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성소 청소

아빠와 함께 2024. 12. 2. 19:32

성소 청소

2024년 8월 21일              본문 말씀:  말라기 3:4-6

(3: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을 때 기뻤다고 하십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전혀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끌려갈 때입니다. 이사야 63:9에 보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1:1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어렸을 때’입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가 성립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심을 하나님쪽으로 증명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음을 인간쪽으로 증명해내지는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증명하는 바가 바로 율법이 율법대로 빈틈없이 실행된다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율법이 없는 다른 이방민족들이 뭐라고 비웃겠습니까? “저들 이스라엘은 참으로 재수없다. 맨날 율법 못지킨다고 자기들 하나님에게 얻어맞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님쪽에서 증명하는 겁니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세계에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를 성소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인간들만의 세계라고 누구도 알고 있고 또한 주장되는 이 현실세계에서 ‘하나님이 여기 있다’가 성립되면 과연 인간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대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모든 그동안의 지식과 상식과 학문과 업적과 문명이 모조리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문명을 착실하게 이루어왔자고 자부합니다. 당연히 이방민족들만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고 뭐든지 인간 편의 위주로 노동하고 활동해 온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원활하면 충분히 자기 삶이 평화롭다고 자부하고 그것을 자기쪽에서 부지런히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단에 합당한 제물을 드리지 못하면 저주받고 심판받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제단에 깨끗한 제물만 드린다고 이스라엘이 멀쩡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전반에 걸쳐서 율법의 거룩이 확장되기에 하나님의 율법대로 일상을 살지 못하면 가차없이 심판이 내려지는 나라였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늘 하나님이 계시는 바로 그곳, 곧 성도는 깨끗하고 정결하게 청소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성소를 어떤 식으로 청소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레위기 4:6-7에 보면,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17-19에 봐도,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조치는 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확정해놓으신 ‘인간과 만남의 조건’이 얼마나 철두철미한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철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충족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말라기 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희생 제물의 똥이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 어떤 식으로 처리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출애굽기 29:14에 보면,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27-28에 봐도,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 조항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있음을 하나님쪽에서 증명해내심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증명한다면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심판을 행사하지 못할 겁니다. 하나님의 증명의 최종 모습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없는 자가 구원 이해와 성령받은 자의 구원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없는 자들은 먼저

‘내가 여기 분명히 있다’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차로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자기 쪽으로 가져 올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의 신앙을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보호해주기 위한

성령님의 도움을 끌어당길 겁니다.

 

반면에 성령받은 자은 이런 철차가 아닙니다. 먼저

성령이 먼저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이 자기 원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의 활동 근거가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절차로서 이 예수님과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결실로

새로운 ‘나’를 동원했음을 알게 합니다.

십자가의 피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한 그 성소를 졍결하게 청소하시는 피가 됩니다. 그 피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심판받음은 성도가 행한 모든 세상 일에 대해서의 대신 심판입니다. 이로서 성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 즉 ‘야곱의 자손은 소멸되지 않는다’이 성취되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오늘도 이 저주 속으로 계속 다이빙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늘 고맙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말라기 3장 4-6절(성소 청소) 24082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4절에서 6절입니다.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오늘 내용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유다와 예루살렘,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나라, 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겠죠.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그 시절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절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중에, 5절에 보면,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만들면서 어떤 기준이 있는데요. 그 기준에 준해서 기쁨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심판을 감행할 수 있는 그런 대상으로 이스라엘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하나님이 만든 그 기준이 우선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하고 감당하기 힘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육신 하나 감당하는 것이 평생의 숙원사업이죠. 내가 태어났다. 이렇게 살았다. 결혼했다. 그리고 잘 살았다. 뭐 죽었다. 모든 이야기가 인간에게는 자기에 관한 이야기, 그게 전부입니다. 뭐 하나님을 언급해도 내 중심의 인생에 조금 도와달라, 뭐 그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련성이 있지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을 지키기 위해서 이 땅 위에 태어났다.’ 이런 것은 인간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너희들의 존재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이 우선이다.”라는 겁니다. 여기 하나님의 그 기준에 대해서 3절 끝에 보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시면서 원했던 겁니다. 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려라. 이거는 뭐 하나님께선 요지부동. 어제나 그제나 변함없이 확정지은 겁니다. 그런데 그 의로운 제물을 드리지 못했어요. 기쁨의 제물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근데 심판하시면서 심판하는 그 자가 어떤 자냐 하면, 술수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군의 삯을 억울케 하는 자,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는 자, 나그네 억울케 하는 자, 이들에게 심판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제단에서 기쁨의 제물을 드릴 때에는 평소에 그 사람들의 행위 자체가 방금 언급한 이러한 지적을 당하지 않는 자의 제물을 받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렇게 돼요.

자, 그러면 이것도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 하고 좀 차이가 나죠. 인간들은 ‘하나님의 제물을 깨끗하게 해서 제사 잘 드리면 된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인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그 제단에 깨끗한 제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전 삶의 영역, 사적인 영역, 개인과의 관계,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서 율법이 율법대로 살 경우에 한해서만 제단에 제물 드릴 때 내가 기쁘게 받겠다.” 그렇게 정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제단에 있었던 그 거룩함이 이스라엘 전 영역까지 확장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그렇게 실시 하셨습니다. 근데 그게 이제 실패를 한거죠.

여러분들 이건 어려운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어려운가 하면 6절,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약속을 변경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야곱의 자손들은 너희들은 소멸된다.” 이러면 앞의 말과, “심판해가지고 다 작살나는구나.” 되겠는데, 여기 6절에 의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반드시 살려낸다는 약속은 너희들이 부족하고 너희들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내가 너희들 구원한다는 것은 내가 포기하지는 않는다. 너희들을 소멸하지 않고 내가 건지겠다.”는 취지로 6절 말씀을 주신거에요.

자, 이렇게 되면 이 세 가지, 바른 제물을 드려야 되고, 생활하는, 평소의 생활도 하나님의 율법대로 완전해야 되고, 그리고 비록 심판은 받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들을 아주 버리는 것이 아니고 구원한다는 약속, 변치 않는 약속,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세 가지를 묶어보자 이 말이죠. 묶어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게 나와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기준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 모독하지 말라. 약속이 되든, 뭐 제사가 되든, 제물이 되든 어떤 경우, 율법이 되든. 너희들은 나의 내린 율법을 모독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과 자격은 없다. 내가 내린 그 법에 대해서 너희들은 멸시할 수가 없어. 너희는 이미 거기에 멸시하지 못하는 자로서 나와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의 내용은 뭐가 되겠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언제 멸시했습니까?”라는 질문이 거기서 나오죠. 그러면 그것은 말라기의 1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1장 6절에 보면,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했고, 7절에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벌써 여기서 기준이 정해졌죠?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활동과 그 존재하심에 대해서 멸시하지 말라.” 뭐 딱 한 마디로 압축이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언제 하나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그런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을 멸시한 적이 없다는 거에요. 자, 이 문제를, 서로 의견이 다르니까 문제가 해결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렇게 해결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성도가 함께 있을 때 내가 성도 된다는 보증을 성도가 해서는 안 돼요. 인간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느 쪽에서 보증을 해줘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성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증을 해주셔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보증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이 믿음이 선행되어야 돼요. “하나님 저 하나님 잘 믿습니다.” 이걸 내가 하나님 잘 믿고 있다는 그것을 내가 자꾸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그것은, 그 증명은 우리 담당이 아니고 같이 동행하시는 하나님 쪽에서 증명해 주십니다.

그게 바로 말씀이 우리 속까지 들어올 때 그 말씀 내용이 다 그것 증명하는 거에요. “내가 너와 함께 있잖아.” 그러면 우리가 우리를,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 못 하는, 못 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그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라는 쪽으로 우리는 평소에 “내가 잘 믿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 내가 스스로 증명해 왔습니다. 저는 하자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기고 있는거에요.

그럴 때 여기 말라기 2장 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라고 되어있어요. 똥을 얼굴에 바른다는 것은 인격 모독처럼 그렇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그냥 인격 모독 차원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29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진 밖에 불살라 버려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6장 27절, 28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밖에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다.” 이게 좀 어려워요. 이건 뭐냐하면, 똥이 묻은 제사장을 보고 주님께서 먼저 똥칠을 했다 이 말이죠. 똥칠을 했을 때, 그 제사장은 불살라야 돼요. 그 제사장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 똥과 함께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을 죽인다는 그것이 하나님이 너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다고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징벌을 하시고 저주하시고 심판하실 때 하나님 믿다가 그냥 심판만 받고 “안 되겠다. 도망치자. 심판받을 거 뭐 안 믿고 심판받지” 이런 식으로 자꾸 계산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말씀대로 심판하신다 할 때 그걸 기뻐하고 감격하고 감사해야 되고 즐거워 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우리 인생 가운데 개입해서 하나님 쪽에서 증명해주는 순간순간이기 때문에 귀한 순간들입니다. 예를 들면 불신자, 아예 불신자 같으면 어떻게 나오느냐? “나 성경 안 볼래. 나 교회 안 다닐래. 나 하나님 말씀 안 들을래.” 그러면 뭐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되면 천국이 어떻고 지옥이 어떻고...” “나 그냥 이렇게 살래. 나보고 뭐 성경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하지마. 나 이렇게 살래.”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소위 그 믿는다는 사람이 친구한테 전도해도 “하, 나한테 그 소리하지 말고 다른 이야기 하자. 그 소리 하지 말자. 종교 이야기하지 말자” 할 때에 그러면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돼요?

“그래. 안되는 것 할 수 없지. 그래 니 행복하게 살아라.” 이렇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돼요? 끝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을 해야죠. 아주 활짝 얼굴을 피면서 기쁘게. “그래. That’s right. 그게 바로 저주야.”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을 자기식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그게, 불신자들이 잘 먹고 잘 살아요. 명품가방도 받고, 대통령 되고, 잘 한다고요. 잘 사는데 그게 저주에요. 편안하고, 간섭도 안 받고 교회도 안 다니니까 절약도 되고, 그게 바로 저주에요.

그러니까 신자 입장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범사에 감사할 것, 할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 세상에 매일같이 쉬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에요. 어떻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전 영역이, 전체의 영역이 하나님의 기준이 그대로 활발하게 적용되는 그 순간순간을 성도는 온몸으로 짜릿짜릿하면서 느끼고 있는 거에요. 그럴 때, 그렇게 생각할 때 그 신자는 신자의 자기 인생 모델이 본인이 모델이 아니에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누가 모델인가? 예수님이 바로 모델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못하고를 내가 하는 행위에서 내가 찾고자 한다면 나의 모델이 내가 되어버려요. 그러한 착오, 그러한 잘못을 교회 50년 다니면 50년 동안 내내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하, 지난번엔 참 은혜받았어. 지난번에는 은혜가 영 안 돼서 잠이 왔어.”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 신앙을 하나님 쪽에서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믿고 내가 믿음 생활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내가 내 신앙을 증명하고 확인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본인이 본인의 모델이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은 뭐 모델도 아니에요. 지 은혜 받으면 신앙 좋은 거고 지 은혜 안 받으면 신앙 없는 거고. 지 맘대로 생각하는 거에요.

이걸 신약성경까지 한번 끌어댕겨 보겠습니다. 신약성경까지. 신약성경에 보면, 성령 안 받은사람들이 구원을 생각할 때 이 절차에 이 공식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뭐냐 하면, “나는 여기있다.”1번, 나는 여기 있다. 2번, “오, 십자가 있네? 십자가가 뭘까? 십자가는 예수님이 피 흘린 곳이고 그 피가 나의 죄를 씻어주는 십자가다.” 내가 여기 있고 십자가를 알았죠? “십자가 나 믿을래. 믿고 내 모든 죄를 용서받을래.” 이게 이제 두 번째 절차죠. 내가 먼저 여기 있고, 두 번째는 십자가를 알고, 세 번째는 뭐냐? “십자가 알았으면 구원되었는데 이 성령은 뭐지? 아 성령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 생활 하도록 늘 보호해주고 돌보아주는 분이 성령이다. 그러면 그거 믿지 뭐.”

1번, 나 여기 있던 것을 내가 믿고, 2번, 십자가를 통해서 내 죄 씻어준 것 믿고, 3번, 내가 스스로 내 힘으로 신앙을 유지를 못 하니까 성령이 오셔서 도와주신다는 성령도 믿고. 그러면 이것 갖추어졌다. 이게 바로 성령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 나오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그 사람 밖에 없지. 아니 교회 나오는 사람치고 그 사람이 전부지 또 무슨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면서 의아해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요. 성령부터 출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성령부터. 성령부터 출발하게 되면, “내가 왜 안 하는 짓을 하지? 내가 왜 의도하지 않은 행위가 왜 나에게서 나오지?” 성령께서 우리를 십자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는 내가 알고 싶어서 나한테 필요해서 내 구원에 도움 된다고 해서 필요한 십자가가 아니다는 사실을 알아요.

내가 구원되기 위해서 십자가 피를 어떻게 믿겠다, 활용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십자가로 데려가는 거에요. 십자가로 데려가게 되면, 십자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믿지 못하고 내가 못 받아 들이는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어난 일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내게 먼저 찾아왔던 성령님하고 예수님, 그 두 분 하나님 사이에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게 돼요. 세 번째, 그리고 난 뒤에 세 번째 나가 나오는 거에요. 성령님과 예수님이 의논하셔서 협의해서 한 그 일에 생산물, 또는 반응체, 결과물로서 나라는 것이 필요했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겁니다. 그러니 성령 없는 사람은 1번, 내가 여기 있다. 나 죽어서 어떻게 되지? 천국 가야 되는데. 2번, 옳다구나 십자가 있구나. 믿어야지. 3번, 아이고 고맙게도 성령께서 또 도와준다네? 도와줌을 받아야지.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의 절찬데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부터 먼저 시작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에요.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

다시 말해서 내가 교회 나오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회 나오는 것도 이게 내가 원하지 않는 발걸음을 주께서 내 인생을 갖고 노시는구나. 성령께서 그렇게 했고 그 성령께서 그냥 1단계에 있으면 나는 내 마음대로 못하네.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없어. 내일은 다 틀어지는거야.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데려가요. 십자가에 일어난 일을 알게 하기 위해서 내가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라는 사실을 주께서는 이끌어내시고, 세 번째, 세 번째가 이제 나에요. 나라는 것은 하나님 일에 참여하라고 나라는 것을 성령이 오셨고 주님이 오셨구나, 십자가 졌구나 하는걸 아는거죠.

그 차이점, 아주 쉽지요? 뭐 이거 뭐 논리 따질 것도 없이 딱 하니 다 아는거잖아요. 자 그렇다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일단 제낍시다. 뭐 들어도. 제끼고 성령 받은 사람에게 오늘 말라기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소에 있습니다. 성소라는 말은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소라는 말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에요.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지요.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고 사회를 배우고 공부를 하면서, 학교에서 초등학교부터 배우는 모든 학문은 사람들 이야기에요. 시작도 사람으로부터. 시작은 원숭이부터 했겠죠. 원숭이. 그럼 원숭이는 뭐부터 했는가? 원숭이는 어류부터 해요. 어류, 파충류, 포유류 이렇게 했겠죠. 그러면 그건 뭐냐? 단세포부터 시작했겠죠. 단세포, 아미노산, DNA 이렇게 시작했겠죠.

하여튼 간에 원숭이부터 시작했다고 해봅시다. 원숭이부터 시작해서 그 이야기는 전부 사람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교육받은 것은 사람의, 사람을 위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사람의 세계, 사람을 위한 세계는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세계, 이게 사람을 위한 세계다. 이런 것을 우리는 교육받았어요. 여기에서 “아니다” 하는 사람들은 없어요. 아니다 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마저 이 인간 사회를 너무 사랑해서 하나님마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천국 보내기를 좋아하신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것에서 저희 기독교 계통의 종교를 만든 거에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거에요. 이게 성소에요. 하나님이 여기 성소, 하나님이 여기 계셔버리면, 인간은 위기입니다.

인간은 바들바들 떨어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줄곧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에. 또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잘 챙겨서 나 자신이 남들 보기에 “어때, 괜찮지?” 이렇게 평가 받는걸 보람으로 우리는 인생을 죽도록 결사적으로 몸과 마음과 뜻을, 힘을 다하여 땀을 흘려가면서 살아왔습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온 거에요. 나를 위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거에요, 내가. 여러분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우리는 나이가 얼마가 되든, 어디서 뭘 하든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는 거에요. 내가. 근데 성경은 뭡니까? 성소. 하나님이 여기 있다는 거에요. 누구 말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은, 인간치고 어떤 인간도 하나님에 대해서 합당한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때 비로소 인간은 뭘 아는가? 자기가 왜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거에요. 이거는 야호 입니다. 한 달 수입이 얼마고 어디 취직을 했는가? 군에 언제 제대했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왜 자꾸 그동안 내가 여기있고 내가 여기 살고 있고 왜 자꾸 내 생각만 하고 살아왔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그러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청소하는 거에요. 뭐?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청소하는 겁니다. 어떻게? 정결하게.

방법은 율법대로, 제사로.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레위기에 보면 율법에 나오잖아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았을 때 우리 이방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참, 어이, 이스라엘, 참 너희들 진짜 재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안 만나서 우리는 우리 편한대로 내 하고싶은대로 사는데, 너희들은 무슨 재수가 없어서 하나님 만나서 율법 받아서” 뭐 레위기, 민수기, 출애굽기 보면, 하나님 말씀 안 지켰다고 막 죽어 나가죠.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 말씀, 안식일 안 지켰다고 죽어 나가고, 점 봤다고 죽어 나가고, 그러니까 이방인 입장에서는 동정하고 싶은 거에요. “아이고 너희들 재수 되게 없네. 어떻게 하나님 만나서 맨날 저주받냐?” 오히려 이스라엘을 걱정하고 측은하게 여기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를 청소하지 아니하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처음으로 알게 된 민족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말라기 1장 그리고 2장 3절, 똥 이야기했죠. 이걸 통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이 계시다는거에요. 뭐 성경을 몇 독하고 그거 잠시 내려놓고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해봅시다. 하나님이 여기 인간들만 있다고, 인간들이 그렇게 장담하고 확신하는 이곳에 하나님이 와버린 거에요. 여기 계셔버린 겁니다. 계실 때 그냥 가만히 계신 게 아니고 이런 거에요. “내가 있는 장소 청소하지 아니하면, 너희들 다 죽었어. 다 저주받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노아 홍수도 마찬가지죠.

자 그렇다면 청소를 어떻게 합니까? 그것 궁금하겠죠. 청소하는 방법은 레위기 4장 6절에서 7절에 나옵니다.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이렇게 되어있어요. 레위기 4장 25절에도,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희생의 기름 같이 단 위에 불사를찌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방금 이 말씀을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인이, 이방 민족이 이 말씀을 봤다고 해요. 하면, 그들은 무슨 생각 하겠습니까?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이야기하겠죠. 우리는 그런 것 안 해도 된다고 느긋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함께 있음으로써 오늘 말라기에 2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데, 하나님이 약속을 했어요. “내가 너희들 속에 있는 나 하나님은 내가 야곱의 자손들이 소멸되지 않고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보고 조롱하고 비웃는 그들은 어떤 방법, 어떤 수단을 써도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 제가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의 순서를 봤죠? 그들은 뭐냐 하면, 첫 번째 내가 있다. 두 번째, 십자가 피로 씻음 받고, 세 번째 성령의 도움으로 천국가면 되잖아. 이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그러면 그들보고 성령부터 먼저 온다고 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를거에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성령부터 먼저 온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 그전까지는 성령 없을때는 내가 여기 있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주님이 여기 계시다는 거에요. 하, 정말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죠. 주님이 여기 계시다는 거에요. 내가 있다고 여기는 그 자리에 주님이 계셔버리니까 나는 위기가 된 겁니다. 그리고 내 모델은 내가 꾸려나가는 내 인생이 내 모델로 여겼는데 성령이 있어 보니까 내가 모델이 아니래요. 누가 모델이냐? 예수님이 모델이라는 겁니다. 모델. 예수님처럼 될 때 함께 있음이 증명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이제 오늘 남은 문제를 해결해봅시다. 아까 세 개를 합친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목사님 이스라엘은 성경 보니까, 구약 보니까 몽땅 망했잖아요. 멸망했다면서요. 오늘 본문을 봐도 뭐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면 다 이걸 다 심판한다고 했잖아요. 그들 사정이나 우리 사정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내가 여기 있다’가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진 이상 이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고 안 통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올 때 우리는 심판받아야 마땅하다. 아주 알기 쉽기 말해서 나라는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는 소멸되는 대상으로 여기 있는 것이지 소멸되는 나를 소멸시키고 심판하는 것은 주님께서 준비된 그 절차대로 나에게 찾아와서 지금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일을 한다는 것, 그들은 자기 나라가 없어지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겁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속한 내 나라, 내 유대 나라가 잘 되어야 된다고 했는데, 성령이 그들에게 오게 되면, 사울 같은 사람이죠. 사도바울, 사울. 나중에 바울 된 사람.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것은 유대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신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위해서 하나님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가지고 왔고 그동안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이 성소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소제 하기 위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필수적인 절차였다는 겁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자기 자신을 처리하고 비웁니까?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것 할 수 없어요. 왜? 우리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마귀가 항상 우리 위주로 나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 이런 말이 어려우면 쉽게 가겠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제주도에서 다이빙하다가 죽은 사람이 세 사람이에요. 두 사람이고 한 사람은 머리를 크게 다쳤어요, 정확하게 말해서. 자 그러면, 다이빙을 왜 하느냐? 인증샷 하기 위해서. “니 사진 찍어라. 나 뛰어내린다.” 뛰어내리다가 이게 얕아가지고 머리 깨지고 또는 들어가서 다쳐가지고 못 나와가지고 거기서 죽어서 죽어 나오고 그랬다 이 말이죠. 다이빙을 왜하느냐? 그 다이빙하는 모습 보세요. 그거는 바다 속으로 그냥 뛰어들어가는 거죠. 그거 왜 뛰어들어갑니까?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그 깊고 푸른 제주도 바다에 뛰어들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아주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풍덩 풍덩 다이빙하는 거에요. 왜? 내 존재가 어느 정도까지 괜찮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어서 다이빙하는 거에요. 그 다이빙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거는 자진해서 저주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죽음 속으로 본인이 본인한테 미쳐서 그냥 풍덩 풍덩 빠지는거에요. 꼭 다이빙 하듯이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 하나님 안 믿고 저주받는,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뭐 대충 그런 것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한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면서 “그래, 마음을 낮춰야 돼. 마음을 겸손하게 해야 돼. 아예 이참에 무소유로 살까?” 뭐 이런거. 여기 보면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고 내가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이런 자, 품군의 삯을 주지 않는 자,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는 자는 내가 심판하겠다.” 특히 마지막은 뭐냐? 7가지인데요. 마지막이 “나를 경외치 않는 자에게는 속히 내가 심판을 내리겠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래. 성경 보고 이제 정신차려가지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말씀대로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겠죠.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왜 실패가, 구원에 왜 실패가 되는가?

그런 식으로 나오게 되면 아까 절차, 성령 없는 사람의 절차. 첫 번째 누가 있다? ‘내가 있다’가, 내가 있다가 이게 제거가 안 돼요. 그냥 내가 마음을 소박하게 살고 마음을 낮추기는 할 수 있는데 내가 날라가버리지는 않아요. 내가 없다가 안 됩니다.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고 자랑질 안 하고 부자 안되고, 뭐 부자 안 되고 싶어서 안 되었습니까? 능력 없어서 안 된거죠. 어쨌든 간에 있는 그대로 살고 이러면 하나님께서 마음 낮췄다고 뭐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겠지. 이러한 꼼수는 주님한테 통하지 않습니다. 그게 그 무소유가 죄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바로 자기를 죄인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덜 죄인, 죄를 적게 짓는 사람으로 자기를 조작하는 것은, 그것도 바로 더욱더 심판받을, 저주받을 죄가 됩니다. 그러면 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인간은 여기에 성경을 보면 인간은 선악과 따먹게 되어서 3장 4장을 잠시 보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어서 땅이 저주받았잖아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어서 저주 받았다, 이것만 있는게 아니에요. 4장에 보면 하나님과 관련 있는 사람 아벨이, 아벨이 이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피를 땅에 흘릴 때에 그 피를 땅에 흘린 것을 보고 땅이 저주받아요. 이걸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저주받는 내용이 깊어졌는데 첫 번째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땅이 저주받죠, 그런데 그 저주받는 땅에 생명 나무가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와서 소위 인간들에게 모독을 받아서 죽임을 당해서 피를 흘리게 되면 그것 자체로서 이미 저주를 받는 땅이 돼요. 따라서 자기가 마음 낮춰서 겸손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걸, 하나님께서 구원해주는 게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라기의 모든 말씀을, 세 개를 합쳐버리면 어떤거냐 하면, 이 말라기의 말씀,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심판받아 마땅함과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백성을 기어이 살려낸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변경하지 않는 약속이 십자가, 예수님 십자가 한 분을 통해서 그게 다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마음을 낮추고 소박하게 산다고 죄가 되는 게 아니고 바로 십자가 앞에서 죄의 마지막 모습을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해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십자가 앞에서 뭘 해도 죄인 맞습니다. 나는 내 위주로 사는 것 자체가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것은, 죄인 맞기는 맞는데 감사한 것은, 바로 십자가 지시고 그리고 내 죄를 까발리기 위해서 주께서 여기 계시다는 거에요.

계시고 주님은 계실 때 그냥 조용히 계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신다는 그 성소, 성전을 깨끗하게 소제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반드시 심판과 저주를 지금도 십자가를 통해서 행사한다는 것, 이것을 알게 된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이 성령 받은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영원한 천국의 야곱의 자손으로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우리 자신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은 없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여기 내가 있다, 하나님이 여기 내가 왔고, 여기에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다 이루었다는 그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오늘도 성도 눈에, 성도 피부에 모든 일이 다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말씀 중심으로 있어야 될 저희들을 내 중심으로 먼저 설정하고 그 다음에 말씀 믿고 지킬려고 나섰던 우리들 아니옵나이까. 이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여기 함께 계심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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