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죽음 속의 죽음

아빠와 함께 2024. 9. 3. 08:47

강남-누가복음 24장 3절 (죽음 속의 죽음) 24071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4장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는 있음이죠. 있음은 나를 확인하는 겁니다. 항상 나를 확인하는 겁니다. 확인하는 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있음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확인하는 삶이 가능하죠. 나의 조건은 내가 여기 있을 때 확인할 수 있을 때 나는 내가 사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이 말은 사실과 진리를 일치시키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곧 나에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내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거죠.


그런데 사실과 진리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있음이죠. 있음을 확인. 사실과 진리가 일치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러면 뭡니까?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부정당하겠지요. 분명히 무덤에 시체가 있어야 돼요. 분명히 시체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시체 있는 지 없는 지는 들으면 안 되고 내가 가서 눈으로 봐야 되지요. 시체 있다. 무덤 안에 시체 있다. 보니까 시체가 있음이 아니고 시체가 없지요. 시체가 없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확인하는 이유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거예요. 이거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진리는 아니에요. 내가 확인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여기에 무덤 안에는 시체가 있다. 시체 없는 무덤이 어디 있어요. 무덤 안에 시체가 있을 때 그게 무덤이 되잖아요. 똑같이 적용하면 돼요. 무덤이란 뭐냐? 안에 뭐가 있을때는 무덤이 된다? 시체가 있을때는 무덤이 돼요. 무덤이란 시체를 넣어놓은 곳이니까. 그런데 그 무덤에 시체가 없다 이 말이죠. 시체를 넣어준 사람은 있는데 시체가 없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다. 그게 사실이고 그게 진리다 일치된다 라고 하는 모든 것이 일거에 다 무너지는 겁니다. 이 무너짐을 여기서는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겠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못 믿겠다. 이거는 말이 안돼요.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우리가 보기에 여기 있는 내가 보기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라는 것은 항상 내가 여기 있고 그게 진짜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내가 있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가 없다는 전제 하에 내가 있다 이 말이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누가 탓해?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는데. 나는 여기 있단 말이야. 자꾸 없다고 하지 마 나 여기 있어. 자신만만해 라고 우기는 그것을 내가 여기 있는 조건이에요. 조건. 내가 여기 있음으로서 내가 하는 것이 뭐가 된다? 진리가 되는 조건이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여기 있으니까 확인되니까 그거는 진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는 믿겠는데 뭐를 못 믿겠다? 시체가 어디 가서 없어요. 십자가는 믿겠는데 부활은 도대체 이거는 확인이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고 하잖아요. 이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은 인간은 어떤 인간도 십자가 사건을 믿을 수 없게 만들어요. 그 없게 만드는 조건이 뭐냐? 부활을 집어넣습니다. 시체가 없어졌네. 그걸 네가 당황한다면 네가 믿는 십자가도 십자가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됩니다. 보통 인간 보기에는 십자가 사건이 있고 그 다음에 무슨 사건입니까? 부활 사건. 예수님의 죽음이 먼저고 그 다음에 부활이잖아요. 우리 인간들 보기에. 왜냐하면 인간들은 순서로 보니까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몇 일 동안? 3일 있다가 부활 됐으니까 순서상 십자가 먼저고 그 다음 나중 사건은 부활 사건이 된다.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부활 사건 나중 사건 속에 초기 사건을 여기다가 나중 사건이 초기 사건을 유발시켜버려요. 초기 사건을 두고 나중 사건이 증명하는 게 아니고 부활 사건을 인간에게 주고 그 다음에 초기 사건인 십자가를 그 다음에 이야기함으로서 인간들이 십자가 믿는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고 그거는 믿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의 부활이에요. 참 어렵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건데. 예수님이 죽고 부활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죽지 않고 부활이 있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인간 듣기에는 똑같은 소리지만 똑같은 소리가 아닙니다. 죽지 않고서야 어떻게 부활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부활하겠지가 아니라 그것부터 출발하지 말고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가 분명히 죽였는데 어떻게 시신이 없어. 어떻게 그게 살아난 거야.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이게 자기 죽음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죽음에 대해서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도대체 내가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은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어버렸다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했느냐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묻고 있습니다.


15장 한번 볼게요. 부활이 없으면 나의 죽음도 없어요. 희한하죠. 부활이 없으면 나의 죽음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죽는데 부활이 있든 없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는데 그 죽음은 우리가 잘못 생각한 죽음, 제대로 된 죽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대로 된 죽음은 부활을 믿게 되어서 그로 말미암아 부활되신 분이 죽었다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경유해서 그 다음에 그 다음 차례 내가 왜 죽지? 이렇게 되어야 이게 되어야 이게 사실과 진실이 일치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해가지고 자기 죽음의 이유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이 말은 인간은 원래 죽는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왜 태어난 인간은 왜 다 죽어야 되는가? 죽는 게 왜 조건인가? 그 조건 도대체 어디서 온 조건인가를 죽어야 된다는 그 조건이 어디에 근거한 조건인가를 그 근거를 알아야 죽음의 근거를 알아야 제대로 죽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가수는 나중에 노래 못하면 어떻게 해요? 은퇴해야 되겠지요. 우리의 순서는 뭐냐? 가수는 노래 못해서 은퇴하고 은퇴 다음에 나이 들어 죽는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우리 상식이죠. 그런데 은퇴 없이 죽으면 어떻게 돼요? 가수가 은퇴하지도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 좀 이상하지요. 그런 사람이 누구지요? 현철. 현철 아세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한다는 현철. 봉숭아 연정. 청춘을 돌려다오 라고 외쳤던 현철. 그 사람 특징이 뭐냐? 은퇴 없이 죽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제 죽었어요. 인간은 죽어도 못 죽어요. 왜? 은퇴를 안 했으니까. 인간으로서 은퇴하고 죽어야 되는데 인간은 은퇴도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인간은 왜 죽을 조건일 수밖에 없는가를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새삼스럽게.


고린도전서 15장에 보게 되면 36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16절 한번 봅시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죽는 것이 기정 사실이 아니고 부활하는 것이 기정 사실이라는 거예요. 죽는 것이 그냥 죽어버리면 인간을 죽게 한 하나님이 주신 조건이 살아나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너는 꼭 죽어야 돼' 라는 그 조건을 살리기 위한 부활이에요. 주님께서 끝까지 죽고 난 뒤에도 하는 거예요 인간을. 살다 보면 죽겠지가 아니라 너는 반드시 죽어야 된다.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왜? 내가 너희를 살려서 내가 너희를 살리는 목적 하에 네가 죽는다는 것이 조건으로 필히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죽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여기 있음에서 출발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거짓이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거 맞잖아. 아니 안 맞아 거짓이야. 네가 여기 있다는 조건은 뭐냐? 내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아니, 죽어서 살아있을 때 조건이 되어야 되는데 네가 살아있어서 살았다 하면 네가 죽는 이유가 안 바뀌어졌기 때문에 그거는 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참 이 부활이 만만치 않지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지요. 어려운 문제 아니고 불가능한 문제지요. 어려워도 알면 다행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것하고 힘든 것하고 차이가 나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라. 아 이거 힘들지요. 힘들지만 할 수 있지요. 타박타박 걸어가면 한 달 걸리면 갈 수 있잖아요. 한 400km 됩니까? 하루에 한 4km 걸으면 100일 만에 가네요. 가다 맛있는 것 먹고 자고 할 수 있잖아요. 힘들지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살기 위해서 나는 꼭 죽어야 된다는 이 사실은 죽었다가 사는 것하고 달라요. 죽었다가 사는 건 다르고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는 조건이 내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조건이에요. 그 먼저 모델이 누구냐?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부활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첫 열매가 돼요.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이 그렇게 했잖아요. 그럼 그 뒤에 천국 가는 사람들도 살기 위해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말투가 사는 것을 기정 사실을 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안 보는 인간들은 뭐냐? 인간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사는 게 어디 있느냐고 자꾸 뭐를 조건으로 삼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거니까 이거는 십자가도 못 믿을 뿐더러 부활조차도 접근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부활을 앞장세움으로 말미암아 정식으로 하고 싶은 것은 너희가 십자가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내가 이해하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나는 필히 죽어야 돼 라는 마음으로 볼 때 비로소 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종속된 죽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예수님께 종속된 죽음이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내가 살아있다는 나는 모르고 뭐가 와야 돼요? 부활의 영이 임해야 돼요. 부활이 먼저 와야 돼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내가 살아있는 나의 이해력과 나의 모든 실력과 이성적인 능력과 학력과 모든 것은 부활의 접근 불가. 불가능성. 왜냐하면 무덤에 가니까 시체가 없으니까. 예상 밖이에요. 시체 없다 그냥 집에 가자 이게 문제가 아니고 그 시신이 예수님의 시신이 나라면 그 무덤 없음을 내가 사전에 그걸 알겠느냐 이 말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죽고 난 뒤에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있을 때 그걸 납득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아서 그걸 납득한다면 내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거짓일 뿐이에요. 그리고 진리 조건은 내가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가 살려주신 그 분야는 누가 개입하느냐? 주님이 개입하잖아요. 주님이 진리에요. 주님이 진리라는 말은 나는 진리가 아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진리가 아니에요. 이거는 거짓입니다.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나를 확인하는 측면에서 사실을 언급하거든요. 사실과 내 말과 일치시키는 것을 가지고 과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컵이 있다. 컵을 컵이라고 부르자. 컵은 색깔이 투명한 이것이 컵이다. 맞나? 틀렸나? 이렇게 되거든요.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어요? 컵 맞네 이러잖아요. 사실과 뭐가 일치된다? 진리가 일치되지요. 그럼 사도 바울은 이 컵이 부활되겠느냐? 이렇게 물어요. 컵이 부활하겠느냐?


자, 이 컵을 컵 무덤에 넣을 테니까 사흘 뒤에 컵이 없어졌어요. 그러면 전에 알던 컵은 진짜 컵이에요? 가짜 컵이에요? 가짜 컵이죠. 그럼 실컷 교회 다니고 복음 듣고 했는데 이게 진리가 아니에요. 내가 교회 가서 들었던 것은 뭐냐 하면은 나 옳지? 나 바르게 살지? 나 훌륭하지? 본인이 본인을 확인하는 거짓된 내가 내 조건을 따로 만들어가는 그러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초기 사건 십자가가 후기 사건의 부활이죠. 후기 사건의 선후가 바뀝니다. 부활이 먼저 우리에게 나타나고 시체는 없으니까요. 십자가는 없으니까. 십자가 사건이 먼저가 아니고 부활 사건이 먼저 다가와서 부활 사건 안에 뭐가 들어있다? 비로소 진짜 십자가 사건이 부활 사건 안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부활의 영을 받지 않으면 뭘 모른다? 십자가를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언어를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 이 작업을 바리새인들이 했지요. 바리새인은 인간의 대표격에 해당되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 다 했으니까요. 언어를 진리에 일치시켜서 그들이 가진 것은 뭐냐? 권력이었습니다. 어떤 권력? 구원의 길을 장악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소경이 길을 인도한다고 했어요. 소경이 길을 인도하니까 뒤 따라오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거짓된 길로 갈 수밖에 없지요. 내가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설명했으니까 이것이 구원의 길에 천국 가는 길을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독점해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구원에 관한 권력자가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받아버리죠. 이 소경된 자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까 그 길이 옳을 수 있겠어요? 본인도 망하고 뒤따라오는 사람도 다 망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소경이 아닌 자는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 밖에 없지요. 예수님 본인 밖에. 본인만 소경이 아니에요. 그러면 제자들이 가보자.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까 가보자. 갔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앞으로 가이소 해서 갔는데 주님만 앞으로 가고 나머지는 다 빠졌어요. 코미디에 나오는 것처럼 "나를 따르라!" 하고 "저 고지를 쟁취하라!" 먼저 장군이 앞에 나왔는데 뒤돌아보니까 자기 혼자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다 빠졌어요. 왜?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있음이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내 보존에 도움 되는지를 늘 확인해왔던 겁니다.


해보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주님과 함께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안 된다. 그 이유는 자기가 있음이 초기 사건이고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것은 나중 사건으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주님은 후기 사건이 앞의 사건을 먼저 땡기는 거죠. 부활하신 분이 뭘 소개합니까? 십자가를 소개하지요. 이게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우리는 나를 구원해달라는 식이에요. 나를 구원해달라. 나는 여기 있는 게 진짜니까. 주님은 은퇴 없이 돌아가셨어요. 현철같애. 우리는 이것저것 정리 다하고 죽어요. 가만있어보자 은퇴하고 난 뒤에 슬슬 재산 가지고 요양병원에 한번 들어가볼까. 자기 준비할 거 다 준비하고 주여 다 끝냈습니다. 저를 불러주셔서 천국에 넣어주세요 이러고 있다고요. 인간은 자기 임종을 누가 준비합니까? 본인이 준비하지요. 그래서 나온 게 보람상조 아닙니까? 본인 죽음을 본인이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시나리오를 누가 짜고 있다? 본인이 짜고 있는 거예요. 웃기지도 않아요 정말.


여기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이 이 부활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먼저 제시한 것이 뭐냐 하면은 율법을 제시했어요. 율법. 율법은 쉽게 말해서 폭탄입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폭탄. 폭탄은 제가 점잖게 이야기했어요.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이 있는데 맹렬히 돌아가는 제재소의 목재 자르는 것. 윙~ 하고 모가지 잘라버려요. 날려버려요. 율법은 저주케 하는 거예요. 모가지를 날려버려요. 주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율법을 먼저 언급을 해버렸어요. 갈라디아서 3장 같은 경우에. 율법을 언급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게 예수님은 누구하고 공범이냐 하면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공범입니다. 예수님이 공범이 되어서 이 세상에 텍사스 전기톱을 가지고 왔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은 누구하고 공범이냐 하면은 악마하고 공범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전기톱 가지고 사정 안 봐주고 그냥 모가지를 저주의 율법으로 날려버려요. 죽여버린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발생되겠습니까? 전기톱으로 윙~ 하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저주가 생성되겠지요. 저주가 생성되고 저주가 생성되는 그 재료는 이게 바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생각하기 쉬운 거예요.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 율법이 뭐로 되어있느냐 하면은 언어로 되어있어요. 언어. 언어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가지고 이게 일치가 될 때 언어에서 뭐가 나와요? 진리가 나오거든요. 언어에서. 진리가 나온다고요. 만약에 일치가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각오해야 되지요. 율법은 언어로 되어있고 언어에 담긴 뜻을 제대로 다 실천 못하면 이거는 저주 받을 각오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물이나 사건, 이 사건을 율법 사건을 인간이 무슨 재주로 일치시킵니까? 일치시킬 수 있어요? 없어요? 사건을 우리가 일으킵니까? 일부러?


율법이란 언어, 언어를 제대로 일치시키는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습니까? 아니면 율법대로 사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대로 사는 거예요.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율법의 고유 기능이 뭐냐? 저주 기능이잖아요. 그 저주 기능을 예수님 자신 몸으로 옴팍 뒤집어쓰는 거예요. 율법을 지켜서 빠져나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쓰는 조건을 가지고 왔어요. 그게 뭐냐? 예수의 몸은 죄 된 몸이에요. 아담의 죄 된 몸이기 때문에 죄인끼리 필히 뭐가 발생돼요? 저주가 발생되어야 돼요. 그래야 율법과 진리가 일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돌아가셨잖아요. 십자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십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무슨 영향을 줬습니까? 아무런 영향을 못 줘요. 오늘 강의에 첫 번째 중요한 겁니다. 십자가 죽음이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십자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흘 만에 살아났기 때문에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났기 때문에. 그러니까 누가 살아났느냐 하면은 저주 받은 자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거는 저주가 꿀렁꿀렁 살아나는 거예요. 온 천지 저주가 살아나는 거예요. 텍사스 전기톱이 살아나는 거예요.


십자가와 십자가 부활 사이에 있었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공모해서 만들어진 그 절차를 나름대로의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부활 통해서 이 세상에 알려주는 것은 뭐냐? 첫째는 순서, 두 번 째는 양립성, 세 번 째는 선택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1. 인간세계 조건에서 인간들은 나름 순서를 정해요. 인간은 모든 행동에 순서를. 왜냐 하면은 시간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선후, 어느 것이 앞서고 어느 것이 뒷선다. 그래서 앞선 것이 원인이고 뒷선 것이 결과라고 보는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살아났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아까 고린도전서에서는 그게 반대지요. 죽었기 때문에 살아난 게 아니고 살아남을 위해서 먼저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2. 인간 나름대로 나름 양립성. 무엇이 옳고 무엇이 무엇이 그른가를 양립을 해요. 무엇이 나한테 유리하고 무엇이 분리한지를 양립해요. 3.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합니다. 선택이 가능할 때 이때 인간은 자기를 주체적으로 인식해요. 자기를 주체로 보는 겁니다. 내가 나의 주도권, 주인공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서 이걸 계속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누가 주인공이에요? 나에게 있어서 누가 주인공이에요? 선택은 내가 하니까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주인공이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해서 그것을 뭐로 본다? 그것을 진리로 간주한다 이 말입니다. 진리로 간주하는 나에게 오늘 24장 보니까 무덤에 갔을 때 무덤에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시신이 있어야 되잖아요. 없어요. 무덤에 시체가 없어요. 무엇이 지금 사단 났습니까? 나름 순서, 나름 양립성, 나름 선택 이 모든 것이 와르르 다 무너졌어요. 무너졌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인간이 텍사스 전기톱에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유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이 저주성은 인간의 저주보다 앞선 저주가 있어요. 이게 순서에요. 예수님이 부활했지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인간에게 찾아올 때 인간은 뭘 느끼느냐? 내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려주는 그 기능으로 오시는 겁니다. 순서상 부활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십자가가 부활을 앞장세우고 뒤따라가지요. 안에 내용으로 들어가지요. 그 중심부에 십자가가 들어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양립성은 뭐냐? 저주와 복이죠. 이걸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해버려요. 저주 받을 자와 복 받을 자를 일방적으로 선택합니다. 이 선택 작업을 인하여 부활의 영이 아무한테나 가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영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아무한테나 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인간에게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게 되면 자기 백성은 비로소 자기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자체가 들통나고 들키게 되고 노출 돼요. 그러면 자기 선택? 이거 소용없고 내 양립성, 이거 소용없고 내가 나름대로 순서 잡는 것 이거 소용없지요. 이거 소용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저주가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의 저주가 나에게 미쳤고 나에게 덮쳐졌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저주가 나에게 덮쳐졌으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은 십자가의 효과라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게 아니고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1장 6장에 나오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은 이건 누가 하시는 일이에요? 주님이 자기 순서와 양립성과 주님의 선택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리얼과 리얼리티'. 왜 이걸 일부러 나눠야 하느냐 하면은 리얼은 실재하는 것이고 리얼리티는 현실이에요. 현실이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납득되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의 언어로 설명이 되고 해명이 되는 그게 리얼리티 현실 세계에요. 그런데 리얼리티 세계는 실재세계로 접근을 못해요. 실재 세계는 언어 밖의 세계, 언어로 해명이 불가해요.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함. 언어로 설명이 불가한 거예요.


인간이 이해되는 것을 studium이라고 하고 punctum 이라고 나눈 사람이 있어요. 기호학자인데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프랑스 문화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저서 <카메리 루시다>에서 사진과 관련된 개념으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제시한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공통적으로 느끼는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정보이고, 길들여진 감정이며,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 같이 날아와 박히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데,

유독 나에게만 필(feel)이 꽂히는 그런 느낌이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 없는 예술은 이미 생명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글에도 “스투디움과 푼크툼”이 있다.

 

글에서 스투디움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독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읽힐수록 좋다.

스투디움에 있어 각자 해석이 다르면 좋은 글이 아니다.

그러나 스투디움만 제공하는 글 역시 좋은 글이 아니다.

그런 글은 독자를 단순한 수용자에 머물게 한다.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똑똑한 구경꾼 정도에 만족하게 한다.

작가 고유의 스투디움이 있어 글만 보고도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건

고도의 경지다.

그만의 스타일, 다시 말해 그만의 스투디움, 그만의 클리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은 김훈, 안도현 등 몇 안 된다.

글의 본질은 푼크툼을 충족시키는데 있다.

글 한편을 읽고 자기만의 감정이나 느낌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다양한 푼크툼을 일으키는 글이 좋은 글이다.

나와 글 사이에 개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통로를 통해 개인적인

경험이 연상되면서 나만의 영감, 저마다의 직관, 특별한 통찰을

불러일으키는 글이 매력적인 글이다.

 

 

[출처] 글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작성자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  청와대 연설비서관 역임, 신문 칼럼과 강연

 

(위글은 “스투디움과 푼크툼” 에 대해 상당하게 검색하여 읽은

여러 내용중에서 간결하면서도 요점이 명확하여 작성자이신

강원국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퍼온 글입니다)

 

studium은 지식 전달이에요. 지식을 전달하는 거예요. 아까 말한 리얼리티에 관한 거예요. 그런데 punctum은 구멍, 상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상 밖에 벌어진 사건이에요. 내가 미리 원인자로서 파악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어?! 내가 예상하지 않은 사건으로 옴으로 말미암아 아! 그런 사건 있구나가 아니라 내가 그 사건을 빼버린, 예상 못했다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를 구멍 난 사람으로 전기톱에 목 잘린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난 상처가 뭡니까? 인간이 창으로 찌르고 못으로 찔렀잖아요. 그 십자가 사건을 보고 그 십자가에 대해서 영화를 찍은 사람들, 멜 깁슨부터 해서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십자가를 이해하느냐 하면은 살다보면 그럴 수가 있다는 거에요. 왜? 오해해서 무해한 사람 찌를수도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거는 무슨 세계냐 하면은 해명이 되는 세계에요. 사람 살다보면 억울한 일 생기지 뭐. 할 수 있나 우리는 우리끼리 살고 다 세상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야. 그냥 그대로 살기 마련이란 말이죠. 이태원 사건이나 무슨 사건이나 지나가면 그만이에요. 세월호 사건이나. 그걸 다 우리가 다 어떻게 관여해.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데. 현철이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란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현실 속에 그걸 저주용으로 찾아온다는 거예요 사건이. 나만 예전처럼 '내가 여기 있다 살면 그만이지' 가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은 너 저주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한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들은 자꾸 리얼리티 현실 세계 속에서 언어하고 자기 행동하고 일치시켜가지고 뭐 하느냐. 인간은 자기를 정제하는 거예요. 정제하기. 순수하게 만들기. 반짝 반짝 빛내기. 자기 자신을. 빛을 내요. 자기 자신을 빛내는 방법들이 뭡니까? 어떤 방법이 자기를 빛내요? 자기를 치장하면 되지요. 명품가방 사고 좋은 옷 사고. 백화점에 손님들 왜 오지요? 권사님 백화점에 손님들 왜 옵니까? 저주 받기 위해서 옵니까? 정제하기 위해서 자기를 정화시키려고 오잖아요. 자기 치부를 가리고 나는 나답게 좀 꾸며도 괜찮을 자격이 있다. 그거하려고 오는 거예요.


인간은 가만 놔두면 인간은 정제해요. 자기를 정수처리 하는 거예요. 닦는 거예요. 더 우수하게. 왜? 나는 고귀하니까. 나는 고귀하다와 실제 고귀한 나와 일치시키는데 평생을 다 보내요. 평생을. 돈 수익도 없으면서 2천 만원 짜리 벤츠타고 다니고. 벤츠 타다가 테슬라 타다가 그것도 처분하고 이제 남은 처분은 본인만 처분하면 돼. 그 본인 처분을 주님이 해준다니까요. 주님이. 성령이 해줘요. 차는 처분해도 인간이 자기는 처분 안 하거든요. 왜? 내가 진리이기 때문에.


누가복음 24장에 보게 되면 13절에 두 사람이 나오지요.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25리 쯤 되는 10km 정도, 엠마오로 가죠. 엠마오. 엠마오를 본인이 간단 말이죠. 가면서 왜 갑니까? 이제 예루살렘에서 볼 일 다 본 거예요. 예수라는 그 분이 오셔서 하는 이벤트는 끝났어요. 이제는 예수님 끝났으니까 자기는 살아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진리니까. 가는데 여기 누가 동행했습니까? 주님이 동행했지요. 16절에 "눈이 가리워서 그인 줄" 알지 못했지요. 그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지요. 도대체 인간이 아는 게 뭐에요?! 개코도 모르면서 살아. 개코도 모르면서. 4절에 보면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천사가 여기 또 개입하고 있어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강조한 게 뭐냐 하면은 천사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천사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융통성. 천사는 인간의 감정, 자비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천사가 심판한다니까. 심판관이 뇌물 먹고 이런 거 없어요. 그런 심판관은 벌써 악마가 되어서 없어졌고 천사는 봐주는 게 없어요. 봐주는 게. 십자가 모르면 다 잘라요. 피 모르면. 그러면 십자가 피 알면 되지 않느냐. 십자가 피는요 부활의 영이 와야 알아요. 그전에는 몰라요. 내가 저주 받아 마땅함을 모를 때는 십자가도 몰라요.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모르면 십자가 피 믿고 십자가 피 찍어발라서 자기가 보람상조해서 천당 가려고 생각한다니까. 그것 때문에 율법이 먼저 왔다니까. 율법이 먼저 와가지고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둬 버린 거예요.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율법을 못 지킨다는 말은 우리라는 존재가 진리하고는 정반대.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라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되는 거예요. 너는 저주받기 합당하다.


마태복음 12장 40절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속에 있었지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웅크리고 있었다. 이게 뭐냐 하면은 고기 뱃속이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모르는 현 세대를 말합니다. 현 세대, 이 세대. 다른 말로 리얼리티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 세계의 전부에요. 인간이 현실 세계 전부를 이렇게 좀 노골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목욕탕 가봤습니까? 목욕탕 천장을 보게 되면 밑에 있는 공기가 차올라서 공중에 매달려 있지요. 공중에 방울방울 매달려 있잖아요. 그래서 목욕탕에 이렇게 걷다 보면 탁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지요. 그게 어디서 떨어집니까? 올라갔던 것이 저주가 되어서 떨어지는 거에요. 걸을 때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지요 물방울이. 사우나 천장에 가면.


그러면 인간은 평생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갇혀있는 물방울에서 뭐가 맺힌다? 저주가 맺힌 그 저주를 도로 받으면서 평생을 보내는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는 요나는 물고기 속이고 예수님은 그게 자기의 무덤 속이에요. 이걸 예수님 말고 누가 빠져나옵니까? 못 빠져 나오지요. 빠져나올 수가 없지요. 그래서 세상은 악몽이다. 이 악몽속에서 못 빠져나온다. 이 악몽 속에서 빠져나올까 싶어가지고 교회 와서 복음도 듣고 백날 해도 항상 자기 자신을 진리로 간주하고 자기 있음을 확인하려는 태도 때문에 이 세상에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지요. 더 중요한 것은 빠져나오면 안돼요. 빠져나오면 안돼요. 그럼 무슨 수로 빠져나오는가?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4장 3절 (죽음 속의 죽음) 240716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인간은 십자가를 해석을 못한다.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저주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인간은 저주인줄 모르고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거기서 저주 받아야 될 이유만 자꾸만 내놔요. 악착같이 살아야 돼. 어렵지만 공부해야 돼. 언젠가는 죽으면 희망 있겠지. 예수 믿고 있으면 나중에 구원되겠지. 피를 믿었으니까 주께서 구원 시켜주겠지. 자꾸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광야 때 한번 생각해봅시다. 광야 때 이스라엘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그들은 자칭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하면 찬송했으니까. 출애굽기 15장에서. 미리암 선창으로 해서 찬송을 했어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실제로 현실 그대로 인정했어요. 왜? 홍해 강가에서 자기는 건너오고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들이 군사들이 갑옷과 병거들이 물에 떠다니는 것을 봤기 때문에. 실제 자기가 여기 눈으로 확인하는 한 그들이 망한 것을 봤어요. 문제는 본인을 못 보고 있다는 것. 희한하지요 그게.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것을 자기의 적들이 죽음으로서 인정을 했는데 본인이 하나님의 편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 거예요. 그게 인간의 한계지요. 무엇이 한계입니까? 자기도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발견을 못해요. 항상 자기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달릴 때 못 박혀 죽었잖아요. 그거는 주님은 못 박아 죽어도 되는데 나는 못박히면 안된다는 거예요. 왜? 아프기 때문에. 아야 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거예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길 간 것은 장차 올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서예요. 구원자는 당해도 되는데 왜 너는 당하면 안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 혼자 당하라는 식이에요. 혼자 고생하고 우리는 덕 보자는 식이잖아요.


광야에서 그들이 올 때에 그들이 멸망했다 망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망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감사가 없었습니다. 감사. 고마움이 없어서. 고마움이 없는 대신 그들에게는 자신에 대한 욕망이 살아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그 인간의 욕망을 사랑으로 바꾸는 진리 사건들을 수시로 하나님께서 일으켰어요. 놋뱀을 쳐다보기만 해도 네가 아픈 거 낫게 해줄게 살려줄게. 그런데 그것이 자기 자신의 본질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애굽에서 내 위주로 살던 것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어떤 하나님의 특별한 조건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겁니다.


요나 이야기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먼저 할 수밖에 없어요. 요나 이야기 어렵기 때문에. 안드레센 동화에 빨간 구두라는 동화가 있어요. 그 아가씨 이름이 카렌인데 몸 위쪽은 멀쩡한데 아래쪽 다리가 음악만 나오면 자꾸 춤을 춰요. 빨간 구두가 춤을 추게 만들어요. 자기 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통제가 안돼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카렌이라는 아가씨가 제발 이 아래쪽 다리 부분을 잘라주세요. 그러나 위쪽은 자르지 마세요. 왜? 위쪽은 내가 살아야 되니까. 이게 무슨 뜻이지요? 결국은 뭡니까? 내가 살아야 되니까. 그러면 아래쪽이 미친 거예요? 위쪽이 미친 거예요? 전체 다 미친 거예요. 전체 다.


범죄도시4 영화에 보면 유명한 조연이 나와요. 장이수. 이런 멘트를 반복해서 했어요. "또 못살게 구네!!" 마동석이 와서 자꾸 불러내서 너 나하고 일 좀 하자. 만약에 거부하면 무서운 신체적 형벌이 가해지죠. 또 못살게 구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이 사랑스럽고 십자가 다 믿겠는데 제발 나를 힘들게 하지 마, 나를. 내가 주의 일에 끌어당기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 찬양하고 믿을 테니까. 그러니까 장이수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전체 곽 있잖아요 프레임, 전체 프레임을 몰라요. 이 세대가 하늘로 쏘아 올리는 기도, 그 모든 요구 그것은 그 희망은 도로 이 세상에 눈물로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왜? 갇혀있으니까. 주께서 이야기한 것은 이 세대가 아닙니다. 이 세대가 아니고 오는 세대에요. 예수님께서 한두 번 이야기하신 게 아니에요.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를 몰랐어요.


이 세대가 아니고 오는 세대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이 세대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시간 지나고 오는 시간으로 이해한 거예요. 이 시간 지나고 오는 시간. 시간의 전후 순서를 이 시간 지나면 오는 세대 이렇게 본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오는 시간도 어디에 속한다? 이 세대에 속해요. 그러니까 이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이거는 여전히 이 세대에 속해요. 이 곽, 박스에 속해요. 저주의 박스에 속한다고요. 저주의 박스. 주님께서 가신 것은 이 세대가 언어로서 해명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 무덤에 뭐가 없다? 시신이 없어요. 이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빠져나간 겁니다. 빠져나가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삼일 있었어요. 삼일. 삼일 의미는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삼일의 의미가 요나에 잘 나오거든요.


자, 요나의 물고기. 물고기 속에 요나가 있거든요. 그럼 물고기는 어디 안에 있어요 지금? 물고기는 깊은 바다에 있지요. 지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뛰어든 게 아닙니다. 요나는 지금 죽기 위해서 뛰어든 거예요. 죽기 위해서 바다 속에 뛰어들어가면 인간은 무조건 죽어요. 아가미가 없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런데 죽음 속에 특수한 죽음이 따로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죽음이 다가아니고 죽음 안에 진짜 리얼리티가 아니고 리얼, 실재하는 죽음이 따로 마련되어있어요. 그 속으로 요나가 들어간 겁니다. 요나는 이 속에 들어가서 바다 자체가 뭐라고요? 죽음이죠. 죽음 안에서 요나는 어떻게 돼요? 죽음 안에서 요나는 제대로 죽은 거죠. 제대로 죽었다는 것이 죽음 안에서 살아있는 방식이 제대로 죽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런 세대, 죽음의 세대 속에서 성도에게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성령 오게 되면 제대로 죽은 거예요. 제대로. 자유입니다. 이게 자유에요.


육체의 죽음 이후에 오는 세대의 삶을 이 죽음 세대 속에 벌써부터 우리가 실현시키고 있어요 그것을. 죽음의 증인이죠. 단번에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의 증인이죠. 그 죽음이 진리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진리에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 진리에요. 내가 만약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다면 내가 뭐가 됩니까? 진리가 돼요. 그러면 아직까지 텍사스 전기톱에 모가지 안 날라간 거예요. 율법은 됐고 율법은 제치고가 아닙니다. 율법이란 저주 아래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새로운 저주, 십자가라는 저주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으리라 예요. 십자가에서 생명을 얻는 거예요. 다른 사람 보기에는 뭡니까? 십자가 안에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이미 우리가 죽은 거예요.


누가 갈라디아서 6장 한번 읽어보세요.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이걸 제가 잠깐 각색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고래 외에는 자랑할 게 없나니 나는 고래로 인하여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었고 세상은 내게 대해서 죽어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이 세상이 저주에 갇혀 있다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부활의 영을 주신 거예요. 성령을 주신 거예요. 세상에 갇혀있다. 하지만 우리는 맨날 세상 사람처럼 살고 싶죠. 나를 포장하고 꾸미고 싶고 나를 정제하고 싶고 나를 순수한 존재인 것처럼 남에게 티내고 싶지요.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맨날 장이수예요. 또 못살게 구네!!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는 거야. 왜 내 뜻대로. 그래서 기껏 하는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이 아랫도리를 좀 잘라주세요. 그럼 윗도리는? 남겨줘야죠. 회개할라고. 아이고 참 요령을 부려요 요령을.


금식하면 용서됩니까? 십일조하면 용서가 되겠습니까?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고 선교회비 내면 다 용서가 되겠습니까? 맨날 통밥 굴리고 요령 부려요. 그냥 죽어라 인간아 그냥 죽어있어. 제대로 된 죽음 안에 죽어 있으면 되는데 자꾸 뭘 할라고 해. 왜 자꾸 뭘 할라고 하느냐? 그래야 남들이 나를 보고 신앙이라고 하는 거예요. 남들이 나를 신앙이라고 해줄 때 나는 신앙인 것이 확신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이 세대는 아무리 언어로 설명해도 진리와 일치가 안돼요. 오는 세대. 설명되지 않은 오는 세대에 속해버리면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납득 못합니다. 이해 못합니다. 정상인 줄 아세요 그게. 그게 정상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네가 행한 것, 네가 신앙생활 제대로 한 것, 네가 봉사한 것 내놔라. 이게 성도한테는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은 이 세대에 대해서 오는 세대로 가려면 공백, 우리는 비어있는 게 되거든요. 공백. 빈자리에요. 공백에 여기 예수님 말씀이 오게 되는데 우리는 주님이 부르신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결과물이 돼요. 꽃이 있더라도 내가 꽃이라고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냥 너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너를 꽃이라 부를 때 너는 내게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의 시잖아요.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뭐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부른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의미가 되는 거예요. 오는 세대에. 오는 세대가 이 세대 다음에 오는게 아니고 이 세대 안에 오는 세대가 이미 담겨있는 식으로 성도를 출현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부활의 영이에요.


고린도전서 15장 한번 보겠습니다. 15장 3절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10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아니고 은혜다 이 말이죠. 이 세대에 이미 오는 세대가 여기 벌써 발생하고 있는 거예요. 생성되어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하나 나갑니다. 공백이라는 말은요 더 이상 지킬 내가 없다는 뜻이에요. 나를 증명할 내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음에 넘겼기 때문에. 김지하 시 곡은 김민기 곡 제목은 ‘금관의 예수’. 금으로 된 관을 쓰신 예수.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텅 빈 얼굴들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구름 저 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야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이렇게 되어있어요. 김지하 씨가 얼마 전에 죽었지만 몇 년 되었어요. 이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엄청 오해하고 있어요. 뭘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은 광주 사태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가사에 보면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인간이 무얼 찾아 헤매이겠어요. 무얼 찾아 헤매이겠습니까? 내가 어느 정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느냐 그걸 찾아 헤매이는 거예요 인간은. 문제는 언제부터 내가 이런 고질병이 생겼는지를 몰라요. 왜 나는 나만 챙기는지 그 병이, 이 고질병이 어디서 왔는지를 몰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악마와 공모했다는 사실을 몰라요.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공모했어요. 하나님이 이 땅에 아들 보낸 거예요. 악마와 인간은 공모했지요. 이 세상은 누가 주인공이다? 인간이 주인공이라고 누가 배후에 누굴 파견했어요? 인간을 파견한 거예요. 그래서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땅에서 활동하신 거예요.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스스로 진리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성경의 한 구절도 설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 가사에 보면 거절당한 손길들, 박정희 독재시대 때 사회적 약자 그런 거 이야기겠죠. 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천국을 왜 찾아요 천국을. 어디 있을까 천국은? 누구 좋으라는 천국입니까? 자기 좋아라 천국이죠. 끝까지 인간은 십자가 자국을 해석을 불가능한 그 세대 안에 살고 십자가 자국을 해석 못하는 것은 자기 안에 악마가 같이 있다는 것을 자기가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자, 요나서 다시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아버지와 공모해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예수님이 명확하게 알고 있어요. 땅속에 웅크리고 있거라. 왜냐 하면은 죄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동일하게 죄의 몸을 지닌 형편에 대해서 예수님이 먼저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모든 인간은 이 죽음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요나가 빠져나왔잖아요. 요나가 빠져나오고 난 뒤에 12장 41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세대 나오지요.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어떤 식으로 온다는 것을 먼저 누구한테 보여줬어요? 요나의 일대기, 요나의 일생을 통해서 먼저 보여준 거예요. 먼저 보여줬습니다. 왜냐 하면은 그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무지 알지를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점에서 신기하느냐 하면은 그 이스라엘 보기에 더 악하고 독하게 죄 지었다고 보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했잖아요. 그 회개를 그들이 뭘 알고 회개를 했느냐는 거예요. 뭘 알고 회개했느냐. 그들이 어떻게 해서 회개했는가? 그들이 회개할 만한 무슨 이유가 있었습니까? 니느웨 사람이 회개한 것을 이스라엘 사람이 해석을 못해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 안 했음으로 드러나요.


어떤 사람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이 십자가를 자랑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설명을 못하잖아요.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를. 설명 못하는 그것을 가지고 회개 안 했음으로 판정이 나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성도가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내가 이미 죽어있고 이미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고 할 때 이 세상 사람들이 너는 어떻게 그걸 알았다는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실재 세계는 현실 세계, 나 있음의 세계에서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상처를 설명 못 한다는 말은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우리를 구원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설명할 수 없는 힘. 부활의 영이 우리를 구원한 거예요. 구원하고 난 뒤의 설명은 뭐냐? 이거는 내가 구원받기 위한 설명이 아니고 이미 구원이 끝난 상태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는가 대해서의 설명이죠. 내가 나 구원받은 설명을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의 대한 설명이죠. 주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따라서 이 노래에 어디 있느냐 천국은. 지금 이 노래 가사 전체가 저주 세대 속에 속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께 갈구하고 예수님께 부탁하는 그 모습이 금관의 예수라는 가사로 나와 있는 거예요. 김민기가 곡도 자기가 쓰고 노래도 자기가 불렀고. 가락은 슬프기 짝이 없어서 안 틀어줍니다. 여러분 알아서 들으세요. 서글퍼요. 장송곡도 아니고 슬퍼요.


자, 계속해서 남아 있는 문제는 이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주님께서는 해명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고 납득도 안 되는데 왜 우리를 구원하느냐? 무슨 방식으로? 우리가 남한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을 한다면 어떻게 그게 설명이 가능하겠느냐 하는 거죠. 아까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악몽 속에 있다고 했죠. 악몽. 악몽은 특징이 뭐냐? 악몽은 쫓기는 거예요. 누구한테 쫓기는가? 악마로부터 후달립니다. 더더더더더 음주운전 측정하고 똑같아요. 더더더더더더. 계속 후달려요. 더 완벽해야지. 전교 1등? 전교 1등 했다고? 우리나라에 고등학교 3천 개야. 3천등 할래? 그런 엄마 있었어요. 계속해서 쫓기고 있어요. 계속 쫓기죠. 어디까지? 노골적인 것이 꿈속에서도 쫓깁니다. 꿈속에서. 더 완벽해야 되고 더 완전해야 되고 남보다 뛰어나야 되고 앞서야 되고 계속 후달리는 쪽으로 가지요. 후달린다는 말은 악마가 우리를 뭐로 간주하느냐? 계속해서 우리를 진정한 사람, 진정한 인간으로 이미 간주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의 개체로서 독립체로서. 너를 잃어버리거나 너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마귀가 계속해서. 이런 처지에 있기 때문에 쫓기는 인간들의 특징은 뭐냐? 납득이 되고 설명이 되는 쪽으로 계속해서 찾아다닙니다. 어느 목사 만나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지. 어느 복음을 만나면 내가 납득이 되는지. 내가 구원받은 걸 납득을 할 수 있는지. 자꾸 내 구원에 내가 자꾸 설명을 하게 되면요 나는 사실과 진리가 일치가 되는 사람이 돼요. 나는 안 죽었어. 기어이 살아남아서 내 구원에 대해서 설명이 성립되는 그런 사람으로 독립적으로 나는 우뚝 서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쫓기면서 완전하면서 수도원과 수녀원에서는 뭐합니까? 점점 더 자기 자신을 깨고 낮아지려고 하지요. 한번 적어볼게요. 너무 중요한 문장이라서. "원 없이 망가지고 아무리 망가져도 부활에 직면한 망가짐에 미치지 못한다." 스스로 자기를 망가트리고 자기를 타락으로 몰아넣고 자기를 살인 강도의 온갖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 이 정도 망가지면 됐습니까? 이정도 죄인 되면 됐습니까? 해도 부활에 직면한 망가짐 앞에서는 그게 빛을 잃어요. 아무 짝도 소용없는 짓을 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바로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누구와 직면했습니까? 몰랐어요. 24장 보면 동행하는 자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15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러니까 본인이 알고 있는 방식의 타락, 본인이 알고 있는 나의 망가짐 이거는 아무리 망가져봐도 본인이 어느 정도 망가진 지 본인이 알고있잖아요. 내가 확인되는 내가 나 자신을 확인되는 망가짐은 망가짐이 아니에요. 자기만 고생이에요. 사람들 교인들 중에 그런 사람 있다는데 내가 복음 알았으니까 헌금 안 한대요. 왜 헌금 안 하는데? 망가질라고. 목사님 기도 할 필요 없네요? 하나 둘 씩 망가져. 나 기도 안 합니다. 선교 회비 안 낼 거예요. 더 나아가면 교회도 안 나갈 거예요. 이렇게요? 저렇게요? 내가 아이디어 끄집어낼 수 있는 극한의 망가짐까지 가요.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타락으로 밀어 넣는다고 밀어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죄인입니까? 아니에요. 그러면 어디서 망가져야 되는가? 예수님께서 동행하지요. 예수님께서 동행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아느냐?


25절에 나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주님께서 미련하다고 이렇게 책망하시고 다시 말해서 좀 어렵지만 잘 들어보세요. "너는 내가 눈을 가릴 거다" 이렇게 책망하는 게 아니고 "너는 미련해!" 라고 책망하는 거예요. 참 어렵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안 믿고 똑똑해도 그 똑똑을 주께서 인정을 안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은 이 말이 어려운데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일을 하셔요. 왜? 인간은 죽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율법을 이루신 것은 주님이지 주님만이 말씀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하심의 권한자예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공모했어요? 마귀와 공모해서 자꾸 우리가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키려고 하니까 자기가 부인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망가지고 타락을 해도 본인이 자기 타락한걸 본인이 조종하고 있어요. 본인이 그런 식으로 극한 죄인 되어서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겠다 본인이 자기 스케줄을 하고 있다니까요. 아주 요령을 부려도 그렇게 부린다고요. 어떤 영화에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여자가 남자를 스토킹해요. 여자가 남자를 지독한 스토킹을 하는데 그 남자의 취미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취미가 뭐냐 하면은 자기를 스토킹 하는 스토커를 스토킹 하는 게 취미예요.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는 게 취미예요. 인생의 보람이고. 그걸 누가 스토킹 했습니까? 모세와 선지자가 스토킹 하고 있었어요 그동안 꾸준하게. 바보에요 바보. 다시 말해서 그동안 말씀으로 할 때 그 말씀 내용이 뭐냐? 예수님 죽으시고 부활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말씀은 누가 이룬다? 인간이 이룬다? 주님이 알아서 이룬다? 주님이 알아서 이룬다 를 그렇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미련해가지고 이걸 모르는 거예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3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주께서 처음부터 동행할 때 목적이 있었어요. 첫째는 뭐냐? 그들로 하여금 눈을 어둡게 함으로서 어떤 효과를 준다? 모세와 선지자로서 이미 이야기를 충분히 했다는 것. 예수님이 하나님과 공모해서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게으르지 않고 충분히 했다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책망하고 난 뒤에 눈을 떠버리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지금껏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이 내가 한 것이 없고 일방적으로 주님이 홀로 하셨다는 뭐가 나오겠어요? 감사가 나오겠지요. 감사가. 그래서 아까 광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못한 것은 뭐가 없다 했습니까? 왜 원망했습니까? 감사가 없기 때문에. 왜 감사가 없지요? 주인공이 누구이기 때문에?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 믿어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내가 약속의 땅 한다니까 본인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본인 자신을. 말씀이 살아야 되는데 내가 살려고 한 거예요. 주님은 말씀이 살기 위해서 너를 채택했다고 보고 우리는 내가 말씀 지키고 믿고 지킴으로 내가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무덤에 시체 없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래서 그다음 32절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또 뜨겁지 아니한가 이 대목가지고 또 교회 여러 군데 난로 피워가지고 말씀 보면서 그게 팔 다리가 뜨겁지. 우리 속 마음이 뜨겁진 않잖아요. 더워 막 더워. 이상하게 덥네. 난로 피워서 더운데 마음은 전혀 안 뜨거워요. 마음이 뜨겁다는 말은 이게 공백 상태의 우리 마음을 말씀 자체가 불을 질렀다는 뜻이에요. 그걸 이제부터 설명합니다.


자, 부활의 영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이 고래 뱃속, 여기서 어떻게 우리를 빼내주느냐. 이 세대에 속한 우리 현실이 전부인데 어떻게 실재 세계로 리얼 세계로 어떻게 빠져나오는가. 쉽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정말 망가진 것은 내가 뭐가 망가진 것도 모른다는 게 망가짐이에요. 내가 망가졌다는 망가진 것도 아니에요. 근처도 안 갔어요. 눈이 어두워진 게 망가진 거죠. 그럼 이걸 어떻게 하는가. 쓰다듦. 다른 말로 하면 애무하는 거예요. 쓰다듦. 애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 아무것도 찾지 않는 거예요. 그냥 등을 쓰다듬지요. 쓰다듬고 돈 내라 이렇게 합니까? 아무것도 내가 찾지도 않고 내 쪽에서 아무것도 내가 가질 수 없는 능력,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내가 소지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나한테 요구하지도 않고 주께서 나한테 뭘 주지도 않아요. 그냥 쓰다듬어줘요. 애무해요. 애무란 나로 하여금 유한의 실패를 즐거워하는 것. 이게 애무에요. 늘 실패하는 즐거움을 줘요. 늘 실패하는 즐거움. 그러니까 이 쓰다듦, 애무 이렇게 했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입김으로 해요. 입김. 마음 같으면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하고 싶어요. 호~. 아이가 엄마한테 아파! 엄마가 어디 아파? 여기 아파. 후~~. 호~ 해주잖아요. 입김이 뭐냐? 그게 후하 히브리어. 이게 성령의 바람이에요.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호 해주는 거예요. 왜? 우리를 개무시하니까. 우리의 실력과 능력을 개무시해줘요. 쓰다듬어주니까. 뭐를 뺏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아요. 그냥 쓰다듬어줘요. 아이고 이 불쌍한 것. 불쌍한 것. 엄마손은 약속이다. 난닝구 올려봐라. 아랫배 엄마 손은 약손이다 약손이다. 잘 낫지요. 왜? 벌써 잠 들었기 때문에. 잠 자면 아픈 것도 모르죠. 엄마손은 약손이다. 외부에서 내부를 그냥 몽땅 용납해주는 거예요. 우리 속에 욕망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잠재워주는 거예요. 이게 애무입니다. 이게 입김이에요. 호~ 해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의 바람이죠. 성령은 이미 우리에게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성령이 주체에요.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성령이 주체에요. 대구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12장 이야기, 인자를 거역한자는 용서를 받되 성령을 거역한 사람은 호~ 해줌이 없는 사람은 쓰다듦이 없는 사람은 이 세대뿐만 아니고 오는 세대에서도 네가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질문하지 마세요. 인간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못 받습니까? 성령의 쓰다듦 성령의 입김이 없어서 그래요.


니고데모가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거듭날 수 있습니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 니고데모가 그걸 알아들을 턱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가만 있어도 돼.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아직까지 안 죽은 장로님이 계셔요. 남진 아직 안 죽었어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내가 내려왔다가 올라가면 되잖아. 내가. 내가 내려가서 올라갈 때 호~ 해주면 되잖아. 무 금관의 예수고 곤욕의 세계 어디 있을까 고생 다하지 뭐. 이 세상 자체가 악몽인데 아까 쫓긴다는 말 했지요. 늘 쫓기는 게 뭡니까? 자기가 자기를 살릴려고 도피하고 있는 거예요. 어딜 가면 날 살릴까? 어딜 가면 안전빵일까? 어딜 가면 내가 고정 수입이 많을까? 늘 쫓기고 또 쫓기는 거예요. 학생들 보세요. 학생들 입시 앞두고 뭐 합니까? 성적이 보니까 7등급 나왔어. 안돼!! 하고 보니까 꿈이야. 막 답안지 밀려 써서 엉망이야. 꿈이에요. 아 꿈이구나. 네가 꿈이다! 그게 꿈이야 그게. 그게 마귀의 공모와 함께 있는 꿈이에요. 악마가 그걸 계속해서 그 죽음의 세계 바깥으로 못보게 하는 거예요. 이게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못보게 만드는 거예요. 교회 다니면 천당 갈 수 있다 자꾸 그걸 강요하는 거예요. 네가 선택하기 나름이고 네가 순서 정하면 그만이야. 순서 정해서 네 신앙생활 알아서 하란 말이야. 부처 선택하지 말고 예수 선택하면 구원받는다고요.


끝으로 히브리서 한번 봅시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서 25절. 이거 안양강의에서 한 거 같은데 제가 히브리서 11장을 보자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실습으로 자기 백성들을 어떤 식으로 구원했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입김으로 쓰다듬음으로 이렇게 한다는데 그 하는 과정 속에서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믿음으로'를 '예수님으로' 바꾸면 돼요. 예수님으로. 믿음은 설명할 수 없으니까. 지금 내가 믿음 가지면 내가 믿었다는 내가 설명이 되잖아요. 히브리서 11장은 그게 아니에요.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이에요. 설명할 수 없는 리얼리티 세계가 아니고 리얼의 세계, 현실이 아니고 실재세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그걸 대구강의에서는 외래종이라고 했지요. 바깥에서 오는 거예요. 바깥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걸 모세가 더 좋아했습니까? 더 좋아했어요? 안 좋아했지요. 안 좋아했어요.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께 원망했다고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해가지고 이 골치 아픈 백성들을 내가 건사해야 됩니까?! 이렇게 대들었다고요. 그래서 화 나가지고 반석 내려찍어가지고 자기는 약속의 땅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게 모세였습니다. 고난 받기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여기 모세는 뭐냐? 예수님에 의해서 재해석된 모세가 돼요. 예수님에 의해서 재해석된 모세. 모세의 자아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모세의 자아가 어떻든 간에 주님께서 모세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단정 짓고 해석한 거예요. "너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도리어 거절하고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솜씨는 주님의 솜씨지 모세의 솜씨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뭐냐? 모세가 이렇게 했다 가 아니라 말씀이 모세를 이렇게 이끌었다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똑같은 법칙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겁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 사후적이에요. 일 끝난 뒤에 돌아보는 겁니다. 시간 순서 바꾸기예요. 나중 사건이 지난 사건을 설명하는 거예요. 지난 사건을. 새 세대에 속한 것이 중심이 십자가라면 이 세대는 바로 십자가의 영, 성령이 활동하는 십자가로서 오늘날 우리의 이 세대의 인간들이 있는 이 세대에 모든 활동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규정하고 설명하고 이끄시고 인도하고 그리고 단정하고 규정을 내리시는 겁니다. "착하고 훌륭한 종아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구나", "제가 언제요?",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입 다물어", "네가 믿음이 좋아서 나의 부활을 믿었구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네가 부활 만나고 난 뒤에 엠마오로 돌아가지 않고 도로 예루살렘에 가가지고 뭐했습니까? 예수님 살아나셨다 이야기했지요. 본인이 했어요? 주님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주께서 만들었지요. 일 끝나고 난 뒤에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보니까 모든 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똑같은 처지에 입장에 놓여 있을 때 저나 여러분이나 오는 세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지난 세대. 이 세대가 아니고. 오는 세대. 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다만 이 세대에 사는 게 힘들다는 거예요. 육신이 있으니까. 힘들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힘든 거고요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자기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자기 죽기를 소원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지뢰가 있는 지뢰밭에 보내버린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현장에 있는 지뢰가 어떻게 됩니까? 펑! 펑! 터지겠지요. 똑같은 일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시킵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모든 가정에서 이 복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폭탄을 터트리고 텍사스 전기톱을 작동시킨다는 사실을 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지뢰밭으로 보내십니다. 힘들지요. 호~~~. 쓰다듬어주시고 다시 은혜를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그게 바로 성령입니다. 부활의 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하셨는데 말로만 그렇게 했는데 말씀과 우리 실체를 연관시켜서 요나처럼 그렇게 부리고 사용하시는 그 친절하신 하나님의 친절하심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느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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