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자기 폐기

아빠와 함께 2024. 12. 11. 09:34

20241209a 부산강의 : [시편]73(57:8)-자기 폐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57편 하겠습니다. 57편에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나오지요. “알다스헷”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멸하지 말라’는 뜻인데 이거는 네가 능히 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더라도 네가 멸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공격하는 쪽이 다윗이 쉽게 손쓸 수 있는 위치에 있더라도 네가 그걸 멸해서는 안 되는 데에 관한 거예요.

그럼 전쟁 중에 있는데 적을 멸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도리어 적들에게 어떻게 되겠어요? 오히려 공격을 당하겠지요. 그래서 다윗의 시편 전체를 보면서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될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다윗 폐기’에요. 시를 썼고 신앙 고백했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폐기하시는 거예요. 신앙인을 하나님이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는데 일반적인 종교에서의 선입견이 날아가 버리죠. 적이 있는데 멸하지 말라? 그럼 적한테 당하란 이야기죠.

적한테 상황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꾸렸다는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의도한 건 뭐냐? 네 손으로 적을 제거해버리면 너를 폐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차질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적을 하나님께서 살려두는 건 아니에요. 적을 하나님께서 폐기하시는 데 그 폐기를 다윗 네가 거기서 관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적에 대해서. 왜 그러냐 하면 초반에 나온 게 상당히 중요한 건데 이것부터 아시면 오늘 강의의 핵심부분에 우리가 들어왔다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어요.

주님은 나를 보호하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생명을 보호하는 겁니까? 내 안의 생명을 보호하지요. 그러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는 것이 인간의 논리상으로는 이것이 맞다 느껴지겠지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누가 방해하고 있느냐 하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건 인간 존재와 우리 세계 속에 있는 생명이 서로 대립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대립되는 성격은 벌써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부터 이미 예상한 거예요.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됐거든요. 그럼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되고 인간은 생명이 그리워서 다시 에덴동산으로 기어 올라올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생명나무 가는 길을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철두철미하게 차단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아주 투철해요. “어떤 인간이라도 내가 생명나무 따먹는 것을 나는 용납 못한다. 지 주체파악 안 되는 상태에서 생명나무까지 탐을 내? 그거는 마귀가 하는 짓이다.” 철두철미하게 차단합니다.

차단하시면서 생명을 하나님께서 인격으로 바꾸기 위해서, 선악과나무가 인격으로 바뀐 게 인간이거든요. 정녕 죽음이 찾아오는 인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선악과 따먹은 열매가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생명나무의 완성은 생명나무 자체가 인격화돼야 돼요. 인격화되는 데 그냥 생명나무가 따로 인격화되는 게 아니고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의 두 축이라서 같이 둘 다 완성돼야 돼요.

따라서 훼손된 선악과나무가 있는 마귀와 한 통속 돼 있는 인간 속에 생명나무가 그 안에까지 같이 합류함으로써 생명나무가 인격화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는 하면, ‘나는 생명나무라’ 너희는 하늘의 만나 기다리지? 내가 생명의 떡이야. 그리고 영생 이야기 계속하셔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 이야기를 아담 때는 생명나무, 생명에서 인간을 차단시켰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심으로써 예수님 쪽에서 먼저 생명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생명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시면서 생명 되시는 분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느냐? 생명나무 자체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느냐? 그거는 인간이란 껍데기를 사용할 때 인간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인간이란 껍데기가 수상한 껍데기거든요. 벌써 마귀가 되어서 자기 의미만 챙기는 거예요. 자기 가치, 자기 구원 이것만 챙기는 자가 되어서 그중에 한 사람이 다윗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다윗에게 장차 생명이 인격화되는 그 통로, 그 이야기, 그 줄기를 언약이란 이름으로 계시란 이름으로 넣었어요. 넣고 난 뒤에 다윗 따로 다윗 속에 있는 생명의 인격화되는 인물, 이렇게 되면 인물이 갑자기 다윗을 통해서 몇 분 돼요? 다윗과 그다음에 뭡니까? 생명나무가 인격화되는 인물, 메시아죠. 메시아가 다윗을 통해서 두 분이 등장하는 겁니다.

두 분이 등장하면서 시편에 나오는 모든 다윗의 예언이 다윗의 예언인가, 아니면 다윗을 사용한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예언인가가 같이 우리 인간세계에 물음을 던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속에 다윗만 있느냐, 아니면 다윗과 상관없는 다른 분이 다윗 속에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답변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아멘. 이 이야기가 선지자 이야기에요. 다윗은 선지자거든요. 사무엘하 보면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윗 속에 무슨 영이 있다고 돼 있습니까?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장차 예언의 내용을 다윗 안에 계시는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어떤 수난과 고생을 하는지를 미리 예언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영광도 같이 예언돼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수난 받는 그 계기 다윗 같은 인간들로 인하여 수난 받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인간의 할 일은 정해졌지요. 뭡니까?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힘들게 하는 업무, 그 역할을 오늘날 성도가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즐겁지 않습니까? 구원 되시는 주님을 힘들게 하는 역할, 비난하고 주님에 대해서 원망, 불평하는 역할을 성도가 하는 거예요. 이 형태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을 때 다윗이 겪었던 것과 동일한 체험이 되지요. 똑같은 체험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보세요. 인간세계에서 자기에게 은혜 준 사람을 그렇게 미워할 수 있겠어요? 인간세계에선 그런 것 없어요. 재벌 친척이 매달 천만 원씩 주는데 그 친척을 욕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을 왜 욕을 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에겐 욕을 안 하는데 자기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은 육신이 살아 있는 한 욕을 해요. 또 그래야 돼요. 왜? 그래야 인간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자기 긍정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공로를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묘책이에요.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데 자기도 뭐 했다는 거예요. 선교사로 했다고, 직분자로 뭐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공로를 아주 호작질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삭제할 의사도 없고 그런 능력도 갖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요? 하나님께서 상황을 통해서 그 구원받은 자의 자기의 성깔, 자기의 본심, 악마적인 요소를 유감없이 하나님이 들춰내는 겁니다.

들춰내면 들춰내는 그 내용이 뭐냐? 지금부터 그걸 설명할게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자기가 자기 힘으로 들춰내지 못한 인간의 속내, 속마음, 속성 그게 뭐냐 하는 거예요. 크게 쓰겠어요. 들춰진 그 죄, 이게 뭐냐? ‘나의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죄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 속에는 악마의 뜻이 들어있어요.

어제 낮 설교에 잠깐 언급했지만 악마가 인간에게 죄만 짓게 하는 게 아니고 아담 속에다 악마 자기와 대화가 가능한 송수신이 가능한 칩을 심어놨어요. 그다음부터 인간은 악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겁니다. 계속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악마 쪽에 부추기는 게 있어요. “너 그렇게 살면 너한테 무슨 의미로 돌아오지? 너한테 어떤 가치로 돌아오지?”

이걸 로마서 10장에서는, “네가 그렇게 하면 어떤 의로움이 남지? 네가 의로움이 없잖아. 그러니까 제대로 살아. 네 존재 자체가 너한테 의로움이 되도록, 살만한 가치를 제공하도록 그렇게 해”라고 계속 가스라이팅을 하는 거예요. 이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그리고 그 공통점이, 악마가 심어준 그 의미는 인간 속에 이미 악마가 들어와서 악마의 의미가 인간들의 보편적 의미로 탈바꿈돼 있는 거예요.

그것이 인간이 행동하고 말하고 심지어 꿈꾸는 현상들이에요. 인간이 꿈꾸고 행동하고 말할 때 무의미하게 행동하던가요? 아니지요. 노림수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성도라면 기도를 이렇게 해야 돼요. 제가 성도가 해야 될 기도를 적어볼게요. “하나님, 날마다 나의 계획을 무산시켜주옵소서.”

인간은 가만있어도 뭘 만들어요? 인간은 가스라이팅 당했기 때문에 인간은 날마다 뭘 만들어요? 이거는 뭐 말릴 수가 없어요. 매일 눈만 뜨면 만드는 게 자기의 계획이에요. 스케줄입니다. 스케줄로 살아 있으니까 움직이는 데 문제는 스케줄, 자기 계획에다 뭘 싣느냐 하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같이 합세, 실어버리거든요. 그다음에 저녁 되면 오늘 내 계획대로 되었는지 점검해요. 점검하면서 비로소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일본말로 요시よし, 오늘도 잘 살았다. 그러니까 성도가 아닌 일반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못해요.

그런데 성도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인간의 본색을 까발려버립니다. 노출시킵니다. 노출시켜놓고 이 모든 계획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고자하는 그 계획, 너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내가 집어넣은 예수님의 공로, 영생이죠. 영생은 예수님이 그냥 주는 겁니까, 예수님의 어떤 행위가 영생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아까 이야기했지요. 예수님께서 뭘 흘려야 돼요? 피 흘리고 살 찢겨야 그게 영생이 돼요. 예수님 오신다고 영생이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와 만나서 부딪쳐서 뭔가 일이 벌어져야 그게 영생이 된다고요. 생명나무의 과실이 인격화되려면 우리같이 못돼 먹은 존재와 만나줘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나밖에 모르는 그 인간과 만나야 우리 속에 영생이 생기고 그 영생만 주께서 건져내기 때문에 우리는 영생 건지는 하나의 생산라인, 생산 공장설비에 해당되는 겁니다.

나는 폐기되고 주님에 의해서 성령 안에서 새롭게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 미리 하늘나라에 준비돼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서 우리 할 일 끝나고요, 땅에서는. 하늘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보관돼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3절. 너는 죽고 하늘에서 예수 안에서 너는 살아 있다. 이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실 겁니까? 죽고 난 뒤에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니에요. 동시성이에요. 지금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진짜 나는 하늘에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걸 교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교회 나오면 복 받습니까, 이렇게 설명할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본인이 주님 만난 상황에서 본인의 계획이 무산되고 작살나야 돼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주님의 원수임을 발각되는 절차가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내가 모르는 나의 죄로 인하여 발생된 결과가 영생이에요. 우리는 영생을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좋게, 좋게 얻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고집스러운 나의 존재 의미, ‘주님,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시면 정말 화납니다’라는 내가 갖고 있던 존재성,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영생이 주님의 아픔과 십자가의 피, 죽으심에서 비로소 발생된다는 사실을 더욱더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됩니다. 분명히.

그래서 오늘 시편 57편에서 적이 있더라도 네가 네 손으로 적을 멸하지 말라. 사무엘상 21장 1절에 보면 다윗이 굴에 있어요. 여기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다 굴에 있잖아요. 사무엘상 24장 3절에 보면 이번엔 누가 굴에 있느냐 하면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이 굴에 자고 있었어요. 그 동네가 굴이 많은 동네에요.

사울이 찾지 못하도록 수색 못하도록 굴이 많은 동네에 갔어요. 사해 북쪽에 그 위쪽이거든요. 예루살렘에 가면 반드시 여행사들 돌아보게 돼 있어요. 저도 가봤습니다만 굴이 엄청나게 많아요. 작은 폭포도 있고 굴도 있고. ‘다윗이 사울 만나서 살려준 곳입니다’ 그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했어요.

네 손으로 멸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시에 네 존재를 얹지 말라. 하나님의 계시에는 장차오실 주님의 의미만 담기지 네가 긍정적 색깔로 같이 포개거나 얹질 그런 계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서 나쁜 역할을 하는데 그 나쁜 역할로 인하여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놀랍게도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우리의 면류관 있잖아요. 얼른 벗어서 어떻게 해야 돼요? 주께 반납해야 되죠. 내가 왜 이딴 걸 씁니까? 미쳤지, 내가 이걸 왜 써야 되는데? 평생토록 주님 원망한 것밖에 없는데 이걸 왜 씁니까? 그 원망의 자국이 주님의 못 자국인데. 얼마나 우리가 악마의 앞잡이로서 주님을 험담했습니까?

험담한 것을 몰래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온갖 미사여구로 찬양하고, 그리고 남 보기에 신앙 있는 척하면서 기도했잖아요. 철야, 금식까지 해가면서. 그런 짓한다는 것은 얼마나 모든 내 계획이 무산됐다는 것을 속에서 불이 타고 있다는 뜻이에요. 만사가 잘되면 교회 나올 이유가 없잖아요. 만사 잘되는 데 왜 하나님께 기도를 해요. 기도한다는 것은 화딱지 나서 하는 거예요. 잘되는 데 왜 기도해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기도하지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안 돼요. 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체가 내가 조작한 환상인데요. 그걸 이야기할게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버리면 그걸 경험한 그것이 어디에 쌓이는 경험이냐 하면 내가 소중한 자란 의미 창고에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 그때부터 나는 쓸모 있는 자가 돼요. 무능한 자가 아니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잖아요. 내 죄만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방금 좋은 말씀해주셔서 이제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방금 죄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내가 아는 죄는 어디서 나오느냐? 선악지식에서 나와요. 선악지식은 누가 넣었습니까? 악마가 심어준 칩에서 나온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신이 된다.’ 신이 된다는 것은, 네가 판단력을 갖게 되었다. 이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네가 판단하는 대로 네가 선으로 판단하면 선이고 네가 죄로 판단하면 그건 죄야, 라는 것을 악마가 아담 속에 하와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두 번째 죄는 뭐냐 하면 내가 몰라요. 내가 이게 죄인지를 몰라요. 두 번째 죄는 예수님이 임재하심으로 아는 죄입니다. 방금 임재란 좋은 말하셨잖아요. 임마누엘도 임재니까.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비로소 아는 죄, 그 죄.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는데, 이거는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 했거든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깊은 것은 인간으로 알 수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의 깊은 것은 인간 쪽에서 피조물은 알지 못해요. 그러면 인간은 어디까지 아느냐? 선악지식으로 아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이게 한계에요.

선악지식 가운데 어떤 죄냐 하면 예수 믿지 않는 죄, 그다음에 하나님 믿지 않는 죄 이것이 바로 인간이 아는 죄에요. 하나님 믿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 있잖아요. 예수님 믿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 도리어 예수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사람 있지요. 그렇지요, 사울.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

사도가 된 바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죄에서 본인이 (어려운 질문이다)벗어났을까요, 그게 유지됐을까요? 유지되었어요. 그게 유지되었습니다. 왜? 자기는 폐기처분돼야 되니까. 폐기처분돼야 될 쓰레기, 배설물이란 사실을 항상 갖고 있으면서 그것으로 인하여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계시가 성령님의 작동으로 계속 나올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것도 죄고, 하나님 안 믿는 것도 죄라 하는 죄는 이건 마귀가 인간에게 알려준 죄에요. 십자가 안 믿는 것도 죄다. 이것도 마귀가 알려준 거예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뭡니까? 깊이 있는 내 죄가 뭔지를 몰라요. 왜? 하나님의 깊은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내 죄라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왔을 때 내 죄라는 것이 뭐냐? 그 내용이 궁금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죄라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죄라고 규정한 것이 마귀 짓이란 사실을 알게 돼요.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은 존재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존재 자체가 죄가 되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몸에 상처 내는 그것으로 나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라는 것을 무슨 수로 알겠어요. 잘하면 될 것 아닙니까. 예수 믿고 바르게 선교하고 예수 믿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예수 믿고 성도끼리 교제하고 주께 충성을 다하고, 그러면 되잖아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왜 그런 식으로 나올까요? 인간은 왜 그렇게 아부하는 식으로 주님께 잘 보이는 식으로 거래와 협상하는 식으로 나올까요? 뭘 지키기 위함입니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 배후에 누가 시켰겠어요? 마귀가 시킨 거예요.

“너를 잃어버리지 마. 그러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 일단 하나님 믿되 너도 챙겨야지. 너를 챙겨. 버티더라도 너를 끝까지 챙겨야 돼. 하나님 좋지만 너 지옥 가면 무슨 낙이 있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악마가 마지막 내민 카드, 조커 같은 절대 카드가 그거에요. ‘네가 하는 네가 믿고 하나님 사랑하고 성경 보는 모든 것이 너의 구원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너에게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그게 인간이 악마와 헤어지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은 고린도전서 2장 10절 그 뒤에 보면 ‘은혜’란 말을 해요. 이것은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기서 파생된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해요. 하나는 고린도전서 2장 끝부분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인데 특징은 그 둘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 대화가 안 된다는 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도 안에는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성령이 들어있지요. 성령은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자해도 모르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 성령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령이 들어있는 인간과 성령이 없는 인간과 아무리 친구 사이고 동창이고 서로 좋게 지내고 돈 거래하고 같이 부부로 자식으로 한 가족 되어도 결국 깊은 어떤 상황 속에서 각자의 깊은 마지막 카드를 내밀 때는 결국은 소통 안 됩니다. 소통 될 수가 없어요.

딸이 되어서 구십 넘은 친정엄마를 지극정성으로 잘 모셨어요. 엄마도 그걸 알아요. “네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나 너 때문에 산다.” 이렇게 딸을 칭찬을 하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딸의 입에서 복음 나온다면 그 엄마가 받아들이겠어요, 안 받아들이겠어요? 안 받아들입니다. 왜? 근원적인 문제, 성령에 관한 거기에 대해서는 육에 속한 사람은 못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엄마의 모습은 살아생전에 그 모습이 최후의 빠이빠이고 그다음부터는 각자 갈 곳은 하는 지옥 영원한 불속, 하나는 영원한 천국에 가면 두 번 다시 못 만납니다. 그 이유가 뭐냐? 어제 낮에 제가 이 표현했지요. 천국과 지옥은 비역사적이다. 시간이 멈추고 끝나는 거예요. 변동이 없어요. 확정된 사실입니다. 한 번 천국 가면 영원한 천국, 한 번 지옥 가면 영원한 지옥. 영원한 유황불에 목말라서 고통 하는 것, 어두운 데서. 거기서 할 것은 이를 박박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8장에.

그러니까 대통령 바뀌는 게 문젯거리도 안 돼요. 시답지 않은 일이에요.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천국과 연결돼 있느냐? 진짜 나는 천국 가 있느냐? 아니면 진짜 나는 지옥 가 있는가? 그것이 윤석열 계엄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요. 미국 간 딸이 애를 잘 키우느냐? 그거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문제지 역사가 멈춰버린 문제에서는 역사에서 무슨 꿈을 꾸고 있느냐? 그 꿈은 개꿈이지 환상이지 뭐. 꿈과 환상은 의미가 더럽게 덕지덕지 붙어있어요.

나의 의미와 가치를 사회에 대고 주변 상황에 대해서 강요하면서 악을 악대로 쓰는 그 모든 욕망의 시도가 꿈으로 계속 내 자아 속에 기억으로 적금 붓듯이 저축돼 있다 이 말이죠. 부부싸움 할 때 뭐라 합니까? “그래 지나간 거니까 다 잊자. 포도주 한 잔하면서 다 잊어버리자” 하잖아요. 전에 너 시가집 공격한 것, 네 친정 공격한 것,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잊자 해놓고는 한 달 뒤에 일 터지면 어떻게 됩니까? 잊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그리고 욕망의 업적은 쌓이고 쌓여서 잊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저축이 돼 있어요. 단단하게 굳어져 있지요. 그게 자기 존재의 의미니까. 내가 여기 사는 이유는 지나온 모든 고생한 것, 내가 돈 번다고 애쓴 것, 남한테 희생한 것. 내가 소위 잘했다하는 것, 그걸 되새기면서 나오는 생산물, 내 의로움이 저축통장에 누적된 걸 자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나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좋게 하다가 뭐라 하면, “너 날 무시하나?”하는 말 나와요. 무시한다는 말은 나도 내세울 가치가 있단 말이야, 그런 뜻이거든요. 그 가치 어디 있지요? 우리 가치가 어디 있지요? 역사의 흐름 속에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임재한다, 예수를 믿는다, 예수님께 기도한다, 그 토대가 어딥니까? 내 자아에서 나오지요. 내 자아는 못난 자아에요, 잘나고 잘난 자입니까? 잘나고 잘난 자아에요.

자꾸 과거를 들먹이는 데 여러분 코 자주 파면 뭐 나오지요? 코피 나오지요. 과거를 자주 회상하게 되면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에 많은데, 여기서 뭐냐? 자기 의 중심으로 편집이 돼요. 편집이 되고 이게 하나의 소설이 된다니까요. 자기가 그동안 잘 산 것으로 자꾸 환상을 만들어내요. 내가 평소에 잘 산 것으로.

그 잘 산 것으로 또 성경 보고 성경 공부하고, 또 기도하고. 또 하나님께 뭔가 응답해달라고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해달라는 것은 나한테 무슨 카드가 있다? “나 그동안 하나님께 충성 봉사했잖아요. 나 그만한 자격은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한다고요. 무슨 자격입니까? 자기가 자기를 일방적으로 소설 써놓고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응답을 요구해요. 아까 성도는 기도를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나의 모든 계획을 무산시켜주옵소서.”

그러면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계획은 ‘나 잘났다’에서 나온 계획들이고, 잘났다는 계획에서 시작해서 저녁에는 ‘무산시켜주옵소서’ 그다음 날 되면 또 어제 무산시켜달란 기도는 정말 잘한 짓이라는 내가 했던 잘한 짓에다가 어제 똑바로 기도한 것이 자기 의로서 이게 또 추가가 돼요.

이건 뭐 쓰레기더미도 아니고 분리수거도 안 되고. 날마다 결정된 것을 또다시 덧붙여서 결정하는 것, 이걸 중층결정이라 합니다. 그 의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자기의 권리가 들어있어요. 지금껏 모아놓은 나의 잘남을 해코지할 때 나는 공격할 권리가 있다는. “이 원수야, 나한테 당해봐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너 모르지 나는 잘 살아왔다. 그런데 네가 나의 잘 살아옴에 흠집을 내? 너 한 번 당해봐라.”

그런데 오늘 시편 57편에 뭐라 합니까? 멸하지 말라. 네가 손댈 적이 아니다. 너는 손댈 권한도 자격도 없다. 똑같은 주제가 누가 누굴 손봐? 똑같이 마귀한테 가스라이팅 당한 것. “그러면 하나님, 저 다윗인데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면 될까요?” “나 너 폐기시킬 거야.” “왜요?” “네가 폐기돼야 네 안의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에도 일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니까.” 모든 일은 그리스도가 일했다는 것을 네가 폐기되지 않으면 자꾸 내가 일했다가 되니까, 이거는 주님을 욕보이는 짓이 되잖아요.

십자가마을에 어젯밤에 제가 글을 하나 올린 게 있습니다. 한강이란 작자가 노벨상문학상 수락강연을 한 30분짜리 되는 것 같아. 강연을 듣고 제가 글을 하나 남겼어요. 그 글 보면 나올 거예요. 그 글의 핵심부분이 어제 오후설교에 이미 나왔던 거예요. ‘존재는 환상을 낳고 환상은 혼돈을 낳고, 혼돈 다음에 새 질서를 낳는다.’

그런데 불신자는 어디서 멈추느냐 하면 혼돈에서 멈춰요. 새 질서로 나오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질서가 되려면 예수님의 계시가 나라는 인간과 만나야, 다시 말해서 나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영생이 만들어지거든요. 생명이 만들어진다고요. 그런데 한강인지 낙동강인지 그 작가는 계속해서 인류는 어떻게 서로 사랑의 고리를 연결할 수 있는가? 금실처럼. 이러면서도 존재, 환상 계속 찾고 있어요. 뭘? 사랑이란 것.

그래서 제가 표현하기를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뭐냐? 이거는 생존본능이에요. 내가 살면 사랑이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살면 그거는 미움이고. 저주지요. 모든 시작을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존재한다’부터 시작하는 게 바로 여기서부터 거짓된 환상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의 존재는 오후설교 때, 세 번째 나무로 오셔요. 그게 무슨 나무라 했습니까? 떨기나무. 떨기나무는 어떤 분이냐 하면 스스로 계신 자에요. 출애굽기 3장에서 떨기나무 나올 때 3장 16절에서 모세가 물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 합니까? 하나님이 존재하니까 우리도 존재하는데 우리 이름이 있듯이 하나님이 이 땅에 존재하시는 분으로 온다면, 그것도 신기한 일이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왜 오십니까? 그런데 오셨어요. 우리로선 오실 필요 없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오셨다 이 말이죠. 오시려면 뭘 갖고 오셔야 돼요?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이름이 뭐냐? 이름은 ‘스스로 계신 분’이에요. 스스로 있는 자. 스스로 계신 분의 종속, 또는 종으로 종속되면 우리는 뭡니까? 스스로 계신 분 안에서 천국 백성이 되니까 이게 새 질서지요.

그럼 스스로 계신 분이 이 땅에서 하려고 하는 게 뭐냐? 인간세계는 존재에서 환상, 혼돈으로 가지요. 이걸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완전히 활성화시켜버려요. 너희들 백날 사랑을 찾아봤자 그거는 혼돈의 다양한 면에 불과하다. 너희들은 혼돈 속에 휘말려 있다. 어떤 것도 너희에게는 의미나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존재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해답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혼돈이기 때문에 목적도 그냥 혼돈이죠.

그래서 그 한강이란 작가가 강연하면서 나는 사랑을 찾기 위해서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서 내 육신을 바쳐서 글쓰기에 나설 텐데 정답은 모르겠고 계속 정답 알기 위해서 저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강연의 요지에요. 그래서 제가 거기다가 마지막 이런 토를 달았지요. 하나님의 원수가 원수 값했다. 세상이 혼돈되잖아요. 하나님의 질투로 세상이 유지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력한 질투심으로, 신명기에 나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질투, 어떤 질투? 불같은 질투심으로, 강렬한 질투심으로 너희들 다 죽일 거야.

바로 이 내용이 주님의 계시가 되어서 다윗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처음에는 다윗도 존재하니까 다윗은 혼돈에 빠진 거예요.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왕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왕 되었고, 골리앗 이기는 것도 내 힘으로 아니고 하나님의 힘으로 이기게 해줬는데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된 것 없는데 왜 이제 와서 저를 죽이려하십니까?”

그래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시편 22편에 뭐라 합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시편 22편 누가 적었지요? 다윗이 적었잖아요. 진짜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구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를 버리는지 앞뒤가 안 맞는 모순에 대해서 자기는 혼돈에 빠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혼돈에 빠져야 돼요. 그래야 나 자체가 폐기처분될 수 있기 때문에. 내 껍질이 벗겨질 때 내 안의 뭐가 등장한다?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영생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자, 그러면 아까 죄에서 두 가지, ■첫째는 뭡니까? 내가 아는 죄는 마귀가 알게 하는 죄에요. 그래서 맨날 반성하고 회개하고 난리 나죠. ■두 번째는 뭡니까? 이건 내가 모르는 죄. 내가 모르는 죄를 알기 위해서 주님께선 다윗 같은 난관에 봉착하는 그런 상황 속으로 인도해요. 상황 속으로 인도하면 비로소 나에게 일어난 난처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시의 스케줄대로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고 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와 찬양이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제가 늘 하는 소리가 이게 성령의 일인지 육의 일인지 알려면 마지막에 뭐가 나오면 돼요? 감사와 찬양이 나오면서 여기서 뭐냐? 나의 의미가 삭제가 돼버려요. 내가 어떻게 죽어도 천국 가냐, 지옥 가냐 그 의미가 삭제가 되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주님이 하고 싶은 대로 뜻대로 그냥 하시옵소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란 존재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일인데 주의 일에 내가 왜 나의 일로 개입됩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일이에요, 주의 일이에요? 이거는 나의 일이 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데 이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계시가 임해버리면 영생이 임해버리면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되면서 나의 일이란 게 애초에 없어요. 미국에 애 보러 가든지 그게 다 누구 일입니까? 이게 다 주의 일이에요. 우리 가정의 일이 아니에요. 딸내미 아직까지 튼튼히 살아 있어서 애 낳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의 일이에요.

이제 첫째 시간 끝으로 묻습니다. 이 감사, 몇 분이나 갑니까? 몇 초쯤 갈 것 같아요? 정답은 그 감사의 삭제 시는 다음의 상황을 주께서 주시기까지 감사가 이어져요. 그러나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얼마 전에 감사했잖아요. 그런데 나를 왜 힘들게 합니까, 라는 새로운 상황이 다가올 겁니다. 그거는 또 더 깊은 감사를 주께서 준비해두셨다, 그런 뜻입니다. 10분 쉽시다.

 

 

20241209b 부산강의 : [시편]73(57:8)-자기 폐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6절에 보면, 내 영혼이 억울하다는 말이 나와요.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말을 다윗이 이야기했는가, 아니면 다윗 속의 그리스도가 이야기했는가? 할 때 둘 다 정답이죠.

출발은 뭐로부터 한다? 상황 속에서 상황에 반응을 나타내는 다윗의 너무나 인간적인 고백으로부터 출발을 하되 그 마무리는 이것이 다윗이 당한 고통을 넘어서서 장차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미리 다윗 안에 있던 그 고통의 체험을 다윗이 먼저 겪었고 그 체험을 그대로 주님이 완성시킨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다윗이 먼저 체험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이러한 계시적 체험을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당했던 모든 계시적인 체험을 이제는 우리 속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힘들고 아프고 내 뜻대로 안 되고 다 마음에 고통스러운데 그게 영생의 목걸이란 말이죠. 하나하나의 상황 속에 내 뜻이 무산되는 그것이 목걸이의 구슬 있잖아요. 하나의 구슬로 딱딱 꿰이는 겁니다. 내 인생이 주님의 영생 목걸이의 구슬로 이미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고통을 같이 체험한다는 이 기적, 그게 아까 말씀한 하나님의 임재. 그게 하나님의 임재라면 함께하심으로 생긴 거라면 우리는 능동적일까요, 피동적일까요? 끝까지 종속되는 피동적 존재로서의 체험입니다. 그러면 능동적은 왜 안 되는가? 능동적은 바로 죄에서 내가 아는 죄를 나의 착함으로 죄에 대한 저주와 어려움을 내 힘으로 벗어나려고 착함을 집어넣을 때 이거는 선과 악의 구조 속에 그대로 놓인 게 되죠.

두 번째 상황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에 의하면 이러한 시도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거예요. “나 나쁜 짓했어, 살인했어, 간음했어.” 이게 뭐예요? 뭘 했다는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지요, 그 자체가. 그것 아니고 할 것 뭐 있었노? 저는 그냥 집에 있었는데요? 집에 있어도 그 마음속에 간음하면 무슨 죄에요? 간음죄죠. 형제 미워하면 무슨 죄? 칼 들고 안 설쳐도 무슨 죄입니까? 살인죄.

“둘째 동서 콱 죽었으면 좋겠다.” 살인죄. 이웃에 담배피우는 영감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무슨 죄? 살인죄. “내 존재는 남되 저 영감 존재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거는 무심코 등장한 내 중심의 계획이죠. 그런데 아침에 보면 그 영감 더 살쪄 있고 건강해요. 내 계획은 또다시 여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무산되지요.

그런 것들이 혼돈을 일으키는 거예요. 윤석열 죽었으면 좋겠다. 이쪽은 이재명 죽었으면 좋겠다. 둘 다 계획은 세워놨는데 주께서는, “네 주제나 파악하세요. 내가 이런 상황을 왜 만들어놨는데?” 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해야 된다는 그것이 바로 ①번 마귀가 심어준 죄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전도할 때 전도지 보세요.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 하잖아요. 그건 절의 전도지와 똑같은 거예요. 뭘 행복해? 영생도 없는 주제에 행복해요? 진짜 복 된 것은 나를 폐기처분하고 옛 사람을 제거하는 그게 복입니다. 내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그러면 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계획이 있습니다. 8절에 나옵니다.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갑자기 김진홍 목사가 생각나는…. 이 말이 성경에 나오는 말 중에서도 어려운 축에 속하는 말이에요.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지가 뭔데 해와 달을 관장해요. 새벽이란 것은 달 지고 해 뜨는 게 새벽이잖아요. 근데 내가 뭔데 건방지게 새벽을 깨워요. “새벽아 빨리 시작해야지.” 새벽은, “좀 더 자고.” “아니야. 일어나야지.” 이것 그런 뜻이잖아요. 내가 새벽에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새벽이 주도적이고, 벌써 새벽인가, 하고 일어날 때 나는 어떻게 됩니까? 새벽이라는 그 일시에 종속되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은 뭡니까? 내가 새벽에 종속되는 게 아니고 새벽을 주관하는 거예요. 내가 일 시작했으니까 자연아 너도 일 시작해야지,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내가 새벽을 깨운다는 것이 다윗에게 해당되겠어요, 주님한테 해당되겠습니까? 이건 주님한테 해당되는 거예요. 인간은 천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이 많아서 전립선 약하면 자기의 소변도 자기가 관리 못해요. 그런 주제에 무슨 새벽까지 지가 관리를 해요?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미미한 존재인데 그걸 알아야 되는데 자꾸 알고 있다하면서도 고집을 피우는 거예요.

유치원 애가 돈을 못 벌잖아요. 그런데 장에 가면 장난감 있단 말이죠. 거기서 유치원 애는 자기의 절대적인 왜소함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돈 있어서 사면 되는데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사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이중적 태도를 나타내는 거예요. 첫 번째, 나는 엄마 없이는 못 산다. 두 번째,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내가 관리 못한다. 그 어린아이가 크면 어른 돼요. 떼를 쓰고 있는 거예요.

모든 하루, 아침에 눈 떴다 하면 떼쓰기로 일관하다가 나중에 밤에 잡니다. 꿈속에도 막 떼써요. 떼쓰기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왜? 자기가 어느 정도 약간이나마 내가 능동적인 자율적 자립적 존재인 것을 내가 갖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엄마한테 저 장난감 사 달라. 돈은 엄마가 냈지만 고르긴 누가 골랐습니까? 내가 골랐을 때 어린애라 돈은 비록 없지만 돈은 못 벌지만 자기의 자긍심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인간들 사는 게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잘 알지요. 잘 알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자율권이 있다는 것을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참 못됐지요. 안 된다니까, 해도 애들은 떼를 쓰듯이 억지를 부리고 떼쓰면서 평생을 이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8절에 보면, “내 영광아 깰지어다” 해놓고 어떤 악기가 동원됩니까? 비파와 수금이 동원됩니다. 비파와 수금이 누굴 깨운다? 내가 새벽을 깨우도록 부추긴다. 근데 내가 부추길 때 새벽 되면 뭐도 시작이다? 내 영광이 깰지어다, 내 영광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본문 말씀에 인간들 입장에서는 전혀 납득이 안 돼요. 비파와 수금을 동원할 이유도 없고요, 굿거리 합니까?

그걸 저는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을 여러분에게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 이 시편 57편 8절의 내용을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있고 설명이 가능한 신약의 상황까지 와서 할 수 있는 구절, 여러분 많이 들어본 구절이에요. 특히 크리스마스 때.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다음에 뭡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요. 땅에서 기뻐하는 자가 아니고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 평화로다. 하늘의 평화가 땅에 그대로 내려앉는 방법은 반드시 중간에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기뻐하심을 입어야 돼요. 하나님의 기쁨에 강제로 참여당한 자에게만 그에게는 하늘의 평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거리가 뭐라고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근데 누가복음 그 이야기가 목자가 들판에서 양 칠 때 천사가 와서 그 이야길 했지요. 그 대목이 굉장히 난해한 대목에 해당되는 거예요. 목사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을 때 이런 천사의 계시, 찬송을 받으면 그들이 평화가 됩니까, 안 됩니까? 제가 물을 때는 주로 안 될 경우를 물어요.

천사가 양 치는데 갑자기 조명발이 환하고 인간이 알아듣는 말로 목자에게 예언의 말씀을 했다. 그러면 그 자체로 목자들이 평화를 얻습니까? 어디를 하나 거쳐야 돼요. 그 자체로는 평화가 안 돼요. 어떤 인간도 성경 공부한다고 평화 되는 게 아닙니다. 계시를 받았다고 평화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어딜 거쳐야 되느냐? 빨리 베들레헴에 내려가서 거기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라.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하늘에서는 하늘의 영광이 되기 위한 어떤 절차가 반드시 하늘의 영광 자체로 영광이 아니고 어떤 분이 오셔서 땅에 어떤 절차를 거쳐줘야 비로소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그 결과물로 땅에서는 평화가 주어지는 거예요.

평화란 뭐냐 하면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으면 천사가 눈에 안 보여요. 천사가 안 보이면 천사가 누리는 평화가 우리한테는 이질적인 거예요. 이거는 내 외부적인 것밖에 안 돼요. 근데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 현장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 나타났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장돌 들고 던질 때 스데반 집사가 일단 피하고보자하고 도망칠 때 그러면 거기에 예수님 나타납니까? 안 나타나고 피하여 도망친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겠지요. 야, 이 동네 심하네. 큰일 날 뻔했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그게 스데반 집사한테는 드디어 그동안 자기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평화를 가로막던 자기 육신이란 존재가 날아감으로써 진정한 평화에 돌입된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서 오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스데반 집사가 평화로웠느냐 하면 예수님이여, 저들이 저희 죄를 모릅니다. 철딱서니 하나도 없어서. 마지막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돌 던져 죽이는 것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르고 한 것이니 저들의 죄를 사하옵소서.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기도를 스데반 집사도 합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에게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아까 말씀드린 육에 속한 사람과 성령에 속한 사람과 대화가 안 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안에 영생이 들어있는지 없는지의 차이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왕 말 나왔으니까 물어야 되겠지요.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어떤 사람이 칼 들고 온다. 피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정답은 이겁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

왜냐하면 피하는 게 옳다, 아니다 하면 이거는 ①번 죄, 선악체제에 또 걸려들어요. 피하는 건 잘한 짓이고, 안 피하는 건 못한 짓이다, 또 선과 악이 차고 들어오거든요. 내 육신 자체가 죄인데 거기다가 의로움으로 포장지를 만들어서 의로운 딱지를 억지로 갖다 붙이려는 그런 죄를 또 범하게 되는 거예요. 있는 것도 죄인데 거기다가 착한 척하는 죄까지 더 갖다 붙이니까. 그냥 이래도 저래도 마찬가지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면 되는 거예요.

이걸 간단하게 줄여서 여덟 자로, ‘니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이니까. 왜? 어떤 마음도 수동적이니까. 진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다면 입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입었다는 그 행위가 나보다 더 세니까 내가 더 강하니까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든 어떤 행동을 하던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음은 변동이 없어요. 취소가 안 되니까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평화입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평화에요, 자유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벌써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걸 다 알고 있어요.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6절) 해놓고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돼 있다고요. 여기서 이 말씀, 우리에게 승리라는 것은 종속돼 있다는 것, 우리에게 승리라는 건 종속요소입니다.

그 앞에 뭐가 있어야 돼요, 뭐가 우선돼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평화에요.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우리 행한 것을 폐기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리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참, 이런 서비스가 어디 있어요? 이런 애프터서비스가 없어요.

영생 준 것, 우리 잘난 행함으로 가려지지 않도록 그때마다 난처한 상황을 챙겨주시는 그 사랑, 여기에 대해서 시편 57편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7절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내가 찬송하리이다” 찬송하는 것, 비파, 수금, 하나님께 하늘의 영광 이 모든 것, 마태복음 6장에선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무슨 뜻이에요? 뭐는 구하지 말란 거예요?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 주택연금 넣을 것, 곗돈 탈 것, 보험 드는 것 그걸 하란 말이 아니고 그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그걸 위해서 펀드, 그걸 위해서 비트코인, 그걸 위해서 주식, 이런 것 기도하지 말란 말이죠. 그거는 누가 하는 거예요? 그거는 누가 하도록 내버려두란 말이죠. 윤석열이 하든 그쪽 동네에서 하도록 내버려두란 말이죠.

나라가 평화로워야 될 텐데…. 그런 건 그쪽 동네에서나 하란 말이죠. 나라가 평화로울 때가 어디 있어요. 평화가 없는데 무슨 평화로울 때가 있어요.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종속된 자만 평화지 이 땅에 평화는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오늘 본격적으로 진짜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시도해봅시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수금, 비파가 동원되어서 영광이 되는 상황을 저는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봤어요. 이게 찬양, 아까 찬양을 목자들이 한 게 아니죠. 누가 했습니까? 천사들이 찬양을 했지요. 그러면 찬양, 비파, 수금 이런 것은 벌써 어느 분위기, 어느 기운이 이 땅을 찾아왔다는 뜻이거든요.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움이 마치 구름 덮이듯이 안개 덮이듯이 이 땅을 미리 찾아온 거예요.

찾아올 때 목자보고 찾아온 게 아니고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의 존재 의미가 하늘의 영광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천사들도 덩달아 아기 예수의 탄생에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목자에게 지금 통보하고 있고 그 결과까지 이야기하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는 지금 네가 누리는 영광스러움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그렇다면 이 계획은 사람 계획은 아니지요. 목자가 이쯤해서 천사와 와야 될 텐데, 이런 계획 없지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하나 알아놓으면 좋아요. 그걸 우연이라 합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했잖아요. 보통 이 땅에선 교회에선 천국 간다하지요. 그걸 천사의 사건으로 표현하면 표현을 천국 간다, 하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처럼 되기 때문에 이거는 성경과 어울리지 않아요.

그럼 뭐냐? 이게 바로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입니다. 우연의 세계 안에. 우연의 세계니까 우연의 세계란 뜻은 내가 예상할 수 있다, 없다? 예상 못한다. 내 자율권, 내 선택, 내 결정 이것으로 미리 낌새채고 알아차릴 결과가 아니다. 천국은 내가 예상한 것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피해가면서 내 스케줄과 내 계획을 무산시켜가면서 그 뒤에 나타나는 내가 예상 못하게 준비돼 있는 다른 세계, 무슨 세계입니까? 우연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우연의 세계 속에 이미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우연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성도는 원망, 또는 불평이 되면서 하나님의 상황이죠.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상황 속에서 불평에서 어디로 간다? 우연으로 가면서 이거는 너무나 낯설고 예상 밖이기 때문에 뭐가 되느냐? 감사와 찬송과 찬양이 되면서 우린 어디에 합류되느냐? 천사의 찬송에 같이 섞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됩니다. 그러면 천사는 하늘에서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뭐다? 평화로다. 그것을 조성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조성된 천사의 세계를 지상에서도 우리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원래 다윗이 음악에 잘 치는 게 있어요. 비파, 수금 이것 잘했어요. 그래서 사무엘상 같은 데 보면 사울 왕이 마귀 들릴 때 옆에서 다윗이 기타 치면서 노래 불러주니까 악신이 떠나갔어요. 그전에 사울 왕 당시에도 선지자들이 예언들이 수금과 비파를 치면서 예언을 했단 말이죠. 사무엘상에 보면 나와요.

그러면 수금과 비파 이거는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이미 이스라엘 내에 사람들이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몰두할 때에 무엇에 대해서 완전히 감각이 무뎌졌고 죽은 상태가 되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이런 천국 같은 말씀의 세계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그걸 깨우는 역할을 선지자들이 해야 되기 때문에 그걸 깨우면서 인간들이 이용하기 위해서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라 자기가 무슨 할 줄 모르면서도 뭔가 성신에 의해서 남발되는 언어가 있어요. 비파와 수금과 더불어서 나온다고요. 지금 사울 왕도 선지자 중에 하나였다고 할 정도로 그런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 말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말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필연의 세계입니까, 우연의 세계입니까? 우연의 세계에서 나오는 그 현상을 하나님의 계시와 더불어 주어졌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망해버렸어요. 이스라엘이 망했거든요, 신약에 오게 되면. 이 이스라엘에게 남겨준 계시, 비파, 수금, 그리고 찬송 이것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십자가에서. 인간에게 수난 받으면서 다 이루었어요. 다 이루었는데 그게 어디 있느냐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에는 나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 볼게요.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 기도가 그냥 땅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었고 이거는 노래로 찬송으로 나오는 기도에요. 글자 쓸 때도 성경에 보면 글자 하나 들어가서 쓰지요. 그게 노래 가사란 뜻이에요.

찬송이란 노래에 실어서 고백하는 그 고백이 시편에 나오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탈피하여 우연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찬송을 통해서 표현하는 그런 현상들이 나타났거든 그들은 이미 합격된 사람이라고 보라 이 말입니다. 그럼 그 노래 가사를 봅시다. 5장 9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하나님의 계시)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계시는 받았는데 사람이 지킬 건 아니니까 계시만 덜렁 가졌는데 지킬 사람이 없어요.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윗이 계시 받았습니다. 다윗이 메시아입니까? 아니지요. 다윗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계시의 수용자지요. 사도 요한이 계시 받았어요. 메시아입니까? 아니에요. 우편배달부가 우편물을 받았는데 그걸 열어볼 인봉을 열어볼 자격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이건 뭐냐? 인간에게는 뭐가 없다? 인간에겐 권리 없음. 인간은 계시를 알아서 공부할 권리가 없음.

내가 계시를 알아서 공부해버리면 그 계시의 내용은 내 행함과 결부가 되어 이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리는 짓이 돼요. 그래서 인간은 철저하게 뭐냐 하면 수동적이어야 돼요. 새벽을 깨우는 건 인간이 아닙니다. 다른 분이 새벽을 깨워야 돼요. “이 자연세계야, 내가 활동하도록 같이 활동하라.” 그분이 깨워야 돼요. 우리가 아니에요. 그분이 깨우면서 비파와 수금을 옛날에는 인간이 했지만 신약에는 누가 합니까? 천사들이 하는 거예요.

자꾸 인간들은 뭐가 돼요? 수동적인 피동적으로 자꾸 밀리게 되는 겁니다. 원 없이 밀려야 돼요. 밀리면 밀릴수록 그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감사와 기쁨이 사랑이 그 폭을 다 채울 거예요. 내가 절대로 못했다. 나는 절대로 내가 하면 구원 못 받는다. 그 폭이 크면 클수록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잖아요. 주님의 사랑이 그만큼 커지는 겁니다.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누가? 예수님이.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요한복음 10장에 일부러 나는 죽으러왔다 했거든요. 죽을 때 자살하는 게 아니고 맞아죽으러 오신 계요.

그러면 예수님을 때려야 될 자들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인간들이에요. 인간들 속에 악마가 있고 악마는 인간들 부추겨서 하나님을 때려죽인다. 하나님을 죽여야 돼요. 죽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맞아죽은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에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주일날 설교했듯이 그것 아시면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다 안 거예요. “세상에 내가 하나님을 안 대.” 이거는 감격스러워야 돼요. 하나님을 안 것만 해도 평생 찬양해도 시간이 모자라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그만큼 나에게 뭐가 주어졌다? 자유가 주어진 거예요.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죽음과 피와 관련되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의 죽음이 그다음에는 나의 죽음으로 확장되니까 주님의 죽음과 내 죽음이 같은 한 공간에 놓여있다는 그 사실이 누가 뭐래도 내가 죽는다는 그 사실이 나의 구원을 의미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게 구원이 아니고 내가 죽어가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울 수가. 좀 당겨서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욕심이에요. 한 구십까지 사시다 죽으려면 고생 얼마나 해야 될지. 남들은 안 됐다하는데 본인은 신바람 이 박사에요. 정말 신나는 일이 내 죽음이 주의 죽음과 관련된 죽음이라는 것.

그 죽음 안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보이지 않고 죽이시는 주님이 진짜 하나님이 나를 죽였다는 이 연관성, 아주 연결돼 있는 연결성 그걸 누가 끊으리오. 그 사랑을 누가 끊겠습니까? 나를 죽이시는 사랑, 그걸 누가 끊어요? 마귀도 못 끊어요. 근데 사람이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 보면 맨날 기도가 뭡니까? 죽으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뭐라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염치도 없어, 하여튼 염치도 없어.

했는데 그 사람들을 피로 샀다는 거예요. 피로 샀다는 말은 피가 어디 안에 박혀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 속속들이 피가 담겨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성도끼리는 대화가 되는 이유가 그들 안에 보편적 죽음을 공유하고 있어요. 서로 같이 나누고 있는 거예요. “나 어제 이래 까불다 죽을 뻔했다.” 서로 죽을 뻔했음을 기쁨의 대화로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와서 멀쩡하게 하늘나라 간 게 아니고 죽어서 가셨잖아요. 그 절차를 고맙게도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죽는 그 십자가의 효과로 우리를 반드시 죽이시고 우리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럼 이미 주님과 동창생이죠. 같은 학교 출신이죠. 천국학교 출신이죠. 이게 지금 찬송의 노래 가사입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계5:10) 아까 봤던 고린도전서 15장 57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다음에 뭐가 나온다 했지요? 우리가 승리를 얻는다 했지요. 제사장 삼으시고 땅에서 왕 노릇한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증거할 그러한 위치에 있게 한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요한계시록 14장 3절 보겠습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죽어가면서 부르는 노래, 살고자 하는 자는 절대로 배울 수 없는 노래, 주님에 의해서 동일한 죽음을 죽는 그들에게만 배울 수 있는 노래를 그들은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15장 2절 보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여기 3절에 모세의 노래 해놓고 그다음에 무슨 노래입니까? 어린 양의 노래죠. 그러니까 오늘 시편 57편에 나오는 다윗의 계시의 내용이 완성된 상태로서 오늘날 성도 속에 시편 57편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들어와 있으니까 시편 57편 돌아와서 마저 봅시다. 2절, 3절. 이게 이해되실 거예요. 이만큼 했으니까.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굳이 설명 안 해도 되지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설명을 제가 하고 싶냐 하면 다윗과 다윗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영이니까 예수님 있다. 출발은 다윗 제치고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으로 가지요.

그다음에 뭡니까? 예수님으로 갔는데 예수님 안에서 모든 계시를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으니까 시편 57편 내용대로 나의 계시를 같이 공유해서 받아들인 자에게 예수님 자신이 입었던 그 공로의 혜택을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눠주는 순서가 있어요. ①다윗 제치고, ②예수님,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다윗으로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시편 57편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계시가.

그러면 다윗에서 예수님, 예수님에서 다윗 안의 예수님 할 때 이 다윗은 예수님을 걸쳤지 다윗은 중간에 끊어집니까, 안 끊어집니까? 이거는 단호하게 끊어져야 돼요. 죽음.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이삭을 바쳤습니다. 어려운 것 아니에요. 쉽지만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이삭을 바친다고 바쳤는데 옆에 수풀에 수양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육신대로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을 바치라 해서 바쳤단 말이죠.

이 계통이 언약1이라면, 갑자기 하나님께서 스톱하면서 이게 언약2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언약을 준비해서 육신으로 시작해서 육신으로 끝나지 않고 육신 속에 영을 집어넣어서 영의 족보, 영의 노선, 예수님의 족보로 빠지게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언약을 같이 준비하신 겁니다. 첫 번째 육신에 속한 인간들은 내 힘으로 예수님을 믿었고 어떻게 하고 해서 내가 안 죽고 계속 살아서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전에 교회 안 나왔는데 교회 나옴으로써 나는 예수 믿는다는 그 내용을 장착한 나를 나중에 죽거나 예수님 재림했을 때 이 나를 하늘나라에 천국에 집어넣기 위해서 엉덩이 들이밀고자 하는 것은 어딥니까? 육신적인 언약, 이건 하나님이 안 받아주는 방법이에요. 오늘날 교회가 하는 방법이잖아요.

“목사님,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잘 왔습니다, 교회 잘 왔어요.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악마가 알게 한 지은 죄 성경에 보니까 회개한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했으니까 회개하시고, 회개하면 당신은 깨끗한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게 구원의 서정이에요, 여러분. 이제는 회개했으니까 약속대로 성령을 받았으니까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사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는데 상급이 남아 있으니까 보너스가 남아 있는 거예요. 보너스 받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말씀을 지키라고 성령을 줬기 때문에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면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명령들을 지키면 여러분들 구원받는 건 기본이고.

그다음으로 보너스가 자꾸 쌓여서 나중에 천국 가서 기본으로 오는 팬티 바람으로 오는 부끄러운 구원 쳐다보면서 아이고, 인간아. 구원받았다고 좋아하지 말고 봉사 좀 하지. 나는 이미 많은 봉사를 해서 옆에 선물이 가득해. 보너스가 가득해. 연말보너스, 무슨 보너스 해서 보면서 느긋할 때 그것은 바로 천국 가서도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잘 오셨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당신은 구원도 받고 따라서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받아서 천국 가도 상급을 타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것 지옥 갑니다. 백 프로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의 언약 노선에서 내 육신이 사는 노선에서 탈락한 적이 이탈된 적이 없어요. 마귀가 만든 종교지요. 마귀가 만든 성경해석이고. 표정들이 왜 그래요, 갑자기. 심각해지고.

현재 지금 이삭 옆에 수양이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지요. 이삭이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지요. 아브라함이 만약에 수양 있다 하면, “아들아, 잠시 폼 잡자.” “아빠, 찔러.” “가만있어봐.” “왜? 안 보여?” 이래 됐을 거예요. 완전히 육을 육으로 육의 한계를 다 들춰내버려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이거다. 그리고 이거는 우연이에요. 인간은 우연의 영역에 침범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왜? 생명나무는 인간이 침범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연은 다가와야 되지 내가 예상하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수양이 준비될 때 주님께서 너 안 받고 수양을 받음으로써 너는 이미 죽은 자고, 이삭은 죽은 자에요. 제사할 때. 죽고 수양 되시는 예수님이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왔던 그들을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자기의 다 이루었던 계시대로 적용을 함으로써 효과를 주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면류관도 나한테 던지라고 예수님 자신의 주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에다 넣어주시는 겁니다.

목사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구원받으러 교회 온 사람이, “목사님, 그럴듯한데요. 문제는 내가 뭘 해야 언약2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내가 희생을 할까요, 순교를 할까요, 뭘 하면 내 육신의 의미만 챙기는 내가 언약2로 넘어갈 수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목사님은 넘어갔습니까? 목사님을 모독하는 게 아니고 목사님이 넘어갔으면 넘어갈 때 방법 좀 이야기해주면 알려주면 목사님이 갔던 언약2의 노선, 진짜 구원받는 노선을 내가 넘어가겠습니다.” 할 때 목사가 해야 될 일이 뭐예요?

저 그냥 당했어요. 저 성폭행 당했어요, 주님한테. 사랑에 강간당했어요. 폭력 당했습니다. 기뻐하심을 입었어요. 내가 기뻐하는 것 따로 있었는데 그것 아니라고 내가 기뻐하는 것 따로 있다고 나를 짓밟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 19장 말씀대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주님은 하십니다.

그러면 그 교인이 그러지 말라고 돌아갈 준비하면서 “그러면 교회 뭐하려고 세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화를 내면서. “나는 교회를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증인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할 뿐이지 교회 몇 명 모여서 밥 먹고 저녁 먹고 점심 골라먹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모이든 어떻게 만나든 주께서 모집하고 주께서 흩어지게 하시고 주께서 살게 하시고 죽게 하시고 사나죽으나 주의 것인데 떠날 때까지 남아있는 것도 아직 안 죽는 것도 당신 보기에는 건강해서 조깅해서 살아 있는 줄 알아요? 우연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게 매일매일 우연이고 그 우연의 세계를 예수님이 가운데서 하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죠.

끝으로 57편 3절,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벌써 다윗이 보세요. 나 아니고 누군가 장래에 이런 말씀 주신 분이 오신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10절에,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영광이 높아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아까 제가 두 구절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뭡니까? 이미 하늘에선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러니까 폭행당하듯이 기뻐하심을 입은 자 중에 하늘의 평화가 공유되고 있다. 또 하나가 마태복음 6장의 말씀, 너희가 성도라면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내일 살지 죽을지 모르는데 하지 말고 그건 이방인들이 하는 거고,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에게는 바로 두 가지, 내 육신이 좋아하는 것과 주님이 좋아하는 것 같이 다 있어요. 그래야 ①번에서 ②번으로 넘어간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증거를 계속 유지해 주실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해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데 우리가 이 세상에 나의 삶조차도 내가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찬송, 새 노래의 가사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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