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해석법130606

아빠와 함께 2013. 12. 31. 18:38

2013-06-06 16:51:46 조회 : 585         
요한계시록 해석법 130606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음성1         음성2        음성3

 

동영상1        동영상2       동영상3

 한윤범 (IP:14.♡.134.60) 13-06-12 16:49 
20130606 봄특강a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들어가기 전에 신명기 9장부터 보겠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 이스라엘 속에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내통을 해요. 유일하게 내통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역할, 이스라엘을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신명기 9장을 요한계시록 하기 전에 왜 거론하느냐 하면, 여기 이스라엘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으면 안 돼요. 어디 있다면 찾아올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도 어려운 것이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스라엘만 있지 이스라엘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고 돼있다고. 하나님이 분명히 나 여기 있다는 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기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뭔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일 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이 움직이는 흔적을 통해서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가 되는 겁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할 때 정답은 여기에는 아니 계시다고 언급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런 데는 하나님이 아니 계십니다. 그러면 어디에는 아니 계신다고 할 때 이 어디는 어디냐 하면, 인간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적인 상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식물과 동물과 바다에 있는 고기마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니까 하나님이 바다 밑에도 계실 것이 맞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의 뜻은 물고기 움직이는 걸 아무리 연구한다고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 뜻이 나타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추리고 추려 나온 방식은 바로 모세가 있는 자리, 곧 이스라엘 자리에만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나타나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걸 하나님이 계신 것과 같은 것으로 쳐줄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고 식으로 처리가 돼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실시되는 게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실시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언약의 상대자가 되니까 이스라엘은 ‘을’이 되는 거죠. ‘갑’은 어디 있습니까? 갑은 없는 거죠. 갑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데 갑의 지시를 받고 을이 움직이니까 이스라엘만 있을 뿐이죠.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는 먼저 요한계시록이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옛날 언약의 자리와 똑같은 원칙으로 이스라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지 않는 다른 곳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백독, 만독 해도 요한계시록을 모른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거기에 모세가 있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을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만나느냐?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구약에는 특정 지점이 있어요. 가나안 땅이라는. 신약에는 어디 있느냐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때그때마다 이스라엘 되게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가 성립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광복절 밤에 여의도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그러면 8월 16일에 가면 불꽃놀이 합니까? 안 하죠. 이미 끝났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불꽃놀이 있었거든요. 어디 있느냐? 이미 끝났어. 이미 사건 종결됐어. 이러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겁니다. 신약에서 이스라엘, 교회라는 것은 항상 사건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에 교회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디 있느냐로 설명할 수 없고, 교회가 어떻게 등장하고 나타나느냐? 그런 식으로만 교회란 말을 쓸 수 있지 교회가 어디 있고, 몇 명이냐는 것은 신약에는 쓸 수 없는 용어에요. 교회와 만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그 교회가 어디 있느냐?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디 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될 정도로 피로 사신 거예요.

우발성인데요. 이런 신약에 교회가 우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이 이미 한계를 보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행하면서 구약에는 여기 있다가 되거든요. 이젠 여기 있다는 것을 해체시켜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마지막 때 신약 시대입니다. 구약에는 여기 있다. 어떻게 움직인다. 신약에 오면 여기 있다, 움직인다는 게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되게 할 때에만 이스라엘 되고, 교회되게 할 때만 교회되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그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이렇게 정리가 되지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는 이스라엘 빼놓고 잘라내는 작업을 해서 이스라엘만 있다는 그 시절이 있었다. 특정 공간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 보면 그 누구라도 요한계시록을 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건 뭐냐? 그냥 요한계시록만 영원히 남아있을 뿐이죠. 말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 있느냐? 요한계시록이 실현되는 그 순간, 사건에 요한계시록이 적용되면서 거기서 교회가 발생되게 돼있죠.

만약에 구약적 인식이라면, 구약적 인식은 신약에 통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구약적 인식이 이라면, 여기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한다. 그러면 누가 갑이냐 하면, 교회가 갑이 되고, 요한계시록이 을이 되죠. 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셨다고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실험은 구약에서 이미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요한계시록 하면서 신명기를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홍해에서 건져냈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악마의 사주 역할,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바로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모른다. 어디 있다고 말하지 마라. 똑같은 질문입니다. 악마가 어디 있느냐? 모른다. 똑같은 거예요. 악마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네 아비는 마귀다. 악마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악마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한 그들이 악마였어요. 그게 안 되면 요한계시록의 짐승 개념이 전혀 풀리지 않습니다.

이미 실패로 끝난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여기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한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단순히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고 실패이면서도 실패 아닌 양 여기면서 오히려 실패로 규정하는 쪽을 공격하는 식으로 자기의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하면서 구약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뜻을 보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접하고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뜻이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느냐? 하나님의 뜻이 함께 있었지만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여긴 본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본성과 속성을 발휘하면서 자기 나라와 함께 망해버렸다. 그렇다면 구약 사람들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갑이고, 하나님은 을이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이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반복할 뿐이고 실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실패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라는 것이 짐승의 앞잡이라는 것이 폭로되면서 진짜 요한계시록이 요한계시록답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략은 차질이 없는 거예요.

여기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교재 초반에 읽어보시면 이 단어가 하나 나올 거예요. ‘도판’이란 말. 도판이란 말은 그림으로 된 판때기란 뜻이잖아요. 여기서 짜깁기로 표현했는데 이 표현도 맞지만 더 진실에 가까운 표현은 지구의 지각이 쭈그러들어서 맨틀에서 올라오는 마그마에 의해서 부유하는 하는 이동하는, 연못의 꽃이 피었는데 바람 부는 데로 이동하듯이 지각들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면서 충돌하면서 지진이 발생하거든요.

뜯어낸 지각들이 하나의 도판이라면 전혀 논리적으로 안 맞는 도판들이 옆에 있으면서 뭔가를 보여주게 돼요. 구약에 그 도판들의 특징이 뭐냐? 전부다 구약 역사의 쪼가리들입니다. 신명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구약부터 제대로 이해하자 이 말입니다. 구약부터 만들어낸 역사를 요한계시록은 잘라요. 맞지도 않는 그림들을 바로 옆에 놔둬버립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안목, 역사적 안목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체를 주께서 차단시키는 겁니다. 모자이크가 맞지를 않아요.

요한계시록 그림이 있다면 A는 B와 만나고, B는 C와 만나야 되는데 이것이 갈가리 찢어져서 A 옆에 C가 있고, Z가 Y에 붙어 있고,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구약 역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돼있는데 A에서 B, B에서 C, 시간 따라 흘러가는데 B는 따로 쪼개서 나오고, C는 따로 쪼개져 나와서 C는 A와 만나고, A는 X와 만나고 Y와 만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의 모든 문장들이. 그걸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맞습니까? 문법 자체가 역사적 토대 위에서 돼있는데. 안 맞지요.

지금 제가 언급하는 것은 왜 그렇게 하느냐? 왜 짜깁기하듯이 안 맞는 도판으로 요한계시록에 깔아놓는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신명기 9장을 봅시다. 이스라엘 나오고, 2절에 보면, “그 백성은 네가 아는 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가나안 땅에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힘이 센 거인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기를 차지해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미리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는 그들은 낙담을 합니다. 힘으로 못 이깁니다. 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다음에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제 이야기 아니죠. 신명기 9장 2절에 나오는 분명한 이야기지요. 그 다음에 4절에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여기 첫 번째 ‘힘’이 나오고, 두 번째 ‘의’가 나오죠. 힘과 의를 대비를 시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해석할 때 힘을 얻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의를 알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천국은 힘쓰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그러면 평소에 이 세상에서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터무니없는 짓이죠.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약속의 땅, 천국이 힘을 원치 않는 세계라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는 힘없이는 못 살거든요.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살 힘이 축적돼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천국에는 남아도는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런데 천국은 힘을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낙 자손은 천국에 못 가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못 가는 아낙 자손을 그렇게 겁내고 있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격해야 될 이스라엘이나 공격당할 아낙 자손이나 둘 다 똑같은 질이에요. 천국과는 상관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익히 아시고 일부러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해놓은 거예요. 천국 가는 이스라엘이 정작 천국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들춰내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천국 가고, 구원받고, 복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들은풍월로 많이 들었는데 정작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은 이룰 수 없는 그런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을 주께서는 들춰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명기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들춰낸다면 요한계시록은 오늘날 우리를 들춰내는 거예요. 이 땅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살 힘이 있기 때문에 살 힘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영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은 오래 산다. 영원히 죽지 않는 걸 영생이라고 보는데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어떤 인물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잠자고 있으면 영생 얻으면 오랫동안 살 것이다.” 할 때 영생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개념인데 영생이란 이름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영생이 그 사람 자체라는 인식은 우리한테는 상당히 낯선 인식이 되죠. 그런데 성경에는 여러분 알다시피 영생이 이 땅에 오셔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그분이 영생이에요. 영생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아저씨가 영생이에요. 이게 납득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목숨이 계속 이어지는 걸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목숨이 힘이거든요. 어떤 아저씨가 나, 영생. 내가 생명이고 길이고 진리야. 생명이 돌아다닐 때 오래 살고 싶은 내가 그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없는 거예요. 따라서 없다는 말은 우리는 영생과 상관없는 존재에요. 영생을 얻을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은 잡아서 먹는다고 해서 안 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약을 올리듯이 내 살을 먹으라고 하니까 잘라서 따로 굽고 지지고 이렇게 먹는다고 영생이 아니다.

영생 자체가 현재 있는 내 목숨은 부지한 채 오래 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영생과 연관되지 않는 영생이라고 따로 돌아다닐 때는 그동안 우리가 영생을 찾았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종교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는구나. 일종의 환상이죠. 태어날 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기 전에 뭔가 너무 한이 맺혀서 영생이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교회 세우고 사람 끌어 모으고 했을 뿐이지 하여튼 우리는 영생은 아니에요. 다른 분이 영생입니다.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겁니까.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기 때문에 나무만 치우면 영생은 못 얻게 돼있어요. 치워버렸는데 없잖아요. 옛날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할머니가 지혜롭게 제사 드릴 때마다 문어와 중요하고 비싼 것은 일년이 뭡니까, 삼년 씩 계속 다락에 감춰놓고 작년에 한 것을 또 내놓고. 감추니까 더 먹고 싶은 것 있죠. 만약에 문어가 영생이라면 우리는 맛도 못 봤어요. 그걸 치워놓으니까 아무리 살고 싶어도 영생 자체가 이미 절단된 상태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 절단된 상태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상은 힘의 세계, 힘의 세상입니다. 힘의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을 본다는 것은, 현재 힘을 더 얻기 위한 힘의 세상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규정했잖아요. 규정했기 때문에 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나나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으로 영생 얻겠다는 것은 힘으로 영생 얻겠다는 짓거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천국에 갈 수도 없는 것들이 천국 가겠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힘의 세계의 범주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너는 이 세상이야.”라고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의 위력이란 말이죠. 이 세상을 힘의 세계로 만드는 요한계시록 하기 위해서 밑에 도판을 까는데 그 도판이 신명기 도판이란 말이죠. 이제 제가 도판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를 아시겠지요.

신명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배치하기를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낙담케 하는 겁니다. 낙담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없다는 것이고, 평소에 이스라엘이 힘을 원했다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이 원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힘 센 하나님을 평소에 원했다는 것이고 이 두 가지가 합쳐서 요한계시록에 들어오면 모두 다 악마에 소속돼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과 고백을 한다 이 말입니다.

어느 교단이든 어느 단체든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여러분, 우리 힘 뺍시다.” 이런 쪽으로 해석하는 게 없어요. 어떻게 하면 지금 갖고 있는 힘을 유지하면서 천국까지 들어가느냐?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 있잖아요. 일곱 교회 해석할 때 보세요. 일곱 교회가 이렇게 책망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서 이러한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하게 되면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존속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모아놓은 힘은 누수 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고 커질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해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요한계시록 본래의 취지라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가 짐승의 앞잡이라는 게 들통 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명기를 몰라서 그래요.

신명기 9장에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아낙 자손을 배치한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가는 것이다. 의가 힘으로 전환되는 것을 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신명기 9장에 보면, 너희들은 원래 목이 곧은 백성이다.

5절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이니까 죄라는 뜻이고 죄라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죄기 때문에 반드시 힘을 얻고자 힘을 탐내게 되고 힘을 그리워하게 돼있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의를 줄까?” “아닙니다. 헌금을 주시옵소서. 교인들 주시옵소서.” 구조가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더러운 구조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더러운 죄성을 주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로 아름답게 수놓아서 오려서 요한계시록을 장식하는데 밑에 도판으로 까는 거예요.

제가 신발을 샀는데 급하게 사느라고 컸어요. 그래서 한두 달 동안 마음고생을 했지요. 신발을 신을 때마다 신발이 미워지는 겁니다. 신발 수선하는데 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입원해서 한 달 더 기다렸어요. 그래서 어제 드디어 그 사람이 일 시작해서 가죽을 대충 오려서 앞부분에 집어넣으니까 딱 맞아요. 그래서 삼천 원 받았어요.

밑에 도판을 까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이라는 도판이 깔렸다는 걸 모르고 현대 21세기 관점에서 힘을 얻고자 하는 그런 본성을 감추지 않는 채 요한계시록에 덤벼들어서 천국 가는데 힘 달라고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단 말이죠. 처음부터 신명기에서는 너희가 목이 곧은 백성이고 의롭지 않다고 이미 판정 났잖아요.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된다니까 의를 양으로 끌어 모으려고 또 죄의 본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너, 의를 얼마치 모았어? 난 이만큼 모았어.”

만나라는 것이 많이 저축하라고 준 만나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라는 것은 저축할 필요가 없는 하늘에서 온 음식이에요. 하늘나라에는 저축 왕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은행도 없고 보관금고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도둑놈이 없는 이유가 뭘 보관할 게 있어야 도둑놈이 있지. 자기 게 없는데. 자기 것이 없는 천국에 가려면 이 땅에서부터 자기 것이 없어야 된다는 걸 훈련을 해야 되는데 이 땅에서는 훈련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 것으로 내가 살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게 있어야 된다고. 내 의, 내 믿음, 내 소망 등 전부 앞에다 내 것을 붙이기 때문에 내 것 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요한계시록에서 일괄적으로 마음껏 갖고 있으라고 해놓고 시커먼 콜타르를 부어버려요. 모든 게 죄가 되도록. 마음껏 가져. 얼마나 가지든지 상관없이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고 자랑질하지 마세요. 그것도 죄에요. 물론 잘 사는 것도 죄고. 적당하게 사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신명기에 나타나는 언약의 본성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언약에서 나오기 때문에 언약 빼놓고 의라고 간주 안 할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심을 했어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구원하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 죄 많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다녀야 역사 배후에 있는 이름 모를 세력자가 나오잖아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짐승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게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재 5페이지에 보면, 교재가 있으면 참 강의하기 편해요.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네 생물이 어디 있는가?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저 꽃병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데 이는 역사상에 있다고 느껴지는 질의자와 꽃병은 같은 역사적 존재로 눈에 띄기에 당연한 질의다. 하지만 네 생물은 어디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일곱 머리에 열 뿔의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인가? 어느 열대 우림 지역에 있는 짐승인가? 본 사람이 있는가? 없지 아니한가.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가?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될 수 없다.]

꽃병과 질문하는 사람이 같은 역사에 존재해 있잖아요. 같이 있잖아요. 눈에 띠잖아요. 네 생물은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는 걸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안 되지요. 있어야 묻지. 여기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입니까? 이 동물원 가봤어요? 없지요. 어느 열대우림에 있는 짐승입니까? 본 사람 있습니까? 본 사람이 없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자체가 말도 안 되죠.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합니까? 따라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악마를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짐승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반려동물은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은 가깝기 때문에 그렇지, 지리산에서 곰 만나면, “영식이 아니냐?” 이럴 수는 없단 말이죠. 이름은 인간에게만 붙일 자격이 있고 짐승은 붙일 자격이 없다는 그 인간이 짐승을 짐승이라 부르기 때문에 짐승 이름이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이름이 없느냐 하면, 이름이 없는 분이 척결해야 되지 이름이 있는 인간은 이름 없는 존재에 대해서 대항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 글 읽어보셨지요. 거기서 크리스천이 칼로 짐승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건 지가 천사보다 더 세다는. 천사도 짐승에 대해서 갈지도 못했습니다. 지가 뭔데 칼 들고 찌릅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도 짐승을 이기지 못했어요. 이 세상에 계실 때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은 짐승의 하수인으로 돼있기 때문에 갑은 짐승이고 을이 인간이거든요. 어떻게 을이 갑을 이깁니까.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도판으로 까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막상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똑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잔득 풀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저 적들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가 이스라엘의 고민거리인데 하나님은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요. 저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 너희에게 속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꾸 해버려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분명히 같이 봤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본 게 뭐예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눈이 네 개입니까. 똑같이 눈이 두 개에요. 시력이 5.6입니까? 1.5 됐는지 모르겠어요. 똑같이 봤어요. 똑같이 그들은 우리보다 힘세고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낙담하고 울고불고 통곡하고 난리 났어요. 왜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갑시다. 승리합니다.” 왜 그런 망발을 했어요? 그들은 뭘 봤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배치해놨다는 입장에서 언약을 생각하니까 그들이 힘센 자를 배치해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배치해놓은 것에 대해서 극복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이 있느냐하는 여부를 보겠다는 것으로 본 거예요.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나머지 열 명은 하나님, 하나님 말은 하지만 전혀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어요. 그냥 강호동 같은 큰 덩치, 그러니까 씨름하면 마땅히 지지요. 패배하기 마련이지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패배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전쟁은 적들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전쟁하는 중이다. 진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언약으로 전쟁하는 중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갔을 때에 전쟁을 하면서도 사실은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지금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둘 사이의 전쟁입니다. 그저 뭐든지 힘으로 이기려고 하는 이 본성, 지울 길이 없어. 돈 힘, 명예 힘, 권력 힘. 뭐든지 힘으로만 해석이 가능한, 힘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되는. 뭐든지 힘으로만 생각, 계산, 줄 세우려 하는 이런 사고방식은 지금도 주님의 말씀과 우리와 끊임없이 전쟁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위로 잘라서 그냥 밑에 깔아놨습니다. 깔아놓으니까 말씀이 그냥 깔리기만 하겠어요? 거기서 말씀 자체의 위력이 막 나오거든요. 구약에 이스라엘이 실패하기 전의 이스라엘이라면 신약 요한계시록에는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이고, 그것도 다 패역한 이스라엘로 이미 확장되고 말았어요. 이스라엘 멸망하면서 각 나라로 흩어졌잖아요. 따라서 언약이 따라 가서 이스라엘을 따라 갔으니까 언약적으로 적용되는 겁니다. 이것은 선지서에 예언돼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중앙과 사방. 역사적으로 보면 중앙은 역사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동서남북 가운데가 중앙이 되죠. 이건 구약이거든요. 신약 때에는 중앙이 뜹니다. 떠서 중앙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앙은 어린양 하늘나라 보좌가 중앙으로 자리 잡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그림은 이 하나로 끝났어요. 사방 동서남북은 스가랴에 나오는 겁니다. 스가랴에 보면 이 네 모퉁이마다 네 천사를 동원해서 동서남북을 쥐고 있어요.

어릴 때 이불 호청 빨 때 보면 완전히 공사에요.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날 받아서 특히 6월 6일 공휴일은 이불 호청 빠는 날이에요. 남자든 여자든 다 동원해서 풀 먹여서 양쪽에서 잡아 당겨야 돼요. 특히 열 세 식구 되면 이불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빳빳하게 다린다고 여자가 갑이 되고 남자가 을이 되어서 당기죠. 사방을 동서남북을 천사가 당겨주는 거예요.

구약 역사에선 중앙이 있어요. 항상 영웅이란 역사에서 중앙지점을 차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중앙지점에 법궤가 있지요. 요단 강 건너갈 때 제사장들이 법궤를 호위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땅 전쟁에서도 항상 법궤가 중앙이 되어서 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가 전차나 기갑부대인 줄 알고 들고 갔다가, 그러니까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힘으로 해석한 거예요. 이런 역사가 얼마나 고마운 역사입니까.

교회가 땅 사놓으면 무조건 땅값 올라야 돼요? 교회가 하는 일은 무조건 야외예배 하면 비가 안 와야 됩니까? 대구 어느 교회는 권사님들 놀러 갔다가 차가 뒤집어져서 여섯 분 돌아가셨어요. 갈 때 차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겠어요. 목사부터 기도하고 갑니다. 처음부터 기도할 때 여섯 명만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적 없잖아요.

힘으로 생각했는데 주께서 그 힘을 빼앗아버렸어요. 이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중앙이 아니고 중앙은 너희를 비껴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 중앙지점을 차지했는데 나중에 기원전 586년에 망합니다. 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흩어졌던 모든 세계가 이스라엘이 우상 섬겨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처럼 이스라엘만 우상 섬긴 게 아니라 모든 나머지 민족들도 우상 섬기는 것으로 마땅히 중앙지로부터 벌 받아 될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천사가 여기 오지요.

그 네 천사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사람 모습, 독수리 모습, 황소 모습, 사자 모습, 사면을 차지하고 있고 중앙에 인자 같은 이가 계셔요. 이게 일종의 전차에요. 이것이 중앙지점에 있으면서 지상에 모이거든요. 그렇다면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    이것이 요한계시록 4장 7절에 보면,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황소 같고, 독수리 같고, 이렇게 요한계시록 4장에 있잖아요. 그러면 이 도판은 에스겔 1장에서 자른 것이죠. 자를 때 그냥 자르면 안 되고 에스겔 1장에서 뿜어내는 하나님의 뜻이 담기도록 뿜어줘야 돼요. 에스겔에서 차용했구나 하고 넘어가면 안 되고 에스겔 자체에서 이러한 천사의 모습은 어떤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했던가?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요한계시록에 깔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밑에서 에스겔 취지가 뿜어 나오죠.

그러면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는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이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못 벗어나요. 심판이라 하는 것은, 힘으로 버티려는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중앙에서 원하는 것은 의를 원하죠. 의는 하나도 없고 전부다 힘으로 버티니까 이 땅은 마땅히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분명히 사라져야 되는데 이 세상은 멸망돼야 된다고 외치는 자가 있어요. 그게 에스겔, 인자에요. 인자가 외치잖아요. “사라져야 돼!” 인자가 나중에 중앙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성소,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이 중앙에서 내려온 성령이나 인자가 임하면 그것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에스겔이 그 취지거든요. 그 취지를 21세기 밑에다 박아놓으면 세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의식은 누가 힘세냐? 힘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신명기에 의해서 의가 없는 힘으로 버티는 사람은 멸망한다고 외치는 그 당사자가 하나님의 교회, 이스라엘에 소속된 144,000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풀리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짐승은? 여기에서는 짐승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니엘 도판이 들어가는데 다니엘에 짐승이 나와요. 짐승이 여기서 중앙을 차지해요. 이스라엘 멸망할 때 중앙은 하늘로 떠버렸지요. 떠버리고 그냥 차지하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두 증인을 살해함으로써 중앙을 차지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신 곳이고, 그게 소돔이고, 애굽으로 돼있어요.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잖아요.

주님이 중앙으로 떠버렸는데 그 빈자리를 적그리스도, 짐승이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차지할 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의 모습으로 차지하면서 사람들은 여기서 옛날 이스라엘을 반복하고 이스라엘을 그대로 모방하는 그러한 형태의 종교국가가 이 세상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그러한 모습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악마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양의 탈을 쓰고 세상을 차지하고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모든 사람은 이로써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을 이뤘다고 자부하는 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런 과정을 주님께서는 구약에 있는 도판들을 동원해서 밑에 깔아놓는 겁니다.


쉬고 하겠습니다.
 한윤범 (IP:14.♡.134.60) 13-06-12 16:49 
20130606 봄특강b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관심사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를 잊을 수가 없지요.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계시는 분으로. 지금 예수님은 사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계시는 분.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성도 아닌 자가 성도로 사는 자, 이게 바로 성도지요. 예수님은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계시니까 여기 있다와 이 땅에서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돼. 하는 성도다움 이 두 개를 모으면 이게 바로 짐승의 나라에 해당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곧 짐승에 속해서 사는 것이다. 왜냐? 예수님께서 짐승의 나라에 이런 식으로 사셨기 때문에. 짐승의 나라를 인간은 몰라요. 짐승의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것은 계산하지도 않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사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그 미지의 존재는 그 무엇, 그 어두운 실체가 드러난다면 이 땅에서 성도로써 산다는 것은 여기다 그대로 대입하면 성도로 살지 않고 성도로 사는 자 성도가 된다. 이런 논리가 되거든요.

그러면 성도로 산다는 것은 교회에 헌금한다는 말이고, 성도로 안 산다는 것은 너, 성도 아닌 것 같아, 라는 평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성도가 되는 거예요. 한평생 살면서 전혀 성도답게 살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성도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살아야 유일하게 성도로 사는데 성공한 사람이에요.

만약에 성도로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묻게 돼요. “성도 같아?” 옆에서 궁시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집단화되어서 그들끼리 예수님은 있지 않고 없는 분이 아니고 그들 조직에 포섭된 예수가 돼버립니다. 그 예수는 가짜 예수기 때문에 거기서 주께서는 빠져나왔기 때문에 성도라는 집단에서 포섭되지 않고 빠져나올 때 그 사람이 진정한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 흔적이 뭐냐?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짐승의 존재가 파악된 것처럼, 윤곽이 드러난 것처럼 성도도 성도가 성도답지 않게 살아가는 자체가 성도가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도답게 살았다고 발목 잡는 그 세력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고 말씀으로 살았다고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돌아가실 때가 되서 진정 내가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는지, 아니면 내가 이것과 상관없이 구원받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동안 성도답게 살려고 한 그 헛된 짓이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쓸데없는 짓을 한 겁니다. 주님은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주님방식이 아니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을 내가 부응하고 충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가식적으로 몸부림 쳐왔던가.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라는 개념 자체가 세상에는 성도라는 개념이 이미 구축돼있단 말이죠. 거기에 메이지 않는 자로 살려면 성도답게 사는 구축된 용어들 주변에 무엇이 깔리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 있고,  또 사람 있습니다. 이게 전부지요. 사실은.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와요. 없는 존재에요. 태양을 머리에 짊어진 여인? 파마했습니까? 뜨거워서 어떻게 해를 져요? 태양의 중량이 얼마나 되는데 몸무게 60 짜리 여자가 어떻게 짊어집니까? 없는 존재에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 어느 동물에도 없지요. 짐승, 아까 뿔, 이것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없는 것들로 배치해놨어요. 완전히 세상을 뒤덮어놨어요. 그것은 이 세상에 있다고 여기는 예수님은 사실은 없는 분이고, 없는 식으로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 보기에 짐승? 없어. 해를 짊어진 여인? 그런 것 없어. 뿔? 그런 것도 없어.

없다고 사람들이 확정지어놓은 그 환경을 주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도입해버립니다. 너희들이 있다고 한 것보다 너희들 보기에 없다고 한 그 바닥 위에 너희들은 살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없다고 전부다 무시하고 다 제거해버리고 달랑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우리는 무엇이냐? 우리는 죽어서 어디 가느냐? 이런 걸 논한다면 이런 행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냐고 이야기할 때는 없다고 간주할 것들을 옆에 붙여놓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해석이 난감하게 되죠. 없는 걸 어떻게 해석하란 말인가? 무저갱? 바닥이 없는 우물? 그런 우물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바닥없음이 과연 성립이 될까요? 바닥없음은 이런 뜻이구나. 한국에서 우물을 파면 아르헨티나나 남쪽이 나와요. 그런데 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중력 때문에. 파봐야 스톱돼요. 지구 자체가 위아래가 없거든요. 중력이 있는 곳이 아래고 나머지는 위가 되는 겁니다. 중력이 없어야 위아래가 되는데 구멍이 없는 우물은 지구상에서는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저갱에서 귀신이 아니고 마귀가 나오잖아요. 무저갱이 있어야 나오든지 말든지 할 텐데 이 자체가 없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은 성경에는 나왔는데 만날 수가 없지요. 있으면 사진 한 장 찍겠는데 그럴 입장이 못 돼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빠져나올 수 없다.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은, 빠져나와야 될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됩니다. 얘들에게 하는 말이, “너 인간이 되어라. 공부 잘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요새 어린 여자 가수에게 “네가 노래 잘 한다마는 가수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된다.” 걔가 인간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니까요. 자기가 인간의 전부인데 여기서 또 뭔가 다른 내가 있다는 말인가? 상상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요한계시록 자체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빠져나온다든지 구원이라는 개념도 안 나오죠. 안 나올 때는 이렇게 됩니다. 지금 인간들이 있는 이 세상을 힘든 세상으로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상상을 합니다. 힘든 세상에서 천국을 상상해서 임의로 만들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의 내용은 지금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요소들 중에서 괜찮은 것들만 골라서 채워 넣게 돼요. 이 천국은 이 세상의 연장, 확대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건너가면 되는 겁니다. 이런 천국은 빠져나온다는 것이 의미가 없고 여기서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 우주선 도킹하는 것처럼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전혀 있지도 않는 겁니다. 짐승이라는 게 왜 나오는지 그런 것은 전혀 없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문제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인간들끼리 뭉쳐있는 이게 문제가 되지요. 그러면 우리들끼리 있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 문제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집단밖에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멸망한 이유가 우상을 섬겨서 멸망했거든요.

우상이란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게 우상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굴 섬겼느냐 하면, 여호와를 섬겼거든요. 그런데 에스겔이나 보면 여호와를 섬겼는데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이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상이란 여호와도 우상에 포함돼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도 가짜 예수에 포함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것이 조작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어떻게 드러냈느냐?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통해서 여호와의 뜻을 다 이야기해줬단 말이죠. 그러면 새 언약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새 언약을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자기는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새 언약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 들이닥치니까 여호와를 섬긴 것이 아니고 마귀를 섬긴 것으로 예수님한테 고발당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없다고 봅시다. 그들이 여호와 섬기는 것이 가짜 여호와라는 것을 알 길이 없지요. 예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사라지고 안 계시다고 여기고 자체적으로 여호와를 섬길 때 이것이 우상이 된다면,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 되고, 말씀을 지키는 게 우상이 된다면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대표적인 집단으로 부름을 받은 게 돼요. 이게 신명기 마지막 대목에 나옵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스라엘 너희들은 필히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그 대목을 뺍니다. 이것은 자기들이 멸망하고 난 뒤에 첨가해서 조작한 구절이지 모세가 그런 이야기할 적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스라엘을 도와준다면 애초부터 초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지 절망적인 예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 2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결국은 여호와를 배반하게 돼있는 그런 코스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여호수아 마지막 대목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니까 너희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어. 필히 너희들은 망하게 돼있다.

반드시 망하게 돼있는 그 이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위로 보지 말고 옆으로 봅시다.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밑바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을 깔아놓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력을 불러내기 위해서 여자라고 했고, 그 다음에 아까 이야기한 무저갱, 그 다음에 유황불, 그 다음에 생명나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 지팡이, 전부 다지요. 그리고 보좌, 천사. 이스라엘 역사를 뚫고 이런 것들을 밑에 깔아놓으면 이스라엘이 이것을 뚫고 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쪽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바라보게 되면 옛날 자기가 겪었던 모든 역사, 부정적인 역사, 벌 받은 역사를 보게 되면 여기서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한테 멸망당해야 되는지가 부각이 돼요. 들통 나요. 드러나게 돼있어요.

그렇다면 무저갱이라든지 아들 개념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창세기부터 나왔잖아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런 단어들이 쪼개집니다. 난도질당하지요. 이스라엘 자체를 쪼개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틈 사이에서 올라오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세력들이 모아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본래의 세력들이 집결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이건 안 보이고 쪼개진 이스라엘 역사, 이런 것만 보이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스라엘 속에 일곱 교회도 포함됩니다. 일곱 교회도 쪼갭니다. 에베소교회는 이게 문제야. 라오디게아교회는 이게 문제야. 서머나교회는 이게 문제야. 빌라디아교회 이것도 문제야. 전부 다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이 틈 사이에 나오는 이것을 봉합하는 거예요. 이걸 다시 뭉쳐서 있음을 자꾸 만들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세력이 현재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세계를 들어가게 되면 말씀으로 이스라엘이 그 동안 부정적으로 겪었던 모든 용어들이 추가적으로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반발 세력으로 하나로 뭉치고 집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집결된 것을 짐승, 바벨론 또는 음녀라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돼있어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진행과정이 뭐냐 하면,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야기, 그 다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우기는 교회들의 등장과 책망 받는 교회와 그 다음부터 천사들이 와서 낱낱이 쪼갭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쪼개면 마지막 요한계시록 16~18장에 가면 이것들이 쪼개면 쪼갤수록 집결해서 오직 하나의 노선, 음녀, 큰성 바벨론으로 집결해서 대항하게 됩니다. 여기에 맞서서 집결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로 확정된 한 신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위에서 신부의 자격으로 내려오면서 혼인잔치가 이뤄지죠. 진행과정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빨리 지나갔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왔던 모든 용어들이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단합된 결집된 모든 조직들을 쪼개는 역할을 하고 쪼갠 그 사이에서 “왜 쪼개는데? 네가 뭔데 쪼개는데? 우리가 여기 모여서 하겠다는데 네가 왜?” 하고 쪼개는 틈새를 메우면서 반발하는 세력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세력으로 나온단 말이죠.

말씀으로 쪼갠다는 것은 주님 쪽에 속한 증인들이고 그러니까 144,000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고. 거기에 반발하면서 서서히 통째로 하나의 성깔로 집결하는 하나로 움직이는 움직임을 쪼갤 때마다 강력한 힘으로 결합이 돼요. 그럴 때 그게 뭐냐 하면, 다니엘이 말하는 짐승의 나라의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은 어디 있습니까? 짐승은 이게 짐승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짐승의 세계라고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기 있다는 것은 사실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다. 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그게 주님에 대한 반발이죠. 그동안 이 땅에서 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지금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죽은 자로 사는 것이라는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그동안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니까 얼마나 기분 나쁘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단결해서 살자. 단결해서 살면 그게 바로 바벨론이고 음녀가 되고 짐승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교재 5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요한계시록 5장에서 1절에 3절 말씀 나와 있지요.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가 여기 있음을 감안해서 보게 되면 진짜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왜 봉합니까? 서점에서 책 사는 입장에서 제일 기분 나쁜 게 비닐로 덮어놓은 게 있잖아요. 칼로 찢고 싶어요. 뭐 신비주의 전략도 아니고 뭐 중요한 게 들어있다고. 주로 내용 안 좋은 만화책에 많이 있거든요. 얘들 보지 말라고.

여기 비닐봉지가 일곱 번이나 감아놨어요. 보라는 거예요?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책을 봉해놨으면 봉해놨다고 하면 될 건데 천사가 하는 말이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책을 펴서 인 떼기에 합당하냐?” 묻기는 왜 묻는데. 출판사가 책을 일곱 번 봉해놓고, “너희 중에 이 비닐 뗄 사람 없지롱?” 그러면 책의 존재의 목적이 뭐고 이유가 뭡니까? 결국은 약 올리는 거죠. “너는 책 읽을 자격도 없어.” 이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실 때 예수님은 여전히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안 보고 말지 뭐. 예수님, 요한계시록입니다. 난 안 봐. 끝난 문제에요. 여러분 창세기 있습니다. 성경 있습니다. “난 안 보고 이대로 살 거야.” 그러면 그만이지 뭐 어떻게 하는데. “요한계시록 이걸 봐야 진리를 안다고?” 이러면 이 사람은 예수님한테 걸려든 사람이에요. 성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책을 비닐봉지로 일곱 번 감아놨거든요.

그러니까 사도요한이 울지요. 예수님이 얼마나 짓궂습니까? 괜히 놀고 있는 얘에게 이 책 보라. 비닐봉지로 쌌어요. 울어라, 울어라. 울리지 못해서 안달 난 것 같아요. 일부러 울려요. 사도요한이 웁니다. 아무도 이 책 펴기를 합당한 사람이 없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울기는. 안 보고 말지. 뭐 답답해서 뭐 궁금한 게 있다고. 신기한 것도 귀찮아. 천기누설도 다 귀찮아. 난 이대로 밥 먹고 살래.” 그러면 그만이지 보기는 왜 보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하여 여기에 뭘 담아내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5장 1절 다시 보게 되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다고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오른손으로 일하시는 낯선 하나님과 너희들이 전에 죽였던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뭐고, 어떻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전부다 구라고 거짓말인 이유가, 오른손과 관련 있는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을 맺지 못하면 너희들은 그동안 너희들이 상상한 엉터리 우상적인 하나님을 섬겨온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이걸 보고 우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어린양만이 이 책을 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5장부터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왜? 오른손과 관련된 분인데 오른손에 관련된 기능과 내용의 책을 펼 사람이 아담부터 해서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결국 인간들은 예수를 만나면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팔자고 그런 기능을 해야 돼요. 따라서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온순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아무 이상 없음. 별 탈 없음. 우리는 죽으면 좋은 나라 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든 종교에 따라서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 책을 펴기 전까지는 교요한 세상이에요. 방금 제가 지어낸 거예요. 정말 고요한 세상,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책을 펴게 되면 번잡스러워. 번잡스러워도 너무 번잡스러워. 너무 요란스러워. 반대로 요란한 세상. 요한계시록은 요란해도 너무 요란스러워요.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너무 조용해요. 가끔 북한의 김정은이 핵미사일 그것뿐이지. 그 외에는 아주 조용합니다. 성폭행범 설쳐대도 아무나 찾아오는 게 아니고 밤거리에 술 먹고 돌아다녀야 그런 일이 있는 거고 집에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도 안 되고.

어쨌든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 정말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괜치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하등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자신을 내가 하나님이라고 드러내는 사람한테는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은 인생이 요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당탕탕. 요란스러워요. 그렇다면 고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밉상 받는 계기가 될 뿐이에요. 하지만 사도요한에게는 이것은 세계에서 최고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웁니다. 내가 이걸 모르고 인생 산다는 것은 이 자체로 나는 인간도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드디어 펼쳤습니다. 펼쳐도 한꺼번에 펼치면 좋겠는데 사람 감질나게 만드네. 한 번 벗기니까 우당탕탕 하더니만 또 다시 사면은 고요해지고. 그 다음에 제2막 벗기니까 잠시 우당탕탕 하다가 다시 고요해지고. 일곱 번을 벗겨서 다 됐을 줄 알았는데 일곱 나팔까지 부네. 그게 다 인줄 알았는데 다음에 일곱 대접을 쏟아 붓네. 아무리 지금 봐도 세상은 너무 치안이 잘 돼있어요. 특히 한국경찰은 4대악 제거한다고 설쳐서 너무 조용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혼자 굉장히 요란스럽단 말이죠.

이걸 어떻게 접근해 나갈 것인가? 사실은 약간 힌트를 드렸어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동원할 때는 현재 인간을 쪼갠다고 했습니다. 쪼갤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언약을 들을 때 그들이 오해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 없지요. 그냥 밥 먹고 살면 되니까. 그런데 말씀이 오니까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순종을 해요. 그런데 순종하겠다는 그걸 기화로 자신의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분명히 자신들은 죄인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 그들은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항상 자기가 갖고 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고 신을 도입시키거든요. 과거까지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고 미래는 자기가 안 살아본 인생이기 때문에 여기다 신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신이 자기에게 해줄 것은 과거에 미흡한 것, 과거에 상처 받은 것, 손해 본 것, 손실당하는 것, 이런 것을 넉넉하게 원상회복시켜달라고 신을 믿게 돼있습니다.

신을 믿게 되면 행운을 가져오게 되면 그 증거를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주변의 막대한 나라에서 찾아요. 주변의 나라가 잘 사는 나라잖아요. 자기도 잘 살아요. 잘 산다는 말은,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는데 저들은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겼더니만 우리보다 더 잘 살거든요. 그래서 산다는 것은 플러스알파란 말이죠. 분명히 똑같이 노력해도 복을 받아 사니까 사는 만큼은 그들이 믿던 신에 의해서 행운으로 주어진 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껍데기에다 그들이 복을 얻는 방식을 집어넣으면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오해할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주의 말씀은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쪼개는 방법으로 오는 겁니다. 왜 그러냐? 이스라엘은 있는 나라지요. 있는 나라에 이스라엘 사람들 본인이 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없는 분으로 이 땅에 나타난 분이에요. 이 땅에서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있음이 적용될 수 없는 없는 분으로 이 땅에 서슴없이 나타난 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없는 분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데에 자꾸 섞이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퇴출시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없는 세계가 있는 세계보다 더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 쪽이거든요. 현재 있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이 같이 있는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이야기가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이 애를 먹습니다. 그 전에 물론 모세가 애를 먹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만나는 보관용이 아니라고 했지요. 보관하면 썩어버려요. 그러나 애굽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보관하려고 해요. 보관하고 많이 먹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할 때 물이 없지요. 양식도 없지요. 물이 없고 양식이 없을 때 현재 있는 나는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원망했습니다. 그것을 다투다, 또는 시험하다. 이런 식으로 광야를 보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오른손의 기능으로 나타날 때만 하나님입니다. 오른손이라는 기능은 하나님의 원수를 노리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원수는 비겁하게 숨어있고 그 앞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님을 맞이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언약을 담고자 할 때 이스라엘은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반발할 때 중간에 모세나 선지자들이 애를 먹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숨어있는 어두운 나라에 다가서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마중 나가서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말지요.

멸망시킬 때 하나님께서 직접 멸망시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방나라 멸망시킬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우박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멸망시키고도 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멸망시킬 때는 바벨론 나라를 통해서 합니다. 그전에 앗수르를 통해서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고 앗수르는 날아갔고. 바벨론이 숨어있는 나라가 돼요.

이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바벨론이라 하지 않고 짐승인데, 제1 짐승. 짐승2가 뭐냐 하면, 바벨론 다음에 페르시아, 바사나라. 짐승3가 헬라이고, 짐승4가 로마입니다. 성경에는 여기까지만 나와요. 왜냐하면 로마에 이르게 되면 여기에 오른손에 주의 자리에 계신 분이 직접 오셔서 드디어 오른손의 정체를 다 드러내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서 짐승의 정체를 진척할 이유가 없어요.

짐승의 실체를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라 하면서 실제 내용은 짐승2, 짐승3, 짐승4의 내용으로 바벨론으로 다시 집결시킵니다. 로마까지 마감시킴으로써 다니엘에서 짐승4가 로마 이후에는 짐승이 없어요. 다니엘에 그렇게 예언되고 있습니다. 스가랴에도 약간 예언된 게 있어요. 스가랴도 여기 교재에 뿔이 나오는데 뿔이 유다를 들이박는 역할을 합니다. 로마에 열 뿔이 있어서 이 뿔은 유대나라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받는 역할, 파쇄하고 멸망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나라를 짐승으로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이 바벨론 나라를 짐승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스스로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너는 빠지라는 거예요. 바벨론 같으면 이스라엘아 바벨론과 싸워라 하면 되는데 바벨론이 아니고 로마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인간들 집단이에요. 인간들은 여기서 빠져나와야 되는 겁니다. 여기 오른손으로 일하시는 분과 짐승과 싸우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로마 이쪽에서 짐승으로 표현했다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나대지 말라 이 말입니다.

용어 자체가 짐승을 사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이미 짐승이라고 지칭되는 바벨론에 멸망당했잖아요. 그러니까 바벨론 속의 이스라엘이 짐승을 이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이미 져버렸으니까 아무도 짐승을 이길 수 없어요.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서 직접 짐승을 짐승으로 들춰내는 겁니다. 짐승을 들춰내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점선으로 하겠습니다. 비로소 짐승과의 전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있어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바로 교회, 이것이 성도입니다. 떨어질 때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고 언약적으로 한다고 해서 12*12*1000이라 해서 하나님의 144,000이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짐승과 싸우니까 그렇지 교회가 짐승과 싸워서 이스라엘이 되는 건 아니에요. 이것은 성사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목사, 당신이 하고 말이 뭐냐? 만약에 우리가 성도라고 한다면 성도기 때문에 짐승과 싸워야 돼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성도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성도되지 말고 주님이 하시는 일의 결과물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일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짐승이 짐승으로 드러난 이상은 짐승은 쉬는 법이 없어요. 짐승이 아니고 로마라든지 미국이라든지 필리핀 같으면 고요합니다. 북한만 좀 떠들어서 그렇지 신문, 방송 보세요. 세상은 정상적이에요. 동성애자가 결혼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것만 이슈가 되지 세상이 불바다 되고 그런 이야기 안 나오거든요.

이 세상이 짐승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에게 맡긴 사람에게만 파악되는 개념이지 일반사람한테는 전혀 감잡히지 않는 거예요. 그저 요한계시록 안 풀린다고 울고 있는 사도요한한테만 눈에 보이지 다른 사람한테는 큰 문제 거리도 안 돼요. 문제 거리도 안 되니까 문제 삼지 말고 그냥 삽시다. 괜히 나대지 말란 말이죠. 요한계시록 지켜보겠다고.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 신천지 천지일보가 저한테 질의한 다섯 가지 중에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한 네 생물은 무엇인가 할 때 이 질문에서 누구인가의 형식을 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하느냐? 지금 어떻게 활동하고 일하고 있는가? 이게 만약에 짐승이 무엇이냐가 돼버리면 내가 활동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오늘 일과도 끝났고 심심한데 뭐 할 것 없나? 옳지. 짐승이 무엇인가 내가 연구해볼까?” 이렇게 나서게 되면 짐승이 누군지 파악하는 주체가 활동하는 나인데 그런데 우리가 빠지잔 말이죠. “짐승이 뭔지 알아서 뭐 할 건데?” “알면 성도되지. 성도답게 산다.” 그러지 말라 했잖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나서는 건 오직 돈 버는 문제 외에는 없어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다 돈 벌다가 양심에 걸린다 싶으면 성경 좀 보고. 그것뿐이에요. 돈 벌다 심심해서 성경 보는 거예요. 우리는 그쪽이지 짐승 연구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하나님께서 짐승이 무엇이냐 할 때 지금도 활동하는 분에게 맡깁시다. 활동하는 분이 오른손이에요.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지금도 짐승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그래야 내가 활동하는지, 않는지 여부를 떠나서 지금도 나 빼놓고 일하시는 주님과 짐승과의 그 다툼으로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현실로서 다가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내가 할 건 아무것도 없기.

심지어 요한계시록 해석도 내가 할 필요조차 없는 이유가 뭐냐? 해석해서 알아서 뭐 할 건데? 그래서 구원받으려고?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는 결과물이라니까. 언약이 쉬지 않거든요. 언약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답지 않게 살기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언약 안에서 주께서 세상을 짐승으로 겨냥하면서 요한계시록대로 차근차근 진행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주변에 사건들이 일어나요.

짐승이란 말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짐승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눈에만 보이기 때문에. “이 짐승.” 그렇게 이야기하면 나는 짐승 아닌 게 되잖아요. 짐승이란 어느 차원이냐 하면, 오른손의 위치에 있을 때 짐승으로 파악되는 거예요. 그럼 짐승은 뭐냐? 그냥 인간이죠. 인간인데 짐승에게 속해 있는 인간이다.

그 특징은 뭐냐? 바로 하나 되기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그 구호의 하나 되기. 세상의 특징은 결국은 다 하나로 뭉쳐진다는 겁니다. 하나로 만들어져요. 종교도 하나요, 국가도 하나요, 전부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두 마리가 아니고 한 마리기 때문에 그래요. 두 마리 되면 안 되거든요. 여기 짐승1, 2, 3, 4 있지만 결국 하나의 짐승으로써 파생된 거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로 뭉쳐지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로 돼야 비로소 구원자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오른손에서 지금도 작용하시는 분, 이 땅에서 죽으심을 당하신 사람에게 버림 받으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한 분이 이 하나를 통해서 대비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받는다. 어떻게 행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 때도 그렇게 등장하는 겁니다.

거기에 필요한 용어들은 10분 쉬고 이 용어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그리스도와 짐승의 하나 됨과 그리스도의 하나 됨으로 모든 용어들이 달려가고 있는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한윤범 (IP:14.♡.134.60) 13-06-12 16:52 
20130606 봄특강c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12장을 봅시다. 교재 6페이지 펴시고요. 3번에 태양을 입고 있는 여인이 나오지요. 이게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 나옵니다. 이걸 우리에게 지키라는 말입니까? 해를 뒤집어쓴 여자 나왔다. 우리도 뒤집어쓰라는 말이에요? 뭔 뜻이냐 하면, 우리 노력으로 해를 입은 여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붉은 용이 나온다고 해서 붉은 용을 우리가 파악해서 대결해서 쳐부숴서 우리를 구원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이 원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말씀이 와서 언약이 와서 쪼개보니까 조각조각 나버렸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파쇄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서 전부다 이스라엘은 우상자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오해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주님 사랑하지 않고 형제 사랑하지 않는 율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란 것은 말씀에서 완전히 다 들통 났어요.

들통 난 찢어진 조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읍니다. 모아진 이걸로 마지막 세상을 요한계시록 12장을 장식합니다. 주님께서 그림 작품을 만드신 거예요. “너희들이 아는 세상? 너희들이 알고 있는 너희들 중심의 법? 아니야. 말씀에 입각하면 조각나야 될 그런 세상에 불과한 거야.” 하지만 그 세상을 표현할 때 먼저 이스라엘에 일어난 사건들, 조각들을 다 뜯어서 그걸 다시 꿰어 맞추어서 세상은 이렇다고 내놓으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이렇구나 하고 알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세상에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의 결정은 이스라엘의 몫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아무 소용없었어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와서 이스라엘을 쪼개는 그 쪼개는 힘에 의해서 살 자는 살고, 남을 자는 남기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가고 그런 겁니다. 형편이 그런 형편이에요.

어쨌거나 “하늘에 큰 이적을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다는 말이냐?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쉬는 시간에 대충 적어봤어요. 삼분의 일(스가랴에 나오는), 음녀, 어린양, 여자, 아들, 칠천 명, 1260일(다니엘에 나오는), 독수리 날개, 이게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나올 때에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어보는 거예요. 조각이 찢어져 나왔던 자리로 집어넣으면 무엇이 구성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돼야 될 이스라엘 모습이 나와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육이라 하는데, 육적인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이것이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반발하다 찢어져서 문제지 원래 이런 용어들이 구축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언약대로 주께서 원하는 참된 이스라엘, 참된 신부, 참된 교회가 여기서 구성이 되는 겁니다. 이걸 놓치면 안 돼요.

뭘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 그냥 그대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이스라엘 실패담이 있어요. 이 여자도 이스라엘 실패, 에스겔 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창녀가 됩니다. 창녀가 되어서 큰 남자들 찾아다니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이런 대목이 전부 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포함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실패한 이스라엘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실패한 이스라엘을 집어넣었는데 이것이 진짜 교회와 이스라엘로 구원에 성공된다면 구원은 실패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져서 진짜 이스라엘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간단하게 정리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어들은 전부 다 인간으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은 인간이 너무 연약해서 마귀한테 져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것을 모조리 가져오라고 해서 거기에다 피로 그 깨진 것을 엮어버리니까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했던 신부요, 진짜 처음에 언약부터 예상했던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이스라엘이 되더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이여, 성도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피로 모세의 노래를 찬양하거든요. 피로 구원받는다는 그 요소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신약에 있어서 성도는 구원받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고 지금도 활동하고 움직이는 오른손의 활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교회,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그 숫자가 144,000이라고 했습니다. 144,000은 12*12*1000인데 12라는 숫자도 구약에 나오고, 1000이라는 숫자도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천 때까지.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모든 숫자는 이미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언약 쪼가리입니다. 언약을 주었더니만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결국 실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확인이 된 상태에서 언약이 깨어지면 안 되니까 분명히 내 백성은 언약대로 이뤄진다 했으니까 하나님이 자기 약속의 성실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분명히 실패한 이들을 위해서 다시 규합되어야 되는데 규합될 때 끊어진 이스라엘 조각들을 꿰어 맞춤으로 말미암아 절대로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공로로 행함으로 구원된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실패한 이스라엘 자리가 우리 자리로서 수용되면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보는 것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왜? 우리 대신 먼저 실패한 이야기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용어들, 아마겟돈 나오는데 아마겟돈, 유브라데, 전부 실패한 자리에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를 실패한 장소가 유브라데에요. 창세기 2장, 3장에서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요. 아마겟돈도 마찬가지고. 므깃도 전쟁인데 사사기에서 그것도 실패한 자리에요. 어떤 것도 온전한 이스라엘로 된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남의 일로 보지 말자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는 우리가 실패한 이스라엘의 자리를 되풀이하는 거예요. 열심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성실히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실패한 거예요.

그럴 때마다 독수리 둘 날개,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독수리 두 날개 이야기를 왜 거론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자기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반박으로 독수리 두 날개를 언급을 했단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언급을 해야 될 이유를 도무지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왜? 스스로 이스라엘 되려는 노력 때문에. 요새 말로 스스로 신자 되려고, 스스로 성도되려고, 스스로 이상적인 교회되려는 그 노력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배후에 마귀 있다는 걸 모르고. 짐승, 마귀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기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가 죄 안에 갇혀있다고 했을 때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 자손인데 언제 죄의 종이 되었느냐고 오히려 반대하고 나섰어요. 주님께서는 죄에서 건져야 된다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죄인이라고 지목한 하나의 시험케이스가 있었어요. 그게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있었잖아요. 그 여인을 예수님께서 아무 대가없이 자유를 베풀었어요.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 여인 하나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고 언약이라는 것은 너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서 몸소 내가 왔는데 내가 온 영생을 모르고 너희들 힘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하니 너희들은 내 하는 일을 훼방하는 짐승의 기능만 할 뿐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여기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적이란 원상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살면서 자꾸 애굽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애굽에서 잘 먹고 맛있게 먹었던 걸 왜 안 주느냐? 그 말은, “하나님이여, 애굽에서 있었던 것 잃어버렸으니까 제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입니다.

인간의 미래란 과거 없이는 있을 수 없어요. 인간은 꿈을 꾸잖아요. 꿈이라는 것은 꿈을 꾸고 있으면서 그게 꿈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어요. 꿈이 아닌 경우가 어떤 경우라고 정립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럼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게 나쁘다는 거예요. 왜? 시편에 보면 어차피 모든 게 꿈이니까. 그러면 꿈이 아닌 건 뭡니까? 인간은 꿈꾸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꿈이 아닌 현실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 꿈이 아니에요. 인간은 안개니까. 이야기해놓고 보니까 슬프다. 정말. 우리는 도화지라니까요. 하늘의 이적이라 하면, 이적이 뭔가 분석하지 마세요. 이적이 우리를 칼로 나무에 조각하는 것처럼 우리를 파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불만이 뭐냐 하면, 기도 열심히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기도 안 한 부분이 얼마나 큰 이적인지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숨을 쉰다. 이게 얼마나 큰 이적입니까. 그런데 어느 인간이, “주여, 숨쉬게 하옵소서.” 이것은 산소호흡기 끼고 있는 사람이나 기도하지 다른 사람은 이런 기도하지 않잖아요. 기도를 하겠다는 말은 지금 뭔가 감사할 많은 것을 놓치는 거예요. 기도할 때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감사거리를 날마다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그 기도도 응답 안 돼요. 회복해서 뭐 할 건데. 회복해봐야 그것도 꿈이에요.

프로이드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들이 눈 뜨고 있을 때가 현실이 아니고 꿈꿀 때 그게 현실이에요. 왜? 인간은 무의식이 의식을 90% 이상 지배한다. 이것은 오늘날 정신과학자들이 말하는데 90%가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고, 무의식으로 대충 조립한 것이 10%밖에 안 된답니다. 그러니까 치매 걸린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결국은 장기 기억밖에. 김을수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했는데 독일에서 30년 살았던 간호사나 광부가 나중에 치매 걸리면 30년 동안 사용한 독일 말은 다 잊어버리고 한국말 한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래적인 개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브라데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적이란 이름으로 주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일단 소유하게 되면 기적으로 안 보는 거예요. 왜? 내가 판단하기 때문에. 주님이 판단하면 기적인데 내가 판단하기 때문에 마땅할 걸로 보지 고맙다는 말이 안 나온다 말이에요. 선악과 따먹었지 말라고 하면, 아담이 이렇게 해야 돼요. “죽는다는 것을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렇게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고맙기는 개코가 고마워. 빨리 따먹어. 저걸 따먹기 전에는 고맙다는 말 못 하겠다. 그래서 따먹은 모양이라. 그리고 왠지 모르게 변화가 생겨서 이유도 모르게 수치스럽고 뭘 가리게 되고. 이건 창조에 없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여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3절에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그러면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적 보따리에 속에는, 쉬운 말로 기적, 하나님의 기적 보따리 속에는 우리가 필요한 것만 기적이라고 여기는데 그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고 죽게 만드는 그 악마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그것도 기적에 속한다는 것을 옆에 있는 너는 몰랐지롱.

우리가 이걸 알면 예수를 믿지. 이걸 알 리가 있습니까. 자기 좋은 것만, 자기 즐거운 것만, 자기 필요한 것만 기적 받았다고 하지 나로 죽게 한 것이 악마다. 이것 안 것도 기적이다. 이것은 성령 받아야 이런 고백이 나오지 그런 고백 안 나옵니다. 인간은 자기가 주인공 돼야 갑이 돼야 만족하기 때문에 기적이라는 말을 해도 오해한단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오른손에 있기 때문에 오른손의 위치를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인간이 주체가 아니고 내가 주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기적이란 용어, 여자라는 용어, 해란 용어 속에 반드시 포함돼있습니까? 이것은 해를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게 아니고 이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누가 지옥 가지? 누가 천국 가지? 이런 게 담겨있는 여자고, 해고, 기적이고 그런 겁니다. 이걸 교재에는 [시원적 의미]라 했습니다. 쉽게 쓰면 분량이 많아지고 해서 단축된 용어를 사용했어요.

시원적 의미, 한자로 ‘始’라 하는 것은 시생대처럼 제일 근본적인 것, 오래된 것, 네 시조가 누구냐? 하는 것처럼 출발점이 뭐냐? 시원적 의미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담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의미가 아담을 타고 미끄럼틀로 사용해서 숨어있던 기적이 쏟아져 나오니까 아담은 몰랐지요. 악마가 함께 있어야 주의 오른손이란 시원적 의미가 나온다는 걸 인간은 몰랐지요. 아담은 몰랐어요. 아담은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한 유혹에 빠졌을 뿐이지 악마까지 계산 못하거든요. 따먹고 나중에 보니까 악마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아담도 성령 받았으니까. 시원적 의미를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기능이 있어요. 여자에요. 그 여자가 해를 입은 여자라.

해가 들어가는데 교재에 [‘해를 입었다’는 것은 모든 창조물에 대한 창조의 능력이 본래의 근원적 의미가 그리스도를 낳는 여인의 모습에 집결하고 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여자에게 해를 입었다는 것은 여자 단독이 아니고 태양과 결합이 돼있는 거예요. 이 말은 여자한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고 태양에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모든 힘, 에너지, 창조물이 태양을 중심으로 창조의 동력을 얻는 겁니다. 여자에게 해를 입었다는 말은, 이 여자가 단순한 하와가 아니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악마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자의 자리가 먼저 있었고, 해를 입은 여자라 했고, 그 여자의 자리에 피조물인 하와가 나중에 결합이 되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됐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태양은 무슨 뜻이냐? 창조의 중심으로 봅니다. 왜? 세상은 태양에 의해서 모든 역사와 시간이 결정되고 모든 에너지는 태양에서 나오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에는 해가 없어지고. 해의 기능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때까지만 세상을 위에서 지배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물로 그냥 그 위치에 있는 겁니다. 그 위치, 창조 원동력에 여자가 결합됐다는 말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자리가 결합된 거예요.

여자와 여자의 자리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냥 하와라면 하와의 남편이 아담뿐이죠. 살림만 잘하면 돼요. 보통 여자라면. 그런데 여자의 자리가 되면 이 여자가 무엇을 밝혀내야 하느냐 하면, 용과 싸워야 될 메시아를 잉태하는 자리에요. 그러면 여기서 갑자기 하와가 졸지에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로 바뀌지요. 마리아라고 개인적으로 지목하면 안 되고 마리아, 하와, 다말, 보아스와 결혼한 룻, 밧세바 모든 여인들을 집결한 여자의 자리로 보는 게 옳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왜냐하면 언약을 공격하는 악마가 얼굴을 내비치는 자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여자는 처음에는 마이너스 남자에요. 남자가 있을 때 여자는 마아너스 남자로 태어납니다. 그럴 때 여자는 남자의 반쪽이 되는 거예요. 이게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인간의 반쪽이 돼요.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처음에는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돼요. 아담이란 기능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아담 기능을 보조하기 위해서 여자가 있어야 되지만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여인이란 남자로부터 독자적으로 벗어나서 여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진짜 남편, 오른손의 기능을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여자의 자리의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아내 된 자들이 남편에게 복종할 때는 그냥 복종하면 안 되고요. 여자가 남자한테 복종하는 것이라면 [사랑과 전쟁2]가 있을 필요가 없어요. 아내는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남자가 여자를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여자의 눈에 남편이 예수로 보일 때만 복종하라 이 말입니다. 끝났어, 끝났어. 남편들 끝났어. 그래서 결혼하지 않더라도 여자의 자리로 살 수 있다. 왜? 남편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괜히 남편이라고 남자의 자리 잡으면 그건 마귀의 자리입니다. 어디 주를 바라보는 여자를 구박하면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옛 뱀, 용의 기능을 보여주는 거예요.

한나가 기도하니까 누가 구박하지요? 엘리 제사장이 구박하지요. 보통 기도할 때 남편과 같이 하는데 여자 혼자 울면서 기도하니까 걱정되는 거예요. 하지만 한나는 하나님의 식구의 모습으로 하는 거예요. 아들 사무엘 놓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여자의 자리에 함부로 남자가 허락도 없이 들어선 게 됩니다. 이건 추방돼야 됩니다. 따라서 남편이 주님으로 보일 경우에만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할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한테 복종한 게 아니고 나는 남편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복종한다고 하면서 남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남편이 주님도 아닌데 위장하지 마세요. 아무도 웃지도 않네.

요한계시록에서는 여자가 있는데 그게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세요.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천지창조를 굳히는 모든 것들이 여자와 결함됨으로써 그 여인은 그냥 여인이 아니고 뭔가 여자의 자리로서 오른손의 주님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악마와 맞상대해야 될 위치로서 여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았느냐? 몰랐지요. 몰랐으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난도질당해야 된다고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했잖아요. 말씀 주면 무조건 오해해요. 다 자기 좋은 대로 무조건 오해한다고.

아까 여자, 남자 이야기 부가해보면, 여자가 자기 남편이 주로 보이지 않는데도 복종한다면 여자의 자리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해야 됩니다. 남편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하면 안 돼요. 그래서 항상 단서가 붙지요. “남편 된 자들이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2장에 의하면 둘 다 사적인 가정의 행복이 문제가 아니고 여자의 자리에 남자, 너도 포함해서 여자가 되어라. 오직 남자는 신랑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아들 나오잖아요.

아들은 여자가 낳는 게 아니에요. 아들은 여자의 자리가 낳아요. 여자의 자리에서 아들이 생기거든요. 그렇다면 이 아들은 여자가 낳은 아들을 부정하면서 아들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람과 사래가 결혼해서 누굴 낳지요? 아무도 못 낳지요. 아브람과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지요. 하갈이란 여인은 없는 자리에요. 왜냐하면 하갈은 사래의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에 하갈의 이름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하갈이 아기를 낳는다는 말은 사래의 육적인 요소가 아기를 낳았다고 보는 거예요. 거기서 낳은 이스마엘은 아브람과 사래의 육적인 자식이 되는 겁니다.

낳고 난 뒤에 누구한테 핍박받지요? 나중에 약속에 의해서 이삭이 나오잖아요. 이삭한테 이스마엘이 구박받지요. 왜냐하면 아들이 등장해야만 그 아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아들이 아님을 보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등장해야 인간 역사에 숨어있는 옛 뱀, 악마의 표적으로 아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스마엘은 악마의 표적이 아닙니다. 한편이 무슨 표적이 됩니까. “숨어있지 말고 기어 나와.” 자꾸 마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마귀는 육을 앞세우고 자기는 숨어있는 거예요. 육을 부정함으로써 “빨리 나와. 뒤에 숨어있는 것 다 알아. 나와.” 할 때는 반드시 악마가 공격할 수밖에 없는 천상의 요소를 앞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햇빛처럼, 소나기처럼 주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 내막을 요한계시록에 구약의 역사를 짜깁기해서 갖다 붙이는 거예요. 이제 첫째 시간, 둘째 시간의 이야기가 이해되지요.

요한계시록 자체가 예수님이야기에요. 다른 이야기 아니고. 어떻게 살라든지, 어떻게 살면 성공하는 게 아니고 성도고 뭐고 다 치우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느냐? 너는 제발 빠지고. 예수님께서 악마에 대해서 어떻게 일을 처리하느냐? 그걸 보여주는 책 요한계시록이에요. 교회 144,000 되려고 애쓰고 하는 것 필요 없어요.

아들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엄청나게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면서 몇 가지 신기한 게 또는 의심되는 게 이런 거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건져내려고 애를 쓴 것 같은데 40년 동안 뺑뺑이 돌리면서 광야에서 다 죽이죠.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그 누구도 약속의 땅에 못 가게 만들지요. 그걸 보면서 뭘 느꼈습니까? 그렇게 죽일 걸 건지기는 왜 건졌어요?

복음을 모르는 일반 목사들이 거짓말로 사기로 해석하는 거예요. “여러분, 구원에는 서정이 있습니다. 일단 홍해를 건너온 것은 믿음의 단계입니다. 광야는 성화단계고 마지막 요단강 못 가면 영화로운 영광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로역정 비슷하게 단계별로 하는데 그렇게 하면 지도 못 들어가네. 모세도 못 들어가고.

구약에 있어서 이처럼 광야에서 죽이는 것은 이미 아들이 따로 마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들과 대비해서 안 맞는 것은 다 삭제시키는 겁니다. 아들 아니야. 천국 백성 아니야. 삭제시키기 위해서는 아들이 아들 됨으로 나타나야 되거든요. 그럴 때 광야에서 누가 그 모습을 보여주느냐 하면, 사실은 모세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세+거룩한 복장을 한 제사장. 모세도 물론 제사장에 포함됩니다만 모세를 비롯해서 거룩한 복장을 한 제사장들은 거룩한 집단이거든요.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천국 못 가요. 그래서 거룩한 사람들이 뭘 하느냐?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이 하는 제사가 효과 있음을 믿는 사람은 남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잘리는 겁니다. 그럼 효과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것은 십일조 드려야 돼요. 십일조가 어디에 모아지는가? 제사 제도에 쓰는 사람들 인건비와 재료비로 충당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지금은 더 이상 죄를 씻을 제사가 없다 했지요. 제사가 없으니까 십일조도 없어져야 돼요. 십일조를 하겠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제사 살리자는 이야기거든요. 제사 살려서 뭐 할 건데? 제대로 하면 모든 십일조는 누가 가져야 돼요? 목사가 다 가져야 돼요. CJ그룹 회장 십일조 가지는 목사 같으면 대단하다고 봐요. 비자금까지 챙기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룩한 것을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아들이 있었고 아들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와 거룩한 제사장 제도를 만든 겁니다. 이것을 모세언약이라 하는 거예요. 이 앞선 언약을 제일 뒤에 나오는 완성된 언약, 새 언약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자로서 미리 준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배하면 잘린다. 언약을 만약에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는 말은, 아들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아들이 있는 그곳이 천국이고 만약에 아들과 부합되지 아니하면 결국은 천국에 합류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육으로 난 아들이 어떻게 영이 될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레위지파를 통해서 유다지파로 곁가지가 나오게 만들어서 육이라는 것은, “나는 영이 좋아. 예수님이 좋아.” 이런다고 해서 육이 아닌 게 아니고 너희가 하는 일로 하여 핍박받고 고난 받고 설움 받는 어떤 돌출된 사건으로 보이게 함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만들죠. 나는 믿음 좋다, 나는 신앙 좋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어떤 일이 벌어지니까 믿음 좋은 게 우선이 아니고 돈이 우선 되고, 명예가 우선 되고, 자존심 우선 되는 경우가 계속 주어지게 되지요.

제가 이번 주일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평생 간통 한 번 안 했다고 자랑질하던 노인이 80 넘어서 다방 마담과 쌍화차 마시면서 연애한다면 실컷 자기는 성화했다고 했는데 미끄러졌지요. 저는 이걸 참기름 발랐다고 했지요. 어떤 인간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십니까? 모르잖아요. 모르는 이상은 나의 행함의 거룩함, 완벽을 이야기하면 안 돼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예수님과의 격차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우리는 육이고, 주님은 육을 구원하기 위해서 피 흘리신 분이고.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육신임을 고백하면 그걸로 된 거예요. 더 이상 뭘 더 원합니까. 자기가 육신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나 이루어질 성령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삭제시킨다. 계속해서 육을 잘라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오게 되면 시간이 역사가 되는 게 아니고 하나의 모형물이 돼요. 여러분 건축설계사무소에 가면 모형이 있잖아요. 완공된 모형이지 공사도중을 모형으로 만든 건 없지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완공된 모형으로 잡아버리죠. 그러니까 완공된 모형이 있다는 말은, 건축설계사무소에 아파트모형을 만들어놨습니다. 실제로 아파트는 완공됐습니다. 그러면 모형을 부셔버립니까? 아닙니다. 손님 왔을 때 이번에 우리 설계사무소에서 저 아파트를 설계했습니다. 이게 그 모형입니다. 계속 우려먹고 계속 자랑해야 계속해서 업무가 확보되잖아요. 그처럼 주님께서 확보된 모형을 역사 끝 날까지 반복시킵니다. 그래서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역사를 섞어버리죠.

여기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하늘의 별 1/3이지요. 그러면 하늘의 별을 딸 때 그 별이 용이 하는 일에 저항할 수 있습니까? 저항 못 하지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라는 것은 그 창조물은 다른 창조 이상의 어떤 배후의 영물이 왔을 때 당하기만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누구 전쟁입니까? 피조물이 나설 일은 아니란 말이죠. 여자에게 해를 입히신 하나님과 그리고 해와 달을 부수려고 덤벼드는 창조의 영광성을 훼손하려는 용과의 싸움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피조세계, 물질세계, 자연세계는 그냥 얻어터지기만 하는 그런 세계지요. 그러니까 보통 사람 보기에는 이 자연세계는 그냥 고요하지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들어가 보면 고요한 것이 아니고 우당탕탕 요란하지요. 오늘은 마귀가 접수했다가 내일은 주님이 접수했다가. 하지만 우리의 신분이 변하지 않는 것은 뭐냐? 우리는 여자의 자리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자가 마리아가 돼버리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 또 낳지는 않았잖아요. 예수님을 한 번 낳고 말았잖아요. 그러니까 여자의 자리라는 것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아들임을 보여주고 아들만이 메시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속한 사람이 여자의 자리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에게만 용이라는 게 감이 잡힌다니까요. 우리가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면 용이고 짐승이고 악마고 관심도 없어요. 용 안다고 돈 더 버는 것도 아니고 용 안 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의미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여자의 자리에 서게 되면 비로소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말라고 온갖 발악으로 설치고 있는 그 용의 모든 활동의 자연의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회사에서 회식하는데 상사가, “너 교회 다니는 줄 아는데 단합대회니까 분위기를 위해서 술 한 잔만 하자.” 이렇게 나올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됩니까? “이 붉은 용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물러가라.” 이래야 됩니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없는 분으로 계셨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땅에서 성도가 아닌 모습으로 성도로 살아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전제가 뭡니까? 성도가 아니지요. 성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까? 결정 못하지요. 결정은 주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러면 어떤 회사 상사가 술 한 잔 먹으라고 할 때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을 누가 보냈어요? 예수님이 보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이래야 돼요. “부장님, 부장님이 그런 이야기한 것도 우리 예수님께서 하라 하셨지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라 하셨다는 걸 믿으시면 먹고 이것은 예수님 없이 한 것이라면 안 먹겠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집에 가면서 우리 마음은, “그때 술 한 잔 먹을 건데. 예수 믿는다고 안 먹었는데. 옛날 생각나네. 몰래 먹어볼까.”

그런 것을 거절했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다만 주께서 또 이런 일을 일으켰구나.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사이다인 줄 알고 먹었는데 술이라. 뱉어냅니까? 그냥 잡수세요. 선한 체하지 말고.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걸 통해서 세상은 내 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혹독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여자의 자리를 하라는 기적인 줄 알고 뭐든지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 소리하지 말고. 지가 사탄이면서.

여기 4절에 봅시다. 용이 별을 1/3을 땅에 던지는 것은 여자를 겁주기 위함이거든요. 우리한테 그만한 능력이 있다 이거거든요. 맞아요. 공중권세 잡은 자라 능력 있어요. 목적은 그게 아니에요. 목적은,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60일은 다니엘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겁니다. 다니엘에 나오니까 또 역사를 잘라야 돼요. 1260이라는 숫자가 나와요. 성경에서 숫자가 나왔다는 것은 확정됐다. 모든 사실은 확정된 코스대로 갈 뿐이란 뜻이에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완전무결하기 때문에 추가하거나 보탤 필요 없어요. 확정된 거예요.

그래서 1260이라는 것은 결국은 악마의 본래 옛 뱀, 용은 용의 자리를 끝까지 보여줘야 하나님의 오른손의 위상이 살아요. 악마에게 악마 짓하지 말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지가 해야 될 일이거든요. 악마는 악마 짓하도록 하고 우리는 여자의 노릇을 해서 날마다 예수님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고 예수님을 증거하면 돼요. 증거한다고 예수 믿는다고 지하철에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가만있어도 사태가 주어진다니까.

처음에는 내 힘으로 믿음 생활하는데 어설프기 짝이 없지요. 육적인 것이 해봐야 흉내 낼뿐이지 마귀가 무섭다고 합니까. 전혀 안 무서워합니다. 왜? 우리는 빠져야 될 인간이 자꾸 주인공으로 기어들어가니까 마귀가 보기에 같잖은 거예요. 우리는 이런 일까지 주께서 구성했는데 여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만 바라보라고 일부러 만들어낸 구성된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1260이에요. 확정적이에요. 왜냐하면 다니엘 마지막은 모든 것이 끝나는 종말이란 말은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다니엘의 주제거든요. 하나님의 인자가 올 때는 끝장났다. 더 이상 있고 싶어도 있지 못한다는 그런 뜻이에요. 물론 1260이라는 것은 그 안에 내용이 있어요. 마흔두 달. 분석하면 한 때, 두 때, 반 때가 되는데 그 의미가 뭐냐 하면, 한 때와 한 때 사이에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 스며들어요. 그러니까 1260이라는 것은 앞으로 며칠 남았느냐가 아니라 지금 2013년도가 포함돼있어요.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삶 속에 파고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자랑, 돈만 자랑하잖아요. 그 사이사이에 그리스도의 피가 삽입돼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모르지요. 그냥 살면 모르는데 어떤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살짝 정신을 차리고, “맞아. 내가 예수님 증거하는 재미로 살지. 내가 왜 이러지?” 하고 불연 듯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 자체가 1260일 안에 포함돼있다고. 종말로 확정된 날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9절을 봅시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더라”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옛 뱀에 쫓기니까 그때부터 나타나는 현상이 어린 양의 피와 그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세상이 힘으로 버티는 세상이잖아요. 여기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왔으니까 힘으로 버티니까 의로 구박해버려요. 결국 힘이 빠지면 죽잖아요. 죽음이 생길 때 그것이 바로 의인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으면 안 된다고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무엇을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은 힘으로만 이야기하고 돈으로만 이야기하는 세상인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어느 집안이나 어느 회사나 돈 때문에 고민 안 하는데 아무데도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우환이 있고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우환이 있고 있으면 있는 대로 욕심내서 자식들 간에 싸우고. 이 세상은 전부 다 힘의 다툼 속에서 우리도 그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만 이게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받는다. 이걸 알 때 그 사람은 이미 힘의 세계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순교한다고 해서 피 흘리고 죽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는 힘의 세계에서는 있으나마다한 입장에서 이 땅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도 몇 초 되지 않아요. 대부분 나도 돈 좋다하지만 불연 듯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면 나는 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라고 잠시나마 이 땅에 살짝 꿈같은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회수당하기 위해 사는 그러한 요한계시록 속에 놓여 있는 어린양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에게 주어졌다는 걸 잊지 마세요. 사도요한이 이것 보고 몇 년 더 살았습니까? 이것 하고 나중에 풀려났습니까? 출세했습니까?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 있다는 말은 힘에 갇혀있어요. 힘에 갇혀있어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어요. 예수 믿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고 오히려 감사와 감격과 눈물과 그리고 천사한테 고맙다고 절만 했을 뿐이에요.

그것은 뭐냐? 그 자리가 사도요한 개인이 관리한 자리가 아니고 바로 아들이 관리하는 그 자리에 예수 안에 사도요한이 이미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지금도 되풀이 됩니다. 누가 뭐래도 요한계시록 자체는 기적으로써 매일같이 성도의 삶 자리를 우리의 힘으로 버티는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 증거하라고 남겨준 그 사도요한의 자리, 성령이 있는 자리,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자리로서 날마다 우리를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중앙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간 어린양이 계시니 내막을 알지 못해서 울었던 사도요한의 심정,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몰랐지만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짐승의 나라며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인 것을 새삼스럽게 알고 이 은혜 이 놀라운 기적을 영원토록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시록6강  (0) 2015.10.09
계시록5강  (0) 2015.10.09
요한계시록4강  (0) 2013.12.19
요한계시록3강  (0) 2013.12.18
요한계시록2강  (0) 201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