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5강) 신11:29(모순된 자리)20240930a(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1장 29절, 한절만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한 구절만 봤습니다.
약속의 땅에 인간이 들어가느냐, 아니면 말씀이 들어가느냐? 또는 인간이 들어가느냐, 언약이 들어가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 미리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는 언약이 들어가는 땅이지, 너희들이 가는 땅이 아니다. 말씀이 말씀의 완성되기 위해서 말씀이 움직이는 세계, 그게 약속의 땅이에요.
그것을 어제 낮 설교에서 언약이, 언약궤가 가는 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고, 이 언약궤로 오신 분이 이 땅에 왔다가 하늘로 승천해서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천국은 지상에 없고, 하늘로 예수님 따라 그냥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본인이 살 땅을 원했던 겁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갓 지파가 자기 목축지를 찾고 있다가 이건 뭐 요단강 안 건너가도 목축지로 좋으니까, “와, 여기 우리는 이 땅 차지하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벌써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본색을.
여름철에 휴가 간다고 계곡 가다가 더 좋은 계곡은 안에 있는데 초입에 들어가자마자 “여기서 그만 우리 전 피고 텐트치고 여기서 놀자.” 안에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바깥에 왔다가 가는 셈이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희망을 들어주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여기가 좋사오니’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마찬가지고요. 변화산에 있을 때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전 피는 거죠. 초막 셋을 짓고 ‘고마, 우리는 이런 상황으로 쭉 갑시다.’ 어디 캠프 왔어요? 놀러 왔냐고요, 지금? 예수님은 죽으러 왔는데 그걸 모르고 “야아, 너무 멋지다. 해같이 빛나고, 영원히 살고” 주님께서 그걸 미리 보여준 것은 얼마나 차이 나는가를, 도대체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차이 나는가를 제자들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죠.
오늘 여기 신명기 11장에서 ‘약속의 땅에, 너희가 가서 얻을 땅으로 인도하여’ 라는 이 말씀을 광야에서 주셨잖아요. 광야생활이 얼마나 고달픈 세상입니까? 거기서 얻을 땅이라고 하니까, 그들은 단박에 뭐냐? “이제는 내가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될 그 땅, 땅을 주시는구나. 고맙다 하나님” 이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11장 26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이제 난해한 설명인데, 왜냐 하면,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뭐가 아예 빠져있어야 돼요? 저주가 빠져있어야 되죠, 저주가.
‘내가 너희에게 복을 줘서 약속의 땅에 살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야지, 왜 그 지긋지긋한 저주는 왜 끝까지 따라오느냐 이 말이죠. ‘좀 따라 오지 마!’ 이렇게 내보내고 싶은데, 저주가 끝까지 따라오는 거예요, 끝까지. 그것은 요 그림, 어항 그림이 있듯이 인간은, 첫 번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기 자리가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유지될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내 자리, 내 영토, 내 살 수 있는 자리, 하나님께서는 마련해준 적이 없어요. 천국? 천국은 내 자리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 것은 불교의 극락 가라 하세요. 극락 가서 제 자리 확보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리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미 피조물의 자리는 창세기 3장에서 확정 났습니다. 피조물의 자리는 어디에 적당하냐? 저주에 적당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려가는 것은 저주받기에 합당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리에 합류시키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내가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노니”라는 말을 받을 때에 이렇게 이해하세요. “내가 오늘날 너희 앞에는 저주가 합당한데, 맞는데, 내가 복도 같이 둘게.” 이렇게 이해를 해줘야 돼요. 저주만 있어야 될 너희에게 복을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주 받아 합당한 자의 생각은 뭡니까? “왜 저한테 복을 줍니까?” 대뜸 이런 질문이 나와야 돼요.
“왜 저에게 자꾸 복을 주시려고 해요? 저는 저주 받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원래 우리에 대한 뜻이잖아요.” 너는 저주받아라. 정녕 죽으리라. 하면 죽고 저주받고 심판받는 게, 지옥 가는 게 마땅한데 왜 복을 주십니까?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뭐, 너 좋으라고 주는 줄 아나? 내가 나한테 복을 주는 거야. 내가 나한테.”
하나님이 하나님한테 복을 주는데 거기에 인간들을 끼어 넣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게 복을 주는 게 천국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반대편, 악마에게 악마의 합당한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지옥이고,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두 군데 찾아볼게요. 요한계시록 19장 20절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라고 되어 있죠.
이미 확정된 거예요. 이미 확정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밖에 없어요. 지금부터 결론에 대해서 미리 안다는 것은 백프로 거짓말입니다, 인간으로서. 그것은 새롭지 않아요. 결론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백프로 거짓말입니다. 내가 예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거기서 나를 빼고 예수님을 집어넣죠. 예수님은 미리 예정된 분이에요, 내가 아니고. 성도는 어디 들어가느냐? 자기 자리가 허락받지 않고 예수 안이라는 자리를 허락받아요, 예수 안이라는 자리, 성도는. 그럼 예수 안은 누구 자리입니까? 예수님 자리이지, 내 자리가 아니죠.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에 천국 나오니까 ‘아, 천국 좋아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제가 좋아할 쨉도 못되면서, 좋아하면 안 되는데, 분수도 모르고 ‘천국 좋아요’라고, 또 영생 나오니까, ‘영생 얻고 싶어요, 영생 얻고 싶어요.’ ”뭐야, 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천국도 아니고, 영생도 아니에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을.
그걸 가지고 로마서 8장 3절에 뭐라 하냐 하면,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롬8: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죄 있는 육신의 몸 안에 하나님 자신을 담아버리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은 ‘나의 자리는 없다’ 하나님이 나의 자리라는 것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양쪽에 달린 강도 있죠. 구원받은 강도와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차이는 구원받은 강도는 자기 자리가 없어요.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뭐를 고집하느냐 하면, 자기 자리를 고집해요. 강도였지만 자기 자리. 나를 다시 십자가에서 구원해주면 나 당신 믿을게.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를 십자가에서 내리면 그 사람 어디 갑니까? 자기 집에 가겠죠. 자기 자리로 가겠죠. 자기 자리를 못 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불행, 비극, 근심, 걱정, 모든 불안과 이런 것, 오늘 아침 뉴스에 우리나라 20대의 25%가, 20대 네 명 중 한 명이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75%가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고, ‘뭐, 그 정도면 참을 만하다.’ 이거고, 심각하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25%에요.
그 모든 문제점에 대해서 뭐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되도 않는 소리 해가면서 그렇게 백날 해봐야 해결 안 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뭐냐 하면, 내 자리가 있다는 게 문제가 돼요, 내 자리가 있다는 게. 내 자리가 있으니까 일곱 귀신 다 찾아오는 거예요. 일곱 귀신.
결혼해봤다가 이혼했다가 또 결혼할라 하는 거. 마지막 사랑으로 또 한 번 해볼까 하는 거.. 오십 넘어서. 이게 뭐냐 하면은, 기어이 내 자리 확보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내 자리를. 결혼이란 게 일종의 타인에 대한 사기거든요. 그걸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어지간하면 혼자 살아라. 그러나 네 욕망을 주체 못하거든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내 자리를 보다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내 말 잘 듣는 배우자를 내 자리에다가 채워 넣는 거예요. 그걸 신성한 결혼이라 합니다. 그게 신성한 결혼이에요. 내 자리가 있단 말이죠.(원 모양) 내 자리가 뭐라 했습니까? 모든 근심 걱정 환란 고난 어려움의 근원이죠. 있는데 여기에다가 내 자리는 그대로 있고 타인을 내 안에다가 집어넣으면, 응에~ 애까지 생기니까 집어넣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타인의 자리가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대등한 크기의 원으로 다가와서 교집합을 이루죠. 밀고 당기고 난리도 아니죠. 결혼 한 지 2년 만에 ”결혼할 때 너 얼마 치 해왔어?“ 이런 이야기 나온다는 건 뭐 보통 문제가 아니죠. 막상막하 만만치 않은 두 개의 원이 겹쳐진 거예요.
힘드니까, 우리 갈라설까? 그래서 갈라섰는데, 처음에는 동그란 원이었는데, 갈라서니까 겹쳐진 부분이 뭉티기로 날아가 버렸어요. 이건 뭐 초승달인가? 그만큼 손상이 된 거에요. 그 자리가 날아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또 있다가 ‘솔로 돌싱 특집’이라 해가지고 새로운 남자나 여자를 만나서 날아 가버린 자리를 채우려고 했는데, 전에 상대보다 더 큰 원이 들어오는 거예요.
날아간 자리 메꿔서 처음 결혼하기 전의 행복을 기대했더니만 더 큰 게 들어와 버린 거예요. 물론 그래서 일곱 번 결혼한 사람도 있어요. 엘리자베스 테일러.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리라는 인식을 마귀로부터 부여받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마귀는 알아요. 하나님에게서 손 떼고 독자적인 자기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최초의 피조물이 마귀입니다.
깃대 들고 으쌰으쌰 한 거죠. ”나를 따르라! 언제까지 하나님한테 매일래? 독립해가지고 우리 독립한 사람끼리 이제는 하나님의 간섭 받지 않고, 우리 힘으로 우리 세계를 하자.“ 그게 뭐냐 하면, 독립했으니까, 인간이 독립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내가 신봉할 이름이 있어야 되겠죠? 신의 이름, 그 신의 이름은 내 이름이에요. 신의 이름은 내 이름입니다.
이제는 여호와 이름 대신 내 이름이 여호와 자리에 떡 앉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 가서 사장한테 그렇게 시달리면, 사표 팍 내면서 그 부하직원이 뭐를 집어 던지느냐 하면. 사장 명패를, 그 명패에 뭐가 쓰여져 있습니까? ‘김 아무개’ 이름이 쓰여져 있죠. 그걸 집어 던지죠.
”나는 네 이름에 너무 시달려가지고 내 이름이 죽도 못썼어. 네 이름 부숴버리고, 이제 내 이름으로 살 거야.“ 이런 거는 드라마에나 나와요. 실제로는 안 그렇고, 돈 물어줘야 되기 때문에. 드라마 보면 화딱지 나가지고 명패를 부숴버리죠.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내 자리가 있다는 말은 무엇을 확보했다? 명패가 있다면, 그 자리는 누구 자리죠? 나의 자리죠, 나의 자리. 내 이름이 있는 자리죠. 악마는 비겁하게 뒤에 숨어서 등 떠밀면서 ”너는 네 이름으로 살아라. 언제까지 등신처럼 살래? 네 이름을 빛내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섬기지 않는 이유는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고 되어 있어요.(요12:42,43-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자기 영광에 관심 있으니, 딴 데 관심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자기 영광이 있으니까 나를 믿지 않는다 했거든요. 말이 참 상당히 의미 있죠. 너희 영광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안 믿는다가 아니라, 너희 영광 때문에 나(예수님)를 안 믿는다는 거예요, 나를.
왜냐 하면,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영광을 포기했어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왔다고요. 그러니까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갑자기 두 개가 되고 말았어요.
‘나의 이름을 빛내주는 하나님 같으면 내가 영광 돌리리라.’라는 나름대로의 흥정, 거래 , 흥정 본능이 있어요. ‘나를 잘 되게 해준다면 내가 하나님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게요.’ 라는 것,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가는, 성당 가는 이유, 절에 가는 이유, ‘나한테만 잘해준다면 내가 자진해서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나만 구원시켜 준다면 뭔들 못하겠어?’ 이런 거.
그러나 하나님은 천국에 인간의 자리가 없다고 하세요. 천국 오는 사람은 사전에 자기 자리를 없애는 조치 하에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 이름, 내 자리를 없애는 조건 하에. 없애려면 뭐냐? 축복과 저주 둘 다를 줌으로써 ”너희들은 저주 싫지? 복 좋지, 그치?“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되면, 복을 원했던 이스라엘이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면서 어디에 합당한 자가 되느냐 하면은, 저주에 합당한 자로 서서히 자신을 드러내게 돼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고 가죠.
그러면 저주에 합당한 인간에게 복 이야기는 왜 했는가? 주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해주기 때문에 그래요. 동행하시는 분은 복이고, 동행당하는 자는 저주받아야 합당한 자고. 이 사실을 어디서 아느냐? 공통의 장, 말씀의 세계에 인간도 들어오고, 하나님의 이름도 들어오시고.
‘말씀의 세계가 인간의 자리보다 월등하게 더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에 이스라엘아 너희는 초대받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희는 초대받았다. 다른 민족한테는 이런 혜택도 없어요. 초대받는 거. 그러면, 여기 복과 저주 있으니까, 방금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 다 기억하시죠? 어항 그림 보여드렸으니까 기억하실 거예요. 그림 그리면 뭐합니까? 강의 끝나면 어항 조 뿌사뿌는데.. ‘나 복 받는다.’고 이상한 이야기 나와요.
복과 저주, 두 가지가 나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복만 추구해요. 복만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복과 저주가 두 개 다 나온다는 것은 둘 다가 가능한 어떤 자리가 있어요. 어떤 자리. 이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이름의 자리. 하나님의 이름은 동행하시는,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사람과 동행하시는 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자리에서 복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과 이스라엘과 함께 있으면서 최종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산출한다, 또는 생산한다? 복과 저주를 양쪽을 다 생산한다는 거예요. 복과 저주가 서로 대립되잖아요. 대립되는 것이 한 곳에서 나온다는 것은 이 안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점이 있는 거예요.
‘피’ 안에서 복과 저주가 다 나와요. 구원과 심판이 나오고, 천국과 지옥이 피에서 다 나오는 거예요. 영화관의 스크린에 영상을 띄울 때, 영상은 뚜렷하게 하나의 영상이죠. 영화가 막 섞여서 나오는 이런 건 뭐 안 되죠. 이 영화에 다른 영화가 중첩이 되는 건 말이 안 되죠. 하나의 필름에서 하나의 영상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 인간이 아는 상식이고 인간은 그게 한계입니다. 인간의 지식의 한계가 이거에요. 한쪽에서 진리와 거짓이 둘 다 나올 수 없다는 것, 인간은 그래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야고보서 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야고보서 3장 11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그럼요, 어떻게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물이 나오겠는가? 12절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게 인간의 한계, 피조물의 한계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 속에는 모순점이 없지요. 모순점이 없으니까 인간 자체는 천국에 못 들어가죠.
누가 데리고 들어가야 되지요. 왜냐 하면, 천국은 뭐가 나와요?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자리에서는 심판할 건 심판하고 구원할 건 구원하는 두 개 다가 나와야 되거든요, 두 개 다가. 피조물은 “난 어디 걸릴래.” 하는 것은 그 생각 자체가 자꾸 자기 구원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지 않아요, 영생을 주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모순되는 복과 저주가 다 나오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자리를 활용하고 사용하고 들어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말은 우리 어디 갈까? 천국 갈까, 지옥 갈까? 우리한테 묻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라면 지옥 갈 자도 나오고, 천국 갈 자도 나오도록 우리 안에 들어온 주님께서 그런 권한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권한이. 인간의 권한을 하나님이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주는 대로 먹어!” 그냥 주는 대로 먹을 뿐이에요. 인간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게 있잖아요. 그 원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 하십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육신을 입은 그 마지막 한계를 주님은 알고 계시고, 유일하게 그 한계를 넘어서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가 되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렵죠.
어느 정도로 어려운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저는 구원 받습니다.’가 내 뜻입니까, 아버지 뜻입니까? 내 뜻이죠. 나에게 싫어버린 바 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내가 싫지 않다는 것은 내 자리가 건재하다는 뜻이에요. 내 자리가 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의 특징은 자기가 돌아갈 자기 자리가 아예 박탈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면 뭐냐? 예수님 자리가 내 자리라고.. 예수님 자리가. 자기 자리는 없는 거예요 돌아갈 자리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같이 죽은 것을 예수님의 자리에 합세했다고 보는 겁니다, 합세했다고.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아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게 구원이 아니라, 피가 그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게 구원이에요, 피가. 그러면 성도 자신은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제가 언제 예수님께 먹을 걸 주었습니까? 언제 마실 걸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하는 일은 나의 자리를 박탈하는 식으로 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나의 자리가 박탈되게 되면, “나 지옥 가기 싫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라는 내 뜻도 일찌감치 주님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요. 내 뜻을 안 받아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내 뜻을 안 받아준 것에 있어서..
적어도 감사헌금 하려면 거기서 해야 되요, 거기서.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해 준 것에 대해서. 그런데 또 오바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오바하는 사람들. “주님, 지옥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뭐야, 이거? 연기야, 연출이야? 무슨 트릭을 이런 트릭을 쓰느냐? 지옥 가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하면 천국 보내줍니까?
두 개의 모순이 나와야 되는데, 이거는 자기 안에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본인의 꼼수가 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하게 되면 주님도 입 다물게 만드는 방법으로 기어이 나를 천국 가게 하는 비법을 생각하는 꼼수가 있으니까 ‘지옥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오바가 나오는 거예요.
‘몸 아프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 내 아들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 감사하면서 이런 의도가 있어요. 수백 명 교인 보고, 다른 라이벌 교인 보고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봐. 네가 나 정도 깊은 신앙을 갖고 있어? 내 아들은 죽었지만, 신앙은 내가 최고다.” 이런 거 있잖아요. ‘아들은 세월호에 빠져 죽었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나를 본받아라.’ 이런 거.
모순이 나온다는 말은 이거는 내 안에서 내가 일을 작동 못하도록 주께서 막는 겁니다. 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나는 뭐 되겠다가 아니에요. 만약에 내가 뭔가 되겠다가 되어 버리면 마태복음 7장 1절, 2절 말씀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면 이 본문 딱 보고 비판 안하면 되겠네 하고 비판 안하면, 비판 안한 것이 됩니까? 비판 안 하는 것, 비판이죠. 그러니 이 말씀을 아까 어항 그림 있죠?
우리가 이 말씀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말씀 안에. 여기서 내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목소리를 내도 누가 내야 돼요? 말씀이 목소리를 우리를 통해서 내야 되고, 말씀을 내려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 지키는 당사자,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주님이, 예수님이, 또는 성령님이 말씀 가지고 말씀의 고유의 그 의미를 드러내는데, 그게 딱 두 가지다 이 말이죠.
뭐다? 복과 저주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를 사용해서 복과 저주가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사용해서 복과 저주가 나오는 겁니다. 피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이 피가 우리 안에서 작동할 때, 예수님이 고난 받은 이유, 예수님께서 땀 흘려가면서 기도한 이유, 그 이유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육신 안에 들어왔으니까, 예수님의 피가 우리 육신 안에 들어와 버리면, 피 소리를 내거든요. 창세가 4장에서 피 소리가 나온다 했죠. 그건 아벨 속에 피가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아벨 속의 그 피가 말을 한다는 거예요. 아벨의 피가 말을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아벨의 관계가 끊어진 게 아니라 이어진 그 순간부터 아벨은 아벨 단독으로 남겨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벨 속에 들어가서 아벨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말씀이 형한테 맞아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피가 나온 거 아닙니까? 그게 피 소리 아닙니까? 주님은 그 피소리만 받아 챙기면 되는 거죠. 아벨이야 죽든 말든. 아벨이야 죽든 말든.
하나님의 피가 우리 육신 안에 들어오면, 육신이 그냥 육신다워야 돼요. 육신답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가 들어왔으니 나는 이제 구원 받았다.” 이렇게 또 자기 자리를 구성하게 돼요. 자기 자리를 구성하게 되면 아까 마태복음 7장처럼 “나 구원받았는데, 저 인간은 구원받았을까?” 이게 뭐에요?
이게 자기 자리로서 비판하잖아요. 주님의 자리가 아니라 자기 자리로서. 그러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이방나라가 이스라엘한테 지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슨 자부심이 생겼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승리했고, 저들은 우리 앞에서 패배했다. 아, 신난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런 거요.
또 홍해를 갈랐을 때, 우리는 홍해를 건너왔는데, 애굽의 군사들은 어떻게 됐어요? 다 빠져 죽었잖아요 그 때 미리암이 앞장서서 뭐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찬양했죠. 그 찬양 내용이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살았고, 저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했다. 아, 기쁘다.” 그 이야기죠.
그들이 광야 지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잘리는 거예요. 그들이 잘리는 거예요, 이제는. 잘려나가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면, ‘그럼, 우리가 안 잘리려면?’ 이러거든요. 참내, 안 잘리겠다는 그런 의욕, 그런 욕구가 결국 얻고자 하는 게 뭡니까? “헤헤, 나는 구원받았네.” 이거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구원 받을 거 같으면 주님께서 나한테 찾아올 필요 없어요. 아예 선악과를 안 따먹게 철조망으로 치워 놓든지, 칭칭 감아서 적극적으로 금지해 놔야 돼요. 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요? 사랑 같으면 아예 선악과를 칭칭 감아서 접근도 못하게 해놔야 근원적인 사랑이죠. 사랑 뭐 있습니까?
엄마가 아들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예” “나는 네가 죽기를 원치 않아.” “예, 어머니의 사랑을 알죠.” “알아? 그러니까 요 병이 무슨 병?” “너무 예쁘죠. 먹고 싶죠.” “그래, 요게 바로 독약이야.” 딱 보이는데 두면서 “먹으면 죽어!” 코 앞에다 갖다 대면서 “먹으면 죽는다고!” 그리고 아들이 가장 빈번하게 왕래하는 길 한 복판에다가 딱 갖다 놓으면서 “이거 먹으면 죽는다고!” 치워놓는 것도 아니고, 한가운데 놓았을 때,
아들 친구가 몰래 들어와 가지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죠. 사실은 그게 독약이 아니고 그게 영생수야. 영생수야. 하나님이 피조물이 신이 되는 걸 거부해서 먹지마라 했는데, 악마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았어. 왜? 그걸 제시한다는 것은 ”너 하나님 되면 안돼! 너는 인간이어야 돼, 피조물이어야 돼.“ 라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그걸 공개 안했으면 하나님 되려고 안 할 텐데, 떡 하니 대외적으로 공개를 했으니까, 이건 하나님이 자기 꾀에 넘어간 거야. 먹자. 먹고 우리 하나님 되자.
먹고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됐잖아요. 각자 각자가 하나님 됐잖아요. 다방에 가보세요. 남자들은 전부다 사장님. 전부다 회장님들. 명패에 자기 이름 다 있잖아요, 자기 이름. ”딴 것은 줘도 되는데, 내 이름은 모독하지마라.“ 이런 거요. 더 깊이 이야기하면, ”다른 것은 다 좋아도,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내 가문의 이름은 욕하지 마라. 너 우리 아버지까지 건드리나?“ 뭐 이런 거.
바로 이런 요소가 예수님의 피가 들어왔을 때, 그게 바로 인간은 애시당초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증거물로 육신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피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꼭 믿어요.’ 어떤 사람 있잖아요. ‘저는 끝까지 믿을 거예요.’ 하는 그 모든 이야기가 실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고, 본인이 의도했던 대로 계획 잡은 대로 나는 죽어서 천국 간다는 그런 일관된 포기 못할 야무진 그 뜻을 계획하는 그 수법이 예수님의 피로 다 들통이 나는 거예요. 들통 나는 거예요. 주의 피가 그걸 들통 내는 거예요.
심지어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 다음에 누구 이야기 했습니까? ”쟤는요?“ 하고 사도요한보고. 주님께서는 ”너는 네 할 일이나 해.“라고 사정없이 구박하면서 ”너는 네 할 일 해라. 안되겠다. 내가 재림할 때까지 쟤 살려둬야 되겠다. 내가 살린다고 할지라도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 말이죠.
‘왜 자꾸 너의 자리를 생각하느냐?’ 그런 이야기를 베드로가 들은 것은 베드로가 성령 받고 다 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원치 않는 죽음이 뭔지를 본인이 모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내가 그냥 원하는 걸 해주면 될 텐데, 죽을 순간에 내가 아는 죽음이면 되는데, 내가 모르는 죽음까지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냐?
이유는 간단하죠. 나중에 오순절 성령 받으면 알아요. 그게 뭐냐 하면은, 끝까지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두 가지의 모순된 것이 나와서 이것이 주님에게서 나오지,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 그걸 알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유명한 구절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갈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게 모순이잖아요. 누가 죽었어요, 안 죽었는데? 아니야, 죽었대. 이것도 모순이에요. 안 죽은 사람보고 지가 스스로 죽었다고 하니까 모순이고, 죽었으면 죽은 건데 내 안에서 살아있다. 네가? 아니! 누가? 예수님이!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이 말이죠.
왜 네 안에 인격체가 둘이 있어? 원래 있어. 네 안에 왜 있어? 예수님의 몸이 바로 인간의 육신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 안에 아버지의 뜻과 자기 뜻이 공존하는 것처럼.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혼인잔치가 나오잖아요. 혼인잔치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를 쭉 보면, 좀 어처구니가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 아들 결혼식이에요. 자기 아들 결혼식에 일방적으로 오라고 초청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국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내 뜻을 묻지를 않았어요, 내 뜻을. ”너 천국 갈래?“ 라고 묻지를 않아요.
그냥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 뜻이 가미되지 않은 곳이 천국이에요, 내 뜻이. 천국은 내 안에 들어온 피, 피 흘린 그 분,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진 게 천국입니다. 그걸 골로새서 1장에서는 아들의 나라라고 해요. (골1: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천국은 아들의 나라> 앞에 뭐가 하나 붙어요. <영광의 아들의 나라>영광의 아들이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무슨 영광을 포기 받습니까? 나의 영광. 나의 모든 영광을 포기 받죠.
제가 어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죠. 도대체 내가 실패하는 인생을 몇 번이나 실험해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인생을 설계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나는 내가 늘 실패를 거듭해야 된다는 건 아는데, 실패를 몇 번 해야 됩니까? 라는 것을 실패할 때마다 하소연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몇 번이나 남아있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일흔 번에 일곱 번“ ”490번 실패했습니다.“ 하면? ”일흔 번에 일흔 번에 일흔 번에 일흔 번에..“ 그러니까 베드로가 했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와 같은 모든 질문이 ”내가 책임지는 내 자리는 어떻게 됩니까?“ 라는 거. ”나는 좋은 쪽에, 좋은 나라에 가고 싶어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믿는 종교에 의해서 결정 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아는 종교를 가지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인간은 아는 게 믿음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믿어요. 종교가 없는 게 아니고, 개종을 안 하고 있죠. 교리 자기가 다 세우고요.
광주강의에서 얘기했듯이 자기가 이성적으로 입법 기능, 법을 다 제정하고, ‘나 인생 이렇게 살리라.’ 하죠. 자녀 키우면 다 알죠. 자기 나름대로 야무진 포부가 있고, 그 포부에 맞는 정교한 계획, 정교함까지는 아니어도 아무튼 계획이 있어요. 그게 자기가 스스로 만든 자기를 사수하는, 자기 공간을 사수하는 거예요.
사수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든 게 뭐냐, 따 먹었던 것 가지고 법 만들죠. 뭘 따먹었습니까? 선과 악. 이 지식 가지고 자기 사수하는 법을 만들죠. 자,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여호수아 8장 30절 보겠습니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아까 읽었던 신명기 11장의 본문은 뭡니까?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가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 했지요. 그 땅은, 선포된 땅은 말씀이 어항처럼 확 퍼져야 될 땅이에요. 말씀을 산포하기 위해서 가야 될 땅이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이 사는 땅이 아니고.
하는데, 그 두 개의 영상이 하나에서 나오거든요. 이게 모순이잖아요. 하나의 필름에서 두 개의 영상이 나오는데, 하나는 축복이고, 하나는 저주에요. 어디서 나오는가? 단 이름이 뭐냐? 에발산이 나와요. 에발산은 무슨 산? 저주에요. 저주에서 두 개가 나오는 거예요, 축복과 저주가.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말씀은 선포하는 자로 하여금 그들을 어디로 끌어 모으느냐 하면은, 단에서 모든 게 나오기 때문에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결과물을 내는 그런 역할을 하는 열두 지파를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느냐 하면은, 제단에서 출발해야 되고, 그 제단은 날마다 저주를(에발산이니까), 저주가 합당하다는 것, 이 저주에 너도 참여하고, 하나님의 이름도 저주받기 위해서 왔다는 거기에 참여할 때, 비로소 축복이 나오고 저주가 제대로 완료된 상태로 나온다 이 말입니다. 완료된 상태로.
그 역할을 하는 지파가 몇 지파에요? 열두 지파. 부채도사가 열두 폭의 부채살을 확 펴듯이. 그 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 기능을 어떻게 했는가? 열두 지파가 하나둘씩 다 저주받아요. 열두 지파가.
여기 여호수아 8장에서는 반쪽 정실부인 쪽은 축복을 선포하고, 선포는 자기가 받는 게 아니고 그냥 말씀을 던지는 거예요. 저 쪽 종 출신의 지파는 저주를 던지죠. 그러면 약속의 땅은 온통 무엇과 무엇으로 가득 차요? 축복과 저주로 가득 차죠. 이게 중첩돼 있는 거예요, 지층이. 중첩돼 있는 거예요.
어제 낯 설교 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평가를 얻기를 원합니까?“ 형편없다 또는 대단하다. 그 중간이죠. 이게 뭔가 하면, 제가 그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도표를 염두에 두고 한 거예요. 광주강의에서 한 건데. 수직선이에요. 우측으로 가면서 0,+1, +2, +3, 이렇게 되어 있고, 좌측으로 가면서 –1,-2,-3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게 뭐냐? 단층적이에요, 단선적, 단층적이라고요. 그런데 존재와 기능은 이중적이에요. 약속의 땅에 축복과 저주가 이중적으로 있는 거예요, 이중적으로. 말씀을 지킬 경우에 복이 되고, 안 그러면 그냥 저주에요.
그러면 어떤 때 축복이 되느냐? 본인이 저주 받아야 합당한데,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다는 경우에만 뭐가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 쪽에서 나온 복이 나와요. 왜? 저주를 경유했기 때문에. 저주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가 들어온다는 말은 우리는 저주 받기에 합당하다는 거예요. 그게 유지될 때 우리는 계속 영생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피를 믿는 자가 되어버리면 이건 모순된 주님의 자리가 아니고, 모순이 없는 ‘나는 드디어 얻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어떻게 돼요? 주님은 내 자리를 안 받으니까, 축복을 원했던 내가 뭐로 돼요? 저주를 받는 거예요. 이 과정, 이 계속되는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구약이에요. 구약 때까지.
열두 지파 하나씩 전부다 제껴지고 날라갑니다. 축복을 원했더니만 저주, 축복 원했는데 저주, 레위 지파 저주, 열두 지파 다 저주 받죠. 무효가 돼요. 열두 지파 몽땅 다 이방 나라에 팔리고, 유다 나라는 로마의 압제를 받고, 그 열두 지파를 지배하기 위해서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그 다음에 알렉산드리아, 마케도니아 헬라, 로마, 네 개의 짐승으로, 네 개의 짐승이 준비되어서, 네 개의 짐승은 열두 지파를 꼭꼭 전부 다 저주받게 하는 그 짐승의 나라죠.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신약에 나타나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들어왔으니까. 그들은 내세울 자기 자리가 없고, 나오는 것은 주님의 피, 다 이루심만 나오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나와 있죠. 7장에 몇 지파 나옵니까? 신천지가 그렇게 자랑질하는 열두 지파.
열두 지파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이 다 이루신 어린 양의 완성으로서 새로운 부채살이 되면서, 이거는 완료된 거예요. 왜? 그 안에는 이제는 다 이루신 분이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육신을 드러내든지, 저주를 드러내든지 그러한 작업조차도 완성된 백성임을 드러내는 증거로써 성령께서 활동을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같은 경우에,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구원할 때, 누구를 꽁꽁 묶어버리죠? 바리새인을 꽁꽁 묶어버리죠. 바리새인들의 그 판단을 꽁꽁 묶어버리죠. 인간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물으면 마태복음 12장의 먼저 담 타 넘고 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버리죠. 왜 주인을, 마귀를 꽁꽁 묶어요?
인간은 악마와 결탁돼서 내 자리를 스스로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묶어놓고 보쌈 하듯이 강제로, 악마도 묶어버리고, 가재도구로 있는 자기 백성도 묶어서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그 작업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그것이 뭐냐? 우리 인간 보고, 우리 자아 보고 뭘 하라는 게 아니고, 아예 그 이루어진 피가, 피 속에 뭐가 있죠?
축복이 있죠, 구원이 있죠, 생명이 있죠. 그 피가 아예 우리 속에 들어 와버렸으니, 피가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걸 성령세례라 해요. 성령세례가 우리 안에 들어 와버렸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남들 앞에서 복과 저주, 둘 다를 비로소 주님의 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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