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2a 부산강의 : [시편]76(60:9)-껍질 역량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60편 하겠습니다.
시편 60편에 보면, [다윗이 교훈하기 위해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믹담’이란 교훈을 주기 위한 교훈시, 또는 황금시. 그다음에 ‘수산에둣’은 가락을 이야기하는데, 가락에 맞추었다. 수산에둣 그 자체는 ‘증거의 백합화’라는 꽃 있지요, 꽃. 증거하는 백합화.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는 이스라엘 북쪽의 왕들과 전쟁하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라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를 염곡에서 죽였다. 이것은 사무엘하 8장 13, 14절에 보면,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같은 내용이 열왕기상 11장 15절에도 나오는데, “전에(다윗 때에)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장관 요압이 가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장사하고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다고 돼 있지요.
여기 일만 팔천(삼하8:13), 또는 일만 이천이라 돼 있는데 하여튼 다윗이 에돔의 남자를 죽이고 요압을 거기에 파견해서 통치했던 그 이야기에 관해서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이는 이것이 지금 다윗이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이 결론만 보면 다윗이 역시 싸움 하나는 참 잘한다. 하나님이 도와주니까 다윗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지, 라는 생각을 갖게 마련인데 시편 60편 내용을 보게 되면 다윗, 이스라엘이 잠시 안일에 빠진 거예요.
에돔이란 민족은 이스라엘의 밥이다, 라고 안심을 했던 그 안심의 틈을 노려서 에돔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저 북쪽의 민족과 싸운다고 정신이 없었을 때에 그걸 정치적으로 남쪽의 에돔이 이용해서 ‘지금 우릴 칠 여력이 없을 거야. 이때 가서 다시 우리 에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해방시키자. 기회다’라고 했는데 북쪽 치고 그다음에 다시 남쪽에 있는 에돔을 쳤습니다.
에돔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하면 요르단이에요. 페트라라는 유적지가 에돔의 수도입니다. 요르단의 수도가 그 당시 에돔의 수도였어요. 페트라는 유명한 여행지에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보면 수십 번 나온 데에요. 계곡에 왕의 무덤을 돌로 조각해서 한 그 동네인데 그 동네가 에돔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편 60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그러니까 에돔이라는 이 민족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흩어지게 했고, 여기 2절에 보면,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지금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혼내준다고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이스라엘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신 것이라, 라고 돼 있어요. 그때 예상치도 못한 에돔 민족의 침범이 이스라엘 내부를 혼쭐나게 정신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정신 나간 표현을 시편 60편 3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여기는 포도주를 마시고 비척거린다고 표현돼 있는데 이스라엘 전체가 우왕좌왕하는 허우적거리는 그러한 형태를 정신을 못 차리고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자리에서 공격을 당하니까 그냥 몸으로 비유하면 비틀거리게 되는, 급소 맞고 비틀거리는 그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포도주를 마셔서 비척거렸다.
4절에 보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되면 방금 에돔부터 해서 1절에서 4절까지 오게 되면 안일에 빠진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뭐며, 하나님이 누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운영되고 관리되고 통제되는가를 다시 정신 차리게 했던 계기를 에돔 민족의 침입으로 공격으로 새삼스럽게 그걸 정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기를 주시고’는 깃발을 이야기하는데 전쟁할 때 자국의 정체성을 깃발에 새기고 그 깃발을 들고 나가는 거예요. 깃발에는 뭐냐 하면 시편 60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앞장세워서 이런 일들을 일으켰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 전쟁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돌리지 않고 이 깃발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승리로 하겠다고 전쟁에 승리하고 그 점령지에다 깃발을 꽂아버리는 거예요. 그걸 여호와 닛시라고 출애굽기 17장에 나와 있어요.
출애굽기 17장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는 데서 난데없이 외부의 침입이 있었는데 그게 아말렉 민족입니다. 전쟁 준비가 돼 있는 아말렉이 떠돌이 같은 노숙인 같은 그러한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을 갑자기 들이닥쳐 공격을 했지요. 그 공격할 때 아말렉은 강력한 무기가 있었고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무기가 빈약했고, 그 약점을 노리고 아말렉이 쳐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그 전쟁의 끝은 뭐냐? 이스라엘이 이겼어요. 근데 이스라엘이 이긴 게 아니고 여호와가 이긴 걸로 전환하는 겁니다. 그게 여호와 닛시에요. 출애굽기 17장 15절,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그런데 이 승리가 아말렉에 대한 승리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대대로 앞으로도 반복해서 아말렉과의 전쟁을 계속 승리케 하시는 거예요. 왜 아말렉을 붙들고 끝까지 승리케 하시느냐? 하나님과 아말렉의 전쟁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은 이스라엘은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그것이 계속 반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아말렉이 갖고 있던 그런 무기는 이스라엘에는 없었다. 그러면 아말렉에는 무기가 있었다. 그럼 이스라엘은 뭐가 돼요? 무기가 없었다. ‘있음이 없음한테 패배 당했다’ 그런 뜻이에요. 무기가 있는 쪽이 무기가 전혀 없는 쪽으로 패배 당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있음이 없음한테 패배 당하느냐? 그 가운데서 그 틈에서 누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관된 전쟁의 방식이 나오겠지요. 그러니까 아말렉과 하나님의 전쟁의 일반화, 또는 공식은 뭐냐? ‘힘’ 없는 자와 그다음에 힘 가진 자를 붙여서 하나님께선 전쟁을 하게하고, 이 전쟁을 할 때 없는 자들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무기가 뭐 있어야 전쟁을 하지요. 근데 전쟁은 일어났어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우왕좌왕할까요? 어쩔 줄 모르고. 국민의 힘처럼. 뭐 어떻게 막아요, 힘이 없는데.
특히 시편 8편에서는 없는 정도가 어느 정도까지 없느냐 하면, 어른들이 무기 없는 정도가 아니에요. 여기 뭐냐 하면 젖먹이+어린아이, ‘젖먹이’ 0살에서 1년 반, ‘어린아이’ 2살에서 유치원생 여섯 살까지 이 애들로 무슨 전쟁을 합니까? 전쟁을 할 수 없지요. 어른들이야 ‘우리는 무기가 없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없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승리했다, 라고 한다면 뭐가 여기서 안 빠졌어요? 우리는 있는데, 갑자기 말이 어렵지요.
우리, 어른입니다. 이스라엘 어른이에요. 이스라엘 어른이 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그런데 적들은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드디어 붙었다. 전쟁했는데 하나님이 개입해서 누가 이겼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어른들이 이겼다, 라는 결론이 나왔다면 이 결론에서 뭐가 아직도 안 빠지고 있는 거예요? 역시 이스라엘 대표 우리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고 되지요.
그런데 젖먹이와 어린아이를 주께서 시편 8편에서 거론한다는 말은 이 어른에서 더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어른 됨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없다 하지만 뭐는 있어요? 힘을 발휘하고 지혜를 발휘하는 가능성은 여기 함축돼 있잖아요. 들어 있잖아요. 무기는 없지만 지혜는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이런 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젖먹이와 어린아이는 0살이니까 신생, 그냥 없는 데서 막 쪄낸 찐빵, 없는 데서 그냥 생겨버렸어요. 이 정도까지 어른들이 내려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 전쟁의 일반화, 표준은 뭐냐 하면 이겼다가 아니라 이긴 나도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이겼던 나도. 역시 하나님 우리 편이야, 라는 인식 자체가 날아가야 돼요. ‘하나님은 우릴 도와줘.’ 사실은 안 도와줘요. 안 도와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에요. 우리는 너무나 그걸 잊고 삽니다.
창세기 15장에 제물을 아브라함이 쪼개지요. 쪼갠다는 말은 없음을 보자. <춘향전> 가사에 나오잖아요. ‘이리 오너라 앞을 보자.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하잖아요. 뭐 보자? 없음을 보자. 아브라함 너는 없음에서 있음이 돼야 되거든요. 없음, 있음을 아브라함은 인정 못해요. 그래서 아브라함에서 나올 수 없는 아브라함의 대행자가 나와요. 그게 누구냐 하면 이삭입니다. 이삭의 특징이 아브라함의 핵심을 차지해요. 본질을 차지한다고요.
그럼 아브라함은 뭐냐? 아브라함은 껍질이 돼요. 오늘 제목을 미리 정해봤어요. [껍질의 역량] 아브라함은 껍질이 되고 안의 속 실체는 누굽니까? 이삭이에요, 이삭.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받은 언약은 누구한테 인수인계해야 돼요? 이삭에게 인수인계해야 돼요. 이삭을 불러놓고, “내가 하나님께 이러한 언약을 받았거든. 자, 이제 하나님은 네 차례다.”
그냥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이삭을 내 손으로 죽여야 됩니다. 죽일 때 나 있음이죠. 이삭 있음이잖아요. 둘 중에 하나는 없어져야 돼요. ‘있는 내가 있는 너를 내가 없애줄게.’ 없애줌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방법은 결과적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못 받아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구원받는데 구원받는 방법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죠. “어찌할꼬?”
자기 손으로 죽인, 있는 내가 있는 나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는 극단적인 행동은 메시아를 죽이는 방법이에요. 오신 메시아를 없애버리죠. 메시아를 없애버리면 나는 멀쩡하게 있고 있다가 없어진 분 누굽니까? 메시아죠. 그러면 있는 예수님을 죽였을 때의 인간의 행동은 나는 나를 계속 있음으로 보존해야겠다는 그 의지, 강력한 기대 이런 것이 뭉쳐져서 예수님을 없앴잖아요.
그러면 내가 없는 분이 나를 구원한다는 말은 이제는 역전됐지요. 없는 주님이 진정한 있음이고, 내가 있음은 이거는 사라져야 될 일시적 현상이라고 본 겁니다. 나 자신을. 있더라도 나는 진짜 있음을 훼방했던 방해했던 죄인으로서의 있음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도출되는 겁니다. 그 관계에 의해서 바로 그 양쪽을 다 채택하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에요. 한쪽은 없는데 진짜 계시고, 한쪽은 나는 있는데 이건 가짜고. 그 있음과 없음, 가짜와 진짜를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둘 사이를 매개하는 능력, 이게 바로 구원의 능력, 피의 관계, 십자가의 능력이죠.
이번 수련회 고린도전서 하는데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누가 인간의 지혜로 어떻게 아느냐?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는 없음에서 나온 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있는 나를 있게 하는 그 지혜가 부정당하지 않고 계속 쏟아져 나오는 식으로 대상, 바깥에 있는 대상, 그게 해가 되던 달이 되던 예수님이 되던 하나님이 되던 삼위일체가 되던 성경책이 되던 성경문자가 되던 일단 내가 있음을 전제로 해서 그걸 해석해 나가기 때문에 그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쪼개야 돼요. 지금 쪼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제물을 쪼개요. 쪼개면 뭡니까? 우릴 쪼개면 없지요. “아브라함아, 네 눈에 보이는 제물 쪼갰지?” “예, 쪼갰습니다.” “안에 뭐가 있어?” 없지요. 마주했으니까요. 쪼개면 한 개가 두 부분이 되지요. 두 부분이 되면 빈 공간이 생기잖아요. 없지요. 없는 데서 나온다니까요.
어제 주일 낮 설교하면서 제가 여성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어요. 여성은 진공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은 없어요. 후손은 자식이란 뜻이잖아요. 근데 여자가 자식을 낳았을 때는 반드시 무엇이 필수적으로 개입해야 됩니까? 아담이 개입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개입된 남자가 주도권을 쥐게 되지요. 없는데 아담으로 말미암아 자식이 생겼으니까.
그러면 생긴 육적인 자식은 쪽쪽 뭐가 돼요? 여자의 후손은 안 돼요. 그냥 남자의 후손되는데 그 남자가 흙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저주받은 자에요. 저주받은 후손만 우리 육체로 계속 생산되는 겁니다. 이걸 번식이라 하는데 계속 번식되는 거예요. 이건 인간뿐만 아니라 코끼리도 마찬가지고 사슴도 마찬가지고 독수리도 마찬가지에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보이는 피조물들은 지금 썩어가고 있다. 썩은 것들이 번식이란 방식으로 물과 땅과 해, 공중을 채우고 있습니다. 처음 창조한 것들의 허접함, 허무함. 마치 이렇게 보면 돼요. 집에 커튼이라든지 벽장식 태피스트리(다채로운 색실로 무늬를 짜 넣은 직물), 거기에 새와 땅의 공룡이든 코끼리든 짐승, 물고기 그려놨습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라이터로 불붙으면 홀라당 다 타겠지요.
홍수 때 물 동원했지요. 그리고 세상이 멸망할 때 불 동원했지요. 물과 불과 그리고 현재 있는 모든 우주, 이것이 동일한 재질입니다. 재질이 같아요. 자연에 속한 재질입니다. 자연에 속한 재질이니까 불붙이면 어떻게 됩니까? 다 타요. 베드로후서 3장에. 옛날엔 물로서. 물의 특징은 안 탔어요. 덮였지요. 불의 특징은 홀라당 다 타버렸어요. 덮였다는 건 존재하지만 덮여있는 것이죠.
불로 태우는 것은 그걸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함축한 것이 뭐냐? 제단이에요. 불로 제물을 태우는 그 제단의 기능이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본격화된 것이 모세 제사법, 그것을 완성한 것이 히브리서에 보면 바로 새 언약에서 완성이 됩니다. 제단에서 태우듯이 다 태우는 거예요. 방염처리 되지 않는 커튼 같은 것 밑에서 불붙이면 어떻게 됩니까?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에 불꽃이 위로 올라가지요.
그렇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온 우주가 불에 타버린다 했어요.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타듯이. 그러니까 인간은 불쏘시개인 거예요. 이유가 뭐냐? 재질이 같아요. 그걸 과학적으로 단백질과 탄수화물과 지방질로 돼 있다 하는 거예요. 세포는 온도 500도 이상을 견딜 수가 없어요. 인간의 세포는. 머리카락 같은 것, 단백질 탈 때 아주 고약한 냄새 나지요. 옛날 촛불 켤 때 여러분 많이 맡아봤잖아요. 졸다가 머리카락, 뭔가 이상한 냄새. 그거 아미노산 타는 냄새입니다. 단백질의 구성요소지요.
그러니까 이런 긴긴 말을 한 마디로 하면 뭐라 합니까? 다 같이 따라 해보세요. ‘껍질’ 본질은 껍질뿐이에요. 본질은 누가 채웁니까? 언약이 채우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가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우리끼린 알지만, 우리끼리란 말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 않느냐? 세상 사람들은 이 껍질에 뭐가 채우느냐 하면 악귀가 채워져요. 악마의 영이 채워집니다.
성령이 아니면 악마의 영이에요. 악마의 영이라 해서 게거품 물고 이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 바리새인이 마귀의 자식, 뱀의 자식이잖아요.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저거 아비를 뭐랍니까? 악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미친 사람들입니까, 바리새인이? 사두개인이 미친 사람이에요? 서기관들이 미친 사람이고, 장로들이 미친 사람이에요? 멀쩡해요.
요새로 말하면 사법기관들입니다, 그게. 엘리트에요, 고시 출신들. 그게 미쳤어요, 고신 출신들이? 대법원장이 미쳤어요, 그게?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막 나온다. 그 사람들 검사, 판사가 미친 사람들입니까? 따지는 사람이고 논리적이고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에요. 판결문 보세요. 진리는 하나도 안 들어있어요. 판결문에는 논리만 들어있어요. 진리는 없어요. 그게 무슨 진리에요. 법 구절에 나오는, 법의 구절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연결됩니다.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공직선거법 위반 피고인 이재명의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보냈잖아요. 그때 민주당은 뭐라 합니까? ‘이건 정치적 의도가 들어있다. 대법원장 탄핵하라.’ 이래 나오잖아요. 그럼 뭡니까? 대법원장은 껍데기죠. 안에 뭐가 들어있다? 정치적 의도가 들어있다. 껍데기 안에 뭐가 들어있단 말입니까? 악귀가 들어있단 뜻이에요.
이 악귀를 방금 악귀라고 이야기했지만 이게 뱀의 자손이 된 거예요. 가인처럼 가인의 후예처럼 뱀의 자식이 된 거예요. 악귀를 보통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특히 철학에선 모든 학문 교육이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악귀 속엔 의지가 들어있어요. 의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 의지, 또 하나는 부정적 의지가 있어요. 부정적 의지는 쇼펜하우어란 사람이 주장한 거예요. 여기서 나온 게 프로이드란 정신과가 나온 거예요. ‘인간에 의지가 있다는 것이 정신병이다.’
인간은 왜 불행하고 행복하지 못하는가? 이 의지가 난리쳐서 그렇다는. 도대체 쉽게 말해서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어라. 이걸 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그다음에 뭐냐 하면 나의 욕망을 보우하사, 내 껍데기 안에 나의 욕망이 차지해서 주인행세해서 나로 하여금 네가 어떤 경우라고 너를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나를 이렇게 들쑤시니까 나는 어떤 순간에도 행복은 모르고, 나는 어떤 순간에도 정신병 아닌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쇼펜하우어에요. 이걸 프로이드가 그대로 인수받은 거죠.
이거는 고치지를 못한다. 왜? 태어나면서부터 그러니까. 이건 인간뿐만 아니고 모든 자연물이 다 그렇다. 이성적? 말도 안 돼, 무슨 이성적. 논리적? 그건 핑계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늘 폭발하는 욕망이 내부에 분화구처럼 또는 라면 물이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만약에 딴 데 관심두면 뭐가 가만 안 있어요? 그걸 뚜껑 열린다 하죠. 인간은 어느 공간이든 어느 자리든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집에서 잠을 자든 꿈을 꾸든 이 욕망이 항상 나란 껍데기를 들썩들썩하게 만드는 거예요.
어느 순간도 계속해서, 여기서 쇼펜하우어에서 다음에 프로이드 나오거든요. 내 육체적 욕구와 내 쾌락을 제발 네가 나서서 좀 그때그때마다 주유소에서 기름 채우듯이 내 욕구가 메마르지 않도록 늘 쾌락을 느끼도록 나를 충동질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회는 뭡니까? 학교는 뭐예요? 가정은 뭡니까? 이걸 밟는 거예요. 밟을 때 뭐로 밟는가? 언어, 명령과 지시로 이걸 밟아요.
에를 들면 성악가들이 발표할 때 무슨 노래 부릅니까? 이태리 오페라 부르고 아름다운 선율 부르지요. 그러면 술 먹고 놀 때 노래방에서 뭘 불러요? 트롯 부르지요. 얼마나 참았겠습니까, 얼마나 참았어요. 집에서 살림할 때 정숙하게 살림을 하지요. 강원도에서 동창회 모일 때 뭐합니까? 해방이다 하고 해방감에 살지요. 뚜껑이 열릴 때 해방감이잖아요. 가끔 강원도에 갈 필요가 있다 이 말이죠. 그걸 무슨 힘? ‘강원도의 힘’이라는.
이걸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하니까 니체는, ‘아니야. 이거는 긍정적 힘이야. 모든 인간의 의지는 윤리, 도덕 같은 것 우습게 여기고 그걸 벗어나야 돼.’ 니체의 이 긍정적 의욕을 그대로 실행한 자들이 누구냐? 중, 승려입니다. 이게 화엄경에 들어있어요. ‘모든 것은 인간의 관계뿐이다. 의지를 압박하고 핍박하지 마라. 네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해라.’ 왜? 그게 부처니까.
그래서 사월초팔일에 가면 고급 승려들끼리 만나면 뭡니까? ‘성불하세요’ 이거는 밑에 하수들, 초자 불자들에게 하는 거고, 높은 데는 ‘오늘도 부처로 사세요’에요. ‘부처가 되세요’가 아니라 ‘이미 당신은 부처입니다. 오직 긍정적 의지로 충만한 존재이십니다.’ 그럼 이러한 긍정적 마인드, 의욕은 어디서 수용하겠어요? 바로 대기업 신입사원 교육하는데 이 사상이 도입되겠지요. ‘긍정만이 우리 기업을 살린다. 안 그러면 퇴직해라. 우린 오직 하면 된다, 파이팅!’ 구호 외치면서 긍정적 마인드로 세상을 좋게 보면 세상에 안 되는 게 없다는 이게 바로 니체의 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쇼펜하우어는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너무 부정적이다. 세상을 볼 때는 틀렸다, 맞다 보다도 긍정적으로 볼 것이냐, 부정적으로 볼 것이냐 그것으로 네 운명이 달라진다. 그래서 니체가 한 것은 무슨 사상이라 합니까? 초인사상. ‘네 속에 너보다 능가하는 힘이 들어있는데 그 힘이 만들어내는 너의 이상적인 모습을 너는 사모하라. 신은 죽었다. 신은 어디 있느냐? 내가 곧 신이다.’
이런 사상이 현재 불교부터해서 모든 유튜브에 있으니까 요새 젊은이들 교회를 안 나오지요. 왜냐하면 고개 숙일 대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내가 주인인데 뭐. 아빠, 엄마 말 안 들어요. 내가 주인이에요.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야.’ 결혼했거든 애 낳아라. 안 낳습니다. 왜? 그 결정은 더 이상 외부의 결정 말고 아까 내 기분대로 사는 거예요. ‘나 개 키울래. 아기 대신 개 키울래.’
그래서 요즘 애들은 뭐하고 노느냐 하면 티비도 안 보고 챗GPT하고 놀아요. 챗GPT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하고 있으니까. 어떤 지시도 나쁜 지시는 없다. 나쁜 결혼 있어요, 없어요? 나쁜 결혼은 없다는 거예요. 나쁜 지시가 어디 있어. 다만 내가 하고 싶냐, 안 하고 싶냐 그 결정을 내가 내리면 되니까. 이게 뭐냐? 껍데기 속에 있는 무엇의 모습이다? 악마의 모습이다.
고개 숙일 대상이 없는 거예요. 항상 고개 들고 저쪽은 부자다, 난 돈 없다. 그래도 기죽을 필요 없다. 나한테는 고양이가 있으니까. 고양이는 자기 말 잘 들으니까. 내 부하가 있으니까. 타인은 어떤 사람? 타인은 나의 이용대상. ‘어떤 누구 앞에서도 나의 주인 됨을 포기하지 말라.’ 이게 니체의 가르침이에요.
니체는 어떻게 알았느냐? 어떻게 알기는 인간 자체가 마귀 자식이니까 잠복돼 있다가 니체가 그걸 발표하기 전에 장애되는 게 뭡니까? 기독교, 그 사람이 신학교 출신이거든요. 기독교, 이걸 모두 다 제거해버리면 남는 건 뭐냐? 드디어 만세, 하고 그동안 굴레 갇힌 악마의 의지가 만세를 부르면서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 방금 니체 이야기와 오늘 시편 60편과 무슨 관계있는가? 바로 깃발. 깃발의 존재, 여호와 닛시. 초반에 뭐라 했느냐 하면, 시편 60편 2절 누가 읽어보세요.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갈라지게 하죠. 이스라엘을 갈라지게 했을 때 이스라엘은 당황하지요. ‘우린 이래서는 안 돼.’ 주님께서 ‘왜 그래선 안 되는데?’ ‘우린 한 나라로 갈라지면 안 돼.’ ‘왜 갈라지면 안 되는데?’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지금 누굴 믿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도와준 하나님이 좋은 분이지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뭘 믿어요? 우리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는 것, 약속의 땅에 살고 있다는 자기 자신을 신봉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일을 계속, 구약이 끝이 아니잖아요. 신약까지 밀고나가려면 구약의 이런 경우를 의도적으로 어떻게 해요? 발생시켜야 되겠지요.
발생시킬 때 주께서 준비된 민족이 있습니다. 민족이 9절,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지요? ‘에돔’ 나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에돔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을 항상 견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야곱만 태어나도 되는데 창세기 25장에 보면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습니다. 마치 사라가 아기를 못 낳듯이. 그리고 야곱의 두 아내 레아도 못 낳고 라헬도 아기를 못 낳아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쪼갠 상태에서 출발점이 항상 없는 데서 나와야 되기 때문에. 있는 데서 자식이 나오면 안 돼요. 없는 데서 계시가 나와야 돼요. 약속이 나오고 언약이 나와야 돼요. 언약이 내 존재보다 앞서기 때문에.
그걸 에베소서 1장에선 뭡니까? 우리 성도의 존재는, 존재가 있고 구원하기 위해서 계시를 주는 게 아니고 창세전부터 우리의 존재를 대신 한 우리보다 앞선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에요. 창세전에 우리는 없었고 예수님과 아버지만 계셨잖아요. 아버지와 아들만 있을 때 여기서 성립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선택이 성립하는 거예요.
언제부터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을 때. 그걸 뭐라고요? 만들기 전에 창세전에 선택이 먼저 있었고 거기서 로마서 9장에 의하면 야곱은 사랑한다. 사랑의 의미는 짝이 없으면 의미 없어요. 미움이 있어줘야 해요. 야곱은 사랑했고 그다음에 ( )는 미워했다. 괄호에 누가 들어갑니까? ‘에서’가 들어가죠. 에돔이 들어가는 거예요. 에서의 후손이 에돔입니다. 야곱의 후손은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고.
창세전의 사랑을 계속해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창세전의 미움이라는 것이 실제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 나오는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나란히 평행선 되는 두 노선이 계속해서 같이 가줘야 되는 겁니다. 이 점이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거예요. 여러분이 강의 들으면 제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어려운 축에 드는 겁니다. 그 어려운 게 어떻게 어려운지 제가 문제를 내면서 보여주겠습니다.
‘안 돼!’ 이 말과 ‘지금 안 돼!’ 이 차이점을 여러분 딱 아시겠지요. 아이가 엄마한테 “엄마, 휴대폰 사줘.” “안 돼!” 이거는 뭔 뜻이냐 하면 ‘영원히 안 돼.’ ‘네 나이 구십이 되도 휴대폰 안 사줄 거야.’ 구십이 되려면 엄마가 백 살 넘어야 되잖아요. ‘네가 팔십이 되도 휴대폰 안 사줄 거야. 안 돼.’ 끝났어, 이거죠. ‘지금 안 돼’는 뭡니까? ‘지금은 안 돼. 나중은 몰라.’ 지금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영원히 안 된다는 이거는 시간 초월이죠. 시간 초월의 요소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 시편 같은 경우에 언약, 하나님의 계시 안에 대상자 되는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적 영원적 요소가 들어있어요. 근데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인간들은 이런 영원한 요소가 없어요. 시간 안에서 시간의 굴레 안에서 ‘지금 안 돼’가 되는 거예요. 지금 안 되니까 그들은 뭐냐 하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거예요. 뭐가? 지금은 안 되니까 미확정이죠. 시간 속에 있음의 특징이 미확정이에요.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당신 구원받았어요’ 하면 정답은 뭐냐 하면, ‘지금 아니래. 그냥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예수님 십자가 피 믿고 하면 혹시나 될 수도 있어’ 이게 인간들의 미확정이에요. 지금 안 되면 시간 속이죠. 시간 속에 있다는 말은 시간은 있고, 시간 속에서 인간은 태어났다가 성장했다가 죽는다는 것의 반복성을 보여주죠. 시간 속은 뭘 보여준다? 반복성, 계속해서 반복하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 속에서 어떤 인간이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이 구원은 뭐냐 하면 반복적인 불확정성, 또는 미확정성이에요. 자, 예수님이 재림한다. 지금? ‘지금은 재림 아니야. 재림은 기다려야 돼. 버텨야 돼.’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재림을 기다리면 구원받습니까? 재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재림 스케줄, 날짜 계산하는 사람도 한두 교파가 아니에요.
진주를 찾아라. 주님의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붙어라. 인도와 파키스탄, 드디어 제3차 대전 벌어지게 되면 여기에 자극을 받은 북쪽의 러시아가 어디를 친다? 북쪽의 러시아가 이란을 밀어붙이고 이란은 누굴 친다? 성전이 있는 감람산이 있는 이스라엘을 밀어붙이면 그때부터 칠년 환란에 들어간다. 드디어 우리가 계산한 계산대로 딱딱 들어맞는다. 이때가 회개할 때다. 자, 회개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스케줄 계산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 읽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원인이 뭐냐? 항상 자신을 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있는 내가 있는 나를 천국으로 올려 보내기 위해서 말씀을 덧붙이는 방식이에요. 내가 발사체가 되는 인식이죠. 지기 스스로 심지에 불을 붙여서 천국으로 우주로 발사시키려 하는 거예요. 나인, 에잇, 세븐…, 발사하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사울 때 이 짓한 사람이에요. 점진적인 증진이 드디어 나를 내가 소원하는 천국에 이른다. 그걸 유대교를 통해서 철저하게 했던 거예요. 자기 아이디어 아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내려온 성경해석이 있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뭘 배웠겠어요? 인간은 어떻게 하면 이 더러운 세상에서 깨끗한 나라로 정결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성경말씀 펴놓고 문자적으로 언어분석 해가면서 한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안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시간 속에서 내가 있음이 뭐로 바뀌어야 되고? 없음으로 되고 나는 죽음이 뭐로 바뀌어야 된다? 죽음에서 그다음에 살아나는 이게 로마서 4장에 나오는 신앙의 토대가 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죽은 데서. 나는 없는 자, 나는 죽은 자. 이게 기본이라는 거예요.
있는데 이걸 어떻게 없어야 되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죽었다고 하느냐? 여기서 사도 바울은 무슨 사상, 무슨 사상이 아니지 신기한 무슨 말이냐 하면, 대신 또는 대체인물, 이걸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바로 구약의 모세 제사법에서 속죄제물에서 가져와요. 사람을 잡아요, 양을 잡습니까? 아브라함이 양을 잡았지요. 아브라함은 물론 이삭을 잡았지만. 이삭을 잡을 때 대체인물로 수풀 속에서 양이 오지요.
대체하고 대신함으로써 현재 있는 것과 대신한 이 인물 사이에 언약적으로 이음새를 놓으면 이분이 죽었을 때에 동시에 동시성인데, 이분이 죽었을 때 나도 죽었고, 이분이 살았을 때 나는 살았다가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시간적으로 아직 남아있다는 게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시간 밖에서 이미 성립돼야 되고 시간 밖에 가면 창세전의 시간이 작용되지요. 작동하지요. 시간을 만들기 전에 있었던 언약적 관계로서 이미 확정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우리에겐 뭐가 있습니까? 육신이 있지요. 눈에 보이는 육신은 아까 껍질이라고 했지요. 이 껍질에서는 바로 예수님이 겪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겪을 필요도 없는 것을 시간 속에서 다 겪었잖아요. 이제는 그 예수님의 남은 고난이 우리의 육신 속에 껍질 속에 있는데 우리의 껍질은 바로 우리 속에 뭐도 있다? 마귀, 귀신들이 거기에 우리의 껍질을 쥐고 있지요.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쥐고 있는 정체를 밝히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던 주님의 계시 완성이 어떤 내용으로 펼쳐지느냐를 하기 위한 이용물로 우린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10분 쉽시다.
■20250512b 부산강의 : [시편]76(60:9)-껍질 역량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우리가 뜻을 조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영적 세계의 접근 불가한 요소가 있다.’ 육신이란 걸 인하여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도 영적 세계, 주님 세계에 못 가는 것은 우리 껍질의 역량이 있기 때문. 역량이란 힘이죠. 첫 번째는 악마고, 두 번째는 주님이란 말이죠. 주님께서 이 땅에 죄 있는 육신, 껍질로 오셔서 악마를 이기고 주님 쪽으로 갔잖아요. 이럴 때 인간은 악마에 속한, 그러니까 육신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 나라로 갈 수 없습니다. 접근 불가한, 접근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주님 나라에 가있는 사람은 성도, 성령을 받아서 주님 나라에 가있는 사람은 우리의 육신으로 뭘 해요? 육신 가지고 접근 불가한 것만 계속 반복해서 보여주면 돼요. 굉장히 이게 가볍고 신나는 일입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처럼. 스데반 집사가 만약에 어떤 영웅 영화처럼 돌 날아올 때 막아버리면 안 돼요. 그냥 돌에 맞아야 돼요. 그 돌 던진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거봐. 네가 백날 예수 믿어봐라. 네가 아무것도 아니잖아’라는 것을 보여줘야 돼요.
왜냐하면 내 힘으로 구원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줘야 되기 때문에. 설사 기적적으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몸이 산다할지라도 내 속에 있는 내 육신의 일은 그대로 그것을 다음에 또 발휘할 수 있는 육신이 아닌 것을 보여줘야 돼요. 말이 어렵다만 베드로 같은 경우에 물 위를 걸었잖아요. 그럼 베드로가 물만 보면 반갑습니까? ‘또 그래야지’ 이렇습니까? 심지어 물 위를 걷는 주님만 바라보고 걸었거든요. 태극기만 바라본 거예요. 자기 안 보고.
바라봤는데 자길 본 순간 어떻습니까? 퐁당 물에 빠졌잖아요. 근데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육신이 있는 한 맨날 물에 이 세상에, 이 세속에 퐁당퐁당 빠지는 일을 반복하는데 성도는 그걸 즐겁게 한다는 것이고 불신자는 거기서 위기를 느낀다는 거예요. ‘난 끝났어, 끝났어. 안 돼. 오십육 년 동안 난 기도원에서 살았어. 끝났어.’ 56년 동안 기도원에 살면서 천국 가려고 기도하다가 그다음에 치매 3급 받아버렸네. 이제는 예수님이고 뭐고 다 몰라. 이젠 내가 뭘 모르는 것도 몰라.
앞으로 내가 치매 걸려서 예수님을 부정한다할지라도 그건 원래 내 속에 있는 악마적 요소가 치매현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것마저도 누가 하신 것이다? 주께서 하신 것이라고 치매 걸리기 전에 이미 정리가 돼야 되겠죠. 또 정리된 지식을 내가 쥐고 있어봐야 소용없는 겁니다. 그거는 바로 육신의 생산 이전에 언약의 차별적 적용이 우선된 겁니다. 내 육신이 이 땅에 태어날 때 어느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 언약이 마중을 나왔잖아요.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가 마중을 나왔다고요.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그거는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고 이방민족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잖아요, 라고 여러분들의 반대하신다면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으로 섞어져 있고 뭉쳐져 있기 때문에 이 언약이 이스라엘 멸망 이후에서는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이 하나의 언약의 그릇이라면 그릇이 깨졌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좋아요.
여러분 옛날 목욕탕에서 플라스틱 물바가지 전에 일본식 물통 알지요. 일본식 물통 뭡니까? 나무로 만든 것, 나무쪽을 대나무처럼 연결된 것 있지요. 이게 쪼개졌다고 해봅시다. 썩어서 쪼개졌다면 물이 어떻게 돼요? 플라스틱은 이런 표현을 못하느냐 하면 플라스틱은 안 깨져. 옛날 일본식 물통은 쪼개지면 물이 다 흩어지겠지요.
이게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에 담겼던 언약이 흩어지면 뭐가 돼요? 바로 이방나라의 마지막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쪼개지길 잘했지요. 이스라엘이 쪼개지지 아니하면 부셔지지 않으면 우리 단군의 자손은 구원이 없어요. 본 자손이 쪼개져야 본 자손이 아닌 개 같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로마서 11장에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언약중심으로 시편 60편도 이스라엘에 관한 거예요.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에돔과 연계돼 있다는 겁니다. 에돔과 연계돼 있어서 뭘 모르느냐 하면 야곱에는 있는데 에돔에겐 없는 것, 또는 야곱에겐 있는데 에서에겐 없는 것 그것을 같이 겹쳐서 하나님께서는 만남을 주선하면서 계시로 이어진 겁니다.
자, 그러면 방금 이야기 끄집어냈잖아요. 야곱에는 있는데 에서에겐 없는 그게 뭘까? 여러분 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사야 63장 1절,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가 왜 에돔에서 나오죠? 이스라엘에서 나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이게 왜 에돔에서 나오지요?
자, 뜸 들일 것 없이 야곱과 에서의 차이는 야곱은 자신을 껍질로 여깁니다. 껍질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야곱의 이름이 바뀌어요. 뭐로? ‘이스라엘’로 바뀌어요. 야곱은 껍질이었고 육신이었고, 그 안에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야곱 안에 침투한 거죠. 그것도 밤중에. 그냥 침투한 게 아니고 대판 둘이 싸웠어요.
야곱은 낮의 존재에요. 낮의 존재라 하는 것은 이미 창조된 상태의 존재에요. 밤이라 하는 것은, ‘낮이 되고 밤이 되니 첫째 날이라’ 해서 밤은 아직 창조가 없는, 창조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밤이라는 장벽으로 칸막이를 한 거예요. 일본식 물통처럼, 대나무인지 각목인지 둘러서 하여튼 칸막이 있잖아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시간에 뭘 만들었습니까? 칸막이를 해놓고 칸막이 뭐냐 하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 이런 식으로 칸막이를 쳐놨다고요.
밤의 뜻은 뭐냐 하면 아무것도 없음, 깜깜한 아무것도 없음, 그다음 날에 대해서 기존에 만든 것이 미리 거기서 예상할 수 없음이에요. 야곱의 인생을 야곱이 예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 인생의 스케줄이 내가 아니에요. 에서와의 차이점이 뭐냐? 에서는 자기가 껍질이 아니에요. 속부터 끝까지 전부 다 뭐냐? 꽉 내 것으로 채워요.
어제 낮 설교한 것 다시 한 번 약간 해보면, 기억이나 추억은 누가 생산한 겁니까? 이건 자아가 생산한 거거든요. 자아가 생산한 기억과 추억이 되면서 이게 현재 나의 본 내용물이 돼버려요. 이 기억이란 게. 자아란 사실은 정확하게 ‘자아의식’을 말합니다. 자아는 없어요. 다만 의식만 있을 뿐인데 자아의식의 본 내용은 지난 날 추억을 기억하는 거예요. 내일 되면 오늘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자아의식의 구성요소가 될 겁니다. 채워져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나한테는 바로 나로 내 것으로 인하여 꽉 차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을 누가 욕한다든지 내 차에 손대면 기분 나쁜 이유가, 나는 과거 것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배신이란 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네가 그럴 줄 몰랐다는 거예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제목에 이런 게 있어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년) 그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그때는 맞다고 하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맞지 않고 틀렸다는 것은 지금에 와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서는 항상 지금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재해석하면서 여기서 자아를 정립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나를 나답게 정립하는 것이 사는 목적입니다. ‘내가 이 정도? 아니야. 저 정도? 내가 더? 나 괜찮아?’ 정립하는 거예요. 정립할 때 바로 나를 인정해주는 타인들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지런히 매일같이 남들은 나를 어떻게 평하고, 어떻게 나쁘게 보고 좋게 보는지 맨날 그것만 살피면서 거기에 온통 신경을 다 쓰는 거예요. 자기 욕하는 사람과는 잘 안 놀아요. 강원도까지 안 갑니다. 친한 사람과만 간다고. 왜? 나를 인정해주니까요.
보통 어릴 때 엄마와 헤어진 아들이 이러잖아요. ‘나는 이제 엄마와 의절합니다. 아빠 고생할 때 엄만 뭐 했다고 집 나갔잖아.’ 이러한 신화나 그런 드라마 많이 있잖아요. <속풀이쇼 동치미>에도 나오고, 하여튼 <사랑과 전쟁>에도 많이 나온다고요. 낳아주면 뭐 하노. 내 추억 속에 들어와야지. ‘당신에 대한 추억은 나한테 남아있지 않습니다.’
‘당신과 관계있어도 내 속에 당신은 없는 존재입니다. 당신이 나 좋다 해놓고 당신이 날 차고 갔잖아.’ 이제 와서 문밖에서 울면서 같이 옛날 화장할 때 그 여자 어떤 여자? 문밖의 여자지요. 네게 줄 내 사랑은 없다. 박강성이 불렀던 노래 아닙니까. <문밖에 있는 그대> 네게 줄 사랑이 남아있지 않다는 거예요.
아까 한 것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해봅시다. ‘안 돼’하고 ‘지금 안 돼.’ ‘지금 우리 다시 사귀면 안 될까?’ ‘안 돼.’ 근데 다시 사귀자는 것은 다 지나간 것 새로 시작하자. 그때는 안 됐지만 지금은 될 수 있잖아. 이것은 바로 뭐냐? 자신이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일체 못 받아들이는 게 뭐다? 에서에요. 아버지가 전에 날 좋아했잖아. 아버지는 내가 만든 음식을 되게 좋아했고, 아버지가 나에게 나중에 모든 재산을 몽땅 다 상속할 터이니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사냥해서 얻으라고 나한테 지시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내게 줄 복은 남아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대사 중에 하나입니다. ‘내게 줄 복이 있습니까? 지금은 안 되지만 혹시 다음에라도 되겠습니까?’ 할 때 주님께선 뭡니까? ‘안 돼’ 하지요. 왜냐하면 이거는 나 같으면 너한테 복을 주겠는데 우리 다시 하자. 이거는 게임 자체가 위반했기 때문에 원천무효, 게임 다시 하자, 이렇게 되겠는데 이것은 내 인생에 누가 개입했단 말이에요? 언약의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이거는 내가 손댈 입장이 못 된다. 나도 당했어. 나도 하나님께 당했다고. 내가 너 좋아하는데 복은 거짓말한 네 동생한테 가는 거야.
그때 야곱은 아버지 것을 뺏기 위해서 엄마 공조해서 뭘 했습니까? 거짓말했지요. 인간사회에서 거짓말은 뭡니까? 이게 뭐냐 하면 위반이죠. 하나님께서 이미 더러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천국 가는 겁니까? 위반에 대해서 위반으로 나선 거죠.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잡혔지요.
그때 바리새인들은 뭐라 합니까? 이거는 신명기 법 위반이라 하는 거예요. 주님의 구원하는 방식은 위반한 건 맞는데 그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위반에 대해서 위반하신 분이 오시는 거예요. 법을 새로 재편성해버리는 거예요. 율법으로 말고 율법 외에 한 의로 구원한다는 그것은 바로 육신으론 접근 불가에요. 인간으로서는 자기를 챙기면 접근 불가에요. 에서는 그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오늘 시편 보겠습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이래 돼 있다 이 말이에요.
목욕탕이란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곳이고, 모독하는 거죠. “에돔은 내 신을 던지리라”는 내 구두닦이나 하란 이런 뜻이고, 블레셋이 나를 위해 외친다는 말은, 바로 정복해서 블레셋이 주도권이 빼앗겼다는 거예요. 요새 가자지역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세겜, 므낫세, 길르앗 전부 다 요단강을 중간으로 해서 세겜은 요단강 바로 근접해 있는 서쪽이고 나머지는 동쪽이고 그래요. 에브라임은 서쪽이고 그렇지요. 블레셋도 마찬가지에요.
여기 나오는 유다, 에돔, 블레셋, 길르앗, 므낫세, 속곳 이 지명들이 다 껍질이에요. 약속의 땅이 땅이잖아요. 땅에 대해서 인간은 그걸 비현실로 보지 않습니다. 왜? 땅이 없으면 못 산다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 전세방이라도 없으면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 분명한 명확한 사실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우리는 아파트에 사느냐, 전세로 사느냐, 월세로 사느냐, 뭘 빌라에 사는지 묻지 않고 예수 안에 산다고 했어요. 아파트나 빌라가 문제 된다, 안 된다? 네 신분에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뜻이에요. 길바닥에 나 앉는다 해도 예수 안이라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는 길바닥에 죽었지만 예수 안이라는 신분은 변함이 없지요.
육신으로 접근 불가한 그 이야기를 누가 이야기해요? 성경은 이야기한다고요. 그래야 껍질은 알아듣고 껍질이 아닌 자는 이 성경세계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나는 내가 그동안 집약한 것, 축적된 것으로 살겠다고 교회 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말씀세계에 들어올 수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럼 여기 유다는 뭐냐? 유다도 껍질이에요. 이스라엘도 껍질입니다. 껍질이란 건 뭐냐? 다윗입니다. 인간을 매개로 해서 계시가 전달될 때 선택된 요 다윗, 다윗이 육신이잖아요. 그런데 그 다윗을 특별하게 다루시는 거예요. 이것을 무슨 언약? 다윗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모세를 특별하게 다뤄요. 자, 사울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새 언약에 속했지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 받은 사람이다. 맞는 이야기인데 온전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모든 성도가 예수 안에서 사도 바울 같은 겁니다.
여러분 귀찮게 해드려서 미안하지만 사도행전 19장 15절 누가 읽어보세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지금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지요? 영에 속한 악귀가 인간인 사도 바울보고 이야기하죠. 보통 인간은 누구와 이야기하는 게 보통입니까? 인간은 인간의 말을 듣고 인간과 소통하는 게 인간인데 악귀가 왜 끼어듭니까? 악귀가 누굴 소개해요? 정답을 이야기하죠.
사도 바울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다? 예수도 알고, 그다음에 뭡니까? 예수도 아는 내가 바로 바울이 예수와 같은 세계에 있다는 것을 누가 보증해줘요? 악귀가 적이 보증해줘요. 이게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일까요? 이게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겁니다. 특히 바울에게 악귀가 그리스도 백성이라고 인정해준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무슨 짓을 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가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잡아가기만 했다면 나중에 사도행전 뒷부분에 죽이기도 했다 했어요. 살인자에요. 폭행자 맞아요. 죄인 중의 괴수 다 맞습니다. 그게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구원되는데 정히 저해요소가 됩니까, 장애요소가 됩니까? 다른 세계에요. 육신으로 어떤 일을 행하면 구원에 탈락이 된다, 이거는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미 마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천국 갈 사람을 안다는 말은 마귀는 뭘 안다는 말입니까? ‘너 같은 인간은 백날 해봐야 천국 못 가. 내가 보증해. 너 성령 없는 것 다 알아. 있는 척하지 마.’ 마귀가 그걸 안다고. ‘복음 연구한다고 백날 해. 언어연구 백날 해. 목사, 집사, 장로 직분 열댓 개 가지지. 소용없어.’
방금 제가 무슨 이야기했습니까? ‘소용없음’이죠. 이게 뭐냐 하면 접근 불가입니다. 이걸 마귀가 알아요. 마귀가 알고 있는데 누구는 몰라요? 마귀에 속한 인간들이 몰라요.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하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이게 어제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믿음은 원래 없어요. 없는 게 맞아요. 왜? 우리가 누구의 후손입니까? 마귀와 한 통속됐기 때문에 믿음이란 것은 탐내도 안 되고 기대해도 안 되고 가질 수도 없어요.
없는데 주께선 뭐냐 하면 누가 갖고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오신 분이 우리를 대체물 또는 대신했잖아요. 대신하니까 그 대체물과 성도가 동행한다 할 때 아주 어려운 영어로 이야기했어요. copy한다고 했어요. 카피한다는 것을 히브리서에선 뭐라고 하느냐? 모형, 그림자 또는 형상이라고 하는. 똑같진 않지만 본질적 요소는 서로 통하는 것, 그걸 동행이라고 합니다.
노아는 예수님 아니에요. 하지만 노아는 예수님의 모형이죠. 그래서 그걸 믿음이라 한 거예요. 공통요소로서 연락을 취하고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마귀가 겁나서 사도 바울이 마귀한테 당하고 고생한 게 아니에요. 주님의 육신이 이 땅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다는 그 고초를 그 환란과 고난을 그게 노선이거든요. 천국 가는.
예수님 다녀가서 가셨던 노선에 이미 그 좁은 길에 이미 참여한 자는 그때부터 육신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의 육신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카피가 되어서 우리는 그 길을 가는데 그 길은 시험의 길이에요. 그래서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라 했습니까? 주기도문에 시험에 다른 길로 이탈되지 말고 주께서 가신 길을 고수하게 해달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천국 가는데 고생 덜 하게 해달라는, 사고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그 내용이 아니에요.
주님한테 사고 났는데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귀족입니까? 왜 아무 일 없이 멀쩡해야 돼요? 멀쩡해도 구원받는데 지장은 없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은 환란이 있고 찾는 사람이 적다했잖아요. 이건 뭐냐? 그만큼 지원자는 많은데 중간에 서류심사부터 탈락자가 면접부터해서 다 떨어져요. 다 떨어지고 남은 자만 구원받아요. 그걸 이스라엘로 솜씨를 보여줬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은 껍데기, 유다는 껍데기이고 진짜는 다윗이란 말이죠. 다윗은 진짜에요. 사람들,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다윗은 우리의 왕이라. 다윗이 뭘 이겼다? 에돔을 지배했잖아요. 여기서 생긴 것이 시편 60편 계시였지요. 이걸 후대 다윗의 혈통적인 왕들이 에돔을 지배함으로써 자신이 다윗 노선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네 번째 왕이 여호람이고 일곱째 왕이 아마사에요.
성경에 보면 여호람도 아마사가 무엇에 신경 썼느냐 하면 에돔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데 필요해서 전쟁을 많이 일으켰어요. 성경구절을 찾아보면 나오는데 시간관계상 생략하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나중에 서서히 먼저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 망하잖아요. 망하면서 이건 역전되어서 에돔이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지배하는 지경으로 나갑니다. 그 이유가 딱 하나에요. 이스라엘이 에돔의 신을 그들의 신으로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결국은 명목상 이스라엘이다, 혈통적으로 다윗 혈통이라는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고 무엇의 개입? 다윗언약을 했던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실효적인 개입에 대해서 그걸 느끼느냐, 안 느끼냐로 결정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릴 리가 있습니까? 맨날 이스라엘이 율법 찾고 섬기는데. 그러면서 자기들은 뭐라고 여깁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부하지요.
그런데 실생활과 모든 생각과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뭐가 빠졌다고 봅니까? 언약정신이 완전히 빠졌다고 보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 에돔이, 껍데기가 아니고 나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는 쪽이 누굴 학대해요?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거예요. 침범하는 거예요. 그걸 누가 하느냐?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둘 다 똑같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둘 다 똑같다.
이걸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시켜봅시다. 앞집에 보살집, 또는 아래 이층에서 시비 걸 때 이거는 우리가 이겼다, 졌다는 문제가 아니고 왜 이렇게 절에 가는 사람, 또는 이단이 왜 자꾸 우리한테 시비 거는가? ‘맞아. 시편에 보니까 에돔이 이렇게 급습을 해서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각성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이 큐티하고 해석하지요. 주석에 나오지요. 엉터리입니다. 그게 바로 가짜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껍질은 내가 진짜 에돔이고 우상숭배자이다. 이게 사도 바울의 복음이에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의인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냥 데려가지 않고 육신을 남겨둔 이유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바리새인 되고,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가룟 유다가 되고,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그 즐거움을 우리가 느끼게 하는 거예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이 됐어요. 그리스도의 몸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는 뭡니까? 예수님의 마음도 있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이라 합니다. 성령이 이미 들어와 버렸어요. 이걸 누가 아느냐? 귀신도 알아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아요. 귀신도 아는 내가 뭘 봐요? 내가 육신에서 뿜어내는 옛날 내 자아를 내가 보고 있어요.
보고 있으니까 이 자아까지 내가 굳이 변호해줄 생각을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래서 결별했다는 것, 헤어졌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더 주께 감사하고 배나 기뻐하는 거예요. 점점 더 기뻐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일부러 한다고 나이트클럽 가지 마시고 고질적인 내가 가만있어도 뭐가 되느냐 하면 거룩을 지향하고 거룩을 바라보는 천하의 바리새인 노릇을 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선악체계에 의해서.
이번 주 내가 참 교회 가서 은혜 받았으니 이번 주 생활은 아마 내 뜻대로 만사가 형통할 거야, 이게 바리새인 아닙니까. 내가 지난 주 구제를 했기 때문에 설마 나쁜 일은 생겨나지 않겠지. 운전하다가 접촉사고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이런 생각.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주님께서 욕했던 네 아비는 악마라 했던 그 자아가 여전히 그 바리새인이 내 안에 딱 붙어있는 거예요. 이게 에돔의 요소인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에돔의 요소는 내 인생은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그 생각이에요. 주일 날 설교에 의하면 태극기를 바라봐야 될 꼬마가 자꾸 십자가 없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기는 뭐냐? 선악체계가 기다리고 있어요. 악마가 인간 속에 집어넣었던 사고방식, 잘했으니까 복 올 것이고, 나쁜 짓했으니까 벌 받을 준비하자는 의식, 이것이 육신이 남아있는 한 끝까지 갑니다.
따라서 어차피 육신이 남아있는 것 내 힘으로 못 헤어지잖아요. 헤어지지 못할 것이면 이러한 주께서 뭐 때문에 피 흘려 돌아가셨는지를 이런 죄의 껍질이 있어줘야 우리가 날마다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남이 나쁜 자가 아니라 나나 저나 똑같은데 누가 이렇게 하거든 ‘너는 나 따라오려면 멀었어. 아직 덜 바리새인이야. 내가 얼마나 바리새인인지 어디서 이게 하수가 바리새인 노릇해. 기도하면 응답받았다고? 나 해봤어. 그런 것 다 해봤다고. 내가 서장하고 밥 먹고 사우나 가고 다 했지. 너 남천동 서장 알지?’ 남천동 어딘지 몰라요, 하여튼.
그걸 우리는 의식 못합니다. 그런데 딸이 와서, “엄마 점점 더 요새 옛날 엄마 아니다. 설거지도 잘 못하노” 하면, “내가 너 키울 때 어떻게 키웠는데” 갑자기 자기 과거 자아 공로가 확 올라오면서, “그런 소리하려면 우리 집에 오지 마라. 그리고 이 아파트 너한테 안 준다” 얍삽한 보복에 들어가죠. 그러니까 아파트라도 갖고 있어야지요. 그래야 큰소리치니까. “네 오빠 봐라. 나한테 얼마나 잘한다고” 이런 것. “이 아파트 오빠 거다.”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바리새인적 아닙니까. 내가 잘한 행함 중에서 좋은 것은 나의 의가 되고 내가 존재할 이유로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태도, 육신이 있는 한 이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고요, 교인들끼리의 다툼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교인들 다툼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걸 교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교제. 자기 의와 자기 의가 만발한 장소가 교회라는. 회개는 집에 가서 하시고요.
남들 앞에서 회개하게 되면 상대는 뭐가 있습니까? ‘네가 회개를 해? 나는 너보다 더 센 회개한다.’ 회개 배틀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인간이 육신으로 어떠한 교묘한 신앙적 행위를 할지라도 접근 불가에요. 영적 세계에 접근 불가. 이게 되질 않아요. 그 접근 불가한 세계에 주님에 의해서 피의 능력에 의해서 껍질 되게 하신 역량에 들어갔다는 것을 이렇게 나의 무능력을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거예요. 이게 성도와 언약의 사람과 비-언약의 존재, 에돔과의 차이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망해가면서 아모스 1장 같은 경우에, 아참 아모스 가기 전에 이사야 63장 설명해야지요. 이사야 63장 1절을 다시 보면, “에돔에서 오며” 에돔에서 어디서 나타나느냐? 에돔에서 메시아가 온다고요. 택하지도 않은 저주받은 쪽에서 왜 메시아가 나타나느냐? 이게 위반의 위반이에요. 절대로 구원자 안 나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에서 구원자가 나타나는 이유는, 고기 잡는데 보통 한우나 돼지 잡는데 일단 어디로 갑니까? 도축장 가지요. 도축장에 갈 때 그때 하얀 옷을 입고 보통 덩치가 커요. 뚱뚱한 아랫배 나온 모자 하나 쓰고 위생복 입고 뭐 들고 있습니까? 칼 들고 있지요. 물론 기계로 다루겠지만 칼 쓰면 피가 묻겠어요, 안 묻겠어요? 그럼 색깔이 어때요? 벌건 색깔이죠. 거기서 나오면서 오늘도 한 마리 조졌다. 손 봤다.
메시아가 뭐냐? 에돔 손 봤다. 에돔을 손 본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나중에 에돔의 신을 섬겼어요. 그러면 도축장의 직원 되시는 분이 누굴 손 봐야 돼요? 이스라엘을 손 봐야 되겠지요. 그래서 에돔 속에 있는 에돔 같은 이스라엘에서 누가 나옵니까? 메시아가 나올 때 에돔에서 이스라엘을 손 보고 심판하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된 그분이 에돔에서 나오는 거예요. 에돔 같은 이스라엘. 심판의 자리에서 심판을 한 건수 올리시고 나오시는 분, 그것이 바로 이사야에 예언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걸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스라엘은 에돔에서 어떻게 구세주가 나올 수 있는지 해석이 불가하지요. 우릴 구원하기 위해서 에돔에서 뭔가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냄새고? 제가 여담이지만 아카시아 향기가 좋아서 아침 산책할 때 아카시아나무 사진을 찍었어요. 아카시아의 그 향긋한 냄새를 담을 수가 없어요. 이걸 접근 불가라 합니다. 영적 세계는 내 육신이 담으려 해도 담기질 않아요. 다만 육신의 더러움을 통해서 복음의 향내가 더욱더 나타날 뿐이죠. 이 냄새도 마찬가지인데. 이 냄새가 무슨 음식냄새인지 모르겠다. 깨 볶는 냄새. 이 냄새가 동영상에 실리는 기술이 발달할 그날….
아모스에 보면 바로 에돔이 본격적으로 죄를 지어요. 누구한테 죄를 짓는가? 감히 건드리지 말아야 될 유다를 건드려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에돔, 이제는 네가 저주받아도 할 말 없지? 네 형제 유다를 왜 건드리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에서, 에돔이죠. ‘에돔이 말하기를 유다의 여호와가 우리를 칠지라도 우리는 다시 일으켰다고 그들은 이야기를 할 건데 일으켰다는 그것을 내가 밟을 것이다. 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돼 있어요, 구약성경 전체가. 본문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대략 이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다시 시편 60편에 들어가 보면,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9, 10절) 우리로 하여금 에돔에 들어가서 강력한 에돔을 칠 수 있는 그런 분을 갈라진 이스라엘에게 의존하지 마시고 친히 오시옵소서, 라고 이스라엘이 말한 게 아니고 누가 이야기해요? 다윗이 이야기해요.
여기 5절에 봅시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그다음에 뭡니까?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오른손으로 구원하는 집단이 있어요.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에요. 뭐냐?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홍해를 건너올 때 어떤 이스라엘 육신이 한 게 없어요. 이스라엘 육신은 애굽에 살던 그 육신이기 때문에 애굽을 두려워하지 어떻게 할 능력이 없는데 안 되는데 어떻게 됐는가? 구원되었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상 밖의 구원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의 이야기였습니다. 중풍병 낫기를 원해서 왔는데 거기에 뭐가 왔습니까? 내가 살아 있는 한 없는 요소, 뭐가 주어졌습니까? 죄 사함이 주어졌어요. 죄 사함이 주어졌으니까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죄 사함 주기 위해서 그 인간은 중풍병으로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 속에 내 사람을 심을 거야, 이런 뜻이에요, 주님께서. 그럼 중풍병은 어디 속하느냐? 껍데기에 나오는 병이지요. 껍질.
그러니까 껍데기가 중풍병 걸렸으니까 생각하는 것이 다시 괜찮은 껍데기 되게 해달라고 고치러 온 거예요. 병원에 가면 그렇잖아요. 그런데 도저히 예상 못한 게 있어요. 죄 사함은 이것은 껍데기로선 접근 불가한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그 사람에게 뭘 했습니까? 죄 사함을 줌으로써 믿음이란 없는 데서 생기고 죽은 데서 살아나는 것이, 새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야곱이란 껍데기, 에서란 껍데기, 그리고 오늘날 우리 아담의 육신, 이방인이란 껍데기를 철저하게 이용해서 주님의 자기 과업을 가동시킨 거예요. 실행시킨 거예요. 껍데기는 난데 내 안에는 주께서 자기 일을 하신 거예요. 자기 일을 엔진으로 집어넣고 우리고 하여금 하나의 셀토스, 벤츠 이런 걸로 자동차로 굴리게 하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이걸 전혀 모르지요. 내가 나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저들도 교회 나가는 것은 지 좋으라고 지 잘되고 천국 가기 위해서다. 천국은 난 모르겠고, 그래선 난 교회 안 나간다. 하나님 믿는 것 모르겠고, 그래서 난 교회 안 나간다. 그러나 저거들은 이기주의, 자기 구원만 챙기기 위해서 교회 나가서 가족도 모르고 자기 하나 천당 가기 위해서 헌금 바치고 돈 바치고 저 짓하는 것 봐. 나는 저거 꼴사나워서 교회 안 나간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교회 왜 나옵니까?” 그러면 답변은 간단해요. “내가 구원받는 죄를 짓기 위해서 교회 나갑니다.” 바로 뭘 집어내지요? 죄 집어내는 거예요. “당신은 왜 헌금합니까?” “이 헌금 하면 혹시 복 받는 그런 죄를 짓기 위해서 헌금했습니다.” “당신은 왜 자녀에게 신앙 교육시킵니까?” “내 새끼 천당 보내기 위해서 혹시나 아는가 싶어서 복음 전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은 왜 목회합니까?” “목회하는 죄를 짓기 위해서.” “당신은 왜 삽니까?” “죄 짓기 위해서.” “당신은 왜 태어났습니까?” “죄 짓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접근 불가. 오늘 제목을 ‘접근 불가’로 할까? 껍데기의 역량이죠. 껍데기를 최고의 껍데기로 활용해주시는 거예요. 나는 돼지껍데기 별로 안 좋아해요. 하여튼 간에 주님께서 이 껍데기를 철저하게 껍데기로 육신이 있는 한 철저하게 이걸 사용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죄인이고 그 누구 못지않은 극악무도한 살인죄, 간음죄, 산상설교에 있는 모든 죄, 좁은 길로 안 가고 어디로 간다? 넓은 길로 못 가서 환장한 죄, 이 모든 잠재성, 잠복성 이걸 주의 말씀이 안 오면 이게 들춰지지 않아요. 천하의 바리새인 이걸 들춰낼 때 주께서 참 부지런히 저 같은 게 뭔데 부지런히 사용하셔서 주님의 연속성을 유지하시고 활동하는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주께서 일하는 것, 내가 믿는 것은 바로 그걸 믿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그것을 바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 사람들아 나 보지 말고 나는 주님을 죽인 그 십자가의 흔적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제발 나를 좀 힘들게 하지 마세요.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내 안에 주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편 60편이 십자가의 형태로 완성되어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활동함을 우리가 기쁨으로 느끼게 하여주시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말씀이 왜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해야 되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게 해주셔서 더욱더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