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2강) 고후3:6(율법의 병렬성) 20241028b(강의: 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p.130 합니다. 첫째 시간에 계속 이어서 말씀드리면, 율법 안은 안전치 않다. 율법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아요.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할 뿐이지, 우리를 지켜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를 죽이고 시작하기 때문에 죽은 자로 간주해서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1장에 나오는 그 보좌가 원래 성전이 있던 자리인데 거기서 철거한다 했죠, 아까. 철수해요. 비행접시 UFO가 왔다가 떠나는 거예요. 떠나면서 그 밑둥치로부터 불 심판이 내려오는 겁니다. 불 심판이. 그러니까 이 세상이 불 심판 받는 이유가 ‘옛날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있었던 성전이 있었잖아. 그런데 너희들은 그 성전을 모독했잖아.’라는 차원에서 불 심판이 일어나요.
그런데 그 에스겔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것이 ‘옛날에 내가 하나님 아들을 보냈잖아.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 아들을 죽였잖아.’ 그래서 예수님이 있는 임마누엘,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니까 그 아래쪽에서 유황불이 쏟아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함은 단촐해요. 단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그냥 불 심판이에요. 깔끔하죠. 깔끔하단 말이죠.
이스라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월절의 양 피 발랐잖아요. 그래서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그건 짐승의 피잖아. 너희 짐승의 피 발랐어. 그런데 짐승의 피가 유효기간이 있어요. 그 짐승, 어린 양을 바친다는 율법의 기한이 지나면 그게 사람이 되어버려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어버리면 어제 낮 설교 제일 끝부분에 이야기했어요. 양들이나 소를 제사지내면 매일같이 쓰레기가 처리되어 진 밖으로 나오죠. 이제는 누구 차례냐 하면 제사장 차례에요. 제물이 와서 태우고 쓰레기 남기는 것처럼 이제는 인간들 제사장이 쓰레기 되어가지고 진 밖으로 다 나오는 겁니다. 반복해서.
그러면 결국 이렇게 이야기해보면 남는 건 율법의 구조만 남아요. 율법의 체계만 남아요. 율법의 심판 구조 그것만 덜렁 남아요, 이 세상은. 이 세상 뼈대는 그게 전부에요. 그것만이 환타지가 아니고 그것만이 실제입니다. 율법. 말씀. 말씀만이 실제에요.
그것이 바로 p.130에 안식일로 나옵니다. p.130에 밑에서 7째줄 보면, [갈라디아서에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4장 10-11절 말씀이죠. 이게 상당히 어려운 말씀인 것이 이제 이해되시죠?
왜 어려운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데 이거 지키라고 누가 얘기했습니까?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누가 이야기하신 거죠? 하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이야기해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단 말이죠.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제 와서 왜 시키는 대로 하느냐, 이렇게 되니까 이건 뭐 어쩌라고? 시키는 대로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고. 어쩌라고요.
그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십계명이에요. 십계명 줄 때 하나님께서 신신당부했다고요. 십계명 안 지키면 네가 3,4대까지 저주 받는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 안 받으려고 십계명 지켰잖아요. 십계명 지켰는데 로마서 13장에 보면 그 십계명을 이제는 지킬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사랑하면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그 십계명은 사랑 안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뭡니까? 제일이라 하는데 원천이 뭐에요? 원천이 그거다 이 말이죠. ‘소망 안에 사랑 들었냐? 믿음 안에 사랑 들었냐?’를 묻는 거예요. 소망이 그냥 소망으로 오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사랑을 품은 소망이고, 믿음은 사랑에서 나온 믿음. 사랑으로 다시 이끌림 당하는 믿음. 사랑으로 이끌려가는 믿음.
‘나 믿었다’ 국소적으로 나한테 오는 믿음 아니고, 나를 붕괴시키고 나를 무산시키고 나를 해체시키고 내 생각 없이 사랑에게만 가는 그 사랑이 선물로 온 은사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5). 아, 그 대목 보게 되면 참… 교회에서 기도하는 내용하고 한번 비교해보세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저한테 많이 물었던 질문 있잖아요. ‘목사님, 저한테 기도하지 말란 말입니까?’ 그동안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티를 확 내버렸어요. ‘날 위해서 기도하지 말란 말은 그럼 기도하지 말라는 소리랑 똑같은 소리인데, 그럼 기도할 게 없는데 기도하지 말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방인들의 기도였던 거예요. 기도라는 수고가 자기 것을 지키는 식의 기도를 해온 거예요. 자기를 무너뜨리는 데에서 오는 기도가 아니고, 자기가 붕괴되는 데서 오는 기도가 아니고. 그런 기도를 해야 되는데….
만약에 이런 약이 있다 칩시다. 어떤 약을 먹었는데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그런데 한꺼번에 투명인간 되는 게 아니고 서서히 몇 분에 걸쳐서 투명인간이 된다면 그 약 먹고 뭘 확인하겠습니까? 없어진다, 없어진다, 없어진다,…드디어 내가 없어진다. 이렇게 되겠죠.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빠져들면 자연적으로 자기가 없어져요. 자연적으로 없어진다고요. 자기가 없으면 누가 나타납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성.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강하게 더 진하게 느끼겠죠. 진하게. 그것이 에스겔 40장에서 47장까지 쭉 나오는 새 성전의 특징이에요.
새 성전의 특징은, 치수는 재나 옷은 없는 것 같다. 전에 송민선 집사님 글에 나와 있어요. 2년 전 수련회 소감문에 이게 나와 있어요. 그때 에스겔 했던 모양이에요. 새 성전에서 천사가 야무지게 치수는 재요. 치수는 재는데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 성전은 그냥 물만 나와요. 생명의 물만 나오고 없어요. 내가 없어졌어요. 나는 없고, 나라는 이 껍질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만 나와요. 성령의 역사.
제가 이야기하면 또 여러분들은 ‘목사님, 그걸 말씀으로 받는 건 아는데 저는 전혀 그런 생활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또 지켜야 되나 율법적으로 막 느껴지는데 어쩌면 좋아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성령께서 올 때… ‘십자가를 아십니까’ 중에서 ‘시간’이거든요. 시간적으로 그 유한한 시간을 째듯이 찢어버리듯이 무한이 유한 시간을 찢어버려서 오는 겁니다.
여기 종이가 있잖아요. 우리 시간은 이렇게 면을 갖고 있어요. 지속적인 면을 갖고 있는데 만약에 이걸 찢어버리면 우리가 느끼는 것은 찢어짐과 찢어짐 사이의 얄팍한 면을 느끼지만, 수평적인 종이 면을 수직적으로 찢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걸 힘이라 해요, 힘. F=ma. 힘=질량×가속도.
보이지 않는 힘이 질량이 있는 물체의 형태를 변형시키는데 천천히 찢으면 이렇게 되고요. 가속도를 가하면 확 찢어져요. 가속도가 더 세죠. 그러면 순간적으로 찢깁니다. 손가락도 갑자기 베일 수 있고요. 이게 힘이 작용해서 그래요, 힘이.
그래서 우리가 서서히 무너지는 게 아니고, 순간적으로 말씀이 오게 되어서 찢기면 언제든지 찢길 수 있는 대상으로 우리를 전환시켜 버리죠. ‘말씀을 위해서 좀 찢겨다오.’ 이런 식이에요. 말씀의 현재성을 위해서 주님의 현재 살아있음을 위해서 너 좀 내가 찢어줄게. 그게 바로 십자가의 위력(威力, 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힘), 힘이에요, 힘.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힘을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 달리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신약 성도는 뭡니까? 신약성도는 이런 거예요. 어떤 분이 부활하셔서… 내가 만약에 철저한 무신론자, 불신자라면, 불신자인데 어떤 복음을 들었다 칩시다. 내가 그 사람한테 반박을 해보는 거예요. “그래, 당신 말에 의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소위 부활했다는 어떤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자기의 성과를 다 이루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여기 눈에 보이는 있음을 아주 개무시 해버리고 일방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찢어버리고 우리의 미래 계획, 우리의 시간 있잖아요, 평면적 시간, 시간을 무산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이 순간에도 무한한 이미 다 이루어진 하늘나라의 그 체험을 느끼게 한다 이 말이지? 당신 말은 그 말이지?”라고 제가 되물을 거예요.
그러면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렇게 할 거예요. “당신은 지금 힘 차원에서만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세계에서 도저히 생각도 못한 사랑입니다. 당신이 무거운 짐을 갖고 있으니까 그걸 가볍게 찢어주고 해체시키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고 주님의 사랑을 가리지 않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럼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여기서 인간에 대한 이 유한한… 벌써 석 장 째 해봅시다. 종이에 ‘시간 면(面)’이라고 썼어요. 보통 시간은 직렬이에요. 시간은 직렬이죠. 율법은 직렬이 아니고 병렬입니다. 직렬 아니고 병렬이라 하는 것은, 직선이 아니고 면을 갖고 있어서 직선, 곡선 여러 가지로 이 세상 모든 변화가 율법에서 주어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법을 상대할 때는 윤리도덕법, 또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법칙을 적용할 때는 국소적으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어떤 단선된 법칙만 내가 이거 지킬까, 말까, 지킬까, 말까 해요. ‘나는 시간 어기는 것은 되게 싫어해.’ 이런 거 있잖아요. 되게 싫어해 이런 거. 이게 굉장히 단선적이고 단선적이다 보니까 병렬적인 것은 다 놓치죠. 다 놓치는 거예요.
‘나는 내 할 일 최선을 다했다. 뭐? 어째서?’ 이런 식이에요. 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다른 요소들이 날아간다는 것은 무시하고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책임지나?’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법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놓고 ‘나는 의롭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런 식으로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하나를 지키려고 할 때 그걸 못 지키기 때문에 전체 율법을 볼 때는 전혀 안 지킨 게 돼요. 다른 법을 다치게 하는 식으로 인간이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은 면(面)으로 되어 있다. 이 면, 이게 유한이거든요. 면으로 되어 있는 유한의 시간에 무한의 시간이 하나의 날카로운 눈에 보이지 않는 선으로 쫙 와서, 오기만 하면 안 되잖아요, 와서 이 유한한 시간 면을 찢어버리고 그 순간 무효화시켜버리죠. 그리고 묻습니다. ‘너는 지금 어느 영역에 속했느냐?’ 하고 묻습니다. ‘너는 어느 영역에 속했느냐? 시간에 속하느냐, 아니면 시간을 벗어난 영역에 속하느냐?’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들었던 사람이 따지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따짐은 기존의 직선으로 직렬로 가는 시간 속에 있으면서 그게 옳다고 복음을 따지는 거예요. 뭐 복음이 앞뒤가 안 맞느니, 그건 귀신, 유령이냐 그렇게 하는데 실제로 이 세상에 보면 사랑을 할 때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우리 자신이 유령이 되는 순간들이 와요. 그래서 제가 준비한 게 있어요. ‘춘향전 사랑가’ 중에서 일부를 제가 복사해왔어요.
춘향전 사랑가 中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또)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지
이이이이, 내 사랑이로다
아마도 내 사랑아
그다음에 재밌는 게, 이 세상 사랑은요. 사랑하는 자에게 한 세 가지를 그 사람에게 베풀어주려 합니다. 첫째는 먹는 거. 둘째, 입는 거. 셋째, 노는 거. 같이 먹고 같이 입고 같이 놀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떠날 줄을 몰라. 제일 먼저 묻는 게 뭐냐?
네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이렇게 나와요.)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 떼뜨리고,
강릉 백청을 따르르르 부어,
씨는 발라 버리고,
붉은 점 움푹 떠 반간진수로 먹으랴느냐?
(무슨 말인지 몰라, 하여튼.)
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
그러면 무엇을 먹으랴느냐?
앵도를 주랴? 포도를 주랴?
귤병, 사탕, 혜화당을 주랴? (대전에 무슨 빵입니까? 성심당. 성심당 빵을 주랴?)
…
그다음 입는 거.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그다음 또 뭘 보느냐 하면)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자기가 뭐 치과 의사도 아니고…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그러니까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속속들이 알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출발이 됩니다. 그다음부터 상대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고 싶어요.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그다음 나오는 게 노는 거예요.
이애 춘향아 나도 너를 업었으니
너도 날 좀 업어 다오
(이렇게 하니까 춘향이가 딱 계산해보죠. 운동량은 아까 질량과 관계되어 있는데 무게가 많이 나가거든요.)
도련님은 나를 가벼워서 업었지만
난 도련님이 무거워서 어찌 업는단 말이요
갑자기 이 시간이 국악 하는 시간 같아요. ‘정년이’ 드라마 하는 거 같아요. 요새 여성 국악하는 내용의 드라마에요. 이 도령이 ‘그게 아니고’ 하면서 말을 또 바꿔요, 비겁하게. 업어달라고 했는데 거부하니까 사랑 놓칠까싶어서. ‘그게 아니고 내 팔만 네 어깨에 걸쳐서 유사 업은 모양으로 그냥 네가 앞에 가면 내가 달랑달랑 뛰어다닐게.’ 이렇게 했어요.
그러기에 내가 널 다려
날 무겁게 업어 달라더냐
내 양 팔만 네 어깨 위에
얹어놓고 징검징검
걸어다니다 보면
그 속에 좋은 뜻이
다 들어 있느니라
(그러니까 자기도 같이 유치하게 놀아주는 거예요.)
둥둥둥 내 낭군 오호 둥둥 내 낭군
도련님을 업고 보니
좋을 호 자가 절로 나
여자에게서 이런 말 들을 때 이 도령이 뭘 느끼겠어요? 작업 걸렸어, 이제! 이제 끝났어, 끝났어, 끝났어. 바로 이게 사랑가인데, 보세요. 지금 이 도령이 춘향이한테 사랑을 느끼면서 뭐가 됩니까? 마음을 보통 낮춘다 하잖아요. 마음이 푹 꺼졌죠. 푹 꺼지면 자아로 가득 차있던 이 마음이, 내 것으로 가득 차있던 여기가 푹 꺼져서 자기 것은 바닥으로 물러나고 빈(empty) 공간이 생기겠죠. 이 빈 공간은 뭐로 채우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로 가득 채우겠죠. 이게 인간의 사랑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한 거예요. 무엇 때문에? 대칭성 때문에. 대칭성(symmetry).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의 사랑과 대칭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제부터 그걸 설명해드리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우선 시간상 ‘순간’이 되어야 돼요. 순간이 얼마나 짧냐 묻지 마세요. 묻는 자체가 여전히 직렬적 시간관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순간이 몇 초인데요? 0.몇 초인데요?’ 이렇게 물으면 안돼요. 순간이 한 달일 수가 있고 두 달일 수가 있어요. 성령 받은 상태가 3년 갈수도 있어요. 물론 그런 사람 별로 없지만. 늘 성령께서 와줘야 되니까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늘 성령이 함께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은 함께 계신데 성령의 활동을 느끼는 것은 말씀 전할 때, 그때 어떤 일을 할 때, 그때 더욱 더 충만과 강함을 느끼는 겁니다. 줬다 뺐다 하는 거예요. 왜? 인간의 육신 자체가 이렇게 늘 주님의 충만을 유지할 수 있는 육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인간은 어떤 육신인가? 수직선상에서 원점을 기준으로 위쪽은 플러스(+)영역이에요. 자아의 의식. 자아가 의식되면 자연적으로 자기 의, 자기 명예, 체면, 자존심, 자존감 다 살아나요. 왜냐하면 의식은 기억이기 때문이에요. 의식은 기억하거든요. 내 자아에 들어있는 기억창고에서 지금 순간순간 빼먹을 걸 빼먹는 게 의식인 겁니다.
자아라는 것은 기억의 창고에요. 기억의 창고인데 인간은 환경 속에서 적응하잖아요. 적응할 때 어떻게 적응하느냐 하면 기억의 창고에서 빼내어 벌어진 환경에 적응을 하는 거예요.
군인이 이런 경우가 많아요. 지금은 그런 게 없지만, 제가 74년도에 군에 갔거든요. 옛날에는 병장이 후배 때리려 하니까 때리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요. 힘드니까 밑에 상병보고 대신 때리라 했을 때 상병은 밑에 사람을 때리기 싫어요. 그런데 병장이 자기보고 자기 대신 때리라 할 때 과연 내가 대신 맞느냐, 안 때리고 맞느냐, 아니면 내가 덜 맞고 약간 살살 때리고 이 일을 마무리 지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야 돼요. 제가 군에 갔을 때는 병장들이 매일 술 먹고 왔으니까 매일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군대 생활이라 하는 게 그만큼 트라우마가 깊은 겁니다. 거의 매일 술 먹었어요. 참 그거 진짜 나쁘죠.
그런데 여기 한번 보세요. 환경이 뭐냐 하면 ‘때려라’가 환경이에요. 때려라. 환경인데 기억의 창고에서 때리라는 말은 뭔 뜻인지 알죠. 몽둥이를 들고 힘을 가해서 상대방 피부에 가까이 댄다, 이거 다 알아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작용합니까? 기억의 창고에 의가 있죠. 윤리도덕이 지시와 결합해서 나한테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면 때리는 것은 나쁜 짓이죠. 나쁜 짓인데 그걸 하라고 압력이 가해졌을 때, 여기(기억의 창고로부터) 중간에 때리라는 힘이 주어졌고 나는 때려야 되는 마중을 나올 때, 힘을 분산시키는 목적으로 이 방향(때리라는 지시에 따라 때리는 방향)보다 약간은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지시받은) 힘과 이(지시를 따르는) 힘이 만나는 중간쯤 순간적으로 자기를 변호할 법칙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윤리도덕은 선악법칙에 근거한 거예요. 선악법칙에. 나중에 뭐라 하면 핑계 댈 게 있으니까. 벙커 안에 있는 자기 의가 덜 다치잖아요. 나의 의가 없으면 인간은 사는 존재의 이유가 없어요. 그거 다치면 자살해요.
그 잘남. 나의 마지막 최후를 놓지 않는 그 잘남, 그거 다치면 치명적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한 이유가 그거 때문에 그렇죠. 잘난 맛에 꾸역꾸역 힘들지만 세상 살아가는 거예요. 중간 벡터에다가 법칙을 만들어낸다고요. 이걸 의식해요. 의식을 하면서 그 순간 자기를 챙기면서 사람은 세상 환경에 적응해가는 겁니다. 모든 게 다 그래요.
그런데 구약에서 안식일 지킨다는 것은 제사 지내는 날입니다. 요즘 안식일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정기적으로 특별히 큰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평소에 제사지내지만. 제사지낼 때 제사장들이 제사지내잖아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제사를 시행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제사장들이 율법대로 시행하면서 자기 기억의 창고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율법을 마중나가는, 맞이하는 자기 법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죠. 자기 법이 있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제사장이 죽어나가는 거예요.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메두사라는 신화 압니까? 메두사 알아요? 로마 그리스 신화에 메두사가 있는데,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전부 다 실뱀이에요. 움직일 때마다 머리통 위에서 실뱀이 아주 춤을 춥니다. 살아있는 실뱀이 춤을 춰요. 얼마나 모습이 흉측하겠어요? 그래서 이 메두사한테 걸리면 사람이 죽는데, 절대로 메두사와 시선을 마주치면 안돼요. 시선을.
메두사의 머리에 있는 천 개, 만 개의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실뱀인데 그 실뱀 하나하나가 독소를 품고 있어요. 독소를 품고 있다는 말은 그 하나하나가 병렬로 된 율법을 몸에 걸치고 있다는 거예요. 몸에 칭칭 감고 있다는 거예요, 율법을.
그러니까 율법이 제사만 지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제사지내는 당사자가 다른 율법을 위반해버리면 위반자가 돼버려요. 이게 촘촘히 textile, 직물로 짜여진 병렬적 율법이기 때문에 지금 이런 일에 종사해도 다른 일에 대해서 이번 일 종사한 만큼의 정력이 없어버리면 이건 위반자가 되어버려요.
위반하면 율법에서 뭐가 나옵니까? 율법을 어기면 뭐가 나와요? 독소가 나와요. 저주. 저주가 나오죠. 그러니까 지금 이 꼬라지가 저주받은 꼬라지에요. 빨리 제대해야 돼요, 빨리. 고참이 때리기 전에 빨리 제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제대할 때 그냥 멀쩡히 제대하면 안 되고 내 몸이 ‘다 이루었다’에 의해서 해체된 상태로 제대가 되어야 되죠.
그래서 무한은 뭐냐? 일단 우리를 죽었다 치고 주님의 사랑이 퍼부어지는데, 그런데 자꾸 마귀가 와서 주님은 죽었다 쳤는데 우리는 내가 멀쩡하게 산 걸로 행세하고 싶어 환장한 거예요. 왜? 나의 잘남과 나의 자존심과 남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나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야, 뭐 이런 거. 자꾸 자기 법을 내세우니까 십자가가 가리워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님이 바빠요. 조지려고. 이게 율법으로 저주를 받아봐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말을 해봐야 정신 차리나? 해서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율법을 가지고 계속 우리를 지적하는 겁니다. 이 쓰레기 같은 주제에 뭐 내세울 게 있다고 지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뿐이에요. 또 우리는 시간 면속에서, 다음에 잘할게요. 무슨 순간에 다음이 있습니까? 순간이 한 달, 두 달 가면 좋겠는데 이게 안 된다고요.
메두사는 시선을 마주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 제사장들은 제사하는 장소가 무서운 거예요. 들어가기가 무서운 겁니다. 너무 무서워서 어떤 때는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또 술 먹었다고 술 먹고 취해서 엉뚱한 짓하다 죽은 사람 있어요.
레위기 10장 보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요. 10장 1절에서 2절까지 읽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이 대목입니다.
자, 질문 들어갑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간음했습니까? 아니죠. 그럼 살인했습니까? 아니죠. 십계명 중에 도적질했습니까? 아니죠. 거짓 증거? 안했죠. 십계명 중에서, 지금 제사까지 하니까 하나님만 섬겼지, 다른 바알 섬기지 않았죠. 십계명 다 지켰잖아요. 내가 나답이나 아비후라면 직렬적, 직선적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법은 위반했어요, 위반 안했어요? 위반 안했죠.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 그냥 죽었죠. 그냥 죽었어요, 죄지어서 죽었어요? 죄지어서 죽었죠. 이게 뭡니까? 직렬 말고 몰랐던 병렬의 죄를 위반한 걸로 됐죠. 내가 지킬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법 지킨다고 열중했는데 주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죽여 버렸죠. 죽여 버린 거예요.
죽은 이유가 나중에 나와요. 술 먹지 말라는 거예요.(레 10:9) 술 먹고 헤롱헤롱 해서 불이라 하는 것은 에너지만 있으면 되지, 어느 불 출신인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제단 불부터 시작해서… 그 전에는 제단 불 지켰어요, 안 지켰어요? 지켰죠. 하필이면 죽을 타이밍에 딴 불을… 딱 그때만 안 지킨 거예요. 하여튼 천사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진즉에 죽어야 될 걸, 그동안 너한테 직책을 맡겼다는 거예요. 직책이 살아야지, 네가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직책이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내 속의 주의 일이 지금 내가 하는 사적인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주의 뜻은.
그러니까 안식일 자체가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안식일을 직접 마주치면 우리는 죽어버립니다. 독소가 나와서. 우리는 주님의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어요. 여기서 두 군데를 찾아봐야 돼요. 우리가 참 너무 쉽게 살아가요, 정말. 대충 살아가고 남 사니까 나도 따라 적당하면 살았다고 되는 줄 아는데요. 고린도후서 3장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보면 6절,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세상에, 의문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이유는 너 꼬챙이로 죽여버린다고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 하나하나 전부 다 하나님의 시선이요, 눈동자입니다.
죽인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돼요? 율법의 꼬챙이에 꽂혀서? 죽으면 돼요. 간단하죠. 꼬챙이로 오뎅 꼬치할 때 우리는 오뎅하면 되거든요. 어묵하면 된단 말이죠. 율법에 꽂혀서 무슨 말하면 됩니까? ‘율법에 꽂혔더니만, 나는 죽었다.’ 이 소리를 왜 못합니까?
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율법의 직책이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니까 우리는 피조물로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쓰여지면 그거보다 더 큰 영광은 없잖아요. 그런데 꼬챙이 가지고 꽂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래서 망했고 오늘날 우리도 망해야 되는데, 주님께서 말씀을 율법에 꽂아서 주는 말씀도 있지만 신약세계는 뭡니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꽂아주는 게 있다고요.
성령에 의해서 꽂아주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아, 성령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자유함이 있다. 기지개를 켜도 괜찮다 이 말이죠. 자유다 이 말입니다. 자유다.
그런데 그 자유가 혼자 자유가 아니고 예수님 계신 곳에 가는 것을 자유라 해요. 주님은 죽으셨잖아요. 우리같이 죽었어요. 우리같이. 인간이 죽는 마당에 누가 와서 합류해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다인 줄 알았어요. 어제 욥기 14장 14절처럼(“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욥도 죽으면 끝이라 했죠.
그런데 끝이 아니었어요. 욥은 몰랐어요.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성도는 죽었다가 예수님이 사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살아야 될 그런 대상으로 성도가 간택된 겁니다. 뽑힌 거예요. 나보다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기능이 나를 뽑히게 한 거예요.
오늘 두 번째 강의 제목을 ‘오뎅’으로 할까. 성령이 와서 꽂아버리니까 분명히 죽었는데 얼굴 싹 내미니까 ‘안녕하십니까? 여기서부터 천국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에 얼굴을 내밀 게 된 거예요. 성령에 꽂혀서. 자유함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는 것이 율법을 배제했습니까, 배제 안 했습니까? 배제 안했죠. 율법을 복음적 차원에서 해석해서 복음의 요소로서 율법을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려면 율법도 같이 다 이루었다의 차원에서 반복이 되어야 우리는 날마다 죽은 자로 확인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레위기 10장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한 군데 더 찾아보는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9장 26-27절. 고린도전서 10장 22절에는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묻죠.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 말이죠. 고린도전서 9장 26절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까 이성적이고 지성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복음을 처음 들었다 칩시다. ‘나한테 복음 이야기해봐. 내가 자세히 들어보고 믿을만하면 믿을게.’ 이런 자세로서 ‘이야기해봐’ 할 때 결국 다 듣고 난 뒤에,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이렇게 있는데, 당신은 허깨비 유령 같은 분이 계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분이 계셔서 지금 당신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중점적으로 누구하고 상대한단 말인가? 당신 이론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주님하고 상대하면서 인생을 마감하고 인생을 끝내려고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비난할 거예요, 비난 안할 거예요? 비난하죠.
왜 유령하고 상대하냐 할 때, 그 비난을 누가 들었냐 하면 사도 바울이 들었겠어요, 안 들었겠어요? 사도 바울이 들은 거예요. 듣고 난 뒤에 9장 26절에 뭐라고 합니까? 내가 달음박질하고 내가 싸우는 것도 향방 없이, 방향이 없이 아무데나 휘두르며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너한테는 내가 지금 미쳐 보이지만, 너희들은 기껏해야 같이 썩어가고 있는 인간들 상대하는 것 외에 뭐가 있느냐? 인간들 상대하면서 울고 웃고 화나고 짜증나고 성질내고. 평생 인간들 상대하고 싸웠잖아요. 인간들 상대하고.
김수미라는 사람, 탤런트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지, 김수미는?’ ‘지금 천사하고 의논하고 예수님과 의논해서 김치장사 했다.’ 뭐 그런 이야기합니까? 김치장사 누구하고 한 거예요? 홈쇼핑은 누구하고 했어요? 사람들 상대하고 했죠. 물론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남이기 때문에 평하지 못하지만, 불신자들이 볼 때에 연기하고 하는 것이 사람을 상대로 해서 했다 할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일 없겠지만 만약에 죽기 전에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 의해서 ‘너희들 내가 전원일기에 나오는 최불암하고 상대했는 줄 아나? 연기자들 상대한 줄 알아? 아니야.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분과 주고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고백을 한다면?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가 남의 인생에 대해서 주제넘게 개입할 입장은 안 되지만 그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남이 뭐라 하든 어떻게 평가하든 우리는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 근거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주님이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처럼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말은 구원을 안 받았다, 가 아니라 나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평가하느냐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늘 주님과 함께 사귀고 있다는 뜻이에요.
너희들 보기에 방향 없이 보이지? 너희들 보기에 유령 같이 보이지? 나한테는 유일한 현실이다. 주님 살아계심이. 주님, 저 뭐할까요? 주님 지시를 받는 대상이다, 자기가. 주님 지시받는 대상.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 갈 때 홀로 그 험한 바다도 거침없이 갔잖아요.
정말 사도 바울이 결혼 안 했기에 망정이지. 사도 바울 결혼 안했죠? 만약에 애 있었다 하면 ‘너는 너 할 것만 챙기고 마누라는 뒷전이고 아무것도 모르지?’ 하고 난리도 아닐 거예요. 애는 ‘아빠~’ 붙들고 ‘아빠, 가면 안돼.’ 난리도 아닐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래요. ‘사도 바울은 결혼도 안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그건 믿지 마라. 결혼도 안 했는데 뭘 아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주님하고 상대하는데 자꾸 사람하고 상대해서 나오는 결과를 가지고 평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p.130, 131에 계속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특정한 날, 아까 갈라디아서 3장, 주께서 시킨 특정한 날이라도 인간의 한계가 뭐냐? 율법이 오게 되면 율법에 맞추어서 율법 지켜보려고 자기 나름대로의 법 법칙을 만들어요. 자기가 그다지 죄인 아닌 것을 감안해서 자기 기억 속에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법칙을 따로 만들어서 율법 앞에 마중을 나오고 주의 말씀에 마중을 나가요.
‘안식일 이렇게 지키면 되죠? 십일조 이렇게 드리면 되죠? 주를 섬길 때 이렇게 섬기면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저 탓하지 마세요. 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자기가 무너져야 되는데 자기를 잊어버려야 되는데 끝까지 자기 사랑을 고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상황대로 조정해서 기어이 자기 사랑을 못하게 만들어요.
자기 집착과 자기에 대한 연민. 자기연민은 이거는 진짜 병이에요. 고질적인 자기 병이에요. 자기연민. 모든 인간이 육신 있는 한 죽을 때까지 연민 나옵니다. 자기연민을 짜면 뭐가 나와요? 눈물이 나오죠. 흑, 나는? 나의 가치는? 뭐 이러고 있다고요. 주께서 말씀을 줄 때는 율법 있죠, 율법. 오뎅 꽂고 오뎅 다음에 성령 꽂고 할 때는, 이게 부숴버릴라. 우지직 우지직 하면서 부숴지니까 뭐가 나와요? 눈물 나오죠. 눈물 나오고 그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감사 또는 감격이 나오죠. 한번 울어야 돼요. 울어야 돼요. 울고 감사 나오고 내일되면 또 울고 또 감사 나오고 모레 되면 또 울고 또 나오고. 이러한 되풀이.
이러한 되풀이를 구약 안식일에는 일주일마다 했잖아요. 요새는 매 순간마다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 뭡니까? 제사가지고 인간을 율법으로 조지고 어린 양의 피로 안식일의 양으로 다시 사랑을 주고. 때리고 사랑주고 때리고 사랑주는 것이 매 순간마다 말씀을 통해서 반복되니까 굳이 내 쪽에서 지킬 주의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고 안식일은 없습니다. ‘십자가와 주일성수’라는 내용이 그 이야기에요.
뒤에 보면 다 지금 그 이야기 쭉 해놓은 거예요. 계속 넘어가봅시다. 다 앞에서 한 이야기고요. p.135 밑에서 4번째 줄에, [막상 하나님과 만나고 나면, 역사에 대한 중요성보다 지금 영원한 실체와 접합하게 된 사실에 더 치중하게 된다.] 영원한 실체와 접합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내가 더 살 건덕지가 없다는 걸 깨닫고 지금 주님과 함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내일 할 계획, 모레 할 계획, 한달 뒤에 할 계획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감사가 되고 기뻐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2번째 줄에 [지나온 것을 현실에 맞게 각색하고 해석하지만 문제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만사가 직렬적이 아니고 병렬적이기 때문에. 내가 모르고 지나간 거, 벌어져도 내가 인지하지 못한 것들이 나의 인생 변수로 나에게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뭐 몇 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만 지켜놓고 ‘나는 지켰다. 나는 착하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다른 것은 다 위반해놓고.
그래서 인간의 계획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의 문제점은 뭐냐?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기쁨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냥 야무짐만 나오죠. 일본말로, 요시! 야무지게. ‘걱정하지 마라, 엄마가 다 키워줄게.’ 이런 거 있잖아요. ‘엄마 믿지?’ 이런 거. ‘아빠 믿지?’ 이런 거. 야무지게. 뭐 집사님도 그런 거 있어요? 내가 애 키워줄게, 이런 거. (없어요.) 없는 줄 알고 물어봤어요. 나도 나 살기 바쁜데 뭐.
미래 계획 같은 것은 나조차도 지금 무너질 판인데 오뎅이 꽂힐 판인데 자기 주제파악을 하면 뭐 남을 도와줘. 그동안 자식 살아온 것은 주께서 키웠지, 내가 키운 게 아니에요. 나는 봉사했을 뿐이죠. 시키는 대로 봉사했을 뿐이지, 내가 키운 게 아닙니다.
p.137 봅시다. 다 한 이야기라서 그냥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p.137 중간에 [그런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모든 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켜 자기 안에] 무슨 세계? [신세계를 건설하고 그 세계관으로 외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 영향이란 끊임없이 외부 세계와 접촉해서 자기 내부의 본능을 만족시키려 하는 데서 발생된다.]
[그러면 이러한 충동은 어디서 왔는가? 이는 필시 인간이 인간이기 전에 인간 이외의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러한 충동은 외부 세계(주님 세계)와 끊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끊어진 것을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성령으로 늘 이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보기에는 미쳤다고 네가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 하냐고 네가 하는 행동이 왜 방향 없냐고 놀림을 받는 그 놀림이 우리 성도한테는 무한한 영광인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소리 듣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세상의 평가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끝으로 나 자신으로부터도 나 자신을 놔줄 수 있는 자유 속에 있음을 주님을 증거하면서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종말의 연속 (1) | 2024.11.26 |
---|---|
시온의 조건 (2) | 2024.11.26 |
중간층 (3) | 2024.10.30 |
십자가-십자가의 반복 (2) | 2024.10.01 |
모순된 자리 (7) | 202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