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8강) 신명기12:23(보호와 인정) 20241230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2장 19절,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찌니라” 땅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했다는 것에서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 위한 땅은 없습니다. 이 땅에는 이스라엘 위한 땅은 없습니다.
이 땅에 살지 말라는 뜻이죠. 이 땅에서는 그냥 죽는 것으로 네 할 일 다 했다. 떠나는 것으로 다 했기 때문에 네 땅은 없다. 그럼 땅은 뭐냐? 땅은 비유에요. 땅=비유. 하나님의 언약 나라에서의 땅은 팩트, 실제가 아니고 비유입니다. 가상, 그러니까 무대 세트라고 보면 돼요. 무대 세트. 철거대상이니까. 철거대상에 살던 인간들 역시 철거대상이에요. 심지어 이스라엘조차도 그렇습니다.
한편의 연극을 보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연극을 보이고, 연극대본은 뭐겠어요? 율법이겠죠. 율법. 그래서 그 땅과 율법의 만남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세계를 보여주는 비유. 비유라는 말을 하면 또 사람들이 어려워하니까 그냥 모형. 또는 실루엣,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땅+인간, 땅과 인간의 만남에서 제가 문제를 던진다면 “땅이 중요합니까, 인간이 중요합니까, 율법이 중요합니까?” 이렇게 물을 수가 있죠. “1.땅, 2.인간, 3.율법 어느 게 중요합니까?” 이렇게 물을 수가 있단 말이죠. 정답은 뭐겠어요? 율법이죠. 말씀이고 언약이 중요한 겁니다. 언약.
문제는 이 인식에 대해서 인간들이 거부한다는 겁니다. 왜 거부하느냐? 율법이 중요하고 인간은 율법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율법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모세 시대에는 율법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어디서? 시내산에서.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게 있거든요. 모세 자기가 작가가 아니잖아요. 뭔가 받았어요. 모세가 받았던 것은 하나님이 썼던 시나리오에요. 하나님이 썼던 그 시나리오를 모세가 받았고 모세는 시나리오 각본 들고 와서, 땅과 인간들이 어디를 가야 이 각본이 다 드러나느냐? 약속의 땅에 거주하면서 각본의 취지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각본을 율법이라고 한다면 이 점에 대해서 인간은 비유라고 했어요. 인간은 비유라고 아주 좋게 이야기했는데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인간은 사기다. 모든 인간은 사기꾼이다. 모든 인간은 사기꾼이라는 건 율법의 관점에서 그런 거예요. 율법의 관점에서.
인간의 관점에서는 무엇이 진실이냐 하면 내가 여기에 살아있음이 유일하게 진실이에요, 인간은. 이건 꿈이 아니고. 꼬집을 때 내가 아프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다. 아니, 이것 외에 무슨 진리가 따로 있을 수 있느냐? 인간은 반발하죠.
그래서 여기서 초반부터 공식, 방정식 하나 나갑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악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바로 악마가 하는 일입니다. 악마가 하는 일은 바로 인간보고 자꾸 인간을 만나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을 만나라. 어릴 때부터 악마가 이렇게 주선을 해왔었어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악마라면, 그럼 하나님은 뭐하시느냐?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기를 주선하죠.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도록 주선합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을 만나는 것이 진실이고 진리라 하는 사람은 무엇에 반발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만났던 그 사람에 대해서 아주 결사적으로 반대를 합니다. 결사적으로 반대해요.
그럼 그런 사람이 누구죠? 이 시대에 하나님과 만난 사람이 누구죠? 모세죠. 모세를 누가 반대해요? 이스라엘이 반대하잖아요. 왜 반대하는가? 우리 인간과 인간이 통하는 보편적 내용이 없다는 겁니다. 짜증이 확 올라온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만나보고 싶어서 환장한 자가 아니고, 우리는 같은 인간들끼리 만나요.
인간 대 인간이 만나는 이유가 있어요. 만나는 이유를 두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하나는 보호에요. 두 번째는, 나를 인정 해달라. 이 둘 빼고는 없어요. 이게 다에요. 이게 다라 이 말이죠. ①보호, ②인정.
애가 엄마 앞에서 운다. 이유가 딱 두 가지잖아요. 나를 보호 해줘라. 나에게 먹을 거 달라. 나를 살게 해달라. 왜? 내가 진실이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답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 대 사람의 만남으로만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엄마가 밥 주고, 저 밖에 나갔다. 또 울어요. 왜 우냐? 내 옆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 옆에.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이 만나야 내가 알아듣는 말을 같은 인간들만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이야기해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짓으로 사기로 또는 비유로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안 듣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말만 해요. 여러분 화딱지나지 않습니까? 화나지 않습니까? 율법이란 각본을 누가 썼다 했어요? 사람이 썼어요? 하나님이 썼잖아요.
그런데 신학박사라 하는 인간들이 외국에 유학 가서 하는 짓거리가 율법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보질 않고 인간이 인간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해서 적당하게 율법적으로 살면 그들은 행복하다는 거예요.
행복은 딱 두 가지에요. 신체적으로 보호받고 남한테 인정받는 것. 이 두 개를 뭐라고 하느냐면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자라도 행복하지 않아요. 뭐가 없으면? 옆에서 나를 사랑해주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죠. 드라마에 보면 재벌들 식탁은 왜 그리 긴지. 긴데 나중에 드라마 끝부분 가면 버림받은 재벌들은 혼자 스테이크 썰죠. 스테이크가 맛없을 리 있어요? 맛있는데 혼자 먹어요. 맛이 하나도 없죠. 아무도 나를 지켜보지 않는 삶.
그래서 저는 이 현실에서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걸 전부 다 사기로 봅니다. 거짓으로 봅니다. 그럼 당신이 말하는 거짓 아닌 진실은 뭐냐? 드라마에요. 영화입니다. 왜? 그건 노골적으로 ‘이제부터 거짓말, 썰 풀겠습니다.’하고 시작하거든요. 바로 그거죠! 이제부터 거짓말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거짓말하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거예요.
드라마나 영화가 좋은 이유는, 그대로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인간은 비유이기 때문에 네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하나님한테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의 각본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각본이 중요한 거거든요. 아무 상관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느긋하죠. 느긋해요.
누가복음 13장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다시, 실로암에서 멀쩡한 망대가 무너졌어요. 망대가 무너진 이유가 새가 꼬여서 망대가 무너졌는가. 망대가 무너져 몇 명 죽었어요? 열여덟 명. 169명. 열여덟 명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죽은 사람도 사기고 멀쩡한 사람도 사기고. 내 인간존재가 거짓이고 사기라는 것. 거짓이고 사기라는 것은 ‘없다’가 아니라, 그 있음 자체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라 이 말이죠. 그 있음 자체를. 인간들은 내 있음 자체를 진리로 봐달라 하는데 그런 목적으로 인간이 만들어진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말하기를,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할 때 다윗 모친이 있어요. 다윗 본인도 있어요. 있고 있으면 그게 진실입니까? 중간에 뭐가 하나 들어가야 돼요.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어요. 그럼 진실은 뭐냐? 바로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다윗의 엄마나 다윗을 주께서 비유로 사용하고 활용했던 겁니다. 이걸 다윗이 눈치를 챈 겁니다. 완전 신났지요.
이 사실을 아는 것을 다윗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그 불가능한 것을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건 하나님이 가르쳐줬죠? 하나님의 성신이 가르쳐줬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성신, 신약에서는 성령이죠,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진실이고 그다음에 남는 것으로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뭘 해줬습니까?’ 이렇게 나오기 마련이에요. 왜? 진실은 오직 하나여야 되고 그 하나라는 후보감에 자기 말고 더 중요한 존재가 후보로 끼어드는 것은 본인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용서하지 않아요.
사람이 산다는 것, 이 세상을 이렇게 보면 돼요. 다섯 자로 말해서 ‘왕위 쟁탈전’이에요. 왕위 쟁탈전. 다들 자기 머리에다가 ‘나는 왕이다. I am King.’ 해놓고. I am a king아니고 I am the king, 그 왕이다 해놓으면 왕이라는 자들이 그다음에 확인 작업 들어가죠.
‘누가 왕인지 한번 해봐?’ 왜 확인 작업 들어가느냐? 보호와 인정에서 두 번째, 인정. 나는 왕이 맞는데 그래가지고는 행복하지 않아요. 누가 ‘당신 왕이다. 당신은 대상 받을 만하다.’ 누가 인정을 해줘야 돼요? 대회 나가야죠. 게임을 해야죠. 내가 어느 수준인지. 그럴 때 ‘왕이시여 대상 받으소서.’ 갑자기 행복이 밀려오죠. ‘내가 생각한 것인데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구나.’ 이게 인간이 자기가 진실이라 할 때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이거든요.
그러면 사람들끼리 무심코 대화를 한다 이 말이죠. “어디 감기 들렸어요?” 이런 거요. 무심코 대화할 때, 대화를 왜 하느냐? 말을 왜 하고 전화를 왜 하고 누굴 왜 만나는가? 나는 왕인데 어느 정도 왕인지 확인 작업 들어가시는 거예요, 확인 작업. 확인 작업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건 진리인데, 내가 진리 맞다는 것을 특히 연세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 통해서 다시 확인 작업하는 거예요. “야야, 제주도 감귤 보냈다. 맛 한번 봐라.” “어머니, 왕이에요. 감귤 농사의 왕이에요.” “내가 또 보내줄게.” 이게 뭐냐? 행복 아닙니까. 이게 행복이거든요. 고아원에 가면 행복합니까? 거기 밥 주는데? 교도소 가면 행복해요? 교도소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왜 빨리 튀어나오고 싶은가? 자기를 왕이라고 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거기서는.
재벌 돼서 교도소 가면 두꺼운 하얀 옷 입고 돌아다니는 그건 드라마 이야기고. 드라마 이야기가 좋은 이유가 ‘나는 사기입니다. 나는 거짓입니다.’하고 시작하는 게 드라마 이야기잖아요. 그게 너무 진실 같아요. 이처럼 드라마에서 시작은 어렵고 불행하게 시작했지만 나중에 크게 성공하고 남한테 인정받고 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대신 메꿔 채워줄 때 우리가 드라마 볼 여망과 합치되거든요.
그런데 소위 뭐 작가라 해서 남이 쓰지 않는 내용을 쓰는 작가라고, 모든 주인공이 시작할 때마다 죽고 마약에 절고 그 자식이 또 마약한 엄마 밑에서 다 망하고 죽고 이혼하고 싸우고 어떻고 쭉 나오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걸 쓴 사람이 『김약국의 딸들』 쓴 작가에요. 딱 보기 싫어요. 박경리라는 사람이 썼거든요. 왜 그렇게 썼느냐? 현실을 현실답게 했다는 거예요. 아휴, 거기에 속이 터져요.
현실은 현실다우면 안돼요! 아무리 소설을 써도 현실이 사기인 것을 작가가 글 쓴다고 그걸 그대로 표현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가 사기인 것을 인간이 계속해서 숨기기 때문에 작가가 쓴다고 해서 그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작가는 그걸 억지로 끄집어내려 하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가정적으로 가정 폭력당해서 혹은 나는 개 조지는 거 보고 다시는 개고기 안 먹는다 해서 나는 채식주의가 되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받았거든요. 참 내. 현실적으로 억울한 누명을 썼고 양민인데 제주도에서 학살당했다. 광주에서 죄도 없는 그런 소년이 죽었다. 뭐 소년이 오든지 가든지 작별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러면 그게 진실이라는 거예요.
그게 진실이 아니에요! 더 미운 게 뭐냐 하면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포장한 게 더 미운 거예요. 상처? 상처는 알아서 지가 다… 인간의 주특기가 지 상처 감추는 게 주특기에요. 거짓이 할 일이 뭡니까? 자기 상처를 교묘히 숨기다가 만만하다 싶으면 확 터트리는 것, 이게 인간이 거짓됨을 드러내는 방식 아닙니까.
그걸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통해서 그대로 다 받아내는 거예요. “자, 너희들은 비유다. 너희들은 가짜야. 존재 자체로 가짜야. 땅도 가짜야. 가짜와 가짜가 만나서 너희들이 내 진실, 율법이 진실이니까 가짜들아, 진실을 한번 지켜볼래?” 하니까 그때부터 어떤 현상 벌어졌습니까? 가짜가 더 이상 가짜를 숨기지 못하고 왈칵 폭발하죠.
그게 무슨 생활입니까? 광야 생활입니다. 사실 광야에 ‘생활’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광야는 거주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통과하기 때문에. 그래서 광야는 죽음의 튜브, 죽음의 관. 관이니까 거기에 살 거예요, 통과할 거예요? 통과용입니다. 통과용인데 뭐를 통과해요? 가짜에게 주어질 형벌과 저주로서 너의 가짜는 이 죽음세계를 통과해야 가짜가 가짜답게 이게 노출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통과 작업에 대해서 너희들이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뜻은. 왜냐? 이 광야, 죽음의 튜브를 통과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참여를 못합니다. 참여를 못해요. 자기 잘못, 사기성을 드러낸 사람은 40년 만에 다 죽였고, 아직까지 사기성이 덜 나타난, 사기가 없는 게 아니고 덜 나타난 그 후손들 데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그럼 아까 광야는 뭐라 했어요? 죽음의 튜브. 통과하는 관. 약속의 땅은 죽음의 투명 유리. 죽음의 통유리. 얼음판 위에 쿵탁쿵탁 뛰잖아요. 화천 같은 데 축제할 때 두꺼운 얼음판 위에서 축제하잖아요. 그런데 카메라가 얼음 밑에 들어가서 위에서 쿵탁쿵탁 뛰고 있는 그걸 카메라로 한번 찍어보세요.
찍어보게 되면 그들의 모든 삶은 얼음판 위에 살고 있죠. 얼음판 바로 밑에는 뭐냐? 지옥불이 있는 거예요. 지옥불 위에, 죽음의 통유리 위에 있는 거예요. 밑에는 불 있고 위에는 투명한 통유리가 있고.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15장 유리 바다가 있죠. 유리 바다가 있는데 뭐가 섞인 유리 바다입니까?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그러니까 통유리가 양면성을 갖고 있죠. 한쪽은 위를 걸을 수 있지만 밑에는 불이 있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통과합니까? 통과 못하죠. 뜨거워서 통과 못하죠. 그런데 통과했잖아요. 이것을 홍해 바다를 빗대어서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거기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3절에 누구의 노래입니까? 모세의 노래에요. 모세의 노래.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각본에 의하면 모세는 합창단장이에요. 성가대 단장이에요. 내 노래를 배워라. 모세의 노래를 배워서 천국에서 써먹어요. 써먹습니다. 천국의 성전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노래는 무슨 노래? 임영웅 노래? 아니죠! 모세의 노래!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우리는 각본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은유요, 비유였다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 자체적인 의미와 가치를 주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자기 아들에게 어떤 의미를 두고 맏아들에게 의미를 둔다면 유월절 그날 밤에 사무라이들이 등짝에서 빼내는 긴 칼에 사정없이 잘라버리는 그 칼에 의해서 죽게 되죠.
그래서 그 사무라이 칼, 천사의 칼은 어디에 들어있는가? 오늘날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본다는 말은, ‘또 베어주옵소서.’ 이런 뜻이에요. 또 이 가짜가 진짜로 착각하고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 내 위주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이 모가지를 안 아프도록 단칼에 댕강 좀 날려주시옵소서. 날려주시옵소서.
주인공이 아닌데 왜 자꾸 우리는 주인공인 양 여겨서 왕위쟁탈전에 나서냐 이 말이죠. 조연이면 어떻고 엑스트라면 어떤데요. 어차피 전부 다 그건 배역 맡은 대로 그렇게 할 뿐이죠. 어떤 사람은 남자면서도 “난 여자 배역 맡고 싶어.”해서 수술해서 여자 되고. 참내. “왜 그런데?” “내가 주인공이거든.” “네가 가짜야. 그러니까 네가 가짜라니까.” 그게 가짜에요.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야 장군과 연관되어 만나기 전에 자기가 가짜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신이 왔지만 하나님의 신이 아직 그 정도 내용까지는 채우지 않았죠. 나중에 우리야 장군을 자기 손으로 죽였을 때, 내 손에 죽은 너도 역할이고 죽이는 나도 역할이다. 우리가 이래서 드라마 하나 찍자. 그렇게 찍은 드라마가 다윗언약 아닙니까. 다윗언약.
자, 언약이란? 언약과 약속의 차이점은? 약속은 하늘나라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약속입니다.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관계+땅. 이 어두운 인간 세상에서 적용되는 것이 언약이에요.
언약은 누가 관여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 자체가 이름인데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있는 존재 빼놓고는 다 존재가 아니고 비유입니다. 다 가짜에요. 가짜는 스스로 있는 분과 연결되어야 돼요. 만나야 비로소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아는 감격과 희열로 감사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 스스로 있는 자와의 관계가 절단되고 끊어져버리면 나는 내가 단독적으로 진짜 내가 내 목숨을 바칠 상대가 나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건 뭐 마약, 선악과라는 독약을 먹은 사람이에요. 늘 비틀거리고 다녀요. 왜 나를 인정 안 해줘?
맨날 전화해서 “여보세요” 하면 “아, 나는 아나마나 친군데 내가 초등학교 친구고…” 이 말속에는 뭐냐? ‘왜 나를 인정하지 않아!’ 그 이야기에요. “엄마,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해놨어?” 이 말은 뭐냐? ‘나를 맛있게 할 임무가 엄마한테 있잖아. 엄마 그 일 했어? 그게 엄마의 역할인 걸 몰라? 엄마의 기능인 줄 몰라?’ 이런 거예요. ‘나는 사람만 만날 거야. 나는 하나님 만나기 싫어. 그런데 엄마는 왜 그거 하나도 못해줘?’ 이러고 있다고요. 세상에 나가서 직장 가면 쪼다 되는데 그걸 가정에서는 풀어줘야지. 네가 최고야, 이렇게 인정해줘야 내가 집구석에 기어들어올 마음이 나거든요.
이것도 드라마에서 본 건데 직장에서 실컷 꾸중 듣고 “일 이따위로 하려거든 사표 내!” 하고 상사한테 욕 얻어먹고 ‘아, 저 인간 죽여 버릴까?’ 하지만 차마 죽일 순 없고, 도저히 집에 그냥 못 가서 돈도 없으니까 포장마차 가가지고 “아줌마, 소주 3병요.” 달라 해서 먹고 오뎅국 먹고 그다음에 아파트 문 열고 현관에서 신발도 안 벗고 엎어져서 방그레 미소를 띠면서 “아이고, 집구석이 제일 좋다.” 이런 거. 그러면 부인이 등짝을 두드려가면서 “또 먹었어. 또 먹었어.” “미안해, 와이프” 되지도 않는 영어발음 해가면서요.
드라마는 그걸 보여주죠. 드라마는 그 인간이 왜 술을 먹어야 하는지 이유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욕을 얻어먹어서 술 먹었다고요? 욕을 왜 얻어먹으면 안 되는데? 네가 뭔데 욕을 얻어먹어서는 안 되는 존잰데? 거기에 대해서 어떤 해답도 드라마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이 작가이기 때문에.
그런데 율법은 누가 작가라 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에요. 진짜 내 모습, 진짜 내 모습은 아버지와 아들로 말미암아 각색된 시나리오 안에 들어있어요. 우리는 몰라요. 얼굴 벌겋게 돼서 아침에 또 탕국, 콩나물국 끓여주면 먹고 아침에 출근하죠. “나 갔다 올게.”하고 또 그날 밤에 욕 얻어먹었다고 술 먹고 들어오고. 뭐에요? 뭐냐 이 말이죠, 이게.
그럼 자식은 “아빠 술 먹는 거 꼴 보기 싫어.” 하고 문 쾅 닫고. 문 또 수리해줘야 돼요, 한 10만원 들여서. “아빠, 실망이야.” “저 딸년은 내가 얼마나 힘들여 돈 버는 줄도 모르고. 지 밥 먹여주는 게 공짜로 생긴 줄 아냐?” 그럼 엄마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고만 하소. 고만 하소. 빨리 방에 들어가소.” 이거.
전부 다 뭐하는 시츄에이션이에요? 상태가 왜 이래요, 전부 다? 상태가 불안해. 상태가 전부 이상해요, 상태가. 참. 서로가 서로에게 긴 창을 갖고 있어요. 푹푹 찔러요, 말로서. 실제로는 말로 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진짜 젓가락 가지고 밥 먹다가 찌를 수도 있고 하죠. “너는 아내가 돼서 남편을 인정해줘야지.” 전부 다 인정해달라고 푹푹 쑤시고 있다고요. 인정해달라고요.
“내가 당신하고 왜 결혼했는데? 사랑받으려고 결혼했다.” 이게 무슨… 누구세요? 진짜세요? 가짜가 왜 사랑을 받아야 되죠? 사랑받을 대상은 따로 있는데. 극본 쓰신 분이 사랑받아야죠. 주님께서는 이 사정을 너무 잘 아시고, 마귀한테 속했다는 것을 아시고 “너를 위해 신을 믿지 마라.” 이게 십계명 중 첫 계명이잖아요. 신을 믿지 마라. 섬기지 말라.
‘믿지 마라’, ‘섬기지 마라’ 다른 말로 하면 신을 너의 타인으로 두지 마라. 타인으로 호출하지 마라. 혼자서는 외롭고 신을 믿으면 뭔가 행운을 줄 것 같은 든든한 타인처럼 느껴지죠. 죽어서는 천국 보내고. 그 타인이 말씀과 율법을 주니까 ‘야, 이런 하나님 복음은 처음이다.’ 또 좋다고. 자기 자아를 인정해주니까 ‘이제사 나는 애벌레에서 벗어났다.’ 이래가면서요.
뭐를 못 빼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이런 본심이 있으니까 나는 뭐다? 나는 사기다. 나는 거짓이고 이걸 신약에 의하면 ‘죄인 중의 괴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약적으로 말해서. 기껏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나’에 집중되니까. 여기에 초점이 모여 있으니까 인간은 다 가짜인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 영화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나는 가짜부터 시작하니까.
그런데 옛날에 <여로>라는 드라마가 있었거든요. 시청률 80%. 거기 나오는 악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어요. 이름이 달중이에요. 그 달중이가 동네 아줌마한테 얻어맞을 뻔했어요. 왜 그리 나쁜 짓하냐고. 각본대로 했을 뿐인데. 그때 얼굴에 점 하나 있는 태은실은 인기가 아주 대단했어요.
우리는 전부 다 하나님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배역 맡은 연기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관점은 말씀이 말씀대로 하는 그걸로 끝나요. 우리는 거기에 동원되는 거예요. 동원된 일꾼들일 뿐입니다. 일꾼들. 그걸 신약에서는 간단하게 ‘종’이라 합니다. 종.
종의 특징은 여러분 아시죠? 책임 없고 자기 가치 없고 자기 의미가 없고. 자기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종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있는 자가 나 말고 나 아니고 따로 계십니다.’를 보여주는 그 종의 기능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종은 사나 죽으나, 로마서 14장 8절, “사나 죽으나” 그다음에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주의 것이로다”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서 죽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도 없도다. 참, 엄청난 말을 사도 바울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러면 이제 자기가 진짜 인간인 줄 아는 사람이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자기도 그렇게 흉내내고 되고 싶어서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면 당신도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고 당신도 예전에 예수님 핍박했는데 어떻게 당신이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뭘 봐서 뭘 발견해서 그렇게 됐습니까?” 궁금해서 물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자기가 가짜면서도 가짜인 줄 모르고 진짜 자기가 존재하는 게 진리라고 여기는 인간이 주의 종이 된 그 넘어가는 시점에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이거였습니다. 한 자로 ‘피’였습니다. 부활이 아니고 피였어요, 피. 무슨 피? 십자가 피였어요. 십자가 피. 고린도전서 1장 17절, 18절, 20절에서 24절 쭉 나와 있는 거예요. 피. 십자가. 십자가만이 인간이 몰랐던 하나님의 지혜다.
그러면 성도라 하는 것은 피의 증인이죠. 그러면 성경공부를 몇 년을 하든 뭐 누구한테 배웠든 말을 할 때 무엇이 중심이어야 해요? ‘내가 구원받았다’가 중심이어야 해요? ‘내가 행복하다’가 중심이어야 해요? 그래야 돼요? ‘내가 영생 얻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했다.’ 이렇게 해버리면 이 ‘인정’이라는 말과 앞에 있는 ‘나’와 바로 다이렉트로 연결되잖아요. 그래서 나는 뭐라고?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되잖아요.
이게 바로 종교라는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동안. 또 종교라는 사기를 친 거예요. 세상이 사기죠. 그다음에 교회도 사기죠. 인간 전체가 다 사기니까.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서로 내통하고 통할 수 있는 단어 주고받으면서 내린 결론은 ‘나는 영생 받았다’ 이거잖아요.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적이 이거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원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이 ‘당신은’. 계속 ‘당신’을 이야기하죠.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진리입니다.’ 그 이야기하려고 교회라는 가게를 차린 거예요. 성당, 교회라는 가게를 차린 거예요, 그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뭘 이야기합니까? 뭘 이야기해요?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뭐? 뭐를 지라?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 이야기하고 있어요. 십자가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그럼 십자가를 구약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오늘 신명기 12장 19절, “너는 삼가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그다음에 뭡니까?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라”
레위인이 뭐를 하는 직업이냐 하면 피를 내서 관리하는 사람, 이게 레위인이에요. 아까 신약에 ‘피’ 있죠. 이 세상 모든 것은 가짜인데, 다 무력하고 효력 없고 효과 없는 비유에 지나지 않고 망상에 지나지 않는데, 유일하게 실재하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오직 피에서 나옵니다.
창세기 9장 5절,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자, 생명이라는 것은 추상 명사죠. 생명이라는 것이 몇 그램입니까? 생명이라는 것의 크기가 몇 리터에요? 안 보이죠. 없죠. 비실체입니다. 비실체인데 이 비실체가 실체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뭐로? 피. 신기하죠. 참 신기하죠.
영생. 영생 모호하잖아요. 비실체죠. 그런데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면 곧 무엇을 먹는 것이다? 생명을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유일한 단서, 접촉해서 양쪽을 다 보여주는 것은 피죠. 피입니다. 피인데 이 피가 식용 피가 있고 제단에 바칠 피가 있겠죠. 그래서 신명기 12장 끝부분에 보면 그걸 구분하는 거예요.
20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무릇 마음에 좋아하는 대로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고기 먹고자 할 때 고기 먹어, 고기 먹어. 마음껏 고기 먹어야 돼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 가게 되면… 레위기 17장에서는 네가 먹을 고기조차도 짐승을 잡을 때는 제단에서 잡으라 했거든요. 그거는 거리가 가까울 때 소규모일 때고 지금 여기 나중에 약속의 땅은 거리가 훨씬 멀죠. 공동체 내에 고만고만한 거리에 있는 땅에서 공동체끼리 뭉쳐서 가는 것보다 약속의 땅에 가면 넓게 흩어져 살잖아요. 그때는 고기 하나 먹으려고 제단까지 올 수 없지 않습니까. 그때는 네가 알아서 먹어.
피를 흘리든 뭘 흘리든 먹되 뭐는 구분하느냐? 제단에 바칠 고기는 반드시 제단에서 드려야 된다. 이게 26절에 나옵니다. “오직 네 성물과 서원물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라” 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기와 하나님께 제단에 바칠 고기의 차이점을 두느냐?
택하신 곳이 약속의 땅 전체 중에서… 애굽에서 보면 약속의 땅 전체가 택한 장소처럼 보이지만, 그 약속의 땅 택한 곳 중에서도 택한 장소를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정해놓았다는 겁니다. 그 지정해놓은 곳이 하나님의 이름이 왕으로서 주인으로서 거주하는 거주지에요.
땅 주인이 거주하는 집이 바로 택하신 장소 중에도 택하신 장소에요. 무슨 땅 주인? 약속의 땅 주인. 약속의 땅 주인 집에 누가 사느냐? 여호와의 이름이 삽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한 자로 줄이면 ‘주(主)’가 되고, 이걸 구약적 이름으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되고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고 이름이 있어야 사는 동네에 오셨던 그분이 영원히 거주하는 곳이 하나님이 영원히 구상했던 그 약속의 땅의 완성상태, 완성태라는 뜻이에요. 완성태.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이 땅에 살았습니까, 어디로 또 갔습니까? 어디로 갔죠. 가신 그 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에요.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거기에 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아니죠.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따라서 주의 이름이 있는 곳, 그걸 ‘아들의 나라’ 곧 ‘천국’이라 하는데, 그곳에 영원히 가야 될 사람은 이 지상에서 거기 가기 위해서는 우리 이름에 누구 이름이 찾아옵니까? 주의 이름이 찾아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그동안 내가 주인공이라 우겼던 그 주인공의 자리를 주님께서 교체시켜서 주의 이름이 나의 주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앉은뱅이 나오죠. 베드로와 요한한테 돈 달라고 깡통 내밀고 있을 때에 거참 비정하게 참 잔인한 말을 해요. “아저씨,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마음이 없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했을까요? 동냥하는 그 사람은… ①보호니까요. 계속 적어놓을게요. 중요하네요. ①보호, ②인정.
돈이 있어야 밥 먹고 사니까 돈도 필요하지만,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내가 절뚝발이기 때문에 노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여기서 구걸 생활하는 것을 당신들이 좀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인정해줄 때 나는 당신과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일원으로서 살 푸근함을 느끼고 정서적 안정감을 얻겠다는 거예요. 보호와 인정,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뭐라 했습니까? 행복이 되겠죠.
그런데 이 냉혹한 사무라이 같은 두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우리는 주지 않겠습니다.” 듣는 아저씨가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가 굴욕적인 걸 알면서도 나 말고 타자, 타인인 당신에게 ‘내가 당신을 호출했으니까 호출한 성의만큼은 동냥을 하든 안 하든, 돈은 없지만 안됐다고 동정을 하든, 내가 당신을 호출한 대가만큼은 저한테 보상을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보상은 두 번째 시간에 할 거예요. 상급. “보상을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어림도 없다. 안 준다.” “왜?” “당신이 원했기 때문에.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진실인 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역할인 걸 모르고 있어요. 내가 줄게.” “뭐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네가 걸으라.”
그 앉은뱅이는 주인이 바뀌었어요, 그 순간. 예수 이름으로 구원 얻겠다,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나를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구원을 달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되었음을, 다 이루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잘 것 없는 내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 필요를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앉은뱅이로 살았었어야 하는 그런 역할을 맡았어요. 거지꼴이 되어서 얻어먹는 역할을 해야 되고. 그런데 그 타이밍이 이 타이밍인 줄 몰랐죠.
주위 사람들이 으싸으쌰, 여러분 알다시피 베드로, 요한에게 자꾸 칭송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요한이 극구 사양하면서 나를 좀 빼달라고 하죠. “앉은뱅이는 나 베드로, 요한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앉은뱅이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믿음이, 주님이 주신 믿음이 그를 낫게 했습니다.”라는 고백.
낄 수도 없는 내가 그 자리에 왜 낍니까? 그 사람 구원하는데 내가 왜 끼어요? 주님이 직접 관리했는데. 찾아왔는데. 그 이름, 능력의 이름이 어제 낮 설교한 것처럼 예수님이 죽어야 효력을 발휘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능력을 안고 베드로가 ‘나는 이제 앉은뱅이 낫게 했다. 나는 구원받았다.’ 이러면 안 되죠. 뭘 봐야 돼요? 도대체 이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죠.
그게 뭡니까? 바로 십자가죠. 예수님의 피. 그게 창세기 9장 5절에 나오는 피만이 하나님의 각본을 실체화시켜 나타내는 실체성. 그것은 피. 또는 세 자로 하면 십자가. 다섯 자로 하면 십자가 사건. 그 모든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각본은 어디를 지금 질주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이 최종 다 이루어지는 지점을 향하여 율법은 피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배역들을 끌고, 그 배역들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그 배역들을 끌고 지금 광야라는 죽음의 튜브를 통과하고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그 가나안 땅에 투명한 유리, 통유리판을 딛고 유대인, 남아있는 유대인에 의해서 뭐가 생산됩니까? 메시아가 살해당해서 피를 흘리게 되죠.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주님한테 뭘 했겠습니까? 박수 치시면서 “잘했어. 잘했어. 네가 주의 자리에 이제 앉아라.” 해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이제는 너의 공로를 인정한 사람을 네가 뽑을 수 있는 권한 줄게.” 그래서 슝슝슝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마음이 우리에게 와서 거기에 닿인 사람들은 내가 거짓임을 아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부득불 상 (0) | 2025.01.03 |
---|---|
십자가-종말의 연속 (1) | 2024.11.26 |
시온의 조건 (2) | 2024.11.26 |
십자가-율법의 병렬성 (2) | 2024.10.30 |
중간층 (3) | 2024.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