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에 왜 신경쓰느냐?
우리 안에서 팝콘이 터지듯이 말씀이 터져버리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주께서 일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해요. 사랑은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분노도 어디에 담기느냐? 말씀에 담겨요. 말씀에 담겨서 하나님께서 분노로 터트리면 그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터트리면 저주 안에 사랑이 나옵니다. 저주 안에서 사랑이 나와요.
충분히 짓밟을 것 다 짓밟고 충분히 죽일 것 다 죽였다는 하나님의 자기만족이 사랑이거든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면 출애굽기 11장, 12장에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뭐냐? “이 집 맏이 죽었대.” “죽었어? 아, 주님께서 만족하겠다. 야, 빨리 지나가자! 넘어 가. 넘어 가.” 이게 유월절(Passover), 넘어가는 절기잖아요. “이 집은 됐고 다음 집 가자. 다음 거 맏이 또 죽이러 가자.” 넘어갔단 말이죠. 왜 넘어갑니까? 충분히 짓밟았기 때문에. 충분히 죽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넘어간 히브리 가정에서 넘어가도록 무슨 조치를 했습니까? “우리 집에 이미 우리 아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죽었어요.”하고 죽었다는 표를, 그냥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는 게 아니고! 그런 실수하면 안돼요,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면 안 되고, 죽은 아들을 대신해서 죽었던 어린 양의 피를 바르죠. 어린 양의 피를.
유월절 어린 양은 이미 밟을 대로 다 밟았다는 자기만족이란 말이죠. ‘내가 어떻게 했습니다.’가 아니라, ‘심판 전에 우리 집에 먼저 와서 이 분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게 유월절이라는 말씀이에요. 말씀이 먼저 왔거든요. 말씀이. 그러니까 천사의 심판 이전에 뭐가 먼저 왔어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먼저 왔잖아요. 그 계명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현실이 들어있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라는 존재가 특이한 존재가 되죠. ‘이 땅에 존재하나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이 땅 말고 다른 데 이미 빼돌렸다.’가 되는 거예요.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크게 써야 돼요. 그 존재가 바로 ‘천사’같은 존재. 천사 같은 존재에요. 이것은 영적 존재 또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영적 존재 또는 영에 속한 사람. 다른 말로 하면 말씀세계 안에 들어온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