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소진되는 존재

아빠와 함께 2024. 11. 10. 09:30

강남-사도행전 1장 3절 (소진되는 존재) 241022a-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1장 오늘부터 시작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이게 유효하기 때문에 과연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는가? 없지요. 왜냐하면은 예수님은 홀로 승천하기 때문에 아무도 따라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데오빌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붙인 호칭이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데오, 하나님 빌로 친구 또는 빌로 하니까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친구'.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서 누가복음 1장에서는 '각하'라고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1장 3절에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누가복음 누가 썼느냐 하면은 누가가 썼어요. 누가복음 누가 썼게요? 누가. 누가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의 비서입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서는 의사로 되어 있고 안디옥, 지금은 시리아 쪽이죠. 시리아 터키 그쪽에 있는 사도 바울의 비서죠. 사도 바울의 비서라는 존재는 있느냐? 사도 바울의 비서는 있어요. 직책이기 때문에. 누가라는 사람은 그냥 일반적인 직책을 받은 사도 바울의 비서라는 영적인 직책을 받아버리면 복음을 쓴 누가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가 나에게서 나에게로 가는데 여기 말씀의 힘이 주입되죠.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면 나에게서 나예요. 나에게서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왜 그리 먼지. 아담에 속한 나에게서 예수님 안에 있는 나에게로 돌아오려면 말씀의 힘 또는 말씀 완성의 힘이 여기 개입이 되어야 돼요. 말씀이 없으면 이 나는 끝까지 나로 갑니다. 하나의 나로 가요. 또 다른 예수님 안에 있는 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약 시편 69편을 잠시 보겠습니다. 69편 28절요. 나에게서 나에게. 그 앞에 나는 나만 있고 나는 나밖에 없어요. 또 다른 나는 없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너 이건 모르지? 너는 너밖에 모르지? 이거 있다 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의 세계를 펼쳐주니까 나에게 있는 나 말고 다른 '나'가 있었던 거예요. 시편 69편 28절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생명책이 여기 등장해요. 생명책이 나오고 생명책을 보게 되면 여기 탈락자가 생기는데 시편 69편 25절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편 69편 25절의 말씀은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바로 피 밭, 가룟 유다의 '나'가 죽었던 그 장소가 피 밭이고 시편의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는 거예요.


여기서 제자가 12명중에 11명 밖에 없잖아요. 11명 밖에 없는데 제자 채우기 위해서 뽑으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가룟 유다다. 가룟 유다가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너희들, 너에게서 너에게로 가룟 유다의 자리를 공유했던 너가 생명책이라는 다름으로 빠져나와요. 구원이 뭐냐 하면은 나에게서 나에게로가 구원이잖아요. 나에게서 또 다른 나로 빠져나올 수 없는데 갈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어떤 자는 제거되고 배제되고 어떤 자는 생명책에 생각지도 못한 예상치도 못한 예수 안에 있는 나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은 그 이야기예요.


데오빌로라는 것은 없지요. 없는데 "데오빌로 각하여" 어떤 직책? 어떤 관직? 어떤 고유적인 인물? 그 인물 이름이 하필이면 데오빌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전에 있는 데오빌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데오빌로로 달라져야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전달 대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초장부터 어렵지만 성도는 대상 없는 자화상이다. 성도는 대상, 상대한다 또는 싸운다 뭐 다 같은 말이 될 수 있어요. 대상이 없는 것과의 싸움. 내가 나 아닌 것과의 싸움. 벌써부터 '나'가 아닌 나와 싸움. 이미 나에서 떠나버린 그 새로운 '나'가 옛날 나와 싸우는 그 싸움. 옛날 나는 없는데 자꾸 이게 내 몸에서 올라오고 있어요. 이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나인데 그 나와 싸우는 대상이 되는 것.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싸우는가? 옛날 나에서 지금의 나로 바뀌면서 무엇이 거기 들어왔지? 말씀이 들어왔어요. 그럼 말씀 가지고 싸워야지요. 말씀에 보니까 옛날 나는 내가 아니고 새로운 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 보니까. 왜? 말씀의 능력이니까요. 그러니까 나에다가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라는 게 덮쳐진 그들에 대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듣는 여러분들은 지금 말씀없던 그 시절에 대해서 내가 준 말씀하고 싸우세요 그 이야기에요. 이렇게 이야기 되어야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이제 말씀 안 봐도 된다 이런게 용납이 안되잖아요. 전에는 내가 있고 구원받기 위해서 뭘하면 되지? 이렇게 됐는데 이제는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예상한 구원에 내가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뭐냐 하면은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바로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는 실패자잖아요. 그건 실패하는 거예요.


말씀이 먼저 우리를 장악해서 말씀 보니까 그 안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내가 예상한 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새로운 '나'가 말씀 오면서 같이 동반해서 같이 주어진 거예요. 그럼 나는 아낌없이 나는 나를 포기하고 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소진하는 존재. 전문 용어로 다 떨어먹는 존재. 탈탈 다 떨어먹지요. 나이 목숨 그거 다 소비하고 갑니다. 다 떨어먹고 갑니다. 많이 남은 사람은 고생을 좀 많이 해야되요. 그런데 연세가 머리 희어지고 염색해도 안되고 화장빨도 다 떨어져나가는 이런 사람은 콩그레이츄레이션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하지 말고 죽는 날을 축하해야 돼요. 죽는 날을. 아이고 이 지긋지긋한 날을 털털 털어도 없어요 이제. 나이고 건강이고 다 떨어졌어요. 에너지 다 떨어졌어요. 병원에서 주사 맞아도 감기 낫지도 않아요. 약빨도 안 받아요. 이제 남은 것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말씀 밖에 없어요. 남한테 자랑할 것도 없지만 남한테 말씀 이야기 외에 할 것도 없어요. 내가 왕년에, 왕년이고 뭐고 소진됐는데 뭐. 더 없잖아요.


그래서 현재는 뭐냐? 현재는 시간의 첨단. 시간의 바늘. 현재에서 인간은 찢어져야 되지요. 너덜너덜하게 찢어져야 됩니다. 인간이 시간을 갖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인간을 찢어버립니다. 과거와 현재를 짼다 같은 뜻이에요. 현재는 가지는 게 아니고 현재에서 내 존재가 찢어지는 순간이 현재입니다. 순간순간 현재는 기억은 있지만 그 기억 어디 써먹을라고? 아무 써먹을 데 없어요. 시간에 휘둘리고 시간에 의해서 나 다움이 용납이 안 되고 맨날 변해요. 맨날 달라져요. 달라지지 않기 위해서 억기로 자아를 붙잡는 것이 뭐냐? 맨날 술이야. 맨날 술 먹으면서 나 이런데 나 이런데. 자기 기억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술을 먹거든요. 그런 사람들 술 안먹으면 정신 혼미해지지요. 술 먹고 잃어버린 나를 다시 한번 정리정돈 할려고 술을 먹는 거예요. 나 이 정도야 이런 거요. 술 한 잔도 먹어본 적 없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지요. 시간이 와서 현재를 찢어버리는데 왜 그러냐 하면은 현재 배후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은 말씀이 있죠.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데오빌로여 할 때 어제도 데오빌로여 나보고 데오빌로래. 오늘도 데오빌로여. 내일되면 또 데오빌로여. 날마다 구축되는 이 자아를 날마다 찢어내기 위해서는 데오빌로로부터 시작하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지요.


누가복음 1장 2절에 보게 되면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제도 누가복음 1장 3절이 적용되고 비 오는 오늘도 누가복음 1장 3절이 적용되고 내일되면 또 예수님의 말씀의 근원이 내일되면 내일 또 작용해서 내일의 자아를 또 둘로 찢어버리죠. 이미 없어진 나와 지금 분명히 말씀 안에 있는 나, 그 나로 둘로 쪼가리내는 거예요. 하나는 가짜 하나는 진짜인데 그 가짜 진짜의 틈에서 말씀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 주님의 살아계심이 나오는 거예요.


그 틈에서. 가룟 유다는 주님을 버렸습니다. 말씀이 안 들어오게 되면 말씀 제껴버리고 내 기억이 있으면 그거 옛날에 알고 있는데 가룟 유다는 사단이 되어서 지옥 갔다는 거 아는데 그걸 왜 굳이 내가 오늘날 왜 알아야 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왜 팔아먹었느냐? 팔아먹은 그 동기는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동기하고 똑같아요.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동기. 누가복음 9장 62절에 보면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아라" 무슨 천국가는 길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쉽고 어떻게 보게 되면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아라. 아까 제가 말한 겁니다. 과거가 현재를 어떻게 합니까? 둘로 쪼개고 찢어버리죠. 과거는 기억용이 아니고 간증용이 아니라 현재를 없어진 나와 현재 분명히 말씀안에 있는 나를 두조각 내는데 용도로만 과거가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과거를 뒤돌아 보지 말란 말이에요. 과거를. 성도는 뭐하고 싸운다? 누구하고 싸워요? 성도는 날마다 대상없는것과 싸웁니다. 대상이 없는데 이미 그 나는 내가 아닌데 육신을 갖고 있는 성도는 맨날 이미 없어진 대상과 싸우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소진하는 나와 싸우고 있어요. 새로운 '나'가 소진하는 '나'와 싸운다. 우리가 뭘 소진한다고 했습니까? 내것이라고 여겼던 나의 목숨, 내것이라고 여겼던 나의 모든 것 명예 건강 그 모든 것은 뭐하는 중입니까? 소비되고 소진되고 있습니다. 소비라는 것은 사용해야 된다 라는 뜻이지만 소진된다는 말은 가만 있어도 저절로 시간 따라서 내 허락도 없이 그냥 없어지는 것. 가만 있는데 없어지는 것. 여러분의 지갑이 만약에 만원 짜리가 두둑히 있었는데 오만원 짜리도 몇 장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만원 짜리 하나 없어졌어요. 그 다음날 보니까 오만원 짜리 없어졌어요. 그게 무슨 현상입니까? 소진 현상. 우리는 난리도 아니에요. 누가 가져갔느냐고. 누가 가져간 거예요? 시간이 가져간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간직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은 우리 허락도 없이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갑니다. 소진시켜요. 왜? 왜 소진시키느냐? 말씀이 그러니까요 말씀이. 말씀에 의하면 시간은 직선으로 달리다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이게 추락합니다 시간이. 시간의 추락 또는 시간의 몰락. 시간이 뚝 떨어져요. 그래서 종말은 가속화 됩니다. 갈수록 종말이 더 종말 속도가 더 빨라져요. 왜? 추락하니까. 물리적으로 봐서는 중력 가속도가 작용한다고 하는데 물리학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갈수록 종말이 가속화 되어있어요. 다급하다 얼마 안 있으면 온다 그렇게 점점 더 그걸 강조하고 있어요. 시간이 뚝 떨어져요. 축구에서 무슨 킥 합니까? 회전 먹은 슛 하듯이 골키퍼 앞에서 뚝 떨어지는 거예요. 또는 야구선수 투수가 공 던질 때 슬라이더 뚝 떨어져가지고 헛스윙 유도하는 것 이처럼 시간이 뚝 떨어진다고요. 왜 뚝 떨어지느냐 하면은 이쪽 시간은 누구의 접촉을 받느냐 하면은 인간의 의식에 따라서 시간이 오다가 예수님 오신 후부터는 누구 의식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의식을 표현해주는 시간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 승천해버리면 시간은 어떻떻습니까? 시간은 이제는 자기의 목을 숙일 순간이 온 거예요. 이제는 시간은 시간 없다. 시간 흐름이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 겁니다. 그럼 무의미하다면 그러면 이 세상은 시간이 뚝 떨어졌다면 이 쪽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은 시간과 관계 없이 떨어짐과 관계 없이 이 세계가 바로 성령의 세계입니다. 이 성령의 세계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몇 일 못 있어서 주겠다. 시간에 살던 인간이 어디로 이동합니까? 성령으로 이동하는 순간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 순간, 성령을 받는 순간 시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럼 시간에 옛 자아가 있다면 성령 안에는 무슨 자아가 있습니까? 새로운 자아, 너희라는 것이 있어요. 너희. 주기도문 같으면 뭡니까? 우리가 있어요. 우리, 너희. 우리 너희는 누가 정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예요. 우리는 뚝 떨어질 때 옛 자아와 더불어 옛 자아가 눈에 띄고 있는 나름대로의 우리가 있고 저희가 있고 너가 있고 '나'가 있잖아요. 이거는 다 무효가 돼요. 이거는 시간이 뚝 떨어지면서 무효가 된다고요. 이건 어디서 형성되는가? 시간의 흐름, 과거, 현재, 미래에서 과거의 기억에서 기억이 묶어져서 자아라는게 자아가 있으니까 너가 있고 내가 있고 나끼리 모여있으면 우리가 되고 그런 거죠. 이런 것들이 시간이 뚝 떨어지면서 드디어 고개를 숙이고 자기 시간의 의미가 없어지죠.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마라고 했으니까 시간 자체가 뒤돌아 볼 시간이 없어요. 여기서는 미래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니까요. 미래의 근거는 뭐냐 하면은 과거가 있을 때 미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의 첨단, 시간이 있으면 뾰족한 것, 뾰족한 현재라는 시간이 나로 하여금 여기서 두 조각 만들어버리죠. 시간 안에 계속 질질 끌려갈래 아니면 시간으로부터 벗어날래? 이것을 말씀이 와서 시간을 통해서 성령안에 새로운 자아를 확인시키는 겁니다. 그게 누구라고요? 데오빌로. 데오빌로라는 것은 말씀에 대해서 감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근원부터 했던 모든 일이 응 그랬구나 그랬구나 비로소 알아먹는 사람, 그 사람은 시간 안에 있는 사람은 못 알아듣지요. 시간밖에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막을 안단 말이죠. 그러면 전에 있는 우리 자아는 알 필요가 없지 않느냐.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에 있는 우리도 같이 병행해서 알아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사도행전 1장 3절에 "해 받으신 후에 또 저희에게" 나오죠. 예수님께서 해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해를 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해를 받았으면 하나님께 해를 끼친 그 인간들을 하나님이 잊을까요? 안 잊을까요? 안 잊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해 받은 것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건져낸 사람을 하나님이 잊을까요? 안 잊을까요? 못 잊지요. 하나님께서 잊지 못하고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을 성령 안에 있는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같은 의식으로 현실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의 능력이에요. 이 모든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옛날에 나 살던 사고방식과 지금 성령의 사고방식이 말씀에 입각해서 어떤 차이가 난다는 것에 대해서 드디어 감 잡았어. 벌써 알게 된 거예요. 알게 된 겁니다.


옛날에 성령 오기 전까지는 유대인하고 똑같지요. 내가 하나님 말씀지켜서 천당 가야지. 자기 생각 뿐이었죠. 이게 제거 대상인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자기한테 계속 투자를 해왔어요. 기도, 헌금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씀은 없고.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서 내가 지킨 말씀이 나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럼 그 구원은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내가 똑똑하고 착한 내가 현재 나를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모순이죠. 착하고 똑똑하면 구원 될 이유가 없지요. 착한데 왜 구원을 해요? 성경에 보니까 우리가 죄인 되어서 그렇다. 죄인 같으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그건 죄의 일부가 아니예요? 그것도 출처가 죄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본인이 죄인이라면 그것도 전적인 죄인이라면 그러면 의로운 것 하나도 없고 다 죄뿐이라면 그 죄인에서 구원받겠다는 아이디어도 죄 일종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의가 돼요? 내가 구원 받겠다는 것이 그게 무슨 하나님의 뜻이고 그게 의입니까? 지옥 갈 죄죠. 욕심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구원 받겠다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성령 안 받은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은 구원 받겠다고 열심히 했던 그런 나도 알고 그거와 관계 없이 성령이 임해서 구원 되는 나, 두 개의 나를 둘 다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성령을 알고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성령이 온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처럼 성령이 온다 이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인간이면서도 누굽니까? 그냥 인간이 아니고 죄인이죠.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이잖아요. 이중이잖아요. 죄인이면서도 의인. 예수님이 죄 졌다는 것이 아니고 죄인된 육신의 몸으로 왔으니까. 죄인이면서 의인이잖아요.


성도도 똑같지요. 죄인이면서도 의인. 죄인되는 나와 의인 되는 나 두 개를 같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의인이기에 내가 성령 받기 전에 나는 철저한 죄인이었다라는 사실을 현재 내 육신이 지니고 있다. 그 육신 안에 옛날 나의 행세와 본성이 그대로 다 있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의인이에요. 의인.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 의인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아는 것이 의인이에요. 사도 바울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안다고 해서 의인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의인이에요 그게. 그렇게 해놓고 의인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의인이란 말이죠. 두 개 다를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죄 밖에 안 나오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죄 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면 율법을 그럼 안 지키면 되겠느냐? 인간이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율법의 감시 하에 있다는 것, 현재 처지는 똑같아요. 나 율법 안 지킬거야 하면 율법이 율법에 의하면 너 죄인인데! 나 율법 안 지킨다고 했잖아. 그래도 죄인인데!


그러니까 이건 좀 무리한 예이지만 예를 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합니다. 어떤 이쁜 아가씨 처녀가 수정과를 들고 가요. 들고 갈 때 어떤 남자가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가 종종 걸음으로 가죠. 나중에 자기 집 앞에서 왜 우리집까지 따라옵니까?! 물론 공익광고에서는 당신 옆집에 살아요 하는데 저의 예에 의하면 수정과 냄새가 좋아서요. 무리하다고 했지요. 무리한 예인데. 계피향 수정과 향이 좋은데 사람들은 자기가 이뻐서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옛날 자아 생각을 갖고있는 거예요. 성도끼리 좀 봅시다 하면 안 보여줘요! 이러거든요. 아니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 왕 되심을 보여달라 이거거든요. 뭐라고들 착각들을 하고 있어. 말씀이 당신에게 왕으로 지배하는 그걸 보여달라니까요. 같은 성도라고 수작 거나. 작업 거나. 작업 거는 게 아니고 왕을 보여달라고 왕을. 당신을 다스리고 있고 당신 안에 들어와서 십자가의 용서를 해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한번 봅시다 하는데 난 또 뭐라고. 사람들이 어디서 오해를 하느냐 하면은 예수 믿고 성경 공부하게 되면 나는 품위가 남들에게 인정받고 이쁨 받는 품위로 내 자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달라진 멋진 나를 자꾸 보여주고자 하고 때로는 이걸 아껴서 안 보여주려고 하는데 지금 그거는 완전히 오해입니다. 오해십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할게요. 존재의 단면. 이거는 예수님의 이미지. 복음의 이미지, 예수님의 이미지 같은 말이에요. 우리 속에 뭐 있나? 우리를 잘라버려요. 단면. 말씀으로 우리를 쪼갠다 이 말입니다. 쪼개면 우리 성도를 쪼개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가룟 유다가 나와요. 가룟 유다가 나온다고요. 가룟 유다가 빠지면 제자가 몇 명이죠? 11명이죠. 그러면 한 명을 더 채우는 그 작업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시간 바깥에 있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결정과 의식을 포기하는 입장에서 제비를 뽑아버려요. 제비 뽑는데 여기 최종 후보가 두 명 올라왔어요. 조건은 뭐냐? 예수님 부활할 때부터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 11제자 말고 늘 따라 다녔던 사람. 그 중에서 두 명 뽑습니다. 23절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자, 둘 중에 어느 사람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유명한 인사였던가? 요셉이라는 사람은 할 말이 많아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세 가지나 돼요. 그만큼 많이 친근하고 알려졌어요. 그런데 맛디아는 맛디아 하나 뿐이에요. 최종 면접 봐서 두 사람 중에 뽑는데 이거는 한 쪽은 들러리 같은 느낌 들고 이미 다 정해놓은 취직 자리에 자기 아는 사람 다 결정해놓고 형식적으로 한 사람 더 곁들인 들러리로 하나 뽑은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뽑아보니까 누가 됐습니까? 맛디아가 됐지요. 맛디아가 됐다고요. 이게 신날 일입니까? 기분 좋을 일입니까?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한 사람을 택해야 될 거기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입장이냐 하면 가룟 유다 입장이 되어야만 가능해요. 가룟 유다 입장 되어야만. 12제자를 선택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12제자 하나하나 중에서 주님의 선택이 들어가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된 것은 어떻게 자기 뜻이 아니고 뭡니까? 주님의 선택이죠. 주님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은 가룟 유다는 죽었지만 자리는 남아있어요. 내가 선택했다는 자리는 남아있지요. 그러면 그 자리를 보궐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보궐 재선거로 들어간다. 보궐로 들어갔다는 말은 가룟 유다의 자리에 그 맛디아가 들어가는 거예요. 맛디아가 들어가버리면 나머지 11자리 조차도 가룟 유다와 진배가 없다는 거예요. 그 근거가 바로 뭐냐? 12제자가 12제자로 자신을 알았던 그 시절은 시간 속에 있던 자리였어요. 시간이 추락하면서 그들은 맛디아를 뽑음으로서 12제자는 우리의 옛 사람의 옛 자아에 놓인 위치와 성령 안에서 새로운 위치의 그 차이점이 말씀 자체에서 다 이룸과 능력 있음을 그들은 알게 되는 겁니다.


참새가 전선에 앉아 있는데 하나 둘 씩 다 떨어져요. 참새와 더불어서 이제 시간없다 시간 자체가 없다 다 떨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 새롭게 뽑힌 맛디아를 통해서 12명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활동해야 될 사람이에요.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존재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육신이라는 것, 옛 자아예요. 옛 자아가 품고 있는 육신, 옛 자아 입장에서 새 자아는 없는 겁니다. 마치 그들에게 예수님은 안 보이는 것처럼.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이 소진되어야 돼요. 이 옛 자아는 있다 해도 얼마 안 있어서 없어져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없어지면서 있음은 있음으로 드러날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의 자아는 드러날 겁니다.


따라서 옛 자아에서 새로운 자아가 성립되어버리면 옛 자아는 자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버려요. 주인공이 되는데 이 새 자아는 어떤 형식을 드느냐 하면 옛 자아 육신이 여기 있잖아요. 있어요. 이 있는 자아가 없음이 돼요. 대신 뭐가 나오느냐? 안과 밖 뿐이에요. 안과 밖. 멸망 당할 세상과 새로운 세상의 경계선에 자아가 여기 꽂혀서 증거하는 겁니다. 책받침 있지요. 책받침 보면 사각형 보이잖아요. 바로 세워보세요. 책받침은 거의 안 보이고 책받침 이쪽과 저쪽만 보이죠. 경계 짓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새로운 자아는. 새로운 자아를 내가 꼭 볼 필요가 없어요. 내가 새로운 자아를 보겠다는 것은 옛 자아에 있던 그러한 행세입니다. 내가 증거할 것은 복음인 것과 복음 아닌 것. 이 세상은 살아있어도 지옥이고 죽어있어도 지옥이라는 것과 우리는 살아있어도 천국이고 이미 천국 왔고 죽어서도 천국이라는 것, 두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대표적인 인물이 거지 나사로. 거지 나사로는 사람 취급을 거의 못 받았지요. 개도 사람 취급 안 했으니까. 개도 얼마나 똑똑한지 자기 주인이 사람 취급 안 하니까 자기도 사람 취급 안 하고. 그러니까 있어도 없는 존재.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외치는 것은 내가 이렇게 거지가 되고 몸이 아파도 나는 지금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천국이다 이런 거. 그럼 사람들이 네 걸 내놔. 네가 내놓을만한 걸 내놓으라고. 그럼 거지 나사로가 없다! 몸이 아픈데 뭘 내놓고 돈이 없는데 뭘 내놔요. 없는데. 그 없음이 바로 나를 기준으로 해서 이쪽과 천국 그 두 개만 보여주는 그 기능과 그 직책 그게 바로 오늘날 거지 나사로를 이어 받은 성도의 위상입니다. 성도의 위상이에요.


신앙생활 되게 쉬워요. 지옥이 뭐고 천국이 뭐고 그거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하는가? 마태복음 16장 시몬. 시몬 있고 교회를 시몬 위에 세웁니까? 베드로 위에 세웁니까? 내가 네 위에 교회를 세운다 할 때 시몬 위에요? 베드로 위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몬입니다. 시몬이 베드로 위에 교회 세워지는 것을 모르고 시몬 위에 현재 나 위에 교회 세워진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시몬이 조금 후에 책망받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가 반석이 되느냐? 시몬에서는 반석이 안나와요. 시몬에서 반석 나올려면 시몬은 어디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예수님이 베드로 속에 들어가니까 예수님이 반석이니까 베드로 위에 다시 말해서 베드로 안에 예수님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예수님 승천하시고 난 뒤에 얼마 안 있어 베드로는 눈에 보이지만 베드로 안에 있는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베드로 안에 있겠지요.


2장에 보면 오순절날 성령 받으니까. 있겠지요. 그러니까 사도행전 3장에 여러분 다 체험하고 알고 있는 이야기죠. 사도행전 3장 12절 베드로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사람들이 베드로 요한이 눈에 보이니까 육신이 있으니까 12절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죠. 당신 주목 안하면 누구 주목하는데요? 그럼 누굴 주목할거에요? 그 현장에서 봤는데 cctv한번 까?! 블랙박스까지 다 봤어. 다 봤는데 왜 당사자 본인들이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는거죠. 그리고 앉은뱅이도 정작 나은 앉은뱅이도 우리를 주목 안 했다는 거예요.


15절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우리를 주목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증인이고 실제로 살아계셔서 앉은뱅이를 낫게하는 것은 16절에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앉은뱅이 속에 들어가서 앉은뱅이 예수님 때문에 걷게 되었지 앉은뱅이 걷는 것에 우리는 하등 도운 적이 없습니다. 이 말 듣는 그 사람들은 데오빌로가 아니라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지요.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나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 성경을 본다는 것은 성령 받아서 이중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한테나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요. 성경 백날 백독했다 백일독 했다 백만하나 백만두번 해도 이건 소용 없는 거예요.


가룟 유다 자리는 멸망자리지 구원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생명책에 누가 들어있는가는 우리가 몰라요. 주님만 알고 주님만 아시고 주님만 아는 명단 따로 있기 때문에 그 명단대로 우리에게 성령을 준 거예요. 노벨문학상 후보자 자기들끼리 비밀이 되가지고 아무도 몰라요. 상을 주니까 아 그 명단에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뒤늦게 추론해서 아는 거예요. 아 명단에 있었구나. 언론사가 짐작해도 소용이 없고. 생명의 면류관 줄 명단은 누가 아느냐? 인간은 어느 누구도 컨닝할 수 없고 뺏어서 미리 개인정보 알아도 소용 없어요. 성령이 오니까 아는 거예요. 성령이 오니까 옛날 내 모습을 아는 거예요. 옛날 내 모습을. 내가 어떻게든 천당 갈라고 발악을 했는지 비로소 헛짓 한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때부터 이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내가 시간 자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알아요.


이거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벌써 또 성령 받기 전이기 때문에 계속 시간 안에서 자기가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프로젝트를. 7절에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구원이 너의 일이 아니고 구원이 예수 나의 일이고 아버지의 일이다"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1장 3절 (소진되는 존재) 241022b-이근호 목사


참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아주 끈질겨요. 말로는 남한테 신앙 있는 것 티낼라고 “주님 보고 싶어요” 하지만 사실은 천국 가 있는 내 자신을 보고 싶어요. 이게 육신이 안고 있는 옛 자아의 본성이에요. 육신이 있을 동안은 계속 남아있어요. 멋있게 되는 영광스럽게 되는 내 자신이 보고 싶은 거예요. 왜냐 하면 욕망은 내 안에서 순환되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되어있는 내가 욕망의 목표가 되어있어요. 내가 잘 되는 게 내 욕망의 요구사항이었어요. 그 요구사항에서 매일 채찍질, 내 욕망한테 내가 시달리고 있어요. 내가 나한테 날마다 심사 당하고 잔소리 듣고 채찍질 당하면서 ‘열심히 하란 말이야, 제대로 해. 실수도 줄이고 장점 살려, 잠 안 자고 열심히 매진해야 돼 그래야 네가 원하는 너 자신이 될 수 있어’ 이걸 계속 해서 우리한테 압박을 가했던 거예요.


스승이신 예수님한테 잘 보여서 예수님이 가 계신다는 그 소개하는 천국 자리에 열두 지파 자리에 자기가 앉고 싶어서 가룟 유다가 나름 얼마나 애 썼는지요. 귀신도 쫓아내고, 그건 주 예수님의 권능이죠. 병든 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회계 담당 직원으로서의 임원진 아닙니까? 임원진으로서 열심히 했어요. 그러나 늘 떠오르는 것은 이렇게 열심히 충성하고 충성하는데 나한테 돌아올 몫은 뭐냐? 자기 생각을 자기 부인이 될 수 없고 떨쳐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가룟 유다한테만 해당되는 걸까요? 나머지 열두 명 다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는 나머지 사람들 다 마찬가지예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사는 거 그거 어떻게 인간이 그걸 솎아낼 수 있습니까? 그게 타고난 인간인데요. 타고난 인간이 그것을 처방할 수 있거나 제거할 수 없어요. 그냥 소진될 뿐이에요. 그 모든 정력과 에너지가 소진될 뿐이에요.


구원은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한번 적어 볼께요.
‘내가 만들지 않았는데 내 힘으로 나를 망가뜨릴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안 만들었는데 내가 나를 제조 안 했는데 제조된 나를 망가뜨릴 수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고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고 하는 것은 가룟 유다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적인 마귀가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마귀를 허락한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하나님이죠. 제조하신 분이 인간을 망가뜨리든 거기서 망가뜨리면서 건지든 그거는 완전히 주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아 나 죄 지었는데 지옥 갈 거야’ 누구 맘대로 가요? 본인이 자기 만들지도 않았는데 만든 원리 같은 것도 몰라요. 만드는 원리는 제조 공장에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분이 다 그 모든 정보를 알고 있지, 만들어진 인간을 그걸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인간을 뭐로 만들었습니까? 만들어진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신이라고 ‘정신 착란’을 일으켜요. 정신 착란 자체가 이게 이미 망가진 거죠. 마귀가 들어갔으니까.


제가 노래 가사를 하나 소개해드릴 테니까요.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노래입니다. 김도향 씨가 불렀던 노래, 제목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어느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려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우~~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흘려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게 가사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근본적으로 뭘 모르고 있어요? 내가 만든 게 아니죠? 내가 만든 게 아닌데 인간은 이상하게 만든 분에게 수리를 맡기면 되잖아요. 안 맡겨요. 안 맡기고 누가 관리하고 책임지려고 합니까? 본인이 관리하고 책임져요. 왜? 이미 마귀가 들어와서 자기가 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계속해서 관장하면서 나는 내 신 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그 생각, 그게 정신 착란 정신병이에요. 다들 노래 알겠지만 들어보면 좋겠죠.


말씀을 안 보고 말씀을 적고 오늘같이 가을에 비 오면 별로 할 일도 없을 때 창 밖에 내다보면서 불신자 같으면 담배 한 대 피우고 술 한 잔 먹으면서 술 먹고 싶어서 친구 한번 만나고 난 뒤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나 이제사 고백한다. 나 또 바보 같이 살았다’ 바보 같이 살은 게 아닙니다. ‘공격하면서 살았다’ 공격하면서 살았어요. 바보 같이 살은 게 아니고, 하나님 원망하면서. 네가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내 인생 이렇게 조지게 할 권한 있어? 이런 거 원망하며 살았어요.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죠. 당신이 천국 가라고 손님으로 나 안 갈 거야. 내 식대로 살아온 식대로 살 거야. 나는 자아대로 살 거야. 왜? 자아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 있는 자아가 했던 행동대로 그냥 살 거야.


그러니까 이게 가룟 유다 모습이라면 어느 누구도 가룟 유다 모습에 동조 안 한 사람 누가 있어요? 다 아담의 자손 거기서 거기예요. 똑같아요. 가룟 유다가 좀 솔직하고 양심적이고 용감하다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은 소극적이고 위선자라는 것뿐이지 본심은 다 똑같은 거예요. 나 건드리면 하나님이든 누가 되든 나 건드리면 성질나는데요? 왜? 나는 절대 신이잖아요. 마귀가 그런 마음을 이미 줬단 이 말이죠.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인생이 잘 안 되면 방법은 뭐냐?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면서 어떤 개선의 여지를 노린 거예요. 교회 와서 기도하던지 성당에 가서 세례 받고 영세 받던지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를 나한테 함으로써 하나 밖에 없는 나를 개선함으로써 개선된 나를 통하여 천국까지 들어가려고 하는 거,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여기 사도행전 1장3절 봅시다. 그 앞에 글자 한 자 나오지요? 뭐 받으신 후에? “해 받으신 후에” 예수님이 해 받았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공격 받았다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제자부터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공격한 쪽에 속해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냈어요. 그 흔적을 가지고 있어요. 그 흔적이 뭐냐? 바로 사건입니다.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에요. 존재의 단면은 사건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당신 속에 예수님이 왕이라는 그것을 사건으로 사건화 되어 보여 달라는 거예요. 왜? 존재는 우리 존재를 깨뜨리면 거기에 이미지가 나오고 그 이미지는 살아있는 이미지 능력을 갖고 있는 이미지, 그 이미지가 뭐냐? 말씀이죠. 모든 말씀이 어디에 집중 되어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되어있어요. 예수님 십자가 사건은 다른 존재하고 차이점인데요. 다른 존재는 어느 누구도 십자가 사건을 유발할 수 없습니다. 왜? 십자가 지신 분은 사도 바울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 십자가 졌기 때문에. 그게 중심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중심화 되어서 그 사건에서 말씀이 사라지면 그 말씀 안에서 기록된 생명책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우리들, 없는 우리들이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거기서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자아가 두 개 되죠.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와 성령 오기 전에 이미 성도한테는 사라졌지만 그대로 육신에서 기능이 남아있는 옛 모습. 성도는 이 두 개의 안목을 보게 됩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나타내사” 며칠 동안 있었습니까? 사십 일. 다 의도한 날짜죠 사십 일. 사십 일 동안 추락이에요. 시간은 추락입니다. 사십 일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서 오직 만나 하나 의존해서 버티던 세월이 사십 년이었어요. 사십 년 동안에 어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 그래도 어떤 사람 존재하는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광야 사십 년 동안 주어진 것은 뭐냐? 오직 외래성을 지닌 만나, 외부에서 온 만나죠. 이스라엘에서는 만나를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뭐꼬? 이름이 만나, 만나라는 뜻은 무엇? 이게 무엇이지? 맨날 무엇이지? 오늘날 성도도 맨날 삶을 살면서 다가오고 느껴지는 모든 사건은 이게 무엇이지? 그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들어있으니까 성도에게는 새로움이 되고 그 새로움이 지난 과거의 모든 아픔과 과거의 굴레를 다 시답지 않은 일로 다 처리가 가능하죠. 과거의 고민거리 염려거리 걱정거리가 만나 앞에서 새로운 십자가 앞에서 다 시시한 일이 되죠. 십자가 뭡니까? 죽을 너를 내가 건져냈다는 거예요.


미국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있어요. 포스터에 보면 낚시를 하고 있죠 흐르는 강물에 아버지하고 아들 이야기. 낚시하듯이 인간은 지옥에 태어났습니다. 살아도 지옥, 죽어도 지옥이에요. 인간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어요. 그 희망 없음을 그 마음을 솔직하게 풀어낸 게 바로 ‘소년은 간다’ ‘채식주의’ 이런 책이에요. 작별 하는 책 있죠? 그 책이 이 세상에 희망 없는 거예요. 그럼 희망 없는 게 기분 좋습니까? 화가 납니까? 화가 나죠. 난 참 화 내면서 살아온 거예요. 바보처럼 살아온 게 아니고 그 보이지 않는 누구를 향하여 끊임없이 욕설하며 살아온 거예요. 주님은 그 욕설을 다 받아내고 심지어 구원 받을 인간들도 욕설한 그 욕설을 주님이 받아냈고 욕설한 그들을 구원해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구원하시면서 ‘니 요렇게 욕했다’라고 말씀으로 되돌려줄 때에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육신이 한 모든 것은 현재에 와서 찢어지면서 다 잊어버리죠. 그러나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걸 잊지를 못합니다. 왜 잊지를 못하는가? 새로움이 없으면 과거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죄 용서가 없으면 내가 죄 용서 받으려고 애썼던 그 아픔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죄 용서가 피 뿌림이 있어버리면 피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내가 이런 짓을 필히 했었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나죠.


해 받으신 후에 주님께서 사십 일 동안 무슨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했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무슨 이야기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아요. 그냥 세 번 나타날 때 그때 잠시 에피소드 이야기했지 사십일 동안 이야기한 것을 비디오 찍듯이 다 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거 안 해도 괜찮아요. 왜? 꾸준히 예수님께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동안 천국 이야기를 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꾸준히. 자, 꾸준히 천국 이야기를 해 왔는데 그 천국 이야기한 그 이야기를 지금 부활하셔서 승천을 앞두고 있는 시간이 추락하는 그 지점에 앞두고 있는 지점에서 승천하면 시간은 추락해요. 추락하면서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톰과 제리 만화 보면 있죠. 톰과 제리가 신나게 까불다가 쥐가 쫓길 때 너무 빨리 달려서 공중으로 확 떠버렸잖아요. 뜨고 난 뒤에 어?! 공중에 떠 있잖아요. 자기가 알 때 비로소 추락하는 겁니다. 자기가 알 때. 그만큼 인간은 신자든 불자든 자기 인식의 노예예요. 인식에 갇혀 있는 거예요. 마약을 왜 합니까? 마약은 인식을 새로 장만하기 때문에 마약하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배고프고 아프고 해도 과도한 도파민이 기쁨을 주니까 자기의 형편, 취직 안 되고 가정 어려운거 다 잊을 수 있어요. 마약이에요 마약. 잊어버리죠.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환상 속에 몰입해서 환상이 자기 세계라고 여기고 대체 현실로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거예요. 마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담배나 똑같은 거예요. 자꾸 환상을 못 버립니다. 그 환상은 과거에서 나온 환상이죠. 성령이 와서 찢어야 되는데 성령이 안 오니까 찢어지지를 못해요. 맨날 마약하고 술 하면서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맨날 자책하면서. 자책이 구원입니까? 자책하면 해결됩니까? 해결 되도 문제예요. 자책해서 해결되면요 그 지점에서 또 자책해요. 왜? 배운 게 자책하는 것 밖에 못 배웠기 때문에.


부흥회가서 회개한다는데 회개만 배워가지고 맨날 회개할 거예요. 사실 그게 회개가 아닌데. 40일 동안 하나님나라 이야기했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가 뭔지를 궁금해요? 하나님 나라 이야기 여러 가지 많습니다만은 마태복음 15장 13절 보겠습니다. 시편 127장 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이게 바로 하늘나라 소식이에요. 하늘나라 소식은 너 죽어서 좋은데 간다 이게 아니라 시몬에서 베드로 바뀌려면 시몬이 시몬 행세 본색을 다 들추어내고 발각당해야 돼요.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장차 교회 반석이 될 사람에게 예수님은 사탄이라고 말했어요. 교회의 반석이 될 사람에게. 사탄 위에 교회 짓습니까? 교회라는 것은 마지막 이스라엘이에요. 완성된 이스라엘. 완성된 이스라엘은 옛날 이스라엘이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그 실패를 계속하는 한 완성된 이스라엘은 그 식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어떤 아이디어 제공해가지고 그들을 교회에 넣어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이디어 제공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하는 것 말고 그들이 하지 못하는 걸 대신하신 분이에요. 대신하신 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와버리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천국가지 못할 행동뿐이었다 도리어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것을 계속 평생 들추어 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감사가 안나올 수가 없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시시한 일일 수밖에 없어요. 중요한 일은 예수님만 중요하지 내가 하는 일은 잘하나 못하나 다 시시해요. 훌륭하나 안 훌륭하나 다 소용없어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러니까 이건 뭐냐? 아버지와 아들의 합동작전. 다 뽑아버려요 다. 대머리를 만드나. 안 돼 이것은 내가 얼마 고생한 건데 안 돼. 안 놔?! 안 돼 이거는 가지고 가야 돼요. 다 뽑아버려요. 이건 천국 가지고 가야 돼요. 다 뽑아버려요. 우리 시대에 군대에 갔을 때 제대하는 병장들 보면 모형 배를 들고 가요. 모형 배. 고생했던 자기에 대한 보상. 자기가 자기에 대한 보상으로. 기념물로 해적 배 모형 들고 나가요. 천국 갈 때 여러분 뭐 들고 가렵니까? 모형 배 들고 가렵니까? 배 왜 들고 갑니까? 그걸 왜 못 부숴요? 3년 동안 고생한 거 날려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이에요. 이거라도 있으면서 내가 이렇게 나라 위해서 고생했다 그건 핑계고요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한 거예요.


인간은 나라 위해서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한 고생하는 겁니다. 그게 있을 때 기념물이 될 때 자기가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집 간 여자 분들의 보람은 뭡니까? 모형 배입니까? 자슥이죠 자슥. 자식도 아니고 자슥. 아이고 내 새끼. 보람이에요. 나 죽더라도 너 성공시키고 말겠다. 걱정하지 마 엄마만 믿어. 엄마만 믿어. 엄마를 믿으라는 말은 엄마와 같이 간다는 뜻인데 애들은 이 말을 오해해가지고 엄마를 이용해 이렇게 오해해버렸어요. 나중에 시집가고 장가가서 계속 엄마를 이용해. 엄마 믿으라면서요. 엄마 돈 줘. 맨날 이용해. 엄마하고 같이 살 생각은 없어요. 건강할 때 엄마지 아프면 엄마 아니고 돈 있을 때나 엄마지 돈 없는 엄마는 엄마도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왜? 본인이 신이에요. 많은 신이 있겠지만 나한테는 무조건 내가 1순위고 0순위고 내가 신이에요. 하늘나라 가봤자 자기 나라에요. 자기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인간은 생각하고 그걸 믿습니다 하고 있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오신 하늘나라는 이겁니다. 하늘나라를 인간이 가리고 있으니까 뽑자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가리고 있으니까. 이를 뽑아야 새 이가 나올 거 아닙니까. 새 이빨 나오죠. 그러니까 옛것 다오 새것 줄게 두꺼비. 새집으로 옛집을 덮어버린다고요. 그런데 옛집은 뭐냐? 내가 신이에요. 내 방식대로 내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집이 두 개가 되어야 둘 다를 알 수 있어요. 그러나 성령을 안 받아서 집이 하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악착같이 교회 다녀야지요. 악착같이 자기의 마일리지를 쌓아야지요. 성급을 쌓아야 구원도 받고 상급도 받고 양쪽 다 되는 거예요. 277번 생명책 나오세요. 귀하는 그동안 6년간 개근했기에 상품을 줍니다. 요세 초등학교 개근상은 등신입니다. 왜 등신이냐? 얼마나 집안이 못 살았으면 해외여행도 못 가나 바보. 얼마나 집이 가난했으면 학교 외에 갈 데가 없느냐. 있는 집안은 전부 다 해외여행 가요.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개근상 탔습니다. 틈새 자랑이 막 튀어나오네. 뽑는 작업. 다 허무는 작업.


유대인들은 오해한 거예요.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이걸 왜 허물어. 허물자. 나 잘났고 율법 지켰다. 네가 잘났어? 세리 창기가 천국 간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의 역할은 뭐였다? 하나님을 가리는 역할, 천국을 가리는 마귀 짓을 한 거예요. 자, 시편 127편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파수꾼을 왜 세우죠? 세워도 소용없다면서 파수꾼을 왜 세우죠? 인간이 왜 집을 짓지요? 그것은 바로 무너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에스라 느헤미야 성전 지었잖아요. 학개서에서. 왜 지었습니까? 지어놓고 무너지게 하는 거예요. 짓는 행위와 무너지는 행위 둘 다를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자기 구원 될 백성에게 주시는 일은 뭡니까? 바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살려고 하고 ■그것이 무산되게 하는 두 가지 과정을 같이 동반해서 다 평생 동안 보이게 하는 거예요. 다 보여주는 거예요.


자, 사도행전 다시 돌아와서 1장 3절까지 보면 예수님 따르는 사람이 120명이라고 되어 있어요. 15절에 나와요.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 되었더라” 마가의 다락방이죠. 이스라엘 가서 마가의 다락방 가봤어요. 120명 잘 하면 들어갈 수도 있고 좀 비좁겠다는 생각도 들고 했었어요. 어쨌든 거기 모였는데 이 120명 모인 사람이 바로 40일 동안 주님께 들은 게 있을 거예요. 그 들은 것을 근거로 해서 몇 날이 못 되어서 내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이 그겁니다. 아무것도 안 듣고 성령 기다려라 이게 아니고 들었던 걸로 근거해서 기다린 거예요. 인간이 심은 것은 다 뽑히고 하나님이 새로 심어준다는 이야기거든요. 새로 심어준다. 새로 심어 준다면 새로 심어주는 그게 뭐냐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그러면 이스라엘은 붕괴되고 망했어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이스라엘 대표자가 누굽니까? 유대인이죠. 유대민족이죠. 유대 민족에 의해서 하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계산 끝나는 거예요. 빠이빠이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몇 명 뽑았습니까? 12명이죠. 전체 이스라엘을 대변해주는 12지파를 대표하는 12명을 뽑았어요. 12명을 뽑았다는 것은 새로 시작한다는 뜻이에요. 새로 시작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12명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부터. 예수님의 뭐부터? 예수님의 말씀부터 하는 거예요. 말씀의 응축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에 모든 말씀이 여기 다 응축이 되면 말씀이 만들어낸 모든 일들이 모든 사건이 단일 사건 안에 다 압축이 돼요. 압축이 되면서 기존에 있던 모든 사건이 압축이 풀리면서 십자가 능력과 더불어서 다 이루었다 와 더불어서 오늘날 일반 성도에게 적용이 되는 거예요. 적용되면 자아가 두 개 된다 이 말이죠. 우리가 이런 짓을 했구나. 우리가 바리새인이네. 악한 이스라엘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악한 이스라엘이다. 구약 전체 말씀, 그리고 신약에 있는 모든 말씀, 예수님 당시에 있던 모든 이야기가 그대로 우리에게 그대로 똑같이 연결되는 거예요. 왜? 다 같은 아담의 육신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주일날 설교 했지요. 인간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에 갇혔다고요. 죄에 갇혔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악한 바리새인이나 우리나 다윗이나 모세나 예레미야나 다 마찬가지에요. 죄에 갇힌 거예요. 죄는 뭐냐? 공격하는 겁니다. 주님께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행한 것은 왜 인정 안 합니까? 이것 때문에 공격해요. 네가 뭔데? 우리도 하나님이거든.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전개 스토리가. 우리의 가치 좀 인정해주면 좋겠습니다. 안 해줍니다 인정 안 해줍니다. 인간이 신이기 때문에 망가졌다고 했지요. 사탄이 그래요. 사탄이 신이 됐기 때문에 망가진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만들어진 존재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차단해버리고 자기가 자기를 만들려고 시도한 겁니다. 교회는 그게 아니죠. 시몬이 사탄 짓하고 난 뒤에 이름이 베드로로 바뀌면서 그 베드로 위에 교회가 올라가는 거예요. 베드로 위에. 그럼 베드로 안에 뭐가 들어가 있어요? 망가진 베드로를 말씀의 다 이루었음이 망가진 베드로와 합류가 되는 겁니다. 합류가 되면서 베드로 배 째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다 이루었다가 나오겠지요. 베드로가 증거 할 것은 그거밖에 없어요. 아까 베드로가 증거 했잖아요. 앉은뱅이 나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내가 안 했어요 우리 주님이 하셨어요” 라고 안에 있는 것을 내놓지요.


여러분들도 대화할 때 그렇게 대화하세요. 당신은 왜 그리 망가졌습니까? 내가 안 했어요. 주님이 망가뜨렸어요. 그럼 당신은? 나는 인간성 더럽지요. 나 인간성 더러운데 뭐. 나한테 뭘 기대해요. 그럼 당신 인간성 더러운 거 주님이 어떻게 다룹니까? 지금도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양초 끝 다 되가. 마지막 불 끝내줄 테니까. 다 그 죄를 재료로 해가지고 의로 만들어줄 테니까 빨리 그 죄를 소진시킬 거예요. 죄 짓는 게 아니고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죄가 드러날 거예요. 그리고 그걸 근거로 해서 주님께서 뭘 하느냐? 교회를 만듭니다. 교회를 만드는데 교회를 어떻게 만드는가? 예수님의 영으로 만들어요. 스가랴 4장에 나옵니다. 성전을 만들라 해 놓고 부서질 성전을 만들어놓고 하는 말이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해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으로 되느니라. 뭐가? 성전이. 그럼 이 성전은? 무너질 거죠.


사람 손이 들어간 것은 그건 무너져요.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왜냐?

구약의 성전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신약의 교회는 머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이게 교회죠.

교회는 출발 자체가 머리가 주님이고 지체가 거기서 뻗어 나온 거죠. 주님께서 지체가 되려면 머리에서 뭐가 주어지느냐? 성령이 저 지체 발가락 손톱까지 계속 성령이 파이프를 통해서 흘러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눈이 되고 발이 되고 코가 되고 하는 거예요. 눈이 발더러 손더러 너는 못하다 하지 마세요. 왜? 쪼개보면 안에 다 뭐가 들어가 있습니까? 쪼개보면 성령이 들어있으니까. 성도끼리는 정말 귀한 걸 내놔야 하는데 자꾸 자기 자신이 잘난 것을 내놓으니까 오히려 그것이 안 귀한 거예요. 귀하지 않는 거예요. 저 사람 믿음 너무 좋다 복음 안다 성령 있겠지. 성령 봅시다 하니까 나 이렇게 믿음 좋아 이래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어떻게 당신을 죄인으로 규정했느냐 그걸 보자니까. 당신 잘났는데 그 잘난 내가 왜 죄가 됐느냐 그걸 말씀에 입각해서 한번 봅시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주님도 그렇게 이야기하시고요. 볼품이 없어요. 그들이 이방 나라 자체가 방언이 아니고 내용이 복음이 들어있을 때 예수님이 하시는 십자가 사건에 들어있을 때 방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줄 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가 되는데 이게 수월한 게 아니라 어려워요. 부산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삼각형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직선에 시간적 나열 속에 살고 있다. 이게 눈에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심으로서 제자들 떠났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떠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떠났다고 생각했지 도형을 삼각형으로 벌린다는 생각을 못했던 겁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했거든요.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다” 이거는 떠나는 게 아니고 함께 있는 방식이 눈에 보이는 방식보다 확장시키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아는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도형을 삼각형으로 확장한 거예요. 확장을 왜 하느냐? 시간마저 예수님의 영역 안에 시간 공간의 차이 없이 언제 어디든지 주님께서 여기서 주의 일을 하는 거예요. 주의 일은 뭐냐? 마태복음 15장 13절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아내지요. 그 작업을 사도들이 하는 게 아니고 여전히 주님이 해요. 주님이 사도를 앞장 세워서 사도들이 아바타가 되어서 하는 거예요. 주님한테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인간만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눈에 안 보이니까. 나중에 성령 받으면 아 달라진 게 없구나. 옛날 제자들이 예수님과 다정하게 식사했잖아요. 그것과 지금 우리와 똑같아요. 똑같애. 달라진 게 없어요. 성령 받아야 알 수 있어요 달라진 게 없습니다.


우리 오빠가 죽었어요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죽은 게 아니고 잔다. 그게 오늘날 우리한테 해당 돼요. 나 이제 나이가 90이 되어서 죽는다. 죽는다 고치세요 잔다. 옳지 잔다. 내 나이 시간 공간 어디 있느냐? 이게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삼각형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까지 들어와버리면 예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버리면 우리 안에는 뭐냐? 말씀 완성이 돼요. 말씀 완성으로 가득 차버리면 이게 의가 되어버려요. 이게 거룩이 된다고요. 성도로 거룩한 자로 거룩한 존재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예수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을 전제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죄가 된다는 것을 내놓지요. 주께서 말씀으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가 했다고 인식하는 인식, 옛날 자아에게 되돌아오는 인식, 흔히 불신자들이 인식하는 인식, 그대로 육신에 다 있는 거예요. 그대로 죄가 되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죄가 되기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왜? 자기 자랑이 안 나오니까. 자기 자랑이 안 나오고 십자가만 자랑하니까.


그리고 성령 받은 안목으로 세상을 볼 때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입니까? 이 세상이 어떻게 보입니까?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거느리고 있어요. 가을쯤 되면 바바리 입고 깃을 세워줘야 맛이 나요. 저녁에 천에 산책할 때는 낙엽 떨어질 때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하면서 어디를 산책하느냐? 지옥을 산책하는 거예요. 왜? 몸의 건강을 위해서. 파워 워킹하는 사람 있고 흔드는 사람도 있고 하는데 이렇게 흔들어도 지옥이고 이렇게 흔들어도 지옥이에요. 지옥에서 살다가 어디로 갑니까?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성도라는 게 딴 게 아니고 경계선에서 지옥과 천국이 둘 다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 이 비오는 날에 성도의 축복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의 축복이에요. 그래서 공간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땅 끝이 어디입니까? 묻지 마. 어디든 땅 끝이에요. 왜? 공간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땅 끝이라고 계산할 필요 없이 주님이 계신다면 그곳이 예루살렘이고 유다고 사마리아고 땅 끝까지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자, 끝으로 오신 성령은 떠날 수 있느냐? 떠나지 않습니다. 그건 구약하고 신약하고 달라요. 왜 떠나지 않느냐 하면은 성령은 성령 단독으로 오면 떠나요. 그런데 성령은 뭐를 품고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두 번 세 번 일어나지 않아요. 십자가 두 번 세 번 적용을 하지 하나의 십자가 사건에서 말씀으로 십자가 사건으로 집중시키지. 십자가 사건을 또 일으킬 필요 없어요. 다 이루심이 다 이루심을 적용시킬 뿐이지 다 이루심 따로 또 다 이루심 따로일 필요 없습니다. 다 이루심이 그냥 할당되고 배당되는 거고 배치되는 거예요. 그냥 나누어지는 거예요. 화투 나눠주듯이. 그냥 십자가 사건을 주어서 그들이 십자가 사건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를 두 개 다 알고 있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 그게 바로 성도의 위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주님 제대로 알게 하고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도 없었고 우리는 주님께 반역하는 일뿐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해주시고 그걸 통해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증거하고 지옥에서 살면서도 지옥이라고 느끼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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