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비 언약과 함께

아빠와 함께 2025. 4. 16. 10:37

20250414a 부산강의 : [시편]75(59:11)-비언약과 함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59편입니다.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1.  {For the choir director; [set to] Al-tashheth. A Mikhtam of David, when Saul} (sent [men,] and they watched the house in order to kill him.) Deliver me from my enemies, O my God; Set me [securely] on high away from those who rise up against me. 영장, 찬양지휘자죠. “알다스헷에 맞춘” 가락이 있는데 지금 어떤 가락인지 몰라요. 그 가락에 맞춰서 가사가 시편 59편이 쓰여졌다는 뜻이죠.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라는 노래에요. 노래 가사가 이렇게 험악해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그게 노래 가사라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가사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울이 사람을 보내서 다윗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신바다, 이렇게 되지요. 그래야 찬양이 되니까요.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세계에서 이렇게 주어져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인간은 그냥 가만히 두면 인간들 일만 생각하거든요. 인간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하나님의 일이 나오질 않아요.

인간은, 개인은 개인만 상대해요. 여러분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 이야기 빼놓고 이야기가 되던가요? 안 되지요. 항상 문장에 보면 앞에 되냐? 나는, 해놓고 ‘그 사람을’ 또는 ‘너를’ 항상 이렇게 나라는 인간과 개인과 너, 그라는 개인, 트럼프가 어떠니 인간이잖아요. 인간 대 인간의 이야기만 인간에게는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안 나오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 오늘 시편 59편에 다윗은,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서 나를 죽이려한다. 그런데 이것이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 개인과 개인의 다툼을 유발하도록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개입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뭡니까? 개인과 개인으로 끝나지요. 의미가.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과 다투었다. 고로 그러므로(수학에서 점 세 개, ∴) 나는 정당하다’ 이걸 가지고 자기 존재 변명이라 합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이걸 ‘자기 의’라고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그 당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데 어제 오후에 언급했잖아요. 기도, 구제, 금식을 했을 때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이 기대하는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에게 의롭게 비추지 않도록 행동하라.’ 왜냐하면 주님이 보시기 때문에. 일은 주님이 했는데 영광을 왜 네가 마지막에 차지하느냐. 그러면 일을 벌인 하나님에게 돌아갈 몫이 있어요, 없어요? 몫이 없잖아요.

개인 대 개인, 또는 인간 대 인간 여기서 나오는 생산은 뭐냐 하면 자기변명이라 했지요. 자기변명은 자긴 의로우니까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착하고, 그다음에 바르게 산다, 이렇게 되지요. 인간은 착하게 바르게 살면서 어디 가느냐 하면 지옥 갑니다. 지옥 가는 공식, 제가 방금 이야기해드렸습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면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교도소 열 번 갔다 온 사람 천하의 강도도 자기는 자기한테 어떤 사람이에요? 착하고 바른 사람이에요. 그것만 끄집어내서 자아로 꽃다발처럼 형성했기 때문에.

-자살은 뭐예요?

자살한 행위가 얼마나 내가 남한테 하고 싶은 것을 나 하나 희생될게, 그게 자살이에요. 내가 남한테 원망할 수도 있지만 내가 인간성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알아서 죽을게. 내게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 지적할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지만 내가 다 입 다물고 나 혼자 스스로 희생물 될게, 그게 자살 아닙니까. 자기 의의 극단적인 모습이죠. 그게 가만있는데 자살합니까? 무슨 관계 때문에? 개인과 개인,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착하고 바르게 살면 지옥 갑니다. 그럼 문장으로 하면, ‘나는 악하고 죄 많고/죄 뿐이고 나쁜 짓 많이 했습니다’ 이 사람 어디 갑니까? 지옥 갑니다. 그러니까 나는 악하고 죄 많고 죄인이라는 것도 어디 속해요? 우회적인 자기 의가 되지요. 이걸 누가 했느냐? 바리새인들이 이걸 했어요. 금식하면서 나 죄인입니다, 이렇게 했어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오지요.

이처럼 인간은 착하고 바르게 산다, 선 의식이죠. 나는 이렇게 악하다, 악 의식이죠. 인간은 선악 구조에서 못 빠져나와요. 이 인간을 누가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죠. 인간으로 하여금 착하든 선하든 자기 자신이 누구의 종이 된다는 의식이 없어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되고, 하기 나름이라는 이 점에 대해서 인간으로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한결같아요.

그러면 다윗에게, 오늘 시편 59편은 다윗 이야기니까 시편 59편에서 다윗의 이야기는 무슨 말인가? 다윗은 개인과 개인, 나와 사울 이야기에 누가 의도적으로 끼어드느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은 여호와인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앞장세울 때 그걸 여호와라고 해요. 언약을 앞장세우는 이유는, 언약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에게만 나온 게 언약이에요.

언약이 왜 하나님께만 나오느냐 하면, 언약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 영원 전부터 두 분 사이에 체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언약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몰라요. 이걸 로마서에서는 영원한 비밀이라고 해요. 창세전의 비밀이라 모르는 거예요. 이 비밀을 하나의 사례, 샘플로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미리 준 겁니다.

미리 준 것이 바로 모세언약, 그다음에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다윗언약이에요. 언약은 하나님만 아시고 인간은 전혀 모르는데 하나님만 아시는 그 비밀이 인간세계에 연착륙했을 때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릴 때 비행기가 멀리 있으면 땅에 있는 사람에겐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비행기가 가까이 오고 뭔가 착륙하려고 가까이 오게 되면 비행기가 보이지요. 아예 비행장에 내리면 다 보이잖아요. 이게 신약이고 공중에 떠서 착륙하려고 시도하게 되면 희미하게 보이고 불분명하지만 있기는 있고 보이긴 보이지요. 그게 구약입니다.

그러니 지금 시편 59편을 보는 것은 희미하게 보이는 거예요. 히브리서 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옛날에는 선지자와 말씀으로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그 선지자의 말씀이 인간의 모습으로 덩어리 체로 아예 하나님이 직접 인간세계에 하나의 인간 모습으로 등장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인데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하나님으로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죽으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죽습니다. 이야기 들을 것도 없이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면서 대행자 아들을 통해서 인간세계에 섞여서 살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되느냐 하면 개인 대 개인처럼 인간 대 인간처럼 하나님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상대자로서 인간으로서 마주하게 된 겁니다. 유대인들의 소원이 뭐냐? 하나님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거는 이방인들의 소원이, 하나님 보고 싶다는 게 왜 안 됩니까?

이방인들한테는 하나님이 보고 싶은 게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을 만들어냈잖아요. 보고 싶은 게 없지요. 자기가 만들어내면 되니까요. 사람 중에서 뽑아서 신을 만들면 되잖아요. 그게 부처 아닙니까. 좀 남보다 깨달은 게 많다든지, 지식이 깊다든지 ‘너 하나님 해라, 신이 되라’ 하면 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고 이런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말라기 이후에 말씀이 끊어지고 난 뒤에 메시아가 여럿 등장했어요.

내가 하나님께서 보낸 자라고 등장했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아버지를 자꾸 보이라고 하지 마’ 예수님한테는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에요. 인간들은 하나님을 원하고 정작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경우라고 하나님을 모르게 돼 있어요. 어떤 경우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느냐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그 고리, 그 관계에 끼어들 때만 비로소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난 게 됩니다.

“내가 이 지상에서 하는 일이 곧 아버지의 뜻이다. 따라서 달리 아버지의 뜻을 찾지 마. 아버지의 뜻은, 내가 독점했으니까 네가 자꾸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세우지 말고 내가 하는 행위가 아버지 뜻의 전부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그게 전부에요. 만약에 우리가 따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그거는 예수님의 뜻을 제치고 지 마음대로 다이렉트로 관계 맺으려하는 쓸데없는 짓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걸 보여줬기 때문에 우리는 딴 것 들을 필요 없어요. 마태복음 17장 변화산 이야기에서 구름 속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 ‘저’가 누구죠? 너희는 딴 생각 말고 내가 보낸 예수의 말만 들으라. 방금 그 이야기를 여러분 잘 아는 공식으로 이야기할게요. 인간은 선악과를 알기 때문에 이래나 저래나 정녕 죽으리란 원칙에 의해서 지옥 갑니다.

지옥 가는데 여기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아는 공식이에요. 중간에 피가 들어와요. 피가 들어오면 인간은 지옥 가면서 무엇을 견지하고 유지하려고 하느냐? 나는 착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바르게 살도록 노력했다. 아까는 목사님,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 했는데 ‘노력했다’는 말 왜 합니까? 왜 하느냐 하면 나는 착하고 바르게 살도록 노력한 게 착함이 돼요. 이게 최선을 다했다 이 말이에요.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것은 그만큼 내 속에 속함이 여전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착하고 바르게 살도록 노력했다, 이 교리 있잖아요. 이 교리의 종교가 바로 천주교입니다. 이게 천주교의 실체입니다. 이게 전부에요. 천주교는 성선설이죠. 날 때부터 인간은 착하다. 천주교와 유교, 불교. 불교는 뭡니까? 날 때부터 부처다. 도를 안 닦아서 그런데 도만 닦으면 누구든지 부터가 된다. 부처 믿지 마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왜? 네가 부천데 다른 부처가 있느냐. 네가 절대자인데. 이겁니다.

여러분 교회 와서 이런 성선설, 이런 천주교, 불교 이론 하게 되면 사람들이 다 은혜 받아요. 물론 천주교, 불교라고 말 안 하죠. 말 안 하지만 여러분들 속에는 바르고 착하게 살려는 게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고 노력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진짜 노력하는 자질이 있기 때문에 그 자질을 묵히면 안 되잖아요. 그 자질을 여러분들이 양성화시키면 바르게 사시면 여러분들에게 준비된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 목사의 긍정적 마인드, 긍정적 사고방식이 설교로 나와요. 그러면 교인들의 반응은 뭡니까? 중간, 중간에 뭐가 나오죠? 아멘 나오고, 예배 마치고 오늘 은혜 많이 받았다가 돼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오후 설교 기도제목으로 이걸 했어요. ‘심판 없는 하나님은 사기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건 다 아는 이야기 아니냐. 제가 하는 말은, 심판 없는 하나님은 사기입니다. 그다음에 더 나가면, 심판의 기준을 모르고 있으면 그거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거다. 이렇게 되는 거죠. 심판하는 하나님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기준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이 언약이에요.

여러분, 유월절 할 때 죽는 사람의 성품, 착하고 바르게 살려는 자질, 이런 게 없어서 죽었습니까, 뭐가 없어서 죽었습니까? (피가 없어서) 누가 이야기했어요? 피가 없어서. 얼마나 복음이 간단합니까? 복잡하지 않아요. 간단해요. 하나님께서 받는 것은 언약을 완성한 그 피만 받아요. 성품, 인격, 품격, 효자, 노력한 것, 부부가 사이좋은 것, 이런 것 안 봅니다. 자식을 몇 키우고 아예 안 봐요. 오직 피만 보시고 천사들이 그 피 없는 가정은 다 죽였습니다. 팩트입니다, 이게.

종교 만들 필요 없어요. 이게 팩트에요. 교인들 끌어 모으려고 조작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교회 교인 몇 명이다, 그걸 의식할 필요 없어요. 이래서 한국에 교회 남아있겠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주께서 택한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니까. 주님이 할 걱정을 지가 왜 하고 있어요? 믿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있든 없든 니가 걱정할 소관 아니잖아. 교인수 많으면 갑자기 기쁨이 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피만 생각하면 기쁨이 와요? 도대체 어느 기쁨을 여러분 호응합니까, 어느 기쁨을 받고 싶어요?

그래서 여기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피를 주게 되면 지옥 갈 인간이 피가 제공된 그곳으로 가요.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피 믿는 게 아니고 피를 제공한 쪽에 모가지 잡혀 이끌려서 그 피와 관련된 그분, 피 흘리신 분이 마련한 그분 세계에 합류하기 위해서 이끌려가는 것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떻게 잘 먹고 행복하고 그 세계가 아니에요.

누구신데 저한테 피라는 것을 주십니까? 피로 끝난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복종하는 그 순간 우리의 이 땅에서의 모든 행위가 무가치한 것이 돼요. 아무 소용없어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 핵심은 예수님이 복종을 완성했는지 그게 관건이에요. 내가 어떻게 말씀대로 사느냐가 관건이 아니고, 세상에 말씀대로 사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무슨 말씀대로 살아요? 그런 인간 없어요. 착각하지 마세요.

주님이 어떻게 했고 그걸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벽탁송으로 보내 준 거예요. 왜 새벽탁송이냐 하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잠자고 있을 때 죽어 있을 때. 경상도 말로 깨벤다 하지요.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에베소서 5장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5:14)

너에게 영생을 주겠다. 일종에 복음은 마약주사입니다. 그냥 영생을 일방적으로 허락도 없이 집어넣어버리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슈슈슛. 이걸 제목 비슷하게 이야기한다면, 화살 맞은 멧돼지. 천방지축 그냥 지 잘난 맛에 날뛰고 있는 슈슈슛, 화살을 쏴버리는 거예요.

필리핀 오지에 가면 아직도 옷을 벗고 사는 원주민들이 있답니다. 그 사람들 요리 중에 하나로 옛날 스페인 통치시절의 요리가 남아있답니다. 멧돼지를 작대기로 쑤셔서 양념 바르면서 불에 돌리는 요리가 바비큐거든요. 그 바비큐를 스페인 통치 받으며 처음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꼬챙이에 꿰인 화살 맞은 멧돼지죠.

사도 바울은 이걸 좀 점잖게 표현했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뭐가 관통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관통한다. 내 안에는 주님의 언약이 관통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거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새 언약의 효력 속에 능력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실을 오늘 시편 59편에서는 방금 신약적 이야기가 지금 구약이기 때문에 비행기가 아직 착륙을 안 했어요. 희미하게 보이니까 이게 뭐로 보이느냐 하면 그냥 다윗과 사울, 사울과 다윗의 인간 대 인간, 개인 대 개인으로만 우리에게 그렇게 비치는 겁니다. 시편을 달달 외웠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시편을 보면서 그들이 뽑아낸 교훈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 또는 구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지상에 오시지 않았어요. 그냥 하늘에 계시고 언약을 줬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말하기를 이 땅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의 할 일은 뭐냐?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까 중간에 뭐가 개입됐다? 언약과 말씀이 개입됐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말씀을 제대로 지키면 지키는 분량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어요. 왜? 비행기가 착륙을 안 했으니까.

점진적인 거룩을 이야기했어요. 누가?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점전적인 거룩을 언급한 자가 누굴 죽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했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누구지요? 사울이죠. 사울 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에 열심을 냈고 인정을 했다 이 말이죠. 인정해서 현재 있는 거룩에다가 더 추가적인 거룩을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옥에 가두었잖아요. 사도행전 22장에서. 자기가 죽였다고 돼 있어요(4절,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점진적인 거룩을 시작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바리새인을 염두에 두고,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서기관과 장로들을 염두에 두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어떤 내용을 전하겠습니까? 잠시 여러분이 예수님이라 치고 이런 사회 속에서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아주 극단적인 내용이 담기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희는 점진적인 거룩, 여호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너희의 아비는 악마다.

졸지에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악마의 대리인으로 보는 거예요. 악마의 새끼, 악마의 자식. 그걸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라고 했어요. 분위기가 험악하지요. 예수님 당시에. 우리에겐 낭만적이지만 그 현장에 있을 때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악감정이 아주 굉장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점진적인 거룩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점진적인 분노, 악감정으로 바꾼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감추는 방법이 뭐냐? 점진적인 거룩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너희는. ‘이렇게 착한데 복을 안 줘?’ 이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분노, 내 인생을 조져놓은 신에 대한 분노를 안 들키면서 감추는 방식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인생을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 드리면 살고 있지.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하나님 욕했어.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으니까. 그만큼 기도를 많이 했고 헌신, 봉사를 했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야.”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감추고 있는 면면이었습니다.

이거는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이야기고, 예수님 이야기니까. 비행기가 공중에 있을 때는 개인 대 개인에 의해서 다른 관점을 봐야 돼요. 제가 이렇게 하면 착륙한 것 다 아는데 구약 볼 필요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구약을 거쳐야 신약에 오니까 그 절차, 경로를 우리가 밟아야 돼요.

개인은 어떻게 산다? 개인은 슬픔과 기쁨으로 삽니다. 이걸 한 마디로 하면 인간은 뭐로 산다? ‘인간은 기분으로 산다.’ 이걸 이야기한 철학자들이 많이 있어요. 쇼펜하우어, 그다음에 니체 이런 사람들이 이 주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개인은 슬픔과 기쁨으로 산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에요, 안 그러면 평소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린 변덕쟁이 아니에요? 변덕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감정의 기복이죠.

어떤 때 기쁘고, 어떤 때 슬프냐? 뜸 드릴 것 없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내 것 다치면 슬프고, 내 것 잘 되면 기쁘지요. 우리의 일상에 아침에 눈 뜨고 심지어 밤에 꿈꿀 때까지 아 기쁘다, 아 슬프다가 전부 다 뭐냐? 내 것이에요, 내 것. 인간이 존재한다, 있다는 것은 추상적이에요. 이거는 허황된 것이고, 안의 실내용은 뭐냐? 내 소유에요. 나를 증명해야 될, 내가 여기에 살아야 될 이유가 이렇게 당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소유물이 있어야 돼요. 그 소유를 누가 건드리면 슬프고, 만약에 내 소유가 잘 되고 칭찬하게 되면 같이 격려해주면 우리는 기쁜 거예요.

자, 그러면 이 점에 대해서 시편 59편도 이런 비행기가 떠서 희미하니까 맨 이러한 슬픔과 기쁨의 감정으로 지금 다윗은 시를 쓰고 있습니다. 자기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기쁨과 슬픔을 실내용을 점검하지 않고서는 오늘 본문에 못 들어가지요. 뭐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기쁘고, 또 슬프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더 깊이 있게 나가보겠습니다. 기쁨보다 슬픔 먼저 이야기할게요.

인간은 뭐로 돼 있다? 내 소유로 돼 있다. 그러면 소유는 어디서 생기는가? ‘소유는 타인 관계에서 얻은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잘 이해 안 되시면 예를 들게요. 지금 어느 대목이냐 하면 우리가 왜 슬프냐는 그 이야기입니다. 내 것을 잃었을 때 슬프다는 이 이야기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있는데 남편과 만나면 늘 싸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먼저 죽었습니다.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주위 사람들이, “안 됐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라는 말을 건네잖아요. 그 말은 뭡니까? “친구야. 너 좋겠다. 잔소리할 사람 없어서. 난 지금 안 죽어서 문제다.” 그 말을 돌려서 우회해서 말해주는 거예요. “이제 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겠네.” “그래. 나 슬퍼.” 이 말은 뭐냐? “네 말이 맞아.” 속으론 웃고 있다, 그런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동네의 강변에 갔을 때 인간이 그냥 강만 보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익숙한 강변에 갔을 때 왜 잃어버린 아내와 같이 왔던 그 기억이 거기서 떠오르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상실감을 느껴요. 박탈감을 느낀다고요. 박탈감을 느끼면서 ‘나는 당신이 그리워 미치겠다.’ 그리워 미치겠다는 말은 더 이상 살 기력이 다 빠져버린 거예요.

그렇게 평소에 싸우고 했는데 젊을 때 같이 걸었던 강변에 가는 순간 내가 원치도 않은 그 기억이 살아나면서 그때 나 혼자 온 게 아니고 죽었던 아내와 더불어 왔음을 느끼는 순간, 내 것을 상실했잖아요, 내 것. 내 것을 상실했을 때 우린 뭡니까? 슬픔이 되고, 슬픔이 되면 이 슬픔을 벗어나는 방법은 자살까지는 아니지만 ‘당신 따라 갈게. 그때 그 좋은 기억 생각하면 그동안 당신한테 참 미안해. 당신한테 미안한 것 보니까 내가 아직도 인간성 괜찮게 산 것 같아. 하지만 도저히 나 혼자는 못 살겠어. 당신 따라 갈게. 당신 같은 여자가 이 세상에 없었어.’

왜 그래요? 강변에 가서 그래요. 같이 갔던 유원지에 가서 그래요. 평소에는 생각 안 나는데 가는 순간 그때부터 뭐냐? 가는 곳마다 혼자 왔다는 생각보다도 당신과 같이 왔던 그때가 좋다고 해서 어떻게 돼요? 현실감, 또는 현재감이 상실되면서 그 사람은 어디 속에 삽니까? 현재에 살면서도 벌써 상실해버린 과거의 삶에서 본인이 발을 못 떼는 거예요. 발을 뗄 수가 없어요.

그다음부터는 자기의 박탈감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아내와 함께 다녔던 다방, 옛날 다방에서 같이 듣던 좋아했던 음악도 들으면서 텅 빈 마음을 계속해서 채워야 되는 거예요. 왜? 안 그러면 온전한 내 것이 안 되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것이 잘려나갔을 때에 마저 채우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내가 나답지 않다는 것은 그거는 살아도 이미 죽은 모습이죠. 내가 남이 되면 나는 없어지니까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게 슬픈 거예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슬픔이 기본이에요. 슬프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세월 지나다 몸무게가 다이어트 안 해도 몇 킬로 빠지거든요. 우연히 또 맨 그 강변에 옛날 과거의 기억을 조합하러 갔다가 멀리서 죽은 자기 아내와 비슷하게 닮은 여인이 오는데 그것도 같은 색깔이 스카프를 했어요. 그리고 그 여자도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연정, 사랑이 싹텄네요.

그러면 뭐가 돼요? 그러니까 나라는 기본 골조는 그대로 있는데 아내와 더불어 있던 그 골조에 아내 비슷한 사람이 남은 결핍을 마저 채워질 때 비로소 자기를 여기서 새로운 기쁨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게 비행기가 희미하게 떴을 때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제대로 오지 않고 교회 가서 말씀만 듣고 그걸 연구하고 공부하게 되면 본인은 상실하지 않고 본인의 것을 결핍된 것을 마저 채우는,

예를 들어서 몇 년 전에 보이스피싱 당해서 이천 만원 날아갔다면 맨날 생각하는 것이 그 이천 만원을 어디서 행운으로 찾아와야 된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봉사하면 이천 만원 돌려주겠지, 그런 마음으로 교회 온 거예요. 그럼 교회 다닌 이유가 상실해버린 나의 미진한 그 폭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 나온 셈이 되지요.

그리고 그 사람은 교회 나와서 뭡니까? 복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게 아니고 뭡니까? 내가 뭔가 더 점진적인 나다운 모습을 복귀할 가능성을 희망으로 걸고 교회 나온 겁니다. 진짜 내 마음에 딱 드는 나, 내 이미지에 맞는 나, 그래서 내가 죽도록 사랑하고 싶은 나, 그 나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신을 찾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우상’이라고 해요.

내 내면에 있는 신에 대한 바람이 바깥의 가현체, 보이는 사람이 되던, 돌이 되던, 새가 되던 관계없어요. 그게 뭐가 되던, 어떤 대상이 되던, 어떤 조직이 되던, 건물이 되던, 부동산이 되던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되고, 우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나의 대체물이기 때문에.

참 인간이 이렇게 복음은 간단한데, 복음은 뭐라 했습니까? 화살 맞은 멧돼지라 했지요.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이 이런 복음의 기쁨을 방해합니까?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화살 안 맞고 화살 쥐고 지가 지한테 쑤시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맞은 걸로 쳐주세요. 복음 아는 걸로 쳐주세요.’ 그러면서 실제로 웃고 우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나다움에 접근해 나갈 때 그걸 만족할 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긴긴 이야기가 한 마디로 말하면 뭐냐? ‘목사님 설교가 위로가 안 되네요.’ 무슨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당신은 그걸 채워줄 수 없습니다.’ 이 정도로 우리는 마귀의 새끼입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거예요. 주의 하는 일은 전혀 관심 없고 오직 내가 만족하고 행복한 것만 전적으로 관심 두는 거예요.

그 자아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데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권력을 쥐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등장했습니까? 다윗이 등장함으로 사울이 파면할 처지에 놓여있는 거예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윗을 추방하고 말았어요. 추방도 모자라 아예 뭐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죽여 버려, 죽이는 거예요. 사무엘상 19장 11절,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이 죽는 것이 사울에게 기쁨이 돼요.

아까 인간은 뭐로 산다? 기분으로 살지요. 다윗의 등장으로 내가 오롯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데 절대자가 되는 것을 다윗이 빼앗아 간 겁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도저히 이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여론조사하면 밀리는 거예요.

지금도 서울에 광화문 가면 평생의 소원이 있습니다. 제발 이재명이 죽어버려라. 남북통일보다 이재명 죽는 것이 급해요. 빨갱이 죽었으면 좋겠다. 광화문에 태극기 흔들고 성조기까지 흔들고 난리 났는데 거기서 합심 통성기도를 했는데 윤석열 파면되어 대통령 잘렸어요. 이게 남은 것은 뭡니까? 이재명이지 뭐. 그래야 내의 결핍된 것이 채워지기 때문에. 인간은 복음으로 산다가 아니지요. 뭐로 산다? 자기 기분으로 사는 거예요.

다윗은 이 문제를 어떻게 자기 감정문제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니까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시편59:1)라고 돼 있어요.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하나님이 나타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다윗 속에 있으면서 다윗의 사적인 감정의 연약함, 그리고 예민함 그걸 충분히 이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을 통해서 복음을 접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도 복음 이전에 다윗 같은 감정, 다윗 정도가 아니고 그전에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달려드는 개인적인 감정, ‘우리보고 죽으란 말인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쳤던 우리의 심보, 그런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누구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숨겨놓은 우리 내부 이야기를 말씀이 경로를 만들어서 채워주는 거예요. 그걸 해주는 거예요.

그걸 말씀의 경사도. 말씀이 서서히 타고 내려가면 성경 안에 경사도를 갖고 있어요. 말씀대로 타고 가면 십자가에 도착하는 것. 십자가는 뭐냐? ‘강도라도 감사합니다’ 그거거든요. ‘세리, 창기 되도 나는 너무 감사해요’ 이런 것. 그러나 그거는 주님의 강력한 역사, 강권이 있어야 그렇게 되고, 과정은 뭡니까? 역시 나는 내 것으로 내 인생 포기 못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연결돼야 된다. 그게 경사도를 갖고 있어야 돼요. 타고 내려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다윗이 시편 59편에서 그 내용을 한꺼번에 구조를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난데없이 사울에게 핍박을 받게 한 것은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그 전의 언약,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그다음에 모세언약까지 모든 언약과, 언약의 반대말이 비-언약이겠지요. 또는 반 언약도 될 수 있지만 비-언약.

지금 하나님의 뜻은 다윗에게 전부 다 한 점에 모입니다. 모이고 그다음에 새 언약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언약을 위해서 자기는 하나의 기점을 형성하면서 여기서 언약은 자기 이후에 이런 식으로 퍼지고, 이런 식으로 퍼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기까지 올 때 다윗에게는 슬픔이고, 여기서 자기로부터 새롭게 펼쳐질 때는 기쁨이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되는 겁니다. 이 중간에 시편 59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번째 시간에서는 이 구조, 다윗 중심으로 옛 언약이 어떻게 다윗에게 귀속이 되고 수용되고 몰려있는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0분 쉽시다.

 

 

 

20250414b 부산강의 : [시편]75(59:11)-비언약과 함께
(강의:이근호 목사)


종말이 온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확인할 수 있나? 세상 더럽다, 세상 엉망이다, 마지막이다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걸 그렇게 확정할 수 있는 것, 다윗은 나를 건드리는 것이 바로 종말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면 종말이란 뭐냐? 두 번째 강의는 약간은 어려운데 제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게 종말이에요. 모든 희망이 없는 거예요. 희망이 있으면 ‘그다음에 뭐 있겠지’가 되잖아요. 그러면 끝을 넘어서서 어떤 희망이 있으면 이거는 하나에 겁주는 거고, ‘조금만 참고 견디면 또 뭐 있어. 괜찮아 희망을 가져야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약간 사이비적인 신학에서 나온 게 뭐냐? ‘7년 대 환란’이란 거예요. 이 마지막 때에 약간만 견디면 나중에 우리는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뭡니까? 자기 종말이 아니죠. 하나의 야심이고 계획이 되는 거예요. 계획은 희망에서 나온 거예요.

종말은 뭐냐? 희망을 앗아가는 것은 무엇을 앗아가느냐 하면 모든의 계획이 무산되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근데 이 종말을 누가 이야기했는가? 세례 요한이 이야기했죠. 다윗 이야기하기 전에 세례 요한 언급하겠습니다. 언급할 수밖에 없어요. 다윗 그 자체 해석에서는 바리새인적 해석이 나오면 안 되니까. 메시아와 십자가와 최종 언약과 연관된 언약이어야 되지요. 안 그러면 언약 해석이 안 돼요. 마지막 언약, 언약이 완성된 상태에서 미완성된 다윗언약의 해석이 가능하니까요.

모든 계획이 무산되는 것이 종말입니다. 내 계획이 쓸데없이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마태복음 3장 1절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 나라라 하는 것은 요엘 선지자가 말하는 종말을 말합니다. 끝났다. 끝이다. 근데 세례 요한은 끝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례 요한 본인도 끝과 가까이 오고 있는 끝이 아닌 이 사이에 무슨 일이 남아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 건지는 있는데 어떻게 하실 런지는 몰라요.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는 세례 요한에겐 누락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옥에 있을 때 예수님에게 사람 보내서 물었지요. ‘당신이 오실 메시아 맞습니까?’ 진짜 몰라서 물었어요. 묻는다는 것은 ‘여전히 내가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까’란 뜻이에요. 희망이 없어야 되는데 인간이 이상하게 자꾸 희망을 갖고 싶네요. 어떻게 피할 길은 없겠습니까? 한 번 창문이 닫히면 다른 창문이 열도록 돼 있는 장치 없습니까? 또 샛길은 없습니까? 그걸 자꾸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는 아예 문을, 세례 요한은 ‘종말이 가까이 온다’라고 한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접수를 했어요. 접수해서 종말이 가까이 온다가 아니라 종말이 닿았다. 끝이 가까이 온다가 아니라 끝났어. 끝났다는 게 닫으면 열 자가 없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닫으면 열 자가 없다.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줘요. 들어올 수가 없어요. 닫으면 열 자가 없으니까.

천국문은 닫혔습니다. 천국의 열쇠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는 말을 더욱더 강조한 말이에요. 천국의 비밀번호밖에 없어요. 끝이란 말은 천국이 막혀있다. 끝났다, 동시에 같은 말로 너희는 이미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갇혀있는 꼴. 가두리 양식장이에요. 그동안 그 안에서 마귀 새끼들을 양식한 거예요. 가둬놓고. 애초부터 그랬던 겁니다.

그러면 이 의식, 끝났어. 그러니까 희망조차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구원되기 위한 바로 직전의 마음자세인 거예요. 그러면 계획이 없고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결국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로 주님이 우리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희망 갖지 마. 계획 세우지 마. 그 계획 너를 망칠 거야. 자꾸 계획을 세우면 우리가 뭐가 된 양 여긴다고요. 내가 희망을 가지면 아직도 자기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거든요.

아까 나눠드린 복사물에 가사가 있는데 (Kansas, 1978) 가사를 읽어볼게요.


I close my eyes
Only for the moment
And the moment's gone
All my dreams
Pass before my eyes a curiosity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나는 눈을 감아요
잠깐 동안 뿐인데
그 순간은 내 모든 꿈이 사라지죠
내 눈앞을 지나 하나의 호기심처럼
바람 속의 먼지
그 모든 것은 바람 속의 먼지일 뿐이에요

Same old song
Just a drop of water in an endless sea
All we do
Crumbles to the ground
Though we refuse to see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늘 똑같은 노래
끝없는 바다에 한 방울 같은 존재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땅으로 내려가서 부서지지요
우리가 보기에 거부해도
우리는 바람 속의 먼지
우리는 다 바람 속의 먼지에요

Don't hang on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It slips away
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Dust in the wind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오 이제 붙잡으려고 하지 마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땅과 하늘뿐
그것도 사라져요
당신의 돈으로도 단 일분도 그 시간을 살 수가 없습니다(내 소유의 시간은 없다 이 말이에요. 먼지 주제에 뭘 소유해요. 먼지의 일부인데)
먼지 속의 바람
우리 모두는 그 바람 속의 먼지

바람 부는 밤, 있다가 없어지는 바람. 먼지니까 바람이 우세하고 먼지는 약하잖아요. 어디로 불지 모를 그 바람 속에 우리는 저항하지 못하고 같이 날려서 날려가는 바람 속의 먼지. Kansas가 불렀던 노래입니다. 노래 자꾸 트니까 유튜브에서 저작권 문제 있어서, 집에서 여러분 들어보시면 됩니다.

이것 들어보니까 구약의 어느 책이 생각납니까? 전도서 생각나지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런데 이 가사가 복음적입니까, 복음적이 아니에요? 이게 복음적 내용이 아닙니다. 복음적 내용이 아닌데 이 가사를 해야 돼요. 우리가 연착륙이니까. 이게 뭐냐?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분석하고, 분석하고, 분석하고, 분석하면 나오는 것은 ‘바람 속의 먼지’ 이게 모든 인간이 지 딴에 머리 깎고 먼 짓을 해도 연구해도 결국은 인간은 헛되고 헛되다는 그게 끝이에요. 뭘 해도 헛되다. 아무것도 아니다. 더 나가면 인간은 허상이다, 허무하다.

때로는 그런 남편들이 많아요. 지는 도 닦고 허무를 찾아 헤매고 있고 차비와 용돈은 아내가 고생고생 요양사해서 대주고. ‘아아, 인간은 허무하다.’ 그런데 부인은 안 허무한 데 지금. 지금 애하고 먹고 살아야 되고 집세 내고 전기세 내야 되는데요? 방금 제가 이 가사를 왜 올리느냐 하면 성경연구하고 복음 공부하다가 결국 마지막 결론이 이걸로 끝나요. 인간의 한계니까요.

다시 말해서 막히고 건너갈 수 없다면 여기서 지금껏 안 진리를 총정리 해보자. 인간은 헛되다. 그다음에 나 복음 알았다. 이제 성경 안 봐도 된다. 왜? 나는 알아 버렸어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안녕히 계세요. 그다음 교회 안 나오지요. 뭐가 문젭니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상을 보면서 뭐가 문제에요? 이거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 될 문젠데 허무가 뭐로 바뀌어야 되느냐? 허무가 죄로 바뀌어야 돼요. 이걸 놓친 거예요.

내가 내 자신을 알겠다는 그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바로 교만이에요. 이게 마귀 생리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이 해야 될 일은, 인간 말고 인간을 만드신 그분이 독점적으로 갖고 있는 계획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은 그 계획을 반영하면 그걸로 인간으로선 자기 몫을 다한 거예요. 뭐 허무타령을 하냔 말이죠. 내가 연구해보니까 허무하더라. 네가 뭔데….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요. 존재는 건방지다 했지요. 인간의 모든 존재는 건방져요. 내가 존재한다는 건 건방지게 존재하는 거예요. 자기 존재를 포기 못하니까. 이게 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꾸자는 이야기에요. 인간이 연구해보니까 허무는 알아요. 그러면 허무 알면 죄 압니까? 아니지요. 허무 아는 노선과 죄의 노선이 달라요. 죄의 노선은 언약에서 와야 돼요. 왜?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버리니까. 그런데 허무는 뭐냐? 지가 탐구하면 도달되는 것이 허무에요.

예를 들어서 내가 신을 알았다. 내가 신의 존재를 안다. 사람들은 그걸 끝이라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신의 존재를 알았으니까 구원받는다. 아 기쁘다. 구원됐구나, 라고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인간은 또 생각해요. 내가 신을 믿고 예수를 믿는 이게 시효가 며칠 가겠느냐? 걱정이 늘어졌어요. 지금은 믿는데 내일모레 안 믿으면 어떻게 되지? 이게 정신병이라 했지요. 지금은 내가 나를 정상으로 고쳐놨는데 내일모레 되어서 다시 도지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예수를 모른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

‘나 예수 모른다. 예수 누구고’ 이런 사람도 있고, 만약에 치매 걸린다면 깜빡깜빡하는 순간 지금 내 믿음도 그 효과가 약발이 다 떨어지지요. 그러면 치매 걸린 상태에서 주께서 부르신다면 내가 주님을 믿는 상태입니까, 몽롱한 상태에요? 치매가 몽롱한 상태가 아니고 다시 자기밖에 모르는 상태거든요.

콘드로이틴은 누가 기억한다고요? 관절이 기억하잖아요. 내 몸이 내 위주로 마지막에 환원돼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래야 우리가 흙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창세기 3장에서 우리가 흙으로 돌아간 이유가 뭡니까? 죄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백날 도를 닦던 믿는다 하던 우리는 기어이 뭐가 돼야 됩니까? 죄인으로서 흙으로 귀환되는 게 주의 뜻입니다.

이것을 다윗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세요. 이렇게 해결합니다. 언약에서 언약을 둘로 나눠요. 언약은 반드시 언약의 그림자가 있다는 거예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림자가 있는데 그 언약의 그림자가 비-언약이에요. 비-언약의 특징, 멋진 특징이 뭐냐? 언약에 대해서 도발하는 데서 뭐가 발생되는가? 죄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은 무엇을 발생시킨다? 인간은 죄를 몰라요. 왜? 허무만 알아요. 허무만 아는데 인간이 죄를 아는 경우는 언약이 왔을 때 나는 어느 쪽에 있다? 죄 쪽에 있는 거예요. 언약으로 인하여 내가 죄 쪽에 있음에 비로소 죄를 알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왜 주님께선 십자가 옆에 두 강도를 세웠을까요? 두 강도의 차이점을 보자. 세 명이 십자가 졌는데 중간에는 누구 차지? 예수님 차지지요. 양쪽에는 인간을 배치했습니다. 인간 둘 다 강도기 때문에 둘 다 뭐가 됩니까? 죄인이죠. 근데 한쪽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한쪽은 뭐냐? 자기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보고 뭐라고 부탁하느냐 하면 “당신이 나를 이 벌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면 당신을 믿을 용의가 돼 있다.”

뭡니까? 자기한테는 더 이상 종말이 아니에요.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만약에 날 구원한다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우리 거래합시다.” 당신이 나를 건져줌으로써 당신은 나를 구원하고 건지는 사람으로 그렇게 어떤 증거를 내가 원하는 식으로 제공한다면 그렇게 그 증거를 가진 나는 이제부터 종말을 넘어서서 희망찬 미래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뭡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자기가 죽어 마땅함을 합니다.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제가 동의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은 지가 궁지에 몰렸으니까 그렇겠지, 하겠지만 궁지에 몰려서가 아니고 인간이 자기가 죄뿐인 것을 아는 이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생겨나지 않는 현상이에요. 죄뿐이란 말은 자기에 대해서 뭘 처리하는 거예요? 희망과 모든 계획 이것을 누구한데, 나로선 할 게 없어 누구한데? 완전히 일임해서 그분의 계획 속에 나를 집어넣어달라는 거예요.

주님 나라에 갔을 때 나를 기억해달라고 요구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강도 짓하는 이것도 주님의 계획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내 나름대로의 사적인 개인적인 계획은 나는 이미 손 뗐습니다, 란 뜻이에요. 왜? 나는 죄인이니까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계획 중에 포함돼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언약 속에 있잖아요. 여기서 어려운 게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뭐도 안다? 비-언약, 죄도 아는 거예요. 비-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죄도 모르고 언약도 모르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정 네 명이 천사에 의해서 강제로 나왔어요. 그러면 네 명 다 구원을 받아야 되는데 도중에 하나가 탈락했을 때에 처음부터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할 자를 멸망시키면 되는데 왜 끄집어내놓고 뒤돌아봄으로 하나를 추가적으로 제거하느냐? 그것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언약을 언약대로 드러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롯의 가정이 필요한 겁니다. 롯의 가정은 아브라함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롯의 처도 필요하고 롯도 필요했던 거예요.

롯의 처가 돌아보는 것은 누가복음 17장에 의해서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돌아봤다고 돼 있어요. 32절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그러면 롯은 왜 안 돌아봅니까? 자기의 계획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렇지요. 롯의 머릿속에 아내가 없을 때 이제는 소돔과 고모라 자기 동네 사람이 다 죽어버렸을 때 ‘우리 가정의 후손은 누가 책임지지? 옳다구나. 나한테 두 딸이 있잖아. 두 딸과 관계를 맺으면 자식을 낳겠구나’라고 롯이 생각했습니까? 롯에게 그런 계획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이미 롯에겐 종말이 자기 내부에 들어왔어요. 자기는 움직이는 끝이고 움직이는 종말이에요. 두 딸이 후손 낳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한테 한 것은 술을 먹게 한 거예요. 제 정신이 아니게 만든 거예요. 롯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술 먹여놓고 의식 없을 때 한 짓이에요, 두 딸들이. 왜? 소돔과 고모라 그 세계에선 그런 의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이 어떻게 돼요? 유예되지요. 며칠 동안? 90일 동안? 90일은 아니지만 그건 트럼프 이야기고, 관세. 불 심판은 어디로 유예됩니까? 롯의 모압과 암몬 이방나라를 통해서 마지막 불 심판까지 유예가 되지요. 유예 되면서 죄도 유예되고 언약의 완성도 유예가 되는 거예요. 언약이 있는 곳에 비-언약도 함께 그림자라 하는 것은 따라 하는 거예요.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으니까 같이 따라가게 돼 있다 이 말이죠.

다윗은 본인 뜻이 아니고 물론 계시를 받아서 그렇지만 다윗의 자기의 언약, 사울에게 억울하게 공격을 당할 때 그는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저주가 나온 거예요. ‘저주는 죄 있는 곳에 저주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을 다윗은 그렇게 고백한 게 아니고 시편 59편에서는 나를 치는 자에게 반드시 필히 하나님의 저주가 따른다. 이게 바로 다윗 중심의 새로운 언약의 구성내용이 돼요.

이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나 치면 저주 받는다’ 이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 다윗 그 시대에 다윗을 공격하면 저주받게 돼 있어요. 사울은 멋도 모르고 그런 거예요. 사울이 왜 다윗을 공격했습니까? 사무엘상에 보니까 사울에게 뭐가 들어왔어요? 악신이 들어왔지요. 그러면 사울에게는 악신, 다윗에게는 뭐가 들어왔어요? 악신의 반대말 성신. 성신은 언약과 관련돼 있고 악신은 비-언약과 관련돼 있어요. 그런데 악신이 들어간 사울은 뭘 몰라요? 다윗에게 언약이 있다는 것을 사울은 인정을 안 합니다. 인정을 못합니다. 인정할 수가 없어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말씀을 안 보는 사람에겐 뭐가 성립 안 돼요? 뒤돌아보는 게 성립 안 돼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이 말이죠. 뒤돌아보아선 안 된다는 건 어떤 경우에 해당됩니까? 이거는 성도한테 해당되는 거예요. 말씀을 바깥에서 보지 말고 말씀 안에 들어간 사람만이 돌아보니까 뒤돌아봐선 안 된다는 것, 그게 말씀 안에서 말씀을 보는 거예요. 말씀에 젖어서 보는 거예요. 수족관에 들어가서 물고기처럼 말씀 세계 안에 놓여있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쥐고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고 말씀 속에 잠겨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구약에서는 안 돼요. 신약의 새 언약 안에서 이게 완성이 되는데 여러분들이, 다윗이 다윗언약의 중심이라면 새 언약의 중심은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계시다할 때 프리즘 압니까? 놓으면 빛이 오색 색깔로 스펙트럼 퍼지듯이 여기서 퍼지는 게 뭐냐 하면 그때 인간들이 모든 악마, 여러 가지의 헌금,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반 감추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당신 인간성이 왜 그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악신을 언급했습니까? 사단을 언급했지요. 이게 개념이 스펙트럼처럼 깊어져서 언약의 내용이 깊어져서 그래요.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개념들 뭐 기도, 구제, 헌금, 봉사, 전도 전부 다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나온 개념이어야 돼요. 종교성에서 나온 구제, 선교, 전도, 헌금 이런 것 안 돼요. 모이기를 힘쓰라, 이런 종교성에 나온 것은 분명히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다 해봤어요. 성전 개념 이런 것, 구원 개념. 반드시 십자가에서 나온 구원 개념이어야 돼요.

그럼 뭘 행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받고 난 뒤에 구원의 스펙트럼의 일종으로 성도는 이 땅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지켜서 구원받은 사람 없어요. 말씀 안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걸 예수 안, 성령 안, 또는 십자가 안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비-언약이 보여요. 종교성에서 나오는 성경 해석과 십자가 안에서의 해석이 종교성에서 나온 것은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그 안에서 봐야 언약 안에 들어간 사람은 알아요.

그러면 언약 안에 들어간 사람은 죄 아니고, 종교성에만 죄냐?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고 비-언약이 죄가 되는 이유가, 그 원인이 인간의 육신에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육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도도 육신이 있잖아요. 그래서 성도가 날마다 죄 짓고 앞 봅니까, 뒤 봅니까? 자기 목숨 보존하는 데 필요한 내 것에 관심 있어요. 나와 관련된 관계되는 사람, 친구 관리부터 돈 관리, 자금관리, 통장관리, 모든 것이 내 소유와 관련된 것들을 거기에 신경 쓰고 있다고요.

그런데 성도와 차이점은 뭐냐? 거기에 신경 쓰면서 그게 뭐라고 규정을 받습니까? 죄라고 규정받으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요. 죄 지었는데 뭘 받아요? 언약 안에 들어왔으니까 이게 무슨 기쁜 난리냐 이 말이죠. 죄는 죄대로 죽을 때까지 죄다 지으면서 이미 천국 안에 살고. 이게 무슨 이런 행운이 찾아온 겁니까?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뭐다? 불신자다. 아주 입 꼬리가 올라가. 좋아서. ‘다 같이 불신자가 됩시다, 합’ 이런 것 있잖아요. 기존 종교성한테는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로마서에 문자로 나와 있는데 그걸 왜 부정하느냐, 이래 나오지요.

그럼 그동안 예를 들어서 악마 같은 경우에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광야에 가죠. 광야에서 예수님과 악마가 단독으로 만납니다. 그때 악마가 쓸 수 있는 카드 다 나와요. 적어볼게요. 중요해서. 악마가 쓸 수 있는 카드/전략을 바보같이 이걸 다 쏟아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통 분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딸딸 긁어서 마지막 카드까지 다 썼습니다.

그 카드, 마지막 전략이 궁금해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문제를 개인 문제로 돌리는 게 전략입니다. 이게 세 가지 시험이에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걸 인정하는데 그래도 사적으로 배고프면 안 되잖아요. 사적으로 인기 떨어지면 당신 주의 일 못하잖아. 당신 갖고 싶지. 이 세상에 유명하고 사람들에게 호응하고 싶지.” 이런 것, 개인문제로 돌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이게 악마의 전략이고 카드지요.

그러면 성도가 이미 언약 안에 있으면 우는 사자같이 언약 안에 택한 백성이라고 악마가 공격하지요.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은 공격 안 해요. 뭘 공격해요. 시키기만 하면 되는데. 성도에게 근심걱정이 오는 것은 어떤 경우에만 그렇습니까? 내가 말씀 알고 복음 다 아는데 갑자기 개인적인 문제로 이게 압축이 될 때 여기에 지나가는 일곱 귀신 다 달라붙는 거예요.

네가 지금 기분이 다운됐다. 그건 뭐냐? 개인문제니까 개인문제는 누구와 관계있어요? 개인문제와 관련돼 있어요. ‘내가 이렇게 복음생활 잘하고 신앙생활 잘하는데 너 같은 인간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니까 내가 미치겠다.’ 그러면 그 개인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해요. ‘하나님이여, 복음대로 사는데 이렇게 자꾸 수모적이고 굴욕적이고 조롱받고 있는데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이기겠습니까’라고 기도를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그게 누구 문제입니까? 예수님 문제에요, 본인 문제에요? (예수님 문제에요) 정답을 너무 빨리 이야기했는데 이게 개인문제잖아요. 개인의 고민이잖아요. 개인의 고민을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데 꼴보기 싫은 사람들 몇몇 때문에 내가 미치겠는 거예요. 내 심정과 본심은 안 알아주고. ‘너는 좋겠다. 복음만 사랑하고. 이 집구석 한 번 봐라. 이게 집구석인가.’ 이런 식으로.

양심적으로 이성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성도를 어떻게 합니까? 힘들게 하는 거예요. 힘들게 하니까 하소연을 누구한테 합니까? 원래 교회 아래쪽은 왜 그렇게 차가운지 몰라. 또 새벽엔 춥잖아요. 방석 하나 들고 가서 깔고 새벽기도 평소에 안 나오다가 문제 하나 생기면 그때 갑자기 교회가 제단으로 바뀌잖아요. 제단에 엎드려서 기도를 합니다. 어찌 합니까, 임재범의 노래가 나오지요.

“도대체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을 해야 됩니까? 할 도리 다했는데 왜 자꾸 이렇게 힘듭니까?” 주님께서 “무슨 수모?” “보세요. 지금 수모당하고 있잖아요.” “수모라는 게 네 개인문제 아니야? 지금 내가 수모당하고 있어? 네가 수모당하고 있잖아.” 그 사람은 지금 뭘 잃었느냐 하면 기쁨과 감사를 상실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마귀가 어떻게 했습니까? 복음 안에 있고 말씀 안에 있으면 복음대로 말씀대로 되어질 겁니다. 우리가 아는 이 지식에 의하면 성경 지식이라면 그래요.

그런데 우리에게 뭐가 있어요? 육신이 있지요. 육신은 인간은 기분 따라 살지요. 왜 기분 따라 삽니까? 나와 관련된 사람, 내가 무시할 수 없는 사람,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 내가 도움을 얻은 사람들이 서로 좋은 관계, 인간관계, 더 다정한 관계, 서로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관계가 평소에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고 나로 하여금 사는 즐거움과 여유를 제공했는지 모르거든요. 우리가 그런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가까운 사람이 섭섭하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수모, 또는 고난으로 해석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시편 59편에 나오는 다윗은 이 문제를 죄 문제로 시작했지만 언약 문제로 전환시킵니다. 어떻게 전환시키는지 보세요. 시편 59편 10절, 11절 누가 읽어보세요.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스톱, 그들을 뭐라고요?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이게 뭔 뜻이죠? 실컷 욕해놓고 저주받을 것을 이미 자기가 내다보면서 내가 죽이는 게 아니고 다윗이 죽더라도 다윗에게 온 하나님의 전략, 언약이 비-언약을 들춰내서 그들에게 저주할 것이다, 했으면 그러면 저주의 끝은 뭡니까? 죽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죽이지 마옵소서. 이게 어디 나오느냐? 이게 아까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가 언급했습니다.

언약이 있으려면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언약이 존속되려면 비-언약이 같이 살아 있어줘야 돼요. 그래서 다윗은 계속 언약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성질 같으면 다 죽여 버릴까, 이게 아니고 나에게 일어난 이 특이사항이 언약이 모르는 사울이 하나님의 성신 받은 나에게 악신 받은 자가 공격한다는 것은 내가 원해서도 아니고 바르게 살려고 애써서도 아니고 언약적 차원에서 그런 조치가 있다면 하나님의 진행과정도 어떤 차원에서? 언약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럼 언약 차원이 뭐냐? ‘죽이지 마옵소서’가 개입돼 있어요. 그러면 죽이지 마옵소서를 우리가 다윗 이전에 있는지 찾아봐야 되겠지요. 창세기 27장 39절에서 40절, 그전에 창세기 21장 18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 큰 민족이 여러분 아브라함 민족을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이스마엘 민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큰 민족이 이스마엘이에요. 하나님의 기업, 천국을 유업을 받을 수 없는 그 민족이 큰 민족이 돼요.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하갈 가족을 이스마엘을 쫓아내면서 네가 지금 갈증을 일으켜 죽겠다 하는데 안 죽인다. 하나님이 안 죽여요. 언약을 위해서 비-언약이 같이 철도레일처럼 나란히 가야 돼요. 성질 같으면 다 죽이고 싶겠지만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언약 안에 육신을 가진 죄인이 비-언약에 속한 우리가 여기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언약에 살았던 자가 있어줘야 언약과 비-언약 사이에 언약이 한 희생, 예수님의 피가 생생하게 그의 살과 피의 가치만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름이 예수지만 하늘나라에서 이름이 기능으로 바뀌기를 원해요. 뭐냐? 어린양으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기능만 돋보이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나 너 때문에 죽었어.’ 어린양이 뭡니까? 희생물을 말해요. ‘나 너 때문에 희생되었어.’ 거기서 같이 그 희생에 대해 찬미하기 위해서 모집된 자가 천국 백성이에요.

따라서 그걸 위해서 비-언약 속에서 죄인들을 뽑아냈기 때문에 죄인으로 뽑아낸 비-언약적 요소가 언약 안에 계속 살아 있어줘야 희생이란 것이 영원토록 찬미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우상이 아닌 거예요.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은, ‘하나님 우리 편이죠. 적들 다 때려죽이세요.’ 이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내 존재 중심의 신 개념이에요. ‘야아 신난다. 저것들 지옥 가고. 우린 살았죠. 고맙습니다, 하나님. 영원토록 감사할게요.’ 이게 우리 생각인데 그게 아니고 어린양 중심이에요.

다시 말해서 ‘너는 어린양이 아니잖아’에요. 네가 너의 계획이나 너의 희망이나 소망을 위해서 천국이 존재하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생활을 천국 가서 해야 됩니까, 지금 이 땅에서 해야 돼요? 이 땅에서부터 그걸 실시하도록 우리 주변에 이러한 비-언약이 악신 들린 자가 들끓게 만들어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악신 들린 자는 어떤 자다? 모든 문제를 무슨 문제로 언급한다? 내 개인문제로 하는 거예요. ‘당신이 말이야. 나를 힘들게 했어. 당신 책임져.’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과의 대화와 언어사용에 있어서 밑에 깔려있는 게 그거에요. 책임지라는 말은 뭐냐 하면 책임질 일은 아예 나한테 하지 말라가 포함돼 있어요.

그걸 어제 낮 설교에 했어요. 사자성어로 하면 ‘내 돈 내놔’에요. 인간의 본심은 딴 게 아니에요. 내 돈 내놔. 달리 이야기하면, ‘내 돈 떼어먹을 생각하지 마. 그럼 우리 관계는 친구사이야.’ 이런 것 있잖아요. 사전이 조치를 해놓는 거예요.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이 말은 ‘내 돈 떼어먹을 생각하지 마. 곗돈 떼어먹을 생각하지 마’ 사람은 내 것이 없으면 내 존재가 없기 때문에. 나의 것으로 내 존재가 정립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정도로 인간은 독합니다. 마귀에 들려도 철저하게 마귀 들린 게 우리 인간의 육신의 모습이에요.

자식보고 “엄마 어떻게 생각해?” “엄마, 존경스러워요.” “그래. 참 착하구나.” 뭔 뜻입니까? ‘내 돈 가져갈 생각하지 마.’ “너희 장가, 시집보내고 나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네 아빠와 먹고 살아야 되거든. 이제 버는 건 없고 쓸 것만 있기 때문에 우리 연금 탐내지 마. 사업한다고 담보 세우라고 하지 마. 이 집뿐이야.” “한 번만 도와주이소.” “그런 소리하지 마.” “나, 엄마가 그런 엄만지 몰랐다.” 대번 자식 입에서 그런 소리 나오지요. “나는 네가 그런 자식인 줄 몰랐다. 끝까지 엄마 것 빼먹고, 아빠 것 빼먹으면 돈 빼먹으면 좋아?”

그 좋던 인간관계, 자식 관계가 서로 좋다고 하던 관계가 돈만 개입되면 소유만 개입되면 전부 다 나빠지는 게 아니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감추었던 본래의 모습은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지을 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주님의 조치는 정당해져요. 우리가 아직도 감추고 살기 때문에 그걸 모르는데….

그다음에 창세기 27장 39절, 40절, 제가 읽겠습니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게 지금 그렇게 아버지가 큰아들을 믿고 뒷받침해주려고 모든 조건이 편파적으로 큰아들에게 복이 돌아가도록 사전에 작업을 다 해놨는데 하나님께서 이삭이 좋아하는 큰아들 자기가 사랑하는 에서를 아버지 손으로 죽여 버리는 아브라함의 그 언약적 특이성을 또 다시 적용시켰어요. 죽이는 정도가 아니죠. 네 손으로 저주해라. 네가 좋아하는 아들을 네 손으로 저주해라. 이게 언약입니다.

네가 싫어하는 아들, 네 손으로 복을 주어라. 왜 자꾸 역전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실은 거꾸로 매달린 하나님이기 때문에. 처박힌 하나님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마귀 들린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악마의 신은 뭐냐? 위대한 분이에요. 그러나 초라한 하나님은 인간에게선 나올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 자체가 전체가 악마의 세력에 꼼짝 마라, 붙잡혀 살았다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으로선 고칠 수 없지요.

그러니까 방금 언급한 것은, 언약이란 토대가 뭐가 돼요? 비-언약이란 토대를 깔아줘야 돼요. 누가복음에 그런 말씀 있어요. ‘적은 자여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아예 단정을 숫자가 쪽수가 적은 걸로 돼 있어요. 신명기 9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딱 한 가지에요. 그들의 숫자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작은 숫자기 때문에.

그러면 구원받은 자가 숫자가 적습니까, 아니면 구원받은 자는 제로입니까? 사실은 정답은 제로에요.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그걸 마지막 언약에 가면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예수님만 죽었다가 부활되고 나머지는 아무도 부활되지 않습니다. 그럼 성령 받은 사람은 뭐냐? 죄인인데 구원받은 자. 죄인인데 예수님의 구원에 참여된 자죠.

창세기 24장 60절 이것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다음에 뭡니까?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원수의 성문을 열려면 원수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원수가 있어야 되지요. 그런데 이거는 언약에 들어간 사람만 원수란 걸 알지 다른 사람은 간파될 수가 없어요.

왜 사람들에게 원수가 간파가 안 되느냐 하면 나에게 너무 친절하고 잘했고 나에게 헌신적으로 나를 키워주신 분들이거든요. 지금 내가 있기 위해서 자기 것을 주면서까지 나를 키워준 분, 그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을 누가 알았습니까? 집안 식구가 원수인지를 알았어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정주고 정 받고 사는 게 사람 사는 거예요.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뭔가 받은 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줘야 내 할 도리 다한 것 같은 느낌 들잖아요. 그런데 그런 행동이 집단화되고 이걸 가시화되고 구체화된 게 인간세계의 왕국입니다. 패거리정치지요. 왕이 선정을 베풀면 모든 백성들이 왕의 소유가 됩니다.

그것을 원해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부탁했어요. 우리에게 뭘 달라? 왕을 달라. 우리가 원하는 왕을 우리가 선택하고 선거할 수 있도록, 물론 선거관리위원회가 조직되어 뽑을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때 하나님의 대책은 어떻습니까? 이것들이 아예 반란을, 이것들이 나의 왕 됨을 배척하는구나.

이것이 바로 비행기가 아직까지 하늘에 있어서 땅에 안착하기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그런 샘플을 통해서 인간들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제 완전히 비행기가 안착되려면 이 땅에 뭡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지요. 사람이 내린 모든 결론은 ‘죽이자’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성령 받은 것은 ‘죽이자’란 이 마음을 뚫고 네가 피 흘려 죽였던 내가 너에 대한 구원자였다는 것, 내 피 속에 너의 죄가 포함된 채 나는 너를 구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령, 성신이죠.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세상이 언약으로 움직이는 세상임을 알았습니다. 진짜 누가 천국 가고 누가 지옥 가는 기준은 바로 언약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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