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090924b행4장19절b부활의능력b
대전강의090924b 이름 : 이미아 2009-10-16 18:20:50 조회 : 37
자,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24절에 보면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일심이란 말은 하나의 마음.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요. 그렇게 되어 있죠. 옛날에 저희 할머니가 교회를 안 다녔어요. 절에 다니셨는데 할머니가 절에 다니시면서 꼭 음력으로 2월 28일이 되면 부엌에서 삼신 할머니를 찾았고 삼신 할머니를 찾으면서 조물주란 용어를 쓰셨어요. 학교도 다니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릴 때는 교회를 안 다녔으니까 항상 타인의 욕망이죠. 남한테 들었던대로 조물주 조물주 했는데. 성경에 보니까 사도행전 4장 24절을 보니까 바다와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자를 조물주라 했어요. 그러면 할머니가 절에 다니면서 무엇을 인정했느냐면 조물주를 인정한 거예요. 조물주 밑에 아래 단계가 삼신 할머니가 되는 거예요. 삼신 할머니는 나중에 공부해 보니까 제주도의 설화에 나와요. 제주도에 창조 설화가 있어요. 삼신 할머니라고 해 가지고 아들 낳아주는 할머니 있어요. 그렇다면 조물주라는 뜻이 뭡니까? 모든 것을 제조하신 신이라는 개념이거든요. 그런데 조물주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천국 갑니까? 아니라는 거죠. 그 밑에 25절에 "우리 종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절에 다니는 우리 할머니도 뭐냐하면 다른 말로 조물주 신을 인정했는데 그 숨어 있는 신께서 특정 어떤 분을 보내시죠.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다윗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너도 나도 다 조물주다 그런데 다윗이 등장하면 다윗하고 옆에 있는 이 사람하고 갑자기 뭐가 생겨 버렸습니까? 다윗하고 사울, 우리 자신들하고 할 때 다윗에게 성령이 임했죠. 25절에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했으니까. 성령이 임한 다윗과 성령이 없는 보통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이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안 보입니다. 안 보이니까 조물주라고 하든지 신이라고 하든지 삼신 할머니라고 하든지 여호와라고 하든지 하여튼 지 맘대로 부르라고 해요.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다 인정하니까. 심지어는 중도 엎어지면 아이고 하나님 하는데. 그런 신이 있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그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결국은 그 문제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없다고 치면, 성령이 없다고 치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면 나는 하나님이 만들었어. 너도 하나님이 만들었어. 그러면 우리 모두는 조물주가 만들었어. 그러면 우리는 뭐하면 된다? 교회 갈 필요 없이 그냥 우리 할머니처럼 물 떠놓고 조물주한테 빌던지 삼신할머니한테 빌던지 누군가 나를 만들었다는 것만 인정하면 그 분이 계신다는 그 천국에는 후다닥 죽어서 들어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라에 들어 가는데 자기만 들어가면 좋겠는데 옆에 나쁜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 여기서 뭘 정하느냐면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가고 나같이 착한 사람은 천국간다. 옛날부터 나쁜 사람을 부모한테 불효하는 사람. 부모한테 불효하는 사람은 염라대왕한테 혼쭐 나게 되어 있어요. 창을 하는 김영임씨가 추석때나 어버이 날에 부르는 곡이 회심곡인데 회심곡의 가사를 쭉 읽어 보았거든요. 이 땅에서 부모한테 불효하면 죽어서 혼난다는 이 이야기예요. 부모한테 잘 하면 살아 생전에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죽은 사람이 빽을 써 가지고. 그런데 부모한테 잘 하는 것, 효도의 특징이 뭐냐면 제사입니다. 기일 때 마다 제사 지내는 것.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들과 죽은 부모가 보고 아이구 기특하기도 해라 나를 잊지 않았네 그런 은덕을 곱게 생각해야지 마음씨가 고와야 복을 받는거야 하면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힘을 모아서 산 자들에게 잘 해준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만 효도의 절정이 뭐다? 제사날을 잊지 않는다는 것. 죽은 부모 한테만 제사하면 안 되죠. 부모의 부모가 섭섭해 하니까. 증조만 하면 또 누구 섭섭해 합니까? 고조. 또 고조만 하면 안 되죠. 시댁 쪽만 하면 안 되죠. 친정집도 해야죠. 그래서 조상 숭배라는 것이 조물주 밑에 아랫단계에서 죽은 조상들이 모이는 세상이 있고 죽으면 모두 합류가 되는데 그 쪽에서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복을 받는다 내가 잘 되는 거예요. 그것을 첫째 강의에서 타인의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제사 제도가 한국의 모든 유교와 전통적으로 가정 질서를 유지시켜 주었고 가정 교육을 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한테 효도하는 바른 교육관이 정립이 되도록 보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렇게 한국의 부모 효도 이야기 하면서 뭐가 빠졌죠? 현재 성경하고 다른 점이 있죠. 다윗이 빠졌고 다윗이 성령 받았다는 것이 빠져 버렸죠. 다윗이 성령을 받았으면 다윗 혼자 착하라고 받은 것이 아니고 다윗이 성령을 받아 버리면 다윗이 선지자이기 때문에 예언을 하게 되어 있죠. 다윗이 예언을 하게 되면 그 당시는 모르지만 미지의 어떤 인물이 등장하게 되겠죠. 그 분이 신약 성경에 누구란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보통 사람은 자기가 양심껏 부모한테 효도해서 조물주한테 죽어서 좋은데에 합류합시다 하면 되는데 예수님은 어떠냐 하면 다윗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인물로 최초로 등장했죠. 다윗은 예언을 한 사람이고 그 말씀대로,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예언대로 사신 분이 누구냐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아까 사도행전 4장 12절에 이 세상에 구원 받을 이름을 예수님 말고 주님께서 주신 적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 한 것을 칸으로 나누어 보면 이 쪽에 보면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한다. 한국의 풍토는 뭐다? 조물주 계시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 사람은 죽으면 귀신이 되죠. 귀신들이 모인 곳이 따로 있고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면 조상들이 힘을 합쳐서 모든 하는 일이 잘 되어 가지고 너가 효도 했으니까 복 줄께. 사업 잘 되게 해 줄께. 사업 잘 된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울 것이 있는, 내가 이렇게 잘 살았으니까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전라도에서 장모하고 처형을 죽였어요. 왜 죽였는가? 이유는 간단해요. 나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딴 것은 다 용서해도 자기를 무시하면 용서가 안 됩니다.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이 공부 못하는 것은 괜찮아요. 그런데 학생이 선생 무시하면 뺨싸대기 날라 갑니다. 너 아버지 뭐하시냐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어떤 인간이든 부부싸움 할 때, 그저 아무것도 아닌 문젠데 언제 크게 터지냐면 무시할 때. 하여튼 내가 친정 꼬라지 볼 때 부터 알아 봤다. 남편이 이런 소리 나올 때. 하여튼 시어머니 보면 그 엄마의 그 자식이지 라고 나올 때. 이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사람은 인간 속에 뭐가 들어 있다?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지 내가 무시 당하지 않는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따라 붙어 보자. 거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 해요. 하여튼 절에 가서 빌든지 성당에 가서 빌든지 교회에 가서 빌든지 비는 그 마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꿈속까지 나옵니다. 꿈은 이유를 막론하고 공포입니다. 공포, 두려움 입니다. 좋은 꿈이든지 나쁜 꿈이든지 관계없이 무조건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지를 꿈을 깨보면 알아요. 뭐가 무서우냐 행여 무시당할까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보상하고 카바하고 딴걸로 취향을 바꾸고 복잡해요. 하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나는 살아야 하고 살더라도 남한테 무시 당하지 않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안 되니까 그 억눌림이 꿈 속에서 풀려 나오게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조상을 효도하는 거예요. 결국엔 조상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 챙기겠다는 겁니다. 기일마다 제사 드리면서 산 자나 죽은 자로부터 효자라는 소리를 들어서 효자에게는 복이 온다는 그러한 기존의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내가 잘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여기엔 뭐가 필요 없냐면 이 점에 대해서는 너나 네나 다같이 아는 것인데 구원자가 뭐가 필요해. 지가 양심껏 살면 되지 아무리 하나님 무서워도 양심껏 사는 자를 지옥 보내는 하나님은 없어. 다 양심껏 살면 결국엔 하나님께서 다 천국에 가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양심에 가계부가 생기죠. 가계부가 뭐냐면 이 쪽은 착한 것. 이 쪽은 나쁜 짓. 해 가지고 이 쪽이 51% 되면 이 쪽이 49% 되도 51-49 하면 몇 퍼센트 남습니까? 2%남으면 극락의 맨 윗자락에 합격할 거 아닙니까? 이런 선악과를 따먹은 계산이 나오죠. 문제는 이렇게 되었으면 정상인데 갑자기 예수님이 등장해 가지고 하는 말이 진짜 하나님이 보낸 자는 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착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착한 일 해도 지옥가고 나쁜 일 해도 지옥가는데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이 인정하는 분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면 그 증거를 대라. 예수님만이 죽음에서 다시 말하면 죄에서 부활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 난 분은 부처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너희들이 살겠다. 새로운 하나님의 원칙이 여기에 삽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는 뭐가 필요가 없느냐면 "예수님에게 어떻게 해 드릴까요?" 가 일체 필요가 없습니다. 착한 일 해 드릴까요? 그러면 나는 나쁜 짓 해 드릴까요? 이것이 일체 주님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운명을 대신 다 치루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남편이라고 하고 거기에 딸려 온 혼인한 사람을 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주고 아내는 뭘 해야 합니까? 설거지 하고 바람 피우지도 말고 나이트크럽 가지 말고 맨날 안에서 성경만 보고 이렇게 할까요? 아내는 뭘 하는게 아니고요 그 주신 남편의 사랑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남편이라는 것은 만드는 것이다 했어요. 남편이라는 것은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남편이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내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관계. 그 관계는 우리가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당연히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고 당연히 우리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남편 남편 부른다고 해서 남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주는 사랑. 사랑인데 우리의 어떤 행위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오직 주시는 사랑으로만 관계가 형성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방금 이 칸막이 내에서 이 쪽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이러한 생각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못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쪽에서는 누가 주인공이예요? 내가 주인공인데 이 쪽에서는 누가 주인공 입니까? 예수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건데 자기 챙기고 예수 믿을려고 하니까 자기가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어 버리면 결국 산 자가 두 분 되잖아요. 산 자가 두 분 되어 버리니까 둘 다 맨날 싸우잖아요. 한 쪽은 죽은 자가 되어야 할 건데. 우리를 죽은 자로 보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인정할 때. 그게 바로 주님이 주신 사랑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뭐냐면은 예언이죠.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신약 성경의 특징을 보면 예언이 쫙 깔려 있어요. "예언하신대로" 아니면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할 때 뭐라고 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니까 제자들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한 것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자기들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뭐든지 하나님의 예언대로 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뭘 하든지 어제 수요 설교에서 말씀 했는데 노상방뇨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따지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방종을 이야기 했는데 방종을 사람이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방종을 해봤자 나보다 더 심한 방종을 한 사람 앞에서는 방종이 아니고 착한 짓이예요. 사람이 아무리 방종해도 현재 있는 수준에 맞춰서 방종하지 그 진짜 방종까지는 못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이 사람도 더 방종한 사람에게는 안 되죠. 사람이라는 것은 본인이 방종을 하면 본인이 힘들어서 못하게 되어 있어요. 착한 일도 억지로 해 보세요. 그것은 착한 일이 아니고 화가 날 지경입니다. 아까 어린애가 사회에서 옷을 요구하니까 애가 옷을 입긴 입는데 집에 가서 옷을 벗어 버리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냥 걸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오너라 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나오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또 그러면 내가 나체주의가 될까요? 나체주의도 자기의 인위적이예요. 그냥 있는 그대로, 편한대로 나오면 되는데 우리는 뭘 꼭 걸쳐요.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성경을 열 두번 봤습니다. 저는 헌금을 많이 했어요. 제가 헌금 해서 교육관을 지었습니다. 제가 전도를 제가 세 명이나 했어요. 목사님 넥타이를 사줬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죄인을 부르러 왔으면 환자가 의사앞에 숨길 필요가 없어요. 병든 것을 그냥 노출하면 되는데 자꾸 병든 것을 건강한 체 하고 있으면 의사로서 힘들죠. 그렇잖아요.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병이 오지만. 그냥 아프면 아픈대로 오면 될텐데 자기 체면이라는 외투를 둘러 버려요. 두르지 않아도 다 아시는데. 주께서는 우리를 죽은 자로 보고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오셨는데 그건 모르고 교회 나오면서 자꾸 폼 잡고 나오고 의인인척 하고 나오니까 더 힘들어지죠. 아까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언한대로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한 겁니다. 그 다음에 28절 봅시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룰려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예정하심. 아마 이것 설명하면 강의 끝날지 싶습니다. 예정하심이라. 예정하심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을 점선으로 하면 아직 여러분과 제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만 하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착하든지 이 사람이 악하다든지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죠. 안 태어났으니까. 태어나야 무슨 짓을 하지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죠.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사랑의 작품과 미움의 작품을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 만들어 놓고 사랑을 집어 넣고 어떤 사람을 만들어서 미움을 집어 넣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미워하심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들어 있어요. 그러면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어떤 것이냐 하면 이 사람이 죄를 지어도 용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파트 있으면 여기 몇 동 입니까? 1004동 앞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집이라고 붙여 놨으면 이종분 집사님 집에서 어떤 짓을 해도 바깥에 이미 사랑의 집이죠. 다른 말로 하면 피죠. 피가 발려 있으면 이 집에서 세 식구가 어떻게 하든지 바깥에 나올 때는 전부 다 용서로 바깥에 나옵니다. 참 희한하죠. 너무 희한해서 꼭 거짓말 같아요. 진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안에서 인간들이 무슨 인간인지 관계없이 쌍꺼풀 했냐 안 했냐 관계없이 바깥에 있는 문에 어린 양의 피를 보고 하나님의 심판주가 그냥 넘어가 버려요. 이 집에는 심판 안 해. 나 안할거야. 이 집은 그냥 용서할거야. 하고 그냥 넘어가 버린단 말입니다. 어때요? 불합리 하지 않습니까? 이게 불합리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 답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구원의 방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공식 다시 한 번 봅시다. 사랑을 받은 집의 특징은, 사랑의 작품의 특징은 죄가 용서 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 했기 때문에 용서 된 것이 아니고 회개와 관계없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사랑 때문에 사랑 자체가 된 거예요. 그러면 말을 다시 합시다. 인간 자체를 뭐로 보면 집으로 보고 이 집을 사랑의 집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집에서 세 식구가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집이 사람을 집어 넣었다고 보자는 말입니다. 세 식구가 의논해서 재원아 우리 무슨 집 할래? 하고 물은 것이 아니고 아예 집 자체가 하나님의 용서하는 집 속에 세상에 들어 온 것입니다. 이것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들어왔다 이 말이죠. 인간의 행동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교회 가고 헌금 하고 기도하고 교도소 몇 번 들락날락하고 아무 관계 없어요. 어쨌든 모든 죄가 용서로 달라지는 아주 희한한 집 구석에 들어 온 거예요. 두 번째 이 집은, 미움의 집의 특징은 무엇이냐면 어떤 의로운 것도 다 미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집에선. 이 집은 무지무지 착해 완벽해 거의 쉴 수도 없어요. 히나님이 미움의 집이라고 짓지 않았으면 누가 봐도 천사의 집이라고 지을 정도로. 예를 들면 한경직 목사. 테레사 수녀.주기철 목사. 성자들...이 모든 의가 그게 하나님은 밉다는 것입니다. 이 집의 특징이 무슨 착한 일을 해도 다 미운 구석입니다. 하나님이 미워서 죽겠대. 미워서 못 살겠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따로 집을 만들어 놓았어요. 이 집에 있는 사람들만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이 미움의 집에 만약에 여기 사랑의 집에서 온 사람이 예수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튕겨 버립니다. 왜 튕기느냐면 뭐가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의롭게 살고자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고 최선을 다한 것들이 머리 속에 다 기억이 나고 거짓이 아니라 실제로 착한 일 했기 때문에 이 모든 죄가 용서 받는다는 것이 불합리하죠. 제가 이야기 한 것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원래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이 형제 지간이라고 했어요. 내용이 같은 저서라 해서. 누가복음 18장 9절 한 절만 누가 읽어 보세요.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여기에 보면 두 사람이 있어요.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이 기도를 하고 갔어요. 바리새인들은 따로 기도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며 이레에 두 번 씩이나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십일조가 몇 퍼센트 입니까? 10%죠. 엄마한테 만 원 받으면 천 원 하기는 쉬워요. 십 만원에서 만 원 하기는 쉬워요. 월급 백만원 받았는데 십만원 하기는 좀 어려지만 괜찮아요. 그런데 재개발 되어서 오 억 받았는데 오천만원 내기에는 차라리 내 팔을 짤라라 차라리 내 목을 짤라라 합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남들이 못하는 그 십일조를 했어요. 아!!돈으로부터 초월한다는 것. 이것은 미친 놈 아니면 할 수 없는 거예요.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거예요. 형제, 의리, 우정, 사랑. 잠깐 끄고 하겠습니다.
대전강의090924c 이름 : 이미아 2009-10-16 18:26:14 조회 : 70 왜 성경에서 이렇게 극단적인 두 사람을 대비하느냐면 사람들이 복 받는데 양심이 있어요. 복 받는데 그냥 받지 못해요. 뭔가 착한 일을 했다는 근거가 있어야 자기가 꿇리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는 착하고 싶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복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자본주의에서 복 받고 싶다는 말은 돈을 벌되 남이 비난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돈을 벌고 싶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돈도 벌고 착하기도 하고 남한테 꿇리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이런 사람을 세운 거예요. 옆에 있는 세리는 다 했는 모양이예요. 간통이고 뭐고 얼마나 토색을 했는지 감히 눈을 들지 못하고 하는 말이 가슴을 치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이럴 때 누가 등장했느냐면 바로 예수님이 등장했죠. 아까 예수님이 누구시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못 받으니까 유일하게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하실 분으로 오셨죠. 그 마지막 심판주께서 그 두 사람 사이에 등장하신 거예요. 실제 있었던 이야기니까. 거기서 판결을 내립니다. 누가 천국에 갈 사람인지 누가 지옥에 갈 사람인지. 바리새인은 느긋하죠. 내신 성적 좋았겠다 아이구 저 인간이 천당가면 나는 천당 안 간다 할 정도로 느긋했는데 판정 내시는 당사자께서 판정하시기를 바리새인은 지옥가고 이 세리는 천국간다 라고 했을 때 그 충격. 그 동안 뭐 믿었어요? 그 동안 인생 뭐 살았어요? 인생 헛짓 했습니다.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미쳤다고 착한 일 했습니까? 50년 살고 영원히 지옥가는 무슨 장사가 그런 장사가 어디에 있어요? 50년 괜찮게 살고 다시는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불에 사는 무슨 가계부를 그렇게 써 가지고 인생 망쳐 놨잖아요. 그것이 왜 그러느냐 하나님의 법칙은 인간하고 정반대 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뭘 하느냐 하면 되느냐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 되요. 참 쉬워요. 저 죄인 맞습니다 하면 참 쉬운데 꼭 지옥 갈 사람들은 때려 죽여도 내가 왜 죄인이야 물론 완전하지는 않지만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게 뭐 있는데 꼭 자기 의를 대체하는 표준 사람으로 자기 의로운 것을 추려서 골라서 나쁜 것은 뒤로 빼돌리고 좋은 것만 골라서 남한테 기죽지 않는 방향으로 자기 제 2의 자아상을... 보통 TV드라마를 보면 다 사람들은 전부 다 저 사람이 나다 일체화 시킵니다. 그만큼 자기는 평소에 의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의가 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께서 이 보세요. 어려운데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려 왔는데 어떤 사람이 어이 아저씨 왜? 나 의인거든 할 때 얼마나 밉겠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언대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죄인을 구원하려 왔는데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자꾸 자기를 의인이라고 하니까 이것은 누구를 방해하느냐면 예수님의 하신 일, 하나님의 예언하신 일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 되버립니다. 자기가 뭘 안다고 하나님의 일을 모독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일은 죄를 용서하는 것인데. 그래서 이 사람은 미움의 집에서 미움 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움의 집을 다시 보면 요 미움에서 반드시 이유가 있어요. 왜 미워할 수 밖에 없냐면 하나님의 법은 완벽해요. 완벽한데 인간의 법은 완벽하지 못하고 선과악이 나뉘어져 가지고 맨날 우리 양심 속에서 계속 싸웁니다. 그러면 하나 물어 봅시다. 사람이 선할 때 핑계됩니까? 나쁜일 할 때 핑계됩니까? 꼭 나쁜 짓 할 때만 핑계되지 선한 일 할 때는 핑계를 대지 않아요. 잘되면 지 탓이고 못되면 전부 다 남탓이고 조상탓이라고. 본인 자체가 공평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어떤 애가 만약에 재아가 수학을 90점 맞았으면 이것은 우연히 90점 맞은 것이 아니고 실력대로 90점 맞은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에 치니까 40점이라 이럴 때는 뭐라 합니까? 뭔가 실수 한 거예요. 아니면 내려서 썼다든지. 뭔가 실수했어. 잘된 것은 전부 다 본인 실력이고 못된 것은 전부 다 실수한거고 그렇다면 이것을 학생들만 하지말고 어른들한테 해 봅시다. 어떤 생명보험 회사 영업을 하는데 어떤달은 한 달 오백만원 올렸어요. 실력을 봅니다. 자기 실력. 어떤 달은 이십만원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저주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죄인 같으면 뭐라고 합니까? 이십만원 해도 아이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백만원해도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질의 문제입니다. 질적으로 나는 오백만원 가졌다 알아줘 이십만원 밖에 없다. 우리 관계 끊자 나는 부끄러워서 못만나겠다 이러지 마시고 질적으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십만원이나 오백만원이나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인간은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은 선악이 나뉘어져 가지고 이십만원 받았으니까 내가 교회 가는데 11시 예배인데 11시 20분에 갔다고 20분 늦었다고 내 한 달 수입을 깔수가 있나 아 하지만 나는 이번 금요일에 철야 열심히 해서 이십만원 수입을 다음달에 오백만원으로 끌어 올려서 남들 앞에 내 기도가 얼마나 응답이 잘 되는지 본때를 보이겠다 내가 얼마나 착하고 이 착한 인간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한테 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지 남한테 보이겠다고 자기가 스스로 종교적인 기술, 기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자기가 점점 더 회개를 해 버리면 회개하고 난 그 다음 날 되버리면 자기가 선해집니까? 악해집니까? 선해지죠. 회개해가지고 지금 선해지고 있는데 빚쟁이가 와서 한 판 싸워 버렸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선해지고 있는 나를 다시 악으로 돌릴 맘이 안 들고 빚쟁이를 보낸 것은 다 하나님 탓이고 빚쟁이하고 싸웠던 그에 대한 벌은 저한테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판단을 잘못하신 것입니다. 라고 판단을 하나님께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한테 조금 이익이 되면 전부 다 자기탓이고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하나님이 일 처리를 불합리하게 나한테 홀대해서 잘못해서 이런 벌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이러한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나를 판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입니다. 신자한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신자한테 이런 마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재원이 신자한테 나를 더 착한 사람으로 나쁜 것은 멀리하겠다는 이런 마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1번 있다 2번 없다 문제 간단한데. 있습니다. 성도한테 이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주여 제가 죄인 맞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입니다. 제가 성경 말씀을 같이 보고 들어도 역시 내 인생은 내하기 나름입니다 라고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이게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을 또 다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 알려 주어서 "참 내가 남 욕할 것 없어." "불신자 욕할것 없어." "내가 불신자와 똑같아." 라고 깨닫게 하는 것. 그게 하나님과 여러분 하고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완벽하게 하지 말고 이렇게 못난 인간을 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집 안에서의 특징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