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1214a행7장38절(외지인)-이 근호 목사
오늘부터 <뒤에서 본 한국교회> 이 책을 가지고 하겠습니다. 교회 뒤에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나타난 것은 교회라는 가현체고 뒤에는 보이는 않는 말씀이 있고. 그 뒤에 있는 말씀과 앞에 있는 교회가 연결되어있는가, 일치되는가, 그 내용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가를 우리가 한 번 따져보자는 거지요. 생각해 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라는 것이 있음을 우리가 모른 척 할 수가 없잖아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동의가 있었다는 뜻이고, 그럼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람들의 동의와 인정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교회가 문제 있다, 라고 말을 하려면, “그러면 너는 교회를 부정하고 도대체 뭐를 내세우느냐” 그렇게 누가 이야기를 하면 답변할 수가 있어야 되지요.
교회가 없다면 그러면 당신이 내세우는 것은 뭐냐, 라는 말을 할 때에 교회 나쁘다, 교회 썩었다. 지금 이걸로 이것은 아무나 정답이 될 수가 없어요. 교회를 잠깐 비우면 거기에 교회는 문제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한결같다. 이런 이야기가 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그럼 한결같은데 그 한결같은 것을 니 입으로 정리해 보라.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 책을 쓰게 된 것이 내가 대구의 대덕교회의 부교역자로 있을 때에 쓴 책이에요. 그 때의 제목은 <성경과 한국교회>라는 제목을 했습니다. <뒤에서 본 한국교회>가 아니고 <성경과 한국교회>. 처음에 나온 책은 제 집에는 이렇게 허름한 얇은 책이 제 집에 있습니다. 초판 처음 나온 거. 그 책을 재판한 것이 제목 바꿔서 나온 것이 <뒤에서 본 한국교회>입니다.
그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교회 안에서 약간의 돈을 주니까 그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떠날 수가 없지요. 부교역자니까요. 또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에 집어넣어주었으니까. 그럼 그 교회의 담임목사 설교하는 거 거기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 그 목사에 대한 말씀은 말씀대로 듣지만 각각의 가정생활에서 그들의 생활 자세, 태도, 마음가짐, 이런 것을 제가 가까이 볼 수가 있지요. 왜? 부교역자가 하는 일이 심방이니까요. 세밀하게 그들의 생활 속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목사는 심방을 잘 안하니까요.
그 당시의 대덕교회 목사는 자기는 말씀에 전념한다는 목사기 때문에 그 목사 이름은 윤희준 목사에요. 대구에서 말씀 잘 가르친다는 소문난 목사에요. 말씀 하나 듣기 위해서 다른 교회 다 다니다가 그만두고 이 대덕교회 와가지고 교회는 작은데 많을 때는 180명까지 모였어요.
수용인원은 그만큼 안 되는데 초대교회 부흥한 것처럼 꽉꽉 찼지요. 숫자 세기가 나중에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작으니까. 그거 헤아리는데 신경 쓰니까. 그럼 저는 이 책을 어떻게 원고를 하느냐, 목사가 설교를 하면 저는 제일 뒤에 앉아서 앞에 기둥이 있어요. 안 보여요. 목사는 설교하게 되면 나는 그 본문 가지고 내가 따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그 목사의 설교가 뭐 그리 좋다고 뭐를 원해서 그들은 듣고 있는지, 그리고 성경 본문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목사는 아는 게 그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전하는데 대구 시내에 있는 교인들이 그 목사 설교 들으려고 왔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유대교였습니다. 목사도 유대교고, 교인들도 유대교고 둘 다 바리새인이에요. 왜 바리새인으로 모든 인근의 종교성이 바리새인으로 최종 종결되는 현장 속에서 이 책을 쓴 거예요.
자, 바리새인, 유대교이지요. 유대교. 유대교의 특징은 여러분들이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알 겁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 획득이지요. 구원 획득. 더 정확히 말해서 행함을 뽐냄으로 구원쟁취, 구원을 쟁취하는 거예요. 행함을 뽐냄으로.
행함을 뽐낸다는 말을 집어넣는 이유는 자기 행함을 부정할 의도가 없어요. 의도가 없다. 이게 유대교입니다. 이들의 행함은 근거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윤리성에서 나온 거예요. 윤리성. 윤리성이라는 것은 모든 판단을 뭐로 하느냐 하면 선이냐, 악이냐로 판단하는 것이 윤리성이에요. 저건 나쁜 거고, 이건 옳은 거고. 여기에 작동되는 것은 선과 악의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선과 악의 차이가 있다. 선은 악이 아니고, 악은 선이 아니라는 거예요.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선과 악의 차이가 있다. 요기까지는 선이지만, 여기까지는 악이라고 볼 수 있다. 라고 자기 판단이 서있는 겁니다.
그 판단은 그들은 판단할 때 그 판단은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인가, 바로 유기적 분위기의 가정환경과 + 사회 환경. 이것이 1970년도, 1980년도의 우리나라의 사회 환경입니다. 지금처럼 개판 같은 사회가 아니었어요. 어느 정도 정돈되어있어요. 내 행동, 내 주먹, 내 마음대로 한다.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자칫 행동하면 사회 지탄을 받는 그래서 사회가 인간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압박을 가했던 그 시료가 통했던 사회에요. 그 사회가.
그러면 이들이 교회에 온다는 말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정리가 돼요. 뭐냐 하면 나의 존재가치를 함양하고, 그 다음에 뭐겠어요? 함양에다가 더 보태서 성숙시켜 나가는 것. 자기 존재 가치. 내 착함을 계속 함양하고. 함양이란 성숙이랑 같은 말이에요. 성숙하겠다는 거예요.
성숙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사회환경과 가정환경이 무엇을 옹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선한 사람에 대해서 호위를 베푸는 사회로 아직까지는 유지가 돼요. 아직 그 때 사회가. 1970년도 1980년도는 그 때 사회가 그게 형성되어있던 거예요.
자, 만약에 예를 들어서 그 사회에 어떤 모습인가를 하나의 예를 들면 돼요. 그 사회에 만약에 10월말에 11월초에 할로인 축제를 한다고 합시다. 그 때 1980년도에 할로인 축제를 한다고 칩시다. 그럼 할로인 축제는 뭐냐 귀신축제지요. 귀신축제 때 한껏 까불기 위해서 의도적인 탈선을 의도적으로 분출된 욕망을 터트리듯이 탈선을 해보는 거예요. 해볼 때 혼자 하면 재미있겠어요? 재미없겠어요? 혼자하면 재미없겠지요. 탈선 혼자하면 그건 맹숭 맹숭해서 재미없어요. 나쁜 짓해도 같이 나쁜 짓해야 재미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탈선할 때는 우르르가 되겠지요. 우르르. 우르르. 같이 휩쓸리고 우르르.
거리에 뛰쳐나와서 그런데 그 거리가 약간의 경사가 있다고 칩시다. 그들이 우르르 모인 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정신적 에너지가 업이 돼요. 무슨 큰 일에 내가 참여된 것에 무한한 희열을 느끼고요. 인간이 느끼는 그 이상의 예상보다도 더 이상의 쾌감을 느끼게 되어있어요. 우르르에요. 지금도 유럽에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토트남 축구보세요. 남미가 그렇게 살기 어려워도 남미가 숨통이 돌아가는 이유는 축구 때문에 그래요. 맥시코 축구. 미국도 마찬가지고요. 마약은 꼭 마약을 해야 마약이 아니에요.
스포츠가 마약이에요. 왜? 혼자하면 찐맛이 없어요. 우르르한다고요. “얘야, 크리스마스때는 조용히 가족과 함께 보내자.” “내가 세 살인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유치원 애들도 그리 안하는데. 요새. 밖으로 무조건 뛰쳐나가서 밖에 크리스마스츠리 안에서 피자를 먹든지 뭘해야 돼요. 그게 우르르에요. 그런데 그 우르르에 너무 좋아서 어느 정도 좋으냐, 앞에 압사되고 밟혀도 너무 좋아. 이 쾌락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것이 쾌감을 더욱더 돋보이게 만들어요.
옛날 같으면 어떻습니까. 죽은 사람은 역시 잘 죽었고 거기에 참석한 인간도 진작 죽어야 돼요. 거기에 애를 보냈다는 것은 그 집안에서 우사스러운 일이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사회 윤리 기준이 지금하고는 너무나 다른 시대에요. 다른 시대. 바르게 사는 것이 사회로부터 사람대우 받고, 인간의 존재 가치가 있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자기가 나쁘게 살았던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자기 존재가치의 수준을 레벨을 높일 필요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냥 높여버리면 거기서 교회 안에 뭐가 있습니까. 경쟁이 생기지요. 그러면 더욱 더 높은 자가 천국에 근접했다는 스스로 자기가 신학을 만들어내요. 교인들이. 그런 신학을. 착함에 착함에 점점 높으면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용납할 수 있는 거리안에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이 한 번 답변할 차례입니다. 방금 이런 생각, 내 존재가치를 높여서 내 행함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이것 이게 뭐가 나쁩니까? 이게 왜 나쁘지요? 굳이 이게 나빠야 돼요? 이게. 그러면 이리 안하고 이게 나쁘다면 아주 반대로 가서 더 망가져야 돼요? 매일같이 할로인데이 해가지고 주르르 가가지고 압사하고 이래야 돼요? 그게 바람직한 사회에요? 아니면 착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함이 우대받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인식, 이게 뭐가 문제고 뭐가 나빠요? 답변 안 할 줄 알았어요.
성경에 보면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발설 못하는 사회가 지옥입니다. 스스로.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발설 못하니까 억지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옥이에요. 기쁨으로 하지를 못해요. 기쁨으로 들어가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기쁨으로. 기쁨으로 또는 감사함으로 이걸 합치면 자유함으로. 이걸 못하니까 주님께서는 환경 자체를 지옥으로 만들어서 그동안 얼마나 인간이 자기 부정을 못하는 존재임을 지옥에 가서 까발리게 돼요. 지옥에 집어넣어서 까발려요. 자기 부정을 못해요. 자기 부정.
인간의 출생은 오류로부터 출생했잖아요. 창세기에 보면. 벌써 잘못되게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될 것은 전에는 몰랐는데 요게 잘못됐다고 주의 말씀에 호응해서 잘못된 걸 이야기하면 돼요. 그게 주님의 말씀의 세계에 부합되는 현상이라니까요. 부합되는 현상. 지금 여기에 대덕교회 분위기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여기 대덕교회 나오는가 모르겠어. 저자 소개에 나와요? 대덕교회 빠지고 박사교회 나오네. 대덕교회 빠졌네.
처음부터 인간은 오류고, 그 오류의 결과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한 것처럼 흙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변동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도 외면한 내가 나빠요. 외면될 수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니까요. 팩트니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기에 죄인으로 보잖아요. 그럼 우리는 거기에 호응해서 무슨 이야기하면 됩니까. 어떤 이야기하면 되지요? 내가 이래서 죄인입니다. OK? 간단하지요. 궁지렁궁지렁 뒷말 달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면 다 죄인인 것 같으면 우리는 살맛이 없지 않느냐” “방금 뭐라고 했어? 궁지렁. 궁지렁?” “궁지렁 궁지렁”
계속해서 변명하고 뭔가 자기가 노리고 있던 것을 포기가 안 되니까, 이건 뭐 내가 뭐 인생사는 것은 다 내 주위 사람이 나빠서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려버리고 자기 부정이 안 되는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뭐를 지라? 십자가 지라 하니까 자기 부정으로 들어가지 않으니까 무엇과 연결이 안돼요? 십자가와 연결이 안 되는 설교를 하는 교회. 그런 목사. 기둥 뒤에서 쓸 수밖에 없었지요.
그 목사는요,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오직 아는 것은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 외에는 없어요. 이게 왜 목사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릴 때 가정환경이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목사니까 남한테 티 잡히는 일이 없어야 본인발이 선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이름을 등에 입고 마치 이 땅에서 내가 목사니까 하나님의 대리자로 우쭐되고 싶은 그 높아지고 싶은 심보, 악마적 심보, 그것을 바른 설교랍시고 그걸 감추고 있지는 않는지. 그 목사만 그렇다는 게 아니고 모든 목사가 다 그렇다고 보면 돼요. 모든 목사가 다. 목사 사모 없으니까 내가 마음 놓고 이야기한다. 모든 목사가 다 그렇다고 보면 돼요. 목사하고 교인하고 차등을 줘야 교회에서 권위발이 서는데 그 권위발은 윤리발이 된다.
완벽. 더욱 더 말씀을 아니까 교인들은 목사님이 말씀을 아니까 말씀에 부합되는 생활을 할 거고, 목사는 그걸 이용해서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군소리하지 말고 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당신은 할 의무 있고, 당신들은 나한테 충성할 의무 있고, 나는 당신에게 충성 받을 권한이 있다. 그래야 교회가 질서가 잡힌다. 교회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조직이 다 그런 게 아니에요. 병원도 마찬가지고 학교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그럼 제가 이렇게 죽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것을 궁금해 해야 돼요. 그렇다면 그게 그렇게 설교하는 게 나쁘고 비복음적이고 십자가 복음 빠져있고 이런 설교라면 그럼 당신은 그 때 어떤 설교를, 그게 전면적으로 부정되어야 된다면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성경가지고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당신의 대안을 제시해 봐라. 라고 그런 투로 반발 아닌 반발이 들어올 수가 있을 거예요. 반발 아닌 게 어디 있어요. 그게 반발이지. 들어올 수 있지요.
거기에 대해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목사나 교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마음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관 속에 딱 안치하지요. 관 속에. 그 때 예배를 무슨 예배라고 합니까. 입관예배라고 하지요. 자, 입관예배에서 주위의 유족 다 부르지요. 다. 다 가라. 관 속에 사람이 죽었잖아요. 칭칭 감고. 장례사 다 가. 설교자가 있다 합시다. 딱 두 사람 남지요. 죽은 자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될까요. 그 설교를 하면 돼요. 죽은 자에게 하는 설교.
살아서 어떤 것을 희망을 주고 이런 거 없어요. 죽은 자라면 죽은 자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되는가,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또 에스겔이 37장 에스겔이 또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설교할 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죽은 자에게 설교했어요. 듣는 사람은 이미 눈 감고 들었어요. 이미 죽었으니까. 왜 죽은 자로 여겨서 설교를 해야 되느냐 하면, 행함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 행함 때문에 죽었거든요.
행함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이미 행함으로 완전히 돌아가셨다면, 죽은 자의 특징은 도로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요. 대목을 성경을 한 번 봐야겠습니다. 에스겔37장1,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골짜기에 뼈가 한 두 개 있습니까, 아주 많습니까, 뼈가 아주 많지요. 많은데 특징이 뭐냐, 그 중에서 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 인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 그냥 갑시다. 이미 죽었습니다. 가능성 없습니다. 가능성 있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갑시다.”이리 될 게 아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다짐을 해요. 살겠느냐, 다짐을 합니다.
이것을 왜 물으십니까? 산다는 것은 이미 끝났어요. 살지 못합니다. 인간은 출생부터가 끝났어요. 하나님이 죽으라고 이 땅에 살기 때문에 인간은 죽는 이외에는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인간이 살아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 죽었다는 표내는 티내는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라는 것이고 윤리, 도덕이라는 거예요. 그것가지고 못 살거든요. 못 살지만 뭐라도 해보는 거예요.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는 거예요. 그냥 그럴싸하게 거룩해 보이고, 아까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어요? 바리새인이 했어요. 바리새인이 그렇게 해보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참 훌륭한 일을 하지만, 약간 모자란다. 그랬어요? 아니면 느그 애비는 누구라고 했어요? 느그 애비는 악마라고 했어요. 악마기 때문에 거기에 몰입하고 있는 거예요. 그 방식을 몰입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보시기에 악마가 함께 있으니까 이미 그건 하나님의 관계와 끊어졌으니까 죽은자지요.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뭐를 시켜요. 니가 나서서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어다. 했지요. 마른 뼈들아! 이게 진짜 참 실소가 나오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공동묘지에 가가지고 하나님께서 “야, 너 목회하게 해줄게.” “목회 장소가 어딥니까?” “공동묘지다. 가자.” “자, 공동묘지 있지. 설교해. 그렇다고 또 너무 길게 하지 말고. 한 30분 설교해.” 할 때 이미 죽은 자에게 그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행함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들이 죽은 이유가 행함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어느 쪽입니까? 바로 행함 때문에 죽었다고 이야기하겠지요. 행함 때문에.
교회 안 다니는 자식들에게 복음 전한다고 해가지고 엄마가 살살 달래고 하지 마세요. 그냥 공동묘지의 마른 뼈라고 생각하고 들을 일이 없는 것으로 기정사실화시키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됩니다. 귀한 성경 말씀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나도 니처럼 이미 죽었었다. 나도 니처럼 죽었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에스겔37장4절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전도입니다. 사람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요. 시체로 합니다. 시체로 해주는 건 좀 점잖은 거고, 좀비에요. 마구 마구 달려든다고요.
자, 이렇게 됐을 때 제가 묻습니다. 1번, 말씀이 허비되었다. 2번, 말씀이 허비되지 않았다. 몇 번입니까? 답은 보나마나 두 번째지요. 인간들 보기에 말씀허비, 시간허비, 금전적허비, 건강까지 허비 다 됐지요.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전혀 허비된 게 없어요. 그것은 ‘말씀의 자체적인 순환’ 때문에. 말씀은 부메랑이라 합니까. 확 던지면 뱅뱅 돌았다가 돌아오는 거 있잖아요. 말씀은 던진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허비라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던짐으로서 “거봐, 내가 이제 이 지구에 불심판 내려도 너희들 없지. 다 죽은 거 맞지. 그것 봐! 한 명도 말씀의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죽었다 하는 말이 틀린 게 아니고 맞잖아.” 라고 말씀이 부메랑처럼 빙 돌면서 서서히 회수를 하는데, 잠깐만요! 잠깐만! 하고 죽은 자리에서 깨어난 사람 있다 칩시다. 어마야! 화들짝 놀라야 돼요. 저게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았지? 이게 바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2장 38절 한 번 보겠습니다. 오순절이야기에요. 오순절날 하늘에서 성령이 오셨잖아요. 그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해서 어제 수요설교 본문을 이 본문을 뽑았어요. 38절에. 여기에 뭐냐 하면, 성령을 뭘로 받는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을 선물로 받지요. 선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면 앞에 것도 뭐가 돼요? 선물이 되지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고 죄사함 받는 것도 바로 선물의 연속성이지요. 선물의 같은 노선에 있지요.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했는데 그렇게 이야기한 베드로와 12제자 그 사람들, 예수님 살아 승천하셨을 때 알고 있던 그 사람들은 이런 코스 밟았습니까? 안 밟았습니까? 베드로부터해서 이 코스를 밟았어요? 안 밟았어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고 죄사함 받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대로 했어요. 38절에서 문장이 짧지만, 그 안에는 긴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사가 다 담겨있는 거예요.
그 베드로가 예수님과 하면서 성령 받고 난 뒤에 다시 자기의 과거를 뒤돌아 보세요. 전부 하는 것이 회개해야 될 죄사함을 받아야 될 죄만 길게 끌어온 거예요. 죄만. 그러니까 어제 수요설교한 것처럼 우리의 과거가 무엇의 과거로 바뀌었다? 주님이 개입한 과거로 바뀌면서 덮쳐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출생이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신 선물이 되지요. 우리의 출생 자체가. 성령만 선물이 아니고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도 선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필연이 아니고 전부 다 우연한 사건이에요. 나의 출생이. 딸을 원했건만 아들이 태어난다. 이게 뭡니까? 이것도 우연한 사건. 아들을 원했건만 딸이 태어났다. 이것도 우연한 사건.
우리는 모든 것이 우연한 사건의 집합체.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거울로 비쳐보이는 여러분의 육신과 여러분의 모습이 주님의 선물입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노끈으로 묶지는 않았지만. 예쁜 매듭으로는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분의 머리부터해서 매듭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끈이 저 발까지 십자가 모습으로 묶어서 그 통째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 인생에 관여했던 나 아닌 나의 타자들, 타인들, 남편, 자식, 시가집 식구들, 친정 식구도 마찬가지고. 그런 모든 것이 나라는 존재의 선물을 선물답게 하기 위해서 관여된 관계망들이지요. 그래서 당신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인데요. 왜 맞는 말이냐 하면, 당신 때문에는 그거는 흐릿하게 들으시고 뒤에 말, 나 망했다, 하는 그거 진짜입니다. 그거 우리는 처음부터 망하기 위해서 망하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회개할 거리가 있고, 죄사함 받아야 할 대상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나라는 존재를 우리라는 존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선물의 마감은 이제 무엇을 줌으로 끝나버립니까. 성령이 오심으로서 끝나버리지요. 그 성령이 아까 봤던 에스겔37장에 주께서 그 성령이 오실 때 말씀으로 오신 거예요.
어떤 분이 부산강의 마치고 집에 오는데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부산강의 참석하시는 분인데, 강의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참을 수 없어 질문한다. 질문이 뭐냐 하면 성신과 성령의 차이가 뭐냐, 성신과 성령의 차이는 성신과 성령은 다 같이 영어로 되어있으니까 번역할 때 인위적으로 번역하는데 신과 영을 호환해도 바꿔도 되는데 인위적으로 구약의 성신하고 신약의 성령하고 이렇게 한 게 아니냐, 라고 나한테 질문을 한 거예요. 그런 궁금증이 여러분의 없지 않아 있었지요. 뭐가 궁금한 것도 모르지요. 내가 뭘 궁금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성령은 환경이 신약 환경에서의 성령이고, 성신은 구약 환경에서의 성신입니다. 환경이. 하나님의 활동하는 영역이 성신은 구약 때고, 성령은 신약 때입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성신은 미완성이에요. 언약의 미완성이에요. 왜냐하면 새언약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성 속에서의 성신이기 때문에 악신 걸렸다가, 성신 걸렸다가 이게 유도리가 있어요. 왔다 갔다 해요.
그러나 성령은 이미 완료가 다 되었어요. 다 이루었다가 돼요. 십자가에서. 다 이룬 상태라는 것을 확인차 그러니까 완성의 선물. 완성되었음을 선물로 주어진 것이 성령이에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빼고 자시고 하는 것은 이건 없어요. 구약도 아니고 신약이 다 완성이 되어버렸어요. 만약에 성령이 왔는데 빼고 자시고 마음대로 되어버리면 예수님께서 두 번 죽어야 되는 거예요. “니가 그런 소리하는 것은 두 번 죽이는기다.” 하는 거 있잖아요. 나를 두 번 죽이는 짓이다.
주께서는 두 번 안 죽습니다. 십자가 다 이루었다는 말은 심판의 최종 기준이 빰빠빠밤! 확정되었다는 말이요. 십자가 모르면 지옥, 십자가 알면 천국. 이걸 최근에 한 설교가 나와요. 부자가 지옥 갔을 때 동생 걱정해가지고 죽었던 나사로에게 다시 살려내게 되면 그들이 믿지 않겠느냐, 하는데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아니하면 설사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다 할지라도 그 믿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최종 구원의 근거가 그게 아니거든요. 최종 구원의 근거는 내가 뭘 봤다가 아닙니다. 내가 뭘 믿었다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에게 최종 근거가 있어요.
예수님의 선물을 줬느냐, 그 분이. 예수님이 선물을 줬느냐, 안 줬느냐, 그걸로 천국, 지옥 결정은 나는 겁니다. 이번 주일에 낮설교에서 언급을 했듯이 그게 바로 불신자를 더욱 더 분노케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하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거 주면 우리는 믿고 따져보고 믿고 순종이 아니라 순종 백배를 할 수 있는 용의가 되어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십니까? 그럼 순종하겠나이다.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데 왜 그 기회조차 박탈해버리면 이건 하나님의 횡포가 아니냐 이 말이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그 주장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시겠어요? 하여튼 죽은 해골이 말이 많아.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은 뼉다구가 마귀와 결합이 되어 한패가 되어있으니까 이 죽은 뼈다귀가 마귀 말을 계속 쏟아내고 있는 거예요. 마귀 말을. 성경대로 바르게 사시면 여러분, 구원받습니다. 그 대덕교회 목사가 계속 마귀 말을 내뱉고 있는 거예요. 본인도 복음 모르고요. 복음 모르니까 와글와글이에요.
다른 목사는 복음 모르면 약간의 멈춤대고 뭔가 주춤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 대덕교회 목사는 아주 복음 모르는 걸 자신있게 말해요. 이게 복음이라고. 그 확신과 당당한 자신감. 여기에 구원이 있는가보다 해가지고 왔고, 나는 기둥 뒤에서 책 쓰고 있고.
성도나 복음 전하는 사람이나 기본 자세는 이거에요. 왜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걸 말씀에 입각해서 다 노출시켜야 합니다. 왜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말씀은 요한복음5장39절의 말씀처럼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죽은 자가 뭘 노립니까? 죽은 자가 주제에 영생까지 얻겠다고. 영생은 생명나무는 끊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해도 도대체 말을 안 들어먹어요. 인간들은. 왜 그렇습니까?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고집대로 밀어붙여요. 종교라는 걸 만들어서. 교회를 만들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5장 40절 읽어보세요.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아멘이지요. 예수님한테는 오지를 않아요. 부정적인 예수님한테 오지 않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긍정적인 자기의 의견을 들어줄 것 같은 우상적인 예수님한테 오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 교회에서 뭘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바르게 살았으니까 우리도 이렇게 바르게 삽시다. 그게 그 교인들한테는 백프로 알아먹는 설교에요. 그 목사는 더 큰 교회에서 돈 더 준다고 하니까 나갔거든요. 가기전에 목사들은요, 우리 윤희준 목사님은 아주 너무 순수해서 돈에서 초월했을 것이다. 돈에서 초월한 사람 없습니다. 돈에서 초월한 사람 없어요. 더 준다고 갔다 말이죠.
가고 난 뒤에 당장 구할 사람 없으니까 나를 강단에 세웠거든요. 나를 강단에. 그래서 요한복음17장가지고 설교했잖아요. 아직도 본문 안 잊어버려요. 1980년도에. 한40년 전이구나. 설교했어요. 무슨 설교했는가, 주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쫓겨났어요. 이제는 그 교인 숫자 안 헤아려도 돼요. 쫓겨났어요. 쫓겨나도 괜찮아요. 왜? 책 다 썼으니까. 이 책 다 썼으니까.
머리말 봅시다. <안타까운 것은 구원되지도 못한 채 교회만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실상이다.> 이 책을 언제 썼느냐 하면, 이게 재판되어서 1996년도 하지만, 그 전에 썼거든요. 한국교회의 실상이 뭐냐, 구원되지 못한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 말이지요. <과연 실상이 그러한지 탐색작업은 성경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요.> 성경에 근거해서.
그래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동원 다 한 거예요. <그래서 한국교회의 본모습과 통째로 대비해 보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가짜 하나님을 생산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원인도 밝혀져야 돼요. 그 밑에 죽 보면 <구원 아닌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구원이 아니다.> 구원 아닌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복음이 아니지요. 이건 제가 뭘 의식했느냐 하면 한국교회의 200년전의 복음이 들어왔을 때 그 때는 복음이 열정으로 왔다는 거예요.
보자. 복음의 열정인지, 종교의 열심인지 한 번 보자. 보면 복음이 아니에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복음이 아닌 거예요. 천주교 처음 왔을 때 복음이 아니고 지금도 복음이 아니고. 아니에요. 어디 천국에 사람이 모자라서 주께서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주님이 아닙니다. 두 세사람도 나와 함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어차피 우리는 뼈다귀니까. 뼈다귀 갈비탕있지요. 장모님 뼈다귀 해장국집. 외국사람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거. 장모를 죽여서 뼈를 내서 그 국인가 해서. 그 다음에 교회의 본질. 1번 11페이지. <1.교회의 본질과 시대적 위치> 교회의 본질부터 먼저 언급한 것은, 성경은 있고, 뭘 구축하느냐 하면 교회를 따로 구축해야 돼요. 교회를 구축해서 교회의 자체가 이러해야 되는데 기존 교회 역사가 분위기가 으샤, 으샤하는 분위기가 교회를 만들었으니까 이제 이 교회를 그대로 가져와서 성경이라는 엑스레이에 한 번 대비해 보자.
그래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알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교회의 본질의 위치가 뭐냐, 이렇게 보면 돼요. 크게 쓰겠습니다. ‘장벽’, 휀스. 성경에서 교회의 자체가 장벽이에요. 아무나 교회가 될 수가 없어요. 아무나. 그런데 누구나 교회가 될 수 있어요. 왜? 아무나 교회가 되지를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누구나 교회가 되게 하셨어요.
혼인잔치에 아무나 못와요. 그러나 길거리에 나가서 누구나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만큼 아무나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주께서 강조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 말이 맞으려면요, 그럼 인간은 어떤 식으로 교회 만들기를 싫어했던가, 그걸 필히 알아야 되겠지요. 10분 후에 합시다.
안양20231214b행7장38절(외지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시간에서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되어있지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는 것은 인간선에서는 이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아니에요. 그걸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저 남아있는 것은 뭐냐, 말씀 자체가 사느냐, 죽느냐가 중요하지요. 말씀 자체가. 내가 죽어서 좋은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 왔다면 그건 가짜교회고요. 진짜 교회는 말씀이 말씀대로 살아있으면 진짜 교회고 말씀이 희박해지고 말씀을 교인들이 외면한다면 그건 죽은 교회가 되는 거예요. 기준은 성경 말씀에, 복음 말씀에 있습니다.
자,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 참된 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장벽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거예요. 이런 게 어려워요. 하나님의 쓰시는 방식이 휀스, 장벽가지고 하는 거예요. 도저히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쪽에 있는 사람이 저쪽으로 건너올 수 없고, 저쪽에서 건너 올 수 없는 장벽가지고 말씀이 말씀대로 다시 되돌아오는 순환구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벽이니까 이 장벽을 한 번 그려보지요. 장벽이 있다. 이쪽은 뭐냐, 이방인이에요. 이쪽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중에서 극히 숫자가 적은 작은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하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택했다. 택했다. 무엇으로 택했는가, 사랑으로 택했다.
또 이야기한다면 질투. 질투심으로 택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거 다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이방인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해당되면서 택했으니까 이방인은 이 선택된 것에 넘어 올 수 없는 거예요. 왜 이 장벽을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왜 세우느냐, 이 장벽의 시작은 창세기3장24절에 벌써 시작됩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있는 곳에 쫓겨나간 인간이 결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차단시켰지요.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걸 차단 시킨 거예요. 들어오지 말라고.
인간들의 생각은 그 생각이 아니고,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어서 들어오라고 길을 만들어줘야 이게 좋은 하나님이고, 착한 하나님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의 교인들이 그걸 생각하고 교회에 오는 거예요. 이렇게 아까운 시간 다 줄여가면서 그 없는 돈까지 헌금까지 준비하면서 이렇게 정성과 성의를 보였으면 주께서는 성의를 봐서라도 길을 열어줘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만약에 어느 불국사에서 행사를 하는데 시간이 지나서 문을 닫아놨는데 멀리서 전라도에서 와가지고 불국사 들어오려고 이렇게 헌금에다가 이렇게 했으니까 넣어주세요. 하면 불국사 주지가 안 넣어주겠어요? 헌금까지 하겠다는데. 넣어주겠지요. 이게 인지상정.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안된다만 있는 게 아니고 안되는 것도 정이 가면 통한다, 라는 게 인간들의 생각이거든요.
인간들도 자비가 넘치고 인간의 동정심이 넘치고 선한 양심들이 각자 있다면 법으로 안되는 거 맞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게 있는 것이 인간들의 선한 품성이라면 인간보다 더 선한 품성을 가진 어떤 존재. 절대적 존재. 그게 누구지요? 신이라면 인간이 그 하나님의 성품을 약간은 분여받았다 하지요. 분여. 할당받았다면 할당받은 그 최고의 자비심의 결정체가 뭐냐, 신의 속성이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끼리도 서로 정을 통하고 다 법을 넘어선다면 진짜 하나님은 애정사정하면 다 들어주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지요. 그러면 뭐가 의미가 없게 돼요? 에덴동산 동쪽 길은 완전히 차단같은 것은 이건 그냥 하나님께서 그냥 겁주려고 급박하려고 준 거지요. 그냥 실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지요.
보세요. 배후에서 악마가 인간을 얼마나 삶아놨는지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우리도 악마의 생각에 수시로 온천수처럼 터져나옵니다. 눈 한 번만 감아주소. 이런 거. 죽은 뼈다귀 주제에. 마귀가 자꾸 니 살아있다. 가능성있다. 훌륭하게 될 수 있어. 성화되면 천국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자꾸 마귀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장벽이 있습니다.
장벽은 바로 창세기3장24절에 있는 장벽, 그걸로 꽂아놓은 거예요. 이 장벽은 이스라엘 쪽에서 세운 게 아닙니다. 이방인이 세운 게 아니에요. 누가 세웠겠어요? 율법이 세웠어요. 율법이. 율법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율법은 어디에 있는가,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 있었던 거예요. 그 사이에. 그 틈에 있었어요. 율법 때문에 되돌아 갈 수 없어요. 선악과 따먹고 물어드릴게요. 생명나무 선악과 나무 심어놓고 물으면 되겠지요. 얼마면 돼요? 내가 물어드릴테니까. 다시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갑시다, 할 수가 없어요.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야 되돌아갈 수 있어요. 율법을 지키면. 인간은 못 지킵니다. 못 지키면 저주에요. 그래서 이 율법을 꽂아 넣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있지만,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율법에 준해서 이스라엘은 성전되었고, 이쪽의 이스라엘이 성전됐다면 이방인은 어떻게 돼요? 선택되지 못했지요.
지금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는 것을 신약에서는 뭐라고 한다? 교회라고 한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교회가. 교회 자체가 장벽이 되는 거예요. 교회 자체가. 교회 자체가 장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만약에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자체가 교회가 돼요. 그리고 이방인들은 단 한 명도 구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들어올 수 없어요.
그런데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면서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고 주신 율법, 말씀, 언약, 약속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약속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이스라엘 내부에서 뭔가 버짐 또는 구멍, 또는 상처, 뭔가 질서가 허물어지는 듯한 그런 증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율법으로 처음에 율법으로 전체를 일괄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뻥! 뻥! 하고 이스라엘 내부에 원래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이스라엘로 병들어가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 거예요. 이게 율법이 주어지면서 생긴 후유증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율법과 이스라엘이 합체되는 조건으로 이스라엘에게 줬는데 이게 합체되지 않고 드디어 율법의 이탈현상이 이스라엘 내부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자, 율법의 이탈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부에 이탈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주는 시그널같은 신호를 계속해서 주께서 보내줬었습니다. 그 시그널 역할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장벽을 넘어선 사람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는 현상이 일어나요.
룻에게서, 또는 라합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전부 다 뭡니까? 이방인들이지요. 장벽 때문에 들어올 수 없는 이방인이 이스라엘 내부에 드디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혼합체가 되는, 처음부터 혼합체였어? 라는 인상을 갖게 되지요. 이스라엘은 눈치를 챘어야 돼요.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만드신 적이 없다는 것을 눈치를 챘어야 돼요.
하나님은 언약을 위한, 완전한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택한 거예요. 무엇의 완전체냐 하면, 장벽의 완전체. 또는 완전한 장벽.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라고 예수님이 이 말씀 하실 때 그 말씀을 하시는 근거는 뭐냐, 예수님의 자신의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내 말이. 내 말을 너희에게 전하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이사야6장에서 이야기할 때 그 이사야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남북이 이미 갈라진 상태지요. 이제 남쪽에서는 북쪽 이스라엘은 날아가버리고요, 공중분해 되고, 남쪽도 서서히 허물어지는 그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되어있지요. 십분의 일이 남아있을지라도 짤려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그루터기밖에 없다. 이사야6장이야기입니다. 그루터기 밖에 없지요.
그럼 그루터기는 왜 남겨 놓았는가, 방금 남겨 놓기 위해서 한 거예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는 계속 뭐냐, 남은 거, 남은 거, 남은 것의 연쇄과정에서 계속 이어지겠지요. 그 이스라엘의 남은 자. 오직 몇 명이겠어요? 남은 자. 두 명? 세 명? 몇 명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남은 자.
율법을 유지하고 있는 장벽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최후의 남은 자는 누구겠어요?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는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을 구하러 왔지, 이방인을 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의 대상이 세 개가 돼요. 첫째는 뭐냐, 첫째는 역사적 이스라엘. 둘째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 세 번째는 언약에 의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국가 민족의 형태가 이 세 가지에요.
기존의 이스라엘, 이방민족, 그 다음에 언약에 의해서 생겨진 진짜 이스라엘. 진짜 이스라엘은 민족 혈통이 이방인이냐, 아브라함의 혈통이냐, 이런 것을 전부 다 극복한 거예요. 그 조건을 취소시키는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언약적 이방인 이 사람들은 이쪽 역사적 이스라엘, 이방민족한테는 뭐가 되느냐 하면 외지인이 돼요. 외지인. 외부 사람이 돼요. 외부 사람.
아, 외부 사람, 외지인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그 외부인의 반대말이 내부인. 우리끼리이지요. 우리끼리. 우리끼리 통하는 이 말을 우리끼리는 아는데 바깥에 나와서 우리끼리 말은 바깥에서는 통하지를 않잖아요. 한국인이 한국인끼리 이야기하면 아는데 베트남사람에게 하면 우리 한국말을 하면 베트남사람 알아봐요? 못 알아봐요? 못 알아보지요. 이게 세상에서 말하는 베트남 사람은 한국사람에 비해서 외지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외지인은 제3의 종족이라 할 수 있는데 외지인은 반대입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통하는 그 말의 뜻을 외지인이 비로소 알아요. 제가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왜 저들이 지옥 갈 수밖에 없는지. 주의 언약과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는데 그 뜻은 일방적으로 잘못된 뜻으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지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그걸 간파하고 있는 거예요.
외지인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하거든요. 아까 성령을 뭐로 받는다 했습니까? 선물이지요.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주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요. 주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주의 말씀이 무엇을 함유하고 있는지를 알아요.
안다고 하니까, ‘갑자기 내가 뭘 알고 있지? 나, 지금 모르는데. 깜깜하네.’ 이런. “다 알지요?” 하면 “뭐? 나 모르는데.” 부산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지요. 남편이 “니, 성경공부 좀 해라. 성경 그렇게 몰라도 돼?” 할 때, 아내가 들어요. 들으면서 남편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성경공부해서 많이 아는데 나는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등신이 돼. 모르겠다.” 그게 정답이지요.
자, 외지인이란 외지인이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이 홀로 행하셨다는 사실’ 이걸 알아요. 왜냐하면 외지인중에 최고 외지인은 이 지구상의 사람이 아닌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그 인간 지구 밖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있는 인간이 쫓겨난 그 동네에 함께 계신 분. 생명나무와 함께 계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분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같이 생명나무에 들어오게 된 사람은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는 거예요. 예수님은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하늘나라 들락달락 하시면서 다 이룬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도 처음이고, 전부 다 그런 분을 성경에서는 주님이라 하거든요. 그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우리의 주님이라 하잖아요. 계획하신 것도 마감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주께서 다 하신 거예요. 그 점을 누가 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만 그 점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 할 때는 어떻게 해석한다? 반드시 어디를 경유해요? 주께서 다 이루심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 해석할 때의 시작점은 왜 우리는 못하는가, 왜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는가,부터 출발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오해들을 우리가 양산하고 있는가를 아는 거예요. 그래야 주님께서 니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그러한 평가를 가슴에 맞바람을 우리가 품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품고 성경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 우리는 성경 보면서 항상 내가 안 놓치려는 것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이 말씀을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 말씀을 지켜서 이런 것, 저런 것 지켰습니다. 내놓을 만한 어떠한 존재가 되겠다는 그 의도. 그 의도에서 우리는 지금 꾸준히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지요. 주님이 다 하셨는데 우리는 주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이 말씀을 지키면 되잖아. 지켜서 구원받으면 되잖아. 이런 식이에요. 예수를 믿어라. 아! 믿지. 믿습니다. 이리 되거든요. 믿음이 문제에요. 믿음이. 믿습니다, 나오는 게 문제에요. 문제.
인간은 자기 행위를 믿게 되어있어요. 마귀에 의해서. 자기 행위가 아니면 안 믿게 되어있어요. 자기 행한 것만 기억한다고요. 그게 우리의 과거를 형성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행한 것만 해야 돼요. 주의 모든 말씀에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겁니다. 없는 사람이 있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없는 사람이 있다. 없다, 있다, 서로 반대에 있는데 이건 한 문장에 같이 쓰고 있잖아요. 없는데 왜 있지? 없는데 왜 있다고 해요? 없으면 없는 거고, 있으면 있는 거지. 왜 없는 사람이 있느냐. 외지인이거든요. 외지인.
인간들이 서로 알고 있는 인간세계가 아니고 그 바깥에 없는 분이라 말이지요. 그럼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그거 잘됐네. 그럼 이 땅에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 있는 것도 알고, 우리에게 없었는데 우리에게 나타난 그 분도 같이 알아서 둘이 보태면 더 온전한 진리가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아신 분이 쫓겨나갔어요. 쫓겨나갔다고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 댕강. 쫓겨나간거예요.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를.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이 있다고 보지를 않아요. 인간 배후에 누가 있다고 봤습니까? 인간 속에 이미 악마가 접수했어요. 이미 인간이라는 이 나이트클럽을 이미 악마가 접수했거든요. 조폭. 하늘나라 마동석이 와야 돼요. 어디서 까불고 있어. 한 번 패야 돼요. 악마가 인간세계를 다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악마가 지배하면서 나오는 가치관, 내 목숨의 가치는 보잘 것 없는 게 아니라는 대원칙. 대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할 때 듣는 사람 이 원칙에 깔고 전해야 돼요. 그래서? 그래서? 내 가치가 어떻게 높아질 수 있다는가를 그 이야기를 해주셔야지. 이런 식이에요. 내 가치를. 그러니 이건 죽은 뼈보다 더 못해요. 죽은 뼈는 아예 아무소리 안하고 있지요. 이건 말이 많아. 대들고. 진짜 마동석이 한 번 불러서. 그러니까 입다물라는 말이야. 그걸 누가 입다물라는 그 고백을 누가 했습니까? 욥이 고백했잖아요.
욥이 말이 많아.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 고난받습니까?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게. 아직 내 목숨의 가치는 하나님이 보장해줬잖아요.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가치있다 이 말이에요.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하나님이. 불교신자 같으면 부처님이 나를 니 보살, 부처라고, 보장해줬다는 거예요. 우리교회 목사님이 내가 신자라고 인정해줬다는 거예요. 끝까지 내 목숨의 가치를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고 이건 귀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아, 이 성깔 죽어야 없어질 거예요. 벌써 복음 들을 때, 인상 보면 알아요. 이게. 강의중에 뛰어나가기도 뭐하고, 좀 참고. 이런 인상 있잖아요. 그런 인상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니가 뭔데 내 존재 가치를 모독하느냐.’ 지금 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요한복음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듣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게 틀린 말입니까? 기둥 뒤에서 하던 말을 강대상 앞에서 했다 말이지요.
제가 노래 가사를 하나 쓸게요. 김민기의 작사.작곡, 양희은이가 처음 불렀던 노래 <아침이슬>이라는 가사 내용이에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긴밤 지새우고, 한밤중을 참았어요. 풀잎에 맺힌, 아침에 풀잎에 맺히기 위해서 긴밤, 어둔밤 힘든 세월을 끝내 이기고 이겼다가, 아침에 하니까 진주보다, 이슬로 보지 말자. 값진 진주가 하나 맺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파를 견뎠습니까. 그 세파를 진주보다 귀한 아침 이슬처럼. 그 다음에 내 맘에 서러움이 태양이 묘지 위에 태양 떠오르고, 데모 노래로 나오는데. 이게 방금 우리가 배웠잖아요. 이게 한마디로 뭡니까. 내 목숨의 가치가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노래가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가 잠자고 있었던 내성을 건드린 거예요. 누가? 마귀가. 내가 이렇게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고 이렇게 살지만,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은 무시당한 자격도 안 돼요. 장모님뼈다귀해장국이 무슨 뭘 그냥 뼈인데, 무시고 뭐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이미 죽었는데. 그런데 죽을 건 죽더라도 아직은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고집이에요. 이게 지금 외지인이 아니고 내지인이래서 그래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태어날 때 받았던 그 언어가 인간의 언어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은 주의 말씀을 무슨 뜻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끼리 통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이라는 게 인간언어로 되어있잖아요. 인간의 언어로 되어있으니까 얼씨구나 하고 지키자. 고귀한 가치가 말씀을 만나서 비록 힘든 긴긴밤이지만 이슬처럼 진주처럼 빛날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진주인가. 안 되겠다. 노래를 들어야겠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가사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자기의 목숨에 가치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지를. 눈물이 확 쏟아져요. 세상이 나를 안 알아주는데서 오는 서러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진주하고 자기 마음을 일치시키잖아요. 죽었지만 태양은 떠오르는 거예요. 어딜 가는데? 광야에 세례요한 있어요? 젊을 때 양희은 노래입니다. 양희은 목소리에요. 기타치고 청바지 입고 그 때 양희은이에요.
이게 인간 죽을 때까지 이 마음이에요. 죽은 묘지 위에 태양은 있지만, 그걸 하나의 시료로 보는 거예요. 내가 더 연마될 수 있고 더 우수할 수 있고, 더 훌륭할 수 있는 거. 나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곳은 교회지요. 교회가서 말씀을 갈고 닦으면서 하나님 보란 듯이 “하나님, 저 보세요. 이런 식으로 단련하고 연마하고 있고 아침이슬 같이 진주처럼 아름답게 연마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당신이 보내신 목사들이 가르친 성화론이거든요. 사실은 바리새인 뒤에 마귀가 있는데. 주의 말을 알아듣지를 못해요.
뭘 빠뜨렸습니까? 장벽을 빠뜨린 거예요. 십자가를 빠뜨린 거예요. 십자가를. 구원될 자격도 없고 지옥가야 마땅해요. 장벽이 선물로 주지 않는 한. 장벽 자체로 선물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 장벽으로 주어집니다. 십자가 자체가 장벽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가치를 보존하는데 거기에 집착하다가 주님의 장벽이 왔을 때 그 장벽을 우리는 비로소 구경하게 되고 그걸 마주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구원은 누가 했다? 그 장벽을 홀로 넘으신 예수님이 넘으셨다는 사실을 장벽 넘어 에서 주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선물이에요. 십자가가.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랑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십자가라는 장벽. 따라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설교하고 난 뒤에 하는 말이 28장26절,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왜? 그동안 사도바울이 뼈다귀보고 설교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놀라는 것은 분명히 뼈인데 뼈가 왜 이 말을 알아듣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신기한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따라서 내린 결론은 뭐냐,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어떤 능력? 말씀이 말씀으로 회수하는 과정에서 누구 하나 얻어걸린 거예요. 부메랑이 돌면서 하나 얻어 걸린 거예요.
그냥 건짐을 받은 거예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선택하듯이 누구 하나 선택된 거예요. 뽑혀 나온 거예요. 이게 바로 말씀이 와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돌아가는 이 원칙. 그 안에 흐르는 것은 모든 것이 시작도 주님이고, 모든 일도 주님이 혼자 했고, 마감도 주님이 하셨다는 그 원칙이 말씀 안에 그 사연이 담겨있어요.
그런데 11페이지에 보면 한국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보수신학이에요. 보수 신학. 자, 여러분, 신학이라는 게 왜 필요한가, 성경신학, 조직신학, 목회신학, 실천신학, 신학을 크게 네 종류로 나눠요. 실천신학 상담학 같은 거. 목회신학은 교회 예배당 등록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런 거. 상담학도 사실은 목회신학에 포함되고 실천신학이라 하는 것은 선교, 전도하는 거를 실천신학이라 하지요.
조직신학은 하나님론, 구원론, 이성적 논리를 가지고 집어넣어서 정리하는 것. 성경신학은 성경의 헬라어, 히브리어, 그거 파헤쳐가지고 그 원뜻이 원래 헬라어, 히브리어, 원뜻이 무슨 뜻이며, 그것은 전체 맥락에서 어떤 뜻을 갖고 사용했는지 그걸 연구하는 게 성경신학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신학교 가고 싶어요. 지식이라는 욕구가 확 올라옵니까. 알면 알수록 더 무식해지면 천만다행입니다.
그래서 14페이지에 밑에서 10번째, <교회는 역사와 정황 속에서 십자가 보혈의 위대성이 날로 더 짙어짐을 인식하고 동시에 나날이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해야 된다.> 점점 더 보혈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는 거예요. <우리의 옛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근심하고 계시는지를 드러내심으로서 건방지고 교만하여 신처럼 되려는 우리들의 의향을 꺾으신다. 이 하나님의 아픔의 전달은 구름 위에서 외치는 일방적인 하늘의 소리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비화, 성령의 오심,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겸손(왕의 신분으로서의 종 노릇)을 통해 추진하신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같이 공유해야 그게 교회다 이 말이지요. 아까 했지요. 내가 나의 문제점을 내 입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스스럼없이 나와 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 아는 교인들끼리 입다물고 말을 안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제가 보기에는 내숭 떠는 것밖에 없어요. 그럼 내숭 떨면 안되느냐, 떨면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내 존재의 가치가 이게 손상이 가기 때문에 그래요. 내 존재 가치가. 아침이슬 못돼서 환장할 일 있습니까.
그걸 흔한 말로 “부끄럽잖아. 우사스럽잖아.” 이런 거. “그거 남들이 알면 내 얼굴 못 든다.” 원래 얼굴 없어요. 원래 얼굴 없는 거예요. 또 이런 사람 있어요. 그걸 과거에 되지도 않는 일을 또 떠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또 십자가 자랑하는 게 아니고 지 못난 걸 자랑하니까.
15페이지 중간에, <주님을 본받아 낮아지려하지 않고 높아지려고 노력한다. 제대로 가르치자면 이렇다. “여러분,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신의 원초적인 죄가 다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악마가 여러분을 항상 조정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그러한 존재인 것을 날마다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한테 손해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주님 것은 하나님께 영광된 분이 낮아졌지만, 우리는 원래 애초부터 낮아져야 될 자가 낮아진 거니까. 이건 당연한 것이지 뭐 그것 가지고 대단한 일 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15페이지 밑에 세 번째, <우리는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 된다. 우리는 마땅히 진노의 대상이고 지옥가야 될 죄인이다.>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이방인 이지요. 이방인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려주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 자체가 장벽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지옥가야 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 올 때 바리새인이 하는 거 있지요. 나는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그리고 마태복음8장에서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할 때 그 백부장이 이방인이에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지요. 천국의 본 백성들은 “다 나가! 니는 끝났어!” 다 쫓아내고 그 자리를 누가 채운다? 나를 믿는 이방인이 채워진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차이가 없어지고 바로 십자가라는 언약에 의해서 새로 소집되고 모집된 집단, 그것이 주의 율법의 완성과 연계가 돼요. 율법이 완성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것은 어려운 이야기했는데, 다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진짜 교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뭐라 했습니까? 장벽. 진짜 교회가 장벽 노릇, 장벽 기능을 해요. 그래서 장벽 기능을 하기 때문에, 장벽 기능을 하게 되면, 아까 한 거 세자로 하면, 외지인이 돼요. 외지인.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외지인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아주 박해하고 핍박했고 추방했지요. 똑같은 대우를 누가 받아요? 오늘날 성도들이 받는 거예요. 주님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아는데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이 오히려 자기들의 하는 일에 동의가 안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아웃사이더라 하지요. 소외됐다. 배제됐다. 우리동네 사람이 아니니까 “나가!” 이리 된 거예요.
성도도 똑같은 대우를 가정에서부터 직장, 교회, 모든 모임에서 성도가 그런 대우를 받아요. 또 이상한 짓해서 교회에서 나가라 그것 때문에 나가는 건 아니고요. 뭐냐 하면 그 모임 자체에 인간의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 때문에 자기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쪽에서 추방되는 현상. 그 현상을 받게 될 때 성도로서의 당연한 조치를 받는 거죠.
이것을 저는 특정교회를 예로 드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런 경험을 하라는 거예요. 가정에서. 엄마가 생각해서 자식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식이 거부하지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그 자식이 육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엄마, 아빠 육에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육적인 아브람의 자손이라서 그래요. 육적인 자손. 그래서 엄마가 어떤 잔소리를 하던, 아빠가 어떤 잔소리를 하던 간에 안에서 측정을 판단을 해요.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느냐, 내 가치를 무시하느냐, 그걸 판정해서 무시하면 단호하게 거부해요.
그리고 이런 소리합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성공해서 엄마가 훌륭한 자식을 뒀다는 것을 엄마 자랑으로 내가 자랑스런 인간이 되어 볼게.” 그런 식으로 큰소리 쳐요. 그럼 엄마는 속으로 이야기하지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냐. 뭐든 니 맘대로 되는 줄 알아?’ 안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욕망은 인간의 욕망보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그래요. 속도가 빨라요. 밋밋한 휴대폰. 할아버지들이 쓰는 휴대폰. 이걸로 해가지고 좋사오니 하다가 폴더 이런 게 나오면 와~~ 이런 휴대폰이 다 있느냐, 하지요. 5G나오고 그러면, 속도가 인간의 욕망이 세상의 욕망을 못 따라가니까 한 번 치고 인간은 엄마말 아빠말 다 때려치우고 그 욕망 따라 가는데 바쁜 거예요.
그러니까 중소기업은 안 가는 거죠. 왜? 그 욕망따라 가려면 그 돈가지고는 욕망을 달성할 수 없기때문에. 그런데 큰 소리는 되게쳐요. 큰 소리는. “엄마 실망 안 시킬게.” “엄마가 원하는 게 뭔데?” “나는 밥 한 끼만 줘도 괜찮은 존재입니다.” 라고 이렇게 자기의 존재가치를 아는 걸 엄마가 원하는데 지는 크게 성공해서 엄마, 아빠의 자랑거리가 되겠다는 거예요. 자랑거리가 되는지, 나중에 영원히 결별하는지 모르지요.
18페이지. 진도 빨리 나간다. <2. 성경과 교회> 제목이 뭐냐,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이냐, 라고 설명하기 위해서 이 대목을 쓴 거예요. 19페이지. <구약에서 선택받은 백성의 의미> 이렇게 있지요. 19페이지 위에서 4번째 줄에 그 당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어떤 정의를 내렸느냐 하면, 교회란 하나님과의 고난에 같이 동참한 하나님의 고난입니다. 백성 고난에 하나님이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한 백성을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무슨 교회라고 하는가 하면, 광야교회라고 하지요.
광야교회는 누가 이야기했는가,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집사가 광야교회라는 말을 했어요. 광야교회라는 말을 할 때는 다른 말로 하면 고난교회. 교회란 고난 받는다. 주님의 고난에 연속체다. 해서 사도행전7장38절에서 광야교회라고 한 겁니다. 그 스데반집사가 모세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광야교회 나온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는 어떤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었나, 19페이지 중간에 문장이 나와 있지요.
19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예수님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 당대의 유대인의 일시적 감정의 흥분의 발로가 아니라 구약 전체에 흐르는 모든 부정적 요소의 사상이 드디어 진짜 하나님과 만났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과 만났을 때에 거기에는 살해당, 살해사건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말이지요.
내가 믿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이 만났을 때 살인사건이 일어나게끔 우리는 이 땅에 육으로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나쁘게 먹은 게 아니고 잘못된 엉터리 책을 봐서가 아니라 타고난 게 우리는 나의 가치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는 식으로 타고났고 진짜 하나님은 그거와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스파크 일어나면서 내 가치를 포기하는 한 당신을 믿지 않겠다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을 대접할 수밖에 없고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을 우리는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 새삼스럽게 내가 나쁘다가 아니라 회개라는 말은 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 환경 자체가 달라졌음을 내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환경이. 예수님을 죽인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는 그런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인식이 발생되는 거예요. 이게 회개에요. ‘아~ 이게 상황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판사,검사 시험에 합격했다. 또는 회사가 너무 잘되어가지고 상장해서 주식이 막 오르고 그냥 막 재벌집에 들어간다. 라는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을 때 우리 주위에 일어났을 때, 그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상황이 바로 예수님을 배척한 상황이라는 감을 잡을 때 그 사람은 회개하는 상태에서 사업을 하고, 농사를 짓고, 애를 키우고 뭐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상황 전체를 한꺼번에 아는 거예요. 그게 회개에요. 한꺼번에 아는 거예요. 보통 수상한 동네가 아니다. 이 세상이. 주님께서 불태울 만하구나! 그렇다면 하루 하루 사는 이것은 기적이고 은혜다. 은혜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계속해서 은혜가 이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의 장벽으로서 휀스로서 가정에 주께서 꽂아놓은 겁니다. 성령을 주셔가지고 니가 예수님 역할, 교회의 역할, 하나님의 그 생명나무 따먹지 못한다는 그 천사의 역할, 한꺼번에 니가 그 지점에서 다 해보라는 겁니다. 그 고난을 받는데 20페이지에 등장한 사람이 아브라함, 요셉, 모세, 같이 있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겨했으니 이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11장24절, 25절, 이런 거 좀 액자해서 만들어놔도 괜찮아요. 자기 존재가치를 지키는 사람한테는 확 집어 던져버리겠지만. “니는 왜 매사가 부정적이야!”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돼요? “니는 주제파악도 못하고 왜 그렇게 긍정적인가, 뭘 그리 긍정적이야? 하나님은 죽었는데 우리 인간은 헤헤거리고 있다. 지금. 뭐가 그리 잘났어?” 이리 하지요.
바로 우리가 외롭지 않은 것은 구원받은 천국 가 있는 선배들이 바로 그 고난의 길을 밟아왔다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고난이 있는지 그건 21페이지부터 다음에 시작해야 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파악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이 누군가 아직도 우리는 어떤 성질에 매여있는가 갇혀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주께서, 성령께서 도우사 갇혀있다는 사실, 묶여있다는 사실조차도 자유로 느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