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4장 51절 (동행) 241008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마지막 24장 50절에서 53절까지입니다. 일단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게 한 마디로 무슨 뜻이냐면, 이런 뜻입니다. ‘세상은 없다’ 세상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없다. 인간이 거주하는 세상은 없어졌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인간이 거주한다고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다녀가심으로써 주님이 계신 곳이 세상으로 전환되는 것, 바뀌는 거예요. 이것은 관심사예요. 하나님의 관심사가 인간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다녀갔던 그 세계에 주님이 다녀가셔서 결과로 내놓는 그 세계에 하나님이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은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은 두 개가 되었는데 두 개가 되었으니까 한 쪽은 접자는 거에요. 한쪽은 없는 거예요. 한 쪽은 없고 한 쪽만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51절을 보면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그 다음에 뭡니까? “저희를 떠나” 라고 되어있지요. 떠났지요. 예수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가 분리된 거예요. 예수님이 함께 있다가 분리될 때 이 세상에 예수님이 계시는 데 홀로 하늘나라 갔다가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고 ‘한 분에 의해서 세상은 새롭게 창조되고 세상은 새롭게 파멸된다’ 이 말이에요.
세상은 뭐가 필요하냐? 한 분이 필요해요. 세상이 존재한다 있다 할 때는 “세상이 있네” 이러면 안 되고 어떤 분을 포함해서 계시냐를 물어야 세상이 있는 거예요. 주님이 계신 곳은 세상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창조 세계고 주님이 안 계신 곳은 뭐냐 하면 이거는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세상에 속합니까? 주님에게 속합니까? 주님이 홀로 올라가셨잖아요. 그럼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남아있는 세상에 속하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가 되냐 하면 ‘인간은 없다’가 되죠. 인간을 없애는 거예요. 인간도 없고 세상도 없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라고 항의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안 될 이유가 있어? 네가 굳이 있어야 돼? 네가 사는 세상이 꼭 있어야 될 이유를 대봐” 그래 되죠. 이게 무슨 생각이냐면 이게 바로 예수님 한 분에 의해서 세상은 만들어지고 한쪽은 없어진다 이 생각이 무슨 생각이냐면 ‘성령의 생각’입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의 생각이에요. 성령은 누구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죠. 예수님의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는 뜻이 성령의 뜻입니다. 봐주기 없어요. 그냥 주님의 뜻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 이게 바로 성령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생각은 뭐냐 하면 간단해요. ‘인간 제거’ 인간을 제거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면 모나리자 그림이 있어요. 별로 크지도 않아요. 큰 대작도 아닌데. 방탄으로 막아놨어요. 어떤 분이 모나리자에서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얼굴을 이렇게 갖다 대면 어떻게 합니까? 모나리자 설명을 하는데 사람들은 모나리자 그림을 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막 들이대면 어떻게 해요? 좀 치우죠. 성령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앞에 인간이 얼쩡대잖아요. 그거 치우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고 일입니다. 근데 소위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하면서 누가 얼쩡거리죠? 주님 앞에. “본인이~” 각자 본인이 주님 앞에 자꾸 얼쩡거리는 거예요. “제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서 천국가나요 지옥가나요” 그 두상 머리 좀 이렇게 치워버리는 거예요. “우리 교회 언제 어떻게 부흥 되겠습니까” “좀 치워” “내 자식은 어떻게 수능 얼마나 잘 치겠습니까” 그런 것들 이렇게 그리스도 앞에서 치워버리는 겁니다. 제거예요. 인간 제거입니다.
인간이 궁금한 것은 세상이 없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세상에 본인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꾸 모나리자 앞에 얼쩡거리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 들이대는 거예요. 자기 아쉬운 것을 하소연해서 응답 받겠다고.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인간도 제거하지만 뭐도 제거해요? 세상을 제거하니까 세상은 결국은 성령 입장에서 세상은 없는 거예요. 교회도 없고 나도 없는 거예요. 풀 나무 그거 다 없어요. 성령 앞에서. 오직 주의 세계 밖에 없어요. 이게 성령의 생각이고 하실 일이에요. 괜히 인간 눈치 본다고 다른 것 주워 넣지 마세요. 깔끔합니다.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생각에서 좀 발전해봅시다. 어떻게 논리를 발전하느냐 이렇게 발전할 수 있어요. 성령의 생각은 인간의 세상 제거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이 땅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이 말은 이 세상은 다시 와서 치워줄게 라는 말이에요. 세상은 주님 떠나버리면 치워야 될 대상이지, 희망을 걸 대상은 아니에요. 세상에서 희망 걸은 너도 없애줄게. 다 없애줄게. 이거를 근거로 해서 그러면 다음에 질문을 한번 던져보겠어요. 은혜란 뭐냐? ‘은혜(선물)’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은사.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준다 한다면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한테 없는 게 뭐 생기고 나한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한테 잘 간직해라 하고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은혜는 뭘 주느냐 하면 은혜만 줘요. 은혜가 주는 내용은 제거 대상이에요. 몸이 아픈데 은혜를 받아 건강하잖아요. 그 건강 제거 대상입니다. 없애버릴 거예요. 그 건강도. 은혜는 은혜만 줘요 은혜만. 은혜만 주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안 줘요. 은혜를 준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동행, 예수님과 동행입니다.
이건 좀 억지 예 같은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면, 에어컨이 없어서 에어컨 기사 불러서 설치한다고 합시다. 에어컨은 소비자가 설치하기가 힘들어요. “아빠 더운데 에어컨 언제 오는 거야?” “오늘 오후에 온대” “LG야 삼성이야” “물론 삼성이지” 이런거.. 그러면서 에어컨을 이제 설치했습니다. 애들에게는 오늘이 오후에 집에 에어컨 드디어 들어오는 날이잖아요. 그런데 설치기사가 에어컨을 설치하고 집에 가질 않아요. “집에 가시죠” “나 여기 살랍니다” 억지 예죠. 지금 에어컨이 문제가 아니고 왜 아저씨가 우리 집에 같이 산다는 것이 골치 아프죠. 우린 에어컨을 원했지 당신을 원한 게 아니라고요. 에어컨 기사가 “나도 그걸 아는데 네가 원한다고 해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해서 산다” 이게 주의 뜻입니다. 성령의 뜻이고요. 그 다음부터 귀찮아 죽겠어요. 집도 작은데 남의 식구까지 들어서니 귀찮아 죽겠어요. 이제 본인이 주인이 아니고 누가 주인이에요? 에어컨 기사가 주인 행세할 판이에요. 그게 은혜입니다. 이게 은혜예요.
이걸 구약에서 뭐라 하냐면 동행이라 해요. 에녹과 노아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겁니다. 그 뒤에도 뭐 동행한 사람 많지요. 지금 왜 제가 갑자기 동행 이야기 끄집어내냐 하면, 여기 49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시리니” 무슨 기사? 에어컨 기사죠. 뭘 원하는지를 몰라요. 내게 원한 것을 온다고 생각했지, 나를 제거하는 분이 온다고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오는데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And behold, I am sending forth the promise of My Father upon you; but you are to stay in the city until you are clothed (endued) with power from on high." 누가복음 오늘로 끝나고 다음부터 사도행전 합니다. 사도행전 이야기가 누가복음 후속편이에요. 똑같아요 흐름이.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능력이 뭐냐면, 성령이에요. 에어컨 기사. 물건이 아니고 내가 여전히 주인으로써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거꾸로 되어가지고 오실 그분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를 다루는 거예요. 약속하신 성령이 이게 구약에서는 뭐냐, 에녹과 노아입니다. 동행하는 겁니다. 그 뒤에 뭐 엘리야 엘리사 다 동행했죠.
구약에 미가 6장 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무심코 교회 가면서 성도들이 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해요. 내 쪽에서 뭘 가지고 나가고 뭘 하면 되고 어떤 마음 자세로 하면 하나님 받겠습니까? 무심코 나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마음 이런 인간을 덥석 포크레인 집게 가지고 물 듯이 그냥 물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너한테 집게 가지고 물어서 내 손아귀에 집어넣는 걸 하나님은 원하는 겁니다. 7절에 봐도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참기름을 원할까 들기름을 원할까 뭘 원할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야 자기 죄를 사하기 위해서 맏아들을 바치는 이 정도로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맏아들 없으면 누구를 바쳐야 되나 맏딸을 바쳐야 돼요? 무남독녀 외동딸 바쳐야 돼요? 요새 아가씨 같으면 뭘 바치겠습니까? 강아지를 바칠 거예요. 고양이나 강아지를.
“뭘 바칠까” 8절에 “사람아” 우리 말로 앞에 “이” 하나 더 넣으면 “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보이셨나니” 주께서 구하는 것은 뭐냐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데 그 인자와 공의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뭡니까? 행하는 것, 동행하는 것. 그러니까 공의와 인자는 하나님 쪽에서 간직하고 있는 공의와 인자가 제공되고 제공된 것을 그대로 그냥 회수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누가복음 마지막에 그 능력이 외부 능력, 자기 능력 아닙니다. 외부 능력 동행하는 외부 능력이 그들과 함께 온다는 거예요. 그분이 누구라고요? 성령이라고요 성령. 은혜라고 하는 것은 뭘 받는 게 아니고 은혜는 그냥 은혜만 받아요. 그 은혜가 뭐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거예요. 그게 은혜예요. 결혼을 하지 않는 총각 보고 “요새 누구하고 같이 살아요?” “예” “나한테 연락을 해야지” “나 요새 성령과 함께 살아요.” 많이 맞을 수도 있는, 밉상거리 되죠.
그래서 이 능력이 함께 오는데 그러면 이 능력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 52절을 한번 보세요. 보통 어려운 것이 많은 게 아니에요. “저희가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여기 예루살렘 나오죠, 왜 시작을 예루살렘부터 하죠? 대마도, 제주도부터 하면 안 됩니까? 왜 예루살렘부터 해야 돼요? 무슨 말이냐면 왜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모여야 성령이 오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왜 시작을 예루살렘이냐 말이에요. 강의 시작하면서 제가 뭐라 했습니까? 뭐는 없다? 세상은 없다 했지요. 눈에 보이는 세상은 없는 거예요. 세상 없으면 인간 제거, 나도 없어요. 주님 우리 놔두고 혼자 갔기 때문에 혼자 갔다는 것은 남겨진 것은 제거된, 내가 와서 쓰레기 치울게, 기대하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없애는 거예요.
여기서 세상은 없는데 예루살렘은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세상이 없어질 세상과 주께서 새로 만드실 세상, 주님이 포함된 세상 주님이 없는 세상으로 나눠주시고 그 접착 지점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정하신 거예요.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왜 시작을 예루살렘부터 하느냐 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아무 데나 하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과 관련된 사항이에요. 성령의 일은 인간과 대결하고 자연과 대결합니다. 인간과 대결하는 이 본문 찾아라 하면 갈라디아서 3장 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말은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반드시 육체의 일은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안 받는다 하나님께서. 왜? 제거 대상이니까. “헌금 기도 했습니다.” “아니 안 받는다니까 안 받어.” “천천의 기름과 들기름과 참기름 드리고 나의 죄를 위해서 맏아들 바치겠습니다” “안 받는다니까 그거 안 받어” “제 헌신과 봉사” “안 받는다니까” “제 회개” “안 받어” “그럼 뭐 받습니까?” “아무 것도 안 받어” “이거 미안스러워서..” “너 그 미안한 것도 안 받을테야”
제가 주일날 이런 설교했어요. 로마서 1장 16절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했지요. 인간은 뭐를 부끄러워하느냐, 복음을 부끄러워해요. “요새 혼자 살아?” “아니, 난 성령님과 함께 살아” 이게 대외적으로 웃사스러운, 인간 세계에서는 발설해서는 반칙이 되는. 전부 다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이야기에요. 이게 복음 이야기가 되어버렸어요. 왜 그러냐 하면 대구 강의에 얘기했지만 나도 살리고 하나님도 자존심도 살리는 방식을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제거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덧붙여서 내가 구원받는 나의 실제 이익을 챙기는 거, 그게 바로 종교라는 거죠. 종교 단체. 종교 단체는 자기 손해 보는 짓을 안 합니다. 기도도 노동이니까 노동한 만큼 뭔가 결과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기름값 써가면서 교회 갔다왔는데 자기에게 뭔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걸 노리고 하는데 주께서는 안 받아요. 육체의 일이 성령의 일이 되려면 그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은 제거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령은 누구랑 대결합니까? 인간이랑 대결하죠. 이게 뉴턴의 운동 제3법칙이에요. 서로 이쪽이 힘을 주면 저쪽도 힘을 준다는 거예요. 뉴턴은 그런 걸 봤죠. 일반인들은 그걸 상상도 못해요. 내가 이 테이블을 막 치는데 “술 내놔라 말이야” 문재인 딸처럼.. 주먹으로 술집 테이블 쳤을 때 술집 테이블은 그냥 일반적으로 맞기만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잖아요. 뉴턴은 그리 안 봤어요. 치면 네 아프잖아 만남을 통해서 이쪽 힘이 위치에너지가 압력을 가해가지고 내 손이 아프다는 거예요. 엄마가 애 때리면 맞는 애도 아프지만 엄마도 아파요. 성령이 인간을 대결하기 때문에 인간은 맨날 성령의 일에 대해서 공격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놔라 말이야, 계속 공격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은 또 뭐냐면 자연과 대립되어있습니다. 이거는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불로 나타나요. 떨기나무. 떨기나무가 자연과 대립됩니다. 분명히 불붙은 떨기나무는 타야 되는데 자연이 타질 않아요. 자연을 활용하죠. 불은 붙는데 자연은 타질 않습니다. 자연이 그대로 있다고 해서 그 자체 활용도는 소용 없고 주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다루어져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연은 가만히 두면 만유인력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대자연을 통해서 성령의 일을 안다? 모른다? 모른다, 왜? 대립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서 아무리 과학적으로 물리학 과학 생물학 백날 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신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과학은 그게 문제입니다. 창조과학은 신이란 절대자란 개념을 해놓고 성령, 십자가 이런 건 하나도 포함 안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이 자연을 통해서 증명됩니까? 성령의 불로 오심을 자연과학 가지고 증명이 돼요? 안되잖아요. 그런데 무슨 하나님이 있어요? 대립 관계인데 가짜 신을 이거 유신론 철학인데 가짜 신을 만들겠지요. 절대자, 그러나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알 수 없습니다. 왜? 대립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럼 대립 관계에 있는 성령은 뭐냐? 약속하신 거예요. 약속하신 능력은 인간과 나와의 대립 상태이고 자연과의 대립 상태예요. 인간이 요청한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주시는 거예요. 왜? 예루살렘의 확장이에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의 확장, 예루살렘에서 무슨 사건 있었죠? 바로 십자가와 부활 있었잖아요. 예루살렘은 분명히 자연에 속합니다. 지리적 공간이죠. 그런데 성령의 십자가 부활 사건은 자연과 새롭게 생긴 이 세상과 주님이 포함된 세상과의 접합점이 뭐라고 했어요? 예루살렘이라 했습니다. 접함점.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 세상 멸망 당할 세상 위에다가 산포 혹은 살포하는 거예요. 퍼뜨리는 거예요. 북한에서 보낸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고 그냥 살포 흩어버리는 것, 덮치는 것 그게 약속한 자에게만 가는 풍선이에요. 그럼 약속한 사람은 그걸 곱게 받는가? 곱게 안 받아요. 왜냐면 아까 한 것처럼 모나리자 앞에 가는 사람을 치워버리듯이 성령은 우리 자아를 제거하는 능력이 있어요. 왜?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여기다가 십자가 사건 자체가 고요하게 갖고 있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겁니다. 제거하기 위해서는 동행하면서 일단 우리의 자아를 제거하고 나중에 죽을 때는 우리의 육신을 제거하고 이래 제거하고 저래 제거하고 “영구 없~다”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끼리 만났을 때는 상대방의 육신 그걸 통해서 뭐를 해야 되냐면 주님께서 성도니까 성령을 받은 성도니까 주님께서 성령으로 그 사람을 제거하고 나타나는 십자가 사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성도니까 성도는 성령이 있는 사람이 성도예요.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을 성도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 실험해보세요 서로 부부끼리. 당신은 이야기할 때 자신의 뜻이 성령에 의해서 제거되고 제거되고 난 뒤에 나에게 주신 성령의 말씀은 이것이었다. 이거를 보라고 각자 배우자한테 한번 이야기해봐요. “여보 당신이 갖고 있는 주님의 뜻을 한번 내보라” “곗돈 날짜가 언제였지?” 왜 제가 이 말을 드렸냐면요. 주님과의 동행은 날마다 주님 앞에 얼쩡거리는 나를 치워버리는 일을 해요. 주님과의 동행 있지만 무슨 동행 있냐면 인간과의 동행 있어요. 이거는 치워버리는 게 아니고 그냥 붙잡아요. 나를 떠나지마 제발 나를 버리지 마. 그런 식으로 붙잡는 거예요. 이번 15일날 곗돈 타는데 날 버리지마. 그래 되겠죠.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딸 붙들고 뭐라 합니까? “니 나 버리면 안된다” 아버지 유산은 다 큰 아들 이미 넘겨줬지만 너는 딸이니까. 그냥 붙드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붙드는 게 아니고 혹시 하나님 믿는 사람 있는가 붙들어요. 득 보자고.
그거는 그 사람 붙드는 게 왜 그러냐면 내가 제거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이에요. 그 사람 덕 봐서 이용해서 나한테 손실이 없도록 발악을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을 의지하지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사건이죠. 예루살렘 그 주민들이 유대인들이 뭘 했습니까? 그들은 집결했고 단결했어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사람들이 괜히 그냥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미가 4장 1절에서 2절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몰리는 데 그 장소가 어디냐?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산이 어딘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서 나옵니까?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잖아요. 예루살렘이 유대인에게 이거는 못 버리는 거예요. 전쟁하고 있는 지금 수도가 어딥니까? 텔아비브 아니에요. 예루살렘으로 옮겨놨어요. 미국 대사관도 예루살렘에 있다고요. 몰랐어요? 예루살렘이 지금 수도예요. 왜? 미가 4장에 지금 말씀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주님 한번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부터 나온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이미 나왔잖아요. 예루살렘에서 일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말씀은 다 이루었지요. 그 다음부터 예루살렘에서 나올 건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에요. 그거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마가의 다락방부터 120명 모여서 기도할 때. 왜? 성령께서 이 미가 말씀을 달성해야 되니까요. 이 스케줄대로 따라야 되니까.
52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어디로 간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베다니는 뭐냐? 예루살렘의 근처 언덕이에요. 언덕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그 감람산 위에 가면 승천교회라고 예수님이 승천한 자리에다가 교회 세워놨어요. 그리고 거기서 축복 받고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 속으로 돌아간 거예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되어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과는 비록 헤어졌지만 이 멸망 받을 세상 인간 위에 주님께서 뭘 바가지처럼 붓는 게 있겠죠. 그게 약속하신 능력이 그들에게 부어진다는 거예요.
아직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게 중요한 게 남아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선택’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능력이 임한 것은 선택된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갔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이방인들은 관련성이 있습니까? 관련성이 없어요 이방인들은. 이게 상당히 어렵진 않은데 복잡해요. 예루살렘은 여기 분명히 아까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에서 다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그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면 본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그냥 예루살렘에 죽치고 앉아있으면 그걸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시작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하니까요.
말라기 1장 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하는도다” 여기서 이방인이 끼어듭니까? 안 끼어듭니까? 이방인이 끼어들지 못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자기한테 적용시키려 하는데 이거는 반칙이에요. 이거는 이방인들은 해당이 안 됩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되어있어요. 이것은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 말을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나는 사랑한 자만 사랑하고 그 외에는 미워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어렵지요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날 사랑하고’ 이렇게 하니까 성경 말씀이 전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버림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안되는 겁니다. 특별히 사랑한 거예요. 특별히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버렸는데 특별히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만 사랑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단군의 자손은 좀 빠지세요. 단군의 자손은 중국 계통이나 일본에.. 좀 빠지라고 그런 사람들은 해당 사항 없어요. 필리핀 사람도 마찬가지고. 말라기 이거를 자기한테 적용시켜가지고 말라기 3장 7절을 한번 볼까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간다 그 말씀 나오잖아요. 이게 이방인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하나님과 자기들 이야기라니까요 우리는 해당이 안돼요. 이거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자.” 남의 종교에 왜 돌아가요? 우리는 단군의 하나님 있는데.. 물론 지옥 가지만.
그 다음에 이르기를 3자 7절에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잖아요. 말라기를 제가 펼친 이유가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바로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은 그 자리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여호와께 못 돌아갑니다. 왜? 어두움에 있는 자가 무슨 수로 어두움을 뚫고 여호와를 믿어요? 인간은 하나님을 못 믿는다니까요? 하나님을 만들어내지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들어내지 돌아가지 않습니다. 돌아갈 거 뭐 있어요? 지가 만들면 되지요. 엄마는 아이에게 인형을 못 만들어줘요 돈 주고 사면 돼요.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갑니까? 쫓겨났는데. 못 돌아가요. 그래서 그 당시에 이미 제사장 언약을 위반한 유대인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 방법이 나와요. 그거 때문에 제가 말라기를 펼쳤습니다. 4장 6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되어있지요. 이 사람이 누구죠? 바로 누구냐 우리 지금 오랫동안 누가복음 해왔죠. 누가복음 1장 17절 말라기에서 이제 누가복음으로 갑니다. 말라기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돌아오라 했는데 인간들이 뭐라 해요? 어떻게 돌아갑니까 했죠? 바로 세례 요한을 보내는 거예요. 그럼 이제 물어봅니다. 세례 요한 보내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한 하나님께 돌아오는 거예요? 아니면 예수님께 돌아가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세례 요한이 누구의 선지자예요? 세례 요한 뒤에 오실 분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 아무도 못 알아보는 하나님. 아무도 못 알아보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말라기의 예언에 대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겁니다.
이렇게 복잡해요. 누가복음 1장 17절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죠. 이게 말라기 예언대로 되었죠. 그런데 이게 뭐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라 되어있죠? 이 능력에 대해서 누가복음 1장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세례 요한의 엄마에게도 성령이 임하고요. 아버지 사가랴에게도 성령이 임해요. 누가복음 1장 67절에는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이르되” 아까 처음 강의할 때 했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무엇이냐? 그 앞에 좀 치워라 하는 거죠. 사람은 입을 다물었어요. 갑자기 벙어리가 됩시다 합죽이가 되어버렸어요. 김희갑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이 있는 사람만 알아요. 갑자기 사가랴가 말을 못해요. 입은 있는데 말을 못해요 이게 성령한테 제거가 되어버린 거예요.
또 누구냐 하면 1장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때 엘리사벳이 41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그 다음에 뭡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큰 소리로 축복하고” 마리아한테 애기한테 축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성령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증거하는 건 뭡니까? 약속하신 분은 따로 있다. 우리의 육신으로 우리가 말씀을 지킨 게 아니다. 약속 모든 걸 다 이룬 분은 따로 있어서 주님께선 그 세계에 내가 너를 넣어줄게 너는 그와 합류되면서 지금부터 너는 나와 함께 가는 거야 그냥 가는 거야 동행하는 거야. 이 동행의 티, 동행하는 그 구현하는 모습 이것을 바로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이것이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4장 51절 (동행) 241008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메신저와 메시지의 차이, 전하는 사람과 전하는 내용의 차이. 이게 바로 예수의 증인이라는 것이 예수의 증인 자체를 증거하는 내용이 들어가면 안돼요. 예수님만 드러나야 되기 때문에. 세례 요한같은 경우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 붙들고 뭐 하겠다 하면 안돼요. 그거는 세례 요한 쪽에서 스스로 자기를 부정했습니다.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된다. 날 붙들고 하지 마라. 아까 모나리자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성령의 일은 간단해요. 주님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아야 돼요. 자기 자신을 갖고 쪼물딱거리지 마라. 자기 자신을 갖고 뭘 할 생각하지 마라.
누가복음 1장 15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입니다. ‘나실인’. 구약성경 민수기 6장 3절에 나와 있어요. 포도주나 독주를 멀리하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된 자, 삼손도 마찬가지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면서 뭐가 되느냐? 메시아가 아니고 메신저가 되는 거예요. 메신저. 메시아는 따로 있고요. 메시아를 드러내는 모델적인 인물. 메시아를 증거하려면 이런 자세로 증거해야 된다를 샘플로 먼저 주신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 세례 요한을 보내가지고 그 말라기 예언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그 자식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와요. 아까 제가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했죠. 그건 어디에 해당됩니까? 택한 백성에게만 해당이 돼요. 택한 백성. 말라기 자체가 택한 백성이에요. 이방민족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철저하게 규모 있게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그 미가 4장과 1장처럼 예루살렘에서 사건 일어나게 되면 이방민족들이 거리로 달려들어오게 되어있지요. 택한 백성은 이미 구원을 받고 그 택한 백성 쪽으로 이방민족들이 야 너 뭐 받았어?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는 소문 듣고 왔어. 예루살렘에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지? 그렇지? 라고 달려오는 자들이 이방민족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이방 민족들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나서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사도들은 그냥 메시아가 아니고 메신저에요. 그들이 받았던 그 내용이 사도나 성도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예루살렘을 고집하고 있어요. 왜냐? 사랑받을 자에게만 사랑이 가야 되기 때문에. 말라기의 그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2장 3절 아까 미가와 같은 말씀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이 나라 저 나라 심판하신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자, 아까 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엘리사벳에게 성령이 임했지요. 그 다음에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세례 요한이 출생했다는 그 이야기했고요. 그 다음에 세례 요한에서 말라기 엘리야가 올 것이다. 엘리야가 뭡니까? 세례 요한이죠.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상당히 어려운 말해요. 나 아니고 내 뒤에.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앞에서 보면 한 사람인데 내용은 뭡니까? 자기 안에 또 한 분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안개가 자욱하게 꼈는데 안개가 걷히면 뭐가 나타나요? 실체가 나타나죠. 세례 요한은 무슨 역할? 안개 역할. 자욱한 안개.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 안개 걷히니까 예수님 나오죠. 이게 뭐냐? 메신저. 메시아 아니고 메신저 역할 하는 모든 성도, 성령 받은 성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나는 뭐다? 나는 안개다. 나의 모든 것과 그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그때그때마다 제거해주는 거예요. 얼굴 좀 비켜라 하고 제거를 해주게 되면 비로소 주님의 다 이루심이 나와요. 주님의 다 이루심. 주님의 다 이루심 감사하라고 하는데 뭘 다 이뤘느냐? 그게 바로 나실인의 역할에서 나옵니다. 나실인의 역할, 쉽게 말하면 헌신하는 사람. 특별히 뽑혀가지고 하나님이 한 사람만 조진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그 사람에게만 모든 걸 일임해서 그 사람이 제대로 업무 수행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이 그 혜택을 보는 관계가 나실인과 일반백성들의 관계예요. ‘너 나와’ 해서 한 사람 뽑아놓고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을 짐승 제물을 잡지만 사실은 그 모든 의도는 너희들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제물을 잡는다. 그런데 제물과 인간 사이에 인간의 요소와 제물의 요소 둘 다를 겸비한 인물이 필요해서 나실인을 뽑았거든요.
그러면 과연 죄 용서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 그걸 시간으로 째깍째깍 해서 땡 끝날 때까지 나실인의 규칙 제대로 지키면 죄 용서된 걸로 해줄게 라고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거예요. 독주, 옛날 사람은 술도 많이 먹은 모양이다. 독주, 포도주 그걸 먹고 싶어도 노아가 뭐 먹고 취했습니까? 포도주 먹고 취했지요 노아가.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인간의 밀보다 먼저 생산된 것이 포도주라는 말도 있어요. 고고학적으로. 우리는 양식이 먼저다 하는데 양식이 아니고 술부터 먼저 만들었다. 인간의 미각을 자극하는 모양이죠. 포도주와 독주 그렇게 마시고 싶은 것을 참고 인내하고 죽은 자의 시체나 이런 걸 가까이 안 하면서 그 기간을 지키면 그 기간만큼 자라나는 게 있어요. 머리카락이에요. 머리카락이 자라면 그 기간 다 되었을 때 수고했어 그 머리카락을 잘라서 사람은 죄인이라서 끼어들면 안돼요. 흠 없는 제물에다가 그 나실인의 머리카락을 합류해서 하나님께서 응답받겠다. 이 시스템이에요. 그게 나실인입니다.
방금 나실인 설명했으니까 나실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대신 하심. 대신 하셔서 그걸 동행 방식으로 집어넣어주심. 대신만 하면 안 되잖아요. 너 대신 했다 볼 일 끝났다 이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대신 하심의 효과를 누구한테? 자기 택한 백성한데 집어넣어야 되잖아요. 그렇죠? 집어넣는 것 이게 나실인의 역할이에요. 자, 나실인 다시 보면 첫 번째 백성 중에서 뽑아낸다. 집단에서 하나를 뽑아낸 거예요. 뽑아냈으니까 그 나실인의 효과는 어디다 도로 집어넣어야 돼요? 그 집단에 다시 집어넣어야 돼요. 집어넣어야 된다고요. 오순절 날 성령이 내렸잖아요. 성령이 각 사람 머리 위에 불꽃으로 내렸잖아요. 이게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창세기 11장에 보면 한 통 속이 나와요. 바벨탑 나오지요. 바벨탑. 바벨탑을 통해서 인간의 생각들과 별 차이 없이 고만고만하다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끼리는 통하는 공통적으로 엮어져있고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 싸우지 않고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어요? 우리의 이름을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 하늘까지 올라가는 것. 우리의 이름이 최고까지 올라가는데 그들은 군소리하지 않고 하나같이 협력이 되었습니다. 최고가 되는데. 인간이 신이 되는 것에. 그러니까 인간은 현재 인구가 82억이라고 하거든요. 그들이 딱 한 마음이에요. 다 같이 신이 되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너희가 아담에서 났느니라. 이 표현으로 다 끝냈습니다.
아담의 악마적인 마음을 똑같이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같이 현재 똑같이 움직인다. 똑같이 움직인다. 개성이고 뭐고 너는 나랑 다르고 다르죠. 환경이 다른데. 그러나 깊숙이 있는 무의식의 그 지점에서는 다들 같은 마음을 갖고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자식을 낳았으니까 똑같은 마음이죠. 그러면 주님의 나라, 주님의 새로운 나라의 백성들도 여러 마음 되면 안돼요. 한 마음 되야 되겠지요. 한 마음이니까 성령이 오는데 너는 노랑 불꽃이고 나는 파랑 불꽃이고 한강에서 불꽃놀이 하듯이 그런 것이 아니고 동일하게 한 불꽃으로 오지요. 한 불꽃으로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외칠 때도 똑같은 말로 하는 거예요. 똑같은 내용을 각자 여러 가지 다른 외국말로 하는 것, 이걸 가지고 복음이라고 하고 내용상 복음이고 형태는 방언이고 가 되는 거예요. 방언은 뭐냐? 복음이 들어있는 것을 방언이라고 해요. 룰루랄라 이게 방언이 아니고요. 그거는 불교 단체에서도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장까지 봤지만 1장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례 요한에게 갔던 초점이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한테 맞추면서 성령이 작용해요. 성령이. 그리고 누가복음 3장 보게 되면 세례 받을 때 22절 하늘에서 뭐가 내려오죠? 성령이 내려오죠. 성령이 내려오시고 예수님께서 4장에 시험 받을 때도 성령이 와서 4장 1장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지금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까지는 예수님이 성령을 주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도하는 것은 십자가 이후의 승천하실 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그 다음부터 성령을 자기 임의대로 자기가 주관하시죠. 여기에서는 예수님은 철저하게 반대로 성령한테 종속된 삶을 살아요.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 세계는 성령의 세계에요. 인간의 세계가 아니에요. 육체의 세계가 아닙니다. 성령의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육체는 죄가 없기 때문에 육체를 제거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죄인인데 약속의 성령이 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무슨 취지? 대신 하심으로 동행함으로 있어야 되기 때문에 이 대신 하심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늘 제거 대상이 되는 거예요. 대신 하심을 위해서. 너 말고 네가 바친 거 말고 내가 널 위해서 바친 거 말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이 뭐 바쳤습니까? 피 바쳤잖아 피. 너를 대신해서 피를 바쳤다고 아버지한테. 그런데 네가 왜 아버지께 돈을 바쳐 왜. 돈 얼마 바쳤어? 반 바쳤습니다. 에잇 죽어라! 죽었잖아요.
우리 인간 치고 온전한 십일조 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온전한 십일조를 어떻게 해요. 온전한 십일조 하라 창고에 차고 넘칠 것이다. 탐은 나는데 야 창고가 넘쳐 야 금괴 1톤이 얼마야. 창고에 가득 찼다. 탐은 나는데 문제는 온전한 십일조가 불가능하다니까요. 온전한 십일조는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할 수가 없어요. 의와 어떻게 집어넣습니까. 십일조에. 10분의 1만 내라는데 바칩니다. 이게 온전한 의에요? 이게? 혼자 사는 것은 의와 신과 인이 아닙니다. 공의와 자비는 동행해야 받는 거예요. 주셔야 되는 것이지 내 속에 무슨 의가 있어요. 없지요. 나실인으로서 메신저 전달자가 된다는 이 말은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와 함께 대신 죽으심으로 계속 동행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강의인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우리 손자가 낮잠 잘 때 지정된 자리에 눕는다고 했지요. 자기 집 가서 자면 되는데 아직까지 너희 집 가라는 소리는 못하고 있는데. 주님의 십자가 안에 우리 죽는 자리를 따로 마련했다고 했지요. 그걸 지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성령이 개입합니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개입해요. 이때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 이 전체는 성령이 주관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성령을 주관하는 거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에 승천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주관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십니다. 이게 성령 세례에요.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사이에 괄호를 쳐요. 여기에다가 자기가 구원할 백성을 여기 괄호 속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래요. 탄생하셨다. 성령으로 탄생하셨어요. 돌아가실 때 성령의 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돌아가시고요 성령의 힘으로 다시 부활되세요. 성령으로. 그 중에 이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 죄 없는 육신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이에요. 본인은 죄 안 지었지만 육신은 죄 있는 육신이에요. 로마서 8장 3절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이게 참 신비롭죠. 죄 있는 육신의 몸인데 죄는 안 지었어. 어떻게 가능하느냐? 이것은 하나님이니까 가능한 거예요. 인간은 못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 있는 육신 같으면 육신에서 죄가 뿜어 나오기 때문에 그 죄는 이미 인간은 아담은 죄에 굴복 당했기 때문에 죄가 나오지 의가 안 나옵니다. 인간의 의라고 하는 것이 죄에요. 죄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착한 일했다고 하지 마세요. 착한 일했으니까 복주세요. 이런 말하지 마세요. 인간은 죄 외에 다른 것은 안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한데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잖아요. 바로 예수님의 배 속에 바로 자기 택한 백성을 집어넣는 거예요. 이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대신 하심. 아까 대신 하심은 나실인 세례 요한에 관한 것이 아니냐 하는데 아까 말씀 드렸어요. 세례 요한은 몸은 하나인데 또 한 분 들어있다고 했지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내가 이루는 나실인의 완성은 세례 요한이 이루는 게 아니고 세례 요한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서 그걸 나실인을 완성을 해요. 왜냐하면 말라기 엘리야가 뭐냐?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는데 그거는 너희들이 나를 찾아라. 어떻게 찾아요? 인간은 몰라요. 아까 말씀 드렸지요. “너는 나에게 돌아오라” 할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라기 선지자에게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돌아갈까요?” 돌아가는 방법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엘리야를 보내는 거예요. 엘리야를 보내는 게 왜 돌아오는 게 되느냐? 엘리야를 보내면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에게로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이 중간 매개 역할을 엘리야가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엘리야로 오신 분이 세례 요한이고 그 임무를 마감하신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에요. 세례 요한은 뭐 죄인 아닙니까? 세례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역할 안에서 마감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왜 다른 말고 세례 요한 속에 들어갔느냐? 세례 요한이 나실인이에요. 나실인. 왜 나실인에게 오느냐? 나실인은 민수기 6장에서 대신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서 대신하는 거예요. 바벨탑이 뭐냐 하면은 바벨탑은 어떤 인간을 뽑아도 마음은 똑같아요. 우리는 신이 되자. 하나님처럼 되자. 너, 나 똑같애. 그런데 나실인은 뽑아놓으면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다른 사람은 안 해도 그 사람은 나실인의 그 규칙을 그 사람은 다 지켜야 돼요. 그래서 세례 요한도 나실인이고 예수님도 나실인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다른 이름으로 하지 못한 그 다른 존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 홀로 이뤘으니까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하나님이 준 적이 없어요. 주신 적이 없다고요. 이거는 다른 사람이 흉내를 못합니다. 자기 안에 택한 백성을 집어넣는 것. 괄호에 집어넣는 것.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괄호에 집어넣었는데 막상 집어넣은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12제자. 12제자는 자기가 열심히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구원되는 줄 알았어요. 주님 대신 집어넣은 것을 모른다니까요.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오늘날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당황스럽고 난처한 입장을 계속 주께서 상황을 줘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성도가 되가지고 자기가 구비할 것은 다 구비했어요. 예수 피 믿고 또 혹시 놓칠 거 있을까 싶어서 재림도 믿습니다 하고 언약도 믿습니다 하는데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아무 짝도 소용없다고요. 막상 자기에게 당황스럽고 난처한 일이 있으니까 그때 자기가 알고 있는 복음 지식이 하등 말짱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법원에서 와서 딱지 붙이고 있는데 십자가 믿습니다가 무슨 소용 있어요. 망했어 난 망했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갑자기 어떻게 해요? 같이 살아요? 여태껏 혼자 살았어요? 혼자 살았어요. 같이 안 살았어요. 성경에는 나와 있죠. 성령과 함께 한다고. 알지요. 그 얼마나 믿습니다 하고 갈라디아서 3장 3절 할 때는 내가 육체로 마치겠는가 성령으로 마치겠는가. 성령으로 마친다고 했는데 법원에서 뭐 날라오는데. 날라오는데. 도대체 인간 쪽에서 무슨 잘못을 일으킨 거예요? 주께서 나를 괄호로 묶어놓는다는 사실을 묶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를 주님께서 밧줄로 꽁꽁 묶어놓은 거예요.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실컷 살았는데 주께서는 딱 한 자로 뭐?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부모님 섬겼습니다 다 잘 섬겼습니다. 뭐? 그래서 뭐? 그게 뭔데? 네 자존심이었지. 너 의잖아. 뭐? 복음으로 핍박을 받아서. 핍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밥 먹고 사는 게 핍박 받은 대가가 아니고 그냥 살려준 거예요. 네가 살아있다 가 아니라 네 곁에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주님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추어탕 사주고 밥 주고. 주께서 그렇게 살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도대체가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내가 뭐 잘못 됐는데? 맨날 잘못된 거 없대. 본인은 잘못된 게 없지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데 잘못 된 게. 잘못된 것을 모르는 것이 그게 바로 죄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죄인 맞지요. 잘못된 걸 모르니. 잘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 맞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아는 것 간단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자신을 알아요. 아 인수인계, 내 허락도 없이 인수인계 이미 가버렸어요. 여기에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고 주와 함께 탄생부터 십자가까지 갑니다. 무엇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그래서 성령은 융통성이라고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하신 이것만 우리에게 적용시켜요. 이것만. 여러분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누가 썼어요? 실제 쓰는 건 누가 썼습니까? 사도 내지는 사도 비서가 썼지요. 그런데 여러분들 일정을 여러분이 쓰거나 여러분 비서가 쓸 때 여러분들이 실수한 것 잘못한 것 세 번씩 주님을 저주한 것 그거 집어넣겠습니까? 안 집어넣지요. 그거 막 빼는 거예요. 빼는 겁니다. 엄마 이름으로 주식한 것 그런 거 넣습니까? 명품 가방 이런 거 넣겠어요? 빼지요. 부끄러운 거 빼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는 내용이 그대로 다 나와 있지요. 복음서에. 누구 하나 조질라고 드는 게 아닙니다 이게. 그 일이 세 번이나 부인한 그 일이 베드로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함께 하셔서 베드로를 통해서 그런 일이 나오도록 조치하신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설교 했지요. 싫소이다. 싫소이다 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 아니에요. 왜냐 하면은 싫소이다를 누가 했습니까? 12제자가 했거든요. 다른 거는 다 용납되는데 십자가까지는 제가 감당 못하겠습니다. 도망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다 좋은데 순간순간 주께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내느냐 하면은 내가 감당하기 납득하기 힘든 진짜 그 일이 생겨버리면 나 진짜 망해도 쫄딱 망하는 웃음거리 되는 만천하에 놀림을 받는 그런 일이 생길 때 그 때 우리가 하는 우리 육신이 혼자 할 수 있는 대안은 딱 가룟 유다에요. 자살. 피할 길은 뭐 밖에 없다? 자살 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용감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비겁하게 도망치고 말았지요. 그때 성령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괄호 안의 내용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주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그리고 네가 낙망하고 절망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그 일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제거하고 말씀 안에서 네가 완성되는 조치로서 네가 주님의 완성하는 일을 혼자 산다는 의식으로 가리고 있으니까 그걸 치우는 역할로 이런 상황들이 벌어진 거예요. 머리 좀 치워라 하는 식으로. 치워버리는 거예요. 치울 때 안개가 걷히고 실체가 나오듯이 아 이것마저 다시 한 번 다 이루었다는 사실.
그리고 성령이 왔다는 자체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이미 너의 시민권은 너의 주민등록은 하늘나라로 이미 주님 따라서 하늘로 주민등록이 옮겨져 있어요. 한번 떼보세요. 생명책에 이름 나와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있으니까 이 땅에서 난처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 난처하다는 말이 뭐에요? 내 의에 손상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우습게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럴 때 있으라고 준 말씀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 말씀이 있잖아요. 그게 구원의 무슨 능력? 구원의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구원받은 자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 내가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이에요. 십자가를 자랑한다.
누가복음 2장 한번 봅시다. 과연 그런 성도들이 있는지 구경해 봅시다. 누가복음 2장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혼자 살지 왜? 왜 성령이 있습니까? 성령이 왜 있지요? 성령은 뭐만 집중한다? 예수님이 하실 일만 성령이 소개해요. 다시 말해서 “시므온아 네가 하고 네가 보고 네가 겪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대신하심과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시므온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정도 되니까 애 낳고 이름 막 시므온이라고 짓고 싶지요. 그 다음에 26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그러니까 성령께서 항상 이끄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하신 일이에요. “그가 주의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성전 들어가는 것도 성령의 감동이에요. “마침” 다른 말로 하면 우연히.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다 우연입니다. 필연은 없습니다. 우연입니다. 인간은 이걸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해석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과거완료로 해석해요. ‘다 이루었다’ 그리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고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완료. 성도 자체가 과거완료의 결과물.
에베소서 2장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장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되어있지요. 과거완료입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가 아니고 “얻은 것이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거 너무 하나님 쪽에서 오바한 거 아닙니까? 하늘에 앉혔다 하는데 우리는 왜 멀미도 안 나고 왜 그래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 이 말이죠. 에녹처럼 노아처럼. 동행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땅 끝까지 예수님이 증거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했다는 거예요. 대신. 그럼 대신 했으면 우리는 뭐냐? 몸만. 우리가 잘났으면 대신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나실인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은 우리가 워낙 못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여기 집어넣은 사람끼리는 한 형제가 돼요. 바벨탑이 사람들이 쪽수가 많더라고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성령 받은 사람의 마음은 똑같아요 전부 다. 우리는 둘 다 쪼다라는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음이에요. 같은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아까 성령 받은 사람,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부의 예를 다시 드리면 “여보 나 당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라고 하면 “이번 15일 날 우리 곗돈 탄다.” 그럴 때 남편이 “그게 그리스도의 뜻이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그래?!!너무 좋아!!!” 둘 다 쪼다. 반전입니다 반전. “여보 우리 새 아파트 사서 좋지?!” “좋지!” 아이고 둘 다 쪼다. 지금 주님 재림하실 걸 기다려야 할 텐데 새 아파트. 그게 얼마나 자기 자신의 낮추는 겁니까. 아까 동영상에 나왔어요. 진정한 오류 없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납작 엎드리는 그 자발적인 기쁨 이런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된 그 기쁨. 이게 바로 성령의 충만이에요. 마리아라는 처녀가 임신을 했다. 이거는 육체로 봐서는 주님이 임신케 했다 이 말이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이거는 맞아 죽어야 돼요. 율법에 맞아 죽어야 돼요. 그런데 그 사촌 엘리사벳이 알아주잖아요. 왜? 같이 성령 받았기 때문에. 네 아기는 하나님의 메시아다. 그 때 성령이 충만하니까 비로소 육체로 아는 것을 능가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곗돈 타서 좋다 남들 보기에는 수준 낮다 하지만 그거는 내가 노력해서 얻었다가 아니라 주께서 허락했다는 그 기쁨을 같이 공유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죠. 이야기 가만 듣고 보니 나도 좀 그리스도 것이 좀 있었으면 자랑할 만한 괜찮은 기쁜 소식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시므온까지 봤지요. 괄호 안에서 성령 받은 예수님이 누굴 만나느냐 하면은 악령을 만나요. 그러니까 우리 생각에는 성령 받았다 이제부터 나는 편하다 늘 기뻐한다 그게 아니고 성령 받았기 때문에 누굴 만나요? 악령을 만나요. 악귀를 만난다고요. 악귀를.
사도행전을 한번 봅시다. 사도행전 10장 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잘 보세요. 왜 괄호에 택한 백성 집어넣는 이유를. 왜 인간에게 안 맞기고 본인이 친히 하신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어떤 자? 모든 사람 모든 자. 어떤 인간도 마귀에게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주님이 고맙고 성령이 고맙습니까? 마귀는 인간에게 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홀로 있어도 대단한 사람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함께를 거추장스러워해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세상 모든 사람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이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고 만약에 이거저거 실패하면 자살하면 될 거 아니야.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주께서 대신 죽으심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미리 집어넣은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내가 집어넣었는지 안 집어넣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원래 자리가 주님 안에 있는 대신 하심을 위한 자리라 하는 것을 성령 받은 자만 이걸 파악을 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주님의 증인되니까요. 예수님도 누가복음 4장에서 악령을 먼저 만나요. 만나는 이유가 모든 인간은 악령을 벗어날 수가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길 수가 없어요.
그리고 누가복음 9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9장 60절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죽은 자들 어떻게 평가하느냐? 어떤 자를 죽은 자라 하느냐?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났잖아요. 떠났는데 인간 세계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 세계에서는. 쉽게 말해서 위를 봐야 되는데 성령이 위에서 오는데 오순절 성령이 위에서 왔잖아요. 위에서 오는데 그들은 뒤를 보고 있는 거예요. 왜? 과거의 기억에 준해서 앞으로 어떤 개선책을 세우면 되고 어떻게 내가 고치면 보다 완전한 신처럼 될 수 있느냐를 인간들은 보다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느냐를 늘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뭐 불신자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신자라도 홀로 있다고 생각. 내 인생을 나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런 생각을 쪼다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인간은 맨날 뒤 돌아보는 게 아니고 인간은 맨날 할 게 아니라 난처한 상황이 왔을 때 뭔가 수월하게 모든 게 무탈하게 지나면 괜찮은데 덜커덕 뭔가 외부적으로 예상 밖의 일들이 난관에 부딪히거나 해결점이 나올 때에 내가 옛날에는 어떤 조치를 해서 내가 수월하게 넘어갔지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란 말이죠. 뒤를 안 돌아볼 수 없이 뒤에는 어떻게 했고 앞으로 어떻게 조취하면 되느냐? 한단 말이죠. 김치를 며느리에게 줬는데 며느리가 김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는데 다음에는 어떻게 맛있게 하느냐 생각 안 할 수 없단 말이죠. 모든 상황이. 그럴 때 그게 바로 죽은 자에 해당되는 거예요. 혼자 고민하는 거예요 혼자. 왜 고민하느냐? 자꾸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 여기 있는 일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 안 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일로 생각하니까 고민을 해도 내가 고민하는 거예요. 내가. 그러면 그럴 때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주님을 찾고 성령을 부르짖으면 되는데 안돼요. 자기를 제거하지 않는 상태에서 찾아봐야 주님이 뭐 비서입니까? 뭘 도와드릴까요? 쪼르르 오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뭐냐? 또 다시 그 상황에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 이게 내 일이 아니고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내 의로움을 챙기려는 이거는 불신자의 내 육신의 모습이다. 그때 갈라디아서 3장 3절 일은 성령께서 벌려놓고 내가 왜 육체로 해결하려고 하느냐. 말씀에 비춰서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파악하는 것.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그 안쪽에 묶어놨다는 사실을. 전체를 다시 한 번 파악하는 그런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끝으로 그렇게 하고 기뻐했다. 기뻐한 건 좋은데 문제는 해결 됐느냐 이거에요. 기뻐한 것은 기뻐한 거고 문제 해결 됐어요. 김치 안 갖다버리고 갑자기 어머님 고마워요 이렇게 될 때 그거는 하나의 욕심입니다. 왜냐 하면은 내 마음은 이런데 타인의 마음도 내 마음처럼 나처럼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다스릴 인간을 타인을 내가 조종하려는 나의 오바, 나의 건방짐에 해당 돼요. 자식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남편도 아내도 내 마음대로 안돼요. 그냥 그동안 둘이 붙어서 살고 그냥 숨쉬고 사는 것도 은혜인줄 알아야지 거기서 더 나가서 그러니까 내 뜻대로 저 사람을 꽉 쥐고 싶어요. 그러지 마세요. 너도 네 마음 모르는데. 소박하게 작은 것에라도 고마워하고 감사하게 되면 그 동안 놓쳐버린 감사거리가 또 새롭게 나타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혼자 살고 싶어 하는 이런 본성을 지닌 육신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성경이 아무리 뭐라 해도 주님이 아무리 무슨 얘기를 해도 역시 그것마저 내가 다루려고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려고 하는 이 속성, 이 속성이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던 그 일인 것을 그런 식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