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추방 당함

아빠와 함께 2025. 4. 29. 18:08

대전-신명기(30강) 신명기13:1(추방 당함) 20250428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13장 해보겠습니다. 13장 1절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절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이루어질 지라도’..

선지자라 하는 것은 앞일을 미리 이야기 한다든지,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해석을 해주는 자죠. 그런데 그들이 해석을 할 때, 어떻게 해석하는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해석을 하고, 예언을 하는데 잘 맞아요.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여호와 이름이냐 아니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소원성취하면 그냥 최고 아니냐 이 말이죠.

놀라운, 신기 있는, 보통 신기(神氣)라고 하죠. ‘신기 있는 사람 아니냐?’ 이 말이죠. 일반 평범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통제하고, 다른 세계에 대해 관리가 가능한 그런 쪽의 사람이 아닌가 하고 벌써 기죽고 들어가죠. ‘궁궐에 귀신 있다’ 그러면 처녀 무당 하나 데려와야 되겠죠. 인간의 힘으로 안 되니깐.

조선시대 때, 이런 무당들을 국가적으로 낮추어 보고, 용납을 하지 못하고, 아주 천하고 더러운 직업으로 삼았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 다시 말해서 철저한, 중국에서 들어온 법 체제 국가로 초반부터 정립돼 있었던 겁니다. 법 체제, 법이라는 것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어떤 결과가 있을 때, 그 사이에 법이 들어가는 겁니다. 법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법칙이라 해도 돼요.

법칙이 들어가죠. 법칙이 들어가는데,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나오고 그 사이에 법칙이 들어가는 게 상식인데, 그게 아니고 법칙이 먼저 앞서서 네가 아무리 원인->결과가 되더라도 법에 위반되면 이것은 나쁜 것이라는 그러한 논리를 법 체제 자체에서 이끌어내요.

그런데 무당이 뭡니까? 무당은 우연이고, 요행이잖아요. 다른 사람이 무당 짓 한다고 해서 귀신 나오고 그런 거 아니죠. ‘당신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했습니까?’ 라고 무당에게 물으면 일반인은 설명 들어도 몰라요. ‘어떻게 해서 귀신이 나갔습니까?’ 라는 물음에 무당들은 뭐라 하냐 하면, “feel, 감(感)이다” 감으로 하는 거예요. ‘필링~’이라는 노래도 있죠. 우리말로 할 때 ‘느낌’이라고 번역하면 좀 이상한 번역입니다만, 그냥 느낌이에요, 느낌.

느낌대로 사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법고시 출신들, 법대출신들이 제일 싫어해요. “너 음주운전 왜 했어?” 라고 물으면, “이상하게 오늘 느낌에 밤에 술 먹고 싶어서 먹고 운전했습니다. 이건 내 자유입니다. 내가 좋다는데 경찰 네가 뭔데 술값 내준 것도 아니고 왜 관여하느냐?” 할 때, “잡숫는 건 좋습니다만, 당신은 법을 위반했습니다. 보니까 벌써 세 번째네요. 교도소 가세요.”

“왜 날 잡아가?”라고 진지하게 물으면, 판사나 검사가 뭐라 하냐 하면 “법대로 했습니다.” 이게 답변이에요. 그러면 “왜 법대로 해?” 하면, “법대로 해야 공공질서가 유지됩니다. 당신 같이 그렇게 하면 이 사회가 개판됩니다. 감 없는 사람이 누가 있고, 느낌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누구나 그걸 참고 사는 것이지.”

다시 말해서 조선시대에 법체계가 국가적으로 해서 무당이라든지 이런 우연 요소를 다 제거하는 이유는 ‘국가 우선주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 해봅시다. 교회는 성령이 임해야 교회죠, 맞죠? 사도행전에서. 자, 그러면 그 다음 질문, 성령은 법에 매입니까, 안 매입니까? 성령은 법에 안 매이죠.

법에 안 매이는데, 성령으로 했는데, 법 쪽에서, 법 있는 사람이 놀리고, 고발하고 비난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앞으로 성령대로 하겠습니까, 법대로 하겠습니까? 법대로 하죠. ”아, 내가 이렇게 하다가는 이 조직 사회에서 추방되겠다, 가족으로부터 추방되겠다. 나만 손해잖아.“ 그렇게 되죠.

제사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야 되는 게 인간들의 법이에요. 그런데 가인은 안 받았잖아요. 법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에요. 인간이 안심하고 자기의 육신을 건사할 수 있는 법적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는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1, 법이란, 인간의 안녕과 평안을 사수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2번 문제, 율법은 뭡니까? 율법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거죠.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나라가 없었어요. 애굽의 일부였고, 애굽에서 나올 때 나라가 없었어요. 이름은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 되려면 영토가 있고, 백성들이 있어야 되는데,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계속해서 퇴출당하는 경우가 남아있어요.

분명히 나올 때는 한 식구로 나왔는데 점점 없어져요. 뭔가 자꾸 잘려나가는 느낌, 제거되는 느낌이 든단 말이죠. 나중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의 땅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인간의 나라를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울왕이에요. 율법을 뭐로 바꿨습니까? 율법을 그들은 법으로 바꾼 거예요. 자, 법은 누구를 위하여? 인간을 위하여! 율법은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은 나를 위한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오해를 한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처럼.

자신이 하나님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교회 가서 맨날 하는 기도 내용이 뭐냐? ”하나님 뭐하시노? 나 안 도와주고?“ 이거잖아요. ”하나님 뭐 하시노? 나같이 착한 사람을 안 도와주고? 뭐 선하다, 착하다, 그런 하나님 없는 거 같애. 그래도 내가 하나님 믿는 것은 내가 워낙 착하기 때문에, 내가 워낙 의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녕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천국까지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자기 의’라 해요. 그걸 오만이라 합니다, 자기 의. 이게 나쁜 줄 모르는 이유가 교회나 성당 가면 다 똑같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목사까지 다 똑같아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아, 이래야 정상인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파탄 난다 할지라도 그건 뭐 큰 문제 아니고, 시시한 문제입니다.’라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어제 오후 설교는 제가 요약을 안했잖아요. 오후 설교를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않은 자들은 하나님이 작살낸다.’(살후1장 7-9절) 이거죠.

여러분, 그 말씀 하나도 뭔가 시원한 청량감이 오지 않습니까? 이게 시원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평소에 주님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래서 뭐?’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건 뭐 예수님 할 일이고, 뭐 내 할 일인가? 그래서, 그래서? 지금 나한테 문제는 그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오든 말든 난 모르겠고, 우리 집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에 신경 쓰는 사람한테는 예수님께서 깔끔하게 마지막 심판한다는 것이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 않는 것에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인간의 안녕과 번영, 또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치를 해야 된다.’ 이런 사람들은 원인은 ‘나’, 결과도 ‘나’가 되겠죠.

여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바로 거짓 선지자가 끼어드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참 선지자를 원할까요, 거짓 선지자를 원할까요? 거짓 선지자를 원합니다. 물론 거짓 선지자가 가슴에 ‘거짓 선지자’라고 달고 오지는 않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 못해줘서 지금 환장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왜 하나님께 사랑을 못 받는가? 하나님께 기도를 안 해서 그렇고, 하나님께 헌금과 헌신과 전도, 구제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와 같이 믿기만 하면 여러분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준비를 다 해놨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기도를 안 해서 복을 못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왔지롱~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간곡하게 기도해드릴테니까 여러분들은 저 하나 믿고, 한 번 믿어 주이소, 고마! 한 번 믿어주시고, 제 뜻에 한 번 따라주세요.”

그 다음에 나오는 얘기가 “내 눈을 바라봐~” 이렇게 나오죠. 허경영. 스바냐 2장에 나오는 자기 말 하는 거요.(습2:15) 어제도 자기 말 한다는 이야기 했죠? 인간은 자기 말만 합니다. “내 말을 들어봐.” 갑자기 허경영이 생각나는데, 그 얘기는 설교시간에는 안했는데요.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바라봤는데 돈이 수 백 억이 넘으니까, 얼마나 편리해요? “실제로 나를 믿고 나한테 안수 받고 기도하고 내 뜻대로 해가지고 실제로 성과를 얻은, 많은 기적을 누린 자들이 여기 증인들로 쫘악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나의 능력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집구석에서 혼자서 끙끙 앓고 이 병원, 저 병원, 해독주스 이런 거 먹지 마시고,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나한테, 우리 교회에 와야 되지, 병원 찾아다니지 마시고, 뭐 또 안다고 비타민제 이런 거 찾지 마시고, 저한테 오세요. 예를 들어서 살이 안 빠진다, 요요현상이 있다 그러면 오세요. 기도하시면 쫙 빠지게 해드립니다.” 뭐 이런 거.

그래도 사람들이 잘 안되면, “제가 예루살렘에 가서, 요단강에 가서 물을 갖고 왔는데 이거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요단강 물입니다.” 여러분 요단강 가봤어요? 더러워서 건너가기도 찝찝해요. 누런 황토물. “요단강 물이니까 이거 잡수시면 여러분들은 병 낫고, 여러분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 받고, 사는 동안에 여러분 복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복 받는 방법은 그냥 막연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기도하시고, 때 맞춰 기도하시고, 헌신하시고 봉사하시면 그 마음, 정성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여러분들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이게 바로 거짓 선지자예요.

제가 말한 것 중에 “이게 바로 거짓 선지자” 이것만 빼버리면 똑같네, 사실은 똑같겠지만...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이미 익히 하나님은 인간을 압니다. 인간에 대해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죄인으로 보거든요. 이것은 뭐냐? 그 죄가 인간을 계속해서 통제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 죄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 악마, 마귀가 있겠죠. 악마가 인간을 다 인도하면서 나름대로 아까 이야기한, 오로지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하여, 인간 세계를 위하여”, 악마가 건사하라고, 잘 되라고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내신 거예요. 이 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 리가 없죠.

다시 신명기 13장을 봅시다. 3절에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라고 되어 있죠. 분명히 13장에서 이렇게 말씀을 했죠. 이 내용, 예언이거든요?

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가 어떤 거겠어요? 이 말씀의 성취가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했다.’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 맞구나.’가 성취가 돼요. 지금은 그들은 다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예예~” 뭐 그냥 ‘예예’죠. 믿을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하나님 말씀만 믿어야죠. 뭐 어떻게 대책 있습니까? 대안 있어요? 없잖아요.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면서 다 하잖아요.

뭐 말기 암 걸렸다가 기도해서 나았다는 그런 사람들 대부분 뭐라고 합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다시 한 번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까” 맨날 덤으로 산대요.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까 몽땅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라고 할 때 그 사람들은 지금 무슨 자기를 말기 암에서 건져준 게 ‘신명기 13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이 너한테 해당되는 이야기야.’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 자체가 뭔가 챙겼기 때문에 나오는, 역시 끝까지 내 위주를 못 버리고 있다는 나 중심의 인생이라는 것을 주께서 나에 대해서 미리 아시고, “너는 백날 노력해서 구원 못 받아.” 라는 것을 신명기 13장 1절부터 3절에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네가 네 스스로 율법 지켜서 구원 못 받는 것을 내가 미리 알려줘? 줄게. 그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증명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 듣고 “우리는 사랑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다려봐. ‘사랑하겠습니다.’부터 해서 모든 인간이 왜 나를 사랑할 수 없는가를 분명히 내가 보여줄게.” 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를 이스라엘 속에 투입하는 것을 주께서 용납을, 허용을 해버려요.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Test, 시험하는 거예요. 그게 시험이에요. 아브라함도 본인을 사랑하는지, 하나님 사랑하는지를 아브라함은 뭐 하나님 사랑한다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너 누구 사랑해?” “하나님 사랑합니다.” “너 사랑 안 해?” “안 합니다.” “좋아, 내가 테스트 할게. 내가 보기에는 네가 네 아들 사랑하는 거 같은데? 그러면, 아들하고 나하고 바꿔볼래?” 하고 시험 내줬잖아요.

제가 여러분에게 시험을 그대로 한 번 내보겠습니다. 아주 친절하게 설명 곁들여가면서 시험하겠습니다. 1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산다. 또는 ‘나’가 산다. 여러분 이 쪽입니까? 아니면, 2번, 나를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2번입니까? 여기에 대한 정답은 어떤 사람만 정답을 낼 수 있느냐 하면, 이겁니다. 간단한 겁니다.

“말씀이냐, 나냐?” 중에서 말씀이 우선이고, ‘나는 말씀의 방해자이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2번이 정답이 돼요. 왜냐 하면, 나는 내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방해꾼이었어요. 방해꾼으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방해자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방해해요? 내가 방해하니까,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방해꾼인 나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해서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깊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찌 알리요? 알 수가 있습니까? 십자가 영이 와야 알지요, 십자가 영이.

맞바꾸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말씀과 우리를 맞바꾸어서 그 동안 말씀을 방해하고 있으면서도 말씀 방해한 줄을 모르는 우리를 말씀 안의 새로운 나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버려요. 육신으로 만든 나, 아담의 나를 말씀으로 만들어버려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아담 족속이냐, 아니면 예수님 족속이냐? 첫 번째 아담이냐, 아니면 마지막 아담이냐? 네 소속을 밝혀라.

네 소속을 아담 소속에서 예수님 소속으로 바꿔 놓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으리오? 그래서 사랑은 필수 조건이 뭐냐 하면,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만약에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자꾸 내가 살아있는 이것을 사랑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크다’는 말씀이 있거든요. 아가서 8장 6절에 나와요. 자, 그러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제는 ‘아이고 그딴 게 뭐 중요해?’ 라고 내칠 수 있는 게 뭐냐? 내 목숨이에요. “너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 “아휴, 죽는 거 그게 뭐 중요해? 사랑이 중요하지.” 이래야 사랑을 안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산 사람만이 자기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진짜 살아난 사람만이 자기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사도바울처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이야기 하겠어요? “나는 죽었다. 어디서 죽었는가?” 혼자 죽으면 자살이고요. 혼자 죽으면 안돼요.

“내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제는 “그럼 당신은 뭐야?” “내가 사는 거? 내가 사는 것은 나 단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그리스도와 한 통속이 되어서 산다. 일체되어서 산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산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뭘 했는가?“ 라고 물으면, 뭘 한 게 없죠. 믿음으로 살 동안에 한 게 없잖아요. 그럼 믿음생활이란 뭡니까? 계속해서 한 게 없는 게 믿음생활이에요. 계속해서 할 게 없어요, 뭘 할 게 없어요.

아니, 재벌 집에 시집온 여자가 정원에서 시금치나 파 기르면 남편이 ”여보, 뭐하노?“ ”살림에 보태야죠.“ ”뭘 보태?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걸 보태?“ ”우리 이거 아니면 못 살아.“ ”뭘 못 살아? 이 집이 재벌집이야. 그거 시장에 가서 사면 돼. 하지마, 그거.“

그러니까 재벌 집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여러분 다 경험해봤죠? 잘 살고 진짜 원 없이, 부족함 없이 살아본 경험들 다 있잖아요. 출신이 부잣집 출신, 좀 산다는 집안에서 태어날 때 경험들이 다 있어요. 나중에 커서도 그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신명기 13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이미 인간들은 이미 거짓 선지자를 요청하는 본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적만 일으켜 준다면 여호와가 아니라 부처라고해도 나한테 이익만 된다면 나 예수 안 믿고 부처 믿을게요.’ 라고 마음 준비가 다 되어있는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모든 인간들이 그래요.

13장 5절 보겠습니다.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죽이라“ 아, 참 주님의 조치가 간단하죠. 어제 낮 설교 가운데서 어려운 점이 ”주님은 살인하지 않습니다, 죽입니다.“ 살인자는 살인자가 부각이 돼요, 살인자가 부각이 되거든요. 죽음은 뭐냐? 태어남 자체가 이미 죽음입니다. 죽은 자를 왜 또 죽여요? 그래서 태어남 자체가 죽음이에요. 그 죽음을 죽음 되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일이고요.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를 죽이는 것은 살인자가 하는 행동이고. 그러니까 자살하지 마세요. 100살 살아도 그게 일종의 자살이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점점 죽어요. 오후 설교에서 했잖아요. 카운트 한다고, 96,97,98..지겨워 죽어 하여튼. 아, 진짜 도대체 언제 떠날건데? 왜 자꾸 하나님께서 살려 두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는 이유는 우리보고 ‘사는 값하라’는 거예요. 사는 값 하라는 게 뭐냐 하면, 죄를 드러내라는 거예요. ‘죄를 드러내라.’ 죄를 드러내는 이유가 뭐냐? 죄를 드러내야 내가 뭐든지 오만하지 않고, 주의 복음에 방해꾼이 안돼요, 그 순간만큼은.

만약에 내가 죄를 안 드러내게 되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잘난 사람, 의인되어 버리죠. 의인 되어 버리면, 나의 의가 어디와 충돌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의와 충돌돼요. ”너희는 구하라 그 나라와“ 그 다음에 뭡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니까, 그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너희는 네가 생각하는 의 말고, 너한테는 없는데 주님에게 있는 나라, 인간에게는 뭐가 있어요? 죽으면 천국, 지옥이 있죠. 이게 다 가짜인 거예요. 천국은 주님만이 독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 주님 외에 천국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주님의 성령이 임해야 주의 나라를 알지, 인간들이 상상하는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건 극락이라고 하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극락이에요. 착한 사람만 가는 나라, 극락이에요.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갔던 나라가 극락입니다. 그러면 그의 나라는 어떻게 하면 돼요? 그의 의를 구하면 되죠. 그의 의를 구하는 데서는 뭐가 있으면 안돼요? 나의 의가 있으면 안되죠.

그런데 나의 의를 제거해서 죄 지으면 이게 결국 뭐가 돼요? 나의 의를 없애고 죄 짓고 회개하고 반성하면 이게 뭐가 됩니까? 주의 의가 돼요, 나의 의가 돼요? 나의 의가 되지요. 이런 바보같은...내 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게 뭐가 돼요? 아주 더 고상하고 더 낭만적인 나의 의가 돼요. 도대체 이건 없어지지를 않네요.

천 번을 때려서 멍이 퍼렇게 든다 할지라도, 매일같이 회개해도 회개 자체가 뭐가 됩니까? 맨날 반성문 써도 그 자체가 나의 의가 되고, 나의 의가 죄의 핵심이거든요. 죄의 핵심. ”하나님, 나에게도 양심 있습니다.“ 양심 같은 소리하네. 양심 가지고 지옥이나 가라! 양심은 결국 나를 사수하고, 내 잘남을 변호하는 데만 필요할 뿐이에요.

”내가 뭐 말할 수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내가 다 참고 있다고!“ 이것도 자기 의잖아요. 보통 부부 싸움할 때 뭐라 합니까? ”내가 참지, 내가 참아. 니 잘 났다 그래“ ”방금 뭐라 했나?“ ”아무 소리 안했다. 나 혼자 해 본 소리다.“ 여러분, 참는 것의 반대말은 보통 화내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아닙니다. 참는 것의 반대말은 감사입니다, 감사에요.

”내가 당신한테 많이 참는다.“ 이거는 참는 게 아니죠. 속으로 부글부글 끓죠. 그런데 뭐가 반대냐? ”당신같은 인간도 있음에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다.“ 물론 듣는 그 사람은 더 화나겠지만. ”너 지금 나한테 한 방 멕였지? 멕인거지, 그치? 이단 옆차기 찬 거지, 그치? 너 같은 인간하고 산다고 내 인간성 참 많~이 좋아졌다, 뭐 그 이야기 하는 거야?“ 이렇게 나올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만 챙긴다는 것이 더 죄가 나한테 더 시큰시큰하게 ,아주 새롭게 매일같이 느껴진다.”

내 속에 감추어놓은 죄가, 감추어지지 않고, 더 깊이 있는 죄가 죄의 깊이가 더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참다 참다 결국 터질 때가 되면,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 때문이다. 다 당신 때문이고, 대통령 잘 못 만나서 그렇고, 선거 조작해서 된 거고, 전부다 너 때문’이에요. 그게 뭐냐? 그게 정확하게 맞더라도 의미 없어요. 왜? 감사가 안 나올 때는 뭐든지 비진리예요. 그럼 감사는 언제 나오느냐? 자기가 망가질 때 감사가 나와요.

3층에서 계단 내려오다가 관절 나갈 때, 밥, 청소, 모든 걸 남편이 다 해줄 때, 처음에는 “조금 감사한 것 같애.” 그러다가 일주일 가도 낫지를 않는데 계속 해줬어. “조금 더 감사하네?” 그래놓고 남편이 내색하는 게 아니고, “당신이 이런 식으로 10년을 아파도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해줄 때, 분명히 저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줄 알면서도 “기분은 좋으네.” 그런 말이라도 해주는 남편도 없습니까? ‘좋으네~’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언어에 농락당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언어입니다. 율법대로 삶으로써 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성질, 언어에 농락당하는 속성이 율법을 만나서 율법을 곡해하는 식으로 지가 지한테 농락당하는 거예요. 이런 말이 있어요. “기만당하는 자가 기만자다”라는 말이 있어요.

예를 들면, 보험 사기꾼 있잖아요. 보험 사기꾼이 보험사기를 쳤어요. 그러면, 보험 사기꾼과 보험회사 관계를 봅시다. 보험 사기꾼들이 설치고 다니니까 보험 회사에서는 정상적인 보험 청구에 대해서도 일단 출발을 어디서부터 합니까? ‘보험 사기꾼일수도 있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조사를 다 해봐야 된다고요.

그냥 보험금 달라는 대로 줘서는 회사가 안 되니까. 왜? 보험 사기꾼이 있으면 그건 기만자죠. 기만자가 일부러 사고 내면, 사기당하는 자가 누굽니까? 보험회사지요. 기만하는 자, 사기꾼은 보험 사기꾼,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은 보험회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위의 말, ‘기만당하는 자가 기만자다.’ ‘사기당한 자가 사기꾼이다.’라는 말은 뭐냐?

‘보험료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가 보상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보험회사가 사기꾼이거든요. 보험회사가 사기꾼이에요. 이문을 통계와 확률에 의해서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책정해서 이윤을 챙기는 이 자체가 사기꾼이잖아요. 왜 그 계산을 안했겠어요? 전체 사고 가운데 보험 사기꾼의 사고 비율을 계산하고, 보험 사기꾼이 등장할 때마다 ‘이것이 보험료를 인상할 수밖에 없는 요인입니다.’라고 대국민 사기를 칠 수 있는 빌미가 되는 거예요.

바로 인간들은 이미 마귀한테 사기를 당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인생 자체가 괴롭고 힘들다는 거예요. 나는 착한데, 인생 자체가 내 착함에 비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분명히 나는 착한데, 악마가 나를 괴롭게 한다는 거예요. 그럴 때 사기꾼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그렇게 힘들게 살 인생이 아닌데, 당신에게 액운이 끼었다. 우리가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가 당신의 액운을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기꾼은 누구에요? 거짓 선지자가 사기꾼이죠.

그런데 거짓 선지자 말을 듣는 그 사람은 누구에요? 본인이 본인을 모르고 본인에게 사기치고 있었던 것을 본인이 몰랐던 거예요. 사기꾼을 만나야, 내가 사기꾼을 만나야 마땅함을 아는 거죠. 그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 하냐 하면, “죽이란 말이야.” 죽입니까, 안 죽입니까? 안 죽이죠. 성과 없는 선지자는 죽여 버리죠. 죽이는 이유가 율법대로 죽이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별 소득이 없으니까 죽여도 괜찮은 거예요.

사울 왕은 분명히 율법대로 한다고 무당을 죽이고 쫓아냈죠. 그런데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누가 찾아갔습니까? 사울 본인이 찾아갔죠.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라.” 왜 불러내는데요? 그 이야기 잠깐 해드릴까요? 죽은 사무엘을 불러냈더니만, 죽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뭐라고 얘기했는지 알아요?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을 지목해서 이야기했어요.

“그 때 너는 왜 아각의 목을 당장 치지 않았느냐?” 옛날이야기예요. “그 때 이미 하나님은 너를 버렸다.” 하나님 편에 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아각의 목을 왜 안쳤느냐 하면요, 왕이 제 자존심에 내가 칠 수도 있고, 안 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쫘악 보이듯이 보여줘야 백성들에게 자기 권위가 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역시 우리 이스라엘은 저 사울왕 없이는 안 돼. 사울과 그 집안이 계속 왕이 되어야 돼.” 라고 했던 그 기회를 사울왕이 놓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뭐냐? “사울과 그를 따르는 자를 나는 이스라엘로 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왕이 와서 새로운 왕이 조직해야 된다.” 그 왕이 누구겠어요? 다윗이죠, 다윗.

사울왕 나중에 어떻게 되나 한 번 봐요. 결국에 사울왕은 뭡니까?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건사하고, 내가 갖고 있는 권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나한테 이익이 온다면 뭐 신접한 여인이든 뭐든 간에 나한테 조언만 해준다면 나는 최고다.’

‘아각의 목을 쳐라’ 아각 왕 이름을 잊을 수가 없어요. 허각과 연관시켜서 생각나요. 여러분들도 성경인물 구절 떠올릴 때 아는 이름과 연관시켜보세요.

이스라엘에 율법이 있는 한, 내내 이런 식이에요. ‘너의 죄를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계속 시험, 테스트 하는 거예요. “죽여라” 안 죽입니다. 안 죽이죠. 거짓 선지가 같으면 죽이는데, 거짓이냐 아니냐를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당신 때문에 우리 조직에 이익이 되면 당신은 참된 선지자가 되고, 여호와 이름으로 했는데 우리가 손해 본다? 그러면, ‘여호와 이름이고 뭐고 소용없다, 죽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에 그 다음 역사가 내내 그렇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부터 해서 모든 선지자가 그런 수난을 받았어요. 참된 선지자는 내가 기대하고 있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퇴출 대상이었고, 죽음의 대상이었습니다.

‘퇴출’,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자,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의 길은 예수님 뒤편에 있어요. 예수님이 길이니까. 예수님의 뒤쪽에 구원의 길이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는 예수님에 가로 막혀서 구원의 길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퇴출당했죠. 추방되었죠.

추방되었으니까 그 뒤에 뭐가 보입니까? 비로소 구원이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어 없어질 때, 비로소 바로 그 자리가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착해서 예수님을 안 죽인다 하면, 그 사람은 뭐가 없습니까? 구원의 길이 없는 셈이 돼요, 구원의 길이 없어요.

율법대로,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계속 보내는데, 나중에는 거짓 선지자는 우대받고, 나중에 장로 되고, 신학교 출신들이거든요. 신학교 출신들 나중에 월급 받아요, 공무원으로서. 그런데 참 선지자는 그런 거 없어요. 참 선지자는 나중에 퇴출당하고, 추방당하죠. 그게 바로 구원의 길이에요. 그 시대 사람의 구원의 길입니다.

자, 어떤 시대든 사람들이 ‘저건 거짓 선지자다, 저건 참 선지자다.’를 어느 기준에 의해서 판정을 내리느냔 말이죠. 그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에 있어서 첫 번째, 도움 되는가 두 번째, 저해되는가로 판정을 내려요. 도움 되는가, 저해되는가?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너희 원수는 너희 집안 식구’라 했어요.(마10장 36절) 그렇죠? 가만히 있는 식구 또 애 먹이지 마시구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그런데 좀 더 뒤 구절에는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너를 부인하라”고 나와 있어요. (38, 39절)

저거는 나의 구원을 막는 적이라 했는데, 그렇게 얘기하는 네가 바로 구원의 길을 막는 적이에요. 구원 받고자하는 내가 구원의 길을 막는 적이 된다고요.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를 퇴출시킬 마음이 없고 내가 나를 추방시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동안 왜 힘들게 살았는데? 뭐 때문에, 누구 때문에 살았는데? 누구 좋으라고 살았는데?”

보통 드라마나 실제로도 그런 일이 많죠. 시집 온 지 얼만 안됐는데, 너무 구박을 많이 받아가지고 이건 뭐 시집에서 ‘네가 낳은 자식 놔두고 너 혼자 나가라.’ 시어머니부터해서 그렇게 구박을 해서 애 데려오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젊은 나이에 그만 추방당했다 합시다. 그래서 한 30년 뒤에 애가 커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 왔다.

그래서 30살 먹은 아들이나 딸이 엄마 만나서 “엄마, 그동안 나 왜 안 찾아왔어?” 그러면 엄마가 뭐라 합니까? “실은 말이야, 가만 있어봐.”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뭐라 합니까? 눈물 흘리면서 뭐라 합니까? “얘야, 미안하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실은 말이야. 우리 시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는 안하잖아요. 왜냐? 그런 이야기는 나를 추방한 당사자한테는 할 수 있지만, 애는 제가 태어날 때 어른들 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제게 중요한 것은 ‘내 성장에 그들이 도움이 안 됐다.’는 그 점이 화가 나는 거예요.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과 결부해서 진리냐 비진리냐를 판정하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인도해가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그들에게.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네요. 우리가 ‘나는 착합니다.’하는데, 중요한 것은 착하고 안 착하고가 아니라 판정 기준이 뭐냔 말이죠.

‘나는 나를 버리기 싫은데 내가 너 때문에 힘들어 못살겠다.’ 이거잖아요. 노골적으로 말해서 “힘들어 못살겠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가 악바리처럼 살아서 이만큼 살았지. 너는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하얀 나비‘ 한번 불러볼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미자가 불렀던 노래 있죠? ‘여자의 일생’ 그 가사 한 번 보세요. ’이게 여자의 갈 길인가‘하고 울면서 그리고 뒤에 나온 가사가 뭡니까?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안 참으면 뭐 어쩔 건데? 참는다는 게 뭐냐? 감사한다는 게 아니고, 내가 나한테 감사하는 거, 내 의젓함과 내 잘남에 본인이 감사하는 것, 이게 자기를 우상시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있는 노래들이 이렇게 감추어져 있어요. 이게 진짜 세계가 아니라 전부 가짜 세계에서 성경 보고 율법 보다 보니까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이 최종의 우상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때까지 율법은 계속 쫓아갑니다. 쫓아가서 끝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들추어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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