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6강) 신명기12:5(중간층) 20241028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2장 1절부터 보면,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그렇게 되어 있죠.
인간의 정서로서 우상을 멸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아세라, 바알 이런 우상을 만든 게 사람이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도 사람이란 말이죠. 사람이라면 똑같이 아담의 후손들이고 아담의 속성들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신을 믿든지 그 사람 자유니까 오지랖 넓게 주제넘게 지가 남이 무슨 신을 믿는지 지가 나서서 ‘당신이 믿는 신은 틀리고 우리가 믿는 신은 옳습니다.’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권한 있어요? 없어요. 없다고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엉터리다.’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당신이 믿는 하나님 끄집어내고 내가 믿는 하나님 끄집어내서 한번 한 장소에서 비교해보자.’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똑같죠. 차이가 없어요. 차이가 없는데 네가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넌 옳은 하나님이고 내가 믿기 때문에 틀렸다는 그것은 어불성설, 말이 되지 않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유명한 말은, ‘니나 잘하세요! 남 믿는 거 간섭하지 말고 니 신이나 니나 잘 믿으세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지 신도 제대로 못 지키면서 어디 오지랖 넓게 남의 하나님 섬기는 것까지 간섭질이야?’ 그렇게 하면 반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반박 못합니다. 반박을 할 수 없어요.
지금 성경은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일방적으로 가져다쓰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누구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의 취향에 따라서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여호와가 되든 부처가 되든 어떤 다른 종교가 되든 막상 그 하나님을 끄집어서 내보면 똑같아요, 똑같아. 똑같습니다.
믿어서 잘 되는 거, 똑같지 않습니까? 안 믿기보다는 믿어서 이익 보는 거, 그거잖아요. 믿어서 내가 이익보겠다고 믿는 거. 여기서 또 나오는 여러분 잘 아는 유명한 문자를 하나 쓰겠어요. 이거는 정말 중요한 문잔데 남 신앙, 남 종교 간섭질하기 전에 우리가 이 정신부터 먼저 분명히 해야 돼요. ‘나만 쓰레긴가?’
나만 쓰레긴가? 하나님 믿어서 이익 보겠다는 이게 만약에 잘못되었다면, 그럼 그렇게 하나님 믿어서 이익 보겠다는 게 쓰레기 같은 나쁜 짓이라면 나만 쓰레긴가? 남들은 안 그런가? ‘나만 쓰레긴가?=정답’. 이게 바로 정답이에요. 이게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이 믿는 신을 ‘그건 우상이니까 척결하라. 그것은 엉터리 신이다.’라고 이스라엘에게 지적을 하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쓰레기라는 사실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이 일을 맡긴 거예요. “남한테 간섭질하지 말고 네 꼴이나 제대로 봐라.” 이 말이죠.
“네가 ‘저들은 너무나 기복신앙이며 그들은 이득을 보기 위해서 자기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 믿는다.’라고 지적을 하지만, 그 지적하는 너는 하나님 믿고 이익 보려는 생각이 있어, 없어?” “있어.” 그럼 똑같죠! 종교가 문제 아니에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그런 건데요. 타고난 본성이. 어디 남한테 쓸데없이 간섭질하고…. 그러니까 인간은 ‘그렇다면 뭐 나만 쓰레긴가?’ 이렇게 되죠.
이게 이유가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요. 율법, 율례라고 되어 있죠. 십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도 율법이죠. 율법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 천사에 속해요, 천사. 천사를 통해서 주어진 거예요. 율법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천사의 손을 통해서 주어졌어요.
그럼 그림이 이렇게 되죠. 제일 위에 하나님 층이 있고 제일 아래에 인간 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해서 하나님 층이 인간 층으로 바로 내려온다고 생각한 거예요. 바로 내려온 게 아닙니다. 그 사이에 중간층이 있어요. 이게 무슨 층이냐 하면 천사 층입니다. 천사 층.
천사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전에 이야기했지만, 천사는 무엇이 없느냐? 천사가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두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천사에게 없는 것. 물론 비트코인도 천사한테 없죠. 그런 거 말고.
천사한테 없는 것 ■1.융통성이 없어요. 봐주는 게 없습니다. 유월절에 천사가 지시에 따라 애굽에 사는 모든 맏이를 사정없이 죽였습니다. 뭐 목 졸라 죽였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자고 일어나니까 다 죽었어요. 융통성이라는 것, 봐주는 게 없다는 거예요. 봐주는 것은 없다. 시키는 대로 한다.
이게 뭐냐 하면 ‘기계’에요, 기계. 이 천사를, 오늘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인공지능은 입력한 대로만 움직여요. 기계죠. 어떤 분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천사처럼 되게 해 달라 기도하죠. 그건 AI 되게 해 달라는 것과 똑같아요. AI. 좋은 이야기에요. 주님 시키는 대로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참 좋은 말이죠. AI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천사, 융통성 없는 천사가 성도보다 못한 점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2.예수님의 고통을 공유할 수 없다. 고통 또는 고난. 예수님의 희생, 이것을 공유할 수 없어요. 왜? 기계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그냥 ‘지시만 하이소’ 뭐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아픔이라는 것, 하나님이 갖는 아픔이 공유 안돼요, 천사는.
그래서 ‘1.융통성 없다’는 이게 지금 천사한테는 자랑거리처럼 보이지만, ‘2.주님과의 공유, 같이 함, 주님과 함께 함이 없다’. 주님과의 같이 함이 없는 이상은 천사가 성도보다 계급이 낮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안에는 귀한 주님의 고통, 다른 말로 하면 고통 속에 주님의 생명이 있지만 천사는 생명이 없거든요. 주님의 생명은 천사한테 주는 게 아닙니다. 성도에게만 주어지고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공유하는 자에게만 제공되는 것이 영생입니다. 천국의 복이에요. 천국의 기쁨입니다.
천사는 천국의 기쁨 없어요. 뭐 살던 동네가 천국인데 달리 기쁨이 있겠어요? 잃었다가 얻은 게 없어요, 천사는. 천사는 한번 잃어버리면 끝이나요. 그게 사탄이거든요. 사탄은 한번 잃어버리면 영원한 지옥 갑니다. 그런데 성도가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은 분명히 지옥 가야 되는데, 빼돌렸어요. 야, 이거 참 기적 같은 이야기에요. 빼돌렸어요.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야. 이쪽이야. 빼돌린 거예요.
그래서 다윗 같은 경우에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에 보면 율법의 완성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봤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내게 부족함이 없다.” 집안에 그런 거 안 걸려있는 모양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다음에 뭡니까? 부족함이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집안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양 소유의 집안이 아니고 목자 소유의 집안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목자의 허락과 목자의 주도 하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이 가정에, 혹은 이 가정 식구들에게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죠. 일곱 살 애가 있는데 그 애가 담배를 피웠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해서 조사해보니까 아빠, 엄마가 다 피워요. 아빠, 엄마 다 피우는 그 환경 속에서 애가 아빠, 엄마 보고 자라잖아요. 아빠가 하는 것을 내가 해야 내가 아빠 자리를 쟁취할 수 있는 거예요. 엄마가 하는 것을 해야 내가 엄마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요.
인간은 차지하면서 자아가 형성됩니다. 차지하면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줄곧 차지하는 행위를 해요. 괜찮은 것, 멋있는 것. 남 크루즈 여행 가면 자기도 돈 모아서 크루즈 여행가고. 무조건 괜찮아 보이는 걸 차지하려 하는 게 있어요.
아빠, 엄마가 담배 피우니까 자기가 아빠, 엄마처럼 담배 피워야 아빠, 엄마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더 이상 아빠, 엄마의 지시와 통제를 받지 않고 통제받기 보다는 아빠, 엄마의 선악을 차지함으로서 내가 신처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애들이 어릴 때부터 유치원 때부터 엄마, 아빠에 대해 눈 굴리며 유심히 살피는 것은 아빠의 자유로움과 엄마의 자율성처럼 내가 언제 스스로 자율성을 갖추게 될 수 있느냐? 그 시점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계속해서 끌어 모으죠. 끌어 모으면 그게 내 안에 쌓여서 자아가 됩니다. 나라는 게 돼요.
그래서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을 보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은 출생 자체가 비극입니다. 출생 자체가 비극이에요. 왜 비극이냐? 이 동네가 어떤 동네냐 하면 이미 율법이 들어와 버린 동네에요. 그래서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작살나는 동네입니다. 이걸 이방인들은 몰라요. 율법이 안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서서히 이스라엘은 뭉개집니다. 무너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신이 되고픈 거예요. 인간의 마지막 욕망이 신이 되는 거거든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지키면 율법을 지키는 그걸 근거로 해서 자기가 완전자가 되고 절대자가 되고 신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는 것을 했을 때 하나님처럼 되니까. 뭐 인간의 성격은 딱 그거 하나에요. 최고의 자리, 절대적 자리에 가는 겁니다.
제사법을 주니까 제사? 그럼 제사지내면 이젠 하나님도 나한테 터치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여다 놓고 어떻게 하느냐? 제사 드릴 수 있는 성전을 파괴시켰어요. 성전이 파괴되니까 뭘 못 드립니까? 제사를 못 드리죠. 제사를 못 드리니까 다른 이방나라보다 우월하다는 점이 날아가 버렸죠. 월등한 점이 날아가 버렸어요.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통로가 끊어져버렸죠. 성전이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자긍심을 가졌는데 성전 자체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지금은 이 성전 있는 곳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슬람 사원들이 돼버렸죠. 시온산 황금 성전. 파괴된 성전의 터 위에 있는 거예요. 지금 이슬람 성전이잖아요. 이슬람 회당. 이슬람교 제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기도할 때 맨날 상체를 끄떡끄떡하거든요. 서쪽, 성전 파괴된 서쪽 담 성벽을 돌로 쌓아놨는데 돌 하나하나가 굉장히 커요, 가보면. 돌이 엄청나게 크다고요. 튼튼하게 쌓아놓은 돌담벼락에서 쪽지에 기도문 적어가지고 바위 틈 사이에 꽂아 놓고 모자 하나 쓰고 끄떡끄떡하면서 기도합니다. 어서 성전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왜? 이스라엘의 마지막 자존심이니까요.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여호와 하나님 있다는 것.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다른 민족들이 얼마나 놀렸겠습니까? “네가 여호와 믿는다며?” “응.” “하나님 어디 있는데?” 그들이 할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한테 잘렸기 때문에. 만약에 성전이 있다면 뭐라고 합니까? “성전 있다. 우리 하나님이 성전 받는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하나님의 성전.”
그 뒤에 신명기 12장 5절 봅시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되어 있죠.
하나님의 이름이 앞장서서, 약속의 땅이 넓으니까요, 약속의 땅 중에서 하나님 이름이 어디서 만날지 그 장소는 친히 여호와 이름이 앞장서서 이끕니다. 어디까지 전쟁을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할 곳에 이르면 전쟁이 끝나요. 그곳이 어디냐? 그곳이 바로 성전 있는 곳이죠.
그 성전의 전쟁은 언제 끝났게요? 하나님 이름이 드디어 여기서 멈췄다. 전쟁 다 끝났다 하는 그때가 언제겠습니까? 성전이 세워지는 그 장소. 여부스 민족의 땅. 예루살렘. 그때가 언제죠? 바로 다윗이죠. 다윗.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한 거예요. 성전의 재료 준비를 다 한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 자신의 약속대로 드디어 성전이 세워진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이동할 필요 없이 다시는 다른 땅을 갈 필요 없이요. 이 땅에서 대대손손 우리 민족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이 지구상에서 영원한 천국을 이룬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 다윗의 소망이고 약속이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 성전을 그래서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었잖아요. 솔로몬이 성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가지고 솔로몬이 다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이 거기 임재했죠. 그러니까 영광이 확 비춰 와서 바깥에 대기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 눈부셔. 눈부셔.’ 하면서 전부다 손으로 눈을 가렸다고요.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뜰 수 없었어요.
그 제사장을 대표해서 솔로몬이 거기서 하나님과 기도가 오고갑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시를 해요. 그것을 무슨 언약이라 하는가? 제사장과 맺은 언약은 모세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모세 계통의 제사장들이 계속 남아있으면 모세언약은 계속 살아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방금 한 말, 상당히 중요한 말입니다. ‘어떤 분은 없어져도 계약이 남아있으면 그 분은 계약 안에서 계속 유효하게 일을 하고 계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부활이에요. 부활.
부활은 새 언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게 성립됩니다. 그러면 새 언약은 뭐냐? 십자가로 완성되었잖아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 최후의, 더 이상 인간들이 손 볼 필요 없는, 인간 쪽에서 행함을 추구할 필요 없는 완벽한 계약이 무슨 계약이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입니다. 피 흘리심이에요.
집 계약할 때 사인하고 도장 찍고 할 필요 없어요. 그냥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천국에 합격입니다. 그러면 그 계약에 참여한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피와 관련성 있는 사람이어야 되죠. 피와 관련성 있어야 피만 남으니까. 피와 관련성 있으려면 자기는 뭘 해도 죄인이어야 하죠.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했잖아요. 내가 흠모하지도 않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 분이 나의 메시야인 것을, 나의 구세주인 것을 알면 그걸로 합격이에요. 그게 합격이에요. 변호사 시험 합격, 서울대학교 합격, 뭐 노벨상 타는 합격 그 이상입니다. 다른 합격은 내가 기대했잖아요.
다른 세상적인 합격을 기대하는 사람이 왜 천국을 못 가느냐? 천국은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구원과 천국이 이게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계약서와 내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발견한 거죠. 내가 원치 않는 분이 나의 구원자인 걸 아는 순간, 이미 천국에 합격되었기 때문에 그 인식이 생긴 거예요. 그래야 피만 사니까. 너 같은 죄인을 위해서 흘린 피만 높여지니까 합격된 거예요.
그래서 이미 합격이 되었기 때문에 내 인생에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기쁨과 감격을 빼앗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피로 맺은 맹약이니까요. 그 피가 들어왔기 때문에. 주님의 피가 내 안에서 피의 효과를 계속 발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어디 층입니까? 인간 층에서 어디로 올라온 거예요? 중간을 천사 층이라 했는데 성도가 포함되면 천사 층이 부활 층으로 바뀌어요.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된 상태로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 층과 인간 층 그 중간의 부활 층으로 들어왔어요.
부활 층의 특징은? 어제 설교에서는 ‘이미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오늘 달리 이야기합니다. ‘이미 너는 죽었다.’가 되죠. ‘이미 죽었다’를 인식했다는 말은 살았다는 뜻이에요. 이미 살았다는 말은 항상 나는 죽어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어렵지 않죠. 세상사람 보기에 유령 같은 존재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천사 같은 존재에요. 유령이라는 기분 나쁜 표현을 하는 게 아니고, 천사 같은 존재로 보는 거예요.
제가 아까 천사 층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율법은 어디 속한다 했습니까? 천사 층. 이 점에 대해 성경을 한번 찾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두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아래층 인간 층에서 모조리 다 범법했다 했죠.
아까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어요? 남의 종교 오지랖 떨지 말라 했죠. 너나 나나 이익 보려고 하나님 믿는 거, 그거 뻔한데 그걸 누가 속아요. 뻔하잖아요. 무슨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믿어요? 자기 이익 보려고 그러잖아요. 그런 점에서 이건 죄에요, 죄. 어떤 신을 골라잡아도 다 죄에요.
그런데 중간층 율법 층은 여기 보면 율법은 천사를 통해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라 되어 있어요.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천사를 통해서 주어진 거예요, 천사를 통해서.
그렇다면 여기서 천사가 하는 일은 뭐겠습니까? (지적질.) 예, 지적질. 가까이 왔는데 더 정확하게 말해서? (죽여요.) 정답을 그렇게 빨리 말하다니. 오늘 막 부부가 쌍으로 정답을 말하네. 난 이거 모를 줄 알았어요. 천사가 하는 것은 마태복음 13장에 심판이에요. 심판은 천사 손에 맡겼습니다. (마 13:30, 39-42)
천사의 특징은 1번 뭡니까?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유월절에. 천사의 특징은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냥. 봐주는 거 없이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 층에 우리는 어떻게 가입되었습니까? 이미 죽은 자로 가는 거예요!
‘죽여라, 죽여라!’ 벌써 죽었는데 또 죽일 게 뭐 있어요? 이미 죽었는데. 그럼 천사가 뭐라 합니까? ‘어린 양의 피가 있는데… 이미 죽었는데 손댈 게 뭐 있어요. 우린 그냥 시킨 대로 할 뿐입니다, 나의 주인이여.’ 이러고 있단 말이죠, 천사가. 이미 죽었는데 뭘 또 죽여. 죽었는데 뭘 죽여요.
그래서 신약에 보면 천사를 ‘우리를 돕는 자’라 하는 거예요. 우리 내부에 주님의 성과가 있거든요. 성과를 천사가 돕는 거예요.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옥에 갇혔을 때 누가 빼냈습니까? 천사가 빼내주는 거예요. 베드로 쿨쿨 잠자고 있는데 깨웠고 지진 나서 흔들었고. 이게 뭐냐 하면 천사가 빼내주는 겁니다.
아까 일곱 살 먹은 담배피운 애, 뭐 때문에 그래요? 왜 담배 피웠습니까, 일곱 살 먹은 애가? 환경 자체가 그렇죠. 그러면 이 층에 올라온 성도의 환경은 뭡니까? 중간 층이죠. 천사의 율법과 함께 있는 층이죠. 그러니까 그야말로 성도(聖徒), 거룩한 존재입니다. 왜? 이미 죽었으니까. 이미 죽었으니까요.
율법이 천사 소관이라 하는 것은 사도행전 7장에도 나옵니다. 7장 53절, “너희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너희가 천사가 전해준.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누구를 통해서? 천사 층으로 와서 이렇게 인간 층으로 내려온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오실 때 어떻게 합니까? 천사 층을 거쳐서 인간 층에 오죠.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을 때 누가 도와줍니까? 끝나고 나서 누가 시중들어요? 천사가 시중들죠. 잘하셨습니다. 율법대로 잘하셨습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도와줘요.
오늘날 성도한테도 똑같이 천사가 도와줘요. 천사는 우리의 뜻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약속이 약속답게 계속 유지되도록 효과 보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래서 천사는 우리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일도 천사들이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요한계시록 1장 보면 명확하게 나와 있죠. 사도 요한에게 주님이 직접 왔습니까, 아니면 누구를 거쳐서 왔습니까?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누구한테 보냈어요?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다시 이야기하면 천사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참, 그거 우리가 본받아야 돼요. 융통성 없는 것을 본받아야 됩니다. 전혀 융통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천사로 아주 범벅을 해놨어요. 사람은 쭈구리 되어가지고 아무것도 못하고 모든 활동, 심판의 활동은 천사가 다 해요. 요한계시록 8장, 9장, 10장, 11장 계속 나오는 모든 활동은 일곱 천사가 완전히 다 해버리잖아요. 천사가 바빠요. 바쁘다고요. 뭐 서비스 받으려고 하면 대기상태에 있어야 돼요. 삼성서비스보다 더 바빠요. 천사가 알아서 한다고요.
또 하나의 예는 안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나와요. 하나님의 보좌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에스겔 당시 하나님께 제사드릴 성전이 파괴되었어요. 성전이 파괴되고 난 뒤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철수작전을 벌인 겁니다.
성전에 있던 주요부품들 있잖아요. 성전의 주요부품이 뭐냐? 성전에는 무슨 그림이 있어요? 천사 그림이 있었어요. 그 그림이 뭐로 바뀝니까? 그림이 실제로 천사의 실물로 바뀌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와, 진짜 에스겔은… 정말 신기해요. 그림인줄 알았는데, 언약궤 위에 조각품인줄 알았는데, 조각품인데 나풀나풀 날아올라갈 때, 여러분 이거 기절초풍할 일이죠. 여기서 내가 칠판에 아이 그림 그렸는데 아이 그리고 돌아서니까 아이가 돼서 올라와보세요. 기절할 거잖아요.
그거보다 더 기절할 일은 뭐냐?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더 기절할 일이에요.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얼마 전에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잘 있었느냐?” 이러고 주님께서, 문 열지도 않았어요, 그냥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니까 도대체 제자들은 그다음부터 시공간 이 현실감에 대해서 어떤 교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압력을 받은 거예요.
기존에 알고 있던 시공간에서 알고 있던 자아, 이게 무용지물이에요. 어느 게 환상이냐 하는 문제가 등장해요. 내가 여기 눈으로 보고 있고 살아있는 이것이 환타지일 수 있다. 이게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침입으로, 예수님의 침범으로 또는 성령의 임함으로써 드디어 정리가 되어가는 겁니다.
내가 아는 나는 타인이 알려준 나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족이 나한테 뭐라 했던 그거지, 진짜 나는 주님이 바라보는 관점이 나이다. 내가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나는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동안 나는 윤리도덕으로 자기를 무장했어요.
이걸 대칭성이라 하는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 속에 악마하고 인간이 한통속 되어서 나름대로의 법적인 구조, 자기 선악체제로 이미 굳혔어요. 그런데 이 선악구조의 특징이 뭐냐? 고마움과 감사가 없어요. 이것이 윤리도덕의 특징입니다. 더 완전해야 돼요. 더 완벽해야 되기 때문에 늘 찝찝하고 찜찜하고 모자라고.
내가 완벽에 완벽을 추구한다는 말은 내가 내 속에 남이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허점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들키면 안 되는 점이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무엇으로 작용합니까? 감사와 감격을 없게 만들어요. 고마운 마음을 없게 만들어요. 그저 열심으로 잘난 체하고 자기를 가리는 데에 몰입하고 몰두합니다.
자기 허점을 지하 벙커 속 깊숙이 집어 넣어놓고요. 이거는 이스라엘 미사일 날아와도 안 터지도록 그 안에 마지막 남은 나의 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내가 사수할 만한 최후의 내 자존심, 자존감. 이거는 비밀금고에 딱 집어넣었어요. 비밀번호도 자기만 아는 비밀번호. 비밀번호가 뭐냐? 그게 자기 이름이에요. 오랜만에 불러보는 나의 이름. 평소에는 자기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요. 남들이 불러주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 이름 부른다는 것은 이제 인생 맛 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제가 강남강의 때 부른 노래 있죠. ‘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오기까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변진섭은 그렇게 안 불렀죠. ‘너에게로 또다시(너에게서 너에게로)’ 했는데 개사해서 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 이것은 뭐냐 하면 뽐낼 거 다 날아갔다 이 말입니다. 이제는 학교도 퇴직하고 남은 것은 나 챙기기만 하는 거예요. 비로소 나를 돌아보고 나 챙기는 데에 열중하게 된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정신병자’라 합니다. 그 정신병자가 쓴 유명한 책이 ‘채식주의자’에요. 강박증. 얼마나 강박증이면 자기 몸에서 식물이 피어나겠습니까. 정신분열증 환자들 이야기에요.
인간은 처음 날 때부터 비극이었고 이 율법 있는 세계에 들어오고부터 정신병자가 아니면 살아갈 길이 없어요. 정신병자 아니면. 위선자가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고 이 환타지밖에 없는 세계에서 ‘아니야, 나는 환타지 아니야. 진짜야. 진짜야.’ 이러면서 진짜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제일 아래층 인간 층에서 타인한테 인정받는 재미로 살아온 거예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왜 교회에서 복음이 중요하냐 하면, 교인들 교회 오잖아요. 교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건 솔로 교인들 먼지를 다 털어내는 거예요. 다 털어내면 ‘하나님 믿습니다. 오늘도 경건하게…’ 이러고 오는 사람들 다 털어내는 거예요. 쓰잘데기 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익 보려고 와놓고는 어디 딴소리를… 다 털어내면 남는 것은, 나에게서 나에게로~. 자기 자신만 절대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교회 나온 거예요. 성당에 가는 거고 절에 가는 거예요.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바뀐 적이 없었어요. 바뀐 적이 없습니다. 더욱 더 철저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신명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거예요. 너 심판대상이야. 이미 천사는 안다.
너희들 이미 애굽에서 나올 때 조졌잖아. 그때 피 아니었으면 너도 똑같아. 맏아들 죽었어. 족보 다 끊어졌어. 맏아들 죽인다는 말은 그 뒤에 있는 둘째, 셋째 해봐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족보라는 뜻이에요. 너는 맏아들 죽는 순간, 이건 하나님하고 관계 끊어진 족보에 불과하다. 안동 권씨, 경주 이씨 필요 없이 족보 다 끊어진 거예요. 함평 유씨인가, 류씨인지 모르겠다만 유씨나 류씨나 다 끊어진 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 층인 2층과 인간 층인 3층을 joint되게 해요. 같이 연결시켜버려요. 연결시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데, 여러분 감당해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존재의 뒤편’. 인간은 눈이 있으니 앞만 보고 살잖아요. 앞만 보고 산다고요. 그런데 율법이 joint(연결)된 이상은 일을 누가 벌이는가? 율법이 일을 벌여요. 율법 안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니까 율법은 자신이 이루어야 될 자기의 계획, 프로젝트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융통성 없는 천사들이 율법을 가지고 그냥 밀어붙여요. 이스라엘이든 이방나라든 관계없이 율법이 가는 곳을 누가 막으랴. 막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율법 편에 서면 그들은 이방민족을 이기고, 뭐 이겼다고 까불고 이러면 이제는 이스라엘이 작살나고 그런 거예요. 이게 바로 융통성 없는 율법의 특징이에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언약을 드러내면 되는데 이게 인간인지라 새 언약을 가려버려요. 새 언약, 율법의 완성이 새 언약이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적 요소가 그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새 언약,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새 언약과 반대되고 충돌되는 것은 바로 윤리와 도덕입니다. 새 언약↔윤리와 도덕.
왜 윤리와 도덕을 계속해서 우기냐 하면, 윤리와 도덕은 주인공이 나이고 ‘내가 행했습니다.’에요. 내가 행했습니다. 내가 행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반대로 새 언약은 누가 행했다? 예수님이 다 행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행한 정도가 아니고 ‘다 이루었다’가 돼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에 대해서 윤리도덕은 ‘내가 행했다’가 되어버리면 ‘내가 행했다’가 뭘 가리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려버리죠. 가려버린다고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치워라!” 하죠. 뭐 희뿌옇게 백내장도 아니고… 왜 갑자기 십자가가 나오질 않아요, 지 잘난 체 한다고. 내가 애를 얼마나 잘 키웠고, 내가 얼마나 직장생활하기 힘들었고. 그니깐 좀 놀아도 안 되나, 그렇게. 맨날 하는 이야기가 나 좀 챙겨 달라 그 이야기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이 윤리도덕이 죄거든요. 마귀의 죄. 이 죄 뒤편에 성도한테는 뭐가 있습니까? 새 언약이 있죠.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존재의 뒤편으로 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잘남과 윤리도덕을 누가 부추깁니까? 이건 뭐 100% 악마가 부추겨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악마를 무저갱에서 풀어서 성도로 하여금 유혹케 하십니다. 악마, 도사견 풀어놔야죠. 악마를 풀어서 성도로 하여금 계속 악마의 작업 속에 맞닥뜨리게 만들어요. 그러면 이제 성도라 할지라도 ‘왜? 내가 뭐 잘못됐는데 이렇게 힘듭니까?’ 대표적인 게 몸이 아픈 거예요. 몸이 많이 아프죠. ‘왜 남은 멀쩡한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몸이 아픕니까?’ 뭐 이렇게 나오죠.
윤리도덕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어제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게 국소(局所)적이에요. 영어로 하면 local이에요. 바늘 침이 오직 자기만 겨냥해요. ‘남들은 멀쩡한데 나는 왜 아픕니까? 남들은 그냥 연금 받고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돈에 시달립니까?’ 이런 거. 모든 게 국소적이죠.
국소적인 것, local을 global하게 어떻게 하느냐? global, 이 번역이 상당히 어려워요. 그냥 쉬운 말로 합시다. ‘전체적’으로 보는데 그냥 전체적이 아니고 평균적으로 다루어진 전체라 보면 돼요. 너는 뭘 해도 다 같은 지옥이고 죄야. 이게 뭐냐? 평균적으로 표현하는 전체적인 거예요. 아담의 후손들은 그렇고 그렇지, 별난 거 뭐 있다고.
그런데 너는 전체적인 안목을 모르고 뭐로 자꾸 봐요? ‘저는요? 저는? 왜 저는?’ 영어로 ‘Why me?' 왜 하필이면 저는? 제가 얼마나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산다고 애썼는데 말씀대로 살려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하필이면 저는? 맨날, 저는? 이걸 입에 달고 나와요, 계속해서. 달고 나와요.
기도해도, 아프리카 애들 우물물 깨끗한 물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 애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남의 아프리카 애까지 신경 어떻게 써요? 과테말라 갱단 없어지게 해 달라, 과테말라, 이디오피아 그건 신경도 못써요. 새벽기도에 내 손자새끼, 내 아들, 내 자식새끼 그것만 기도하다가 ‘아이고, 시간 다 됐네. 벌써 두 시간 지났네.’ 빨리 집에 가버리죠.
국소적입니다. 너무나 개인적이죠. 전체를 모르고 남과 차이나고 싶은 거예요. 비교해서 전보다 낫고 싶은 거예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내가 애를 얼마나 잘 가르쳤는데. 이게 바로 ‘자기 의’라 하는 겁니다. 아, 이거… 평소에는 잘 모르는데 마귀가 와서 쑤셔대야 비로소 느껴져요. 마귀가 와서 쑤셔대야.
그래서 어제 제가 그런 얘기했는데 그걸 다시 문장으로 하게 되면, 이방인들의 특징은 자기 수고로 자기 것을 지키는, 그다음에 뭐에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방인들의 특징은 자기 수고로 자기 것을 지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의 수고로 나의 ‘것’을 지키는 거예요. 이게 다 뭐에요? 국소적이죠. local.
내 노력으로 내 것 지키는 것. 그다음에 뭡니까? ‘믿음’이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 믿음가지고 살아요. 그러니까 종교인 아닌 자가 단 한 명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 것 지키는 데에 자기의 몸을 바친 자들이에요. 자기 것 지키면서. 그래서 교회, 성당 다니고 절 다니는 거예요. 딱 마귀가 생산한 자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준 것은, 참 이거 무서운 이야기인데 첫째 시간 마치면서 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뭘 알려줬는가? ‘입구는 알고 출구는 아는데 그 안에 갇혀서 벗어날 길이 없다.’ 무지무지 무서운 거예요. 출구는 알고 입구는 아는데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거예요. 이 땅에.
선악과 따먹고 와서 율법 세계, 이 저주받은 세계, 심판의 세계에 들어와 버렸고, 출구도 율법을 다 지켜야 빠져나가요. 아는데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 없다? ‘없다’에요. 세상에, 율법을 통해서 로마서 7장에 나온 말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벗어날 길이 없네.
구원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이미 구원된 자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음을 감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선택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메시야는 악마였습니다. 드라마에 나오고 시중에 나오고 뉴스에 나오는 모든 예수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기독교 이야기는 전부 다 마귀가 만든 거예요. 마귀가 유포시킨 거예요. 열심히 빌고, 저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면 구원받겠지, 이거 전부다 사깁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안 적이 없었는데 주님께서 오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엉터리 메시야를 그동안 찾고 다닌 거예요. 메시야 힘 빌어 와서 예수를 믿는다는 그 믿음으로 탈출을 시도한 자체가 이게 엉터린 거거든요. 믿는 거도 율법이 되어버렸으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다음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랍니까?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예? 치매 걸리면 대책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진즉에 국소적으로 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면 될 걸가지고 계속 국소적으로 자기만 챙기다가 ‘나는 치매 안 걸린다. 나는 치매 안 걸린다. 안 걸릴 거죠? 나는 치매 걸릴 리가 없다.’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벌써 걸렸네?’
주님은 우리가 뭐라 해도 그걸 탓하지 않습니다. 이미 갇혀있기 때문에. 빼내주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율법의 완성으로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찾아오는 것이지, 우리가 발광하면서 노력한다고 못 빠져 나옵니다.
바로 신약의 성도들, 성령 받은 사도들이 비로소 구약 해석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출구 알고 입구 다 알았는데. 왜? 창세기 아니까. 빠져나갈 곳은 우리는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합당한 조치다.’ 이렇게 본 겁니다. 10분 쉽시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온의 조건 (2) | 2024.11.26 |
---|---|
십자가-율법의 병렬성 (2) | 2024.10.30 |
십자가-십자가의 반복 (2) | 2024.10.01 |
모순된 자리 (7) | 2024.10.01 |
십자가-부활의 능력 (13) | 2024.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