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1a 부산강의 : [시편]72(56:8)-공백의 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56편,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1,2절)
자신의 원수가 없을 때에 시편이란 이런 계시가 원수 없이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환경이죠. 근데 시편에서는 나의 원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요? 나한테 해코지하면 하나님께서 해코지한 게 된다, 자동적으로. 그게 어떻게 성립이 됩니까? ‘우리 집에 도둑 들었는데 이게 하나님의 집에 도둑 들은 것과 동일하다.’ 이게 말이 돼요? 안 되지요. 그래서 강의 시작하면서 우리가 이 점을 먼저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자연의 폭력과 인간의 폭력, 어느 것이 더 셉니까? 자연의 폭력이 더 세지요. 자연의 폭력이 더 센 이유가, 자연은 인간성, 성격, 출생, 남녀 그런 성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허리케인이나 태풍이 사람보고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그 지역에 있는 걸 싹쓸이해버리죠.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노아 홍수, 앞으로 일어날 불 심판 이것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자연의 폭력은 하나님의 폭력이죠. 이미 인간은 하나님의 폭력에 노출돼 있어요. 가릴 수 없어요. 다 드러나 있습니다. 노출됐다는 것은, 인간이란 폭력의 대상이다. 때리면 맞아야 되지요. 폭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한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 민족이 바로 히브리 민족인데요. 히브리 민족은 폭력을 경유해서, 경유라는 말보다도 경유하는 게 아니고 폭력 안에서 발생된 나라가 바로 무슨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이 폭력은 유월절의 어린양이기 때문에. 문설주나 문 입구에 자기가 키웠던 어린양의 피가 묻지 아니하면 그 집안에 쳐들어가서 그 집안의 대를 이을, 그 집안의 혈통을 책임지는 맏이를 하나님께서 살인했습니다. 천사가 살인했어요. 죽였어요.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하나님은 살인자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이 찾아왔어요. 이 하나님을 그들의 믿은 게 아니고, 그들이 만든 게 아니고, 그들이 구한 게 아니고 구하던 믿던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그냥 덮친 거예요. 쳐들어온 거예요. 사람을 죽이는 하나님을 그들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도록 강제된 겁니다. 강요받은 겁니다.
그러면 다른 민족은 어떻겠어요? 다른 민족은 어떤 하나님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런 민족이라면 하나님이 달라야 되겠지요. 다른 민족은 회유가 가능한 신, 주고받는 게 가능한 신, 빌면 복 주는 신, 우리 손으로 우리 의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그게 바로 이방인들의 신이죠.
기차 타고 오다가 어떤 분을 봤는데 보살 몸빼를 입었어요. 보살 몸빼 알지요? 절에 가는데 몸뻬 형태의 바지를 입은 사람이 있단 말이죠. 내가 가상으로 그 사람을 만나서 묻고 싶어요. 왜 절에 가십니까? 질문이 이거에요. 답변은 뻔해요. 빌면 복 주니까. 그러면 안 빌면 복 안 줍니까, 라고 묻고 싶어요. 그쪽은, 안 빌면 복 안 주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다룰 수 있는 종교가 불교에요. 내 쪽에서 다룰 수가 있어요. 안 믿으면 그만이에요. 내 쪽에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부처입니다. 쥐었다 폈다(쥐락펴락) 할 수 있어요. 바치면 복 받고 안 바치면 복 안 오고. 여유가 있다? 안 바치면 되지요. 물론 여유가 있더라도 보험 드는 식으로 여유가 있을 때 공양을 미리 해놓으면 앞으로 예상 못하게 들이닥치는 일에 대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러면 이런 하나님, 그러한 불교가 쥐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부처의 대상이 내가 정성과, 불교에서는 정성에다 보태요. 업보라고 합니다. 업보는 돼지저금통에 동전 떨어뜨리는 거예요. 업보를 쌓으면 내 대와 후손들까지 복을 받게 돼 있어요. 업보 저금통이에요. 부처라는 신과 나, 부처는 신입니다. 부처가 나중에 발달해서 미륵보살이 되니까. 미륵보살은 인간이 아닌 그냥 신이에요. 화신, 신이 인간이 된 거예요.
신과 인간의 중간이 뭡니까? 내 행함이 중간에 중보, 매개 역할을 하는 것, 그게 불교지요. 그럴 때 절에 가는 사람들이 그러한 신에 대해서 “아아 납득이 안 된다. 도대체 이해 불가하네.” 그럽니까? 그런 게 아니지요. 평소에 자신의 양심대로 했던 선과 악의 구조, 지금 선악구조 나오지요. 선악구조에서 여러분이 유념할 게 있어요.
선악구조의 특징은 악에서 선으로 옮겨올 수 있고, 선에서 악으로 갈 수 있다는 게 선악구조입니다. 참 쉽지요. 선악구조란 내 하기 나름에서 악에서 선으로, 선에서 악으로 갈 수 있는 이 구조가, 인간세계에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무엇으로 이걸 둘러치는 거예요? 환경으로 둘러친 게 선악구조에요.
차타고 오다보니까 벡스코BEXCO란 게 딱 나왔어요. 벡스코가 뭐하는 곳입니까? 텅텅 비어있는데 거기서 행사하는 곳이죠. 부산국제영화제, 거기서 하잖아요. 행사하는 데에요. 선악체계가 이미 인간의 환경으로 자리 잡았고, 이 안에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세월이 가면서 자식 나오지요. 후손들 생기잖아요.
그러면 사람들, 그 후손들, 그 인류라는 집단은 너나 할 것 없이 공동 환경 속에 같이 모여 사는 겁니다. 공동 환경이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말이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잘 통하지요. 무엇을 통해서 잘 통하겠어요, 무엇을 매개로 잘 통하겠습니까? 선악체계 안에서 잘 통하는 거예요.
자, 제가 선악체계를 뭐라 했습니까? 악에서 선으로, 선에서 악으로 옮길 수가 있다. 무엇에 따라서 옮길 수 있다? 자기의 하기 나름이다. 이걸 선악구조를 종교로 만들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보살 몸빼 입은 그분들이 가는 곳 뭐죠? 불교. 불교는 부처와 인간 사이의 매개가 뭐였습니까? 저금통. 무슨 저금통이라 했어요, 제가? 업보 저금통.
선행을 한 업보 저금통으로 해서 내가 선하지만 완전하게 선하진 않잖아요. 살다보면 악이 있지요. 악이 묻은 것을 악에서 그것마저 뭐로 바꾼다? 만약에 한 85%가 선하면 이걸로 만족하지 않아요. 뭐가 있어요? 15%의 악함이 있어서 자기와 자기 미래, 자기 가족들에게 재앙이 올 수 있단 말이죠. 재앙이 오는 건 괜찮은데 재앙이 왔을 때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사전에 선행으로 보험을 들어놔야 돼요. 인간의 사는 방법 간단하지요. 미리 장차 예상 없이 닥치는 재앙에 대해서 미리 보험을 들어놓는 거예요.
그러면 15% 있지요. 누구 지지율입니까? 윤석열 지지율. 자, 15%의 악을 뭐로 바꿔야 돼요? 선으로 바꾸면, 이거는 욕심내서 백 퍼센트까지 인간은 바라진 않아요. 적어도 90~95%까지 선행이 된다면 그다음부터는 자기의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저울에서 선이 많을 경우에 자기의 사업적인 어떤 결정이나 행동이나 선택이나 자식들 법대를 갈까, 의대를 갈까하는 고민, 그것도 공부를 잘해야 고민이지만.
그러한 고민할 때 내가 결정하는 것이 이미 절에다 부처한테 업보를 많이 쌓아놨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해도 이게 좋은 결과를 낳겠다는 그 미래감이 우리에게 뭘 준다?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뭐가 누락된 사실이죠? 처음에 썼지요. 하나님은 뭐다? 살인자다. ‘사람 죽이는 것이 하나님이다.’ 이 사실을 누락시킨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가는 데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관심은 뭐냐? ‘너 죽었어’에 관심이 있습니다. 창2장 17절인가? “정녕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원인을 찾아가보는 거예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 있잖아요. 그 죽으리라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동일한 결과가 계속 주어지니까 후손들이 해야 될 일은 뭐죠? 왜 내가 죽는가를 통해서 도대체 내 마음속에 무슨 괴물이 들어있는지를 거꾸로 찾아가면 되지요.
찾아가니까 뭐가 나왔습니까? 보살 몸빼 나왔지요. 그러면 보살 몸빼가 있는 환경을 선악체제 환경이고, 선악체계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들끼리 대화가 된다, 안 된다? 잘 통하지요. 그렇다면 천주교와 불교는 대화가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잘 통하지요. 선악체계니까. 그렇다면 기독교는 불교는 대화가 잘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잘 통합니다. 왜 통하느냐? 둘 다 노림수가 똑같기 때문에.
공통점이 뭐냐?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인간은 정녕 내 행함을 내 기억이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할 걸 내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앞에 꽃꽂이한 것 잊을 수 없고, 교회 피아노 기증한 것 잊을 수 없고, 지난 주 헌금한 것 잊을 수 없고, 내가 누구누구 전도해서 내 사람 끌고 온 것 잊을 수 없고. 도대체 인간은 나라는 자체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같이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거예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특수한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만이 대화가 안 통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인간이 뭘 추구하고 신에게 뭘 요구하는지 너무나 잘 알아요. 너무나 잘 알면서 거기서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본인이 예상 못한 태어난 나는 정녕 죽어야 된다는 그 내용을 섞어서 말을 하게 되는 특수한 경우가 발생되는 거예요.
나는 꼭 죽어야 돼, 라는 그 본질을 담아서 대화가 되는 것, 대화를 남에게 말을 전하는 그런 특수한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이 누구다?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말씀을 담아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간단하고 방정식으로 만들면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 말 속에 말씀이 들어있다. 그걸 고상하게 표현해보겠습니다.
존재의 공통요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존재의 공통요소를 알아요. 인간의 존재는 자기의 바탕이 뭔지에 대해서 미지수에요. 몰라요.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세요, 본질이 어때요, 성질이 어때요? 잘 몰라요. 그건 뭔 뜻이에요? 내가 잘 모르는 데서 내가 나왔으니까 결국은 논리적으로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자기 바탕을 몰라요.
그런데 아까 창세기 2장에서 뭡니까?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현상이니까 여기서 멈추면 안 돼요. 왜, 왜 내가 죽어야 되는데? 찾아가보면 선악체계지요.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선악체계는 뭐라고요? 내 행함에 따라서 뭐에서 뭐로 바꾼다? 내가 선에서 악을 줄이고 보다 더 선한 데로 발전할 수 있고, 내가 만약에 게으르거나 긴장감을 늦추거나 내가 행동을 안일하게 해버리면 좋았던 의도, 저축한 적금 다 까먹고 다시 악이 될 수가 있다는 그 구조. 그 구조가 우리에게 뭘 이야기했습니까? 정녕 죽으리라고 돼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러분 설명 들었으니까 방금 이야기한 걸 다 안다 치고. 둘 다 정녕 죽으리라는 똑같은 데서 온 공통 존재의 현상은, 공통 존재로 되었던 다수 많은 사람들, 모든 인류는 그 토대를 다수 각자의 개성대로 토대를 내놓다는. 각자의 개성들이 다 다르니까 사람들이 뭘 찾지 못한 거예요, 어디를 가지 못합니까? 공통 존재를 찾아갈 수 없어요. 왜? 나는 내 식대로, 너는 네 식대로 살면 되지 너와 나는 같은 점 없어, 이러고 마는 거예요. 이러고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특수한 사람 있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사람은 개성이 있고 인격이 다르고 가정환경 다르고 DNA구조가 다르다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똑같다. 공통 존재 바닥을 갖고 있다. 여기 다수의 토대가 하나의 존재, 동일한 다 같으니까 1이죠. 다수가 1로 가는 것이 막혀있는 거예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다수는 눈에 보이잖아요. 다수가 공통 1, 1은 안 보이죠. 존재의 바닥에선 안 보이잖아요. 각자 토대만 주장하지 다수가 안 갈 때 이게 어떻게 된다? 가는 것이 막혔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는 것이 나의 원수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라고 주장하려면 너는 내 개성을 왜 깨느냐, 너는 왜 내가 믿는 종교를 부정하느냐? 이래선 안 돼요. 왜? 그거는 다수 중에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 공격한다고 공통 존재 노릇해선 안 돼요. 어떤 경우에만 나를 공격하는 것이 나의 원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냐? 그거는 뭐냐 하면 내가 섞었던 말씀, 말씀을 부정할 때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뭔 뜻인지 여러분 아셔야 돼요.
어떤 사람이 교회를 안 다니는데 여러분 자신에게 “사람이 인간성 너무 좋다. 어디 놀러 가면 내가 집안 청소 다해줄게.” 왜 그런 친절을? “나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너무 기뻐요. 행복한 것 같아. 당신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나한테는 마음의 상처를 모든 정신적 질환을 다 치료받는 것 같아서 그냥 주는 거니까 기쁘게 받으세요.” 할 때 여러분들이 “그것도 좋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렵니까?” “그거는 하지 마시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원수지요. 원수가 되는 거예요. 나한테 친절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그리고 나의 원수가 돼요.
방금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사실 이런 예는 제가 굳이 들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의 가족들이 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족구성원이 내 딸과 아들, 남편, 아내가 다 그러니까요. 평생 나를 키워줬는데 “엄마, 죽기 전에 교회 가고 예수 믿으세요.” “그거는 나한테 맡겨둬. 니가 관여하지 마.” 뭐예요? 갑자기 자기의 다수성을 죽을 때까지 쥐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시편 56편을 보면서 “나의 원수가” 할 때 도대체 여기 내 원수란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자가 누구냐에 우리는 관심을 둬야 돼요. 하나님의 원수가 내 원수고, 내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인물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 말은 본인 자체가 계시 덩어리 될 때나 가능한 말이죠. 본인 자체 움직임 자체가 계시 덩어리입니다.
그게 8절에 나와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Thou hast taken account of my wanderings; Put my tears in Thy bottle; Are [they] not in Thy book? 야아 보세요. 자기 눈물을 모아 모아서 무엇이 되었다고요? 책이 됐지요. 눈물이 발생되려면 외부에서내 마음을 후벼 파야 되지요. 내가 괴로움을 당해야 되지요.
그러면 책은 계시니까 계시 책 한 권을 위해서 필히 누가 등장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원수가 꼭 등장해야 됩니다.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 가족 중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거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원수라 해서 멱살 쥐고 집 나가, 이게 아니고 친절을 다해주고 내 편에 서서 나를 변호해주고 나를 아껴주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나한테 용돈까지 다 제공하는데 뭐만은 거부? 인간의 존재의 공통요소만은 입 다물고 그 말은 제발 나에게 하지 마세요, 윤시내.
그게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러니까 평소가 우리가 원수인지 원수 아닌지 구분도 못하면서 잘해주면 원수 아닌 자로 생각하는데 그런 게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아내가 교회 가고 남편은 죽을 때까지 교회 안 가면 뭐라고 하느냐? “너 죽을 때 다리 붙들고 가면 되잖아. 니 죽더라도 나는 남편 자격으로 갈 수 있잖아” 이런 식으로 농담 삼아 이야기합니다.
그것 농담이 아니에요. 자기가 예수 믿는 아내처럼 예수는 안 믿어지지만 예수 믿는 아내에게 잘한 게 있잖아요. 잘하게 되면 비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자라할지라도 악에서 뭐로 바뀐다? 악에서 선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러한 좋은 업보는 평소에 교회 가는 너한테 많이 해줬다는 거예요. “교회 갈 때 운전 다 해줬잖아. 물론 니는 내리고 나는 집에 가지만.” 그런 식으로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그렇게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해서 지가 얻고자 하는 게 뭐예요? 나의 토대 사수. 아주 미친 듯이 사수하는 거예요. 나의 나됨은 결코 부모가 아닙니다. 형제가 아니에요. 나의 토대는 내가 평생토록 일구어서 수고와 노고와 땀방울을 통해서 내가 만든 토대에요.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이 정도 되기까지 내가 나한테 투자하고 부어놓고 모든 성과 그것 없이는 나는 죽을래, 할 정도로 인간은 꼭 마음속에 쥐고 있는 것, 그게 나만의 토대입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원수지요. 나만의 토대, only 나, 나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성경에선 뭡니까? 존재의 공통성, 너와 내가 나왔던 공통적인 게 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말씀이에요. 우리는 지금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쯤 이해됐다 치고 질문 하나 나갑니다. 질문은 이겁니다.
누가 나를 압박하느냐? 주관식을 귀찮으니까 객관식으로 할게요. 하나 찍으세요. ①자연, ②악마, ③인간, ④하나님, ⑤보류. 자, 누가 나를 압박합니까? 날 추워요? 그럼 옷 두껍게 입고 내복 입으면 되잖아요. 악마는 압박하지 않아요. 악마는 없으니까. 인간에게 평소에 악마는 없어요.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만나본 적은 없어요. 인간? 여기 지지율이 확 올라가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 악마 없으면 하나님도 없어요. 교회에서 하나님 있는 척하고 찾지 평소엔 하나님 없어요. 이 ⑤번이 뭐냐? 납니다, 나.
누가 나를 가장 압박하는가? 지금 최종 결선에 올라온 게 ③번과 ⑤번이에요. ⑤번은 깊이 생각하면 정답인데 무심코 툭하면 전부 다 이겁니다. ③인간이 나를 압박해요. “인간아, 인간아. 나가 죽어라” 이 인간. “나 너 없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주변의 모든 인간이죠. 이게 모순이 되는 이유가, 그 인간이 없으면 외로워 죽어요. 나의 외로움의 원인이 뭐예요? 외로움의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결국 외로움을 통해서 정답은? 딩동댕, 나. 내가 나를 처분하기가 곤란해요.
근데 처분하기 힘들면 가룟 유다처럼 자살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어제 낮 설교에 짧게 이야기했어요.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생각나는 사람 있습니까? ‘지옥에는 사형이 없다.’ 진짜 인간의 팔자가 이 정도로 심각합니다. 죽으면 좋겠는데 모든 고통 안고 몸 아프다, 그럼 스위스 가면 돼요. 스위스 가서 질소 투입하면 5분 만에 죽어요. 스위스 가든지 네덜란드 가든지.
네덜란드는 좀 비싸고 스위스 가면 바디프랜드 하는 거 있지요. 안마기계에 뚜껑 닫고 그다음에 선택하면 돼요. 이걸 한 번 누르면 취소가 안 돼요. 에라, 번개탄도 피우는데 누르지 뭐. 아주 간편한 번개탄 용도로 하는 거예요. 그것 누르면 죽습니다. 죽는데 이게 어떻게 됩니까? 지옥에는 뭐가 없어요? 죽음이 없어요. 사형이 없어요.
그러면 지옥 가기 전에 미리 죽으면 어떠냐? 지옥 가기 전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지옥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정녕 죽으리라고 돼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율법을 적용받거든요. 그러면 지옥도 율법의 저촉 받아서 신명기 28장에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를 받아요.
그러니까 지옥은 이미 시작된 거예요, 이 세상부터. 시작부터 ‘정녕 죽으리라’에 저촉을 받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가시면 지옥입니다. 배 진수식 할 보세요. 요새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배를 처음에 어디서 만들어요? 육지에서 만들지요. 다 만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뭡니까? 육지에서 바다로 띄워야 되잖아요. 그때 미끄러지듯이 잘 띄워야 돼요. 잘못하면 배가 뒤집어져서 새로 만들어야 돼요. 미끄러지듯이 가잖아요. 그러니까 지상 생활에서 미끄러지듯이 그대로 가게 되면 뭐냐? 지옥입니다.
누가복음 16장 부자. 이 땅에서 부자 됐지요. 그 부자 된 것 그대로 가게 되면 지옥에서 지가 부자인 줄 알고 부자 행세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지옥 쪽으로 방향 정해진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선악체계. 선악체계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간다는 거예요. 선에서 악, 악에서 선 그건 나 하기 나름이다.
그러면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까 천국은 뭡니까? 천국은 뭐가 안 들어가지요? 자기 행함이 안 들어가지요. 이건 너무 간단한데, 얼마나 쉬워. 기도, 전도, 찬송, 예배참석, 성경공부 이런 게 하나도 안 들어가지요. 그것 들어가면 지옥이니까. 인간은 자기 행위를 기억하니까. 그게 안 들어갈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미리 죽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미리 죽어버리면 내 행함은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고 내 행함은 기도, 전도, 헌금, 성경공부, 예배참석, 찬양, 목회생활 뭘 해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죄가 된다는 걸 안다는 것은 이미 어디에 들어간 겁니까? 천국에 들어온 거예요. 이게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천국은 세상의 평가가 뒤따라오지 못하는 장소.
천국은 세상의 평가가 뒤따라오지 못하고 멈춰야 하는 공간,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여기서 세상 평가 안엔 뭐가 들어있을까요? 선악평가지요. 선악평가가 더 이상 뒤따라오지 못하고 스톱, 멈추는 거예요. 어디서? 천국 문에서 멈춰요. 그러면 이 천국을 사도 바울은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예수 안’으로 표현해요.
예수 안에서, 이게 성경 전체를 통해서 제일 어려운 단어에요. 내가 집사님 안에 들어가 볼까요? 무게 칠십 나가는데 들어가면 빵꾸 날 건데요. 안 돼요. 나라는 존재가 예수 안에 들어갈 재간 있습니까? 없어요. 엄마도 갓난아기를 꼭 쥐고 있지 안에 집어넣지는 않잖아요.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6장 보겠습니다. 거기 임신 이야기가 나와요. 16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여자가 아기를 출산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먼저 여자가 안에 뭘 가졌다? 아기를 가진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에베소서 1장 1절에서 4절, 창세전부터 예수 안에서 너희를 택하였나니, 라는 말이 나와요. 그럼 창세전에 예수 안이니까 예수님이 뭘 임신했다는 말입니까? 자기 백성을 안에 잠재적으로 임신을 했다는 거거든요. 이게 어제 낮 설교에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아담에 속한 후손들이 죄에 왕 노릇당한, 모든 게 죄가 되는 것처럼 할 때 아담 안에 이미 뭐가 들어있어요? 많은 다수가 포함돼 있어요.
마찬가지로 마지막 아담 예수님 안에 자기 백성들이 창세전부터 이미 계시적으로 또는 언약적으로 함께 담겨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십자가 달리면 엄마 혼자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니고 그 안에 잠재적으로 있었던 자기 자녀도 십자가 달릴 때 이미 같이 죽은 게 되는 겁니다. 엄마 따라서. 우리 어머니는 예루살렘에 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있는 말씀(“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하는 게 뭘 빼는 거예요? 이미 출생해서 태어난 누구의 행함? 나의 행함을 다 빼는 이야기에요. 이걸 제거하는 이야기에요. 내가 하면 이게 주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 되니까요. 나의 일이 섞였다 하면 선악이 거기에 선악 바이러스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거는 천국이 아니고 어느 쪽입니까? 그냥 지옥으로 미끄러져가는 거죠. 지옥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날 때부터 천국 백성 되려면 달라도 뭔가 달라야 되겠죠.
여러분 이게 어려운 이야기 아니고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임신했고 나를 출산시켰다, 라는 그 이야기는 출발점이 ‘내가 뭘 하면 됩니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어디서부터 출발해요? 예수님부터 출발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은 이거는 뭡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의 DNA, 잠복돼 있던 예수님의 각본대로 진행되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은 이러한 식으로 그들이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직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완결됐지요. 완결됐으면 앞으로 어떻게 일어날 것에 대해선 우리가 압니까? 우리는 앞으로 뭘 겪을지 모르잖아요. 그걸 ‘완결된 불확정성’이다. 완결된 불확정성, 또는 비확정성 해도 비슷한. 완결된 것들이 다수를 이룰 때 십사만 사천 완결된 것이 다수를 이루는 거예요.
야곱은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그럼 야곱에서 다수가 나왔지요. 몇 명입니까? 열두 명. 열두 명이 계속 430년 동안 자식을 낳으면 전체는 무슨 숫자 되지요? 이스라엘 되겠지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미확정적이죠. 왜냐하면 하나의 야곱의 정신을 위해서 잘려나갈 것은 잘려나가고 더 추가될 것은 추가되는 비확정성,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지요.
지금 시편 56편에 나오는 이야기가 다른 민족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면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원수, 나의 원수가 발생된다는 말은 흔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니까 으샤으샤해서 우리는 다 구원받은 백성이다,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거는 미확정, 또는 비확정성, 또는 불확정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작동하는 작용하는 원리는 어떻게 됐다? 이미 뭐 됐어요? 완결된 거예요. 그럼 완결된 어떤 특정 인물이 미리 이스라엘 다윗 시대에 등장해야 되겠지요. 그 인물이 누구지요? 다윗이죠. 이제는 다윗은 여기 보세요. “다윗의 믹담 시” 가락을 이야기하는 거고, “영장으로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 인에게 잡힌 때에” 이렇게 돼 있지요.
요 이야기는 다윗이 블레셋에 잡혔어요, 아니면 자진해서 블레셋에 들어가게 된 겁니까, 어느 쪽이죠? “요낫 엘렘 르호김”은 ‘외진 곳에 있는 고독한 비둘기의 곡조’ 이런 뜻이거든요. 자기 신세를 뭐로 봤습니까? 원래는 고향이 블레셋이 아니고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 나를 핍박을 해서 곤혹스럽게 비둘기로 고립된 형상이에요. 그때 나온 노래다, 이 말입니다. 이게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5절. 이것은 다윗이 미친 척해서 가드라는, 가드는 블레셋 땅이거든요. 가드라는 곳에서 미친 척해서 위장 귀순하는 그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사무엘상 21장 10절에,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사람들이, “임금님, 이거 위장 귀순 아닙니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했는데 그 영웅을 우리가 받아주면 됩니까?” 하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13절) “걱정하지 마. 이미 권력 다 빼앗기고 봐라. 미친 인간이잖아.”
그래서 받아줬습니까? 안 받아줬어요. 미친 인간이니까 우리가 죽이지 말고 다른 데 보내.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14,15절)
그런 식으로 위장해서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나오는 이 시편 56편입니다. 이게 계시입니까, 계시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의 책에 포함된, 계시에 포함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첫째 시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계시 아닙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왜? 그럼 사도행전 29장 막 쓰자, 이 말인가? 그게 아니고 이미 완결된 계시가 우리의 여러 가지 형태, 성도의 여러 가지 형태를 양생하고 발생시키고 현상들을 나타내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시를 ‘나는 계시다’ 하면 뭐가 돼요? 우리는 자신이 미확정적이라 하는 것을 놓치면 안 되지요. 계시라 하다가 까불다가 잘릴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모든 출발을 어디에서 해야 돼요? 나는 구원받았다, 하면 안 되고 자꾸 어디로 가야 돼요?
처음에 완결된 예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걸로 경유해서 다시 자기를 보고, 또 하루가 지나면 또 어디로 갑니까? ‘주님의 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로 가서 그 말씀의 현상으로서 오늘 내가 하루를 산다는 것, 그걸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20241111b 부산강의 : [시편]72(56:8)-공백의 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시편 56편 6절에 보면,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생명을 엿본다? 왜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까? 도대체 뭘 빼앗으려고 했을까? 사람이 누구를 죽이려는 이유는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예요. 부모가 얘보고 공부 잘하라고 나무라고 윽박지르고 때리기도 하는 이유가 부모가 자기 인생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연세 많은 할머니가 아들며느리 다 일하러 나가고 손자 열심히 키우면서 어린이집에 왔다 갔다 하면서 정성스럽게 키우는 이유는 내 인생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다윗을 공격하고 다윗의 생명을 찾아 없애고자 하는 것은 내가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예요. 죽인다는 말은 상대방을 지상에서 존재 자체를 없애는 거거든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인간의 모든 존재가 주님의 존재를 가려왔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한 백성의 존재를 악인으로부터 공격받아 지움으로서 그 지웠던 자리에서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로 사용하십니다.
아아, 하나님 무섭지요. 네가 죽든 말든 내 있음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네 목숨 잃어버림을 나는 수단으로 사용하겠다. 그 사건이 창세기 4장입니다. 아벨이 죽어요. 아벨이 죽을 뻔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벨이 안 죽고 죽을 뻔했으면 가인의 죄도 드러나고 아벨도 결국 죽을 뻔했지만 다시 멋지게 살아나면 쌍방 간에 좋지 않겠느냐, 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을 때까지 손도 안 댑니다. 가만히 지켜봐요. 기어이 아벨이 죽고 난 뒤에 뒤늦게 하나님이 가인에게 찾아오지요.
이걸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망하기 직전에 우리를 다시 사업을 일으키면 좋은데 기어이 망하게 하시죠. 아직도 인간들은 배 열두 척에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 이야기죠. 아직도 나에게는 배 열두 척이 남아있사오니 이것으로 뭘 해볼까요, 하지요. 간증집회가 그 이야기잖아요. 간증집회는 죽을 뻔한 사람 이야기지 죽은 사람 이야기 아닙니다. 죽은 사람 공동묘지에서 무슨 이야길 해요. 간증집회는 죽을 뻔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게 가짜에요. 유사 아벨?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8절) 다윗의 눈물이 그대로 수송이 돼요. 택배로 해서 어디로 가느냐? 주의 병에 담기고 주의 병에 담긴 그것이 주의 책에 담깁니다. 순서가 이렇게 돼 있지요. 결국 하나님께서 노리는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늘의 계시가 아니고 하늘의 계시가 땅에 내려온 땅이란 상황 속에서 주님의 계시는 어떤 식으로 비추는가? 하늘의 계시가 땅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오는가? 주의 책이 계시잖아요. 이 계시를 분석해보면 주의 병에 담겨있고 주께서 계시를 미리 준비했고, 주의 병에 담긴 내용을 해석해보니까 뭐가 나왔어요? 눈물이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서 주님의 병을 하나님으로, 다윗을 뭐로? 주님으로 예수님이 되겠지요. 왜? 이 땅에 왔으니까. 주의 병, 주의 책은 이 땅에 없고 다윗은 이 땅의 존재니까 다윗이 흘린 눈물, 이것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눈물이 하나님의 계시를 완성시킨다 이 말입니다. 완결된 그다음에 미확정성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결된 확정성으로 최종 마감이 되는 그 여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경로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마땅히 들어가야 되겠지요. 질문이 아니고 제가 말하는 거예요. 버림받았다는 것은 누가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있다는 거죠. 아버지가 있을 경우에만 아버지께 버림받음이 성사가 되지요. 내가 누구한테 버림받았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집안 식구한테 아빠엄마한테 버림받았다 할 때 그래도 남는 것은 누가 남아요? 이젠 내가 버림받았지만 씩씩하게 내 힘으로 살면 되잖아요. 이게 이 세상의 형편이에요. ‘그래 보란 듯이 내가 성공하겠다.’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도로 하나님께로 필히 돌아가야 돼요. 나를 버린 분에서 다시 돌아가야 돼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그것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보는 겁니다. 아버지의 계획이라고 보는 거죠. 아버지의 계획에 의해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나를 버린 것이 아버지의 계획이라면 아버지의 계획의 남은 뜻은 뭐냐? 버림받은 나를 다시 받아주는 것, 이게 아버지의 계획이니까 ‘주여,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아버지로부터 저주받고 버림받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에게 해당되겠어요, 하나님께만 해당되겠습니까? 하나님께만 해당돼요. 인간에겐 해당 안 됩니다. 인간에게 해당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의 자립심 때문에. 버림받아도 나는 여기 있잖아. 그럼 내가 알아서 나를 다시 일구면 되지, 이게 인간들 생각이에요. 버림받으니까 실망스럽고 눈물 나고 짜증나지만 그래도 나는 다 잊어버리고 보란 듯이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겠다, 이 의지를 가진 위대한 조상님 이름이 뭐죠? 아담이었지요. 우리는 그 조상의 그 자식들이고.
비록 생명나무에서 강제 추방당해도 인간은 근본 된 토지에서 꿋꿋하게 그들은 자식 낳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비록 인생의 끝은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살아 있을 때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고 매일 버티고 오늘 떨어져도 버텼듯이 내일도 버티고 인생이란 버팀의 연속이에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죠. 버티는 데 여기다가 화학조미료 msg 뿌리는 것이 뭐냐? 하나님 믿고 버티고, 주님 믿고 버티고, 주인공은 여전히 나고. 교회 다녀서 버티고, 기도하면서 버티고, 전도하면서 버티고 버팀의 주체는 누구다? 하나님이 아니고 나다.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죠. 거기서 나온 말이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평생 교회 다녀도 하나님 믿은 적이 없어요. 주님 믿은 적이 없습니다. 행여나 혹시나 해서 믿는 척을 할 뿐이지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요. 왜? 자기 포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시편 56편에서 뭐냐? 다윗을 투입한 거예요. 다윗을 투입한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어요. 다윗은 꼭두각시 인형, 위에서 조종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윗이 있는데 다윗에서 뭘 끄집어낸다. 뭔가 행함이든 의지든 끄집어내고 욕망을 끄집어내면 출발점이 어디에요? 출발점이 다윗에서 끄집어낸 그 결과물들을 여기서 행위로 보여준 게 되잖아요. 이런 다윗은 시편 56편에 나온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은 여기 배후에 위라 합시다. 위에서 뭘 줬느냐 하면 언약을 줬습니다. 언약을 줬다는 형태가 뭐냐?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은 거예요. 기름 부음 받은 명칭이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그 시대의 메시아가 다윗인 이유가, 다윗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윗은 훌륭하지 않아요. 용기 있는 게 아닙니다.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요소를 다윗으로부터 출발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에서 출발해야 돼요.
이 기름 부음에서 출발한 다윗의 언약, 이걸 다윗언약이라 하는데 다윗언약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사건은 어디서 주어졌는가? 너의 후손으로부터 주어진 본질이 지금 너에게 도달했다, 이래 보는 거예요. 너의 후손이니까 다윗의 후손. 다윗의 후손을 이게 바로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로마서 1장에 나오지요. 복음은 뭐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누가복음 1장, 2장 거기서 성령 받은 엘리사벳이나 그리고 사가랴가 또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언하기를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
노선이 인간의 행한 것 끄집어내는 그런 노선이 아니에요. 노선의 인간의 행함과 전혀 결별된 완전히 불연속적인 연결되지 않은 또 다른 노선에 의해서 주어지게 돼 있어요. 다윗이 있다면 먼 미래에 다윗의 자손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질문한 게 그거잖아요. 어떻게 자손이 주가 되겠느냐? 자기의 몇 대 손인데 어떻게 다윗이 주님이라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너는 네 아들보고 주님이라 하느냐, 이런 식이죠. 자기 손자보고 ‘주님’ 이렇게 합니까? 손자 키우면서 주라고 합니까? 안 하잖아요.
아브라함이 먼저 태어났어요, 예수님이 먼저 태어났어요? 아브라함이 먼저 태어났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보고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돼 있어요. 예수님을 보고 같이 기뻐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나이 오십도 안 됐는데 어떻게 네가 아브라함을 아느냐? 그때 함께 있었거든요. 이 말은 아브라함에 일어난 모든 상황과 행함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래야 아브라함이 계시가 되니까요. 아브라함이 울었던 것, 다윗이 울었던 것 그게 예수님의 눈물 명에 담기고 계시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이제부터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이 나올 때에, 오늘 이야기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여러분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있다면 다윗 주변의 환경은 비어있어요. 그런데 다윗을 공격하는 다윗의 원수들 있잖아요. 원수들은 뭐로 가득 차있습니까? 선악체계로 가득 차있어요.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선악체계가 들어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담의 성질을 그대로 다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다윗이 장차 다윗의 자손과 연결되지 않다면 다윗도 어디 포함돼요? 선악체계에 그냥 포함될 보통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을 때에 그게 사무엘상인데 그 대목을 잠시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6장, 사무엘이 몰래 사울이 알면 자길 죽이니까,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말씀은 있지만 자기를 지킬만한 보디가드나 권력은 없어요. 그래서 걸리면 죽어요. 권력 있는 자는 사울이니까요. 사무엘이 몰래 갑니다. 16장 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그래서 이새의 집에 가서, 이새에겐 엉뚱하죠. 사무엘이 자길 찾아오리란 건 예상도 못한 겁니다.
예상도 못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비어있다. 공백이다. 어려운 단어 하나 나왔습니다. 비어있다, 공백이다. 여러분들 수준이 되니까 어려운 것 해도 괜찮지요. 공백, 비어있다. 두 개의 뜻이 있어요. 하나는 그냥 없다는 뜻이 될 수 있겠죠. 두 번째는 없다가 있다. 뜻이 어때요? ‘없다’도 공백이고, ‘없다가 있다’도 맨 공백이죠. 근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냥 없다가 돼요. 처음에 없다가 된다면 오케이 없어, 이렇게 되잖아요.
현재 이 자리가 구봉서 있습니까? 이미 죽었으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구봉서란 코미디언은 죽었습니다.’ 죽음이 있다가 되지요. 이거는 뭐냐 하면 우리가 접근불가가 돼요. 또는 논리 불가. 현재 우리가 통용하고 있는 언어체계나 논리구조로서 찾아가 수 없는 세계, 그게 바로 공백의 세계입니다. 그냥 없다는 부정적 의미지만 이거는 뭡니까? 없음이 있다는 것은 그 혼란스럽고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있다는 것,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그 세계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를 준다는 것이 두 번째 의미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어떻게 돼요? 공백이죠. 비어있지요. ①번입니까, ②번입니까? ②번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인간에게는 주님의 세계는 갈 수 없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지금 갈 수 없는 세계에 알 수 없는 괴물에 의해서 갇혀 있다가 되는 거예요. 긍정적 의미로. “너희들이 하늘나라를 가? 참 웃기는 이야기네. 너희들은 갇혀 있어. 못 빠져나와.” 어디서 못 빠져나오느냐? 사망에서 못 빠져나와. 죽음에서 못 빠져나와.
누가 고린도전서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 고린도전서 15장 26절 크게 읽어보세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이 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김정은이다, 이러면 이해되지요. 푸틴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마스다. 이러면 원수의 대상이 딱 있는데 원수의 대상이 뭐라 돼 있어요? 사망이다. 그렇다면 나의 원수가 나다, 이렇게 돼요.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원수인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나는 나에게 달려들고 있다. 모든 우리의 행동과 말 속에서 죽기를 무서워해서 진리대로 행하지 못하고 이게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될까? 내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느냐, 아니면 조기에 은퇴할 수 있는 행동인가를 점검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사망한테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 55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절,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지금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해요? 지금 아무것도 없는데 사망아, 사망이 ‘예’ 합니까? “사망아 네가 나의 원수였다.” 옆에서 “목사님,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아니야. 알 필요 없고…. 네가 나에게 죄 짓게 만드는구나.” “본인이 죄 지어놓고 핑계를 사망보고 합니까?”
사망이란 구체적인 인격체가 있느냐? 말 통하는 관계가 성립하느냐, 이 말이죠.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이 인간과 논리적으로 카페에 앉아서 커피 앞에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논리와 언어로서는 바로 공백 세계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왜? 공백 세계는 인간의 논리가 접근이 불가하니까요. 그래서 공백의 세계는 어떤 세계다? 없음의 세계. 그런데 없음의 세계가 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뻔한 세계,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세계, 그래서 과학 관찰의 대상이 되는 세계, 저기 달나라 있다, 저기 화성이 있네, 거기 안드로메다가 있다. 그럼 달이 있으면 그 달 따면 행복합니까? 여러분 달 따면 행복해요? 달 따면 인간 승리입니까? 이 질문을 내가 나눠주는 걸로 따져봅시다. 우리 부산모임에선 평소에 잘 안 하는데 오늘 노래교실 합시다.
왜 제가 흔히 아는 대중가요를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복음을 듣고 말씀을 봐도 일상생활이 다 가려버려요. 말씀 듣고 10분 안 돼서 일상생활로 완전히 환원됩니다. 돌아갑니다. 왜? 일상생활의 논리와 원리가 몸에 축축하게 젖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 성경공부 시간에 일상생활을 끄집어 당겨서 여기서 말씀의 제단에다 한 번 보자 이 말이죠.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럼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가사를 생각해보세요. 가사 없는 건 잘 안 해요.
<꽃반지 끼고>(은희)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
이제는
이제는
가 버린
가 버린
아름다운 추억
생각난다 그 바닷가
그대와 둘이서
쌓던 모래성
파도가 밀리던
그 바닷가도
이제는
이제는
가 버린
가 버린
아름다운 추억
정녕 떠나 버린 당신이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어요
여기 당신이 준 꽃반지를 끼고
당신을 생각하며
오솔길 걷습니다
그대가 만들어준
이 꽃반지
외로운 밤이면
품에 안고서
그대를 그리네
옛일이 생각나
그대는
그대는
머나먼
머나먼
하늘에 저 별
저 별
성경공부 백날해도 집에 돌아가게 되면 자기의 추억 속에 잠기고 꼭 과거의 추억이 아니더라도 현재 모든 일상 속은 추억의 바탕 위에 기억의 바탕 위에서 연속해서 행동하게 돼 있어요. 이 <꽃반지 끼고>란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공백이에요? 뭐가 공백이에요, 다 아는 이야기. 여기 특히 마지막, “그대가 만들어준 이 꽃반지 외로운 밤이면 품에 안고서 그대를 그리네 옛일이 생각나” 근데 그대는 지금 어디 있어요? 죽었어요.
그러면 죽어서 지금 뭐가 됐어요?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어요. 꼭 별이고 싶어요. 왜? 그냥 죽어서 화장터 가면 기억하는 내가 너무 잔인해. 따라서 저 별이 되어서 가끔 보고 싶을 때마다 해운대 바닷가에 나가서 별 보면서 ‘여보’ 하든지, 죽은 자식 같으면 자식을 생각하면서 ‘너는 나의 별이었어’ 이러고 그다음 날 다시 한 번 용기를 얻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잖아요. 이게 우리가 납득이 되는 생활이에요.
문제는 그 납득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는 완전히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일상생활을 납득한다는 말은 잊어버리라는 게 아니라 이걸 납득하고 이것 말고 다른 세계, 공백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다윗이 위대하지 않아요. 다윗은 똑같아요. 보통사람과. 다윗도 맨 꽃반지 끼고 거닐고, 그걸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 그리워할 거예요. 그게 다윗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예상 못하게 자기 생각에 자기 추억으로 건너갈 수 없는 다른 영역이 자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알 수 없는 핍박, 알 수 없는 쫓김, 알 수 없는 고립과 외톨이. 왜냐하면 공백의 세계와 꽃반지 끼고의 세계와는 뭐가 안 됩니까? 같은 말로 상호소통이 안 돼요. 그런데 다윗은 특수한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계시대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니 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공감하고 같이 사는 이 세상에서 유독 나의목숨을 제거하려는 그런 경향성을 보인다는 것까지 알았어요.
그래서 우린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행복은 더디 오는데 불행은 순간적으로 닥치지요. 행복한 순간이 길다할지라도 불행한 순간이 모든 행복을 무효화시켜버립니다. 지금 그걸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림은 이렇게 그리지 말고 다시 그려야 되겠지요. 다윗이 출생해서 쭉 가지요. 사무엘상 16장에서 거기에 사무엘이 기름 부으려고 하니까 그 아버지가 자식 일곱 명을 다 동원했고 사무엘 선지자가 일곱 중에서 누구에게 부을지 대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사무엘도 일곱 명이 다니까 부으려고 하니까 그때 누가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지요. 맏이 엘리압이 괜찮게 생겼는데 “걔 아니야. 하나님은 중심을 보지 겉모습을 보는 게 아니야.” 그럼 첫째도 안 되고 둘째도 안 되고 마지막 일곱째까지 다 안 됐어요. 그러면 그 자리에 기름 부을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음이죠. 없음의 세계.
내가 구원받는다, 이것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이건 마귀 짓이죠. ‘없었던 내가 구원되었다.’ 이게 맞는 말이죠. 내가 생각하지 않은 내가 완결된 상태는 모르지만 지금 미확정이지만 완결된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세전에 미리 예수님과 더불어서 몸 안에 같이 있으면서 죽을 때 같이 죽고 살 때 같이 살았어요. 그 나가 구원받는 게 지금의 나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나와 나 사이의 연결점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나가 있었음을 통보해주지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항상 말씀이 들어와야 돼요.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고,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 사건은 칠 년의 사건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 사건은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했어요. 그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이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이미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선 창세전에 나를 임신했는데 이젠 반대로 내 안에 누굴 임신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임신하게 된 거예요.
다윗이 있는데 인생에 대해서 다윗은 있음과 있음의 연속이에요. ‘꽃반지 끼고’에요. 다 기억해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목동으로 산 것 다 있는데 내가 모르는 사건, 없음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무엘이 집에 찾아왔고 그때 다윗은 양치기 위해서 밖에 나갔지요. 어느 아들이 사울 다음에 차기 왕이 되느냐, 하는 그 일을 할 때도 양은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그 일을 누가 맡겠어요? 가장 가능성이 없는, 없음이죠. 가장 왕이 될 가능성이 없는 막내아들이 바깥에서 양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럴 때 이새의 집안에서는 차기 왕을 뽑는 절차가 이루어졌단 말이죠. 기름을 막 부으려고 하는데 주께서 패스, 패스 완전히 하이패스에요. 없어. 그래서 사무엘이 화를 내요. 아니 나는 분명히 여기 기름 부을 아들이 있다, 왔는데 왜 없느냐? 그때 이새가 이실직고해요. 막내아들 있는데 여기 낄 자리가 아니지요. 그건 빼고, 했습니다. 걔 데려와. 딱 데려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걔한테 기름 붓지요.
그래서 합격될 자는 기어이 합격된다는. 지가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먹고 춤을 추든, 지가 예수 안 믿는다고 어디 도망을 치든 기어이 걔 불러와. 걔는 미확정성을 모르지만 이미 완결된 상황이 더 강해요, 우리보다. 해줬을 때 그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은 놀라지요. 왜냐하면 내가 지금껏 아는 세계에 살았는데 거기에 뭐가 더 추가됐습니까? 내가 모르는 세계가 나를 주도한다는 이 사실이 내 안에 같이 결합이 되면서 내 안에서 주님의 계시대로 움직이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지요.
이제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사업이 망해서 돈 다 잃었든 주식투자해서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든 그거는 더 이상 우리 입에선 불행이란 것은 싹 다 없지요. 비극, 불행, 망했다 이것은 인간세계 일상생활에서 통하는 꽃반지 끼고 지 애인 죽어서 하늘에 별 된 그런 경우를 말하지만 이제 주님 세계에서는 네 애인이 죽더라도 그게 주님의 시나리오대로라는 데 드라마가 되려면 대본대로 해야지요. 그 드라마에 하나의 장면에 불과한 것. 창세전에 이미 계획된 대로 작정한 대로 움직일 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사울이, 오늘 다시 없음입니다. 사울 왕이 공격한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사울 왕이 다윗을 왜 공격하는가? 있음의 세계만 고수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의 특징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고, 이 세상에 권력이 다고, 과학이 다고, 말씀 같은 건 집어던져버리고 눈에 보이는 실적 얻기,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인생에서 승부를 걸러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놈들이 설치는 힘주는 그들의 권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적어왔어요. 이건 뭐냐? 시편에 나오는 악인들의 특징, 거기에 대해서 듣기만 하세요. 악인의 성격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여 화살촉을 독한 말로 겨누며, 시편 64편 3절. 사람의 걸음을 밀치려 한다, 시편 140편 4절. 시편에서만 말한 거예요.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며, 140편 5절. 거짓말하는 자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요, 시편 5편 6절. 거짓되고 궤사 사기를 치며, 120편 2절. 해하기를 꾀하며 죽이기 위해서 모이며, 140편 2절. 그 입술 아래 독사의 독이 있으며, 140편 3절.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다, 시편 17편 12절. 그 눈은 의로운 자를 엿보며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시편10편 8절. 여호와를 배반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고, 시편 4편. 이런 자는 하나님의 원수들이고, 시편 37편 20절. 하나님을 미워하고, 시편 68편 1절. 몹시 교만하며, 140편 5절. 그런데 그들이 때로는 형통하고, 시편 73편 3절. 때로는 풍성한 제물을 누리고, 시편 73편 12절. 이게 악인들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이번엔 의인 봅시다. 시편에 나오는 의인은 공고하고 궁핍하며, 12편 5절. 다르지요. 86편 1절은 47편 17절과 같은 뜻입니다. 마음이 상했다, 시편 109편 22절, 109편 16절. 악인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 시편 37편 1절. 보세요. 의인은 어떻습니까? 의인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멀쩡하게 의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어떤 대상이 돼요? 악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핍박을 받는데 왜 핍박을 합니까? 이유는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실적과 업적으로 승리감을 쟁취해서 ‘나 부자 됐잖아, 성공했잖아’ 너는 통뼈냐 왜 그 맛으로 안 사느냐 이 말이죠. 보니까 집도 세 채 있고, 자동차 일곱 대 있고, 부동산은 천오백 평 되고, 월수입은 이천만 원 되는데 왜 그것으로 안 사냐 이 말입니다.
그 소리 듣기만 해도 기분 좋지요, 지금. 그리 살아봤으면…. 없어서 주님 찾는 것보다도 있어도 주님 찾는 게 더 어렵지요. 어렵더라도 해봤으면 좋겠어. 집도 펜트하우스 이런 집에 살고 싶고. 집에 나갈 때나 올 때 엘리베이터 타고 싶다 말이지. 다들 타시는구나. 나만 안 타는 모양이지, 나만 계단 있는 집….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악인과 함께 한 통속이 되어 거기 푹 빠져서 같이 희희덕거리면서 자기 성공한 맛에 자기가 도취되어 살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은 악인이고 시편이고 뭐 의인이고 하고 집어던져버려. 성공했는데 이걸 왜 봐요, 성공했는데 복음을 왜 듣습니까?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이 땅에 없는 세계가 없는 식으로 이미 천국이 시작됐다는 거예요. 지옥이 시작됐다 했지요. 천국도 같이 시작됐어요, 성령 안에서.
끝으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있음의 세계에서 어떻게 없음의 세계로 넘어갈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있음의 세계에서 공백, 없음의 세계로 어떻게 넘어가는가? ①못 넘어간다, ②안 넘어간다. 어느 게 맞습니까? 안 넘어가지요. 왜? 없으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있음은 뭐냐? 이게 원인이 내가 방해물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아는 있음의 세계에서 나온 나, 우리 부모는 누구고, 삼촌은 누구, 우리 동생은 누군지 다 아는 내가 있음의 세계의 나를 어디다 집어넣으려 하느냐 하면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교회 다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천국은 있음의 세계와 단절되지 않은 끊어지지 않은 그대로 이어지는 마치 생명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 같은 그런 천국을 컨셉 잡아서 교회가 사업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제가 첫 번째 강의할 때 초반에 이야기한 게 뭐예요? 내가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쪽에서 꺼낼 수 있는 그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이 내 구원에 어떤 기여와 보탬이 되겠습니까, 라고 내가 뭘 하면 천국 가겠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나를 없애지 않고 튀어나온 질문이에요. 그러니까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의 세계로 어떻게 들어갑니까, 라는 질문은 ‘우리가 못 들어간다’가 아니라 그런 식으론 안 가고 내가 행한 대로 하면 되잖아.
예를 들어서 행함 중에서 제일 결정적인 행함이 뭐냐? “내가 믿으면 되잖아.” 믿음이에요, 믿음. 로마서 4장에 인간은 행함으로 가는 게 아니고 뭐로 간다? 믿음으로 간다. 그러면 믿지 뭐. 믿으면 되잖아. 주님께서는 ‘못 넘어간다’를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아닌 나가 나와야 되겠죠.
이게 뭐냐? 이름 바뀌기에요. 이름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바로 생명책에서부터 거꾸로 쏟아내면 되지요.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있다면 생명책은 없음의 세계죠. 없음의 세계에서 새로운 내가 모르는 나에게 이름을 부여해요. 이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하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인자의 이름, 주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이름을 이제부터 바꿔야 되겠네요. 이예수로. 아니죠. 인간의 세계, 있음의 세계의 이름은 그냥 이름으로 언어로 끝나지만 없음의 세계, 하늘나라 이름은 이게 기능으로 와요. 어떤 변화로 와요. 능력으로 와요. 어떤 능력이냐? 그게 바로 시몬이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베드로로 바뀌었지요.
그런데 바뀐 이름으로 기껏 한 게 뭐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 베드로는 다시 시몬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는 이름과 전혀 무의미한 시몬의 짓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시몬이 아니라 반드시 반석, 베드로가 돼야 된다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 자기 성취감을 위해서 주께서 성령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오고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찾아왔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은 ■이미 사망이 사망했다는 거예요. 사망이 사망했다는 것은 뭐냐? 누가 어떤 분이 ■사망에서 벗어난 분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이 말씀의 완결을 줘요. 그러면 ■말씀이 완결되게 되면,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중요한 게 마지막에 나왔네요.
이게 뭐냐 하면 사건이 돼요. 사건이 되면서 ■사건은 똑같은 내용을 복제가 가능해요. 없음에서 없음을 채우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으로 채워진다면 이제 없음은 뭘 얻느냐? 내용을 얻었어요. 이 내용은 역사를 통해서 뭐가 된다? 복제가 돼요.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주님의 경로가 우리 인생 속에 거기에 그냥 복제가 돼요. Ctrl+v 그냥 복제가 된다고. 그냥 복사가 되면 내 가는 길이 본의 아니게 원치 않게 주님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게 돼요.
그 가는 길이 뭐냐? 시편 56편 그다음부턴 하나님의 원수, 내 원수가 아니고요. 나한테 친절했는데 무슨 원수 돼요? 주님의 원수가 눈에 띠게 돼요. 어떻게? 그들이 가는 방향, 삶의 태도, 인생관 이 모든 것이 지옥 쪽이라는 것을 이젠 영적 감각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남편이, “내일 휴가인데 우리 유럽 한 번 갈까? 당신 고생 많이 했어” 젖은 손을 부여잡고, “아이고 손 좀 봐. 자식들 키운다고 고생했구나. 가자” 이렇게 할 때 영적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여보, 당신 너무 고마워. 그래 같이 가자.” 가면 뭘 느끼겠어요? 그쪽은 유럽 간 지옥 맨이 되고, 나는 유럽 간 천국 사람인 것을 중첩된 세계를 양쪽 다 알게 되면서 남편이 하는 것을 주님이 주신 친절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지옥 가는 게 어디 감히 나에게, 절대로 그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까 주어진 모든 상황을 감사하는, 주께서 두 개의 중첩된 것을 알아보는 성령으로 받아서 주님 가신 세계와 그리고 남아있는 심판의 세계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점을 새길 수 있는 기회를 매일 일상 속에 우리에게 부여하는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성령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고 우리가 뭐 바친 것도 아닌데 그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주께서 어떤 경로를 밟아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는지를 그 길로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그것을 매일같이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