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0a 부산강의 : [시편]74(58:3)-자아상실증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58편입니다. 58편에서 다윗이 예언해서 언급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게 ‘악’이라는 거예요. 2절에 보면,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악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언약에서 나오는 겁니다. 약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악을 통해서 다시 약속의 본 내용이 분명해지는 도구로서 악을 사용합니다. 악은 악마, 사탄이라 할 수 있고 악마, 사탄에 매여 있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를 포함한 인간입니다.
그러면 누구도 여기에 매여 있겠어요? 인간 속에 누구도 있겠습니까? 다윗도 포함돼 있겠지요. 다윗도 포함되는 거예요. 하여튼 여기 악마의 지배를 받으니까 통제에 있으니까 인간 고유의 인간 자신의 생각은 이 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그럼 여기서 어떤 반발이 나오느냐 하면, ‘그러면 나는 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나오겠지요.
인간은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인간 속에 나도 포함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 아담의 후손이니까. 그런데 딱 나오는 질문이, ‘그러면 나는 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앞의 것을 동의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앞의 것을 동의하면, ‘그러면 나는 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질문이 나올 수가 없지요. 이 두 문장에서 앞의 것이 완전히 매조졌단 말이에요.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결론이 났는데 이 결론에 대해서 누가 반발해요? 나는 특별대우 해주시면 고맙겠다고 나를 특별대우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성경에서 규정했을 때 여기 이 문장 자체에 대해서 반발을 하면서 나오는 나는 소속의 어디냐 하면 악마의 소속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이 반발심이 이 최종 결론에 나는 수긍 못하겠습니다, 동의 못하겠습니다. 나는 그걸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이면 다냐?’ 뭐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책임지고 결정하는데 왜 내가 책임진다는 내 인생에 주제넘게 하나님이 미리 결론을 짓습니까, 나 거기에 대해서 기쁨으로 수긍할 수 없습니다’ 이런 반발이 나오겠지요.
이런 반발이 나오는데 ‘그러면 나는 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지금 제가 잘못된 질문이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은 어떤 게 있겠습니까? 이런 게 있겠지요. ‘인간은 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 나는 빼주세요.’ 그건 잘못된 거고. 진짜는 뭐냐 하면, ‘언약은 악에서 어떻게 빠져나갔습니까?’ 이 질문은 정답이 되겠지요.
문장1: 인간은 악에서 못 벗어난다.
문장2: 그러면 나는 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문장3: 언약은 악에서 빠져나간다.
세 가지 문장 가운데서 2번 문장과 3번 문장의 차이점을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2번 문장의 주인공은 ‘나’가 되겠지요. 3번 문장의 주인공은 나가 빠지고 ‘언약’이 들어가지요. 이 차이가, ‘기독교를 종교로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복음으로 이해할 것이냐?’로 여기서 구분됩니다. 종교라 하는 것은 나를 못 놔요. 종교를 이용하든, 예수님을 이용하든, 하나님을 이용하든 무조건 나는 최종적인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니고, 내가 제일 중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나를 지켜내겠다는 야무진 오기 있잖아요.
오기에 비해서 3번은 주인공이 언약이란 말이죠. 그러면 언약 자리에 누굴 대입해보면 이 문장 굉장히 쉽습니다. 누굴 대입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대입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악에서 악마에서 인간세계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이 3번 내용을 미리 시편 58편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삽입시켰다. 집어넣었다고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강의를 처음부터 시작할게요. 제가 물어봅니다. 다윗은 악마에게 속했습니까, 안 속했습니까? 속했지요. 분명히 다윗은 속했단 말이죠. 왜? 인간이니까. 아담의 형상을 받았으니까 사탄에서 빠져나가질 못해요. 그런데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윗으로 시편 58편을 썼잖아요. 그러면 시편 58편에 다윗은 눈에 보이는 거고, ‘다윗 내부의 악마가 세냐, 아니면 하나님이 예수님이 세냐?’ 하고 격돌의 장소가 바로 다윗의 몸이 되고 그 다윗의 몸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윗은 좋겠네’ 하지만 다윗은 좋겠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다윗은 누굴 부러워하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를 부러워해요. 다윗은 아직까지 언약이 완성되기 전의 투쟁하는 장이지만 우리는 다 이루었다, 이미 다 끝나고 난 뒤에 이미 정답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쉬운 예로 이렇습니다. 수능을 치고 난 뒤에 채점하는 그 시간 뒤에 ‘내 점수는 몇 점이다. 난 두 개 틀렸다, 세 개 틀렸다’ 이게 좋은가요, 아니면 채점이 나오기 전에 미리 합격 통지받는 게 좋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내가 조마조마 채점해서 점수가 나와야 될 텐데 이 점수로 어디 갈 것이냐? 이런 초조감보다도 아예 수능 치루고 난 뒤에 동시에 ‘당신 수능 만점이야’ 소식 듣고 난 뒤에 채점하는 것은 느긋하잖아요.
그렇게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약 성도고, 구약 사람들은 초조한 거예요. 엘리야, 모세까지 초조한 겁니다. 변화산에서. 주님, 언제 십자가지십니까? 마가복음 9장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이 대화를 해요. 그때 예수님이 그들과 대화할 때 제자들과 대화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대화 안 했습니다. 놀아도 놀 쨉이 안 되거든요. 대화 상대가 안 돼요. 영광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 상대가 되지 철딱서니 없는 야고보, 요한과 베드로와는 대화가 안 돼요.
대화는 누구와 하느냐? 구름 사이에서 아버지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변화산에서 이야기해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왜? 모든 집중, 그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는 내용이 뭐냐 하면 집중, 응집. 더 중요한 것은 함축. 언젠가 제가 설교하면서 냄비 이야기한 적 있지요.
냄비에다가 라면 끓일 때 라면은 예수님이고 그다음에 예수님께 속한 백성들은 파 등 여러 가지 라면에 넣은 게 많잖아요. 치즈 넣을 수도 있고, 또는 된장도 넣어보기도 하고. 어쨌든 간에 모든 주변에 있는 것들이 주변에 고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고 어디에다가 한 곳에 모인다? 냄비 안에 라면 끓는데 끌어당기는 거죠. 끌어당길 때 그걸 성경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2장, 13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사라, 선물. 선물은 줄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줄로 잡아당기면 ■처음에 당길 때는 나가 있어요. 나라는 의식이 있는데 뭔가 줄로 특히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죠. 사랑의 줄로 나를 잡아당기면 ■그 당기는 순간순간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이런 말이 나와요.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5절). 그런 노래 있잖아요.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김용임의 노래에 나와요.
왜 밧줄로 합니까? 성도가 어떤 병에 걸렸는데 그 병에 걸려야 돼요. 안 걸리면 구원 못 받아요. 성도가 걸린 병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자아상실증. 이거는 축복 중에 이런 축복이 없어요. 자아상실증과 기억상실증을 좀 구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억상실증은 내가 누군지 자꾸 찾아다녀야 되고 초조하고 불안해요. 자아상실증 걸린 사람은 해맑은 얼굴하고 있습니다.
기억상실증은 내 기억이 없으니까 기억을 마저 채우려고 따라다녀야 돼요. 총알 두 방 맞았는데 도대체 누가 나를 쐈을까? 당신이 쐈어? 내 속에 뭐가 있는지 스위스계좌에 2조원 있는데 그 번호를 본인도 몰라요.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도 몰라요. 자기 이름도 몰라요. 옛날 이름 성현이, 뭐 그런 이름을 쓰고 있다고요. 기억상실증은 나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되는데 불가능해요.
가능성 없는 부질없는 짓을 계속해야 되는 그런 아픔이 있지만 자아상실증은 해맑은 얼굴이에요. 왜냐하면 자아상실증은 날마다 새로운 것이 들어오니까 새로운 것이 들어올 때마다 고맙습니다, 감사로 일관되거든요. 아침이 눈을 떴는데 나를 잃어버렸어요. 나를 잃으면 그 안에 물론 기억상실증도 포함되지만 나를 잃어버리니까 저 사람에게 내가 과거에 원한관계, 불편한 관계, 저 사람에게 잔소리를 좀 해야겠다하는 이런 부담 같은 것이 어떻습니까? 모든 관계는 새로 설정되지요.
이걸 부팅(booting, 재시동하다)이라. 컴퓨터를 눌러서 과거 자료는 다 날아가고 모든 새로 시작하니까 뭐가 없느냐 하면 원한이 없어요. 타인에 대한 관계에 대한 원한이 없어져버립니다. 원한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얼굴? 해맑은 얼굴. 이런 특징이 뭐냐 하면 유치원에 어르신들 말고, 일곱 살들 말고 막 들어온 유치원 초짜 세 살, 두 살 애들이 해맑잖아요. 유치원에 방금 들어온 애가 탄핵 때문에 고민합니까? 태극기 들고 갑니까?■ 나한테 주어진 모든 관계에서 내 중심선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공백이 돼요. 내 안이 비어있게 돼요.
내가 과거에 원한이 있으면 누가 손해냐 하면 본인만 손해에요. 본인의 인생에 감사와 기쁨 다 날아가고 입에서 쏟아지는 것은 세상과 사회에 대한 그리고 일가친척에 대한 분노만 나옵니다. 분노의 용광로? 분노의 저장소. 자기가 걸어 다니는 분노 창고에요. 분노 레미콘 차. 아내가 만약에 분노가 있다, 남편은 어떻게 됩니까? 주변에 근처에 가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슬금슬금 남편이 누구 눈치를 봐요? 아내 눈치 보게 만들어요. 그러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남편은 눈만 뜨면 아내 눈치 보느라 눈 뜨는 게 무서워요.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항상 대기상태니까. 심지어 어느 정도냐 하면 이렇게 해도 불호령, 저렇게 해도 불호령할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것은 날아가 버리고 어떻게 하면 불호령 안 받는 그것부터 먼저 하게 되면 사람이 위축이 되지요.
‘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이러거든요. 나 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무엇이 아직 살아 있다? 인간관계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나 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을 바꿔서 ‘당신은 참 훌륭해.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라 당신 때문에 살았어. 고마워’ 이따위 소리하는 것도 부담돼요. 이게 더 해달라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고, 남편한테는. 지금 조작인지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또 그것 분석한다고 골치 아프다고요.
차라리 잘해달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여보 내가 누구에요’ 차라리 그게 더 좋아요. ‘우리 오늘 아침부터 관계 새로 맺자. 당신 누구세요? 나 왜 여기 있지?’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를 비워서 자기를 공백상태, 빈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왜 이렇게 내 점수는 몇 점일까 초조하지 않고 아예 애초부터 너는 만점이라고 할 때 인간은 만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 못 돼요. 아까처럼 인간은 자아가 있잖아요. 자아는 뭐로 돼 있느냐 하면 관계자들과의 관계로 이어져요. 불교에선 인연이라 하지요. 주고받는 것. 사람이 주고받을 때 그냥 주고받는 게 아닙니다. 거래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나타난 특이현상이 창세기 3장에 나와 있어요. 뭐냐 하면 ‘저 여자 때문에.’ 여자는 누구 때문에? ‘저 뱀 때문에.’ 그러니까 누구 때문에 내가 됐다? ‘내 속에 뱀이 들어왔고, 내 속에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내 속에 들어온 여자와 뱀을 스스로 이제는 내 손으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망했으니까 내가 원래 원했던 나는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는 뱀과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 그게 원상 복귀되지 않는 한 나는 나로 돌아갈 수 없기에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지 않고 저 뱀과 저 여자한테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선악과 따먹은 하나의 증상이에요.
쉽게 말해서 나를 포기 못한다는 말은 내 속에 침범해버린 타인과의 관계가 나로 하여금 엉망진창 되었다고 남 탓하는 병, 정신병이죠. 그러니까 아담의 후손치고 정신병자 아닌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 정신병자에요. 원치 않는 내가 된 것에 대해서 타인에 대한 공격과 분노가 없으면 숨도 못 쉬는 그런 정신병, 그건 정신과의사한테 찾아가도 소용없어요. 정신과의사도 지도 같은 병이기 때문에 의사가 아니에요. 환자가 환자를 고친다? 이게 말이 돼요. 환자는 환자를 못 고치잖아요.
예수님은 뭐로 오셨습니까? 내가 온 것은 환자를 부르러 온 거예요. 왜? 예수님 자신이 의사기 때문에. 그런데 의사 앞에 가서 “어떤 병입니까?” “저 사람 때문에 병 걸렸습니다.” 하고 남 탓해버리면 결국 남 탓했다는 말은 이어지고이어지고 사다리타기하게 되면 결국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내가 나 된 것은 누구 탓이다? 하나님 탓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내 탓입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죽여 버렸지요.
그럼 예수님을 없애버리면 어떻게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자기가 고쳐져요? 예수님을 없애라고 지시한 것은 악마입니다. 가룟 유다를 통해서 악마죠. 그러면 악마가 원하는 것은 악마에게 예속된 인간 이것이 고쳐졌다는 규정으로 남아있기를 악마가 요구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아무리 몸부림 만부림쳐도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게 네 운명이야, 팔자야.’
마귀가 우리보고 하는 말이, “그러니까 너는 나와 같이 하나님을 욕하고 예수님을 욕해. 이게 우리 숙명이야.” 예수 믿지 말라고 욕하는 게 아니고 조용히 말씀에서 발을 빼는 것이 마귀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인간의 소극적인 반발이죠. 무슨 소리해도 나 안 들었다, 하는 그때 시절로 돌아가는 거예요. 말씀이란 게 돈도 안 되고 내 생활에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말씀은 내가 듣지 않겠습니다, 복음은 듣지 않겠습니다, 하고 반발하는 거예요.
이사야 40장에 이런 말씀 나와요. 인간의 모든 존재는 마치 들판에 보이는 풀이고, 인간이 뭔가 반짝 잘되고 성공한 게 있잖아요. ‘야 너 부럽다’ 이런 것, 그거는 잠시 핀 들풀의 꽃과 같은데 그것이 말씀의 바람이 불면 어떻게 돼요? 말씀만 남고 모든 것은 다 소멸된다. 이사야 40장에 나오잖아요. 그때 마귀는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나 그것 안 들었다’ 이러는 거예요. 안 들으면 돼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악마가 시켜서 하는 것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자체를 제거하면 되겠지요. 제거하게 되면 인간에게 남는 건 뭐냐?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훔쳐서 따먹었다가 우리 안에 꽉 채우겠지요. 그게 바로 마귀가 원하는 인간상입니다. 하나님께 대듦으로써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사는, 하나님만 신이 아니고 우리가 신보다 더 높은 신이 되었다는 절대적 자기에 대한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이 뭉쳐진, 집단화된, 제도화된 모습을 네 자로 ‘민주주의’라 하는 거예요. 민주주의 배후에 누가 있겠어요? 무슨 권력이 작동하겠습니까? 악마의 권력이 작동하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민주주의가 좋다는 말은, ‘이 사탄의 세계가 최고 좋아요’란 뜻이에요.
그러면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뭐냐? 왕 제도에요. 쓸 만한 왕, 솔로몬, 다윗 누굴 말하느냐? 그 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게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왕의 백성입니다. 이걸로 바뀌는 거예요. 그다음의 이야기 이렇게 되지요. ‘그 왕이 너한테 뭐해줬는데?’
지금 시편 58편에서 나오는 악이라는 것을 제가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은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인간의 악. 인간의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안에 사탄이 들어있지요. 하나님께 대드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것, 하나님을 안 믿는 것, 교회 안 가는 걸 자부심으로 여기는 것, 단독적으로 자기 인생에 책임진다는 걸 무한한 자기의 존엄성과 영광을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존엄성 하면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에요? 이거는 북한에서 많이 듣지요. 우리 김정은 이름의 존엄성, 많이 들었잖아요.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악이에요. 또 악은 뭐냐 하면 ( )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어서 악이 있는데 ( )의 악, 이 빈자리, 언약의 악, 또는 하나님의 원수로서의 악이에요. 이 하나님의 원수로서의 악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뭘 추적하기 위해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원수를 추적하기 위해서 오셨지요. 누가 저 대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무슨 일을 하려 오셨습니까?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에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상호간에 해결할 문제지 거기에 누가 끼면 안 돼요? 나가 끼어들면 안 돼요.
제가 어제 오후에 기도로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이 용서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망함으로 모독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용서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내가 새삼스럽게 ‘너는 나빠, 너는 나쁜 거야. 나쁜 짓했어. 그런 악독한 죄를 짓다니’라고 책망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누구에 대한 모독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왜 나는 남보다 못해, 왜 못 살아, 남들은 저렇게 착한데 나는 나쁜 짓만 하는 거야’ 이렇게 자기 자신을 닦달내지 말라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who), 그 누가 속에 나를 집어넣지 마세요. 내가 나를 정죄하지 마세요. 정신병이 딴 게 아니라 그게 정신병이잖아요.
하나님의 용서가 들어오는 방법, 내가 나에게 악을 끄집어내는 방법은 나 중심으로 이뤄져요. 나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나의 가치와 나의 의미를 지켜내기 위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해서 십자가로 해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이마에 검은 십자가를 그린 채 뉴스에 출현했습니다. (그날은(3월 5일) 부활절 준비를 알리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다.) 이건 뭐 부적도 아니고. 천주교가 그 정도로 개판이에요. 아주 노골적이에요. 그 마귀성이.
하나님의 용서가 어떻게 되느냐? ‘왕+제사장’입니다. 이 방법으로 악을 끄집어내요. 인간은 자기가 윤리, 도덕적으로 판단해서 나는 나쁜 짓 안 하겠다든지, 나쁜 짓하면 너무 후회가 돼서 앞으론 그런 죄책감을 가중시키는 그런 나쁜 짓을 다시는 안 해야지.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해야 되겠다는 말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모욕이라니까요. 그럼 나는 앞으로 나쁜 짓만 해야지. 가만있어도 나쁜 짓인데 뭘 또 새삼스럽게 나쁜 짓을 해요. 밥 먹는 것도 라면 끓여먹는 것도 나쁜 짓인데 뭐 또 새삼스럽게 나쁜 짓이란 걸 따로 도입합니까. 숨만 쉬어도 나쁜 짓인데.
살아 있는 것이, 숯 덩어리가 화장한다고 까만 게 없어집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문장들이 1번에 관한 거예요. 하나님이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끄집어내는 말씀들이란 말이죠. 아까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뭐 때문에? 마귀의 일이죠. 그러면 나는 어디 소속돼야 돼요? 마귀한테 소속됨을 그걸 인정하고 그 마귀의 일을 멸하는 현장으로 우리가 제공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마귀에서 벗어나서 그동안 마귀가 어떤 식으로 지금도 육신이 있는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그걸 파악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 여유가 있어야 된다고요. 어떤 상태에서? 자아가 상실된 상태에요. 성경을 볼 때 자꾸 자아를 집어넣지 마시고 내 대신 예수님과 마귀의 다툼으로 보시면 성경해석이 의외로 다 풀립니다. 방금 팁 하나 드린 거예요. 나 집어넣지 말고. 자꾸 문장을 그렇게 봐야 돼요.
제가 문장 쓸 테니까 뒤에 문장 연결시켜보세요. 얌전한 고양이는, 그다음 문장?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보통 이렇잖아요. ‘얌전한 고양이가 입양이 잘된다.’ 그러면 똑같은 앞 문장 있더라도 뒤 문장을 뭐로 채우느냐에 따라서 관심사가 어디 있다는 걸 알지요. 얌전한 고양이가 입양이 잘 되지요. 고양이 찾는 사람.
주의 말씀을 줬는데 주의 말씀 그 뒷부분을 내가 나서서 채우면 안 된다고요. 앞부분은 마귀가 시작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마귀가. 뒷부분은 뭐로 채워야 돼요? ‘예수님이 이렇게 마무리지었다’로 채워져야죠. 하나님의 원수는 왕과 제사장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왕이다, 하나님이 왕이다 상투적으로 이거는 어지간한 교회는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노래도 있잖아요. <만왕의 왕 내 주께서>(찬송가 151장) 가스펠송에도 나오잖아요.
그럼 제사장은 뭐가 있느냐? 빌립보서 2장에 소개돼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절) 그러니 너희는 무슨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하는 일을 주목하라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거기에 주목하지 말고, ‘예수님을 받았네’ 거기 주목하지 말고, ‘예수님, 나는 너무 좋아요’ 자꾸 그런 것 주목하지 말고, 내가 주님 앞에 주님 하는 일에 내가 가미된 접근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주님 쪽에서 하신 일이 뭐냔 말이죠. 내가 끼어들지 않은 그 상태, 깔끔한 상태, 있는 그대로 백 프로 주님만이 하셨던 그 상태가 그대로 흠집 내지 말고 나의 다룸 없이 그냥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라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우리보고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문장 뒤에 남겨진 문장이 있다면, 만약이 그 문장을 우리보고 채우라면 어떻게 채워요? ‘그러니까 그 좋으신 분을 믿자’ 이래 나올 것 아닙니까. 받아들이자, 영접하자 온갖 이야기 다 나오겠지요, 교회에서.
그러나 그 문장은 이렇게 돼요. 산 자나 죽은 자나, 그러니까 천국 가나, 지옥 가나 모든 인간은 그분을 주로 인정하심이라. 만유로 하여금 그분을 주로 인정하게 되어서,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심이라.’
마귀한테 빠진 인간은 마귀한테 복종하지 않습니다. 왜냐? 빠졌다는 그 자체가 복종이기 때문에 새삼 악마가 인간에게 찬양을 받을 일 없어요. 마귀교, 하는 이런 것은 다 헛된 짓입니다. 가만 살아도 복종된 상태기 때문에 새삼스레 종교를 만들 이유가 없어요. 마귀는 항상 감춰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어렵게 합니다.
질서세계, 또는 질서체제. 질서라는 것을 사람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질서는 어디 있느냐 하면 혼돈 위에 있어요. 이 혼돈은 뭐냐 하면 어둠의 세계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와요(“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은 질서체제로 체계를 갖춰있어요. 악마가 질서체제를 갖췄습니다. 혼돈은 혼돈만 나오는 게 아니고 어둡다고 돼 있어요.
혼돈과 어둡다면 질서는 뭐냐? 무슨 세계? 빛의 세계에요. 이게 바로 악마의 세계입니다. 놀랍게도. 범죄하고 난 뒤에 창세기 3장 이후에. 그러면 예수님께서 온 것은 이 자체가 혼돈과 이것을 감추고 인위적으로 질서체제를 갖추게 되면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혼돈을 밝혀내기 위해서 여기에 뭘 만드느냐 하면 틈, 균열을 일으켜요. 좀 어렵게 설명하겠습니다.
틈과 균열을 일으키는데 이 질서는 정신적 질서겠지요. 질서란 정신적 질서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사회문명이란 질서를 낳았으니까 정신이죠. 인간의 정신은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정신의 질서는 언어의 질서에서 나와요. 말의 질서에요. 서로 통하는 말을 통함으로써 질서체제, 명령체제가 갖춰져 있습니다.
질서체제가 그림을 이렇게 그리니까 상당히 수평적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말, 언어는 수평적이 아니고 실제로는 계층체제, 계급으로 돼 있어요. 계급으로 돼 있는 이 말, 말이 계급화 되면 이걸 법이라고 합니다. 법은 뭐로 돼 있습니까? 언어로 말로 돼 있지요. 그러면 말을 다룰 줄 알고 많이 아는 쪽은 사회에 낮은 층일까요, 높은 층일까요? 높은 층에 속해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뭘 배운다? 인간 말 속에 있는 언어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교육이에요. 그러면 교육을 많이 못 받았다는 건 뭡니까? 쓰는 말의 어휘나 개념이 많이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듬성듬성 언어를 사용해요. 징검다리가 어떻습니까? 일반다리는 이어져있지요. 징검다리는 여기 하나 돌멩이, 여기 하나 돌멩이 있잖아요.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에 뭐가 있겠습니까? 틈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많이 배운 사람은 이 틈이 있다는 틈의 내용을 알지요. 틈의 내용을 아니까 이건 뭐가 되느냐?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사기는 누구한테 칩니까? 언어로 메울 수 없는 데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자가 못 메우는 자에게 사기 치는 거예요. 이 언어로 돼 있는 것이 질서지요. 질서와 질서 사이에 충동이 나와요. 충동이란 욕망입니다. 육체적 욕망. 그러니까 교육을 한다는 것은 충동이 나오는 틈을 메우는 게 교육이에요.
교육을 못 받으면 불쑥불쑥 뭡니까? 성질 나오지요. 어떤 성질? 술 먹었을 때, 마약했을 때, 도박했을 때 여러분들이 교도소에 가 보면 모든 교육의 질이 바깥보다 낮아요. 왜 낮으냐? 무엇 때문에 교도소 들어왔어요? 욱, 욱, 욱하지요. 욱하는 것은 말을 해야 될 그 시점에서 적당한 언어와 의미를 구사를 못해서 주먹부터 나가서 마누라 패고 경찰서에 가고, ‘당신은 벌써 세 번째야. 교도소에 가.’ 속에 있는 분노를 미국 같으면 총으로, 한국이면 칼로 찔러서 교도소 오잖아요.
스스로 자기 언어로 메워야 될 대목을 메우지 못해서 틈이 벌어진 거예요. 틈이 모이면 거기서 뭐가 생긴다? 충동. 충동은 왜 생기지요? 다스리지 못하는 욕망에서 나오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으니까. 욕심이 나오니까 사기꾼이 와서, “돈 있는 거 은행에 넣으면 이자 3프로밖에 안 줍니다. 수협 3.1%, 농협 3.5%, 3.2% 정기예금 그것도 1년 반짜리. 일반은행은 더 낮아요. 그러니까 천만 원 해보야 1년 이자가 삼십만 원밖에 안 되니까 나한테 맡기면 오십만 원 쳐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무슨 돈으로 이자를 5% 주느냐?” “내가 부동산에 대해서 아는 사람 많거든요. 요새는 건물 시세 없고 땅이 괜찮아요. 땅 개발되는데 5~10% 나옵니다. 벌써 참여한 사람이 이천 명이 넘어요. 사람들 바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집에 있는 푼돈 은행에 넣지 말고 투자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작동합니까? (3% 삼십만 원)−(5% 오십만 원)=이십만 원이 뭐로 작동돼요? 욕망으로 작동되지요. 지금 아이들 대학등록금 나오고, 딸 시집보내야 되는데 은행에 넣어서 언제 목돈 합니까? 이번에 한방에 목돈 챙겨서 부모 값합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부모 값? 부모 값이란 의미를 알잖아요. 그 부모 값의 의미를 채우는 건 징검다리론 안 되고 반드시 부모 값이 되는 연속된 의미와 의미의 그런 연결 같은 것이 필요할 때 잠시 마음이 안정감을 얻겠지요. 이게 사기꾼이 개입되는 거예요.
제가 경제적인 사기꾼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목사지요. 사기꾼 목사. 당신이 아픈 것은, 당신 집안에 우환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에 그렇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누가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더욱더 깊이 알게 되면 당신이 원하는 욕심을 채우는, 욕심이란 말 안 하지 참,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종교잖아요.
그러나 복음은 뭡니까?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라. 욕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당신이 어때서? 당신이 사는 형편이 어떻든 주께서 죄를 이미 용서했으니 영생 얻었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면 그걸로 족해야 되는 것 아닌가? 자꾸 뒤에 마귀가 쑤셔서 남은 저렇게 살아가는 데 아직까지 내 인생 오십, 육십 살면서 남은 인생 오십 년 남았는데 이 꼴로 못 산다. 나 죽는다, 정말. 뭔가 안전빵에 들어가야 된다. 이건 뭐예요? 하나님 말씀을 주시옵소서. 말씀과 말씀 사이에 그 중간에 비어있는 것도 말씀으로 채워주시길 바랍니다.
아까 문장 세 개 이야기했잖아요. 다 잊어버렸지요. 첫째는, 인간은 어떤 인간도 악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나를 어떻게 빼내주시렵니까. 내 속에 누가 빠져나와야 돼요? 내 속의 언약이 나와야 될 문제를 남은 인생은 나 어떻게 될 건데? 말씀이 책임지고 하나님 책임지세요, 이래 나와 버리면 사기꾼한테 넘어간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이 와서 질서체제를 뚫습니다. 뚫어버리면 여기 틈이 생기지요. 그 틈에서 뭐가 나옵니까? 우리가 내 속에 이러한 구정물 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한 구정물이 말씀이 찢어진 그 틈을 통해서 죄가 솟구쳐 올라오는 거예요. 진짜 석유 같으면 심봤다 할 겁니다. 사실은 내 죄가 솟구쳐 올라오는 걸 봤다 할 만해요.
세상에 내가 악마를 종교란 이름으로 기독교 신자란 이름으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억지와 메이크업/화장술로 연출하면서 내 속의 죄를 감추고 살았구나. 이게 주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들통 나겠느냐 말이죠. 교회 가봐야 지 믿음 좋은 것 자랑질하고 있는 그런 입장에서. 그래서 이 세상을 빛의 세계라 하는데 빛의 세계에서 밤이 없기 때문에 어두운 거예요. 빛밖에 없기 때문에 어두운 세계에요.
시편 58편을 썼던 다윗은 자기 세계에서 뭘 이야기합니까? 악을 언급한다고요. 이 악은 인간들의 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심어놓은 악을 이야기해요. 이미 구원받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거는 우리가 본격적으로 주저 없이 부담 없이 우리는 마음껏 ‘내가 마귀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마귀란 말은 마귀 편에 속했단 뜻이죠.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환자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 찾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지요. 7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린 옛날에 저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선으로 봤지요. 이걸 희생이라 봤지요. 이걸 평강이라 봤지요. 그러나 더 내려가야 돼요. 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란 고백을 하지 아니하면 이 죄인을 위해서 그다음에 나오는 10절의 말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그때 모습이 나의 진짜 모습인 것을 발견치 아니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인되기 위해 죽었다는 것이 우리한테 아무 의미가 없이 돼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하지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내가 남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이 짓이 얼마나 악한 짓이란 것을 부담 없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20250310b 부산강의 : [시편]74(58:3)-자아상실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압축된 악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압축된 언약이란 거예요. 그러니까 압축된 악이니까 이것은 다윗에게는 육적인 악처럼 보입니다. 다윗을 괴롭힌 사람들이 많잖아요. 아히도벨도 그렇고, 사울 왕도 그렇고, 골리앗도 마찬가지고. 우리 보기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요. 저게 무슨 보편적 의미를 갖느냐, 에요. 골리앗은 다윗의 적이잖아요.
뱀이 마귀라고? 뱀 잡으면 되잖아요. 뱀 잡는 사람 있지요(땅꾼). 잡으면 되지 나랑 무슨 상관있어. 단편적으로 보이는데 그게 압축돼 있다, 다른 말로 응축돼 있는 거예요. 악은 언약이 진행되면서 응축된 접혀져있는 의미가 한 꺼풀, 한 꺼풀 자꾸 벗겨지면서 동시에 압축된 한 꺼풀, 두 꺼풀 펼쳐지는 거예요.
장미가 처음에 필 때 덩어리처럼 돼 있다가 만개하면 활짝 펴지잖아요. 참 장미 나왔으니까 장미꽃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게 참 신비롭고 감사하고 어떻게 보면 어려운데요.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주님은 꽃잎 속에 계신다. 주님이 장미라면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꽃잎 속에 있다. 그럼 꽃잎은 뭐냐? 성도를 말하죠. 분명히 성도란 인간인데 인간들만 있는데 거기 계신다는 거예요.
나에게 입을 것 주었고 먹을 걸 준 것은 바로 인간에게 인간이 준 게 아니고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했을 때 주님은 어디 계시느냐가 함축된 의미가 활짝 만개될 때 비로소 발견하는 거예요. 길은 어디 있는가? 성도 안에 길이 있지, 뭐. 근데 그것도 모르고 ‘주님이여, 영광스럽게 꿈에 나타나 주옵소서.’ 영광스럽게 꿈에 나타나는 주님이 아니고 같은 성도끼리 만남을 통해서 그 안에 길이 품고 있는 거예요. 그게 함축된 응축된 의미거든요.
그럼 오늘 시편 58편 내용은 간단해요. 악 언급하고, 그다음에 악 작살나라 이 이야기에요. 저주받으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시편 58편은 그것밖에 없어요. 짧기도 짧지만. 악이 등장하고 나중에 악이 얼마나 저주스럽고 고통스럽고 작살나는지를 보여주겠다. 이게 바로 시편 58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사적으로 자기 개인적 감정에 치우친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잖아요. 함축된 의미를 모르면 그렇게 하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 개인적 사건이잖아요. 개인적 사건이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 확장이 돼요. ‘사건의 지평’이란 이 단어, 이 용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물리학에서 천문학에서 나와요. 사건의 지평의 의미는 바로 블랙홀을 설명할 때 사건의 지평이라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블랙홀 검은 홀이지만 막상 검지는 않고 하얀 게 빛이 나온다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밤이 없기에 어둡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모든 빛으로 포장돼 있는 이게 어둡다는 거예요. 안에 진짜 악마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빛으로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리고 적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사탄이 뭐로 위장하느냐? 선한 양으로 위장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마치 빛으로 행세해요. 특히 요한계시록에선 본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적그리스도, 또는 적 선지자, 짐승들이 그냥 짐승이라 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띠고 사람들을 속이는 겁니다. 빛으로 나타나거든요. 빛이라고 다 빛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사건의 지평이란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돼요. 사건의 지평이 블랙홀이라면 성경에 적용하면 이런 문장이 됩니다. ‘죽어도 성사될 수 없는 일에 주목하라.’ 내 목숨 바쳐도 해결되지 않는 일에 주목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에 주목하라. 아까 첫째 시간에 자아상실증이라 했지요.
이미 나를 상실케 한 그 일에 주목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힘들어 못 삽니다. 참 사는 게 힘들어요. 내 구속에 나의 의미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일어난 일들이 나의 의미로 오는 겁니다. 윤석열 풀렸는데 나한테 어떤 의미냐? 전부 다 나의 의미. 트럼프가 관세 매길 때 나한테 오는 여파는? 전부 다 일어난 모든 일이 나의 의미로 쏠리게 되면 이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마지막에 뭐냐 하면 예수님이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내 목숨 내가 지키는 일로 다 응축돼버리면 냄비가 내 냄비지 주님의 냄비가 아니잖아요. 주님, 주님 하는 건 거짓말이고 누가 주가 돼요? 내가 주님이잖아요. 내가 나한테 주님이 되고 나는 그 충실한 신자가 되고. 내가 신이 되고 내가 신자가 되고 거기서 만든 게 내 종교고. 그 외에는 남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건의 지평, 또는 다른 말로 사건의 지평이 너무 어려우면 의미의 지평, 모든 의미. 내가 목숨을 바쳐도 발견될 수 없는 다른 선, 저쪽 세계의 의미가 어디로 온다? 내 세계로 의미로 밀려오는 일이 벌어져요. 그게 어떻게 밀려오느냐 하면 언약의 투입으로 밀려옵니다. 밀려오게 되면 의미가 외부에서 온 의미, 그냥 우리 쉬운 단어 할게요. 단어의 징검다리가 많아서.
외계인의 침투, 이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납니다. 천사 세 명 오지요. 이게 외계인이에요. 천사 세 명이 오게 되면 갑자기 아브라함과 사라가 입을 다물게 돼요. 처음엔 입을 안 다물고 농담인 줄 알고 웃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애를 낳습니까? 고마운 이야기지만 내가 목숨 바쳐도 성사될 수 없는 일이라서 나는 내 생애 가운데서 농담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 그 표현을 아브라함이 그대로 노출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 일어난 일은 목숨 바쳐도 성사될 수 없는 일이 아브라함을 장악하게 되지요.
이것을 요한복음 5장에서는 뭐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현상이라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렸는데 집 나오고 보니 가스불 안 껐어, 어떻습니까? 이것은 바로 의미의 지평에서 나온 사건이에요. 분명히 수련회 마치고 카메라삼각대를 챙겼다고 챙겼는데 두 달 지나고 보니까 삼각대가 없어요. 그래서 막 성질을 내고 하면서, 성질까지 냈다고 하면 자칫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그냥 약간의 화를 품고서 나는 챙겼는데 당신이 안 가져왔구나, 했는데 가야산호텔에 전화해보니까 거기 있어요.
내 한도를 넘어섰어요. 내가 챙길 한도를 넘었을 때 의미는 사건의 지평, 블랙홀에서 외계 쪽에서 내가 생각한 내가 쌓아놓은 세계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내게 침투한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뭐로 변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마귀를 대적하는 똑같은 관점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시편 58편의 끝에 보면 아주 작살을 내게 돼요. 10절에 보면,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그다음에 7절 보면 온갖 저주가 다 나오지요.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소멸되게 해달란 뜻이에요. 5절 보면,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말씀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다는 그런 이야기 나오고.
8절에 소멸이란 말 나오지요.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있었는데 없다는 거죠.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만기되지 못해서 인큐베이터에서 죽어버린 아이처럼 잠시 있는 것 같은데 이거는 영원한 사망을 볼 수밖에 없는 그런 것. 또 9절에,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뭔가 요리를 하는데 중간이 불 꺼져서 아무 성과가 없게 하는 그것.
이걸 다윗이 어디다 쏟아 붓습니까? 드디어 악인을 발견하고 거기다 모든 걸 쏟아 붓지요. 개인적인 원한입니까? 아닙니다. 악의 응축된 의미가 다윗 시대에 분량만큼 이게 펼쳐지는 거예요. ‘이 원리를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자비를 베풀지 어떻게 욕설 아닌 욕설 같은 욕설을 퍼부어 대냐? 이래서 다윗이 성화했겠어?’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계시는 함축과 응축이 돼 있는 거예요. 개인적인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의 계시고 이 계시는 예언이고, 그 예언에 담긴 저주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서 저주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고 확정되는지를 미리 다윗을 통해서 예언케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윗 이전에 그런 일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할 것은 악과 선을 어떻게 나누느냐? 사건의 지평에서 보면 나눠집니다.
창세기 21장 9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희롱한다는 단어가 원뜻이 뭐냐 하면 성적인 학대를 의미하는 겁니다. 좋은 표현으로 놀린다 이 말이죠. 그러나 남자가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3년 먼저 태어났고 이삭이 서너 살 쯤 되었을 때 성적인 학대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라가 그냥 희롱한 것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니에요.
궁극적으로 성적이란 말은 섞어지는 거예요. 두 몸이 한 몸 되는 섞어지는 것, 몸과 몸의 구분이 사라지는 동작이 성적인 동작이잖아요. 성적으로 동작이 되면 소속이 되고 종속이 돼요. 왜냐하면 성적인 유혹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한쪽이 한쪽에 완전히 노예가 되는 가능성이 있어요. 자기를 추종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요.
이걸 보고 사라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분노를 퍼붓습니다. “여보, 저 하갈과 이스마엘을 당장 쫓아내라.” 이거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한 용어가 성경에 똑같은 단어가 두 군데 더 나옵니다. 하나는 창세기 26장 8절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껴안는다, 성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썼던 것, 당신이 가져온 저 노예가 나를 성적으로 희롱했다는 그 단어에요. 절대로 분리되어야 마땅함을 강조할 때 해야 되는데 거기에 도전할 때 쓰는 용어가 성적인 표현이 이 표현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뭡니까? 하갈과 또는 사라, 같은 말로 이스마엘과 이삭은 절대로 합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이게 언약의 투입으로 분명히 의미가 양성화되기 시작한 거예요. 응축된 의미가 언약이 유발하는 그 환경에 따라서 한 꺼풀, 두 꺼풀 언약이 언약대로, 예언이 예언대로 실현되는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현장에 우리 인생도 놓여있는 겁니다.
십자가로 죄를 다 용서했다, 다 이루었다. 굉장히 고맙지요. 고마운데 이 고맙다는 말은 뭐냐 하면 왜 우리가 이 세상 사람과 갈 길이 섞이지 않고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다른 길로 가고 있느냐를 성도가 살아가면서 우리 속에 십자가의 의미가 한 꺼풀, 두 꺼풀 쌓여가면서 언약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활동합니다, 활발하게.
그게 바로 언약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나는 행복해야 되는데, 그런 게 나오는 게 아니고 언약이 우리 인간을 통해서 우리 성도를 통해서 계속 발췌되면서 절대로 악과 우리가 가는 이 의의 길은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을 애초에 살아 있으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그걸 주지시키고 그걸 체험케 하는 거예요.
이 사이, 아까 틈이죠. 틈 사이에서 비로소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인간의 세계 너머에 있는 외계 세계에서 온 감사와 기쁨, 이걸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은사라 했지요. 은사는 밧줄이죠. 은사=밧줄. 밧줄로 나를 꽁꽁 묶고, 묶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알아서 하라는 게 아니라 그다음부터는 잡아당기는. 언약으로 인하여 우리가 기쁨으로 묶여서 사랑에 묶여서 잡아당겨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의 밧줄로 묶이면 무슨 상실증? 자아상실증. 너무 얼굴이 해맑아요. 화장발 좋아서 해맑은가. 해맑고 이제는 당신 나한테 하지 마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자기 남편보고 처음 뵙겠습니다. 이래야 원한관계가 없어요. 지난여름에 네 한 일을 안다, 그런 식으로 원한관계는 본인만 손해라니까요. ‘누구세요? 참 남편이지.’ 늘 신혼기분이죠. 일방적이지만.
타인과 만남에 부담이 없는 거예요. 왜? 내가 나한테 부담이 없으니까. 내가 내 안에 솜사탕 같이 헛방이니까. 크기는 부풀었는데 한줌도 안 되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음에서 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날아가 버린 존재의 가벼움. 주께서 항상 우리는 텅 비게 만들지요. (흰 걸로 지워보세요.) 이게 바로 희생에 꽁꽁 묶인 거예요. 물로 청소한 희생에 꽁꽁 묶인.
이게 언약에서 어렵다 이 말이죠. 우리가 보기에는 사회적으로 친해지면 안 되느냐 하는데 그건 인간적 생각이고, 좋은 게 좋다고 우리 친하게 지내자. 친하게 지냈다는 것이 나한테 좋은 체험으로 기억으로 남아 있으면 앞으로 우린 관계는 좋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걸 우상으로 봅니다. 갑자기 언약으로 시작했다가 내 행복으로 마감되잖아요. 그러면 마치 내 인간 승리가 돼버려요. ‘역시 내 인간성 좋으니까 남들도 나를 따르는구나.’
인간성 좋은 게 망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꾸 나한테 고맙다는 사람이 내 속에 인생에 엮여있다는 것은 내가 계속 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짐을 져야 되는 바보 같은 짓이에요. 게워내고 비워내야 되는데 저 사람은 나 없이는 못 산다. 그거는 진짜 어리석은 마귀의 짓입니다. 어떤 서른네 살 먹은 아줌마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옛날에 내가 서울에서 예술로 행사하는 그 일을 했는데 이제 그것 다 때려치우고 강원도 고성에 와서 해녀 한다는 거예요.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서울에 사람 만나서 예술적인 행사 진행하는 이벤트하든지 그 일은 이런 이야기에요. 속을 모르는 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는 거예요. 웃고, 언니 하면서 회사 운영하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런데 백날 해봐야 전부 가식이고 연출이고 속을 모르니까 인간과 인간 만남이 힘들다 말이죠. 그런데 왜 강원도 고성에 와서 해녀로 문어 잡는 게 좋으냐? 바다가 속을 다 보여준다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는 이야기냐 하면, 오늘 아침 7:50에 하는 <인간극장: 최전방 해녀, 조단비>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인간극장 아시죠. 노인들 보는 프로. <6시 내고향>하고, <가요무대> 노인들 보는 프로 아닙니까. 바다는 속을 다 보여주니 그게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줌마가 뭘 모르느냐? 그렇게 자기 속은 시원한데 자기 속은 다 들켜야 되잖아요. 자기 속이 들킬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거예요. 누가 너는 어느 편이다, 어느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쪼개주는 그 쪼개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은 어떻게 개입하는가? 창세기 48장 17절, 참 이런 게 어려워요.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야아, 아버지 야곱이 손자들한테 축복을 하는데 오른손은 축복이에요.
‘오른손이 축복이다.’ 이것 언어지요. 언어는 의미 있겠지요. 의미는 성경에 썼잖아요. 함축된 의미입니다. 오른손이 뭐냐 하면 주님의 우편의 자리에 계신 미지의 인물로부터 모든 언어가 쏟아져 나온다는 그 의미를 이렇게 그 시대에 맞추고 함축된 거예요. 오른손이라는 게. 하나님의 오른편이 뭐하는 자리냐? 하나님의 오른편에 미지의, 미지입니다. 아직까지 구약엔 나타나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 지상에선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포착하고 그걸 체포하는, 발로 짓누르는(시편 110:1) 그 작업에 종사하는 분이 미지의 인물이란 말이죠.
아까 요한일서 3장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오는 것은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함이라. 왜? 마귀가 인간의 일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게 오른쪽이에요. 오른손이란 말이죠. 출애굽하고 홍해 건너고 난 뒤에 미리암이 찬양할 때 찬양가사에 있어요. 하나님이 오른손의 능력으로 저 애굽군사를 쳤습니다. **출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오른손이 축복된 자리란 말이죠. 오른쪽이 축복된 자리라면 왼쪽은 뭐냐? 축복일까요, 축복이 아닐까요? 단순히 축복이 아닌 중성적인 중립적인 지역이 아니라 이거는 축복을 받쳐주기 위해서 동원된 축복 따로 있고, 만약에 본인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저주가 되고, 축복을 받쳐주는 보조적이라면 그거는 축복에 종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왼쪽 자리에요. 그러니까 왼쪽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나 상실증에 걸려야 돼요.
여러분,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삭이 복을 누구한테 주려고 했습니까? 맏이한테 주지요. 맏이한테 줄 때 이삭이 놓친 게 있어요. 야곱과 에서가 임신해서 나올 때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먼저 난 자가 나중 된다는 그 계시를 무슨 뜻인지를 그땐 몰랐어요. 먼저 난 것은 끝까지 먼저고, 나중은 끝까지 나중인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먼저 난 자가 나중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삭이 몰랐던 것은 먼저 난 자를 계속 먼저 나게 만들고 둘째는 둘째 되면 일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데 왜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가 뭐겠어요? 왜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요? 빌립보서 2장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 한 몸인 영광에 있었지만 하나님이지만 그걸 버리고, 그다음 어디로 갑니까?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가장 저주받는 몰골 형태인 십자가란 말을 하거든요. 그냥 죽는 게 아니에요. 늙어죽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다음에 복종하는 거예요.
복종의 의미는 높은 곳이 아니고 낮은 곳에 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바로 멜기세덱이 말한 왕+제사장, 왕이 곧 제사장인, 이 제사장이 뭐냐 하면 죽음 속에 자기가 제물이 되는 걸 말하는 거예요. 왕인데 왕이 아닌 희생제물이 되는 데까지 이 두 가지 일을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왕과 제사장 요소가 빠진 것을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이 규정한 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목숨 바친다고 될 수가 없지요. 고난 받고 희생하겠다고 나서봤자 그 결과는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역시 ‘나 잘났다’로 돌아오잖아요. 자기가 목숨 바쳐도 이루지 못한 일을 주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중심이 되면 안 되고 누구 중심? 예수님 중심이 되고, 우리는 그 냄비의 토핑으로 마늘, 파 이런 것으로 토핑으로 가담되는 그 능력이 은사의 능력이지요.
여러분, 은사라 할 때는 내가 빠졌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밧줄만 생각하면 돼요. 믿음, 소망, 사랑 다 은사지요. 근데 믿음, 소망, 사랑도 목표지점에 가야 돼요. 믿음, 소망, 사랑 마지막 목표를 뭐라 합니까?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에서 나와서 사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사랑에서 사랑으로 돌아가려면 누구는 빠져야 돼요? 나는 빠져야 되지요.
그런데 그 본문을 설명하면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우리가 사랑하자, 이렇게 나와요. 이게 얼마나 잘못된 해석인지. 네가 빠지는 게 사랑이에요. 내가 자아가 상실한 것이 아내나 남편한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여보, 오늘부터 당신 사랑할게.” 하면 그 소리 듣고 기뻐할 남편 없어요. “오늘 죽었다. 오늘 죽었다. 오늘 죽었다. 제발 부담 주는 말 하지 마. 그냥 하던 대로 해.” “오늘 당신을 위해서 고등어 굽는다.” “굽지 마. 그냥 구워. 앞에 뭐 붙이지 말고.” 왜? 결국 대가 요구하는 거예요. “백화점 물건 하나 봐났어? 그냥 당신이 없는 채로 다가와.”
이 노래 있어요. <돌려줄 수 없나요>(조경수) 했거든요. 사랑은 돌려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받는 것이 사랑 값을 하는 것이지 받았으니까 돌려주는 것은 그거는 상대를 사랑을 사랑으로 갚아서 지배권을 유지하려는 하나의 정치적 권력수작이에요. 서로 다툴 일 있습니까. ‘네가 나한테 선물을 해줘? 나는 너한테 더 큰 선물해서 나는 너를 잡아먹을 거야’ 하는 식이 된다고요.
이게 호혜정신. 이것 어디 강의했었는데? 이번에 다니엘 할 때 제2강 제국주의에서 왕이 왕다운 것은 백성들에게 베풀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백성들이 왕의 자애로움에 탄복해서 알아서 기게 되는 조직이 바로 인간사회 초반기의 제도의 원칙이었다는 겁니다. ‘우리 목사님은 꼭 목자 같아.’ 이게 뭐예요? 이게 목회자의 수법이에요. 이게 사기꾼이라니까요. 그것도 하다하다 안 되면 힘들어서 나중에 한 이십 년 지나고 난 뒤엔 내려놓지만. 조용한 걸 보니 그냥 넘어가란 이야기네. 교회에 희생하는 것이 아주 고도의 훈련된 수법인 것을 몰랐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손을 어긋맞게 한다고요. 이삭이 그걸 설마 하나님이 내 일에 개입할까? 그냥 내 원하는 대로 해보자. 왜 원했느냐? 맏이가 내가 좋아하는 그걸 해줬어요.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잖아요. 아들이 둘 있는데 내가 싫어하는 고기, 개고기를 사줬다. ‘네가 아버지 취향도 모르고 그동안 살았나? 너 죽었어. 너 한 푼도 없어.’ 그런데 아버지 취향이 영덕 게다. 그런데 때마다 취향 알아서 사줬다. 아버지가, “딱 기다려. 모든 유산 너한테 간다.” 이게 인간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통해서 이걸 바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갖고 있던 질서체제를 두 아들이 계시 역할을 해서 어떻게 했어요? 그걸 중간에 쪼개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개인적인 취향 의미로 해석했던 아버지를 쪼개버린 거예요. 이것은 야곱 본인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야곱이 누굴 좋아했느냐? 요셉을 좋아했어요. 요셉을 특별로 대우했잖아요. 그런데 그 요셉이 어떻게 됩니까? 평균처럼 느껴진 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요셉이 죽었어요. 요셉이 죽었을 때 아버지 야곱이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요셉이 죽었으면 난 더 이상 안 살래. 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그동안 내 대신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죽은 이상은 나는 이 땅에 살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요셉이었지요. 근데 그 요셉이 죽었는데 죽음이라는 그 동네에서 사건의 지평을 넘어서서 블랙홀에서 어떻게 됩니까? 야곱이 있는 이 동네로 국무총리가 되어 금의환향하여 되살아왔지요. 그때 야곱은 뭘 느꼈느냐 하면 내가 요셉을 사랑했던 그것이 두 조각나야 된다는 그러니까 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요셉은 하나님 쪽이지 내 소유가 아니었던 거예요. 내 좋으라고 있던 자식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 좋으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좋으라고 있는 것을 누가 건방지게 좋아했어요? 내가 건방지게 좋아했지요. 그 건방진 나는 누구에 의해서 쪼개져야 돼요? 쪼개질 때 내 안에 뭐가 등장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빙자해서 나만 좋아했던 내 죄가 노출될 때 노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던 겁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런데 이런 복을 나만 누려야 되겠어요? 내 죄가 폭로되는 이 죄를 나만 누려서는 안 되잖아요. 그럼 그게 돈을 주는 상속보다도 나에게 내 인생, 험한 인생, 깨져버린 조각난 내 인생을 어떻게 해요? 상속으로 자식에게 또는 손자에게 물려주는 게 마땅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내가 아니라 쪼개진 나와 처음의 나와의 그 틈새, 차이점을 어긋맞게 축복하면서 표현해주는 거예요.
둘째 이리 와. 첫째 이리 와. 요셉은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가 지금 나이 많아서 노망난 줄 알았어요. 치매 걸려서 둘째, 첫째 못 알아보는 줄 알았어요. 축복 자리에 둘째를 하고, 둘째 자리가 첫째가 가고 어긋맞게 축복한 겁니다. 누가 복이 오느냐가 아니라 어긋맞은 이게 복이에요. 내가 나 되지 않게 해주신 게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하나님께서 철회시키고 상쇄시키고 그걸 규정해내는 그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은사, 사랑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이런 대목이 기억나네요. 자꾸 교회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한다고요. 진정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도와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자기를 사랑한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얻은 자다. 이젠 마음껏 자기를 미워해도 상관없이 되는 이러한 상황을 주님께서 허락해주신 겁니다. 인생, 네 손에 달려있지 않고 내 손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함축이고 응축이죠.
그다음에 아까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야곱이 요셉의 맏이를 둘째로 보내고 둘째를 첫째로 보낸다 하면서 여기서 성립되는 것이 뭐냐 하면 복과 저주는 결코 날카롭게 갈려져야 된다는 거예요. 나눠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그때는 아브람이죠. 아브람을 선택해서, 창세기 12장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사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네가 복의 근원이 된다 했잖아요. 아브람의 이름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은, 말을 여기서 멈추면 되겠는데 인간들끼리는, 뒤에 뭘 붙입니까? 너를 저주하는 자는, 왜 저주라는 부정적 단어가 굳이 여기 들어와야 되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사건의 지평선, 외계지요. 다른 세계에서 오지 아니하면 이 땅에는 진정한 저주가 발생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주가 발생되려면 반드시 저주와 더불어서 인간에 존재하지 않는 복이 같이 병행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럼 지상에는 복이 있다, 없다? 없지요. 복이 없다는 사실을 저주받은 세계에서는 안 믿어요. 왜? 복이 없으면 뭐만 있어요? 저주만 있기 때문에 저주만 있다는 이 세상을 안 믿습니다.
이 세상은 뭐냐? 복과 저주를 지 마음대로 정해요. 그것도 성경말씀을 총동원해서. 그것도 시편 1편을 동원해서. “율법을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누굽니까?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줘요. 언약을 주게 되면 그 접혀져 있는 의미가 나오지요. 처음에는 율법을 묵상하고 율법을 사랑하는 자가 있는 것처럼 돼 있는데 갈수록 율법을 묵상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입하면서 그걸 밝히 드러내십니다.
호세아 보겠습니다. 호세아 7장 6절에서 8절까지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 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빵을 굽기 위해서 불을 피웠는데 지가 뜨거우면 알아서 돌아누워야 되지 않습니까? 불은 불대로, 심판은 심판대로, 저주는 저주대로 활활 타고 있는데 ‘이게 뜨겁다. 이게 불이구나’ 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뭐가? 이 세상이. 저주를 이야기하고 말씀을 이야기해도 아무도 거기에 관심을 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덮여서 그래요. 뭐가 덮여 있느냐? 불로 이미 심판이 덮쳤다. 이게 마태복음 3장 11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불세례라 합니다. 세례란 덮는 거예요. 꼼짝 못하게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세례는 뭐예요? 성령으로 덮어버리는 거죠.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무엇이 저주고, 무엇이 복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어떤 관점입니까? 외계인 관점이에요. 인간의 관점이 아니고 인간에게 넘어온 낯선 분이 전해온 그런 외계인 관점인 복과 저주를 규정하는 것은 성령 받았기 때문에 판단되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을 안 받으면 있는 그 자체가 불바다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불을 싸지르러왔다 했어요. LA 캘리포니아에 산불 난 것은 알지요. 몇 달간 산불 났잖아요. 얼마 전에 일본에서 11일 동안 산불 났는데 못 껐어요. 이제 껐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방화범이에요. 가는 데마다 불 질렀어요. 뭐로? 외계에서 넘어오는 말씀의 의미로서 불을 지르니까 그걸 자기 의미의 확장에 미쳐있는 인간이, 아까 배운 것 해봅시다. 인간은 자기 의미에 미쳐있기 때문에 여기서 나온 게 뭐라고요? 언어죠. 인간이 갖고 있는 언어를 뭐로 그걸 받아들입니까? 성경을 해석해요. 헬라어, 원어 해가면서 성경을 해석하니까 이게 의미가 어디로 가요? 나의 적법성, 나의 정당성으로 모든 게 쏠리게 돼 있어요.
아우구스투스라는 황제가 팔라티노라는 로마 언덕에 신전을 지었는데 아폴론이란 신전을 지었어요. 여러분, 옛날 사람들이 신전을 짓는 이유가 자기 통치 권위의 적법성이죠. ‘내가 하는 행동, 제대로 하는 행동이다.’ 적법성을 위해서 옆에 뭘 두었다? 신을 둔 거예요. 인간이 신을 믿는 이유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의 정당함, 자기의 의로움 때문에 믿는 거예요. 이게 어긋맞은 게 없다고요.
분명히 들으세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생 나의 정당성과 의로움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아보면 이게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안 바뀌어요. 안 바뀌는데 뭐가 나와요? 새로운 요소, 주께서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시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에서 뽑아낼 수 없는 이 저주를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주인공이 뭐로 바뀌었어요? 안 바뀌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미 나를 바뀌었다고 선언해주신 주님이 내 안의 주인공이 되는 것, 이게 성령세례 받아야 가능합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라는 말을 기쁘게 감사함으로 받는 거예요. 이걸 억지로 하면 신자 아닙니다. 요런 멘트가 되면 하나님도 속아 넘어가겠지, ‘주여 저 죄인입니다’ 이런 것 안 통합니다. 이런 요소 소용없고요. 행동 하나하나에 함축된 의미가 펼쳐지면서 왜 나는 숨만 쉬어도 그게 죄가 되는가를 주께서 그렇게 네가 화덕 위에 있다고 언질을 줬건만 우리는 ‘어때서 뭐. 남들이 나를 부러워하던데’ 좀 치니까 나이스 샷, 하면서 벤츠 뒤에 골프채 싣고 돌아다니고 하니까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고, 복층 아파트, 펜트하우스인가요? 살고 하니까 ‘아이고, 부러워 죽겠다’ 하니까 뿌듯하다, 이렇게 되는데 그게 뭐냐? 아브람이었어요.
그런데 아브람에게 이름이 하나 붙지요. 아브라함. 시작은 아브람이었는데 아브라함으로 끝나면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바턴을 누구한테 넘기느냐? 내 대신 죽은 이삭에게 바턴을 넘깁니다. 넘기면 타이밍 맞추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이삭에게 딱 주어져요.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네 씨앗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악은 절대 악으로서 들춰져야 되고, 의인은 주님 때문에 절대적인 의로 구분되는 그 내용이, 다윗 시대의 예언이 바로 시편 58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용하시고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온갖 악역은 우리가 맡게 하시고 그 악을 위해서 대신 값을 치르신 그 주연 역할은 주께서 맡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