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오실 구원자가 내 인생 설계에 이미 들어왔다고 했을 때 나의 인생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다윗으로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율법을 따졌던 본인이 바로 내가 율법의 위반자란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주지요. 시편 51편 “하나님이여, 이 성신이 찾아오는 기쁨을 나에게서 사라지지 말게 하옵소서.” 율법으로 버티는 내가 그게 바로 주님께서 대들었던 모습인 것을 성신이 올 때 비로소 나는 애초부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죠.
■그전에 다윗에게는 자기의 목표점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목표, 그 기대가 바뀌어요. 어떻게 바뀌느냐?
㉮다윗의 목표와 기대가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무의미하게 돼요. ‘아아, 날 위해서 산다는 게 하나님 앞에 안 통하는구나. 이게 의미 없는 거구나.’
㉯그런데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여기선 멈추면 다윗은 구원 못 받지요. 이 무의미를 통해서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밖에 있었던 언약궤가 어디로 들어오느냐? 무의미한 아무 쓸모없는 내 안에 들어와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내 안에 들어와요.
■그동안 다윗은 목표, 기대 때문에 땅에서 뭘 흘렸습니까? 피를 흘렸잖아요. 그런데 밖에 있는 언약궤 피는 뭐냐 하면 인간의 피가 묻히면 안 돼요. 여기는 희생제물의 피가 묻혀야 돼요. 내 피 말고 내 피와 땀과 노력으로 버티려는 인생 속에 내 노력과 내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가 들어오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밖에 있는 언약궤가 내 안에 들어와요. 그러면 지킬 법이 남아있습니까? 더 이상 내가 지킬 법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막 같은 경우에 이렇게 돼 있거든요. 여기 25미터, 50미터 잡고 대충 그래요. 이건 동쪽이고, 서쪽이고, 남쪽이고, 북쪽이고. 여기에 텐트 쳐있고 천막 제일 안쪽에 언약궤가 있잖아요. 이 앞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제단이 있어요. 이 자체적으로 회로가 흐릅니다. 바깥에서 희생양이 들어와요. 속죄제든 서원제든 양이 들어와요.
이 양이 바로 언약궤 있는 하나님 이름이 계신 곳에 들어오질 못해요. 여기서 변형이 일어나야 됩니다. 어디를 방문해야 되느냐 하면 제단을 찾아가야 돼요. 제단에 가면 양이 홀라당 여기서 뭘 만나는가? 불을 만납니다. 그 불은 춥다고 손 쬐는 보온용 불이 아니에요. 아예 자체를 다 태워버려요. 그럼 양 자체가 태워지고 나면 드디어 ㉮양 실체가 연기가 되어 날아가요. 남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다 태웠다는 확실한 사태를 증명해 줄 그게 양의 핍니다. 이 피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나님, 주의 이름이 있는 언약궤까지 가요. 7월 10일 날. 그때는 양보다 소, 레벨이 높은 제물이 들어가요. 염소나 소가 들어가요. 소를 잡고 소의 피가 언약궤에 피 뿌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회로가 돼요.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는데 여기서 인간이 드린 양을 하나님이 받는다는 말은, 인간의 것을 하나님은 안 받아요. 안 받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것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것을 받도록 하나님 자체가 인간세계 속에 인위적인 행함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접수가 돼요.
접수가 된다는 말은 완전히 죽어서 피를 남긴 그 인간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분은 누구죠? 다른 인간은 안 되고 오직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일찍 경험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경험, 방금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경험이죠. 예수님의 경험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니까 왕이 예수님의 경험을 하는 거예요. 왕이 예수님의 경험을 했고, 왕이 경험한 것을 또 누가 경험하게 된다? 그 당시 다윗이 왕이 되었던 백성들이 함께 경험하는 것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거예요.
아까 분명히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지만 하나님의, 방금 이야기한 이 회로를 ‘다윗언약’이라 해요. 다윗언약의 회로가 가동이 돼버리면 다윗도 바뀌고 다윗과 같이 있는 백성들도 다윗언약의 회로에 감김으로서 같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역대상이라든지 사무엘하도 나오지만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지요. 인구 조사할 때 백성들이 많이 죽어나가지요.
하지만 백성들이 다시 죽어나갈 심판이 멈춰지고 사는 것은 아리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뭐가 됩니까? 제사장 되어 하니까 그게 멈춰지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백성들은 무슨 경험을 합니까?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다는 그 경험밖에 없던 백성들이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 다윗이 경험했던 그 경험을 통해서 어떤 경험이 회로가 들어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바쳐지는 그 회로가 주님의 경험으로 내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불로 시작해서 피로 들어가는 거예요. 불, 피. 심판에서 시작해서 심판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 밖에 없지요. ■이게 성경적으로만 팩트가 아니고 이 현실세계에서 유일한 팩트에요.유일한 사실입니다. 이건 종교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았다.
이건 종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거예요. 기독교는 종교를 가지면 안 돼요. 복음이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전후, 이 세상의 창조부터 마지막까지 그 중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현실감각이 있어줘야 돼요. 이건 내가 믿고 말고 할 그 문제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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