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율법 8번 강의
05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동은교회) - 강의 8
서경수 2005-09-26 09:26:45, 조회 : 5, 추천 : 0
강의 8
이제 마지막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난 이유가 자신의 거룩을 과시하기 위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과 찬양이 자기에게만 집중되도록 하는 그러한 피조세계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고 만드신 것이 천국과 지옥이지요.
따라서 지옥 갈 사람들은 반드시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데, 민수기 16장 30-34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벌이시는가 하면, 그 정도로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거룩이 지상까지 쳐들어와서 인간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얼마나 하나님이 거룩한가를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지옥의 존재합니다.
이렇게 지옥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역시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기 전에 있는 임시적인 곳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장차 천국에서 작용할 원리와 지옥에서 작용할 원리가 한꺼번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간단한 구호만 외치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이런 구호를 외치는 것은, ?이 땅에서 어떻게 내가 잘 되는가? 혹은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벌을 적게 받고 편안하게 사느냐?? 라는, 이 땅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존하느냐 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기에 이런 구호를 외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떠날 동네가 땅인데 무엇 때문에 땅에 연연하는가 말이지요.
성도가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신다 하시고, 또 성도는 죽는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하셨지요. 이런 표현들은 우리가 땅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을 그대로 이용하셨기 때문에 이런 표현 자체에 집착할 필요 없이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 그대로 하면 되요. ?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이 말이 한 개인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을 통해서 ?네가 전에 있는 세상 자체가 사망의 세계이고, 새로 옮겨진 세계 자체가 생명의 세계?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역 교체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데, 개인이 구원을 받는데 영역 교체할 때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가 ?인자?를 분석해 보면 ?인자?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언약의 완성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 ?인자?가 온 것은 그전까지는 유보상태였어요.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자만 옮기고 사망할 자는 버리십니다. 이제는 완전히 구조조정을 해 버리지요.
그래서 여기에서의 사망은 단순히 개인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쪽 전체가 저주성이 있고 이쪽은 은혜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17장 30-31절 봅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옛날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허물치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제 구조조정에 나서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제는 허물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인자의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자의 때?에 대항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는 필요치 않음. 또는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음. 혹은 메시아가 오든 안 오든 아무 변함이 없음.?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사람의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때?와 ?인자의 때?가 서로 대판 최후의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방패박이에 나서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볼 때 ?인자의 때?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불신자는 ?사람의 때?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인자의 때?로 보면, 최후의 심판, 모든 것이 정리되는 그 때를 내다보면서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게 되고, ?사람의 때?로 보면, 인간은 진화하고 발전하고 번영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 학문이란 것이 뭐냐 하면, 정보의 되먹임에 의해서 정보의 질이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계속 업 그레이드 되면서 예상치보다 훨씬 돌발적인 돌연변이 같은 그런 정보가 뚝뚝 튀어나옵니다. 그것이 인류로 하여금 새롭게 한 걸음 더 진보할 수 있는 하나의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진화한다는 증거는 모든 학문에서 다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정보를 분석, 파악, 그리고 시행착오, 거기다가 예지, 내가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것이 더 추가되면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확실히 발전하거든요.
?인자의 때?가 이미 작업에 들어갔고, 인자가 성령을 보내서, 성령은 그냥 간직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인자를 증거하라고 준 것이거든요. 그리고 성령은 부도수표가 아닙니다. 성령을 주면 반드시 그 값을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반드시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빌립은 광야에서 이디오피아 내시와 만나게 되어 있어요. 도망칠 수가 없어요. 복음을 전하고 증인 노릇하는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우발적이란 말은 인간이 예상할 수 없도록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일은 성령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에 옆 사람의 인생을 내가 어찌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일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구조조정에 들어갑니다.
?인자의 때?가 되면 ?깨어 있어라?고 하고, ?사람의 때?에는 ?더욱더 번영하세. 영원무궁토록 번영하세? - ?우리 여왕이여 영원하라!? 이것이 영국 국가 아닙니까.
?인자의 때?를 느끼는 사람은 ?사람의 때?의 끝을 압니다. 마지막을 알아요. 사람의 때가 다 부질없지요. 그래서 모든 것이 사소한 일이고.
?사람의 때?가 부질없다는 말을 잘 한번 들어보세요.
부질없는 사람의 때를 제가 ?흐물흐물?로 표현했습니다. 나의 주체가 흐물흐물. 주체가 흐물흐물해 지는 것은 너무나 인자가 확실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흐물흐물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민감할 필요 없고, 예민할 필요 없어요. 비가 오면 오는 거지요. 하필 내가 휴가 받아 놀러 가는데 왜 비가 오느냐고 따지는데, 비가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중간에 ?나?가 개입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만 빠지면 비가와도 걱정이 안 되는데 ?나?가 개입되니까 비 오는 것이 걱정이 되요.
옛날이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두 자녀 중 한 자식은 소금장사고, 한 자식은 우산장산데 이 부모는 비가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인데, 왜 걱정입니까? 내 자식 장사 못할까봐 걱정을 해요. 여기에서 ?내?가 빠지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하나님 은혜로 비가와도 감사하고, 날씨가 맑아도 좋고.
뭔가를 걱정한다는 것은 주체가 너무 강해서 그렇습니다.
유영철 사건을 이야기 했지만, 유영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단단히 결심을 하고 치밀한 계획 하에 살인을 한 것입니다. 스스로 강력한 자아를 만들어야 살인이 가능하지 그런 죄를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닙니다.
유영철이 지옥 가는 이상으로 테레사 수녀도 지옥 가는 거예요. 사람 구제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밥 퍼주는 사랑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결심을 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왜 구제를 했습니까?? 하면, ?나도 모르게 그냥 하다보니까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되는데, ?하나님은 고와와 과부를 돌보셨는데 나도 하나님 본받고 싶어서 결심을 하고 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것이 바로 번영과 확산을 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힘들여 구제하고 지옥가고. 무슨 이런 손해 보는 장사가 다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의 값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할 일이고, 복음 전하는 것 그 자체가 내게 주어진 특별 보너스라는 것입니다. 전해서 뭘 얻는 것이 보너스가 아니라, 복음 전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부여받은 것 이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그런 귀한 특권입니다.
지금은 태국에 가 계시는데 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목사 되어서 기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런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것 그 이상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이것은 바울과 같은 고백입니다.
우발적이란 말을 좀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고 하는 것은 우발적입니다. 우발적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우발적으로 안 만들고 필연적으로 만들어요. 필연적인 이것을 가지고 ?역사?라고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발적으로 준 것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필요한 것 뽑아내고 필요 없는 것은 다 제거해서 역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역사를 가지고 과거를 통해서 미래까지 예측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학을 이루는 이성적인 작업이지요.
그러면 이 역사가 없는 곳은 없는가? 이 세상에 역사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삼성 그룹에도 역사가 있고 교회에도 역사가 있고 가문에도 역사가 있고 전부 역사가 있는데, 이 역사를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 역사에 ?나?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해 자기 정당화에 나섭니다.
예를 들면, ?이런 수련회를 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이번에 약 80명 모였기 때문에 다음번 모임에는 100명 정도 준비합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정판옥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어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올해 80명 모였으니 다음에 100명 모이도록 합시다.? 내일 예수님 재림하면 내년을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잖아요. 우발적으로 주셔서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라야 은혜가 되지, 내년에 만약에 십자가마을 수련회를 개최했는데 달랑 7명이 모였다. 서경수 목사 다리 부러져서 못 오고, 정판옥 목사 열심히 수련회 준비했는데 허리가 아파 못 나오고, 오용익 목사는 또 차 고장 나서 못 오고, 정락원 목사님은 수련회 오려고 나오는데 손님이 오셔서 못 오고 --
이런 우발적인 사유들 때문에 결국 7명 참석했잖아요. 그러면 ?작년에 80명 모였는데 올해는 겨우 7명인가?? 라고 하지 말고, 80명 모인 것도 한 명도 없는데 있게 하셨고, 7명 모인 것도 한 명도 없는데 있게 하셨고, 지금 7명 모인 것도 주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배후에서 구조조정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라는 어려운 말을 여기에서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손성식 목사님이 너무 어렵게 글을 써서 이걸 해명할 필요가 있어요.
둘 다 묵시인데 이것도 묵시고 저것도 묵시인데 사람들이 우발적인 묵시를 뭐라고 스스로 위장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것을 역사로 위장하기 때문에 묵시가 역사를 때려 부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묵시와 역사의 싸움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우발적으로, 하나님이 묵시로 계속 심판을 합니다. 그럴 때 인간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면 역사를 가지고 대처해요.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잘 하겠습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죄를 더 증가시킵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지금은 ?인자가 활동하는 때?인데 마치 사람이 활동하는 때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한단 말이지요.
자, 그러면 ?묵시가 우리 생활에 어떻게 역사하는가??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묵시가 어떻게 역사하는가 하면, 우발성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을 채우면 사랑의 우발성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이 모두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뭔가 하면,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거기에 반응을 보였는가 하면 십자가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나를 강권하게 되면, 내가 환란에 처하든지 궁핍에 처하든지 어떤 환경도 사랑의 강권입니다. 사랑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역사를 추구합니다(나는 옛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난번에는 조금밖에 못 이뤘는데 이번에는 더 많이 해야지. 자꾸 지난번과 대비하면서 더 나은 역사를 주장하거든요. 이 역사를 주장하는 주체가 사랑을 받게 되면 이게 흐물흐물해 져요. 흐물흐물해 진다구요. 마치 뼈 없는 오징어처럼.
사랑을 받으면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와 사랑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지요. 따라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게 되면 비로소 내가 죄인인줄 깨달아 십자가 은혜를 바라보게 되고 ----? 뭐 이렇게 복잡하게 나가는데 [두번째 사례]를 쓴 사람도 이런 경향이 있어요. ?우리가 유형철 보다 뭐가 나은가?? 하면서 뭔가 많은 것을 지적하는데 감사가 빠져 있어요.
감사가 빠지면 뭐가 되는가 하면, 억지로 예수님을 알아서 그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 내고자 발악을 하지요. 투쟁을 하면서 사생결단을 해요. 참 안타깝지요. 이런 사람은 고마움도 없고 감사도 없고 사랑도 없어요.
이렇게 되니까 갈수록 주체가 강화되고 스스로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려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시라소니처럼 온 천하를 헤매고 다니는 거예요. 부산 역에 가면 매일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하면서 전하는 사람이 있어요. 좀 쉬어가면서 하면 될 텐데 쉬지도 않고 해요.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고. 너무 기계적이에요. 무슨 우발성이 기계적인 것이 있습니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자기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 나는 흐물흐물해 져서 빠지면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우발적으로 베푸는 그 전체가 다 사랑입니다. 죄라는 것은 죄를 생각할 때만 죄가 있는 것이지 모든 것이 사랑이라면 죄가 날아가 버립니다.
로마서에는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죄란 것은 믿음 밖에 죄가 있어요.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반대하고 또 자기 역사 만들고 주체를 공고히 하고, ?거울아 거울아 내 모습이 어떠냐?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착한 사람 있냐?? 이렇게 맨날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는데 그럴 때마다 우발성으로 된통 당하게 되면 그 우발적인 사랑에 감사하면서 또 주체가 흐물흐물해 지고. 또 잠시 후에 자기 주체를 내세우고 ---
2004년 12월 6일 구원 받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2004년 12월 7일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금방 이 죄를 회개했으면 2004년 12월 8일 죽으면 괜찮은데, 2005년까지 계속 살면서 죄를 지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여기에서 2004년, 2005년 이것이 뭡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설정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주시는 대로 먹습니다. 일할 곳을 주시면 일하고, 사장님이 월급 안 떼먹고 주시면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켜서 이것을 나의 역사로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서 노조가 생기고 운동을 하게 된단 말이지요.
노조활동 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합니다만 노조활동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 이익 찾겠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위안부 할머니가 데모를 한다. ?일본은 사죄하라!? 위안부가 대모를 할 것 같으면 사창가에 여자들이 다 데모를 해야 합니다. 누구한테요? 자기 부모들한테.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느냐??고 데모해야 합니다.
그냥 흐물흐물해져서 잊으세요. 옛날은 지나간 거예요. 우발적인 것입니다. 너무나 자기 역사가 강하다보니까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은 일상생활 잘 하고 있는데 제 혼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설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전부다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이 말씀드립니다.
사도바울이 과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그것은 확실한 주체에 의해서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우발적으로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고 난 후에 정반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예수 믿어야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핍박해야 하나님께 영광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돌변한 바울을 다른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지요. 금방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선 사람이 얼마 후 예수 믿어야 산다고 떠들고 다니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유대인: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울 너의 말을 어떻게 믿는데?
바 울: 믿기 싫으면 때려치워라. 이번에는 진짜다.
유대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아냐?
그러니까 ?다음?이라는 역사를 만들지 말고, 지금 죽더라도 낙원에 가는 이러한 사랑, 나를 보지 말고 지금은 인자께서 나를 다루시는 그런 시대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수심으로, 감춰진 복수심으로 가족을 괴롭히고 자기 스트레스 받는다고 교인을 괴롭히고 자기 안 알아준다고 목사에게 대들고 다른 교인들에게 대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자기 자아가 너무 강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기면서 주님 바라보며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5년 9월 26일 8:5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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