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언약적 기능

아빠와 함께 2025. 3. 9. 17:56

언약적 기능 

2025년 3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3:19-22

(33:19)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33:2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할 수 있을진대
(33:21)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33:22)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투가 인간들의 현재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나오신 말투입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무게를 두고, 그리고 중심으로 해서 삶의 패턴을 이룹니다. 변함없는 것으로 그들이 누구도 동의하는 것은 낮과 밤이 주는 질서입니다.

낮과 밤은 보이는 해와 보이는 달에 의해서 갖추어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에 대해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신뢰를 하고 있는데 그 신뢰가 최우선적입니다. ‘변하지 않고 한결같음’의 표준으로 낮과 밤의 교대 질서를 거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이 자연원칙에서 나온 안정성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십니다.

너희들이 보기에 결코 달라지거나 바뀔 리가 없는 이 대자연의 원칙이 바뀌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확고하게 하나님께 밀어붙이시는 원칙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언약’이요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은 왕의 출현에 관한 약속입니다. ‘레위언약’은 그 왕이 지상에서 하시는 기능에 관한 겁니다.

왕이란 전면적인 지배와 통치에 관한 존재이고 레위언약은 그 왕이 지상에서 행하실 기능에 관한 겁니다. 그 기능이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죽음을 생산하는 겁니다. 이 지상의 기능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적인 기능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레위인들은 왕을 모시는데, 그 레위인들이 모실 왕은 인간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적 기능에 대해 모시는 겁니다.

역대상 23:25-28 보면, “ 다윗이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평강을 그 백성에게 주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것이 없다 한지라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되었으니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에게 수종들어 여호와의 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일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어깨에 매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어깨에 무엇이 매일까요? 그것은 성전에서 해야 될 일과 관련된 기구들과 사물들을 어깨에 맵니다. 언약궤도 물론 어깨에 맵니다. ‘어깨에 맨다’는 것은 자기 고유의 이상이나 사적인 이득과는 전혀 무관한 일에 매진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곧 ‘자기를 위한 자기’가 성립될 수는 없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이들 레위인들은 다윗이 왕이되고부터 왕의 지배와 통솔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왕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되심의 기능을 위해 수하에 레위지파 사람들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런데 이러한 정치제도가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다운 왕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받아야 될 왕들이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무관한 외국 민족과의 관계를 고려한 겁니다. 이미 그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들에게 돌아갈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레위언약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능력껏 살면 된다고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해 법칙보다 밤의 달의 법칙보다 더 운행되는 게 각자 인간들 속에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자신을 위해 사는 법칙’인 겁니다. 비록 가끔 남을 도와준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이 자기을 우선적으로 챙기고 그 다음 남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된 왕’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왕’을 원했습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의 짊어질 대상도 백성들의 관심사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즉 백성들이 그다시 애타게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백성들을 십일조로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겁니다. 민수기 18:20-22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바로 원칙에 대해서 백성들의 반응이 시큰둥 한 겁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에스라, 느헤미야는 ‘제사장들만으로 지배를 하는 체계’를 염두에 두고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비록 성전이라는 건물이 대충 다시 만들 수는 있어도 레위인들만의 세계는 결국 성사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마음들이 각자 자신에게 꽂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태양으로 대낮에 모든 인간들이 혜택을 입고, 밤 되면 하늘에 떠 있는 하나밖에 없는 달의 혜택을 집단적으로 입듯이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은 결코 개인적인 행복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방향이 틀렸다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6:19-21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땅에 두고 있습니다. 비록 과학적으로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그 태양을 돈다고 해서 세상 중심이 지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께서 태양에 오신 것이 아니라 지구에 와서 활동을 마무리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예수님 재림 때에는 지구 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무너집니다.

즉 지구 외에 그 어떤 장소도 우주의 중심이었던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왕으로 오셔서 레위언약을 죽음으로 완성하신 주님의 일은 성도의 마음 중심을 바로 십자가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십자가 두게 되면 바로 그곳이 하늘의 모든 일이 집중되어 있는 곳입니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에 매우 신경을 씁니다. 하지만 기껏 살아봤자 100년이라는 시간 간격에 해당될 뿐입니다. 영원한 원칙은 인간의 제한된 시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완성으로 확정되는 겁니다. 우리 마음을 그 중심되는 십자가에 둡시다. 그곳이 하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각자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지말고 오직 하나뿐인 영원한 가치를 내세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5강-예레미야 33장 19~21절(언약적 기능)25030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3장 19~21절입니다. 구약성경 1108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찐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인간을 원천적으로, 인간을 무시하는 투로,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야’라는 그런 낮춰보는 태도의 말씀 스타일이 또다시 주어집니다. ‘너희들은 백날 해도 안 돼’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내가 이야기해봤자 너희들 알아듣겠어? 지킬 수 있겠어? 안 될 거야. 너희들이 안 되는 것은 너희들에게 분명하지만, 너희들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나의 뜻이 달라질 거라는 그런 착각은 하지마’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해서 이런 말투를 사용합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대자연에 있는 해와 달이 정확하게 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전에 오후 예배에서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잖아요. 지구가 돈다는 말은 ‘낮과 밤이 번갈아서 되는 이유를 제가 밝혀냈습니다. 그건 태양이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돕니다. 그래야 낮과 밤이 항상 일정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증명됩니다’라고 하니까 교회 당국에서 체포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재판받으면서 자술서를 쓰면서,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다 이단적이고, 이건 기독교, 하나님 그리고 주님을 모독한 일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앞장서서 내가 용서치 않겠습니다’라고 극히 자신을 낮추며 자술서를 써놓고, 재판정을 나오면서 하는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한 적 없어요. 그런 말 하면 경찰에서 와서, ‘너 지금 방금 한 말과 재판에서 한 말이 다르다’라고 또 체포할 거예요.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지금 논쟁이 뭐냐 하면, 태양이 있고 지구가 돈다는 것에 교회가 논쟁이 있는 게 아니에요. 지구가 중심이냐, 태양이 중심이냐를 묻는 겁니다. 아무리 지구가 태양을 돌더라도 중심은 지구에요. 왜? 메시아가 태양에 온 것이 아니고 지구에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태양도 멈춰있는 게 아니에요. 태양도 은하단에 속해서 은하단을 공전하고 있고, 은하단은 우주에 중심도 어딘 줄 모르는 그곳을 또 공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자연 세계에서 진리를 안 것은, 이것이 온전한 진리가 아니라, 자칫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신 이 지구 중심사상을 흩어버릴 가능성이 있어요. 소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포가 어떠니, 물리학이 어떠니, 수학이 어떠니, 아무리 그런 주장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피 흘림이나 새 언약의 완성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해와 달이 바뀔지언정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비록 해와 달이 바뀌고 낮과 밤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바뀌지 않는 것이 뭐냐. 그것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그 모든 원리와 법칙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게 진리라고 전 세계가 동의하잖아요. 전 세계가 동의하면서 그들이 따로 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는 자연과학이라는, 해와 달이라는 이 하늘의 층을 뚫고 올라간 삼층천에 관한 이야기예요.

자연과학의 한도를 넘어선 이야기가 하나님의 예언이고, 그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제가 울산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시간을 종결짓고, 시간을 넘어서, 시간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난 뒤에서 주어진 언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언약 안에서 인간의 시간의 흐름은 이미 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라는 그것이 언약 안에 담긴 함축된 내용이에요. 그렇게 함축될 때, 인간은 이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 인간의 불안감을 조성하거든요. 인간은 판도라 상자를 열 때, 신화에 보면, 그걸 열었다가 온갖 질병과 걱정과 근심이 다 튀어나오니까 겁이 나서 얼른 덮었는데, 덮었을 때 그 안에 마지막 남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희망이라는 거예요.

아직도 배가 열두 척 남아있다. 요새 말하면 아직도 연금은 있다는 거죠. 그렇게 인간은 희망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만약 희망마저 없다면 자살이죠. 한국은 현재 인구 5천만 이상의 국가 중에서 1등 한 것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지 모르겠습니다만, 1등 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루 자살 숫자가 40명을 넘어섰습니다. 하루에 40명이 죽으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암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숫자가 자살로 죽는 거예요.

아마 제가 알기로는 그런데, 교통사고가 순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순위가 문제가 아니라, 왜 자살하느냐? 희망이 없으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왜 희망이 없는가. 자꾸 확정된 것을 기피하고 희망적인 것을 확정된 것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자살한 사람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어요.

그들은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믿는 이유가, 예수님 믿는 이유가, 내 희망에 대해서 어떻게 가능성으로 바꿔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다가 안 되니까, 자포자기해서 자살하고 삐지고 교회에도 안 나오고 그런 거죠. 하나님 믿다가 안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 징조죠. ‘이제는 나 하나님도 싫어. 나에게는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가능성을 거부했기에,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을 욕해도 욕할만한 자격이 있다’라고 이렇게 교회 안 나오는 거예요.

‘나는 걸핏하면 하나님 욕할 거야.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줬으니까’라는 고집 같은 것이 인간에게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들은 교회 와서 그러면, 목사님들 설교 중에서 도대체 어떤 대목을 들었냐는 말이죠.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라는 그런 것만 들은 거예요. 다윗 언약이 무엇이며, 레위 언약이 무엇이며, 그런 것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은 뭐냐. ‘다윗 언약 + 레위 언약 =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공식이 나옵니다. 다윗 언약이 뭐냐. 왕입니다. 레위 언약이 뭐냐. 그 왕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능이에요. 위치는 왕으로서, 기능은 죽는 왕. 죽었던 왕, 죽음으로써 따로이 공간을 마련한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양보하거나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언약 중심으로 봐야 하는데, 자기중심으로 교회 다닌 거예요. 울산에서 새순까지 차를 태워주시고 운전해 주시는 권사님이 지난 금요일에 또 귀한 명언을 남겨줘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열선이 나오는 뒷자리에서 제가 메모를 했는데. 어떤 귀한 말씀을 들었느냐 하면, 권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가 시집갈 때는 남편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를 생각했답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난 뒤에 시간이 좀 지나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온전히 자기만 기쁘게 할 생각만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길을 잘못 택했는지, 중간에 딴 길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코스로 잠시 들어간 것만도 얼마나 대단합니까. 제가 아는 사람은 항상, ‘나를 기쁘게, 그다음은 나를 기쁘게, 그다음도 기쁘게, 끝까지 나를 기쁘게’인데.

한 번도 그 노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꼭 해와 달 같아요. 항상 그 노선에서, 나를 기쁘게, 나를 기쁘게, 나를 기쁘게. 그런데 그분은 남편을 기쁘게, 그다음은 주님을 기쁘게, 이제는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겁니다. 그 말씀을 하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방책이 없느냐는 그런 것을 깔고 저에게 묻는 거죠. 정답은 이겁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나 자체가 없어요. 왜냐 하면, 언약은 집단적이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해와 달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의 햇빛에 우리는 다 같이 한꺼번에 받고 있고, 하나의 달빛에 우리는 그걸 다 같이 한꺼번에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은 하나입니다. 내 소유의 하나가 아니라, 전체가 다 같이 부여받는 하나예요.

그게 바로 언약의 햇살이에요. 햇빛이 아닌 다른 빛. 다 이루었다는 그 빛. 언약 안에 모든 시간은 종결을 넘어섰습니다. 모든 시간의 계획한 것이 언약 안에 다 담겨있어요. ‘다 이루었다’의 혜택을 해와 달이 하는 것처럼 부여받는 겁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에녹이 알았고 엘리야가 알았고 모세가 알았어요. 그들은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님과 동행했다. 언약과 동행했다.

언약과 동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일을 다 하시니까 신이 나겠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놀기만 하면 되겠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왕으로 사용하시고, 엘리야를 그 당시 왕으로 사용하시고, 에녹을 그 당시 왕처럼 사용하는데, 그 본 기능은 말할 수 없는 고단함을 주셨어요. 그게 바로 제사 레위 기능입니다.

레위 언약을 한마디로 말해서 뭐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뭐라고 보면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레위 언약은 역대상 23장 26절에 보면 레위 사람에 대해 이렇게 나옵니다.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것이 없다 한지라” 멜 것이 없다는 겁니다. 메고 간다는 것은 나귀같은 존재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어깨에 뭘 메기 위한 레위인이에요. 어깨에 멘다는 것은 뭘 메느냐. 장차 왕으로 오실 분을, 왕으로 오신다는 그 인격체, 왕이 오신다는 것이, 인격체로 오시기 이전에, 어떤 기구, 사물이죠, 사물화된 것을 분해해서, 구성되어있는 사물을 직접 어깨에 메고, 어딜 가느냐.

약속의 땅이 기다리는 곳까지 유일하게 메고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장차, 자기 어깨 위에, 장차 오실 왕 되시는, 모든 것의 통치자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이 지상에서 일하시느냐에 대해, 본인의 몸에 짊어지고 그것을 여기서 발출해야 하고 드러내는 기능이 바로 레위인의 기능입니다. 내 어깨에 누구 있다는 거죠.

‘내가 보기에는 당신 어깨에 언약궤가 있고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릴 기구가 실려있고만, 무슨 누가 있다고 하느냐, 무엇이 있다고 해야 맞지’라고 하는데, 레위인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누구가 있는 거예요. 파편화된 거죠. 오실 분의, 이 땅에 오실 메시아, 구원자의 파편화된 기능, 여러 가지 기능들이 있지만 파편화된 기능 중 하나를 하는 거예요. 레위인들이.

그러면 역대상 23장에서는 다윗은 그것을 아주 친절하게도, 기구를 레위인들 모집해서 그들에게 일임했거든요. 전에 이 언약궤를 레위인이 안 메고, 수레에 싣고 오다가 사람들 여럿 죽었어요.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민수기에 나오는 레위인의 존재를 하나님의 언약과 결부시켜서, 언약이 완성될 때까지 레위인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다윗이.

그게 말라기 2장에 보면, 레위 언약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는 겁니다.(말2:4)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있는 한, 그 약속을 짊어지고 갈 레위인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약속은 눈에 안 보이죠. 하지만 레위인은 눈에 보이잖아요. 레위인들이 제사 기능과 관련된 그런 재료들과 물체들에 관여할 때, 사람들은 레위인만 보지 말고, ‘너나 나나’라는 식으로 보지 말고, 그들 어깨 위에 하나님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줘야죠.

실제로 요단강 건너갈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때, 요단강으로 차단시켰어요. 홍해나 요단강으로 차단시킨 겁니다. 차단시키는 이유는 가다가 다시 한번 스톱시키는 거예요. 우리가 왜 애굽에서 나왔으며, 우리가 왜 광야의 사막길을 걸어야 했으며, 우리는 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굳이 먹어야 하며, 왜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가기 전에 요단강이 다시 한번 막습니다.

막는 이유가 뭐냐. 너의 기능은 뭐냐를 묻는 거예요. 누구를 위해서 너는 일하고 사느냐를 묻는 겁니다. 이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아주 특이한 하나님의 성격, 성질이 됩니다. 민수기 18장 21절을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했어요.

이것은 바로 십일조, 하나님의 십일조를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레위인에게만 주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십일조라 하는 것은, 이게 율법이고 언약이잖아요. 십일조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생산되는 그러한 생산물을 미리 앞당겨서 기능적으로 레위인에게 양식으로 주는 거예요. 그러면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먹고산다’라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좀 더 깊이를 가져야 해요.

십일조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먹고산다’라고 해야 해요.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중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 레위인들에게 십일조가 없었어요. 줘야 먹지요. 안 줬습니다. 안 주니까, 레위인들에게 십일조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이 땅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기를 전체 이스라엘이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포기한 이유가 개인적인 행복과 개인적인 생존을 위해서, 그동안 여호와를 섬겨왔다는 거예요. 집단적인데, 하나님이라는 태양을 없앤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달을 없앤 거예요. 그 대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잖아’라는 그걸로 인해 십일조가 제사장에게 안 가는 겁니다. 안 갔다는 말은, 제사장이 하는 기능 있잖아, 제사 기능.

그 제사 기능이 ‘나에게 별로 필요치 않아’라는 마음의 결정들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이게 왕이 올 때까지 그래요. 다윗은 레위인들을 싸잡아서 했지만, 다윗 죽고 난 뒤에 또다시 그들은 몰락 했거든요. 그러면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절과 친절을 다해서 레위 기능의 중요성을 언급했건만, 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까?

왜 제사 기능이 형식으로 치우쳐 버린 이유가 뭐냐. 느헤미야에 보면, 포로 잡혀간 자들이 다시 와서 성전 짓겠다고 할 때, 성전만 지은 것이 아닙니다. 옛날 레위들을 다시 모집해서, 레위인들의 사회를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뭐가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면 뭔가 이유가 있겠죠. 왜 하나님 말씀, 레위인, 다윗 언약,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마태복음 6장 19절에 보면 그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여러분, 보물을 땅에 안 쌓아 두면, 땅 말고 다른 곳이 있습니까? 없어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마음이 땅에 쏠려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알려준 겁니다.

너의 마음은 완전히 땅에 몰빵하고 있는 거예요. 땅에. 땅에는 뭐가 흐르는가. 시간이 흐릅니다. 인간은 그 짧은 인생, 요새는 100세까지 튼튼하게 살자고 하는데, 100세 인생이라고 합시다. 100세까지 살면, 그리고 100세까지 살다가 죽으면, 101살, 102살,..., 내가 죽고 난 다음 생에는 모르겠고, 내가 챙기는 세계가 나의 전부의 세계예요.

인간은 전부다 거기에 완전히 올인(All in)되어 있어요. 거기에 다 집중되어 있어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몰라요. 내가 눈 감으면 남이 어떻게 되더라도 난 모르겠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또 개인적인 거, 개인적인 것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겁니다.

이 말은 그 뒤에 말씀을 보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하늘에 쌓아 두게 되면 우리 마음은 땅에 있지 않고, 땅을 떠나서 이제는 어디에 가 있다? 하늘에 가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걸 하나님의 언약으로 요지부동 밀어붙이겠다는 겁니다. 네 땅에 있던 마음을 하늘에 둘 수 있도록, 네가 몇 년을 살든지, 수명이 얼마든지, 나이가 얼마든지, 연세가 얼마든지,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네 마음을 땅에서 하늘로 전환시키는 것을 내가(주님이) 지금 벌이겠다는 겁니다.

그 벌이는 방법이 뭐냐. 하늘 쳐다보지 말고 땅에서, 이 왕 되신 주님이 어디서 죽고, 어떻게 죽고, 왜 죽고, 그것을 보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 죽음이 레위 언약의 완성, 십자가입니다. 이로써 왕 되시는 분의 현명한 처사가 바로 십자가 죽기까지 아버지 뜻에 복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였던 겁니다. 너희들의 마음은, 이제는 땅에 있는 하늘의 마음인 십자가로 향한다면, 네 생명은 하늘에 있음을 내가 보장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미리 우리에게 알려준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현재 현찰이 얼마 있고, 내가 몸이 얼마나 튼튼하고, 얼마나 아프고가 문제가 아니라, 정작 문제는 몸이 튼튼한 것이 문제고, 돈이 많이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을 땅에 두게 만드는 요인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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