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9강) 신명기12:30(나의 일 빼기) 20250324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2장 29절에서 32절까지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 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어 거기 거하게 하실 때에(29)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벌써 낌새가 이상하죠. 사람을 망하게 하는 땅에 네가 들어가게 되면, ‘너는 망할 각오해라’ 이런 뜻이에요. 너의 끝은 누가 안다? 하나님, 내가 안다, 내가 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터미널로 사용한다.”
터미널이란 뜻이 뭡니까? 모든 게 종점이죠. 끝점이잖아요. 이방 민족은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관심사가 현재 있는 나를 어떻게 지켜줄 것이냐에 관심이 있어요.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인간들도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여튼 이방 민족은 자기를 위한 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끝장난다는 생각은, 자기를 끝장내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을 선택하지 않죠.
종교마트에 가서 그 신을 카트에 안 담죠. 지금 나를 행복하고 풍성하게 해 줄 신을 담지, 왜? 선택은 내가 하니까. 신을 내가 선택하잖아요. 나 좋아라 하는데, 나를 망하게 하는 신을 누가 선택합니까? 이스라엘도 망하게 하는 신을 선택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훅 들어오신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불쑥 들어온 거예요.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노예로 몰아세우게 만들었어요. 그들로 하여금 애굽의 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애굽의 많은 신이 자기의 존재 자체를 압박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옛날 잃어버렸던 신, 여호와, 400년 전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그들은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까짓거 노동을 좀 힘들게 시켜도 노예를 죽이진 않아요. 왜냐하면, 노동하는 기계이기 때문에 죽이지는 않는데, 이스라엘에게 바로가 어디까지 압박하느냐 하면 아예 족보를 끊어버리는 짓을 했죠.
‘아들 낳으면 다 죽여라.’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자기 아들 대에 희망이 없고, 왜냐하면 대가 끊어지니까. 이걸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사실, 완전히 영원히 히브리 종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기의 끝장을 본다는 데 대해서 마지막에 그들은 여호와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족보를 잇기 위해서 부르짖었죠.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압박을 가해서 된 거예요. 가끔 과학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 있어요. 진화론 주장하다가 자기가 병에 걸렸다든지, 가정에 문제가 일어나니까 어릴 때 주일학교 다녔던 그 하나님으로 돌아섰다. 그런 것이 기독교 기사에 보면 많이 나와요.
뇌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든지, 양자물리학자가 ‘과학 속에 나타난 하나님’ 이래 가지고 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았다고 해요. 어떤 계기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속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역전이 벌어지는데요...나에게서는 나의 일이 나오죠. 내가 구원받는 건 누구의 일입니까? 나의 일이죠.
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광주 강의에서도 했지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그 신을 선택하는 행위도 누구 좋으라고? 나 천국 보내달라고 보험 하나 들 듯이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들어왔다 이 말이죠.
소위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 주님, 주님이 계시면 가만히 계십니까? 어떻게 합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죠? 나에게서 뭐가 나옵니까? 나의 일이 나오죠. 그럼 주님에게서는 뭐가 나옵니까? 주의 일이 나오죠. 이 주의 일이 근거가 있어요. 바로 율법을 앞장 세워서 주의 일이 율법대로 그냥 추진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일이 등장했고, 내가 존재한다는 이상 무슨 일이 계속 지속적으로 주저 없이 나오게 됩니까? 나의 일이죠. 이 둘 사이에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뭐가 셉니까? 하나님이 세죠.
‘하나님 참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셉니다.’라고 발언한다고 해서 내 일이 중단됩니까? 중단되지 않죠. 중단되지 않습니다. 개가 주인 왔을 때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지요. 좋다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그 주인이 선을 넘으면 안돼요.
개 밥그릇을 발로 찬다든지 이러면 개도 , 원래 개가 이해심이 많은 편이라 그런 건 봐주는데, 개가 먹는 사료에 주인이 입 대고 먹는다든지 이럴 때는 잠자고 있던 라이벌 의식이 확 올라오면서 개가 뭐라 합니까? “It is mine!" 이거 내 거야. 이렇게 영어 방언이 막 터져 나오면서.. 물론 미국 개이겠지만.
”이 사료는 내거야!“ 내거니까 내가, 개라는 나의 존재에게 있어 나의 사료를 먹는 것은 이것은 천하의 주인이라도 주인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내 일, 개의 일. 개의 일은 지켜줘야죠. 주인이라도 선 넘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개보다 못한 게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훅 들어오면서 밝혀내는 거예요. 밝혀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일에 요구하는 목적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너는 네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네가 누군지 아느냐? 소크라테스가 이거 몰라가지고 고민고민 했어요.
소크라테스의 전기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사람들 만나서 계속 묻는 거예요. 어떤 청년을 만나서 그 청년에게 “너 왜 네 아버지 고소했어?” “아버지가 경건치 않아서요.” 그 당시에 신을 안 믿으면,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경건하지 않은 거였어요. ”아버지가 신을 인정 안 해서 아버지를 고발했습니다.“
도시 사람이었으니까요. 싱가포르처럼 도시 사회가 소규모제라서 법의 적용이 아주 엄격해요. ”그래, 아버지가 신을 안 믿는다고 고발해도 되나?“ ”네, 경건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뭔데?“ 라고 또 시비 걸기 시작합니다.
”경건이 뭔데?“ ”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예전 말로하면 신탁, 무당으로부터 받은) 위반하지 않는 게 경건입니다.“ ”신탁을 누가 결정하는데?“ 너 오늘 잘 걸렸어. 계속 캐고 다닌 거예요. ”네가 신의 내용을 알아? 네가 전해 들었잖아.“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켜야죠.“ ”네가 지키는 것과 신탁을 받은 무당이 지키는 것이 어떤 근거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하느냐?“ 라고 계속 따지는 거예요.
결국 소크라테스가 노리는 것은 뭡니까? ”저는 경건에 대해서 모르겠습니다.“ ”너는 왜 모르면서 아버지를 고발했냐?“ 여기까지 몰아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고발한 청년이 뭐라 합니까? ”왜 고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거예요.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 이게 과연 진리냐? 이게 거짓이지, 이게 무슨 진리냐? 그걸 캐 가는 거예요.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그걸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리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소크라테스 앞에 앉아있다고 봅시다. 소크라테스가 똑같은 논리로 나한테 묻겠죠. ”너는 네가 누군지를 아느냐?“ 그러면 소크라테스 논리대로라면 모른다고 해야죠. 모른다고 한다면, 그 모른다는 걸 가지고 소크라테스는 시비 걸 거예요.
”왜 모르는데?“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야지. 모른다는 사실을 당신이 어떻게든 모른다는 사실을 하면, 당신 나름대로 정리되어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경건이 뭐냐, 정의가 뭐냐, 진리가 뭐냐’이걸 모르는 게 아니고, 가장 기본적인 것은 뭐냐?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걸 짐작했는지 늘 주장하던 게 뭡니까? “네 자신을 알라.” ‘네 자신을 알라’고 하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된다는 그 의지, 그 의지가 무지에서 나온 거예요, 그게. 잘 이해 안 되면 그냥 넘어가고요.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알아야 되니까. 정답부터 먼저 말씀드려볼게요.
너는 너 자신이 누군지를 아느냐? 율법을 통해서 이걸 언급하시는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주께서 우리에게 주는 해답은 우리는 출발할 때 ‘나는 내가 이런 존재다.‘라는 것을 이미 우리 안에 뭔가 심어져 있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수상한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되는데 심어져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은 모르지만 주님은 아는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해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을 죽일 자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는 누구냐? 87일 만에 국무총리가 복귀되었잖아요. 기자회견 합니다. “저는 말씀회사에서 온 기자인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하죠. 그걸 듣고 국무총리가 “나는 예수님을 죽인 자입니다.” 이런 발언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담임목사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목사입니다.” 그런 사회적, social position 말고. 당신은 진짜 누구십니까? “내가 하나님 아들을 죽인 자입니다.” 구약에서는 뭡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그런 품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보유자입니다.” 이렇게 되는데, 신약에 오면, 마지막 최종적인 언약이 뭐냐? 예수님 피와 살이잖아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거 인간의 힘으로 그걸 보일 수 있어요, 없어요? 안 되죠. 이게 인간의 일의 한계예요. 인간의 일은 안돼요. 그래서 주님의 일이 이스라엘에게 찾아와서 기어이 이스라엘을 예수님을 죽인 대변자로 만드는데, 그걸 터미널이라고 해요, 터미널.
마지막 종점까지 가게 하시는데, 그 종점이 뭐냐?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이 만나서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순간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다? 어떻게 약한 피조물이 강한 창조주를 죽일 수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창조주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게 해요.
인간 중에서 가장 약한 인간으로 오게 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살인이 가능하도록 그렇게 사건을 거기까지 밀어붙입니다. 터미널이죠, 터미널. 이렇게 터미널이 되어 버리면, 어떤 복음이 형성되느냐 하면,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어디를 간다 합니까? 죽음의 세계에 간다 하죠.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죽음의 세계가 현재 인간이 살아있는 세계와 다 같이 갇혀있는 세계라면, 죽고 난 뒤에 어디 간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죽음의 세계하고 인간의 세계가 이미 한결같이 인간은 늙어 죽어서 세포가 노화되어서 죽습니다. 죽으면 애초부터 이 죽음의 세계에 간다는 말보다도 죽음의 세계가 이 살아있는 모든 세계를 이미 점령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사고에요. 죽어서 거기 죽음의 세계에 가니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인간의 시간관에서 인간은 과거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누적 속에 있고, 인간이 죽게 되면, 누구나 갔던, 인간은 미래에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 미래가 결국 죽는다면, 인간 속에 이미 과거+현재+미래가 한 통속, 한 영역, 프레임 안에 이미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 이야기 한 번 들어 볼랍니까? 잠시만 제가 들려드릴게요. 죽었던 사람 이야기입니다. 죽었던 사람 이야기가 결국은 오늘날 우리 사는 사람과 그 죽음이 같이 있는 거예요. 잠시만 들어보세요. 가사를 생각해보세요.
<아득히 먼 곳>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이 노래 부른 사람 죽은 사람이에요)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가사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 적시네
아득히 먼 곳이라 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의 입장이잖아요. 지금 이선균은 죽음에 가 있어요. 그렇다면, 이 죽음에 가 있는 이선균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와 똑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이선균은 노래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거예요. 어떻게 이선균 노래 들으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얼마나 좋아했던 배우인데..그런데 꽃뱀 때문에 죽었잖아요. 휘성 같은 사람 보세요. 난리도 아니죠, 밥도 안 먹을 거예요. 주인이 죽었는데 개가 밥을 먹을 수 있어요? 휘성의 팬인데..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인간은 과거를 버리는 게 아니고 과거를 품고 살아가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품고 살아간다고요. 이게 무슨 일이다? 인간의 일이에요. 나를 지키는 일이에요, 나를 지키는 일.
이걸 오래전부터, 인류가 역사를 시작할 때부터 조상숭배는 모든 민족의 공통점이에요. 왜냐 하면, 조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금 내 현재, 내 미래에 의미가 있고 내가 있게 된 과거의 의미가 받쳐줘야 지금의 현재 내 의미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디로 보냅니까? 이 과거, 현재, 미래 이선균이가 죽었던 그 장소를 내가 벗어나게 해주는 거예요.
뭐가? 율법이! 그럼 어떻게? 노선이 바뀌어야 되겠죠. 아득히 먼 곳? 아니야, 같이 있어. 같이 있다고요. 네가 아는 범위 안에, 죽음의 세계 안에 있어요. 네가 아는 범위 내에. 전혀 우리가 모른 범위 바깥의 일은 인간의 힘이 못따라 붙여요. 그건 누가 해야 돼요? 주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 인간의 미래를 접고, 하나님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파견 보냅니다. 구약에서는 자기 아들로 오시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먼저 구약에서는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른 이방민족이 따라올 수 없는 나라로 갑니다.
그게 뭐냐? 그렇게 아득히 먼 곳이 아니에요. 그곳은 갈 수 없는 곳이에요. 인간이라는 존재 때문에 갈 수 없는 곳, 그게 율법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입니다. 분류 작업이죠, 분류 작업. 벌써 주께서 시작할 때부터 이미 분류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맨날 싸워도 남편 죽고 난 뒤에 장례식장에서 아내가 붙들고 늘 하던 이야기, 하도 제가 장례식장에 많이 갔습니다. 50번도 넘은 거 같아요. 시골 박사교회 가니까 초반부터 맞닥뜨린 게 장례식이었어요. 오자마자 92세 분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86세 돌아가시고 하는데, 그 따라가는 남아있는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먼저 가 계시게. 내 당신 따라갈게.” 얼마 전까지 싸웠어요. 죽어라죽어라 싸웠는데, “좀 기다려. 내 따라갈게.”
주님께서 용납을 안 하는데요, 거 어디... 거기가 진정 죽음의 세계가 아니에요. 죽음의 세계는 출입구가 예수님이 죽을 때 그 출입구를 통과해야 진짜 하나님이 마련한 죽음의 세계가 나오는 겁니다. 지옥과 천국이 갈라지는 그곳에 가는 겁니다. 뭐, 따라죽어서 뭐 할라고요. 인간은 만나면 전부 다 계약서 들고 만나는데.. 얼마나 이기주의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는 거예요. 율법을 주시는데,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 6장 3절에 나옵니다. 6장 3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헌법재판소 판사가 8명이죠. 4명이 여자고, 나머지 남잔데, 그 재판석에 앉아있는 재판관들은 다른 변호사를 우습게 봐요.
“네가 공부 얼마나 했는데? 너 몇 등 했어? 서울법대에서 몇 등 했는데? 그것도 공부 한 거냐? 사법 연수원에서 너는 끝에 있었어. 우리는 수석이었어.” 변호사라 해봤자 우습게 여기는 거예요. 바둑 둘 때, 프로기사가 아마추어 두는 거 보면 그건 수도 아니에요.
최고의 엘리트에요. 최고의 엘리트이기 때문에, 판결 내리고 판결에 대해서 온 국민과 언론사가 다 달려들어도 그 논리를 지적해 낼 수가 없어요. 그 정도로 완벽에 완벽입니다. 왜? 인간의 두뇌로 짜낼 수 있는 지혜로는 최고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재판을 그렇게 해요. 뒤탈 없게 해요.
판결에 대해서 뒤탈 없게 하는 게 그들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정치적 판단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재판관이 8명 있다고 했죠. 만약에 주께서 여덟 명을 앉힌다면 누구를 앉히겠는가? 하늘나라 재판석에.
이 세상에서 불신 생활을 했던 사람을 구원시켜 놓고 재판석에 앉혀버려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아는 사람, ‘나는 불신자 맞습니다.’를 구원해 놓고, 그를 재판석에다 앉혀버려요. 그리고 누구를 판정하느냐 하면, 6장 3절의 말씀 다시 보면, “우리가 (누구를 판단해요?)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어떻게 교인끼리 서로 고소하느냐? 지금 고소의 정답을 어떻게 세속적인 판사한테 그걸 듣고자 하느냐? 우리가 하늘나라 판사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왜? 우리는 터미널이니까! 우리는 종점을 아니까, 끝을 아니까. 끝을 알면 모든 걸 아는 거예요. 끝을 알면 모든 걸 아는 겁니다.
모든 걸 아는 자가 천사까지라도 판정하는 거예요. 천사하고 성도의 공통점이 있어요. 천사는 이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 자체가 뭘 해도 그 전체가, 존재 자체가 죽음의 세계라는 것, 저주의 세계라는 것을 이미 천사는 아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인간의 세계에서 나오는 희망이, 희망이 아니고 이게 가짜라는 것,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서 만든 희망이라는 것을 천사가 안다는 점에서 성도하고 동일해요.
차이점은 뭐냐 하면, 천사는 육신이 없어요. 육신이 없기 때문에 몸으로 느끼는, 아까 땅에는 뭐가 없다고 했죠? 희망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희망은 어디에 쓰는 용어냐 하면, 하늘나라에서만, 하늘나라 자체가 희망의 결정체에요.
그런데, 성도는 천사와 차이점은 터미널을 통해서 땅의 희망에서 어디로 바뀌었습니까? 하늘의 희망으로 가득 찬 그쪽에서 넘어오면서 예수님의 육신의 고통을 같이 체험했다는 점에서 천사보다 우월합니다. 주님이 가졌던 그 고통, 갈등, 그 애씀, 자기부정, 이런 걸 성도는 갖고 있지만, 성도의 본질로 갖고 있지만, 부정이 포함되어야 그게 성도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는 그걸 갖고 있지만, 천사는 원래 도사거든요. 천사는 도사가 돼서 그게 없어요. 주님의 아픔에 참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에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체험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사보다 성도가 한 수 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를 재판한다? 천사를 재판한다.
재판한다는 말은 이건 악마고, 이건 천사고 이걸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악마가 뭘로 인간을 유인하고 미혹했는가를 아는 거예요. 자,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의 요점은 이겁니다. 사람이 있으면 사람의 일이 나온다. 그런데 주님이 계시면 무슨 일이 나온다? 주님의 일이 나온다.
그러면 주님의 일은 무엇을 매개로 한다? 율법으로 매개를 하죠. 율법을 매개로 해서 인간의 일은 자기의 희망과 미래에 대해서 그리움이 있어요.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어요, 희망이 있다고요. 율법이 그것을 무산시킬, 주님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그 일이 무산되게 될 겁니다.
무산되는 방식은 바로 율법을 앞장 세워서,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소박한 그리움과 희망을 좌절시키는 새로운 사건들을 율법 진행 과정 속에서 유발시키는 일을 하게 돼요. 그런 예를 지금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율법이니까요. 사무엘상 9장 3절.
땅의 인간들의 희망을 ‘아랫 희망’이라 표현할 수 있고, 하늘의 희망을 ‘윗 희망’이라고 할 수 있죠. 희망이 아랫 희망과 윗 희망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나온 사람은 자주 오해하죠. 내가 그리는 희망이 나의 일에 속하면 그게 아무리 하늘나라를 소망해도 땅 희망이 돼요.
‘긍정적 마인드’ 그런 거 있잖아요. 그건 땅의 희망이에요. ‘4대째 기독교 집안’ 이건 뭡니까? 과거를 통해서 희망을 추출하고 싶은 생각, 그 희망으로 내 미래가 보장되었으면 좋겠다는 자기 내부의 희망이죠. 그러니까 인간에게서는 계속 하늘의 희망이라는 형식은 갖췄지만, 결국 땅의 희망으로 전락되는 희망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이미지가 형식주의를 형성하게 돼요. 형식주의는 뭘로 굳혀지냐 하면, 패턴, 습관, 자기만의 징크스, 법적 습관, 법적 태도, 이런 걸로 자기 이미지화 시키는 거예요. “나는 축구하기 전에 머리를 안 감는다.” 이런 거요.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있어요.
“난 교회 가기 전에 반드시 무슨 일을 한다, 또는 안 한다.” 이런 게 다 있어요. 평소에 머리 안 감다가 교회 갈 때 머리 감는다. 타인에게 제일 먼저 오는 게 냄새니까. 평소에 안하다가 그 날은 머리까지 감죠. 그럼, 만약에 예배 참석하니까 경건한 마음? 아니에요.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어떤 분이 감사하다는 글을 올렸는데, 그 사람 표현에서 처음 듣는 표현이 나와서 내가 그걸 부각시켰어요. 무슨 표현이냐 하면, ‘온라인 우리교회’ 아, 이거 멋진 말이다. 온라인 우리교회는 머리를 감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 나름대로의 자기 이미지 관리는 항상 패턴과 습관에 의해서 형식주의적 법으로 자기를 무장하죠. 인간들이 자기 일로 피어나올 때 하나님의 율법은 또 그렇게 공격대상이 구체화되는 겁니다. 딱 기다려! 너희들이 생각하는 율법해석을 율법이, 실제로 율법이 그걸 무산시켜줄게. 부숴줄게, 부숴버릴게.
자기 이미지 관리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 하잖아요. 율법이 그걸 부숴버려요. 그 예를 지금 사무엘상 9장 3절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뭔가 잃어버렸어요. 뭐를? 나귀를 잃어버렸어요. 사울 집에서.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나갑니다. 암나귀를 찾으러 나가는데, 여기서 장차 왕이 될 관상, 왕이 될 상인가? 왕이 될 상황에 있는 인물, 그가 움직일 때에 암나귀를 잃어버렸죠.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찾으러 간단 말이죠. 그러면 사울은 그 암나귀 찾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가 첫 번째 왕이 될 사람이라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야 되는 조건이 하나님 보시기에 왕이 되는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암나귀 찾다가 사무엘상 11장 6절에 보게 되면,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여러분들이 실력이 되니까 제가 편하게 말씀드립니다. 사사시대 때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겨우 구원이 되는 그러한 시대였어요.
그 시대가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왕이어야 되는데,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의 왕 됨을 거부했어요. 거부하고 그야말로 바알 섬기면서 우상을 섬겼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뭐를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 왕 맞다. 내가 너희 왕이야. 내가 왕이기 때문에 굳이 너희에게 너희들 속에 인간들 중에서 왕을 뽑을 필요가 없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실체로서 제공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율법의 실체로서.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왕 되심을 원치 않아요.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시대냐? 사사시대. 사사시대 특징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일시적으로 또는 임시적으로 임시적 구원자가 필요한 거예요. 임시적 구원자. 이걸 요즘 말로 ‘계약직 신“
또는 차 사고 났을 때 누구를 부르죠? 보험회사 직원 부르죠. 그렇다고 해서 보험회사 직원의 종이 되는 건 아니죠. 필요할 때마다 그냥 임시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땜빵 하는 거죠. 인간들이 왜 신을 땜빵 역할로 밖에 안 보느냐, 사사시대 때에..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내가 결정해서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되, 당신 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걸 어디서 그들이 알게 됐느냐? 이방나라는 든든하게 눈에 보이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왕의 특징은 영웅적으로, 세습적으로, 전통적으로 족보를 따라서 왕이 있어서 그들은 안정권에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안정적인 왕의 권력 때문에 자기 이스라엘은 많이 밀리고 사는, 당하고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계약직이죠. 계약직이니까 하나님은 일단 그 당시 시대를 반영해서 사울을 뭐로 바꾸냐 하면 사사로 바꿔요. 사사로 바꾸려면 사사의 조건이 뭡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요. 임했는데 문제는 사울이 사사의 범주를 못 벗어나요. 사사의 역할 밖에 안 되는 인간이 백성들이 요구를 해서 사사밖에 안 되는 사울을 뭐로 억지를 부리냐 하면, 왕을 삼아버려요. 왕이 된다고요. 사무엘 보고 그걸 시켰죠, 그들이 왕을 원하니까. 사울을 왕이 되게 한 거예요.
왕이 되니까 사울 왕은 나중에 다윗을 만나니까 뭐가 되냐 하면, 악신이 들려요, 악신이. 조금 전까지 성신 받은 자가 악신 들린다니까요. 사무엘상 보면, 사울이란 사람이 성신 받아서 옷 벗고 춤추고 난리도 아니에요, 사무엘처럼.
사무엘은 왕이 아닙니다. 선지자죠. 선지자는 배후에 왕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사사는 배후에 왕이 없어요. 사사는 잠시 고용된 임시직이라니까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잠시 사사가 등장하는 거죠. 사무엘처럼 연락 체계가 된 게 아닙니다. 그냥 써 먹고 말 거예요.
악신이 들린다 이 말이죠. 그럼 여기서 뭐냐? 사울을 임시 땜빵으로 왕으로 해놓고 그 다음에 다윗이 그냥 등장해 버리면, 사울의 임시 땜빵이나 다윗이 임시 땜빵이나 똑같이 돼요. 그래서 다윗에게는 사울의 한계를 품은, 그러니까 인간들의 한계, 인간들의 약점, 부정성을 품고 등장하는, 그걸 품고, 그걸 극복한 왕인 다윗이 등장하기 위해서 다윗은 어떻게 하느냐?
사울의 악신을 다윗이 비파 쳐가지고 추방하고 말아요. 추방합니다. 추방하면서 뭐는 가져오느냐? 사울이 갖고 있던 ‘기름 부음’이라는 그 흔적은 그대로 자기 쪽으로 인수인계 해버려요. 기름 부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긴다. 기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지만, 자기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을 품게 만드는 작업을 한 겁니다.
자, 이렇게 이 모든 게 율법의 진행과정에서 이렇게 되어 진다는 말은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처음에 이방 나라는 율법이 없잖아요. ‘율법이 없다.’ 이게 첫 번째.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있다.’ 세 번째,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없다.’ 네 번째, ‘율법의 완성에 의해서 없는 이스라엘이 생긴다.’ 가 되겠죠.
이 네 가지의 절차를 주께서 훅 들어오셔서 일방적으로 이 절차를 실시를 한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 제가 세 번째 까지 얘기를 했죠.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없어져요. 다윗 언약 안에 그게 내포되어 있지, 이스라엘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만나면서 자신의 희망을 율법에다 싣고자할 때, 율법이 그런 희망을 내치는 거예요. 사울에게 담겨있던 백성들의 희망을 다윗이 내쳐버립니다. 왜? 사울 안에는 그 당시 백성들의 모든 여망과 희망이 사울에게 집약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무엘상 보면서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분명히 그들은 찬미했지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그런데 그게 왜 정치적 힘으로 결집이 안 되죠? 왜 쫓겨 다니죠?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윗을 찾던 사람은 다윗이 누군지를 몰라요. 다만 새로운 희망의 영웅으로 등장했다 뿐이지. 율법의 정신은 뭐냐? ‘네가 누구냐’예요. 네가 누구냐? 백성들은 그런 데 관심 없어요. 내가 누구냐에 관심 없고, 누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냐?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내가 누구냐’를 몰라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몰라요. 그냥 나 지켜주면 그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이런 자체적인 법의 패턴을 보여주는 거예요.
다윗이 등장했다는 말은 결국은 다윗이 등장함으로 레위 언약이란 제사 제도가 말짱 거짓이었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겁니다. 이제 레위 제사 제도에서 뭐로 넘어가느냐? 왕 제도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 말은 좋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나, 하나님의 왕 되심을 포기했다’는 것을 계속 끌고 가시는 거예요. 계속. 그게 위에서 말한 세 번째입니다.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마땅히 파괴되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도 하나의 임시 고용자였다, 땜빵이었다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나는 땜빵이 아니라 계속 정규직이었으면 좋겠다. 말씀회사 취직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9절에서 10절까지 “저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보세요, 예수님을 찾을 이유 없죠? 내 인생을 완전히 조져 놓은 거예요. 세상에 이걸 행복이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과거, 현재, 미래의 패턴에 의하면 이 말씀은 우리 쪽에서는 수용이 안 되죠. 다시 말해서 이미 나의 존재가 있다는 말은 엄연히 나의 일이 있다는 거고, 나의 일은 나의 기준이 있다는 말이고, 그 말은 천하의 주의 일이라도 나를 망친다면, 나는 주의 일을 받지 않겠다. 라고 하는 거죠. 그거죠.
아까 사울에서 다윗으로 교체된다는 얘기했죠, 교체. 교체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죽음으로 질주합니다. 죽음으로 달려가요. 멈출 수가 없어요. 왜? 내 존재가 그러니까. 내 존재는 나의 일을 통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일에서는 뭐가 빠졌다고 했어요?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일이 있는 한, 주의 일은 나한테 마치 N극과 S극이 서로 배척하듯이 누구 자존심이 더 세냐고 배척하듯이 이게 튕겨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의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본능적이에요.
“내 일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왜 내 일을 작살을 내요? 뭐 하나님이면 다냐?” 이게 우리 마음 속에 늘 이렇게 샘솟듯이, 좋은 말 아닙니다 이게.. 분출하듯이 계속 솟아나는 일이 그 일이에요. 그 일이라고요. 우리는 교체할 마음이 없어요. 좋게 좋게 가자는 거예요.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게 가자는 거예요.
주님께서 마태복음 10장, 11장에서 열두 제자를 뽑아버렸어요. 열 두 제자. 제자 뽑고 훅 들어와요, 훅! 그냥 훅 들어온다고요. “가자” 어느 길로요? “몰라도 돼. 내가 앞장서잖아, 내가. 내가 앞장선다고. 너는 나 따라오기만 하면 돼. 따라오는데 일단은 네가 여행을 위해서 주머니나 두 벌 옷을 갖지 마라.”
여벌 옷을 갖지 마라, 요새 말로 쉽게 하면, ‘휴대폰을 소지하지 마라.’ “몰라도 돼. 언제 기각되는지, 누가 대통령 되는지 몰라도 돼. 너는 등신이야 이제부터. 아무 것도 몰라도 돼.” 그러면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 호락호락 수용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 반대했죠. 왜? 제자들은 터미널이니까.
새로운 의미의, 새 언약에 합당한 터미널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어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밀어내는 게 아니고, 3년 동안 모든 재산을 버리고, 모든 청춘을 버리고 다 따라다녔어요. 땅을 치면서 이야기했어요. ‘내 청춘 내 놓으라’고 나훈아가. “내 청춘 돌리도, 내 청춘 돌리도”
제자들은 강력 반발했지요. 바로 이런 거예요. 율법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 안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냉혹하고 냉정합니다. 너무 냉정해요. 요한복음 14장에서 “기다려라 내 다시 갈게.” 그때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의 느낌은 뭐겠습니까?
“아, 안 오신다는 뜻이구나.” 왜 그렇게 받는 게 편하냐 하면, 그래야 편안히 고기 잡으러 갔으니까요. 왜냐 하면, 내가 기대했던 그 소망이라는 틀에 주님이 걸려들지를 않으니까..나의 존재와 나의 일이 유효하게, 유의미하게 살아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예 그것엔 걸려들지 않는 방식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훅 들어오신다.’고 한 거예요. 난데없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업 망하고 난 뒤에, 가정에 우환이 있고, 자기가 말기암 되어서 예수 믿는다? 그거 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제 미래가 망했으니까, 미래 부분만 마저 채워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빠져있는, 누락되어 있는 미래를 채워주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일용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그 시절마저 그게 엉터리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기다리기 때문에 내가 온 게 아니고, 재림을 백날 기다려도 너한텐 안가. 주의 분류작업은 숨어서 하시기 때문에, 구원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주님이 열심히 분류작업을 했고, 거기에 우리가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을 우리의 미래와 어긋나면서, 우리의 희망과 어긋나면서 비로소 발견하는 겁니다. 그게 율법의 온 취지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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