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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32절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32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그 당시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이렇게 아 이런일도 있었구나 제 물건을 제 물건이라 하지 않고 제 돈을 제 돈이라 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데 그 힘이 부활의 힘. 부활의 힘에 의해서, 부활의 힘이 뭐로 만들어졌냐면 하나로 되었다. 마음이 한 마음 되게 했다. 하나의 마음. 부활이 하나의 힘이 되었다. 이렇게 된거죠. 그런데 "여러분 부활을 믿습니까?" "예. 그러면 마음이 하나 됩시다." "예" 자동적으로 이렇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안 되요.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내 집, 네 집이 다 없어지느냐 그런 경우는 뭔가 중간에 어떤 논리적인 절차가 있어야지 뭔가 해명할 것이 있어야 해요. 부활인데 이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 다음에 어떤 절차를 넘어오고 그 절차가 어떤 절차를 넘어오고 그 다음에 어떤 과정을 거쳤더니만 그들이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설명이 되어야지 "부활을 믿습니까?" "예" "그러면 내 것 네 것 다 없습니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요. 그 중간에 절차가 들어가는데 이 절차가 뭐냐? 이것이 아주 신비로워요. 신비로운데 부활을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경. 얼마 전에 방송에 나왔는데 경남 창녕에서 16.5세 쯤 되는 소녀가, 지금은 소녀이지만 그 당시에는 나이로 봐서는 성인이죠. 여자의 뼈가 있었는데 그 뼈를 복원을 했어요. 복원을. 신문에 보셨죠? 이쁘장하게 생긴... 만약에 예수님의 뼈가 있다면 지금 복원이 될까요? 예수님의 뼈가 있다면 지금 복원을 할 수 있습니까? 복원되죠.
이 16세되는 아가씨도 경남 창녕에서 가야시대인데 이 아가씨도 순장되었다고 추측되는데 복원되었다. 그처럼 죽은 예수님의 뼈를 복원하면 그것이 부활입니까? 부활은 아니죠. 복원이 되니까. 그러면 복원이 될려면 뼈가 있어야죠? 뼈가 있어야 돼요. 뼈가 있으면 힘살 붙여서 뭐 죽은 마네킹 같지만 아 저분이 바로 소녀구나 알 수 있듯이 지금 부활이라는 말은 뭐가 없느냐면 뼈도 없고 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금 부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살아남을 우리가 볼려고 하는 방식으로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했다면서요?" "그래." "그러면 예수님 볼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라고 하는 그것은 복원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난 특징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게 되면 특징이 뭐냐? 이것은 진짜 중요한 이야기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면 우리는 졸지에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특징이예요. 그런데 1400년 전의 소녀를 복원해 놓으면 소녀가 죽은 자가 되고 우리는 뭐가 됩니까?
소녀를 마네킹처럼 만들어 놓고 "아가씨 옛날 여자치고 예쁘네" 라고 말하고 있는 우리는 뭐가 되요? 우리가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산 자가...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데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났다 말을 함부로 하는데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있대. 우리는 자기가 살아 있는 입장에서 또 나처럼 살아 있는 부활을 그리워 하는데 그런 부활은 없습니다. 그런 부활은 없어요. 부활은 왜 없느냐 하면 이 부활이 등장할려면 부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부활의 세계가 구조적으로 뒤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벌초하는데 꿀통이 있다 "야! 꿀이다." 그 벌통 가져가면 위험합니다. 왜? 벌이 자기 집 뺏긴다고 벌통에서 나와서 막 달려들죠. 자기는 분명히 벌통만 가져간다고 하는데 그 뒤에 벌떼가 따라오죠. 우리는 단독적인 개별자 예수님의 부활만 딱 봐서 "아 예수님의 부활을 내가 눈으로 봤으니까 나는 믿습니다. 나는 구원 받았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만 믿고자 하는데 그 뒤에 뭐가 따라온다? 부활의 세계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를 성령의 세계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나오는 성령의 세계. 이것을 줄이면 영적 세계. 그런데 우리는 영의 세계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 이것은 말도 안돼. 그런 일 없어." "그런데 부활이라 아! 보고싶다." "그러면 한 번 우리한테 솜씨를 보여줘 봐." 죽었다가 살아난 솜씨가 보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부활의 세계와 단절된 채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체만 달랑 보고 싶은 거예요. 본다면 우리는 비디오 찍을 거예요. 찍고 난 뒤에 교회 스크린에 방영하면서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 "나는 보통 능력있는 목사가 아니다. 나를 믿어라" 그러면 교회 부흥되겠죠. "그 교회 예수님이 부활한 비디오가 있대" "그런데 다른데는 안 나오던데" "대우가 뭔데?" 이것은 뭐냐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살아 있다 나도 살고 부활하신 분도 만날 때 둘 다 살아있는 채로 만나고 싶다는 그러한 인간들의 잘못된, 그것을 인식론이라 하는데 성경을 볼 때 잘못된 오해의 소산이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과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났죠. 사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나오는데 내가 예수를 봤는데 나는 그 앞에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죽은 자가 되었다 정확한 표현은 뭐가 있는 것 같습니다. 1장 17절에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으로 내게 얹어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 갔죠? 그 때 뭐가 날라갔느냐면 "나는 여기 있다." 라는 이것이 성립이 안 되요.
오늘 표현이 좀 어렵더라도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이 말 자체에 빗금을 쳐 버려야 해요. 이것이 성립이 안 돼요. 사도 바울은 반대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나는 대전 관평동에 앉아 있다는 생각 자체가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흔히 변화산 이야기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그 때 화들짝 놀란것이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변화 되었다는 것도 놀랬지만 그것 못지않게 놀란것은 이미 그 시대보다 8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나타났습니다.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1400년 전에 활동하신 분, 모세가 등장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내가 어디 변화산, 대전 어느 산 몇 동 주소가 있는 여기에 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요.
그리고 여기 있다는 것도 성립이 안 되고 지금은 서기 몇 년이라는 것도 성립이 안 되요. 그것을 가지고 묵시 세계라고 합니다. 묵시란 말은, 사실은 묵시라는 말을 정의내릴 필요는 없어요. 다만 묵시라는 말은 뭐가 묵시가 아닌가를 통해서 묵시를 반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논리학에서 여분으로, 부정적으로 표현한다고 하는데. 묵시라는 것은 역사와 공간이 아닌 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역사로서는 표현이 안 되는 것. 2009년도 그게 의미가 없는 것. 내가 여기 대전시 관평동에 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것. 이것을 시간과 공간을 지워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이 없는데 나를 여기에 있게 만드는 그 힘. 그게 묵시의 힘이예요. 그걸 삼층천이라고 하고, 예수 안이라 이야기 하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십자가 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묵시 세계에서 더 들어가 버리면 요한복음 8장에 나오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참 어려워요. 너희들 보기에 나 혼자 있는데 지금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면 너희들이 믿겠느냐?
지금 예수님이 계신데 예를 들어서 내 곁에 2000년 전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면 너희들이 믿겠느냐? 그러면 저희들이 미쳤다 하죠. 맞아요. 이 쪽 세계가 달라요. 부활의 세계하고 이 쪽 부활 이전의 세계하고 세계가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아까 읽었던 본문의 내용을 단촐하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 한다면 이들이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한 마음 된 것은 그 순간 그들이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려서 그래요. 다른 말로 해서 성령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올 때만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지. 시도때도 없이 전부 다 밥 퍼주고 하는 그런 식으로, 통장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자기 교회 집사에게 통장 맡겨서 돈 찾고...이런 정신분열적인 그런 짓은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일은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몰라요. 그것을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러면 무엇으로 하느냐? "주님의 능력으로 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에 나옵니다. "뭐든지 너가 할 때는 주님의 능력으로 하라." 주님의 능력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예술가들에게 이런 면들이 보입니다. 분명히 1악장까지는 외워서 쳤는데 1악장부터 2악장 넘어갈 때는 정신이 없어. 1악장에서는 반은 틀린것도 기억해요. 그런데 2악장 3악장 갈 때는 앞에 관중도 안 보여요. 몰입되어 버리면. 이렇게 표현해요. 처음에는 자기가 음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음악이 자기를 삼켰어요.
성령이 이들을 삼켰기 때문에 이들은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으로 나오면 3초일 수도 있고 5초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늘이면 안 됩니다. 5초짜리를 한 시간으로 늘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이비 성령은 어떻게 만드냐면은 박수를 칩니다.
박수를 치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신경조직이 무뎌지면서 무의식이 발현되면서 그냥 확 열기에 따라서, 왕성한 에너지에 따라서 이성적인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감정적인, 파토스적인 정적인 것이 기운을 차지하면서 지나간 과거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면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것 끝나고 나면 돈 다 빼앗기고. 부흥사한테 돈 다 빼앗기고 난 뒤에 손 들고 가난하지만 건축헌금 한다고. 그런거야 뭐 외상으로 한 것은 취소하면 그만이예요. 제가 어느 집회에서 손 들라고 해서 손 들고 50억 하겠다고. 지도 사기고 나도 사기니까. 안 하면 그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는 순간 성도는 묵시 세계에서 자기를 잃어버린다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베드로처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는 비로소 이유없는 죄인됩니다. 죄를 져서 죄인이 아니라 이유가 없어요. 너무나 거룩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냥 죄인이예요. 그래서 아까 읽었던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우리 교회도 서로 재물을 나눠야지 이렇게 나오지만 성령 안에서 이것을 보면 "주여 저 죄인입니다." 간단합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순간이 언제냐면 죄인되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능력에 지배당하니까 그 순간만큼은 죄인 맞습니다. 웃으면서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웃느냐면 사람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 순간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라가 버려요. 장래에 어떻게 밥 먹고 살 것이며 자식들은 어떻게 키울 것이며 앞으로 5년뒤에 나는 어떤 모습이며 과거에 남한테 잘못한 것. 그런 죄 같은것이 다 날라가 버려요.
세상에서 지은 죄는 죄 취급도 안 해요. 왜? 너무 큰 죄, 주님 앞에서 죄인이 되어 버리면 세상에 남한테 운전하면서 욕한 것은 죄도 아닙니다. 죄인으로서 일상이기 때문에 그것 죄책감 전혀 안 느낍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죄인이 되어 버리면 특징이 죄책감이 없습니다. 참 오늘 돌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책감이 없을 때를 성경에서 두 자로 뭐라고 합니까? 자유입니다. 청와대 이명박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렵지가 않은 거예요. 죄책감이 없으니까. 왜? 죄책감이 없습니까? 정답은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앞뒤가 안 맞죠. 이 논리가 안돼죠. 보통 죄인 같으면 그 사람 뭡니까? 부흥사 같으면 당신들 죄인입니다. 회개 하십시오.
그 다음에 뭘 끄집어 내야 되요? 지나간 과거의 스스로 자기가 생각해도 잘나갔던 것 다 끄집어 내야잖아요. 그것은 조작한 것이고. 윤리도덕적이고. 묵시 세계에서의 죄인이라는 것은, 말씀의 세계에서는 약속의 세계에서는 태어날 때 부터 원초적으로 원래 자리가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비로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처음 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 죄인인데서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구나."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 만들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 그대로 건져내는 그 작업을 가지고 그 관계성을 가지고 그 포크레인, 골리앗 크레인. 짐 하역작업할 때 사용하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의인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의 능력이 임하니까 날 때 부터 죄인이 구원받는... 어제 누구 욕한 것,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7년 전에 누구 사기친 것,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근원적으로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우리 자체를 계속 죽을 때 까지 죄인으로 만드는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좋은 현상이 일어나느냐면 어떤 부담이 없냐면 새삼스럽게 죄인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의인될 이유가 없죠.
만약에 죄인 같으면, 산 밑바닥이라면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올라가봤자 죄인으로 올라가니까 소용없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아래 층에서 십자가 피로 용서받은, 십자가 피가 의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의인될, 의인 노릇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의인 대신에, 내가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무엇을 행하라고 했습니까? 자유를 행하면 이 자유가 묵시 부활의 세계에서는 이 자유를 의라고 했습니다. 자유!!주님의 자유!! 이 자유가 어떤 자유냐면 성령께서 꼭두각시처럼 "힘 빼!!" "힘 빼!!"해서 만드는 자유죠.
저는 맛사지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만 이야기 들어보면 태국 맛사지. 맛사지를 할 때는 맛사지사가 힘이 들어가면 "손님 힘 빼세요." 힘을 빼야 근육을 발로 누르면 시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힘을 빼래요. 힘을 뺀다는 것은 무엇을 사용하지 않느냐면 내가 어떻게 하면 선한 인간이 될까를 빼버리고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하는 영에게 맡겨버리면 모든 것이 감사가 되죠.
자기가 행동해 버리면 결국엔 자기 자책감으로 오잖아요. 그런데 원래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너는 죄인이라고 하면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책임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았느냐면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알았습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고 구원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은 나를 죄인이라고 알려 준, 그 정보를 알려 준 하나님께서 죄인 되게 하셔서 구원하신다는 모든 과정까지 조치의 일환으로 내가 개입된, 참여된 것입니다. 여기 두 아들이 있는데 이종분 집사님은 그리할지 모르겠지만 쫌 왈가닥 엄마 같으면 학교를 가야하는데 안 일어난다 일어날께 하면서 또 잔다 그럴 때 문 열고 한 쪽 팔 끌고 침대에서 질질 끌어 땡기면 되죠.
하나님께서 안 일어나는 우리를 침대에서 질질 끌 때, 그 때 이미 잡아당길 때 우리는 죄인으로 변해요. 우리가 무슨 나쁜 짓 해서 죄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어날 때 부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은 이미 한쪽 팔은 어디에 끌려가고 있습니까? 주님께 그러니까 구원의 메카니즘, 구원의 노선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질질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끌려가면서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죄인 주제에 부족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죄인인데 뭘 더 달라고 합니까? 모든 게 부족함이 없죠. 그것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이죠. 욕심이야 나죠. 욕심이 나더라도 죄인이 죄인 값 해야죠. 하지만 이미 팔이 끌려가고 있다니까요. 오른팔이 오른팔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의 노선에 안 들어가 있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끌어주는 힘이 없으면 독자적으로 의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꾸 누구한테 명령과 지시를 들어야 돼요. 그런데 그 명령과 지시를 곧이곧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이기 때문에 누가 끌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묵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에 속하지 않고 역사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위에서 명령과 지시가 떨어지면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 있는 법 체계에 의해서 자기가 지킬 것만 골라서 지키고, 왜? 골라서 지켜내야 자기가 의인된 것을 자랑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지키지 못할 것은 뒤로 미루고 안 들은 척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지시한 것을 변개해서, 다른 것으로 해석해서 자기를 옹호하는 배운다는 식으로 수정해서 그것을 지켰다 이렇게 이야기 하죠.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십일조할 때는 의와 인과 신을 겸하여 해라 하니까 사람들은 의와 인과 신을 지킬 재주가 없잖아요. 없으니까 뭐로 합니까? 십분의 일을 그냥 계산해서 하잖아요.
의와 인과 신을 빠트리고 양적으로, 액수적으로 냈다고 누구보고 이야기 하느냐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보고 독사의 새끼들아 욕하면서 그 이야기 하시는데 꼭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욕 먹을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예요. 한국 교회가.
의와 인과 신이 만약에 포함된 율법 같으면 자기 행위의 주체를 자기가 생각하지 않잖아요.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야 자기 행동의 주체를 자기가 생각하지 않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이것이 의와 인과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거 빼먹고 돈 계산 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계산하는 것이 주종목 아닙니까?
세금을 떼고 십분의 일이냐 보태서 십분의 일이냐 골치 아프다 이 말입니다. 특히 재개발 들어가 보세요. 보상금 받아 보세요. 참 갈등 생깁니다. 이것을 본 교회에 내느냐 나눠서 내느냐 뭐뭐 문제가 많은데 전부 다 의와 인과 신을 버린 겁니다. 돈을 한 푼도 교회에 헌금 안 해도 현재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이미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목사님 그 말씀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시편(50편)에 나와요.
왜 자꾸 내게 바치느냐고 주께서 짜증을 내시는 것입니다. 산에 있는 짐승들이 다 내것인데 산에 있는 짐승을 잡아서 나한테 드린다고 공간적인 이동을 했다고 해서 비로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물을 산에 갖다 두어도 다 내거야. 중요한 것은 소나 양을 바치는 것이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바치는 너의 몸, 그 자체가 아파트에 살든지 직장에 가든지 그래도 너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게 바로 몸 자체를 산 제물로 드리는 로마서 12장 1~3절 말씀 아닙니까? "너는 영적 제사를 드려라" 너 자체가 제물인데 왜 자꾸 제물 따로 너 따로 노느냐 말입니다. 어디 하나님께서 돈 환장한 분도 아니고. 돈이나 받으소서 왜 자꾸 돈만 받아 챙기고. 그러지 말고 우리 몸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 될려면 아까 이야기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한 2초~3초내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이 나지 않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성령께서 어떻게 만드냐면 "아! 참 죄인이지." 죄인이지라는 의식이 언제 생기느냐면 거룩한 성령이 올 때는 예를 들어서 쉽게 이야기 해 봅시다. 거울이 있다면 내가 거울을 보면서 그 정도하면 잘 생긴축에 속한다 했는데 그 옆에 장동건이 섰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거울에 나도 비치고 장동건도 비치잖아요.
그러면 내가 못났다는 생각이 들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언제 느낍니까? 뭐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뭐 약속이 올 때는 죄인으로 느낀다는 이 말은 어려운 말인데 쉬운 말로 어느 순간에 설거지 하면서 T.V보면서 죄인으로 하는 것 맞지 하는 순간이 성령이 찾아온 순간이예요. 그러다가 차 때문에 과속으로 짜증난다. 짜증나는 그 순간도 마찬가지예요. 너 기다려 내 따라 간다 너 혼나봐라 하면서도 내가 참 내가 죄인이지 그것을 이겨서 뭐할건데 그거 이겨서...우리 학생들은 게임을 거의 안하는데. "거의 안하지?" 거의 안 하지만 만약에 게임하다가 "야 이것봐라 나를 이길려고 해" 한 순간 나를 집착해야 내가 누굴 이긴다? 나를 집착해야 주체가 내가 되거든요. 내가 누굴 이긴다? "내가 너를 이긴다." "내가 너를 이겨서 너를 혼내주리라" 라는 그 순간이 찾아 오는데 이것은 교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사가 앞에서 기도하는데 "아 10분 하네" "내가 20분 해서 너를 꺽으리라" 어느 순간에 컴퓨터 게임하다가도 참 내가 죄인이지 이겨서 뭐할건데. 저 쪽 아파트 잘 사네 나는 못 사는데 나도 돈 벌어서 복 받아서 잘 살아야지 하는 순간에 죄인되어 버리면 아이구 이것 짧은 인생 부활의 세계에 있는데, 예수 안에 있는데 아, 그것 잘 먹고 잘 살아서 뭐할건데 그것 이겨서 뭐할건데 이겼다고 의인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이 짧은 순간이예요.
이유없이 죄인되는 순간 한 2초 갑니다. 2초 지나면 에이 누가 잘났냐하고 또 붙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같으면 이것을 행하면 안 됩니다. 행하면 큰일 납니다. 행하면 이런 행동을 자신을 잊지 못해요. "나는 말이야 한 십 년 전에 교회에 재산 다 바쳤어. 그 때 나는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어. 그런데 너희들은 뭐야? 그러니까 이 교회의 주인은 나야" 라는 식이 된다 말입니다.
목사 같으면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이렇게 불어나게 했으니까 내가 나갈 때 먹을 것 챙겨서 퇴직금 줘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 집착을 계속하고 있는. 이건 뭐 교회가 아니죠. 그게 바로 방금 길게 설명한 부활의 능력이 아닙니다. 부활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부활의 능력이 찾아 오면,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죠.
성령이 찾아 오면 우리를 죄인으로,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죄로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이 어디서 오느냐면 성령의 부활이 어디를 거쳐서요? 십자가를 거쳐서 오거든요. 십자가 다음이 부활이고 십자가 다음에 성령이 우리에게 오잖아요.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 아니고 부활은 하나의 보자기예요. 보자기고. 그 안에 뭘 담습니까? 십자가를 담아서, 부활은 하나의 비누방울 이라면 그 안에 공기가 들어 있잖아요. 십자가라는 공기가 그 능력이 부활이라는 것을 가지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면 십자가 안에 우리가 집어 넣어지면 우리는 십자가라는 공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내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어제 수요일 날 언약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이 안에 새 언약이 있으니까 새 언약 특징이 뭐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인도 의인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능력이 있죠. 이것을 비누방울 처럼 몽실몽실 있다가 자기 택한 백성에게 흠뻑 씌워버리면 이 사람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사실은 이미 안에 들어 있는데 성령께서 역사함에 따라서 인식을 그렇게 자주 자주하는 것이죠. 성령께서 자주 하지 않으셔서 문제인데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다시 한 번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무엇을 통과하셨습니까? 십자가를 통과했죠. 그러면 물어봅시다. 십자가 이전에 무엇을 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었습니까?
십자가가 새 언약이라면 십자가 이전에 무슨 언약이죠? 옛 언약이죠. 구약이죠. 구약을 두 자로 이야기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는 것, 이것이 성경보기 입니다. 말씀보기 입니다. 흔히 말하는 큐티라고 하죠. 성경을 보게 되면 "아 참 나 죄인이구나" 라고 알게 되고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이런 죄인이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받았구나"
그런데 그 다음에 통과하면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성령의 은혜로 성령이 찾아 오셔서 내 마음이 이렇게 되었구나!" 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나는 졸지에 죄인이 되는데 그 때 딩동하고 누가 문을 두드리면서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아쉬운 점을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람 말 다 들을 필요 없고 자기 속에 있는 성령께서 허락한 대로 "그러면 제가 한 오만원 꿔 드릴께요." 라고 했을 경우에는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 이 본문이 내 능력이 아니고 말씀 스스로의 능력이 나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하네. 내가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 4장 4절을 지킨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성령 자기 솜씨로 내 솜씨가 아니고 내 착한 솜씨, 성화된 솜씨가 아니고, 성령의 솜씨로 문 열게 만들어서 오만원 주게 한 것 입니다. "아이구 이런 집사님 처음 봤습니다. 내가 열 집을 돌아다녔어도 저한테 오만원 꿔 준 사람 처음 봤습니다."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구요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아이구 이렇게 겸손까지 겸한 사람도 처음 봤습니다." 하거든요." 이것은 겸손이 아니구요.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당신 계속해서 이야기하면 내가 다시 본성으로 돌아옵니다. 빨리 가세요." 계속하게 되면 "내가 이만큼 잘났구나" 5초가 다 끝나가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늘 말씀을 보면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기도가 딴게 아니라 말씀 속에 들어가라는 이 말이죠. 하나님의 뜻을 보라 이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모든 것의 주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헌금을 해도 내가 안 돼요. 본인 주인한테 물어봐야 한다니까요. 왜냐하면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낸다고 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 몸 자체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임을 고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어려운 것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이 정도는 쉬운 것에 들어갑니다. 자 뭐가 어렵냐면은 방금 한 것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x),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나를 사용한다(O), 맞거든요. 사용한다를 딴 말로 바꾸어 보면 "말씀이 나를 만든다" 앞에 하나 더 넣으면 "새로 만든다" 앞에 더 넣으면 "늘 새로 만든다" 앞에 하나 더 넣으면 이것이 묵시니까 쉽게 말해서 시간과 공간인데. "연속성" 이것이 어려운데. 말씀이 늘 나를 새롭게 만들면 무엇을 끊고 시작하냐면, 내가 나를 만들면 여기에 무슨 구조가 성립이 되느냐면 과거가 안 끊어져야 돼요.
우리 학생들 어려우면 쉽게 예를 들께. 재원이 1년 전에 무엇을 했지? 피아노 쳤지. 그 피아노 안 쳤으면 원래 피아노 실력이 안되겠지. 그것이 기초가 되고 철학에서는 원인이라고 하는데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오는데 콩 심는데 콩 나고. 콩 안 심어 놓고 콩을 바라면 안되잖아요; 팥 심은데 팥 나고. 내가 나를 만들면 그것은 어는 구조에 빠져드냐면 원인과 결과라는 구조에 빠져들어 갑니다.
그런데 말씀이 나를 만들면 우발성이라고 해 가지고 예상 못한 짓을 하게되요. 예상 못한 짓을...그러면 재원이가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하면 만약에 재원이가 신앙 가지고 본다면 내가 이렇게 연주하는 것은 작년에 내가 연습해서 되었다고 했다면 원인과 결과를 고수한 것이 되죠. "역시 연습을 해야 해. 연습 안 하면 이렇게 나올수가 없어" 그런데 만약에 묵시 세계에, 영적 세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 때 연습한 것도 누구 덕이다? 연습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지금 발표를 하게 된 것도 하나님 덕이 된 것입니다.
연습은 했는데 갑자기 천재 지변이 일어나서 홍수나서 다리 끊어져서 연주회 없는 걸로 취소. 그 다음 연주회도 취소. 너 연주회 없는 걸로 해 버리는 그런 자유가 하나님한테 있잖아요. 아들 달라고 그렇게 기도해도 딸 나올 때 이름도 끝순이다. 딸은 그만놓자. 또 딸 나올 때 그 다음 말순이.. 이런 것은 내가 나를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이것 천국 못 갑니다. 이렇게 천국가는 것.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갈 때 내가 교회 간 것을 원인으로 보고 그 다음 복 받는 것은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따 내는 원인을 누구부터 출발하면 나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해야지. 내가 믿음을 제시해야 그 믿음의 빈 그릇에 채워지지. 그래서 부흥사들은 시편에 나오는 말씀대로 입을 크게 벌리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본문이 그 본문이 아닙니다. 그 본문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예상한 것은 애굽에서 멋들어진 것, 애굽에서 잘 사는 것을 예상하고 빠져 나왔지만 입을 크게 벌리라 애굽에서는 상상도 못한 하나님의 안식으로 입을 채우리라 너희 속에 있는 애굽에서 있던 것은 다 토해내야 한다. 그것이 광야시절 입니다. 세상에서 부자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인기얻는 것 토해내는 작업이 아까 오른 팔에 질질 끌려오는 작업 중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피아노를 쳐도 역시 피아노 연습은 내가 했기 때문에 그 때 안 했으면 큰일날 뻔 했어 내가 잘 했어.내가 연습한 원인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그 원인과 결과의 구조가 토해져야 합니다. 그 때 피아노 연습을 안 할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가 매 들고 설치는 바람에 연습을 했다. 그 때는 "엄마 고마워" 그러면 엄마는 "내보고 원인 찾지 말고 이상하게 그 때 매를 들고 싶더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애"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라 이것이 성도의 삶 이예요.
제가 강의 끝나면 매일 묻는 것이 뭐냐면은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맨날 묻는 것이 그거예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살되 옛날에는 내가 원인이 되었고 결과는 내가 했는데 이제는 원인부터 결과까지 하나님의 덕이라고 돌릴 때 그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삶 입니다. 묵시 안에 있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계획해서 교회에 봉사할까 하지 말고 그냥 복음안에 실려서 파도에 정처없이 종이배가 떠 다니는 것처럼 이미 묵시 안에서 떠 다니면 그 때 마다 할 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사도행전 5장을 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러분들 다 아시지만 제가 쉽게 이야기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주 부부 정이 돈독해요. 의견이 일치가 되어가지고 하나님께 얼마를 드릴려고 생각했다가 드릴려고 한 것도 먼저 본인들이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한 백만원 드려야지 했다가 "여보 백만원 많다. 당신 보기에도 많지?" "그러면 한 오십만원만 드려야지." 오십만원 감추고 오십만원만 가져왔더니만 베드로가 "마귀가 너 속에 있구나" "악마가 네 속에 들어 왔구나" 남편부터 들어오고 아내는 나중에 들어왔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았죠? 몰래카메라??? 성령이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얘는 지금 마귀에 속해서 헌금을 반 숨기고 한다 따라서 성령께서 아나니아를 죽여야겠다 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것을 모르고 와서 남편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가 아내 삽비라도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죠.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어느 수준이 되어야 해야 완전한가? 완전한 문제입니다. 어느 레벨이 되어야 완전하게 헌금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 되어야.
방금 했던 사도행전 5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여러가지 해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헌금을 몽땅 내었으면 완전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감추지 말고 다 바쳤으면 됐을건데 그것은 해답이 틀렸습니다. 완전함이란 것은 첫 번째 그 사람 속에 사탄이 없어야 합니다. 같은 이야기인데 그 사람 속에 성령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를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지적받았다고 해서, 베드로 목사한테 지적받았다고 해서 목사를 겁내면 그것은 애초부터 신자인지 아닌지 상당히 의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아이구 베드로 도사네. 베드로가 도사 같으면 누구한테 주눅 들어요? 베드로를 슬슬 피합니다. 우리교회 오후예배 기도에 대해서 방금 기도를 했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오후 예배 설교하기 전에 집사님들이 기도하면 저는 성령께서 집회에 기도를 통해서 계시를 나누어 주고 있다고 봐가지고 그 기도 내용을 헛되이 무시하지 않고 복음적인 것을 끄집어 내어서 제 설교에 접목을 시켜 버립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예배 참석하면서 눈 감고 이미 기도 내용을 듣잖아요. 이미 아멘 했잖아요. 그 사람 기도 내용에 대해서 어떤 대목에서 아멘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아멘 했다 말이죠. 그러면 이미 계시 선포는 시작 된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설교한다고 해서 그 기도 내용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이제 기도 생각하지 말고 제 말씀 들으세요." 이렇게 나와 버리면 그 기도 왜 시킵니까? 교회가 뭡니까?
거룩한 공회가 서로 교제하는 것, 사도신경에 나오잖아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가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사오며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성도가 교통하는 것은 목사 자기가 돛대가 아니라 말입니다. 자기가 최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집사로서 기도에 참여했다는 것은 거룩한 교제에 참여한 것이 되잖아요.
그 집사의 고백을 무시할 수 없어서 보태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집사님 이번 기도 순서인데" "아이구 그런 것 시키지 마이소."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반도 안돼요. 다 빠져 버리고. 그러면 제가 기도 제목을 끄집어 내야 해요. 교인들은 그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제가 다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설교를 몇 번 해야면 설교를 세 번 씩 해야됩니다. 첫 번째 묵도할 때 성경구절 하거든요. 이미 계시로서 참여되었죠. 기도제목 만들어서 해야죠. 본 설교해야죠. 오전에 중고등부 설교 해야지.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월급 받는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서 기도했으면 목사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내 기도에 대해서 씹으면 어떻게 하지. 내 기도는 목사 설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웅성웅성한 소리 그것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본문을 가지고 왜 이야기 하느냐면 목사들이 "너희들이 아무리 해도 성령받은 목사를 못 속여. 헌금 내놓아. 부흥사한테 돈 다 내놓아." 이렇게 해석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발 앞에 헌금을 했기 때문에 이름 안 쓰고 헌금하지 말고 이름 쓰고 목사가 이름을 발표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사이비도 그런 사이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목회할 때 이름 일절 쓰지 말라고 했다가 이제는 이름이고 뭐고 헌금 강단에다 올리지도 말고 헌금할 시간도 없고 바로 집에 갑니다. 자기가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자꾸 올리게 되면 경쟁이 되어 가지고 너만 올리냐? 나도 올린다. 올리면서 자랑해요. "이번에 서울대에 합격해서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경쟁이 되어서 묵시 세계가 아니고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사람과의 보이지 않는 이기심들이 있으니까 그 자체가 사탄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악마가 역사하는. 완전함은 완전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함이 수입된다는 것이 사도행전 5장 1절의 내용인데 그 본 내용은 10분 쉬고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