로마서

로마서85강-한 마음(롬15;5-7)이근호140518

아빠와 함께 2014. 5. 18. 19:34

한 마음(로마서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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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5-18 13:35 

한 마음

2014년 5월 18일                            본문 말씀: 로마서 15:5-7


(15: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오늘 본문에 입각해서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은 혼자 있을 때는 신자인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악마같이 불신자로 곧장 변하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신자노릇하면서 과연 혼자 있을 때만 신자라면 하나님께서 신자라고 쳐주시느냐 하는 겁니다.

신자라고 간주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로마서 15:6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원래 인간에게 있어 ‘한 마음’과 ‘한 입’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전체 속에서도 인간은 자기 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따로 장만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보는 게 아니라 전체와 별개의 존재라고 장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즉 절대 존재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최종적인 것이 둘 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결승전을 치러서라도 마지막은 자신만의 최종 승리자로 확정짓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우리’라는 것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특별한 나’이겠지요. 나 빼놓고 모든 타인은 나의 절대성을 증명해줄 역할을 할 나 보다는 덜 중요한 존재들이라고 해석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존재감을 갖고 각자 모여든다 할지라도, 심지어 ‘신’을 동원해서 결속되었다고 하더라도 각자 개인에게 ‘신이 어떤 존재인가’ 물어보면 열이면 열, 다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유일신으로 시작했다가 다신으로 끝나버립니다. 이 말은 차라리 신이 우리에게 아무런 언질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천사들과 함께 사시고, 우리는 우리 인간들 끼리 따로 인간 나라 만들고 사는 것이 서로에게 편한다 는 속내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신이 뭐라든 나의 이 절대존재성을 건드리고 간섭하고 잔소리하면 싫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절대성’말고 최종적인 진리를 따로 수입하거나 수용할 의사를 인간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면 동지요 나를 힘들게 하면 적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은 이 절대존재성을 깨트리는 작업부터 개시가 됩니다. 깨트리는 방법은 하나님관에 관한 이견(다른 견해)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하나님이 어떻게 다를까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서는 ‘대립관계’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버렸고, 예수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도리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이런 대립이나 버림받음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나를 만들어주신 저분 저곳에 있다’는 식입니다. 즉 서로가 ‘존재’ 곧 ‘있음’의 속성으로 맺어진 점에 하등 문제될 게 없다는 겁니다. ‘있음’이 ‘있음’에서 말 건네고 말걸어오는 데 있어 전혀 문제되지 않고 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애초에 있지도 않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개인이라고 간주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소속의 일원’으로 표현하십니다. 아담에 속했든지 아니면 예수님께 속했든지 말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구조 중에 하나를 맡은 것으로 보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작업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조직의 절재존재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셨다는 율법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해나가려고 했습니다. 즉 율법으로서 자기 나라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결속력의 원천으로 사용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율법으로 조직내에 계급을 조장했습니다. 즉 율법의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여분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에 율법 연구과 실천에 매진하는 자들은 보다 법적으로 정당한 사람이라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법으로 나라를 만들게 된 이유는, 그들 내부에 자리잡은 율법적 성향이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존재의 절대성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싶어했습니다. 많은 법을 지킨 자는 그렇지 못한 보다 높은 계급을 유지하면서 지배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계급선호도는 결국 절대최고의 자리를 다들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신으로부터 엄격하게 다 저주받아도 자신만큼은 손톱만큼도 벌이 주어지지 않고 멀쩡하게 계속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법적인 선호도에 의해서 사람의 세상은 법의 사슬로 꽁꽁묶인 사회가 됩니다. 신은 법을 주면되고 인간은 그 법을 지키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어떤 대립도 있을 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율법 세계에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투입시켰습니다. 범죄인 모습으로 투입시켰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대신 ‘율법의 완성’이라는 새로운 사슬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에 의해서 예수님과 묶여버린 자들인 바로 탕자요, 죄인들이요, 간음한 자요, 세리요 창기요 장애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 확립한 법적인 계급에서 제일 하층에 배정받아 ‘신의 저주의 표상’처럼 간주되는 자들에게 무상의 긍휼이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지 결코 의인의 친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대립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화해가 성사되기 때문입니다. 대립없는 화해란 없습니다. 저주없는 구원이 없듯이 말입니다. 법적으로 자기 존재성을 절대적인 곳으로 밀어붙일려는 모든 시도가 실은 예수님의 세계 안에서 인간들 자기만의 독자적인 구역을 따로 장만하기 위한 악마적 시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로 새로 구원받게 된 자들은 개인 구원적 차원에서 구원될 것이 아니라 ‘우리들 차원’에서 구원된 것임을 압니다. 즉 “나처럼 태생 자체가 죄인인 자로서 오직 긍휼하심으로만 구원받은 자가 누구지?‘를 알게 됩니다. 그들만이 바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개인을 위한 예수님이 아님을 우리들이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5-19 15:18 
84강-롬 15장 5-7(한마음)1405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5장 5절에서 7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5:5-7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혼자 있을 때는 신자인데 같이 있으면 신자가 아닐 경우에 그게 신자냐,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혼자 집에 있을 때 성경도 보고 기도하니 신자인 것 같지요. 그런데 누굴 만났다 하는 그 순간부터 열불 올라오는데 그게 신자의 모습이겠어요? 혼자 있을 때는 그렇게 신앙생활 잘 하다가 누구를 만났다 하면 못 잡아먹어서 난리할 때에 ‘내가 과연 신자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신자 아닙니다. 그게 신자 아닙니다. 신자냐 하는 것은 더불어 있을 때 티가 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집단을 만들었지 처음부터 개인을 뽑아내지를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었지 “너를 구원한다.”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한 예수님에게만 ‘너’라고 하지 나머지 모두는 ‘너’가 아닌 ‘우리’가 되고 그 우리라는 조건하에서 우리를 ‘우리’에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막상 구원하고 난 뒤에 나만 달랑 남고 우리가 없다면 그것은 진짜 헛다리짚은 거예요. 주께서 뽑아세우지 않은 겁니다.



나만 홀랑 구원받았다? 주님과 일대 일로 붙겠다? 일대 일로 계산 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네 형제들은 어디 갔지?” “몰라요. 저는 고려한 바 없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머리 하나에 달랑 지체 하나인 괴물 되어버리지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구원을 좋아해요. 나만 달랑 구원 받으면 남이야 죽든 말든 그것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 속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따로 구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남은 신이 되면 안 되고 나만 신이 돼야 돼요.



최후 마지막 신은 나 이어야 하고 둘이 되면 결승전 붙여야 됩니다. 둘되면 싫어요. 나 혼자 신, 나만이 절대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본성을 성경은 노출시킵니다. 제가 아까 구약에서는 개인구원이 없고 이스라엘이라는 집단구원밖에 없다고 했지요.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우리가 성경을 대하게 되면 “저는 요?” “우리는요?”가 아니라 “나는 요, 저는 요?”라고 해서 그 질문 자체가 벌써 “나는 어떻습니까?”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호세아 11장 5절에 보면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선지자를 보냈고 말씀을 줬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게 돌아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은 달라요. 우리 생각은 뭐냐 하면, 아예 그런 말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 우리 깊은 속에 담겨 있는 본성이 뭐냐 하면, “그 성경 나한테 아예 안 알려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잘 사시고 우리는 우리 인간대로 잘 살고, 각자 삽니다.” 이게 우리의 숨겨진 본심이에요. “너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고 하면 “안 보내 주셔도 됩니다.” “성경책을 주셨잖아.” 하면 “괜히 성경 줘서 우리한테 부담 느끼게 하지 마시고 아예 안 줘버리고 하나님은 하나님하고 천사하고 잘 누리시고 우리 인간은 그냥 우리끼리 살고, 이 대로 그냥 갑시다.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여러분은 교회 다니는 것이 편합니까, 아니면 누구도 교회 오라고 하는 말도 없이 그냥 그런 소리 들은 적도 없이 그대로 가는 것이 편하겠어요? 여러분, 하나님한테 잔소리 듣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아예 하나님의 잔소리조차 없는 것이 우리 본성이 맞아요? 어느 쪽입니까? 이 세상에 나만 설치고 그 다음에는 신경 뚝 끊고 모르고 살면 그게 우리한테는 차라리 참 편할 것 같아요. 신앙생활 사십년, 오십년, 오래 한다고 해서 그 성질 안 바뀝니다. 초반에 아멘이 벌써 나왔습니다. 절대로 바뀌지를 않아요.



믿으면 좋을까 싶어서 왔는데 하나님께서 부담만 주니까 그러면 “하나님 좀 조용히 해 주세요. 나도 지금 바쁩니다.” 이렇게 “각자 헤어져 살다가 나중에 죽을 때나 만납시다.” 이게 편하다니까요? 우리 솔직하게 갑시다. 이게 편해요. 다시 이야기하겠어요. 전체가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전체중의 일부로, 전체에 포함된 일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부 됨을 거부하는 거예요. 전체가 이만큼 있는 것은 아는데 그런 것은 신경 뚝 끊어버리고 내 아파트, 내 집, 내 자식들, 내 가족들, 이것만 잘 챙기면 우리는 그만 그것으로 더 이상 욕심도 없이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5장에서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하니까 이게 부담이 돼요. 왜,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그 버릇은 뭐냐 하면, 나만 살면 돼요. 나만 잘 먹고 살면 돼요. 이게 버릇인데 거기다가 다른 사람까지 자꾸 끼어들어오니까 나만 살면 되는 그 행세가지고 다른 사람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는 마련해 본적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타인은 전부 다 경쟁자니까. 홉스도 그렇게 벤담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세상이라 하는 것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정확히 한 거예요.



누굴 만났습니까? “한 번 해 보자.” 그런 식이라니까요? 왜, 각자 한들이 맺혀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네가 내 한을 풀어주면 내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고 내 한을 돋울 것 같으면 내 적이 된다.” 적이냐 동지냐, 동지냐 적이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은 모두 정치적인데 그 정치에서는 딱 두 종류밖에 없다. 하나는 동지요, 하나는 적이다. 칼 슈미트라는 독일의 정치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세상이란 간단하다. 동지냐, 아니면 적이냐?” 우리가 그런 말을 부인할 수가 없어요. 맞는 말을 했으니까.



맞는 말을 했는데 로마서 15장 본문을 대하니까 분명히 우리가 평소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고 로마서 15장과 연결을 시켜보려니 연결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혼자 있을 때 신앙생활 잘 할게요.” 하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더불어 있을 때 네 사람으로 받을 수 있느냐?” 하니 “그건 좀 힘든데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러니까 너는 성경대로 밀어붙이는 나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판정을 내려버리는 거예요.



아까 호세아말씀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이야기를 해도 혼자 사는 이것이 이력이 되고 버릇이 되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 도와줄 것이나 도와주시고 구원할 것만 구원해주시되 내가 나 혼자 사는 여기까지는 손대거나 관여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나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막을 길이 없네요. 저라도 못 막습니다. 로마서 15장 앞장세워서 밀어붙이는데, 불도우자처럼 밀어붙이는데 누가 방금 읽은 로마서 15장 5-7절의 말씀을 막겠습니까?



“형제와 더불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한다면 너는 신자 아니다.” 하는 이 밀어붙임에 대해서 우리가 저항 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자기가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하다 보니까……, 결혼할 때 주례 목사님께서 “여러분은 이제는 부부가 한 몸 되었습니다.” 하잖아요. 그거요, 백날 살아도 부부가 한 몸 안 됩니다. 안 되는 걸 지금 목사가 강요하고 있는 거예요. 한 몸으로 살라고. “주례하는 당신은 그렇게 사시오?” 본인도 못살거든. 자기도 안 되는 걸 성경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잖아요. 한 몸 아닙니다. 한 몸 될 수가 없어요. 자식도 한 몸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한 몸 안 되는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한 몸이 안 되고 각각 다른 몸이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존재로 굳어져 있기에, 나밖에 모르는 딱딱한 구슬같이, 당구공이나 골프공처럼 너무나 단단하게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네가 다른 사람과 한 마음 되고 한 뜻이 되라.” 하는 말씀을 밀어붙이는 작업과 동시에 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이 당구공 같은 이것을 깨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우리의 존재를 존재라고 인정하지 않고 이걸 깨는 작용을 하셔서 이걸 뭐로 바꾸는가 하면, 존재에서 작용이 들어가게 되면 구조로 바뀌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기도하는 가운데 구조라는 중요한 단어가 나왔어요. 존재가 아니고 구조로 바뀌는 겁니다. 그 구조 안에서 하나의 존재가 새롭게 자리를 잡으면 뭘 부여받게 되느냐 하면, 하나의 역할을 부여 받아요. 제일 쉬운 예가 뭐냐, 영화촬영 할 때 영화배우들 이야기입니다. 배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집에서는 가장이고 남편이고 사회에 나가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막상 영화배우로서 역할을 만나게 되면 그는 깡패 짓도 해야 되고 무슨 짓이든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식이 있다가 “우리 고상한 아버지에게 저런 질 낮은 역할을 맡기다니.” 하고 달려들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게 영화라는 구조속의 역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욕쟁이 역할을 맡았다면 아버지는 영화에서 욕을 아주 잘 해야 돼요. 아버지가 욕을 잘 할 때 자식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존경심을 보내야 된다는 말이지요. ‘아버지는 평소에 욕 한마디 할 줄 모르는데 이제 우리 아버지는 버렸어.’ 이러면 안 돼요. 자식은 우리 가정, 내가 속해 있는 내 가정밖에 모를 때는 “우리 아버지가 저런 욕쟁이 역할을 하는데 내가 그런 역할을 맡긴 적이 없는데.”라고 할 때 감독이 있다가 “네가 안 맡겼지만 내가 맡겼다.” 감독인 내가 아버지에게 역할을 맡긴 거예요.



문제는 그겁니다. 우리는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까, 그 역할에 대해서 내가 나한테 미리 지적한다는 것이 문제가 돼버려요. 이것은 주님이 지적해주면 되는 것을, 내가 지적하고 그 다음에 구조를 삼으니까 이 모든 것이 내가 절대 신이 되는 구조를 따로 편성해서 쥐게 되는 거예요. 우리들은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주님의 구조의 역할을 맡아야 되는데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는 작업이 뭐냐, 이미 우리는 나만을 위한 구조 속에 철썩 같이 신으로, 존재로, 당구공처럼 있습니다.



이걸 깨면서 주님의 구조의 역할을 맡겨주시는 거예요. 이걸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대립 없이는 화해가 없다.” 이런 말로 정리할 수 있어요. 아주 단출한 문장으로 “대립 없는 화해는 없다.” 하는 겁니다. 우린 자꾸 순종만 하려고 하는데 순종 아닙니다. 대립을 해줘야 돼요. 대립하면서 자기의 본색이 드러나야 되고 본색이 드러난 것에 대해서 주님이 생각한 구조에 의해서 완전히 파편화 되고 깨어지고, 깨어지면서 우리는 새로운 역할과 임무와 사명을 부여받을 때 우리는 그 전에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의 새로운 자리의 위상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나처럼 깨어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발생될 때, 그 사람에게나 자기에게나 주어진 동일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되었다, 가 아니라 누가 당신을 그렇게 전환시켰습니까, 그 전환되는 과정에 모두 다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신 분이 계십니까? 없지요. 만약에 청와대에 근무하시는 분이 이런 하찮고 초라한 교회에 왔을 때 다른 사람들이 다 묻습니다. “높으신 분이 큰 교회에 안가시고 이런 하찮은 교회에 오는 어떤 전환의 과정을 겪었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지요.



그 전환 과정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묶음, 단결한다, 결속력을 다진다, 할 때는 사람들이 종교적이기에 신을 이야기해요. “신께서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했습니다.” 흔히 듣는 멘트잖아요. 그거 많이 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정답같이 들리지요. 그러나 그 체인을 하나님께서 잘라버려요. 그 신이라는 체인을. 왜냐,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모였습니다.”라고 일단 시작은 했는데 “그런데 당신이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이지요?”라고 막상 내놓으라고 하면 다 달라요.



결국은 이것은 유일신으로 시작해서 다신론으로 빠집니다. 교인 열 명 같으면 열 명이 신이 다 다르고 예수가 다 달라요. 이게 무슨 하나 됨 입니까? 하나 됨이 유보 된 거지요. 이것은 하나 됨이 아니지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옳은 거야, 라고 하면 상대방이 듣고 가만있습니까? “이게 어디서 이단 질이야?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야.” 이렇게 각자 끄집어내면 열 명이면 열 명이 다 다르다는 말이지요. 다신의 집단이에요. 유일신의 집단이 아니고. 말들은 유일신이라지만 행동하는 것 보면 다신이에요. 교회가 개척교회 하면서 어려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했는데 문제는 투표할 계제가 되면 권사 떨어지면 교회 나갈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 때문에 하나라고 해 놓고 권사투표 떨어졌다고, 어떤 성씨가 어떤 성씨를 밀었다, 뒤에서 표 작업 했다, 불고기 사줬다, 온갖 이야기 다 퍼지면서 이 투표 하나 때문에 산산조각 다 깨져버리는 거예요. 뭐가 하나 됨이고 언제 적부터 하나 됨 입니까?



로마서 15장 5절-7절, 인간의 힘으로 그게 될까요?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성사될 문제가 아닙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모자간이 있는데 애가 아주 착해서 자기 방에서 공부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엄마가 화급하게 들어와서 “얘야.” 했어요. 애가 “엄마, 오늘도 내가 성경 석장 보고 기도 한 시간 했어요. 엄마, 나 착하지요?” 하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짐 싸라.” “제가 착하고 바르게 공부도 잘했는데요?” “짐 싸라.” “왜 짐을 싸야 돼요?” “집 주인이 집 비워 달래.”



그 애는 지금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개인 구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출발을 개인에서 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기도하고 내가 어떻게 예수 잘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그래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해서 이 집을 주셨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집을 자기 집으로 생각했는데 엄마가 하는 말은 “원래부터 이 집 주인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집 주인이 요구하는 바는 “네가 그 집에서 열심내서 신앙생활 잘 하라.”가 아니라 “방 비워라. 집 비워라.”를 요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작업을 막을 자가 없어요. 여러분, 기도하는 것과 집 비우는 이야기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기도할 때는 혼자서 하면 되지만 집 비우는 것은 짐을 싸고 그 집을 아예 나가야 돼요. 성경에서,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보고 집 비워달라는 거예요. 거기서 신앙생활 하지 말고. 원래 이 집이, 이 세상이 너희 집이 아니고 인간들이 살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세워 놓고 전도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전도하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집을 비우고 나가 달라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마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절에,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초에 열두 제자를 보내서 전하는 그 소식이 뭐냐 하면, “집 비워 달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소돔과 고모라가 우리 생각에는 나쁜 짓을 해서 벌 받았다고 생각하지요? 나쁜 짓, 성문란, 동성애 등 우리가 아는 풍월은 소돔과 고모라가 나쁜 짓을 해서, 나쁜 짓을 안 했으면 안 망했는데 나쁜 짓을 해서 유황불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 11장 말씀에 의하면 “만약 너희들이 지금 열두 제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멸망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성문란을 했으며 우리가 무슨 그 보다 더 심한 죄를 범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된 그 이상의 범죄를 우리가 행한 적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도저히 생각이 안 나는데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렇습니까?”라고 묻고 있지요. 우리가 이렇게 묻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부턴 착하게 살게요. 이제는 바르게 살겠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우리가 한 귀로 흘려듣지 않고 잘 새겨서 그대로 하겠으니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같은 것은 제발 안 떨어지면 좋겠습니다.”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댓구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지적은 그것이 아니고 이미 시대가 종말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사 갈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는 종말을 집고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식탁보가 있지요. 미역국, 소시지, 잡채, 김치, 이렇게 죽 차려져 있다 합시다. 주님께서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으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주님은 식탁보를 쥐고 뒤집어 버린다니까요? 뭘 먹고 자시고가 아니라 이걸 뒤집어 버려요.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 주께서 전한 복음입니다.



새삼스럽게 깨끗하게 살라, 잘 살라, 그런 문제가 아니고 네가 주제파악을 하고 시대를 파악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잘 해볼게요, 하는 것은 이미 구약 때 선배들이 다 해본 거예요. 이 말은 결국 인간의 현재 모든 모습과 행동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속한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는 단결해야 된다, 딱 그겁니다. “인간들아! 다 모여들어. 우리를 하나로 묶자. 묶되 인간이기에 묶이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하나 되게 했다는 그것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그런 식으로 버티고 한 번 살아보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리스도의 아버지하고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대립이 돼요. 그런데 인간이 우리끼리 하나가 될 때는 절대로 대립이 안 되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이라는 말이지요. 대립이 없기 때문에 엉터리 신이에요. 십자가를 보여준다는 것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이거든요. 한쪽은 버리고 한쪽은 버림받고, 이 관계가 진짜 창세전부터 숨겨져 있는 비밀이었다는 말이지요. 그 비밀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고 인간들끼리 “너 있지?” “있어.” “나 있지?” “있지.” “살아 봐야지.” “그렇지 살아 봐야지. 우리가 나쁜 짓해서 벌 받지 말자. 우리가 신의 뜻으로 모이자.” 이래서 신으로 사슬을 둘둘 말은 거예요. 주께서는 그 사슬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신으로 뭉쳐진 사슬, 종교로 뭉쳐진 사슬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제발 각자의 존재로 본색을 드러내라는 겁니다. 구슬이 모였다고 해서 그 구슬이 깨지겠어요? 떨어지면 구슬이 우르르 쏟아지는데, 빠찡코 알처럼 우르르 쏟아지거든요. 그거야 당겨서 대박나면 좋겠지만 인간 세상은 자기가 편리할 때 동지라고 여길 때는 우르르 모이고 적이라고 여겨지면 뿔뿔이 다 헤어지는 것이 인간인데요.



사랑했다고요?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하는데요? 부모 효도한다고요? 유산 없으면 미워하는데? 이게 하나가 안 돼요. 그래서 이 문제, 하나님께서는 인간도 모르는 인간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서 고맙게도 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만들고 율법을 줬더니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하나가 되었다고 자부했던 겁니다. 바보같이. 율법은 그들로 입을 막고 죄를 더 짓게 하고 저주와 심판아래 두게 하려고 율법을 줬는데 이스라엘 우리 선배들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 되는 하나의 결집 본드로 사용한 거예요. 말씀 지키면 우리 편이다, 그렇게 한 거예요. 말씀을 지킬 위인이 없는데.



로마서 7장에 따르면 나름 말씀을 지키고 싶어요. 그러나 내 안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나로 말씀 못 지키게 하는 것이 우세한데 무슨 수로 말씀을 지킵니까? 우리가 돈을 사랑 안 하고 싶어요. 그러나 정 돈이 없고 눈앞에 돈만 보일 때는 미치는 거예요. 강도질이라도 하고 싶어요. 우리는 절대로 돈을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행여 돈을 미워했다가 돈이 왔다가 가버리면 나만 후회하잖아요. 우리의 본 모습은 율법을 절대로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우리 선배들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이 법을 자꾸 동원해서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기고 싶은 겁니다.



제가 수변 공원 산책하는데 60대쯤 되는 아주머니가 개를 안 묶은 채로 그냥 오고 있어요. 오지랖 넓은 제가 가로막았지요. “공원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공원에 붙여 놨어요. 다섯 가지,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말고 ……, 제일 마지막에 애완견은 목 줄 하라고 되어 있어요. 목줄 해야 되는데 안 하거든요. 아주머니 하는 말이 “저 사람은요?” 제가 보니 강 저편에 있는 아저씨가 개 목줄도 안한 채로 그냥 가고 있거든요. 이게 크게 붙어 있는데 애완견에 목줄 하라는 그 법을 피해가면 자기는 맘대로 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거예요.



사람들은 어떤 법이 오게 되면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법은 코에 막 갖다 붙이듯이 들이대고 자신 없다 싶으면 못 본체 넘어가요.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내가 내 주장을 해도 되는 이유는 이런 법들을 잘 지키고 있기에 그렇다고 나타내고 싶은데 그런 법 중에서 자기가 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법들을 뽑아내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는 어제 산책할 때 이야기고 오늘 아침에는 천주교 신자 같은데 한 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십자가 모양을 쥐고 한 손으로는 쓰레기 봉지에 떨어진 쓰레기를 다 주워 담고 있었어요.



얼마나 거룩해 보입니까? 이게 뭐냐, 줍는 심리가 뭐냐 하면, 새벽미사 드려서 이 영혼이 아주 청아하거든요. 막상 운동하러 나왔다 보니 모든 것이 더러우니까 이 청아한 내 마음에 부합이 안 되잖아요. 아예 미리 준비했어요. 미리 준비한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다 담아서 내 마음이나 내가 바라보는 이 환경이나 깨끗하게 일치될 때 사람이 기쁜 법이에요. 그게 율법 지킨 겁니까, 자기 맘 달랜 거예요? 저도 그거 해 봤거든요. 해 봤기에 알아요. 그것이 얼마나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저런 분도 있구나. 오랜 만에 봤네.’ 하고 가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중국산인데 3만원주면 트롯 천곡 실린 게 나와요. 제가 가격을 물어봤어요. “할아버지, 나도 사고 싶은데 그거 얼마입니까?” “이거 3만원인데 요새 천곡까지 나온다고.” 이거는 그야말로 한 마음이 아니고 자기 마음밖에 몰라요. 지금 산책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기는 크게 틀어놓고 계속 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한 시간 내내 뉴스만 틀어놓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좀 귀에 꽂고 들으면 되는데, 젊은 사람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는 모양이라. 얼마나 시끄러워요. 세상이 결국 뭐냐 하면, 자기 마음인데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도 그 사람이 버티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이것은 법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기 이전에 인간 내부에서는 어떤 단결이 되어 있는데 그 단결된 쇠사슬이 뭐다? 율법이에요. 율법에서 ‘율’자 빼면 ‘법’입니다.



이 법이 주어지게 되면, “나는 남이야 죽든 말든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살만한 정당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살아 있다. 나는 다만 그것을 살아가면서 확인할 뿐이다.” 그렇게 돼요. 그렇게 되니까 이 이스라엘 선배들이 어떤 짓을 했느냐 하면, 법이 있는 곳에 누가 법을 잘 지키느냐에 따라서 누가 오래 살고 누가 일찍 사형 당해도 괜찮은가, 이렇게 구분되는데 이스라엘에 일곱 개의 계급을 정했습니다. 백정이나 죄인들은 어떻게 죽어도 괜찮고 법을 잘 지킨 사람들은 계속해서 오래 오래 살아남아야 되고 다치지도 않아야 되고 제일 위에 있는 우두머리가 사두개인이고 그 밑에 바리새인이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게 바로 존재입니다. 나는 너보다 우수한 존재라는 겁니다. 네 집안은 저주받고 망가져도 그것은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고, 왜냐하면 신께서 묶어 놓은 거니까, 신의 합당한 조치고, 신은 율법을 줬으니까 주신 율법에 의해서 나는 너무나 잘 지키고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나는 오래 오래 복을 받고 월급도 많이 받고 오래 사는 것이 너무나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라고 자기 존재의 내부에다 거룩한 율법을 가득가득 채우는 작업에 나선 거예요. 그것이 그 시대의 모델이 되고.



그래서 마태복음 6장 산상설교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를 지적하느냐 하면,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서 누구를 지적하느냐 하면, 바리새인을 지적합니다. 지적하면서 이런 말씀을 했지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하지 말라고. 그리고 기도에 관해서는 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고 너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고 금식에 관해서는 금식하고 난 뒤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금식을 했는지 안했는지 표 안 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립을 갖고 있는, 대립이 없이는 화해가 없으니까, 아버지와 대립을 갖고 있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서 기존에 설쳐대고 고정되고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제일 윗단계를 쳐버립니다.



제가 지금 복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일 윗단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쳐버려요. 요새 식으로 하면 뭐냐 하면, 목사님이 “말씀을 보시고 지키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때 누가 흐뭇하냐 하면, 일주일 교회 오는 것 외에 별 할 일이 없는 사람들, 일 주일동안 하루 일하고 육일을 노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요. 왜?……, 가만 보니 목사가 거기 해당되는데, 퇴직한 장로도 마찬가지고, 그거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직장이 있더라도 일요일은 강제로 놀게 하는 은행원이나 공무원이나 교사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와서 자기 존재가 흐뭇해지는 겁니다.



왜, 법대로 했으니까, 말씀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리고 사업하다가 교회 못 나오면 교회 오면 항상 주눅 들어요. 주눅 들 때는 어떻게 합니까? 헌금, 십일조 듬뿍 하는 것으로 대충 메우는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잖아요. 이게 바로 존재위주의 삶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걸 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 그냥 치기만 하면 안 되지요. 율법으로 묶인 사슬을 뭐로 묶는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정신, 자신의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묶어야 되겠지요. 주님의 마음이 뭐냐 하면, 아버지하고 의논했던 그 마음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율법의 세계로 뭉쳐져 있다는 그것이 현실로 드러날 때는 율법으로 계급화 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사회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사회지도자급은 도덕성에 있어서 더 높은 도덕성을 원한다는 자체가 이 세상은 법, 그 놈의 법, 법, 법, 법으로 따지게 되어 있어요, 법으로.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오히려 버림받았거든요. 그 법으로 묶인 사슬을 끊어버리고 뭘 로 다시 사슬로 묶어서 한 마음 되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 버림의 모습으로 사슬로 묶어 버립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그게 탕자고. 그게 창기고. 그게 강도고. 그게 세리들이에요. 그게 절름발이고. 그게 소경된 사람들이고. 그게 죽은 자요. 그게 병든 자요. 그게 이방인들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묶은 것이 풀리지 아니하면 주님이 주신 것에 의해서 묶이지를 않는다는 그 말이거든요. 내 존재 잘났다고 묶어놓은……, 사실 묶이지도 않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이 자기절대성으로, 법으로 묶인 이 세상 속에서 그 율법을 끊어버리고 법이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불쌍히 여겨주심, 그저 용서하심, 그저 사랑 베풀어주심, 그저 불쌍히 여겨주심이에요.



율법을 지킬 때는 예상이 돼요. 내가 이 율법을 지킨다. 예를 들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하는 것이 디모데전서 6장에 나와 있잖아요. 그 말씀을 봤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겠다.’ 하고 지키려고 시도하면서 이걸 지킨 후의 상태를 우리가 미리 예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시금치만 줘도 감사할 때, ‘아, 나는 이 말씀을 지켰구나.’ 예상이 되는데 이 예상이 된다는 것, 예상을 이미 하고 난 뒤에 법을 지켰다는 말은 그 법을 지키고 난 뒤에 하나님 보시기에 지켰다고 판정 내리는 것이 아니고 미리 자기가 ‘이 정도면 지켰다고 할 거야.’라고 자기가 자기결정을 회수한 것밖에는 안 돼요.



금식하거나 기도하거나 전도할 때, 어떤 사람을 전도하고자 할 때 내가 전도하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전도를 받아들였을 그 후의 상황을 미리 예상한다는 그 자체가 주님께서 허락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예상한 사업을 한 거예요. 자기 영역의 확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주님께서 용서를 할 때는 예측이 안돼요. 예상도 안돼요. 그것은 돌발적입니다. 너무 어렵기에 예를 들면, 지금 매일 같이 소주를 두 병 먹는다. 벌써 오십 년째다. 그런데 내가 만약 술을 하루 한 병으로 줄였을 경우는 나는 그만큼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는 두 병이 아니라 한 병만 먹는 사람으로서 착한 사람이 된다, 라고 예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들이닥쳐 버리면 “술 줄이는 것과 구원하고는 관계가 없다.”라고 되어버려요. 이것은 예상 못한 거예요. 나는 술 끊어가면서, 담배 끊어가면서 차근차근 뭔가 해야 내가 천국 갈 줄 알았는데 그것은 내가 했던 법 지켰던 것의 연장이거든요. 그런데 막상 십자가의 능력이 바로 들이닥쳐 버리니까 주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데요? 가만 들어보면 구원 파 교리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십자가 마을에 글 올려놨잖아요.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근신하라고. 성경에는 근신하라고 되어 있거든요.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전에는 주일날만 갔는데 주일 오후예배도 참석하고 수요일에도 참석하고 구역예배도 나가고 새벽기도까지 나가면 그만큼 신앙이 향상되었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이 자기존재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서 이미 익숙해진 방법을 나한테 적용시키는 거예요. 그게 율법적으로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이 다 해봤지만 우리는 그걸 모르니까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보는 거지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다메섹에 내려가는 도중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순간에 그 사슬이 끊어지는 거예요. 율법에 매여 있던 그것이 두두둑, 하고 끊어질 때 “율법에서부터 벗어났느니라. 저주로부터 벗어났느니라. 죄로부터 벗어났느니라.”는 소식을 한꺼번에 듣게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뭐냐 하면, 나 같이 끊어진 사람이 또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과 우리는 한 마음이 되고 한 몸이 되면서 주님께서 나에게 찾아온 것은 달랑 나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 같은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진 사람끼리 놓이게 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공통점이 있다면,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바로 날 때부터, 나기 전부터 죄인이었습니다.” 하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돼요. 이것은 어떤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었다는 기억이 없이 그냥 태생이 죄라, 태생이. 태생이 죄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 태생이 죄임을 지적 질 해 주면서 그것을 뒤늦게 지적당하는 그 사람이 이미 용서 받았기에, 구원 받았기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주님의 성령의 놀라운 감동과 능력으로만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랑 질? 남에게 자랑 질 못합니다. 자기 자랑 못해요.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해 줬다는 그 고백 외에 아무 고백을 할 수가 없어요. 그걸 가지고 주님의 자기전개와 그리고 응축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졌던 그것을 전개해 가요. 전개한 사람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를 자꾸 압축시켜요. 압축시키면 달랑 남는 것은 오직 주 예수 하나 뿐이에요.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오직 주 예수 하나만 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주님 공로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표백이 아니고 탈색이 되는 겁니다. 표백과 탈색이 다른데요. 표백제라는 것은 색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거예요. 탈색이란 아예 색깔이 없게 만드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표백이 아니고 아예 탈색을 시켜버려요. 왜 그런가 하면, 주님 보시기에 착하다, 안착하다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이, 방 비워라. 집 비워라.” “내 방에 있는 이 낙서는 제가 어릴 때부터 적어온 낙서인데.” 그거 필요 없어요. 집 다 비우고 다 폭발시켜서 다 드러냅니다. 우리가 정들었던, 우리가 꾸몄던, 나의 신앙의 우수함과 나의 신앙생활의 증거를 보여줬던 모든 것들은 폭발로서 다 사라져버리지요.



이게 뭐냐, 종말로서 식탁보 뒤집기입니다. 식탁보 자체를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엉망진창 되어버리지요. 왜, 우리가 엉망진창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절대자로 봤기 때문에. 이것은 내 힘으로 고치지를 못하는 것을 뒤늦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버림받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이제 정리하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신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나와 비슷하게 닮은 존재인 신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래서 신으로 하나 되고 교회를 만들었는데 와서 보니까 전부 다 신이 다 달라요. 너는 너 잘났다. 나는 나 잘났다. 그러니까 한 마음 한 뜻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에이, 나만 잘나고 나 혼자 그냥 집에서 믿으련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메시아를 보내놓고 하나님 아버지가 메시아를 버려버렸어요. 죽으라고, 저주받으라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았다는 그 말이 맞아요. 그 저주받는 나무에 주께서 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간의 존재는 주님이 대변해서 훤하게 다 보여준 거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있다고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종말에는 이미 끝났어요. 이제 성령이 오게 되니까 이것은 개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주신 자를, 세리나 강도나 은혜 주신 자를 가지고 다시금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은 하나로 응축되는데 주 예수님을 한 마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당신도 그렇게 변했어요? 나도 그렇게 변했는데.” 서울의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서울에 교회 갈 데 있습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평교 인들이 불쌍히 죽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왜냐니까, “십일조가 없는데 십일조를 하라고 강요를 당하니까 얼마나 불쌍한지요.” 자기가 보기에 말라기에 나와 있는 십일조는 십일조를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인데 왜 사람들에게는 그게 안 보이고 십일조를 하라, 마라, 하는 것으로 보이는지 불쌍해 죽겠다고 하는 거예요. 6월에 식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요. 전에 십일조를 할 때는 천만 원씩 했다는 거예요. 왜 했을까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지요. 나를.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신과 내 존재가 정상적이라고 본 거예요. 자기를 정상이라고 본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나서보세요. 우리 존재 정상 아닙니다. 주님은 버림받았는데 우리는 버림 안 받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세리와 강도는 알았어요. “주여, 불쌍한 존재입니다. 법도 못 지키고. 잘 지키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우리는 하나도 못 지켰어요.” “내가 너를 구원하노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죄를 용서 했기에, 이미 모든 죄에 대해서 처리가 되었기에 자기의 처리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전개시킬 때 우리는 주님이 만든 영화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는데 그 어떤 역할도 우리는 “이런 자리에서도 불쌍히 여김 받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도 불쌍히 여김 받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 높이는 그런 하늘나라가 이 세상 나라와 교체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한 마음 한 뜻, 참 남의 일로만 여겨졌습니다. 해보려고 했는데 성질나니 다시 이별하고 깨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능력으로 찾아오니 바로 그것이 죄였고 그럴 필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기에 주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