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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읽는다

아빠와 함께 2025. 2. 15. 19:38

죄를 읽는다    2013년 4월 7일                                본문 말씀: 로마서 5:12-14

 


눈이 있기에 인간들은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 보이는 것들의 집합을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한계성을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규정해놓았습니다.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느니라”의 원칙을 고수하십니다.(요 9:41) 이것은 곧 인간의 인식론의 한계를 두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글들은 사람을 위해서 다른 것들이 어떻게 있느냐,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세상은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여기서는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뭐가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해서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이 따로 있고 사람은 그것을 보여주는 목적으로 이 땅에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목적이 된 이상 성경을 아무리 읽는다 해도 그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성경 자체가 위치가 뒤바꿔져야 돼요. 나를 위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전부 다 성경을 그동안 거꾸로 보고 있었던 거예요. 죄라는 것은 사람이 있어야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는데 죄가 먼저 있고 사람은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와 결합하게 되어 있어요.  

 


진짜 성령 받게 되면 내가 구원을 입에 담았다는 그것도 죄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이미 주께서 창세전에 구원한 것이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성령이 올 때, 믿음이 선물로 올 때 그때 인식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구원받았습니까, 나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뜻이에요. 구원을 못 받았으니까 인식론 가지고 존재론을 재조립하는 거예요.
이게 인식론에 빠져있는, 자기 주위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거기에 빠져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자기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될 텐데. 인간은 자기한테 문제가 없다고 하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 맞지를 않지요.

 

사람이 눈이 있다는 것은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눈이 달린 거예요. 눈 뜨니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 보인다 하는 것이 진짜 볼 것을 못 보게 만들기 위해서, 기껏 엉터리로 보면서도 그것을 본다는 것의 최종마감으로 하기 위해서 눈을 달아둔 거예요.
 

우리는 눈만 뜨면 죄를 짓는데. 왜 죄 없는 사람만 가는 그 천국에 우리가 왜 가야 되지요? 죄라는 것은 이미 추방된 그 상황, 쫓겨났던 그 쪽을 잊도록 만드는 겁니다. “잊어라. 이제는 우리가 노력하면 돼.”라는 식으로 저쪽과의 관계성을 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전부다 길 잃어버린 노인네에요. 성령님이 아니면 누구도 찾아낼 수가 없어요. “여기서 이사를 갔으니 여기에는 집이 없고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3-16)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치매노인처럼 방황하고 있어요. 생명나무쪽으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 막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생명나무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서 죄가 있는 겁니다. 죄가 최종 지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의는 뭐냐,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이에요. 그 일은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 되게 하기 위해서 죄가 이 땅에서 활용되어야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악한 천사, 악마죠, 악한 천사마저도 피조물인데 그 피조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있는 겁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죄 속에서 어떤 경로를 밟을 때 참 된 인간으로, 참된 아들로 인정받느냐를 보여주는 발판으로서 아담은 죄를 지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자기한테 늘 순종하는 그것에 뭐가 오는가, 율법이 오고 말씀이 오고 동시에 죄가 오고 사망이 와 버리면 ‘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이유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사망과 죄와 율법을 보내신 그 배후의 능력자와 접선이 돼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했구나, 하는 그 관계의 노선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나의 의라고 여겼던 그것, 자기가 자기에게 순종했던 그 순종이 저주받아 마땅한 나의 본성에서 튀어나온 본성의 산물인 것을 깨닫는 순간이 곧 하나님의 의십자가로 용서받는 그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거예요.
 
아직도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아직도 몰라요. 우리는 평생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께서 계속 가다 보면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의, 십자가, 어린양의 죽음, 이것은 우리가 예상도 못한 큰 기쁨이라는 것을 나중에 천국 가서 알아서 면류관도 반납하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마음껏 드리는 것, 이것이 인간존재의 이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우리가 나그네라 하지만 실제생활에서는 나그네가 아니고 죽치고 여기서 성공하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인식론적으로 그저 죄속에 뒹굴고 있지만 고맙게도 십자가의 능력이 올 때마다 다른 기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잘했다, 못했다, 구원되었다, 구원 안 되었다, 그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을, 이미 창세전부터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은 것을 우리는 증거 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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