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4a 부산강의 : [시편]71(55:13)-배신을 통한 친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55편, 역시 ‘다윗의 시’라고 돼 있습니다. 다윗의 시라는 것은 어떤 인간이 살아 있다는. 인간이 살아 있는데 인간에게 뭐가 붙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붙어 있다, 이렇게 돼요. 하나님의 언약은 20절에 나와 있어요. 시편 55편 20절에 나옵니다. 다윗은 자기가 시련에 사로잡힌 이유가, 언약이란 환경이 그렇게 몰아넣었다는 거예요. 언약이란 환경이 자기를 시련에 몰아세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보통 인간에게는 거울 보면 자기만 보이잖아요. 그런데 언약이 붙어버리면 나라는 환경 자체가 언약의 필드, 언약의 장이 되는 겁니다. ‘언약의 작용 속에 있는 나’, 이걸 신약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나’인데 예수님은 안 보여요. 이게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나오는데 상당히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하시고 그다음에 9절에,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렇게 돼 있어요.
안 올라가고 같이 일하면 왜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증인하라 하면 그 전까지는 제자들이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같이 일행으로 보였지요.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서 같이 움직였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에 유대 지도자가 중앙에 있는 핵심인물 예수님을 제거했잖아요.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일반인들, 보통사람들은 어떤 환경을 갖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시면서 사람들에게 제거 당함으로써 그들의 환경은 언약이 없는, 언약이 빠져버린 환경으로 이렇게 규정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약이 없는 환경이죠.
언약이 없는 환경에 누가 들어오느냐 하면 한강이 들어오죠. 노벨문학상 받는 한강이 들어오는 거죠. 대단하죠. 언약 대신 낙동강, 한강이 들어와 버렸단 말이죠. 노벨문학상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들어온 것은 우리 인간만의 내가 요구하는 완전한 환경을 인간들을 모아서 인간들이 결집해서 구성하는 겁니다. 바벨탑이죠.
그런데 그 사회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을 하지 않아요. 이게 원래 수천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조상도 원래 그런 줄 알았고 살았고, 우리도 그런 줄 알고 살고, 우리 후손들도 그런 줄 알고 사는 거예요. 자식들에게 돈 물려줄 줄 알았지 재산 나눠줄 줄 알았지 언약을 상속할 생각은 없는 거예요. 왜냐?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인간들이 진리는 아니지만 정답이 되는 거예요. 진리는 추구하는 대상이지 진리를 알았다 하면 이게 안 되지요. 진리는 뭔가 있는데 추구할 뿐이지 현재는 우리가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체가 정답이라고 하는 겁니다. 말이 어려우니까 적어볼게요. 인간의 삶의 정답은 추구하는 거예요. 추구하는 것, 기대하는 것, 바라는 것이에요. 바란다, 추구한다는 것은 이만큼은 아는데 요만큼은 미흡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만큼은 안다는 말은 내가 이 정도까지는 했다 이 말이에요. 이걸 달성했는데 달성했다고 욕망이 채워지는 건 아니거든요. 이거는 미흡된 거예요. 미흡된 걸 뭐로 채우느냐? 추구하고, 기대하고 소망함으로써 채우려고 시도하는 이것이 인간의 삶의 정답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답은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는 다 알아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뭔가 모자란 게 있을 때 추구하게 되면 지금 내가 달성한 것이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의미가 있어요. 여기까진 내가 하고 모자란 것은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사는 정답이에요. ‘열심히 하자.’ 열심히 해야 사는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다 알아버리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계속 나를 설득하고,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뭔가 모자란 구석이 있어야 매진할 수 있는 이유가 발생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럴 일은 별로 없지만)“엄마, 나 전교 1등 했어.” 엄마가 뭐라 합니까? “모의고사 전국 석차를 봐야지. 너희 학교 쪼다 같은 애들 모아놓고 1등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금 강남 애들, 선행 학습한 애들과 붙어야지.” 그래야 거기서 매진할 수 있는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엄마, 이번에 회사 승진했어.” “빨리 나와서 네 회사 차려야지.” “공무원 7급 됐어.” “5급, 3급 남아있는데? 네가 장관 돼야지.” 그래야 매진할 수 있는 빌미가 생긴다니까요.
요 모자란 것 채우기 위해서 어디 갑니까? 교회 가지요. 그래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모자란 걸 채우면 더욱더 빛난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 26절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복음에 깔려있는 기본사상은 이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존재, 이게 기본이에요. ‘사람은 할 수 없다.’ 기도를 하던 교회를 몇 년 다니던 성경을 백독을 하던 다 소용없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소용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소용없는 인간을 뽑아서 구원해주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방금 이야기했듯이 자기에게 의미를 둬요. 여기까지는 내가 달성했다는 거예요, 내가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미진한 것에 뭘 채우느냐? 언약을 채우면, 주님만이 할 수 있다가 돼버리면 인간이 여기까지는 내가 달성했다는 게 거짓말로 사기로 드러나는 거예요. 구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뭐냐? 성도의 삶이 뭡니까, 신앙의 삶이 뭡니까? 자꾸 저한테 묻는데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또 말씀드릴게요. 내가 사기꾼으로 드러나는 게 신앙이에요. 참 쉽지요.
자꾸 뭘 하려고 해요. 마태복음 19장 26절에서 너는 못 한다고 했는데 못 한다는 말을 자꾸 밀어내고 그래도 내가 못 한다는 것을 믿었잖아요, 이렇게 나온다고요.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믿었으니까 그 믿은 가치는 인정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하지 못 한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 못 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이 기대하고 고대하고 소망하는 이 자체가 전부 다 엉터리라는 거거든요. 그럼 인간은 뭘 기대합니까?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는 것? 천국 가는 거, 지옥 가기 싫은 것, 이런 것 기대하잖아요. 이게 다 엉터리라는 거예요. 내가 천국을 고대한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천국 고대하기 위해서 내가 뭘 하지?” 보니까 예수 믿어라. 믿으면 구원받는다. “옳지 예수 믿어야지.” 예수 믿는 것은 인간의 행함 아니에요? 그것도 행함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도 엉터리라는 것을 그걸 아는 것은 언약이 붙어야 알 수 있는 거예요. 언약이란 환경이 갖다 붙어야 비로소 발견되는 거예요. 내가 주가 아니고 내가 주류가 아니라 언약 그분이 바로 주류가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 11절에서 예수님이 승천을 해버려요. 승천을 해버리면 공간의 구조가 예수님과 동행할 때는 이게 수평적입니다. 수평적이기 때문에 수평적인 어떤 점의 배열만 있게 돼요. 예수님 옆에 나 있고, 내 옆에 베드로 있고 수직선상에서 바로 옆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해버리면 이 선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삼각형으로 바뀝니다. 바뀌면서 수직선에 있는 인간은 보지 못하는 꼭짓점에 누가 가 있는가? 예수님이 가계십니다.
이것이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의 말은 예수님께서 이미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우편, 꼭짓점에 가 있으니까 이 사이에는 뭐가 형성돼요? 삼각형이 형성됐지요. 여기에 뭐가 꼈다? 구름이 꼈다. 인간은 하지 못 했는데 주님은 이미 해냈다는 그 언약완성의 환경이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성도들에게 덮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수직선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삼각형 안에서 살아간다는.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주님의 능력이 개입해서 일어나는 현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이 성도입니다. 내가 짬뽕을 먹든지 짜장면을 먹든지 이게 내 마음대로 안 됐다. 오늘은 이상하게 짬뽕이 안 댕기네. 짜장면 먹을 수밖에 없지요. 이게 자기 마음대도 당기는 게 아니에요. 발걸음도 세시는 것도 주님이라니까요.
그런데 이 삼각형을 누가 지우느냐 하면 마귀가 지워버려요. 마귀가 지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마귀는 다시 수직선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오늘 할 시편 55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원수에요. 삼각형을 수직선상으로 돌려버리죠. 마귀가 수직선으로 돌리는 방법은 간단해요. 언약만 치워버리면 되지요. 언약 치워버리면 인간은 할 수 있다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가능성 존재가 되고, 언약이 오게 되면 뭐가 돼요?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이게 언약이 주어질 때 생기는 현상이에요. 사람은 할 수 없어요. 그러나 누구는 한다? 하나님은 하신다는 이 말을 통해서 내가 일어나는 구원, 천국은 지옥 가는 것은 내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결과물입니다. 내 생각을 전혀 반영하지 않아요. 지옥 가고 싶다고 지옥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천국 가고 싶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오게 되는 우리는 가차 없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천국을 가야 됩니다. 할 수 없어요. 좀 죄송한 말이지만. 지옥 그렇게 가고 싶었는데 지옥 가려고 나쁜 짓도 하고 했어. 예수 안 믿는다 하고 다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내 힘으로 지옥 갈 재주가 없어요. 언약이 와서 결정내린 사항을 그냥 우리는 수용할 뿐입니다. 돌이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이미 언약에 의해서 확정됐잖아요. 확정됐으니까 나는 왜 못 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 가야 될 모든 짓거리를 다 해요.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굉장히 즐거워요. 지금 성도의 삶이 딴 게 아니에요. 어떻게 불만에서 감사가 나오느냐는 거예요. 불만족스러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감사가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불만은 육신이 하는 거예요. 왜? 이 세상에서 내 욕망은 충족되지 않게 돌아가니까. 하지만 감사는 바로 내가 할 수 없는 불만 가운데 감사가 나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려면 그 바탕이 뭐가 돼야 돼요? 불만이어야 되지요. 오늘 본문 시편 55편 내용을 보세요. 뭡니까? 다윗의 입이 당나발처럼 튀어나온 거예요. 다윗이 지금 불만이 대단해요. 하나님 이럴 순 없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근데 다윗이 성도에요. 언약과 함께 있는 성도인데 늘 불만으로 모든 시편이 다 그래요. 불만으로 시작했는데 시편 55편 끝에 보면 하나님께 감사로 이어져버려요. 아하, 이렇구나. 자체 안에서 불만에서 감사로 이어지는 그런 경과/경로를 다윗의 육신 내부로 언약이 통과하면서 언약이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성취로 끝나는지를 그때그때 보여주는 삶, 이게 언약적 삶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원수가 바로 다윗 본인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이 언약이 내까지 내 앞에서 스톱되는 게 아니고 언약이 경과하는 경로가 내 속까지 들어와 버리면 하나님께 불만하는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까지 까발리게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내민 것을 하나님은 받지 않는 것, 그게 하나님의 원수에요.
하나님의 원수는 언약이 없잖아요. 언약이 없는 것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행함밖에 없지요. 행함밖에 없는 그 행함을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함을 안 받는다는 것은 너는 내 원수기 때문에 원수에서 나오는 어떤 행함도 받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신 우리 자리에 들어오셨지요. 그게 뭐라 했습니까? 언약의 장 안에 있으니까 이게 예수님 안에.
예수님 안에서 자체적으로 언약의 안이라 하니까 언약이 구약 때는 말씀, 계시로 이어지고 신약 때는 말씀이 뭐로 바뀌었지요?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지요. 육신이 되신 말씀. 말씀은 너 내 말 똑바로 들어, 이게 육신이에요.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 선지자의 말씀으로 왔는데 신약은 신체로 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 신체는 별 볼일 없게 됐어요. 전문용어로 ‘나가리’되었다. 우리 신체의 행함은 나가리된 거예요.
그 나가리된 것을 보이지 않는 언약을 통해서 늘 보여주는 것이 성도의 남은 생애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니까 삼각형 안에서 지상에 있던 모든 것은 나가리, 배제될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다 이루었음을 증명하는 새로운 족속, 새로운 종족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이걸 제3의 종족이라 하는데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종족에 속하지 않는 인간류, 인간의 새로운 종류의 등장,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의 등장이에요.
언약을 이룸으로써 언약의 세계는 지상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게 되지요.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보이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굳히기에 들어간 영적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영적 존재는 어디서 나왔는가? 무저갱에서 나왔어요. 이게 오늘 시편과 관련해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무저갱이 뭐냐 하면 죽음보다 더 깊은 곳에 무저갱이 있어요. 이건 그림으로 그려야 되겠어요. 말로 설명이 안 되고요.
인간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수직선상 하나의 서열, 배열 이렇게 돼 있지요.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되면 나는 살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게 다니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다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다. 전부다.’ 이게 과학이라는 종교입니다. 과학이라는 종교는 신앙이라는 말을 안 해요. 신앙 대신에 뭐로 바꾸느냐? 이걸 신념으로 바꿔요. 사실은 믿음인데 신념으로 바꾸는 거예요. 신념으로 바꾸는 이유가,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나는 그걸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념적으로 믿습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맞기 때문에. 과학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거든요.
우울증 걸리면 어디 가지요? 정신과의사 찾아가지요. 정신과의사가 뭡니까? ‘믿습니다’의 대상이잖아요. “저는 어떻게 처방하든 믿습니다.” 의사가. “믿지 마시고요. 내 말을 들어서 과학적으로 해봅시다.” 그러면 환자가, “그 조치를 따르겠습니다.” 믿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순종합니다, 헌신하겠습니다, 다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의사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예전에는 스승으로 봤지요. 스승으로 본다는 것은 언제든지 추종할 마음자세가 됐다는 뜻이에요. 오늘날 정신과의사를 따르는 그 태도에요. 그 자세.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 같은 사회를 안 떠나도 되는 것, 같은 사회를 구성하는 것 거기서 정서적인 안심을 노리는 거예요. 안정을 취하는 겁니다.
여자들이 시집갔을 때 그리고 임신했잖아요. 누굴 찾습니까? 친정엄마 찾잖아요. 친정엄마 왜 찾습니까? 이 땅에 저임금으로 애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 엄마기 때문에. 1년 4기로 나눠서 분기마다 오십만 원만 주면 되거든요. 조선족은 이백오십만 원 줘야 된다니까. 필리핀도 마찬가지고. 가격차가 너무 나니까. 그리고 엄마는 믿고 맡길 수가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엄마, 내가 익히 아는 엄마는 보이는 나를 내 가치와 의미를 지켜낼 수 있는 보이는 대상이 되면서 같은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자가 엄마에요. 가까운 일가친척이에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친구라 합니다. 어디 나오느냐 하면 13절에,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나에게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전에 친구와 나와 통했다는 뜻이고 같은 생각을 나누는 공동체란 뜻이에요. 그런데 그 친구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나를 배신한다는 이것은 바로 뭘 뜻하느냐 하면 내가 그 친구와 한 통속인 것이 발각당하는 순간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와서 나와 내 친구를 떼어놓는다는 말은 그전에 이미 나는 하나님의 원수 된 사고방식에서 좋다고 둘이 친구했다는 뜻이에요.
눈에 보이는 세계, 과학세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한테 제자들은 뭐라고 호칭을 했느냐 하면 나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인가 나오지요.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구라 하는 것은 앞으로 친구라 해주겠다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뭐냐? 제자들아, 너희들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지. 왜?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믿기만 하면 되니까. 딱 들어붙어있으면 주님 나라에 갈 수 있으니까. 이것은 뭡니까? 보이는 내가 보이는 주님을 딱 붙어있으면 주님과 같은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사회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같이 갈 수 있는 관계라고 제자들이 그렇게 오해했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친구라 해버리니까 친구는 영원히 이제는 그 세계를 공유하는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나를 생각하는 것은 종이 주인을 생각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레벨, 그 차원을 내 쪽에서 이제는 그걸 수정하고 개선해서 종이었던 너희를 뭐로 바꾼다? 친구로 바꾼다. 그런데 뒤에 뭐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이게 뭐예요? 너희들은 나를 좋아하지만 목숨 바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냥 이용물로 생각하는 거예요. 좋은 분 만났으니까 나는 결사적으로 안 놓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55편이라든지 22편에 보면 바로 주님을 배반한 자 누구냐 하면 주님의 친구에요. 그 대표자가 가룟 유다에요. 예수님 제자 가운데 대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어요. 예수님 잡힐 때 예수님께 뽀뽀할 때 ‘친구야’라고 했지요. 주님께서 네 할 일 해야지. 친구하게 하듯이 키스한 거예요. 죽음의 키스를, 팔아먹기 위한 키스를 아주 친밀한 관계인 것을 뜻하면서 내 대신 좀 죽어줘, 하는 것이 나의 가치와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내 대신 당신이 내 손에 팔려야 돼, 이거는 가룟 유다의 생각이고. 버림받은 자를 위해서 자진해서 친구로 나서서 그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요.
분명히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결과가 너무 다르다는 것은 시작점이 나부터 출발하게 되면 아무리 예수님을 논해도 그거는 가룟 유다가 되고, 시작점을 예수님의 생각해서 그 예수님의 생각이 나한테 도달되면 나를 휩싸이게 하고 나를 장악하고 나를 캐치하면, 내 생각을 장악하게 되면 그것은 친구의 혜택이 그대로 우리 속에 남아있게 되는 거예요.
왜 그런 미묘한 차이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시는가? 이 세상이 바로 밑의 음부의 세계, 죽음의 세계,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세계 이게 수직적으로 됐기 때문에 세상은 1, 2, 3 세부분으로 나눴던 거예요, 구약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 천지 창조한 세계, 죽으면 어디 간다? 땅 밑의 세계, 지하의 세계죠. 이거는 하늘나라는 뭡니까? 땅 위의 세계, 지상의 세계. 구약 내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는 그 세계구조가 인간의 구조, 이스라엘의 구조 안에서 그들은 말씀을 받았던 거예요. 이 구조를 유지하면서 말씀을 받았던 거예요.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 세계, 음부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라. 이 죽음의 세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예언돼 있고요. 또 의인은 놀라운 사실은, 이게 잠언 14장 32절에 나온 말씀인데요, 의인은 음부에 내려가도 소망이 있다고 돼 있어요.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구약의 백성들도 인간이 늙으면 죽는다는 걸 다 알아요. 그러니까 죽지만 살아 있을 때 뭘 챙기고 죽으면 괜찮다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 알고 죽으면 죽음 세계에서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죽은 나를 건진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들이 만든 종교에도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염라대왕에 간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들에게 아직까지 무슨 생각이 주어지지 않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알면 구원받는다’에 머물지 그 생각까지 하나님의 원수가 만들어낸 생각이란 걸 못한 거예요. 그들은 무슨 단계를 빠뜨리느냐 하면 장차오실 하나님께서 음부까지 내려갔다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생각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우선돼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거쳐야 될 모든 비극을 거치고 승천하시고 주님 우편에 계셔야 바로 그 능력이 비로소 소망다운 능력으로 기획돼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저 ‘믿습니다’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구약의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 구약 시편 다 알고, 예수님 죽였던 유대인, 바리새인도 다 알고 있어요. 의인은 음부에 내려가도 소망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죽어도 우리는 부활된다. 이걸 바리새인들은 알고 있었다고요. 그럼 바리새인은 구원받습니까? 구원이 안 돼요.
로마서 10장 6절에 보면,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은 이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 유대인들 사고방식이 땅 밑에는 음부 있고, 땅 위에는 하늘이 있는데 우리가 비록 죽었어도 하나님의 말씀 지켜서 의인된 사람은 부활된다, 그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왜? 그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것조차도 자기 의가 되니까. 로마서 10장 3절에 ‘자기 의’라 해요. 인간이 말씀을 대하고 인간들 생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구축되고 구성되는 그 안에 나름대로 구약성경을 정리했는데 그게 자기 의, 하나님이 배척하는 인간의 행함이란 생각을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갖고 있질 못했어요. 나름 열심히 하면 되잖아, 이거에요. 나름 열심히 하고 열심히 성경 배우면 되잖아,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자기 말고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가 해낼 수 없는 것을 하시는데 음부에 갔다가 위로 올라가는 그 일을 누가 내 대신 대신했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예수님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이미 끝난 상태에요. 끝난 상태가 그들에게 복음이란 이름으로 바로 코앞에 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걸 믿음으로. 로마서 10장에서 하는 이야기. 새삼스럽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왜 하느냐? 이미 끝난 상탠데. 나는 안 했지만 다른 분이 했잖아요. 다른 분이 완료를 했잖아요. 그럼 나는 쪼다지요, 그냥. 뭘 해도 엉터리만 내놓는 거죠.
사람들이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눈에 보이는 세상, 직선으로 나열된 세계가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기 때문에 “죽으면 어디 가노?” “어디 가겠지, 뭐.” 자꾸 눈에 보이는 세계 밑에 음부가 있다는데 무저갱은 더 밑에 내려가요. 음부보다 더 밑에 무저갱이 있어요. 무저갱에서 기어 올라온 자가 누구냐? 마귀라니까요.
눈에 보이는 세계 밑에도 보이지 않는 뭔가 실체가 있고, 위에도 보이는 않는 실체, 천사와 주님이 계시고 하나님 계시는 곳.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가 구성돼 있는 겁니다. 이렇게 세계관이 확장되는 거예요. 구약 때는 눈에 보이는 음부, 눈에 보이는 하늘, 하늘에 하나님 계신다. 이게 구약 때 제한된 한계적인 세계라면 신약은 예수님이 이렇게 내려갔다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확장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아래 내려가서 뭘 확장했느냐 하면 이미 마귀들도 알고 있어요. 누가복음 보겠습니다. 8장 30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자, 이 대화, 누구와 누구의 대화입니까? 귀신과 예수님의 대화에요. 현재 예수님은 눈에 보이죠. 그런데 귀신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대화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 실체를 정복하려 오신 분이에요. 예수님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고 요한복음에 나와요. 이 말은 뭐냐?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도도 사람과 상대하지 마세요. 사람과 상대하게 되면 자꾸 다른 사람을 기대하게 돼 있어요. 나를 좋아해야 되는데, 날 도와줘야 되는데, 저 사람이 날 싫어하면 안 되는데, 미워하면 안 되는데.
지금 시편 55편에 나오는 다윗의 상태가 자꾸 내 친구가 날 배신했어요, 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초반에. 주님께서 “왜 사람하고 상대를 했어, 그래?” “주님,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니까 주님께서 좀 복수해주면 안 돼요?” 그 이야기에요, 시편 55편의 이야기가. 복수란 말 대신 ‘보응’이란 말 나오지만. 주님이 복수해달란 말은 내 복수를 대신 해달란 이야기거든요.
이 말은 나에게 복수할 권한이 아직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내가 뭔데 주님이 내 복수를 들어줘야 돼요? “그럼 복수는 하나님이 하시고 내가 참겠습니다.” “네가 뭔데 참아?” “너 뭐라도 돼? 뭣도 아닌 게 복수를 왜 참아? 너는 참을 자격도 없고 복수해달라고 요구할 권한도 없고.” “왜? 제가 왜 그런데요?” “네가 내 복수 상대니까. 네가 내 원수니까.” 주제파악도 못하고 말이죠.
하나님의 복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에 대한 복수에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원수가 발생되고, 그 원수에 대한 복수란 말이죠. 모든 심판은 내게 맡기라 했잖아요. 로마서 12장 19절에 나온 말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너의 원수는 아예 없어요. 주님의 원수가 있다면 그건 주님의 원수지 우리 자신의 원수는 없어요. 주님께서 원수는 이미 안에 무저갱이 있어요. 무저갱에 있는 마귀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나와서 아주 설쳐대는 데 가관이라. 온통 귀신들이 군대로 모여서 인간들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거든.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인간들 마음을 장악해서 인간들을 장기 알 다루듯이 배치와 배정을 지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가이소, 뒤로 가이소.’ 인간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그냥 살 뿐이에요.
마귀의 노림수가 있어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마귀의 노림수는 언약이 작동하는 환경을 가로막는 것, 이게 모든 마귀의 활동이에요. 언약이 작동하는 것, 다시 말해서 언약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어떤 경우라도 들리지 않게 합니다.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도록 번잡스럽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놓는 거예요. 그것을 오늘날 과학세계에서는 언약이 없이 살아가는 것, 이걸 정상인이라 합니다. 과학적으로 정상적인 사고방식.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이렇게 돼요.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어떠냐 하면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가 아니고 아까 이야기했지만 고대하고 기대하고 이런 거예요. 진리는 ’모르겠다’입니다. 과학자, 생물학자한테 학생이 물을 수 있어요. “교수님, 인간은 죽어서 어떻게 됩니까?” “모르겠다.” “교수님, 천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르겠다.” “그럼 교수님, 죽어서 우리 몸은 어떻게 되나요?” “그거야 흙이 된다.”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습니까?” 그거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단정을 안 내려요. 심판이 없다, 하나님이 없다, 천국이 없다 단정을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고 말해야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과학은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지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그것만 생각하면 되지 우리가 행복하면 오케이라는 겁니다. 행복하게 되는데 과학이 충분히 도와줄 수 있으니까 과학이야기하고 철학, 문학으로 달래주고 하면 되지 언약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뭐가 없어요? 교회는 종교이야기하지 언약이야기를 안 해요. 종교는 종교 생활하는 주체가 따로 있고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열심히 기도하면 은혜를 그만큼 많이 받고 응답도 받는다, 이게 종교에 해당되는 거예요. 왜? 종교는 뭐냐 하면 이득이 나한테 돌아오는 게 종교에요. 내가 죄인 되는 게 아닙니다. 이득은 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나 언약은 누구 중심으로 움직인다? 삼각형에서 주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어제 오후설교에 잠깐 언급했잖아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주님이 얼마나 냉혹하게 이야기하는지. “나사로 죽은 것은 나의 영광을 위해서 죽었다.” 이게 얼마나 냉정한 말입니까? “나사로는 모르겠고 나는 내 영광만 챙기면 돼. 오케이?” 이런 식이에요. 그게 교회에서 안 통하지요. 교회는 모든 이득이 나한테 와야 돼요. 나한테 도움 돼야 돼요. 내가 미래에 대해서 보장받고 뭔가 확신이 있고, 전부 다 이익이 나한테 와야 된다고요.
그러나 언약은 나를 경유하지요. 나한테 오는 게 아니고 나를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지나가면서 포집하니까. 내가 죄인임을 드러내면서 어떤 점에서 내가 얼마나 고집스럽게 나만 위해서 살아왔는지 들춰내는 게 언약의 위력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 지상에 있는 다윗의 육신을 흔들어요. 다윗이 불만족스럽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우린 불만족스러워요. 나는 정상인 되고 싶은데 낯선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니까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만족, 기존의 공동체나 가족으로부터 괴리되는 현상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다 날아가 버리죠. 그래서 가까운 친구, 가족부터 떨어져나가죠. 나는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관계가 다 끊어지는 겁니다.
그걸 어제 낮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맹세로서 기존의 법적 체제를 가위로 다 잘라내는 것 같아. 관계를 다 잘라내는. 잘라낼 때 우리는 갑자기 외톨이가 되지요. 그동안 우린 뭐가 그리우냐 하면 내가 같이 더불어서 웃고 울고 행복하게 하하 호호 다정스러운 이런 관계가 새삼 그리워지는 겁니다.
갑자기 나는 외톨이 되고 그리워지니까 이거는 텅 빈 공간이니까 옛날처럼 되돌아갈 수 있고, 더구나 옛날보다 다 다복하고 다정스러운 괜찮은 상황을 하나님한테 호소하게 되지요. 불만족스러운 가운데 호소하게 되고 나의 좋았던 그 시절을 하나님이 채워주기를 보충해주길 고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서 이렇게 이러한 호소를 통해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닌 상태, 다른 분이 언약이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새삼 감지하게 돼요. 10분 쉽시다.
■20241014b 부산강의 : [시편]71(55:13)-배신을 통한 친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인간이 있는데 여기서 플러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의 자아가 둘로 쪼가리 나요. 겹치게 돼요. 두 개가 생겨버렸어요. 자아가 두 개가 생기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실 때 지상에 계신 예수님의 형편과 그 지상을 거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음부에 계시다가 올라가실 때에 그 신분의 변화가 그 모든 과정이 완료가 돼요. 그 완성체가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 인간이 예수님의 경로를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지독하게 고생했다는 그 고생이 이제는 우리의 생애로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현상을 남기게 돼요. 허접한 육신으로 왔다가 영광스러운 해 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바뀌는 그 경로가 일단 예수님부터 시작을 했고 그다음에 반복해서 차례차례로 남은 성도가 그걸 따라하게 돼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부활할 때까지 내내 예수님에게 능력을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뭐냐? 성령이에요. 성령은 언약이 완료되었을 때에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은 관계지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그 사이에 개입하십니다. 언약이 완료될 때 주어진다는 말은, 예수님도 이미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거예요.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계약의 성사, 계약이란 관계입니다. 관계가 성사되었으면 이 관계가 변치 않는다는 확증된 보증이 있어야 돼요. 그 보증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뭐로 온다 했어요? 성령이 와서 보증해주는 거예요. 아파트 계약할 때 보증금 주잖아요. 계약 취소할 때 인간 쪽에선 보증금 배나 물어주고 취소하면 되지만 주님이 주신 보증은 일방적으로 왔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취소가 안 돼요. ‘성령 나가세요, 나가주세요’ 막 빼고 이게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경로를 표시하는 그러한 신호등으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사로잡혔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의 계획으로 철회가 안 돼요. 오신 주님의 조치를 철회가 안 된다고요. 우리는 가차 없이 주님이 얼마나 많은 환란을 거쳤는가를 우리의 현재 남은 생애로 보여주는 업무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자아가 둘로 쪼개져야 되는 겁니다.
첫 번째 쪼개지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육신, 보통 사도 바울에서는 옛사람이라고 돼 있어요. 옛사람과 옆에는 새사람 되겠지요. 옛사람 없이는 새사람 안 되니까. 지금 새사람 됐으니까 옛사람은 좀 날아가면 좋겠는데 지금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에요. 옛사람과 새사람이 같이 있어줘야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증거할 인물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 한분밖에 없단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참된 인간임을 마지막 아담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옛날 아담의 육신을 이용하고 계신 거예요. 내 구원 자랑하라고 구원된 게 아니란 이 말입니다. 둘 다 쪼개져있는 거예요.
먼저 옛사람을 ①번이고, 새사람을 ②번이라면 ①을 거쳐서 ②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①부터 따져봅시다. 옛사람은 숨어있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는다. 연세가 좀 되신 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나 아무리 육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육신이 남아있는 한 아버지가 나를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리를 자기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자리를 대물림하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이란 것은 이미 육신적 환경이 조성돼 있고 나보다 먼저 아버지 되신 분이 아버지의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식이 태어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항상 인간은 뭔가 인식할 때 아버지 같으면 이렇게 했지만 나는 그걸 달리하겠다, 하면서 항상 아버지를 전제로 해요. 아버지로 배경으로 깔고 하는 거예요.
문제 인간이 경찰서 가서 맨날 하는 핑계가, “너 왜 그런 짓했어? 그게 나쁜 짓인지 몰라?” “내가 어릴 때 아버지한테 얻어맞아서 반항심이 생겨서 이렇습니다.” 맨날 핑계를 누구한테 댑니까? 아버지한테 대는 거예요. “너는 왜 공분 안 하고 가출했어?” “엄마가 이혼해서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살아서….” 맨날 아빠, 엄마 또는 형, 동생 이 핑계대고 있어요.
촌에서 농사짓는 육십 된 아주머니보고, “당신은 왜 어릴 때부터 농사짓습니까?” “아버지가 동생들 대학 보낸다고 맨날 농사짓게 됐다.” 모든 핑계를 가족들에게 다 돌리는 거예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라는 육신, 자아는 그냥 형성되는 게 아니고 주변의 환경과 대비하면서 거기서 조성된 거란 거죠. 어떤 대물림 같은 게 있어요.
아버지가 가졌던 그 위세, 그 위엄이 어릴 때 나의 욕망의 대상이 된 겁니다. 내 목표가 된 거예요. 아버지 자리가 그럴싸해 보이니까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는 거예요. 아버지가 만약에 나를 어릴 때부터 때렸다, 늘 일은 안 하고 술 먹었다. 그러면 걔는 어떻게 되겠어요? 나는 크면 나는 절대로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안 되겠다. 아버지는 오후 3시 되면 낮잠 잤다. 커서는 내가 진짜 아버지처럼 낮잠 자면 개다, 이런 식으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상으로 삼아서 그것과 조율하면서 자기 자신을 구축해가는 삶, 이게 옛사람의 정신구조에요.
“우리 아버지가 장로인데 하는 꼴을 보니까 나는 교회 안 나간다.” 맨날 교회 안 나가는 핑계를 아버지 핑계대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이미 그 환경 속에 살아온 인간이 그 배경을 본인이 끊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끊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미워했던 아버지, 어머니, 가족 그 환경을 인간이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성경적으로 뭐냐? 인간은 아담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이 아담의 복제판이에요. 그럼 아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걸 생각해줘야 옛사람의 진짜 본질을 알 수 있겠지요.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 있지요. 요 날, 이 시간으로 인하여 선악을 아는 것과 ‘정녕 죽으리라’가 같이 엮여져 있는 그 날에 인간은 새로운 육신이 된 겁니다. 죄인인 아담으로 다시 태어난 거예요.
선악을 아는 것 대신 ‘정녕 죽으리라’도 동시에 받아들이는 그런 형편에 놓이게 된 그런 육신을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아담의 육신적인 것은 아담이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아도 낳을 수밖에 없어요. 계속 하나님께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방금 이 이야기에서 정리할 수 있는 문장은 이 문장이에요. ‘나는 나를 파괴할 수 없다.’ 이건 미치는 거예요, 정말.
나는 나를 파괴할 수 없어요. 왜냐?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계속 길게 가게 만들기 때문에. 내가 태어난 환경을 하나님께서 유지시켜 줘버려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걸 달리 말해서 ‘나는 죽을 수 없다’ 왜? 죽음을 맛봐야 하니까. 내가 죽는 죽음을 내가 맛보기 위해서 새로운 또 하나의 자아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언약에 의해서.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언약에 의해서 두 개의 자아가 생기는 것은 지옥 가는 사람에게도 어떻게 된다? 해당이 되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인간들이 선악을 안다 했잖아요. 제대로 된 선악은 어떤 소스와 연결돼야 돼요. 다른 원천돼야 돼요. 그 원천이 뭐냐? 생명나무 되시는 그분의 생명이 경험하는 선과 악이 따로 있고, 악마가 주장하는 선과 악이 따로 있어요. 인간이 아는 선과 악은 악마가 인간을 자기 육신 안에 가두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고.
주님께선 뭘 격리시켰어요? 선악과 따먹은 걸 알고 후다닥 뭘 격리시켰습니까? 생명나무와의 그 관계를 끊어버렸어요. 진짜 선과 악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는다고 아는 게 아니고 다른 외부에서 생명나무가 선과 악에 참여할 때 선과 악이 완전히 종료가 돼버려요. 완성이 돼버린다고요. 뭐 양심상, 이런 건 소용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악을 경험하기 위해서 저주를 경험하는 거예요. 어디서? 십자가에서. 그러니까 마귀가 발악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 소식을 못 전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 말씀대로 바르게 살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악마의 전형적인 멘트에요. 주장입니다. 교회는 다 속아 넘어가고 있고. 목사 본인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고. 사탄의 앞잡이 되어서. “말씀대로 바르게 사시면 구원받습니다.” 이건 구약인지 신약인지 구분도 안 돼요. 인간들은 교인들은 납득이 되지요. 특히 앞자리에 있던 권사님, 장로님들 납득이 되지요. ‘아멘, 할렐루야’ 막 터져 나오지요.
선과 악은 우리 인간만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만 아는 선과 악에 대해서 아마 하나님도 동의하실 걸, 하나님을 지 마음대로 만들어내요. 인간의 말에 동의되는 하나님 같으면 무슨 사건이 없어야 돼요? 십자가 사건이 없어야 돼요. 왜 십자가를 빼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요, 교회가. 맨날 부활된 새 생명 이야기하고 있어요. 단절성 없이 바르게 사시면 여러분들은 새 생명 얻어서 부활되어서 천국 갑니다, 그 이야기만 한다고. 재림 기다리시면 재림 될 때 구원받습니다.
재림 기다리면 구원됩니까? 뭐를 경유해야 될 것 아닙니까?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그런데 십자가를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의 어떤 지혜로도 십자가는 막혀 있는 거기 때문에 십자가를 알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질 않아요.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어떤 인간도 지혜로 열두 제자고 어떤 인간도 십자가를 모르도록 돼 있는 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칸막이를 쳐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헛방이죠. 선악을 아는 인간의 육신은 헛방이고, 그 육신 대신 무슨 육신? 아담의 계통이 현재 우리 육신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두 번째 아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마지막 아담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게 어려워요. 기존 아담을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표상이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아담은 유령이다. 기존의 아담은 유령이다. 진짜 아담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진짜 아담이고, 나머지는 그 앞에서 유령이다. 선악을 먹는 그 날에 악마가 인간 속에 쑥 들어왔지요. 들어오면서 인간은 악마의 귀신이 된 거예요. 육신은 있는데 안에는 악마가 차지하고 있는, 일곱 귀신, 군대 귀신이 들어와 버렸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본인이 만든 게 아니에요. 마귀가 만든 인간이에요.
마귀가 만든 인간을 어느 계통? 눈에 보이는 아담의 계통을 주님께서 계속 생산케 한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지 않고 아담의 형상이라 해요. 아담의 형상 따라 인간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네피림도 나오고, 나와 봤자 창세기 5장에 의해서 죽으리라. 나와 봤자 죽으리라, 나와 봤자 죽으리라.
하지만 죽을 때까지 쓸모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그게 쓸모가 있는 거예요. 버릴 카드로 쓰시기 위해서 인간이란 게 쓸모가 있는 거예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위해서 쓸 카드기 때문에 뱀의 후손이 계속해서 이어져가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노선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두 개의 자아가 발생된 겁니다.
시편 55편과 관련해서 이걸 연결시키면 인간의 시커먼 육신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가요. 그러니까 자기 안에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선망의 대상이었잖아요. 그런데 결혼하든지 아버지 돌아가시면 자기가 아버지 자리를 차지했잖아요. 그러면 나는 나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영웅이 돼요. 영웅은 합당한 존귀와 의미와 가치가 무조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나에게 영웅이다? 나는 나에게 왕이 되는 거예요.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이런 것.
인간은 아무리 남들이 못 생겼다고 해도 엄마한테는 자기 아들이 왕이에요. 우리 집안이라는 나라를 대를 이을 우리 왕국의 다음 차기 왕이 아들이에요. 아들이 없으면 맏딸이에요. 맏딸이 있음으로서 부모는 안심하고 눈 감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죽지만 우리 왕국은 살아 있으면 나는 그 안에서 부활되기 때문에. 영웅입니다.
영웅이란 말이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면 영웅은 후손들에게 거나한 장례와 매장이 용납되는 대상이 영웅이에요. 나는 죽지만 후손은 나의 시신을 눈에 보이는 지상 바로 밑에 음부에다가 스올 세계에다가 나를 매장함으로서 죽은 자의 집합체에 후손들이 뭘 하느냐? 보증을 해줘요.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다웠다. 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내가 존재하니 내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냐.
그러니까 아버지가 좋은 게 아니고 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누가 있게 되었다? 내가 차기 왕이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먼저 계심의 덕택이다. 따라서 아버지를 잊지 말고 모심으로서 나는 계속 왕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게 인간 세상의 매장의 풍습입니다. 장례풍습이에요. 그러니까 여기 무덤엔 영원토록 할 순 없지만 대대로 가까운 조상부터 모시게 돼 있어요. 그 가까운 조상 무덤에 또는 요새는 납골당에 자기 조상이 있지요.
이 말은 ■무덤에 누가 있다? 나를 있게 한 원인자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살아 있는 나는 의미의 바탕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되지요. 만약에 무덤에 시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거는 저주받은 자지요. 그렇지요. 예수님의 무덤에 시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빈 무덤을 믿는 거예요. 없어요. 인간들이 아담의 모든 세계관 자체를 거기서 벗어난 걸 자유라고 해요. 이게 자유에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교회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추도예배를 드릴까요, 말까요? 우리는 복음 전해서 추도예배를 안 드립니다. 자알 했습니까? 추도예배를 하는 것이 나쁘냐, 좋으냐하는 그 문제가 왜 잘못됐느냐 하면 인간은 죽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나의 죽음을 결코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죽는 죽음은 생명나무가 투입된 그 죽음, 독특한 유일한 죽음, 십자가의 죽음에만 참여할 수 있어요, 성도는.
성도는 죽지 못해요. 그러면 성도 대신 죽으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여자 세 명이 갔는데 없다니까요. 무덤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냐? 시체가 없으면 입었던 베옷도 같이 없어져야 되는데 베옷만 덜렁 개어져 있고 그 안의 주인공이 없어져버렸어요.
여자들은 이게 자기 정서 관리가 안 됐어요. 좋아해야 될지 무서워해야 될지를 모른 거예요. 두 가지의 감정이 교차된 겁니다.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무서운 것은 자기를 지금까지 존재케 했던 이어져오는 모든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갑자기 자기의식이 뻥 뚫린 거죠. 기쁘다는 말은 뭐냐? 살 수 있는 가능성, 주님이 도망친 게 아니고 살 가능성이 있다는 걸 내비쳤으니까 그것으로 남은 제자들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제자들이 찾아왔을 때 뭘 전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겼던 말씀을 전해요. 말씀은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는 내가 보이지 않는 말씀과 연계하려고 시도했는데 인간의 육신이 약해서 실패한 거죠. 그런데 이제는 실패한 쪽에 바로 말씀이 직접 찾아온 거예요. 어떤 식으로? 나타났다? 아니요. 보이지 않는 식으로 나타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죠.
말씀 따로 아담 따로 있다가 시편 55편에서 다윗이 무고하게 쫒기잖아요. 처음에 다윗이 복수해달라고 이래요. 너무 힘들다고 한다고요. 말씀 따로, 자기 육신 따로 있지요.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투입되지요. 언약이 투입되면서 다윗은 육신을 통해서 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자아 사이를 깨닫게 돼요.
그러면 현재 육신으로부터는 원수가 있었는데 이 원수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친한 친구라 했지요. 친한 친구가 나를 배반할 때 ‘나’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나를 배반한 원수로 인하여 내가 그동안 한 통속으로, 이게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친구라며 좋게 지냈어요. 좋게 지낸 그 사이가 원수가 될 것이라는 것은 다윗 쪽에선 몰랐어요. 늘 친하게 지냈으니까.
여기 아히도벨이라 하는데 물론 아히도벨과 친하게 지냈지요(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 삼하15:12). 나중에 압살롬 반란 때 반대편에 섰으니까 “네가 나를 배신하고 반대편에 설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말은 아직도 자기 육신에 하나밖에 없는 자아에 의존했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다윗이 복수를 요구했다고요. 나를 배반하다니 저건 죽어야 돼, 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들로 하여금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하옵소서.
여러분, 장례를 치르지 못할 정도로 내침을 당한 분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서 장례되었지 그쪽에서 아예 죽어서도 영웅 대접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옛날에는 반역자는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그 시신을 들판에 그냥 짐승의 밥이 되도록 까마귀밥이 되도록 그냥 내쳤어요. 법적으로 장례를 못 치르게 했어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라는 책에 보면 나와요. *소포클레스의 테베(비극) 3부작 <오이디푸스 왕>, <클로누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반역죄가 제일 큰 죄에요. 능지처참하는 것도 반역죄에요. 물건 훔쳤다고 그러진 않아요. 반역죄가 제일 힘든 것은, 반역죄는 뭘 건드렸느냐 하면 대대로 내려오는 선조와 후손을 연결하는 이 관계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왕이 세습되잖아요. 여기 왕 자리에 대하면 이건 반역죄 돼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 태양의 노선을 건드리면 이거는 삼족을 멸하는 겁니다. 왜냐? 아버지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했으니까. 이게 어디 김정은만의 이야기입니까? 우리 이야기는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말고 우리 할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마라.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그걸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하지요. 이게 뭡니까? 노선이 무슨 노선? 아담의 노선이에요. 그 아담의 노선에 다윗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이 빈 무덤이에요. 끊어졌어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무슨 언약? 할례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도 죽이려고 했어요.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해야 될 모세를 죽이는 이유가 뭔가 누락이 됐어. 뭐가 누락이 됐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안 죽였어요.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 이 말이에요. 언약적 아들을 위해서 모세가 활동해야 되는데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육신의 아들로 그저 데려가는 거예요.
출애굽기 4장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한 이유가 뭔가 빠져있기 때문에, 요소가 빠져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이 요소가 빠지면 하나님의 일이 안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뭔가? 나는 내가 나를 관리할 대상조차 아니라는 사실을 빠뜨리면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이 문장은 적어놔도 괜찮아요.
‘감사하지 않거든 움직이지 마세요.’ 감사하지 않거든 뭘 하지 마세요. 여기 드르륵 공사 중이죠. 주께 감사하면서 공사했습니까? 감사라 하는 것은 이 인간은 태어나면서 불만이에요. 미흡하니까, 욕망을 채울 수 없으니까. 욕망을 채울 수 없으니까 인간은 움직입니다. 움직이죠. 불만이 불만을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결과는 만족스럽습니까? 일시적이죠. 또 불만이에요. 완전히 운전면허 더더더더 하는 것처럼 그래 돼요.
왜 복음을 들어도 복음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내 불만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복음을 이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들어도 불만스럽다는 말은 뭡니까? 이 하나님의 언약이 내게 유리한 용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자아가 계속 아담의 노선에 머물겠다고 고집하는 고집스런 자아뿐이에요. 자기를 영웅시하는 겁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다윗이 왕이거든요. 왕이니까 얼마나 친구가 많겠어요. 그 친구한테 배신당한 거예요. 그럴 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그게 왕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왕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은, 현재 이스라엘 자체가 유령 같은 거짓된 이스라엘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왕이기 때문에 내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은 진짜 이스라엘이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사울 왕 때 사울이 이스라엘을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시편 55편에서 이거는 내가 생각한 이스라엘 말고 내가 배신당하게끔 만드는 다른 언약의 이스라엘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할 게 아니고 나의 모든 것은 주께서 친히 담당해야 될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게 시편 55편 22절입니다. 누가 읽어볼까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됐습니다.
이 짐을 불만스러워서 맡깁니까, 감사함으로 맡깁니까? 이게 나에서 떠나야 된다는 것, 두 번째는 나는 내가 아니에요. 주님께서 언약으로 채워주기 때문에 육신의 나에서, 아담의 나에서 새로운 마지막 아담, 영원한 아담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나에게 손을 떼게 만드는 그러한 능력이 언약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나한테 손을 떼는 거예요. 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감사할 때만 움직인다는 말은 감사가 실릴 때만 움직이면 돼요. 어떤 때 감사가 되느냐? 나는 감사가 나와요? 불만이 나오죠. 불만한 내가 작살날 때 누구로부터? 동일하게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넌 나와 친구 아니냐고 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나에게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원수와 나와 친구였잖아요. 친구는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가 통하는 자가 친구였다.
이 친구 속에 누가 있어요? 옛날 내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여기 지금 언약이 왔잖아요. 언약이 오니까 주님께서는 여기 있는 나를 뽑아내기 위해서 이 친구라는 자에게 어떻게 됩니까? 언약이 접속되면서 배신당하는 거예요. 왜냐? 언약으로 오신 분 자체가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신당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신당한 요소가 우리한테 오니까 나도 친구한테 배신당하는 경험이 있으면서 우린 발악을 해요. 너무 사는 게 힘들다고. 그런데 주님께 맡기니까 언약노선으로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감사할 만한 조치란 걸 알 때 그다음부터 우리는 감사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 감사가 실리는 화차로서 드디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까 여러분 답변을 해보세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존재하느냐, 마느냐 이것이 문제다.’ 이걸 번역할 때 사람들은, ‘사느냐, 죽느냐’에요. 그러나 인간은 죽을 수 없어요. 인간은 죽을 수 없는데 셰익스피어도 그렇게 생각해요. 삶의 반대가 죽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사는 것 자체가 죽음이에요. 왜?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죽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말이 안 되잖아요. ‘계속 죽어있을 것이냐, 마느냐’ 이렇게 돼야 되지요.
인간이 사는 것도 죽음이라면 우리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사는 것도 죽음이고, 죽는 것도 죽음이니까 이것이 문제 자체가 될 일이 없어요. 그게 감사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여지도 없고 골라잡을 위치에 있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로다, 했거든요. 그런데 존재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 문제는 이미 예수님께서 가져간 문제에요.
왜냐하면 존재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통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 있으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말이 맞지요. 뭐로 존재하는 데요? 안에 귀신이 실려서 귀신의 화차니까 죽음을 실어 나르는 화차, 인간은 이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어도 죽음이 살아 있는 것이고.
주께서는 인간세계를 뭐냐? 빈 무덤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 세상 전체가 죽음으로만 설명이 되는 세계로 우리에게 안겨주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이 세상의 모든 골칫거리는 지가 죽을까봐 자기 죽음을 거론하면서 설명하고. 그 차이뿐이죠.
그러니까 보응한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19절에 보면 초반의 단어가 뭐죠? “태고부터” 다윗이, 다윗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으니까, 갑자기 다윗이 뭐로 바뀌었어요? 예수님으로 바뀐 거예요. 다윗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아버지, 태고로부터 있었던 그 관계가 지금 현장에서 드러나게 하옵소서. 다윗이 언어로 표현돼 있지만 그 안에서는 예수님이 하실 일이 다윗 안에 그게 들어있었던 겁니다.
태고로부터 뭘 하느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 복수하게 하옵소서. 이것은 인간 다윗, 이스라엘 왕 다윗을 앞장세워놓고 안에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난데없이 친구한테 배신당하는 이 모습이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다윗에게 보여준 거예요. 이게 어떻게 다윗에게만 해당되겠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은 아직까지 미진한 다 일어나지 않은 예수님 때가 아니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야기했다면 우리 성도의 입장은 뭡니까? 시편 55편은 다 이루어진 상태에서 우리는 고스란히 이 경험을 하게 되고 이 경로를 밟게 되는 겁니다. 보응하는데 기준이 있어요. 복수할 때 하나님이 나를 복수하는 그런 건 없어요.
그다음에 봅시다. 20절에 보면,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뭘 배반했다? 그 언약을 배반하는 거예요. 이것을 설명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에요. 이게 과학의 세계죠. 과학의 세계는 눈이 보이는 걸 관찰하는 것뿐이에요. 아주 친근해요. 그리고 아까 과학자가 뭐라 했습니까? 죽어서 어디 가느냐에 대해 모르겠다고 했지요. 그냥 모르겠는 거예요. 이 근방을 모르는 거예요.
모르겠으니까 끄집어낸 아이디어가 죽은 조상은 이 땅 밑에 무덤에 묻혔다. 자기 손으로 조상을 묻었으니까. 그리고 위에 하늘과 관련해서, 땅 속에 무덤이 있으니까 시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가 박테리아에 대해서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모르겠다, 하면 돼요. 무조건 모르겠다, 하면 돼요. 모르겠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이것만 안다는 거예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 있고, 보이지 않는 점선 이거는 하나님이 마저 채워져서 무엇이 가치를 높여 달라? 우리가 행한 것을 높여 달라. 이게 바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까 죽은 자에서 뭐가 올라온다? 여기서 무저갱에서 올라오죠. 이거는 음부의 지하법이에요. 이거는 뭡니까? 지상법이 되겠지요.
보이지 않는 지상법에 누가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나타나서 어디까지 갔습니까? 음부까지 내려갔다 올라갔다고요. 그러니까 지하법, 지상법 누가 다 관장합니까? 주님이 관장해요. 마지막 때 주께서 재림하실 때 무덤에서 올라오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거쳤기 때문에 자기 고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여기 있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리가 이 지상법, 지하법 다 관장하시는 언약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여기 눈에 보이는 육신 말고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다 이루었음이 여기에 이렇게 오는 거예요. 들어오게 되면 지금 설명하는 게 뭐냐? 새롭게 들어온 여기 뭐가 있느냐를 설명해야 돼요. 주께서 다 이루었다 했는데 뭘 이뤘느냐 하는그 점이에요.
처음에 이야기한 이걸 이렇게 하겠습니다. 처음에 삼각형 이야기했지요. 눈에 보이는 것과 승천했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승천하신 분이 재림하시니까 재림도 역시 가려져있는 거예요. 삼각형 이 그림을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이걸 좌표로 그리면, x축과 y축이 만나는 지점 0, p라는 지점이 있으면 x축에 4라면, y축에 5라면 p의 좌표는 p(4,5), 이게 뭐냐? 인간이 현재 자기의 좌표가 되는 겁니다. 이 전체가 인간의 하나의 사회공동체가 돼요.
그런데 여기 이상한 게 있어요. 여기 0은 누가 정하느냐? 이 원점은 누가 정하느냐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회사 과장이다. 그럼 나는 어디 있어요? 어느 회사 과장으로 있겠지요. 과장인데 과장인 이 지점만 나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우리 마음속에 뭡니까? 원점이 있는 거예요. 원점은 뭐냐?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나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나를 그걸 기점으로 해서 ‘에게 나는 아직 과장밖에 안 됐다’ 이러는 거예요. ‘잘못하면 과장으로 퇴직할 수 있겠네. 계산해보자. 연금 얼마 될까?’
그러니까 인간에겐 항상 무엇이 사라지지 않아요? 원점이 사라지지 않아요. 이 원점이 아무리 인간은 벌써 자아가 두 개에요. 내가 뭔가 고대했던 그 나, 그리고 현실적인 나, 이 두 개의 자아가 항상 움직여서 이 사이에 불만요소로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좌표입니다.
자,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줄 때 과장 이쪽을 공격하겠습니까? “너 예수 믿었으니까 사표 내라. 사표 내고 선교사해라.” 이렇게 나옵니까? 아니잖아요. “네가 글 좀 잘 써서 노벨문학상 받았으나 예수 믿었으니까 찢어버려라.” 이럽니까? 상금이 (1000만 크로나)13억 정도인데 그걸 왜 찢어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노벨문학상 받았는데 상금은 명예직이라 하나도 없다. 그럼 사람들이 부러워하겠습니까? 전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상황, 이 공간이 눈에 보이는 공간에서 두 개 다 발생된 거예요. 좌표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네가 천막을 만들든 네가 백수가 되던, 안 그러면 장사를 하던 거기에 대해서 묻지를 않고 뭘 바꾸느냐 하면 이걸 바꿔요. 성령을 통해서 이 원점을 공격해버려요. ‘너는 죽었다’가 되지요. 그럼 어떻게 바뀌느냐? ‘사느냐, 마느냐’에서 ‘의냐, 죄냐’로 바뀌어요. 이게 바뀐다고.
내가 의롭다가 아니라 네가 ‘의를 보여주느냐, 죄를 보여주느냐’ 이걸로 바뀐다 이 말이에요. 이걸로 바뀌려면 우리 생각에서는 항상 죄, 의보다도 내가 존재하느냐, 마느냐 이게 우선입니다. 존재한 내가 의로우냐, 존재한 내가 악하냐 이걸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나부터 존재하고 내 존재가 의로워야 천국 간다, 이 논리로 교회 다녀요. 교인들 다 그래요. 또 목사도 그걸 노리고.
그런데 주님께서 뭐냐? 의와 죄를 위해서 네가 존재한다고 바꿔버립니다. 그러면 의는 누구냐? 우리는 의가 없어요. 누구 의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의가 이 자리에 원점에 있으면 우리가 있는 모든 자리는 원점과 거리가 먼 죄인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자기의 증인되게 하는 겁니다. 좌표의 원점이 바뀐다고요. 빈 무덤이 내 무덤을 대신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빈 무덤에 빨려 들어가서 부활되지 여기서 부활되지 않아요. 반드시 십자가로 가서 부활돼야 돼요. 십자가로 가면서 우리는 무엇이 부정당해야 돼요? 나의 옛사람 자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옛날의 아담 노선이지 새로운 예수님 노선이 아닌 것을 알면서 우리는 부활에 참여하는 겁니다. 여기서.
시편 55편의 모든 말씀은 언약 안에 들어와서 주님의 자아로 바뀌면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감사로 이어지게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바꾼다는 사실을 그것조차도 새삼 감사하게 하옵소서.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움직이기에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