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나 빼기

아빠와 함께 2025. 4. 29. 18:09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6강) 롬10:15(나 빼기)20250428b(강의: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십자가를 아십니까』에서 [십자가와 전도] p.182부터 하겠습니다.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다. ‘도’란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나와 있죠.

그럼 십자가 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인물이 뭐냐? ‘멸망하는 자’도 동원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라는 것도 나오죠. 그러면 들어가는 것, 재료는 뭡니까? 멸망하는 자가 재료가 되지만 그 결과로 나오는 게 뭐냐? 구원을 얻는 자가 나오죠.

멸망하는 자, 멸망해야 될 자가 있을 때 멸망하는 자가 자동적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뭐가 투입됩니까? ‘십자가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투입되게 되면 멸망하는 자에서 구원 얻는 자가 발생된다.’ 이 이야기에요.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구원 얻은 자가 뭐를 자랑하겠습니까? 자랑할 수 있다면? 자기 멸망한 걸 자랑합니까? 죄 지은 걸 자랑합니까? 뭡니까? 십자가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겠죠. 자랑하면서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의 공로잖아요. 예수님의 공로죠. 따라서 나라는 것이 있기 위해서 예수님의 능력 없이는 아무도 구원 못 받으니까. 논리가 그래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 없이는 아무도 구원 못 받죠.

그럼 모든 자는 뭡니까? 멸망해야 마땅한 자가 되죠. 이 멸망해야 하는 이유와 십자가의 능력을 누가 전한단 말입니까? 구원을 얻은 자만 이것을 전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멸망해야 하는 이유+십자가의 능력을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전하는 것은 안 되죠. 이건 자기 증인 되니까. 자기는 멸망 받아 마땅한 자인데, 주도권은 십자가 지신 분이 주도권을 가져서 예수님만 자랑한다 할 때 결과적으로,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구원 받았다, 안 받았다의 관건은 어디 달렸습니까? 내가 뭘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실제로 여기 도입되었느냐 하는 문제에요. 도입되었는지가 결정적이죠. 도입되었느냐.

그 밑에 보면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 문제를 내게 되면 그 취지가 밝혀지겠죠. 다음 중 구원의 능력은? 1.예수님의 오심, 2.예수님의 존재하심과 일하심, 3.십자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 몇 번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이죠.

그럼 성경에서는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이 죽었다.’ 이렇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탄생도 있고 예수님이 세례 받는 것 있고 일하신 것 있잖아요. 그러면 그 해석을 할 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건 능력입니까, 능력 아닙니까? 능력 아니죠. ‘예수님이 이런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능력 아니죠. ‘예수님은 이런 수난을 받았습니다.’ 능력 아니죠.

지금 성경책을 누가 보고 있어요? 내가 보고 있잖아요. 내가 구원 받은 자 되려면 성경해석을 어떻게 다가가야 되느냐? 3.십자가의 죽음으로 다가가야 되겠죠. 그러면 성경, 신약성경에 있는 모든 구절, 심지어 구약의 모든 구절, 창세기 1장 1절까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구절까지 무엇과 결부시키면 되겠습니까?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면 그것이 전도, 그게 설교다 이 말입니다. 그게 설교가 되는 거예요.

참 쉽죠? 굉장히 쉽죠. 쉬우니까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빵이 옛날 토속적인 맛이 나는 것은 여기에 막걸리를 이스트용으로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빵이 구원의 능력이 되려면 어떻게 합니까? 이 빵을 먹는다고 구원 되는 거 아니고 천국 가는 거 아니고, 어떻게 연결시키면 돼요? 이 빵에 대한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결부시키면 되겠죠. 참 쉽죠? 뭐가 뻥 뚫린 것 같은 느낌 드는데 논리적으로는 굉장히 쉬운 거예요.

그러면 이 빵과 예수님 죽으심을 연관시켜보겠습니다. 이렇게 연관시키면 되죠. ‘모든 주어진 것들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주신 것이다.’ 이러면 ‘모든 주어진 것들’이니까 여기에 막걸리 넣은 빵도 포함되겠죠. 그럼 여러분들이 한번 넣어보는 거예요. 모든 주어진 것, 맏아들. 내 맏아들은 누가 준 겁니까?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온 겁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왔죠.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건이고, ‘예수님’은 존재잖아요. 존재에서 아들이 나온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 사건에서 아들이 나온 거예요. 만약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나 예수님의 존재를 믿어. 예수님, 신의 존재를 믿어.” 이건 아무 효과 없어요. 예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뭐 빌보드에 올라가든 뭐에 올라가든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날 나로 하여금 곡을 만들게 하고 빌보드에 올라가게 했다는 거예요. 그냥 예를 든 거예요. 그런 일이 있다는 게 아니고 그냥 예를 든 겁니다.

그러니까 열 살 먹은 애가 “엄마, 나 수학시험 쳤는데 백점 맞았어.”할 때, 그게 구원의 능력이 되려면 “예수님이 그렇게 백점 맞게 했다.”그러면 안 되고 “네가 백점 맞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다.”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존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심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계셔서 내가 있다’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있다’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예수님이 계셔서 내가 있다 하면 수학 백점이 주께 영광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수학 백점이 영광이 된다면 그럼 수학 95점은 영광이 덜 되는 겁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죠.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수학 백점을 맞더라도 나는 결국 주님의 죽으심에 합류되었고 합류될 자다.’ 이걸 인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고 비켜야 그 뒤에 구원의 길이 나오니까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결부되어야 죽으심 안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이 천국 가는 길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 갈 때 따라가겠다고 했거든요. 그때 예수님께서 못 따라오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베드로의 죽음이 베드로의 구원의 능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것까지 여러분 아셔야 돼요. 예수님의 죽으심만 구원의 능력이지, 베드로의 죽음이 거기 낄 자리가 못돼요.

결과는 끼어들었는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결과는 끼어들었지만, 시작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이어야 되지, ‘예수님도 참 훌륭한 분이지만 베드로도 참 훌륭해.’ 이렇게 되면 안 된다니까요. 베드로가 훌륭해져버리면 교황이 훌륭해져요. 천주교에서는 교황을 베드로 계열이라고 주장하거든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베드로보고 반석이라 했다는 거예요.

베드로는 반석이 아닙니다. 베드로 안에 계신 분이 반석이죠. 그래야 ‘예수 안’의 베드로죠. 그런데 베드로를 딱 떼어 내버리면 베드로는 반석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냥 시몬이죠. 그냥 시몬이에요. 시몬이라는 죄인을, 반석 되신 예수님이 천국의 열쇠 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규정하는 방법이 있고 내부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외형적 규정이란, ‘모여 있다. 모여 있는 모임이다.’ 이런 걸로 규정을 합니다. 코이노니아(Koinonia, κοινωνία)라는 헬라어가 있는데 그냥 우리말로 하면 ‘집회’ 또는 ‘동우회’, ‘단체’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어요. 어떤 표현을 하든 간에 이 ‘교회’라는 뜻을 제대로 표현 못해요. 에클레시아(ecclesia, έκκλησία), 모임, 집회 이런 뜻이거든요. 교제하는 집회. 동우회 같은 경우에는 시노도스(synodos)라 해서 ‘공의회’라고 하는 겁니다. 소위 주교들하고 왕이 모였을 때 공의회라 해요. 무슨 결정들을 할 때 교리 결정할 때 공의회를 많이 했잖아요. 천주교에서 공의회를 따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외형적으로 설명해도 이게 왜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 이런 외형적 규정 속에는 탈락자의 속출 요소가 있어요. 탈락자. 탈락자들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온전한 외형적 모임으로 교회라고 묘사하기가 곤란해요. 교회라고 손들고 나왔는데 두 달 뒤에 교회 안 나온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한번 나오면 절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관계가 없을까?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낯선 인간끼리 서로 과거가 다른 인간끼리 출신이 다르고 다 성별이 다른 인간끼리 다시는 탈락자 없이 영원히 완전체로 모을 수 있는 그런 용어가 없을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의 내부적 규정으로서 ‘body, 몸,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대목이 어디 나오는지 성경 한 번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이렇게 되어 있죠. 외형적인 것이 교회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교회를 설명하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외형적으로 자꾸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을 또는 복음을 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법으로 해석하고 싶은 거예요. 법의 체제가 동원되면 가시적인 대상, 눈에 보이는 대상체가 돼요. 그러면 그것만 딱 붙들면 천국에 합격이 된다, 그렇게 언급할 수가 있단 말이죠.

그게 일반인들에게 왜 좋냐 하면 일반인들은 벌써 출생 자체가 법적으로 되어 있는 단체에요. 소속이 있단 말이죠. 법적으로 규명을 해주고 법적으로 납득되는 소속이 있기 때문에, 천국 가는 단체가 되려면 살아온 것도 법적 인식이므로 ‘법적으로 인식에 합당한 그러한 집단으로 나를 등록한다면 나는 아주 이해하는 데에 편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일반인들이에요.

그래서 교회에서나 성당에서는 “등록하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서류작성하시고 전화번호 하나 적어놓으시고 여기에 오래 있으면 집사 되고 더 오래 있으면 권사, 장로 됩니다.” 하는 거예요. 뭐 태권도 학원도 아니고요. 처음에 흰 띠인데 그다음에 오렌지색, 초록색에다가… 그럼 검은 띠는 누구에요? 당회원들이 검은 띠에요? 도복 입고. 검은 띠인 사람도 불편한 게 많아요. 소위 검은 띠인 사람은 기도해도 정장 입고 넥타이 매고 해야 되지만, 집사가 기도할 때는 운동복 입어도 ‘집사 주제에 그런 거 뭐 봐 줄게.’ 이럴 수 있단 말이죠.

외형적으로 법에 저촉이 안 된다면 나는 그 교회에, 천국 백성에 합류가 되는 거예요. 이걸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죠. 공동체. 이런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거예요. 떡을 떼고 나누고, 뭐 막걸리 떡을 먹든 뭐든 간에 떡을 떼고 참외도 맛있다 하다가 떡 맛있다 해놓고 그 다음부터 안 나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떡값만 날렸네. 떡값만 날렸어.

그래서 도저히 이건 나오고 안 나오고 빼도 박도 못하는 단어가 있어요. 혈육적인 것은 ‘너는 이제부터 내 자식 아니다. 호적에서 뺀다.’해도 자식은 자식이거든요. 부모-자식 간을 인간이 못 끊습니다. 끊을 수가 없어요.

거기다가 성경은 교회를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봐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면서 모든 눈에 보이는 것, 가시적(可視的) 또는 가지적(可知的)이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기꺼이 탈피하도록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것을 탈피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걸 탈피해버리면 남는 게 뭐냐? 남는 게 우리가 행한 것 말고,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들, 그 현상들의 일치가 교회를 형성합니다.

지금 전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전도 내용에 대해서도 ‘뭘 전할 거냐’도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8장 15절부터 읽어볼게요.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다고 성령이 자동적으로 온다, 안 온다? 안 온다 이 말입니다. 왜? 법적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이 (예상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를 다 탈피하십니다. 다 벗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여기서 시몬은 마술사 시몬이에요,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 시몬 마술사 입장에서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하자 없는 행동을 한 거예요. 자기가 보기에 사도가 안수하니 성령이 왔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생각해도 ‘안수하기 전에는 성령이 없었는데 안수하니까 성령이 왔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에게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거다. 다른 사람이 안수하면 성령이 안 온다. 저 사람들이 안수하니까 성령이 왔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직업, 다시 말해서 마술사라는 직업 입장에서 볼 때 이건 좋은 상업적 컨셉이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이것은 강남 강의에서도 했지만 사도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무엇으로 보이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데, 거기에 추가적인 어떤 능력이 임해서 이렇게 된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능력은 능력대로 오더라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가 능력으로 오는 데는 이게 필수적으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이 말이죠. 일반인들의 생각이거든요.

지금 일반인들에게 뭐가 안 보입니까? 실제로 홀로 일하시는 성령님은 안 보이죠. 성령님이 안 보이지만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보이는 인간이 이렇게 하면 성령이 오신다.’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성경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들을 자기 일에 동원시킨 거예요!

여러분, 같은 말 아닙니다. 이게 엄청나게 다른 말이에요. 그럼 발주를 누가 한 거죠? 아파트 발주를 누가 한 거예요? 주민들이 하게 되면 재개발이죠. 그런데 건설 업체가 하게 되면 건설 회사가 발주체 아닙니까? 나중에 집 지어놓고 팔면 되잖아요.

지금 이 세상에 구원의 발주체가 누구냐 하면요, 인간이 아니에요. 사도가 아니에요. 누굽니까? 성령님이에요. 주님이 그렇게 발주한 거예요. 그런데 이 시몬은 어디에 기대를 거느냐 하면, 사도들이 하는 일, 사도가 인간이니까 저희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이 하는 일에 어떤 자극이 되거나 개시할 수 있는 준비 작업으로 끼어들 수 있지 않나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 시몬이요? 오늘날 전도자가 다. 모든 교회 전도자들이 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전도 안 해서 우리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는 거예요. 자, 교회라는 것을 외형적으로 봤습니까, 내형적으로 봤습니까? 외형적으로 봤죠. 외형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죠. 집회란 말이에요, 집회. 모임, 집회 이걸 교회라고 그들은 규정하고 있어요.

사도행전 보면 모이는 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하니까 뭐가 탐이 나느냐? 숫자가 늘어난다는 게 탐이 나는 거예요. 숫자가 늘어나면 뭐도 같이 늘어나겠어요? 헌금도 늘어나겠죠. 헌금도 늘어나면 뭐가 늘어나겠어요? 교회 월급도 늘어나고 자기의 노후대책도 보장이 되겠죠. 어제 오후 설교 끝나고 난 뒤에 나중에 축도할 때 제가 그랬잖아요. 축도 기도에서. 제발 노후대책 세우지 말고 죽음대책 세우라 했잖아요.

그러고 나서 내가 일평생 동안 주의 설교하고 강의하고 목회하고 개척교회 몇 군데 했다는 거예요. 그때 또 적용되는 성경구절이 있어요. 성경은 얼마나 친절하게 구석구석 다 박아놨는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여, 제가 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너 모른다.”(마 7:22-23) 왜? 자아를 위해서 예수님을 컨셉으로 당겼으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도의 입장에서는 전도 안 해도 돼요. 전도 할 필요도 없어요. 왜? 받을 걸 다 받아 챙겼기 때문에. 사도 입장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사도한다고 구원에 더 보너스 주고 이런 거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도를 죽을 때까지 안 죽여요. 제 말 맞죠? 죽을 때까지 안 죽입니다. 하여튼 빈틈이 없죠. 맞는 이야기죠.

죽을 때까지 안 죽인다는 말은 쓰실 때까지 탈탈 떨어서 다 쓰신다는 거예요. 다 쓰십니다. ‘네 목숨 값하라.’ 다시 말해서 ‘네 숨값 하라’는 뜻이에요. 숨값. 갈라디아서 다시 한번 봅시다. 여러분들이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하지, 돌아가신 분에게 이런 이야기 못합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일이 여러분 다 값하라고 살아있는 거예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 했거든요. 이 본문해석을 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하면, ‘그 당시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고 사회적 계층이 차이 나서 집회 자체가 성립 안 되었다. 어디 더러운 것들이 우리 고상한 귀족이나 말하는 자리에 끼느냐? 저리 가라 해서 공동의회 자체가 천한 것들, 모자란 것들을 안 넣어줬다.’ 이렇게 해석하잖아요. 그 해석이 또 교회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외형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교회는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잘난 자, 못난 자 이렇게 얼마나 민주적이고 평화로우냐, 이렇게 해석을 하더란 말이죠. 다 이렇게 해석하잖아요.

지금 그렇게 해석하면 안돼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여자냐 남자냐를 따지는 게 아니고, 여자는 여자 값하면서 죽을 때까지 네 일하라고 여자 되게 하신 거예요. 남자도 마찬가지고. 종도 마찬가지고. ‘나 구원 받았으니까 나는 멋진 공동체, 교회라는 공동체, 그리스도 몸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그 이야기 들으려고 하시는 게 아니고요.

주님께서는, 너는 내가 시키는 일 하라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일! “뭐 종인데 뭐…” “종이라도 내가 너 종 되게 했어. 내가 너 강도 되게 했고 너 창녀 되게 했어. 그 값을 해야지. 기생 라합 봐. 창기, 세리 봐.” 삭개오는 세리장이잖아요. 남한테 군림해서 욕 얻어먹는 세금장이란 말이죠. 그런데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직업 바꿨습니까? 안 바꿨어요. 어떤 직업이든 어떤 시간이든 날 위한 시간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날 위한 시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단체는 다른 단체와 달리 서로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뭐 이런 외형적인 것 감상하면서 흐뭇하게 여길 그런 쨉이 아니에요. 그 시간에 너는 복음이나 전하라! 나 이렇게 구원 받았다, 그거 생각하지 말고 하루하루 네가 하고자 하는 네 일이나 하란 말이야. 네 있는 모습 그대로.

“난 뭐 몸이 아파서 복음도 못 전하고…” “아픈 것이 전도용이야. 내가 아프게 했어. 왜? 전도하라고!” “고관절 나가서…” “고관절 나가더라도 내가 나가게 했다고. 내가.”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남 탓이에요.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자기 자신을 외형적으로 봐요. 맨날 외형적으로. 나는 나한테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전도를 누가 방해했어요? 나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엉뚱한 생각이 주님의 거룩한 도를 방해한 거예요.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 보이지 않죠.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 지신 분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안 믿어져요. 여기서 능력이 와야 되는데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이냐 하면 구원해주는 능력이에요. 구원의 능력은 일시키는 능력이에요. 기능적 능력이에요. 일시키는 능력.

“오늘 왜 모자 쓰고 왔어요?” “주께서 모자 쓰게 하셨네요.” 주께서 주시는 일시킴을 위함이에요. 만약에 내가 이러기 위해서 모자 쓰고 어떻고 한다면 이건 자기 의가 되죠. 자기 의. 나는 모자 쓰나 안 쓰나 구원 받았다~ 주님께서는 일시키기 위해서 구원해놨는데, 나는 드디어 챙길 것 챙겼다~ 신난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전도라 하는 것은 발주자가 누굽니까? 주님이 발주하죠. 그 결과 생긴 것이 뭐냐? 전도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사람이 발생하죠.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활동하고 있죠.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걸 교회라고 해요.

‘교회 들어갔다’가 아니라 ‘나 교회 다닌다’가 아니라, ‘늘 교회 되게 하신다. 성령께서.’ 교회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신다. 아까 ‘몸’이라는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육체도 자식 부모 사이에 형제 간 사이에 형은 형 아니고 동생 아니다 해도 소용없듯이 이것은 이미 주어진 거예요.

그처럼 우리의 구원도 빼도 박도 못하고 이미 주어진 거고요. 우리가 맡은 기능도 이미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내가 하기 싫어요, 하고 싶어요’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작동하고 있어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요약한 것으로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보고 10장 보고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이렇게 되어 있죠. 주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왜 몸이 하나냐? 고린도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약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명이 필요해요. 10장 2절에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뭐가 설명이 필요하냐? 구약에 있는 역사적 사건을 신약의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서 어떤 해석을 동원시켜서 이렇게 진리로서 내세울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구약의 사건을. 구약의 사건에서 그들이 마신 물은 한 장소에서 마신 물이에요. 한 장소, 광야에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홍해를 건너왔는데 다른 사람은 홍해 말고 다른 길로 건너오고 이런 거 없어요. 그건 노선 이탈이죠. 노선 이탈은 마라톤에서 선수로 안 넣어줍니다. 똑같은 코스를 밟고 가야 되거든요. 똑같은 코스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코스에 동행하시는 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누구냐? 여호와의 이름이죠. 주님이 애굽에서 나왔고 주님이 유월절에 있었고 주님이 홍해를 건너갔고 주님이 반석에 있었어요. 그 주님이 하는 일이 모세 옆에 있는 지팡이로 보였고. 모세 옆에는 항상 뭐가 있었습니까? 지팡이가 있다는 말은, 너희들의 경험을 내가 보상해주는 게 아니고 내 경험에 네가 종속되게 하시는 거예요. 지팡이가 겪는 그 경험에 종속된 자를 교회라고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몸은 하나요 지체가 여럿’이라는 이 말은 그 몸은 누구 몸을 말하느냐? 우리 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엡 4:3-6) 다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다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아까 갈라디아서 3장 28절, ‘자유자나 종(노예)이나 또는 남자나 여자나’ 그렇게 표현할 때 그 표현은 이게 돼요. ‘내가 남자다’, ‘내가 여자다’, ‘나는 주인장이다’, ‘나는 당신의 노예다’ 할 때 앞에 붙어있는 ‘나’. 남자, 여자, 주인장, 노예 이것은 그대로 있고 무엇을 제거하느냐 하면 나를 제거해야 돼요. 나를 제거하지 않으면 이게 단일성이 안돼요.

교회 오게 되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정답은 있어요.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 동에서 오셨습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어느 동이든 내가 교회 오는데 그게 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느 동에 사느냐 물으면 내가 중촌동에 삽니다. 36년 된 금호 아파트에 삽니다.”

이렇게 하겠는데, 그건 어떤 조건의 탈락이냐 하면 ‘교회가 무엇이냐’를 보여줄 기능, 전도에서 ‘나는 중촌동 옛날 아파트에 삽니다.’ 이게 전혀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게 돼요. 왜? ‘나’가 들어가니까. 천국은 불순물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리스도 몸이 들어가는데, 내가 들어가는 것, 그것은 가차 없이 못 들어가게 합니다.

제가 제일 답답한 게 그거에요. 참 답답한 게 천국은 간다 하면서도 몸은 천국 가는 몸이 안 되었을 때, 저 사람 어쩌려고 저러는지. 도대체 대책이 있어? 아무 대책도 없어요. 천국 갈 거라고 기대하면서 마음가짐이나 생각은 천국에 못 살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요. 이거 어쩌면 좋아요, 이럴 때는? 뭐 약물 주사를 놔도 안 되고 어떻게 달라질 대책이 없네요. 대책이 없어요. 바꿔야 되거든요.

“천국 간다는 내가 바로 죄였습니다.” 이렇게 바꾸면 된단 말이죠. 그럼 “지옥이나 가라.” 이런 이야기 안한다고요. “어떻게 알았지, 그걸?” 그래가지고 주님께서는 “너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 이렇게 되는데 그냥 “성경에 보니까 예수 피 믿으면 간답니다.” “너는?” “나는 그대로죠.” 네가 그대로 있으면 안돼!

그대로 있으면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 아니고, 만약 교인 수가 50명이라면 그 교회 몸이 몇 개에요? 50개가 돼요. 그거는 교회 아니에요. 뭐 낙지도 아니고 히드라도 아니고 이거 뭐 진짜 50개의 머리가 있어가지고 중구난방 된다니까요. 하나에서 나와야죠, 하나에서요.

“당신은 무슨 물 먹었어요?” “나는 뭐… 삼다수 먹고 왔어요.” 이스라엘은 한 군데 한 반석에서만 나온 물을 먹었는데 삼다수를 먹고 왔대요.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어요. 말 안 통하니까 수준 낮으니까 우리끼리 놀자. 게바 파고 아볼로 파고 뭐 바울 파고 예수 파고 파를 이루었다고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왔던 반석, 실제적으로 반석에서 나온 물질적인 물을 먹은 자들은 구약에 오면서 탈락됐어요. 탈락이 있는 거예요. 온전한 완전체가 아니고 탈락을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 이것을 거론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하나의, 반석에서 물 먹는 것 말고 물 안 마시고, 그리스도에 속한 자는 두 번 다시 뭐가 없다? 탈락은 이제 없다. 이제 탈락은 없는 거예요. 물마시듯이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그렇다.

탈락이 없다는 말은, ‘나’라는 가치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집게로 빼내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늘 제거해주는 작업을 성령께서 해주신다는 거죠. 어제 낮 설교에 이 대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제가 귀신들린 자를 이야기했죠.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들어있는 인간. 아무것도 아닌, 마귀죠, 진짜 귀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름도 없어요, 그냥 군대에요, 아무것도 아닌 마귀가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남은 인간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게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사가 안 될 수 없어요. 감사가 절로 돼요. 왜 우리가 감사와 기쁨이 없냐 하면 지가 뭐 인양 여기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라도 된 양 여기기 때문에 불안이 와요. 이 잘난 것을 어떻게 손상당하지 않고 흠집당하지 않고 지켜내느냐? 그렇게 지켜내는 방법은 여러분 아시죠? 맨날 자기의 뭘 끌어와요? 자기만 지키고 남은 못 지키는 법을, 자기만 지키니까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법을 끌어와서 이게 자기 의가 되어버려요.

그 법이 있는 자는 스스로 망가진 자에요. 사실은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 깔끔하게 다 치료가 되고 괜찮은데요. 상담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오은영 박사부터 해서 상담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이혼숙려 캠프에서 서장훈부터 퇴직 판사, 변호사들 나와서 상담해주죠. 상담하는 사람들을 상담하고 싶어, 정말.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그 목적지가 뭐냐 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거에요. 당신은 소중하다는 거예요. 이거는 상담을 하는 게 아니고, 악을, 하여튼 저주를 벌어. 인간은 소중하지 않습니다! 그게 치료에요, 그게. 우울증이고 뭐고 간에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대로 병 걸려 죽어도 상관없어요. 마귀의 주택지인데 뭐 마귀 아파트가 마귀 아파트 값을 하지, 뭐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 말하려고 지금까지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말을 위함인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도가. 사도 본인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맨날 죽음에 넘기움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신경 쓸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죽는데 내가 왜 신경 써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닌 흙으로 되는 것이 그게 왜 내가 신경 쓸 문제냐 이 말이죠. 발주체가 내가 아닌데요. 아파트 한번 지어봐야 돼.

자꾸 율법, 성경말씀 동원해가지고 대학교 간사들, 학생들처럼 ‘주여 주 오는 날까지~’ 찬송해가면서 ‘주여 주여 회개합니다’ 이러고 있는데… 물론 기성교회에서 그렇게 하니까 애들이 본받아서 그렇게 하겠죠.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주 오시면 너 없는데? 너 누구세요? 하고 있는데 어쩜 좋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언제 오셔도 상관없어요. 내가 없으면 뭐만 남는 줄 알아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만 남아요. 복음만 남는다고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 안에 말씀만 남는다고요. 말씀만.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상담하는 사람들이 정신병자 같아요. 이혼숙려 프로그램 보게 되면 성질나면서 보거든요. 이거 뭐 개판이야, 개판, 완전히. 남편 돈 한 푼 안 벌면서 돈 쓰면서 큰소리치고요. 기가 차요. 여자는 돈 벌어주면서 얻어맞으면서도 안 떠나고 있고. 뭐에요? 자기에 대한 자기 애착이거든요. 집착이란 말이죠. 자기 결정에 대한 자기 집착이에요. 비참하게 끝나는 걸 내가 용납 못하는 거예요. 전부 다 정신병자들이에요, 정신병자들. 공통점이 뭐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걸 모르는 거예요. 그들이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나와도 소용없어요.

로마서 10장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전도의 발주체가 누구라고요? 보낸 자에요. 하늘이죠. 성령께서. 그러니까 ‘전도하고 싶으니까 성령 오세요.’ 안돼요! 출발을 너부터 시작하는 것은 전도가 안 된다고요. 그냥 살아. 나 빼고 살아, 나 빼고. 나 빼고 살면 어느 현장이든 뭐 동창회 가든 어디에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그게 전도에요. 전부 다 공부 잘하는 거 자랑하는데 나는 뭐 ‘우리 애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 자랑하고…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해놓고 ‘아름답다’를 어디다 딱 집어넣느냐 하면 그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 아름답다는 규정을 해버려요. 뭐 아름답기 위해서 전도하고 이런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모든 게 하나님이 발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는 세세에 모든 작업에 하나님의 손길이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이 전도를 하는데 누가 방해하느냐? 나의 나 의식이 방해하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일상생활 가운데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마찬가지에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고요. ‘주여, 이런 일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또는 ‘이런 일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할 줄 나는 몰랐습니다.’ 이런 것.

‘내 뜻대로 안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럼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주께서 퍼부어주고 있는 것의 극히 일부만 알면서 나는 내 인생 오늘 잘 살았다, 못 살았다 함부로 평가한 거예요. 내가 존재한 자체가 주님께서 복음 전파하기 위해 안 죽인 거예요. 살려준 게 아니고, 안 죽여준 거예요. 안 죽이고 일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그 중에서 극히 일부밖에 안돼요.

그 일부라도 건진 게 어딥니까. 그 일부를 알거든요. 일부를 아는데 그 다음날 저녁에 무슨 일 터져버리면, 갑자기 전기세가 예상보다 많이 나갔다 하면 그 감사와 기쁨은 그 순간 다 날아가죠. 왜? 극히 일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까지 포함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다시 전기세 많이 나온 거보고 생각해보니까 옛날에 연탄 때우고 살던 거 생각하면 지금은 가스 불 들어오는 이게 얼마나 고마운지. 갑자기 또 고마움이 생기는 거예요. 일부가 약간 더 늘어났어. 전부는 아니에요. 몰라요, 우리는. 어느 정도 감사해야 될 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그 일부라도 내 기능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 전파 기능에 참여되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라는 말씀이 이제는 새록새록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러지 못한 것은 내 생각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내 생각을 지워주시는 이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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