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죽음의 심판

아빠와 함께 2024. 7. 23. 09:24

대전-신명기(24강)신11:26(죽음과 심판)20240722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11장 할 차례입니다. 신명기 11장 전체 내용을 보시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구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요하듯이 덮쳤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1절부터 보면,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되어 있죠. 1절 말씀부터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님이 인간을 왜 필요로 하냐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인데, 굳이 인간을 찾아와서 명령 지키라는 그 명령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냥 인간들이 행한 대로 행하면, 나중에 심판만 해도 되잖아요. “똑바로 안 살았구나. 너 지옥 보내야겠다. 너는 제대로 살았구나. 천국 보낸다.” 이것만 하면 되는데 왜 명령을 지키라고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은 뭘 설쳐요. 인간 입장에서 인간이 설치니까 누가 가만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있어요. 24시간 온종일 본인이 설치니까,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분으로 인간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뭔가 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막 설친다는 것은,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그 누구도 나에게 지시나 명령을 할 수 있는 존재를 우리가 사양하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데, 자기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서 하고 있는데, 굳이 외부에서 잔소리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 생각이에요. 내가 식물인간 되어서 누워 있으면, 그래서 설치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와서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령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식물인간이 아니고 뭔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는 거고, 그런데 이게 인간으로서 납득이 안 되는 것이 우리가 식물인간이 아니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면, 스스로 움직이도록 놔두면 되잖아요. 굳이 명령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명령할 필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인간을 죽여 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뭐로? 말씀으로 죽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연쇄 살인범? 하나님이라는 연쇄 살인범에게 걸려야 살아요. 왜냐하면, 주의 말씀이 사니까. 우리가 설치는 것은 사는 게 아니고 죽는 길이고, 그냥 인간을 놔두면 죽어요. 죽으니까 말씀이 선수 쳐서 말씀으로 죽여 버리는 거예요.

말씀이 죽일 때, 말씀이 살 때, 그 인간도 사는 겁니다. 적어볼게요. <말씀이 살아야 내가 산다.> 말씀이 살아야 내가 산다. 이 말은 <이미 우리는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이미 우리는 죽어 있는 거예요. 죽어 있는 우리를 말씀이 살려내는 식인데, 말씀이 살려내려면 전제가 뭐냐? 우리가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겠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주의 법도와 명령입니다.

인간이 자꾸 살아 있으니까 자기가 아침에 일어나서 늘 설쳐요. 뭔가 해요, 인간은 가만있지를 못하고 뭔가 해요. 설탕 토마토를 먹든, 떡을 먹든 자꾸 뭘 해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뭔가 한다고요. 자꾸 하니까 어떤 느낌이 안 드느냐 하면, 내가 죽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왜? 맥없이 앉아 있으면 죽은 걸로 알겠는데, 그게 아니라 설치니까, 누가 봐도, 내가 봐도 그렇고 남이 봐도 내가 안 죽은 거예요.

안 죽었으니까 이대로 잘 하게 되면 내가 계속 살 수도 있겠다는 그런 발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인생은 모든 게 무효가 된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회사에서 기가 센 상사가 신입 사원에게 와서 결제 올리고 이렇게 하게 되면, 그 면전에다가 서류를 확 뿌리면서 “다시 해 와!“ 이러잖아요.

”다시 해 와.“ 이거 무슨 뜻입니까? ‘네가 한 것은 무효다, 무효.’ 그런데 우리 인생은 내가 어린아이부터 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뭘 하잖아요. 하면서 좀 더 커 가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두 자로 <다짐>입니다. 다짐. 하여튼 늘 다짐을 해요. 다짐을 다지고 그래요.

다진 다짐을 자기가 또 갖고, 앞으로는 잘해야지, 앞으로는 실수를 줄여야지 다짐을 하고 그 다짐이 제대로, 실제적으로 성과, 효과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뭘 찾느냐 하면 성과를 주목합니다. 평생에 마음은 다짐을 하고, 실제적 결과는 성과로 내고, 이 전체를 뭐로 한다? ‘무효’가 된다. 이 전체는 무효가 돼요.

실컷 70, 80 살았는데, 무효! 서류 다시 해와! 인간들이 다짐을 하고, 성과를 내는 이걸 왜 하나님께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무효로 던지느냐 하면은, 인간이 여기에, 이 악마의 논리에 사로잡혀서 그래요. 뭐냐 하면, <성공과 실패>에요, 성공과 실패. 이것 때문에 사람은 잠을 못자요, 성공과 실패 때문에. 뭘 해도 늘 공포와 두려움이 따라옵니다. 이번에는 실패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무효로 만드는 것은 이 성공과 실패, 이것을 주님께서는 철거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이걸 철거를 시켜주는 게 이게 얼마나 큰 사랑이겠습니까? 그래서 11장 1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무슨 조치가 있고 난 뒤에 그 결과를 돌아볼 때에 이것이 사랑이었구나..

그래서 인간은 뭐든 해요. 하는데, 그 뭘 하는 거기에다가 주께서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거든요, 여호와께서 언약을 주십니다. 증거에다가 사실을 보태는 것을 소송이라 해요. <증거+사실=소송> 사실을 채워 넣는 것을.. 변호사들이 재판할 때, 조그만 한 증거 있잖아요. 이 증거를 실제 사실과 스토리를 만들어서 짜깁기를 해가지고 그걸 들이밀어야 소송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증거로 언약을 줘버려요. 증거의 특징은 뭐냐? 이게 법 조항이라. 법률 조항으로 줘버려요. 율례와 규례, 율법이죠, 율법. 율법을 줘 놓고, 율법 플러스 사실이니까<율법+사실>,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가 돼요. 이스라엘 역사가 돼서 결국은 소송에서 누가 이기는가? 주님이 소송에서 이기는 거예요. 주님이 소송에서 이기면, 소송에서 패한 자는 누굽니까? 인간이죠. 인간이 패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 쪽에서 가만있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성공 실패를 늘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도록, 접근을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는 원칙, 규칙, 구조를 누가 만드느냐 하면은, 하나님 쪽에서 만들어요.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은 성과 없지요, 다짐 소용없지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죽음’이라고 해요, 죽음. 그러니까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이 말이죠. ‘내가 나에게 아무 소용없구나.’ 라는 것, 나에게 아무 소용없다는 것, 입에서 냄새나 나는데 무슨 소용 있겠어요? 코나 고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가 아~~무 소용 없다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을 내 바깥의 시선에서 나를 볼 수 있는 기적이 주어집니다. 내가 나를 판정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남하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내 바깥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나거든요. 소용없다는 것...주님께, 하나님께 누가 된다는 것.

그래서 여름철 되면 애 키우는 엄마하고 아기하고 늘 여름철에 다툼이 일어나요. 찡찡대면서 엄마한테 오게 되면 엄마가 뭐라 하면서 밀어냅니까? ”야, 덥다. 접근불가다. 좀 떨어져라. 너 혼자 놀아. 엄마 덥다.“ 하면서 밀어내죠. 밀어내면 아기가 울면서 계속 오는 거예요. 그것은 아기 입장에서는 엄마하고 있을 때 나름 자기가 성공한 걸로 본 거예요.

주님께서는 인간이 성공하는 것을 도저히 눈 뜨고 못 봅니다. 인간이 성공하는 것을 용납을 안 해요. 봐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은 자꾸 하나님께 기어 붙어가지고 하나님께 붙어 있는 그것을 자체적으로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성공적으로 보는데, 그 성공을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그 원칙은, 함축되어 있어서 좀 어렵지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은, 없음을 통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없음 → 죽음> 없음을 통해서. 없다는 것과 죽음이라는 것이 달라요. 하나님의 시선과 말씀에서 차이가 난다는 걸 알아요.

그러나 인간은 이 둘의 차이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없어지는 걸 죽음이라고 간주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인간이 ‘없음’을 생각해요. 없음을 생각하는 이유가, 없는 데서 내가 있다. 내가 있음.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없는 데서 내가 있다. 따라서 내가 있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면 없는 것을 없애면 안 되고, 같이 연관시켜야 나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안에 의식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없음을 알려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제거해야 없음에 들어가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 미리 관 속에 들어간다든지, 모든 시각, 청각, 촉각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의 관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니면 자연인이 되어서 산 속에 들어가는 것, 그렇게 해보는 거예요.

이미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께서 집에 쌀이 있는데 찾지를 못해서 ‘야들이 나를 굶겨 죽이려고 쌀을 안 갖다 주는구나.’ 라고 치매가 걸리셨으니까 오해를 한 거죠. 아들이 나를 죽이려고 쌀을 안 갖다 놨으니까 며느리도 그렇고. 그러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내가 나를 처분하는 수가 있죠. 그래서 스스로 처분하려고 교회 앞에 산 있잖아요. 산에 많이 올라가지도 않아요.

열심히 올라가서 한 100미터 올라가셨나? 바위에, 그것도 뾰족한 바위는 아니고 편안한 바위에 누워계셨단 말이죠. 왜냐 하면, 나 이렇게 죽을라고. 물론 당연히 실패로 끝났죠. 거기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 봤죠. 좀 더 깊이 들어가셨으면 모를까, 사람 지나다니는 길에 누워계시니까.. 이게 왜 실패로 끝나느냐 하면, 내가 ‘없어진다’를 내가 의식하기 때문에, 없어진다는 의식은 안 없어져요. 이게 문제예요. 이게 문제.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말이 왜 거짓말이냐 하면, 지금은 천국이 아니고 천국은 따로 있다는 그 의식이 천국이 아닌 지금 의식을 그대로 천국까지 가져가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있으면서 제대로 된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인이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을 없앨 수가 없어요.

몸은 죽을 수 있지만 죽기 직전까지 내 의식은 ‘나 죽는다, 나 죽는다.’ 내가 죽는다는 그것이 그 자체가 의식이 살아 있기 때문에 의식마저 날아가야 죽은 건데, 의식은 뻔히 살아 있으면서 나 죽는다고 하니, 말도 안 되죠. 인간의 모든 감각을 냄비 속에서 들어내듯이 다 긁어내면 무(無)가 된다, 없음이 된다고 하는데, 그 긁어내는 본인은 있잖아요. 그러니 모든 종교가 이거는 사기를 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종교가.

자기를 부인한다, 자기를 부정한다. 부정하는 본인은 그 부정을 긍정해야 되는데요? 어떻게 할 거예요? 인간의 의식 자체를 없앨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얘기를 해줘서 어머니를 데리고 왔단 말이죠. 낮잠도 못 주무시고 죽는 연습하다가 왔단 말이죠. 그리고 제 아내가 쌀통에 쌀이 있다고 확인시켜 드리니 화색이 확 돌면서 굉장히 기뻐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기쁘냐 하면, 내가 안 죽어도 된다는 데에서 굉장히 기쁨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안 죽어도 된다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좋아하면서 죽음을 미리 안다는 것, 그건 죽음을 몰라서 그래요. 따라서 우리가 아는 없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이 노선, 노선 자체가 끊어져야 돼요. <없음 ↛ 죽음> 내가 죽으면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죽음이 아니에요.

인간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몰라요. 살아있는 내가 조작한 엉터리 죽음인 겁니다. 그래서 친절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말씀을 줘가지고, 죽음을 말씀 안에서 경험케 해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있다→없다>라는 생각으로 자기의 죽음을 겁내면서, 벌벌 떨면서 끌려가고 있는 상태거든요, 우리가.

우리가 아무리 살아도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거예요. 어느 때 갑자기 죽을 수도 있고, 커피 먹다 갑자기 죽을 수도 있고요.

<있다—없다>를 주께서는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죄—의> 죄와 의로 바꿔버려요. 있다/없다의 관계를 죄와 의로 바꾸어 버립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은 있다, 없다는 현상적인 것, 우리 몸이 늙어가는 걸 현상적으로 파악하잖아요.
현상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내가 판단. 내가 판단하려면 내 판단은 항상 옳아야하기 때문에 나는 멀쩡해야 돼요, 나의 판단은. 그런데 죄와 의라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 돼요. 주님의 판단을 두 자로 하면, <심판>이라고 하는 겁니다, 심판.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 그 모든 기억과 추억들을 다 끌어 모아서, 끌어 모으는데 이게 어디에 집결되는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이게 다 집결하고 모아지게 되어있는 것들을 우리는 평소에 살아있으면서 그런 행위를 하는 거예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긁어모아요. ”가져와 가져와, 너 숙제한 거 다 가져와. 다 가져와.“

그러면 우리는 가면서 뭐라 하냐 하면, ”내가 죽으면 되잖아요!“ ”아니, 그건 니 생각이고.“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를 때 뭐랬냐 하면, ”내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죽겠나이다.“(요13:37-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어요. 내가 죽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되잖아요..

전에 민주당 대표 할 때 돈 뿌려서 한 사람 누구죠? 검찰에서 조사도 안 나왔는데 자기가 자진해서 검찰청에 간 사람 있잖아요. 쯔양이라고 먹방 유튜버 협박해서 돈 뜯어낸 사람이 여론이 들고 일어나니까 본인이 자진해서 나는 협박한 게 아니라고 검찰에 갔을 때, 검찰에서는 ”우리가 조사할 계획 없습니다. 가세요.“ 했던 것처럼.

자진해서 죽는다고 해서 안 받습니다. 베드로가 자진해서 주님 따라간다고 해서 그걸 착하게 보지 않아요. 아직 조사가 진행 안 됐는데, 내가 나중에 소환할 때, 부를 때 오라고. 지금 오면 안돼요. 우리는 마치 자기 목숨이 마지막 최후에 내놓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게 우리의 목숨이 가치가 없다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가치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아까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고요. 사람이 움직이니까 자꾸 뭔가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다짐을 하고 그 다음에 이왕 다짐을 했는데 성공적인 성과를 내겠다고 ”이건 성공작이야. 이건 행복한 거야.“ 라고 본인이 판단하는 거예요, 본인이.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뭐냐, ”그거, 니가 판단하는 거 전부 다 무효로 돌리고 내가 판단할게.“ 판단해서 주신 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주의 법도와 규례와 명령이에요. 주의 율법을 줘버려요. 주의 율법을 줄 때 그럼 우리가 주님의 명령이 오고 지시가 온다면 그럼 우리 자리는 뭐가 되느냐?

여기 재판장에 하나님이 판사로 모자 쓰고 앉아있고, 맞은편에는 반드시 뭐냐, 피고, <피고(저주)>다시 말해서, 저주의 자리가 있어야 돼요, 저주의 자리가.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피고,<피고(복)> 반드시 복된 자리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여기 있는 피고들은 특징이 뭐냐 하면, 일단 본인을 복 받는 자로 단정 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챙기고 이웃을 챙기고 이래요.

자기가 저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저주 받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봤습니까? 봤으면 손 들어보세요. ‘나 사랑해서 저주 받을래.’ 이런 사람은 없어요. 사랑함으로 저주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웃 사랑해서 저주 받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성경보기, 교회 다니기, 이거 안하면 안돼요? 이 짓을 왜 해요? 아니, 이걸 왜 하는 겁니까? 누가 하라 했어요? 이거 한다고 돈 나옵니까? 여러분들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그냥 내 잘난 맛에 살면 안 돼요? 그냥 내 잘난 맛에 살면 되고, ‘참 어머니 훌륭합니다. 우리 키워줘서.’ 가끔은 이런 효도 받고.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요. ”왜 성경 보고, 성경 그냥 갖다 버려도 되는데 왜 굳이 보고 하느냐?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묻고 싶죠. 물으면 100% 성령 받기 전의 12제자의 답변이 나와요. 왜 주님을 따르고, 왜 하나님을 믿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왜냐 하면,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예요. 결핍을 왜 보충해야 되는가? 그게 나름 내 인생 성공이기 때문에. 인생 성공이에요.

인생 성공을 해서 뭘 원하느냐? 나는 피고가 아니고 싶은 거예요. 나는 내가 판정 내린 나이고 싶지, 누가 감히, 누가 감히, dare, 누가 감히 나에게 심판, 판정 내린다는 것은 내가 용납을 못하겠다. 나도 신인데, 나도 신인데,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는데..누가 감히 나에게 이렇다 저렇다 최후 심판을 내려요?

내가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불경이든 경전이든 훌륭한 게 있으면 내가 시간 나는 대로 챙겨서 결핍을 뭐로 합니까? 보충해서 온전에 이르고, 완전에 이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와도 기 죽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판사 앞에서 당당한 피고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러니까 너는 죽어야 되는 거야.“ 라고 명령을 주신 거예요. 그게 신명기 11장 26절에 나와요.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내가 너희 앞에 복/저주>를 둔다는 거예요.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너희를 포함해서 최후의 심판정, 재판장을 내가 너희와 함께 만들겠다고 내가 너희에게 찾아와서 동행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네가 내가 하는 계획에 본의 아니게 참여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 또는 재판장. 누가 저주 받고, 누가 복 받고, 이게 어떤 기준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우리 같이 한 번 만들어가자 하고 찾아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찾아오심 자체가 완성이지, 완성에 이르는 길은 아니에요.

그러니 이렇게 할 때는 하나님께서 마치 이스라엘을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피고가 아니고 법원의 직원들 있잖아요. 법원의 직원들, 죄수들 관리하고, 재판장 소란하게 만들면 몽둥이로 패서 구속 시키고 하는 직원들 있잖아요. 그와 같은 직원들로 생각하시고 오신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1장 2절부터 4절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과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2)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3)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따를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4)“ 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물어봅니다. 애굽 사람들한테는 복과 저주를 앞에 두었습니까, 안 두었습니까? 안 두었죠. 그냥 팼죠. 그냥 팬 거예요. 그냥 몽둥이 가지고 패 버린 거예요. 법원 직원을 노예로 삼고 있으니까, 내놔라 하니까 바로 왕이 뭐라 합니까? ”내 백성인데 왜 내가 내놓나?“ 하니까, ”맞고 내놓을래, 그냥 내놓을래?“ 열 번이나 맞고 내놨잖아요.

하나님의 심판에 종사해야 될 참여자를 주께서 뽑는 거예요. 장차 전체 인류를 복과 저주를 행할 그 대상자로 삼고 거기에 일꾼들이라고 히브리인들을 일방적으로 선택해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들어서 데리고 올 때에 못 보낸다고 붙어있는 거 몽둥이로 패 가지고 구분시켰죠,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애굽 사람 기능이 다르고, 이스라엘 기능은 특별히 해야 될 일이 있다고 따로 떼 놓는 거예요. 떼 놓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개입이고, 언약 개입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당히 우쭐댔지요. 뭐 기뻐서 미리암과 더불어서 찬양을 신나게 했지요, 홍해 강가에서. 애굽 군대 장비들이 홍해 강가에 늘어질 때에 이거는 뭐 자기들이 굉장히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느낀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다시 말해서, <저주는 더 이상 우리에게 없다> 이렇게 인식한 거예요. 그럼 저주 담당은 누구냐? 애굽이죠. 애굽에 있던 우리를 건져낼 때에, 애굽에게 저주가 내려졌다는 말은, 거기서 건짐 받은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는 복이다’ 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같지가 않다는 거예요. 아까 뭐라 했습니까? <있음—없음>이러한 인식, 의식적 구조를 뭐로 바꿔야 된다고 했어요? <죄—의>로 바꿔야 된다고 했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도 인간인지라 내가 있다/ 없다는 그 인식을 포기하거나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있으니까. ”하나님, 저 여기 있잖아요!“ 하나님 말하길 ”죄가 있잖아!“ 있는데 나는 내 몸이 있다고 우기고, 주께서는 거기 죄가 있다고 우기고, 인식의 차이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인간들은 ”죄 있으면 내 목숨 바쳐서 죽을게요. 죄 있는 것은 내가 죽으면 그만이잖아요.“라고 할 때, 그게 바로 뭐냐, 아직도 있는 게 없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직 있다/없다의 그 논리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있다/없다가 아니에요. 죄도 영원하고, 의도 영원해야 돼요. 있다/없다는 인간의 관찰, 경험에 의해서 발생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있다/없다를 죄와 의로 바꾸기 위해서 뭘 줬느냐, 율법을 줬죠, 언약을 줬습니다.

언약 안에 있음과 없음을 여기다가 함축해서 응축을 시켜요, 응축을. 이런 아이스크림 있죠. 부라보콘 아이스크림. 밑에 역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과자에다가 아이스크림을 담잖아요. 있음/없음이라는, 눈이 있으면 누구나 다 아는 이 구조에 담아서 이걸 응축을 시키면 뒤에 죄와 의가 나와요, 밑에까지. 이걸 담는 거예요. 담는 이 경로 있잖아요, 이 경로가 광야의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림 참조)

가면서 있음/없음을 느끼던 그들이 죄와 의를 느끼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살았다고,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살았다는 말은 아직 안 죽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숨 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물 없죠, 양식 없죠, 그때부터 그들은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물 있고 양식 있을 땐 농사지으려 하잖아요.

물 없고, 양식 없을 때 그들의 할 일은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께 대한 대듦, 반발, 반항, 그게 내가 그럴 줄 몰랐던 거예요. 이건 있음/없음의 차이가 아니고 내 안에 응축된 거예요. 덩어리 된 거에요, 덩어리. 벌충하거나 보충할 문제가 아니고, 죄를 더 지을 문제가 아니에요. 더 추가할 죄가 없어요.

자체가 죄기 때문에 더 추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살다보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내가 지금 몸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존재할까, 내가 아파서 비존재로 끝날까, 요양병원에 가서 비존재로 끝날까? 살다보면 그것이 계속해서 발산되고 있어요.

로마서 한번 봅시다. 로마서 3장 5절, 6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5)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 이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이 뭘 앞장세웁니까? 이미 심판을 앞장세웠잖아요, 심판.

심판은 기준을 우리가 정한 게 아니에요. 소송에서 이기려면 증거에다가 사실이 추가되어야 돼요. 그래야 소송에서 이깁니다. ‘굿파트너’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에요. 심판한다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사도바울에게 대들 때, 드디어 죄가 나옵니다. 뭐라고 하냐 하면,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죄를 더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아이디어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을 위하여. 아까 얘기한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영광이 안 되는데, 결핍된 영광을 충분하게 채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더 지어야 된다는 논리를 사도바울 당신이 펼치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한 말이 “내가 한 말을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죄” 라는 거예요.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결국은 ‘내가 어떻게 심판을 모면하느냐’ 모면하려고 하는 그 발상 자체가 나 자신을 건전하게 보는 거예요. 나 자체가 지금 죽을 수는 있지만, 전면적으로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은 그것은 내가 내린 기준에 의하면 그건 터무니없이 안 맞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로마서 3장 얘기에서는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자신의 기준에 부합되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일방적으로 엉터리 해석을 해왔다는 거예요. 성경을 율법을 해석하든, 메시아를 해석하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으로 살릴 것인가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 쪽으로. 다시 말해서 나의 건전함을 유지시켜 줘서 성과를 내는 하나님을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싶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3장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 여러분 잘 알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어느 인간이 받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그걸 용납할 수 있겠어요? 아무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모두 죄인이라는 뜻이고, 죄인에게 주어지는 정당함이란 것은 오직 저주를 저주답게 내려줘야 뭐가 살아요? 하나님의 정당함이 살아요. ‘하나님의 정당함을 살리기 위해서 네가 저주 받을 용의가 되어 있나?’를 인간에게 물어볼 때, 모든 인간은 ‘그것까지는 곤란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판사 되신 주님이 “지옥!” 지옥이라고 보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재판정에 있어서 피고 있잖아요. 이 피고를 누가 채우느냐?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 히브리인들을 그 피고석에다 세우겠다는 게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명령의 목표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재판정이, 온전한 정당한 재판장이 완성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피고 역할 하라고 불러낸 거예요, 피고 역할 하라고요.

그리고 재판장 되신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피고는 들어라. 너의 앞에 복과 저주가 주어져 있다.” 뒤에서 피고들끼리 “우리는, 나는 착한데..” “누가 내가 말하는데 속에서 기침 소리를 내는가?” 이건 궁예가 드라마에서 한 대사에요. “누가 함부로 기침 소리를 내는가? 누가 내가 말하는데 함부로 궁시렁궁시렁 대는가? 방금 뭐라 했는데? 누가 뭐라 하는가?”

“저주를 좀 치워줬으면 좋겠어요.” 저주가 있는 이상은 갑자기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저주가 있어? 이미 애굽에서 나왔는데 굳이 저주가 필요할까? 어린 양의 피 발랐는데..” 뭐, 이런 거. “양의 피겠지, 사람의 피가 아니고.” 그래서 한 번 보세요. 신명기 11장 6절 봅시다.

실컷 애굽을 작살내신 하나님께서 6절에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이게 민수기 16장 27절에서 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31절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다 파묻혀 죽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에요? 이스라엘 밑에 뭐가 있다? 구덩이, 저주의 구덩이. 복이 뭔지, 저주가 뭔지를 내가 다른 민족은 제치고 내가 너희 민족에게 알려준 걸 고맙게 여겨라 이 말입니다. 너희는 너희들 생각밖에 안하지? 너희들이니까, 내가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 냈으니까 내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너희들을 참여시켜 준거야. 복인 줄 알아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문제는 인간들이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살아야 돼.” 산다는 건 있다는 거고, 죽으면 사라지는 거잖아요. 있음과 없음으로 생각하잖아요. 있음과 없음으로 생각하는 자기 백성을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님의 심판장으로 바꾸어서 있음과 없음의 구조에서 이탈해서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역할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겁니다.

그 역할이 뭐냐 하면, 율법 안의 복과 저주죠. 복과 저주가 같이 합체된 기준이 뭐냐? 십자가죠, 십자가.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말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복과 저주에 참여시킨 이 사랑, ‘아, 복의 기준이 십자가고, 저주의 기준도 십자가구나.’ 이걸 알게 된 이 사랑을 사랑이라고 이해 못한 자는, 자기를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저주다 이 말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 생각을 해야지, 자기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인간들이. 다시 신명기 11장으로 와 봅시다. 이렇게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27,28절 봅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뭘 받는다고요? 저주를 받는다. 결국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결국 네가 저주 받는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저주 받지 말아라’가 아니라 저주를 주든, 복을 주든 이게 하나님 일이지, 네 일이 아닌 것을 알아라 이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나에서 뭐로 옮겨가야 됩니까? 나에서 말씀으로 옮겨가면 돼요. 참 쉽지요? 말은 쉬워요.

내 의식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옮겨가면 되는 겁니다. 옮겨가라고 18절~20절까지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18)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1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20)”

이거 뭡니까? 이거는 뭐 인간이 사라졌어요. 인간은 사라지고 뭐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미간에다가, 손목에다가, 온 집에 뭡니까? 말씀이 살아있는 곳이에요. 말씀이 살아있으면 그 동안 살아있다고 여겼던 것을 살아있음을 누구한테 갖다 붙였어요? 살아있다는 이 형용사를 누구한테 붙였습니까? 나에게 붙였잖아요.

이 나를 떼고 여기에다가 말씀이 살아있는데, 그 말씀이 살아 있는 집안에 나는 일부로, 일부가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지신 이유입니다. 앉으나 서~~나 말씀 생각~~앉아 있을 때나, 일어서나 무슨 생각? 말씀 생각! 이게 바로 인간의 저주받은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의식을 스스로 말씀으로 바꾸지를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콘, 브라보콘 밑으로 점점 더 블랙홀 밑으로 빠져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망함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유일하게 저주를 앎으로서 유일하게 구원을 받는...그 마지막 빠져나가는 그 지점이 바로 십자가 지점. 십자가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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