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1124a 누가복음23장 28절(고장난 인생)-이 근호 목사
<기독교의 허상> 이 책 최대로 어렵게 읽기. 이걸 왜 어렵게 읽어야 되느냐 하면 영적 싸움이거든요. 육적 싸움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에요, 복음의 싸움은. 영적 싸움의 대상 가운데 교회가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복음을 방해하는데, 교회가 복음에 대해서 방해해요.
이것이 어려운 것은 복음에 대해서 교회가 방해하고요.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어디까지 나가느냐 하면 내가 복음을 방해해요. 내가 방해하죠. [교회가 (복음을) 방해하고 내가 방해한다.] 그렇게 되면 영적투쟁에서 이 내가 복음 편에 과연 끼어들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내가 하나님과 한 편이 되어서 세상에 있는 교회와 세상에 대해서 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기독교의 허상>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나도 알지, 기독교가 허상인 거. 나는 복음 편에 서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허상인 게 잘 보여. 엉터리 교회 아주 실컷 두들겨주자.’ 뭐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그렇게 이 책을 쭉 읽어보게 되면, 실은 이 책이 우리 자신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내가 싫어하는 적을 설정해놓고 그 적에 대한 공격용의 내용으로 왜곡될 수가 있습니다.
나까지 포함해서 복음의 적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되죠. 그렇게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돼요. [복음이 나와의 만남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야 고장 날까? 내가 어떤 식으로 살면 내가 고장이 나겠느냐?]
새로운 차를 구입했을 때, ‘어떻게 하면 저 차를 잘 유지해서 오래 타도 고장 안 나겠나?’가 아니라 ‘이 차를 언제 일찌감치 고장 낼 수 있는가? 그 방법이 뭔가?’를 연구하면서 차를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은 의식이에요.
그런 사람 있습니까? ‘나 이 땅에 태어났다. 한 평생 산다. 나 어떤 식으로 하면 살아가는 내가 망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못하죠. 그런 생각을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복음은 전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다. 나는 지옥에서 한 철 보낸다.] 이게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에요. 지옥에서. 그래야 영적 싸움이 돼요. 주님께서 세상과 영적 싸움을 할 때, 그 세상 속에 우리 자신도 포함이 되어 있단 말이죠. 우리 자신도. 그런 것을 좀 감안해주고 우리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이걸 감안 안 해버리면, 하나님 믿으면 믿을수록 자기 고생한 탓을 하나님께 돌릴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방치하는 것 같아. 그렇게 내 생각과 주님 생각 사이에 틈이 생겨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성 좋은 내가 참지.’ 하고 그걸 참아버려요. 참아버리니까 이 생각은 마귀의 생각과 동일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아먹은 게 아니고 아주 참고 참았다가 나중에 마지막 순간에 결국 예수님께 복수하잖아요. 파는 것으로 복수하잖아요. 돈도 얼마 되지 않는 은 삼십 냥 가지고 복수해버린다고요.
한번 정리해봅시다. 복음은 이 세상이 지옥이다. 여기 악마가 있으니까 영적 싸움을 하는데 나는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내가 아닌 타인과 싸우는 거예요. 내가 아닌 타인과 싸우게 되면 이 싸움의 목적은 뻔해요. 내가 건재하는 거예요. 내가 멀쩡한 거. 내가 고장 안 나는 거. 하나님 믿고 난 뒤에 복음 알고 난 뒤에 내가 더 우수한 존재가 되는 거. 이 싸움을 인간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의도와 복음이 만났을 때, 이미 나는 나를 지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대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인생이 펼쳐지지 않으면 예수님이나 하나님마저 탓을 돌릴 수 있는 원망의 대상이 되죠.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뭘 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을 했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본색 또는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그곳이 광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우리 모든 인생을 나그네 인생이라 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들어 “이 세상은 나그네 인생입니다. 이 땅에는 우리의 본향이 없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들은 이 땅에서 본향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본향을 찾는 우리는 뭐가 돼요? 이 땅에서 본향을 찾지 않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이 땅에서 안정적인 내 자리를 확보하겠다 하는 것은 결국 이 사이에 대립이 생기죠. 그러면 영적 싸움은 날아가버리고 오히려 내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요모조모 따지면서. 제가 하나님한테 이거해주고 이거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건 뭡니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리고 복음은 인간들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죠. 그럼 인간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복음은 인간들이 나를 멀쩡하게 만들기 위해 타인과 싸운다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화시키고 복음은 영적 싸움을 하는 거예요. 영적 싸움을. 그렇게 되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면 이렇게 해요. [의도적으로 불화를 일으킨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불화를 일으킵니다. 의도적으로.
이 <기독교의 허상>을 교재로 해서 강의할 때, 여러분 생각에는 하나 읽고 설명한다고 생각이 들겠지만 저는 강의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단어를 뽑아내요. 예를 들면 ‘머리글’ 봅시다. 초반에는 페이지 수가 나타나지 않고 18페이지부터 나와 있는데 ‘머리글’ 다음 쪽, 마태복음 10장 34-39절 찾았습니까? 그 대목에서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다음 줄에 나온 것은 ‘연락 사무소’라는 단어 나왔죠. 그다음 밑에서 5번째 줄, ‘결별’ 나오죠. 그다음 밑에서 3번째 줄에 ‘민중들의 스타’.
그다음 쪽 봅시다. 페이지수가 초반에 안 나와서, 그다음 쪽 중간에 보면 ‘개나 돼지’ 나오죠. 그다음 쪽, ‘억울한 소리’ 단어 나오죠. 그다음에 ‘하소연’ 나오죠. 단어가. 그다음 ‘예수님의 눈물’ 바로 앞에 쪽, 거기 보면 ‘업소’라는 단어 나오죠. ‘낭만’ 나오죠. 마지막에 ‘신의 각혈’ 나오죠. 2007년 아니고 2008년 7월 7일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의 눈물’ 나오죠. ‘예수님의 눈물’ 봅시다. 책 읽기 쉬워요. 중간에 ‘허덕거림’ 단어 나오죠. ‘우량품’ 나오죠. ‘고액으로 사 간다’, 제일 밑에 ‘성화’. 이제 다음 쪽부터 페이지수가 나오는데 p.18 보면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눅23:28)’ ‘예수님은 그들의 종말이 애처롭다’ 이렇게 단어를 찾아보는 거예요. 단어를.
왜냐하면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게 불안한 것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그래요. 적절한 단어. 적절한 단어만 찾으면 인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호한 단어 말고 적절한 단어. 적절한 단어가 세상을 밝혀줘요. 여러분,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사람 있죠? 그 사람은 자기에게 딱 맞는 적절한 단어를 못 찾아서 그렇게 흔들리는 거예요.
찾질 못하니까 이 단어 가져오고 저 단어 가져오고 계속해서 끌어 모을 때까지 끌어 모으는데 그중에 어느 것이 나하고 맞는지 맞춤이 안돼요. 홈쇼핑에서 옷을 하나 샀는데 이 옷이 아닌 것 같아서 바꿨지만 또 그것도 안 맞고. 액젓 하나 사는데 새우젓 액젓 했는데 다른 게 오고, 이거 묽은 거 말고 약간 덩어리 있는 거, 이런 거 있잖아요. 인간의 평생은 맞추기 한다고 세월 다 보내요. 내게 딱 맞는 거.
적절한 단어를 맞추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세상에 떠도는 단어를 내가 임의로 선택했다는 그게 화근이에요. 이게 문제점이 돼요. 왜냐하면 그 단어 고를 때 의도가 고장 안 나려고 뽑기 때문에 뽑는 것 자체가 벌써 본인이 실수한 거예요.
이 두 단어 중에서 여러분들이 어느 단어를 뽑을지 생각해보세요. ‘성공’ 이 단어를 뽑기 원합니까, ‘실패’ 이 단어를 뽑기 원합니까? 성공을 원하지, 실패를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이 지옥 구천을 헤매듯이 계속 평생 지옥을 헤매는 거예요. 무슨 싸움한다고? 남들 붙잡고 나를 지키는 싸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동네가 지옥이에요. 그렇게 지옥에서 한 철 보내다 나중에 죽게 되고. 끝까지 사람들은 죽으면서도 ‘내가 왜 죽지? 왜 살았지? 나는 누구지?’ 이런 것을 한꺼번에 물을 수 있는 그런 단어를 찾아내질 못해요.
그러면 아까 그 모든 단어, 이것을 하나로 집결한 단어를 제가 강의하면서 벌써 제시해드렸어요. 그 단어가 뭐였습니까? ‘복음’이죠. 영적 싸움을 할 때 ‘마귀하고 예수님하고 싸운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는데, 그렇지 않고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바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무엇을 전파한다고 했습니까? 기쁜 소식, 복음을 전파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 기쁜 소식, 마가 기쁜 소식, 누가 기쁜 소식, 요한 기쁜 소식이죠.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어떤 소식이 들어가요? 기쁜 소식이라고 보면 결국 어디로 이게 모아지는데, 모아진다는 단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수렴(收斂)’이라 해요. 한쪽으로 모아지는 거예요. [일관성 있게 모아지는 국지적 지점]. 이 땅에 특정 지점. 다른 말로 하면 [극소화된 국지적 일관성].
같은 말인데요. ‘극소화된 국지적 일관성, 진짜 극소화된, 극히 작게, 최고로 작게’ 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 말도 적당치 않아요, 복음에 대해서는. 작은 정도가 아니라 없어지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없다는 0보다 더한 무엇이에요. 마이너스(-)로 가요, 마이너스(-)로. 그런 지점이 있다고요.
이 세상이 평면이라 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 평면 안에서 헤맨다고요. A지점, B지점, C지점에서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사는지 돌아다니는데, 이 평면에 구멍이 나 있으면 사람들은 안 가요, 빠져버리니까. 여기 빠져죽으니까요. 그럼 이건 실패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선택 대상치 후보감에 아예 들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떤 인간도 가기 싫어하는, 죽는 것이 늙어 죽는 게 아니고 우연히 차 사고로 죽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죽으신 이 지점, 0보다 더 낮은 마이너스(-) 지점에 극소화된 국지적 특정 지점을 주께서 주신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 이 말이에요. 복음.
그럼 우리가 설명해야 될 것은 뭐냐? 일관성이거든요. 일관성 있는 거거든요. 복음이 일관성 있는 극소화된 국지적 특수한 지점이잖아요. 그럼 일관성을 제가 한번 표현해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있음을 견지하기 때문에 유지하기 때문에 마이너스(-)보다 플러스(+)를 좋아해요. 더하기를 좋아한다고요. 집에 자꾸 사 모으고 그러는 게, 돈이 생기는 걸 좋아하지, 날라가는 건 좋아하지 않잖아요.
그러면 우리 스스로 물어보는 거예요. 플러스(+)냐, 아니면 마이너스(-)냐? 어느 쪽이냐? 우리는 플러스(+)쪽이에요. x+x+x+…+x=0(죽음) 인간이 플러스한 마지막은 죽음이에요. 죽습니다. 다 잃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건 0에요. 0은 죽음. 더한 x의 개수가 n개라면 nx=0에요. 그럼 (x+(-x))=0를 위 식에 대입해보면 n(x+(-x))=0가 돼요.
매 순간마다 죽음이 관여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거예요. 왜? 플러스(+)로 인생 다 살아봤자 그러고 난 뒤에 죽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다(x+)는 옆에 0이 붙어있는 거예요. x+0. x를 펼쳐보면 x+0=x이에요. 죽음과 함께 살아있는 겁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x가 되기 위해서 (x-x)를 배제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배제하는 것이 뭐냐? 마이너스를 배제하고 플러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이 도입하는 것이 법이에요. 법을 도입해요.
법이 있어야, 나는 법 지켰으니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보장되고, 나한테 해코지하는 것은 그냥 밀어내려면 미안하니까 법을 만들어서 밀어내는 거예요. ‘그건 내 취향이 아니에요.’ 이거 뭐에요? 나는 그 취향이 아니라고 밀어내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인간세계에 이미 법이 있는 거죠. 법은 플러스가 플러스되기 위해서 법을 도입한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에 한 것처럼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은 법의 혜택 범주 바깥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걸 희생물이라 합니다. 하나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잘라낼 필요가 있어요. 안 그러면 있는 것들이 플러스가 안돼요. 법이 잘라내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힘을 얻고, 법인데 힘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법, 이것이 배제를 낳는 거예요. 배제.
그러니까 여러분들 보세요. 모든 인간은 죽잖아요. x-x=0로 가잖아요. 가는데 자기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0이 안 되는 것처럼 이 법을 도입했다고요. 그럼 0쪽에서 어떤 분이 오셨다면, 인간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법에 대해서 포용의 대상이 될까요, 배제의 대상이 될까요? 배제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율법에 보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신약에서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어요. 몸과 정성,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이것은 예수님이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아버지의 마음을 유일하게 아는 분이 아들이에요. 아들이 아니면 한 집안 사람이 아니면 한 식구가 아니면 아버지의 뜻이 뭔지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오게 되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존에 있는 율법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법으로 일방적으로 바꿔치기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율법 때문에 죽었으니까.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율법을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만납니까? 예수님을 만나거든요. 진짜 율법을 아는 분과 율법의 뜻도 모르고 자기 힘 키우기 위한 집단과의 마주침에서 예수님은 배제 당했죠. 배제 당했으니까 결과적으로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차분하게 하자 없이 확연하게 그 진리가 드러나 버린 거예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자, 법이 힘을 사용할 때는 법은 나를 지키고 그다음에 나를 지키는 데에 방해되는 것은 배제하죠. 그럼 법은 배제 당하는 쪽을 파괴시킵니다. 파괴시키는 것에는 목숨을 빼앗는 것도 포함되고요.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x+x+x+…+x=0가 되죠. 0이라 했죠. 결국 인간은 아무리 싸워도 모든 인간은 0가 돼요. x+x+x+…+x 이 전체가 0가 된다는 말은 유한(有限, finite)하다, 한계가 있다는 뜻이에요. 한계가 있는데 여기에 대들었던 오신 분은 한계가 없어요. 그럼 뭐가 됩니까? 무한(無限, infinite)이 되는 거예요.
무한으로 오신 예수님이 유한의 세계와 마주치면서 인간은 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스스로 증명해버린 셈이 돼요. 스스로. 유한에 갇힌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죽음에 갇힐 만해서 갇힌 셈이 되어버렸다고요. 그 이유가 뭐냐?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를 배제했습니까? 무한을 배제한 거예요. 무한을 밀어붙인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때는 본인들이 어느 나라 가기위해서 율법을 지킨 거예요? 천국 가기위해서. 천국 가기위해서 율법을 지켰잖아요. 천국 가기위해 율법 지킨 그것이 결국 예수님을 배제하게 만든 거예요. 폭력을 행사하고 예수님을 파괴시킨 거예요. 무한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공격했고 파괴했다는 말은 스스로 나는 죽어 마땅함을 증명해낸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인간의 유한세계 평면에서 A에서 B에서 C에서 아무리 열심히 율법을 연구해도 그들은 오류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오류의 반복. 계속 실수에 실수를 연속한 것뿐이에요. 이 지평 안에서. 평지 안에서.
그러니까 이 세상은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예수님을 배제하는 건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싸우는 거예요. 자기들끼리도 싸우는데 그게 마귀세계를 주님께서는 그렇게 만든 거예요. 여기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25절,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오신 이유가 이 세상을 불화케 하기 위함이에요. 마태복음 10장 34절에도 나오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화평이 아니고 화평의 반대, 검을 주러 왔다. 검을 주러 온 거예요.
유한한 세계가 자기의 무한을 위해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천국 가기 위해서 인간은 법을 도입해서 자기를 마이너스가 아니라 계속 플러스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함으로써 인간들은 나를 지키는 힘을 이 율법 지킴을 통해서 자기가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러면 남들도 그렇게 하겠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복음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타인과 싸우는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과 싸우는 거예요.
그렇다면 법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가? 평소에 우리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런 법칙 속에 우리가 이미 놓여버렸어요. 이미 우리가 고장 난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게임 속에 들어가요. 게임 속에 들어가서 규칙을 만나고, 규칙은 아까 법이라 했죠, 규칙을 만나서 법으로 규칙을 만들면 이건 구조가 되고 이 구조에서 승자가 되면 보상을 얻는 거예요.
게임 → 규칙(법) → 구조 → 승자 → 보상
x₁+x₂+x₃+…계속해서 인간은 살아가는데 살아가면서 x₁으로 자족하고 만족하는 사람 없어요. 여기서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결핍 또는 결여. 처음에 20대 후반에 공무원 시험 쳐서 합격하잖아요. 개그맨 선전한 것처럼 에듀윌 해서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하면 그걸로 몇 개월 만족합니까? 이건 뭐 전세사기 만나서 떼돈 안 벌면 만족이 없죠. 의사시험 합격, 의사시험 합격하면 만족합니까? 의대 정원? 미쳤어? 나도 지금 병원 가게세도 못 내고 있는데… 이미 수요 공급이 확정된 데서 갈라먹기, 뺏어먹기를 어떻게 힘들어서 하겠나, 이렇게 나오죠. 그럼 다른 수를 찾는다고요. 의사 돼서 미국 가든지 캐나다 가든지. 결핍을 느끼겠죠.
이 자체가 뭡니까? 타인과의 싸움. 이걸 뭐라고 합니까? 이게 게임이에요, 게임. 이게 게임이고 게임에서는 막 싸우면 안 되니까 규칙을 만들게 되면 규칙에 대해서 또 더 영특하고 똑똑한 사람들만 규칙에서 살아남겠죠. 여기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 내가 게임이고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와의 게임이고. 그 게임은 힘을 끌어 모으는데 그 힘은 승자가 될 때 내가 미흡한 것을 채울 수 있는 보상책으로서 주어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툼과 다툼의 연속인 겁니다. 그런데 그게 뭐를 빌미로 한다고요? 이게 법으로 나와요.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서기관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큰 소리 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나라 자체가 게임판인 데에서 누가 십일조를 얻고 누가 어른 대우 받을만하냐 이 말이죠. 무식한 세리 창기냐, 아니면 자기들이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은 나한테 배워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이 게임 판에서 무지(無知)라는 것은 곧 공포를 야기하죠. 공포는 내가 계속 플러스 존재가 되기 위해서 채워져야 될 그런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데에서 오는 공포에요.
너 고2인데 요새 영어 좀 공부하나? 싫어. 수학은? 빵점. 그럼 너 어떻게 살래? 보세요. 앞으로 걔가 맞닥뜨릴 사회가 무슨 사회? 게임 사회. 게임 사회에서는 뭐를 모르면 탈락? 규칙 모르면 탈락. 규칙은 뭡니까? 너 수능 몇 등급이야? 딱 나오잖아요, 딱. 딱 나오죠. 나 춤출래. 춤 그 동네는 어디 뭐 게임이 없는 줄 알아요? 그 동네는 규칙이 없는 줄 압니까? 리아 킴부터 해가지고 벌써 스트리트 댄서들 쫙 수천 명이 그 위에 있는데. 트로트 가수 백댄서나 해야지.
도대체 이 세상에서 이 유한한 세계에서 나를 그냥 살려줄 어떤 위인도 존재하지 않아요. 엄마가 도와주겠지. 엄마는 게임 안합니까? 시집갔으면 네가 알아서 살지, 몇 푼도 안 되는 돈을 왜 네가 뜯어먹어? 네 새끼 네가 낳으면 네가 책임져라. 왜 여기 와서 기거하고 하느냐? 너 때문에 나 마이너스 된다.
가정에서는 아직까지 이걸 못 느껴요. 그러나 가정을 벗어나서 사회가 되어버리면 인간은 게임에 들어옵니다. 이걸 인간의 사회화라 해요. 인간은 사회의 일원이 돼요. 그렇다면 무작정 나는 공주고 무작정 나는 왕자라서 엄마 아빠가 다 해줘, 할 때 그 애의 정서는 아직까지 정리가 안됐어요. 정리 안 되다가 걔가 사회에 나가면 자기 내부가 구조화돼요.
구조는 사회의 법과 규칙이 삽입되어서 이게 응결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즐기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 사회 규칙이 응결, 딱딱하게 굳히는 거예요. 두부 만들 때 있죠. 또 묵 같은 거. 이게 굳어져버려요. 굳어지면서 융통성을 발휘할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희망은 뭐냐? 내가 나중에 은퇴해서 촌에 가서 혼자 잘 살래. 그걸 젊을 때부터 생각한다고요. 지금 혼자 잘 살고 계십니까? 하고 싶은 대로? 완전 묵이 해체돼버렸어요. 플러스로 잘 살고 계시죠, 플러스로.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지. 이건 보상 아니에요? 인간의 자기 결핍에서 오는 보상.
이게 무의식 쪽에서는 구조가 되는데 문제는 인간들이 게임을 하고 규칙을 만들고 구조를 만들고 그래서 더 똑똑하고 더 힘세고 더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자가 결국 승리한다, 사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다, 라고 지내면 세상은 그렇고 그런데 여기에 누가 들어왔어요? 무한한 분이 들어왔잖아요, 무한한 분. 무한한 분이 들어왔죠. 어디에 들어왔어요? 유한한 인간세계에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그 무한한 분이 어떻게 됐어요? 퇴출당했죠. 배제 당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은 위기에 봉착한 거예요. 이게 <기독교의 허상>이에요. 무한한 분의 복수에요. 유한에 대한 복수.
인간들이 뺑뺑이 돌잖아요, 뺑뺑이.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에 지금 이르렀어요. 나 이거 할까, 직업 저거 할까. 직업을 골라도 이미 있는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직업을 고른다 이 말이죠. 이렇게 유한 안에서 뺑뺑이 도니까 여기서는 방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방향성이 없어요. 이 안에 갇혀서 뺑뺑이 도는데 무슨 방향성이 있어요. 이걸 아까 반복이라 했죠. 이 세상은 반복만 해요.
뭐가 없느냐 하면 ‘분기점’이 없어요. 분기점이 없는 거예요. 끊어냄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방향성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면… 방향성이죠, 수학에서는 벡터(vector)라 하는데 하나의 질점이 방향을 보여줄 때 이걸 벡터로 계산해요. 어떤 특수한 방향이에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극소화된 국지적 일관성 있는 지점은 하나에 수렴한다 했죠. 수렴이 방향성이에요, 방향성.
주님께서 수렴되는 점으로 빠져나오면서 주님의 의도대로 그들이 한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한 거예요. 그 방향이 지옥의 심판 쪽으로 가도록 유도한 거예요. 어떻게 유도하는가? 그들로 하여금 한 놈만 죽이도록.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과 일들이 한 사람만 한 놈만 죽인다는 의식으로, 그들이 분열되어 있었다가… 사탄의 세계는 분쟁하면 안 되거든요. 예수님 앞에서는 사탄의 세계가 분쟁하는 세계가 아니고 똘똘 뭉친 세계로 주께서 의도해서 단결케 한 거예요.
어떤 사상과 어떤 타인이 있더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전부다 똑같은 플러스(+)가 되게 한 거예요. 똑같이. 그래서 예수님을 사형시켜 보내버렸죠. 주님이 의도한 겁니다. 그럼 주님의 이러한 의도, 그렇게 해서 주께서 얻고자 한 게 뭐냐? 사건을 이렇게 일으켜서 주께서 얻고자 한 것.
국회의사당에서 서로 서로 내가 잘한다고 내가 옳다 하다가 한 사람이 와서 엉뚱한 소리하게 되면 야당 여당 없이 다 공격하는 거 있잖아요. 이미 북한이 그 일을 지금 꾸준히 해오고 있어요. 북한의 어떤 임산부가 김일성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고 손가락질 했다면서 그 임산부를 공개 처형했거든요. 애 있는 여자를, 초상화 설명한다고 손가락질 했다고 죽여버렸단 말이죠. 시범조로 한 놈만 죽이는 거예요. 한 놈만.
그 여자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니지만 주님은 아예 의도했어요. 너희는 땅에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났다. 오죽 의도했으면 제자들도 도망치고…. 그러니까 제자들이나 가룟 유다부터 해서 주님의 말과 섞일 여지를 주님 쪽에서 허락을 안 한 겁니다. 모든 인간은 x옆에 -x가 있기 때문에. 0(zero)가 있기 때문에. 그게 최종성이기 때문에.
주께서 어떤 방향성을 정함으로써 주께서 의도한 게 뭐냐? 그것은 바로 ‘힘의 잉여(넘침)’입니다. 힘은 넘치는 거예요. 넘치는 표시를 어떤 사람은 ⋌ 이렇게 표시했는데 이상한 기호지만 부등호(힘<)도 적절치 않아요, 다른 쪽이 더 크다가 되니까, 그대로 합시다. 힘 쪽에서 와서 공간 쪽으로 벌여간다는 말이에요. 이 공간의 방향성이 있는데 공간은 진리를 주장해요. 인간은 진리를 주장하는데 이 진리가 법이에요. 법을 주장해요. 법을 주장함으로써 파괴가 일어나요. 파괴가 일어나면서 결국 인간은 불안한 주체가 되는 겁니다.
힘⋌공간 ⇒ 진리(법)+파괴 → 불안한 주체
인간세계에서도 벌써 이게 돼요. 아까 김정은 북한 이야기했죠. 북한 주민들은 불안해요. 김일성 족보 힘이 너무 세서. 공간은 뭐냐? 북조선. 북조선에 진리가 있는데 그 법은 뭐냐? 김일성 초상화에 손가락질 하면 너 파괴해버린다. 타인을 존중하면 내가 못 살잖아요. 그럼 누가 희생되어야 돼요? 임산부 이런 거. 그 임산부가 러시아 대사 부인입니까? 아니죠! 그냥 희생물이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존재죠.
넘치는 힘이 어떤 공간을 찾아오게 되면 넘치는 힘이 쏟아지게 되어 있고 그 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데 진리의 파괴기능을 통해서 인간의 주체는 어떤 노력을 해도 인간은 여기서 플러스(+)로 유지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김정은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개인이 다 그래요. 내가 힘을 많이 모아서 내가 사장으로 있는 이 기업, 내가 가장으로 있는 이 가정, 또는 직장에서 장(長)이 된다면 나를 지키기 위한 규칙을 만들어서 직원들에게 징벌과 적절한 보상을 줌으로써 직원들이 나에게 의존적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이미 이런 본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누가 오셨습니까? 이것이 유한한 인간들의 모습인 동시에 유한한 모습을 누가 이용한다? 무한한 분이 오셔서 이 힘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배제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허상>이에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분명히 교회가 몸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아니하면 율법에 위반되어서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죠. 그 법을 누가 들고 나옵니까? 목사 본인은 그걸 지켰다고 우기면서 들고 나오는 거예요. 교인들은 뭘 봅니까? 진리를 보는 거예요. 목사 키가 커서 힘이 세서 이런 게 아니고 법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그 법 앞에서 인간은 불안하다 이 말입니다. 언제 공격받고 파괴될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기가 곤란하니까 약 5분 정도 더 하고 10분 쉽시다. 한 예를 들어보겠어요. 한번 적어볼게요.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이상하잖아요, 사랑하면 그걸로 기뻐야 되는데 늘 외로운 나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만 보네
그 다음 가사 보세요.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내 가슴 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우리가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잖아요. 그 사랑을 여기다 대입해보란 말이죠. 우리의 신앙이 주님 사랑 느낌 그대로 머물길 원했지만, 그 다음 중요한 게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수 없었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바르게 살겠다는 그거 왜 그런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그립잖아요, 주님의 사랑이. 가사 하나하나가… 지금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노래 들어볼게요.
<너를 사랑하고도> 전유나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왜 사랑하는데 외롭죠?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만 보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내 가슴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그다음 가사 보세요.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주님의 우리 사랑과 우리가 주님 사랑하는 것이 달라요. 그다음 태도, 나 이제 그만 믿을래.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수 없었네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이제 점점 더 주님과 멀어져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을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됐습니다, 그것만 하면 됐습니다. 이제 복음 바이바이에요. 이게 우리에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해도 안돼요. 방향이 내가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내 사랑 그대로.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31124b 누가복음23장 28절(고장난 인생)-이 근호 목사
인간세계는 구원을 멈추지 못합니다. 유한한 데에서 유한한 것을 건지는 그 치열함, 내가 법을 지키고 그 법이 나에게 힘이 되고 미진한 것은 천국에서 보상받는다는 그 구원에 대한 집착, 욕망이 인간에게 멈춰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봐야 알지. 사람이 천국 가봐야 알지.’라는 소리를 하거든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아놓은 것은 유한의 세계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죠. 인간의 지혜에 분기점이 발생했어요. 그걸 끊어버립니다. 내가 무한에 대해서 알려줘? 무한은 바로 너희들에 의해서 너희 손으로 죽인 자가 무한이라는 겁니다.
이런 내용이 되죠. [예수님께서 먼저 생명을 내놓으시면서 모든 인간이 이 피에 대해서 빚지게 만들었다.] 빚을 지게 만들어버렸어요. 이 피는 무한의 피에요. 다시 말해서 너는 무한히 죄인이고 저주받아야 되고 그리고 이 피를 받은 자는 무한히 사랑받아야 되고 의롭고 영생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분기점이에요, 분기점. 유한의 세계가 알고 있는 그것과 무한의 세계가 알고 있는 그 사이에 확연하게 둘이 노골적으로 그 차이성을 분기점을 통해 다 드러내신 거예요.
그러니 복음이 복음 되려면 이 세상에서 불화되는 일들이 의도적으로 일어나야 마땅하죠. 이 세상이 불화된다는 말은 교회 내의 불화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내 마음 안에 불화가 일어나야 되죠. 이 빚지게 만든 분기점을 통해서, 건널래야 건널 수 없는 곳으로 이미 주님 혼자 가버렸을 때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제거된 이름이 돼요.
제거된 이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제거된 이름. 누구로부터 제거된 이름이에요? 나로부터 제거된 이름이에요. 내 이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제거하고자 했던 그 이름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죠.
그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제가 죽였습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주님을 싫어했습니다. 왜?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수 없었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제거시킨 거예요.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을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주님을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지만 그 주님이 내가 원했던 주님이 아니었던 거예요. 이 삭제된 이름에 합류되는 것이 구원이에요. 그게 구원이에요. 이 삭제된 이름은 인간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삭제된 이름은 명명(命名)불가능한 이름이기 때문에.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이름이에요. 명명이 불가하죠.
출애굽기 3장 13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이 뭐냐고 물었죠.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궁금증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물을 때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자,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나타날 때만 나타나고 내가 감추어버리면 너희는 나 있는 곳에 있지 못한다. 유한과 무한을 분명히 구분 짓는 그러한 기능을 하는 하나님, 그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은 이미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이 있으면서도 같이 부를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이름 가진 너희들이 부를 이름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이름을 드러낼 때와 감출 때는 일방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정한 거예요. 그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보통 이름 부를 때 누가 있을 때 이름 부르잖아요. 강아지든 누가 있든. 나타날 때와 스스로 숨길 때를 주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이에요.
그럼 여기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자유롭습니까, 하나님이 자유롭습니까? 질문 자체가 너무 의도가 있어서 쉽게 답변을 못하죠. 어렵지만 이걸 한번 해보겠습니다. 누가 자유로운지. 아까 했던 것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인간이 어릴 때는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죠. 그런데 점차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면 인간 내부는 세상을 닮아서 구조화되죠. 인간은 구조화된다 했습니다. 인간은 게임 판에서 게임을 하는 거예요. 게임은 노리는 게 있어요. 승자가 되는 거예요. 승자만 되고 나는 패자가 안 되려고 하는 거예요. 패자가 안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의도적으로 누구를 패배자로 만드는 작업을 해줘야 돼요. 혼자 운 좋게 승자되는 건 없어요.
로또 사는 그런 낭비를 해줘야 누구 하나 로또 1등이 되는 승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패자로 들어가야 승자가 발생되지, 내가 패자가 되지 않으면 승자가 안 나오는 겁니다. 언젠가 내가 승자의 자리에 돌아올 날이 있겠지, 해서 복권 사는 거거든요.
여기 <기독교의 허상>에도 나와요. 초반에 나오는데, 나한테 진리를 이야기하지 말고 나를 승자로 만들어주는 하나님이어야 되고 예수이어야 한다는 것을 민중들이 군중들이 원하고 있어요. 대중들이 게임에 들어온 거죠. 게임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이름을 부르잖아요.
그런데 아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죠. 부른다고 나옵니까? 안 나오죠. 부른다고 안 나와요.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찾아오지 않느냐 하면, 이름을 부를 때 이름 부른 자, 자기가 이미 존재하고 있잖아요. 자기 이름이 있잖아요. 자기 이름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부르는 게 아니고, 자기 이름을 자기 이름대로 견지하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요. 그런 이름은 준 적이 없어요. 내 이름 묻지 마라. 나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다. 너희는 너희 할 일이 있어. 나는 내 할 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주님 할 일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해서 복음이 오질 않아요. 복음이 나타나지 않아요. 복음은 인간의 게임에 주님이 참여하는 거예요.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인간의 더러운 게임을 주께서는 마다하지 않고 그 더러운 게임에 참가해요.
참가해서 승자가 되겠습니까, 패자가 되겠습니까? 왕창 망하죠. 빌립보서 2장 8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장 패자가 돼요. 제일 loser가 돼요. 가장 저주받은 자가 돼요. 그것도 죄도 없으면서. 저주받은 자가 되죠. 심지어 누구한테 미움 받느냐 하면 강도한테도 미움 받았어요. 강도에게도.
게임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게임하기 마련이니까. 게임이 있다 할 때 인간들은 이 게임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옥이 여기 있다’. 네가 있는 게 아니고, 지옥의 일부로서 네가 있는 거예요. 그럼 주님이 게임에 들어온다는 말은 주님께서 지옥에 들어온 거예요. 방향성 있는, 그냥 게임이 아니고 어떤 방향으로 수렴되는, 쭉 쏠리고 있는 어디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그 지옥에 주께서 들어오신 거예요.
들어오셨으니까 유한한 인간들이 있는 곳에 무한한 분이 들어오셨잖아요. 주님이 어디로 빠져나가셨습니까? 십자가 저주로 빠져나간 거예요. 이 세상이 가는 방향이 지옥 방향이었어요. 인간은 모르죠. 우리 주님은 아시죠.
인간과 인간끼리 있으면 항상 거기서 법이 드러납니다. 내가 지키는 규칙과 네가 지키는 규칙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 맞는지를 드러내는 거예요. 결혼해서 신혼 초에 어지간히 많이 싸우죠. 왜냐하면 살아왔던 나를 구성했던 자아를 구성했던 규칙이 달라서 그래요.
처음에는 뭐 ‘우리 서로 사랑하며 재미나게 지내자’ 할 땐 규칙이 없다가도 애 하나 낳게 되면 애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숨겨진 자기의 규칙이 막 드러나요. 그게 극대화 되면, 이럴 거 같으면 헤어져, 막 나오죠. 애를 망치려고 아주 작심을 했어, 그러면 다른 한쪽에서 또 가만히 있질 않죠. 게임에서 진짜 지면 안 되니까. 네가 망치지, 내가 애 살린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언성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물어볼게요. 자유가 뭡니까? 인간세계에서 자유란? 인간세계에서 자유라 하는 것은 내 절대적인 법에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말고 관여하거나 잔소리하지 말고 내가 최고가 되는 것이 인간세계의 자유죠. 그런데 나한테 도전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헤어지고 싶다 하겠죠.
‘I want to break free’(Queen)를 나는 너하고 헤어지고 싶다고 번역했는데 그 앞 가사에 보면 나는 자유롭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노래 많아요. 많은데 왜 이 가사를 택했는가? 여기 중간에 보면,
I want to break free from your lies
나는 너의 거짓말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You're so self satisfied I don't need you
너는 너무 자기만족에 빠졌어 나는 네가 필요 없어
I've go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를 가져야 돼
그다음에 보면,
God knows, God knows I want to break free
신은 알아, 신은 알아 난 자유롭고 싶어
이 대목 때문에 이 가사를 채택했어요. 이 대목 때문에. 왜 자유롭고 싶어 하면서 신의 재가(裁可, 안건을 결재하여 허가함)를 왜 득(得)해야 되죠? 왜 받아야 되죠? 아 참… 이게 정말 난해한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의도한 건데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무한을 만들어요. 무한을 만들어냅니다. 이 <기독교의 허상>이라는 책에서 계속해서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이 뭐냐? 인간세계에서 만드는 메시야, 하나님을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이 책 내용이.
자체적으로 무한을 만들어내요. 이게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이에요. 바벨탑에 방향이 있어요. 바벨탑의 목적이 있다고요. 그 목적이 뭔지 여러분들 아시죠?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자.(11:4) 하나님 세계에 합류하려는 거예요. 유한이 무한을 기어이 달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 무한의 목적을 위해서 제발 우리끼리 덜 싸우고 우리끼리 힘을 합하고, 바벨탑이니까, 우리끼리 양보 좀 많이 하고 내 주장 내세우지 말고. 하나를 위해서. 뭘 위해서? 무한을 위해서. 하나님께 재가 받고 인정받는 거예요. 인정받으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우리 마음대로 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러면 악마가 하는 이야기가 뭐에요? 네가 신과 같이 된다.(창 3:5) 동격이 돼요. 악마가 이미 아니까. 우리 조상 아담의 본성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신과 동격 되는 것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부추겼죠. 만들어 낸 거예요. 이제 어려운 질문 들어가기 전에 이 노래도 한번 들어봐야죠.
“I want to break free” Queen의 노래에요.
I want to break free
I want to break free
I want to break free from your lies
You're so self satisfied I don't need you
I've got to break free
난 네가 필요 없어. 하나님 신이 필요한 거예요, 자유를 얻는 데에.
God knows, God knows I want to break free
I've fallen in love
I've fallen in love for the first time
And this time I know it's for real
I've fallen in love, yeah
God knows, God knows I've fallen in love
…
가사에 나와요. 이제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연애를 해봤거든요. 연애를 해서 막상 사랑에 빠져보니까 그것이 나의 자유를 완성시킨다, 방해한다? 방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은 알아.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너를 떠날 수밖에 없는 걸. 나는 나 혼자 이겨내는 걸 신이 알아. 나는 자유를 가져야 돼.
그러니까 여자보다 자유를 원하는데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그 전제조건이 뭡니까? 내 자유를 누가 재가해주고 누가 인정해준다는 겁니까? 신이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신을 도피해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고 신을 데리고 자유를 얻는 거예요.
기독교입니다. 이게 기독교에요. 이게 교회잖아요. 전부다 자기 위주로 살면서 누구한테 재가 받았다고요? 하나님한테 재가 받았다는 거예요. 이 노래를 모란봉이 불러요. 김정은이 같이 박수쳐가면서. 인민 남성합창단 한 200명 동원해가지고 ‘갓 노우즈 갓…’ 이러면서 신 이야기를 해요.
제가 문장을 하나 쓸 테니까 이게 무슨 문장인지 여러분이 자신있게 해독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기독교의 허상> 보면서 ‘그래, 복음 모르면 죽어야 돼. 가짜 교회 없애야 돼.’라고 그렇게 이해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신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요. 마약하는 자와 마약 안 하는 자가 똑같아요. 신을 믿는 자나 신을 안 믿는 자나 똑같아요.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제가 문장을 하나 쓸게요. [당신은 사실 천국으로 가면서 왜 내가 당신이 천국 간다고 믿도록 합니까?] 당신은 사실 천국으로 가면서, 당신이 ‘나 천국 간다’고 내가 믿도록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이걸 이중기만이라 해요. 이 문장의 내용을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본인이 천국가면 되는데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당신은 정말 믿어지지?’라고 그걸 왜 나한테 강요하느냐 이 말이에요.
아까 강의 가운데 제가 드린 질문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취지가 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은 영적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누구하고 싸운다? 타인하고 싸운다. 남을 의식해서 하는 거예요. 남을 의식해서. 인간의 행동 하나 말 하나… 벌써 뭔가 튀어나왔다, 말한다, 행동 전부다 남을 의식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남을 의식하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십자가의 현장이 없을 때 남을 의식해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있죠. 강도가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사실 천국 간다고 나한테 이야기를 하느냐?”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강도는 예수님을 나와는 다른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사람들에게 타인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냐 하면 나에게 나의 존재를 강화시키고 나에게 이익을 주고 나에게 잘해주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꾸준히 강도짓하며 살아온 거예요. 꾸준히. 그 대상으로서 예수님까지 포함을 시킨 거예요. ‘그럼 내가 원하는 걸 내놔 봐. 내가 당신 믿어줄게.’라는 생각이죠.
이제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죠. 진짜 아는지 단어 하나 바꿔볼게요. 단어 바뀌면 이해하기가 곤란해요, 또. [당신은 사실 지옥으로 가면서 왜 내가 당신이 지옥 간다고 믿도록 합니까?] ‘천국’ 단어를 ‘지옥’으로 바꾸는 거예요. 더 어려워요. 당신 사실 본인이 지옥 가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내가 지옥 간다’는 그 말을 왜 하느냐 이 말이에요.
이것은 타인을 의식하는 게 아니고 복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복음이. “나 지옥 간다. 어떻게 너희 기분 좋지?” 이 말은 이 질문 자체가 상대방에게 뭘 의도합니까? “나는 지옥 가는데 너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고 있어?”라고 질문 형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질문 받고 답변해보세요. 누가 이 질문을 했다. 집사님이 답변해보세요. “나 지옥 가고 있거든. 나 사실 지옥 가고 있어. 나 지옥 간다고 너한테 말해줄게.” 할 때,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해?” “나는 지옥 가는데 넌 어디 가?”하고 은근히 물어보는데 답변 뭐라고 하면 돼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전에 잘하던 답 있잖아요. 쓸데없이 그런 걸 왜 묻냐고.
왜 대인관계에서 언어가 통하느냐 하면, 대인관계를 통해서 만남을 통해서 법이 필연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규칙이 나와요. 이 곤란한 질문은 빨리 지우겠습니다. 너무 실례를 범한 것 같아요. 아까 퀸이 말하기를 I want to break free,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심정이죠. 타인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나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 모든 질문을 제가 강의 초반에 이미 해드렸습니다. [나 어떻게 하면 고장 나지요?] 이 질문은 남들한테 할 필요 없어요. 인간은 천성적으로 아담의 죄성을 받았기 때문에 나를 강화해요. 자기 의죠. 누가 나한테 어떤 욕을 해도 내가 교도소를 간다 할지라도 나는 내 안에 자기를 지키는 원리가 있습니다.
같은 또래 취업준비생을 죽인 여자의 재판 결과가 오늘 나왔거든요. 검찰은 사형인데 판사에서 무기징역을 내린 게 있어요. 정유정인지 있죠.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진정으로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 이야기를 왜 해요? 내가 남한테 사과한다는 자체가, 아무리 너희들이 나보고 막가는 인간이라 욕할지라도 나는 전적으로 나를 부인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왜? 그 속에 너희들이 모르는 의로움이 있고 너희들이 모르는 양심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어떻게 양심과 의조차도 부정하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은 “따먹기는 왜 따먹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그걸 알라 했어? 먹지 마라는 것이 이미 들어온 이상은 ‘먹지 마라’와 더불어서 우리는 함께 폭망해야 되죠. 같이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내 의와 내 양심과 함께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무슨 수로 무너집니까? 이거 안 무너져요. 나쁜 짓은 부정할 수 있어도 착한 짓은 부정 못 하잖아요. 내 양심이 고운 것은, 나빠도 아주 나쁘지 않은 것은 부정 못하죠.
그런데 제가 아까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최후 마지막 순간에 모든 저주와 심판을 무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인간에 의해서 그 무한의 극단적인 전부, 주님의 생명을 죽이심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빚을 지게 만든 거예요. 이걸 악마가 알죠. 그래서 영적 전쟁이에요. 영적 전쟁.
이제 <기독교의 허상>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이중적 기만을 하죠. 차라리 지옥가고 있다, 그것을 자랑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천국 가고 있다고 자랑하니까 그걸 왜 자랑해요? 내가 천국 가고 있으니까 나 이만큼 착하니까 너도 날 알아달라는 거예요. 그걸 남한테 왜 부탁합니까? 게임이기 때문에. 이게 내가 사는 법이고 규칙이기 때문에.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옆엔 강도죠. 구원받은 강도는 누구한테 인정받은 거예요? 사람 필요 없어요. 누구한테 인정받은 거예요? 예수님이지, 하나님 아닙니다. 그 현장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자리에요. 하나님의 아들 죽이는 것에 합류된 거예요. 저도 죽여 달라고. 예수님 죽는 게 하나의 찬스에요. 십자가 찾아온 게 찬스라고요. 내 마지막 남은 의와 양심마저 제거될 수 있는, 그 의와 같이 망할 수 있는 기회로 온 거죠.
그러니까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빚진 자라는 말은 내가 복음을 안 이상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이방인에게 내가 빚진 자다.(1:14) 그리고 말하기를 복음을 아는 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16)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나는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누가 원하는데? I want to break free가 아니고 주님이 원한 법의 잉여, 법의 넘쳐흐름에 그 폭력에 내가 일찌감치 거기에 뛰어듦으로서 이 세상이 내 인생이 내 여생이 어떻게 돌아가도 내가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 그럼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에게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주님에게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기독교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건 좋은데 걱정할 필요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남은 인생은 뭐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다시 복습해봅시다. 강의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의미한 짓이기에 해야 한다]. 무의미한 짓이기에 아무 의미 없기에, 해야 되는 거예요. 무의미하니까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왜 구애받지 않는가를 계속해서 주께서 무한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성령이죠, 무한이 들어와서 유한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겪었던 그것을 우리에게 반복시켜버리는 겁니다. 주 안에서. 무의미한 짓이기 때문에 계속 해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게임할 때 나한테 승리가 오지 않으면 안 해버려요.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은 늘 승리해야 된다는 결핍 때문에 다른 희생물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나는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구질구질한 고기는 안 먹고 그 고기 먹느니 차라리 산정 높이 올라가 홀로 죽겠다. 죽어라.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있죠? 내레이션 나오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모든 대중가요나 팝송 이런 게, 클래식은 가사 없으니까 별 의미 없고요, 이런 것들이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자기 본성을 그대로 가락에 실어서 유포했고 동감한다고 그게 유행하는 노래가 히트노래가 되어버린 거예요.
자, 그러면 ‘머리글’ 그다음 페이지 한번 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제 딱 아귀가 맞아 떨어지죠. 아, 이것 때문이구나.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너 죽이기 위해서 왔다 이 말이에요. 나는 죽기 위해서 왔다. 나랑 같이 죽을래?
그런데【예수님은 인간들이 창안한 그 연락 사무소를 거부】합니다. 왜? 인간 자체에서 뭘 만든다고 했습니까? 무한을 만들어내요. 왜냐하면 마귀의 정신이 뭐냐? 신이 인정한 안에서 나는 같이 신이 된다.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만한 힘을 우리는 필요로 했던 거예요. 뭐든지 하면 되는데 꼭 하나님의 재가를 얻어서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상담 많이 받아봤죠? 모든 상담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냥 하면 되는데 무슨 재가를 얻기 원한다? 복음적으로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행동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무의미한 게 아니고 의미 있는 행동을 본인이 하게 됨으로써 자기가 계속 의로운 존재로 증명되기 때문에 그런 상담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적 전쟁이 계속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결국 예수님과 결별】하죠. 결별하고 이 땅에 특이한 예수가 등장하는데【돈 벌어주는 예수, 복 내려주는 예수, 뒤에서 종교 사업을 밀어주는 예수가 민중들의 스타】로 확산됩니다.
그다음 페이지에【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개나 돼지에게 함부로 던져 주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이용하여 큰 교회를 꿈꾸는 자의 손에 복음이 넘어가 난자당하더라도) 시기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야, 이거 중요해요.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그들을 시기하고 부러워한다면 이거 뭐에요?
아까 문장 다시 이야기한다면 이런 경우 있거든요. “나 지옥 간다.” 하니까 “너 사실 지옥 가는데, 그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나한테 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진짜 네가 지옥 가는 것을 믿게 만드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따지고 보면, 그게 복음적이기도 하지만 복음적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지옥 간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게 천국 가는 사람인 것을 티내면서 네가 갖고 있는 세상 것을 나는 안 부러워한다고 발악하고 있는 거예요. 안 부러워한다는 것도 부러워하는 거 아니에요? “너는 돈 있지? 우리는 주님 있다!” “그래, 주님 있다 하고 가, 그냥.” “나한테는 주님 있다니까?” “주님 있는 데로 가라니까.” “너는 돈 있지? 나는 주님 있다.” “뭐 어쩌라고? 어쩌라고?” 가짜에요, 가짜.
다음 장, ‘2007. 7. 7’ 사실은 2008년입니다. 그 위에【피는 낭만인가 아니면 여전히 신의 각혈인가?】자, 낭만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피 흘림이 낭만이냐? 낭만을 영어로 하면 로맨스(romance)죠. 낭만이라 하는 것은 추가적으로 즐기는 거죠. 추가적으로 즐기는 거예요. 말년에 은퇴하고 항구에 낚시하러가면서 립스틱 짙게 바른 다방 마담하고 히히덕거리면서 쌍화차 시켜놓고 낭만을 위해서. 그거는 아직 배 덜 고팠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고난의 길을 가느냐? 아니요. 고난 길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각혈, 토해내는 피죠. 그 앞에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빚진 자 되게 만들죠. 그 빚은 주님이 지출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의 지출로도 그 지출을 갚을 수 없습니다. 아홉 번 일곱 번 용서해도 안돼요. 천 번을 용서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향수를 뿌리는 게 아니라 보석을 갖다 바쳐도 눈물을 바가지로 흘려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p.18 봅시다. 밑에서 9번째 줄,【“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눅 23:28)”】그러니까 이 아줌마들은 예수님 망가지는 걸 보고 울었어요. 그런데 본인이 고장 나야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얼마나 귀하게 컸는데. ‘내가 망가지면 안 돼. 절대로 귀하게 커야 돼.’라고 누가 언질을 줬어요? 아빠, 엄마가 포근하고 안락한 가정이 계속해서 우리한테 그런 식으로 각인시켜 놓은 거예요. 나는 사랑받기 좋은 사람이고 나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 각인 받았어요.
그런데 사회 나가니까 아빠, 엄마와 같은 그런 것이 수급 안 되잖아요. 그럴 때는 사랑에 대한 결핍, 어릴 때 누렸던 그 사랑에 대한 애정결핍을 느끼면서 그걸 뭐로 보상하느냐? 이제는 돈으로 그 사랑을 매수하려고 하겠죠. 나 가진 거 돈밖에 없어, 이런 거죠.
교장이 되었으면 옛날 교장이 썼던 의자 그대로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뭐에요, 이게? 뒤로 젖히면 넘어가는 거. 이게 이백 만원 넘는답니다. 교장 바뀌면 전에 이백 만원짜리라도 버려버리고 새로 산대요. 왜 그런 짓합니까? 추가적인 사랑을 교직원으로부터 더 얻어내기 위해서.
사랑을 왜 얻어내야 돼요? 아까 그 도표 봤죠? 자기가 그 집단의 모든 힘의 신처럼 군림해야 하나의 질서가 잡히니까요. 신이 여러 명 되면 안 되니까요. 내가 겸손하다고 해서 말썽꾸러기가 안 생기는 게 아니고 내 대신 다른 쪽에 말썽꾸러기 생기죠. 교장이 기죽어 있으면 행정실장이 신처럼 설치게 되고 고참 교사가 설치게 되고 뻔하거든요. 누구 하나는 잡아야 된다 이 말이죠. 안 그러면 이사가 잡든지 잡아야 되거든요.
이거는 직업가진 사람들에겐 다 해당됩니다. 학교 가서 조리사 상대할 때도 군기 안 잡으면 밥이 되겠어요? 8시 출근인데 언니 봐주소, 해서 9시 다 되가지고 오면 일이 되겠어요? 욕은 내가 다 얻어먹는데. 조직사회는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욕 안 얻어먹기 위해서는 밟아야 되는 거예요. 북한이 그런 거예요, 북한이.
그럼 우린 말하죠. “바르게 살고 싶어도 왜 바르게 못 삽니까? 주님, 제가 여기 있는데….”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거기 있는 게 아니고, 지옥이 거기 있다. 너는 지옥을 구성하는 지옥의 구성원이고.” 지옥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p.20, 진도 빨리 나가요. 쭉 나갑니다.【가공되어 기분 좋게 다듬어진 복음】요한복음 5장 27절 되어 있는데 한번 보세요.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지금 예수님이 여기서 십자가를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심판주 이야기합니까, 예수님 자신이? 심판주 이야기하죠.
이건 아까 이야기한 뭘 유도한 거예요? 유한한 인간들이, 심판주라고 내가 분명히 언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퇴출시키죠. 퇴출시키면 어떤 효과가 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이 땅에 없는 효과가 돼요. 아예 구원자가 없어요.
결국 오늘 강의를 끝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구원은 효과]입니다. 주님이 홀로 주의 이름으로 홀로 일하신 그 모든, 완벽하게 오케이 사인이 끝난 그 효과가 힘을 초월한 잉여의 힘으로 우리에게 흘러넘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다? 십자가에 있음을 알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과 십자가와 우리 자신과 주님의 일하심을 한꺼번에 알게 하옵소서. 무지가 공포를 낳으니 이제는 복음을 앎으로써 구애받지 말고 수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마음껏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