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장 33절에서는 그걸 뭐로 설명했느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 33절 이야기하면서 32절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한 거예요. 롯의 처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자에 해당된다, 이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엄청난 과제를 우리에게 준 거예요. “너 구원 받았나?” “예 구원받았습니다.” “뒤돌아봐, 안 봐? 너 롯의 처처럼 뒤돌아보고 있어, 안 보고 있어?” 지금 엄청난 과제를 주고 있는 거예요.
롯의 처는 구약 역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롯의 처처럼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자.’ 지금 이 문제가 아니고 ‘롯의 처를 생각하라’라는 말은 ‘롯의 처가 뒤를 돌아봐서 멸망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로 사용한다.’라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롯의 처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는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예언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언 안에. 따라서 ‘그래, 나는 개인적으로 롯의 처처럼 뒤돌아보지 않으면 구원받겠지.’ 지금 그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문제 낼 게요.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예.” “그럼 뒤돌아봅니까, 안 봅니까?” 1번, 본다. 2번, 안 본다. 여기서 말씀의 깊이가 있어요. 1번, 뒤돌아본다. 성도입니다. 2번, 뒤돌아보지 않는다. 불신자입니다, 불신자예요.
이게 어디서 갈라지느냐 하면, 성경말씀 가지고 내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나는 돌아보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할 거고, 이거 불신자예요. ‘성경 말씀은 내 구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언약의 어떤 요소가 깔려 있는가를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특이성을 줬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신자입니다, 그 사람이 신자예요.
그래서 신자한테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그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도대체 어떤 점에서 롯의 처와 딱 닮았는가?’를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찾아내면 돼요. 롯의 처와 어떤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는지를 매일 같이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게 신자예요.
그러면 불신자는 뭐냐? 불신자는 아예 말씀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불신자는 ‘앞으로 가고’ 혹은 ‘뒤로 가고’가 아예 없어요. 불신자는 그냥 살아요. 불신자는 그냥 산다고요. 말씀을 의식하고, 이런 것이 없어요. 그냥 머물러요. 현재에 머무른다고요. 불신자의 삶은 내 존재가 1순위에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복종하는 그 순간 우리의 어떤 행위도 이제는 소용없습니다. 의미가 없어요. 자꾸 내가 주님 앞에 복종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주특기는 뒤돌아보는 거예요. 뒤돌아보는데 주님께서는 뭘 보느냐 하면, 약속을 보라는 거예요.
약속이 뭐냐? ‘너 말고 내가 너 대신 아버지한테 복종한 그 순간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너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게 복음이에요. 그게 기쁜 소식이란 말이죠. 뭐 때문에 고민하고 근심했습니까? 내 행동 따라서 내가 행복해진다고요? 아니에요. 주님의 행동 따라서 결정된 거예요, 모든 것이.
그래서 지금까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앞이 있고 뒤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무엇이 뒤쪽이고 무엇이 앞쪽인지’ 그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고 언약의 내용이니까, 언약 내용 안에 무엇이 있느냐? 비로소 ‘뒤쪽’이 무슨 쪽인지를 아는 거고, 반대로 ‘앞쪽’으로 간다는 것이 뭔지, 계시 안에서, 언약 안에서 앞쪽이 따로 설정되어 있는 거예요.
일반 불신자는 성경 자체를 볼 이유가 없어요. “내 돈 내놔.” 하면 끝나는 거죠. 내 돈 가지고 내가 사는데 성경을 왜 봐요. 달라진 사람만이 성경을 보면서 왜 내가 착해서 구원받지 않는지, 내가 세상 쪽을 안 봄으로써 구원받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 성경 말씀을 내가 지켜서 구원받는 일이 없다는 것, 내가 잘해서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성경 안에서 찾아야 해요, 성경 안에서!
그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은혜로 구원받는 거예요.
성경 말씀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현장속에 들어가서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주님의 성령께서 말씀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결국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인간도 인간 속에 있는 뒤돌아보는, 즉 누가복음 17장에 의하면, 자기 목숨 보존하는 것을 포기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 존재가 1순위에요. 여기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행복이 우선이고요, 사는 게 우선이에요. 이걸 분명히 명심해야 해요. 그런데 불신자는 성경을 안 보고, 그냥 머물고 있으면서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이렇고, 성령께서는 신자로 하여금 성경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자신이 기껏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과 현재 내가 하는 일과의 그 차이, 그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까지 우리 육신, 성도니까 그 육신에다가 이 둘, 서로 대비가 되는 두 개의 자아상을 결합시켜서 둘둘 감아놓습니다. 그렇게 감아놓으면 우리는 말씀의 촉수가 돼요. 예수님의 활동의 촉수로서 활동한다고요.
주의 증인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어요. ‘나는 뒤만 돌아보는 천하의 죄수 중에 죄수’ 이것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말씀이 아니었으면 이걸 내가 어떻게 알았어요? 그걸 감사한 마음으로 남은 생애 동안 주님만 증거하는 사람 되는 것, 주님의 복종으로서 모든 것이 게임 오버, 끝났다는 것 그걸 일본 말로 ‘시마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끝났다, 시마이가 된 거예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로마서 7장에서 사도는 선과 악이 함께 있는 육신으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주시는 특이성을 품고 움직이는 주님의 촉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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