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2/21-숨어 계시는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26. 2. 21. 09:13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하느님께서 너도 몰래  보살피셨다. 이스라엘 하느님, 구세주께서  보살피셨다.(공동번역)

구세주, 이스라엘 하나님, 진실로 주께서 자신 숨기시 하나님이십니다.(표준새번역)

Verily thou [art] a God that hidest thyself, O God of Israel, the Saviour.(KJV)

Truly you are a God who has been hiding himself, the God and Savior of Israel.(NIV)

Truly, You are a God who hides Himself, God of Israel, Savior!(NASB)

Truly, you are a God who hides himself, O God of Israel, the Savior.(ESV)

 

여기서 ‘구원자’라는 단어와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의 조치가 모순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백성들과 터놓고 구원 할래 안 할래를 논의할 시점은 지나갔다는 겁니다. 새로운 구원방식은 백성들에게 포착되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을 성사시키시는 방식입니다. 왜 백성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식을 고수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이 알았던 하나님 개념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상상되었던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고, 자신이 살아 있는 식으로 하나님도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과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그런 믿음을 가질 자일까요?

아닙니다. 로마서 4:17-18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보통 인간들에 있어 ‘믿는다’는 것은 일단 관찰의 대상으로 손에 쥐고 확인한 다음 믿어야 될지 아니될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즉 자신이 이미 분명히 ‘살아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면서 자신이 제대로 살아 있는지 혹은 정당하고 제대로 바르게 살아 있는지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대상을 관찰합니다.

대상을 확인하는 경로를 통해 자신의 우수성을 스스로 찬미하고 흐뭇해하고 싶어하고 인정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이 기대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겨난 믿음입니다.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의 기대 안에 들어있지 않는 내용을 믿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믿음은 믿어야 될 대상이나 사태의 일부로서 삽입된 믿음입니다. 사태 자체로서 벌어진 상황이 그가 믿는 자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이삭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음을 받아들인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니까 신약의 제자들도 이런 믿음의 질을 공유해야만 합니다. 은근히 기대한다든지 노리는 바를 갖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예레미야는 깊은 절망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도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절망에 도달해야 하는지를 알아봅시다.

레위기 24:16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그 다음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을 인정하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훼방하지 않는 심정으로 부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따로 떼내어 그것을 인물화시켰습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언제가 지상에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그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망령됨에서 이탈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들 입장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반발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은 듯하면서 실은 본인의 가치와 의미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셨을 때에 인간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데 실패합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5-7) 결과적으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떡이 남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십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2-13)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 자기네들 배불리는 기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바는 사람들이 배불리는 떡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12광주리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먹고 난 뒤, 비워있는 것을 또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니라 인간들이 포기했을 때, 새롭게 나타나도록 이해되어야 할 떡입니다. 5병2어의 떡을 먹었던 자들이 예수님을 간절을 열망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요한복음 14:8-9에 보면,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는 인간들이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믿어져야’ 합니다. 창세기 8:11에 보면, 노아가 멀리 보냈던 비둘기 입에서 새 땅에서 자라난 감람나무 잎사귀가 물려져 방주로 나타났습니다. 노아는 비록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벌써 하나님께서 새 땅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님께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화목할 관계를 미리 준비해주셨음을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바랄 수 없는 신세계를 미리 마련해주신 겁니다. 이런 환경을 통해서 굳이 자신들이 이 땅에 살 생각을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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