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4장 49절 (소유성과 성령) 240924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44절부터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되어있지요.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 예언된 겁니다. 예언된 것을 누구한테 주는가? 여기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라는 말이 나와요. '내가', 예수님이죠. 너희에게 너희가 나와요. 그 다음에 45절에 "저희 마음을 열어"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저희 마음을 열어, 여기에 뭐를 투입시키는가. 여기에 모세의 율법과 그 다음에 선지자의 글, 시편의 글인데 이 글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면은 "나를 가리켜" 그러면 구약성경 전체는 어디를 겨냥한다는 거에요? 예수님 자신을 겨냥해서 쓰여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이 "너희에게" 라고 있는데 나의 자리에다가 모세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 플러스한 그 나, 옛날의 나 말고 예수님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내용이 뭐냐? 이런 내용이 합류된 나를 나와 너희 사이에 나를 이렇게 집어넣는다는 이 말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다. 나는 살아났다 너희는 안 살아났지? 나 어때 멋있지?! 지금 이게 아니고 살아난 상태에서 하신 일이 있어요. 그 하신 일이 뭐냐 하면은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을 예수님께 모든 것이 집중된다는 이 집중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내가 이 집중을 집어넣으면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너희'가 나오는 겁니다. '너희'라는 존재는 없어요. 너희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예수님이 너희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초반부터 정리 한번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잖아요. 분명히 추방시켰지요. 그러면 생명나무 못 따먹지요.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시켰으니까 못 따먹지요. 그러면 인간에게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생명 있는 곳에서 추방을 시켰는데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이 없지요. 그러면 교회가 해야 될 일은 뭡니까? 구원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구원은 없는 거예요. '구원이 없다'예요. 구원이 없다를 믿는 사람이 신자예요. 죽고 난 뒤에 희망 가진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좋은데 가겠지 그건 신자가 아니지요. 구원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그러면 교회가 그동안 이천 년 동안 사기를 친겁니다. 구원이 없는데 자꾸 교회가 구원을 주겠데요. 그건 거짓말이죠.
주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을 때 인간에게는 두 번 다시 구원이라는게 없습니다. 생명나무와 의도적으로 추방을 시켰기 때문에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이 있는 교회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왜 자꾸 교회에서 있다고 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이죠.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하심이라" 그렇게 들이대는데 그건 인간이 들이댈 자격이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모든 말씀은 인간이 손을 떼야 됩니다. ㉮모든 말씀에 대해서 인간은 손을 떼야 돼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손 댈 자격 자체가 없어요. 왜냐? 누가복음 24장 44절 보게 되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모든 나를 가리켜 하는 그 말씀을" 누가 손 대느냐 하면은 예수님만이 이걸 손 댈 수 있어요.
그럼 우리가 왜 성경 말씀 손 대면 안 되느냐? 우리는 부활 안 했거든요. 부활하지 않은 자는 성경 말씀을 손 댈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손 댈 분은 부활하신 분 밖에 없어요. 지금 내막이 이래요 내막이. 그 인간은 구원이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은 누굴 구원하느냐 하면 예수님만 구원해요. 예수님만 딱 구원합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할 수 없어요. 예수님만 구원해놓고 예수님 홀로 아버지하고 모든 말씀을 이뤄서 구원을 받았어요. 받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어떤 권한이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하는 공로를 이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을 따로 내가 내 주체로서 선택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의견이 창세 전에 이미 아버지와 조율되어있어요. ㉰인간은 구원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인간 육신의 모습으로 왔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내 공로로 구원이 없는데 내 공로로 ●오직 예수님만 공로가 있다는 것을 증거할 사람을 내가 따로이 뽑을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거에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원한 자를 내가 살린다" 라고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의논하기를.
그러면 구원은 없는데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영을 삽입시킨 사람이 나타나요. 강제로. 강제로 삽입시킨 것. 삽입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집어넣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그냥 이렇게 죽은 채로 있는데 병원에서 의식이 거의 없는 식물인간 된 사람에게 의사가 호스 넣을까요 말까요? 물어볼 수 없어요. 의식이 없으니까. 호스를 위까지 집어넣잖아요 강제로. 집어넣지요. 성령께서 빼지도 못하도록 성령을 인간 속에다가 성령이라는 튜브를 강제로 집어넣는 거예요. 이거는 집어넣을 때 자기가 막 당기는 게 아니고 강제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무슨 말이냐 하면은 한번 집어넣은 성령을 그 부활의 능력 때문에 집어넣음을 당한 인간은 자기가 온 힘을 다해도 이게 빠지질 않아요. 그래서 구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된 사람은 뭐냐 하면은 이게 예수님만 구원 되야 될 건데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지정을 해가지고 그 사람에게도 의논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성령튜브를 집어넣는 거예요.
이걸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의 원리가 뭐냐. 마음까지 믿으라가 아니라 믿으라가 아니죠. 그냥 믿으라 하기도 전에 먼저 언약 자체가 자기 백성까지 깊숙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 권한입니다. 저한테 들어오지 마세요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식물인간이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죽은 자에다가 성령을 집어넣어서 살리는 겁니다. 집어넣어서 살릴 때 그때 에스겔 37장에 보면 말씀이 들어오면 죽은 해골이 조립이 되면서 살잖아요.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도 특징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왔다'예요. 들어왔다. 들어왔는데 누가복음 24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들어올 때 예수님 자리에 뭐가 포함되었다 했습니까? 예수님이라는 그 존재에 모세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모든 것이 예수님한테 왔잖아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대입하면 돼요. 주님이 들어왔다는 말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누구와 연관되어있다? 1.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다. 2. 나와 연관되어있다. 몇 번입니까? 예수님과 연관되어있다죠. 왜냐? 우리는 구원이 없으니까. 우린 구원받으면 안되니까. 우리는 구원받으면 안돼요. 이게 주님의 일관된 원칙이에요. 추방하면 끝나는 것이지 추방할 때는 언제고 구원해? 말이 안돼요. 우린 구원받을 수 없어요. 그런데 구원된 자가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하고 그 안에 내용을 예수님 자신의 세계로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들어와버린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 같은 말로 '성령 안', '예수 안'이 되는 거예요.
그럼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할 일이 있지요. 뭐냐?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관계성, 선지자의 글과 예수님의 관계성, 시편과 예수님의 관계성. 이것의 실효성. 우리나라에서 독도를 뭐라고 합니까? 실효적 통치라고 하지요. 실효적 통치를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나를? 누가 해요? 주님이 실효적 통치를 하는 거예요. 통치를 할 때 뭐로 하느냐? 예수님 자체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실효적 통치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말씀의 실효적 통치의 삶이 되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의 실효적 통치.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모든 말씀이 여기 예수님에게만 초점이 모여졌다 하지요. 예수님께만 초점이 모여진 그 결과가 뭐냐 하면은 십자가 죽으심이잖아요. 십자가의 죽으심 그 다음에 부활이죠. 이 말씀의 완성이 십자가 부활이잖아요. 예수님이 자살했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누가 죽였어요? 그 당시 율법 갖고 장난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요.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죽지 아니하면 죽을 필요가 없단 말이죠. 가룟 유다가 팔아먹고 죽었잖아요. 인간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러면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이게 우리 껍데기 같으면 우리 안에 할 때 우리가 두 가지를 느껴요. 한 가지는 뭐냐 하면은 내가 뭘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건졌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보여주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럼 매일 삶 속에서 이 현상 속에서 말씀에 입각해서 왜 나는 한결 같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왜 자꾸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가를 우리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것이 뭐냐? 성도의 삶이죠.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다른 사람은 이걸 몰라요. 불신자는 이걸 모릅니다. 불신자는 뭐가 없어서 몰라요? 예수님의 영이 안 들었기 때문에 내 인생 건전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면 나중에 하나님께 이렇게 훌륭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교회 생활 잘했습니다 하고 갖다 바치면 천당 갈 줄 알았지요. 구원은 없는 거예요. 천국은 우리 인간에게 없는데 아직도 미련있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조작질을 했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이 두 개를 확대시켜보겠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예수님만의 구원이 어떻게 인간 구원으로 확대되는가?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지금 이 질문은 이 질문과 구분되어야 해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완전히 뉘앙스가 대립되죠. 반대되죠.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십자가 지셨다. 그럼 나는 뭘 믿으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믿으면 된다. 이건 뭐에요? 이게 마귀가 가르친 거예요. 여기 무슨 욕망이 있습니까?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죽기 전에 미리 사전에 조치를 취해야 되겠다. 누가 누구한테? 내가 나한테. 이것 잘하는 사람 있잖아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거 잘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이 종교단체를 만들었잖아요. 교회라는 것도 만들고 많이 만들었어요. 바리새인의 후예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 범죄했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셔서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 거기에다가 예수님 십자가까지 믿는 자는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천국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하기로 그렇게 작정했습니다. 믿으십니까? 뭐 이런 거.
왜 인간은 구원이 없는데 이상한 이야기하고 애초부터 구원이 없는데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미혹하기 위해서. 교회로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서 교회가 그러한 컨셉으로 상품화 시키는 거예요. 사람의 욕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욕망을 끌어당겨야 운영이 되니까 그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1번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1번이 되면 예수님만이 이미 구원이 확정되었어요. 다른 사람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어떤 누구도 구원의 대상이 아니예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구원이 됐다는 그 자리는 하나님 우편의 자리예요. 우편의 자리에 앉아서 옛날 주님이 하신 그 고난을 우편의 자리에 앉아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 아니면 행사하지 못해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편의 자리에 올라갈 때에 주님께서 곱게 올라간 게 아닙니다.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누구하고 싸우게 되어있어요. 누굽니까? 하나님의 원수죠. 하나님의 원수는 누구 편이에요? 하나님의 원수 속에 누가 이미 들어있습니까? 이미 모든 아담의 후손들, 인간들은 하나님의 원수 속에 이미 통제받고 있지요. 실효적 지배를 받고 있지요. 이걸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뭐냐? 마귀를 가지고 이 세상의 신,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는 신. 에베소서 5장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세상의 신, 악마와 싸운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인간을 앞잡이로 세워서 하나님을 죽게 했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원수는 누구 편에 서 있다? 인간의 편에 서 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뭐냐 하면은 마귀의 주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게 마귀의 구호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아까 제가 분명히 했지요. 모든 말씀은 누가 손을 댄다? 인간은 손 못 대요. 그게 누가복음 24장 이야기에요. 인간이 성경을 인쇄해가지고 백억 권을 해도 인간은 성경을 손 댈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손 대야 돼요. 다른 사람이 손 대면 이건 전부 다 마귀의 해석이 나와버리죠. 그러면 성령이 와서 해석하면 어떤 해석이 나오는가? 내가 성경 해석하는 것은 마귀 해석이다 라는 결론이 나오지요. 그게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대해버리면 그 성경 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구원시키려고 하는 수법을 시도하게 돼요 인간은. 자기에 대한 미련이 있어요. 자기 포기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 그걸 믿습니다 해서 성경 본 나의 행위가 나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작동하게 하는 토대가 되게 하는 인간은 이미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뒤에서 부추긴 겁니다.
그런데 이 논리대로 제 논리가 맞다면 그러면 예배당 세워놓고 교인들한테 어떻게 꼬실까 하는 것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이 동네, 성령 받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면 교회에도 단 한 명도 없어야 되지요. 없어야 되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 막 온다. 그러면 내보내야 되지요. 내보내는 방법은 뭡니까? 인간은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 말하면 뭐 이상한 교회가 다 있네 나가야 되겠다. 사요나라. 잘 가세요. 맞잖아요. 인간에게는 없네 맞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말은 너희들이 나를 죽였잖아를 앞장세운다는 뜻이에요. 너희들이 나를 죽였잖아. 왜 죽인 줄 알아? 너희들이 배후에 악마가 사주해서 나를 붙들고 너희 구원 얻기를 시도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은 구원이 없는데 그게 싫다는 거예요. 나는 기어이 구원 받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지옥 가기 싫고 나는 죽어서 천국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 시도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는 거기에 대처를 하는 거죠. 대처를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해야 될 강의 내용은 딱 두 가지죠. 뭐냐 하면은 인간이 말씀을 손 댈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두 번째, 인간이 손 댄 것 말고 주님이 손 댈 때 주님은 어떤 식으로 말씀을 이끌고 있느냐. 그 두 개를 다 알고 그 두 개의 차이를 알면 되지요. 그 차이를. 한 가지만 알면 안돼요.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이해하면 내 구원이 성사되는가 이 한 가지만 알면 안돼요. 뭐도 알아야 되는가? 왜 그 방식을 차단시키고 주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에게 찾아와야 구원이 되는가? 두 가지를 다 알아야 되는데 오늘 두 가지 다 합니다. 자, 첫 번째 인간이 손 대면 무슨 사단이 일어나는가. 인간은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인식할 때 인식하는 순간 뭐가 되느냐 하면은 소유물로 바뀝니다. 사물 인식이 소유물 인식이 돼요. "보암직도 먹음직도 탐스럽기도 하다." 마귀가 부추겼습니다. "선악과 나무가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렇지?!" 거기서 끝나면 마귀가 마귀가 아니지요. "네 것 해라. 네 것" 눈에 보이는 사물 인식이 소유물 인식으로 바뀝니다. 성경에 천국이 있지. 천국 좋지. 천국에 생명수 있고. 네 것 해라. 천국을 네 것으로 전환시켜라. 이 소유물 인식이 인간의 믿음의 전제입니다.
인간 모든 믿음의 전제는 믿습니다 라는 말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세요. 갖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 갖고 싶습니다 같은 말이 뭐냐 하면은 빼앗기기 싫습니다. 더 나가볼까요? 갖고 싶습니다 같은 말이 빼앗기기 싫습니다. 뺏으면 죽여버린다. 같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죽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 죽인 거예요. 바리새인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은 소유대상입니다. 왜? 객체이기 때문에. 나 주체가 있고 객체는 내 주체말고 나머지는 모두 객체에요. 하나님은 객체입니다. 객체가 있다는 말은 객체가 마치 존재해야 되니까 존재하려면 사물화된 존재거든요. 구약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우상이라는 게 그게 형상화 사물화된 그거거든요. 소유 대상이 될 때만 관계가 수립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가지기 원한 거예요. 마치 선악과를 보기만 하면 안되고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는 것이 악마가 인간한테 이미 집어넣어둔 악마의 속성이에요. 내 것 가져야 속이 시원한데 가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이 뭐냐? 내 것인데 빼앗길 리가 없다는 거예요. 내 건데 빼앗길 리 없다.
그러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들었던 그 백성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을 어떤 데 염두에 두고 하느냐? 그거 내 것 될 수 있어? 라는 취지로 듣게 되는 거예요. 오늘날 목사님의 설교할 때 듣는 교인들이 인식이 그래요. 그거 좋은데 내 것 될 수 있습니까? 하여튼 문제가요 '나'라는 존재가 문제에요. 이 존재 자체가 소유성의 덩어리를 존재라고 합니다. 내것에 동그라미 치면 그게 나의 존재에요. 그래서 내 것이 빠지고 내 것이 없으면 자살해요. 참 인생 더러워서 못 살겠다 죽자.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나 뭐 가지고 야구하냐. 그래서 은혜 받는다는 말은 저쪽 것이 내 쪽으로 넘어오는 것이 좋다는 뜻이에요 그게. 내 소유된 것이 굉장이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이런 인간을 누가 받아줍니까? 천국에서 받아줘요? 이미 속성이 마귀 속성인데. 뭐든지 내 것 되고자 하는데. 가인 보세요.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자기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자기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이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야곱이 속입니까? 내 것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를 속이잖아요. 아버지가 눈이 완전히 안보이는 그걸 기회로 해서 속이잖아요. 형인 냥 변장해서. 인간은 온통 생각하는 것이 뭐냐? 더욱 더 내 것 되는 것, 더욱 더 내 것 만드는 묘수는 이것 충실한 게 인간의 한 평생 시간을 그걸로 다 채우는 겁니다.
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대책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샘플로 삼아가지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 율법을 주셨습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율법을 안 줬어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습니다. 줬는데 이 율법의 내용은 벌써 이스라엘은 인간이잖아요. 인간들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성이죠. 모든 것 소유성 내 것 만들어야 비로소 소기 목적을 달성했다고 느끼고 자기가 끌어모은 것에 대해서 흐뭇해하는 것을 은혜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만족스럽다라는 뜻이에요. 율법은 알고 어떻게 하겠어요? 반대로 뭐 합니까? 빼앗는다 또는 제거한다. 이것이 율법 안에 들어갑니다. 인간은 얻고자 하는데 주께서는 빼앗고자 하는 겁니다.
이게 대표적인 것이 '할례'. 제거하고 빼앗는 겁니다. 인간의 뿌리 자체를 제거해버려요. 뿌리 자체를. 출생지의 요새 땅 꺼짐 현상을 뭐라고 하죠? 싱크홀, 자기 혈육 자체의 싱크홀 현상을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싱크홀 현상을 만들어요.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이삭이 그러하고 아브라함이 그러하고 야곱이 그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사람은 자기 뿌리 자체가 붕 뜨게 만들어요. 뿌리 자체가 일단은 혈육은 아니다. 육신은 있는데 육신이 그 뿌리를 모른다. 따라서 그 뿌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뿌리가 여기서 없는 뿌리에다가 새롭게 주어지는 겁니다. 주어지게 되면 그 언약백성들이 유지해야 될 존재는 소유가 아니고 '나는 없는 데서 나왔다'가 돼요. 없는 데서 나왔다. 내가 없는 데서 나왔다. 쉽게하면 '없는 데서 나온 것이 곧 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없음이 나보다 우선 되는 거예요. 없는 게 먼저고 그 다음에 없어야 되는 게 나다. 그러면 없음에서 뭐가 생겼습니까. '나'가 생겼죠. 여기 뭐가 들어갑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없어야 되는 내가 생겼다'가 되는 겁니다.
말은 어렵게 했지만 갈라디아서 6장 이걸 아주 쉽게 이야기해놨어요. 6장 15절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아멘"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뿐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새로 지은 자에게는 어떤 조건에도 구애 받을 필요 있다? 없다? 할례나 무할례라는 조건 자체가 이제는 빠이빠이 이건 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에서 할례 행했다 무할례 행했다 할 때는 먼저 조건이 있어야 돼요. 할례 무할례 이거는 뭔가 있어야 되지요. 육신이 있어야 되잖아요. 이 말은 육신에서 이 육신을 가지고 천국 가려고 하는 것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 인하여 이미 그것은 엉터리고 그런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새로 지음받으면서 그걸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이 무할례가 되어서 구원받지요 하나님? 아니야.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거야 라고 할 때 그 전제가 뭐냐? 나는 여기 있고 여기 있는 내가 죽어서 천국 가는데 어떤 조건을 결합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이유는 뭐냐? 모든 선지자의 글, 시편의 글이 율법의 글이 누구에게만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 집중되고 인간은 손 떼라. 손 못 대고 예수님께만 가져가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만.
그래서 사도행전 같은 데 보면 사도행전 여러 군데 많이 나오는데요 사도행전 10장 45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자, 여기 할례 받은 신자죠. 이 신자들은 뭡니까?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본인이 인식하는 거예요. 제 식대로 하면 할례라는 그 계명을 내가 소유했다라는 점을 내가 알고 있는 자들이 놀래요. 왜 놀래느냐. 자기는 할례 받았는데 신자 되었다 하는 그들이 여기 이방인들은 할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방인은 할례가 없지요. 할례 없는데 그들에게 뭐가 왔어요? 성령이 왔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뭔가 경로 하나가 빠진 거예요. 할례 받았으면 내가 그 다음에 성령 줄게. 이게 유대인들이 알고있던 거예요. 예언서에서 알고있던 거예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만 택하고 이방 사람은 택하지 않았는데 택한 이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를 약속하기를 율법을 지키고 율법 지키면 언젠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서 성령이 임할거고 성령이 임하면 너는 구원받는다. 착착 그 절차가 있는 거예요. 절차. 그 절차대로 그들은 자기신체에 할례라는 율법을 행했고 이제는 성령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이 깨어지면서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 성령이 와버렸어요. 성령이 왔다고요. 그러니 그들이 놀래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이 왜 바꿨냐? 하나님의 계획이 왜 바뀌었냐 이렇게 되겠지요. 할례를 행할 때에 로마서를 한번 봅시다. 왜 자꾸 할례를 언급하느냐 하면은 오늘 누가복음에서 시편, 율법의 이 말씀이 신약에 성령 옴으로서 어떤 다른 해석, 주님에 의한 해석이 인간이 율법을 받은 해석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제가.
로마서 4장 한번 봅시다. 4장 11절, 12절 제가 한번 쭉 읽어볼테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한번 보세요.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왜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4장 10절에 보면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출발을 뭐로 하느냐 하면은 할례 없던 것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의 자부심과 자긍심은 뭐냐? 우리 민족만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할례가 구원의 시작이라고 이해하는 거예요. 구원의 시작. 그러나 주님은 뭐냐? 깜빡 속았다. 깜빡 속았다. 내가 너희에게 할례를 준 것은 할례를 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 몸에 문신 새기듯이 할례를 새겼으니까 우리는 이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뭐가 문제냐 하면은 우리가 구원받는다가 이게 성립이 안돼요. 구원은 예수님만 구원받지 우리는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누가복음 24장에서 저희에게 또는 우리에게 했지요. 우리, 저희는 누가 만들어냈느냐 하면은 원래 인간이 아니고요 예수님이 새로 만든 사람을 가지고 저희, 우리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죄인을 가지고 만든 사람들이에요. 성령을 줘서. 그러니까 예수님하고 붙어있다고 우리가 아니예요. 제자들이라고 우리가 아니고. 제자들이라고 성령 안 받으면 안되잖아요. 제자들이라고 우리가 아니라 바로 제자들 보고 하는 말이 누가복음 24장 여러분들 잘 아는 내가 너희에게 약속의 성령을 주겠다. 약속의 성령을.
그런데 약속의 성령을 주는 조건이 뭐냐? 내가 부활되어야 돼요. 부활되는 조건은 뭐냐?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어요. 죽은 이유가 뭐냐? 제자들 포함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구원 받기에 합당치 않음이 완전히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자격 없다. 구원 받을 자격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말씀은 나한테 준 거예요. 너희에게 준 게 아니고 나 예수 나한테 준 거야. 아버지가 그걸 기뻐하셔서 그래서 예수님 혼자 구원 받으면 되는 거예요. 구원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이 주가 되었거든요. 주가 되고 난 뒤에 주에 해당되는 권한들이 구약에 나와있단 말이죠. 그게 뭐냐? 자기 백성을 주가 된 자만 자기 백성을 선택해서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따라서 그 주님의 권한을 하나님 우편에서 행사해버리면 자기의 영, 자기의 부활한 영을 그들에게 삽입시켜주는 거예요. 튜브로 강제로 삽입시켜주게 되면 그들이 죽더라도 그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그 영으로 인하여 또 사는 거예요. 살면서 그들은 왜 성령 받고 살아났을 때 왜 내가 성경 봐서는 이 구원이 안 되는지를 이제는 구원 받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그걸 증거하는 거예요. 그걸 증거해야 오직 예수님만 모든 것을 다 하셨다. 예수님만 말씀을 다뤘다는 것을 같이 더불어 증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제 그 내막이 윤곽이 서서히 펼쳐집니까? 나 혼자 펼쳐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이 질문을 할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성경이 말씀 이야기입니까? 마음 이야기입니까? 우리 마음 저 마음 이야기입니까? 어느 쪽 이야기예요? 시작이 어디입니까? 말씀으로 시작했지요. 말씀으로 시작해서 네 마음 이야기는 아니다를 경유하면서 어디로 모입니까? 말씀으로 가는 게 이게 성경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 이야기, 세상 사는 이야기, 자기 가슴 아픈 이야기, 사기 당한 이야기, 몸 아픈 이야기, 자식 말썽부린 이야기, 이런 거 가정의 문제 이야기 이것은 주님에게 필요한 거예요. 주님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나한테는 필요 있다? 없다? 나한테는 필요 없어요.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 개입한 거예요.
내 인생 똑바로 살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요. 나는 나에게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나는 나에게.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주님이 쓰실 때만 주님이 쓰신다 할 때만 '나'라는 것이 부정적 역할로서 이게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작을 말씀 시작부터 안 하고 어디서부터 하느냐 하면은 제 마음은 이런데요 이런다고요. 그냥 오신 길로 돌아가세요 이렇게 하지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악마적 마음인지를 제가 예를 한번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나와 인간은 이미 소유물이 된 나와 남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라도 어머니께서 맛있는 저녁을 하고 날 기다리는데 동생이 맛있다고 내 것까지 뺏어갔다. 예를 들면 소세지, 잡채 같은 거. 맛있는 거 해 놨는데 동생이 뺏어갔다. 동생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용서가 안돼요. 동생 그 날 많이 맞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배고프다 해가지고 몰래 어떤 식당이나 푸드트럭에서 몰래 음식 하나 빼먹었을 때 형은 어떻습니까? 재밌어해요. 왜? 동생은 내 쪽 사람이니까. 그 음식 도둑질 당한 식당의 아픔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푸드트럭 바빠서 빵 몇 개 가져갔는지 몰라요. 깔깔깔깔 웃으면서 재밌다. 그래도 안 들키도록 하자 이렇게 해요. 왜? 동생은 내 가족이니까. 인간은 타인과 동등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각과 사고가 내 편이에요. 동생이 내 음식 먹을 때는 동생이라도 쥐어박지만 밖에 나가서는 동생을 보호하지요. 그 마음으로 교회 나와서 교회 나와서 누굴 믿어요? 예수를 믿고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어딜 간다고요? 천국 간다고요? 참 같잖지도 않아요.
제가 할례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가 뭐냐? 바로 율법의 아브라함 이전을 보여주면서 아브라함 때 할례를 이야기하면서 이 할례가 그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에, 한계점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인간이 할례 받아도 지옥 간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이 할례 받고 지옥 갔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서. 할례 받아도 아무 효용이 없는 거예요. 왜? 할례를 하라고 해서 했는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게 효과가 없어요. 왜? 이유를 몰라요. 인생의 특징은요 무작정 찾아다닙니다. 뭘 찾는지도 몰라요. 인간은. 뭘 또렷하게 저걸 찾을께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거 찾아봐야 아니야 내가 찾는 거 아니고 다른 거. 다른 거 뭐? 모르겠어 그냥 찾고 싶어. 그냥 찾고 싶어. 파랑새 찾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냥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만족함이란 인간에게는 없어요. 자꾸 뭘 찾아요. 찾다가 치매 걸려서 죽지요. 평생 찾는데 뭘 찾는지를 몰라요. 뭐가 잘못 됐느냐? 찾는 게 잘못이 아니고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조건 하에 뭘 찾는 거예요.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조건 하에. 찾아서 다시 내 것으로 더 키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내 것이 비어있는 것을 용납을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할례 행한다는 말은 우리 것을 빼앗고 제거하는 거거든요. 제거하는 대신 할례를 행해버려요. 자기 자신을 제거하는 대신 할례를 행해버린다고.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몸에다가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몸에 문신 새기듯 할례라는 말이 아니고 꽈추에다가 할례를 행한다는 그 말이 아니고 네 모가지를 날리라는 뜻이에요. 모가지를. 그게 마음의 할례거든요. 마음을 자르라는 말이에요. 마음을 잘라라.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에게는 행할 수 없는 것을 율법 중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 나는 시키는대로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인가 이렇게 하겠지요.
아브라함이 할례를 했잖아요. 할례한 사람들이 할례의 진수와 맞닥뜨릴 때 그들은 할례가 소용 없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요단강, 요단강 건너갈 때. 할례 행했다 해서 가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언약궤 앞장 세워야 돼요. 다시 말해서 자신을 언약궤 앞에 자신의 존재가 미미하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언약궤 존재와 비교할 때 이건 훼방의 요소 방해 요소에 불구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할례한 나를 내세우는 게 아니고 그냥 언약궤만 믿고 요단강을 건너가죠. 이 요단강은 뭐냐? 딴 날은 물 많지 않다가 건너가는 그 날 물이 왔어요. 이건 죽음이에요. 너의 죽음을 전제로 해서 죽음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죽기 전에 네가 관여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네가 살아있을 때 하는 어떤 것도 죽음 이후에 네가 관여할 수가 없다. 관여할 수가 없는 그 이유가 뭐냐? 바로 모든 말씀은 할례가 됐든 뭐든 바로 주의 동행하시는 주의 이름과 결부되도록 하나님과 창세 전에 언약이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건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 했지요? 길갈에서 여호수아 5장에서 뭐하느냐. 할례 행합니다. 할례를 행해요. 할례의 의미가 전에 요단강 가기 전에는 홍해의 의미만 담겼던 할례가 이제는 요단강 건넌 후 요단강 요소가 더 추가되서 나오는 거예요. 소유가 추가된 게 아니고 '나는 죽어 마땅해'가 계속 추가되면서 할례는 더 진의가 완료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참으로 나는 죽어 마땅해가 돼요. 왜? 십자가가 바로 진정한 할례거든요. 그 할례 앞에서 다 도망갔지요. 그럼 할례 받은 자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예수님 구원되는 거죠. 말씀대로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만 구원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뭐냐?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할례 받은 것이 들어와요. 이걸 골로새서 2장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이 들어왔다고 되어있어요. 십자가의 죽으심이 들어와버리면 이미 할례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아요. 네가 네 몸으로 할례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묻지 않는 이유가 뭐냐? 너는 없는 자인데 예수 내가 너를 새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새로 지음 받은 모든 책임은 예수님만 갖고 있지 주도권을 갖고 있지 네가 새로지음 받은 주제에 내가 뭐를 기여했습니까? 라는 소리는 일체 다 차단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4장 49절 (소유성과 성령) 240924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4장 45절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튜브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와서 들어왔으면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기 하기 전에는 무엇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고난 받고 삼일 후에 살아나는 것과 죄 사함의 회개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일어날 일이 아니고 인간이 버린 그 분이 우리한테 혜택을 주는 거예요. 혜택을 주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끝나는 게 아니고 부활하신 상태에서 실제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겁니다. 활동을 개시하면서 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라고 하셨습니다. 능력이 임할 때까지니까 이거는 능력이 임하기 전까지는 아직까지 성령을 안 받을 때에요. 성령을 안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모든 그 구원의 효과를 제대로 덮쳐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성령이 덮쳐지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덮쳐지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 전에 인간들은 신을 이해하면서 자기 소유성에 근거해서 이해한다.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자기 존재가 더 강화되도록 유리하게 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성령이 오기 전이고 성령이 왔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약속은 또는 약속된 성령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지워버립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생각을 안 한다가 아니라 생각을 해. 생각을 하든 행동을 하든 네 마음대로 해.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너에 대해서 일체 신경 쓰지 않겠다. 왜? 의미 없기 때문에. 내가 행동을 잘했으면 어땠을까? 바르게 했으면 어떨까? 걱정과 근심은 다 인간의 자기 소유성 깨질까봐 소유성에 지장이 될까봐 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은 공포 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공포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공포에 입각한 발언과 행동. 무슨 회사에서 회의를 한다든지 어디 거리에 나가서 데모를 한다든지 안 그러면 집에서 조용히 혼자 숙제 수학문제를 풀어도 항상 이겁니다. 공포에 입각해서 수학문제 푸는 거예요. 벌벌 떤다 이 말이죠. 왜? 자기 문제 홀로 해결해야 되니까. 자기문제를.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은 자꾸 문제만 만들어내지요. 어떤 해결책은 없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자동적으로 문제거리 골칫거리만 계속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게. 그런데 고마운 할례는 뭐냐? 그거는 고민거리가 아니라고 계속 우리를 제거해 나가는 것이 할례입니다. 주님 이것 때문에 고민입니다. 내가 지워줄게. 내가 지우개로 확 지워버릴께. 자꾸 지워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근심이나 걱정은 사도 바울의 걱정은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그것뿐이지 자기 신상에 대해서는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아요. 내가 궁핍하다 또는 여유있다. "내가 궁핍에 처할지라도 여유 있을지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 안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이 덮쳐왔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시편, 하나님의 율법, 선지자의 글 그것이 새로운 현실이 되어서 우리가 몰랐던 생각도 못했던 진짜 현실로 자기가 흠뻑 뒤집어썼다는 사실, 성령 받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못 벗어난다. 적어볼게요. 지금 적는 것 중요해요. 나는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못 벗어난다. 그 다음에 히히히. 흐흐흐. 이게 성도입니다. 나는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못 벗어나. 아 짜증나. 이거 지옥 갑니다. 자율성, 나의 선택권, 나의 결정권 그거 주님께서 할례, 할례는 자른다는 뜻이에요. 그걸 다 자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할례 행해도 뭐냐? 무할례자가 돼요. 무할례자.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이 돼요. 율법을 받기 전에 할례 받기 전의 아브라함이 되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할례가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나의 할례 받을 때 아브라함이 아니라 할례 안 받을 때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실효적인 통치 지배를 받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더 쉽게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고 나는 있을 필요가 없고 이렇게 돼요. 하나님의 의가 있음을 위해서 내가 있어야 되지 나는 있는데 하나님의 의 받아서 구원 받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있음으로 충분해' 라는 말을 증인으로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늘 짤리지요. 뭘 제거되는 거예요? 제거되려면 내 생각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계속해서 내 생각이 나와야 되겠죠. 내 생각이. 남은 잘 사는데 나는 왜 못 사나. 모든게 뭡니까? 내 소유성과 관련된 것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아침에 눈만 뜨면 또 시작이고 또 시작이고 뭘 할때도 벌벌벌 떨면서 실패하면 안 되는데 잘해야 되는데 손님 오면 원피스 하나 팔아야 되는데. 이번 달 수입 계산해보니 큰일났다 문 닫아야 되나. 끊임없이 이게 나와줘야 엄청난 복음이 그게 문제거리가 아니고 고민거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할례 입장에서 그걸 제거해나가는 겁니다. 그게 마음의 할례에요. 고민은 혼자 다 해놓고 나중에 혼자 한 고민이 하나님의 이미 의롭게 됨 앞에서는 그거는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그걸 계속 발견해나가는 겁니다. 계속 발견해나가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주님이 계시면 그런 사람 생깁니다. 주님이 부활했으면 그런 사람 생깁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게 바로 사도행전이에요. 사도행전 나온 인물들 보면 하나같이 실성했어요. 실실 늘 웃어요. 꼭 실성한 것 같애. 웃을 일도 아닌데 웃어요. 기뻐해요. 지진 났다고 웃고 감옥 갇혔다고 웃고 미친 것도 아니고 미움 받는다고 웃고 귀신 달려든다고 웃고 돌 던진다고 기뻐하고 이건 뭐 실성이라는 말 외에 다른 적당한 말이 없어요. 그러면 실성이란 말 대신 다른 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성도의 삶은 혼돈입니다. '혼돈'.
혼돈이라는 것은 내 쪽에서 체계를 잡을 필요가 있다? 없다? 체계 잡으면 안돼요. 체계 잡을 필요없어요. 그게 소용없어요. 주께서 들쑤시는데 체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이게 오히려 인생의 짐을 자기가 짊어지는 거예요. 엄마 내가 3년 뒤에는 성공할게. 여러분 이런 질서를 잡지 마세요. 내가 온 재산을 다해서 카페 해가지고 네가 나라는 남자하고 결혼한 것이 얼마나 네가 참으로 멋진 선택이었다는 것을 내가 보여줄게. 카페해서 다 말아먹고. 멋있는 남편되기 위해서 전집 아줌마하고 재혼하면서 자기는 수억들여서 카페했는데 카페 망하고 손님이 와야 장사가 되지. 복음의 위대함 앞에서 주님께서 나의 위대함을 함몰시켜주잖아요. 이게 기쁨이잖아요. 이게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이고 이게 성령 안의 생활이거든요. 내가 꿈꾸는 위대함은 아예 나한테 들이붙을 그러한 처지가 아니에요. 나한테 위대함이라든지 인생 성공이라는 것은 아예 나와 어울리지 않아요. 붙으면 안돼요.
혼돈이라고 했지요. 실성이라는 말보다 더 적당합니다. 실성한 거예요. 맨날 허허허 웃고 실성한 거죠. 이번에 6억 날렸어 허허허. 이건 진짜 돈 날려서 진짜 실성한 건지 성령 받아서 실성한 건지 구분이 안돼요. 그런데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증인이라고 합니다. 증인. 이게 무슨 증인이냐? 토네이도 있잖아요. 토네이도의 등급은 얼마나 쎄냐 얼마나 속도가 빠르냐에 결정되는 게 아니고 피해 정도에 따라서 결정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 증인의 등장은 이 세상 자체가 재판이 되고 말아요. 재판장에 모든 인간은 피고가 됩니다. 재판의 대상이 돼요. 이게 보이니까 허허허 웃는 거예요. 남 보기에는 실성했지만. 쉽게 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은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지금 구치소가 뭡니까? 구치소에서 고스톱 쳐가지고 돈 500원 따고 좋아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또 땄어. 246번 너 나와. 끝나. 끝나. 돈이고 뭐고 끝나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은 이 세상 자체를 심판장으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심판장으로. 왜?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지 구원받는 것은 이미 결정된 거고 그 다음에는 너희 차례. 나 죽였으니까 멀쩡하다고 생각하면 안돼지.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그 배후에 악마부터 해가지고 그 추종자들을 내가 심판할게.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천국에 가 계시기 때문에 이 땅의 활동은 지옥의 사자. 이 땅과 천국하고 이미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게 가 계신 분이기 때문에 지옥의 사자로 활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 지옥의 사자에 대리자고 증인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부터 과연 사도행전의 상황이 사도행전의 그 현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내용들이 펼쳐지는지 여러분들 사도행전 한번 씩 다 봤잖아요. 이런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도행전을 다시 봅시다. 보게 되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너희들은 지옥 간다.
사도행전 비시디아 안디옥 1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의 설교가 나와요. 29절에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에요. 인간 세계에서 이게 통하리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인간 세계는 이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살아있는 내가 이 땅에서 잘되는 것을 원하지 반드시 죽어야 돼' 라는 그것을 어느 인간도 원하는 인간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안 믿은 것처럼 사도 바울 이 말도 사람들이 안 믿어요. 안 믿지요. 안 믿어야 되지요. 같은 인간끼리 인간이 뭘 추구하는지를 서로 서로 잘 아는데 뻔히 아는데 내가 이 말했다고 그 사람이 믿을 거 같아요? 안 믿지요. 그래서 45절에 보면 설교를 오랫동안 해요. 오래 하면 뭐 합니까? 아무도 안 믿는데.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반박하고 비방하는 거예요.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설명을 해봐요. 이게 어떻게 믿을 이야기인지. 너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은 관심도 없어. 이게 어떻게 이 말을 믿습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한테만 집중해서 자기한테만 관심을 두고 내가 어떻게 버티느냐 어떻게 죽어서 천당 가느냐 이것만 관심 있지 어떻게 예수님이라는 타인, 타인 이야기에 왜 관심을 둡니까.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기뻐하는데 기뻐할 때 조건이 붙어요. 뭐냐?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라는 것은 어떤 인간도 이걸 미리 캐치할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현상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자기의 자아를 포기하면서까지 이게 덮쳐온 사람에게 그리고 그 덮쳐진 것이 날마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날마다 삭제시키고 제거한다는 것, 내 행동하는 생각하는 모든 것을 무의미로 제거하는 이 자체가 이게 내 현장에서 내 삶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일어난다는 이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이것은 본인이 어떻게 착해서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영생 주기로 이미 하늘에서 작정했어' 라는 그런 통보를 받게 된 겁니다. 구원 받는 본인도 뭔가 유혹거리 있잖아요. 미끼, 뭘 하면 뭘 주시겠습니까 이런 것을 일체 주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 이야기만 하는데 예수님 앞에서 나 의미 없네 이렇게 자기를 정리하는 사람들. 내가 잘해도 의미 없고 못해도 의미 없고 망해도 의미 없고 성공해도 의미 없다. 그런데 울고불고 할 어떤 가치도 없다. 왜? 세상은 내 세상이 아니고 주님께서 딱 묶어놓은 변하지 않는 세상으로 확정 났기 때문에. 그 원칙만 작용하고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네요. 아 쉽네. 편하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그렇지 뭐. 성경 우리가 지키나 주님이 홀로 지켰지. 이걸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걸 받아들여보니까 이런 자에게는 보너스 죄 사함이 있고 이런 게 있으니까 이건 그냥 머리 긁적이면서 '되게 미안하네. 뭘 잘했다고 죄 사함까지 받고 왠 은혜인지.‘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것을 받아들일 때 갑자기 자기 자식 불러놓고 "야 너 오늘 수학 몇점 받았어?" 이게 큰 문제가 아닌 거예요 이게. 오늘 직장 상사한테 혼났다. 사표 내려다가 집어넣었다. 이게 별 문제 아니예요. 사표 쓰나 안 쓰나 이게 무슨 문제예요 이게. 괜히 볼펜만 닳지. 각오 세운다고 뭐 달라질 게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동생이 빵을 훔치나 내 빵을 먹거나 그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게. 어차피 '나'라는 것은 매일 제거되어도 그 다음을 또 생기고 또 생기고 매일같이 생기는 것이 나 위주. 그 다음에 은혜를 받으면 또 내 위주로 살았구나 하고 또 허허허 하하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25절. 사도 바울은 실성했다 베드로도 실성했다 미쳤다 이게 제 말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이야기했으니까요. 네가 미쳤구나. 1장 25절에 보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제 곳으로 갔나이다" 야 참 주님께서 분리 하나 끝내줍니다. 유다는 제 곳으로, 가야 될 곳으로. 지옥 갈 사람들은 지옥으로 보내는 것. 그래서 이 시대는 실효적 통치 안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가룟 유다가 제 곳으로 갔대요. 그 대신 맛디아를 뽑은 겁니다. 맛디아를. 자, 사도행전 2장 16절을 보면서 누가복음 24장 49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장 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이게 뭐냐? 약속이죠. 그럼 약속을 누가 손 댑니까? 약속을 누가 친히 활동 실시하시는 거예요? 우리 주님이잖아요. 그럼 그걸 믿으면 되잖아요. 어렵습니까? 내가 열심히 직장에서 일한다고 사는 게 아니거든요.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도 갑상선 암 걸리면 못하잖아요. 모든 것은 뭡니까? 약속이 약속대로 되어질 뿐이고 그 주도권에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직장생활, 농사짓든 촌에 가서 뭘 하든간에 그것조차도 주님의 약속 속에 포함이 되어있는 거예요. 약속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믿지 않고 주님의 약속은 십자가 죄 사함이고 농사 짓는 것은 제가 결정했습니다. 이게 촌에 가서 한번 당해봐야 제거 한번 당해봐야 아 이게 촌에 온것도 내 뜻이 아니구나 한번 알아봐야 아하 다시한번 잃어버렸던 하하하 허허허가 다시 소생시켜주는 겁니다. 내것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윽박지를 공포가 날라가버렸다는 거에요. 공포가 날라갔어요. 공포는 언제오는가? 내것 불러모을 때 내것 내것 내것 불러모을 때 일곱귀신 같이 따라오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그 다음에 뭡니까? "표적을". '표적'. 성도의 존재 자체가 표적이다. 성령 받은 성도 자체가 표적이니까 표적이 내 것이라고 하면 안돼요. 표적은 주인이 따로 있어요. 나는 나지 표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에요. 나는 나의 표적이라는 말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인데 표적이라고 말 할수 있는 분은 나를 나 되게 하신 분만 쓸 수 있는게 표적이에요. 네가 미국 가나 뉴질랜드 어딜 가도 예수 그리스도가 너와 함께 있음을 알려주는 그런 시그널로 사용되는 거예요. 시그널로. 시누이가 못 되게 군다. 시누이가 못 되게 구는 그 가정에 시집 가게 만든 그 것이 뭡니까? 주께서 하신 표적이에요. 시누이가 너무 못되게 구는데 어떻게 합니까? 너도 못되게 하면 되. 너도 못되게 하면 되잖아. 왜 못하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바로 그거잖아요. 자존심. 나는 내가 안 지키면 누구도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죽음을 경유해서 부활해서 나온 것이 성령이거든요. 성령은 항상 뭡니까? 이 세상 일어난 모든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게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성도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십자가에서 다시 한번 다 이루었다는 것이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다시 내 쪽으로 확산되는 거예요. 표적이 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4번째 2장 25절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야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하면 무엇을 언급합니까? 다윗을 언급해요. 아까 누가복음 24장 다윗의 쓴 글이 누구한테 된 것이다? 다윗의 쓴 글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한 거죠. 누가 이야기했어요? 예수님 본인이 이야기했어요. 예수님 본인이 다윗의 모든 글은 나에게 주어졌고 다윗의 글이 완성되기 위해서 너희들에게 미움 받아서 죽어야했고 그리고 부활했어야 했고 성령을 너희에게 주고 이 모든 것이 다윗의 말씀 안에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다윗의 말씀 안에. 그런데 다윗의 말씀을 네가 구원받기 위해서 네가 손 대? 내가 손 대야지. 내가 손 대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보잔 말이죠. 25절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것은 뭐냐? 인간이 왜 손 대면 안 되느냐 하면은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에 이야기가 다윗의 이야기예요. 그럼 다윗은 뭐에요? 하나의 시그널이죠. 표적이죠. 물론 그 당시 다윗은 그걸 몰랐습니다. 몰라가지고 왜 자꾸 사울은 나를 미워하느냐 이렇게 하고 있는데 27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라고 다윗이 이야기할 때 세상 사람들은 다윗의 시편을 손 대면 뭐냐 하면은 여기 음부에 버리지 않고 하는 것은 다윗의 이야기다 라고 해석하는 거예요. 왜? 다윗이 말했으니까. 본인이 말했으니까 본인이 나라고 했으니까 라는 것에 대해서 사도행전 2장 29절에서 형제들아 다윗은 죽었다. 아직도 부활되지 않고 아직도 죽어서 우리 가운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다윗 이야기 아니잖아. 누구 이야기냐? 다윗 안에 예수님이 다윗이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그때 당시에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뭐냐? 당신들 껍데기 속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라고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이 논리적으로 틀리고 맞다고 할지라도 자기밖에 생각 안하는 오늘 현대인에게 이런 설교 하는 게 실성한 거예요. 미친 거예요 그거는. 그거 믿으면 돈 나오나? 얼마 주는데?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래서 31절에 그래서 주님은 미리 다윗 속에 들어가서 다윗을 사용해서 이용했고 살아나셨다 32절에 우리가 다 이 일에 뭐가 됐다? 증인. 너희들은 종속된 거야 인간아. 나 자체는 없어. 너의 자아는 예수님이 가져가고 너는 예수님의 자아의 증인이다 이 말이죠. 내가 어떻게 됩니까 하지 말고 주님이 내 안에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이.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안 믿는 가족들이 성령 받은 가족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왜 비겁하게 너 할 일을 가지고 자꾸 예수님 핑계 대고 예수님한테 밀어붙이느냐. 너는 너 할 일 해 너 할 일. 이게 자기 할 일 자신 없으니까 예수님 예수님 하니까 우리가 못 알아듣잖아. 좀 알아듣는 이야기해.
거기에 대해서 적당한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개, 돼지한테 복음 전하지 말라. 복음은 개, 돼지한테 전하는 게 아니다. 전도한답시고 함부로 전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본인도 우리 성도도 본인도 이게 너무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는데요. 이걸 아주 논리적으로 따져가지고 하면 그 사람이 믿을 것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 문제는 주님이 할 문제지 주님이 성령이라는 호스를 강제로 집어넣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가 상대방에서 설득력 있게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 마세요. 그 다음에 7번째 3장 21절. 여러분 이렇게 보니 어때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미쳤지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거 같애. 통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3장 21절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이건 베드로가 설교한 건데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라는 이 대목이 나와요. 예수님의 재림 이야기거든요. 예수님의 재림은 베드로는 어디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그분이 승천했다는 것을 근거로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예수님이 승천이 되어버리면 성도한테는 무엇이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이 구애받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 다시 말해서 나는 미국이나 북한 어디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요 교도소 가도 마찬가지고요.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아요.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거 구애받을 필요 없어요.
인간의 육신에 속한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이미 이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재판장이죠. 모든 것은 제거되도록 예비되어있다. 예비. 보관되어 있다. 컨테이너에 있는 내 이삿짐. 창고에 있는. 그냥 가만 두어라. 가만 두어라 내가 불태워줄 테니까 가만 둬. 공산주의가 어떻고 사회주의가 어떻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고 하마스가 어떻고 어떤 이야기라도 그냥 아무 문제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이다 기름값 올라서 어떡해 이런 고민은 할 필요 없어요. 이미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것은 성도한테는 승천한 그곳이 성도의 시간이고 공간입니다. 예수님 계신 시간과 공간의 접촉을 받기 때문에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는 접촉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름살 좀 생겼다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그거는 폐기되어야 될 피부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사도는 하여튼 내가 어떻게 죽고 사는 문제 생활을 어떻게 하는 문제 이 자체가 없어요. 사도행전 7장 봅시다. 7장에 스데반 집사 나오는데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잖아요. 돌에 맞아 죽는데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승천했으니까 받아주는 거예요.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다시 말해서 '저들이 나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이미 내가 구원 받았음을 확인하게 위해서 주께서 허락하신 조치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죄를 묻지 말아주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이런 대장부가 다 있습니까. 재림했다는 것을 재림이라고 하지 마시고 승천했기 때문에 재림하시거든요. 땅에서 떠낫기 때문에 재림이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말은 우리의 시공간은 어디있다? 예수님의 시공간과 우리가 함께 있기 때문에 이쪽에 있는 것은 허깨비같은 것이다. 자, 그 다음에 3장 18절 봅시다. 다 주님이 이야기한 약속입니다. 약속한 성령이 왔을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누구한테 왔습니까? 예수님한테 왔지요. 예수님께 왔을 때 주님께 일어난 현상은 주님이 사람들로부터 뭘 받는다? 해악을 당하는 거예요.
그 동일한 약속이 동일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이 시대에 땅에 사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성령의 약속을 받아버리면 우리에게 뭐가 옵니까? 비난과 무시와 실성했다는 소리와 정신병자라는 소리와 온갖 모욕적인 발언을 듣겠지요. 그게 바로 좁은 길. 이번에는 4장 18절 봅시다. 베드로 요한이 전도를 하니까 권력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똑같은 현상을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들이 똑같이 겪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들은 어떤 태도를 가진 줄 알아요? "기뻐했다" 했어요. 야 진짜 주님이 함께 계시는 거 맞구나. 주님이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은 거예요. 이런 비난을 받을 때에.
4장 31절 제가 언급한 이유는 이렇게 방금 18절에서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했지만 성령이 임하니까 진동이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서 꿀리거나 양보하거나 좋게 좋게 지낼 필요는 없다 그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도행전 8정 18-20절 아주 재미난 거 나옵니다. 재미나요. 베드로 요한이 성령받기를 기도하니까 성령이 왔어요. 오니까 거기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사도에게 돈을 주면서 말하기를 성령 받는 그 희한한 현상을 재주를 나한테도 넘겨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선물이죠. 베드로가 이 말 할 때 뭡니까? 내 동생이고 내 부모고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성령 오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돈 주고도 못 한다는 말은 이거는 선물이기 때문에 주고 말고를 주님이 결정하지 받을 사람 내가 왜 결정해. 나도 받은 입장인데 내가 받은 거 반반 나눠주는 게 됩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23절에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너는 은과 함께 너는 망한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몬이 쫄아가지고 '망하지 않도록 대신 기도해주세요' 하는데 기도한다고 될 문제입니까? 기도는 무슨 기도냐 하면은 '나'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지금 살아계신 주님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자기 백성에게 성령주는 일을 저를 통해 해 달라는 기도지요. 하나님 우리 둘이 아는 사이니까 이 사람은 나하고 친한 친구니까 어떻게 성령 좀 주세요 라는 것을 하는 게 아니예요. 계속 주께서 저를 사용해달라는 거예요. 주의 시그널로. 그런데 그런 기도하는 사람 있겠습니까? 하는데 하하하 허허허 웃는 사람은요 신바람이 났어요. 신바람 나가지고 그걸 아주 즐겁게 해요. 찬송가입니다. 정식 찬송가가 아니고 제목이 찬송가에요. hymn. 사랑에 대한 찬송. 가사를 한번 보세요. 푸른 하늘이 우리를 위해 무너진다면.
지금 방금 우리가 강의 들었잖아요. 우리는 일단 실성한 겁니다. 우리도 혼돈되었어요. 무엇이 혼돈되게 하는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데 어느 정도냐? 푸른 하늘이 우리를 위해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그것으로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 대신 예수님을 집어넣어 보세요. 아침마다 사랑이 내 마음에 넘치고 당신의 손길로 예수님의 손길로 내 마음이 떨고 세상이 아무래도 좋아요.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의 사랑이 있는 한. 나는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어요. 당신을 위해 금발로 물들이겠어요. 당신이 원하면 머리도 금발로 물들이겠대요. 만약에 당신이 원하신다면 달이라도 따오겠어요. 보물을 훔치겠어요. 만약에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겠어요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는다 해도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요. 언젠가 인생이 당신을 나에게서 갈라놓는다 해도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상관없어요. 나도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우리의 영원함을 가지는 거예요. 우리는 끝없는 푸른 하늘 속에서 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 속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아무 문제 없는 하늘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이어줘요 라는 노래 가사 보셨지요. 가사 보면서 노래 한번 들어보세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 사랑,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다.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믿음 소망 사랑의 원천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따로 계신데 그분의 사랑이 선물로 은사, 선물로 주어지게 되면 그 속에 이런 사랑이 오고 이런 사랑 오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무 문제가. 그런데 이 이야기 듣고 문 열고 나가잖아요. 그 다음부터 주워 모으는 거예요. 남한테 기 죽지 않기 위해서 나 사는 사람처럼 산다고 남한테 내세울 것을 찾기 위해서 또 내 소유성이 발휘되지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주님 보시기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왜? 주님께서 조질 거니까. 주께서 십자가 또 만나게 해가지고 그걸 경유하면서 그전보다 더 큰 감사와 기쁨을 여러분에게 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악과 악마성을 경유해야 비로소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주님 쪽에서 친히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이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