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부득불 상

아빠와 함께 2025. 1. 3. 09:05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4강) 고전9:16(부득불 상)20241230b(강의: 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p.153 [십자가와 상급]. 상당히 관련 없어 보이죠. 그런데 이게 관련이 있습니다. 왜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받은 상이 있어요. 상을 같이 누리자, 하는 대상자가 있기 때문에 상급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은 주님이 혼자 하시고 우리 상은 같이 누리자.

그걸 성경 전체로 보면 신랑 혼자 고생하고 신부는 신랑 덕분에 그냥 누리는 것. 그걸 혼인잔치라고 이야기합니다.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신랑이지, 신부가 아닙니다. 여러 명의 신랑은 없어요. 항상 단 한명의 신랑만 있고, 신부는 숱하게 많습니다.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다, 또는 숫자로 표현하면 십사만 사천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왜 구원받느냐? 전부 다 주님의 상급의 효과 때문에 그렇게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상급 상 안에 들어가는 것이지, 상을 받는 게 아니에요. 상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상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현실상, 또는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을 이야기하거든요. 그 세상 안에 살게 되면 그 자체가 상급 안에 들어와 사는 겁니다. 거기서 만약에 내 상급 따로 있고 네 상급 따로 있으면 그때 왕위쟁탈전 또 벌어집니다. 반란이 일어나서 안돼요.

상급이 예수님 혼자 공로로 주어진 상급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상의 조건이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조건이에요. 공동체라는 조건을 아주 실감나게 하려면, 동체. 앞에 (불붙은) 동체. 비행기 동체. 뜨겁습니까? 실감 좀 나죠. 이 불붙은 동체에서 살아남은 자는 어느 범위냐? 성경에 나옵니다. 머리가 아니고 꼬리 부분. 꼬리 부분에 승무원 둘만 살아남았어요. 말석에 앉았던 사람들.

이 세상 자체가 불붙는 동체에요. 이제 곧 타버릴 거예요. 타버리는데 신기하게도 이 비행기가 태국에서 올 때는 전부 다 각기 자기 소유의 좌석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비행좌석에 앉은 여행자들은, 이 좌석은 내가 앉을 권리(소유권)가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공동체인데 어떤 공동체냐 하면 ‘각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공동체’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갖고 있죠. 이건 조건에 해당됩니까, 해당되지 않습니까? 조건에 해당되지 않겠죠.

그러나 인간들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두 이 공동체에요. 따라서 각자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공동체. 뭐 예를 들면 어떤 권리냐?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를 마치 차표처럼, 내가 갖고 있을, 고정되고 지정된 좌석처럼 그렇게 느끼고 있는 공동체, 이 공동체를 두 자로 뭐라고 합니까? 이걸 오늘날 교회라 하죠.

이 교회를 박살내는 공동체의 투쟁에 의해서 지상의 상급이 윤곽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싸움이 일어나야 돼요. 상급이 무엇이냐를 두고 싸움이 맹렬하게 일어나야 돼요. 왜? 인간은 각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기본자세로 되어있기 때문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내 것’이라는 조건은 ‘내게 대해서 내가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이걸 두 자로 ‘노동’이라 해요. 노동의 대가. 예수 믿는 것도 뭡니까? 노동의 대가죠. 가만있어서 주어지는 게 아니고요. 교회에서 가만있으면 안 되고 뭐라고 합니까? 집사님, 뭐라고 합니까, 교회에서?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 하죠. 로마서 10장에 의해면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했죠.

그러니까 교회에서 해야 될 것은 뭐냐? “본인이 하세요, 본인이. 남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믿어야 됩니다.” 하는 순간 본인이 그걸 인정할 때 나만의 특별한 내 몸은 누구 소유권이다? 내 관리 하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죠.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지워지고 삭제되는 게 아니고 내가 강화돼요. 그러면 이제 여러 목사 찾아다니면서 “보다 더 보충할 거 없어요?” 이러거든요. 자기를 지울 생각 안하고 자기를 부정할 생각 안하고 더 마저 채울 게 없습니까? 나중에 가서 ‘아이고, 이거 빠뜨렸네. 빠뜨리면 지옥 가는데.’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완벽한 옵션을 다 채울 수 있는 것. 차 앞에 떠는 것부터 해서 에어컨부터 해서 깡통 말고 옵션 꽉꽉 다 채우는 그런 거. 그런 조건을 성경에서 찾는 겁니다.

주일 낮에 했던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본인이 사랑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없겠죠?’ 뭐 이런 식이죠.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왜? 지금 뭐가 급한 겁니까? 뭐가 본인한테 심각한 거예요? 내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정리가 안 된 게 본인한테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썩은 시체에 훈장을 하나 더 붙인들 그 시체가 살아나는 게 아니잖아요. 쓰레기에 훈장 붙이면 그게 훈장 값을 합니까? 따라서 자기를 쓰레기로 그냥 포기하면 되잖아요. 쓰레기로 자기를 놔주면 된다고요. 놓지를 못하니까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 하면 다 끝날 문제에요.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르기 때문에 더 알자’가 아니라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나에 대해서 관심 뚝!’ 관심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뭘 알면 돼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니라. 이게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라고요.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런데 그리스도를 아는 게 영생이라 하니까 또 어떤 목사는 이렇게 가르쳐요. 그리스도를 니가 알라고 가르친다고요. 아 참. 골치 아파요. 그리스도를 네가 알아야 네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또 나를 소환해. 계속 나를 소환하게 만들어요. 뭐 소환되고 안 되고 지 마음대로지만. 그걸 부추긴다니까요. 그걸 부추겨요.

뭐가 없느냐 하면 주님의 다 이루심 속에는 절대로, 요한복음 6장 39절 말씀이에요, 절대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릴 일이 없는 능력을 주시는 것도 포함된다. 이걸 믿는 것은 불가능해요, 인간은. 그런데 이걸 믿는 자가 출현해요. 누구겠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알았다’가 아니라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다’고 해요. 내 안에 들어온 거예요.

내 안에 들어왔으면 누가 이제는 즐겁게 밀릴 판입니까? 내 걱정이 밀려야 되죠. 그 말씀의 무게에 밀려 떨어져 나가야 되죠. 그래서 성도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그 말씀이 ‘내가 얻어야지’를 밀어내요. 성도한테는 상으로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그 사실이 ‘나는 그 상 내가 받아야지’를 강하게 부정해버립니다.

일단 신약에서 상이 무엇인가? 그 상부터 규정해봅시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부터 하나하나 설명해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지금 사도 바울이 복음 아닌 걸 전합니까? 복음을 전한다고 분명히 하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이 자기를 사용하는 거죠.

나라는 표현을 해도 항상 나를 사용한다는 걸 전제로 한 나에요, 사도 바울에게는.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나는 죽는다.’가 아닙니다. 성령이 “이번 마지막 배역은 돌에 맞는 배역을 한 거야. 큐!” 하늘에서 예수님이 큐 사인 들어간 거예요. “자, 찍습니다.” 천사는 카메라맨으로 찍어요. 찍으면서 돌에 맞을 때 “잘 맞아! 피하지 말고.”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저 봐. 주님이 찍고 있잖아.” 하니까 그걸 “안 들을란다.” 하면서 돌 던진 거예요.

‘주님이 바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서 있다. 모든 게 각본대로 되어간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 즐거워서 미치겠어, 정말. 지금껏 살아온 것이 다 주님의 뜻인 것을 전에도 알았지만 이번에 또 마지막으로 큰 대박을 터트리네.”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데 돌 던진 사람은 귀를 막아요. 악을 써서. 똑같은 거예요.

아까 한 것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성도의 모든 삶은 죽음을 함유한 말씀에 의해 다루어진다.’ 죽음이 함유된, 죽음이 포함된. 예수님 죽음이죠, 우리 죽음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는 내용을 품고 있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죽음의 취지가 복음 전하면서 나타나야겠어요, 안 나타나야겠어요? 필히 나타나겠죠.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함이니라” 아, 부득불 한다는 말은 안 해도 되는데 반드시 시킨 분이 시켜서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자랑이에요, 그분 자랑입니까? 그분만이 자랑인데 그걸 나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한 거예요. 내가 전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죠.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뭐가 됩니까? 화가 임한다. “종이 종노릇 제대로 해야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까라하면 까야지 뭐 말이 많아.” 하면서 뒤통수 때릴 수가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건 부득불 하는 것이고 만약에 안 하면 나만 손해란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로 복음을 전할 생각이 없고 아시아 터키 북쪽으로 전하려고 했을 때 성령이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가지 마라.” 그럴 때 우리 같으면 뭐라 하겠습니까? 배운 실력을 동원해서, 이 세상에 듣든지 안 듣든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빨리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뭐 그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그들 자유지만 전할 책임은 우리한테 있고 뭐 어떻고 저떻고 아는 거 또 나불거리면서 “그러니까 반드시 전해야 되지 않습니까?” 뭐 이렇게 할 거예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내 담당이지, 네가 왜 거기에 대해서 중얼거리냐 이 말이죠. “내가 시키는 대로 가지 말라면 가지 마.”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아, 네가 여기서 죽는들 내가 택한 백성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 없어. 네가 선을 넘었구나. 내 일이지, 네 일이 아닌데 왜 자꾸… 주의 일이 너의 일로 언제 바뀌었지? 이거 뭐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이지. 나 오늘 죽여버릴 거야, 진짜. 죽여 버려도 할 말 없어. 죽여 버리면 일 할래? 안 하잖아. 매일이 네 마지막 날이야. 매일이.” 매일이 내 마지막 날입니다.

17절에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여기서 내가 내 뜻대로 하면 상을 얻는다는 이 말이 뭐냐? 기존에 하나님이 말하는 복음적인, 홀로 상 받을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세상에 통용되는 상 개념, 상급 개념입니다.

이 상급 개념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셔서 바리새인을 상대로 해서 분명하게 언급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여러분들 알다시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노동(율법 지킴)=구원이 되는 조건이거든요. 구원되는 당사자는 나고 내가 율법을 지킨다는 노동을 해야 돼요. 율법을 안 지키면 지옥에 떨어지니까. 그래서 율법 지킴을 노동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노동을 하면 구원에 상급을 플러스로 받게 되어 있어요. 나+노동(율법 지킴)=구원+상급.

이게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그들은 ‘구원+상급’ 이것이 구약 전체를 해석하면서 내린, 도달한 결론입니다. 이 결론의 문제점은 이거에요. 이 사람들의 문제점은 뭐냐? ‘하나님은 □ 아니고, 나하고 상대하신다.’ 이렇게 돼요.

중간에 뭐가 뻥 뚫렸죠. 비어 있잖아요. 이 빈자리에 누가 옵니까? ‘하나님은 나하고 상대한다.’ 할 때, 하나님이 이 □자리에 와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거예요.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노동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다음에 아까 이야기한 내가 율법 지킨다는 노동이 있잖아요. 이 두 개를 대결시켜요. 비교시키고 대조시키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옛날에 이걸 했기 때문에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한 거예요. 그 믿음이 뭐냐? 선물로 준 믿음이다. 은혜로부터 온 믿음이다. 로마서 4장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4:4-5)

그 믿음이 ‘믿습니다’가 아니에요. 인간이 ‘믿습니다’하는 믿음은 자기가 노동한 것을 전제로 해서 ‘내 노동한 것을 믿습니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만큼 애쓴 것을 믿습니다. 믿음이 일종의 자랑거리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상급 받을 자격이 충분히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들어가 버리니까 이 인간들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아이고, 하나님 노동한 것에 우린 도대체 안 되겠네. 우리 졌다 하자.” 이렇게 나오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요. 예를 들어, 물 위를 걸었다. “우리도 물 좀 한번 걸어보자. 아이고, 안되네. 졌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공격해서 죽여 버린 거예요.

죽였다는 것은 무슨 노동만 살리겠다? 우리는 내가 한 노동만 살리겠다. 이것을 제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세 자로 ‘가능성’이라 해요. 가능성을 믿는 거예요. 가능성. 한국 교회, 성당 전부 다 통틀어 내가 공격한 이유는 오직 이것밖에 없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

가능성에 대해 부정해버리면 교인들 다 떠납니다. 교인들 하나 둘 다 떠나요. 많이 떠났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고 세상에, 주님이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나. 내가 나가라 하는 게 아니고 친절하신 주님께서 친절을 베풀어주신 거예요. 그분들이 안 떠나고 있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어요. 이 소리해서 몇 명 또 빠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 사람들의 주장을 한번 들어봐요. 그 사람 지옥 간다고 자꾸 몰아세우지 말고 그 사람들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 이 말이죠. 들어보면 뭐냐? 믿으라 해서 믿었는데 이게 왜 문제냐 이 말이에요. “행함 믿지 말고 믿으라 해서 믿었는데 이게 왜 문제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 내용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내세웠습니까? 주께서 하신 십자가, 주께서 하신 영생 그걸 믿으라 해서 믿었는데 이걸 시비 걸면 그럼 나보고 어떻게 구원받으란 말인가?” 하고 화를 낼 거란 말이죠.

그러면 복음 쪽에서 하는 이야기는 간단해요. “That's right! 바로 그 뜻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 뜻이에요. 그게 십자가에요. ‘주께서 건져주지 않으면 아무도 건짐 받지 못한다. 내가 시도하는 모든 시도는 다 마귀 짓이다.’ 그걸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그거 주고받는 건 아무 소용없고요. “인정합니다.” 그건 안 기쁘거든요. 억지로 ‘나도 믿습니다’ 그거 티내는 거고요. 그건 거부하고, 기쁨으로 “세상에 이런 횡재가. 이런 난리가 다 있어.” 그럴 때 그 사람에게 ‘내가 믿었던 상급 주세요.’ 이런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못 나오죠.

그 이야기를 고린도전서 9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이 말은 사도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상 개념을 자기가 ‘모른다’가 아니라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저쪽 세계를 구원받은 자도 잊지 않고 다 알고 있습니다.

이걸 알고 있어야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나오게 돼요. 잊어버리면 안돼요. 내가 잊어버리면, 나는 영생 얻었다고 까불고 있어요. 나를 안 잊어버리면 십자가에서 멈춰요. 그런데 ‘나는 이제 영생 알았으니까 날 잊어버렸다.’ 이래버리면 영생 이야기하면서 돌아다닌다고요. 그건 핵심이 되는 아까 첫 번째 강의의 ‘피’, ‘십자가’ 그건 옛날에 다 알았고, 이러고 지나가는 거예요. 막 지나가버리는 거예요. 스톱할 때 스톱을 못 하고 있어요.

자, 그다음에 17절에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하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그래, 이게 진짜 진리야. 주님 저 이제 진리를 맡아 하겠습니다.’ 했습니까? 안 했어요. 안 했는데 누가 맡겼어요? 오야붕이 맡겼어요. 상을 혼자 받을 자격이 있는 그분이 그냥 찍었어, 그냥. 창세전부터 찍었다는 거예요.

창세전부터 찍어놓고, 창세전부터 너를 택하였노니 네가 폭행자로 네가 사람 죽이는 자로 네가 교회 핍박자로 역할 하다가 사도가 된다는 것, 이것은 이미 주님이 쓴 각본대로 이루어질 뿐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신났어요. 신났어. 몸에 가시가 있어서 문제지. 고질병이 안 빠져서 그게 문제지, 나머지는 다 신났던 거예요.

그다음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육신으로 오실 때의 그 반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 당시 정치 세력이 존경받기 위해서 권력의 맛을 봤기 때문에 계속 정치하려고 애를 쓰고 지도자가 되는 애를 쓰는 세상 주권자들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광주강의에서 했죠. 요한복음 18장 36절,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빌라도에게 이야기했죠, 예수님께서.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그럼 이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죠. 있는데 분명하게 있는데 이 나라가 분명히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 네가 내 나라 아닌 곳에 네가 거기서 한번 살아봐라 이 말입니다. 얼마나 그게 힘든지. 내 나라도 아닌데 그 나라에 신경 써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죠. 유대인들이 동전 들고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할 때 주님께서 나라를 둘로 쪼갰잖아요.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바치고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줘라.” 예수님은 나라를 둘로 보는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모함해서 체포하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나라, 그 한 나라로 집약해서 예수님을 자꾸 몰아세우려고 했다 이 말이죠.

나라를 둘로 분리하면 돼요. 우리도 그렇게 대꾸하면 됩니다. 그렇게 대꾸하고 그렇게 살면 돼요. 나라가 두 개에요. 우리의 시민권은 두 개입니다. 주민등록증도 있고요. 그거 또 찢지 말고. 그래야 노인 혜택 받아요. 차비, 지하철 혜택 받는다고요. 주민등록증도 있고, 그건 썩어질 거고 다른 나라가 또 있는 겁니다.

이 나라가 없고 다른 나라만 있는 존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천사에요. 천사. 자, 질문 들어갑니다. 천사는 상급을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안 받습니다. 천사가 인간들을 그렇게 부러워하고 사도 요한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천사는 사랑이라는 그런 감정들이 없어요. 미운 감정도 없습니다. 지옥 가는 건 밉다, 천국 가는 건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감정을 인수인계 받은 자에게만 해당돼요.

천사는 무뚝뚝한, 그야말로 영어로 하면 stony, 꼭 돌 같은, ‘stony~’라는 노래 있어요, 돌 같은 사나이, 무뚝뚝한 사나이, 냉혹한, AI같은, 인공지능 같은 그런 존재에요. 인공지능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면 아무 맛도 없이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에요, 도대체.

천사는 아무 감정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해요. 천사와 욥의 차이. 천사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세 친구의 중보자 기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에게 당할 대로 당했기 때문에.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욥과 하나님과 연관되지 않는 친구들. 그러면서 친구들은 하나님을 어쩌면 그렇게 거론하는지. 연결되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들은 풍월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지. 신학을 펼치죠. 그들은 나(하나님)와 관계없다. 따라서 관계있으려면 욥이 당한 고난 앞에서 너희들은 자기 죄를 인정해야 된다. 나에게는 그러한 아픔이 없었음을 용서해주옵소서. 주님의 아픔 없는 걸 용서해달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천사는 이 나라는 없고 남의 나라에 그냥 사는 게 천사에요. 그런데 성도는 이 나라도 겪고 그러면서 이 나라가 아닌 나라의 사람으로 신분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따라서 그냥 마음 같으면 ‘빨리 죽여주옵소서. 그게 속이 시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만요.

‘나도 그 비행기 좌석 하나 있어가지고 그때 불탈 것 같으면 미리 태국에 가서 억지로라도 야매 표라도 해서 탈 걸. 그것도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폭발할 때…, 폭발하면 아프진 않을 거예요, 탈 걸.’ 이렇게 하는데 어디 그런 호사를 누리려고요. 이런 호사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운권이 아닙니다.

그저 치매 걸려서 요양병원에 가는 그런 비참한 곤욕을 당하면서 새삼스럽게 ‘내 나라는 아니다. 이곳은 내 곳이 아닌데 아직 안 떠나고 이렇게 어기적거리고 고생을 해야 되나.’ 그걸 겪어야 돼요. 겪어야 천사에게 없는 주님의 사랑을, 이 못난 죄인을 사하여 주시는 용서와 사랑을 알게 되는 거예요. 사탄의 가시가 사도 바울 몸에 박혀있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크게 한번 써볼게요. 오늘 강의에서 이것만 하나 받아들여도 됩니다. ‘더는 잃을 것도 없고 더는 얻을 것도 없다.’ 우리의 입장은 그렇습니다.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이걸 한 마디로 말하면, 종이죠. 종. 착하고 충성된 종.

자아에 대해서 이미 삭제당하고, 삭제당하고 비어있으면 안되죠. 삭제당하고 거기에 십자가 다 이루심이 이 안에 차고 들어왔으면 그다음부터는 주님한테 가스 라이팅 당한다 했죠.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터키 쪽에 가지 말고 그리스 쪽에 가라.” 그럼 가면 되는 거죠.

내가 몇 명을 전도했습니다, 그건 아무 쓸데없는 거고요. 네가 왜 전도해, 네가? 인간은 단 한명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어떤 인간도 십자가 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 진 사람이 없다면 전도의 주체는 본인들이 아니에요. 그럼 십자가 지지 않았는데 왜 전도하라 하느냐? 전도해야 네 죄를 그 현장에서 새삼스럽게 드러낼 게 아니냐, 죄를.

‘내가 했습니다.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목회하고 내가 복음 전했습니다.’라는 인식이 새로운 자아상을 형성하게 되잖아요. 형성하게 된다고요. 그럼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목 내놔. 어이, 천사. 모가지 따.” 이렇게 하면 “잘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늘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요. 늘 내가 다시 죄인 자리로 돌아가는 이 기쁨. 거기서 십자가로 인한 감사가 또다시 샘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만나처럼 계속 나오는 겁니다.

자, 18절 보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 상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것 전하면 안돼요. 복음을 전할 때 발생되는 그 무엇이죠.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이게 뭐냐? 상급이죠.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사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죠. 섬김 받으러 왔어요, 사실은. 주가 되기 위해 왔는데 말씀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사람에게 섬김 받으러 온 게 아니고 도리어 내가 사람의 종이 되러 왔다.” 이렇게 하셨잖아요.

그래도 못 알아들으니까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오라 했죠. 물 가져오라. 전에 설교한 것 같은데 세숫대야에 물 담아오라 했죠.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 씻어 달라 했어요. 다 씻어 달라. 그럴 때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부분만 씻어도 다 씻는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야, 너는 내 일의 하나의 부분일 뿐이다. 하나의 비유일 뿐이에요. 몸체는 주님이고. 주님한테 붙어있는 발가락 같은 기능, 존재. 그게 베드로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다 씻어 달라 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고 예수님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 예수님 이용해서 전신으로 깨끗하게 마사지 받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놓고 영생 얻었다고, 나 진짜 애벌레에서 나비 되었다고. 참내.

고린도전서 9장 19절 이야기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고맙소>라는 가사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요. 봉사하고 희생하는 거예요. 성도는 이렇게 사는데요. 왜?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잃을 것도 없을 때는 봉사하고 희생하는 거예요.

옆구리 있는 데가 꽉 막혀 체했을 때 마사지 받으면 쑥 내려가죠. 그래서 “그렇게 마사지 해줬으니까 이 아파트 줄게.” 합니까? 턱도 없어요. 화장실 들어갈 때 기분하고 나올 때 기분 달라요. 다르죠? 왜? 봉사, 희생을 하는데 상대는 잃을 것, 얻을 것 다 계산하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사도로 하여금 봉사하고 희생하게 하는데, 상대에게 “아고, 봉사하군요. 희생하는군요.” 이렇게 받는 것이 아니고, 결국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다했는데 그쪽은 나에게 뭘 준다? 상처를 주는 거예요. 그만큼 뭘 몰랐다? 세상을 몰랐어요. 세상을 모른 거예요. 내가 잘해주면 그저 잘해줄 줄 안 거예요. 아파트 줄게, 이런 거. 요새 신축 아파트 짓고 있는데 그거 당첨권….

세상은 이렇습니다. 바로 이걸 예수님이 경험하셨고,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욕은 욕대로 다 얻어먹는 그게 이 상이다, 이 땅에서. 어느 땅에서? 남의 땅에서. 남의 땅에서 그 상을 받아야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때 받는 상은 내 노동이 아니고 주님의 희생을 반복했다는 그 상, 주께서 주신 희생의 반복에 주님의 취지에 합당한 주님께서 얻은 상에 우리가 참여할 뿐이에요.

천사는 부러워합니다, 이걸. 천사는 부러워해요. 주께서 안 넣어줘요. 마리아가 임신했잖아요. 봉사입니다.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남편 될 사람 요셉이 거부하죠. 나는 어쩌라고? 내가 뭐 임신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조용히 마리아 불러서 “나 쿨한 남자니까 너 자유를 위해서 내가 보내줄게. 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남자야. 우리 헤어져.” “왜?” “사랑하니까.”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할 때, 그 요셉 누구한테 된통으로 책망 받습니까? 천사한테 책망 받죠. “아는 체 하지 마라. 네가 드라마를 많이 보고, ‘야, 이럴 경우가 나한테 생기다니.’하는 그쪽으로 가지 마라. 네가 아는 것은 네가 정할 수 있는 내용들이 하나도 없다. 너 때문에 상처받은… 헤어지겠다고 쿨하다고 하는 그게 더 상처인 줄 몰라?”

“마리아, 너 어떻게 임신했어?” “성령으로 임신했어.” ‘내 그럴 줄 알았어.’ 왜 이렇게 못해? ‘나 그럴 줄 알았어. 너한테는 진짜 성령이 올 줄 알았어.’ 요셉 너 그런 말을 왜 못해? ‘그래서 넌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 왜 그 말을 못하는 거예요? 불가능성이에요. 구원은 불가능성이에요. 상급 받는 것도 불가능성이에요.

그걸 어디서 경험해야 됩니까? 남의 나라에서 경험해야 돼요. 비행기 내려앉고, 탄핵한다고 난리도 아니고, 탄핵한 사람 또 탄핵하고 탄핵한 사람 또 탄핵하는 그 나라. 남의 나라잖아요, 남의 나라. 아무 상관없는 나라인데 ‘너는 비행기 떨어진 걸 애도하지 않고 그걸 왜 즐기느냐?’ 뭐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욕 얻어먹는 그걸 자진해서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나도 앞자리에 탔으면, 그걸 이상한 이야기하는 걸로 여기고. “가족들의 아픔을 생각해봐라.” “주님의 십자가나 생각해봐라.” 그것도 말 못해요. 얼마나 인간들이 사건 터질 때마다 자기 위주인지.

물론 성도가 내일까지 살지 모르지만 계속 산다면 아직 사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바로 피의 색깔이 자꾸 옅어지기 때문이에요. 그걸 사자성어로 ‘색소침착’이라고 합니다. 피부가 이상해졌어. 점점 더 이상해. 함몰된 것 같아. 우리는 복음 듣고 돌아서면 색소침착이 여러 군데서 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확 갈았죠. 12만원 주고 확 갈았잖아요.

이럴 땐 어떻게 하면 됩니까, 목사님? 20절대로 하면 돼요. 알아서 색소침착하면 돼요. 내가 알아서. 그게 20절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 전도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나는 트랜스포머가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변형이 가능해요. “정체를 밝혀라. 네가 죄인이야, 의인이야?” “어떨 때는 의인이고 어떨 때는 죄인이고. 하늘나라에서는 의인이고 이 땅에서는 죄인이고.” “둘 중에 하나만 해라. 하나로 뭉치면 안 되나?” “안 돼.” “왜?” 트랜스포머거든요.

형태가 바뀌어요.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 따라 바뀌면 돼요. 이래도 죄인이고 저래도 죄인이니까. 죄인이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형태까지 바뀌는 그게 무슨 문제가 돼요.

22절에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모양, 여기 트랜스포머 나오네요.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뭡니까? 참여. “참여하고자 함이라”

일은 누가 해요? 현재 성령이 일하시고 주님이 일하는 것에 나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상급은 공동체가 같이 누리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3장은 안 찾아봐도 되겠죠. 어떤 사람은 심었고 어떤 사람은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뿐이다.(고전 3:6-9)

이 공동체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단일 존재. 그 공동체 특징은 항상 뭘 해도 ‘주께서 내 안에서 하셨지 않습니까? 하셨잖아요.’ 그러한 되질문을 하게 만드는, 오히려 질문을 유도하게 만드는 상황들입니다. 주께서 하셨잖아요. “또 대상이가?” “주께서 하셨잖아요. 주께서. 주께서 하셨잖아요. 내 죄를 드러내라고 주께서 대상 줬잖아요.” 다음엔 특선되고 싶다. 그럼 죄를 더할 건데.

이렇게 상을 받는 그 끝에 27절에 보면… 상은 공동체입니다. 내 상이 아니에요. 공동체 상에서 내 역할로 있는 상이에요. 그 상에 끝부분은 뭐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트랜스포머까지 해서 전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두려워함, 이걸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이거는 드라마가 아니고 영화에 나오는 내용인데, 영화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좋고. 어떤 영화에서 공항 검색대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한쪽 이어폰을 발견했어요. 그 이어폰을 딱 꽂는 순간, 그걸 멀리서 지켜본 사람들이 지시를 막 보냅니다. 네 아내가 누구고 직업이 뭐고 네 아들이 몇 명 있고 아들이 지금 뭐하고 있고 네 부모가 지금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고 다 안다고 하면서 내 지시대로 내가 보낸 것 검색대에서 그냥 통과시키지 않으면 그들 지금 이 순간 다 죽는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합니까? 협박이라 하죠. 협박. 그런데 협박하면서 “저쪽을 봐라. 지금 네 이마에 빨간 거 있지? 총이 너를 조준하고 있지?” 총 쏘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 협박했던 그 남자에게 협박당해서 그런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에게 총 쏘라 했는데 안 쏘면 ‘네 아내가 죽는다. 네 가족이 몰살한다.’ 협박을 또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 전부가 협박과 협박을 하는 관계,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 거예요. 모든 인간이 해당돼요. 그러면 남편과 아내의 대화는 뭡니까? 안에 뭐가 섞여있어요? 협박과 공갈이 섞인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거예요. 너 만약에 내 뜻대로 안 해주면 오늘 밥 없다, 이런 거요. 협박과 공갈이죠.

협박과 공갈이 없으면 우리는 그걸 자유라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악마한테 협박을 받든지 주님한테 조종을 받든지 둘 중에 받아야지, 피하면 안돼요. 그래서 아까 고린도전서 9장 27절은 뭐냐 하면, 지금 사도 바울은 주님과 같은 공동체에서 주님의 지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나도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 하에 내가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한 자로 뭐라고 하느냐? 이게 바로 나의 받을 ‘상’이라는 겁니다. 상.

주님의 지시와 주님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님께 감시를 당하는 것이 상이라는 거예요. 왜? 회개하는 동시에 늘 감사가 나오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인간인지라 수시로 수시로 나는 이렇게 희생과 봉사를 했는데 상대는 조롱과 멸시와 모독과 무시를 보낼 때 성질이 올라오죠. 그런데 주님은 “나도 당했다. 너는 지금 내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거야. 싫어? 말아?” 이러고 있다고요.

그게 일종의 주님한테 당하는, 세상적으로 말하면 협박, 공갈이에요. 이거 없이는 구원이 안돼요. 이거 없이는. 그러니까 이게 바로 자유라는 거예요. 자유라는 말은 한쪽 세계에서 일체의 협박과 공갈을 받을 필요 없는 신분,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부터 어떤 평가나 지시를 안 받아도 되는 신분.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들 참 많이 있었어요. “그럼 목사님, 내 마음대로 하면 됩니까?” 그러면 제가 말하죠. “주 안에서 마음대로 하세요.” “기도 뭐합니까?” “주 안에서 기도하세요.” 주 안에서 기도한다는 말은 주님의 협박 받으면서 기도하라 이 뜻이에요. 공갈 받으면서. “너 죽인다. 내 뜻대로 안하면 실패하고 말거야.”

그걸 고상하게 협박이란 말로 했지만 히브리서 12장의 단어로 하면 ‘징계’라 하죠. 징계가 없으면 내 아들이 아니란 뜻이에요. 참 좋게 이야기해서 ‘우리 가족이잖아.’ 이런 뜻이거든요. 너 나하고 가족이잖아. 8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참 아들이냐? 아들이라고 자꾸 큰소리치지 말고 너 언제쯤 징계 받았어? 며칠 징계 받았는데?” 이렇게 묻는 거죠. 징계란 말은 내 줄이, 내 일상의 모든 관리줄이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뻐하는 거예요.

이 구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그다음에 뭡니까?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걸 왜 설명해야 되느냐? 왜 설명해야 되느냐 하면 이렇게 딱 보게 되면 ‘그러면 난 고난 안 받고 나는 천국 안 갈래.’ 하는 요런 꼼수를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30절을 보게 되면 그것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미 확정했다. 끝내놨다는 겁니다. 그럼 이 고난에 내가 고생한 고난은 포함이 안 되죠. 그건 미확정이니까. 내가 철수해서 고난 안 받겠다 하면 안 받는 거고 받겠다 하면 받는 거고, 이건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기 때문에 고난 아니에요. 자기가 지금 순교 폼 내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고난은 무엇을 확인시켜주는 겁니까? 30절을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이미 이것은 빼도박도 못하고 주께서 이미 내 식구라는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이 남의 나라에서 이런 수난과 이런 모든 서러움을 다 겪게 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주와 함께 영광 받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더 깊이 감사하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절차가 하나님이 주신 상급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흉내내거나 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지고 주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흔쾌히 군소리하지 말고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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