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슥10장1-3(우상의 허탈함)140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0장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21페이지입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여기 처음에 복술자, 사람이죠. 드라빔이라는 것은 사람이 섬기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목자들에게, 목자가 사람이죠. 수염소는 짐승에 해당된 것입니다. 갑자기 사람을 언급하다가 졸지에 사람을 짐승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해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없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는 분명히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우리는 하나의 양이 됩니다. 양, 염소 이런 표현들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나 어떤 인간이냐 이렇게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 그걸 따지고 물으라는 것입니다. 천국 안 갈려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죠. 다 천국에 가고 싶죠. 그런데 성경은 누누히 이야기 하기를 천국은 지금 봉쇄되어 있고 천국에 넣어주고 안 넣어 주고는 천국에 계신분과 연계될 때 비로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하나님 계시고 인간 있을 때 그 가운데 중보자라 이 중보자가 왜 등장했겠습니까? 불교는 중보자가 없어요. 지가 부처되면 되요. 지가 알아서 바르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허나 진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항상 중보자를 거론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보자 앞에서 어른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대전에서 창세기 내용으로 수련회를 하면서 마지막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왜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 못하느냐면 성경 카메라 앞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얼굴을 돼지같은 얼굴이라 했는데. 그 돼지같은 얼굴을 들이대 가지고 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면 하나님께서 거 좀 비키라 말하죠. 중보자가 보여야 카메라에 중보자가 보여야 되는데 중보자 안 보이고 자기 얼굴을 카메라에 들이대니까 이 세상 움직이는 주인공이 안 보이는 거예요.
물론 욥도 그런 실수를 했죠. 자기에게 고난이 오니까 자기가 카메라에 들이대고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힘듭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욥아 좀 비키라 니가 이 세상을 만든 건 아니잖아? 세상을 만들지도 않았으면서 니가 자꾸 주인공 노릇을 하면 되겠느냐? 그래서 욥으로 하여금 중보자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면서 친구들을 위해서 욥 자신이 중보자의 기능을 합니다. 니가 기도해서 제사 드리면 저 친구들이 아마 죄 용서를 받을 것이라 그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중보자에 속한, 중보자의 기능이 나오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은 아니고요 지금도 세상을 움직이는데 관련성이 있어요. 그 연관성이 있는 사람을 양이라 하고 부정적으로 하나님의 중보자에게 대드는 쪽을 염소, 수염소 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심판하실 때 오른쪽은 양이고 왼쪽은 염소 보신적이 있죠? 양과 염소로 나누었다.
이렇게 할 때 오전 설교에 말씀드린 것처럼 모두 다 똑같은 동질, 동등한 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양다운 사람도 없고 염소다운 사람 없는데 양과 염소는 하나님의 관계에 의해서 양은 양으로 염소는 염소로 그들 끼리는 똑같은 동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염소라고 이야기 하므로서 양을 따로 뽑아 내겠다는 의도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건 가운데서 여호와의 사건과 여호와가 보이지 않는 사건과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자체가 사건 다발인데 그 중에서 여호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건과 여호와와 상관없는, 여호와를 보여주지 못하는 그런 사건들. 그런 사건들이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여호와를 바로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을 알아채는 그런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건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여호와 아닌 사건을 제거하는, 생선에서 가시만 남기기 위해 살을 발라내듯이 그런 추려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하신 말씀은 현재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있는데 여기에 쓰레기 같은 것이 덮여져 있어요. 덮여져 있는 것을 하나 둘 치워 나가면 고 알맹이에 양을 양답게 하는 구원받게 하는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치워내는 작업을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해내고 있습니다. 백내장 수술 하면 상당히 모든 것이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뭔가 희미한 것을 치워버릴 때 뚜렷하게 보이잖아요. 치워내는 작업 중의 하나가 2절에 나옵니다.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이렇게 되어 있어요.
드라빔이라는 것은 우상의 종류, 가정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 신들을 드라빔이라고 합니다. 가정의 신, 가정의 우상. 조상들이 섬겼던 것을 후손들이 그대로 이어 받으므로 말미암아 자기 가문에 대한 예의와 충성을 다하는 거예요. 드라빔이라는 우상이 있었고 그 다음에 복술자, 점 치는 사람을 복술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는 악마적인 사건이죠. 그것을 하나하나 쓰레기 치우듯이 치우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을 할 때 그런 것을 용납하고 장려했던 자를 수염소, 지옥갈 수염소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드라빔이 뭐며 복술자가 왜 이렇게 점을 치는지 그걸 알고 있어야 되겠죠. 1절에 보면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농사 지어야 먹고 사는 농경시대에서 농업 혁명이라는 것은, 역사가들은 BC 만 년 경에 농업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풀이나 뜯고 돌아다니다가 정착하면서 종자 개량을 통해 정착해서 농사를 지었고 농사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도구와 종자 개량으로 많은 생산이 일어나면서 이제는 돌아다니지 않고 정착 해도 이제는 살만하게 됐을 때에 그 때 땅이라는 소중함을 알죠.
그와 동시에 농업혁명과 정착과 동시에 농업에 필요한 신들이 만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드라빔이라는 것이 성경에 최초에 어디에서 나오느냐면 창세기 31장 19절에 라반 자기의 드라빔이 있었고 딸이 그것을 훔쳐가는 그 대목이 나오는데 드라빔 설명하면 골치 아프니까 이 드라빔, 가산의 신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간단한 예를 들어서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유일한 제사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약속대로 제단을 만들고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의 피를 쏟아 버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응답이 됩니다. 뭐 봄비가 내리든 가을비가 내리든 상관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과 교섭하는 방법을 인간이 몰랐기 때문에 드라빔이라는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개인적인 가산의 신들을, 우상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비가 와야 농사가 잘 되고 농사가 잘 되야 잘 먹고 사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련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건을 통해서 교섭해 나가면 되거든요. 그 교섭의 내용이 뭐냐면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가 묻어 있으면 되요. 드라빔은 그게 없습니다. 복술자에게는 그게 없거든요.
지금 제가 말한 것이 뭐냐하면 인간들이 자기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지 아니하신 사건, 드라빔이나 점 치는 그런 사건들이 있고 거기에 현재 이스라엘이 있고 언약의 피 여호와께서 원하는 사건도 거기에 같이 섞여 있는 겁니다. 섞여 있을 때 핀셋으로 하나님이 만든 사건이 아닌 것을 하나하나 제껴 버리면 되요. 그러면 쉽네요. 핀셋 있고 하나님이 주지 아니한 사건 하나하나 옆으로 이리 제끼고 저리 제끼면 거기서 여호와의 사건이 하나 나올 거니까 거 참 쉽다고 이렇게 생각 되겠죠.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사기 17장 1절 에브라임 산지에...하여튼 성경에 지명하나 나오면 제가 더 바짝 땀이 흘러요. 왜냐하면 에브라임 산지 같으면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에브라임 거기가 어디 동네지? 거기가 어디쯤 되는지 모르잖아요. 에브라임이 어디쯤 되냐면 대구가 예루살렘이라면 에브라임은 대전쯤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여튼 대전 바닥에 미가라는 사람이 엄마랑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가 엄마가 모아 두었던 돈 일천 일백이 그 자리에 없어요. 그래서 성질 좀 급한 미가 엄마가 “돈 가져 간 놈 대대로 망해 죽어라 저주 받아라” 라고 욕을 했어요. 돈은 없고. 하여튼 집 안에 뭐가 없으면 무조건 도둑놈이 가져갔다고 하니까 성질 급한 거죠. 분명히 내 막대한 재산을 도둑놈이 가져 갔으니까 저주 받아라 하고 욕을 했습니다. 그 저주 했던 소리를 아들 미가가 들었어요. 듣고 난 뒤에 “엄마 그 돈 내가 가져갔다”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 같으면 나도 그것도 모르고 했네 그 돈 너가 잘 쓰든지 돌려 주든지 하라고 했을텐데. 신에게 내 돈 가져간 놈 저주받게 해주시옵소서 저주를 퍼부었던 말이죠. 저주를 퍼부으니까 그 저주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저주가 옮겨 질 것을 고민했던 엄마가 이제는 반대로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해가지고 하나의 신상을 만들었는데 그 만든 신상이 드라빔이라는 신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호와의 사건이 묻혀있는데 거기에 여호와 사건 말고 하나의 인간적인 사건이 이렇게 덮쳐져 있는 거예요. 제가 그것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제끼라 했죠?
그런데 이것을 제낄 때 제낄 수가 없는게 이미 들었던, 인간이 평소에 그 사회에서, 여기는 사사시대인데, 그 분위기에 스펀지처럼 푹 젖어 있는 입장에서 이것을 제낀다는 것은, 이것을 제쳐버려 없앤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사고 방식을 통째로 부정한다는 셈이 되버립니다. 아까 우리 반주 하시는 분이 찬송가 368장이 잘 헷갈린다고 했는데 이것이 들어 왔던 가락 때문에 잘 안 되거든요. 인간의 몸은 스펀지가 되어 가지고 스펀지는 안에 내용이 없구요 전부다 전수 받은 내용만 꽉 차 있어요.
전수 받은 내용인데 이걸 제낀다는 것은 이건 완전히 자기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인생관을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십일조 안 하면 저주 받습니다. 성경에 있습니다. 말라기에 있습니다. 십일조 안 하면 저주 받고 하면 복을 받는데 과연 그런가는 십일조 하는 그자체로서 테스트가 가능하니까 여러분들이 진짜 믿으시면 십일조 일단 한 번 해보세요. 과연 해보고 복 받는지 안 받는지는 그 다음에 가서 스스로 판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것을 교회에서 아주 못이 박히도록 했습니다. 주일성수도 마찬가지고.
그러다 보니까 항상 십일조를 안 하게 되면 마음속에 나는 온전한 신앙이 아니야 하는 생각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걸 핀셋으로 제거를 해야 되는데 본인이라는 구성 자체가 이미 남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그것의 열매가 “나”거든요. 나라는 것이 따로 뚝 떨어져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남들이 세뇌주고 교육시키고 교육받아 왔고 그것이 하나의 종기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이 그게 나다 이 말이죠. 그게 나니까 몸통하고 잘라낼 수가 없죠. 잘라내면 나는 하나의 이단이 되는데요.
옛날에 서울의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일조 안 하면 저주받는다고 하는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십일조 한 만큼 손해입니다.” 지금 와서는 딴 소리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십일조 한 만큼 손해다 라고 했어요. 박영선 목사님이 실제로 해보니까 저주가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인간의 경험이 아니거든요. 경험이 아니예요.
이것은 경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은 경험을 제쳐 버려요. 경험을 부정해 버린다구요.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죄에서 나온 경험이기 때문에 아무리 경험을 쌓고 쌓아도 그것이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학문이라는 것은 믿을게 나 밖에 없어요.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관찰하고 또 관찰해서 어떤 일관된 원칙을 끄집어 내서 그걸 발달 시켜서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합리적이고 과학적 사고 방식입니다.
아르키메데스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우리도 지금 목욕탕 가고 늘 목욕탕 가고 목욕탕 가면 물 넘치잖아요? 목욕탕 욕조에 들어가서 물 넘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예요. 욕조에 들어가서 물 넘친 사람이 그렇게 많건마는 물질의 비중이 부피하고 관련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르키메데스 한 사람 밖에 없었어요. 하늘을 쳐다보면 푸르잖아요? 그렇게 푸른 하늘을 쳐다 보면서도 지금도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왜 하늘이 푸른지를 따진 사람은 19세기 틴텔이라는 과학자 밖에 없었습니다. 빛의 산란 때문에 그게 푸르다는 거예요.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쇠를 내리칠 때 내리치는 소리와 물체의 길이가 비례된다는 것을 이야기 한 사람은 피타고라스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전에 이야기 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요르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비타민 C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바나나는 껍질이 변하는데 오렌지 껍질은 왜 안 변할까? 이거 해가지고 비타민 C를 발견했어요.
그러니까 뭐든지 주의깊게 보면 남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냐 현대의 복술자입니다. 이게 점 치는 사람이예요. 사람이 영국의 관습법도 있지만 인간의 모든 주변에 있는 것은, 내가 나 되는 것은 경험이 누적되서 경험에서 경험으로 누적이 되면서 안 맞는 것은 도려내고 맞는 것만 골라서 점점 더 진리와 진리의 엑기스만 골라서 오늘날 우리는 과학적으로 산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모든 생각은 발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칼 포프라는 철학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항상 시행해 보고 뭔가 문제 있으면 시행해 보고 문제 있으면 문제를 시정해서 보다 나은 발전을 이루려 한다 모든 교육과 심리학 교육 과학 경제 행정 인간의 모든 분야가 해 보고 약점 있으면 고쳐 나가면 발전 된다 이것이 전부거든요. 지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걸 배운다구요. 한의생들이 공부하는 것이 과거에 이거 먹으니까 감기 나았더라 이것을 외우는 거예요. 의대 학생들도 마찬가지구요.
무조건 다 외워야 되요. 법도 관습법이니까 법대 학생들 사법고시 보는 사람들 무조건 책 스물 몇 권 무조건 다 외워야 되요. 누적되고 누적되는 거예요. 그걸 제껴 버린다 이것은 여호와의 사건이 삐직하고 정전기를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죽어야 산다 이건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아무도 이야기 한 사람이 없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저는 드라빔이 성경에 나오고 점 치는 사람이 나오지만 저는 분명히 합니다.
여호와를 모른 이상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이상 당할 대안이 없습니다. 명절은 왔죠. 식구들은 왔죠. 그러면 할 거 뭐 있습니까? 토정비결 내죠. 뭐 재미로 한다? 옛날에 어릴 때 저도 우리 할아버지가 토정비결을 끄집어 내가지고 할아버지다운 권위를 초장부터 꽉 잡았어요. 야들아 다 오너라 해서 토정비결 책도 있어요. 거기에 맞춘 달력도 문방구에서 팔아요. 쭉 비교해가지고 “근호 너는 3월달 주의 해야 겠구만” 하는 내용이 다 나와 있거든요.
우리가 그것을 안 한다고 봅시다. 점을 안 친다고 봅시다. 달리 대안이 있습니까? 대안이 없죠. 이 과학 시대에 아직도 점 치고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과학이 빠트린 부분이 있어요. 뭐냐하면 내가 잘되기 위해서 미래에 어떤 행운이 올 것인가? 그것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할지라도 과학이라는 것은 과거의 연속이기 때문에 미래는 몰라요. 그냥 해보는 거죠.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 미리 과학이 차지하지 못한 그 부분에 대해서 이 점쟁이들이 차고 들어가니까 에이 밑져야 본전이지 하면서 믿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여호와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의 사건이라는 것은 이건 매일같이 우리에게 덮어지고 덮어지기 때문에 이걸 제거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거죠. 누구 좋아라고 다 내 좋아라고 드라빔과 복술자들을 섬기기 때문에 이것을 제껴 버리고 없앤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점 치는 것도 나를 위해서 점 치잖아요. 신을 섬기는 것도 나를 위해서 섬기잖아요.
그래서 여기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라고 스가랴서 10장 2절에서 아무리 이야기 해도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중에 한 개는 맞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열 개 하면 한 개는 맞던데요. 점 치러 가보니까 용하대요. 하는 소리가 다 나보고 하는 소리 같던데. 여기서 우리가 아는 것은 허탄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그 허탄한 것을 찾아가는 내가 허탄하다는 뜻입니다.
나한테 문제가 있으니까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런 점쟁이들이 있잖아요? 점쟁이들이 있다는 말은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고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찾는 사람 중의 하나가 나라는 말이예요. 내가 점쟁이를 양성했고 내가 드라빔을 양성을 한 거예요. 문제는 뭐냐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수염소, 목자 있지만 우리는 목자를 원치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염소 같은 목자를 원해요. 나 축복해 주고 나 잘되는, 드라빔이나 복술자 같은 그런 내용으로. 성경 표현을 넣어주는 그런 목자들, 목사들. 그걸 우리가 원한다 이 말이죠. 점쟁이들이죠.
우리가 점쟁이들을 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해결책은 뭡니까? 십자가가 여호와 사건의 마지막 종결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면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된 것을 십자가가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저주 받았다는 뜻이고 그 저주 받았다는 이유가 우리가 저주 받는 것을 대신 보여 주기 위해서 저주 받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저주 받아야 되는가? 자기 이야기로 와야 된다 말이죠. 우리가 하는 짓은 뭐냐면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살잖아요? 그게 바로 십자가잖아요.
그 십자가에서 자동적으로 십자가의 능력이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면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예수 믿기, 삼위일체 믿기, 교회 나오기. 전부 다 이것이 바로 점쟁이를 찾는 방법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들 목사를 욕할 것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니 잘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축복을 해주기를 고대하는 그런 마음으로 교회 오는 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를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1절에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야고보서 5장에 보면 나옵니다. 7절에 “내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4월 달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 하고 10월 달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합니다. 봄에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라고 해놓고 하는 말이 심판주가 문 앞에 있으니 오래 기다리라 기다리면 심판하러 다시 오겠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여호와의 사건입니다.
여호와의 사건이라는 것은 뭐냐면은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이루신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비를 내리고 모든 경작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나 자신이 문제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뭘 느끼느냐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나쁜 짓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봄비와 경작한 것도 있고 남들보기에 사는 것처럼 사는 것, 이것은 전부 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증거로서 우리에게 은혜로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오 다오 라고 달라고 하지 말고 반대로 해야 되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 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면 점쟁이들을 찾아 갈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드라빔을 집안에 모실 필요가 없어요. 천주교 신자처럼 마리아 상을 이렇게 동그랗게 만들어 제단 쌓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천주교에서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도 TV밑에다 성경책을 이렇게 놓고 뭐 하는데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이렇게 해가지고 또 특정 공간에다 특정 시간에다 하는데 그게 다 옆집을 위해서 한다면 하는데 옆집을 위함이 아니고 위에서 쿵쿵 거리는 윗집을 위함이 아니고 바로 지금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안 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우리가 미가 집안을 자처해서 그렇게 만들 필요가 없어요. 제사 지내는 것 주님께 일임 합시다. 예배 드리는 것 주님한테 일임 하시고 은혜 오고 안 오는 것도 주님께 일임 합시다. 그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자기 행한 것 가지고 기대하지 말고 미련두지 말고 애착두지 말고 내가 이렇게 행했으니까 복이 올까 하지 말고 우리는 내 행한 것 걷어 치우고 내 행한 것 전부 다 그게 복술이고 점치는 거예요. 뭔가 행운이 올까 착한 척 하는 얄궂은 얍삽한 짓입니다.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이 하신 것을 믿고 믿음으로 맨날 이렇게 은혜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살아 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 사건이 있는데 우리 욕심 때문에 묻혔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 둘 끄집어 내어서 숨 가쁘게 숨 답답하게 우리 욕심대로 묻혀 있는 그 십자가를 날마다 다시 볼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