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전설의 주인공

아빠와 함께 2024. 9. 11. 08:45

20240909a 부산강의 : [시편]70(54:1)-전설의 주인공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54편입니다.

시편 54편의 성경말씀을 대하면서 성경은 항상 뭐부터 하느냐 하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한테 물어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똑같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 있을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다음에 가인이 동생 죽고 난 뒤에도 가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마찬가지에요. 계속해서 주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나한테 문제점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취지가 질문하시는 것은, 너한테 문제점이 있다는 거니까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한테 먼저 가지 마시고, 신을 상상해 가지 마시고 문제점으로 가면 돼요. 문제점에 있으면 주의 질문이 들어올 거고, 문제점이 있다는 질문을 하실 거고 그 질문 따라 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뵐 수가 있는 겁니다.

이창섭 목사님 아버지 돌아가셨잖아요. 내가 이창섭 목사 아버지라고 이야기하고, 누구도 자식한테도 아무에게도 이야기 안 했겠지만 이런 질문을 해야 돼요. “내가 왜 죽어야 되는가?”라고, 부친은 평소에 살고 싶어 했어요. 그렇잖아요. ‘빨리 죽어야 되는데’ 그거는 남한테 과시용이고 본심은 살 때까지 계속 더더 살아서 호강하고 싶은 겁니다. 건강한 채로. 그것도 비실비실 말고 우사스럽고 치욕스런 모습은 보이기 싫고 대단한 모습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 할 때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것은 바로 문제의식이에요. 나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죽으면서 내가 죽느냐는 그 의식이 죽음보다 더 소중한 겁니다. 죽을 때 그냥 죽으면 말릴 수 없는데 내가 왜 죽어야 돼, 라고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돌아가는 것과 내 의견과 지금 안 맞는다는 뜻이에요. 나는 살고 싶은데 육신은 망가졌단 말이죠. 왜 내가 이런 처참한 대우를 받아야 되는가, 라는 식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이 자리에 들어야 되는 겁니다. 이 자리에 들어가면 무슨 순환구조가 기다리는가? 순환구조란 뺑뺑이 도는 거죠. 시간방향이고 반대방향이고 상관없습니다. 오른쪽으로 돌리고 가끔은 왼쪽으로 돌리고, 이거는 뭘 비벼도 괜찮아요. 하여튼 순환구조에요.

순환구조의 특징은 폐쇄적이다. 구조 보세요. 동그라미잖아요. 그냥 질문이 질문을 낳고, 질문이 질문을 낳고 그 질문 자체에서 뺑뺑이 도는 데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현재 이 현실 속에서 뭐가 되느냐? 현실은 나에게 비극이라는 것. 뭐 물어볼 사람이 없어요. 구름보고 묻습니까, 별보고 묻습니까, 달보고 묻습니까?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칠성각에다 별보고 물었어요. 북두칠성보고 물었어요. 부처한테 묻지만 부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시답지 않고 부처 뒤에 뭘 모시는가? 칠성각을 모셨어요. 그래야 절이 장사가 돼요. 왜? 별은 인간보다 오래 가니까. 밧데리가 오래 가요. 부처 지가 뭔데? 부처를 믿으면서 부처는 기껏 그냥 쇠락하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니까. 부처보다 더 센 것 그게 칠성각이라.

캄캄한 밤하늘에 절망적인 밤을 보란 듯이 빛나는 일곱 개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이집트에선 태양을 섬겼어요. 왜? 태양이 우리를 먹여 살리니까, 곡식을 자라게 하니까. 태양신. 그래서 이집트는 영원한 것은 태양이다. 왕을 쇠락케 하고 죽는 왕을 무엇의 아들로 봤겠어요, 옛날 이집트에서? 허약하게 죽어가는 왕을 누구의 아들로 봤습니까? 태양의 아들로 본 겁니다.

그런데 그 태양이 깜깜하게 된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태양을 깜깜하게 만드는 그러한 계기가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모세. 열 가지 재앙 중 제일 마지막 재앙 그전의 재앙이 태양이 사흘 동안 깜깜해졌지요. 깜깜해지고 모든 조명이 꺼져버려요. 조명이 꺼지면서 캄캄한 배경 안에서 등장하는 것이 인간들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목가지 날리는 죽음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그 날이 왕의 대가 끊어지는 날이에요. 왕뿐만 아니고 모든 집안, 귀족집안, 천한 집안 상관없이 모든 집안의 대를 제사 드릴 아들을, 그냥 딸 말고 시집간 딸 말고, 맏아들을 맏이를 전부 다 죽여 버렸어요. 심지어 옥에 갇힌 죄수의 맏이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고 아무 죄도 없는 가축의 맏이까지 다 날렸어요.

이게 바로 무슨 세계냐? 어두움의 세계.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어두움을 누락시키고 죽음의 세계를 고려하지 않고 밝음의 세상 안에서 자기 자신의 순환하는 논리를 구성해왔던 겁니다. 밝음의 세상이 계속 가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인간은 맹목적으로 살아온 거예요. 의미도 없이 살아온 거예요. 살다 살다보니까 무엇이 나를 살려주느냐 하면 시간이 나를 살려줬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살려주는데 시간이 나의 피부에 주름이 끼게 만들고 모든 내장과 심장에서 이게 쪼그라들게 만들었어요. 점점 더 시간이 흘러가면 이거는 내가 나답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연세가 육십 넘으면 사진을 잘 안 찍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자기를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꿈속의 내 모습과 현실적으로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은 차이 나도 너무 격차가 나요. ‘꼬라지 이래 될라고, 이 꼬라지 볼라고 그렇게 나를 지켜왔던가?’ 거기서 유명한 네 자 나오지요. “찍지 마라!” 아버지고 뭐고 간에 찍지 마라, 동영상 찍지 마라. 부끄럽다 이 말이죠.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선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잠깐 살려두고요. 질문해보겠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인가, 내가 선택당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 진리에요? 내가 선택하는 겁니까, 선택당하는 겁니까? 당하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자연이 있음으로써 내가 산다고 했는데 자연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연이 시간을 동원해서 나를 쇠락시켜서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자연을 의지했는데 자연마저 나를 이렇게 완전히 부서트린다면 정말 내가 의지할 믿을 구석은 어딥니까? 없지요.

결국 그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믿고 살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환경, 자연마저 내 원대로 뜻대로 안 되게 해주는 겁니다. 자연 속에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인간은 늙는데 해와 달과 별은 늙지도 않아요. 이거는 불공평한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 식물은 겨울에 다 죽는 것 같은데 봄에 다시 살아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나는 한 번 죽거든 살아남이 없느냐? 어떻게 이 자연의 힘이 나를 살려주면 안 되겠느냐? 그런 신을 우리가 믿자, 해서 나온 신이 바알 신이에요. 바알 신은 부활의 신이에요. 부활의 신, 소생의 신, 자연을 모방해서 만든 자연의 일부의 신. 모든 자연은 겨울 되면 없어지지만 봄 되면 다시 소생하잖아요. “나 저렇게 소생하고 싶어. 나도 저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어 소생하고 싶어.”

그럼 자연 배후에 신이 있죠. 자연을 다스리고 죽은 자연을 다시 살리시는 그 신을 나도 거기에 끼어줘. 나도 들어가게 해줘. 믿고 싶어. 이게 뭐냐? 무슨 신이요? 바알 신인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순환구조. 지금은 비극이지만 비극 이전에 뭐가 있는가? 신화가 있지요. 전설입니다. 신화이니까 무슨 이야기에요? 신의 이야기에요.

내가 믿고 싶은, 출발은 여기서부터 합니다. 비극적인 몸 아프고 완전히 다 망가져서 이제는 없어질 것만 있는 비극적인 내가 마지막 붙들 수 있는 것은 뭐냐? 신화에요. 과학이 발달하고 뭐 로켓을 올리고, 로켓 올리기 전에 뭐합니까? 고사지내요. 진화론이 어떠니,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영화 만든 사람이 촬영하기 직전에 고사지내지요. 중소기업 개업할 때 그거는 말할 것도 없고요. 운동선수가 징크스 스스로 만드는 것도 말할 것도 없고. 아이 낳을 때 고사지내지요, 죽고 난 뒤에 고사지내지요.

우리 동네 절에 보면 벌써 광고 있어요. 추석날 제사 맡기실 분 맡아줍니다. 우리가 제사 할 테니까 돈만 내세요. 음식 차려드립니다. 추석이 절의 대목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절 뒤에는 반드시 뭐가 있다? 칠성각이 있다. 부처 그것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믿을 게 못 되고 별은 영원하니 믿을 수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의 문제, 생로병사의 문제를 신화적인 것, 신화를 알려주는 사람, 또는 신화적인 존재로 가서 순서가 그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가 나를 새로운 창조물이 되고 싶은 이 폐쇄적인 순환 고리를 형성하는 것, 이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종교 있든 무종교가 됐든 그건 상관없어요. 전부 다 이 비극 신화, 그리고 내가 원하는 나다움을 창조하고 싶은 이 모든 것을 고리 속에 인간이 놓여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모습이에요.

그러니까 폐쇄적인 자체적으로 이 고리에 대해서 어느 인간에게나 물어보세요. 이게 여기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요? 이 자체에 어느 인간에 물어도 없지요. 나에요. 나를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새로운 내가 된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과 접했던 이방민족이죠. 이방민족은 뭐가 없느냐?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고, 언약이 없으면 그냥 인간들만 있는 거예요.

인간들에서 끄집어낸 아이디어의 집합체가 바알종교입니다. 뭐가 없다고요? 언약이 없어요. 그냥 인간들의 생각만 있어요. 그 생각들 그것이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하기를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전제로 해서 말씀, 십계명 줬습니다. “나를 믿어라.” 이게 십계명의 1계명입니까? 아니지요. 뭐라고 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신이 이미 유통되고 있었던 거예요.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고, 비극을 행복으로 만들 신을 인간 나름대로 장착돼 있었던 겁니다. 종교를 가진다, 나는 천주교다, 알라 이슬람이다, 불교다. 그 딴 거 아무 의미 없어요. 똑같아요. 교회도 마찬가지로 똑같아요. 나 잘되게 해주는 이 신화적 존재가 다시 내가 태어나게 되면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내가 새롭게 창조됐다 치면 이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신화로 가지요. 신화에서 나는 뭐가 된다? 나는 이 신화, 전설의, 전설이란 소설의 주인공이에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는데 고기 하나 걸려들었어요. 고기 맛있다, 고기를 시장에 팔면 남는다. 그 노인은 그 딴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큰 고기를 낚았다는 그 자체의 자부심을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끌고 오면서 상어 떼한테 다 뜯어 먹혔어요.

그러면 그 노인의 자부심이 소진될까요, 그대로 있을까요? 그대로 있어요. 왜? 주인공은 고래도 아니고 주인공은 바로 내가 뭐로 거듭나는 거예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에요. 따라 해봐요. 전설의 주인공. 이것 때문에 교회 오고 이것 때문에 예수 믿는 거예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라니까.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는 거예요. 몸 아프다. 여기서 쓰러질까, 죽고 싶다. 아니에요. 아픔에서 거뜬하게 일어나는 내 모습에 더 자극받는 겁니다. 누가 보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보란 듯이 나 이 정도야. 까불지 마.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내가 주인공이야. 어린왕자.

이 세상에 유명한 명작들, 소설과 드라마에 주인공이 잘되는 게 모티브에요. 핵심이에요. 주인공이 못 됐는데 많이 알려진 명작 있습니까? 없지요. 신데렐라, 백설 공주부터 해서 그 뒤에 노벨문학상 받은 모든 것은 결국은 끝내 이기리라. 박세리가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최고 권위의 US오픈 여자골프대회에서 승리할 때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상록수>란 노래 뜨면서 끝내 이기리라. 태국의 아마추어 골프선수를 이기고 우승한, 온 국민이 그 힘든 IMF시대에 용기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래, 할 수 있어. 끝내 이길 수 있어.” 이 말은 뭐냐? “그래, 내가 쭈그리가 아니야. 나는 이제는 들러리가 아니야. 내가 내 인생 소설의 주인공이고 나는 전설의 주인공이야.” 이걸 불신자들은 술 한 잔 먹으면서 그걸 바깥으로 내뱉는 거예요. 제가 지하철 타고 내려오면서 코스 보게 되면 아침부터 교회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에 술집 있어요. 여름 되면 문 열어놓고 술집 하는데 보면 아침 아홉 시에요. 술집에서 술 먹고 있어요. 낮술 정도가 아니고 아침 술 하고 있는 거예요. 어제 또 취한 모양이라 해장술 하는.

왜 술을 먹습니까? 왜 담배를 피워요? 왜 술 먹고 담배를 피웁니까?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예요. 그러면 교인들이 새벽기도 왜 나옵니까? 나를 잊어버리면 모든 의미를 잊어버려요. 이 순환고리에서 폐쇄고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전설의 주인공이죠.

그러면 이젠 문제는 던져놨어요. 인간은 귀신한테 매여 있다. 절망을 겪고 뭐 어떻게 인간 승리 백날 해도 전부 다 우상이에요. 인간이 만들어낸 공통적인 신화구조 아래서 벗어날 수가 습니다. 더구나 이 신화구조의 중심은 누굽니까? 본인이 주인공이죠. 이게 바로 모순이라는 거예요. 왜 모순인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약간 살짝 어려워지기 시작하는데 주무실 분은 미리 주무시는 게….

이게 구조입니다. 사각형 구조. 아까 우리 자신이 전설의 주인공이죠.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구조를 만들기 시작해요. 소설의 주인공이 원래 그래요. 소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6‧25가 나든 IMF가 터지든 항상 이야기의 화제가 어디에 집중됩니까? 나한테 오지요. 인간은 어떤 모습이 있느냐 하면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여기서 바깥으로 발산한다. 확장시키는 거예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다. 이건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인생을 오래 안 살아도 자기가 주인공인줄 알고 있어요. 아빠가 엄마가 뭘 사주고 난 뒤에 2초도 안 지나서 좀 줄래, 하면 안 줍니다. 자기가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발산하는 거죠. 인생을 살면서 20대에 누굴 만나고, 40대에 누굴 만나고, 결혼을 누구와 하고, 60대에 누굴 만나든 그 의미는 내 쪽에서 나간 의미로 구성을 해요. 이 구성은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돼요.

그런데 뭐가 문제냐 하면 발산된 의미가 그냥 날아가 버리면 휘발되면 안 되잖아요. 다시 나한테 오는 거죠. 이걸 수렴이라 합니다. 발산, 퍼지는 것. 수렴, 채취하는 것. 나로부터 멀어졌던 의미를 다시 나한테 끄집어 당기는 거예요. 이걸 긁어모으기. 금 모으기가 아닙니다. 뉴스를 보던 영화를 보던 카페에서 누굴 만나든 전부 다 뭐냐? 의미 채취에요. 그 의미는 뭐냐? 역시 한결같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해와 달과 별, 그게 내 마음대로 됩니까? 지가 여호수아도 아닌 게 해를 멈추게 하는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럼 이거는 뭐냐 하면 ‘국지적인 형태 갖추기’에요. 국지적인 짜임새 갖추기, 이게 인생이에요. 이게 타인에게 소용 있어요, 없어요? 타인에 소용 있는 정도가 아니고 타인에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타인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줘요. 그런데 여기에 제가 뭐라고 썼느냐 하면 짜임새에요. 시스템, 구조 짜기입니다.

어떤 아들이 나이 많은 홀로 사는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집에 들어왔어요. 집 명의는 어머니 명의고. 아들이 어머니 모신다고 자기 아내까지 들어왔어요. 괜찮은 집이에요. 그런데 그 아들이 틈만 나면 자기 장모 부르고 할 때 그 엄마가 내린 조치가 뭐냐 하면 아들 여행 갔을 때 가방 다 들어내고 거기다 세입자 들였어요. 비밀번호가 안 맞아. “너희들 쫓겨나갔어. 니 방에 세입자 들어왔어.” “제가 어머니 모시려 했는데….” 이렇게 나오니까 “네가 날 모신 게 아니고 날 등쳐먹은 줄 분명히 알아라. 어머님 모실게요, 하면서 내 등쳐먹었잖아. 내가 널 버려놓은 같아.”

이게 뭡니까? 자식은 부모를 섬긴다 해도 부모는 절대로 자기가 섬김 받았다는 것을 대외적 용도로 사용해요. 노인정에 가서 우리 아들 그렇게 착하다. 하지만 그거는 위선이고 실제로는 항상 뭘 하느냐 하면 선택을 해요. 여기 선택이 어려워요. 선택이 예상보다 어려워요.

옳고 그름 사이를 선택합니까, 아니면 선택과 비선택 사이를 선택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이거는 옳다 그르다 그렇게 선택하는 게 아니고 나 이제 아들 안 본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옳고 그름은 혼자 있을 때 하는 거예요. 남한테 일단은 “나 너하고 상대 안 해.” 왜? 나는 이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무섭지요, 인간. 인간은 본인 선택 외에 다른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종교가 무슨 종교에요? 바알종교에요.

바알종교의 특징은 바알신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선택했다는 요소가 내가 당신을 신으로 인정했다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게 바알종교에요. 그럼 바알종교라는 그 개념을 네모로 만들고 거기다가 삼위일체. 예수, 하나님 다 집어넣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고 어떤 예수에요? “내가 당신 선택한 것 당신 알지?” 그 내용이 있으면 그거는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바알종교에요.

그런데 오늘 시편 54편 하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특히 다윗 같은 경우에 다윗이 평소에 이렇게 살겠어요, 안 살겠어요? 다윗도 아담의 후손, 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겠지요. 사는데 다윗에게 다른 경험치가 계속 발생돼요. 그게 뭐냐 하면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요. 환장할 지경이에요. 본인을 자꾸 궁지에 몰아넣어요. 궁지에 몰아넣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찾아와요. 궁지가 없이 절망적인 상황이 없도록 해주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다윗에게 위기를 초래하시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 선악과 따먹지 마라 이후에 주께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그거에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기서 그것을 신약적 입장에서 해답을 내려야 돼요. 네가 어디 있는가?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어디 거주하는가? 인간이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땅입니다, 땅. 땅은 위험한 곳이에요. 인간은 위험한 곳에 살면서 그 위험을 알아야 되는데 거기서 살려고 하고 있어요.

왜 위험한가?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흙으로 만드는 그런 조건들로 가득 차있는 곳이 땅이에요. 저주가 가득 차있는 곳이 땅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땅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요. 한국이 싫다. 뉴질랜드 이민 가면 돼요. 뉴질랜드 싫으면 미국에 이민 가면 되고. 가봤자 땅에서 땅으로 폴짝폴짝 뛰는 거예요. 다른 대안은 없어요.

그러니까 점쟁이들 찾아가서 “도사님, 어디 가서 살면 땅값 오르겠습니까?” 세상에 점쟁이한테 가서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 집을 살까요, 말까요? 팔까요, 세 놓을까요?” 이런 이야기에요. 인간의 기초가 뭐냐? 그냥 땅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역사는 무슨 싸움? 땅 싸움이에요. 푸틴이 하는 것도 땅 싸움이고, 하마스-이스라엘 전쟁도 땅 싸움이에요. 죽기 살기로 땅이 있어야 살아요. 그걸 하나님이 아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하지요. 너 살던 땅 말고 네가 경험치 않은 땅 줄게, 라고 하지요. 그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이에요.

바알과 여호와의 차이점은 뭐냐? 바알은 뭐가 있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바알신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당신을 믿는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이 당신 안에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알신이에요. 인간의 만들어냈으니까 인간이 창안해냈으니까, 그때 그 내용이 내가 무엇의 주인공? 내가 신화의 주인공, 전설의 주인공.

“내가 당신을 믿어줄 테니까 전설의 주인공으로 굳건하게 유지시켜 달라.” 이런 조건 하에 그 신을 믿어요. “예수여, 내가 나의 주인공으로 번듯하게 할 수 있도록 예수 당신이 나를 도와주고, 여호와여 도와주옵소서.” 이게 바로 바알종교 아닙니까.

그러면 기존에 모든 땅을 가진 인간들은 바알 신을 섬길 때 전쟁을 할 때 우리가 침략하는 땅은 앞으로 우리 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앞에 깃발 세우고 했어요. 전쟁할 때. 마르둑 신은 마르둑 신의 깃발을. 블레셋과 이방 아람, 에녹 모든 민족은 자기 신의 깃발을 내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차이점은, 여호와는 뭐냐 하면 인간의 전설의 주인공 내용을 일체 용납하지 않고 다른 분이 모든 이 세상의 자연과 해와 달과 천지창조의 주인공임을 집어넣는 내용이 바로 약속이란 이름으로 들어가 있어서 그 약속을 스스로 알아서 실현시키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죠. 다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굴 찾아왔어요? 모세를 찾아왔지요.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두 가지지요.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 한쪽은 아담, 아담이란 이름 안에 예속돼 있는 모든 다양성 있는 이름들, 그 다양성 이름을 전부 다 아담이라는 흙이라는 이름에 종속된 하부 이름들이에요. 인간의 이름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담 또는 흙. 남자든 여자든 이름은 하나로 통일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지 않아요. 우리가 어떤 이름을 갖고 있든 우리 속의 아담 노선을 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두 개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개의 이름이 중요한데 두 개의 이름이 결국 뭐냐? 하나의 이름 중심으로 전개시키는 거예요. 두 개가 있는데 한쪽에 편향된 이름으로 다른 이름이 끌려가는 식의 전개가 이뤄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아담 이름, 누구 중심으로 전개되겠어요?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요.

시편 54편 1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됐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네 이름 포기할래’라고 묻는 거예요. 내가 나를 부추겨서 나를 구원하는 것 포기할지 묻는 거예요. 이것이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특이사항을 주지 아니하면 다윗이 밥 먹을 때 주의 이름으로 밥 먹게 한다, 이러진 않는다 말이죠.

평소에 하던 일을 이것은 내 이름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일들만 있다면 굳이 하나님의 이름 찾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이런 난관 정도는 미리 예상하면 거기에 대비해서 내가 어떻게 한다, 이것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다윗에 이런 시편이라는 기도가 나올 수 있도록 한 것은 이게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특이한 일들이 일어나서 그래요.

여기 시편 54편 본문 들어가기 전에, “다윗의 마스길” 마스길은 트롯이냐 탱고냐 보사노바냐 째즈냐 그런 가락 이야기고요.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이렇게 돼 있어요. 다윗은 본인도 전설의 주인공이고 싶어요. 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그런데 전설의 주인공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 내 뜻대로 안 되지요. 나의 선택, 나의 결정의 능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나는 바른 걸 선택하고 내 앞길을 이렇게 제대로 지혜롭게 선택해서 헤쳐가야지, 라는 자세가 원천봉쇄 돼버려요.

아까 순환구조 이야기했지요. 순환구조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복습해봅시다. 제일 출발점을 뭐라 했습니까? 비극. 누구의 비극? 나의 비극. 나는 대단한 존재인데 사는 꼬라지하고는 왜 이러냐. 비극에서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이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유가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전설 또는 같은 말로 신화. 하나님께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주게 되면 어디로 갑니까? 본래 나는 이렇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어서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다. 이 순환구조에서 인간이 벗어날 길이 없지요. 항상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때 자기가 어떤 결과를 갖는지 예상하고 나오는 겁니다. 이 비극적인 것이 한 바퀴 돌게 되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내가 재창조가 되어서 이거는 희극적인 내가 만족스런 존재로 다시 순환한다는 구조에요.

이 신을 무슨 종교라 했습니까? 부활의 종교죠. 부활의 종교는 우리 인간은 변해도 자연은 튼튼하고 한결같은, 해와 달, 별. 따라서 자연을 주관하고 있는 신, 자연을 주관하는데 이 지상에서 어떤 형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더라? 부활로. 자연이 봄여름가을겨울, 겨울 되어 죽었는데 봄 되면 어떻게 돼요? 땅에 다시 싹이 올라오지요. “그 부활에 저 끼어주면 안 돼요? 자연을 다스리는 자연의 신이여, 나도 자연의 일부로서 그 부활에 들어가면 안 되겠어요? 내 당신을 믿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주변의 토착민들이 믿던 바알종교에요.

이 논리구조, 이 바알종교의 특징은 부활은 있는데 뭐가 없어요? 인간의 자기 부정이 없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없어요. 왜 자기 부인이 없느냐? 부활될 때 부활의 나가 현재의 나와 동일 되는 나기 때문에 그래요. 동일시되는 나에요. 목사님 아버지 돌아가셨습니다. 근데 아버지 돌아가신 것과 감히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가 죽은 것과 대비시켜봅시다. 마르다, 마리라. 지금 욕하는 것 아니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었잖아요. 마르다, 마리아는 그걸로 끝이지요. 그걸 끝이라고 봤습니까? 더 이상 오빠는 그 집안에 전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데 그게 아픔이고 눈물로 쏟아지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참 좋은 기억을 줬던 오빠에요. 기둥 같은 오빠에요. 오빠를 의지한 겁니다. 근데 그 의지한 오빠를 죽였어요.

그럴 때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 붙들고 얼마나 원망했습니까. 내가 예수님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몹쓸 짓을 했기에 우리 집안의 전설의 주인공이 난데없이 돌아가셨습니까? 내가 아플 때 언질 줬잖아요. 빨리 와서 우리 기둥 같은 오빠 살려달라고. 그런데 노리듯이 죽고 난 뒤에 오셔서 어쩌라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원했던 것은 바로 논리 순환구조로부터의 탈출을 주님이 시도한 거예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폐쇄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나를 믿느냐? 믿고말고요. 예수님께서 특히 마르다에게 한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너희 오빠 죽고 난 뒤에 사는 것과 내가 죽어서 사는 것과 너 어느 쪽을 믿을래? 기둥 같은 오빠 죽고 사는 걸 믿을래, 내가 죽고 사는 걸 믿을래? ‘나를 믿을래, 오빠를 믿을래’와 똑같은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내가 좋아, 오빠가 좋아? 같은 말로 내가 좋아, 네가 좋아? 네 자신이 좋아, 안 그러면 내가 좋아?

인간은 이미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좋아 수도 없고요. 어떻게 반 떼어 나눠줄 수도 없는 거예요. 좋아다는 게. 집중된 방향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거는 한 방향이기 때문에 방향을 둘로 쪼갠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나 좋아하면 몰빵이에요. 예수를 믿던, 삼위일체를 믿던 전부 다 나 좋아하는데 집중하게 돼 있어요. 나 좋아할래, 너 좋아할래? 같은 말이에요.

신을 믿고 바알을 믿고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던 간에 그거는 자기의 방향을 꺾지 않겠다는 고집이에요. 왜냐하면 내 방향을 가는데 혹시 후원할 수 있고 혹시 도움 줄 수 있는 분이라면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이게 마르다, 마리아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걸 예수님이 모를 리가 있어요. 마르다, 마리아야 지금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날 믿는다고 위선 떠는데 네가 오빠를 생각해봐라.

오빠가 죽었다 살아난 당사자잖아요. 나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오빠가 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가 생각해 본적이 있냐?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나 사는데 보탬 되라고 예수 믿는 것하고 실제로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죽은 그 오빠가 다시 살아나는 선택 당함을 입은 오빠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부활입니다. 바알종교의 부활이 아니에요. 내가 다시 부활되는 게 아니고 흙은 죽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다시 사는 게 부활이거든요. 근데 흙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어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인데? 그동안 교회를 다녔는지 절에 갔는지 분명히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수를 믿었는지 부처를 믿었는지 안 그러면 나를 믿었는지 분명히 생각해보라고요.

다른 사람은 다 속아 넘어가도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목사님 아버지, 다시 부활됩니다. 지금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흙일 때 아는 그 아버지는 아닐 거예요. 정말로 성령 받아서 복음을 아시는 분이라면 흙을 재료로 해서 죄인을 재료로 해서 새로 만든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듬뿍 담긴 새로운 아버지로 부활될 겁니다.

그때 만나시거든 우리 집안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님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결정한 요소가 빠지고 내가 선택한 요소는 빠지고 일방적으로 주님한테 선택 당해버린 거예요. 선택당한 요소가 거기에 들어가면서 로마서 9장 13절이 나오지요.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주님의 일방적 선택이 담긴 새로운 피조물, 그것이 바로 부활의 세계에 모여든 집단의 공통점입니다. 10분 쉽시다.

 

 

20240909b 부산강의 : [시편]70(54:1)-전설의 주인공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이 순환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인간들은 자기 폐쇄적이죠. 순환구조, 자기가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소설의 주인공. 그런데 주님의 언약은 특징이 뭐냐? 시작과 끝이 있어요. 시작과 끝이 연결돼 있습니다. 알파고 오메가고 내가 시작했다, 내가 끝을 내는 거예요. 시작과 끝이니까 이걸 둥글게 말아보자. 시작과 끝이 이렇게 동그랗게 되죠. 또 하나의 안에 순환구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안에 시작과 끝이 스스로 계신 분이 스스로 만든 언약을 이루어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전설의 주인공을 이것으로 여기에 들어와야 돼요. 시작과 끝에 들어온다고요. 들어오게 되면 들어오는 이 지점이 바로 시편 54편에서 땅이에요. 땅의 명칭이 ‘십’이라고 하는 땅이 있어요. 광야. 광야 찾아보면 사해 동쪽이 아니고 서쪽에 십이라는 땅인데 다윗이 땅과 땅 사이를 돌아다녀요. 사울을 피해서 돌아다닌다고. 구약을 볼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둬야 돼요. 땅이란 것을 이뤄진다. 염두에 두고 함축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기초가 되기에 모든 환상을 잡아먹는다.’ 앞에 순환구조, 인간은 자기가 기초가 돼요. 여기 자기가 육신에서 나왔지요. 기초가 되기에 모든 환상을 다시 기초 쪽으로 다 수용해요. 역시 나 하나 살아남는 이것 건지면 다 건진 거다. 근데 제가 방금 시작이라 했지요, 끝이라 했지요. 여기에 뭐가 흐릅니까? 시간이 흐르지요. 시작부터 해서 요이 땅 마지막까지 시간이 흘러가잖아요.

그러면 자기 폐쇄적인 인간이 주님의 언약에 들어오려면 뭐부터 자르면 되느냐 하면 간단해요. 자기 육신에서 자기 나이를 빼세요. 자기 나이를 지워버리세요. 뭐만 남겠습니까? 사십, 오십, 육십 내가 몇 년 살았다는 것을 지워버리세요. 자아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굉장히 간단해요.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 나이 없어요. 그냥 육신만 있어요.” 이거는 세 살 때도 육신이었고, 열 살 때도 육신이었고, 나이 팔십 되도 육신이에요.

근데 어릴 때부터 육신이었고 지금도 구십 되도 육신인데 그동안 세월이 나한테 조작해준 이 자아가 진짜 육신이라는 진흙, 육신이라는 허약한 것을 그동안 커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가려왔던 거예요. 그걸 치우질 못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행동과 태도가 말하는 거나 생각, 사유하는 이 모든 것이 육신이었음을 어제도 육신이고 오늘도 육신이고 앞으로 육신에 불과한 것을 아닌 척하면서 전부 다 가려온 겁니다.

그 가린 것이 뭐냐? 환상이죠. 환상이란 말하니까 잘 안 떠오르지요. 그럼 떠오르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미지. 나라는 이미지, 자아라는 이미지. 인간은 육신으로 나와서 육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육신에서 피어나온 이미지를 위해서 평생을 자기는 이미지에 몸 바쳐 살아온 겁니다. 그걸 이미지 관리라 하죠. 체면, 위신, 나를 보는 타인의 평가,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평가.

그런데 타인을 볼 때 육신으로 보면 되는데 우리는 타인을 볼 때 ‘흙아’ 이렇게 보면 될 걸 ‘각하님’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육신을 가리는 조작된 가면 같은 이미지에게 우리는 아낌없이 나의 이미지가 굴복해요. 이거는 둘 다 속고 속는 세상이에요. 모든 걸 버려도 심지어 내가 자살할 순간이 온다할지라도 까짓것 자살하지, 뭐만 남기고? 그동안 괜찮은 이미지만 남기고 자살해요. 밥 못 먹어서 자살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자기 이미지 때문에 죽지요.

벌써 인간이 자기 이미지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 그 이미지를 위해서 누구한테라도 언제라도 굴복할 비굴하게 살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심지어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떠올릴 때 예수님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의 육신을 겨냥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착함과 선함을 본받으려하는 거예요.

인간은 백날 그렇게 해도 이미지 동원해도 자기의 육신 됨은 변하지 않습니다. “계란이 왔어요.” 이 계란을 삶으면 오리 됩니까? 이게 오리 알 돼요? 삶아먹는 볶아먹든 뭘 해도 본질은 한결같은 계란이죠. 달걀이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게 닭의 육신이라 보는 겁니다. 육신은 육신으로 피어난 자아와 이미지가 육신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 주님께선 아십니다.

택한 백성에 어떤 조치를 내렸는데 그 조치가 뭐냐? 그 조치를 제가 한 문장으로 쓰겠어요. 인간은 이것밖에 안 되니까, 자기 이미지에 미쳐 사니까. 그러니까 이 다윗이 난데없이 사울에게 쫓겨서 십 광야까지 쫓겨 가는 그 다윗의 일대기가 여정이 딱이에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뭘 보냐? 왜? 다윗이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상대는 나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죽이는 이유를 본인이 알 길이 없어요. 죽이려하니까 자기는 피해서 도망가는 겁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공격하는 이유는, 사울 왕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다윗에게 이미 넘어갔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왕의 이미지를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되찾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를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사울이 악신 걸렸지요. 악신은 마귀지요. 마귀가 오늘날 우리 각 개별자에게 개인에게 하는 것은 내가 준 이미지를 충실히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 네 평생의 업무다. 네 이미지 관리하는 것이 네가 해야 될 필생의 사업이다. 이걸 악마가 계속 우리한테 부추겼던 겁니다. “네가 어때서? 너 잘났잖아.” 근데 혼자 잘났다 하면 안 되잖아요. 나보다 잘난 사람 있으면 안 되지요. 망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 땅에서 예쁘고 잘 생기고 얼굴 작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그런 잘 생긴 남자배우들, 그보다 상대적으로 쳐져있는 인물도 아닌 그 앞에 비교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게 있어요. 그 연예인들 제발 좀 이혼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기 때문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전화 들고 나오는 모든 대화의 바탕은 나의 이미지를 위해서 네가 내 앞에서 이미지 좀 줄여주면 안 되겠니? 그 사이를 무슨 사이? 친구 사이. ‘친구야’ 그게 친구에요. 지난 한주동안 너한테 있었던 일보다 나한테 있었던 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두 시간 반 동안 전화한다는.

악신 들린 사울이 계속해서 다윗을 공격합니다. 공격하는데 놀랍게도 다윗은 본인의 이미지 관리를 안 해요. 여기서 나온 것이 시편 내용입니다. 시편 내용은 악신 들린 일반인과 뭔가 차별되는 차이 나는 다윗, 이 격차에서 이 차이에서 신앙의 본질이 나와요. 다시 말해서 계시가 나온다고. 약속이 나온다는 거예요.

다윗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다윗이라는 독특한 특수한 인물에게 골리앗 죽이는 사건을 입혀서 하나님의 특수성과 아담의 일반성과의 그 격차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나오게 하는 그것이 바로 시편 내용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편도 포함되는 거예요. 두 개의 차이 남을 통해서 그 차이 속에서 번지는 겁니다.

시편 22편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절) 다윗이 안 쫓기면 이런 고백이 안 나와요. 이 땅에서 굳이 이미지 관리를 해선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는 인물이 미리 다윗에게 덮친 거예요. 같은 인간인데 이미지 관리를 안 해. 이게 도리어 정상인들이 이상히 여겨요.

언약궤가 들어왔다고 다윗이 좋다고 옷 벗어젖히면서 춤을 췄어요. 다른 백성들은 왕의 낮아짐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고 있었는데 단 한 사람, 아내 미갈은 그걸 보고 그런 옷 벗는 짓은 내 앞에서 하지 나보다 계급상 서열상 저 밑바닥에 있는 궁녀들 하녀들 앞에서 고귀한 당신의 이미지 관리하는데 온 신경을 다 쓰는 내가 당신한테 퍼붓는 그 정성은 하루아침에 춤추면서 다 날아갔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걸 보고 하나님이 미갈을 참을 수 없어서 애를 못 낳게 했어요. 저주받는 여인 됐어요. 네가 건드릴 자를 건드려야지 네 자신은 안 건드리고 모든 의미가 나한테 다 소급돼야 된다는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내가 이미지 관리했기 때문에 그 열매는 나한테 돌아온다는 거예요. 이 모든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면 됩니다. 마귀가 인간은 어떻게 변질시켰는지 보세요. 간단해요.

인간은 창조물입니까, 창조입니까? 인간은 창조자에요, 창조물이에요? 창조물은 하나님 뜻이고요, 창조자는 마귀 뜻이에요. “니 인생 니가 알아서 해야지 누구한테 맡기느냐? 니 인생은 니가 창조하는 거야. 육신은 변변치 않지만 이미지는 네가 창조할 수 있잖아.” 노력 여하에 따라서.

온 세상이 마귀 세상입니다. 마귀의 말은 그렇게 쉽게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마귀의 말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어요. 왜? 이미 한 통속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없어요. 마귀는 나의 이미지 관리해주고 내가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그 마귀의 것을 왜 우리가 마다하겠습니까? 인간이 마귀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마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귀 같은 친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친구야, 밥 한 번 먹자.” 맨날 그런 노래하는 사람 있어요. 밥 먹어서 뭐할 건데? 밥 좀 먹자. 김성환인가 하는 배우하다 가수하는 사람. 그 사람이 맨날 밥 먹자 해. 옆에 아침부터 술 먹는. 너도 네 창조자고 나는 내 창조자니까 서로 통하는 게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거죠. 인간은 마귀에서 못 벗어납니다. 너무 잘해주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 가운데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으켜주는 게 마귀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힘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인공이 누굽니까? 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죠. 유대인들은 여기에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이 성경해석이에요. 오늘 그 해석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에서 주님께서는 무슨 요소를 집어넣느냐 하면 시간 요소를 집어넣어서 육신을 육신대로 그냥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방법이 뭐냐 하면 계시가 왔다가 사라지는 방식. 다윗의 때는 이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사무엘이 해요. 25장에서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28장에서 사울이 사라진 그 계시가 공터가 되었습니다. 빈자리가 되었어요. 이미 악신에 의해서 자기 이미지 관리에 미쳐있는 사울이 자기에게 계시를 주는 사무엘이 25장에서 사망하고 난 뒤에 그 허한 빈자리를 뭐로 채웁니까? 엔돌의 신접한 여인으로 채우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첫째 시간에 구조의 중심이 있지요. 우리는 그 한 가운데 중심으로 보고 중심에서 퍼져나갔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돼버리면 구조 밖에 대해서는 무지해요. 무지몽매합니다. 그래서 구조 밖까지 알려면 이 중심자리가 하나님께서 중심자리를 점선으로 공터가 빈터가 되게 만들어요. 이 구조가 무슨 구조냐 하면 성경구조입니다.

내가 중심에 있어야 되는데 내가 중심이 되려면 나 중심으로 구조가 같이 병행해서 붙여줘야 내가 중심이 돼요. 친구 열 명이 있는데 자기가 친구들한테 잘해줘서 친구들이 총무해라, 회장해라 해서 됐어요. 그런데 십 년 후에 자기 빼놓고 열 명의 친구가 군에 가고 유학 가고 이리저리 다 가버렸어요.

그러면 자기 구조는 어디 있습니까? 자기를 회장이란 이미지를 설정해준 규정해준 그 규정에서 그 구조가 있어야 내가 중심이 돼요. 구조가 해체돼버리면 뭐도 없어요? 자기가 어떤 중심됨이 없지요. 그런데 이미지는 남아있고 나를 으샤으샤 해준 그 구조물은 없어질 때 내가 나답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자식이 교통사고 난 뒤에 부모가 죽고 싶은 이유가 그동안 자식 키운다고 스물 몇 살까지 수억 들여 키웠던 그 자식이 갑자기 음주운전 사고로 죽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본인이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자기 이미지를 보충해줄 주변의 증거물들이 없어지니까 이건 나의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 교착상태, 모순상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다윗은 그냥 시키는 대로 골리앗을 이겼고, 그냥 가만있는데 백성들이 나서서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했단 말이죠. 자기가 원했던 거예요? 자기가 부탁한 겁니까, 대선에 나가려고? 가만있는데 사울 쪽에서 그래도 나는 천천, 기분 좋았지. 그런데 다윗은 만만, 자기 열 배나 했을 때에 저걸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이게 마귀와 결탁돼서 죽으라고 나라는 안 돌보고 블레셋과 전쟁할 생각은 않고 다윗 잡을 전쟁만 한 거예요. 블레셋은 멀리 있는 적이고 가까운 적은 뭐냐? 다윗이에요.

그걸 사자성어로 ‘내부총질’이라 하는 거예요. 이준석이. 교회 목회는 이런 것 없는 줄 압니까? 신천지가 괴롭혀요? 안 그러면 설교 잘하는 부교역자가 나를 괴롭혀요? 조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조직이 내 이미지로 하여금 나한테 지정된 위치를 줬다고 하는 겁니다. 조직에서 나는 당회장이라는 위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 다 나가도 당회장이에요. 참 골치 아픈.

한 번 생성된 이미지를 못 버리는 이유가, 내가 선택해서 내가 만든 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창조물 있어야 내가 창조주 행세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것은 뭐냐? “네가 스스로 신이다.” 이거에요. 신이 되려면 내 창조물들이 주위에 그득하게 읍소해야 돼. 엎드리고. 내 수확물, 내 결과물이 풍성할 때 나는 그 조직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진정은 이 중심이 바로 나의 구조 밖에서 이 공터 된 나와 구조 밖의 나와 싸움, 전투, 전쟁을 벌일 때 진짜 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발견됩니다.

다윗은 지금 뭘 보여주느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사라졌음을 미리 앞당겨서 그 시대에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아까 이야기했지요. 사무엘이 25장에서 죽어요. 그동안 계시를 줘왔어요. 사울도 사무엘을 존경했어요. 사울이 왕 되는데 있어서 사무엘이 기름 부었잖아요. 자기가 왕 되는데 주례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과 사울 사이에 중매자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나라의 왕이 되었다면 나의 왕이라는 이미지는 누가 보증해줘야 돼요? 사무엘이 살아서 보증해줄 때 누가 뭐래도 나는 왕입니다.

여러분들의 만약에 회사를 한다. 창업할 때부터 고생고생해가면서 몸소 영업 같이 뛰면서 회사 망할 때 사장님, 몇 푼 안 되지만 부도 난 것 이걸로 급한 불 끄세요, 해서 처갓집에서 25억 빌려서 자금 대주고 그렇게 했던 그 부장, 그런데 결국 회사 망했을 때 그 부장이 사장님 저도 떠나겠습니다, 할 때 사장이 뭐라고 하겠어요? 브루투스 너마저? 너마저 가버리면 나 어떻게?

이혼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픈 거예요. 좋든 싫든 옆에 붙어있을 때 내 이미지는 보증이 되는 거예요. 가족이라는 보증이 되는데 자식은 있는데 둘이 갈라서버리면 재정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적으로 나 누구지? 도대체 내가 누구야? 그동안 나를 누구라 했던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사울 왕의 처지입니다. 사울 왕의 형편이에요. 사울 왕이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죽자 사자 따라다닌 사람이 누구였다? 다윗이었죠. 그런데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하면서도 알고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미 내 편이 아니고 다윗 편이란 걸 아는 거예요. 악마가 이미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를 멸하려 왔지요. 알고 있으면서도 죽어라고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려했어요. 이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사는 인간들의 세계의 본질이고 형편입니다.

사울의 잘못은 어디 있느냐? 땅에 있었습니다. 이게 구약의 한계입니다. 그냥 땅에서 모든 게 결정된다고 보는 거예요. 성전도 땅에 있지요. 복을 받아도 땅에 복을 받지요. 땅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놀랍게도 그 시대에 땅을 떠난 존재로 삼습니다. 땅은 땅에서 살라고 다윗을 붙들고 다윗도 그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 땅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요.

그렇게 어떤 인간도 빠져나올 생각을 못 먹고 있는 그 땅이란 것, 인간의 육신, 흙이 살 수 있는 것은 땅 밖에 없어요. 땅에서 땅을 파고 거기서 농사를 지어야 그나마 흙이 될지언정 살 수 있는 이 땅을 하나님이 개입해서 다윗으로 떠나게 만듭니다. 떠나는 방법은 땅을 전부 원수의 통제, 원수의 지배받는 형편으로 만들었어요. 이게 시편 54편에 나오는 줄거리입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편 54편 1절, 아까 봤지요. “하나님이여”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뭡니까? “주의 이름으로” 자, 땅의 세계는 이름이 붙어서 활동하는 세계에요. 땅 치고 이름 없는 자가 없어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땅에 왔을 때 뭐가 붙는다? 이름을 불러요. 모세가 하나님께 뭐라고 부를까요? 땅에 내려왔다는 거예요. 하늘에 그냥 팔짱끼고 계신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내려왔다는 거예요. 땅에 내려왔으면 이름을 가지는 겁니다.

이름을 가지는데 그 주의 이름이 다윗으로 하여금 땅에 합류하고 땅을 누구한테 인수인계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 마귀죠. 마귀한테 인수인계하고 그냥 주의 이름을 떠나버려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여기 애굽이 있는데 홍해가 있어요. 히브리인들에게 모세가 찾아옵니다. 모세가 어디서 찾아왔는지 생각해보세요.

모세가 어디서 애굽에 왔어요? ①가나안 땅에서 양 치고 있다가 애굽으로 왔다. ②떨기나무에서 왔다. 몇 번입니까? 떨기나무에서 왔지요. 모세가 이쯤해서 나도 민족해방해불까, 이렇게 온 게 아니죠. 모세와 하나님과 함께 한 공간에서 왔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줬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불이 타는 곳에 모세가 신발 벗고 불타는 그 음성을 유일하게 듣고도 살아남은 게 모세에요. 시내 산에 올라갔다가 사십 일 동안, 나는 양식 안 먹었다는 건 이해되는데 물도 안 마셨다는 건 도저히…. 물도 안 마시고 양식도 안 먹고, 사십 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던 모세가 애굽으로 왔습니다. 여기 히브리인들은 애굽 땅에서 살았어요. 모세가 이야기한 건 이 땅 말고 다른 땅이라고 했어요. 다른 땅인데 뭐가 붙어요. 무슨 땅이냐 하면 ‘약속의’ 땅이에요. 이 땅에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빈 땅이 아니에요. 가나안 토착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땅 자체가 없어요.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이게 광야로 막혀버려요. 막히니까 애굽에 살던 사람들이 땅만 생각하는 거예요. 광야가 좋을까, 애굽 땅이 좋을까? 애굽 땅이 좋지요. 그래서 열 번이나 유턴해서 돌아가자고 한 거예요. “모세 치우고 다른 지도자 뽑아서 돌아가자.” 이 이야기를 민수기에서 왜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살던 기억을 잊지를 못하거든요.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내가 복음 알기 전에 살던 그것이 어디에 저장돼 있어요? 우리 육신에 저장돼 있습니다. 육신은 육신을 보는 게 아니에요. 육신에서 뭐가 피어나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이미지가 피어나는 곳이 육신이에요. 육신은 옷으로 감추고 있는 겁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채색 옷을) 참 정답을 이렇게 말해주니 너무 고맙습니다. 옷이라는 것은 내가 너를 보는 평판이에요. 특별하게 보는 거예요. 사랑하는 독자에요.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항상 사랑하기에 잃어버려요. 딴 사람은 안 다쳐요. 내 사랑이 다 담기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도 설교했지만 마태복음 6장 21절입니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해서 그 앞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보물을 땅에 둘래, 하늘에 둘래?’ 주님께서 묻지요. 우리한테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이 말은 네 육신에 덮인 이미지를 알아, 이런 뜻이에요. 네 육신은 온통 땅으로 가득하게 두껍게 덮여있다.

그러니 산상설교 내가 준 말을 어느 누구도 지킬 위인은 있다,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땅에서 출세하고 남 보기에 괜찮은 이미지 관리하는 게 우리 평생의 필생의 사업이 되기 때문에. “나 신앙 좋아요, 기도 잘하지요, 헌금 많이 하죠.” 이게 교회에서 하는 짓이 그 짓이잖아요. 내가 이만큼 잘된 건 다 주님께 충성 잘해서 복 받은 거라고. 우리는 그걸 남들에게 남발하고 싶은 거예요. 이미지 관리하고 싶은 거예요.

자꾸 육신을 가리는 거예요. 마귀가 그 짓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마귀한테 고맙게 여겨야 돼요. 나는 네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를 네가 나한테 들킨 것에 대해서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환장한 존재가 마귀에요. 육신을 가릴만한 요소를 다 우리한테 허락한 것이 마귀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갈수록 난관입니다. 결국 홍해 건너온 사람들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었어요. 정탐꾼 보냈지요. 모세가 정탐꾼 보낸 것을 허락함으로써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딱 두 가지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는 정탐꾼 허락한 것,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아주 사소한 건데 이 백성 어떻게 관리하란 말입니까, 하고 성질나서 두 번 친 것.

참 하나님도 일부러 모세를 못 들어가게 했어요. 왜냐하면 칠 때 ‘스톱, 스톱 그냥 가리켜’ 이렇게 친절하게 했으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모세의 본질이 이미 유령적 존재에요. 이미 하나님과 함께 사십 일 동안 있었기 때문에 모세에게 약속의 땅이 고향이 아니고 모세에게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요.

모세가 먼저 갈게, 이래 되는 거예요. 너희들은 같은 땅을 봐라. 그게 약속의 땅일까요? 약속의 땅인데 약속의 땅일까요? 결국은 약속의 땅은 날아가 버려요. 사울이 약속의 땅을 배려먹었고 그 뒤로 왕들도 마찬가지고요. 약속의 땅인데 뭐냐? 주님을 핍박하는 땅으로서의 약속이죠. 왜? 격차 때문에, 차이.

다시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볼 때 이 점까지 고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울과 다윗, 다윗이란 특이한 존재가 사울 왕에게 일반인입니다. 보통 사람입니다. 이미지 관리죠. 경쟁자 나타났습니다. 핍박하죠. 미운 걸 밉다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냥 미운 거예요. 내 창조주를 증명하지 못한 거기 때문에 미운 거예요.

처녀로 결혼했는데 남편이 이미 아들을 갖고 있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에 미쳐서 당신 애라도 내 애처럼 키우겠다고 해놓고 막상 결혼해보세요. 내 창조물이 아닌데 그게 예뻐할 리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잘 키우다가 너무 마음이 안 당기니까 “여보, 나도 내 애 갖고 싶다. 그러면 당신 아들도 잘 키우고 내 애도 잘 키울게” 했는데 막상 자기 애를 낳고 보니까 더 미워. 이건 이스마엘이라. 내 쫓고 싶어.

인간의 마음은 악마의 마음이기 때문에 내가 통제가 안 돼요. 미운 걸 밉다 하는데 그걸 어떻게…. “그러면 안 된다. 처음에 약속했지 않냐.” 약속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건 그때 약속이지 뒤에 무슨 약속이 있어요. 어느 인간이 약속할 수 있는 위인이 됩니까? 그때 기분 따라 하는 게 약속인데. 도대체 내 통제가 안 된다니까요. 통제 안 되는 인간에게 말씀을 지키라?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어떻게 말씀을 지킵니까? 내가 내 통제가 안 되는데.

여러분들이 처음 교회에 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보고 뭐라 해요? 죄인이라 했지요. 누가 죄 짓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죄 짓게 해놓고 인간보도 죄인이라?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 선악과 잘라버리든지, 치워버리든지, 전기 담으로 해서 탐스럽기도 하지만 아예 근처도 못 가게 만들든지. 그냥 따먹으세요. 보암직도 먹음직도 해서 따먹었어요. “따먹었지? 너 죽었어.” 이게 뭐예요? 그것보다 불교가 합리적이죠. 윤리도덕이 합리적이죠. 이게 뭐예요?

“너는 창조주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냥 창조물일 뿐이야.”

그런데 주께서 죄 짓게 해놓고 죄 지었다고 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네가 창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창조자의 지혜와 지식을 갖추었다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네 속의 악마의 소리기 때문에 그렇다. 악마의 평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차라리 세리와 창기 되면 안 돼요? 강도 되면 안 됩니까? 그게 딱이잖아요. 우리한테 딱 맞아요. 저 아직 강도 아닌데요, 이러는데 그건 아직 안 굶어봐서 그래요. 아직 강도질 형편이 안 돼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망대가 무너져서 몇 명 죽었어요? 18명 죽었지요. 얼레리꼴레리 도대체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저렇게 졸지에 죽을 나이도 안 됐는데 죽었겠냐? 주님께서 “지금 누구 말이에요?” “망대 무너져서 죽은 사람 말이에요.” “니가 지금 살았다고 생각하느냐? 너도 죽었어.”

주께서 죽은 자를 구원하는 거예요. 죽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됩니다. 왜? 주님의 격차에 나오는 계시가 활용도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죽어서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는 거예요. 주님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내가 죽었다’부터 이야기를 해야 되지 살았는데 예수 믿고 천당 갔다, 그거는 바알종교지요.

주님의 절차가 우리 철차에 반복시키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죽었던 주님이 부활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미 죽어있었다, 이래 돼야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어떻게 죽이는데? 말씀으로 죽이거든. 말씀으로 죽이니까 죄 아닌 게 없데. 이게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합당한 우리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인들, 이 세상은 불신자 밖에 없어요. 그 불신자들의 보통 생각은 마귀의 생각이고, “살아 있는 나를 한 번 건져봐 믿어줄게” 십자가 옆에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하는 발언을 지금 우리 속에 잠재돼 있습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예수님한테 듬뿍 십일조 하겠습니다. 이런 발언들이 우리 속에 자생해서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우리의 문제점으로 들추지 않고 문제점을 가리는 식으로 그동안 평생 살아왔다는 것을 들통 내는 거예요.

좀 더 진행해보겠습니다. 다윗과 사울 사이에 격차가 있잖아요. 차이가 있어요. 오늘날 ‘사울 같은’ 우리와 그리고 사울, 마귀죠. 사이에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사울 같은 것이 드러나요. 다윗처럼 구원은 받았는데 사울 같은 우리를 사울과 다르게 그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왜냐하면 이 땅에서 떠난 분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오셔서 아버지로 갔잖아요.

다윗은 다윗 시대에 시범으로 보여주고 오늘날 이 시대 2024년도는 우리 시대에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이 땅을 버리고 이 땅에서 할 것 다하고 다시 하늘로 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해야 될 인생 고백입니다. 그냥 불신자로 살면 놔두면 되는데 그냥 나밖에 모르는 사울 같은 인간, 사울과 다윗 두 개를 다 겪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복음을 받게 되고 믿게 된 성도의 특징입니다.

시작과 끝이 하나님 언약이죠. 이걸 돌돌 말면 이렇게 되지요. 시작과 끝이 맞물린다. 주께서 시작하시고 끝이 됐다. 이게 동그라미 돼버리면 예수 안이 돼요. 예수 안이 나 안에 있는 나에게 와서 예수님 자신과 우리 사이의 격차, 차이점을 밝히면서 우리를 데려갑니다. 데려갈 때 시편 54편의 말씀으로 데려갑니다.

시편 54편 4절, 5절.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그다음에 6절에 보면 무슨 제 나옵니까? 낙헌제 나오지요. 낙헌제는 회목제의 일종인데 이거는 나를 제물로 바치는 거예요.

기꺼이 계속 저를 사용해주시옵소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세상과 차이 남이 내 속에서 계속 나오게 되면 나는 주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창조 자체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창조주로서 능력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저를 마음껏 사용하옵소서. 그게 바로 낙헌제에요.

낙헌제의 특징은, ‘낙(樂)’의 뜻이 뭡니까? 기쁨이죠.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계속해서 생산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여러분 자녀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녀가 있다면, “엄마 이번에 성적 좀 올랐지. 내가 컨닝을 했거든.” “기뻐, 성적 올라서 너무 기뻐. 이 자식, 네가 낙헌제야.”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통제, 컨닝하고 싶은 충동을 내가 컨닝을 안 한다할지라도 안 한 쪽을 선택했더라도 그 선택은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왜? 마음속으로 간음한 무슨 죄죠? 간음죄. 마음속으로 남 미워하면 무슨 죄? 살인죄. 우리는 내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이미 마귀가 작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통제 안 되기 때문에 그 통제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컨닝하는 현상을 통해서 그걸 으윽 하고 바깥으로 현실화시켜놓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이번에 문장이 길었지요. 간단한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구나. 내가 남한테 내세울 게 일도 없는 존재인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지요. 세리가 나와서 감히 얼굴도 못 들면서 제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지난 수요일에 십일조 이야기할 때 세리가 한 번도 십일조 한 적 없다는.

끝으로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5절 다 같이 해봅시다. 하나님의 원수가 얼마나 우리한테 달라붙었는지 시편 54편에 나오는 원수 있잖아요.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 왕, 자기 이미지 관리하는 그 사울 왕. 사도행전 19장 15절, 이거는 큰소리로 다 같이 해봅시다. 이게 이미지 관리와 관련돼 있으니까 꼭 찾아보라고.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와 고맙다, 마귀야. 마귀가 알아요. 우리 교회 당회장 다 속아 넘어가고 집사, 장로 다 속아 넘어가는데 마귀는 속아 넘어가지 않아요. 왜? 자기편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네가 위선자고 거짓 신앙인이란 것은 마귀가 딱 알아요.

그런데 마귀가 말하기를 예수는 알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가 되는데 마귀가 뭘 안다 했습니까? 마귀가 누굴 알지요? 예수 다음에 세상에 마귀나라에서 악마의 나라에서 바울이 요주의 인물이 된 거예요. 이거는 뭐냐? 바울은 원래 우리 편인데 예수님한테 빼앗겼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요? 동네방네 귀신은 다 알아요.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에요. 이거 MBC뉴스에 안 나옵니다. 이게 뉴스시간에 안 나와요. 뉴스는 전부 다 인간의 이미지 이야기만 하고 이런 이야기 안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이 말은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이 몰래 엔돌의 여자 무당한테 갈 때 여자 무당이 알잖아요. “당신은 우리 쪽이라고, 우리 쪽. 당신은 우리 쪽이야. 당신 악신 걸렸어. 같은 편끼리 왜 이래. 선수끼리 왜 이래.” 이게 교회 아닙니까. 교회는 선수끼리 다 통해요. 스스로 위선자인지 다 아는데 뭐. 신앙인척해도.

해답은 땅입니다. 땅에서 떠날래요, 땅에서 이미지 관리할래요? 사도 바울의 소원은 땅에서 떠나는 거예요. 이제는 나의 본질의 모든 내용은 땅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부모형제가 아니라 위에 계신 분이 현재 내 모습의 모든 것을 중심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게 뭐냐? 복음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이상하게 복음 나오는 현상, 사람들은 안 듣습니다. 듣던 안 듣던 그건 내 소관 아니죠. 그냥 복음이 흘러나오는 흘러넘쳐 나오는 이 현상은 귀신도 통제 안 되지만 귀신보다 더 세도록 통제 안 되는 것이 귀신은 귀신대로 하되 복음은 그걸 뚫고 통제 안 되는 방식으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저와 여러분에서 늘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존재를 우리가 관리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의 소유물이고 주님께 드린바 낙헌제 제물인 것을 우리가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는 그런 현상을 피우면서 늘 자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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