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복 속의 환란

아빠와 함께 2024. 5. 28. 22:27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8강) 고후4:8(복 속의 환란) 20240527b(강의: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p.108 위에서 7번째 줄에,【구약의 복 내림은 중심을 갖고 있다.】‘복이 나한테 오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복이 오되 중심을 향하여 복이 온다. 중심을 향하여 복이 오고 그 중심에서 온 복을 인정 못하게 되면 그 중심에서 저주가 오게 되어 있죠. 복과 저주는 함께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역시 중심되시는 분에게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나 복 받았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문하게 돼요. ‘왜? 왜? 왜 저한테 복을 주죠? 제가 뭐 했는데 왜 복을 주죠?’ 그 중심을 보면, 맞아요. 내가 뭐 한 게 없어요. 한 게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복의 종이 됩니다. 노예가 됩니다.

노예라는 표현은 상당히 부정적인 표현이에요. 나쁜 표현으로서 계급사회에서 제일 하층민을 노예라고 규정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노예가 되고 싶지 않고 여유만 있다면 주인이 되고 싶어 하죠.

종(노예)의 특징은 이거에요. 자기 것이 전무(全無)함. 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노예의 특징이에요. 첫째는 자기 것이 없고, 두 번째 주인이 존재함. 주인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주인의 역할은 뭐냐? 나의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매일같이 내 것이 되는 것을 몽땅 자기(주인) 것으로 빼앗아가는 그 일을 해줘야 그게 주인이 되는 겁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것은 뭐 종도 이런 종이 없죠. 최고의 노예죠. 그리고 달란트 비유에서 충실한 종들 보세요. 주인이 있든 없든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인 것이니까 주인의 지시가 주인의 것에 같이 묶여있다고 보는 거예요. “제대로 일해라.” “예.” 그 증거는 뭐냐? 주인의 것이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신의 몸과 자신의 목숨도 자기 겁니까, 주인 겁니까? 주인의 것이니까 그것이 주인을 위하여 쓰여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이별해야 되죠. 자기 자신과 헤어져야 돼요. 내 것에서는 내가, 주일 오후 설교에서 박멸되어야 된다 했죠. 내가 없어져야 참, 이건 내 게 아니고 주인 것이라는 것이 새롭게 인식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림 뭐 동양화를 그린다. 상장 최우수상을 준다. 참 이거 내가 그린 게 아니지, 이런 거요. 모든 상황이 그건 너무 자연스럽게 쉽게 나오는 거니까…. 수박 하나 샀다고 나온 게 아닙니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이 관계, 나로부터의 벗어남 자유라고 합니다. 내가 챙길 나가 없어진 상태, 나는 주인이 챙겨주는 상태, 이걸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는 단독으로 설치는 걸 자유 개념이라 하지 않아요. 어디에 예속되었었는데 이제는 어디에 예속되었다. 둘 다 예속된 거예요.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지금은 의의 종이라는 거예요.

의의 종일 때, 이 의가 종의 소유가 아니고 종을 종으로 여기는 주인의 소유에 의가 있는 겁니다. 굳이 내가 의를 가질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주인과 종의 관계가 돈독한 관계에 놓여있을 때 나오는 고백이에요. 내가 의인이 될 필요 뭐가 있습니까. 주님만 의인이면 되죠.

주님만 하시는 일이 나를 끊어내는 저주의 일이라면, 오케이! 주인이니까. 주인은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게 바로 로마서 9장 3절에 나오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내가 단독으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내가 단독으로 있으면서 ‘주인은 나한테 어떤 걸 주었을까’ 그걸 챙기고 계산하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 종의 위치가.

따라서 아브라함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만큼 얘기했으니 알았죠. 아브라함은 주님(나)의 종 아브라함이다. 그걸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선택. 자기 것을 자진해서 없앨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자기로부터 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택 개념이 여기에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선택 개념이 어떻게 우리의 자아를 내 몸으로부터 기존의 자아로부터, 마귀의 종이죠, 어떻게 이걸 떼어 낼 수 있는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가? 그걸 이제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민수기 21장 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그다음 8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지금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종이란 뜻은 이스라엘 대표자 되는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세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돼요. 지팡이가 자기하고 나란히 가잖아요. 자기가 지팡이를 들고 있을 때에, 자기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게 아니고 지팡이가 자기를 지팡이로 여기고 지팡이 삼고 있는 거예요. 지팡이를 통해서 주어지는 일에 자기는 지팡이처럼 다루어져야 되는 대상이라는 것을, 자기 옆에 있는 지팡이로서 늘 보고 있는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모세가 성질나서 자기가 지팡이의 주인인 줄 알고 지팡이가지고 반석을 두 번 쳤잖아요. 그걸 주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네가 뭔데 내 앞에서 네가 내 주인노릇 하느냐. 너는 나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데 마치 모세 네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인 내가 시킨 대로 해야 되는 종의 위치처럼 네가 백성들 앞에서 총회 앞에서 그렇게 주객을 바꾸도록 너는 그런 행동, 그런 조치를 했다. 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건 계획된 거예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 모세가 못 들어가지만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주인입니다. 누구냐 하면 여호수아에요. 모세에게 주어졌던 모세 언약을 여호수아가 그대로 인수받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모세도 들어가고 여호수아도 들어가고 그럴 필요조차 없어요. 그건 비효율적이에요. 모세는 백성들의 범죄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줘야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단(斷)면이 되려면 찢어짐이 있어야 되거든요. 찢어짐이 없으면 단면이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멀쩡할 때와 찢어짐. 두 가지를 위해서 찢어짐은 누구 역할이냐? 같은 모세 율법이지만 모세 언약이지만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찢어져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것은 모세가 자기 목숨을 다 바쳐서 보여줄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것. 못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가 있어야 되고, 여호수아는 ‘아, 이런 경우에 못 들어가는구나.’를 품고 자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모세 언약은 여호수아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고 모세부터 시작하죠. 그러면 모세 언약 내용의 출발점은 뭐냐? 못 들어가는데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야 돼요. 못 들어가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고, ‘못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것은 인간의 한계 너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다른 요소가 따로 있는 겁니다.

민수기 21장을 잠시 두시고 그전에 먼저 봐야 될 것이 있어요. 신명기 27장이요. 민수기 21장은 두시고 신명기 2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역시 모세 언약에 관한 건데요. 모세가 살아있을 때 이 언약을 받았습니다. 아직 여호수아는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물론 그전에도 시내산 올라갈 때 모세와 여호수아가 함께 올라갔어요. 여호수아는 중간에 놔두고 자기 혼자 단독으로 올라갔는데, 신명기 27장 1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그다음에 보세요. 2절부터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고 되어 있죠. 건넌 후에 세워질 그 돌에 무엇이 기록됩니까? 율법이 기록되죠. 그럼 그 땅은 사람의 땅입니까, 율법의 땅이에요? 율법의 땅이에요. 율법에 준해서 완성될 분이 약속의 땅을 구현하게 될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산다는 것은, 또는 사는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 조건이 뭐냐? 우리가 훌륭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고 뭐를 지켜봐야 돼요? 우리와 함께 들어온 율법이 완성의 때를 봐야 돼요. 그 율법이 약속의 땅을 통해서 완성될 때, 우리를 제키고 율법이 알아서 완성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아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3절에 보면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어느 산에 세우라 했습니까? “에발 산에 세우고”

에발 산이 저주 산이거든요. 이미 그들은 실패했다는 것, 저주받아 마땅함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인간은 안 되고 말씀은 된다 그겁니다. 인간이 말씀 되는 게 아니고 인간은 말씀을 지킨다,가 아니라 인간은 안 되고 못 지킨 말씀은 말씀 스스로 되게 되어 있어요. 말씀 자체가 새로운 인격자 되시는 말씀의 완성자, 메시아를 말씀이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광야 40년 동안 그들이 범죄하고 하나님께 죽음을 당하는 것은 말씀 완성 절차상 당연한 거고 필연적인 거죠. 필연적인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보세요.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이 임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지키면 완전히 힌두교 돼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임한 거예요.

말씀이 임했으면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말씀이 우리의 주인노릇을 하고 우리는 종이 되겠죠. 그럼 종의 완전함? 그것은 누구 몫이냐 하면 말씀의 몫이에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종으로 완전토록 하는 겁니다. 말씀을 완전토록 할 때 요소가 뭐냐? 우리가 찢겨져야 되고 우리가 범죄해야 되고 우리가 망해야 되고 우리는 배신해야 되고 우리는 마귀자식이 되어야 되고 어둠의 자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은 필연적인 겁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어야 되고. 그런 것도 필연적이죠. 그래서 ‘너 죄의 종 할래, 의의 종 할래?’ 우리보고 선택하라든지 고르라든지 결정하는 그런 식이 아니에요. 방식이. 말씀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고 다시 민수기 21장 봅시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한테 묻지 않고 모세가 돼서 일방적으로 가는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해서 불뱀에 물렸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쳐다보면 효과 있는 효험 있는, 불뱀에 물려 퉁퉁 부은 자가 건강하게 되는 효과 있는 장대를 만든다고 한다면 그 장대에 여러분들은 어떤 이미지, 어떤 형상을 새기겠습니까?

뱀보다 더 센 걸 해야 될 게 아닙니까? 붙어라, 붙어라. 뱀보다 더 센 게 누구죠? (용) 용이나 뱀이나 같은 한통속이죠. 개보다 더 센 자가 누굽니까? 강형욱. 개 대통령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 모세라면 뱀을 잡는 천사를 새겼을 거예요. 천사. 뭐 100프로입니다. 내가 동유럽에 갔다 왔으니까. 동유럽에 있는 모든 천장의 프레스코화 그림들이 천사로 가득 차 있다 했잖아요. 앞에 제단에 보면 천사 그림 있고요. 동상, 흉상, 조각상 전부다 천사들이에요. 천사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들아, 와서 천사보고 힘내라. 천사를 쳐다보는 자는 너희가 나음을 얻으리라, 이런 거예요.

그런데 모세는 무슨 형상을 만들었습니까? 천사가 아니고 불뱀을 만들었잖아요. 불뱀을. 불뱀을 어떻게 하라했습니까? 어떻게 보라? 쳐다보죠. 쳐다본다는 말은 뭐냐? 내 본질과 나를 물려죽게 했던 그 뱀과 본질이 일치하고 동일하다는 거예요. 내 자신이 누구냐를 먼저 아는 자만이 말씀의 세계에서 종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말씀을 드러내는 종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증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천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천사를 만든 게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요한복음 3장을 생각해봅시다. 메시아가 왔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했던 메시아는 어떤 모습이겠어요? 로마로부터 이길 수 있는 승리자에 해당되겠죠.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했잖아요. 그렇게 되어 있죠.

그렇게 된 이유가, 주님께서 뭘 했느냐 하면 요한복음 16장 33절 봅시다, 이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는 거죠. 아까 14장에 평안 이야기했죠. 이제 16장 33절,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뭘 당한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무엇을 경유하게 해요? 환란을 경유하게 하죠. 환란이라는 것은 이 세상 계급사회에서 환란은요, 승자가 겪는 것이 아니고 그 승자한테 짓밟힌 패자가 당하는 상태가 환란이에요. 다 빼앗기니까. 내 게 없으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게 없는 게 제일 싫어요. 어제 오전 오후 설교에서도 다 이야기했어요, 중요해서. 인간은 왜 사느냐 하면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나의 도덕적 윤리성이 이만큼 정당하다는 자기 증거를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시중에 나쁜 놈 나오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걸 보면서 뉴스 듣는 순간, ‘나는 그런 짓까지는 안 했다.’ 이 말. 나는 그런 짓까지는 안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불쑥 나와요, 그게. 자동적으로 나온다고요. 어떤 사람은 돈만 챙기고, 어떤 사람은 뭐 가정을 두고 바람을 피고, 이렇게 나올 때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어떤 식으로 산다? ‘적어도 짐승은 되지 말아야 된다. 사람 할 도리는 하고 산다.’ 그 안에서 자기는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예수 안입니까, 아닙니까? 예수 안이 아니고 어디 안이에요? 내 안에 살죠. 내 안에 살아요. 뭐 지옥 100프로입니다. 지옥 100프로에요. 이렇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다 그래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사람 사는 보람은 남이 나를 인정해주는 그것으로 살아요. 그것으로 산다고요.

남편 일찍 죽고 혼자되었을 때에 그걸 뭐라 하죠? 고아와 그다음 뭡니까? 과부, 나그네죠. 살 때 그 과부된 자의 마음가짐이 어떤 마음가짐이냐 하면 내가 남편 없이 혼자 산다 해서 막 가지는 않았다는 것이 스스로 자기한테 규약이 돼요. 법이 돼요. 그러니까 내 주인은 여전히 나다. 내가 주인이다. 남편 잃어도 지옥 가는 겁니다. 남편 잃었지만 자식은 잃었지만 뭐는 안 잃었어요? 자아를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남편 잃음으로써 자아가 얼마나 내 중심이었던가가 도리어 환하게 드러나게 된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떤 사태, 어떤 조치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달라질 게 없어요. 시어머니가 아프든 건강하든 아무 상관없어요. 내가 여전히 주인공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내 안의 세계에요, 내 안의 세계. 이게 지옥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복을 주는 것은 뭐냐? 어떻게 지옥에서 예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이 문제에요.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내 가정에 내 인생에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소용없어요. 절대로 예수 안은 못 들어가요.

우리가 뭔가 자꾸 지킬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요. 지킬 것을. 남한테 인정받을만한 것들을 계속해서 수집하고 그걸 지켜낸다니까요. 뭐라고 하면,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 정도로 막가지는 않았다. 그건 개지.” 이러는 거예요. 그럼 그게 개라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뭐에요? 옆에 있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럼 나 지옥 간다는 말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여인은 자진해서 자기를 개라고 했잖아요. 주님 앞에서. 그런 고백을 왜 우리는 못하느냔 말이죠. 누가 문제에요? 우리가 문제인 거예요. 그런 고백을 못한 우리가 문제라고요.

특히 여자 분들이 시집와서 그 시집의 분위기가 나를 인정해주는 새로운 배경으로 자리 잡아요. 그 구조로 자리 잡아요. 그저 남편만 사랑하면서 살면 되지. 아니에요. 남편 집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새로운 자아구축에 대해 동기를 제공하는 겁니다. motivation을 제공하는 거예요. 아,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그런 걸 제공한다고요. 그런 것은 ‘자아 안’ 정도가 아니고 시집 안. 시집 안이죠.

옛날에는 시집 안이 자연스러웠어요, 여자한테. 그래서 어떤 분은 남편이 바람나서 가버렸어요. 그런데 혼자 남아있는 여자는 남편이 바람나도 꼭 시집 제사 다 챙기고, 지가. 시집 어른들 다 챙겨줘요. 왜 그러냐 하면요. 그 사람은 시집와서 자아를 잃어버렸어요. 남편은 바람나서 다른 여자랑 살림 차려도 나는 이집 사람이라는 거예요. 열녀 난 거예요. 열녀.

그런데 그걸(시집) 부정할 수가 없어요. 부정하려면 뭔가 옮겨가야 될 게 있어야 되는데 시집와서 배운 것이 자아가 그런 식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옮겨갈 빈자리가 없어요. 빈자리가. 옮겨갈 빈자리가 없다는 게 솔직히 말해서 새로운 남자를 못 만났다 이 말이죠. 시집도 발로 찰 정도로 좋아하는 남자를 못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저쨌든 간에 옮겨갈 데가 없으니까 기존이 편한 거죠. 왜? 그쪽에서 인정해주니까. 세상에, 요즘에 이런 여자가 어디 있나, 이렇게 칭찬을 해주니까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예수 안이라는 그런 세계를 못 가도록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귀가 획책을 하고 있는 세상인지요. 믿습니다, 한다고 옮겨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여자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 분명히 또 남편은 떠났지만 우리 시어머니 건강하게 해 달라 그렇게 기도할 걸요. 왜냐하면 자기 자아의 것이 그대로 기도로 표현되니까요. 그게 언어의 기능이거든요.

그렇다면 아까 세상을 이겼다 할 때에 지금 제자들이 그 말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세상을 이겼다. 일단은 기분 좋은데 세상을 이길 분을 따라다니니까 우리는 지금 ‘든든한 빽을 얻었구나’ 그걸 기뻐하는 거예요. 뭘 놓친 거예요? 환란. 환란은 고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환란은 고생이 아니에요. 환란은 이쪽(새로운) 세계를 알았는데 건너갈 수 없는 딜레마를 환란이라 해요. 딜레마. 여기(기존)서는 쫓겨났는데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려니까 다리가 끊어졌어요. 이게 환란이에요. 환란. 어떻게 오도 가도 못해요.

이 상태가 구약에서 무슨 상태냐 하면 바로 홍해 상태에요. 홍해 앞바다에 왔는데 뒤에서는 따라오고 앞에는 바다가 있어서 갈 수 없는 이게 환란입니다. 광야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얼마나 원망하는지. 원망한 사람들이 원망할만했어요. 우리도 그들이었으면 원망했을 거예요.

자, 모세의 놋뱀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장대에 달린 것을 보면 살리라 했어요.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오늘 <십자가를 아십니까> 책 주제와 관련해서 복이 뭐냐 하는 거예요. 복이 뭐냐? ‘복이란 불뱀을 쳐다보게 되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복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나를 못 보고 바깥을 봐요. 나는 항상 정당하니까. 나는 항상 의로워요. 나는 항상 나한테 바르게 사니까. 나는 늘 나를 용납해요. 나를 천국 안 보내도.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끝까지 자기를 용서해요. 용납하고. 자기를 격려하고 자기에게 힘을 부어줘요. ‘내가 지옥가도 나 혼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견딜만할 거야.’ 지옥 가도 자기 스스로 격려해줘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에게 후합니다. 자기를 늘 용서하고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라 하는데 자기를 생각 안하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 생각하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MBTI 심리분석 유형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외형적(external)이죠. MBTI가 틀려먹은 것이 외형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면의 구조가 바깥으로 반영된 게 외형이거든요. 그러니까 외형/내형이 따로 구분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왜 외형적이고 어떤 사람은 내형적이냐? 이 MBTI 검사 자체가 문제에요. 검사를 하니까 여기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데 소극적 반응을 나타내면 내형이 되고 적극적 반응을 나타내면 외형이 되는 거예요. 이 검사가 문제에요. 이 검사 유형이 문제에요.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아담의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똑같아요. 인간의 속성은 분류가 안 됩니다. 뭐 베드로는 적극적이고 요한은 소극적이고 그거 아니에요. 모두 다 마찬가지에요. 인간 속에 모든 인간의 다양함이 다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것이 상황 따라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MBTI 성격유형이 어디에 소용없습니까? 불에 소용없어요. 인간의 인물이 달라도 내장은 똑같거든요. 내장 조사해보세요. 똑같아요. 그러니까 의사가 하는 거예요. 의사가 내장 볼 때는 인물 안보거든요. 내장보고 수술하잖아요. ‘이 사람 잘 집어야 돼. 인물이 잘 생겼기 때문에.’ 이런 거 없다고요. ‘아유, 내장도 이쁘네.’ 이런 거 없어요. 창자가 이쁘네, 이런 거 없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의 외형은 포장지죠, 포장지. 포장지를 찢어버리면 안에 내부 나오잖아요. 주님께서 포장지를 찢어주는 것, 이게 뭐냐? 복이에요. 인간은 환란당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복은 뭐냐? 미리 처벌받는 것, 이게 복이에요. 처벌을 면제받는 게 아닙니다. 처벌을 면제받는 게 아니고, 미리 처벌을 받되 어떻게 받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처벌받습니다.

그럼 주님의 처벌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할 때 처벌받지 않았었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러나 성도는 예수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 안에. 아까 인간 안에 있다 했죠. 인간 안과 예수 안이 있는데 인간 안에서 예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못 들어간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광야에서의 실패가 ‘못 들어간다’를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광야에 있더라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어느 누구도 못 들어가요. 갈렙,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는 아주 특이한 사례입니다. 이건 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죠.

못 들어간다. 그럼 못 들어가는데 이 자체가 뭐냐? ‘개인은 못 들어간다. 그러나 단체는 들어간다.’ 이게 굉장히 이상한 말이에요. 광야에서 죽은 자는 못 들어가는데 광야에서 죽은 자가 못 들어가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은 들어가요. 이 기이한 것, 이 모순을 어떻게 쉽게 묘사할 수 있는가 생각하다가 제가 고안한 것이 이거에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에요. 엘리베이터가 아니고 에스컬레이터.

에스컬레이터가 계단처럼 생겼잖아요. 자, 그럼 문제 던집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냥 서 있지 않고 계단처럼 내려간다면 계단을 내려간 거예요,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간 거예요?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간 거죠. 성도가 하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행동은 우리가 한 거 맞아요. 우리가 행동한 것 맞는데 그것이 주님의 언약에 실려서 그 상황에 따라서 상황이 내려가게 해서 움직이게 해서 같이 움직여 나가는 거예요. 보조를 맞춰서.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우리는 못 들어간다. 맞다.’고 고백했어요. 우리 힘으로 못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와 동행하는 게 있잖아. 왜 그걸 놓쳤느냐 하는 거예요. 지금 주님이 살아있거든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끝, 28장 20절에,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 함께 있는 게 존재가 아닙니다. 활동이거든요. 하나의 사건을 늘 일으켜요.

그렇다면 지금 주님이 살아계시고 활동하시고 사건 일으키는 것을 누가 그것을 막습니까? 까불이 내가 막는 거예요. 우리 까불이 아닙니까? 내가 설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신 마동석이 와서 어떻게 합니까? 그냥 때리면 안돼요. 그건 가룟 유다 돼요. 한 방 먹고 나가떨어지면 안돼요. 너는 잘못 태어났어, 이러면 안 된다고요. 딱 쥐고 그냥 쥐어 패는 거예요. 매일같이. 패는 거예요. 내가 가만있으라 했지? 패는 거예요.

그러면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일은 했잖아요. 일은 해놓고 까불어서 일은 했는데 까불었다고 한 방 맞으니까 내가 가만있을 경우에 나오는 결과를 보는 거예요. 한 방 맞고. 그럼 그 일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님이 일으켰죠. 그 관계, 그 동행관계를 복이라 하는 거예요. 같이 동행하는 거예요. 대신 죽으심 맞아요. 우리 대신 죽으신 것 다 맞는데 대신 죽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동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한번 봅시다.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여기서 우리는 질그릇에 해당되죠. 질그릇은 비어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란을 주게 되면 환란은 다 빼앗기는 거죠. 내 게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걸로 여긴 것이 내 게 아니니까 빈 그릇이 되겠죠. 빈 그릇에 무엇이 담깁니까? “성령의 능력이 큰 것이 우리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죠.

그럼 우리는 그냥 빈 그릇이에요. 우리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I'm nothing.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빈 그릇이에요. 남이 뭐라고 욕해도 그건 당연한 거예요. 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왈칵 화를 낼 이유가 없다고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남이 인정한다, 인정 안 한다 그걸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왜? 뭔가 대단해야 뭐 인정받고 말고 할 텐데 아무것도 아닌 게 뭘 인정받아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그릇인데요. 그릇이라는 것은 고체 아닙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 능력이 임하는데 그 능력이 어떻게 임합니까? 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당했던 환란을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당했던 환란이 왜 우리에게 찾아오느냐? 그것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환란을. 자, 환란이 뭐냐? 환란은 내 세계 안에 있을 경우에 결코 천국, 약속의 땅, 예수 안의 세계, 십자가 안의 세계로 우리가 들어갈 어떤 재주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거 아는 게 복이에요. 이게. 내가 질그릇인 걸 아는 게 복이고, 내 안에 어떤 능력이 임한다는 것도 복이고, 주님이 당했던 환란이 찾아오는 것도 복이고, 그 환란이 찾아옴으로써 내 힘으로서는 나의 세계에서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느냐? 예수 안에서 나왔어요. 무슨 소식이 온 거예요. 주님이 그냥 가만 계신 분이 아니고 지금도 세상 끝날까지 활동을 하는데 그전에는 내 활동한다고 가리워졌어요, 그게. 우리가 너무 바빴어요. 너무 바쁘고 또 가만있지를 못해요.

동유럽 여행을 갔다. 갔는데 여행 왔으면 현지인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되지 않겠는가, 누구의 또 견해가 있어가지고 빈에서 한국사람 소문에 제일 맛있다는 돈가스 집을 갔는데 비가 약간 왔어요. 갔는데 못 들어갔어요. 사람이 많아서 쭉 줄 서 있는 거예요. 벌써 같이 갔던 나이 많은 사람들은 화딱지가 나서 분노하죠.

자, 여기서 나오죠. 분노 왜 한다고 했습니까? 나는 이런 대접받을 사람 아니다. 나는 nothing이 아니다. 결코! I'm not nothing! 영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절대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이런 대접받을 사람이 아니야, 나는. “가자. 뭐야, 이게? 도대체 몇 분 동안 서 있는 거야. 허리 아파 못 서 있겠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현지에 와서 현지인이 먹는 걸 해야지.”

그런데 보니까 어떤 뒤에 오는 사람이 쓱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뭐야? 보니까 그 사람은 예약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일행이 ‘너는 왜 예약 안 했냐?’ 관광객들은 예약을 안 받는대요. 안 받고 현지인들에게만, 현지인들 식사가 좋다는 소문 듣고 관광객들이 왔으니까 차별대우하는 거예요. 관광객들은 줄 서든 말든 현지인들은 그걸로 인하여 불편하지 않도록 차별하는 거예요. 비엔나 사람한테는 주겠다.

그래가지고 아, 천국도 미리 예약해야 되나? 천국을 줄 서서 들어가면 되나? 예약이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천국은 예약을 안 받아줍니다. 천국은 아무도 못 가기 때문에 예약이 안돼요. 갈만한 곳이 되어야 예약이 되는데 아예 아무도 못 가기 때문에 예약 자체가 안돼요. 기다려도 안돼요. 줄 서도 안돼요. 예약도 안돼요. 그냥 못 들어가요. 천국은 못 들어간다고요.

그렇게 줄 서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아까같이 울화가 터지는 거예요. ‘자, 여기서 이거 먹지 말고 그냥 간단한 피자집도 있고 하니까 거기 가자.’ ‘안 된다. 이거 반드시 먹어야 된다. 이거 안 먹으면 온 보람을 못 느낀다.’ 야, 진짜. 정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어요.

환란이란 이런 겁니다. 왔는데도 보고도 못 들어가는 거예요.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들어간다’가 될 경우에 내가 주인이에요. 내가 먹고 싶고 내가 들어간다. 내가 주인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도 우리가 주인 안 된 적이 없습니다. 놀러 가든 집에 있든. 그래서 여행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가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여행가도. 여행가도 현지인과 안 싸워요. 같이 갔던 사람하고 싸워요. 새로운 환경 때문에 없던 싸움이 나온다니까요.

따라서 예수 안의 세계는 우리가 갈 여행지가 아니고, 우리가 놓여진 환경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 안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는 환란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거죠.

자, 이제부터 왜 못 들어가느냐?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말씀을 못 지켜서 못 들어가요. 못 지켜서. 말씀을 못 지켜서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궁금하죠. 어제 오전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천국 갔다 치고 어떻게 생활하느냐? 이게 궁금하다는 거예요. 천국 갔다 치고. 그럼 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천국에서 예수님의 공로를 보여주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걸 레위기로 설명해드렸습니다. 지금 제사장이 제사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식이라 했어요.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그다음에 남아도는 고기와 빵을 화목제를 통해서 ‘너희도 먹어라’하고 주는 거예요. 먼저 음식 드시고.

그러니까 이 음식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주인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나온 거잖아요. 그게 천국 일이에요. 예수님이 하는 공로를 우리가 그냥 받는 일을 하는 일이 우리가 죽고 천국 가서 하는 남아있는 일이에요. 영원토록 할 일이 그겁니다. 그 궁금증이 이제 풀렸죠? 천국 가서 뭐 하느냐? 맨날 헨델의 메시아만 듣느냐? 아니에요. 헨델의 메시아도 없어요, 거기는.

주님의 공로가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입으로 새기면서 씹으면서 생명나무를 따먹으면서 계속 그걸 새겨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는 천국 일을 성령께서 지금 이미 시작케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가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길에 서서 비 맞으면서 우리가 돈가스를 만드는 거예요. 주님 주신 재료로 돈가스를 만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환란 지나고 승리가 아니라, 환란 속에서 주의 승리를 맛보게 하는 거예요. 주의 승리를 맛보게 하는 방법은 환란밖에 없습니다. 이 까불이가 늘 마동석한테 얻어맞듯이 나 하는 일이 지워져야 되니까요. 늘 내가 하는 일은 주님한테 작살나는 일만 해내요. 그리고 작살나는 그 자체도 복이고요. 그 환란 속에서 말씀은 ‘이게 성공이야’하고 말씀을 끄집어낼 때 우리는 그 새로운 말씀 먹는 재미로 살아가요. 성도는 이미 성령 안에서.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해요. 말씀이. 똑같이 기억나는 아는 말씀이 새로운 환경에 부딪치면서 새로운 나의 한계를 느끼게 하시면서 ‘새로운 말씀의 기쁨이 이렇게 기쁘구나. 이렇게 기쁜 말씀이 있고 이렇게 반가운 말씀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감사하는 그 재미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거예요. 예수 안에 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항상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자, 그러고 난 뒤에, 환란을 당했죠? 그러고 난 뒤에 주변을 보는 거예요. 주변을 보게 되면 그쪽은 지옥 가는 게 아니고 그들은 지옥 생활을 이미 시작했어요. 그들은 막 노력을 해요. 아등바등 애를 쓴다고요.

약간의 우울증 온다면 어디를 갑니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요. 지금 나라에서 보조금까지 준다 하니까.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보조금까지 준답니다. 10차례까지 보조해준답니다. 물론 다 대주는 건 아니고요. 차비 정도는 대준답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

정신과 의사가 정신건강 안 봐줬으면 그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남 탓이죠. 누구 탓? 우리 남편, 아내, 자식 탓. 내 인생 이렇게 된 것은 우리 부모 탓. 부모가 내 인생 이렇게 조져놓고. 내가 이런 것은 목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 목사 네 탓이고 설교를 잘못해서 그렇고 교회 성당 신부가 잘못되고…. 전부다 남 탓으로 다 돌리는 거예요.

부처가 그걸 지적한 거예요. 힌두교에 대해서 그걸 지적한 거예요. 누구 탓, 누구 탓 하지 말라. 우리는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난다. 붓다가 바른 소리했죠. ‘이 세상에 있는 영겁의 모든 일들은 우리가 감당 못할 사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고생과 고해(고통의 바다)는 우리 손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뭐냐? 깨달으면 된다.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봐서 내가 나를 장례 치르면 되잖아.’ 이게 부처 이야기에요.

그래서 맨날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막 춤추고 하는 거 있죠. 박성호인가 개그맨이 뉴진 스님으로 나와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자기가 자기 마음 달래는 거예요. 누가 달래줘요? 내 마음 내가 달래야죠. 그런데 그거하고 똑같은 짓을 교회에서 교인들이 장로, 집사, 목사들이 하고 있다니까요.

환란이 승리하리란 걸 몰라요. 예수의 말씀으로 승리하려고 내 승리를 내가 따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그 가운데 비난은 누구한테 갑니까? 남한테 비난을 쏟으면서. 이제는 비난을 누구한테 해야 돼요? 누가 우리 주님을 가렸습니까? 바로 나죠. 누가 죽였어요? 누가 주님을 미워했습니까? 우리가 미워하는 거예요. 자아가 있기 때문에 주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아를 갖고 산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자체가 복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게 복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필연적이에요. 이 모든 남 탓, 내가 스스로 살려는 종교적인 모든 행위가 지나가보면 그게 환란을 유발하는 요인이었고 내가 불뱀이었고 나는 내가 주님을 가렸던 죄인인 것을 날마다 쳐다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거예요.

불뱀이니까 얼마나 내 인생을 내가 힘들게 했습니까. 몸 아파서 힘들고 자식 괴로워서 힘들고 모든 되어진 상황이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인데 왜 남들은 저렇게 행복하게 잘 사는데 나만 가지고 그래. 나만 왜 차별대우를 하느냐는 그 불만. 그 불만을 없애지 마시고, 그걸 이제는 즐겁게, 이제 내 시간이 아니고 주의 시간이니까 주께서 그걸 가지고 천국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제목이 <천국의 조각>이잖아요.

그 죄인을 가지고 주께서 십자가에 동행하셔서 대신 피 흘리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내 공로 아니고 주님 공로라는 것을 지금부터 나의 허접함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줄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나를 해코지하는 남들만 쳐다보고 원망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원망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재밌고 즐거운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것이 새로운 말씀에 근거해서 말씀만 드러내기 위해서 가리워졌던 것이 깎이는 그러한 주님의 성령의 역사인 것을 알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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