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090528b행1장b예수님은주이시다b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주제의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천천히 한 번 정리하는 뜻에서 다시 하면 사도행전의 주제가 주님의 하실 일. 주님의 작업. 주라는 것은 여호와라, 여호와의 작업이다. 십자가 이후에 여호와 작업이 사도행전의 주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아니라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하면은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주님이 개입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 했습니다. 그 예로 든 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예수님의 하신 일로 영광이 되는데 이것은 신약 성경의 축복과 저주가 누굴 기준으로 한다? 예수님의 말미암아 영광이 되기 때문에 영광이 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오고 영광이 안되면 저주가 오게 되어 있거든요. 축복과 저주가 주님으로 결정이 되는데.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런 것이 구약에도 있느냐? 구약에도 이런 근거가 있느냐? 제가 구약의 근거로 창세기12장을 이야기 했습니다. 거기 보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제가 이야기 했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냐? 아니예요,아니예요. 대단한 인간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처음에 아브람이라는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인데 여기에 뭐가 왔느냐 하면 언약이 주어지니까 대단한 사람이 되었죠. 그런데 그 언약을 뭐라고 했죠? 아까 끝부분에 그 언약을 뭐라고 했죠? 할례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할례 언약이라는 것은 뭐냐면은 가죽이 이렇게 있고 몸체분야가 있으면 가죽과 몸체를 분리시키는 언약, 뜯어내는 언약이라 뜯어내야 해요. 인간은 맨 정신으로는 아브람 밖에 안되니까. 뭔가 그 인간을 확 뜯어내 버리면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고 아브라함이 들어 있고 예수님이 들어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천국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는 설교 하기 전에 늘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한 번 적어 볼께요. 저는 교인들 앞에 설교할 때, 강의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설교할 때, 저래서 천국 가겠나? 저렇게 살아서 천국 가겠나? 라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천국 가는데 라는 것에 대해서 답변을 하기 전에 천국 가야 되요. 천국을 가야 되요. 이유없이 무조건 천국 가야 됩니다. 천국 갈려면 우리 안에 뭐가 있어야 하냐면 이것을 크게 쓸께요. 우리 안에 언약이 있어야 되요.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베드로 전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가 어떤 말을 하든지간에 어떤 봉사를 하든지간에 너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피아노 예를 들었죠? 우리 재원이 피아노를 칠 때, 남들 보기에는 재원이가 피아노를 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해주셨다는 그 언약. 아브라함 같은 그리스도의 언약이 있을 때 주님에 의해서 구원 받습니다. 식당에서 있을 때 재아씨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해놓고 진짜 사랑한다면 지옥이 없어야 되는데 사랑한다고 해놓고 지옥 보내면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렇게 할 때, 제가 답변하기를 요한복음 17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자기가 구원 받을 사람을 사랑한다. 아들의 속한 사람을 사랑한다. 이게 정답인데 왜그런가 하면 엄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할 때 자식은 자기 밖에 없다고 하지만 엄마의 DNA. DNA이 알죠?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유전정보. 엄마의 DNA가 반이나 들어 있어요. 나머지 반은 누구거예요? 아빠거지. 엄마의 자기 것이 들어 있으니까 그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잖아요. 그만큼 자기 것이 들어 있으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보고 끄집어 내신다니까요. 낚시할 때, 낚시가 어떻게 생겼어요? 밋밋하게 생긴게 아니라 탕하고 걸렸다 하면 고기가 빠질 수 있어요? 없어요? 빠질려고 하면 더 쪼이게 되어 있잖아요. 그처럼, 낚시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와 버리면 껍데기는 관계없어요. 어떤 껍데기인지 관계없이 껍데기가 어떻게 살든지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요소로 인하여 그 사람은 빼도박도 못해요. 아무리 탈출을 강행해도 안되요. 하나님의 언약이 그런겁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식을 낳게 했죠. 아브라함 자식이 한 사람 누구라 했죠? 이스마엘. 또 한 사람은 누구라 했죠. 이삭. 이삭인데, 아브람속에서 나온 이스마엘은 결국은 버림 받아요. 버림받고,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나긴 했지만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이삭은 구원 받아요. 이게 갈라디아서4장에 나와요. 두 언약이 있는데 하나는 저주받은 언약과 복받은 언약이라고. 자,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레미야 4장 4절. 마음의 가죽을 벗겨라 이 말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어떤 가죽에 덮혀 있다는 것. 이것은 비언약이죠. 이스마엘적이죠. 하나님의 가죽이 덮혀 있는데 이것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자꾸 자신을 껍데기로 보죠. 아까 처음에 제가 했죠. 인간의 자아 속에는 뭐가 들어 있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기억이 들어 있죠. 이것은 가죽에 해당되는데, 이것을 육이라 하는데 이것을 벗겨 버리면 내것이 아닌 외부에서 온 것, 이질적인 것, 사실은 예수님의 것이죠. 나는 내 것만 있는 줄 알았지만 예수님의 것이 내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이 홀라당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죽이 벗겨지면.....
자, 이제부터 조금 어렵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도 어렵지만...내 것과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것의 차이점이 뭐냐? 내 것,나의 것과의 예수님 안에 있는 차이점이 뭐냐? 이 차이점이 어렵기 때문에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내 것이라 하는 것은 내 행위로 구원 받는 것, 이것 내 것이죠. 여기엔 윤리 도덕 양심 성격 유전적 요인 미친 자 또는 여러 가지 정신병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유전적 요인, 여러가지 성질...예수님의 것은 이야기할 것 없죠.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한 약속. 그러면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우기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행위로 지옥가는 것 자기 행위로 지옥가는것. 우리 재아씨에게 물어 볼까? 니 행위로 지옥가나? 우리 이미아씨에게 물어볼까요? 이미아씨 행위로 지옥갑니까? 아니죠. 그게 아니예요. 이삭이 자기 행위로 태어났습니까? 아니잖아요. 이삭은 태어나고 보니까 이삭이라. 태어나고 보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 났어요. 따라서 예수님의 것은 뭐냐 하면 내 행위로 지옥가는 것도 아니고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받는다는 요소가 내 안에 들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공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행위. 둘 다 있습니다. 이게(예수님의 것)있고 저게(내 것)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내 것과 예수님의 것, 이것이 둘 다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내 것도 있고 예수님의 것도 것이 있는데 항상 내 것은 뭐냐 내가 뭘 했더니만 복을 받았어 내가 뭘 안했더니만 저주받았어 다음 부터는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이게 전부 다 바로 뭐냐 하면 예수님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 자살로 마감되든지 어떻게 되든지간에...바라기는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이 책임지지 마세요.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평생 스트레스 받아요. 내 인생 스스로 책임질려고 하면 아무리 성공할라고 해도 결국은 허무로 끝나요. 허무. 니체가 여기...허무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허무는 소극적 허무와 적극적 허무가 있는데 소극적 허무는 쇼펜하우어. 적극적 허무는 니체라는 사람입니다. 적극적 허무는 굉장히 밝은 것 같은데 속에는 뭔가 공포가 들어있는, 쫓기는 것, 굉장히 밝은데 뭔가 자꾸 쫓겨. 내 인생을 내가 추스려야 할텐데...내가 어떤 한계에 부닥쳐서. 이 놈의 인생을 탈피해야 할텐데 그만한 능력과 힘도 없고 아이디어도 없고 재주도 없고 열성도 없고 열심도 없고 인내심도 부족하고 항상 내 것은 나를 추궁해. 재아씨 추궁이라는 말 알아요. 나무라는 것, 자기에게 벌 주는 것. 우리 재아씨는 자기에게 벌 준적 있어요? 이 못된 놈아 너는 나빠 앞으로 너는 밥도 먹지마..아직 어리니까..자꾸 나를 질책하는 거예요. 나를...인간아 인간아 니가 이래 사니까 이 모양 이 꼴이지. 자꾸 질책하는 거예요.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엄청난 짐이 됩니다. 평생토록 이것이 없어지지 않아요. 바보야 바보야 아!!! 나는 바보처럼 살았군요. 맨 날 자기를 치는 거예요. 그 걸 보고 성화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네 자로 "놀고 있네" 앞에 두 글자 더 붙이면 "자슥~놀고 있네" 그래 천국이 그렇게 만만한줄 알았더냐 너가 완벽한다고 천국을 갈 것 같으면 부처도 갔다. 가룟 유다가 얼마나 양심적이었으면 자살을 했겠습니까? 더러운 짓 해 놓고 자살한 사람 많습니다. 진중권씨가 이런 이야기 했죠. 노무현씨 죽었을 때, 아이구 이 노무현씨야 전과 14범도 자살 않고 잘 살고 있는데...전과 14범이 누군줄 아세요? 전두환이예요. 전과 14범도 자살 않는데 당신이 왜 죽느냐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것!!! 양심을 못버려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양심을 못버립니다. 아이고 내가 그런 실수를 내가 그런 바보같은 실수를 하다니 아!!!도저히 내가 나를 용서 못한다. 평생 우리는 그런 자아를 못버립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는 인간 하나님은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누구하고 의논하시느냐면은 그렇게 몸부림치는 우리를 거들떠도 보지 않으시고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공로하고 주께서 주와 의논해서 이 껍데기 같은 우리를 건져 가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행전 주제가 되는 주께서 하신 일이 이겁니다. 그러면 이런 껍데기 내 것만 챙기는 내 스스로 자처하고 자기 과시하는 역시 나는 훌륭해 라는 자기 자존심 챙기는 이것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내 것이 있을 때, 내 것에 둘러 싸여 있을 때, 예수님의 것과 내 것이 얼마나 극대 극으로 큰 차이가 나느냐 이렇게 보여 주기 위해서 이 내 것 속에 둘러 싸인 채, 예수님의 것이 튀어나오게 합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사도행전 성경 해석 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성경 해석의 종류가 몇 종류 되겠어요? 두 종류 되겠죠. 내가 내 것으로 완벽을 기하는 성경 해석 나오겠죠. 자, 이제부터 사도행전 본다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이젠 주님의 형상을 본 받아야지 나는 남보다 더 착한 사람 되어야지 나는 개 같이 살았지만 이젠 성경처럼 살아야지 아!!! 정신 바짝 차려서 이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라는 내 것의 해석이 있겠죠. 그 다음에 또 다른 해석이 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해석이죠. 왜 나는 쪼다냐? 왜 나는 그렇게 주께서 사랑해도 나는 내 완벽만 추구하는 쪼다냐? 하는 그 시원한 해석이 나오겠죠. 그래서 사도행전의 해석은 두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행전 1장부터 보면서 이 두가지 해석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보일 겁니다. 똑같은 사도행전의 본문을 두고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자, 여기 보면 내 것의 해석과 주님이 해석이 있는데 쭉 적어 볼께요.
내 것의 해석은 공포심, 미흡함, 미완료... 공포심에서 공포심 제거 미흡함에서 만족 미완료에서 완료 있는데 이게 내 것 해석이고.
주님의 해석은 이미 완료, 이미 완성, 이미 성취, 이미 거저 주심, 이미 새로운 피조물 됨.
다르죠?
이것(내 것의 해석)은 뭐예요. 뭔가 다가서는데 앞에 점선이 있죠. 이상적인 나의 최고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여분이 남아 있죠. 점선은 아직까지 도달되지 않은 거예요. 이것(주님의 해석)은 뭡니까? 이미 실선이예요. 이미 여기 차가 있어요. 있어서 돌아보는 식이라 내가 어떻게 해서 어떤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께서 다 이루어 주셨지? 왜 내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거저 구원해 주셨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즐기는 식이죠. 이것(내 것의 해석)은 공포심, 뭔가 쫓기는 듯한 아직도 미흡해 아직도 멀었어 더 나아가야 돼. 완벽해야 돼. 이것은 반성의 연속이죠. 이것(주님의 해석)은 느긋함이죠. 악마는 느긋함에 질린다. 악마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느긋함이예요. 악마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줄 알아요? 너는 초조해라.너 배고프지? 40일 금식해서 배고프지? 너는 초조해야해 돼. 너는 지금이라도 기도해서 돌을 돈으로 바꿔 그 돈으로 떡을 사서 먹어야 너가 메시야의 일을 할 수 있어 그 다음에 시험이 뭐냐면 사람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너는 완전히 메시야야 따라서 너는 성전어떻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천사가 와서 발을 받쳐 주는 기적을 베풀면 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추종하리라. 세 번째 시험은 세상의 모든 권세를 너가 쥐고 있어라 그게 너 목표잖아. 이게 바로 사실은 우리가 반성하는 목적 우리가 회개하는 목적 우리가 자기 추궁하는 목적이 사실은 이런 공포심으로부터 보다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그런 심보를 마귀가 예수님한테 유혹거리로 템테이션(temptation,유혹)으로 준 거예요. 2등해 보세요. 2등하면 앞에 뭐가 남이 있습니까? 1등이 남아 있죠. 그럼 1등 해보세요. 앞에 뭐가 남아 있죠. 1등이 대상이라면 허무가 남아 있죠. 허무가... 노무현씨가 만약에 옛날 사법고시에 패스하지 않고 과수원 농사꾼이라면 지금 이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 농협 공판장에 가서 물건 값 흥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엉위 바위에 올라갈 생각은 할 필요도 없어요. 물건 값 흥정하느라...허문데, 나의 것이 허구로 끝나는데 왜냐하면 1등을 해봐도 허무가 남아 있고 대상을 해봐도 허무가 남아 있어요. 대상하면 또 대상해야되요. 다른 사람의 눈이 있어요. 대통령이 되면, 자기 이미지가 뭐냐 하면 청렴한 대통령. 나는 불의한 돈을 먹지 않은 어떤 역대 대통령보다 깨끗한 대통령. 누가? 노무현씨가. 천 육 백 억을 해먹은 사람도 있는데 나는 깨끗한 대통령이다. 이 깨끗함을 유지하는 방법이 뭐예요? 장렬하게 죽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허무입니다. 이 허무를 없앨려면 예수님이 만들어낸 나라는 자아가 따로 있어야 됩니다.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자아는 말고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 내는 자아가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 속에는 내 것, 부모로부터 받은 내 것이 있고,내 성질, 내 성깔,이게 뭐냐면 아까 이야기 한 나의 것. 이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예수님의 백성,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새로운 자아가 여기에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내 속에 죄가 있는데 이 죄는 자꾸 완벽에 거하려고 하는데 자꾸 완벽할려고 하는데 완벽이 안되는 늘 미흡한... 그래서 오호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허무한 사람이다. 이 허무한 인간을 세상에 주께서 나를 십자가로 건져 내셨구나!!! 허무하지 않은 인간을 건져주는 것이 허무한 인간을 건져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결합에서 보니까 전체적으로 보니까 허무하지 않은 거예요.
아까 그림을 봅시다. 하나님 사이에 내가 있죠. 처음에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주님이 있을 때 나는 죄인이고 나는 허무할 때, 허무하고 죄인으로 있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덮쳐서 아까 2층 이야기 했죠? 2층의 할머니가 운동하다가 1층으로 내려 앉을 때, 졸지에 나는 1층에 있으면서 2층 맛을 본다고 했죠. 주님이 가신 코스. 임신 출산 시련 전도 십자가 부활 승천...예수님의 코스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의인 되어서 구원 받는 거예요. 의인 되었다는 조건은 죄인에서 의인의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의인의 자격으로 아버지께 구원을 받는 거예요. 아버지 집에 돌아온 탕자가 뭐했습니까? 객관식 1번 농사지었다 2번 착하게 살았다 3번 아버지 말에 더욱더 순종했다 4번 아버지만 자랑했다. 몇 번 이겠어요? 탕자의 이야기 알아요? 모든 재산을 다 기생과 더불어서 써버리고 나중에 빈털털이 되가지고 부끄러워서 다시 돌아온 탕자. 그 탕자의 이후 생활이...1번 아버지 말에 순종했다 2번 농사 잘 지었다 3번 자기 반성에 들어갔다 4번 아버지만 자랑했다. 몇 번 이겠어요? 재원이 몇 번 이겠어요? 너가 탕자라고 생각해 봐. 몇 번 이겠어요? 4번이 정답이죠. 왜냐하면 가락지를 끼었거든요. 그 가락지가 자기 노동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집 나간 탕자가 돈 다 날리고 왔는데 아버지가 뭘 준비했느냐면 아버지의 가락지를 준비했고 아버지의 옷을 준비했고 소를 잡았다. 그래서 걔는 그 다음부터 동네에 나가면 무슨 가락지? 그 가락지는 아버지의 공로로 주신 가락지. 아버지가 입혀준 옷이고. 자기의 입은 것 모든 것. 전부가 아버지가 그냥 거저 주시는 것이예요. 이게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화와 관계없이 내가 변화되든 상관없이 일방적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통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행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자기 아들. 예수님의 요소, 예수님의 DNA, 예수님의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 있으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영을 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8장 보세요. 로마서 8장 8절에서 11절까지 한 분씩 읽어 봅시다. 8장 8을 누가 먼저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세요.
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이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여기까지 조건이 뭡니까? 그 사람이 육신이 아니고 영이야 라는 그 조건이 뭐예요? 그 사람 속에 뭐가 거해야 되요? 영이 거하면 누구든지 그 사람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 되는 거예요.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영은 우리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속에 들어왔던 이질적인 영을 말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11절 누가 읽어 보세요.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의 관심사가 뭡니까? 우리 안에, 우리를 해부해 보고 관심사가 뭐예요? 너는 세 살 때 어떻게 했어? 일곱 살 때 어떻게 했어? 이걸 묻는게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관심사가 뭐예요? 너 나이 얼마야 그것이 아니고 여기서 뭘 찾아요? 본문 11절에 보면 뭘 찾습니까? 하나님이 집어 넣어 준 자기것이 있느냐를 찾죠. 그게 뭐라고 되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죠. 죽을 우리 몸이 죽어야 마땅한데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우리가 행실을 바르게함이 아니라 죽을 우리가 무엇 때문에 다시 살아요? 아까 낚시라 했죠. 낚시라는 것은 이질적인 것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잖아요. 우리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영에 꿰여서, 영에 의해서 죽을 너희 몸도 그 영으로,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라. 이게 뭐냐 하면 영으로 해석하는 것과 나의 것, 육으로 해석하는 것, 차이점이 이렇게 다르면서도 같이 우리 속에 있어줘야 비로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고귀한 분이신가 부각이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생각엔 내 것이 없어져 버리고 완전 도사처럼 신선처럼 아주 진짜 부처처럼 아니 예수처럼 뭘 해도 완벽하게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허락하질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뭔가 쫒기면서 평생 허구에 시달리고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그리고 서로 자책하면서 심지어 자살까지 하면서 뭔가 자꾸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 쫓기면서도 그러면서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아!!!이런 것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란 말씀 때문에 로마서8장 11절의 약속.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무엇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이질적인 것,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다면 한 번 물어 봅시다. 그럼 내 속에 영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압니까? 진짜 예수님의 영이 있으면 자기가 맞습니다. 나는 곤고합니다. 허무합니다 라는 말만 할 뿐 아니라 허무하기 때문에 느긋하잖아요. 허무하기에 너무나 느긋하다 이 말 됩니까?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허무하기 때문에 느긋하다 다른 말로 하면 허무를 느끼는 여유로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옛날 음악 크게 틀어 놓고 누워서 들으시면서 허무를 느끼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남들은 허무가 자살로 이어지지만 나의 허무는 느긋함으로 여유로움으로...더 쉽게 말해서 실컷 한 번 울고 싶을 때 울어 보세요. 운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고 우는 것을 참는다고 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는 것은 우는거고 구원받는 것은 주의 영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하기 전에 실컷 한 번 울어 봅시다. 그러데 이상하게 눈물이라는게요, 눈물의 특징이 그만 나와도 된다 싶지만 눈물은 계속 나와요. 끝도 없어요. 희한해요. 내가 마셨던 물의 양과 비교가 안되요. 내가 물을 한 컵 마시면 눈물은 두 컵 나와요. 아무리 울어도 눈물은 또 나와요. 울면서 구원 받는 울면서...운다고 해서 믿음 없는 것도 아니고 운다고 해서 인생 실패하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느긋함의 일종이고 웃을 때 또 웃으세요. 웃는다고 해서 교만한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면서 구원은 챙기고 이 주제가 전도서 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유용한 말씀이 많아요. 쓸데없이 돈 아끼지 말고 있는것 맛있는 것 니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죽어라. 쓸데 없이 돈 모으지 말고 평생에 돈 모아야 허무한건데 평생에 낙이 뭐냐 니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돈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그것을 낙이라 했어요. 아!!! 성경 위험합니다. 성경 아주 위험한 말이예요. 이유가 뭐냐 물어보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기 때문에. 앞뒤가 안맞는 것 같죠? 헛되고 헛되고 헛되기 때문에? 뭔가 세상적으로 말하면 인생 한 방이다 라는 식으로 막장가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게 아가서와 연결시키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허무조차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완료된 사랑이 있기 때문에 허무도 즐길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성경을 봄으로 말미암아 이젠 덜 울고 뭔가 어떻게 인격이 완성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인간 못난 것은 이미 기정 사실이예요. 인간 못난 것은 이미 기정 사실로 있기 때문에 못난 인생 미련 갖지 말고 이런 인간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솜씨가, 작품이 어떤 솜씨인가를 아는 것이 사도행전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주님은 주님이시구나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직수씨가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그게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땡기는대로 살면 되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죠? 쓸데없는 조심스러움은 병이예요.
자, 이제 사도행전 들어가 봅시다. 사도행전 서론 길은데 다음 시간에 또 할겁니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도행전 1장은 사도행전이 하나의 객차라면 앞에 객차가 또 있어요. 그 객차가 예수님의 일생. 여자의 일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예수님의 일생 다음에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공부 잘 했는지 봅시다. 나의 일생은 어디에 있어요? 우리 재원이 인생 어디 있어요? 예수님의 일생을 빨간 글씨로 쓰면 나의 인생은 어디에 있어요? 나의 인생은 여기 있겠죠. 그러면 사도행전은 누구와 연관이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일생과 관련된 사도행전. 빨간 예수님의 일생과 연결된 사도행전이고 나의 인생은 검은 것으로 시작해서 검은 것으로 끝나 버리죠. 그러면 나의 일생은 빨간 예수님의 인생과 상관이 없죠? 예수님의 일생이 무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흐지부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생이 어디에 효과를 줘요? 효과...효과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어린 재아씨는 굿하는 것 봤어요? 무당이 굿하는 것 봤어요? 무당이 춤추는 것 봤어요? 실제로 본 적이 있어요? 못 봤죠? 요새는 굿 잘 안하니까. 그러면 점쟁이집에 가 봤어요? 재원이 해 봤어? 애들이 장난 삼아 해보는 점치는 것 해봤어? 아주 모범적이 학생이군요. 심심풀이 토정비결 사주팔자 장난 삼아 해보는 것. 사실은 진지한데 장난 삼아 한다고 하죠. 좋으면 좋고. 그러면 왜 봅니까? 사람들이 점을 왜 봐요? 그것을 두 글자로 하면 효과죠. 만약에 점치는데 돈 이 만 원 주고 오 만 원 주고 봤는데 효과 없으면 안하죠. 그런데 저 집이 용하대 용해 쪽집게래 쪽집게. 쪽지게라는 것은 빈틈없이 다 정확하다는 말입니다. 그 효과를 보고 가죠. 지금 여기에 교회를 검은교회.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사람들이 움직이죠? 왜 갑니까? 지금 점쟁이 집에 사람들이 점 치러 가고 굿하는 집에 굿하러 가는데 그러면 교회를 왜 가요? 교회는 뭘 노리고 갑니까? 효과죠. 효과를 보러 가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현재 사람들이 교회 와서 효과 볼려고 하는 것은 검은 사람들의 검은 교회죠. 그러면 여기 효과가 무슨 효과입니까? 검은 효과죠. 그런데 제가 빨간 글씨로 썼어요. 예수님의 일생은 빨간 것으로 되어 있고 사도행전도 빨간 글씨로 되어 있다면 여기 예수님의 일생과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효과는 검은 효과입니까? 빨간 효과 입니까? 빨간 효과죠.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나의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무슨 효과예요? 검은 효과죠. 그렇다면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효과를 이야기 해줘야 교회예요? 안그러면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점 집을 찾는, 굿을 하는, 사주팔자 보듯이 자기 이득이 되는 그런 효과를 찾는 어느 것이 교회예요? 어느 것이 교회예요? 예수님이 세운 교회가 교회가 되잖아요. 그러면 사도행전은 이 두 가지 교회가 다 있겠습니까? 두 가지 다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도들의 편지 속에 이 두 가지의 효과가 다 들어 있죠. 갈라디아서1장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이야기는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앞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이 객차라면 그 앞에는 예수님의 일생이 있죠. 그러면 이걸 빨간 글씨로 쓰면 예수님의 일생이 그대로 이어져서 사도행전이 되고 사도행전에서 뭐가 오겠습니까? 효과죠. 예수님의 효과죠. 우리는 예수님의 일생이 아니기 때문에 검죠. 검은 인간들이 모인 곳이 뭐라고 했습니까? 검은 교회. 검은 교회에서 바라는 것은 빨간 효과 입니까? 검은 효과 입니까? 시커먼 효과. 이것은 점치는 것이나 굿하는 것하고 마찬가지겠죠. 그런데 정작 사도행전이 줄려고 하는 효과는 검은 효과가 아니고 무슨 효과? 예수님의 효과죠. 예수님의 효과는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의 일생에서 나오죠. 예수님의 일생을 사도행전에서는 진짜 교회 맞나? 예.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생에서 얻은 것을 너희에게 공짜로 효과 줄께. 이게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교회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어떤 교회가 나오겠습니까? 인간들이 세운 엉뚱한 교회와 진짜 교회와의 마찰과 다툼도 사도행전에서 나오겠습니까? 안나오겠습니까? 나오겠죠. 그런것도 사도행전 공부하면 나온다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데오빌로여 그 다음에 예수님에 대해서 먼저 쓴 글에, 먼저 쓴 글이 누가복음이거든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일대기 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에 먼저 쓴 글에 성령으로 했던 그것을 이제는 승천의 날까지 기록하였노라. 이제는 승천부터 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것이 시커먼 너희에게 죄 많은 너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를 보라. 이게 사도행전 1장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효과가 뭡니까? 그 효과가 뭐냐 하면 그 효과를 크게 쓸께요. 그 효과를 성령이라 했어요. 누가복음 9장 9절부터13절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어떤 아비가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며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비가 어디있느냐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게 되거든 하물며 그 자식에게 사랑하는 아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입체감입니다. 어떤 입체감? 천국의 구조의 입체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나왔습니다. 천국의 구조라는 말을 오늘 강의에서 처음 했습니다. 왜 제가 구조라는 말을 썼느냐면 구조가 되어야 우리는 거기 일부분으로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만약에 카드(?)같면 성령이 나의 일부가 되버리죠. 하지만 성령이 구조가 되버리면 오히려 내가 성령이 만들어 내는 천국의 구조에 하나의 기둥처럼 밑에는 하나의 발판처럼 하나의 부분이 되죠.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구조하면 장충체육관. 여기 대전에 무슨 체육관 있죠? 충무체육관 있죠. 충무체육관 갈 때 충무체육관을 내 안주머니에 넣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성령을 받는다 하니까 보통 사람들은 성령을 내 마음 속에 담을 수 있는 걸로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게 오류다 이 말이죠. 체육관 속에, 성령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들어 간다는 것은, 성령은 입체감이죠. 홀로그램.. 성령은 입체감인데 내려오는 천국의 구조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근거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나와요. 너희들이 서로 성령 안에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주 어려운 말이죠. 성령이 온다는 말은 갑자기 내가 아주 작아져 버리고 작아진 나에게 뭔가 덮치는데 보니까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갑자기 사람들은 내 걱정 자책하고. 나는 뭐야 나는 죽고 싶어. 내가 인간이야 인가도 아니야. 나는 죽어도 마땅해. 맨 날 자신에게 몰두하다가 갑자기 뭔가 위에서 턱하니 와 보니까 무슨 생각이 달아나 버려요? 나는 실력이 얼마며 나는 한 달 수입이 얼마며 내 가족이 몇 명이며 이 생각이 없어져 버려요. 강아지 밥을 먹였을까? 그런 생각이 없어요. 지금 재원이 몇 시 인데 아직도 집에 안들어오지 그런 생각이 안나요. 갑자기 성령이 와 버리면 그걸 가지고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면 삼층천에 올라가니까 내가 거기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돌입되 버려요. 그래서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변화산 알아요? 변화산에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올라 갔는데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변해가지고 죽었던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니까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구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했죠. 그 순간 베드로가 누구 생각 안했습니까? 자기 생각 안했죠.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을 때, 초막 셋이 각각 누구용입니까? 하나는 예수님 하나는 엘리야 하나는 모세죠. 그러면 자기 것은? 자기 것은 없어요. 그러면 뭐가 없어져요? 아까 이야기한 주제? 아까 질문한 주제? 성령 안에서 뭐가 없어 집니까? 자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생각나지 않아요. 이게 성령 안에 보면 천국의 구조 속에서 자아는 일부로 포함되기 때문에 생각나지 않아요. 이것을 주께서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만약에 강렬해 버리면 강렬한 채로 기도하게 되면 성령이라는 예수님의 효과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했던 욕망을 기도하게 되죠. 나를 키우는 용도로서 기도하게 되죠. 보통 한국 아줌마 같으면 일단 역시 머니머니 해도 돈. 두 번째 자식 성공. 세 번째 건강. 네 번째 나름대로 자아찾기. 다섯 번째 같으면 자기가 교회 다닌다면 자기 교회 부흥..이걸 원하죠. 요런걸 주게 되면 뭐가 커집니까?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는 점점 더 굳어지고 강력해지고 자아는 더 커지고 이렇게 되죠. 자아가 이런 것이 돈도 안되지 자식 성공도 안되지 건강도 나빠져 남한테 실수해 가지고 공개적으로 아주 수치를 당해 자기가 이렇게 부끄러운 인간인 줄 온 천하 온 신문지상에 인터넷에 떠돌면 이럴 땐 사람 죽고 싶죠. 그리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부흥이 안되고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이럴 땐 결국에 남는건 뭡니까? 자살하죠. 농약 먹고. 보통 농약을 많이 마시는데. 결국 천상천하 유아독존. 철학에서 독아론. 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이런 인간이 원하는 것이 그대로 있더라도 이 윤곽이 실선이 아니고 점선으로 변하면서 흐물흐물해져요. 우리 재원이 계란국 먹어 봤어요? 계란을 탁 깨면 계란이 다 어디로 가요? 계란이 뭉쳐져요? 흩어져요? 흩어지죠. 자아라는 윤곽이 흩어져 버려요. 그러면 따로 자아라는 윤곽을 붙잡을게 없어요.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아라는 윤곽이 흩어져 버리니까 따로 붙잡을게 없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감사와 이미 성취된 이미 완성된 그 성령의 구조 속에 주님이 만들어준 용서라는 건축물, 용서라는 구조물안에 하나의 내가 갇혀있어 버리면 놓여 있어 버리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용서가 되기 때문에 그게 너무 좋아서 자기 생각은 흐물흐물해져 버립니다. 식사비 내가 낼께. 차비 내가 낼께. 일본말로 그 다음에 기마이쓰는 거예요. 그 전에 원수가 뭐로 변합니까? 진짜 원수를 원수라 하지 않죠? 뭐라고 합니까? 웬수죠. 원수가 용서가 되죠. 용서라 한다는 것은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한다면 용서가 안되요. 원수를 용서한다는것 자체가 자꾸 자아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용서가 안되요.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위대해지기 때문에 용서라고 하면 안되요. 원수는 잊는것이 최고지 용서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사과 들고 오면 골치 아퍼...사람이 연인 사이에 서글픈 관계가 뭐냐 하면 미운사이도 아니고 원수 사이도 아니고 제일 서글픈 관계가 뭐냐? 실례지만 누구신지.. 잊혀지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최고의 위기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문을 닫고 말을 안하는 거죠. 아...영화 10도라.. 재털이 어딨나? 리모콘은? 밥 차려줘?(말로 대답 안하고 몸짓으로만 함) 형제간에 그렇게 말 안하고 싸울 때 있어요? 없어요? 형 나좀 봐. 여기 좀 보라고. 눈을 안맞대죠.
바라기는 내가 나를 볼 때 잊어버리세요. 나하고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나라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지금 뭘 해야 되지? 그것만 생각하고 해야될 것만 하면 되지.
난 했는데 잘 했을까? 완벽 했을까? 어쨌을까? 저쨌을까? 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내가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가지고 거기서 점점 더 자기에게 큰 무게를 둬요.
그러면 자기가 쫓기게 되고 두려워지죠.
가만히 있어봐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기도하고 그만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행전을 첫 시간 이렇게 같이 보았습니다. 우리 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인정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천국가느냐 지옥가느냐 결정된다는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받아 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2009-06-17 13:07:56 녹취 : 이미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