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5강-믿음 갖추기냐 ,믿어 질 뿐이냐 0909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3. 15. 14:25

090924 행4:19 믿음 갖추기냐? (타인의 욕망에 따라)
______VS 믿어 질 뿐이냐? (부활의 능력이 당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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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090924a행4장19절a부활의능력a


대전강의090924a  이름 : 이미아
2009-10-16 18:16:27 조회 : 35    

사도행전 4장 18-19절을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18절.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어떤 분이 교목으로 취직을 했는데 그 학교 재단의 이사장 되는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성경 이야기 많이 하지 마세요" 라고 당부하고 갔다고 합니다. 기독교 재단인데, 기독교 학교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 나라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야기 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니까 사도가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해 보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우리가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이야기가 상당히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복잡하고 어려워요. 왜 그런가 그림으로 설명해 보면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만약에 이 사람이 한 40년 살았다고 합시다. 앞으로 이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한 90에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폭이 이것 밖에 안되고 그것도 인식이 4살 5살 정도인데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알았다고 치고 유아 세례도 받았다고 치고 늙어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을 알았다고 해도 폭이 이것 밖에 안되겠죠. 그렇다면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하는 판단을 이 긴 하나님의 폭이 짧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나는 살아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누가 너를 살게 했는가? 우리 형이 먼저 있을 때. 우리 삼촌이 먼저 있을 때. 우리 아버지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그럼 아버지는 누가 태어나게 했을까? 내가 없을 때는 하나님이 없다가 내가 태어나자 마자 하나님이 새로 생겼습니까? 아니죠. 그것은 아니다 말입니다. 세 살 때 부터 하나님을 알았다면 한 살 때 부터 두 살 때 까지의 하나님은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나를 살게 하고 두뇌가, 몸이 점점 더 성장하게 하고 그렇게 하신 분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면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차리는 것 보다도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은혜로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순간에 아 하나님이 계시다 알아 차렸다고 해서 그 때 그 순간 부터 우린 하나님과 거래에 나선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시장에 콩나물 장사 아줌마는 그렇지 않아요. 오늘 저녁에 콩나물을 먹기 싫을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가면 돼요. 하지만 그 아줌마 하고 이야기 할 때는 아 콩나물 먹고 싶어 콩나물 얼마입니까? 묻는 그 순간 부터 그 아줌마하고 의미가 소통이 되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찾기도 전 부터 이미 하나님은 나를 키워 오고 있었고 은혜 주고 있었고 살려 주셨고 공기 주셨고 햇빛 주셨고 심장 뛰게 하셨고 부모님 살아 계셔서 기저귀 갈게 하셨고 내가 있게 한 그 부모님을 있게 한 할아버지 할머니도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셨고 나보다 목사가 나이가 많게 해서 신학을 먼저 하게 하셨고 성경을 미리 더 알게 하셨고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뭐냐면은 그릇은 그릇인데 작은 그릇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경상도 말로 종지기, 간장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홍수처럼 쏟아져도 기껏 담는 은혜가 어느 정도냐면 종지기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정도 차 있는데 나는 이 정도 찰 것을 생각했는데 빗물 받아 보니까 이것 밖에 안되니까 불평이 늘어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것 밖에 안 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묻죠. 이 그릇은? 너라는 몸체는? 너라는 두뇌는? 그것은 너가 만들어 달래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을 때 나는 거기에 관여한 바 없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직수씨가 태어나기 전에 신직수씨가 하나님 나를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그러면 하나님께선 의견을 하지도 않았는데 덜렁 만들어 버렸습니다. 나를 만들어 놓고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을 종지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잘 알아야지 멋지게 알아야지 해도 내가 아는 은혜는 종지기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가야산 수련회 때 했듯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학생들이 잘 이해될지 모르지만 제가 모험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조각에 보면 형체가 드러나도록 큰 사각형 대리석 같으면 이것으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 때 처음에 대리석 덩어리가 있겠죠. 그러면 그 안에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고민하면서 앉아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밑에서 부터 파내면 되죠. 하나님께서 아빠하고 엄마가 있어 가지고 나라는 것을 주변부터 먼저 있고 아빠 엄마가 주변을 차지하고 있고 아빠 엄마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고 하면 결국은 나는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빠, 엄마를 배치해서 나보다 먼저 된 여러가지 배치물들이 있어 가지고 배치된 것들로 인하여 그 안에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나라는 것이 발생된 거예요. 파들어 가는 거예요. 파들어 갈 때 로뎅의 생각하는 조각이 자기가 알아서 팠습니까? 아니죠. 바깥에 로뎅이라는 조각가가 파주니까 이거 작품하나 생겼구먼. 하고 보니까 저와 여러분들이다 이말이죠. 파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만들면서 파고 있는데 아직까지 형성되지 않은 내가 아 저기는 조금 약간 더 파주세요. 쌍꺼풀 수술 좀 해주세요.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됩니까? 못 됩니까? 못하죠. 방금 이렇게 구차하게 복잡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대로 우릴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저 사람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대로 만드는데 저 사람이 끌을 가지고 파다 보니까 내가 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 이종분 집사님께서는 대전에 사시고 저는 대구에 살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전에 한 번 구경해 볼까? 하고 어슬렁 거리다가 이 집을 방문해 볼까? 나미아불타불 이런 식으로 찾아 온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자극을 해서 제가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우리 재아나 재원이가 커가는데 엄마 없이 엄마 나 이제 내 힘으로 클거야 살거야 라고 할 수 없어요. 아마 커서 나이 삼 십 되서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반드시 여러분들을 여러분이 되도록 도와 주는 분들이 있어요. 끌을 가지고 정을 가지고 도와 주는 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재아가 그런 아이는 아니지만 술을 먹고 왔다 할 때 엄마가 너 앞으로 술 마시면 죽어 이랬단 말이죠. 그 다음부터 술을 안 먹었다. 그렇다면 엄마가 끌을 가지고 정을 가지고 재아를 뭐로 만들었다? 두 번 다시 술을 안 먹는 인간으로 짤라 내었죠.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모든 것도. 그래서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만든다 세상에서는 철학에서는 환경이 만든다 하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든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해봅시다. 여기까지 이해 된다고 하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봐요. 로뎅이라는 조각가가 만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로뎅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관람하는 사람이 물어 보는 거예요. 어이 조각품 무슨 생각해요? 묻는다고. 그러면 조각품이 말을 못하잖아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조각품이 말 못해. 그러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해요? 만든 사람한테 물어야지. 이것이 무슨 뜻인줄 아시겠죠? 그러면 우리 누가 만들었죠? 아까 강의 새로 해봅시다. 우리 누가 만들었죠?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셨죠. 그러면 내 인생 왜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그걸 누구한테 물어봐야 해요?  하나님한테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물어봐. 그런데 하나님을 절단시켜 놔버리면 그걸 누가 답변해야면 답변할 자격도 안 되는 내가 답변해야 해요. 내가 공부를 이렇게 못해서. 내가 그 때 실수를 해서. 그 때 내가 아내한테 잘해 주었으면 이혼하지 않았을텐데. 내가 그 때 선생님 말씀 잘 들었으면 수학 성적이 오르텐데...모든 것이 다 내가 행동만 잘했으면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고 내가 실수만 안 했으면 지금보다 우수할건데. 갑자기 내가 내가 내가 이것을 가지고 주체라고 합니다. 전부 다 내가 내가 합니다. 그러면 자기만 내가 내가 하는 줄 알았더니 옆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하고 묻지도 않고 나도 묻지도 않고 그러면 이 둘 사이에 뭐가 생기느냐면 시합이 생기고 경쟁이 생기고 이거는 비교가 생기고 이것은 스트레스 받죠. 너가 잘 났는지 내가 잘 났는지 한 번 붙어보자. 옆에 있는 아파트하고 이쪽 아파트하고 서로 싸우고 옆집하고 싸우고 같은 직장 동료하고 싸우고 같은 직원들하고 싸우고 상사하고 싸우고 서로 싸우고 옆에 교회에서 같은 집사들하고 싸우고 목사들하고 싸우고 전부 다 모든 싸움의 이유가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가 나를 만든다. 내가 나를 만든다의 대표적인 구호가 뭐냐면은 "I can do it"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네 자로 하면 "하면된다."  전부 다 이것이 뭐냐면은 주체에서 나왔습니다. 주체에서 나오는데 이 주체가 어디서 나왔느냐면 환경에서 돌출된 거예요. 뭔가 판에 있으면 신문지나 종이 있습니까? 이게 환경이면 환경에서 쏙 내밀면 올라오죠? 올라오는 요것을 주체라고 해요. 그런데 올라올 때 뭘 끌고 올라왔어요? 주변에 있는 종이를 끌고 왔죠? 이 종이를 환경이라고 하고 고상한 환경의 내막을 까보면 타인의 욕망이라고 하죠.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우리 재아나 재원이가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제일 가까이 기대하는 분이 누구죠? 엄마죠. 아침에 일어났다. 말은 안 하지만 엄마 나 오늘 어떤 사람이 되야 해? 라고 묻는 거예요. 만약 아빠가 계시면 아빠 나 오늘은 어떻게 아빠 맘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겠어? 라고 묻는 거예요. 아내 같으면 여보 내가 오늘은 당신한테 어떤 아내가 되야 해? 참 어제 당신이 나한테 이런 이런 거 원했지? 봐 당신 보란듯이 내가 이런 이런 것 해가지고 내가 얼마나 당신한테 훌륭한 아내인가 본때를 보여 주겠어. 분명히 말은 주체인데 걸려 있는 것들이 전부 다 누구냐 하면 가까운 주변 인물들이예요. 교회에 갔다. 목사님 저 어때요? 저 신앙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이죠? 저 기도 어때요? 괜찮게 기도하죠? 저 헌금 액수 어때요? 괜찮죠? 전도 세 명 했는데 목사님 칭찬해 주세요. 전부 다 이유예요. 남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나는 남이 만들었어요. 그걸 가지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왜 자꾸 두리번 거리는지 모르겠어요. 나라는 것을 작크를 열고 쭉 쪼개보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전부 다 남이 들어 있어요. 넌 이렇게 살아야 해. 넌 이렇게 오는 거야.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집에서 옷을 벗어요. 그런데 옷 벗고 골목에 나갈려고 하니까 엄마가 말려요. 애 바깥에 나갈 때는 옷을 입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엄마한테 욕해. 애들 옷도 안 입히고. 그럴 때 어린 아이는 아하 내가 엄마하고 있을 때 하고 바깥에 있을 때 하고 차이가 나는구나 바깥에 있을 때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을 알죠. 그 때 비로소 아이는 자아 의식, 스스로 의식이 생기는데 자아 의식은 결국 누가 요구한 거예요?  남이 요구했어요. 만약에 남이 요구한대로 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자아 의식이 상실되어서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옷을 처음 입으니까 어색할거 아닙니까? 그래서 집에 오면 홀라당 벗어 버리는 겁니다. 어떤 애는 옷을 짓밟기도 하고. 나 옷 안 입어. 심지어 여자 아이 같으면 나는 바지 안 입어 난 꼭 치마 입어 왜냐하면 치마 입고 밖엘 나가보니까 어휴 애는 꼭 백설공주 같애. 백설공주라는 타인. 동화책에서 백설공주 라는 독일의 어떤 공주 이야기를 들어 가지고 그 백설 공주의 욕망이 자기 자아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 다음 부터는 백설 공주가 되든 신데렐라가 되든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될까 의심했는데 치마 입고 밖에 나가 보니까 애는 백설 공주라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 말을 애들은 곧이 듣고 진짜 자기가 백설 공주인 줄 아는 거예요. 그 때 부터 바깥에 나가면 백설 공주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는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고 나가니까 백설 공주 소리를 안 해 아하 남한테 칭찬 받는 것이 나에게 선이 되고 같은 말로 진리가 되고 나에게 욕을 하는 것이 악이 되는 비진리가 되는 이런 관계에 들어 가는 겁니다. 만약에 그 아이가 벗는 것을 좋아해 가지고 나이 20세 넘어서도 벗어가지고 삼성 그룹에 취직을 하면 취직 되겠습니끼? 어디 미친 나시족이 와 가지고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엔 뭐냐 회사 취직하는 것은 본인이 삼성 그룹에 취직하고 싶어도 본인 생각이고 삼성 그룹이 원하는 인간상 남들이 원하는 인간상 연주자가 연주할 때 자기는 음악에 도취되었지만 박수가 안 나오면 레파토리 좀 바꾸시지 조용필의 친구야 같은 것도 하고 클래식만 하지 말고 째즈같은 것도 하고 재원이나 재아가 어떤 인간상이 되고 싶어요? 답변할 필요는 없어요. 이렇게 물으면 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만히 보면 남들이 주변 사람들이 칭찬해 줄 것에 소망을 두고 있어요. 여기서 극단적으로 나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 났을 때 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뭐냐면은 나는 사람들에게 미움 받음 바 되고 사람들이 나를 못 알아 보도록 나는 살아 간다고 했어요. 이사야 53장인데. 내가 사람을 구원하러 왔지만 사람들이 도저히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시장통에 같이 걸어도 같이 식사를 해도 못 알아 볼 것이다. 밥을 먹으면 뭐할 것이요, 같이 이야기를, 대화를 해도 나를 못 알아 볼 것이다. 예수라는 양반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분이 누군지는 완전히 감추어진 비밀로서 온 거예요. 그래놓고 우리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은 나를 본 받으라고 했어요. 누가 성경을 쉽다고 했어요? 누가? 이런 예수님 빼놓고 보통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에서 뭐만 뽑아내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을 기도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미 제가 알고 있는 복의 내용만 주시옵소서. 복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면 지금 우리 엄마나 아빠 친척들이 은근히 저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복이라고 간주하고 싶고 저한테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저는 이 교회에서 주변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스타가 되고 내가 집중받고 부러움을 사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여 내가 기도한대로 주시옵소서 라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실례지만 누구세요? 누구세요? 라고 했습니다. 누구세요? 라고 했습니다. 질문이 두 개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 보고 누구세요? 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보고 누구세요? 라고 물어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저 아시잖아요. 절 만들었잖아요. 이근호 목사님 강의에 보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이미 알아서 날 들었다면서요. 조각품 깍아서 만들었잖아요. 만들었으니까 제가 이런 것 필요하니까 주세요. 보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축복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을 보냈거든요. 오신 예수님 보고 사람들은 분명히 복을 주시기 위해서 왔는데 우린 예수님 보고 실례지만 누구세요? 하고 의아해 하는 거예요. 못 알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서로 사마티 아니할제 서로 안 맞지요? 맞지를 않는 거예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가 맞겠어요? 틀렸겠어요?  이것도 틀렸죠. 예수 믿습니다.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해 하는 일반적인 요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4장 11절 한 번 읽어 보세요.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지난 번에 한 번 했는 것 같은데 다시 해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다? 버림 받았다? 버림 받았죠. 버림받은 돌인데요. 그런데 버림받은 돌이 12절에 보니까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모욕받고 웃음거리가 된 그 예수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12절에 보면 없다는 말이잖아요. 이야기가 복잡한게 아니고 간단한데 우리가 버렸는데 버린 그 분이 우리를 그 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딩동하고 문 열어 보니까 거지가 왔어요. 어디서 대낮부터 거지가 어이 나가 라고 우리가 배척했는데 사실은 배척받은 그 분이 이 가정을 구원한다면 이 가정은 무슨 수로 구원을 받습니까? 목사님 다시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불러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알아 본다니까요. 아까 그 거지 아니야 아 역시 다시 봐도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타인의 욕망. 같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욕심들. 그러니까 엄마가 나에게 이걸 요구한다면 엄마의 마음은 어디서 받았겠어요? 엄마의 엄마나 아빠한테 받은 마음이고 나에게 물려준 엄마나 아빠의 마음은 처음에 아담부터 물려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과 야망같은 거예요.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에 가득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를 버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 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 갔더니만 나를 쫓아날 때 비로소 구원 받는 시점이 되죠. 교회가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에서 쫓겨난 그 시점부터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나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모퉁이의 머릿돌이 확실 할려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원해야겠죠. 그럼 이제부터 해답을 복잡하게 했는데 간단하게 내리겠습니다. 우리속에 방금 뭐가 있다고 했어요. 나라는 것은 없어요. 나라는 것은 돌출이예요. 돌출. 그런데 툭 튀어나온 것을 환경이라고 합니다. 환경이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환경에 맞추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마치 이 집안에서 이 사회에서 나를 인정해주죠. 예 우리 코드 잘 맞죠. 우리 의사 소통 잘 되죠. 그러니까 저를 이 공동체에서 쫓아내지 마세요. 대전의 프로 야구팀이 한화죠. 그런데 갑자기 롯데에서 돈 줄께 스카우트 했어요. 그러면 환경이 뭐로 바뀝니까? 대전의 환경이 부산 롯데 팀으로 바뀌는 겁니다. 한화가 발목을 잡으면서 가지 말라고 해도 돈이 있는데 하고 새로운 롯데팀에 가서 저 어때요? 이 롯데팀하고 딱 맞죠. 음악의 유명한 여집사가 연주자인데 아 저사람은 음악밖에 몰라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어디에서 이번에 한국 음악 협회 회장 좀 맡아 달라고 하니까 예 맡죠. 음악이고 연주고 다 때려치고 한국 음악 협회 회장해 가지고 국회의원 찾아다니며 로비하고 있다고. 그게 뭐냐하면 사람은 옛날에 음악만 생각했던 그게 당신입니까? 지금 한국 음악 협회 회장해 가지고 돈만 밝히는 국회의원 내다보는 그게 당신입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죠? 그때 그때 달라요~하죠. 그때 그때 다른 거예요. 그래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여기에 보면 이걸 타인의 욕망인데 이 타인 속에 누가 끼여드는가?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예수님께서 여기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이 그림 한 번 보면 여기 나예요. 이쪽에서는 타인, 남이 땡기고 이쪽에서는 예수님이 땡기고 누가 더 힘이 셀까요? 피조물이 힘이 셀까요? 그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가 힘이 셀까요? 바로 예수님이 힘이 세면 이 사람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바로 이 사람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몇 분 걸렸습니까? 엄청 길었죠.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본인이 믿는 것이 아니고 어느 쪽에서 당겨 주느냐가 나 예수님 쪽에서 당겨줘 하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 하고 나는 하나님 예수님 보다도 남의 눈치 보면서 살아 하면 남들에 맞는 나 남들이 요구하는 나 역시 나는 없어요. 남들이 원하는 나. 하여튼 남이 어디 있는지 몰라. 결국 이것을 가지고 불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보았던 사도행전 4장 19절 이해가 다 되었죠.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들 앞에서 판단해 보라 그 이야기 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그 당시에 베드로와 요한을 미워하는 사람들, 세상 권력자들이 하는 말이 어이 이제부터 예수 말도 듣지 말고 예수 말도 가르치지 마라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땡기는 것이 중요하냐 너희들이 땡기는 것이 중요하냐 어느 것이 내가 살 길이냐 어느 것이 내가 영원히 살 길이냐 너희들이 한 번 생각해보라.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성경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야기 할라고 하면 굉장히 길어요. 그러면 4장 19절에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땡기고 있다. 당기고 있다. 그러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땡긴다고 하는데 실제로 땡기는 것입니까? 괜히 지가 착각하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땡기는 것 맞기는 맞아요. 땡기면 어디로 땡기는데요? 그것이 또 궁금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2-4절을 한 번 봅시다.

2절.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절.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남자수가 약 몇 명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 천 명 되었죠. 참 신기해요. 사도들이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을 예를 든 거예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했죠. 그럼 방금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당긴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기고 어디서 당기느냐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 때 사도가 하는 말이 어떤 특정 사람을 저나 여러분들을 당길 때 그냥 당기는 것이 아니고 무슨 힘이냐 하면 5미터 당기고 3미터 당기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그 힘으로 우리를 당기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럼 재아한테 물어 볼께요. 그럼 부활의 힘으로 당길려면 우리는 뭐가 되어야 해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식 간단한 거예요. 아주 쉽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실 때는 그냥 부탁하고 사정하고 구걸해서 교회 나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죽었는데 나 때문에 부활되는 거야 라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살려내는 거예요. 아까 공부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 한 것 히브리서11장의 내용을 한 번 봅시다.

36절.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아까 시작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때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세례받은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 믿음이냐면은 어떤 믿음이냐면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여기 톱으로 켜는 것과 돌에 치는 것과 죽는 것이 온다 할지라도 히브리서 11장 신앙인들은 그런 것이 올지라도 믿음을 버리지 아니했다 기억나요? 그 때 그들이 뭘 믿었냐면 예수님이라고 했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어서 죽은 예수님이 안 죽고 살아계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어서 예수님의 세계. 부활의 영이 있는 부활의 능력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잡아 당기니까 이 사람은 톱으로 켜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칼로 죽는 것도 무섭지 아니한 가운데서 계속해서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방금 사도행전4장 2절과 3절의 말씀.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는데 그 때 사도들이 하는 말이 우리를 가두어도 소용 없어요. 왜? 하니까 우리는 죽어도 괜찮아요. 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예수님이 일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능력으로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와 함께 있으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따라서 당신들이 우리를 옥에 집어 넣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허물이 되지 못합니다. 라는 말을 전했더니만 그것을 믿는 사람이 몇 명 되었다구요? 오 천 명 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오 천 명. 아니 그것을 믿어요? 아니 그것을 믿는단 말입니까? 여기 선풍기가 있다. 믿죠. 여기 컴퓨터가 있다. 믿죠. 여기 안경이 있다. 믿죠. 그런데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눈에 안 보이는데 눈에 안 보이잖아 그런데 오 천 명이나 믿어요. 이것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영이 사람의 마음에 오게 되면 그 때 부터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 믿어지는데 아무나 개나 소나 다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해서 일어난 일이 믿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거듭났다 중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로 보는 것에 대한 즐거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치다 삑사리 났다. 아이구 이번에 연주할 때 실수해서 자살하고 싶어.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피아노를 잘 쳐도 이미 죽은 자고 못 쳐도 이미 죽은 자다. 너가 부활되는 것은 너가 피아노 잘 쳐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와 같이 있어 주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에 너는 피아노 잘 치나 못 치나 밤에 오줌 싸나 안 싸나 관계없이 이미 너는 영생을 얻은 것이다. 이걸 믿는데 몇 명 믿었다고 했어요? 오천명 믿었어요. 요즘 한국 교회보다 낫습니다. 한국 교회는 맨날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이런 소리만 하죠. 눈에 보이는 타인의 욕망 남들이 그럴싸하게 보이는 타인의 욕망. 내가 교회가서 이만큼 성공하고 사업 잘 되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런 복을 복이라고 그것 달라고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미 죽은 자요 라고 설명할 때 과연 오천명이 믿겠습니까? 이게 어디 교회 장사 안 되게 전부 다 복 받을려고 온 사람들한테 어디서 이미 당신은 죽은 자요 인격 모독하는 인간을 무시하는 인간의 선행을 무시하는 그런 말을 하냐 대박에 욕을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도행전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입니다. 그걸 경상도 말로 다섯자로 갈도 못한다. 갈지도 못한다. 그걸 두자로 이야기 하면 자유라고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제가 전에 이런 이야기 했습니까? 간음한 여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간음한 여인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여자보고 먼저 물었죠. 너 왜 간음했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요. 옆에 사람들 있던데 그 사람들 뭐할려고 왔지? 저를 나쁜여자라고 지적하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어디갔지? 네자로 없나이다. 그래 그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께. 너는 죄가 없어. 이걸 가지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게 요한복음 8장 이야기이고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리라 너가 진리를 가진것이 아니고 진리가 너에게 덮쳐 버리면 너는 진리안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용서함 안에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용서가 된 그 영역안에 너가 놓여 있게 될 것이다. 왜? 우리 속에 누가 들어 오셨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해 줄려고 아예 작심하고 들어오신 예수님이 들어 오셨기 때문에. 그럼 우린 어떻게 용서를 받는가? 예수님이 그냥 들어 오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이 피가 우리가 죄를 지어서 받아야 할 모든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님이 중간에 나서서 대신 흘리신 피가 우리 죄 때문에 주어질 모든 지옥의 형벌을 지옥의 고통을 피가 중간에서 해소를 했기 때문에 이 피가 있는 한 우리가 지옥에 갈 일은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이 내 고집보다 더 셉니다. 타인의 욕망과 유혹보다 더 셉니다. 누가 하나님보다 더 세냐? 이 대목을 한 번 찾아 봅시다. 사람들이 이 대목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고린도전서10장 22절. 다같이 한 번 읽어 볼까요.

22절.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식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강한 자냐 라고 물었잖아요. 우리가 주님보다 안 강해. 강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주님이 이끄시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게 돼. 자 그럼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그러면 목사님 이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보이긴 보이는데 내가 만약에 이 사실을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처음에 이야기로 돌아가면 됩니다. 내가 안 믿는다 이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라는 말을 할 시점이 불과 길어봐야 90년이고 짧은 사람은 20살 때 죽으면 20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안 믿는다고 내세울 때 내가 있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뭔가 다른 조치가 있어 가지고 아까 조각품 깍이듯이 나 안 믿을거야 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안 믿는것이 아니고 환경이 깍이다 보니까 그런 조치가 나왔죠. 그러면 내가 있기 전에 이런 환경 자체를 누가 주셨느냐면은 바로 나라는 것이 생기게큼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사건들을 일으켜서 배치를 한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부모님이 계시고 나보다 먼저 형이 있고 하여튼 모든 지금 나 된것은 전부 다 주변에서 작용들이 벌어졌다 이 말이죠. 내가 믿든 안 믿든간에 그런 소리 하는 것 조차도 누구 계획안에 잡혀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안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말을 반대할려면 첫 번째 나는 내가 알아서 태어났다. 두 번째 나는 내가 알아서 죽는다 이것이 성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중간에 있으니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태어난 것도 내가 알아서 태어났으니까 죽는 시점도 내가 알아서 고를거야. 그래서 그 중간에 것도 내가 알아서 할거야. 사람은 1번도 떼내 버리고 2번도 모르면서 그 중간것만 뭐라고 고집하느냐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믿고 안 믿고도 내가 판단한다. 자꾸 내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내가 하지만 내 안에는 내가 없고 남들의 요구 조건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방금 이렇게 길게 설명한 것을 성경에서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란 말은 무슨 뜻이냐면 무엇이 나쁘다 무엇이 옳다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은혜란 말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나쁜짓 하고 안 하고 했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 하고는 다른 이야기 입니다. 개입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지금 손으로 무릎을 치면 당신이 지금 무릎을 치는 것은 오늘 뉴욕 유엔본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을 했기 때문에 무릎을 쳤다고 하면 제가 이걸 인정 안하죠.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한 것 하고 무릎 친 것하고 아무 관계 없죠. 마찬가지로 내가 사람을 죽였어 그럼 지옥갈거야. 아니예요. 사람 죽여서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죽인 것 하고 내가 지옥가는 것 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역시 교회 목사가 되어서 천당 갈거야. 아니예요. 교회 목사되고 기도 많이 하는 것 하고 천국가는 것 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천국가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행동해서 나로 하여금 천국에 보내 주는 것입니다. 괜히 우리는 옛날 습관이 남아 가지고 자꾸 자기 선행과 자기 악행을 여기에다 개입을 시키는 버릇들이 있어요. 이것이 타인의 욕망이죠. 안 믿던 버릇 때문에. 안 믿던 버릇이라는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천당가고 지옥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복 받고 저주 받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런데 그것은 당신 착각이고 어쨌든 나중에 가만히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 (IP:124.♡.85.46) 09-10-22 19:23 
대전090924b행4장19절b부활의능력b


대전강의090924b  이름 : 이미아
2009-10-16 18:20:50 조회 : 37    

자,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24절에 보면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일심이란 말은 하나의 마음.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요. 그렇게 되어 있죠. 옛날에 저희 할머니가 교회를 안 다녔어요. 절에 다니셨는데 할머니가 절에 다니시면서 꼭 음력으로 2월 28일이 되면 부엌에서 삼신 할머니를 찾았고 삼신 할머니를 찾으면서 조물주란 용어를 쓰셨어요. 학교도 다니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릴 때는 교회를 안 다녔으니까 항상 타인의 욕망이죠. 남한테 들었던대로 조물주 조물주 했는데. 성경에 보니까 사도행전 4장 24절을 보니까 바다와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자를 조물주라 했어요. 그러면 할머니가 절에 다니면서 무엇을 인정했느냐면 조물주를 인정한 거예요. 조물주 밑에 아래 단계가 삼신 할머니가 되는 거예요. 삼신 할머니는 나중에 공부해 보니까 제주도의 설화에 나와요. 제주도에 창조 설화가 있어요. 삼신 할머니라고 해 가지고 아들 낳아주는 할머니 있어요. 그렇다면 조물주라는 뜻이 뭡니까? 모든 것을 제조하신 신이라는 개념이거든요. 그런데 조물주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천국 갑니까? 아니라는 거죠. 그 밑에 25절에 "우리 종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절에 다니는 우리 할머니도 뭐냐하면 다른 말로 조물주 신을 인정했는데 그 숨어 있는 신께서 특정 어떤 분을 보내시죠.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다윗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너도 나도 다 조물주다 그런데 다윗이 등장하면 다윗하고 옆에 있는 이 사람하고 갑자기 뭐가 생겨 버렸습니까? 다윗하고 사울, 우리 자신들하고 할 때 다윗에게 성령이 임했죠. 25절에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했으니까. 성령이 임한 다윗과 성령이 없는 보통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이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안 보입니다. 안 보이니까 조물주라고 하든지 신이라고 하든지 삼신 할머니라고 하든지 여호와라고 하든지 하여튼 지 맘대로 부르라고 해요.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다 인정하니까. 심지어는 중도 엎어지면 아이고 하나님 하는데. 그런 신이 있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그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결국은 그 문제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없다고 치면, 성령이 없다고 치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면 나는 하나님이 만들었어. 너도 하나님이 만들었어. 그러면 우리 모두는 조물주가 만들었어. 그러면 우리는 뭐하면 된다? 교회 갈 필요 없이 그냥 우리 할머니처럼 물 떠놓고 조물주한테 빌던지 삼신할머니한테 빌던지 누군가 나를 만들었다는 것만 인정하면 그 분이 계신다는 그 천국에는 후다닥 죽어서 들어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라에 들어 가는데 자기만 들어가면 좋겠는데 옆에 나쁜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 여기서 뭘 정하느냐면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가고 나같이 착한 사람은 천국간다. 옛날부터 나쁜 사람을 부모한테 불효하는 사람. 부모한테 불효하는 사람은 염라대왕한테 혼쭐 나게 되어 있어요. 창을 하는 김영임씨가 추석때나 어버이 날에 부르는 곡이 회심곡인데 회심곡의 가사를 쭉 읽어 보았거든요. 이 땅에서 부모한테 불효하면 죽어서 혼난다는 이 이야기예요. 부모한테 잘 하면 살아 생전에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죽은 사람이 빽을 써 가지고. 그런데 부모한테 잘 하는 것, 효도의 특징이 뭐냐면 제사입니다. 기일 때 마다 제사 지내는 것.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들과 죽은 부모가 보고 아이구 기특하기도 해라 나를 잊지 않았네 그런 은덕을 곱게 생각해야지 마음씨가 고와야 복을 받는거야 하면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힘을 모아서 산 자들에게 잘 해준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만 효도의 절정이 뭐다? 제사날을 잊지 않는다는 것. 죽은 부모 한테만 제사하면 안 되죠. 부모의 부모가 섭섭해 하니까. 증조만 하면 또 누구 섭섭해 합니까?  고조. 또 고조만 하면 안 되죠. 시댁 쪽만 하면 안 되죠. 친정집도 해야죠. 그래서 조상 숭배라는 것이 조물주 밑에 아랫단계에서 죽은 조상들이 모이는 세상이 있고 죽으면 모두 합류가 되는데 그 쪽에서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복을 받는다 내가 잘 되는 거예요. 그것을 첫째 강의에서 타인의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제사 제도가 한국의 모든 유교와 전통적으로 가정 질서를 유지시켜 주었고 가정 교육을 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한테 효도하는 바른 교육관이 정립이 되도록 보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렇게 한국의 부모 효도 이야기 하면서 뭐가 빠졌죠?  현재 성경하고 다른 점이 있죠. 다윗이 빠졌고 다윗이 성령 받았다는 것이 빠져 버렸죠. 다윗이 성령을 받았으면 다윗 혼자 착하라고 받은 것이 아니고 다윗이 성령을 받아 버리면 다윗이 선지자이기 때문에 예언을 하게 되어 있죠. 다윗이 예언을 하게 되면 그 당시는 모르지만 미지의 어떤 인물이 등장하게 되겠죠. 그 분이 신약 성경에 누구란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보통 사람은 자기가 양심껏 부모한테 효도해서 조물주한테 죽어서 좋은데에 합류합시다 하면 되는데 예수님은 어떠냐 하면 다윗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인물로 최초로 등장했죠. 다윗은 예언을 한 사람이고 그 말씀대로,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예언대로 사신 분이 누구냐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아까 사도행전 4장 12절에 이 세상에 구원 받을 이름을 예수님 말고 주님께서 주신 적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 한 것을 칸으로 나누어 보면 이 쪽에 보면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한다. 한국의 풍토는 뭐다? 조물주 계시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 사람은 죽으면 귀신이 되죠. 귀신들이 모인 곳이 따로 있고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면 조상들이 힘을 합쳐서 모든 하는 일이 잘 되어 가지고 너가 효도 했으니까 복 줄께. 사업 잘 되게 해 줄께. 사업 잘 된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울 것이 있는, 내가 이렇게 잘 살았으니까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전라도에서 장모하고 처형을 죽였어요. 왜 죽였는가? 이유는 간단해요. 나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딴 것은 다 용서해도 자기를 무시하면 용서가 안 됩니다.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이 공부 못하는 것은 괜찮아요. 그런데 학생이 선생 무시하면 뺨싸대기 날라 갑니다. 너 아버지 뭐하시냐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어떤 인간이든 부부싸움 할 때, 그저 아무것도 아닌 문젠데 언제 크게 터지냐면 무시할 때. 하여튼 내가 친정 꼬라지 볼 때 부터 알아 봤다. 남편이 이런 소리 나올 때. 하여튼 시어머니 보면 그 엄마의 그 자식이지 라고 나올 때. 이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사람은 인간 속에 뭐가 들어 있다?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지 내가 무시 당하지 않는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따라 붙어 보자. 거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 해요. 하여튼 절에 가서 빌든지 성당에 가서 빌든지 교회에 가서 빌든지 비는 그 마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꿈속까지 나옵니다. 꿈은 이유를 막론하고 공포입니다. 공포, 두려움 입니다. 좋은 꿈이든지 나쁜 꿈이든지 관계없이 무조건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지를 꿈을 깨보면 알아요. 뭐가 무서우냐 행여 무시당할까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보상하고 카바하고 딴걸로 취향을 바꾸고 복잡해요. 하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나는 살아야 하고 살더라도 남한테 무시 당하지 않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안 되니까 그 억눌림이 꿈 속에서 풀려 나오게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조상을 효도하는 거예요. 결국엔 조상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 챙기겠다는 겁니다. 기일마다 제사 드리면서 산 자나 죽은 자로부터 효자라는 소리를 들어서 효자에게는 복이 온다는 그러한 기존의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내가 잘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여기엔 뭐가 필요 없냐면 이 점에 대해서는 너나 네나 다같이 아는 것인데 구원자가 뭐가 필요해. 지가 양심껏 살면 되지 아무리 하나님 무서워도 양심껏 사는 자를 지옥 보내는 하나님은 없어. 다 양심껏 살면 결국엔 하나님께서 다 천국에 가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양심에 가계부가 생기죠. 가계부가 뭐냐면 이 쪽은 착한 것. 이 쪽은 나쁜 짓. 해 가지고  이 쪽이 51% 되면 이 쪽이 49% 되도 51-49 하면 몇 퍼센트 남습니까? 2%남으면 극락의 맨 윗자락에 합격할 거 아닙니까?  이런 선악과를 따먹은 계산이 나오죠. 문제는 이렇게 되었으면 정상인데 갑자기 예수님이 등장해 가지고 하는 말이 진짜 하나님이 보낸 자는 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착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착한 일 해도 지옥가고 나쁜 일 해도 지옥가는데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이 인정하는 분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면 그 증거를 대라. 예수님만이 죽음에서 다시 말하면 죄에서 부활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 난 분은 부처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너희들이 살겠다. 새로운 하나님의 원칙이 여기에 삽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는 뭐가 필요가 없느냐면 "예수님에게 어떻게 해 드릴까요?" 가 일체 필요가 없습니다. 착한 일 해 드릴까요? 그러면 나는 나쁜 짓 해 드릴까요? 이것이 일체 주님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운명을 대신 다 치루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남편이라고 하고 거기에 딸려 온 혼인한 사람을 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주고 아내는 뭘 해야 합니까?  설거지 하고 바람 피우지도 말고 나이트크럽 가지 말고 맨날 안에서 성경만 보고 이렇게 할까요? 아내는 뭘 하는게 아니고요 그 주신 남편의 사랑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남편이라는 것은 만드는 것이다 했어요. 남편이라는 것은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남편이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내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관계. 그 관계는 우리가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당연히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고 당연히 우리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남편 남편 부른다고 해서 남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주는 사랑. 사랑인데 우리의 어떤 행위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오직 주시는 사랑으로만 관계가 형성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방금 이 칸막이 내에서 이 쪽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이러한 생각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못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쪽에서는 누가 주인공이예요? 내가 주인공인데 이 쪽에서는 누가 주인공 입니까? 예수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건데 자기 챙기고 예수 믿을려고 하니까 자기가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어 버리면 결국 산 자가 두 분 되잖아요. 산 자가 두 분 되어 버리니까 둘 다 맨날 싸우잖아요. 한 쪽은 죽은 자가 되어야 할 건데. 우리를 죽은 자로 보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인정할 때. 그게 바로 주님이 주신 사랑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뭐냐면은 예언이죠.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신약 성경의 특징을 보면  예언이 쫙 깔려 있어요. "예언하신대로" 아니면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할 때 뭐라고 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니까 제자들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한 것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자기들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뭐든지 하나님의 예언대로 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뭘 하든지 어제 수요 설교에서 말씀 했는데 노상방뇨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따지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방종을 이야기 했는데 방종을 사람이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방종을 해봤자 나보다 더 심한 방종을 한 사람 앞에서는 방종이 아니고 착한 짓이예요. 사람이 아무리 방종해도 현재 있는 수준에 맞춰서 방종하지 그 진짜 방종까지는 못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이 사람도 더 방종한 사람에게는 안 되죠. 사람이라는 것은 본인이 방종을 하면 본인이 힘들어서 못하게 되어 있어요. 착한 일도 억지로 해 보세요. 그것은 착한 일이 아니고 화가 날 지경입니다. 아까 어린애가 사회에서 옷을 요구하니까 애가 옷을 입긴 입는데 집에 가서 옷을 벗어 버리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냥 걸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오너라 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나오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또 그러면 내가 나체주의가 될까요? 나체주의도 자기의 인위적이예요. 그냥 있는 그대로, 편한대로 나오면 되는데 우리는 뭘 꼭 걸쳐요.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성경을 열 두번 봤습니다. 저는 헌금을 많이 했어요. 제가 헌금 해서 교육관을 지었습니다. 제가 전도를 제가 세 명이나 했어요.  목사님 넥타이를 사줬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죄인을 부르러 왔으면 환자가 의사앞에 숨길 필요가 없어요. 병든 것을 그냥 노출하면 되는데 자꾸 병든 것을 건강한 체 하고 있으면 의사로서 힘들죠. 그렇잖아요.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병이 오지만. 그냥 아프면 아픈대로 오면 될텐데 자기 체면이라는 외투를 둘러 버려요. 두르지 않아도 다 아시는데. 주께서는 우리를 죽은 자로 보고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오셨는데 그건 모르고 교회 나오면서 자꾸 폼 잡고 나오고 의인인척 하고 나오니까 더 힘들어지죠. 아까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언한대로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한 겁니다. 그 다음에 28절 봅시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룰려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예정하심. 아마 이것 설명하면 강의 끝날지 싶습니다. 예정하심이라. 예정하심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을 점선으로 하면 아직 여러분과 제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만 하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착하든지 이 사람이 악하다든지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죠. 안 태어났으니까. 태어나야 무슨 짓을 하지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죠.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사랑의 작품과 미움의 작품을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 만들어 놓고 사랑을 집어 넣고 어떤 사람을 만들어서 미움을 집어 넣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미워하심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들어 있어요. 그러면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어떤 것이냐 하면 이 사람이 죄를 지어도 용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파트 있으면 여기 몇 동 입니까? 1004동 앞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집이라고 붙여 놨으면 이종분 집사님 집에서 어떤 짓을 해도 바깥에 이미 사랑의 집이죠. 다른 말로 하면 피죠. 피가 발려 있으면 이 집에서 세 식구가 어떻게 하든지 바깥에 나올 때는 전부 다 용서로 바깥에 나옵니다. 참 희한하죠. 너무 희한해서 꼭 거짓말 같아요. 진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안에서 인간들이 무슨 인간인지 관계없이 쌍꺼풀 했냐 안 했냐 관계없이 바깥에 있는 문에 어린 양의 피를 보고 하나님의 심판주가 그냥 넘어가 버려요. 이 집에는 심판 안 해. 나 안할거야. 이 집은 그냥 용서할거야. 하고 그냥 넘어가 버린단 말입니다. 어때요? 불합리 하지 않습니까? 이게 불합리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 답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구원의 방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공식 다시 한 번 봅시다. 사랑을 받은 집의 특징은, 사랑의 작품의 특징은 죄가 용서 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 했기 때문에 용서 된 것이 아니고 회개와 관계없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사랑 때문에 사랑 자체가 된 거예요. 그러면 말을 다시 합시다. 인간 자체를 뭐로 보면 집으로 보고 이 집을 사랑의 집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집에서 세 식구가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집이 사람을 집어 넣었다고 보자는 말입니다. 세 식구가 의논해서 재원아 우리 무슨 집 할래? 하고 물은 것이 아니고 아예 집 자체가 하나님의 용서하는 집 속에 세상에 들어 온 것입니다. 이것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들어왔다 이 말이죠. 인간의 행동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교회 가고 헌금 하고 기도하고 교도소 몇 번 들락날락하고 아무 관계 없어요. 어쨌든 모든 죄가 용서로 달라지는 아주 희한한 집 구석에 들어 온 거예요. 두 번째 이 집은, 미움의 집의 특징은 무엇이냐면 어떤 의로운 것도 다 미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집에선. 이 집은 무지무지 착해 완벽해 거의 쉴 수도 없어요. 히나님이 미움의 집이라고 짓지 않았으면 누가 봐도 천사의 집이라고 지을 정도로. 예를 들면 한경직 목사. 테레사 수녀.주기철 목사. 성자들...이 모든 의가 그게 하나님은 밉다는 것입니다. 이 집의 특징이 무슨 착한 일을 해도 다 미운 구석입니다. 하나님이 미워서 죽겠대. 미워서 못 살겠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따로 집을 만들어 놓았어요. 이 집에 있는 사람들만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이 미움의 집에 만약에 여기 사랑의 집에서 온 사람이 예수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튕겨 버립니다. 왜 튕기느냐면 뭐가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의롭게 살고자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고 최선을 다한 것들이 머리 속에 다 기억이 나고 거짓이 아니라 실제로 착한 일 했기 때문에 이 모든 죄가 용서 받는다는 것이 불합리하죠. 제가 이야기 한 것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원래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이 형제 지간이라고 했어요. 내용이 같은 저서라 해서. 누가복음 18장 9절 한 절만 누가 읽어 보세요.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여기에 보면 두 사람이 있어요.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이 기도를 하고 갔어요. 바리새인들은 따로 기도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며 이레에 두 번 씩이나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십일조가 몇 퍼센트 입니까? 10%죠. 엄마한테 만 원 받으면 천 원 하기는 쉬워요. 십 만원에서 만 원 하기는 쉬워요. 월급 백만원 받았는데 십만원 하기는 좀 어려지만 괜찮아요. 그런데 재개발 되어서 오 억 받았는데 오천만원 내기에는 차라리 내 팔을 짤라라 차라리 내 목을 짤라라 합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남들이 못하는 그 십일조를 했어요. 아!!돈으로부터 초월한다는 것. 이것은 미친 놈 아니면 할 수 없는 거예요.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거예요. 형제, 의리, 우정, 사랑. 잠깐 끄고 하겠습니다.






대전강의090924c  이름 : 이미아
2009-10-16 18:26:14 조회 : 70 
 
 
왜 성경에서 이렇게 극단적인 두 사람을 대비하느냐면 사람들이 복 받는데 양심이 있어요. 복 받는데 그냥 받지 못해요. 뭔가 착한 일을 했다는 근거가 있어야 자기가 꿇리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는 착하고 싶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복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자본주의에서 복 받고 싶다는 말은 돈을 벌되 남이 비난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돈을 벌고 싶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돈도 벌고 착하기도 하고 남한테 꿇리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이런 사람을 세운 거예요. 옆에 있는 세리는 다 했는 모양이예요. 간통이고 뭐고 얼마나 토색을 했는지 감히 눈을 들지 못하고 하는 말이 가슴을 치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이럴 때 누가 등장했느냐면 바로 예수님이 등장했죠. 아까 예수님이 누구시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못 받으니까 유일하게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하실 분으로 오셨죠. 그 마지막 심판주께서 그 두 사람 사이에 등장하신 거예요. 실제 있었던 이야기니까. 거기서 판결을 내립니다. 누가 천국에 갈 사람인지 누가 지옥에 갈 사람인지. 바리새인은 느긋하죠. 내신 성적 좋았겠다 아이구 저 인간이 천당가면 나는 천당 안 간다 할 정도로 느긋했는데 판정 내시는 당사자께서 판정하시기를 바리새인은 지옥가고 이 세리는 천국간다 라고 했을 때 그 충격. 그 동안 뭐 믿었어요? 그 동안 인생 뭐 살았어요? 인생 헛짓 했습니다.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미쳤다고 착한 일 했습니까?  50년 살고 영원히 지옥가는 무슨 장사가 그런 장사가 어디에 있어요? 50년 괜찮게 살고 다시는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불에 사는 무슨 가계부를 그렇게 써 가지고 인생 망쳐 놨잖아요. 그것이 왜 그러느냐 하나님의 법칙은 인간하고 정반대 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뭘 하느냐 하면 되느냐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 되요. 참 쉬워요. 저 죄인 맞습니다 하면 참 쉬운데 꼭 지옥 갈 사람들은 때려 죽여도 내가 왜 죄인이야 물론 완전하지는 않지만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게 뭐 있는데 꼭 자기 의를 대체하는 표준 사람으로 자기 의로운 것을 추려서 골라서 나쁜 것은 뒤로 빼돌리고 좋은 것만 골라서 남한테 기죽지 않는 방향으로 자기 제 2의 자아상을... 보통 TV드라마를 보면 다 사람들은 전부 다 저 사람이 나다 일체화 시킵니다. 그만큼 자기는 평소에 의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의가 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께서 이 보세요. 어려운데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려 왔는데 어떤 사람이 어이 아저씨 왜? 나 의인거든 할 때 얼마나 밉겠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언대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죄인을 구원하려 왔는데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자꾸 자기를 의인이라고 하니까 이것은 누구를 방해하느냐면 예수님의 하신 일, 하나님의 예언하신 일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 되버립니다. 자기가 뭘 안다고 하나님의 일을 모독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일은 죄를 용서하는 것인데. 그래서 이 사람은 미움의 집에서 미움 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움의 집을 다시 보면 요 미움에서 반드시 이유가 있어요. 왜 미워할 수 밖에 없냐면 하나님의 법은 완벽해요. 완벽한데 인간의 법은 완벽하지 못하고 선과악이 나뉘어져 가지고 맨날 우리 양심 속에서 계속 싸웁니다. 그러면 하나 물어 봅시다. 사람이 선할 때 핑계됩니까? 나쁜일 할 때 핑계됩니까? 꼭 나쁜 짓 할 때만 핑계되지 선한 일 할 때는 핑계를 대지 않아요. 잘되면 지 탓이고 못되면 전부 다 남탓이고 조상탓이라고. 본인 자체가 공평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어떤 애가 만약에 재아가 수학을 90점 맞았으면 이것은 우연히 90점 맞은 것이 아니고 실력대로 90점 맞은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에 치니까 40점이라 이럴 때는 뭐라 합니까? 뭔가 실수 한 거예요. 아니면 내려서 썼다든지. 뭔가 실수했어. 잘된 것은 전부 다 본인 실력이고 못된 것은 전부 다 실수한거고 그렇다면 이것을 학생들만 하지말고 어른들한테 해 봅시다.  어떤 생명보험 회사 영업을 하는데 어떤달은 한 달 오백만원 올렸어요. 실력을 봅니다. 자기 실력. 어떤 달은 이십만원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저주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죄인 같으면 뭐라고 합니까? 이십만원 해도 아이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백만원해도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질의 문제입니다. 질적으로 나는 오백만원 가졌다 알아줘 이십만원 밖에 없다. 우리 관계 끊자 나는 부끄러워서 못만나겠다 이러지 마시고 질적으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십만원이나 오백만원이나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인간은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은 선악이 나뉘어져 가지고 이십만원 받았으니까 내가 교회 가는데 11시 예배인데 11시 20분에 갔다고 20분 늦었다고 내 한 달 수입을 깔수가 있나 아 하지만 나는 이번 금요일에 철야 열심히 해서 이십만원 수입을 다음달에 오백만원으로 끌어 올려서 남들 앞에 내 기도가 얼마나 응답이 잘 되는지 본때를 보이겠다 내가 얼마나 착하고 이 착한 인간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한테 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지 남한테 보이겠다고 자기가 스스로 종교적인 기술, 기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자기가 점점 더 회개를 해 버리면 회개하고 난 그 다음 날 되버리면 자기가 선해집니까? 악해집니까? 선해지죠. 회개해가지고 지금 선해지고 있는데 빚쟁이가 와서 한 판 싸워 버렸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선해지고 있는 나를 다시 악으로 돌릴 맘이 안 들고 빚쟁이를 보낸 것은 다 하나님 탓이고 빚쟁이하고 싸웠던 그에 대한 벌은 저한테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판단을 잘못하신 것입니다. 라고 판단을 하나님께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한테 조금 이익이 되면 전부 다 자기탓이고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하나님이 일 처리를 불합리하게 나한테 홀대해서 잘못해서 이런 벌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이러한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나를 판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입니다. 신자한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신자한테 이런 마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재원이 신자한테 나를 더 착한 사람으로  나쁜 것은 멀리하겠다는 이런 마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1번 있다 2번 없다 문제 간단한데. 있습니다. 성도한테 이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주여 제가 죄인 맞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입니다. 제가 성경 말씀을 같이 보고 들어도 역시 내 인생은 내하기 나름입니다 라고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이게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을 또 다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 알려 주어서 "참 내가 남 욕할 것 없어." "불신자 욕할것 없어." "내가 불신자와 똑같아." 라고 깨닫게 하는 것. 그게 하나님과 여러분 하고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완벽하게 하지 말고 이렇게 못난 인간을 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집 안에서의 특징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