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부활의 능력

아빠와 함께 2024. 7. 23. 09:25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0강) 누가복음12:32(부활의 능력) 20240722b(강의: 이근호 목사)


p.126 봅시다. 거기 ‘희년’이라는 게 나와요. 기쁜 날. 지금 이 chapter가【십자가와 주일 성수】에요. 시간문제에요. 시간에 관한 문제인데, 시간에 관한 문제가 왜 어려우냐하면 사람들은 공간에 일단 갇혀 있어요.

이 공간 자체가 계절의 순환이 되잖아요. 계절의 순환, 또는 순환되는 계절에 의해서 인간은 이 공간 안에서 나름대로의 시간을 이미 구축해 있습니다. 농사짓기 또는 고기 잡기. 고기 잡거나 농사지을 때 달 변화, 해 변화, 거기서 달력, calender를 이미 만들고 그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냐면 자기를 위한 시간이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시간은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줬어요. 율법으로 알려준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하고 이스라엘이 서로 같지 않은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드러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자꾸 어디로 가요. 기차타고 어디 가듯이 이스라엘은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동 중이다.’ 이동 중인데, 이동 중에 그 차편이 뭐냐? 차를 탄다든지 기차를 타는 게 아니고 뭘 타고 가느냐? 시간을 타고 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시간이 끝나는 곳에. 시간이 끝나는 곳에 가겠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동 중이면 이스라엘 모든 가는 길에 풍경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풍경이 바뀌는데, 기차는 있는 풍경 속을 기차가 통과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이스라엘이 이동 중에 있는 이 시간은 이방민족의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시간이기 때문에 언약의 시간이 주변의 풍경을 자의적으로 생산해내요. 풍경을 만들어가면서 달리는 시간.

그러니까 계절의 자연의 순환에서 만들어내는, 인간이 고정적으로 눈 뜨면 보이는 해와 달, 그 시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주어지는 시간에 이스라엘이 합류하는 겁니다. 이 계절은 해와 달과 별이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그런 시간이고 그게 이방 시간이라면, 이스라엘은 그 시간과 달리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하는 그 때까지 하나님이 질주할 때 백성으로서 같이 따라붙어야 돼요.

그래서 새롭게 새롭게 조성되는 주변 환경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마다 적응을 해줘야 됩니다. 못 따라가면 낙오자가 되죠. 탈락자가 발생되는 거예요. 방금 이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어떤 취지를 드러내느냐 하면… 마르크스의 경제론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자본론.

농사짓는 사람이 밭떼기(밭에 나 있는 작물을 몽땅 사는 행위)를 하게 되면 미리 중간 도매상이 와서 ‘이것은 농사가 잘되든 못되든 생산을 얼마하든 간에 난 이미 돈 줬습니다. 나중에 뭐 가격 쳐(맞춰) 달라 소리하지 마세요. 미리 다 돈 내고 우리가 가져갑니다. 농사는 당신이 짓고 우리는 가져갑니다.’ 밭떼기를 했을 때, 이때 농부는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소외’라는 말을 여기서 했어요, 소외.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상품에서부터 노동자가 소외되는 현상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자본가 계급이 돈독해졌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그 시장가격에 참여를 못하는 거예요. 자본자의 하인이기 때문에. 머슴이기 때문에. 자본의 가치가 중요하지, 노동의 가치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러분, 어디 준공식이나 기공식 하는데 가위가지고 색종이 자를 때 양복입고 서 있는 유지들 가운데 건물 짓는데 노가다한 사람 있어요? 목수한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없는데 왜 자기가 왜 기공식, 준공식에 하얀 장갑 끼고 가위로 자릅니까? 뭘 댔기 때문에 그래요? 돈 댔기 때문에.

그 돈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일한 가치? 아니죠. 일한 가치 아닙니다. 뭐냐? 교환 가치. 시장에서 얼마에 팔렸느냐 하는 교환 가치에요. 교환 가치가 돼야 거기서 잉여 가치가 발생되고 그게 이윤이 되거든요. 이윤에서 노동자는 완전히 배제된다.

그래서 그것이 그렇게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그걸 목표로 한다는 거예요,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렇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가 아니라 그걸 목표로 하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점점 더 배제와 소외를 가속화시키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성과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배제시켜버려요.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자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축할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보통 세상 살면서 뿌듯함 같은 게 있어줘야 사는 보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뿌듯함을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에게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방 나라의 신은 계절의 순환에서 도출된 신이라서 신이 안정적이에요. 반복해서 주는 거예요. 반복해서. 반복해서 비 내리고 반복해서 햇빛 나고 반복적이기 때문에 그 신과 같이 있는 자체가 안정적이고 뿌듯함을 줘요. 삶의 보람을 준다고요. 그 바알 신을 믿는 민족이 가나안 민족이에요. 열 족속. 그 가나안 민족, 안전빵인 가나안 민족을 애굽에서 나와서 날아온 돌이 쳐서 공격하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과 연관시킨다면 있음의 세계에서 이스라엘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나왔을 때 이스라엘은 있음과 비교해서 ‘땅 없음’이 돼요. 애굽은 ‘땅 있음’이 돼요. 그리고 가야 될 가나안 땅은 ‘땅 있음’이 돼요. 그런데 애굽도 이방 신, 우상이고 가나안 땅 열 족속도 우상을 섬겨요. 우상을 섬기는데 애굽 땅 있음, 가나안 땅 있음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땅 없음이 되니까 이것은 ‘부재’에요.

여러분, 없음하고 부재가 달라요. 부재라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무대가 있는데 아직까지 배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배우가 등장해서 짠 나타나게 되면 ‘어? 저 배우는 어디서 왔지?’ 이렇게 되고, 배우가 연기하고 나서 사라지게 되면 ‘어? 저 배우가 어디에 있지?’ 이럴 경우에는 텅 빈 공간을 전제로 해서 ‘나타났다, 안 나타났다, 있다 없다’가 돼요. 텅 빈 공간을 전제로.

텅 빈 공간, 이걸 어려운 말로 공백(空白)이라 하는데 빈자리. 텅 빈 공간을 우선 마련해놓고 거기다가 배우를 등장시켰다 사라지게 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재라 하는 것은 배우가 없다 뿐이지, 공간은 있잖아요. 공간은 있죠. 그러니까 전혀 없음이 아니에요.
없음하고 부재하고 달라요. 없음이라 하는 것은 아예 없는 거고 부재라 하는 것은 앞으로 등장할 중요한 인물을 중심으로 볼 때 그 인물이 그때는 없었고 지금은 있다 이 말이에요. 그때는 없었고 지금은 있다 할 때 그게 부재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땅이 없는, 땅이 부재한 민족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광야 생활이에요. 광야 생활을 보냈어요. 광야 생활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어요. 그럼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창조의 시간이에요.

창조는 없는 데서 창조되었습니까? 어때요? 여러분 그렇게 생각합니까? 없는 데서 창조됩니까?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조직신학자들은 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없는 데서 창조되었다면 이사야 45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할 거예요? “나는 없음을 창조했다.”(45:7)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죠? 나는 없음을 창조했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나는 빛을 창조하고 어둠을 창조하고 모든 없음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결국 이 말은 ‘있다/ 없다, 어둡다/ 밝다’를 인간적 차원에서 의미만 제한해서 한 것이고, 이사야 45장에서는 “너는 있다/ 없다, 빛/어둠을 너희들 쪽에서 생각하지?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다른 편에 속한다.” 그게 ‘나는 숨어있는 하나님’(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숨어있는 하나님이다.

진실로 숨어있는 하나님. 숨어있으니까 인간 편에서는 ‘없다’가 되죠. 그 숨어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나타내시면서 인간 쪽에서 볼 때는 없는 데서 만들어진 창조가 되는 거예요. 그 창조 안에 섞여서 오신 분이 누구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더불어서 이 세상이 창조된 거예요. 예수님이 창조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것과 시간문제와 이게 무슨 관계 있느냐? 순환하는 것은 멈춤이 없어요. 항상 내일되면 또 돌아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은 가위로 자르는 게 있어요. 절단하는 게 있어요. 절단. 있다가 숨어버리고 있다가 숨어버리는. 1, 2, 3, 4, 5, 6 해놓고는 7일째 숨어버려요. 없고요. 1, 2, 3, 4, 5, 6 해놓고 숨어버려요.

1, 2, 3, 4, 5, 6 인간이 노동하는 날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노동하니까 있단 말이죠. 있으니까 인간은 가만있지 않고 일한다 했죠. 1, 2, 3, 4 있는데 밭떼기가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중간에 있는 끊어진 7일째가 앞에 있는 것을 밭떼기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의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 스스로 자축하거나 뿌듯하게 여기는 요소가 다 날아가 버리죠.

없었던 사실이 등장함으로써 있었던 인간의 모든 것은 없음에 예속이 되는 겁니다. 없음에 양도를 해줘야 돼요, 없음에. 그게 제7안식일이에요. 내가 노동한 것은 주님의 노동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적인 겁니다. 보조적인 것. ‘그림자’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림자에요. ‘그림자’란 노래가 있어요, 옛날에 서유석이 부른 노래가 있는데. 나는 그림자란 말은, 나는 실체가 아닙니다. ‘누구에게서 뻗어져 나온 연장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자기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을 닮은 민족이고 싶어 해요. ‘하나님이 민족을 만든다면 어떤 민족이 될까’를 하나님께서는 말씀, 율법을 줘서 그들에게 확장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그걸 왕 같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 했어요.

이 말은, 장차 오실 하나님은 이 땅에 제사장으로 오시는 거예요.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죽음을 다루는 일이 제사죠. 죽음을 다루는 거예요. ‘다룬다’는 말은 살아있을 경우에나 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미 죽어버린 것을 뭘 다뤄요? 주께서는 죽음을 다루는 겁니다. 그 죽음을 다루는 것이 신약에 오면 바로 ‘부활의 능력’이에요.

◎이제부터 제가 쭉 예를 들 텐데요. 이제부터 제가 예를 드는 것은 왜 인간이 믿음이 없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있지만 제가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어 볼게요.

첫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어요. 결국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무엇과 대조되는 거죠? 육신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과 대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의 집단, 집합은 자기의 육에서 났기 때문에 육신에서 벗어나서 성령으로 태어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게 너무나 지당한 거예요. 육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세 가지 예를 들겠어요.

두 번째, 우리들 가운데 나무보고 바다에 빠지라 하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거예요. 믿음이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세 번째는 너무 무섭고 너무 엄청난 거라서 좀 미루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게 있어요.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가 있다. 나무보고 빈다. 희한하게 비틀어진 괴기스럽게 생긴 나무를 보고 전통적으로 거기에 제사 드리고 빈다. 나무보고 왜 빌죠? 나무에 뭐가 있다고 빌죠? 어떤 힘이 있다고 빌죠. 보통 나무에 빕니까? 이상하게 비비 꼬여가지고 오래 된 묵은 나무에 왜 그렇게 비느냐? 우리 예상 밖에 좀 특이하기 때문에 신령한 나무, 초월적인 특이성을 가진 나무이기 때문에 나무가 지닌 그 특이성 때문에 빌게 되면 그 힘이 나한테 일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빌죠.

요새도 그러겠지만 옛날부터 교회 목사님을 섬기는 이유가 목사한테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목사한테 빌면 그 기가 일부 자기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할머니들이 무슨 교회나 절에 가지 않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아들이 군에 간다든지 수능 같은 시험 앞두고 깨끗한 옷을 입고 새벽에 부엌 가서 정화수를 떠놓고 빌죠. 그 정화수 성분 조사해보세요. 그게 진짜 유기물, 무기물 퍼센트로 정화수에 해당되는지. 마트에 파는 생수보다 더 정화되었는지. 그러나 이건 나름대로의 정화수에요. 떠놓고 부엌에 가서 어떤 노동하기 이전에 새벽 해 뜨기 전에 빕니다. 중얼 중얼 중얼 빌어요.

그때 그 여자분, 그 아줌마, 나보다 나이 적은 그 아줌마가 왜 그런 짓하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육신이 확장되면 육신과 영 사이에 경계선에 도달하게 되고 그 경계선을 향하여 정성을 다해 기를 집중하게 되면 육신 너머에 있는 영적 힘이 나한테 전달되어서 내 소원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 있잖아요, 기대.

희망, 기대, 목표, 계획 이게 인간에게 있죠. 인간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초월적인 목표를 향하는 그런 내면의 요구, 욕망이 있는 거예요. 초자연적인 욕망이 있는 겁니다. 욕망이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테스트하는 거예요. “그런 욕망이 있다면 네가 나무보고 뽑히라 해서 바다에 빠지라 하면 빠지겠는가?” “아휴, 그건 못하죠.” “그럼 네가 나무보고 빈다면? 또 하나님한테 빌고 예수님한테 빈다면 얘가 수능 잘 되겠는가?” “그건 잘 될 것 같은데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믿음이 있으니까요.”

그럼 옛날 라디오 앰프 같은데 보면 볼륨 낮추는 거 있죠? 볼륨을 확 낮춰보는 거예요. 제일 낮은 볼륨이 어느 정도냐 하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것이 믿음의 볼륨 가운데 최저에요. 그게 최저인데 그 최저도 안 된다면 나무보고 빌고 예수님, 하나님보고 비는 것은 뭡니까? 전부 다 이건 믿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경에 뭐 구하라 주실 것이고 발로 차라 찾을 것이고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인간이 그냥 두드리고 발로 차겠어요, 안 그러면 도끼가지고 부수겠습니까? 이것저것도 안 되면 도끼로 문 박살낼 거예요. 뭐가 있는가 싶어서.

그런데 아까 이사야 45장 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 아니고 ‘스스로’ 숨어계시는 분이에요. 인간의 요구에 맞춰 조절해서 잡았다 하면 빠지고 잡았다 하면 빠져버려요. 철저하게 인간이 자축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자기 행함에 뿌듯한 성과를 내지 못하도록 피신하는 쪽으로 숨어계시는 거예요. 피신하는 쪽으로. 따라오려면 따라와! 도저히 접근이 되질 않는 거예요.

단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 지켜도 그 단절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래도 이스라엘을 주께서 계속 끌고 갑니다. 망할 때까지. 왜? 그들이 생각하는 풍경과 다른 풍경을 만들기 때문에. 여리고성 함락할 때 안식일 맞춰서 이미 날짜를 정했어요. 다른 날은 한 바퀴 돌았는데 특별히 제 일곱째 날은 일곱 바퀴 돌고 나팔 부니까 이게 다 무너진 겁니다.

그럼 성이 무너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무너뜨리고 난 뒤에 어떻게 견고한 성이 무너졌는지 생각할 거 아니겠어요. 생각할 때 무슨 요소를 집어넣었겠습니까? 그때 형사들이 와서 “야, 이 성이 왜 무너졌지?” “팀장님” “왜?” “이건 안식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안식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예요. 안식일.

그러면 안식일의 풍경은 여리고성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풍경이냐 하면 그냥 제사하는 풍경이에요. 그런데 제사가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내는가? 현실을 만들어내고 제사가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는 동인(動因), 힘이 되는 거예요. 동력이 되죠. 뭐가? 안식일이. 시간이요.

자, 다시 이야기할게요. 1, 2, 3, 4, 5, 6일에 일을 누가 합니까? 내가 하죠. 안식일 의미를 놓쳐버리면 안식일 지킨 내가 역사를 만드는 힘이 되잖아요. 그게 안식일 못 지키는 거예요. ‘안식일은 내가 노동했다 하는 그것이 단절되고 안식일의 주인님이 역사를 만들지, 우리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6일 동안 노동했다.’ 가 돼요.

따라서 어떤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지는가? 우리가 한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드는 사건들이 벌어지겠죠. 우리가 한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내가 한 것이. 누가복음 12장 31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봐야 돼요. 특히 이거는 목회하는 목사님이 크게 읽어봐야 돼요.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절,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아멘.

무슨 무리? 적은 무리. 갈수록 적은 무리. 갈수록 적은 무리. 더 줄이면 안 되는데요? 더 더 더 더 더 갈수록 적은 무리. 왜 적은 무리가 또 적은 무리, 적은 무리를 양산하느냐? 그 나라 의는 무리를 제공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하신 일을 제공받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과 더불어 그 밴드, 이러면 안돼요. 그 밴드 숫자 자꾸 신경 써서 안돼요. 오직 예수님 뿐, 이 정도까지 가야 적은 무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몇 명 모였는데 ‘우리 숫자 몇 명 왔어.’ 이게 아니라, ‘우리 누구 때문에 왔어.’가 되어야 돼요.

누구 때문에, 주님 때문이라면 나는 그 숫자에서 카운트가 되질 않아야 돼요. 이게 이사야 2장 22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저도 목사니까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아까 얘기했죠. 인생의 어떤 뿌듯함과 인생에 자축하는 모든 경우를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죠.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수(數)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수에 칠 가치가 없으면 숫자는 뭐 됩니까? 제로(0)가 되죠. 내가 있음으로서 너는 수에 칠 가치가 없다는 것은…수에 쳐버리면 이건 존재가 돼요. 내 앞에서 너는 너 존재가 소멸된 상태이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 말은, 네 존재가 의식되면 내 존재가 가리워진다.

그래서 인간은 주의 일을 방해하는 거 아닙니까. 자기 존재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한 성과가 몇 명 모였느냐? 내가 목회해서 몇 명 끌어 모았지? 이번 수련회 몇 명 모았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 나라 의를 구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그것은 보조적이고 뒤따라오는 것이지, 중점적인 머리 부분은 그 나라에요. 그 나라 의에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의 나라를 뭐로 나타내느냐, 이 땅에서? 그의 의로 나타낸다는 거예요. 그의 나라=그 의. 그의 나라를 의로 나타낸다는 말은 그의 나라가 의를 남기기 위해서 모든 죄를 심판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옴을, 그것을 네가 요청하라. 기도하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임하기를 네가 기도 내용으로 삼아라 이 말입니다.

계속 안식일 하겠습니다. 안식일 다음에 희년 나가는데, 안식일을 다시 하겠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시간이란 기차를 타고 간다. 그 시간이란 기차는 어떤 새로운 풍경들, 환경들을 만들어내는데 심판하는 환경을 맞이해요.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에 대한 심판을 하는 환경.

이방민족은 순환하는 시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항상 뺑뺑이 순환하는 시간을 따르는 반면 약속의 땅도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순환하는 것이 아니고 순환을 단선(單線)으로 만들어요. 순환을 단선으로 만든다고요.

그러니까 시간은 항상 둥글다. 이게 우리한텐 좀 낯설어 보이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모든 달력은 반복으로 되어 있어요. 시간이 단선이 되는 것이 더 이상해요. 시간이 단선이 된다는 말은 시간위주가 되고 인간위주는 아니라는 겁니다. 내 시간이 이해 안 되거든 너희들 다 기차에서 내려라 이 말이에요.

그럼 시간위주라는 말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건데 뭐냐 하면 ‘공간위주를 포기하라’에요. 공간위주를 포기하라. ‘나 어디 가서 살래. 어느 목축지가 좋아.’ 그런 거 포기하라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작동하고 있는 안식일이 실제 역사와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하나님, 저 목축지 제가 할래요.’, ‘내가 이거 할래요.’ 그건 이방적 사고방식이에요.

빨리 인생이란 동영상 짧게 끝내고, 인생이란 건 스냅 사진이거든요, 빨리 끝내고 주님을 만나야 돼요. 그런데 나만의 공간을 가져버리면 인간은 그 공간에 주저앉게 돼요.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과거를 보냈던가. 이게 기억이잖아요, 기억.

앞으로 이야기할 건데 여러분들이 너무 어려워하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공간을 포기한 거예요. 부활의 능력이라는 게.

자, 첫 번째 기적을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성령으로 태어났죠. 우리 인간하고 다르죠? 그러니까 인간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거예요. 두 번째, 예수님이 볼륨을 최저로 낮춘 믿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무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거. 어느 인간이 이걸 해냅니까? 그래놓고 믿음이 있다고요? 겨자씨만한 믿음도 이 정도인데. 믿음 더 컸으면 큰일 날 뻔했다.

세 번째가 아주 충격적인 거예요.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끝났어, 끝났어. 무슨 수로 예수님 피 먹고 살 먹습니까? 우리 가운데 피 먹고 살 먹은 사람 있어요? 맛이 어떻던가요? 떨떠름하던가요, 어떻던가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권사님 잡쉈어요? 잡숴본 적 있습니까? 수육으로? 어떻게? 선짓국으로? 뭐 어떻게요?

어떻게 살과 피를 먹어요? 그냥 믿으면 안 됩니까? 안 돼! 그 살과 피를 먹어야 돼요. 그냥 믿습니다, 하면 안 됩니까? 그건 베드로 짝나고.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안 돼! 내 살과 내 피를 먹어야 돼요. 실컷 교회 50년 다니고 했더니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적이 없네. 그럼 50년 교회 출석한 게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예수님 살과 피를 못 먹었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믿으라는 게 아니고, 먹고 마시라니까요! “믿습니다.” “너 안 먹었지, 그치? 안 먹었으니까 자꾸 ‘믿습니다’ 소리 나오는 거야. 차라리 솔직하게 ‘안 먹으렵니다’ 해야지.” “나는 육회도 안 먹는데…. 나 그 대신 믿을게요.” 아 참… 핑계도 참. “믿어?” “예. 믿습니다.” “그럼 나무보고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 해.” “그것도 못합니다.” 그것도 못하면 뭐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증거와 사실관계가 같이 짜여져야 소송에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제시한 증거 내용과 그게 사실적으로 합치될 때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들었던 현지 사람들의 반응이 뭐였습니까? 어렵도다. 누가 이것을 믿을 수 있느냐.(요 6:60)

내가 믿을 만한 것만 골라 믿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것은 안식일 자체가 단절이라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요? 주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고 피해가시는 분이에요. 따라잡으면 피해 버리고 따라잡으면 피해 버려요.

언제까지? 주님의 살과 피가 흐르고 찢겨질 때까지. 어떤 인간도 믿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 인간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피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잖아요.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성공하셨어요. 무슨 일에 성공했습니까? 이 세상에 인간치고 날 믿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 아무도 없다.

그러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하고 대화할 때 대화내용이 누가복음 9장에 이미 누설이 되었죠. 누가복음 유튜브에 나와 있어요. 그게 뭡니까? 그때 대화내용이 ‘예수님이 언제 돌아가십니까?’ 이거에요. 엘리야와 모세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그럼 여기서 물을 수 있는 것이 엘리야와 모세는 무슨 수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느냐는 거예요. 십자가 지기 이전의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느냐.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만든 단절, 시간적 단절을 어떻게 점프해서 뛰어넘어서 주님의 완성된 시간 속에 합류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그들이 단선이 돼요. 단선이 된다는 말은 공간이 사라진다는 말이에요.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광야는 공간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동안 공간이라는 것은 내가 터 잡아 살 공간을 우리는 공간이라고 이해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유는 거기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광야에는 공간이 없어요. 공간이 없고 시간만 있어요. 어떤 시간? 매일같이 만나가 내리는 시간만 있어요. 만나만 계속 내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만나를 신명기 8장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떡을 준 게 아니고 말씀을 주었다는 거예요.(8:3)

만나가 떡이라면 인간 육신에 들어와서 육신으로 소화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이 되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합니다. 새로운 현실을 뚫고 나가죠. 새로운 현실을 뚫고 나가요. 인간이 단선이 되어서 단선이 쭉 이어지게 되면 이 단선은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왜 단선인가? 트럼프의 장담이 총알이 트럼프 귀를 뚫고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트럼프가 대통령 된다면… 지금 될 가능성은 있지만 된다는 보장을 못하겠어요. 지금 3개월 남았으니까. 해리스 부통령이 갑자기 표 몰려서 될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트럼프가 된다면 트럼프로 말미암아 트럼프가 대통령 된다면 이 선(線)이 몇 선입니까? 트럼프 단선이죠. 단선이 되는 거예요. 그럼 바이든 대통령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제거되어야 되겠죠.

따라서 단선이 지나가는 모든 노선에는 인간에게 믿음 없음이 노출되어야 돼요. 믿음 없음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여리고성 같이 인간 힘으로 점령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미리 정탐꾼을 보냈더니만 가나안 땅에 거인족이 살고 있어요. 거인족. 거인족 중 하나가 골리앗이 되겠죠, 여기 가나안 땅에. 거인족이 살아서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복할래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일같이 부딪쳐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자기가 아는 힘과 자신의 믿음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그쪽으로 가는데 그쪽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거예요. 그냥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믿을 재주도 능력도 없고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신다면 그다음부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 말씀 지키는 것을 누구한테 넘기겠습니까? 누구한테 넘기겠어요? 동행하시는 주님한테 넘기면 되죠! 바로 그거하면 되는 거예요.

“너 성령으로 태어났어?” “아닙니다.” “너 믿음 있으면 나무 한번 뽑아볼래?” “못합니다.” “내 살과 피를 먹으라.” “어렵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뭐냐 하면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나는 못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안 믿는다. 다시 말해서, 나의 무능성이에요.

나의 무능성. 그 무능성이 뭐냐? 무능한 자가 무능성을 아는 그 능력을 가지고 부활의 능력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참 쉽죠잉? ‘부활을 믿읍시다.’가 아니에요, 지금. ‘내가 안 해도 하신다.’가 부활의 능력이에요. 나는 하고 싶어도 이거는 방해만 되죠. 하고 싶어도 안한 게 되고 해도 안한 게 되고 전부 마찬가지지만.

부활의 능력을 친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가 자신을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 문장 앞에 빠진 게 있어요.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렇게 돼요.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예수님을 믿는다, 이렇게 돼요. 살아있는 내가 나무보고 뽑히라고 했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닌데, 살아있다는 걸 전제로 한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갈 때,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게 단절이 안 되는 거예요. 한쪽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한쪽이. “너는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왜? 네가 살아있다고 우기고, 나는 죽으러 가기 때문에. 네가 죽는데 따라갈 수 있느냐?”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안 돼!” 너는 나를 따를 수가 없어요.

이게 단절되기 위해서는 반대가 되어야 돼요. 반대가 뭡니까?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다.”에요. 우리는 보통 몇 번씩이나 부인하죠? 맨날 술이야~가 아니라, 맨날 부인이야~. 우리는 맨날 부인이야. 하나님이여, 살아있는 나 어떻게 할 거예요? 빨리 도와주세요. 뽀빠이 살려줘요. 맨날 뽀빠이 찾고 있어요. 살려달라고. 딴따라 딴따 따~ 갑자기 막 알통이 생기면서.

도무지 우리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으니까 움직이고 움직이니까 성과 내다보고. 아까 했죠? 성과 내다보고 있으니까 내 인생은 성공일까, 실패일까를 점검하고. 맨날 하는 일이 그 일 빼고 뭐 다른 일 있습니까? 다른 일 있어요? 내 자식 잘 키웠어 못 키웠어, 뭐 이런 거. 내 평생 잘 살았나, 맨날 생각하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자기 단절이 안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쭉 한번 보세요. 애굽에서 나올 때 바다 건넜을 때 그들이 막 물 퍼내고 소방수 동원해서 펌프해서 물 뽑아냈어요? 아니죠. 하나님이 만든 풍경, 그 현실은 항상 누가 먼저 반발하고 반항하느냐?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들이 반발하고 반항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부활의 능력, 죽은 분의 능력이에요. 죽은 분의 능력. 살았다고 우기는 세상 속에서 그 살아있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 분의 능력이 진정코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에요. 그 살아계신 분이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그래서 우리는 맨날 십자가야. 맨날 십자가에요. 단절이 끊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그래, 나 구원받았어. 단절이 끊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뭐할까’ 이렇게 나와요. 단절이 끊어지게 되면 갑자기 자기가 스스로 자축할 수 있는 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하죠.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개척교회를 얼마나 하고 어떻고 저떻고. 갑자기 자기가 자기한테 보상해주고 싶고 자기한테 보답하는 백화점 선물 사주고 싶고. 너 고생했어. 예수 믿는다고 얼마나 힘들었어. 이번에 가방 하나 뽑아. 본인이 본인한테 위로 쇼핑을 하게 만들고. 자기 노력에 대해서 자기가 울음을 터트리고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핑계대고 구원 받았다 핑계대면서 서서히 나오는 것은 자기 완전성 추구에요. 자기 완전성 추구의 특징이 사람을 안 만납니다. 그래서 어디 가느냐? 조문은 해요. 죽은 자가 안 살아났기 때문에 마음 놓고 내가 갈 수 있어요. 귀찮게 안 하기 때문에. 죽은 다음에 가요. 아이고, 친구야. 너하고 있을 때 좀 만날 걸. 그때 만약에 벌떡 일어나서 오늘 카페 가자 하면, 아니 아니.

그래서 오늘날 젊은 사람들 공통적 취미가 있어요. 취미가 뭐냐? 고독이에요. 왜? 스스로 완전케 하기 때문에. 복음도 알게 됐겠다. 자기 완전성을 자기가 꼭 쥐고 있습니다. 이제는 칼 대지 마라. 나의 완전성 추구에 날 키워준 부모라도 나에게 칼 대지 마라. 점점 도피하죠. 말 안합니다. 필요한 사무적 말만 해요. 직장에 가도 청소 안합니다. 내 책상 손대지 마세요. 내 책상이에요. 맨날 나를 갖다 붙여요.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이 시대. 이게 얼마나 단절을 모르는 시대인지요. 자기밖에 모른다 하죠. 왜 그러냐? 내가 축하할 자를 나로 확정해버렸기 때문에. 나한테 보람이 오는 쪽으로 나한테 보람이 100% 다 쏠리는 쪽으로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자식들 좋다고 또 오야오야 해주고 하죠.

그래서 솔로 같은 프로그램에서 선보고 하면 남녀 둘다 겁을 집어먹게 됩니다. 내 완전성에 혹시 먼지나 묻지 않을까. 혹시 상처 스크래치 내지 않을까. 그거부터 챙기면서 둘이 만나요. 아주 살벌해요, 이 만남의 장소가. 살벌해요.

처음 만날 땐 내 타입이라 하잖아요. 그 타입 7분 내지 15분 지나면 식상해요. 아, 그 얼굴 누구 닮았던데. 누구 닮은 것 같은데… 박보검 닮았나? 아, 이제 나 취향 달라졌어요. 7분 만에 취향 달라졌어요. 왜? 다른 영철이 왔기 때문에. 영수 왔을 때 내 취향이 영철이 가방 들고 오면 그거 다 날아가 버려요. 남자도 마찬가지고요. 영숙이 올 때랑 현숙이 올 때랑 다 달라져요.

골라먹는 재미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미쳤다고 남한테 올인해? 이 정신으로 살아가요. 자기는 어떤 단절도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 안 다니는 건 물론이고요. 성경 안보는 것은 물론이고요. 자기 완전에 빠지는 것.

그게 뭐냐? 지금 우리는 묵시의 세계에 살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순환하는 과학적 자연세계 속에서 자기가 악마로 완전한 악마로 점점 더 만들어지는 거예요. 누가 나를 밭떼기해 간 사람이 없어요. 살아있기에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뭡니까? 죽은 분의 능력이 오직 자기 택한 백성에게 찾아와서 네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주는 그 고마움. 그 고마움을 우리 간직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주님의 십자가가 만드는 현실 속에서 참으로 지옥 같고 참으로 모두 다 마귀의 자식 같은 이 현상은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현실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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