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인간 끝

아빠와 함께 2024. 9. 24. 09:08

강남-누가복음 24장 37절 (인간 끝) 240903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36절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그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께서 전도 방법이 부활입니다. 부활체, 영체. 예수님의 복음은 영체가 되지 않으면 전달이 안됩니다. 왜냐하면은 예수님이 직접 부활하셔서 사람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복음 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날 때 부활체가 되어야 복음이 전달됩니다. 부활체가 되어야. 부활체라고 하는 것은 조건이 있어요. 죽어야 돼요. 죽지 않으면 부활이라는 게 성립이 안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체는 특징이 있어요. 그냥 죽으신 게 아니고 사람에게 맞아 죽었지요. 배척을 받고 죽으신 거예요.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내려진 사형집행에 의해서 죽으신 분이에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복수죠, 여기 한 사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살아났습니다. 살아났으니까 영체라고 합니다. 살아나셔가지고 이게 끝이 아니고 이걸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났어요.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유가 뭐냐 하면은 복음을 전파하라고 나타나신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복음 전파 방식은 뭐밖에 없어요? 부활체 밖에 없고 그 부활은 그냥 자살해서 죽는 건 안돼요. 사람들에게 심판받아서 죽은 그 죽음에서 부활한 분의 영체, 그것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그래야 복음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인간의 끝. 인간은 끝났다. 이게 뭐라고요? '기쁜 소식'. 이게 복음이에요. 인간은 끝났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과 계속해서 그 취지가 살아있는 거예요. 인간의 끝, 인간은 끝난 거예요. 이걸 똑같은 네 자로 하면 길이 없다. 생명으로 가는 생명나무 먹을 수 있는 길은 인간에게는 없다. 인간은 없다 예요. 제가 설교시간에 여러번 해서 좀 식상할만한데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귀한 강정, 그것도 땅콩 강정을 설 지나고 따로 딱 귀하게 모셔놓아가지고 그때 얼마나 귀했다고요. 설 지나고 난 뒤에 손자들이 "할머니 땅콩강정 주세요" 하면 할머니 말은 간단했어요. "없다" 그게 할머니가 전할수 있는 기쁜 소식이에요. 없다 땅콩 잊어라. 땅콩강정은 없다. 인간은 길이 없어요. 길 찾지 마세요. 끝났어요. 왜? 인간에게 맞아 죽은 분이 전하는 복음 내용이 그거예요. 끝났어요. 이걸 심판이라고 하지요. 이제는 너희들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39절부터 보게 되면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내', '나'가 나오지요. 39절 마지막에 "나는 있느니라" 나는 있느니라. 주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지요. 여호와니까요. 나는 있느니라 되어있어요. 나니까 보통 하는 말로 자아라고 하지요. '나'라는 자아는 여기 있다. 여기 있다 되는 거에요. 37절에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뭐로 생각합니까? 영, 유령으로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이 수정을 해주지요. 야 여기 유령있다. 나 여기 있어 나. 인간들의 자아는 인간들의 나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본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봤다 하는 것은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이에요. 내가 여기 있고 나 있는 것처럼 있지 않을 때는 그게 유령이 되는거죠. 나는 여기 있다. 있는데 이상하게 나처럼 있지 않아야 될 어떤 분이 있을 때 유령인가? 영인가?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죠. 그때 예수님이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나 종류가 몇 종류 되겠어요? 두 종류가 된 거예요. 두 종류가. 두 종류 사이에 길은 없어요. 인간의 자아는 끝났습니다. 이게 기쁜 소식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심판받고 죽었구나를 아는 게 복음이에요.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은 심판을 기분 좋게 세상 끝날까지 널리 전파하라 이 말입니다. 마치 뭐처럼? 유령처럼. 왜냐하면 성도는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안에 예수님의 자아가 들어오는 것을 성령이라고 해요. 예수님의 자아가. 그러면 성도의 몸 안에 자아가 두 개 생기죠. 하나는 전에 '나'라고 여긴 것은 십자가 사건에 근거해서 이거는 심판받으려고 하나님을 도리어 심판함으로서 심판받는 거예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죽었다. 이게 복음이거든요. 하나님이 죽었다가 복음이란 말이죠. 그러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무슨뜻이냐 하면은 내가 죽었다를 아는 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었다라는 것이 하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나한테 소식을 전해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굳이 나에게 이야기한다는 말은 제대로 사신 분은 바로 예수님만 제대로 살아있다는 뜻이고 예수님 살아있다는 말은 그럼 누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죽은쪽이 누구에요? 내가 죽은 거예요 내가. 내가 죽어야 복음 안에서 주님이 죽음의 영체가 계속 살아있는 바가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복음을 가리잖아요.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있으려면 왜 주님한테 죽었다는 그 절차가 왜 필요한가 이유도 같이 담겨있어야 되잖아요. 하나님이 왜 죽었어요? 사람에게 맞아 죽었잖아요. 우리가 뭡니까? 우리가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사람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은 누구한테 맞아 죽었다? 바로 나같은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을 때린 그 속성, 그 종류 속에 내가 포함이 되어있다는 뜻이고 죽은 인간이 생명나무 따먹을 것은 땅콩강정 없다 하는 것처럼 길은 없어요. 생명나무 가는 길이 없다는 말은 그게 인간의 끝이죠. 나의 끝사랑 하는 노래 있지요. 인간은 끝이에요. 인간이란 끝을 보여주는 존재. 자기 자아의 끝을 보여주는 존재. 복음 전파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몫이고 주님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8절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볼일 없다고 다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어요. 두 제자가 있는데 한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어요.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 이 글로바라 하는 이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 제가 좀 기억을 잘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탁구 기구와 관련된 회사 상표가 글로바. 글로바라는 제자가 같이 동행을 했단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33절 반대로 갔어요. 나오다가 도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거죠. back한 거죠.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나타났다고 이야기할 때에 이 글로바라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은 사람이 왜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조금전까지 별 볼일 없다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사람이 왜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이거 미친 사람 아닙니까? 왜 이 이야기하면 남들한테 욕 얻어먹을 거 뻔히 알잖아요. 옛날에 돌아가신 분이 살아났다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얼마 전에 사형선고 받고 돌아신 분이 살아난 거예요. 그러면 어떤 조치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다시 살아날 분을 사람들이 뜻을 합하여 죽였다는 거예요. 이걸 함부로 발설해야 됩니까? 자칫하면 자기가 죽는 수가 있어요 이게. 발설해도 눈치껏 발설해야지 이거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되잖아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의견을 합해서 예수님을 죽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다 동의한 셈이 되는데 그 죽인 사형수가 다시 살아나버리면 이거는 사형했던 조치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바가 되는데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 아니고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틀렸는데 그냥 '아 우리가 잘못했네 재판 새로 하면 되겠네' 이게 아니고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을 '아이고 억울하게 누명 씌웠네' 하고 풀어주고 다른 진범을 찾자 이렇게 되는게 아니고 이미 전부 손 털었어요. 왜?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인간이 할수 있는 역량의 끝입니다. 인간의 끝이 죽음이잖아요.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것은 인간은 끝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복음의 내용이 뭐냐? 인간은 끝났어 너희들 이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살아있다는 인간 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자기가 살아있는데 끝났다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아직 내 할 일이 있어. 나 아직 살아있어.' '아니야 너 끝났다. 살아있어도 소용없어 끝난거야.' 이걸 어떻게 내가 스스로 내가 '어 그래' 하고 받아들입니까. 세상 좀 살고 한 90 넘어 살다가 죽으면 천국가면 그게 복음이라면 받아들이지요. 그게 복음이라면 받아들여요. 열심히 살만큼 살다가 죽어서 또 살고 이거는 뭐 손해 보는 장사 아니니까 이거는 받아들이는데 내가 살던 죽던 나는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 너라는 자아는 이미 끝났다는 것, 죄인으로 규정했다는 사실. 네가 살아있어도 실은 죽은 것이다. 죽은 존재가 살아있는 척 하지말아라. 그게 복음인데 이거 누가 받아들입니까? 아무도 안 받아들이죠.


그러니까 이 글로바라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죠. 예수님이 부활을 받아들이면 '나'라는 존재가치가 어떻게 되는가를 그걸 좀 고려하고 받아들이지 그냥 예수님 살아계셨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럼 나는? 길이 없는거죠. 예수님은 살아계신데 우리는 지금 죽으면 살 가능성이 없잖아요. 주님이 살아나도 주님 자기 인생이란 말이죠. 내 인생이 아니잖아요. 주님 살아났다고 덩달아 우리도 살아납니까? 그럼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근거 없어요. 근거고 뭐고 간에 우리는 그 살아나신 분을 우리는 죽이겠다고 거기에 묵시적으로 소극적이나 적극적이나 이미 동조가 된 거예요. 저분은 안돼, 저분은 죽으면 안돼 라고 나선 사람이 11제자 중에 누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니까 한 사람이 살아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죽은 거예요. 이거는 희망도 끝났어요. 끝났다는 이 소식을 '아 기분 억수로 좋아' 하고 그걸 받아들인 능력이 자질이 인간 가운데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누가 있어요? 살만큼 살다가 천당간다 이거는 다 받아들이는데 너 아니야 너는 끝났어 이걸 누가 받아들입니까? 그런데 그 사정도 모르고 글로바는 좋다고 예수님 살아났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제자들로서는 감당이 안되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예상하거나 기대하거나 자기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부활하신 예수님 믿는 것부터 해서 그분이 말하는 복음전파도 이미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오늘 강의 이걸로 끝낼까요? 예수님은 좋겠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예수님 죽었다 혼자 살아나서 좋은데 나머지는 끝났지요.


자, 예수님은 살아났는데 나머지는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주님이 깜짝쇼 하실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놀랬지? 너희들 나 죽을줄 알았지? 살아났어. 그래 구경했으니까 나는 갈 길 간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가버렸을 때 결국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취지는 모든 인간은 심판받아 합당하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죽고난 뒤에 나중에 제자들이 우리가 죽으면 안될 분을 죽였고 우리가 지켜야 될 분을 못 지켰어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안하니까 기념해서 주님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1년에 한 번씩이라도 하자. 그래서 예수님이 남긴 그 귀한 말씀, 이웃 사랑하라 하나님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런 말씀을 기념하자. 그게 복음 전파입니까? 그게 교회입니까? 예수님 죽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 교회일까요? 그게 복음전파입니까? 그거 친목모임 아니에요? 계모임 같은 거죠. 그래놓고 자기는 안 다치는 거예요. 왜? 미안해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주님 죽은 거 미안해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미안해하니까 아마 죽으면 천국갈 거다. 이런 엉터리같은 교리 같은 이런 것 만들어서 위로하는 것, 푼돈 좀 내가지고 운영비 형광등 전기세 이런거 내고 그러면 그게 교회고 그게 복음 전파의 결과의 교회입니까? 아니지요. 복음전파는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고요 복음이 전파되려면 인간은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은 그냥 심판 받아 합당하다 하는 이런 현상을 나타내는 게 아니고 결사적으로 복음을 차단하려고 아주 결사적이에요. 죽기 살기로 결사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훼방하고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에게 미안해하고싶어도 그거는 힘을 못써요.


왜냐하면은 만약에 예수님에게 미안한 게 조금이라도 남한테 들켜버리면 그 공동체에서 우리가 예수님은 죽을만해서 죽인건데 왜 네가 우리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제 와서 배신하느냐. 너 세상 살기 싫어? 아직도 죽어 없어진 예수님을 추모하고 미안해하지마. 우리 인생 살아야지. 우리 의미 찾아야지.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 그전에 하나님 섬기고 율법 섬기고 잘했잖아. 그대로 그냥 살면 돼. 예수님이 죽던 말던 우리는 말씀대로 살면 되는거야. 이게 유대인들이 죽고 난 뒤에 행동이었습니다. 누구한테 그렇게 행동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지 않은 사람은 다 그렇게 했어요.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지 않은, 내방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참 안됐지 뭐 죽을 사람은 아닌데 너무 나대다가 죽었잖아. 이런 식으로. 뭐 어쩔 수 없지 뭐. 운이 나쁜데 어떻게 하겠어. 우리라도 반듯하게 율법대로 살면 되지. 율법 있으니까. 이게 바로 복음에 대해서 결사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이에요. 이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할 때 뭐도 같이 전했습니까? 다른 복음도 같이 전했지요. 다른 복음. 아니 복음을 전한 게 아니고 뭐부터 전했어요? 다른 복음부터 전했어요. 다른복음. 그 다른 복음의 내용이 뭐냐?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우리가 의인 된다. 이게 다른 복음이에요. 하나님은 율법대로 심판하기 때문에 심판에서 면제되려면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고 반듯하게 살아야 된다. 어떻게? 몸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거 이야기한 거예요. 그럼 복음은 뭐냐? 몸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심판을 전하는 거예요. 심판을. 목숨을 다하여. 끝났어 끝났어. 이걸 전하는 거예요 이걸. 글로바가 미쳤지요. 글로바가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 18절에 글로바가 미쳤지요. 좀 더 뒤에는 저녁 먹을 때 미치겠지만. 그때 주께서 눈을 뜨게 해주세요. 저녁때 미쳤는데 이 두 사람 미침이 37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니까 11명하고 그때 거기 모인 사람 다 미쳤어 이거는. 아프다가 좀 건강해졌다 이거는 미친 사람 아니지요. 교도소 갔는데 10년 만에 나타났다. 11년 만에 나타났어요. 10년 전에 나를 죽인게 너지? 뭐 이런 거. 메시지 막 보내고. 이런 건 있을 수 있지요. 억울하게 옥살이하다가 나왔으니까. 백설공주에게 보낼거야 뭐 이런 식으로 이거는 가능한데. 이건 미친 거 아니에요. 나는 억울하게 옥살이 했다 이런 거. 넌 죽었어. 그게 아니고 이미 죽은 분이 살아났데. 이제는 우리가 죽을 판이야. 우리가 이제 당할 판이래. 그런데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거. 이게 앞뒤가 안 맞아. 그게 왜 기쁜데? 그게. 그게 왜 기쁜 소식이 되는데요. 그게 왜 기쁜데? 아무도 기쁘지 않아요. 예수님이 부활한 게. 아 우리 쪽에서 처리했으면 좀 그냥 죽은 척 좀 계시죠 왜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의 가치 체계를 이렇게 흔들어대고 우리의 의미를 무의미로 만듭니까. 너는 이제 죽었어. 그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은 길이 없는 게 되거든요. 심판 대상이니까. 이래도 심판이고 저래도 심판이에요. 뉴질랜드 이민 가도 심판받고요 나이 80 넘어도 심판받고 태어나자마자 죽어도 심판받고 사도 바울의 복음이 그거잖아요.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으매 사망이" 그게 고상해 보이지만 무슨 이야기입니까? 어린이집에 애 놀잖아요. 너 죽었어 이 말이잖아요. 너희들은 끝났어 살아도 소용없어. 너 죽었어. 이 반에 15명이네 다 죽었어. 주일학교에서 전도사님 이야기해주세요. 보자 오늘 참석한 1명 죽고 2명 죽고 3명 죽고 오늘 너희들 죽은 거 이야기해줄게 뭐 이런 거.


인간이 죽인 양이 되살아났어요. 죽음으로 들여보낸 양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양을 죽여서 보내는 것은 여전히 성전 제도가 유효하다고 믿는 그 시절이었어요. 왜? 성전이 양을 요구하니까. 그런데 죽었던 양이 살아나버리면 그동안 성전 중심 자체가 날라가버리고 성전이 날라가버리면 사두개인 자체가 날라가버리고 제사장도 다 날라가버리고 성전 중심으로 해석해왔던 율법체계 전체가 다 날라가버리고 소용없어요. 뭘 해도 소용없어요. 길이 없으니까. 뭘 해도 소용없고 길이 없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걸 전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를 이 복음 이야기를 자기 아이 두 살보고 너 죽었다 하는 그걸 부모가 못 받아들이죠. 애는 무슨 소리인줄도 모르고요. 그 이야기를 받아들인 게 이상한 겁니까? 못 받아들인 게 정상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못 받아들이는 게 정상이죠.


그러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들을 탐색하고 조사해봐야돼요. 여러분 조사해봐야돼요. 내가 지금 죽은 척하고 살아있다고 하는지. 죽은 척하고 있는지. 심판받기 싫은데 심판 심판 하니까 예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라고 입술로 그렇게 조작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봐야 돼요. 찾아오라고 기대한 것이 벌써 26년 지났는데 아직도 주님이 안 찾아왔어. 답답하니까 나라도 복음을 나라도 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요? 성경에 복음 내용 많잖아요. 주워모아서 믿습니다! 라고 하는 거. 그걸로 주님 찾아오신 것을 대신하겠다. 그런 시도는 안해봤어요? 그 시도가 왜 가짜냐 하면은 그거는 사람이 해낼 수가 있습니다. 신학교 가서 성경보고 해가지고 엑기스 추리고 있잖아요. 복음 정석. 수학 정석말고. 정통 복음 이런 거. 그 책 보면서 자기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낼 수 있잖아요. 야무지게 기도원에 가가지고 성경 보고 참고서 기독교 강령 칼빈 이런 거 보면서 참고해가지고 외우면서 나는 다 이루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단 말이죠. 해낼 수 있는 것을 안 하고 그냥 손 놓고 있어요. 뭐라도 해야지요. 해내야된다고요. 그거라도 해야 교회에서 큰소리 치고 기독교 알아요? 모르죠. 그거는 안 미친 거예요. 안 미친 겁니다. 안 미친 인간이 복음 안다고 우길 때에 그들이 생각한 부활은 뭐냐? 이거에요. 신비. 신비하고 부활하고 다릅니다. 정반대에요. 인간이 해내지 못한 신비로움이 있다. 그 신비로움이 너를 어떻게 했는데? 신비로움을 하나 추가했지 뭐. 여기 밥 하나 추가요 하는 것처럼. 신비로움 하나 더 걸친 거예요. 그런데 부활은 뭡니까? 뭐 하나 걸치는 거예요? 우리를 심판하는 겁니까? 우리를 심판하는 거예요. 걸치는 게 아니고. 너는 죽었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이 사실. 그것도 주님이 그냥 나이 많아서 죽으신 게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충돌에 의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아담이 하나님을 죽인 거예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죽인 거예요. 우리는 소속이 어디입니까? 창조주 소속이 아니고 어디 소속입니까? 피조물 소속이죠. 사태가 끝났어요 인간은. 인간은 끝났어요. 아무 희망이고 희망 갖는 게 나빠요.


신비는 뭐냐? 성경 보면서 부활 다 끄집어내는 신비로움은 부활은 내가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애초부터. 그런데 신비로움은 내가 소중하니까 소중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신비를 내 몸에 걸치는 거예요. 신비는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더 추가적인 긍정적인 요소를 덧입혀주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걸 은혜받았다고 하지요. 자기가 세상으로부터 미친 사람 소리 듣기 싫은 거예요. 남들이 모르는거 하나 추가했기 때문에 멀쩡한 정도가 아니고 멀쩡한데 더 지니어스 아주 천재적인 세상이 모르는 그 신비체험까지 추가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멀쩡한데 더욱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으로 톡 튀어나올 정도로 대단한 사람.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적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는 한 명이 아니라고 했지요. 적그리스도가 물 사마귀같이 계속 피부에 다 나오는 거예요. 적그리스도 경쟁이 되가지고. 과일에 설탕 바른 거 뭐라고 합니까? 탕후루 가게 생기니까 옆에 막 생기는 것처럼. 교회 다녀서 다가 아니라 신비체험까지 해야되니까 그것까지 추가해가지고 추가하는 유행이 되어버린 거예요. 신비로서 자기를 커버하는 것. 그것은 뭐냐하면은 복음을 못 받은 대가에요. 복음을 못 받는 대가. 다른 복음이죠.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 이야기할 때는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 이야기할 때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정상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사람은 이거는 인간이 자기가 받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런 생각 조차도 안 할 때 난데없이 주어졌기 때문에 본인이 무척 입장이 난처해진 사람들. 주어진 것 떨어지지도 않고 받아들인 복음을 끄집어내려면 교회에서 미친 사람 소리 듣고 무슨 팔자가 이런 팔자가 됐느냐. 그냥 엠마오로 내려가지 말라고 왜 예루살렘으로 뒤돌아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세상은 끝났다. 그걸 전파하는 거예요. 그걸 전하는 거예요. 그걸 전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처럼 되지요. 예수님 복음 전파하다가 맞아 죽었잖아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요. 마태복음 24장 43절에 보면 세례 요한 죽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한다 했어요. 제자들 뽑아서 복음 전파하지요. 사도행전 8장 35절 쭉 보게 되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합니다. 스데반,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런데 스데반 입장에서는 돌에 맞아 죽든 어떻게 죽든 지금은 자기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지금은 복음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어떤 사람이 권투 시합을 이렇게 합니다. 영화같은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I'll be back. 이런 거 나오잖아요. 다시 오께. 영화같은데 보게 되면 두사람이 돈내기 권투를 하죠. 두 사람 시합하는 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체육관에 구멍이 뚫리면서 눈부신 광채가 두 사람에게 환하게 비칠 때 두 사람이 지금 권투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는 게 의미가 없는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어느 행성에서 오셨습니까? UFO가 나타나서 광채를 비치니까. 이걸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걸 가지고 뭐냐? 이걸 가지고 복음의 광채라고 해요. 복음의 광채.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비치지 못하게 만든다. 광채가 나타나지 않을때는 사람들 하는 일이 뭡니까? 네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네가 쎄냐? 내가 쎄냐? 네가 수입이 많아? 내가 수입이 많아? 서로 권투질하고 있는 거예요. 주위에 사람들은 이겨라! 이겨라! 응원하고 있고. 누가 성공하는가? 누가 승진하는가? 누구 애가 공부 잘하는가? 싸움하고 있단 말이죠. 이게 일상이에요.


교회 가도 마찬가지고 누가 믿음 좋은가? 누가 헌금 많이 하는가 싸움질하겠지요. 그런데 이걸 일거에 제거하는게 뭡니까? 싸움을 멈추게 하는게 뭐에요? 천장에서 햇빛보다 더 빛난 광채가 비춰버리면 우리 지금 뭐하고 있지? 이렇게 되지요.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구약에도 있지만 신약에 있어요? 없어요? 있었지요. 누가복음 2장 크리스마스때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쁨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 천사가 환하게 조명빨 천사가 개입한 거예요. 천사를 만났다 하는 자체가 미친 인간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복음을 못 받아들입니다. 어느 인간도 복음을 못 받아들여요. 인간이 인간에게 말해서 복음을 못 받아들여요. 중간에 누가 관여해야되고 누가 개입해야 됩니까? 살아계신 주님이 관여해야돼요. 오늘 본문에 제자들에게 찾아온 것처럼.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미루고 있는 그 내용이 뭐냐? 찾아왔다. 주님 혼자 좋겠네. 부활했으니까. 그럼 우리는 뭐가 되지? 우리는 뭐가 돼요? 구경 잘했습니다 참 좋겠네요. 가자, 주님 부활했데. 주님 부활해서 가고 우리끼리 살면 되지. 어차피 우리는 부활되지도 못하는데 살아도 소용없지만 애들 봐서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지. 애를 봐서. 소용도 없지만. 부활이 안되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생명나무고 뭐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보냈습니까? 아니면 뭐를 주시기 위해서 따로 모았습니까? 사도행전 1장에서 그들을 따로 모았지요. 뭘 줬느냐 하면은 이걸 줬어요. 약속을 주었습니다. 약속을.


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 나옵니다. 약속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받는 게 아니에요. 약속은 일어나는 거예요. 구원은 내가 받는 게 아니고 구원은 일어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받았다가 맨날 내팽개쳤기 때문에. 그동안 율법 받고 뭐 받고 백날 받아 봤자 인간 손에 넘어간 이상은 말짱 다 깨집니다. 5년 전에 구원받았고 10년 전에 은혜 받았고 소용없습니다. 약속은 일어나는 거예요. 구원은 일어나는 것. 생명은 일어난다. 부활은 일어나는 것이다. 죄사함은 일어나는 것이다. 십자가 피 믿고 죄사함 받는게 아니고 죄사함부터 먼저 주고 죄사함 받은 자를 십자가로 데려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믿을 능력도 없고 죄사함이 뭔지도 몰라요. 끝난 인간인데 뭘 알아듣겠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어서 소지하겠습니다. 소지하면 안돼요 우리는. 우리는 이미 망가졌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뭘해도 우리는 외곡되어버려요. 우리 안에 들어오면. 신학을 하든 뭘 하든. 칼빈 신학을 하든 뭘 하든. 이건 소용없어요. 외곡된다니까요. 내것 가질려고 해요. 왜? 인간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아가. 인간은 자아를 자기에서 뽑아낼 수가 없어요. 자아라는 게 없는데 마귀가 심어놨거든요. 아담이 무슨 자아가 있고 하와가 무슨 자아가 있어요. 숫자를 계산할 때 너와 내가 2이 아니고 1이 되는데 어떻게 자아가 있어요. 1이 된다면 너의 자아는 성립이 안되지요. 그러면 뭐냐? 그냥 우리가 되는 거죠. 우리가. 나와 네가 합해서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우리예요. 한몸이 되어버린다니까요. 하나님이 허락한 자아는 두 사람이 한 몸 된 자아만 허락하는데 이건 나누어지면 자아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자아가 되죠. 그런데 악마는 나누어서 각자 자아를 집어넣어놨다니까요. 다시 우리가 될 수가 없어요. 부부는 한몸이라고요? 한몸이니까 결국 이혼할까 이런 소리 나오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말기암 걸린 남편이 오늘 내일 병원에서 오늘 죽는다고 했는데 가보니까 살아있어. 오늘 내일 하는 환자. 여보 죽지 말고 살아있어야 돼.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어. 해봐. 우리 이혼하자. 암 말기 환자하고 이혼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게. 우리 이혼하고 각자 어떻게 잘 사는지 한번 보자. 그게 성립 됩니까?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인데 죽은 인간이 이혼이 무슨 의미가 있어 둘 다 죽은 자인데 둘 다 시체인데. 이혼 당하면 할수 없지. 그러나 그게 아니고 이혼하자는 말 자격 자체가 안돼요 우리는. 왜? 결혼한 적이 없어요. 동업했지 돈 떨어지면 이혼이에요. 동업했지요. 솔로라는 프로에 나와가지고 실례지만 상철씨 하시는 일이 뭡니까? 15년째 놀고있습니다. 그걸 누가 선택하겠습니까? 삼성에 다니고 있습니다 뭐 이래야 좀 관심있지. 나 15년째 놉니다 지금. 엄마집에 얹혀 삽니다. 이걸 누가 결혼해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자기 자랑할라고 나온 거예요. 자아 자랑이요. 자아가 있으니까 동네 귀신 다 와요. 왜? 자아는 마귀가 집어넣었잖아요. 귀신은 마귀의 졸개죠. 자아가 있으니까 죽은 인간이 사는 척 하니까 동네 귀신 다 달려들어요. 여러분 벌이 어디에 많이 달려들지요? 뭘 발라놓으면 벌이 달려듭니까? 꿀 발라놓을 때. 벌이 왜 오지? 자아한테 꿀 발라놔서. 꿀 발랐더냐? 한번 먹어보자 봉숙아. 왜 집에 갈라고 하니 봉숙아. 있지요. 꿀 발라 놨더냐? 한번 먹어보자. 인간은 자꾸 꿀 발라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목사님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듭니까? 꿀 발라놨거든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4장 37절 (인간 끝) 240903b-이근호 목사



두번째 시간 합시다. 구원이라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소유할려면 소유자가 발생되야 되는데 이미 자아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어! 저기 괜찮은거 있네 가져야지! 이거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여놓고 주신다는 말은 받아 놓고 우리 쪽에서 내 자아가 마중 나와가지고 죽었지만 이 생명을 내가 잘 관리 보존 관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이게 자아가 두 종류가 돼야 돼요. 하나의 자아는 새롭게 주어진, 누가 찾아오심,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예수님의 자아가 우리 자아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게 아까 양이 죽었다가 양이 살아나는 거예요. 주일날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못 들어갑니다. 양을 대신해서 집어넣아야 돼요. 그럼 양이 가는 코스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코스가 내가 왜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가를 보여주는 코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이래요. 인간은 죄인이다. 이미 성경에서 규정, 확정되어있지요. 그러면 성경대로 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가 '나'라는 육신에서 펄펄 어떤 경우라도 어떤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죄만 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면 되는 겁니다.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죄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면 돼요. 이게 만약에 죄가 나온게 아니고 어떤 내 의미 가치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또 다시 나를 그 가치있는 나를 안 놓치고 살려내려고 또 시도하게 될 겁니다.


저번까지는 내가 뭣도 모르고 주님도 모르고 죄 지었지만 이제는 새 사람 되었으니까 새 사람 답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편지를 그러므로 딱 넣어가지고 앞에는 교리고 뒤에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처럼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아내 위해서 목숨 바친 적이 있나? 만약에 아내 위해서 목숨 바치면 그 아내는 얼마 안 가서 과부됩니다. 남편이 장렬히 전사했거든요. 아내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살다가 살다가 하다하다 너무 사랑해서 내 목숨 바쳐서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그래서 진짜 목숨 바쳐가지고 죽으면 아내는 좋겠다 심심해서. 연금이나 타고 있을까? 당신 죽으면 안돼 나 외로워서 못 살아. 그럼 남편 하는 이야기가 에베소서 5장을 못 이루는데요.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서 죽었잖아요. 그 다음 차례는 남편 차례 아닙니까? 그러면 에베소서 5장 못 이뤘으니까 분명히 의가 되지 못하고 다른 것은 다 지켰는데 단 한가지가 모자라네. 아내를 위해서 죽지를 못했어. 땡! 탈락. 저주나 받아라. 이럴 것 같으면 결혼하지 말지. 결혼이 자기 맘대로 됩니까? 안하고 싶다고 안하고 하고 싶다고 하는게 결혼이 아니에요. 인간은 짐승이기 때문에 땡기면하지. 뭐 앞뒤가 어디있어 신앙을 본다? 돈을 본다? 그냥 반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자아가 죄짓는 재미로 살아가요? 잘난 재미로 살아갑니까? 의로운 재미로 살아가잖아요. 이 격차, 이 격차가 있어줘야 네가 나 죽인 거 맞잖아 가 분명해지잖아요. 복음이 들어온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온 사람은 자기의 죄가 어디까지 그 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체험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죄를 더 많이 아는게 감사가 되는데 만약에 20살 때 성령받아서 죄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22살에 군에 갔는데 수류탄 터져가지고 죽었다. 그러면 아 아깝다. 2년치 죄밖에 몰랐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죄 사함을 먼저 염두에 두고 우리 인간은 모르죠. 주님은 알아요. 창세 전에 예정했기 때문에. 죄사함을 염두에 두고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을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십자가로. 그게 성령의 역할이에요. 성령은 줄 것 다 주고 선물이니까. 이 선물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려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율법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그 사랑,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다 지킴, 그 능력이 죄인 마저 나같은 죄인 마저 살려냈다는 사실을 후차적으로 알려주죠. 후차적으로. 그러니까 이 작업은 이미 죽은 우리 인간은 못하고요 자아가 나서서 못해요. 자아가 나서서. 주님의 자아가 나서서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생겨나는 것이고 발생되는 것이고 일어나는 것이지 우리 자아가 소지해서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는 그 표현을 제가 달리 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환경. 환경이 달라져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환경이. 예수님이 완성한 환경이 우리 지옥같은 이 세상 속에 찾아와서 그 환경에 사로잡혀서 그게 덮쳐져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 환경이라는 이 말은 어른들한테 무슨 말인가 하지만 어린아이한테는 이거는 딱이에요. 부자집 도련님이 날 때부터 색동저고리 입고 태어났습니까? 그런거 아니거든요. 벌거벗고 태어났지만 입혀주는 것은 부자집 재력으로 입혀줬잖아요. 환경이잖아요 환경. 가난한 집에 태어나가지고 젖도 제대로 못 먹었다. 그럼 나중에 커가지고 자기 과거를 탓하면서 그 엄마한테 돈 달라고 해가지고 네가 마트에 가가지고 분유 1개월치 사가지고 너가 앉아서 먹으면 되잖아. 꼭 엄마가 타주기를 바랬느냐? 지금 몇 살보고 하는 이야기하는 소리에요?! 걷지도 못하는데 마트를 어떻게 가요. 인간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마세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예요. 환경에 의해서 정해진 거예요. 환경에 의해서. 유도리는 있겠지만 나중에 커서. 그 유도리를 보통 가출이라고 하죠. 가출. 보통 가출하면 가출해서 성공한 사람 이야기하는데 태반은 거의 90%이상은 가출해서 망해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지요. 대표적인 가출 아들 탕자. 이 교회 이름 뭐에요? 탕자교회. 환경 이야기했지만 악마가 주도하는 세상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날 복음 들어도 밖에 나가면 기다리고 있어요. 서로가 다르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해요 이 세상은. 그러나 복음은 뭡니까? 다른게 아니고 틀렸다. 다르게 되면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긍지는 건질 수 있잖아요. 틀려버리면 이것마저 날라가버려요.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자아 자체가 이게 원망스럽죠. 왜? 뭘해도 다른게 아니고 뭘 해도 틀리니까. 그런데 이 자아는 틀렸다로 끝났어요. 인생은 끝이니까. 틀린 것을 옳게 고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자, 오늘 본문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두 군데를 찾아야 돼요. 24장 내에서. 먼저 두 사람, 글로바하고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늘어지게 잔소리를 한거죠. 25절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27절 다시 읽겠습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그 다음에 누가 나옵니까? 어떤 자아가 나오지요? 예수님 자아에 관해서 설명되어있지요. 이 대목을 덮지마시고 같은 누가복음 1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31절 거지 나사로 비유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가 지옥가가지고 빼도박도 못하고요 지옥갔단 말이죠. 그러면 지옥가면 사람이 지옥은 왔지만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 지옥에 왔는지? 부자 때문에 지옥에 온건 아니고 왜 지옥에 왔는지. 31절에 나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니까 뭐냐?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너희가 들어야 천국가고 그걸 무슨 뜻인지 모르면 어디 간다? 부자 되도 지옥가고 가난해도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라도 모세 선지자를 모르면 지옥가는 거예요. 가난하다고 무조건 천국가고 그런 거 없어요. 천국은 복지대책으로 세운게 아니니까요.


그러면 모세 선지자의 말을 우리가 듣고 실천하면 되지 않느냐. 그게 누가복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모세 선지자의 글은 전부 다 누굴 겨냥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겨냥한다고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사람에게 맞아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모세 선지자 말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할 수 있는 위인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라니까. 성경 봐도 이거는 소경이에요. 무슨 뜻인지 몰라요. 백독은 했겠지요. 백번 모르지요. 그럼 천독하면? 천번을 몰라요. 성경 보고 아는 것은 성경 많이 봐서 아는게 아니고 십자가를 알아서 십자가의 영이 와서 아는 겁니다. 십자가의 영이 와서. 안 오면 어떻게 하느냐? 왜 내가 너한테 가야 되는데? 이게 성립이 안 되거든요.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가야 되는데? 내가 너한테 왜 가야 되는데? 좀 와주면 좋을텐데.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가야 돼? 너는 이미 심판이야. 다시 말해서 인간 자체가 이미 틀린 거예요. 틀려먹은 거예요. 지옥이 딱이에요. 창세 전에 숨겨놓은 뭐 있겠지. 그거는 나만 알아고 있고 너는 모르고. 그걸 네가 컨닝해서 알 수가 있어? 천사도 아닌게 지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틀린 거예요 우리는. 그냥 모르는 겁니다. 성령이 오니까 아 우리는 모르게 되어있구나 라는 사실. 우리 몸에 자아 구조 자체가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뭘 해도 소용없어요. 경건해도 경건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약속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는 약속이 들어 있어요. 그 약속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행함을 근거로 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두 사람한테 이렇게 잔소리를 하시는 주님께서 44절에 또 잔소리를 하십니다. 11명 모인 사람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 말은 뭐냐?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예수님을 겨냥했다 라는 것을 율법과 선지자들이 백독 천독을 해도 이게 나옵니까? 안 나오는데. 무슨 시편을 봐도 예수가 나옵니까. 선지자들이 무슨 예수가 나와요. 안 나오죠. 인쇄가 잘못 됐나? 잘못 되든 제대로 되든 예수님이 안 나온다니까요. 왜? 안 가르쳐주지~ 안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로마서에 나옵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은 복음의 내용이 다 담겨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그 다음 뭡니까? 감추어졌지요. 감추어진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주 작정을 했어요. 너희들 죄인 맞다. 죄는 뭐죠? 죽음이죠.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인간이 왜 죽는다 했습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죽었지요. 살 인간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보고 넌 살 인간이 아니래요. 선악과 따먹은 후손이기 때문에 살 인간이 아닌 겁니다. 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취지를 알아먹으세요. 우리는 천국이고 뭐고 살 인간도 아니고 살아있는 인간도 아니고 이 자체가 죽은 거예요. 자꾸 우리 고집 부리지 말고요 주의 말을 좀 건성으로 듣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봅시다. 그대로 들어봅시다. 이미 죽은 거예요. 죽어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죽어있으면 돼요. 그냥 죽어있으면 돼요. 깨워야 된다? 그거는 죽은 인간이 죽어있으면서 손가락 내밀어가지고 자기를 깨운다. 아이고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던가 해야지. 이게 말이 돼요? 이게? 내가 복음을 연구하고. 이게 말이 돼요? 왜 복음을 지가 연구합니까? 자기가 십자가 지지도 않았는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에요. 복음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는 십자가를 진 적도 없다고 했어요. 십자가 지신 사람이 이 분이라고 소개하는 입장이죠. 배달의 민족이에요. 주문했습니까? 아 이 집 아니네. 그럼 가면 되죠. 내가 심방하고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고 했는데 네가 나를 안믿어? 내가 너 교회 오라고 봉투에 5만원 줬는데도 떼먹고 안왔지.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정성은 기르는 개한테도 하는데. 되지도 않는 일을 왜 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어떤 인간도 복음을 받아들일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복음을 기뻐하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부터 취조들어가죠. 네가 복음을 안다 소리하는데 진짜 우리교회에서 잘해요. 처음 오는 사람 가만 두지 않습니다. 교회 오라고 하는게 아니고 내보내기 위해서. 알아들어먹을 일이 없다. 의심하고 내쫓기 위해서 취조하는 거예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들었습니까? 취조 당사자도 나는 의심돼. 자기는 구원을 소유했어요? 구원은 소유가 아닙니다. 구원은 자기가 쥐고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피어나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고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니고 기체로 나타나 있습니다. 15절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그 다음에 뭐라고 나와있습니까? "망하는 자들에게나" 야 사도 바울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모독하는가를 보세요. 그 심판 받을 인간에게 존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극단의 모독을 해버려요.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이것만 하면 되는데 굳이 뭘 집어넣습니까?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냄새를 피우는 거에요. 기체. 환경이죠. 냄새를 피우니까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죽은 인간한테 발라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살리고자 하는 그게 아니에요.


더 아주 심하게 말해서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이런 말씀 있거든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대목 나오지요. 버스정류소에 그런거 많이 붙어있으니까. 근처 교회에서 붙이라고 해줬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 말이 주님한테 심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미리 앞당겨 심판받는 거예요.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어차피 맞을거. 어차피 죽을거 미리 죽는 거예요. 지금 그 간수한테 이야기했다고요. 간수는 인생 완전 조졌어요. 자기가 지켜야될 죄수를 다 놨으니까 자기가 사형 당할 입장이거든요. 그럼 자기만 사형 당하면 됩니까? 자기 가족은요? 가족파탄 끝났지요. 어찌 할꼬 이러고 있다고요. 사도 바울보고 책임지라는 거예요. 어찌 할꼬. 그런데 사도 바울이 구원이라는 언급을 했지요. 같은 말이에요. 지금 네가 당한 형무소직 이거 날라간 게 인생 심판으로 보이느냐? 이건 심판도 아니야. 제대로 심판 받아야지. 주님한테 심판 받아라. 그러면 네가 공무원 짤려도 짤린건 짤리고 구원은 구원대로 받을 것이다. 그걸 전했지요. 그게 망할 자인지 구원될 자인지 그건 사도 바울의 고유 권한 아니지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그런 자기의 선교여행했던 그 긴긴 삶의 마지막 소감은 뭐냐? 하나님 앞에 소감문 딱 쓰는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게 소감문이에요. 그런데 그게 주의 약속대로 됩니다. 창세 전 주의 약속대로 된겁니다. 망할 자는 망하고 망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놀랍게도 구원될 자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이렇게 따지고 논리를 아무리 따져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예요. 사도가 놀래버리죠 사도가. 사도가 놀래버리는 거예요. 기적을 행하는 사도가 놀래버리죠.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도르가, 다비다. 같은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와요. 사람들의 심보가 여제자가 선행을 구제를 많이 하니까 도움을 많이 얻은 거예요. 아까 저녁 먹을 때 나온 노래 있지요. 왁스의 화장을 지우고. 거기에 보면 나오지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받기만 했다는거예요. 그러니까 남자가 떠나니까 돌아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자는 거예요. 지금 도르가 이 사람이 너무 선행하니까 이 사람이 구제가 아까운 거예요. 그럴 때 베드로가 이야기한 것은 선행 구제가 아니고 죽은 자를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린 거예요. 이 다비다를 도르가를. 그 말은 뭡니까? 도르가처럼 죽었다 안 살아나도 그 죽었다가 살려낸 그 과정을 통해서 뭘 해야 돼요? 야 우리 구제 많이 얻게 되었다 이러면 안되고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복음의 증인되라고. 이제는 구제 없어도 괜찮고 선행 안 받아도 괜찮고 지금 당장 말기암 환자로 죽어도 괜찮아요. 약속 속에 있는 주님의 자아가 내 자아를 대체한 거예요. 그 전제로 내가 필히 심판받아야 돼요. 그래서 심판한다는 그것이 이 세상에 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쁜 소식은 주께서 나를 심판한다는 소식이에요. 최고입니다.


예수님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했잖아요. 했을 때 아까 누가복음 다시 언급해서 했듯이 예수님이 참 좋겠다 혼자 살고. 그런데 여기서 뭐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시편에 나를 기록한 것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약속을 남기고 갔지요. 그런데 그 전에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약속을 예수님이 했지요. 예수님이 했는데 제자들이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찾아온 거예요. 찾아와서 너희들 약속 안 믿는 것을 전제로 해요. 너희들 약속 안 믿었지? 너희들은 약속을 안 믿고 안 지켰는데 누구 쪽에서 지켰어요? 예수님 쪽에서 약속을 지키고 약속대로 살아나서 찾아왔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은 주님께서 계속 진행중인 약속을 하시는 약속 속에 그들은 편입된 거예요. 편입. 이제는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함이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쪽에서 내밀면 안돼요. 약속은 생겨나는 거예요.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소지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약속은 주님이 소지해서 주님이 알아서 이루십니다.


마지막날에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 분명히 들었어요. 안 믿었어요. 그런데 주께서 찾아와서 어떤 일을 하느냐? 안 믿는 너희에게 이제부터 믿게하는 약속을 너희에게 실행하겠다. 그게 바로 오순절 성령 오심입니다. 그럼 제자들은? 야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다시 고기 잡으러 가자 이렇게 합니까? 그렇게 안돼요. 뭐냐 하면은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왔던 그 영체, 동일한 영체로 달라져야 돼요. 영체가 뭐 번쩍번쩍 해가지고 레이저 쏘고 이런 게 아니죠. 성령을 받은 거예요.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야되겠지요. 격차, 차이. 격차 차이는 틈이라고 할수 있는데 틈은 예수님을 십자가 죽기까지 또는 죽을 때 사람들의 견해, 예수님에 대한 사적인 견해들 있잖아요. 환경이죠 악한 환경. 이 세대. 환경과 예수님이 찾아와서 성령까지 온 제자들의 견해와 어떤 차이가 있을겁니다. 그 차이가 사도가 전하면 다른 복음과, 복음 두 가지 다를 말해줘요. 두 가지 다를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진리라는 것이 뭐냐하면은 최소한 두 개의 기표가 있어야 진리가 되는 겁니다. 두 개의 기호가 있어야 된다. 인 것과 아닌 것. 또는 없음과 있음. 두 가지가 최소단위가 있어야 돼요. 그러면 복음을 전파하라고 되어있어요. 복음을 전파하라. 그럼 제자들은 뭘 느끼겠습니까? 두 가지의 차이를 몸소 그들은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러니까 이거는 복음을 쥐고 전하는 게 아니고 제자들이 가게 되면 거기서 일어나는 거예요. 왜? 환경이 따라가니까. 제자들이 속한 환경이 달라요. 부활의 환경.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니까. 그리스도가 부활 세계에 속하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은 부활의 세계에 지금 제자들이 성도들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 안에 살고 있어요. 공간 안에.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예수님을 앞태를 보자 뒷태를 보자 아무리 봐도 하나님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런데 예수님 뭐라고 합니까? 자꾸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하고 아버지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요한복음 8장에서 그래 너는 너 잘났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 대봐. 다른 사람 증인 대봐 하니까 율법에 이르기를 두 사람만 증인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고 또 한 사람은 '나'라는 거예요.


제가 지난 주인가 설교 시간에 이걸 했잖아요. 설교 시간이기 때문에 이걸 상세하게 설명을 못해드렸어요. 상세하게. 이게 인간의 환경에서 통하는 논리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증거하는게 증거 채택이 가능하냐. 이게 가능합니까? 내가 있는데 따로 내가 떼어 나와서 바깥에 내가 하나 있어요. 나 1과 나 2가 있어요. 나 2 보고 내가 나라는 것을 이야기해봐. 이게 인간 세계에 가능하냐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두 사람 있는데 한 사람은 아버지다. 아버지.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 있으면 이것이 율법에 이야기한 대로 증거가 확립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예수님은 율법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인간들이 이 해석을 못 끄집어냈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율법 해석은 다 엉터리였다 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아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버지라고 상상해놓고 해석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거예요. 너 빼놓고 두 사람, 아니야 나 포함해서 두 사람. 나 포함해서 두 사람. 왜 주님 말이 옳으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체 인간을 끌어당기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일체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둘로 완결되어야 돼요.


그래서 왜 인간이 끼어들지 않는가. 인간은 이미 쫓겨난 주제에 생명나무를 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배후에 누가 그 짓하게 합니까? 마귀가 그 짓하게 하지요. 마귀가. 네가 힘들게 살았는데 죽어서는 호강해야지. 자꾸 마귀가 와서 자꾸 부채질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가만있으면 안되지 뭐라도 해야지 자꾸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인간은 뭡니까? 죄인으로 규정됐지요. 설치면 설칠수록 뭐만 나와요? 죄만 나온다고요. 여기까지 듣고 삐져서 밖에 나간 사람 없지만, 이왕 삐져서 나간 사람은 그러면 만약에 그런 사람이 강의를 듣는다면 그동안 뭐를 듣고 싶어서 줄창 앉아있느냐 이 말이죠. 다 맞고 하는데 내쪽에서 내가 뭘하면 나한테 구원이 주어지느냐 그 이야기를 해달라니까 이러고 있다가 아예 없다고 하니까 짜증 확 올라오면서 나가지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 대신 약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약속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지요. 인간이 이루는 게 아닙니다. 약속이 알아서 이미 잘 알아서 창세 전에 오직 택한 자만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딱 천국에 가도록 약속이 알아서 다 해주십니다.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삐져서 나가려다가 들어와 앉아가지고 그것 좀 진작에 이야기하지 끝물에 이야기하나. 그런데 그 약속이 언제 오는데? 그거 듣고싶다.


그래서 여기에 사도 바울에 편지에 나와있는 복음에 대해서 다 한번 찾아봤어요. 모조리 다. 약속이 약속을 이룰 때 사도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는 복음을 전파하라 이렇게 해요. 복음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에서 너를 낳았으니까. 새롭게 태어났으니까. 복음에 태어난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요? 복음을 전파하게 되어있어요. 복음을 전파하는 것.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파하라. 에베소서 6장 19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디모데후서 4장 2절. 그 다음에 전부 다 복음 이야기하는데 그 공통점은 뭐냐? 복음을 가져라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간직하라 이게 아니고 전파하라. 복음을 내놓아라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약속이라는 환경이 우리를 그냥 가만두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약속이 구약때 약속이 만든게 뭐냐 하면은 이거였어요. 성전이었습니다. 맞지요? 시내산에서 율법 받고 그들이 땅에 만든게 뭡니까? 성막이었죠. 성막이 커서 뭐 됐다? 성전이잖아요. 성막은 이동성, 들고 다니는 것. 성전은 고정되는 것. 성전의 의미는 고정되는 거예요. 제사 기능은 똑같지만 고정되는 거예요. 성전이 하늘로 가버리면 하늘나라에 박혀 고정되어버립니다. 이 말은 성전이 고정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하나님쪽에서 이미 확정 지었다. 다른 장소에서 만나지 않는다. 오직 성전에서 만난다.


미가 1장에 수요일날 언급했잖아요. 성전에서 뭐가 나와요? 심판이 나와요. 성전이 이미 마련되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뭐가 돼요? 성전 바깥이 되겠지요. 성전 바깥에 있는 것은 심판 받고 저주 밖에 없어요. 그런데 구약에서 약속한 건 성전이었단 말이죠. 그러면 신약에서 약속이 이뤄지는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 우리의 육신, 우리의 몸이 뭐가 돼요? 이게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안에서 약속이 약속대로 저절로 생겨나요. 저절로. 밀폐된 용기에 연기 피우면 연기가 가득 차겠지요. 그걸 충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령에 의해서 약속이 충만해져요. 충만해지면 우리의 육신은 움직이면서 입과 귀와 코가 있잖아요. 그러면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 두뇌에서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 거기서 논리적인 조립을 하는 것 그리고 그걸 내가 결과로 행동이나 말 할 때 이게 성전에 약속을 경유한 외부의 모든 변화의 조짐이 입을 통해서 발설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사도 바울은 뭐냐? 세상에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오직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주동자는 예수님이다. 주님이 주 되셔서 이 모든 일을 이루었다. 모든 것이 복음으로 연결되도록 거기에 해당된 변화만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다니엘에 느부갓네살 우상 나오지요. 첫 번째 바벨론 두 번째 금 같은 바벨론 은 같은 메대 바사 그 다음은 놋 같은 헬라 마케도니아 네 번째 철 같은 로마, 철과 10가지 깨진 진흙, 로마 후시대죠. 현재 200개 나라가 갈라졌잖아요. 이미 다니엘에 예언되어있단 말이죠. 예언되어있는 것이 그냥 역사가 되어있습니다. 자, 역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이후에도 무엇을 틀어막아요? 하나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틀어막는 거예요. 그것도 누가 죽였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찾는 그 하나님을 이미 인간 손에 죽었어요. 지가 죽여놓고 지가 찾고 있다 이 말이죠. 그 복음이 듣기 싫어서 인간 세계는 이 역사대로 그냥 밀어부칩니다. 그러면 이미 주님의 성령이 찾아온 성도는 어떻게 되겠어요? 이미 성전이 되었지요. 성전 안에는 뭐로 다 이루었습니까? 약속으로 다 이루었지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 이걸 발설을 하는 거예요. 발설을 하면서 무슨 외부환경과 만나지요. 바로 하나님의 준비된 약속의 외부환경. 그게 뭡니까? 로마와 그 이후의 시대. 짐승의 시대. 짐승의 시대와 정면으로 피부로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짐승의 시대. 짐승의 시대는 뭐가 없어요? 복음이 없지요. 짐승의 시대는 복음이 없어요. 복음이 없다는 말은 무슨 힘으로 역사의 원동력으로 삼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이성과 노력과 결집력 이거죠. 인간들이 결집해서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인간밖에 없지요. 배후에는 악마가 하겠지만 인간의 유구한 역사는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질주하겠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죽은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이 세상을 심판하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뭘 몰라요? 그들이 살아봤자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살아봤자. 맨날 판사 검사 백날 되도 그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짐승의 세계니까. 뭐 가봐야 알지 이래요. 예수님께서 좁은 길 넓은 길 왜 이야기했겠어요? 지옥 길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지옥 길. 많은 사람이 찾는 길.


그러면 오늘날 시대 봅시다. 이런 문구가 있어요. 인공지능에 충성합시다. chat gpt아닙니까. 애들 시험볼 때 공부할 때 뭐합니까? chat gpt쓰지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chat gpt 월 29,000원인가 주고 해가지고 오갖 궁금한거 다 물어봤어요. 뭐까지 물어봤느냐 하면은 이근호 목사의 설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 이야기해요. 어느 목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니까 이근호 목사의 설교는 십자가 중심이고 자기가 이야기한 목사는 세상 사람들 구미에 맞춘 설교입니다. 인공지능이 이야기해요. 인공지능이. 웃기지도 않지요. 정 궁금하면 여러분 이름도 한번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뭡니까? 인공지능에 뭐하자? 충성하자. 충성이라는 말은 도저히 내 능력으로서는 따라할 수 없다고 굴복을 선언하는 거예요. 굴복을. 이제는 자식 대신에 인공지능 돈 얼마 안해서 하게 되면 약 먹는 시간 알려줘 놀아죠 같이 대화 상대해주고 웃기기도 해줘. 인공지능이 다 해줘요. 다 돼요. 다 돼요 전부 다 인공지능이. 병원에 가기 전에 인공지능에 물어보세요. 요새 나온 신약의 내용은 어떻고 아직까지 이건 안되는 약이고 이거는 확률이 50%고 30%고 다 나와요. 괜히 약 가지고 돈 벌려다가 인공지능한테 걸리면 안된다니까.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보다 뛰어나니까 인간의 본성상 무슨 소리 나와요? 충성합시다. 이게 짐승한테 충성하는 거예요. 짐승한테 충성. 아 똑똑한데 뭐 잘난척 해봐야 자기만 손해죠. 충성해야지요. chat gpt있으면 설교 준비할 것도 없어요. 다 나와요. 어떤 유형을 원하십니까? 전부 다 나옵니다. 성경 본문찾기 다 나와요. 글자 쓰면 나오고 그런거 아니에요. 문장을 만들어줘요. 문장을. 이것은 헬라어인데 여기에 합당한 것은 구약에 이겁니다. 다 알려줘요. 다 chat gpt에서 나온거에요. 양반들 인사할 때 같은 데에서 배껴가지고 인사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같은 대서소로 인사하는거 하고 똑같아요. 처음에는 좀 주춤하다가 까놓고 합시다 해가지고 나는 1357로 나오고 당신은 2468. 그게 유명한 웃으면 복이와요에 나오는 코미디 코너에 나왔던 겁니다. 모든 것이 통일되죠. 통일되고 인간은 이미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말 안해요. 그런데 또 집사님이 그것까지 물어본 거예요. 인간은 죽었지만 부활한대요. 인간은 죽었지만 부활합니다. 두 가지 자아를 이야기 못하지요. 왜? 인공지능은 인간을 닮았기 때문에 똑닮았기 때문에 자아를 포기를 못하는 정신으로 무장되어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는가. 그것을 그 각 시대마다 지금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을 보내가지고 성도로 하여금 마주치게 하는겁니다. 마주치게. 그럼 복음만 전한다는 말은 뭡니까? 둘 다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복음과 복음. 둘 다를 전하면서 그 차이를 십자가 사건에 근거해서 증거할 수가 있는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인공지능까지 발달시켰습니까? 우리 주님이죠. 우리 주님. 예수님 십자가 달린 그 상황과 조금도 환경은 달라진 적이 없다는 것. 그때 내가 있었으면 예수님 배반 안했는데 그런 거 없어요. 각 모든 시대가 똑같은 시대에요. 하나님이 죽었다를 그것도 인간 손에 이미 하나님은 물 넘어갔다. 왜?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다는 말을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못 받아들이는 세상. 그러니까 이것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냐.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유가 바로 복음 때문에 있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안 믿는 것이 정상이고 거부하고 화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죽고 심판의 대상이라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되고 놀랍고 감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소식이 되는지 주의 부활의 능력이 찾아온 결과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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