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국가 안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부지런히 뭔가는 하지만 낳는 것은 죽음과 죽음의 연발입니다. 쓸데없는 대의명분이나 이념 같은 것으로 백성이나 국민을 현혹시키니 국가가 곧 ‘눈에 보이는 종교’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현실 국가나 그 신화에 목을 매는 것은 마음 속에 매일같이 화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이 세상 환경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분노로서 가득 차 있는 세상
주께서는 우리가 연약한걸 고백 하란게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거에요. 왕이 등장 “시온의 딸아!” 천국의 백성이죠. “예루살렘의 딸아.”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들을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왕이 그것도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탔다는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게 나귀 새끼가 어떤거냐 하면, 그 나귀 새끼는 아직 어른 나귀가 아니고 새끼니까 작은 새끼는 그 자체로 어떤 쓸모가 없어요. 누가 사용해주면 비로소 쓰여짐을 받는 아주 극단적인 피동적 존재가, 피동적 상대가 바로 나귀 새끼입니다. 스스로 서기도 비틀 비틀해요 이거는. 겨우 서서 자기 걸어 갈 정도. 나귀 새끼를 탔다는 말은 무슨 뜻이 있느냐? 하나님은 일체 사람하고는 상대 안한다. 일체 사람하고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람하고 상대 안하면 이것보다 더 겸손한 것은 없어요.
호산나는 시편 118편 24절에서 25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게 이제 호산나라는 뜻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아까 나귀 새끼도 사람 아니거든요. 여기에 나오는 소리 지르는 사람들도 예수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그냥 죽은 돌이 호산나라는 말씀과 결합해서 돌들이 튀는걸로 보는 거에요. 그냥 돌인데, 그것도 죽은 돌이에요. 돌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에 영향력을 입어서 호산나의 실현체로 호산나라는 그 말씀의 실현된 하나의 증거로서 돌들이 튀듯이 부르짖으면서 지금 호산나라고 부르고 있다는 거에요. 주께서 왕으로 왔을 때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예수님의 천국 백성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수준을 낮추느냐 하면 나귀 새끼, 그리고 돌멩이. 돌. 우리 이 수준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에요. 그 돌들이 구원받는다? 돌들이 말씀을 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에 국가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한 소속이 되어있어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국가는 신화입니다. 신화. 조작된 거에요. 제가 신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이죠. 거짓되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꾸며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한계가 뭐냐? 자기가 꾸며낸 것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고 자기가 꾸며내지 않으면 인간은 거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보자. 버텨보자. 사는게 남는거다. 살면 성공이요 죽으면 실패다.” 이런 인간들의 억지스러움이 신화화 된게 최종신화의 모습이 뭐냐? 국가라는 겁니다. 자, 국가는 뭐냐? 매일같이 패배하는 것을 성공한 것으로 형식적인 전환을 꾀하는 것이 국가에요. 패배 자체를 승리로 제시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관점의 억지스러운 관점. 이게 국가 이념이에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신화 같은 왕, 나를 지켜주는 왕, 나를 지켜주는 국가, 그걸 우리가 과연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본인에게 있는가 한 번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왜 주님은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지. 돌멩이를 가지고 백성 만드는지.
살아가면서 손실본 것, 살아가면서 우리가 제대로 못사는 것, 거기에 대한 고통스럽지만 이 국가와 함께할 때 거기에 상이나 이익 같은게 있다고 우기는 것이 신화적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국가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나 보상은 일체 없습니다.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지도 못해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꼭 우리가 필히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필히 살아야 된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뭐냐 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걸 하고있는 거에요.
㉯거기에 반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나라의 왕이에요. 하늘나라의 왕인데 그 왕 자체가 이 땅에 와서 상처를,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고 결국은 죽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결과를 앞장세우고 이 땅에 밀어붙인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에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라고 요청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마가복음 19장에서 보면 그 특징이 있어요. 나귀 새끼 보는 사람 특징이 자기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도 얹고, 그리고 나귀 새끼가 주님이 오면서 길을 열어주게 되는데,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뭐냐하면 겉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타는 예수님 앞에 겉옷을 벗어놓고 그걸 밟고 지나가라는 이 말은 내 자리가 내 자리의 최종 위치를 드디어 이미 확보 했다는 거에요. 내 위치를.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 오시는 예수님 앞에 그걸 냈다는 말은 자신의 최종적인 위치를 비로소 확정되고 고정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 자리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오시는 왕이 밟고 지나가는, 왕의 자리죠 주께서 나귀 새끼타고 한 발자국 밟고 지나가는 그 자리, 그 자리에 내 옷을 가지고 거기다 집어 던지는 거에요. 살포시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합류하는 겁니다. 오실 왕과 합류되는 거에요. 이게 호산나의 의미입니다. 저를 구원해달라는 말은, 저에게 최종적인 자리를 확보하신 분에 우리가 합류되게 하옵소서. 최종자의 자리.
그 최종적인 자리가 요한복음 17장 12절, 예수님의 그 기도 가운데 있는 내용인데요.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기도하기를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버지하고 오실 왕, 나귀 새끼타고 오신 왕. 사이에 맺어진 그 관계가 우리 이스라엘 백성, 천국의 백성에 최종 자리가 바로 그쪽 자리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어요. 예수님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주님의 결정을 나귀 새끼타고 온 그분의 모습을 내가 몰랐던, 내가 미처 경험하지 않았던 최종 자리를 그분들이 확보한 채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현상으로 간주하는 자, 이 자가 바로 주와 함께 기뻐하는 자, 그게 바로 오늘 와서 언약이라고 합니다.
왕이 왕 되게 백성다운 백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께서 조치를 했다는데 자기가 거기다가 겉옷을 가지고 참여를 한거에요. 최종적이다는거에요. 우리가 지금 우리의 자리를 항상 최종적으로 생각하고 그냥 콱 죽으면 돼요. 콱 죽으면 되는데, 왜? 그래야 돌멩이가 되니까. 주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확정된 그러한 주님의 대상자로서 우리를 통해서 호산나라는 주님이 바로 구원자라는 것을 외칠 수 있는 그런 사명을 매일같이 할당받고 분배받는 그러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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