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1강) 로마서7:9(십자가 반복) 20240930b(강의: 이근호 목사)
p.128 중간에 하겠습니다. [국가 이스라엘의 멸망은 자국뿐 아니라 세계를 향한 복의 근거지가 상실된다는 차원에서 전 세계의 멸망을 의미한다(사13-34장; 겔25-35장)]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샘플이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이 멸망한다고 다른 나라는 헤헤거릴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걸 ‘전조(前兆, 어떤 일이 생길 기미)’라 합니다. 지진의 전조. 뭔가 자꾸 흔들리다가 와장창 나중에 크게 나타나는 것. 전조현상. 이스라엘 멸망이 전조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써 그것이 전 세계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사야 13-34장, 에스겔 25-35장에 나옵니다. 이사야도 예언했고 에스겔도 예언했습니다. 그렇게 멸망했을 때, ‘애초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은 그럼 하나님이 인간을 속인 것이냐? 그 언약이라는 것은 결국 실패로 끝나느냐?’ 그렇게 나올 수 있겠죠.
이스라엘이 실패를 해줘야 그 실패 속에서 진정한 이스라엘이 나오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그게 로마서 11장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뜻인데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럼 처음부터 온전한 이스라엘을 유지시켜서 온전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면 될 텐데, 처음엔 마치 구원시켜주는 것처럼 ‘너는 네 백성이고 너는 내 종이다’, ‘야곱아 두려워말라’ 하고요. 이사야 42장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나오고,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에서 ‘너’는 예수님이죠.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장. 그다음 이사야 53장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1),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6)
하나님이 예수님만 구원하는 거예요. 내 백성이라고. 그럼 언약은 실패했는가? 아니죠.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완성됩니다. 완성돼요. 그러면 오늘날 마귀가 이렇게 예수님이 이룬 언약의 완성에 대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비난하고 그것을 저지하려 하겠어요? 왜냐하면 언약이 완성되면 자기들은 아까 요한계시록에서 봤던 것처럼 완전히 다 유황불에 들어가니까(19:20).
유황불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해 아까 요한계시록 19장만 봤었는데 21장에 보면 유황불에 마귀와 귀신들만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둘째 사망에 유황불에 참여하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 흉악한 자, 살인하는 자 이런 자들도 들어간다고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그러니까 어린 양을 모르는 자는 악마한테 반드시 굴복되게 되어 있고 굴복되어 한통속이 된 자는 한통속으로 다루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입니다. 그럼 그들을 지옥 보낼 수 있는 근거는 무슨 근거냐? 천국에 생명을 얻는 자들이 완료가 될 때 저쪽(지옥)도 같이 완료가 되는 거예요. 공사가 끝나는 거예요. 이쪽, 천국 가는 사람이 완료가 되면 저쪽 공사도 끝나요. 지옥 만들기와 천국 만들기가 같이 진행되기 때문에 천국 만들게 되면 지옥 만들기도 같이 완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강의에서 우리가 좀 더 어려운 것을 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 이루어집니까?’ 하는 말이 과연 성립되느냐 하는 그 문제요. 천국이 천국대로 완성되는데 언제 완성됩니까? 사도행전 1장에서 “이스라엘 회복할 때가 언제입니까?”(6) 제자들이 예수님보고 물었을 때 그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엔 애초부터 중립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이미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땅과 하늘이 같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벨은 언제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 자체가 성립 안 되듯이. ‘어느 영토에 속합니까? 어느 공간에 속합니까?’ 이러면 말이 되는데, ‘내가 언제 구원받습니까?’ 하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시간론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번 챕터의 제목이 [십자가와 주일성수]죠. 주일이란 시간에 관한 문제와 십자가에 관한 문제. 과연 ‘주일성수가 십자가의 의미와 합치되는가?’ 그걸 따져보는 그 이야기입니다.
전조현상이 이스라엘 멸망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우리가 궁금한 것은, 멸망 속에서 진짜 산 이스라엘이 완성된다는데 왜 꼭 그래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막혀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생명나무 가는 길이 완전히 막혀있습니다. 막힘을 더욱 막히게. 이것은 무엇과 반대말이냐 하면 ‘뚫어’의 반대말이에요. 변기 막힐 때 ‘뚫어’ 있잖아요. 그거 구입 왜 합니까? 막힌 것을 뚫기 위해 하죠. 그러나 하나님 뜻은 막힌 것을 더욱 더 막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진행하십니다. 막힌 것을 더욱 막히게.
여기에 대해서 성경에 나오는 구절 세 가지만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①“어찌할꼬”.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거죠(37). 그다음 이사야 6장 ②“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5) 또 하나는 로마서 7장에 ③“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24) 처지 곤란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난처하게 되었다. 곤란하게 되었다.
막힌 데서 뭔가 기회 있는가 싶어서 좌우로 어퍼컷 넣으면서 뭔가 빈틈을 찾으려 하는데 현실은 뭐였습니까? 갈수록 더욱 더 느끼는 것은 그 짓하는 자체가 오히려 뭘 해도 막힘이 더욱 더 꽉 막혀있다는 거예요. 막힘이 더욱 더 완고하게 막혀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완강함보다 더 막혀있는 게 주님의 완고함이에요. 주님의 완강이 인간의 완강보다 더 세고 인간의 완고가 주님의 완고에 져요. 백 날 완고해도 주님이 더 세요. 인간이 고집 세도 주님은 왕고집, 옹고집이에요. 제발 제 아들만은 허락해주옵소서. 다른 거 다 할 테니까 저 여자만은 허락해주옵소서 뭐 백날 고해해도 그 고해 안 받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다 막혀있는 거예요. 그 막혀있다는 증거가 이거에요. 피. 아예 피로 막아버렸어요. 끝났다는 거예요. 막힘은 더욱 더 굳건하게 막혀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구원시도는 끝났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않고서는 영생이 없다 했을 때, 그들이 영생을 노리고 왔다는 것을 이미 암시해주고 있고, 영생을 얻기 위해 나(예수님)에게 찾아온 모든 시도가 예수님의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는 그 한마디에 다 무산되었죠.
따라왔던 사람 중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어떻게 생각이 그리 일치되는지 전부 다 떠나가는 쪽으로 몰표 나왔어요. 모조리 다 예수님을 떠나기로 의견이 합치되었습니다. 의견이 동일했어요. 몽땅 다 떠났어요. 몽땅 다 떠나고 난 뒤에 주님께서 쓱 누구를 봤느냐 하면 아직 안 떠나고 있는 자를 봤죠. 열두 제자. 너도 가지 왜? 무슨 볼 일 있다고 왜 여기 있어? 너도 마찬가지야. 영생 얻기 위해서 지금 모든 걸 버리고 날 따라왔잖아! 내 살, 내 피 먹을 수 있어, 없어? 엄두도 안 나지? 그럼 너도 가!
네가 영생 얻으러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베드로가 한 말에 있어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를 떠나겠습니까?”(요6:68) “떠나! 지금 떠나! 영생에서 지금 떠나!” 그런 것은 안 통해요. 주께 안 통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선택이에요, 선택. 내가 열둘을 선택했다는 거예요. 열둘을 선택한 거예요. 선택이, 인간의 야무진 의지, 열의, 열성, 동기 부여 이런 걸 완전히 묵사발 만들어버립니다. 주님의 선택이.
그러니까 주님의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이 너희의 선택을 완전히 깔아뭉갠단 말이죠. 그걸 부정해버린단 말입니다. 막힌 것을 더욱 더 막히게 만드는 거예요. 왜? 인간은 뚫어~. 뚫어보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 선택이잖아요. 인간의 자기 선택은 주님의 선택 앞에서 용납이 안 되고 용서가 안 되죠.
매일같이 지금도… 주님은 휴가도 없고 추석, 설도 없어요. 늘 일해요. 일하는 게 선택에 관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고 놀질 않는 겁니다. 인간이 매일같이 자기 선택에 놀지 않듯이 늘 활동해요.
그런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셨잖아요. 인간 입장에서 우리가 의도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구박거리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인간은 예수님에 대해서 ‘모욕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욕감 느낄 때 하나님께 대드는 방법은 선악과 따먹으면 되듯이, 인간들이 예수님께 모욕감을 느낄 때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면 되겠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예수님이 꼭 나를 죽일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이라는 게 얼마나 자기가 다룰 수 없는 것인지….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난 뒤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들은 것을 취소시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에게 모욕감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제단 이야기했는데 제단이 있고 제단 밖에 열두 지파의 부채살이 있다 했죠. 제단을 경유하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 믿는 것을 변경하고 취소할 재량권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저주받는, 저주 산에 있는 제단에 들어오지 않으면 자기한테 좀 이익 된다 싶으면 교회 다니고 복음 믿고요. 좀 이익이 안 된다 하면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는 재량권을 자기한테 찾음으로써 그럼 나는 정말 나다움이 되기 때문이에요.
나는 신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상대해서라도 하나님 말을 듣지 않는 순간이 내가 신으로 등극하는 순간이 돼요. 내가 절대자가 되는 순간이에요. 같은 인간하고 상대하고, 뭐 김건희하고 윤석렬 상대하는 그걸로 안 되고 적어도 상대하려면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예수님과 상대해서 그 예수를 안 믿어주면 돼요.
예수님을 모독한다고 예수님을 욕하고 그게 모독이 아니라, 내가 당신 무슨 이야기했는지 심사숙고해서 잘~ 들었거든. 내가 신학교 나왔거든. 신학교 나와서 국회의원 된 사람도 있잖아요. 전도사하면서. 성경에서 무슨 말 했는지 내가 잘 알거든. 내가 옛날에 백독했거든.
이게 바로 가장 신을 모독하는 방법이에요. 신을 모독하는 방법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안 해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는 말을 안 해요. ‘어찌할꼬’라는 말을 안 해요.
마귀가 인간을 계속 부추기는 이유는 마귀가 아는 모든 걸 인간에게 전수해버렸기 때문이에요. 마귀가 알고 있는 것, 죽어서 천국 있고 지옥 있는 것. 아는 그것을 인간에게 전수해버렸어요. 그러니까 너는 지옥 있으니까 지옥 가지 말고 천국 가도록 노력하라는 거예요. 그게 오늘 목사를 통해서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악마가.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느냐? 뭐 막힌 거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냥 그 사랑을 붙들고 믿고 그 사랑에 매달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구원받는다고 자처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마귀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방법이에요. 막혀있음 자체를 모독하는 방법이에요. 주님께서는 주님 할 도리 다 했고 이제 우리 할 도리는 하나님이 내민 카드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참, 얼마나 못돼먹었는지요. 모든 신학자들이 다 그렇잖아요. 그럼 그 신학자들한테 배운 목사들도 마찬가지죠.
여기 <서약>이라는 노래, 알리라는 여자 분이 불렀던 노래 가사를 한번 보세요. 가락은 들어도 모르고요. 가사 한번 보세요.
한사람만 사랑하게 해 주소서(‘주소서’ 기원, 기도형식이에요.)
흔들리지 않는 맘을 내게 주소서
흐르는 강물처럼 영원하기를
내 마지막 사랑이 그대이길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만을
사랑하다 죽으렵니다
두렵지 않게 해 주소서 그대를 믿어요
그 손 놓지 않을께요
그대라는 선물이 고맙습니다
그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영원히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대가 내 삶이기에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만을
사랑하다 죽으렵니다
두렵지 않게 해 주소서 그대를 믿어요
그 손 놓지 않을께요
사랑하는 그대와 같이 늙어 갈수 있다면
함께 밥을 해먹고 그 품에 잠들 수 있다면
사랑은 주는 거니까 아파도 주는 거니까
그대를 사랑합니다 죽어도 사랑합니다
세월따라 모두 떠나도 내 맘속엔
그대만 피고 집니다
다시 내가 태어난대도 그대를 만나서
사랑하다 죽으렵니다
이왕 가사 나왔는데 노래도 어떤 노랜지 그냥 한번 들어보세요. 스토커에요. ‘한사람만 사랑하게 해 주소서 흔들리지 않는 맘을 내게 주소서 흐르는 강물처럼 영원하기를 내 마지막 사랑이 그대이길…’ 나머지는 집에서 들으소서.
왜 이 가사를 했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을 만나서 내놓을 수 있는 극단적인 표현을 묘사한 거예요. 이 극단적인 표현이 뭐냐? 이것이 죄라는 느낌이 못 들고 딴에 굉장히 순수하고 순결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본인한테. 본인한테요. 그러니까 타인을 통해서 내 안에 이런 순수함과 순결함이 있다는 것에 자기가 놀라버리고 자기 순수함을 즐기고 만끽하는 거예요. 저 사람을 저렇게 사랑할 수 있는 내가 좋은 거예요. 내 자신한테 내가 모르는 면이 있어서 감격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막혀있다 했잖아요. 이게 막혀있는데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다고요.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신에 대한 모든 극진한 추종을 다 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 가고자 하는 인간의 제일 앞머리에 바리새인들이 와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거예요. 어느 정도냐? 구약 성경을 보면서 과거에 자기 조상들의 오류, 조상들이 잘못한 것, 실패한 것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배운다는 취지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물론 지도층은 그렇지 않아요. 지도층은 로마 지도층에 붙어서 돈 벌기 바빴고,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순수하죠.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제시하신 카드는 이겁니다. 문제를 냈죠. “돈만 아는 세리, 창기, 강도 이들이 천국 가는 방법에 대해 제시해보라. 이들이 천국 가는 방법은?” 바리새인은 뭐라고 합니까? 단호하게 뭐라 합니까? “없다.”죠.
왜냐하면 이게 율법의 사다리이기 때문에. 율법은 빛이에요. 빛이 오게 되면 순수해지고 빛을 못 받는 사다리 저 밑은 어두워요. 그럼 어두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점차 점차 빛이, 영광이 비취는 쪽으로 올라가야 구원에 가까워요. 이게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종교 아이디어죠. 지금도 성화론이 이거잖아요. 밑에 있는 세리, 창기, 강도가 구원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 말씀을 하셨고 이 아이디어를 제시한 자가 악마였습니다. 왜? 바리새인은 아버지 악마의 자식이기 때문에. 인간 다 악마의 자식이지만 대표적인 악마의 자식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을 통해서 사다리 올라가면 빛에 가까운 것이 아니고 악마의 정신에 가깝죠. 막혀있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어떤 식으로 뚫을 수 있는가, 하는 아이디어는 악마 쪽에서 다 제공된 것들입니다. 종교란 이름으로 제공된 거예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마태복음 9장에 중풍병자가 지붕 뚫고 내려왔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네 죄를 사했느니라”(2) 네 죄를 사했다. 그러니까 기본이 뭐냐 하면 인간은 죄인데 이 죄에 대해서 죄 사함을 받는 인간도 죄가 뭔지 몰라요. 맨 똑같아요. 어서 좋은 사람 되어서 착한 하나님과 착한 하나님 나라에 착한 사람으로 합류되는 것, 이게 전부인데 주님께서는 뭐부터 했느냐 하면 죄 사함부터 했어요. 죄 사함부터. ■죄 사함부터 하고 그 다음 할 일은 뭐냐? ■도대체 무슨 죄를 사했는지를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생겨나게 하신 겁니다. 그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사랑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제 사랑을 하게 되면 이런 사랑을 하세요. 지금 문제는 그런 사랑할 만한 인간이 안 나타나서 문제가 되는 거죠. 얼굴 되지, 키 되지, 돈 되지, 성격 되지, 나만 사랑하지. 뭐 그런 인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백날 교회 다니고 뭐 해도, 교회에서 믿음 있는지 없는지 그걸 따진다 해도, 만약에 교회에 어떤 사람이 등장했는데 키 되고 성격 되고 마음 되고 다 되고 그런 사람 있다면 신앙은 일체 묻지 않고 달려들 겁니다.
그만큼 아직도 자기가 죄인 걸 인간이 죽을 때까지 못다 아는 거예요. 인간의 죄에 대해서. 그럼 어떻게 하느냐? 못다 아니까 그럼 손발 묶고 가만있으란 말인가? 그때 그때마다 주께서 상황을 줘요. 상황을 주면서 내가 인간들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끌리고 하는 인간들에 대한 그 태도를 상황 속에서 끄집어냄으로써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성령이 하는 작업을 같이 공유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기도 하고 맞는 말인데, 중간에 하나를 겪어야 돼요. ‘이런 사랑을 한 게 죄인 것을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걸 하나 이렇게 살짝, 중간에 하나 겪어야 돼요. 사랑은 좋은데 사랑마저 죄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되고 주님께 헌금하는 게 죄가 되고 주님께 기도하는 게 죄가 되고 전도하는 게 죄가 되고 성경 공부하는 게 죄가 되고.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특히 헌금하는 게 죄가 된다 하면, 아멘. 죄가 돼요.
그럼 왜 그런가?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에서 다 이야기해줘요. 그 이유가 시간 때문입니다. 참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인간은 왜 죄인 줄 알면서 더 깊숙이 죄에 들어가는가? 물론 죄 사함 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럴수록 기쁨이 더 깊이 나와요. 왜? 죄 지을 때마다 무엇이 더 뚜렷하게 오느냐 하면 막혀있음이 계속해서 기쁨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철저하게 막혀있는 이유를 아는 그 이유의 깊이가 기쁨의 깊이가 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이… 이건 말도 안 돼, 이게.
여러분들이 혹시 길 가다 ‘속편한 내과’ 간판 보신 적 있어요? 요새 뭐가 등장했느냐 하면 ‘등편한 외과’ 나왔어요. 동구청 상가에 보면 간판이 크게 있어요. 등편한 외과. 하여튼 표절을 해도 제대로 표절했어요. 시간이 인간과 만나면 최고 좋은 게 뭐냐? 내 육신 편한 게 최고 좋아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두 달 동안 35도 올라가다가 낮에 약간 선선할 때 어떻습니까? 기쁨이 화악 올라오죠. 뭐가 최고다? 내 육신 편한 게 최고에요. 내 육신 편한 게. 이런 기쁨은 예수 믿어도 안 생겨요. 산들바람에 확 다 넘어가요, 산들바람에. 파스 몇 개 붙여보니, 어 좋다! 후끈후끈 좋지요. 오순절 성령 받아도 이만큼 후끈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몰라, 그보다 후끈했겠지만. 인간의 육신에 시간이 째깍째깍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못 들어도 할 수 없어요. 인간은 모순되어 있으니까. ‘과거 한 때 나는 나이었던 적이 있다.’ 나는 나였던 적이 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은 과거만 기억해요. 맞죠? 인간은 과거만 기억해요. 그래서 인간은 과거의 존재에요. 과거의 존재.
과거의 경험들이 구성되어서 기억을 낳고 그 기억뭉치가 자아가 되고 그 자아는 자신의 육신을 자기 소유라고 여깁니다. 소유성. 자기 소유라고 여겨요. 그래서 육신이 편하면 자아가 편해요. 속편한 내과, 등편한 외과. 육신만 편하면 그때부터는 뭐 기분도 올라가고 만사가 기분이 확 좋아져요.
그런데 ‘한때 나는 나이었던 적이 있다’ 이런 말은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문제. 왜냐하면 하나님은 과거였던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없이 항상 하나님은 현재입니다. 하나님한테는 모든 게 현재에요. 하나님한테는 모든 게 현재고 인간한테는 모든 게 과거고.
막혀도 단단히 막혔죠. 그 막힌 게 뭐냐? 시간으로 인하여 막혀있는 겁니다. 인간은 과거 기억이 있기 때문에 과거 기억이 만들어낸 게 현재의식이고 더 나아가서 미래의식이에요. 아까 첫째 시간한 것,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결론은 새롭지 않다는 말했죠.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은 새롭지 않다.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이 자체가 과거에요.
그러나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날마다 주님께서 새로움을 창출해내고 있어요. 하나님은 새로움을 창출해서 현재를 만드는데 인간의 자아는 현재가 아니고 늘 과거의 덩어리에요. 과거의 덩어리라고요. 과거의 덩어리인 증거가 뭐냐? 그 증거가 자신의 육신이다 이 말이죠.
‘아, 내가 젊었을 땐 튼튼했는데.’, 이러거든요. 이건 뭐냐? 젊었을 때 튼튼하면 뭐합니까? 팔 올리면 어깨가 막 아파. 젊을 때가 아니라 몇 달 전에도 이게 올라갔다니까요. 지금은 뻐근하지만. 비교가 되니까. 비교가 되니까 그 비교에서 미래가 나와요. 시간만 지나면 미래가 되는 게 아니고, 과거의 아픔을 보상받거나 과거의 좋았던 기억으로 회복되기를 소원할 때 그때 우리는 미래를 고대하게 돼요, 미래를.
그래서 미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적일 때만 미래가 돼요. 희망적일 때만. 그래서 만약 과거에 내가 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절망적이고 피하고 싶죠. 그러나 인간이 미래를 피한다는 말 자체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처럼 인간은 시간 속에 갇혀있어요. ‘인간은 시간 속에 갇혀있다.’ 인간은 시간 속에 갇혀있습니다. 같은 말이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혀있다.’ 같은 말, ‘나는 내 속에 갇혀있다.’ 나는 내 속에 갇혀있습니다. 이걸 오후 설교에서 ‘태극기 휘날리고’ 했죠. 자기가 만든 성에 갇혀서는 바깥에서 여기 들어오면 내가 공격하겠다, 뭐 그런 식으로 자기 성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잠언서에서 언급하기를, 인간과 친하게 지내는 게 어느 정도로 어려운가 하면 성을 빼앗는 것보다 어렵다. 자기 마음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타인의 마음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성을 빼앗는 만큼 어렵다는 말은 각자 인간은 롯데 캐슬을 전부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성채를 다 갖고 있는 거예요. 갇혀있는 겁니다.
그 안에서 혼자 틀어박혀 미래를 상상하는 거예요. ‘내가 7급 공무원 합격하면 엄마가 얼마나 좋아할까. 열심히 공부해야지.’ 이런 거요. 그 안에서 희망도 만들어내고 동시에 절망도 만들어내고. ‘내가 못났다 할지라도 누가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해주면 나는 기꺼이 그 사람과 결혼할 용의가 되어 있다. 나이가 서른 넘었고 어떤 남자도 날 안 좋아할 때, 나 취직도 못했는데 ‘취직 못해도 당신 얼굴 보니 나 너무 땡긴다. 결혼합시다.’ 하면 얼른 결혼해줘야지.’ 아가씨 혼자서 상상해요. ‘그쪽에서 집이며 차부터 다 해오겠지.’ 혼자서 상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시간에 의한 상상 없이는 단 1초도 넘어간 적이 없어요. 길을 걷거나 뭘 하거나, 다음에는 한 달 뒤에는 앞으로 내일은 뭘 해야지. 항상 이렇게 시간 속에 갇혀있고 주눅 들고 하는데 그게 뭐냐? 그 기초가 과거에 자기가 구축한 자아상으로 이런 것을 이제 만들어내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 찾아왔던 그 사람들도 예수님을 찾을 때는 나름대로의 기대와 희망을 갖고 온 거예요. 자기 시간 속에 갇혀서 온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은 막혀 있잖아요. 막혀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움을 주려고 한 거예요. 새로움을 주는데 새로움에 뭐가 장애요소가 되느냐? 시간 속에 있는 과거의 자아상이 새로움을 방해하고 지장주고 공격하게 되는 겁니다. 반발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의 성이 있으니까.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것은 ‘영원성’이죠. 인간은 ‘시간에 갇힘’. 이 중간에 뭐냐? ‘막혀있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선 통할 수 없죠. 그럼 막힌 걸 뚫어서 자기 백성을 건지려면 주님 쪽에서 무슨 조치가 있어야겠죠. 그게 뭐냐? 주님 주신 이 영원성을, 인간의 시간 속에 있는 육신, 다시 말해서 죄 있는 육신 속에 영원성이 여기 들어오는 겁니다.
들어오게 되면 생기는 것이 바로 피. 십자가 사건이 여기서 생겨버립니다. 그럼 이거 뭐 우리 다 아는 이야기, 뻔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게 뻔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뭐가 기다리고 있는가? ‘피가 반복된다’는 이 사실입니다. 피가 반복된다는 이 사실이에요. 사도 바울이 이걸 알았던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반복된다는 겁니다.
반복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시간입니까, 아니면 늘 현재가 될 때 반복돼요? 인간은 과거라 여기고 현재라 여기고 미래라 여기지만, 하나님 앞에는 영원성이 콩닥콩닥콩닥 하나님의 심장처럼 늘 반복해서 하는데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면서 피 사건만 되풀이될 뿐이죠. 되풀이된다고요.
제가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처음에 총신대에서 이야기하고 많은 목사님들과 공부했을 때 그들이 한결같이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왜 십자가 제자리 뛰기 하느냐’에요. 그들은 뭘 기대했느냐 하면 십자가 말고 그다음에 성경엔 십자가 이야기 말고 부활도 있으니까 십자가 떼고 부활 떼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아까 그 바리새인 사다리 있죠? 계속 더 완전함, 완전함, 완전함. 그래서 성경에도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네가 그리스도까지 장성하라, 이런 본문들이 막 떠오르면서 그 본문에다가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거기다 완벽한 줄 알고 딱 연결시키는 거예요.
막혔다는 말은…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의 육신을 천국 내 자리에 올려 보내겠다는 그 일관성이 있잖아요. 나에 대한 어떤 보상, 힘든 인생 살면서 죽어서는 보상받겠다는 그 자체가 천국과 막혀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믿음이 없는 거예요!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고 자기 믿음을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포기 못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신학을 하고 성경을 공부해서 더 보태고 더 보태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알면 나중에 완전한 데 이를 것이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완전함이 반복된다는 것. 주님의 현상이 반복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너는 시간 속에 갇혀 너밖에 모르는 죄인이야! 너는 곤고한 자야!’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너는 곤고한 자야. 네 속에 악 있다? 로마서 7장에 나오죠. 네 속에 악 있다. 육신이 남아있는 한 죽을 때까지 그걸 느끼는 거예요.
이제 죄가 어떤 식으로 교묘한가를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거죠. 지옥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헌금하고 이런 죄. 우리 애가 아파서 내가 아파서 감사헌금하는 이런 죄. 되게 마음 낮추고 겸손해보이고 모든 것을 다 버린 무소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차원에 이른 걸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거.
주님의 십자가가 반복되어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반복해요. 자기 자신의 건전함과 우수함, 그것을 반복하면서 시간 밖으로 못 벗어나는 그 티를 내죠. 제목이 [십자가와 주일성수]입니다. 주일성수라는 건 없다는 취지로 이 글을 쓴 거예요. 주일성수는 없다.
무슨 예수님이 주일을 지킵니까? 아니, 다른 날은 일 안해요? “주님 도와주소서.” “가만있어보자. 지금이 토요일이고 내일이 주일이니까 내일 보자.” 이게 주님이십니까? 아니잖아요. 주께서는 주일, 일요일, 월요일 이런 거 생각 않고 일하잖아요. 그럼 다 무슨 날입니까? 다 주의 날이죠. 모든 날이 주의 날이잖아요. 뭐 어떻게 주님이 돌아가셨습니까? 주일이 제사지내는 날이에요? 주일만 주께서 일하고 나머진 내가 일하고 왜 그래요? 아직도 안식일 지키는 거예요?
근원적인 문제는 이거에요. 시간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성에서 나와서 영원성으로 돌아가는 이 순환, 이 서클을 되풀이하기 위해서 시간이 있는 겁니다. 왜? 인간의 육신은 시간의 저촉을 받으니까요. 늙어가고 죽어가니까.
그럼 이 서클 안에 있으면 우리가 늙어가는 것도 다 죄 때문에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도 죄 때문에 죽어가고. 늙어가는 것도 그냥 곱게 늙어가면 안되죠. 뭘 생산하고? 죄를 드러내면서 영원 속으로 간다는 사실을 이미 죄 사함 받은 자만 이걸 느끼게 되는 거예요. 죄 사함 받은 자만.
그러면 시간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십자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로부터 뭐가 나오는가? 말씀이 나오죠. 로마서 7장에 말씀이 율법이 나오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동안 말씀이 없었으면 몰랐을 뻔한 죄가 말씀이 옴으로써 나한테 죄가 나온다는 거예요. 죄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런 예를 들었죠.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을 예로 들었어요. 참, 말이 굉장히 중요해요. 내가 탐내지 말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본인에게 탐심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도이기 때문에 인식이요, 자기 인식이 아니고 위에서 주님의 인식이 자기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의 인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노리는 게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기어이 죽는 이유는 인간이 죄 덩어리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주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그걸 늘 새롭게 새롭게 느끼게 만드는 것, 이게 주님의 노림수거든요. 우리한테 말씀을 줄 때.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했는데, 탐내지 마라는 말씀이 오는 순간 내가 미처 몰랐던, 왜 몰랐냐 하면 우리 자아는 과거의 존재기 때문에 지금 탐내지 말라는 말씀과 결부되기 전까지는 내가 탐심이 가득 찬 사람이란 걸 몰랐는데, 뭘 새롭게 알았냐 하면 야, 내가 욕심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 그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 말씀이 나한테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 율법의 원칙에 의하면 죄 지은 자에게 뭐가 주어져야 돼요? 죄 지은 자는 저주죠. 내가 손해다/ 이익이다, 가 아니라 내가 저주를 받아야 죄인이 죄를 받아야 누가 빛나요? 율법의 선함이 빛이 나기 때문에 나를 이용한 겁니다. 이 관점도 내 관점 아니에요. 율법의 관점, 말씀의 관점이라니까요.
아까 어항 그림 안 잊어버렸죠? 어항,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 죄인이 충분히 죄인다워야 말씀이 멈추지 않고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탐내지 마라’ 그거 하나뿐입니까? 또 있잖아요. 도적질하지 말란 말 있잖아요. 벌써 탐내는 것도 저주받고 죽어 마땅한 거예요. 그런데 계속해서 주님께서 육신을 살려줍니다. 그다음에 ‘도적질하지 말라’ 그걸 또 빛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시간 속에 누가 들어왔어요? 시간 속에 율법이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이제는 율법으로 시간 속에 들어왔다는 예수님께서 로마서 7장 끝나고 8장에 보면 육신을 입고 하나님이 시간 속에 직접 들어와버리면 십자가 안에 우리가 90을 살든 100살을 살든 길게 살아도 그 지을 죄는 이미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 죄는 십자가 피로 이미 사함을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 중풍병자, 그다음부터 죄 안 지었습니까? 지었죠. 죽었다 살았던 그 마르다 오빠 죄 안 지었습니까? 죄 지었죠. 모세 마찬가지고요. 모세는 막 성질나서 두 번 쳤잖아요.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 “누구십니까?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되지도 않는 이상한 이야기 막 했잖아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탄의 가시를 집어넣어준 이유가, 그 쓸데없는 걸 왜 기도하느냐? 응? 됐네, 이 사람아. 넌 계속 가시 박혀. 왜 본인이 완전해지려고 해요? 뭔데? 시간 따라 후패해지는 게 인간이고 죄 짓는 게 인간인데, 왜 계속 죄 지을 생각 안하고 왜 완전해지려 하느냐 이 말이죠. 따로이. 따로.
그럴 필요 없어요. 영원함이 옴으로써 우리는 죄 속에서 죄 짓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 죄 사함의 영원성. 그것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육신이 여전히 시간 속에 놓이게 만드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걸 다른 말로 쉽게 하면, 예수님 육신의 반복. 역시 반복이에요, 반복. 강의 제목은 ‘반복’이에요. ‘십자가의 반복’. 늘 반복하는 거예요.
십자가만 반복하면 부활은 뭐냐? 부활은 십자가가 반복하는 그 환경을 부활이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살아있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반복함을 증거할 수 있어요. 그 능력이 부활의 능력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 남아있는 후패한 육신은 반복해서 죄가 뭔가를 드러내는 그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이 얼마나 기쁘고 십자가가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고민과 걱정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과거의 나는 이랬는데 과거의 내가 기대하고 미래의 내가 희망한 건 이거였는데 거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것 때문인 줄 압니다. 십자가는 간 곳 없고 자기 잘 되길 원하고 완전하기를 원하는 이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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