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증거의 무더기

아빠와 함께 2024. 11. 27. 17:23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이고 평범한 이런 생활 방식을 하나님께서 저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언약’에 의한 삶이 방식이 이질적으로 등장합니다.


 언약이 투입되면 사정이 확연히 차이납니다. 언약에 의해 사랑을 받은 자는, 다른 모든 인간들 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균열이 나타납니다. 언약으로 인해 경계가 발생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일하시면서 생겨나는 특이함입니다. 언약 투입이 사건화되어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존재로부터 죽음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존재를 자신이 지키겠다는 그들의 의해서 살해당한 하나님이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성취하신 그 십자가 사건은 모든 존재를 산 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보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건을 성령님께서 가지고 이 세상에서 복과 저주를 구분짓는 일을 하십니다.
즉 성도란 복과 저주 사이에 간격으로 자리잡는 사건 속의 인물로서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사이에 십자가가 자신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라서 전의 언약의 인물들처럼 증거의 무더기로서 사건화된 삶을 삽니다. 따라서 이들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겁니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   

 

말라기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너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매사가 잘 되고 있으니 너는 그 하나님의 잘 되심을 믿어야지 너의 형편가지고 쭈물딱 거리고 자기 형편가지고 뭐 “에게, 나 이것밖에 없네, 이것만 남았네. 나 절망이다”라는 이야기는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묶일 수 없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에 언약에 실려있고요, 그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뜻이 함께 할수 없다가 역사속에서 계시가 되게되면 야곱은 에서와 함께 하나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함께 같이할 수 없다를 분명히 하는겁니다.

도대체 야곱은 사랑받았다는 것이 무슨뜻이냐  

 하나님의 약속을, 야곱에게만 집중시킨거에요. 그렇게 되면  야곱에게 주었던 그 언약과  에돔한테 없던, 에돔뿐만아니고 다른 민족에게도 없는 그것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요. 균열이 뭐냐? 경계, 경계선, 차이남, 갈라짐, 섞이지 않음 이런걸 의미하는겁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선 생명나무 심어 놓으시고 인간을 생명나무 없는곳으로 보내시면서 인간이 사는 것과 생명나무 있는 곳에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불꽃으로 균열을 시켜놨어요. 이 구조, 이 구조를 그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는 이 세상 바닥에 그걸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적용시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되어있는 사람은 그 일상,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어딜 가도 경계선이 발생되고 균열이 생기는 현상이 일어난다는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똑같이 열심히 사는데 야곱이 가게되면 다른쪽이 야곱을 건드리면 그 다른쪽이 사달나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그 하나님을 뭐라고하느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냐하면요. 존재를 믿으면 구원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존재, 예수님이라는 존재, 성령의 존재를 믿는다고 해서 구원되는게 아니에요. 그게 뭐냐하면 그거는 언약이 없을 때 지식적으로 그렇게 믿게 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원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원하는게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을 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구원을 해주시는거에요. 근데 그 언약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에요.
구원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 존재를 인정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 성령께서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은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겠다는거에요. 존재는 잘라져야돼요. 사건에 의해서 토막나야 돼요. 갈라져야 돼요. 사건에 의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지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그 십자가 사건으로 내 존재가 사건 안에서 내가 죽은 존재로 사건화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 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죠.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야곱이란 존재는 구원받고 에서란 존재는 지옥간다. 이렇게 해석하는데, 야곱도 구원 못받아요. 야곱은 하나님에의해서 갈라짐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바뀌어야 돼요. 야곱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 사건화 된 야곱이어야 된다 이말이죠. 참 이게 말로하니까 어려워요. 야곱이 구원 받지 못합니다. 야곱이 구원받으면요, 야곱의 후손인 유대인들 다 구원받아요.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했다는 말은 그 야곱이 예수님이고요. 예수님이 사건을 일으킨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에요.
 종전의 나와 주님께서 인정하는 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내가 알던 나는 십자가로 죽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나는 십자가 안에서 살았고” 이렇게 사건을 증거 할 수 있어야 돼요. 사건을.  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라고 31장 1절에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는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요. 예수님이 나를 지켜주는 예수님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예수님이에요. 주님이 나를 죽이는 이유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내존재만 생각하고 존재만 지키고 존재만 사수하는데 정신이 다 팔려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식으로 불을 통과못해요. 두루도는 화염검을 통과 못합니다.

 47절에, ‘여갈사하두다’ 이거는 라반동네의 사투리고요. 이걸 히브리 말로 하면, ‘갈르엣’ 또는 ‘미스바’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 무더기. ‘증거의 무더기’에요. 증거를 나타내는 무더기.
이 증거는 너 인생하고 내인생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사건으로 개입하심으로써 완전히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완전히 다른길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거에요.  
‘유대인들은 천국간다’, 이게 아니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건이 와요. 그 사건으로 언약이 완성된 야곱, 그건 뭐 십자가 사건 속에 새로 만들어진 언약적 이스라엘이죠. 야곱. 그 외에는 전부다 에돔. 가장 가까운 형제간 까지 오게 되면, 에서와 야곱이 형제간인데 형제간 마저 둘로 쪼개지는 최후의 사건,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게 증거의 무더기에요. 하나님이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그러한 새로운 사건의 결과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어디있느냐? 오늘날 성도 안에다 집어넣었어요. 성도안에다가.
그래서 성도를 건드리면 저주받아요. 이건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성도를 해꼬지하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신다 했어요. 이게 뭐냐하면, “봐, 내 존재 중요하지.” 그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과연 나라는 존재가 존재로서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매일 삶이 세상에 나가서 십자가 사건을 뿜어내고 있는 사람인지, 그것부터 결정해야 되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 나를 전제로 한 것이 치명적인 오류였고 잘못된 생각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로 새로 만들어내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거의 무더기로서 저희들을 사용함을 새삼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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