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형상과 사랑

아빠와 함께 2024. 6. 25. 08:11

대전-신명기(23강)신10:12(형상과 사랑)20240624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10장 12절부터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이렇게 시작하죠. 오늘 강의 시작은 천국의 조건입니다.

<천국의 조건> 조건은 인간이 정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정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정합니다. 이 조건에 대해서 하나님도 구애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조건에 맞추어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이 조건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게, 제안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 조건에 대해서 낯설어요. 상당히 낯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낯설지 않아요.

왜냐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천국의 조건을 설정했기 때문에 낯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천국의 조건을 누가 이루느냐 하면은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이 이 조건을 이루십니다. 조건을 이루려면 조건에 필요한 환경이라는 조건이 또 필요해요. 이 조건이라는 결과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환경 자체가 마련되어야 되거든요.

그 환경으로 끌려 들어온 자들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역사를 구성하는 민족>이에요. 역사인데, 없는 역사예요. 없는 역사를 구성하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시간이죠. 없는 시간을 새로 구성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뭐냐, 장차 구원받을 수 있느냐, 장차 구원받느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 구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서만 나타나지,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이라는 말을 끄집어낼 자격이 없어요.

이걸 뭐라 하냐 하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 천국에는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돼 있어요.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선택받은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그 다음에 뭐라고 하냐 하면, “만민 중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여기서 만민과 이스라엘을 구분합니다. 만민은 아니에요. 만민은 관계자 외에요, 천국에 대해서. 그럼 만민들이 뭘 갖고 있는가? 시간 개념을 갖고 있어요. 지금 구원 받을까, 아니면 죽어서 구원받는가? 나중에 구원받는가? 지금 미리 구원 받았는가? 미리 구원 받았다면 나중에 구원 받을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여러 가지 논리가 등장하는데, 그건 만민들의 아이디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구원이란 것을 생각 안 해요.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한대요. 구원은 하나님의 관심사지, 이스라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구원 때문에 죽을 뻔해요. 맨날 죽어 나가는 거예요.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굴어?” 장이수가 아까 이야기 했다 했죠.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굴어?

자, 범죄도시 1,2,3,4,에서 범죄자 잡는 것은 장이수가 잡아요, 마동석이 잡습니까? 마동석이라는 형사가 잡잖아요. 그런데 형사가 제 일을 하면 되는데, 맨날 누구 찾아와요? 장이수한테 와서 “야, 너 오늘 필요해.” 하면, “왜 자꾸 못살게 굴어?” “안 해? 안하면 이리 와. 벌 줘야 되겠어.” 이러면서.

장이수라는 조연은 자기 나름대로의 일이 있어요. 일이 있는데 마동석은 형사 자기 일을 가지고 왜 자꾸 나한테 찾아 오냐 이 말이죠, 자기 일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꾸 찾아오니까 구원이 자기 일인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그때부터 사달난 겁니다. 자기가 마치 관계자 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한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 이야기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 이야기예요. 예수님은 나중에 신약에 오죠. 지금 우리는 신명기를 보기 때문에 예수님은 빠집니다. 예수님 대신 주의 이름이 들어가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의 특징이 뭐냐? 형상이 없다는 거예요, 형상이 없다.

주의 이름이 형상 없이 이스라엘과 함께,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함께 했다는 말은, 모든 이방민족이 왜 천국과는 관계자 외인가? 그들은 형상을 가진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래요. 형상, 형상이란 말은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형상의 시작은 뭐냐? 거울 보면 누구의 형상이 있죠? 나죠.

그래서 모든 인간들의 우상은 ‘나를 신으로 만드는 중간과정’에 들어갑니다. 나를 신으로, 나를 형상화 시키는 거예요. 형상은 히브리어로 첼렘(צלם)이라고 하는데, 형상은 눈에 보이죠. 보이는데, 본인이 본인의 형상을 보는 것은 거울에 비치는 건데요. 사실은 그런 점이 좀 어려운데, 형상은 내가 보는 게 아니에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상이에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러면 내가 아는 형상은 남들이 나를 보고 평가 내린 것들의 수집이 나의 형상이에요. 누군가 나에 대해서 뭔가 평을 해주고, 너는 이런 사람이라고 해줘야 우리는 그걸 가져다가 내 형상으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어릴 때부터 부모가 아이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아이의 자아의식은 가까운 부모가 이야기하는 대로 자기가 그렇게 억지 부리면서 구성해 나가는 거예요. 상당히 억지에요, 억지. 그래서 친구라는 영화에 보면 담임 선생님이 조폭 아들 붙들고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뭐라 합니까? “너 왜 행동 이렇게 해?” 라고 묻는 게 아니죠.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이렇게 묻죠.

너를 이런 행동을 해도 그걸 잘했다고 하는 느그 아부지가 도대체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에 이런 행동이 용납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너를 규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야. 너를 키워준 네 부모가 규정한 것이 그대로 너의 형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형상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게 없죠.

형상이 뭐냐? 태도, 행위, 마음가짐, 이게 형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 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고 난 뒤에 뭘 만들죠. 신을 만든단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때 70만 이스라엘의 일부라 생각하고, 모세가 말도 안하고 후다닥 산 위로 갔다고 칩시다. 여러분들도 거기에 섞여 있습니다. 각자 제안을 하는 거예요.

여호와라는 신을 우리가 믿고 왔는데, 여호와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각자 의견을 한 번 내보자 할 때, 여러분은 무슨 의견을 내시겠습니까? 어떤 의견을 내겠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 때, 우리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느냐 이 말입니다. 피조세계에서, 가까운 피조세계에서 아이디어를 얻겠죠.

그 피조세계가 한 둘입니까? 어디서 얻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손들고 “예, 우리 하나님은 용감합니다.” 그러면 아론이 듣고 ‘첫 번째 요건이 용감하다.’ “또 없습니까?” “자비롭다.” “오케이,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자비롭다.” “튼튼하다.” 어떤 사람은 “귀하다.” 튼튼하다, 귀하다, 용맹하다, 자비롭다, 네 가지 요소를 다 합치면 뭐가 됩니까?

귀하기 때문에 뭐로 만들어야 돼요? 나무로 만들어야 돼요? 아니죠. 금으로 만들죠. 돌진한다, 이건 뭐 거침없는 소지요. 튼튼하다, 소. 그리고, 소는 뭡니까? 인간이 부리는 대로, 하라는 대로 잘 따르잖아요. 자비롭고 어질죠. 그 네 가지의 형상을 조립해서 나온 게 뭐였다? 황소. 그런데 이것이 그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이미 애굽에서 황소를 섬겼어요. 황소를 신으로 섬겼다고요.

왜 애굽에서 사람들이 신을 섬겼느냐 하면, 신을 섬겨야 인간의 말을 듣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인간은 궁금하다. 뭐가? 내가 궁금하다.> 내가 궁금한 거예요. 네가 왜 궁금하냐? <나는 나에게 신>인데, 절대 신이거든요. 나는 나에게 신인데, 최고의 가치가 있어요.

신인데, 이걸 형상화 시킬 때, 신인데 그 신하고 나하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마주해서. 중이 부처상을 만듭니다. 부처상을 만들고 그 부처를 가만히 놔둡니까? 안 그러면 늘 대화합니까? 새벽부터 촛불 켜고 염불하면서 대화하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가 필요한 거예요. 부처가.

원래 싯다르타, 원래 최초의 불교는 그런 거 하지 마라 했거든요. 왜 하지 마라 하나? 나는 내 안의 내면의 나와 대화하면 되지, 그딴 거 필요 없다 했는데, 그건 도가 튼 부처나 가능하지, 이건 쪽수를 모으려니까 이게 쪽수가 안 되는 거예요. 도 닦는 것도 뭐 이게 몇 명 중에 한명도 안 되니까. 교인수가 얼마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면에 있는 내 신을 고상하고, 착하고, 어질고, 위대하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을 뭐 하나 형상화해서 그걸 모양을 만들어서 앞에 놓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대화하기가 무척 쉬워요. 집에서 혼자 앉아서, 누워서 하는 것보다 절에 가서 108배하면서 하는 것이 훨씬 마음에 안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내용을 꽉 압축을 해보면 남는 것은 뭐냐? ‘그래, 내가 신이야.’ 이거에요.

내가 신이라는 그 자기 확인, 자기 증명을 하면서, 그 높고 험한 절에 가서 내려오면서는 룰루랄라 노래 부르면서 내려오는 거예요. 요새는 자가용 타고 내려오지만. 그 불교 하고 기독교 하고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똑같아요. 이게 똑같아요. 천주교에도 묵주 땡기면서, 묵주 없이 기도하면 안 되잖아요.

안방에 보면 마리아상 있잖아요. 마리아상 있는 것하고 없는 것하고 천지차이에요. 촛불은 없어요, 요즘. 화재 나서 아파트 홀랑 다 탈 수가 있다고. 묵주 땡기잖아요. 땡기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기도는 뭐다? 호흡이다. 기도를 하면 숨이 막혀 숨을 못 쉴 정도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 버티기’ 거든요.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예요.

따라서 세상이 나를 안 알아줘도 누구는 알아줘야 돼요? 내가 나를 알아줘야 내가 그나마 하루하루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는 호흡인가? 뒤를 높여서 제가 물었어요. 호흡이라고 말 안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그렇게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형상화 시키는 겁니다.

우상이 형상화되는 방식을,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한 번 적어볼게요. <예언자> 구약의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엄청 많았어요. 선지자 학교 있어가지고, 예언자 양성소가 있어가지고, 엘리야, 엘리사부터 굉장히 많았습니다. 일종의 공무원들이에요. 시험 쳐서 합격하면 나라에서 정기적으로 보너스 나오고, 월급 나와요. 그래서 예언자 되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시인> 그리스에서는 예언하는 사람들이 시인이었어요. 옛날 그리스. 그 시인을 보좌하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주로 <신탁, 점쟁이, 우상숭배, 영매, 점성가, 계시 받은 성자> 계시 받은 성자는 스페인에 많이 있어요. 그래서 스페인이 중세 때부터 관광산업이 발달했어요.

왜냐하면, 동유럽에 있는 사람이 스테판 성자부터 해서 예수님 제자부터 해서 죽은 자들이 스데반 집사도 거기서 죽었다, 처음엔 이렇게 하다가 열 두 제자의 유골을 유명한 교회가 그걸 수입 해다가 각 교회에다 그걸 안치를 해요. 돈 많이 주고 사요.

돈 주고 사게 되면, 그 지역에 있는 체코나 헝가리, 오스트리아의 그 큰 예배당, 성당에 그 지역의 신자들이 이 영험한, 그러니까 절에서 부처의 사리를 분배, 할당 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부터 해서 쫙 해놓으면, 특히 그런 거 하면, 나중에 예배당 짓고 나면 운영비가 빠져요. 귀족들이 그걸 원했다고요.

특히 그 유명한 성자들을 옹립한 이유가 성자들을 옹립해야 성자들을 중심으로 예배당이 계속 세워지는 거예요. 그게 많은 데가 바로 스페인 순례 코스가 됐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스페인이 관광산업 하는 거예요. 거기에 한 번씩 갔다 와야 신앙이 좋아지는 거예요. 지금 이슬람 성지순례 하다가 1200명 죽었는데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 갔다 오는 것처럼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그들이 또 계시를 했거든요. 계시 받은 성자. 그 다음에 <귀신들림, 타로 카드, 위저보드> 위저보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17세기에 나온 널빤지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는 널빤지, 없는데 글씨가 막 나오는 것, 그게 아니고 Yes냐 No냐 써놓고 알아서하는 거예요. 서양에서는 많이 해요.

그 다음에 <교주>신천지 같은 교주, 위저보드는 어디서 많이 하느냐? 심령 대회용,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들이 테이블 하나 놓고 여자 마법사 비슷하게 복장 차려놓고 ‘여기 지금 신이 임하십니다.’ 여자 머리에는 옛날 할머니들 쓰는 것 비슷한 모자 하나 쓰고 ‘신이 여기 임하십니다.’ 하면, 갑자기 진동이 일어나요. 그러면서 덜덜 떠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건 지금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페요테> 페요테는 멕시코 서쪽에, 남미 쪽에서 하는 건데, 마시면 취해버리는 이상한, 사람이 뿅 가게 만드는 음료, 술 같은 거, 최음제 같은 거, 사람이 정신적으로 취해버리는 그런 거. 그러면 뭐가 나오겠어요? 환상이 나오겠죠, 환상.

이것은 바로 사울 왕이 엔돌의 무당한테 갔을 때에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사울왕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왕인데, 정확하게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지금 계속해서 왕인지, 아니면 내가 왕 그만둬야 되는지, 지금 내 위치가, 상황이 어떤지 모를 때는 그냥 하나님께 물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누구를 거쳐서 묻는다는 거예요.

누구를 거쳐서 묻는가? 누구를 거쳤든 그게 아무 소용없이 나는 뭡니까? 나는 내가 궁금한 거예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서 궁금한 게 아니고 내가 신인데, 이미 전제는 깔렸어요. 내가 절대자인데, 내 판단은 옳은데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옳고, 의롭고, 거룩한데, 그리고 정확한데, 과연 그런지를 뒤풀이 하듯이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자들은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귀신 들린 자예요, 인간 자체가. 본인 자체가 귀신 들린 거예요. 귀신 들린 자가 귀신 들린 자를 찾고 있는 거예요. 이런 자들 속에 뭐가 들어 가냐 하면, 이스라엘이 드디어 거기를 통과하는 거예요. 발람 선지자 통과하듯이 그걸 통과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통과 시키는가? 차이점을 보는 거예요.

어떤 차이점? 인간 세계는 본인들이 신이에요. 이걸 보통 우상숭배라 하잖아요. 우상숭배라 하는 것은 이거에요. 바로 <소유욕>입니다. 소유가 있어야 자기 존재성이 구축이 돼요, 소유가 있어야. 내가 어디까지 배웠고, 어느 대학 나왔고, 애는 몇 명이고, 내가 돈은 얼마 있고, 몸은 건강하고.. 뭔가 내게 속한 내 것이란 게 있어야 내 존재가 확립이 된다니까, 내 존재가.

그러면 내 것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이게 바로 인간의 시간론이에요, 시간론. 인간의 시간론. 과거부터 내가 애쓰고 노력한 게 축적이 되어서 그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되면 지금 나의 존재는 절대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있기까지 고생을 지독스럽게도 많이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우상화>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방 민족이 전부다 나의 우상화가 되지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신명기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한 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냐 하면, “나를 사랑하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돼 있죠. 이 사랑이라는 말의 반대가 뭐냐 하면, 우상숭배예요.

우상숭배에 뭐도 포함돼 있다? 나의 소유도 포함돼 있다. 나의 존재도 포함되지요. 왜? 내가 신이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딱 나와 있어요. 사랑이란, 나를 미워하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것. (요12: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넌 아니야. 너 아니야.” “하나님 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너 아니야. 너는 관계자가 아니라 출입 금지야. 너는 안 돼.” “제가 어떻게 하면 성령 받겠습니까?” “너 아니야.” “어떻게 하면 말씀 지킵니까?” “너 못 지켜. 너 아니야.”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겁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나왔는데, 없다는 말을 더 정확히 하면, 저주 가운데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그게 ‘겨우’입니다. 어디 나오냐 하면, 22절에 나와요. 신명기 10장 22절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하늘의 별 같다는 뭐가 생각나죠? 창세기15장 생각나죠.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미 나이도 많고, 자식 낳을 수 없어요. 자기 부인도 나이가 많았어요. 나이가 많다 정도가 아니고 아예 태가 죽었어요. 로마서 4장에 의하면 태가 죽었어요. 아기를 못 낳는다는 것을 충분히 다 했습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시간은 끝이 났어요.

나는 누구냐? “너 죽은 자야. 너 죽은 자야. 그렇게 궁금해?” “궁금합니다.” “너 죽었어.” 이거에요. 내가 죽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언약을 경유해서 하나님께 오도록 하나님 쪽에서 조치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가서 믿게 하는데, ‘믿습니다!’ 한다고 믿음이 아니고, 언약 속에 기어들어올 수 있는가? 이걸 묻는 거예요.

언약 속에 들어오면 믿음이고, 그 언약 속에 못 들어오면 믿음이 아니에요. 이 언약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형상입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 15절에 나와요.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이런 이야기는 이미 인간들이 자기가 우상화 시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형상을 눈에 보이는 식으로 자기 형상을 하나 만들어 놓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그냥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일단 머릿속에 상상해서 이미지를 그려 놓고, 뭐 수염이 났든 안 났든, 키가 몇이든 그런 게 있잖아요.

예수님을 흉측하게 상상하는 사람은 없어요. 대부분 예수님의 형상은 송중기, 그 다음에 우리나라 유명한 이병헌, 현빈 같은 잘생긴 남자, 꿈에라도 한 번 사귀고 싶은 남자, 그런 것들보다 더 잘생긴 모습, 그게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모든 인간의 상상하는 형상은 자기가 너무 마음에 드는 자기하고 해야 그게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뭐냐? 인간은 이미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요. 누구냐? 나는 나를 믿고, 나는 나를 소망하고,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해 놓고 오늘 신명기 10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런데 아까 언급했듯이 하나님 쪽에서 내민 형상은 언약이라 했죠. 그런데, 언약은 그야말로 약속이에요. 형상,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아직 신약이 아니니까, 예수님이 아니니까, <태도, 행위, 활동>으로 바꾸십니다. 형상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요.

이게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형상 나오죠?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완전히 십계명 지키는 것 하고 완전히 상관없죠.

네가 십계명 지키나, 안지키나 상관없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준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태도와 행위와 활동입니다. 그 대상은 있어요, 없어요? 대상은 없어요. 인간 중에는 없어요. 인간 중에는 하나님이 긍휼과 은혜 줄 자가 없습니다. 없는데, 주께서 언약을 가지고 만들어가요.

그러면 그 언약의 대상은 언약 속에 들어있다고 보면 돼요. 하나님의 언약 속에 언약이 들어 있는 거예요. 계란 속에 닭 있죠. 닭이 나오죠. 언약 안에 예수님 들어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주의 이름을 지상에 보내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과 대화하는 그 관계가 언약이에요.

그 이름이 나중에 형상화되기 위해서 차용된, 동원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가만있는데 덤으로 어떤 혜택을 입느냐 하면, 긍휼과 은혜를 입어버려요. 자기 안에 들어있는 그 무엇, 미지의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혜와 긍휼을 그들은 덩달아 받게 된 겁니다.

그것이 약간의 동물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출애굽 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출애굽이 새로운, 이건 참 어려운데..이건 두 번째 시간에 하고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그건 어려운 거고, 그게 여호와의 밤이거든요. 이제는 유월절 날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캘린더 새로 제작해요. 그 날이 첫날이에요.

그러면 시작이 언약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일이 그 전에 출애굽 이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창세기 46장 27절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 신명기에 나왔던 70명이 그 70명입니다.

근데 신명기에서는 앞에 부사로 뭐가 붙었죠? “겨우” 70명이었다. 그러니까, 70명 가지고 뭘 하겠다는 말이냐? 그러나 70명이지만 하나님의 태도와 긍휼과 자비, 그걸 보란 말이죠. 70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으니까 하늘의 별 같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하늘의 별과 같이.

그러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졌으면, 언약이 투입돼서 별과 같이 많아졌으면, 이 70명 자체가 언약의 취지를 잊어버려선 안 되죠.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이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그 태도는 뭐냐?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거예요.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니까 어떻습니까?

이거는 이스라엘이 뭘 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이만큼 된 거죠.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창세기 47장의 요셉까지 이어집니다. 아브라함 동원 시키고, 이삭 동원시키고, 야곱 동원시키고, 요셉 동원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기 형상이 집단화 될 때, 그러한 취지가 계속 살아있는 집단은 어떤 집단인가를 주께서 일을 개시를 한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형상과 대화하고 싶다, 자기 아들과 대화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출4: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자,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 보기에는 윤리, 도덕처럼 들리죠.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런데 그것은 그전의 십계명에 의하면 “우상숭배하지 말라” 와 통하는 거예요. 적어볼게요 <하나님을 사랑하라=우상숭배 하지 말라> 둘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게 뭐에요? 요건 응용문제인데 맞춰보세요. ’이웃을 사랑하라‘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찾아야죠. 이게 뭐냐 하면, <진멸>이에요. 다 죽여 버리는 거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이웃을 다 죽이는 거예요. 이웃만 남기고 다 죽이는 거예요. 관계자 외에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신명기 10장 18절 19절을 보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뭐 되었다?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출애굽의 취지를 잃어버리면,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출애굽은 그 때 유월절 날, 홍해 건너온 날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to be continued 계속 출애굽이 이어지는 거예요. 출애굽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출애굽이 이어진다는 것은 분리, 천국의 관계자와 관계자 외를 계속해서 주께서 지금도 둘을 가름하고 계시는 거예요.

구분하고 계시는 작업이 지금도 쉬지 않는 거예요. 출애굽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구원이냐, 출애굽에서 구원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게. 구원이란, 출애굽하고 같은 말이에요. <출애굽이란, 언약이 없는 자에게 언약을 집어넣는 작업>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게 출애굽이에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은 안에 출렁출렁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출애굽 취지가 들어있는 거예요, 출애굽 취지가. 우리는 내가 우상이었는데, 죽어 마땅한데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내 안에 들어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출렁출렁 들어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풍선에다 물을 반만 넣어보세요. 반 넣고 난 뒤에 풍선 주고받고 하면 뭡니까? 이게 출렁출렁 덜렁덜렁 하면서 주고받죠.

성도가 그런 거예요 성도 안에 출애굽 정신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정말 율법사가 질문할 만 해요.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굽니까?” 라는 질문으로 바뀌었잖아요. 그 바뀐 질문을 한 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요.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씀에 대해서 율법사가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고 한 거예요.

지금 이 율법사의 잘못은 뭐냐 하면, 본인이 우상숭배자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나온 질문입니다. 지금 내가 나+율법을 지키면 나는 구원받는다는 공식을 고집하고 있어요. 이걸 고수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니까. 이거는 너무 당연하니까, 이건 뭐 하자나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위치를 바꿔요.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으로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나오는 이웃은 이렇다 로 답변해요. 이미 율법을 완성한 나에게서 나오는, 이웃을 사랑하라의 완성체인 나가 내놓을 수 있는 이웃은 어떤 태도와 어떤 행위와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나 이 율법사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남들의 평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좋게 평가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질문을 한 거예요. “나 구원 받은 사람 맞죠? 율법 지킨 사람 맞죠, 그쵸?” 그걸 염두에 두고 질문을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위치 조정을 하는 겁니다. 너 말고, 율법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니까, “너 말고, 네가 다룰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내가 할 것이다.” 라고 내놓은 예가 뭐냐, 바로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는 거예요.

강도 만난 사람이 이웃입니까? 아니죠. 이웃이라 하는 것은 그 관계망 자체에서 이웃이 나와야 되죠. 한 쪽은 어떤 역할을 하냐 하면,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역할을 해야 돼요. 그 역할. 또 한 쪽은 뭐냐? 강도 만난 사람 보고 그냥 지나간 두 사람 등장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그냥 내가 강도 만난 사람이다 하면 간단할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해요, 복잡하게. 위치가 바뀌기 때문에. 그럴 때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제사장, 레위인의 바로 그러한 태도, 결정에서 우리가 못 벗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돼요, 염두에 둬야 돼요.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그냥 지나갑니다.

“그 선한 사마리아인 있지 않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인간은 없어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들도 선한 사마리아인을 흉내 낼 수는 있어요. 내가 목산데, “지난 주일에 선한 사마리아인 설교 해놓고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만나게 했구나. 바로 내가 도와줄 이때를 위함이다.” 하면서...이건 뭐를 전제로 한 거예요?

내가 궁금한 거예요, 내가. 우리는 내가 궁금하면 안돼요. 나는 이미 끝났어요. 나는 애기 못 낳아요. 이미 사래에요. 사라도 아니고, 사래에요. 이미 끝났어요. 애기 못 낳아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 형상에 미쳐있는데 뭘 해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주께서는 여기서 주께서 일을 벌여서 긍휼과 은혜를 여기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은혜와 긍휼을 만들어내는 현장, 그 공장, 현장 용도로 우리는 쓰일 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내 배 째세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배 쨌나?” “배 쨌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너에게 습격할 거야. 선한 사마리아인이 습격할 거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상하게 자기에 대해서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특징이.

심지어 자기 소유까지 줘버려요. 자기 소유가 있어야 존재가 되는데, 소유를 넘겨줬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에 대해서 포기한 거예요. 이거는 자기 미움, 자기가 너무너무 미울 때나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게. 자기 자신이 미울 때. ’나 고만 살래.‘ 이럴 경우에나 가능하다 이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형상, 아까 언약이라 했죠. 언약이 들어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형상이 들어있는 자와 들어있지 않은 자한테, 통해서 주님께서 성도한테 형상을 줌으로써 계속 출애굽의 그 갈라짐, 애굽인이냐, 이스라엘이냐는 그 갈라지는 작업을 계속해서 지금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하고 대화하거나 말을 할 때에, 이러한 모습이 계속 나와요. 다시 한 번 질문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이 뭡니까? 바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진멸당해야 마땅함을, 평소에 뭘 해도 그게 나오면 돼요. 수박 먹을 때도 “진멸 당하게 좀 먹어볼까? 뭐, 진멸당해도 마땅한데 오늘도 뭔들 못해?”

진멸 is 뭔들. 진멸 당해야 마땅한데 뭔들 못해? 그게 뭐 말로 나오는 게 아니고 평소에 행동으로 나오도록 배후의 성령께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사랑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일체 피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일체 해주지 않는 거예요.

“진멸 당할 것이 어디서 이게 배불러 가지고 뭘 달래? 진멸 당할게?” “엄마, 사탕 500원” “진멸 당할 것이!” “엄마 계란 삶아줘” “진멸 당할 게 어디 계란을 삶아 달래?” 애가 삐져 있으니까 “옛다, 계란 삶은 거.” “엄마, 계란 삶았네~” “감사함으로 받아라.”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 아는 그것, 그것은 바로 이웃사랑으로 주어진 주님의 복입니다. 그래서 여기 13절에 ’행복‘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냥 복이에요. “하나님께서 네게 복 준다.” 관계자에게만 복을 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는 사람.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이 세상은 전부 우상 천지다.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과정을 제가 복잡해서 설명을 안했는데, 과정까지 포함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신이 되는 그 과정에 자기 공고히 함의 절차를 반드시 거치게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자폐증 증상을 보이는 겁니다.

계속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요, 계속. 그 안에서는 자기만 있으면 돼요. 자기와의 대화. 모든 대화를 단절하고, 자기 공고화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요? 점점 더 딱딱해지겠죠, 자기가. 자아의 고체화. 자기가 액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니고, 고체화. 딱딱해지는 거예요. 자기가 딱딱해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백화점의 고급 가방이나 옷을 사면서 그걸 실제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눈으로, 좋은 가방 사면서 내가 이 가방을 가질 만 한 자격이 돼. 내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야. 내가 나한테 주는 보너스야. 이런 작업에 들어가요. 이게 오늘날 2,30대에요. 40대는 애 낳아서 안돼요. 애 낳으면 끝났어. 2,30대 결혼 안 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회 전체가 이런 식으로 변화되고 있어요.

자기한테 축하하고, 자기한테 친절하고, 그래서 자기가 점점 더 고정화되는 거예요, 딱딱해지는 거예요. 직장에서 이렇게 못한다 하면 직장 때려치워 버려요. 직장 때려 치우고 뭐 유튜브 한다고 하고 돌아 댕기고, 하여간 자기 세계로 매몰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확인하는 거예요. 나는 뭐든지 내가 판단해서 내가 알아서 하는 거 맞지? 맞지? 본인이 계속 판단하는 거예요. 본인 자체가 이미 신이고, 우상이 된 시대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그들에게 해 줄 상담은 간단해요. “너는 이 상태가 이미 죽은 거다.” 이게 바로 죽은 상태다. 인간은 이미 죽었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너한테 임해야, 네가 되는 게 아니고, 네 속에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 너는 이제는 그 은혜를 증거 하는,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더 이상 나의 증거는 포기되고, ’주님이 나를 살렸다‘를 증거 하는 증인 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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