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4/1-시작과 끝이 이미 확정되고 연결되어 있다.

아빠와 함께 2025. 4. 1. 22:33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우리’에 합세할 수 있는가?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끝과 연결되어야 한다.’ 끝과 연결되어야 됩니다. 끝. 끝의 모습으로 등장한 우리 자신이어야 돼요. 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우리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2.시작과 연결되어야 한다.’ 시작과 연결되어야 됩니다. 시작을 어떻게, 태초에 시작을 어떻게 했는가를 알리는 방편으로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끝과 시작을 연결시키는 여기에 투입된 존재가 되도록 하는 거예요. 두유 먹고 빵 먹었다. 왜 두유 먹고 빵 먹나? ‘태초에 주님이 계시고 마지막에 주께서 끝장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두유 먹고 빵 먹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시작과 끝이 이미 확정되어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면서 퍼지는 일종의 치맛자락. 일렁거리는 치맛자락 있죠, 치맛자락.

하늘에 있는 치맛자락을 ‘오로라(aurora)’라고 이야기해요. 지구의 자기장이 태양에서 방출되는 전자 또는 양성자와 부딪치면서 빛을 내는 거죠.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가 차단되는데 일부는 입자 형태로 들어오고 극지방으로 모아져서 이때 발생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일종의 에너지의 치맛자락이 되는 겁니다. 오로라.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서울 살든지 어디 살든지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치맛자락의 일부로서 천조각의 일부로서 장식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치맛자락으로 춤춘다고 보면 되죠. 그럼 우리 성도는 뭐냐? 성도의 일과는 주님의 말씀이 춤추는 대로 움직이는 치맛자락 같은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러한 치맛자락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는 어떤 식이 되어야 되는가? 한번 적어볼게요. ‘말씀이 없을 때는 수시로 죽어야 된다.’ 말씀이 없을 때는 수시로 죽어야 되는 겁니다. 말씀이 없을 때 왜 우리가 수시로 죽어야 되느냐 하면 말씀이 깨워줄 때 말씀과 같이 해서 우리가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말씀이 “야, 일어나!”하고 깨워줄 때 후닥닥하고 말씀과 더불어 활동해야 되기 때문에 이 일에 방해되는 것은 뭐냐? 나라는 존재죠. 나의 존재. ‘말씀이 없어도 나 여기 있잖아.’라는 것이 방해가 되는 거예요. 실제로 활동하고 존재하는 것은 말씀인데, 또는 말씀으로 움직이는 주님이 존재하고 활동하는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활동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활동하게 되면 무엇이 가리워져요? 말씀의 치맛자락으로 말씀이 춤추는 것이 나의 존재로 인하여 가리워지잖아요. 그럼 주님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존재를 치워버립니다. 치운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내 원대로 구원이 안 이루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내 뜻대로 원대로 내가 예상한대로 구원이 안 이루어지게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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