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7강) 신명기12:5(시온의 조건) 20241125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12장 14절부터 하겠습니다.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찌니라” 그렇게 시작됐죠.
초반부터 좀 어렵게 시작하겠습니다.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택한 장소를 하나님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면 인간들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장소를 택했다 하면 ‘그 장소를 택했다’는 사실을 조건으로 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구성됩니다.
어떤 특정 장소를 정했다. 그러면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특정 장소를 고집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특정 장소를.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특정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면 특정 장소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는데, 특정 장소가 ‘없습니다’에서 나중에 ‘있습니다’로 되어 있죠. 없습니다→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이 개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는 특정 장소가 아예 없어요. 인간세계에는 특정 장소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 편리한 대로 살기 때문에 자기가 정해요. 자기가 정하는데, 인간이 자기가 정하는 인생을 완전히 박살내시고 일방적으로 ‘이 자리를 내가 지정할 거야.’ 하면, 네가 정한 모든 네 인생을 위한 자리는 삭제당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문장으로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을 삭제시킨다.’ 여러분의 삶이 늘 이렇죠. 이 일의 반복이죠.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일이에요. 우리는 내 일을 하기 위해서 아침에 눈을 뜹니다. 그런데 내 일을 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일은 어디 있느냐?
‘내 일을 나중에 뭐 하나님 일이라고 쳐주자.’ 아, 안돼요. 그건 안돼요. 그거는 반칙이에요. 자기가 정해놓고 ‘내 일인데 이거는 뭐 하나님 은혜로 주신 일이고…’ 뒤에 뭐 이상하게 복음적인 내용으로 변조를 시켜봤자 하나님이 간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을 삭제시켜나가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내세우는 조건을 자기만의 세계라고 자꾸 뭉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이 정해놓은 하나님 일의 일부에요. 일의 일부. 따라서 걸리적거리죠, 내 생각과 내 일이. 무엇에 방해가 돼요? 전체적인, 주님이 내민 조건에 이게 자꾸 걸리적거린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뭐냐? 내 생각을 제거하는 거죠. 지워버리는 겁니다. 내 생각을 삭제시키는 거예요. 삭제시키면 나의 일이 무슨 일로 드러납니까? 주의 일로 드러나요. 나의 일이 주의 일로 드러납니다.
삭제하는 방법은 이래요. “그거 왜 하는데?” “뭐 잘해가지고 뭐 영광을 돌리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건 다 네가 거짓말하는 거고.
㉮그걸 왜 하는데? 목적이 있나?” “목적이…
㉯나 좋으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나는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개입할 거야.”
삭제시키고 네가 하는 일을 하나님 일로 바꿔버리면 성사(成事), 그 일이 이루어졌다, 안 이루어졌다는 모든 결말과 영광은 누구한테 돌아가요? 주님께 돌아가는 거죠. 주님께. 주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주님께 감사하는 거죠. 모든 일에. 금상? 주님께 감사해요. 대상? 주님께 감사해요. 다음에는 포도나무 그림 그리신 액자로 바꿔 주신다는데, 카메라로 금상 받으신 그림 한번 비춰봤으면 좋겠어요.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
일하면서 주의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감지하느냐 하면,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할 때는 기쁜데 하고 난 뒤에 왜 이렇게 허망하고 허무하냐. 기껏 내가 이런 거나 하려고 이 세상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느냐?’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 이게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내 탓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내 탓을 돌릴 필요가 없어요.
애가 공부를 못한다. ‘야, 내 참. 애 하나도 못 키워서…. 왜 내가 엄마 노릇하느냐?’라고 어떤 허망함을 느낄 때, 그 애 공부하는 것도 주의 일이라면 그거는 내가 거기에 가담했지, 그걸 내 영광으로 가져올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요. 왜 이런 결혼생활을 하느냐, 인생을 왜 사느냐 하는 모든 것이 빨리 조기에 뭐로 바뀌어야 돼요? 조기에 나의 일에서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주의 일로 바뀌어져야 돼요. 주의 일로.
그럼 제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일은 나의 보람, 영광을 위해 했다. 그러면 주의 일로 바뀌었다면 주님은 어떤 핵심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가, 그걸 이제 설명합니다. 그 점이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어쨌든 나의 일은 없습니다. 다 주의 일인데 그러나 시작은 뭐부터 출발합니까? 나 하고 싶은 거, 나 먹고 싶은 거, 내가 얻고 싶은 거, 내가 쟁취하고 싶은 거부터 나의 일부터 출발해서 성도는 그것이 바뀌어지는 거예요. 바뀌어지면서 주께 감격과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주의 일의 내용은 뭐냐? ‘주의 일의 내용은? 악마가 무엇이냐? 악마가 무슨 일을 했느냐?’ 악마는 주님한테만 관심사가 있는 거지, 인간은 관심 없어요. 인간의 일에는 악마라는 게 들어오지도 않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어요.
여자의 후손의 적은 누구입니까? 뱀의 후손이죠. 뱀의 후손의 적은? 여자의 후손. 그 사이에 인간은 빠져야 됩니다. 인간이 빠져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자기 일로 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적은 악마기 때문에 주님은 악마를 어디서 찾는가? 인간세계 속에서 “악마, 너 나와!”하고 악마의 흔적과 악마의 실체를 뽑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이라 했잖아요. 주의 일을 좀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주의 일=주님의 이름의 일’. 주님 이름의 일이에요. 그러면 악마의 일은? 이미 인간이 악마한테 접수, 점령당했기 때문에 ‘악마의 일=인간의 이름으로 또는 나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것’ 이게 마귀의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찾아왔을 때 주의 이름의 일을 한다고요. 주의 이름의 일을 하면서 인간의 일을 삼켜버리죠. 잡아먹죠. 삼킨단 말이죠. 아까 우리 식당에서 음식 먹을 때, 버섯에 이름이 있었죠. 버섯에 ‘한마음 식당’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그런데 그거 뭐 구워 먹어버렸는데 뭐. 이름 구워먹었어요, 가위로 잘라서.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삼키는 이유가,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에게 관여해서 인간의 일을 관여하는 이유가, 인간은 악마를 몰라요. 악마가 들키지 않아요. 악마는 철저하게 인간에게 존재감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매사를 누구하고 의논하느냐 하면 같은 사람 붙들고 이야기해요. ‘아이고, 형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번에는 투표를 어디에 해야 됩니까?’ 모든 인간의 대화는 얘기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을 상대로 해서 서로 대화가 언어가 소통되지, 마귀보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건 뭐 공포영화에나 나오지, 그런 거 없습니다.
마귀한테 할 때는요, 쌍투스 쌍투스 해서 퇴마사 신부들. 마귀가 도대체 라틴어에 약하다는 건 생전 처음 들어요. 하여튼 천주교가 참… 애들 소꿉놀이하는 것 같아요. 마귀는 영어에 약하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왜 한국말 놔두고 라틴어를 가지고 귀신을 쫓아냅니까? 그 성수 뿌리는데 성수 물 화학구조 분석해보세요. 무슨 물인데요? 어디 뭐 요단강에서 떠온 물이에요?
그런 종교 상징의 분위기에 자꾸 말려드는데, 지금 인간에게는 솔직하게 말해서 악마가 없어요. 모든 것이 인간의 일은 인간 하기 나름이에요. 인간이 하기 나름. 인간이 하기 나름이란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하는 일을 동그라미 친다면 이 동그라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이건 몰라도 되고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고 이런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느냐? 그건 모르겠고. 몰라요. 인간은 그냥 인간 자체적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 인간의 자기 신뢰입니다.
인간의 자기 신뢰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악마를 들추어내는데 율법을 투입시킵니다. 율법을 투입시키면 드디어 도저히 악마가 참다 참다 못 참아가지고 율법에 대해서 자극을 받고 본색을 드러내죠. 어떻게 본색을 드러내느냐? 율법을 가지고 인간이 생각하는 한도 너머의 속성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들추어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그 한도 너머를 제가 문장으로 한번 써보겠어요. ‘나는 어떤 일을 해도 어떻게 살아도 다 의롭다.’ 이겁니다. 이유는 묻지 말라. 나는, 내가 한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 교도소 열 번 들락날락하든 사람을 차로 치어죽이든 그런 거 묻지 말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술 먹고 어떤 행패를 부리더라도 누가 뭐래도 나는 나에게 그게 정당하다 이겁니다. 논리로 설명이 안돼요.
애들 고집부리는 거 보세요. 좀 배웠다는 엄마들은 애를 다룰 때 논리적으로 접근해요. “하지 마.” 이러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얘야, 있어봐. 네가 이런 쓰레기를 버리면 지금 탄소를 줄여야 될 판인데 세계가 4년 남았어, 지금. 온도가 15도 올라가기까지 4년 남았는데 네가 이렇게 플라스틱을 함부로 버리면 바다에 있는 고기들은 플라스틱을 먹고 그 고기를 우리가 먹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하면 애는 벌써 자고 있어요, 그 이야기할 때. 길어가지고 잠자고 있다고요.
“하지 마.” 끝나는 문제에요. “너 하면 오늘 밥 없다.” 이러든지 애 약점 있잖아요. 그러면 끝날 문제를, 환경운동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논리로 다가가는데 애들이 잔소리 듣기 싫어서 멈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애들한테는 뭐가 없느냐? 근원적으로 자기 잘못이라는 걸 애들은 몰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잘못이 있다, 없다? 없어요. 미안한 것도 있고 죄송한 것도 있고 내가 이건 나쁜 짓이라 하는 것은 아는데 근원적으로 내 근원은 결코 나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런데? 이유는 몰라요. 이유는 모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게 되면 악마가 율법을 덥석 물어요. 이건 덫에 걸린 거죠. 그다음에 율법 지킨 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대듭니다. 하나님께 이제는 노골적으로 당당함으로 나오죠. ‘하나님, 저한테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 저한테 왜 그래요? 제가 얼마나 착한지를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 인생을 왜 그렇게 구겨놓습니까? 내가 뭐 그리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Why me? 왜 하필이면. 나보다 나쁜 사람 많은데 하필이면 내 인생을… 이렇게 갑자기 자빠지고 엎어지고 몸 아프고. 애가 셋이나 되는데 어떻게 키우라고 이 젊은 나이에 말기 암이 뭡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오빠(A Job Who Is near Us)>(2019, 다큐멘터리, 85분)라는 영화 있죠. <교회오빠> 비평했다가 욕 얻어먹었어요. 교회오빠라는 단편영화 있어요. 장편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마귀영화에요. 신앙적으로 끝까지 견디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영화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마귀영화에요. 내가 느꼈어요. 아픈 것도 유세다. 아픈 것도 유세야. 뭐고, 이게? 아파보니까 자기 죄를 안다고? 네가 죄를 알아? 아파서? 아직 덜 아팠구나? 인간은 죽어도 자기 죄를 몰라요!
사람의 본능이 자기 죽음과 함께 자결할 용의가 되어있을 정도로 자기에게 자기가 착해요. 자결할 수 있는, 나를 껴안고 죽을 각오로 인간은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것은 마귀가 심어준 심성,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나를 의롭다고 해줘. 하나님이여, 내가 잘했다고 해줘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요. 내 행동 말고. 그냥 나는 의로운 존재라고 간주해주세요. 이게 바로 우상의 시작이죠.
『모래 사나이』이라는 책이 있어요. 호프만(Ernst Theodor Wilhelm Hoffmann, 1776-1822,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작가이자 작곡가)이 썼는데 이 사람이 독일 사람이에요. 이 책의 줄거리가 이렇습니다. 주인공 이름이 나다나엘이에요. 나다나엘이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릴 때 자기 어머니가 주인공 나다나엘에게 ‘너 자꾸 잠 안 자면 모래 인간이 와서 너를 덮쳐서 네 눈을 파내고 모래 채워 넣는다. 그러니까 잠 똑바로 자.’ 보통 인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무서워요.’하고 자고 그다음부터는 그걸 잊잖아요.
물론 그 아이도 크면서 그건 겁주기 위한 용도라는 걸 아는데, 겁주기 위한 용도라고 의식에서는 이미 해결이 되었는데 이게 어디까지 갔느냐? 무의식 속까지 내려간 거예요. 유난히도. 유난히도 무의식 속에 내려가니까 그때부터 걔가 이유를 모르는 공포심을 가져요.
그 아이가 약간 더 컸을 때 아버지와 친한 변호사가 왔는데 변호사가 모래 인간처럼 생각되는 거예요. 모래 인간. 그래서 그 변호사를 볼 때 보통 사람 같이 아버지 친구로 보면 되는데 이상하게 공포심을 느꼈고 그 공포심의 근거가 어디냐? 어릴 때 누적된 공포심이 좀 커서라도 사회로 파급되고 자기 사회생활에 확산되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눈을 빼고 그건 안 믿지만 이상스럽게 거부감을 나타내요, 그 변호사에게. 그리고 좀 더 커서는 망원경을 파는 상인이 이제는 어떤 공포심을 주는 거예요. 이유도 모르게 공포심을 주는 거예요.
이 단편소설이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유도 모르는데 특정 인물, 특정 물건, 특정 공간, 특정 기억이 왔을 때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공포심을 유발한 요인이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안에 담겨있다는 것을 그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겁니다.
망원경 장사가 왔는데 그 사람이 이제는 또 다른 모래 인간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주인공이 자기 약혼녀하고 자기 약혼녀 오빠하고 셋이서 높은 탑 위에 올라가요. 보통 유럽에 보면 탑 위에 전망대 있잖아요. 망원경을 가지고 아래를 보니까 마침 망원경으로 뭐가 보이느냐 하면 전에 나한테 공포심을 줬던 아빠 친구 변호사가 지나가는 걸 봤어요.
모래 인간처럼 느껴지는 상인이 준 망원경가지고 처음에 모래 인간처럼 느꼈던 변호사를 바라볼 때, 자기가 두 모래 인간에게 휩싸여서 공포심에 어쩔 수 없이 약혼녀하고 같이 죽으려고 약혼녀를 밀었는데 약혼녀는 오빠가 얼른 빼줬고 자기는 그 공포심을 견딜 수 없어서 그 높은 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책 끝이에요.
소설이 참 과하기는 하지만 주제가 뭐냐? 인간이 죽는 이유는 공포를 죽음 안으로 피신하기 위해서.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느끼는 공포를 달리 해소할 길이 없어서 자기 죽음 속에서 공포를 피신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소설 속 나다나엘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왜 공포를 느낍니까?’가 아니라, ‘무엇을 품고 죽었습니까?’를 묻고 싶은 거예요.
무엇을 품고 죽음 안으로 도피했습니까? 무엇을 품었을까요? 공포와 결별된 나. 그럼 뭡니까? 잘난 나. 이 점에서 이 작가의 주제는 온 인류에게 다 공통적으로 해당사항을 갖는 겁니다.
평소에 인간이 내뱉는 모든 행동과 태도, 많은 대화들의 출처가 어디라 했어요? ‘자기 의’죠. 그 자기 의는 뭐냐? 하나님, 묻지 마세요. 무조건 나는 정당하니까. 정당한 자가 어디 가야돼요, 죽고 난 뒤에는? 지옥 가야돼요, 천국 가야돼요? 천국. 무조건 천국 가야돼요. 무조건. 나의 천국이죠. 나의 구원이고. 무조건 천국 가야돼요.
누가 이런 작당을 했는지 인간은 몰라요. 내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본인은 몰라요. 아빠도 몰라요. 할아버지도 몰라요. 증조할아버지도 몰라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마귀가 집어넣고 마귀는 뒤로 빠지니까 마귀가 그런 짓 했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실을 집어넣었다가 빼잖아요. 율법을 실처럼 우리한테 꽂습니다. 꽂고 어디까지 꽂히게 하느냐 하면 율법의 끝자락이 악마의 심장에 꽂혀서 건질 때 ‘악마, 너 잘 걸렸어!’하고 뽑아내는 그 작용이 뭐냐? 율법입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걸 간단하게 이야기하죠. 율법을 준 것은 뭐라고요? 모든 것을 어디 아래? 저주 아래 또는 죄 아래.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는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저주 아래.
그런데 신약 말고 구약을 한번 보세요. 율법이 왔을 때, 율법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율법은 받아놓고 오히려 율법을 받았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행세깨나 하는 거예요.
제가 세 가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동그라미 하나 그릴게요. 1)이스라엘=유대나라, 2)큰 동그라미 이스라엘 안에 작은 동그라미 유대나라가 따로 있다. 3)이스라엘 동그라미와 유대나라 동그라미가 따로 있어서 두 동그라미가 겹쳐진 공통점(교집합)이 있지만 온전한 이스라엘은 유대나라가 아니고 온전한 유대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나라라 해서 다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라 해서 다 구원받는 게 아니라, 공통부분만 구원받는다.
이 세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어요. 이 세 가지 견해 이 중에서 뭐 맞는 게 있습니까, 성경적으로? 맞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답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이 셋 중에 하나에요. 인간들이 성경을 볼 때 역사적으로 보거든요. 역사적으로 봤으면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 약속을 이룬다. 이룬다면 이 셋 중에 하나일 것이다.
1) 이스라엘이 유대나라든지. 지금도 이 주장을 많이 해요. 온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 이 주장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혜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든 상관없이 그들은 무조건 이스라엘 혈통이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다 구원받는다. 이스라엘이 바로 유대나라다.
2) 이스라엘은 작살나도 유대나라는 남은 자가 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3) 아까 이야기했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유대나라가 구원받는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과 유대나라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있어서 따로 공통적으로 구성되는 이 공통부분이 구원받는다.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는 인간들 세계에서는 아이디어가 이 세 개뿐이에요. 그럼 정답은 뭐냐? ‘없다’죠.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을 활용했지, 구원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붙일 수 없는 이유가 ‘주의 이름의 구원’이에요. 아까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삼킨다 했죠. 주님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이름이 구원되는 계획은 없어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땅에 오면 주의 이름이 돼요. 제가 좀 어렵다 했거든요. 이게 좀 어려워요. 나 스스로 있는 자로 오시기 때문에. 언약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땅에 있잖아요. 그러면 땅에서 벗어나야 뭘 해요? 구원이 되죠. 그러면 누구의 구원입니까? 인간의 이름의 구원이 아니고, 주의 이름의 구원이죠.
그러면 하늘나라 가는 백성들은 뭐냐? 자기 이름이 주의 이름에 삼킴을 당하고 무슨 이름으로 변한다 했어요? 내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뀐 거죠. 야곱은 뭐로 바뀌었어요? 이스라엘로 바뀌었죠.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바뀌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을 변화시키는 이삭의 하나님, 야곱을 변화시키는 야곱의 하나님.
달리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 이삭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고, 야곱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들이 활용 당하게 하시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살아있는 인간은 마귀에게서 못 빠져나옵니다. 마귀에서 못 빠져나오니까 그 인간을 어떻게 해야 돼요? 율법으로 죽여버려야 되죠. 죽여버리는 순간 무슨 관계가 끊어집니까? 그 인간과 마귀와의 관계는 끊어졌죠. 마귀가 더 작당을 부릴 게 있어야죠. 없죠.
아니, 저주받겠다는데 마귀가 무슨 공포심을 줘요? 제가 강남강의인가 가짜인간이라면 공포영화 5개 보라했죠. 이래도 가짜고 저래도 가짠데 세상에 무슨 가짜인간을 구원합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짜에요. 가짜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가짜인간이 교회 다니고, 가짜인간이 천주교 성당 다니고, 가짜인간이 결혼하고. 백날 해봐도 가짜에요.
자기 죽는 이유를 모르니까요. 왜 죽느냐? 그건 난 모르겠고. 왜 죽는지 몰라요. 이 동네 어른들 어디 갔습니까? 저 산에 갔지 뭐. 산에 간 그 사람은 어디 갔어요? 그거는 모르지, 뭐. 산에 갔어, 끝났어요, 뭐. 인간의 한도잖아요. 인간 생각의 한도잖아요. 그 이장님 진짜 박수치고 싶어요. 솔직히 무슨 좋은 나라를 가요? 그냥 산에 갔지. 마을 공동묘지에 갔어요. 끝났어요. 그 뒤에는 모르겠고.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출발점을 그런 이장님의 생각으로 봐야 돼요. 자꾸 뭔가 나를 위해서 덧붙이지 마세요. 이렇게 하면 복 받고, 이렇게 하면 뭐 천국 가고, 자꾸 덧붙이지 마세요. 그게 아직도 마귀가 우리를 갖고 노는 전략입니다.
마귀가 묻기를 “너 죽으면 어디 가는데?” “공동묘지.” “그 뒤에는?” “모르겠고.” “너 모르면 돼?” “나 몰라서 구원받았어. 됐냐? 나 몰라서 구원받았어.” “주님을 믿어야지.” “나 안 믿어서 구원받았어. 됐냐?” 이 말은 뭐냐? 마귀가 건널 수 없는 것이 성도 입에서는 나와버린 거예요. 악마의 자기 관할 영역 바깥의 이야기를 해버리면 악마가 할 말이 없어요, 악마가.
“성경에 있잖아.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데 너 믿어야지.”하면, “나 안 믿어.” “성경을 네가 불신하는구나.” “그래, 불신해.” “너 성경을 모르는구나.” “나 몰라, 그래.” “성경을 안 믿는구나.” “나 즐겨 안 믿어. 너무 감사해서 안 믿어.” 왜 여러분들은 이런 말을 못합니까?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요? 내 여자다.
말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무서워서 그래요. 어릴 때부터 뭘 해댑니까? 네가 빨리 예수 믿어서 어디 가야된다? 천국 가야된다는 것이 계속해서 무의식 속에 누적되어 있으니까, 내가 행동 잘못하고 죄 지으면 자칫하면 지옥 가는 수가 있다. 그럼 누가 손해 본다? 내가 손해 본다. 가짜인간이 무슨 손해가 있어요?
그런데 손해 본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내 안에 마귀가 집어넣은 게 있기 때문이에요. 뭐냐? ‘너는 원래부터 선하고 의롭고 훌륭하고 남은 모르지만 너는 꼭 천국 가야돼.’ 이 의식이, 악마가 우리 속에 집어넣어준 겁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 아세요. 이제 여러분 아셔야 돼요, 이 실상을.
마귀 빼놓고 무슨 성경이야기가 됩니까? 처음부터 약속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야기지, 인간이 빠져야죠. 그런데 마귀는 모든 구석에다 인간을 다 집어넣었어요. 인간을 다 집어넣었다고요.
“목사님, 비트코인 팔까요, 살까요? 지금 10만원 넘었다는데 살까요, 팔까요?” 도대체 묻고 싶어요. “왜 내려가면 안 되는데? 왜 내려가면 안돼요?” “자존심이 상해서요.” “본인에게 뭐가 있어요?” “예. 자존심이 있어요.” “누가 집어넣어줬는데?”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자존심을 누가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또 답변을 그렇게 하죠, 화가 나가지고. “목사 니는 자존심 없나?” 또 반격이 나오는데, 그 반격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반격이에요. ‘하나님, 자꾸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말씀으로. 나도 말 안하고 있으니 등신인 줄 아나?’ 이런 식으로. 매사가 반발이에요. 반란군. 매사가 하나님에 대해서 여지없이 쏘아붙이는 거예요. 대드는 거예요.
부부 싸움할 때 한 쪽이 입 다물고 ‘그랬어요?’ 이러면 끝날 문제를 참다 참다 ‘가만있어보자. 지금 계속해서 러시아한테 밀리는데 우크라이나인 내가 가만있으면 안 되지. 대륙 간 탄도탄을 쏘아버릴까?’ 반격하면 그때부터 난리가 나버리는 거예요.
처음에는 어떻게 하는 줄 알아요? ‘그래, 복음을 아는 사람인 내 쪽에서 참아야지. 지옥 가는 시체가 뭐라 해도 천사인 내가 참아야지.’ 참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가만 두질 않아요. 계속 밀어붙여. ‘아이고, 천사고 천국이고 나중 문제고 지금 도대체 내가 도저히 안 되겠어. 여기서 밀리면 진짜 더 밀릴 것 같아.’ 그럼 주님께서 나오시죠. “왜 밀리면 안 되는데? 왜 남편이 지면 안 되는데?” 가만 보니 이유가 없어요. “나 등신 되잖아요.” “왜 등신 되면 안 되는데?” 계속 묻는 거예요.
그래서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년경–BC399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도 그렇고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라는 철학자가 한 말이 있어요. ‘끝까지 의심하라.’ 끝까지. 끝까지 의심하라. 그런데 소크라테스, 데카르트는 마귀 들렸기 때문에 끝까지 못가요. 끝까지 못갑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끝까지 안 가고 돌아섰죠. 끝까지 의심했는데, 의심해도 의심해도 파고 파도 의심할 수 없는 게 등장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완전히 마귀에요.
네가 존재하는 게 아니야! 네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 네 아버지, 죽은 네 아버지가 존재하는 거야. 이걸 누가 밝혔느냐 하면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와 라캉(Jacques Lacan, 1902-1981,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자)이 밝힌 거예요.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내 생각은 내 존재를 지울 때나 가능하고 내 존재는 내 생각이 없을 때 나타난다.’ 이런 뜻입니다. 이게 간단히 뭐냐 하면, ‘의식에서 노는 차원의 해답은 무의식에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 무의식에 누가 자리 잡았는가? 죽은 우리 아버지의 명령이 자리 잡고 있어요. 죽은 우리 아버지의 명령. 이미 돌아가셨지만 ‘너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제?’라는 것이 평소 일상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 집안이 가평(파평?) 윤씨, 안동 권씨다 이런 거. 자기들끼리 계모임하고 이래요. 돼지고기 구워먹고 이래요.
도대체 인간이… 양보할게, 양보할게, 양보할게, 계속 밀어붙이면 결국 마지막에 양보하지 못하는 게 있어요. 딸그락거리는 마지막 것. 아무리 의심해도 뚫리지 않는 냄비 구멍이 있죠. 이 끝은 아무도 가지 못합니다. 끝까지 가신 분이 있어요. 누구게~요? 누구겠습니까, 끝까지 가신 분? 예수님이죠.
예수님 공격할 때 광야에서 마귀가 말씀가지고 공격했다는 사실. 말씀가지고. 다시 말해서, 극상의 종교적인 것으로 공격했어요. 종교에서 최고 경지에 오르는 그것가지고 공격했다고요. 그러니까 종교에 탐닉하고 거기에 빠진 사람이 마귀를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마귀를 모르죠.
다만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힘들게 자기 생애가 다 할 때까지 파고 또 파고, 또 성경 원어분석하고 연구하고 연구하죠. 내가 누구냐? 하나님이 누구냐? 마귀가 뭐냐?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알아서 뭐하는데? 아니, 그걸 내가 하지, 왜 네가 하는데? 그냥 세리나 강도나 돼, 그냥! 창기나 돼, 그냥! 내가 찾아갈 거야. 왜 그걸 네가 하느냐?” 네가 한다는 자체가 배후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악마가 있다는 거예요. 그동안 자기 일이라고 여기고 한 그것은 누구의 일이었냐 하면 마귀의 일이었습니다. 마귀의 일.
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시비 걸고 나오시는지를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7-48절에 이런 말씀 있죠.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있죠. 마지막 때 하늘나라 설명하면서 하늘나라는 ‘분류’다. 하늘나라는 뭐라고요? 분류다. 뭘 분류합니까?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분류한다는 거예요.
이 대목을 딱 볼 때, 인간은 딱 두 가지 반응입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나, 좋은 고기 되어야지.’ 이건 뭐 100% 실패입니다. 두 번째가 솔직한 거예요. ‘네가 뭔데 나를 함부로 평하느냐?’ 이 이야기할 때 이거는 악마의 대변인으로서 순간적으로 악마를 대변한 거예요.
좋은 고기, 나쁜 고기가 마태복음 13장 49-50절,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되어 있잖아요. 48절에도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되어 있죠.
여기에 대해서 인간의 솔직한 심정은 두 번째에요. 솔직한 심정은 악마의 심정이에요. 악마의 심정으로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거에요. 성경에 이게 나왔잖아요? 간단해요. 성경을 덮으면 그만이에요. 성경을 안보고 교회 안가면 그만이고 말씀 안 들으면 그만이에요.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네가 뭔데 나를 감히 평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죠. 그럼 마귀의 방법은 뭡니까? “네가 죽는다고? 어디 있던데? 저 선악과? 따먹어, 이 바보야! 네가 그 말씀에 왜 주눅 들어있어? 나 용감하잖아. 악마 나 봐. 나 용감해. 나 누구? 뱀. 배얌. 뱀. 나 봐. 왜 네가 하나님께 평을 받아. 그 가지 꺾어버려, 그거.”
그 후손들이 누굽니까? 인류 아닙니까, 인류. 그게 인류라고요. 그게 우리 자신들이고 그래요. 안보고 안 들으면 되지. 왜 듣고, 좋은 고기 될래. 등신도 아니고. 좋은 고기, 네가 결정해.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외부에서 결정하라 하지 말고 네가 스스로 너를 평하면 되잖아. 그 간단한 방법을 놔두고 왜 그 말씀이라는 것에 주눅 들어서 거기에 질질 끌려 사느냐 이 말이에요. 앞으로 지 즐길 날도 많은데.
첫째 시간 끝내면서 어려운 대목을 한번 봅시다. 로마서 11장 26절,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나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되어 있죠.
그러면 이사야 59장을 한번 봅시다. 이사야 59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59장 20절에서는 구원자가 시온에서 나옵니까, 아니면 임합니까? 임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계시를 대신해주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시온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시온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시온’이라는 아까 신명기에서 ‘주의 이름으로 택한 자리’가 따로 있다 했죠.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택한 그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어요. 택했다는 그 자리가 이 땅에 사는 사람과 같은 공간일까요, 아니면 공간이었다가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을까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죠. ‘시온에서 임하사’ 또 시편 14편 7절에는 시온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이사야 59장 20절과 시편 14편 7절을 두 개 다 결합해보면 임해서 나오는 거예요. 시온이라는 자리가 있잖아요. 분명한, 쉽게 말하면 예루살렘이 있죠. 시온에 구속자가 만나서 거기서 임하고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말씀을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해버려요. 완성해버리면 시온이 인물이 돼요, 인물이. 어떤 인물이 공간에 오는 게 아니고, 인물 안에 이미 시온이라는 영토가 인물 안에 들어있어요. 들어있고 그 시온 자체가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시온을 완성했다면 시온의 백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죠. 하늘에 있어요. 지상에 있는 게 아니고. 그런데 성도는 지상에 있잖아요. 지상에 있으니까 하늘에 계신 주님 안에서 우리한테 뭘 보내느냐 하면 성령을 보내버려요.
성령을 보내버리면 우리 성도가 마치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활동했던 것처럼 되죠. 그때 예수님께 성령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죠. 예수님은 육신가지고 땅에 생활하면서 자꾸 자기가 아버지와 하나고 아버지와 함께 있대요. 그러니까 같은 땅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봐도 이거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너와 함께 있어?” “아니야. 함께 있어.”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예수님이 지금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버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고 싶다,가 아니라 실제에요.
마찬가지로 하늘의 성령을 받아버리면 성도의 꼬라지는 다른 육신과 똑같이 뭐 밥 세끼 먹어야 되고 돈 없으면 두끼만 먹고 버텨야 되고 잠이 온다, 안 온다, 하루에 네 번 깬다, 갱년기고 뭐고 약한 육신 다 겪는데 성령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있었던 그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 되어가지고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으면서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마귀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마귀를. 마귀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늘에 가신 분의 마음과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우리는 육신이 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땅에 있더라도, 마귀가 무슨 짓을 하고 어떤 활동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죠. 마귀의 일은, ‘인간들이 협의해서 인간의 영원한 장소를 우리가 정하면 오케이.’ 이게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택한 공간은 이미 어디에 있다? 시온은 하늘로 갔다는 겁니다. 그 시온 안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첫째 그림, 둘째 그림, 셋째 그림(그림1)은 성경에 부합되지 않고 합당하지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 강의 중 그림은 첨부파일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호와 인정 (0) | 2025.01.03 |
---|---|
십자가-종말의 연속 (1) | 2024.11.26 |
십자가-율법의 병렬성 (2) | 2024.10.30 |
중간층 (3) | 2024.10.30 |
십자가-십자가의 반복 (2) | 202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