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5강) 창15:1(전쟁을 통한 상급)20250324b(강의: 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p.153 [십자가와 상급]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상을 주고자 해도 받을 사람이 없어요.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을 사람을 따로 지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거기 6번째 줄에 나와요, 창세기 15장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 After these things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Abram in a vision, saying, Fear not, Abram: I am thy shield, and thy exceeding great reward.(KJV)
1. After these things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 saying, "Do not fear, Abram, I am a shield to you; Your reward shall be very great."(NASB)
1. After this,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 "Do not be afraid, Abram. I am your shield, your very great reward."(NIV)
받을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상급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조해야 되죠. 창조해야 되죠. 그래서 너는 상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네가 바로 나의 상급이다. 아브라함아, 네가 나의 상급이다. 결국 하나님의 상은 하나님이 하나님께 수여하는 거죠.
왜냐하면 아브라함 속에 주체자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오죠.
아브라함 네가 의롭게 된 이유는 네 속에 의가 박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의가 속에 박혀있는 상태를 하나가 된 상태라 해서 그걸 믿음이라 해요. 네가 믿는 게 아니고, 믿음이 발생되는 하나의 기계라는 거예요, 기계. 인간의 믿음 말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인간의 모습을 띄고 발휘될 때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도로 가져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죠.
그럼 인간의 믿음은 뭐냐? 인간에게서 나왔으니까 행함이 되죠. 로마서에서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롬 3:28)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를 자꾸 일으켜요. 믿고 싶은데 하나님 쪽에서 못 믿게 만들어요. 우리가 뭔가 믿는다는 것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신뢰’를 말합니다. 신뢰하는데 이것은 나에게, 현재 신뢰를 주는 나에게 이익을 주고, 이 이익은 나에게 생존을 끌어주죠. 생존을 잇게 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이 준 믿음은 믿는 자를 죽여 버려요. 이미 죽은 자로 규정을 하기 때문에 하나는 살리는 용도로 믿는 것과 ‘지금 죽어도 마땅합니다’고 나오는 내 죽음을 전제로 한 차이에요.
내가 죽었다고 쳤을 때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는 일은 뭡니까? 일-(빼기)나의 일=주의 일. 일 중에서 일 빼기 나의 일하면 여기서 남는 것은 주님의 일만 남아요. 빼기 알죠? 산수 다 배웠죠? 전체 일어난 사태에서 나의 일만 빼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불신자는 뭐냐 하면 나의 일 빼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게 불신자에요. 전부다 이미 나의 의미로 재해석했기 때문에 나의 일 빼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불신자는 줄창 자기만 증거해요. 자기만 증거하고 자기 자랑만 할뿐이에요.
나 전유진 안다, 이런 거죠. 나 윤석열 지지한다. 이거 뭐에요? 내가 결정한 일에 내가 지지한다 이 말 아닙니까. 내가 결정한 일에. 어떤 사람 만나면 ‘좌파에요, 우파에요?’ 그렇게 묻는 이유가 그걸 통해서 시간의 지루함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게임하면 시간 흘러가는 걸 몰라요. 잠시 잊을 수가 있어요. 안 그러면 지루하니까. 심심하니까 누구라도 붙어 싸웠으면 덜 심심한 것 같아요. 바쁜 젊은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모든 일을 멈췄을 때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있고요.
돈까지 써가면서 가고. 심지어 은퇴한 목사는 전광훈이 돈 백 만원 줘서 교인들 다 완전히 몰표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우파를 만들어라. 주께서 주신 사명이 아니고 전광훈이 준 사명을 가지고 했다는 썰이 있어요. 그것도 유력한 썰이죠. 증인들이 있으니까. 촌 교회 목사가 목돈 탈 일이 뭡니까? 백만원 어디서 나오겠어요? 안 그래도 대장질하고 싶어서 환장한 게 목사인데, 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자기 목사라는 대장질을 유지할 수 있잖아요. 돈도 받고, 그 지역의 유지도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중간에 주장했다는 얘기 안 해요. 또 명예훼손 걸지 마세요. 그런 썰이 있다는 거예요.
자,
㉮상급을 받을 사람은 없어요.
㉯없기 때문에 친히 언약으로 상급 받는 자를 만들어내야 됩니다.
㉰만드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상주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 자기 상을 수여하면서 경유지로 사용하는 거죠.
자기 백성을 경유지로. 이렇게 하면 또 듣는 인간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일에 이용했다는 말인가? 아, 기분 되게 안 좋네.’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경유지로 사용하면서 곱게 사용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사용하느냐? ‘전쟁을 통해서 하늘의 상을 통과시킨다.’ 전쟁이 없는 곳에는 뭐도 없다? 상도 없는 거예요. 전쟁을 일으켜서 전쟁을 통해서 하늘의 상이 다시 하나님께 부여되는 그러한 수단으로서 활용되게 됩니다.
이 땅에 상 받을 자격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이 이미 창세 전부터 결정되어 있어요. 피조물은 그냥 시다바리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생명의 면류관까지 주님의 발 앞에 던집니다. 내가 합당치 않다는 거예요. 상당히 부정적 요소에요. 자기 부정을 듬뿍 담아야 그때 비로소 주님께 찬미가 돼요. 우리가 쓰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평생토록 주의 일하는 목적이 ‘나는 상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그 상황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겸손해가지고 ‘난 상 받을 수 없습니다.’ 이거는 또 하나님이 안받아줍니다. 이게 어디서 또 흉내 내고 있고, 연기하고 있어. 실제로 주님께서는 전쟁에 참여시켜서 전쟁을 통해서 이 전쟁에서 인간이 자기의 노력과 성과에 대한 대가를 집요하게 노리고 있는 자기 본성을 까발리게 만듭니다.
그 전쟁의 예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블레셋과의 전쟁. 사무엘상 4장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벌어지는데 전쟁이 벌어지게 하신 취지가 뭐냐? 그 효과가 뭐냐? 엘리 제사장 가문을 작살내는 거예요. 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정책을 하나님 쪽에서 이제는 철폐하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제사장 중심의 나라가 되지 않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가 철폐되면 그럼 하나님의 약속에 위반되지 않느냐? 처음 약속과 다르지 않냐? 하나님은 상 받을 아브라함에게 상을 주시면서 아브라함이 누굴 만나게 하느냐 하면 멜기세덱을 만나게 해요. 그 멜기세덱이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제사장 맞아요. 또 하나는 왕이에요. 제사장에서 왕직으로 사이즈를 키우는 겁니다. 범위를 넓히는 거예요. 제사장직에서 왕직으로 넓히면서 필수적으로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을 실시합니다.
따라서 사무엘상 4장, 5장에 나오는 이 전쟁은 첫 번째, 엘리 가문을 작살내는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어떤 분이 왕이 되느냐?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원수에게 사로잡히는 방법으로 승리하는 분이 왕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적에게 패배함을 통해서 왕이 돼요. 패배를 통해서 승리자가 된다고요. 그럴 때만 하늘의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승리를 노리는 자는 상이 없어요. 패배했을 경우에만 상이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내용을 포함하면서 구원된 자만이 상을 언급할 자격이 돼요.
상을 많이 언급한 자가 누구냐? 사도 바울이죠.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뭐했던 사람입니까? 스데반 집사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사람이잖아요. 저 스데반 집사는 죽어 마땅함을 드러내는 그 현장 책임자로 있었던 사람이란 말이죠. 옷을 맡긴다는 말은, 우리가 돌을 던지는 조치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그렇게 당신이 증인 좀 해라.
왜? 당신은 헌법 재판소 재판관이니까. 엘리트이기 때문에. 법에 대해서 알잖아요, 법에 대해서. 서울 법대 출신이거든요. 그 당시 율법을 다룰 때 유력한 두 학파가 경쟁적으로 있었어요. 가말리엘 학파에 속한 인물이 사울이었어요(행 22:3).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율법을 아는 우리의 승리가 되기 위해서는 스데반 집사를 패배자로 전락시키는 겁니다.
그럼 사울이 사도가 되는 요소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 함유되어 있고,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같이 뒤따라 들어온 거죠. 예수님을 죽인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울에게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그것이 사도라는 내용으로 채워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주님이 그 방식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첫 번째는 엘리 제사장을 작살내고 본격적으로 왕 체제로 바꾼다는 거예요. 그런데 왕이 될 그분이 적들에게 체포되어서 패배자로 전락해야 왕이 된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가 사로잡히게 되죠. 언약궤는 뭐가 있는 곳이냐?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죠.
그럼 여러분들은 부모가 지어준 자기 이름이 있죠. 언약궤는 무슨 이름이 있어요? 나무로 되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나무 상자가 되는 겁니다. 나무 상자는 특징이 뭐냐? 외부에서 거들어줘야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은 뭐냐?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나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있어요. 뚜껑 열고 보기, 그게 뭐 힘들어요? 궁금해? 궁금하면 봐. 본단 말이죠. 사무엘상 6장 19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걸 만화로 그려낸다면, 상자를 여는 순간 거기서 뱀 머리 같은 것이 한 이천육백 마리쯤 나와가지고 독을 쏘아대서 보는 사람들이 독 맞고 전부 쓰러지는 것. 카툰, 만화 같은 걸로 그려보면 그게 아주 실감나겠죠. 그런데 그건 만화고, 여니까 뭐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는데 죽었어요. 없는데 죽었다.
언약궤를 들여다보니까 죽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의 인지력과 지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또 다른 공간이 언약궤를 통해서 터져 나올 만발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독일군들이 언약궤 들여다보다가 완전히 해골 되었잖아요, 영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 1982)>에서. 주인공 이름이 해리슨 포드죠. 인디아나 존스 첫 번째 시리즈. 나 그 영화보고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요. ‘야, 언약궤가 저렇게 죽이는구나. 신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지 말랬는데 왜 들여다봤어? 죽어 마땅하지.’ 이런 승리감이 있었어요.
들여다보면 죽는다는 말은 언약궤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활약한다는 뜻이죠. 언약궤는 독자적으로 활약하고 활동한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언약궤는 뭐냐? 소로 이동했어요.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 움직인다. 요양병원에 있는 노인네가 휠체어를 타고 계단 오를 때는 번쩍 들어서 옮겨줘야 옮겨진다는 거예요. 장애인이죠, 장애인.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가 휠체어 탄 장애인이잖아요.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면서, 우리는 멀쩡한데 언약궤는 인간인 우리의 봉사가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무능한 자,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본 거예요.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가 협조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면 제 노릇, 제 구실을 못하는 무능자라 하는 인식을 인간들은 자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나무 상자니까요. 나무 상자가 뭘 할 수 있느냐? 발로 차면 차이고 들여다보면 보고 하죠.
언약궤가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블레셋 군사들이 언약궤를 달랑 자기 진영에 갖고 왔습니다. 그들이 하마스였어요. 알라신 앞에 여호와가 있는 거예요. 알라신이 이겼고 누가 패배했습니까? 여호와가 패배해서 인질로 잡힌 거예요. 그런데 그 인질로 잡은 하마스가 망했어요. 온 동네가 다 망했어요. 이제는 토하고 싶어. 이게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놀림감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돼서 인간들의 불신성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내놨습니다.
자, 문제는 이거예요. 다윗이 언약궤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이것은 우리가 이동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셔야 된다는 거예요. 모실 때는 율법을 가지고 모셔야 된다. 모실 때는 어깨에 메야 된다. 마치 대감마님 모시듯이 모셔야 된다. 율법으로 모실 분이 누구냐? 다른 지파는 안 된다. 오직 레위지파여야 되는 거죠.
레위 지파가 언약을 메고 모심으로써 다윗은 무엇으로 자기 고백을 하는가? ‘여호와 언약궤를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살아계신 언약궤 앞에서 내 이름은 마땅히 더럽혀져야 됩니다.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내가 자진해서 철회하겠습니다.’ 하고 거기서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옷을 벗고 춤을 추면서 찬미했습니다.
이것이 종의 종 됨을 보여주는 거예요. 자유인은 자기가 판단해서 움직이지만 종은 시키지 않으면 못 움직인다는 그런 근로조건을 스스로 받아들인 거예요. 그저 시켜만 주이소, 이런 거예요. 시켜만 주이소.
자, 이렇게 해서 언약궤라는 상자가 점차 뭐로 변형되어 가느냐 하면 인물화 돼요. 언약궤가 전쟁을 하는 주인공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자기가 하는 전쟁이 아니라 언약궤를 사수하는 입장에서 전쟁에 자기가 거기에 참전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걸 인식한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전쟁. 골리앗과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하나님의 이름이 지금 어디 있어요? 언약궤에 있죠. ‘그럼 언약궤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기꺼이 제가 한몸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럼 상급은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전쟁을 관통하면서 전쟁을 통과하면서 그 속에서 상급은 하나님에게서부터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죠. 돌아가면서 주의 이름이 참으로 찬양받고 상 받을 유일한 분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혼자 다 끌어 모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다윗을 통해서 그 사실이 점차 점차 밝혀지겠죠. 그 대목이 어디냐? 민수기 31장입니다. 민수기 31장과 사무엘상 30장을 연이어 한번 봅시다. 민수기 31장에 율법이 나옵니다. 민수기 31장 21-30절, “제사장 엘르아살이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법률이니라”
민수기입니다, 민수기. 율법. 모세 때 이야기에요.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전리품이 있잖아요. 전리품을 ‘야, 좋다. 금가락지 해야지.’ 이러지 말고 율법을 통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전쟁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은 인간의 이름으로 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했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했으니까 전쟁 당사자가 주의 이름이죠.
그러니까 전리품은 누구 앞에 상납해야 돼요? 주님 앞에 상납해야 되잖아요. 상납하고 난 뒤에 그 상을 이제 주님이 주시는 대로 그들은 받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그 상을 통해서 하나의 조직이 되는 거죠.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는 겁니다. 상이 연결, 밧줄 기능을 하는 거예요.
우리를 전쟁에 참전시키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승리케 하고, 거기서 얻어진 결과물에 대해서 ‘너는 내 백성이니까 가져라’하고 줬을 때 ‘이 상은 주님이 홀로 하셨습니다.’ 하는 반응을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이 민수기에 나온 31장 21-23절의 이 말씀이 아까 그 언약궤의 주의 이름이 언약궤를 모신, 주의 종, 언약궤의 종으로 자발적으로 나섰던 다윗이라는 인물에 그게 실리겠어요, 안 실리겠어요? 실리겠죠. 그게 사무엘상 30장 24-25절입니다.
23절부터 보게 되면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붙인다’는 말이 있죠. 붙이시매.
그건 뭐냐 하면 옛날 구약에 자기 전에 있었던 그 전쟁의 내막에 대해서 다윗이 다 알고 있다는 뜻이죠. 그렇죠?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붙여주시는 전쟁.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다윗,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붙여야 들어오죠. 붙여서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을 관통하면서 이스라엘 자체가 주님의 승리한 파티장의 어떤 결실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이게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평소에도 일상 가운데 이런 말씀을 자꾸 적용시키세요. 날씨가 추울 때, ‘오뎅 국물이 먹고 싶다.’ 보니까 저기 50m 앞에 오뎅 파는 포장마차 있잖아요. 그때는 ‘야, 오뎅 있다.’ 하지 말고 주께서 붙여줬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모든 일상에서 그렇죠. 어떤 집엔 보이스 피싱을 붙여주시고. 원치 않는데 훅 들어온 거예요.
사무엘상 30장 24절에서 군대를 붙였거든요. 붙였으니까 다윗은 정신 바짝 차리는 거예요. “자, 민수기 31장을 해야 돼. 민수기 31장.” 붙여준 전쟁은 이미 승리는 끝났어요. 끝났는데 문제는 ‘여기 상을 우리가 챙길 것이냐, 말 것이냐’에요. 그때는 민수기 31장이 동원되어서 검증에 나서야 되죠. 이걸 누가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언약궤 상자가 점차 인물화 되는 과정 속에서 다윗이 선택받은 왕으로서 해야 될 임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24절,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찌니 같이” 뭐해라?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같이 분배하라고 되어 있어요. 같이 분배해라.
다시 민수기 31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31장 25-31절까지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로 더불어 이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계수하고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그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취하여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얻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나 각종 짐승을 오십분지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께 돌아가는 몫은 몇분의 몇입니까? 오백분의 일로 되어 있죠. 하나님이 얼마나 겸손하십니까? 승리는 자기가 해놓고 오백분의 일밖에 안 가져가잖아요. 그런데 원래 마동석 나오는 영화 <범죄도시>에 보면 조폭 양아치들이 대장은 자기 혼자 다 먹고 밑바닥한테는 짜장면 사주잖아요.
이 세상에서는 소득만 주고 그 사람이 하는 힘에 의해서 배분이 되고요. 배분을 할 때 힘에 의해 배분하면서 약간 더 쳐서 주는 것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법입니다. 네가 한 것은 짜장면밖에 안 되는데 따로 불러서 짬뽕 사줄 때, 그것도 해물짬뽕 사줄 때 그때는 “다른 조직원보다 너는 특별하니까 앞으로 위험할 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 알겠어?” 이런 거. “나는 너를 2인자로 생각하고 있거든. 그래서 만약에 내 비자금 2조원 기억하고 있는 인간이 딴짓 하거든 네가 총으로 쏴라. 요트에서 쏴버려라.”
이게 조직사회에요. 내 사람, 나와 가장 가까운 내 사람. 그걸 여러분 아는 단어로 하면 뭡니까? 측근. 앞에 한 자 더 붙이면 최측근. 지분을 보다 많이 넣어주는 거예요. 이것을 ‘위계화’ 또는 ‘서열화’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힘으로 구성되는 질서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의 조건은 뭐냐? 아까 본 것처럼 불을 지나가게 해서 견딜만한 것은 남기라 했죠. 그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옵니다. 성경이 따져보면 굉장히 쉬운데 복잡해요, 이게. 왜 복잡하냐 하면 인간이 자꾸 자기 몫을 노리기 때문에 자기 지분을 노리기 때문에 자꾸 일이 복잡하게 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게 상급에 대한 거예요. 상급, 십자가와 상급 이야기.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아주 단정을 해요. 하나님이 자라게 한다. 그러니까 물 주는 자, 심는 자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자라나게 하는데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뿐이니라”
이 하나님이 구체화 된 것이 누구냐? 여기에 불이에요, 율법에 의해서. 고린도전서 3장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되어 있어요.
이게 어려워요. 이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묻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공력이 둘 중 하나입니다. 1번-양적이다, 2번-질적이다. 어느 쪽입니까? 질적이에요. 양적이 아니고.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도 과부의 두 렙돈을 쳐주는 이유가 양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적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힘하고 달라요. 주님이 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차지하는 양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질로 삽입되어 들어오는 겁니다, 새로운 질로. 그럼 우리 속에 내가 한 일, 내 것이 남아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한 게 남아있으면 안 되죠. 99%는 주님이 하시고 1%는 내가 했다 하면 질이 깨어져요, 질이. 질 자체가 온전한 질이 아니에요.
제가 농협에서 쌀을 사서 차에 싣고 제 아내와 같이 왔어요. 집에 와서 트렁크 열고 쌀 내려놓고 주차한 다음 쌀을 들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쌀을 드는데 나는 쌀 포대가 그렇게 연약한지 몰랐어요. 내 손톱이 날카로웠던 모양이에요. 드는데 퍽 터지면서 그 안에 응축되어 있던 쌀이 숨을 쉬듯이 팍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걸 제일 밑에서부터 얼싸안고 2층까지 오를 때에 옆에 무슨 보이스, 무슨 소리가 들리겠죠. 잘디 잔 잔소리가 들리겠죠. “내가 쌀 포대 곱게 놓으라 했잖아.” 다 지나간 과거 이야기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 터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걸 어떻게 운반하느냐. 그렇게 쏟아졌어요. 그래서 일부는 들고 올라가고 무사히, 아기 안을 때 이후에 제일 조심히 안고 올라가고 나머지는 집사람이 와서 쓰레받기로 큰 다라에 쓸어 담아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올라오고 난 뒤에, 아내는 나한테 지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운동을 시켜요. 20키로 어떻게 하면 빠진다 하는 게 아니고, 운동을 시킨다고요. “돌 골라내.” 심심하니까 TV틀어놓고 돌 골라냈어요. 골라내니까 이제 눈에 보이는 돌이 없었어요. “돌 골라냈다. 숙제 끝.”하고 넘겨줬다고요.
넘겨주니까 제 아내가 물로써 제대로 이제 정제단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제련단계에 들어가죠. 혹시나 하나님의 공로에 인간의 행위가 섞일까 싶어서 제련하는데 그 일을 누가 하는가? 성령님이 하셔요. 인간은 못해요. 인간은 대충 봐서 ‘나는 마음을 낮췄다. 겸손하다.’ 했는데 성령께서는 인간이 못 뽑아내는 걸 다 뽑아내요.
아내가 물로써 쭉 하면서 성령이 하는 일을 보여줘요. “자, 당신 와서 봐라. 응? 당신은 다 뽑아냈지? 이 남아있는 흙 봐. 이렇게 해도 모자라. 또 해야 돼.”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이 쌀 네가 먹어라. 이 쌀 당신이 책임져라.” 이거는 죄 사함이라는, 주께서 지셨다는 사실을 잠시 잊으신 모양이에요.
그렇게 해서 또 걸러내니까 또 나오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죽을 때까지 나오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죽을 때까지 육신의 속성 때문에 내 생각, 내 의도, 내 희망, 내 소원이 내 육신에 계속 남아있고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남아있는 한 주께서는 더러워서 안 받아요. 받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알아서 해주겠지만 하여튼 남아있으면 안 받아줘요.
참, 이 강의를 마감하면서 큰일 났어요, 지금. 안 받아줘요. 안 받아주면 영생이란 상급을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못 받죠. 받을 수가 없죠.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에베소서가 있습니다. 아, 에베소서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자, 에베소서 보기 전에 극단까지 몰아세우는 대목을 한번 봅시다. 열왕기하 19장 10-11절,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의 의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의 열왕이 열방에 행한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이 싸가지 없는 소리를 누가 하느냐 하면 랍사게가 해요. 이름 자체가 얍삽하잖아요. 랍사게. 랍사게를 누가 보냈게요? 하나님이 보냈죠. 하나님이 랍사게로 하여금 히스기야를 궁지에 궁지로 몰아넣게 합니다. 왜냐하면 더는 히스기야가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그 희망을 완전히 좌절시키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까지 없애버렸죠. 기도해서 응답 받겠다 하면 저쪽에서 더 밀어붙여요. 하나님께서 더 밀어붙이게끔 합니다. 하나님 믿고 성경 공부한 것 다 총동원하고 집에 있던 마지막 무기 있잖아요. 학습 받고 세례 받고 성령 받았다는 것까지 다 끄집어냈는데 그게 상황을 호전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게 만들어버려요, 주께서. 이게 바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끝까지 밀어붙여요, 끝까지.
그러니 얍삽한 랍사게가 나중에 돌아서면 굉장히 고마운 분이에요, 이게. 김정은 같은 것도 그렇고 푸틴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굉장히 고마운 분이에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그 나라 의만 구하면 돼요. 자기 나라 옛 영토, 과거 영토 생각하면 안돼요. 젤렌스키도 하여튼 그 나라 의만 구하면 돼요. 그 나라 의만.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망쳐요. 거기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 도와주소서. 안 도와줍니다. 도와주면 마귀가 도와주죠. 내 일 안 도와줘요. 내 일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없어야 흙이 싸대다가 햅쌀에 섞이지 않는 방법으로 성령께서 일하세요. 그러나 이미 섞여버렸어요. 섞이면 어떻게 합니까? 흔들어야죠. 잔소리해가면서. 이거 네가 다 먹어라. 고생 네가 혼자 해라.
그리고 난 뒤에 에베소서 한번 봅시다. 에베소서 4장 8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뭡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언약궤가 혼자 전쟁 승리하시고 전리품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죠. 그런데 그전에 무슨 절차가 필요합니까? 율법대로 민수기 율법대로 실시가 되어야 돼요.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서서 율법대로 움직여야 되는데 그 율법의 완성인 인격화, 예수님이 율법을 대신해서 아버지 앞에 나서서 아버지로부터 “그래, 충성된 종아. 너는 나의 율법을 이루었구나.” 이루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뭡니까? 그때, 상이죠. “너는 나의 상이다. 상급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상이 되는 거예요.
일단 율법대로 한다는 것은 모든 적, 모든 원수를 다 발 앞에 깔아뭉갰다는 것이 확인이 되어야 돼요. 자, 문제 나갑니다. 그 원수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걸 인식하는 게 복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 창세 전에 있었던 그 사항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상태가 돼요.
창세 전 태어나기 전에 사항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만이 아는 내용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줬을 때,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이건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다 하셨습니다.’하는 그것을 고백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이건 누가 뭐래도 우린 구원받은 상태죠. 그럼 구원받은 자가 해야 될 것은 뭡니까? 왜 나는 안 되어야 마땅한지, 내 육신가지고는 왜 안 되는지 그걸 실습 또 실습하는 그런 자유함과 즐거운 일이 있죠.
그걸 이렇게 요약해보겠습니다. 이거는 특별히 여러분에게만 알려주는 겁니다. ‘최고의 쾌락과 욕망은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쾌락과 감사와 기쁨이 없어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 실습 가운데서.
정말,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애달아하면서 몰랐던, 네 꼬라지를 아느냐 하는 그것. 주께서 알려주잖아요. 내가 주님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왜? 내가 주님을 죽인 원수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의 가담자입니다. 그러면서 주어지는 그 감사와 기쁨.
주님께서 그냥 산 채로 아버지께 간 게 아니고 죽은 모습으로 감으로써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이미 죄인으로 결정이 난 거예요. 어떤 인간도 민수기 율법을 지킨 자가 없습니다. 주님 혼자 지켰어요. 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약속된 권한을 부여받게 되는데 ‘네가 혹시 원하거든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것을 나눠주는 것을 내가 허락하노라.’ 그런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자를 그렇게 분배할 때 그 자체도 또 하나님 말씀의 완성입니다.
끝으로 나눠드리겠다 했던 팝송 가사인데 시간 관계상 빨리 하겠습니다. 이 가사가 오늘 첫 번째 강의했던 것과 관련됩니다. 얼마나 나의 일이 집요하게 나를 안 놔주는지를 이 가사를 보면서 한번 봅시다. 한글 가사 나옵니다.
[Yesterday, When I was young] 1969 Roy Clark
-언약이 빠진 인생 노래-
내가 겪었던 사랑은 언제나 끝이 너무 안 좋았어.
그것 때문일 것 같아. 내가 나이보다 더 늙었다는 생각이 든 건…(나래이션)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땐 인생은 혀끝에 닿는 빗물조차 달콤했지. (여러분 20대, 10대 잘 나갔던 것 생각해보세요.)
하찮은 장난을 하듯 삶을 살았어. 마치 저녁 바람이 촛불을 갖고 놀 듯… (세상풍조가 바람이라면 우리는 같이 신나게 흔들리는 촛불과 같다 이 말이죠.)
수많은 꿈을 품었고 원대한 계획도 세웠지만 언제나 약하고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로 세운 것이었어.
낮의 밝은 빛은 멀리하고 밤에 젖어 살았지. (밤에 논다고 낮에는 낮잠 오래 잤죠.) 그 세월들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간 건지 이제야 알겠네.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땐 끊임없이 행복의 노래가 샘솟았고 내 앞에는 화끈한 즐거움만이 놓여있었지.
눈이 멀어 그렇게 큰 아픔이 있음을 외면했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젊음도 가버렸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 지금 와서 기억나는 대화는 모두 나 자신에 관한 아무 의미 없는 것들 뿐…
그땐 달빛도 창백했어. 그 정신없던 날들이 무언가 신기한 것을 주기도 했지만.
‘마법의 지팡이라도 갖고 있는 듯’(이게 중요해요) 내 청춘을 써버렸고 그 너머의 낭비와 공허함을 보지 못했지. (마치 뭐 큰일이라도 할 것처럼 허세와 허풍 떨면서 담배피우고 술 먹고 돌아다니고 허랑방탕하게 보냈던 거예요, 그 세월이. 허비했다 이 말이죠.)
오만함과 자만으로 사랑도 장난으로 여겼어. 사랑의 열정도 너무 빨리 식어버렸어.
친구들도 결국은 모두 내 곁을 떠나고(뭐 친구들 있습니까? 없죠.) 인생이란 연극의 마지막 무대에 나 홀로 남아있네.
아직도 부르지 못한 수많은 노래가 남아있건만… 쓰디쓴 눈물의 맛이 혀 끝에 느껴지네. 대가를 치를 때가 왔어. 젊은 날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한… (젊은 날 내가 했던 것에 대한 대가)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기쁨과 감사가 없죠. 나를 상실한 기쁨과 감사가 전혀 없죠. 그냥 한탄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어떤 노래인지 들어보겠습니다. 영어로 보세요.
Yesterday, When I was young
독백
Seems the love I've known has always been the most destructive kind
Guess that's why now I feel so old before my time
노래
Yesterday, when I was young
The taste of life was sweet as rain upon my tongue
I teased at life as if it were a foolish game
The way the evening breeze may tease a candle flame
The thousand dreams I dreamed
The splendid things I planned I always built to last
on weak and shifting sand
I lived by night and shunned the naked light of the day
And only now I see how the years ran away
Yesterday, when I was young
So many happy songs were waiting to be sung
So many wild pleasures lay in store for me
And so much pain my dazzled eyes refused to see
I ran so fast that time and youth at last ran out
I never stopped to think what life was all about
And every conversation I can now recall
Concerned itself with me, and nothing else at all
(우리의 지난날 고백 같은 거죠.)
Yesterday the moon was blue
And every crazy day brought something new to do
I used my magic age as if it were an wand
And never saw the waste and emptiness beyond
The game of love I played with arrogance and pride
and every flame I lit too quickly, quickly died
The friends I made all seemed somehow to drift away
And only I am left on stage to end the play
There are so many songs in me that won't be sung
I feel the bitter taste of tears on my tongue
The time has come for me to pay for
Yesterday, When I was young
중간에 밑에 첼로가 쫙 깔아줄 때 그 슬픈 과거의 후회스러움을 잘 보여주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모습,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에게 관통하셔서 주님의 영생을 상으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노력이 아니라 주께서 관통하시고 지금 함께 계심의 증거로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