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4강-집 모퉁이의 머릿돌090827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3. 15. 07:22


090827 행4:10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의 
_______________________집 모퉁이의 머릿돌

 관리자  (IP:124.♡.85.46) 09-08-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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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090827a행4장10절a버린돌로서집모퉁이의머릿돌a 

대전강의090827a  이름 : 이미아 
2009-10-16 18:00:49 조회 : 43     
  
  
자,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10절을 봅시다. 10절에서 12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개념이 기존 한국이 말하는 개인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이건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이 없다고 하니까 "나 살았구나!" 갑자기 개인 구원 위주로 확 바뀌어 버렸습니다. "나 살았어!!"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옆집의 아저씨는 이젠 지옥간다. 항상 개인 구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없어지느냐면 구약의 개념이 있잖아요. 구약의 성전 개념, 구약의 거룩 개념은 홀라당 아무 자기하고 상관이 없고 나는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란 이름 믿어서 내가 달랑 구원 된 셈이 되버려요. 그러면 구약에 내려오는 그 모든 천계와 단계 모든 발전은 무용지물이 되버려요. 쓸데 없는 짓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기독교도 전체 마찬가지 입니다. 기독교나 한국 교회가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 이름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라는 것을 개인 구원적으로 할 것 같으면 창세기부터 사도행전 앞 까지는 다 소용 없습니다. 안봐도 되고 없어져도 괜찮고 그것은 무효며 과거처럼, 과거라는 사실 자체도 날라가 버리니까 이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다른 이름 앞에 뭐라 되어 있느냐 하면 모퉁이의 머릿돌.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개념이 없이 모퉁이의 머릿돌 위한 하나님의 이름인데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왜 집어 넣었지" "음 나하고 상관 없어" "음 그건 나는 몰라도 돼" 그건 잘라 버리고 그 뒤에 있는 것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이 없다. "나 예수 이름 믿습니다." 라는 자기 죽어서 천당가는 것 그것만 고수하고 앞에 모퉁이 돌의 의미를 잘라 버린 채 뒤에 것만 달랑 삼켜 버릴 때 그것은 오해도 보통 오해된게 아닙니다. 이게 바로 오해되니까 그 뒤에 나오는 사도행전 16장 31절도 오해되는 거예요. 버스 정류소에 보면 교회마다 천막에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그 다음에 뭘 얻을 것이라 구원을 얻을 것이라 글쎄 구원 문제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교나 일반 종교에서 개인 구원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공간 문제입니다. 공간 문제이고 이 공간을 수요일 날 뭐라고 장로님 뭐라고 표현 했습니까? 국자죠. 국 뜨는 국자. 개미가 큽니까? 국자가 큽니까? 재아야 개미가 크니? 국자가 크니? 국자가 크지. 그러면 국자에 뭐가 담겨? 개미가 담기지. 그게 구원이예요. 예수 있고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 믿는 어떤 카드를 내가 쥐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뭔가 담겨야 됩니다. 담기게 되면 뭐가 생기냐면 두 가지 개념이 발생되요. 안이 있고 밖이 있고 국자 안이 있고 반대로 국자 밖이죠. 국자 안에 있는 개미하고 국자 밖에 있는 개미의 운명은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처럼 구원 밖에 있고 국자 안에 있는 개미는 구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예수 믿는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푹 뜨이는 것입니다. 푹 뜨일 때 사람들은 주께서 자기만 뜨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고 나를 구원시킨 요건들이 갖추어진 환경과 배경과 더불어서 함께 푹 뜨는 거예요. 나무 옮겨 심을 때 어떻게 합니까? 흙 탁탁 다 털어내고 나무만 덜렁 옮겨 심으면 나무 죽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새끼줄 가지고 뭘 하죠? 뿌리 부분을 동그랗게 해가지고 같이 살았던 흙과 더불어서 새끼 묶어서 5톤 트럭에 실어서 한 이백 만 원 받고 심지 않습니까? 그처럼 함께 나를 구원되게 하는 요건을 가지고 뭐냐? 그게 바로 성전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원이 아니고 성전. 성전으로서의 구원되면 성전이라는 국자고 나는 성전 안에 있음으로서 성전 안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시편 84편에 나는 세상의 천 날보다도 주의 전에 한 날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마치 뭐와 같은 신세다? 성전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와 제비 둘 보금자리. 제비는 성전이 있음으로 덩달아 삽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빌붙어서 그것을 생물에서 뭐라고 합니까? 기생이죠.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기생관계. 공생관계처럼 기붙어서 받는 국자 안의 개미처럼. 하나님이 성전 만드는데 거기에 들러리로 참여된 이유 때문에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은 나를 위한 주의 이름입니까? 성전을 이루기 위한 주의 이름입니까? 당연히 성전을 위한 주의 이름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주의 이름이고 우리는 거기에 국 뜰 때 같이 뜨인 거예요. 성전 만드는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다? 나에게 안 나왔습니다 해서 나의 이름은 소용 없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필요 없고 누구 이름이다? 주의 이름 아닙니까? 다른 이름 속에 누가 포함되었습니까? 바로 나도 포함되죠. 내 이름으로 내 결정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주일 날 했습니까? 로빈슨 크루소에서 자기 하인 이름이 프라이데이라고 했죠. 원주민 이름이 없어요. 그 하인은 이름이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주인이 로빈슨 크루소가 "어이 이제부터 프라이데이, 금요일이라고 해라." "왜요?" "내가 너를 만날 때 금요일에 만났으니까." 그러면 그 아이를 프라이데이라고 불러도 원주민 그 아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지가 지 맘대로 불러서.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는 그 하인을 부를 때마다 무슨 시간관을 고수하느냐면은 "아 나는 금요일 불렀어."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금요일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명이고 호출입니다. 호명이 되면 호명된 주체자 속에 호명 받은 사람의 모든 자기 주체는 박탈을 당하면서 어디에 흡수되느냐 하면 호명한 그 노선에 따라서 갈리게 되버려요. 그러면 호명하신 분이 만들어낸 이미지, 준비 되어진 그 세계가 있죠. 그 세계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 세계속에 호명 당하면서 호출 당하면서 거기에 존재하게 되면 그 사람의 개인적 존재 의미는 의미가 없고 이것이 그물망인데 그물망 속에 하나의 포인트로 자리잡겠죠. 와 보니까 자기는 d라는 지점에 호명되서 왔는데 c라는 지점에 어떤 친구가 와 있더라는 말입니다. "야 너 교회 나왔네" "넌 고등학교 때 절에 안갔나?" "절에 갔었지" "니 엄마 보살이고" "그래 너는 술 먹었잖아?" "술 먹고 개판 쳤잖아?" "그래"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 교회에서 만났느냐 할 때 서로의 자기 자랑하면 안되겠죠? 내 실력이 좋아서 기도를 해서 하면 안되죠.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물 구조. 이 그물 구조의 주체를 누가 만들었느냐 프라이데이라.  프라이데이라고 호명했던, 무에서 없는데서, 없다는 말은 뭐도 없다? 이름도 없다는 말이예요. 우리 학생 이해 되겠나?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난 뒤에 이름이 있는 거예요. 아 고등학생에게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한다 하여튼 알아서 하세요. 그 때 이름이 없을 때는 누구만 존재했습니까? 주님만 존재했죠.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이름이 먼저 존재하신 분이 호명할 때마다 이름이 붙여지면서 너는 아담이야 아담은 자기 나름대로의 운명은 없어요.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아담으로서 살아갈 팔자와 운명을 그냥 배급받은 거예요. 하나의 그물 구조에 배급받은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그물 구조가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그물 구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뱀의 후손의 그물 구조도 있어 가지고 둘이 싸움을 해야  전쟁을 벌려야 할 그 그물 구조에 가담이 된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방주 만든다는 말은 방주를 만들어도 안 들어갈 사람들의 새로운 질서가 있죠. 노아 여덟 식구는방주에 들어갈 질서가 있죠. 언약은 구분이고 쪼개는 것이고 차별이고 양과 염소 하듯이.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서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방주에 넣기 위해서 노아를 미리 앞서서 노아 만들고 방주 만들고 집어 넣고 그 다음에 집어 넣은 가운데 또 갈라지고 하는 모든 그 세분한 갈라짐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다 주의 이름에 의해서 이미 장착된 그 안에 주의 이름이 갖고 있는 풍성한 내용이 그게 우리라는 도구를 통해서 계시화 된 것입니다. 이게 완전히 현실화 될 수 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점을 쉽게 하기 위해서... 안경이 십만원 짜리인데 육만원 주었습니다. 십 만 원 짜리인데 많이 깎아서. 학개 봅시다. 학개 2장. 지금은 어렵지만은 강의 하면서 되풀이 합니다. 이게 기초기 때문에 지금은 이해 안되지만 되풀이 하면서 익숙해지도록 하겠습니다. 학개 2장 10-12절에 보면 

10절. 다리오 왕 이 년 구월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절.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절.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갑자기 이 질문을 왜 해야되는지. 다시 이야기 합니다. 사람의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제물을 쌌는데 만약에 옷자락이 거룩한 제물 말고 다른 일상적인 물건과 음식에 닿았다면 그 옷자락이 거룩하겠느냐 거룩하지 안하겠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등학생도 아는거죠. 거룩한 물건을 쌌더니만 그 옷자락이 거룩한 물건을 감쌌다는 그것 때문에 그 옷자락은 거룩한 옷자락이 되었죠. 그런데 그 옷자락이 거룩한 물건을 싼 것이 아니고 어떻게 실수든 오류든간에 의도든간에 그것이 만약 일상적인 거룩하지 않은 물건을 쌌을 때 과연 그 옷자락이 거룩한 옷자락이 되겠느냐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던 율법의 핵심이 뭐냐 율법의 본질이 뭐냐를 이 이스라엘이 망해봐야 알아요. 무슨 말이냐면 사람은 율법을 어기면 자기가 잘못해서 율법을 어겼다 하잖아요. 제가 결론 내립니다. 하도 어렵기 때문에 잘못해서 사람이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환경이 바뀌어서 거룩이 비거룩이 된 것이예요. 옷자락이 우리가 옷자락이 아니라니까요. 드롭포스의 반짝반짝 반짝이가 포장을 한다면 아까 떡을 우리가 샀잖아요. 떡은 우리고 떡의 포장지가 이거라면 포장지가 누구 소유냐면 율법에 맞는 포장지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였습니까? 떡이었습니다. 떡인데 포장지가 만약에 더러운데 묻어 있다면 그 더러운 포장지에 우리가 있다면 거룩합니까? 거룩 안합니까? 이걸 묻는 거예요. 안하죠. 그럼 율법은 우리가 지키고 안 지키고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 나름대로의 거룩만 유지 된다면 우리는 그 포장지에 싸여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뭐가 되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처음부터 율법 줄 때 사람들이 오해 했어요. "주여 지키겠나이다." "지켜서 내가 구원 받겠나이다."  자꾸 이 옷자락을 자기가 알아서 취득할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망해 놓고 보니까 내가 옷자락을 거룩하게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탁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옷자락이 거룩하면 그 안에 뭐가 되었든지 간에 거룩이 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처음 구원이 됐었어요. 나중에 옷자락 자체가 더러워지니까 이 사람들은 "아이구 더러우면 할 수 없지" "그럼 우리 손으로 옷자락 만들지" 글쎄 너희들 손으로 안된다는 것이라니까요. 옷자락이. 율법의 완성이 우리들 손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하는 것처럼. "뭐 안되지만 인간으로서는 연약하지만 그저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지켜 볼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그것은 안일한 개념, 안과 밖의 개념, 국자 개념 그 개념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우리를 담아내는 국자같은 기능을 하는데 우리는 그동안 부자 청년처럼 "제가 어릴 때 부터 십계명을 지켰나이다." 자기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프라이데이가 아니고. 로빈슨 크루소가 원주민하고 함께 있을 때는 그 원주민 이름은 계속해서 프라이데이, 금요일이죠. 그런데 만약에 로빈슨 크루소가 그 섬을 떠나면 원주민 이름은 뭡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가면서 뭐냐 하면은 "주께서 나보고 프라이데이라고 해줬어." 자기가 주께서 주신 호명을 자기가 쥐고 있더란 말이죠. "나 내가 예수 믿었어." 자기가 예수 믿은 것을 자기가 쥐고 있으면서 그것으로 구원 받을려고 하더란 말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결국은 누구 이름입니까? 자기 결심이었고 자기 오기였고 자기 다짐이었고 이것은 근원적으로 성경 통째로 다 오해한 것입니다. 창세기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다 오해한 것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대전 강의에서 이걸 다 뜯어 고칠수는 없고 찬찬히 풀어 봅시다. 기초부터 해가지고 보통 문제점이 아니예요.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거예요. 왜 그럴까? 바로 성전 개념이 빠져 버려서 그렇습니다. 성전 안에서 성전을 국자로 보지 않고 자기가 성전에 나와서 뭐 지키면 구원 받고 성전 내버리고. 우리는 모퉁이 돌에 합류되어 있는데 우리는 자기만 구원 받으면 "뭐라고?" 모퉁이 돌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내가 구원 받았는데 모퉁이 돌이 왜 필요한데 내가 지금 예수 믿고 예수 믿으라매 예수 믿습니다. 모퉁이 돌이 왜 필요한데? 다시 말해서 안과 밖이 성립이 안 돼요.분명히 예수 믿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데 분명히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너는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고 예수 안에서 구원되었다고 반드시 액센트가 예수 안에 있는데 우리는 관심사가 자기 죽어서 천당가는 것만 급급하다 보니까 뭐가 빠졌느냐면 예수 안에서가 왜 필요하지?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구원 받으면 되지 내 행함으로 구원 받으면 되지 예수 안이 왜 필요하지?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목사가 "아이구 예수님의 행위로 당신이 구원 받습니다." 하면, "글쎄요 동의합니다." "내가 다시 해보께." "내가 해보께 맞는가 보세요." "예수 안에서 내가 예수 믿어서 난 구원 받습니다."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그 사람은 "어쩌라고 내보고 시키는대로 했잖아. 시키는대로." 목사님이 답답해서 "글쎄 자기 이름을 부인하라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참 귀찮아 죽겠네 그럼 다시 할께 예수 안에서 나를 부인하고 예수 믿었습니다."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어쩌라고 시키는대로 다했는데 어쩌라고." 이 문제가 바로 여전히 자기가 어떤 그물에 걸린 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그물은 누가 짠다? 우리가 짜는 것이 아니고 고마운 것은 우리가 안 짜도 이미 대전 바닥에 다 짜여있고 대구 바닥에 다 짜여 있고 모든 전 우주에 지금부터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 그물 구조가 다 짜여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이미 그물이 다 짜여져 있어요. 짜여져 있는데 이제 배치만 남아 있죠. 예를 들어서 어떤 아파트 그물 구조에 이웃집 아파트 여기가 몇 동이죠? 104동이죠. 105동에 이사를 왔어요. 105동에는 어떤 애가 태어나서 105동에 채울지 모릅니다. 이 그물 구조는 이미 어떤 때는 구멍이 나있고 어떤 때는 채워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미 구조는 우리가 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 믿고 열심 낸다고 기도한다고 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짜여져 있는 구조에 주께서 야곱을 창세 전에 예정하사 야곱을 태어나게 하사 여기에다 집어 넣고 그 다음에 다른 동에 가면, 지옥가는 동에 가면 그물 구조가 짜여 있어요. 그러면 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미움받기로 작정된 구조거든요. 에서는 여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너희들이 야곱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것은 야곱의 행함도 아니요 에서가 여기 지옥가게 된것도 에서의 악한 행함이 아니요. 이미 모든 것이 말씀에 응하려 함이니라.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말씀이 응하도록 그렇게 짜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알 때 진짜 성령받은 사람은 뭘 압니까? 이 전체를 모퉁이 돌이 된 것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의하여 이것이 하나의 성전이 되니까 "나는 성전에 가담했을 뿐입니다" 라는 말을 다른 말로 풀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주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가담시켰다는 것을 외부로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우리 대전 강의의 주제가 되는 사도행전이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멍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돌아다니면서 전도해보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것이 들어오죠. 그렇다면 에서 쪽에서 보면 가능성이죠. 가능성이 증거되는 쪽이라면 여기에 야곱쪽, 사도 바울 쪽에서 보면  불가능성이죠. 철저하게 처음부터 불가능성이죠.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불가능성이죠. 제가 옛날에 했던 게임한 것에 이런것이 있습니다. 통에 장기판 핀 같은 것을 동그란데 구멍이 뚫려가지고 타넘기도 하고 빈칸에 넣는 것을 아십니까?  연세 되신 분들 알고 요새도 그런 게임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구멍을 다 뚫어가지고 누가 먼저 빨리 차지하느냐 그런 게임이 있어요. 구멍이 뚫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구멍에 먼저 선점하고 꼽으면 되는 거예요. 이미 구조가 창세기 3장에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 모퉁이 돌은 누구였다? 누가 차지했다? 예수님이 먼저 차지한 것입니다. 그걸 지금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일단 들은 이야기지만 모른다고 치고. 한 번 들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까. 이걸 쉽게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영적 세계라는 것이, 영적 세계라는 특징은 말씀의 완성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 바깥은 육적 세계죠. 그러면 영적 세계에 이미 들어 온 사람의 특징은 뭐냐하면 여기는 말씀이 완성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완성되자 완성되게 하자가 아니고 이 세계는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예수님의 행위로 이미 완성된 말씀 세계에 들어온 거예요. 이 세계에 들어온 사람은 뭘 느끼느냐면 뭘 확인하느냐면은 "내가 안 해도 일 다해 놓았네." "내가 십일조 이런 것 안 해도."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구원 받은 모든 장치는 이미 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기서 뭐가 오느냐면 보증금이 주어지죠. 이미 했음을 이야기 해주는 보증금.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구원 받은 조건은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완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주어지는 현상이 뭐냐면은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세례는요.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을 경우에만 성령세례가 아무 댓가 없이 죄인들에게 주어진다고 요엘에 예언되어 있거든요. 요엘이라는 그 말씀이 과연 완성되었는지 완성되지 않았는지 오순절 날 확인되었습니다. 오순절날 시험도 안 쳤는데 뭐 영수국 공부도 안했는데 젊은이나 늙은이나 관계없이 뭐가 옵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한결같이 정답을 이야기 해요.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정답을 이야기 해요. 요엘서에 뭐라고 되어있느냐면 성령이 오게 되면 반드시 너희 입에서 기이한 고백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뭐냐면은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됩니다." 라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거든 그게 요엘서의 완성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복 받은 줄 알아라 이것들아!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왔다는 것은 프라이데입니다. 내가 스스로 내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의 이름이 와 버리면 우리 이름은 삭제되버리고 주의 이름이 내 이름을 대신하죠. 대신. 참 대신하면 대구신학교가 생각이나서 뉘앙스가 안 좋은데..대구신학교 말고. 대신하게 되면 우리는 주님 없이는 존재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그것을 학개서는 성전 없이는, 모퉁이 돌 없이는 성전에 포함된 사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성전에 포함된 사람은 도대체 내 거룩이 어디서 왔지 라고 살펴보니까 모퉁이 돌에서 온 거예요. 그렇니까 하는 말이 주의 이름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다?  모퉁이 돌 위에 위치해 있고 모퉁이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령의 역사가 모퉁이 돌 위에 있는 모든 돌 위에 한결같이 같이 전부 다 시멘트로 싸발려 버리죠. 벽돌하고 벽돌위에 외장 공사하죠. 미장이 한 십만개 쯤 하잖아요. 벽돌이 안 보이게 포장을 해버리죠. 포장이 뭐냐 주의 이름이라는 말이죠. 여기 참 흉칙한 예까지 꼭 들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허벅지를 칼로 찌르면 피는 피부 안에 있죠. 바깥에는 피가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칼 가지고 짤라 버리면 안 쪽에 있는 피가 바깥에 나와서 바깥의 표면을 발라버리죠. 그러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행함이 있고 우리도 지금 행하고 있고 뭐가 있는데 항상 뭐가 표면에 발립니까? 주의 이름으로 내가 먹기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자기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봉사 하기도 하리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베드로전서4장에서 나오죠. 너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라 멘트를 날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멘트를 날려서 위신을 세우지 말고 실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필요하냐면은 뭔가 짜르는 것, 피를 내는 것이 필요하죠. 내 이름을 죽여야 내 피부에 발린 내 허벅지에 발린 모든 피 안에 뭐가 있느냐면 "너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너의 행위는 죄고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행위다." 라는 것이 이게 두께를 가지고 표면에 발린다는 것입니다. 쭉 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냐하면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으로 영광된다 이렇게 되거든요. 말씀의 완성 단계에서 이런 식으로 고백을 하는데 여기서 여러분들 다 아는 이야기인데 보통 사람은 어려운데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 아까 이름이란 존재라고 했는데 여기서 약간 어려운거 합시다. 주의 이름이 존재가 아니고 주의 이름이 존재로서 하는 기능이 있어요. 아.. 이거 토요일 날  해야 하는건데 미리 다 하네. 토요일 날에는 딴 것이 또 나오겠죠. 믿읍시다. 주의 이름의 기능을 하면 이 기능이 뭐냐면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기능이예요. 사도행전 4장을 봅시다. 4장 2절을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2절.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도의 내용이 뭐로 함축된다고요? 물론 재림도 있고 승천도 있고 온유와 화평 형제사랑 온갖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걸 모아모아서 함축을 하면 뭐예요? 뭐가 도예요? 전도할 때 무슨 도를 전해야 합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죠. 누구만 한 거예요? 우리 이름은 못해요. 누구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만 시켰습니까? 주님만 한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주께서 해야만 할 기능이예요. 기능. 제가 전에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점에 도서 판매하는 아가씨들 있어요. 뭐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모르겠지만. 유니폼만 입었지 밤 늦게까지 상당히 고생하는데 "실례지만 지젝의 착오된 시선 그 책 어디 있습니까?" "들뢰즈의 생성 철학이 어디 있습니까?" 물어보면 "그거요. 3D에 4번에 있습니다." 딱 지적해줘요. 그러면 아가씨가 그 책 내용 압니까? 모르죠. 지금 사람들은 지가 가능한 것만 하는 거예요. "예수 이름 믿으세요?" "믿습니다." 할머니들. "주 예수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몰라. 당신이 믿으라고 하니까 내가 믿는 것 밖에 몰라." 인간속에 여기서 목사님이 믿으라고 하니까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이 뭡니까? 믿음은 어떤 것이라고 나온대로 이미 습득된 것이 있죠. 습득된 것. 학교 교육 배우면서 주위 상황에서 믿는다는 것은 고개 끄덕이면 돼. 라는 그런 어떤 습득된 과거 옛 습관이 있잖아요. 그러면 목사님이 "십자가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고개 끄떡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누구십니까?" "몰라" 이렇게 합니다. "들뢰즈의 책이 어디 있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그럼 내용은?" "아 그런것 나한테 묻지 마세요. 지금 바쁜데 꺼져." 이렇게 한단 말이죠. 주의 기능이 와야 성령이지 예수 연구 하는 것은 지금 한신대 장신대 총신대 많이 잘 배웁니다. 성경 신학 이름으로. 조직 신학 이름으로. 예수 인자와 엄위가 무엇인지 시험치고 이래요. 안 믿습니다. 그거 성령받은 것 아니예요. 그거 배워서 목사로 써 먹기 위해서 배운 것입니다. 뭐 개혁주의 신학이 어떠니 조직 신학이 어떠니 할 수 있어요. 그래놓고 "내 알잖아 내 복음 안다 말이야 내가 한 번 가르쳐 볼까? 내 잘 가르친다." 가르치면 뭐합니까? 자기 존재라는 이름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아직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지금도 로빈슨크루소인데. 지가 지 이름을 지어버렸어요. 기능이 누구 기능이다? 나는 책 구해줬잖아 내가 책 찾아 줬잖아 하는 기능. "나는 어떤 손님이 와서 들뢰즈 책을 원해서 나는 책 찾아 주는 기능을 했습니다." 하면서 여직원이 할거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들뢰즈를 아는 것하고 상관없습니다." "들뢰즈가 누구인 줄 알아야 들뢰즈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직원이 "나는 책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책이 어디 쪽에 있는 줄 알잖아요. 그러니 들뢰즈와 연관이 있다고 말좀 해줘요." "NO." 나는 영어까지 쓰면서 NO. "당신은 들뢰즈를 몰라." 주의 기능은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모든 것이 어디로 쏠린다? 어떤 성경 해석을 해도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이른 쪽으로 성경 해석이 가능하면 그 사람 뭐 받은 사람입니까? 주의 이름의  작용하는 그 기능. 그 기능이 그 사람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확인 되잖아요. 확인. 모든 성경 해석이 주의 기능으로 "주께서 하셨습니다." 여러가지가 아니고 딱 모아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중심과 부활. 사도행전 4장 2절에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의 세계라는 것은, 십자가 부활이라는 천국이라는 세계는 예수님의 행위로 이미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 바깥에 육의 세계는 아직도 육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식을 해요. 열심을 내어서, 충성을 다하여 이 세계를 뚫어 보겠다고 자기가 알고 있는 습득하고 있는 논리적 개념을 총동원 해 가지고 계속 가능성 가능성에다 심지어 가능성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은 묵시도 포함되어 있고 초월도 포함되어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철학자들이 묵시를 이야기 하고 초월을 이야기 해요.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아는 역사라는 범위 위에서 나온 반대 체제로서, 반대 명제로서 헤겔의 반대 명제로서 역사와 반대되는 초월이기 때문에 실제로 주의 기능하고 관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초월은 뭐냐? 나는 나를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금보다 더 월등한 신이 될 수 있다. 이거 불교죠.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초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주여 왜 저 같은 죄인을 구원했습니까?" 주체를 내가 프라이데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프라이데이라고 이름하신 그 분. 보이지 않는 분. 중국에서 어떤 예술가가 배경하고 똑같은 배경을 만들어 가지고 투명인간, 투명세계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어요. 사람 없는 것 같아요. 자세히 보면 사람이 있는데 배경하고 똑같이 해 가지고 보호막 보호색 해 가지고 다른 사람이 보면 없는데 자세히 보면 있어요.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어두운 세계에 우리로 하여금 옛날 주님이 하셨던 십자가 기능을 그대로 되풀이 하기 위해서 마치 주님처럼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보호색을 입혀놨어요. 천국색 파카를 입혀 놨어요. 미군부대 파카를 입혀놨어요.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인데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한국 교회 안 알아주는게 서러워서 예배당을 크게 지었잖아요. 조용하게 살면 되는데 조용히 살 줄 몰라요. 떠벌려야 드럼치고 기타쳐야  김제동 엄마 불러야 불러줘야 티를 내야 예수 믿으면 복 받구나 투명인간이 되기 싫은 거예요. 육적인 사람들의 복에 맞추면 이게 장사가 된다니까. 예수 믿는 효과 본다는 것입니다. 그 기능에, 그 기능으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육적 세계와 영적 세계는 육적 세계에서 아무리 이해해도 그 마지막 최종 해석은 나의 행함으로 전락하고 영적 세계의 특징은 어떤 해석을 해도 어디에 모인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게 모이기 때문에 만약에 옆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증거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와 부활만 증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사건이 계속 가는데 누가 저 사람을 낫게 했느냐?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베드로는 불가능성을 이야기했죠. 주께서 주신 주의 이름이 지금 투명 인간처럼 살아계신 주님께서 주님과 저 사람 사이에 인간의 행함을 집어 넣으라? 마라? 하지마라 그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이미 설치되어 있는 성전의 그물 구조에 그 빈 공간에 앉은뱅이가 기입된 거예요. 드디어 빈 공간에 앉은뱅이가 구원을 얻었다 기입된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하는 말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구원이 목적이 아니죠. 목적은 뭡니까? 내가 이미 확보되어 있는 성전에 내가 거기 빈 칸에 내가 거기 가담한 것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묵시 세계에서 보면 뭡니까? 이미 이루어진 성전의 빈 칸이 확인될 뿐입니다. "딱 너야" 라고 지목하는 것입니다.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들어가게 하신 우리 자리를 우리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확인할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자리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자리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율법이 여기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 여기에서 육의 세계를 알리기 위해서 뭐가 주어지죠? 율법이 주어져서 죄가 넘치죠.  율법의 기능입니다. 육적인 세계에서는 율법이 왔다니까 부자 청년처럼 "제가 어릴 때 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해서 인간의 속성은 율법을 보면 환장해요. 사람은 자기가 선해질 수 있고 의로워질 수 있는 그 찬스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경우라도. 이것 설명 할려면 또 몇 시간 가는데 인간은 환경이 주어지면 그 환경에 변신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은 그냥 껍데기고 껍데기 속에 있는 그 괴물은 인간을 환경에 맞추도록 적응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베드로가 환경 바뀌니까 즉시로 베드로는 그 환경에 적응합니다. "나 모른다." 어떤 소녀가 "베드로 아저씨. 그 때 예수님하고 함께 있었잖아요." "너 까불래. 나 저 사람 모른다. 나 기억 나지 않는다. 아는 바 없다" 이렇게 하거든요. 사람이 아무리 복음, 복음 하지만 신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큰 교회 부교역자 되면 복음 버립니다. 본인은 복음 버리고 싶지 않겠지만 본인을 장악하고 있는 괴물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으로 변신케 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모든 인간이....그래서 율법이 주어지면 율법은 뭐 뭐 하라, 하지 마라 하니까 절호의 찬스입니다. 나로 하여금 더 고품질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멋진 찬스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법이 오게 되면 사람은 너무 좋아합니다. 목사가 "40일 새벽 기도 연속 나오세요." 그러면 뭐가 좋은 줄 알아요? "목사님. 40일 새벽 기도 연속 나오면은 안 나온 사람보다 내가 더 의롭죠." 내가 그 찬스를 놓칠리가 있습니까? 내가 남보다 게임에서 더 착한 게임에서 승리자가 되는 절호의 찬스가 주어졌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 찬스를 놓쳐가지고 상대적으로 악한 죄인으로 평가받을... 그것은 내 본성이 용납이 안 해요. 사람은 자기 보고 죄인이라고 하면 용납이 안돼요. 어쨌든간에 따라 잡아서 얼추 1등은 못해도 중간쯤은 의로운 대열에 서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율법은 반드시 인간의 행함이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뭐가 따라 온다? 인간의 행함. 이 육의 세계에서는 율법 다음에 인간의 행함이 없는 율법은 없습니다. 왜? 율법이 약을 올리거든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분명히 자기보다 더 위대한 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머리속에 뱅뱅 매일 "신이 될 수 있다. 신이 될 수 있다."  "아! 이러면 안돼." 백 날 그래봐야 소용 없어요. 미지의 것이 남아 있는데. 미지의 것을 삼켜야 잠을 편히 잘 수 있어요. 아직 미진한 것이 남아 있으면 사람들은 환장해요. 개들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나오고 싶어서 난릴거야. 오늘 무슨 날인 줄 안다. 사람은 미지의 것이 남아 있으면 환장해요. 율법에서 착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놓쳐요. 왜 빠트려요. 하지요. 율법은 좋다고 잡아 땡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자기의 내부와 외부에서 균열이 일어납니다. 철학적인 용어인데 자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요. 정신과 의사죠. 봉합한다고 애 많이 씁니다. 물론 돈은 챙기지만. 자아 균열. 없는 사람이 없어요. 심한 사람은 병원에 오고 아니면 술로 해결하고 이러는데. 자아라고 뭉쳐 놓으면 자아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고 저 놈 삼키고 나면 여기 또 자아 그림자가 있고 환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성령이 오게 되면 율법을 행한 자리에 뭐가 들어가죠? 인간의 행한 자리에 뭐가 들어가죠? 예수님의 행함이 들어가 버리죠.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됩니까?  내 이름 빼고 주의 이름 들어와서 율법을 이루었다. 아까 율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을 거룩답게 유지해서 그 보자기를, 그 국자를 거룩을 유지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그 다음에 거룩을 우리의 거룩으로 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베풀어 버리면 이미 거룩한 것에 혜택을 입으면 우리는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서 문지기가 되는. 이제 감 잡히죠. 여기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뭐냐면은 바로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온 사람은 자기 행함이 아니고 주의 행함으로 십자가 행함이라는 것을 알죠. 문제는 그 다음부터 입니다. 여기에 율법이 필요하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영 되었는데. 로케트 1단 2단은 태평양 바다에 빠트려 버리면 되는데 하나님 나라는 율법을 그대로 가져가 버려요. 왜냐하면 이것을 가져가 줘야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하는 분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육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행함만 결부 되기 때문에 "아! 참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구나" "아! 이거 안되네." "주여 죄인 맞습니다." 자기의 행함과 결부 되어서 율법의 기능을 발휘하다가 이 율법을 그대로 가져가 버리면 율법의 기능은 그대로 살아있죠. 뭐냐면은 죄를 지적하는 기능인데 이 죄의 기능은 율법의 내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이 있으니까 율법 뒤에 예수님 십자가 부활이 있으니까 마지막 때 심판의 기준이 뭐냐면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그렇다면 뭡니까? 여기 죄는 확정되어 있죠.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지옥갈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여기에 율법적 기능을 해버리면 이 밑에서는 "내가 마음 속으로 간음했구나" "내가 기도를 안 했구나" "내가 이웃 사랑을 안 했구나" 이렇게 되지만 이쪽의 율법의 기능은 뭐냐면은 "내가 또 주님 앞에 내 의를 내세웠구나" "내가 또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했구나" 이것이 평생 회개해야 되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라고 했는데, 주의 행위가 있는 것을 자꾸 행위 뒤에 꼬리를 붙쳐서 예수 믿는 내 행위를 집어 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율법이 있고 그 율법과 더불어 있는 율법에 붙어 있는 주님의 이름이 우리를 "이래서 죄인 맞잖아." "아유 죄인 맞군요." 3초가 되든 2초가 되든. "맞군요. 또 내 사랑했습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데 또 왜 내 몸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또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아유 내 새끼들 앞으로 우얄꼬." 또 걱정하다가 지나면 "주께서 인도할텐데." 이거 3초,2.5초 가다가 다음에 또 24시간 23시간 동안 전부 다 "야유 인간아 우에 인간 만들까" 엄마가 걱정하다가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인 한 명 떠나면 또 환장해 가지고 정신 병원에 갈까 싶고. 가든 말든 이미 구원 받았는데. 이미 성전 안에, 국자 안에 들어 있는 데. 국자 안에 있는 것이 지가 국자 노릇 할려고 하니까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지가 프라이데이라 주님이 안 보이니까. 그러다 주님이 오시니까 깨깽 깨깽 해가지고 "마 니가 내 없다고 주인 행세했지? " "미안합니다." 그 다음에 "뭐 할까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또 주인 없다고 지 맘대로 하다가 또 "뭐할까요?" 하고 묻고. 율법의 기능은 죄의 의미가 주님의 행위에 대한 반발. 육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의 행함에 대한 내부적인 모순. 탐을 내는 내 죄와 탐내지 않을려는 내 죄의 갈등. 이것이 육의 세계라면 영의 세계에서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주께서는 하신 십자가를 부정하는 그래서 영의 세계에서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지옥가고 이 쪽의 죄는 그것을 완벽하게 못 행한 사람이 죄가 되고.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새로운 차원에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  (IP:124.♡.85.46) 09-10-22 19:20 

대전090827b행4장10절b버린돌로서집모퉁이의머릿돌b 

대전강의090827b  이름 : 이미아 
2009-10-16 18:06:34 조회 : 33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본향, 그것을 안식이라고 하는데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라는 영화가 원래 있었습니까? "집으로" 아!! 집으로..누구 집이냐 하면 예수님의 집이거든요. 성경에 보면 누구의 집이냐면은 예수님의 집이잖아요. 내 이름이 있는 집, 내 집으로 가자. 내 집으로 가버리면 이 땅에서는 타향살이가 되겠죠. 타향살이 노래가 절로 나오죠. 막걸리 걸쭉하게 걸치고 부르면 타향살이~여기서 한 번 잘 들어 보세요. 나는 타향살인데 집으로 가고 싶다. 모든 인간의 염원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 다녀도 절에 안 다녀도 갖고 있는 염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이 타향살이 하는 모든 인간에게서 영원히 거할 본 집으로 가자 할 때 이 집을 우리는 쉽게 예수님의 집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집을 이걸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집이라 했단 말이죠. 그래서 다른 민족이 화를 내는 거예요. 이스라엘만 인간이 아니고 우리도 인간인데 우리도 죽으면 본향 가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 유대인들은 남의 집은 다 지옥이고 오직 이스라엘이 나타나는 그 여호와만 진짜 집이냐 여기서 강한 반발이 나오죠. 그러면 그들은 뭐라고 합니까? 언약이 있잖아. 언약. 언약이 다른 민족에게는 안 주고 언약이 오직 누구한테 주었다? 이스라엘에게만 주었다. 그 쪽에서 반발하기를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었다는 증거를 대봐라 할 때 이스라엘은 간단하게 대답 합니다. 우리는 원래 없던 나라인데 없던 나라가 생겨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디서 없었고 어디서 생겼는데 이게 바로 뭐냐하면 두 번 째 강의의 핵심인데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처음 나와요. 그래서 시간이 처음 나올 때 부터 날짜가 바뀌는데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바뀌는데 애굽은 무엇을 뜻하냐면 모든 현재 있는 인간 전부를 이야기 하고 그러면 애굽나라에는 뭐가 없었다? 아직 이스라엘이 없었다. 그냥 약속만 있을 뿐이죠. 애굽나라에서 아무것도 없는데서 뭐가 나왔습니까? 이스라엘로 나왔잖아요. 무에서 유 나왔죠. 나온 이 사람에게 누가 너로 하여금 없는데서 있게 한 줄 아느냐 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의 이름이 비로서 여기에 국가적인 형태로 주의 이름으로 붙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이 있음은 어디 있음이냐면은 주님은 지금 계시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기능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겠죠. 쉬운 예로 홍해가 갈라졌다. 홍해 갈라지는 것이 누구의 의견입니까? 이스라엘 의견입니까? 애굽사람 의견입니까? 모세의 의견입니까? 누구의 의견입니까? 주님의 의견이죠. 주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는 주님과 보이는 이스라엘과의 접촉점이 뭐냐면은 지팡이잖아요. 지팡이에 뭐가 있다? 지팡이에 주의 이름이 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①지팡이에 주의 이름이 있다가 지팡이 사라지고

②주의 성소에 주의 이름이 있고 나중에는

③성전에 주의 이름이 있고 나중에는

④우리 몸이 주의 이름이 있고.

 

제가 예수 믿는 것 봐 가지고 봐라 주님이 살아 계시잖아 그렇게 하는 거예요. 둘째 시간 하는 것을 진도 빨리 나가는데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뭐냐하면 곧 집으로 가자 그 집은 어떤 집이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죽어서 좋은데 가는 집이 아니고 이 집은 오직 누구에게만 알려 주었다?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알려 주었다. 언약의 이름으로. 언약의 이름으로 주었다 이 말입니다. 왜 하필 언약이 있어야 갈 수 있느냐 언약이 있어야 없는데서 있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구원 받을려면 없는데 없는데 생긴 나라에 메시야가 진짜 메시야다.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었는데 살아 났거든 주님이 하신 언약이라고 믿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사람을 만났다. "예수 믿습니까?" "예. 예수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증거가 뭡니까?" "내가 기도하니까 복 받아 기도하니까 부자되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상상력입니다." "당신의 본성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 사람한테 물었는데 어떤 한 사람이 "내가 주님이 계시다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것을 남들은 안 믿는데 저는 믿어집디다."

 

그래서 저는 항상 최종적인 증거대라면 십자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증거합니다 하면 그게 바로 당신이 바로 없는데서 있게 한 옛날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새 언약의 연속성 속에 들어 있는 진짜 신자라고 보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을 이야기 하면서 제가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앞으로 사도행전의 싸움이 뭡니까? 보이는 것과 결국 십자가 싸움이 되겠네요? 빙고~바로 그거거든요. 그러면 오늘 날 우리의 싸움은 뭡니까? 우리의 싸움은 있는 교회 예배당 증거로 보고 큰 교회 부흥되는 것을 증거로 보는 이런 세력과 우리는 뭐만 증거합니까? 그 딴 것 말고 보이지 않는것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심판대에 주께서 다른 증거를 주신 적이 없는 거예요. 사도행전 17장 29절을 한 번 봅시다. 제가 읽어 버겠습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이걸 방금 이야기 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가능성. 인간의 눈에 보이는 유와 가능성인데 30절에 마지막 알지 못하는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든 이제는 허물 하겠다. 이제는 갈구겠다는 이 말입니다. 갈구는 증거가 뭐냐?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으로 하여금 빼도 박도 못하게 확정날짜 받았습니다. 저를, 저라고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뭘 주었다? 증거를 주었죠. 부흥사들이 말하는 폭탄 맞았어도 6.25 때에 살아난 것 그것 증거 됩니까? 안 됩니까? 아닌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에 간증이 필요하냐고 간증에 대해서 올라 왔을 때 제가 문제 던졌잖아요. 간증을 쥐고 있는 그 간증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간증은 그걸 증거하면 안 돼요. 사람이 체험은 있어요. 체험은 있다고요. 중국 상하이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눈 덮힌 길을 가면서 "주여 주님이 보고 싶습니다." 간절히 기도 했더니만, 우연히 사진을 찍었더니만 분명히 눈을 찍었는데 삐뚤하게 보니까 예수님의 수염난 얼굴이...그 때 부터 예수님이 수염난 분으로 확정이 되면서 그걸 삐딱하게 찍어 놓고 주님은 이 집의 주인이다 해가지고 밥상위에 주인이다 붙여 놨잖아요. 그런데 그런 체험은요. 보통 벽지를 두 시간만 쳐다 보세요. 예수님 다 나타납니다. 이게 뭐냐하면 배경과 적용에서 자기가 이미지화 되고 싶은 것을 집중해서 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보입니다. 글쎄 그런 체험을 버리란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길 수 있어요. 그것은 그냥 간증하시고 자랑해도 좋은데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이게 붙어야 돼요. "내가 중국 가다가 눈 사진 찍었거든." "그래, 그래" "주님 얼굴이.."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 이래야 돼요.

 

체험을 부정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 이야기 하세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더라. 그게 뭐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십자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하시는 증거는 십자가 부활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지막 심판을 결정 짓는 확정 기준이 바로 십자가 부활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죠. 안 믿으니까 사도 바울은 안 믿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진짜 주님의 사람이 누구냐 들이미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신.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어디로 모으더라? 사도행전을 보니까.사도행전에 빌립 집사가 뭐라고 합니까?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를 보고 있을 때 빌립집사가 그것을 뭐로 유도하더라? 십자가로. 이사야 53장에 십자가에 대한 마지막 증거는 뭐냐? 예수님이 이렇게 죽었다가 이렇게 부활했다. 빌립 집사도 역시 그것을 십자가로서 딱 모아서 증거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놀랍게도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으니까 안 믿는 사람보고 하는 말이 너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 말씀이 또 이루어지는 거예요. 안 믿으면 안 믿는대로 이루어지고 어쨌든 절대적인 마지막 기준 하나는 포기할 생각이 사도 바울에게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에라 이래 내가 고난 받아도 하겠나" 고난을 주죠. 사도 바울은 한 술 더 뜹니다. 내가 고난이 더하면 더할수록 오히려 이것이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증거해 버리니까 이것은 고난줘도 십자가요 고난 안 줘도 십자가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환난이나 어려움이나 풍부한데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것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복음을 다 전할 수 있다.

 

항상 기뻐하라. 그와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주께서 자기 속에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하면 우리는 그대로 내 경험되기 위해서 애쓰는데 애쓸 필요 없어요. 주께서 사건과 사태를 툭툭 치면 결국은 믿을 것은 내 간증이 아니라 내가 진짜로 믿는 십자가 그것 때문에 내가 부족해도 구원 받습니다. 주님의 주체, 나는그냥 프라이데이. 나는 그냥 호명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거 가지고 사도행전을 보면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 그 다음 진도 나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 참 이거 설명 하는데 한 시간이상 걸렸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범인으로 알았다가 보통 사람으로 보는 거죠. 이걸 한 자로 이야기 하면 방금 이야기 한대로 유죠. 학문이 없고 학력도 별로 내세울게 없다. 있음이죠. 유죠. 뒤에 하나 첨가하면 가능성이죠. 가능성과 유로 보는 것은 무슨 세계죠? 육의 세계죠. 그런데 그 뒤에 보세요. 다같이 시작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글쎄 이게 없다니까 예수와 함께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보는 사람은 지도 미친거 같아요. 우리 보기에 진짜 미친거 같아요. "베드로야 일어나 봐" "뒤돌아 봐" "어 너 밖에 없네" 유죠. 보이죠. 가능성이죠. "너가 가라고 해서 갔구나" 이거죠.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와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있다. 글쎄 이걸 믿는 자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이예요. 그래서 이 구절이 어려운 거예요. "목사님 저도 베드로처럼 믿게 해 주세요." 라고 할 때 목사 입장에서는 "참 죄송합니다." "왜요? " 사도행전 4장 13절 보세요. 베드로가 그냥 행했는데 어떤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네. 어떤사람은 완전히 돌았네. 지난 달 우리 사모님이 친구 분 하고 오셔 가지고 그 친구 분 하고 같이 할 때 얼마나 사모님 보고 돌았다고 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유고 실적이죠. 가능성이예요. 그 사람은 기도했더니만 복 받았는데 너 왜 그 복을 부정하냐? 그것은 마지막 구원의 최종적인 믿을 만한 천당이냐 지옥이냐를 가르는 증거가 그것이 아니죠. 그것은 간증이죠. 그 분이 체험 안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걸 체험한 것을 뭐할 줄 모른다?  부정할 줄 모른다. 왜? 유는 부정되야 하고 가능성은 부정할 줄 알아야  이것이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는 성령 받은 사람이고 성령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한 소망 하지만 그것을 버리란 말이 아니고 그냥 하세요. 미스코리아 된 뒤에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다 주의 성령으로 한 것이고 누가 뭐랬습니까? 그 기분 유지하라는 말이죠. 미스코리아 진 된 사람이 은혜 받았으면 옛날에는 미스코리아 되는 것이 복 받은 줄 알았는데 이제와서 보니까 십자가 보이지 않는 분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 때는 착각했습니다. 라는 말만 하면 지난 번 체험은 무효한 것이 아니고 무용지물이 아니고 그 때 육과 지금의 영이 오히려 대비되면서 도리어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겠죠. 앞으로 계속해서 그런 체험들이 우리에게 계속 주어질 것입니다. 대전 집을 찾아 오는 길을 잃어 잃었구나 생각했는데 마침 순적하게 어떤 분을 만나 가지고 인도 받아 보니까 딱 이집 앞에 오더라 그 체험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나 구원 받았습니다 라고 생각할 뻔 했다가 아 그 다음에 찾아 왔는데 이 근처에서 헤매가지고 30분 헤매고 성경 공부 참석 못해도 그것도 뭐다? 주의 은혜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런 것입니다. 어떤 기준을 내가 유와 가능성의 기준을 내세우면 안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 한 것을 어렵게 해 보겠습니다. 영의 세계에 층이 있어요. 영의 세계에 방금 이야기 한 역사적 사실이 있어요. 여기 윗층에 올라가면 역사적 사실이 뭐가 되느냐면 묵시적 사건으로 이것이 함축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나는 고3 때 기도하다가 은혜받았다 간증이죠. 역사적 사건 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은혜 받아서 보면 그 때 내가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라고 지난 과거를 한꺼번에 밧줄로 꽁꽁 묵어서 그 자체가 묵시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해 보면 내가 고3 때 기도하다가 은혜 받았다 이것은 내가 구원받은 증거다 라고 했더니만 딱 보니까 여러 사건 중에 하나의 불과 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제 2의 사건 십자가 사건에서 나왔던 사건임을 알죠. 묵시적 사건인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는 쉽죠. 한 층 더 올라가면 요 자체가 나는 고3 때 묵시적 사건을 받았던 사건 자체가 또 나로 하여금 믿음의 증거처럼 활용하게 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면서 그 때 나는 일방적으로 고3 때 11월 4일에 받았던 그 사건을 내가 묵시적 사건으로 받았던 것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제가 11월 3일 날 군대에서 은혜 받았거든요. 오전 11시 30분에 받았습니다. 잊어 버리지도 않습니다. 역사적 사건 때  그 다음 올라 가니까 뭐냐하면 내가 무슨 기준으로 11월 2일 날은 묵시적 사건으로 왜 포함을 안 시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그 때 짜릿했거든요. 11월 3일 날 11시 30분에 짜릿했다 이 말이죠. 짜릿한 것이 뭐냐면은 내 몸에 의해서 짜릿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윗층에 올라 가니까 11월 3일 날이 아니고 11월 2일 날 부터 이미 은혜를 주신 것을 잃어 버린 거예요. 왜? 일방적으로 짤라버려서 묵시적 사건의 시작과 끝을 지가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싶어서 마치 엿가락 짜르면 구멍이 생겨서 툭 부러지잖아요. 11월 2일까지는 그냥 평범했었어 하지만 11월 3일 날 나는 드디어 교회가서 은혜 받았어 라고 지가 지 맘대로 절단시킨 거예요. 그 절단 시킨게 윗층에 올라가면 그게 나의 괜한 오기였다는 것, 나도 신앙 있다는 것을 과시 하고 싶은 자기 오기 였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면 뭡니까? 태어날 때 부터 묵시적 사건이었습니다. 괜한 예배당 내가 유리창 깬 것도 묵시적 사건이었고. 그 땐 저 밑바닥에 있을 때는 예배당 유리창 깬 것은 하나님이 반대하는 줄 알았죠. 하나님은 반대했던 그 행위마저 구원 하는 절차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거예요. 지난 달에 친구 찾아 왔잖아요. 친구 찾아 왔을 때 사모님은 또 내 믿음을 반대 할려고 친구 찾아 왔구나 이렇게 하잖아요. 더 묵시적 사건에 올라가면 사모님의 신앙을 돕기 위해서 천사가 보낸 겁니다. 그러면 강장로님 화 낸다. 그럼 목사님 우리 교회 사태도 그럽니까? 나는 인정 못합니다. 좀 더 올라가 보세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예정된 삶, 그 어떤 것도. 나중에 십자가 와 가지고 천국 가보니까 면류관 다 반납해요. 다 던져 버려요. 주께서 나 하나 인간 만들기 위해서 온갖 것은 다 일어 났어요. 그러면 나를 만든 작품은 누구다? 나를 호명했던, 예수 안에서 나를 호명할 때 부터 이미 너는 어떤 절차를 살다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어떻게 죽어야 나 한테 온다는 절차가 이름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내 이름으로 간주해서 믿지 않고 누구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에 근거한 주님의 절차였습니다 라고 받아 들일 때 로마서 9장 너가 태어나기 전 부터, 너가 선과 악을 행하기 전 부터 너는 사랑 받기로 작정 되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 너의 짧은 안개같은 인생이었느니라. 나중에 거지 되어서 천당 가든지 부자 되어서 천당 가든지 가 보면 지상에서의 부자 거지는 아무 의미 없고 거지가 되어야만 했고 가난했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태어나기 전이니까. 이미 주님께서 성부 성자 두 분 의논한 절차대로 그냥 미끄러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렇잖아요. 나의 험악한 무슨 길? 나의 험악한 나그네 길인데, 그 사람이 험악한 나그네 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봐서 이미 그 사람은 집으로 가자 나그네 길이 나의 정착할 집이 아니고 이미 집이 있고 그 다음에 걱정하는 것은 임마 나 따라와 너희들도 나 따라오게 될거야. 그런 언약만 계속해서 축복으로. 축복이라는 것은 집에서 길게 늘어 뜨린 사다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주께서 가신 길이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방금 이야기 한 그것을 신약 성경에서는 무지무지 하게 어렵게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겨울 수련회 때는 요한 복음 할려고 하는데, 지금 제가 엄두가 안나는데. 요한 복음에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음을 너가 믿으라 믿을 재간이 있습니까? 이게 안과 밖이 뒤집어 지는 것을 육의 세계에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안이면 안이고 밖이면 밖이지 이걸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못믿을 줄 알았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감사할 것은 내가 너희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니라 가룟 유다는 제껴놨지만 너희들 한테는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을 모르기에 그들은 떠나야만 하는 거예요. 주님이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베드로는 배신 해야만 하고 열 두 제자 모조리 주님 곁을 떠야 되는 거예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앞으로 대전 모임이 복 받을려면, 앞으로 대전 모임 구원 받을려면 절에 가시든지 술 집에 가시든지 룸 살롱 가시든지... 그런데 안 가도 돼요. 안 가도 되는 것이 은혜 받고 교회 예배당 문 만 열면 룸 살롱 찾아 가고 싶고. 나는 십자가 소리 안 들려지는 곳에 가고 싶고. 나는 다만 세상을 좋아했을 뿐이고. 다음 날 다시 주일 날 교회 오는 것이 거북스러웠을 뿐이고. 설교 시간에 잠 잘려고 다짐에 다짐을 했을 뿐이고. 그러다 설교 시간에 얻어 맞았을 뿐이고. 주께서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적인 것을 계속 그대로 맡길 뿐이고. 돌아보면 그것마저 하나의 절차로 주의 이름만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내 안에 거하게 하리라" 라고 하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궁금한게 뭐냐하면 안에 거한다는 것이 뭡니까? 라는 궁금증. 그게 사도행전 4장 28절. 아 내가 생각해도 어렵다 정말 정말 어려워요. 여기 4장 28절. 

28절.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방금 4장 28절을 설명하는데 두 시간 걸렸습니다. 방금 제가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앞에 예정하신 이것을 무슨 중심으로 바꾼다? 전부 다 주님께서 하신 일로 바꾸지 않고 뭐로 바꾼다? 나 구원 받았구나! 제가 강의 처음이야기 했죠. 예정해서 나 구원 받았다. 왜 이 말을 나는 동의하기 때문에. 실컷 이야기 한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데 이걸 모르고 덜렁 이 말씀만 받아 버리면 뭐가 되겠습니까? 아 예정이고 그 딴 것 모르겠고 나는 예정이든 구원이든 나는 모르겠고 어쨌든 나는 구원 땡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뭘 자랑하겠어요? 자기 구원 받은 것 자랑하겠죠. 앞에 예정하심은 날라가 버리겠죠. 그렇다면 뭐가 안되죠? 회개가 안되죠. 주여 나 예수 믿는데 왜 자꾸 어렵게 겁을 줍니까? 또 짜증냅니다. 앞에 예정하심이 국자고 우리는 담겨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3장 봅시다. 수요일 날 했는데 제가 생각해도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씀인지  저는 이걸 여러번 봐도 좋아요. 고린도 전서 3장 21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니라" 22절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나 너희의 것이요" 자, 여기까지 봅시다. 만물이 다 우리의 것입니까? 아니죠. 더 큰 국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 것이 빠지면 우리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이 다 우리 것이라 하는데 누구야 누구야 앞에서 얼쩡거리는 놈이 누구야 사자가 있는 동물 왕국에서 간사한 이리가 이리인지 토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꼭 사자 앞에 얼쩡거리면서 다 자기 앞에 절을 한다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뒤에 있는 사자한테 절을 하는 것인데 믿는 사람이 자꾸 이런 식으로 오해해요. "주여 회사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결해 주세요." "방금 뭐라고 했지?" "주여 회사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왜 너의 이야기를 왜 들어 주어야 하는데?" "주여 주의 종 아닙니까?" "너의 어려움을 왜 풀어줘야 하는데?" "제가 신자인데.." "나는 너 보고 상대 안 해. 너는 너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런데 나의 이름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주의 이름이 쥐고 있죠. 그러면 처음에 언약할 때 하나님이 누구하고 계약했어요? 나하고 상종을 안 하고 누구하고 상종합니까? 나를 쥐고 있는 큰 국자 주님의 이름으로 하여금 "어이 저 이근호 또 착각하고 있다. 손 좀 봐라." "알겠습니다. 주님이여." 주께서 손 보는 거예요. 주께서 손 보면 "아!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내 몸은 주의 이름이 거하는구나" 이렇게 깨달을 때 그러면 우리는 모든 근심 걱정이 그 순간에 날라가 버리죠. "아! 착각했구나." 그럼 다시 봅시다. 착각했잖아요. 이것이 뭐가 된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고민하다가 또 착각했구나 깨달으면 묵시적 사건 되죠. 묵시적 사건이 일방적인 간증이라고 또 착각하는 거예요. 또 올라가는 거예요. 결국엔 마지막에 우리는 주께서 주만 묵시적 분이고 우리는 주만 역사적 사건으로서 오해만 했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할 때 모든 말씀이 동원되어서 우리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23절에 그리스도는 누구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몸은 육이다. 육 다음에 뭐가 있죠? 가능성. 다른 사람들은 뭐만 보인다? 너 교회 가는구나 교회 가는 것은 불가능이예요? 가능이예요? 가능성이죠. 너 지난 번에 교회에 있더라 눈에 보이죠 눈에 보이니까 유죠. 나 교회 갔었다. 나는 기도했었다. 이런 가능성을 자랑하면 안 되고 우리 배후에 누가  있다? 큰 국자. 주께서 교회가게 하셨다 기도하게 하셨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믿어지게 하셨다. 이게 바로 성경 전체의 신약 성경 전체의 내용이죠. 온유하라 온유하게 하셨다. 형제 우애  형제 우애하게 하셨다. 몇 초 동안에? 한 0.5초 동안에. 자꾸 어려운거 하면 안되는데 이왕 어려운거 계속 해 봅시다. 주체가 여기 있는데 내가 했다. 나는 뭐뭐 이다.뭐뭐 했다가 주체입니다. 밑에서 묵시적 사태가 벌어지면 이것이 찢어지겠죠. 찢어진 그것이 밀리겠죠. 이것을 파열이라고 합니다. 주체는 뭐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행했던 것을 기억한 것, 그걸 모아서 자아, 주체. 나의 현재 존재를 인정해주는 근거들을 모아서 자아라고 합니다. 근데 찢어버리면 이렇게 구멍이 생기고 주변에 밀려난 것이 있죠. 밀려난 그것을 가지고 파열된 주체. 그러면 구멍에서 뭐가 생깁니까? 낯선 경험들, 낯선 체험들이 올라오죠. 이것을 가지고 잠재되어 있던 묵시가 우리와 함께 있던 주님께서, 우리의 주체는 가능성만 있다는 가능성에서 잠재되어 있던 불가능성이 자아를 뚫고 오죠. 자아는 그 순간 누구한테 굴복하죠? 낯선 사건에 굴복하고 낯선 불가능성에 굴복하죠. 그러면 이 주체가 찢어 지겠죠. 찢어질 때 요걸 라캉이라는 사람은 실적이라고 이야기 하고. 그걸 얼른 다시 "나는 하나님께 은혜받았다" 하고 봉합하죠. 꿰매죠. 은혜받은 자로서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죠. 그걸 바로 뭡니까?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 거듭난 것을 자랑하면 또 찢어져야 합니다. 평생 갑니다. 그래서 라캉은 인간은 자기가 상상하고 있다가 상상이 어디서 나온다? 내가 상상하기 때문에 나만 아는 나의 과거에 대한 현재적, 현행적 편집이죠. 자기의 유리한 쪽으로 편집하는 이러한 상상이 새로운 사건이 오면 찢어지고 분열된 이게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상징이 되면 인간은 어디에 굴복한다? 환경에 굴복하죠. 남들이 뭘 요구할까? 굴복하죠.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글쎄 나는 이런 상징적인 존재야" 라고 하다가 이게 새로운 사건으로 찢어지면서... 주체라는 것은 항상 후차적인 조립품 입니다. 착오적인 조립품. 자기 긍정을 위해서. 항상 지는 죽어도 자기를 부정 안 해. 하여튼 찢어 놓고 올라오죠. 올라오면 다시 봉합되어 가지고 "역시 나는 은혜받을만 해." "왜?" "창세전에 예정되었기 때문에." "근데 너, 강아지는 구원 안 받았지." 지 자랑하다가 또 와장창 깨지면 "주님 잘못했습니다."  하다가 다시 또 봉합하고...이런 절차를 통해서 우리는 묵시적 산물로서 나중에 보면 주체를 누구 작품으로. 내 작품이 아니고 주님의 예정된 작품으로서 우리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었다. 주의 이름으로 인수 인계하는 그것이 내 나라가 아니고 내가 상상한 나라가 아니고 원래부터 주님의 나라고 아들의 나라고 그래서 갈 수 없는 불가능한 나라에 이렇게 찢어지면서 불가능한 나라에 입성이 됩니다. 그래서 가고자 해도 못 가는 나라에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흔적이 뭐냐?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내가 내 몸이 아닌것을 깨닫는 과정의 반복으로서. 들뢰즈란 철학자는 반복이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미래의 것이 앞당겨서 되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미리 손대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것이 반복될 때 우리는 불가능한 세계에서 날마다 벗어나면서 불가능성 세계로의 진입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능성 세계가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것은 가능한 세계고, 유의 세계에서 보면 엄마가 만약 자식을 키우면 내 자식은 나의 뭐가 되겠어요? 나의 과거의 업적이 되겠죠. 너 하나 키우는데 얼마나 기도한 줄 아냐? 너 하나 때문에 내가 얼마나 희생한 줄 아냐? 아이가 있다는 말은 뭐가 있다? 나의 과거의 업적들이 차곡차곡 쌓이겠죠. 얼마 전에 어떤 분하고 만나서 이야기 했는데 스물 다섯 살 먹은 청년인데 자기는 아프리카 가겠다는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서 엄마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 자식이란 부분이 많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자식이 떠나 버리면 뭐가 허물어 집니까? 주체가 찢어지잖아요. 자식이 있음으로서의 자아 상징성이 확보되어 있는데 자식이 훌쩍 떠나 버리면, 재아나 재원이가 만약 독일 가버리면 엄마는 무슨 낙으로 삽니까? 지금은 큰 소리 치죠. 아이구 자식 없어서 편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생각이고 내일 모레 몇 년 뒤에 아이구 그 놈 없으니 가슴이 허전하다 이럴 수 있단 말입니다. 정낙원 목사님 가고 난 뒤에 온 십자가 마을이 허전해서 메꾸지 못합니다. 당신의 빈 자리 컸음니다만... 그런데 주님은 올라와 올라와 자꾸 너 자신 스스로 감당하지 말고 하나의 절차야 올라와. 왜 그렇게 과거를 스스로 너를 감시하느냐. 자꾸 과거가 발목을 잡아. 성경에서는 자식을, 요즘 부모는 결혼해도 아주 자기 딸이 결혼하면 사위를 붙들고 이혼해 이혼해 친정 엄마가 자꾸 이혼을 부추겨 계속 부모를 안 떠났어요. 왜냐하면 자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맨날 전화해서 이 서방 잘 해주냐 내가 걱정이다. 잘해줍니다. 전화 그만 하이소. 여차하면 이혼 해야 돼. 이거 누가 결혼했는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너를 우에 키운지 알지. 압니다. 압니다. 기도해서 키운 딸이다. 이름이 에스더다. 압니다. 이름을 바꾸던지 해야지. 어머니 이제 에스더 없고 주의 이름 입니다. 이래 하든지. 엄마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고 지금도 새벽 기도하면서 주여 내 딸 잘 되게 해 주세요. 말은 주의 이름인데 내용은 아빠 이름인지 겉으론 편의상 주의 이름이고 실컷 주하고 관계없는 일 해 놓고. 끝에서 주의 이름이라고 하고. 이게 주께서 하는 일이 못 미더워서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시를 빼 달라 가시없는 사도 바울 되게 해 달라 몇 번 이야기 했습니까? 세 번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이 사도바울 내 계획으로는 가시있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봤나?" "사도바울은 가시를 빼서는 안된다." "가시 있어야지" "내게 가시 있는 것이 내게 은혜입니다." "이제 정신 차렸구나"

 

항상 차후에요.

 

우리는 주의 은혜를 잘 몰라요. 하지만 천국가면 내 집에서 이미 내가 가야 할 본향에서 작업이 들어 갔어요. 나그네 길에 뭐가 작업 들어 갔다? 고향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그걸 사르트르는 선취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선취란 미래가 미리와서 현재를 장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작업에 들어간 거예요. 그것을 라캉은 그것을 선취로 보지 않고 현재적인 실재계가 상징계와 더불어서 움직인다고 보고 들뢰즈는 물질적으로 물질이 외부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 자체가 그렇게 운동하므로 물질과 물질이 만들어 내면 의미와 사건이 자동적으로 성립된다. 찢어진 이야기는 들뢰즈 이론이 아니고 알랑 바디우가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라 하는 것은 주체가 규정할 자격이 없어요. 찢어진 것을 기독교에서는 외부에서 하잖아요. 알랑 바디우는 주변에 있는 힘이, 잠재된 힘이 밀어 부쳐서 주체를 다시 모아주죠. 그래서 이것은 규정을 누가 한다? 주체가 규정할 수 없고 주체가 찢어진 그러한 사건들이 규정하기 때문에 이걸 집합으로 묶어 놨어요. 그래서 알랑 바디우의 철학은 뭐냐? 집합론. 집합이라는 것은 이미 일어난 집합의 요소만 들어 있고 집합을 내가 만드는 것은 집합에 대한 반칙이죠. 몇 몇 사람이 대전에 올 것이라고 만약에 이종분 집사님이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착각이죠. 와 보고 난 뒤에 차후에 오늘 몇 명 모였습니다. 오늘 신직수는 점심 때 돈이 몇 만 원 나가겠다 차후에 하는 것입니다. 집합 개념이라니까요. 집합 개념은 주체를 생각하지 주체에서 손을 놔 버려라. 그 집합이 있을 때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몸이 무슨 개념입니까? 집합 개념이고 그 집합 개념을 규정하는 규정은 못 내리고 왜? 지체이기 때문에. 머리 부분이 내리는데 조건이 뭡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규정에 합당한 사람만 뭐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집합에 통용 되면서, 합치 되면서 그들은 모일 때 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머릿돌, 성전이라고 하죠. 성전은 무슨 기능? 주님의 이름이 있으니까. 무슨 기능? 주님의 존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벽돌에 붙는 것이 아니고 주의 기능이 발현되면 그게 바로 성전이라고 합니다. 지난 수요일 날 한 예를 든 것이 있는데 거기 보면 심훈의 상록수 소설의 한 대목에 채연심이라는 여대생이 농활 작업 하면서 애들을 조선말을 가르치죠. 학생들 기억납니까? 책은 안 봤지만 시험에 나오니까 내용은 알고 있죠? 거기 보면 일본 순사가 인원수를 제한했어요. 학급시설 안정 상태 때문에 몇 명만 받고 몇 명은 받지 말라 했는데 채연심이라는 학생이 가갸거겨를 했다고요. 그런데 분명히 제한된 공간에서 했는데 왠지 소리가 큰 거예요. 창문 밖을 보니까 나무에 학생들이 참새처럼 달려서 가갸거겨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교실의 범위가 뭘 넘어 섰습니까? 공간적인 짤라냄, 경계선을 넘어서서 가갸거겨 하면 그 여선생님에 반응에 반응하는 범위 전체가 뭐가 돼요? 교실을 벗어난 교실이겠죠. 성전이라는 지점을 벗어난 성전이 될려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응답하는 것은 비록 수 천 길 떨어져도 전부 다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전의 건축물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됩니다. 있어야 범위 밖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아! 정말 어려워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의 이름을 공간이 점령하지 못한다 말은 하면서도 허락한 이유가 어떻게 주의 이름의 용서와 긍휼이 지정된 인간이 지은 집을, 건축물을 넘어서서 작용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크기에 구애받지 않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기가 있어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야 주님의 용서가 삐까삐까 영광을 받는다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죄 질라고 하는데 이미 우리가 육이 있는 이상은 항상 주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주의 몸인데 항상 뭐로 바뀌냐면 내 몸이라고 고집하는, 평생 죽을 때까지 돌아서면 무조건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고 내 몸이라는 말은 여기까지는 내 자식이고 제는 내 자식 아닙니다. 오목사님 자식이죠. 있을 때는 다같이 그리스도의 몸이죠. 대전 떠나면은 난 몰라 단이가 왜 야단을 맞았는지 신경 쓰는 거예요.내 범주 안에 있으니까 그게 돌아보면 죄가 되죠. 주의 몸이 갑자기 뭐로 바꼈습니까? 내 위주로 내 몸으로 바꼈으니까. 감사한 것은 또 이렇게 찢어지죠. 우리 재원이가 피아노 세계 대회에서 일등을 해가지고 이걸 좋아하면 안 되는데 왜리리 싱글벙글 보람이 있었구나 이러면 안 되는데. 왠지 남의 애도 아니고 내 애가 일등하니까 하여튼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등을 했는데 여자를 잘 만났어. 드라마를 써요. 독일 여자를 만났어. 예수 믿는 한국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기를 바랬는데 이 놈이 일등하면 뭐하노. 주여 내 자식인 줄 알았습니다. 회개했다가 그런데 그 독일 여자가 세상에 그렇게 또 시어머니한테 잘하네 주여 회개 합니다. 이런 은혜인줄 모르고... 맨날 바껴요. 자기한테 좋은 것이면 좋아 했다가 싫어했다가 평생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우리는 평생 주님의 주체와 내 이름과 주님의 이름의 다툼. 결국 우리가 이렇게 함께 앉아 있듯이 나중에 본향 가면 또 같은 그물 구조에 걸려 다같이 멀찍이 앉아 있을 것을...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살아갈 동안 자기 눈에 안 보이면 자기 위주로 돌아 섭니다. 그게 바로 주의 복음으로서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한 번 봅시다. 강의 참 어렵다. 파열. 찢어짐. 그 다음 묵시가 나오고 어렵지만 토요일 날 참석 못하시는 분을 위해서 미리 땡겨서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절 다시 봅시다. 다시 보고 제가 묻습니다. 도 전함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왜 싫어 합니까? 왜 십자가 부활 전하면 왜 싫어합니까? 내가 주인이 아니니까. 갑자기 내 중심이 뭐 되니까. 내 주체가 외부의 주체에 의해서 무시 당하고 의미없이 되버리고 내가 우주의 중심인줄 알았는데 중심이 뭘로 이전되어 버렸다? 십자가 부활이 중심이 되어 버렸죠. 그럼 나는 뭐가 되요?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나의 본성은 가만두지 않죠. 나는 내 중심으로 사는데 그리스도의 중심이 되버리면 나는 갑자기 분노가 일고 화가 치밀고 왜 내 말을 무시해. 왜 내 자아의 주체, 내 행함의 집합체를 왜 무시해. 알랑 바디우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 믿는 사람 아니예요. 어느 누구도 돛대고 어느 누구도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철학자가 밝혔지. 만약에 알랑 바디우한데 예수님이 중심이라고 하면 예수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도 너의 우상숭배라고 하는 거예요. 왜그러냐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사람 눈에는 뭐로 보이느냐면 유로 보이고 예수 믿는 것도 인간의 가능성으로 믿을 수 있다? 없다? 그 사람한테는 믿을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의 집합을 나는 불가능성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글쎄 우리 주장이 그것이라니까. 우리 믿은 것은 은혜라고 이야기 해도 그 사람은 못 알아 듣는 거예요. 은혜라고 하는 그것이 너희들의 고집이었다고 보는 거예요. 개혁주의측이 그렇죠. 왜 자꾸 그렇게 신앙고백을 무시하느냐 하는 겁니다. 신앙 고백을 하는 주체가 누구냐?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었다는 겁니다. 청교도가. 청교도가 그것 아닙니까. 복음은 그게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신다고 하면 글쎄 내가 믿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셔서 내가 믿었다는 거예요. 청교도가 화를 내면서 주께서 믿게 하셔서 내가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현재 개혁주의자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결국은 나를 건드리지 마라 이근호 너도 예수 믿고 나도 예수 믿는데 건드리지 마라 같이 예수 믿으면 방금 이야기 한 것처럼 십자가만 전하면 되는데 왜 십자가 마을에는 왜 십자가만 주장하느냐 마치 어떤 용감한 사람은 그 말을 하고 용감하지 않은 사람은, 머리 쓰는 사람은 못하죠. 왜냐하면 얼레리 꼴레리 십자가만 주장하더라 했을 때 진짜 예수 믿는 사람한테는 그럼 너가 전했다고 나올 것이 뻔하니까. 차마 말을 못하죠. 십자가만 있다고 해 놓고 미워하는 것을 보니까 십자가 정신이 없다는 것이 들통난 것이 부끄러워 가지고 십자가 마을엔 이근호만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마을에 십자가 있다는 것을 차마 비평 못해서 너희들만 십자가 있냐? 그래서 십자가만 있으면 우리 함께 십자가만 이야기하자 하면 안 해요. 성경엔 부활 성령의 열매가 있는데 왜 그걸 다 빼고 십자가만 이야기 하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에게는 십자가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 믿는 우리의 행함도 우리의 의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태달라고 하는 소리가 나오는것을 봐서 당신은 십자가 믿는 것을 흉내내는 사람이지 결코 이런 성령 받은 영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으로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영의 세계는 어떤 것이라고요? 인간의 유와 가능성을 모두 철폐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소급해서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하여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성령이 주고 받는 다는 것이 증거되는 그런 세계가 영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걸 시기하고 위선자는 뭐라고 합니까? 그래 내가 그걸 믿는다 하잖아 라고 하면서 근데 왜 인간을 무시해. 예수 믿고 난 뒤에 인간이 의를 행할 수 있는데 왜 그것을 빼버려. 주체가 예수님인데 예수 믿는 우리 주체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너는 죽었고 너 안에 그리스도가 산 자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인데 저쪽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죽었다가 살아난 이 주체를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그거거든요. 몇 년 전에 그 이상한거 했잖아요. 주께서 죽었다가 살아 계신다 라고 주체를 죽게 하니까 그쪽에서 하는 말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증거가 우리니까 우리를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너 믿음안에 산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주체가 뭐로 바꼈다? 나에서 누구로 바꼈다? 주로 바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도록 하게 하신다. 그들은 뭐라고 하냐면 그 하는 것이 우리 입술로 한다는 거예요. 입술로 하는 우리를 인정해 달라. 그러면 나는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증거하게 된다. 그쪽이 하는 말이 이 목사는 주를 믿는다는 말을 못한다. 물어봐라 못하니까 그렇지. 그러면 나는 누가 죽게 하셨느냐 질문을 해야 그게 영적인 세계에서 하는 질문이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왜 나는 그것을 원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인가? 라고 묻는 것이 영의 세계에서 묻는 질문인 것입니다. 나는 왜 이것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가? 항상 주체는 주님에게 돌려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성령 받은 사람의 흔적이라는 이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긴긴 시간 또는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가 어떤 흐름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작한 일도 아니고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벌어진 일이 나로 하여금 본향 진짜 고향으로 가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가게 하면서 우리는 죄 지은 것 밖에 모르고 돌아서면 또 내 중심이고 하지만 고맙게도 그 짧은 틈 사이에서 십자가로 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수시로 깨닫게 하시니 이미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인 것을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