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06 봄특강c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12장을 봅시다. 교재 6페이지 펴시고요. 3번에 태양을 입고 있는 여인이 나오지요. 이게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 나옵니다. 이걸 우리에게 지키라는 말입니까? 해를 뒤집어쓴 여자 나왔다. 우리도 뒤집어쓰라는 말이에요? 뭔 뜻이냐 하면, 우리 노력으로 해를 입은 여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붉은 용이 나온다고 해서 붉은 용을 우리가 파악해서 대결해서 쳐부숴서 우리를 구원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이 원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말씀이 와서 언약이 와서 쪼개보니까 조각조각 나버렸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파쇄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서 전부다 이스라엘은 우상자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오해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주님 사랑하지 않고 형제 사랑하지 않는 율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란 것은 말씀에서 완전히 다 들통 났어요.
들통 난 찢어진 조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읍니다. 모아진 이걸로 마지막 세상을 요한계시록 12장을 장식합니다. 주님께서 그림 작품을 만드신 거예요. “너희들이 아는 세상? 너희들이 알고 있는 너희들 중심의 법? 아니야. 말씀에 입각하면 조각나야 될 그런 세상에 불과한 거야.” 하지만 그 세상을 표현할 때 먼저 이스라엘에 일어난 사건들, 조각들을 다 뜯어서 그걸 다시 꿰어 맞추어서 세상은 이렇다고 내놓으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이렇구나 하고 알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세상에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의 결정은 이스라엘의 몫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아무 소용없었어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와서 이스라엘을 쪼개는 그 쪼개는 힘에 의해서 살 자는 살고, 남을 자는 남기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가고 그런 겁니다. 형편이 그런 형편이에요.
어쨌거나 “하늘에 큰 이적을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다는 말이냐?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쉬는 시간에 대충 적어봤어요. 삼분의 일(스가랴에 나오는), 음녀, 어린양, 여자, 아들, 칠천 명, 1260일(다니엘에 나오는), 독수리 날개, 이게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나올 때에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어보는 거예요. 조각이 찢어져 나왔던 자리로 집어넣으면 무엇이 구성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돼야 될 이스라엘 모습이 나와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육이라 하는데, 육적인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이것이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반발하다 찢어져서 문제지 원래 이런 용어들이 구축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언약대로 주께서 원하는 참된 이스라엘, 참된 신부, 참된 교회가 여기서 구성이 되는 겁니다. 이걸 놓치면 안 돼요.
뭘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 그냥 그대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이스라엘 실패담이 있어요. 이 여자도 이스라엘 실패, 에스겔 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창녀가 됩니다. 창녀가 되어서 큰 남자들 찾아다니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이런 대목이 전부 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포함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실패한 이스라엘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실패한 이스라엘을 집어넣었는데 이것이 진짜 교회와 이스라엘로 구원에 성공된다면 구원은 실패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져서 진짜 이스라엘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간단하게 정리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어들은 전부 다 인간으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은 인간이 너무 연약해서 마귀한테 져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것을 모조리 가져오라고 해서 거기에다 피로 그 깨진 것을 엮어버리니까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했던 신부요, 진짜 처음에 언약부터 예상했던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이스라엘이 되더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이여, 성도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피로 모세의 노래를 찬양하거든요. 피로 구원받는다는 그 요소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신약에 있어서 성도는 구원받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고 지금도 활동하고 움직이는 오른손의 활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교회,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그 숫자가 144,000이라고 했습니다. 144,000은 12*12*1000인데 12라는 숫자도 구약에 나오고, 1000이라는 숫자도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천 때까지.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모든 숫자는 이미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언약 쪼가리입니다. 언약을 주었더니만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결국 실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확인이 된 상태에서 언약이 깨어지면 안 되니까 분명히 내 백성은 언약대로 이뤄진다 했으니까 하나님이 자기 약속의 성실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분명히 실패한 이들을 위해서 다시 규합되어야 되는데 규합될 때 끊어진 이스라엘 조각들을 꿰어 맞춤으로 말미암아 절대로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공로로 행함으로 구원된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실패한 이스라엘 자리가 우리 자리로서 수용되면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보는 것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왜? 우리 대신 먼저 실패한 이야기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용어들, 아마겟돈 나오는데 아마겟돈, 유브라데, 전부 실패한 자리에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를 실패한 장소가 유브라데에요. 창세기 2장, 3장에서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요. 아마겟돈도 마찬가지고. 므깃도 전쟁인데 사사기에서 그것도 실패한 자리에요. 어떤 것도 온전한 이스라엘로 된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남의 일로 보지 말자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는 우리가 실패한 이스라엘의 자리를 되풀이하는 거예요. 열심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성실히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실패한 거예요.
그럴 때마다 독수리 둘 날개,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독수리 두 날개 이야기를 왜 거론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자기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반박으로 독수리 두 날개를 언급을 했단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언급을 해야 될 이유를 도무지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왜? 스스로 이스라엘 되려는 노력 때문에. 요새 말로 스스로 신자 되려고, 스스로 성도되려고, 스스로 이상적인 교회되려는 그 노력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배후에 마귀 있다는 걸 모르고. 짐승, 마귀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기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가 죄 안에 갇혀있다고 했을 때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 자손인데 언제 죄의 종이 되었느냐고 오히려 반대하고 나섰어요. 주님께서는 죄에서 건져야 된다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죄인이라고 지목한 하나의 시험케이스가 있었어요. 그게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있었잖아요. 그 여인을 예수님께서 아무 대가없이 자유를 베풀었어요.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 여인 하나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고 언약이라는 것은 너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서 몸소 내가 왔는데 내가 온 영생을 모르고 너희들 힘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하니 너희들은 내 하는 일을 훼방하는 짐승의 기능만 할 뿐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여기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적이란 원상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살면서 자꾸 애굽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애굽에서 잘 먹고 맛있게 먹었던 걸 왜 안 주느냐? 그 말은, “하나님이여, 애굽에서 있었던 것 잃어버렸으니까 제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입니다.
인간의 미래란 과거 없이는 있을 수 없어요. 인간은 꿈을 꾸잖아요. 꿈이라는 것은 꿈을 꾸고 있으면서 그게 꿈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어요. 꿈이 아닌 경우가 어떤 경우라고 정립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럼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게 나쁘다는 거예요. 왜? 시편에 보면 어차피 모든 게 꿈이니까. 그러면 꿈이 아닌 건 뭡니까? 인간은 꿈꾸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꿈이 아닌 현실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 꿈이 아니에요. 인간은 안개니까. 이야기해놓고 보니까 슬프다. 정말. 우리는 도화지라니까요. 하늘의 이적이라 하면, 이적이 뭔가 분석하지 마세요. 이적이 우리를 칼로 나무에 조각하는 것처럼 우리를 파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불만이 뭐냐 하면, 기도 열심히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기도 안 한 부분이 얼마나 큰 이적인지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숨을 쉰다. 이게 얼마나 큰 이적입니까. 그런데 어느 인간이, “주여, 숨쉬게 하옵소서.” 이것은 산소호흡기 끼고 있는 사람이나 기도하지 다른 사람은 이런 기도하지 않잖아요. 기도를 하겠다는 말은 지금 뭔가 감사할 많은 것을 놓치는 거예요. 기도할 때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감사거리를 날마다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그 기도도 응답 안 돼요. 회복해서 뭐 할 건데. 회복해봐야 그것도 꿈이에요.
프로이드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들이 눈 뜨고 있을 때가 현실이 아니고 꿈꿀 때 그게 현실이에요. 왜? 인간은 무의식이 의식을 90% 이상 지배한다. 이것은 오늘날 정신과학자들이 말하는데 90%가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고, 무의식으로 대충 조립한 것이 10%밖에 안 된답니다. 그러니까 치매 걸린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결국은 장기 기억밖에. 김을수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했는데 독일에서 30년 살았던 간호사나 광부가 나중에 치매 걸리면 30년 동안 사용한 독일 말은 다 잊어버리고 한국말 한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래적인 개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브라데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적이란 이름으로 주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일단 소유하게 되면 기적으로 안 보는 거예요. 왜? 내가 판단하기 때문에. 주님이 판단하면 기적인데 내가 판단하기 때문에 마땅할 걸로 보지 고맙다는 말이 안 나온다 말이에요. 선악과 따먹었지 말라고 하면, 아담이 이렇게 해야 돼요. “죽는다는 것을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렇게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고맙기는 개코가 고마워. 빨리 따먹어. 저걸 따먹기 전에는 고맙다는 말 못 하겠다. 그래서 따먹은 모양이라. 그리고 왠지 모르게 변화가 생겨서 이유도 모르게 수치스럽고 뭘 가리게 되고. 이건 창조에 없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여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3절에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그러면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적 보따리에 속에는, 쉬운 말로 기적, 하나님의 기적 보따리 속에는 우리가 필요한 것만 기적이라고 여기는데 그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고 죽게 만드는 그 악마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그것도 기적에 속한다는 것을 옆에 있는 너는 몰랐지롱.
우리가 이걸 알면 예수를 믿지. 이걸 알 리가 있습니까. 자기 좋은 것만, 자기 즐거운 것만, 자기 필요한 것만 기적 받았다고 하지 나로 죽게 한 것이 악마다. 이것 안 것도 기적이다. 이것은 성령 받아야 이런 고백이 나오지 그런 고백 안 나옵니다. 인간은 자기가 주인공 돼야 갑이 돼야 만족하기 때문에 기적이라는 말을 해도 오해한단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오른손에 있기 때문에 오른손의 위치를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인간이 주체가 아니고 내가 주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기적이란 용어, 여자라는 용어, 해란 용어 속에 반드시 포함돼있습니까? 이것은 해를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게 아니고 이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누가 지옥 가지? 누가 천국 가지? 이런 게 담겨있는 여자고, 해고, 기적이고 그런 겁니다. 이걸 교재에는 [시원적 의미]라 했습니다. 쉽게 쓰면 분량이 많아지고 해서 단축된 용어를 사용했어요.
시원적 의미, 한자로 ‘始’라 하는 것은 시생대처럼 제일 근본적인 것, 오래된 것, 네 시조가 누구냐? 하는 것처럼 출발점이 뭐냐? 시원적 의미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담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의미가 아담을 타고 미끄럼틀로 사용해서 숨어있던 기적이 쏟아져 나오니까 아담은 몰랐지요. 악마가 함께 있어야 주의 오른손이란 시원적 의미가 나온다는 걸 인간은 몰랐지요. 아담은 몰랐어요. 아담은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한 유혹에 빠졌을 뿐이지 악마까지 계산 못하거든요. 따먹고 나중에 보니까 악마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아담도 성령 받았으니까. 시원적 의미를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기능이 있어요. 여자에요. 그 여자가 해를 입은 여자라.
해가 들어가는데 교재에 [‘해를 입었다’는 것은 모든 창조물에 대한 창조의 능력이 본래의 근원적 의미가 그리스도를 낳는 여인의 모습에 집결하고 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여자에게 해를 입었다는 것은 여자 단독이 아니고 태양과 결합이 돼있는 거예요. 이 말은 여자한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고 태양에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모든 힘, 에너지, 창조물이 태양을 중심으로 창조의 동력을 얻는 겁니다. 여자에게 해를 입었다는 말은, 이 여자가 단순한 하와가 아니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악마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자의 자리가 먼저 있었고, 해를 입은 여자라 했고, 그 여자의 자리에 피조물인 하와가 나중에 결합이 되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됐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태양은 무슨 뜻이냐? 창조의 중심으로 봅니다. 왜? 세상은 태양에 의해서 모든 역사와 시간이 결정되고 모든 에너지는 태양에서 나오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에는 해가 없어지고. 해의 기능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때까지만 세상을 위에서 지배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물로 그냥 그 위치에 있는 겁니다. 그 위치, 창조 원동력에 여자가 결합됐다는 말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자리가 결합된 거예요.
여자와 여자의 자리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냥 하와라면 하와의 남편이 아담뿐이죠. 살림만 잘하면 돼요. 보통 여자라면. 그런데 여자의 자리가 되면 이 여자가 무엇을 밝혀내야 하느냐 하면, 용과 싸워야 될 메시아를 잉태하는 자리에요. 그러면 여기서 갑자기 하와가 졸지에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로 바뀌지요. 마리아라고 개인적으로 지목하면 안 되고 마리아, 하와, 다말, 보아스와 결혼한 룻, 밧세바 모든 여인들을 집결한 여자의 자리로 보는 게 옳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왜냐하면 언약을 공격하는 악마가 얼굴을 내비치는 자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여자는 처음에는 마이너스 남자에요. 남자가 있을 때 여자는 마아너스 남자로 태어납니다. 그럴 때 여자는 남자의 반쪽이 되는 거예요. 이게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인간의 반쪽이 돼요.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처음에는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돼요. 아담이란 기능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아담 기능을 보조하기 위해서 여자가 있어야 되지만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여인이란 남자로부터 독자적으로 벗어나서 여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진짜 남편, 오른손의 기능을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여자의 자리의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아내 된 자들이 남편에게 복종할 때는 그냥 복종하면 안 되고요. 여자가 남자한테 복종하는 것이라면 [사랑과 전쟁2]가 있을 필요가 없어요. 아내는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남자가 여자를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여자의 눈에 남편이 예수로 보일 때만 복종하라 이 말입니다. 끝났어, 끝났어. 남편들 끝났어. 그래서 결혼하지 않더라도 여자의 자리로 살 수 있다. 왜? 남편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괜히 남편이라고 남자의 자리 잡으면 그건 마귀의 자리입니다. 어디 주를 바라보는 여자를 구박하면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옛 뱀, 용의 기능을 보여주는 거예요.
한나가 기도하니까 누가 구박하지요? 엘리 제사장이 구박하지요. 보통 기도할 때 남편과 같이 하는데 여자 혼자 울면서 기도하니까 걱정되는 거예요. 하지만 한나는 하나님의 식구의 모습으로 하는 거예요. 아들 사무엘 놓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여자의 자리에 함부로 남자가 허락도 없이 들어선 게 됩니다. 이건 추방돼야 됩니다. 따라서 남편이 주님으로 보일 경우에만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할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한테 복종한 게 아니고 나는 남편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복종한다고 하면서 남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남편이 주님도 아닌데 위장하지 마세요. 아무도 웃지도 않네.
요한계시록에서는 여자가 있는데 그게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세요.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천지창조를 굳히는 모든 것들이 여자와 결함됨으로써 그 여인은 그냥 여인이 아니고 뭔가 여자의 자리로서 오른손의 주님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악마와 맞상대해야 될 위치로서 여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았느냐? 몰랐지요. 몰랐으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난도질당해야 된다고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했잖아요. 말씀 주면 무조건 오해해요. 다 자기 좋은 대로 무조건 오해한다고.
아까 여자, 남자 이야기 부가해보면, 여자가 자기 남편이 주로 보이지 않는데도 복종한다면 여자의 자리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해야 됩니다. 남편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하면 안 돼요. 그래서 항상 단서가 붙지요. “남편 된 자들이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2장에 의하면 둘 다 사적인 가정의 행복이 문제가 아니고 여자의 자리에 남자, 너도 포함해서 여자가 되어라. 오직 남자는 신랑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아들 나오잖아요.
아들은 여자가 낳는 게 아니에요. 아들은 여자의 자리가 낳아요. 여자의 자리에서 아들이 생기거든요. 그렇다면 이 아들은 여자가 낳은 아들을 부정하면서 아들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람과 사래가 결혼해서 누굴 낳지요? 아무도 못 낳지요. 아브람과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지요. 하갈이란 여인은 없는 자리에요. 왜냐하면 하갈은 사래의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에 하갈의 이름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하갈이 아기를 낳는다는 말은 사래의 육적인 요소가 아기를 낳았다고 보는 거예요. 거기서 낳은 이스마엘은 아브람과 사래의 육적인 자식이 되는 겁니다.
낳고 난 뒤에 누구한테 핍박받지요? 나중에 약속에 의해서 이삭이 나오잖아요. 이삭한테 이스마엘이 구박받지요. 왜냐하면 아들이 등장해야만 그 아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아들이 아님을 보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등장해야 인간 역사에 숨어있는 옛 뱀, 악마의 표적으로 아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스마엘은 악마의 표적이 아닙니다. 한편이 무슨 표적이 됩니까. “숨어있지 말고 기어 나와.” 자꾸 마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마귀는 육을 앞세우고 자기는 숨어있는 거예요. 육을 부정함으로써 “빨리 나와. 뒤에 숨어있는 것 다 알아. 나와.” 할 때는 반드시 악마가 공격할 수밖에 없는 천상의 요소를 앞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햇빛처럼, 소나기처럼 주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 내막을 요한계시록에 구약의 역사를 짜깁기해서 갖다 붙이는 거예요. 이제 첫째 시간, 둘째 시간의 이야기가 이해되지요.
요한계시록 자체가 예수님이야기에요. 다른 이야기 아니고. 어떻게 살라든지, 어떻게 살면 성공하는 게 아니고 성도고 뭐고 다 치우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느냐? 너는 제발 빠지고. 예수님께서 악마에 대해서 어떻게 일을 처리하느냐? 그걸 보여주는 책 요한계시록이에요. 교회 144,000 되려고 애쓰고 하는 것 필요 없어요.
아들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엄청나게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면서 몇 가지 신기한 게 또는 의심되는 게 이런 거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건져내려고 애를 쓴 것 같은데 40년 동안 뺑뺑이 돌리면서 광야에서 다 죽이죠.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그 누구도 약속의 땅에 못 가게 만들지요. 그걸 보면서 뭘 느꼈습니까? 그렇게 죽일 걸 건지기는 왜 건졌어요?
복음을 모르는 일반 목사들이 거짓말로 사기로 해석하는 거예요. “여러분, 구원에는 서정이 있습니다. 일단 홍해를 건너온 것은 믿음의 단계입니다. 광야는 성화단계고 마지막 요단강 못 가면 영화로운 영광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로역정 비슷하게 단계별로 하는데 그렇게 하면 지도 못 들어가네. 모세도 못 들어가고.
구약에 있어서 이처럼 광야에서 죽이는 것은 이미 아들이 따로 마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들과 대비해서 안 맞는 것은 다 삭제시키는 겁니다. 아들 아니야. 천국 백성 아니야. 삭제시키기 위해서는 아들이 아들 됨으로 나타나야 되거든요. 그럴 때 광야에서 누가 그 모습을 보여주느냐 하면, 사실은 모세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세+거룩한 복장을 한 제사장. 모세도 물론 제사장에 포함됩니다만 모세를 비롯해서 거룩한 복장을 한 제사장들은 거룩한 집단이거든요.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천국 못 가요. 그래서 거룩한 사람들이 뭘 하느냐?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이 하는 제사가 효과 있음을 믿는 사람은 남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잘리는 겁니다. 그럼 효과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것은 십일조 드려야 돼요. 십일조가 어디에 모아지는가? 제사 제도에 쓰는 사람들 인건비와 재료비로 충당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지금은 더 이상 죄를 씻을 제사가 없다 했지요. 제사가 없으니까 십일조도 없어져야 돼요. 십일조를 하겠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제사 살리자는 이야기거든요. 제사 살려서 뭐 할 건데? 제대로 하면 모든 십일조는 누가 가져야 돼요? 목사가 다 가져야 돼요. CJ그룹 회장 십일조 가지는 목사 같으면 대단하다고 봐요. 비자금까지 챙기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룩한 것을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아들이 있었고 아들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와 거룩한 제사장 제도를 만든 겁니다. 이것을 모세언약이라 하는 거예요. 이 앞선 언약을 제일 뒤에 나오는 완성된 언약, 새 언약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자로서 미리 준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배하면 잘린다. 언약을 만약에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는 말은, 아들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아들이 있는 그곳이 천국이고 만약에 아들과 부합되지 아니하면 결국은 천국에 합류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육으로 난 아들이 어떻게 영이 될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레위지파를 통해서 유다지파로 곁가지가 나오게 만들어서 육이라는 것은, “나는 영이 좋아. 예수님이 좋아.” 이런다고 해서 육이 아닌 게 아니고 너희가 하는 일로 하여 핍박받고 고난 받고 설움 받는 어떤 돌출된 사건으로 보이게 함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만들죠. 나는 믿음 좋다, 나는 신앙 좋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어떤 일이 벌어지니까 믿음 좋은 게 우선이 아니고 돈이 우선 되고, 명예가 우선 되고, 자존심 우선 되는 경우가 계속 주어지게 되지요.
제가 이번 주일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평생 간통 한 번 안 했다고 자랑질하던 노인이 80 넘어서 다방 마담과 쌍화차 마시면서 연애한다면 실컷 자기는 성화했다고 했는데 미끄러졌지요. 저는 이걸 참기름 발랐다고 했지요. 어떤 인간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십니까? 모르잖아요. 모르는 이상은 나의 행함의 거룩함, 완벽을 이야기하면 안 돼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예수님과의 격차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우리는 육이고, 주님은 육을 구원하기 위해서 피 흘리신 분이고.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육신임을 고백하면 그걸로 된 거예요. 더 이상 뭘 더 원합니까. 자기가 육신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나 이루어질 성령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삭제시킨다. 계속해서 육을 잘라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오게 되면 시간이 역사가 되는 게 아니고 하나의 모형물이 돼요. 여러분 건축설계사무소에 가면 모형이 있잖아요. 완공된 모형이지 공사도중을 모형으로 만든 건 없지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완공된 모형으로 잡아버리죠. 그러니까 완공된 모형이 있다는 말은, 건축설계사무소에 아파트모형을 만들어놨습니다. 실제로 아파트는 완공됐습니다. 그러면 모형을 부셔버립니까? 아닙니다. 손님 왔을 때 이번에 우리 설계사무소에서 저 아파트를 설계했습니다. 이게 그 모형입니다. 계속 우려먹고 계속 자랑해야 계속해서 업무가 확보되잖아요. 그처럼 주님께서 확보된 모형을 역사 끝 날까지 반복시킵니다. 그래서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역사를 섞어버리죠.
여기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하늘의 별 1/3이지요. 그러면 하늘의 별을 딸 때 그 별이 용이 하는 일에 저항할 수 있습니까? 저항 못 하지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라는 것은 그 창조물은 다른 창조 이상의 어떤 배후의 영물이 왔을 때 당하기만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누구 전쟁입니까? 피조물이 나설 일은 아니란 말이죠. 여자에게 해를 입히신 하나님과 그리고 해와 달을 부수려고 덤벼드는 창조의 영광성을 훼손하려는 용과의 싸움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피조세계, 물질세계, 자연세계는 그냥 얻어터지기만 하는 그런 세계지요. 그러니까 보통 사람 보기에는 이 자연세계는 그냥 고요하지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들어가 보면 고요한 것이 아니고 우당탕탕 요란하지요. 오늘은 마귀가 접수했다가 내일은 주님이 접수했다가. 하지만 우리의 신분이 변하지 않는 것은 뭐냐? 우리는 여자의 자리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자가 마리아가 돼버리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 또 낳지는 않았잖아요. 예수님을 한 번 낳고 말았잖아요. 그러니까 여자의 자리라는 것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아들임을 보여주고 아들만이 메시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속한 사람이 여자의 자리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에게만 용이라는 게 감이 잡힌다니까요. 우리가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면 용이고 짐승이고 악마고 관심도 없어요. 용 안다고 돈 더 버는 것도 아니고 용 안 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의미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여자의 자리에 서게 되면 비로소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말라고 온갖 발악으로 설치고 있는 그 용의 모든 활동의 자연의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회사에서 회식하는데 상사가, “너 교회 다니는 줄 아는데 단합대회니까 분위기를 위해서 술 한 잔만 하자.” 이렇게 나올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됩니까? “이 붉은 용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물러가라.” 이래야 됩니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없는 분으로 계셨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땅에서 성도가 아닌 모습으로 성도로 살아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전제가 뭡니까? 성도가 아니지요. 성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까? 결정 못하지요. 결정은 주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러면 어떤 회사 상사가 술 한 잔 먹으라고 할 때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을 누가 보냈어요? 예수님이 보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이래야 돼요. “부장님, 부장님이 그런 이야기한 것도 우리 예수님께서 하라 하셨지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라 하셨다는 걸 믿으시면 먹고 이것은 예수님 없이 한 것이라면 안 먹겠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집에 가면서 우리 마음은, “그때 술 한 잔 먹을 건데. 예수 믿는다고 안 먹었는데. 옛날 생각나네. 몰래 먹어볼까.”
그런 것을 거절했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다만 주께서 또 이런 일을 일으켰구나.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사이다인 줄 알고 먹었는데 술이라. 뱉어냅니까? 그냥 잡수세요. 선한 체하지 말고.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걸 통해서 세상은 내 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혹독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여자의 자리를 하라는 기적인 줄 알고 뭐든지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 소리하지 말고. 지가 사탄이면서.
여기 4절에 봅시다. 용이 별을 1/3을 땅에 던지는 것은 여자를 겁주기 위함이거든요. 우리한테 그만한 능력이 있다 이거거든요. 맞아요. 공중권세 잡은 자라 능력 있어요. 목적은 그게 아니에요. 목적은,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60일은 다니엘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겁니다. 다니엘에 나오니까 또 역사를 잘라야 돼요. 1260이라는 숫자가 나와요. 성경에서 숫자가 나왔다는 것은 확정됐다. 모든 사실은 확정된 코스대로 갈 뿐이란 뜻이에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완전무결하기 때문에 추가하거나 보탤 필요 없어요. 확정된 거예요.
그래서 1260이라는 것은 결국은 악마의 본래 옛 뱀, 용은 용의 자리를 끝까지 보여줘야 하나님의 오른손의 위상이 살아요. 악마에게 악마 짓하지 말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지가 해야 될 일이거든요. 악마는 악마 짓하도록 하고 우리는 여자의 노릇을 해서 날마다 예수님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고 예수님을 증거하면 돼요. 증거한다고 예수 믿는다고 지하철에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가만있어도 사태가 주어진다니까.
처음에는 내 힘으로 믿음 생활하는데 어설프기 짝이 없지요. 육적인 것이 해봐야 흉내 낼뿐이지 마귀가 무섭다고 합니까. 전혀 안 무서워합니다. 왜? 우리는 빠져야 될 인간이 자꾸 주인공으로 기어들어가니까 마귀가 보기에 같잖은 거예요. 우리는 이런 일까지 주께서 구성했는데 여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만 바라보라고 일부러 만들어낸 구성된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1260이에요. 확정적이에요. 왜냐하면 다니엘 마지막은 모든 것이 끝나는 종말이란 말은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다니엘의 주제거든요. 하나님의 인자가 올 때는 끝장났다. 더 이상 있고 싶어도 있지 못한다는 그런 뜻이에요. 물론 1260이라는 것은 그 안에 내용이 있어요. 마흔두 달. 분석하면 한 때, 두 때, 반 때가 되는데 그 의미가 뭐냐 하면, 한 때와 한 때 사이에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 스며들어요. 그러니까 1260이라는 것은 앞으로 며칠 남았느냐가 아니라 지금 2013년도가 포함돼있어요.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삶 속에 파고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자랑, 돈만 자랑하잖아요. 그 사이사이에 그리스도의 피가 삽입돼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모르지요. 그냥 살면 모르는데 어떤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살짝 정신을 차리고, “맞아. 내가 예수님 증거하는 재미로 살지. 내가 왜 이러지?” 하고 불연 듯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 자체가 1260일 안에 포함돼있다고. 종말로 확정된 날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9절을 봅시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더라”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옛 뱀에 쫓기니까 그때부터 나타나는 현상이 어린 양의 피와 그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세상이 힘으로 버티는 세상이잖아요. 여기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왔으니까 힘으로 버티니까 의로 구박해버려요. 결국 힘이 빠지면 죽잖아요. 죽음이 생길 때 그것이 바로 의인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으면 안 된다고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무엇을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은 힘으로만 이야기하고 돈으로만 이야기하는 세상인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어느 집안이나 어느 회사나 돈 때문에 고민 안 하는데 아무데도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우환이 있고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우환이 있고 있으면 있는 대로 욕심내서 자식들 간에 싸우고. 이 세상은 전부 다 힘의 다툼 속에서 우리도 그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만 이게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받는다. 이걸 알 때 그 사람은 이미 힘의 세계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순교한다고 해서 피 흘리고 죽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는 힘의 세계에서는 있으나마다한 입장에서 이 땅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도 몇 초 되지 않아요. 대부분 나도 돈 좋다하지만 불연 듯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면 나는 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라고 잠시나마 이 땅에 살짝 꿈같은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회수당하기 위해 사는 그러한 요한계시록 속에 놓여 있는 어린양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에게 주어졌다는 걸 잊지 마세요. 사도요한이 이것 보고 몇 년 더 살았습니까? 이것 하고 나중에 풀려났습니까? 출세했습니까?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 있다는 말은 힘에 갇혀있어요. 힘에 갇혀있어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어요. 예수 믿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고 오히려 감사와 감격과 눈물과 그리고 천사한테 고맙다고 절만 했을 뿐이에요.
그것은 뭐냐? 그 자리가 사도요한 개인이 관리한 자리가 아니고 바로 아들이 관리하는 그 자리에 예수 안에 사도요한이 이미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지금도 되풀이 됩니다. 누가 뭐래도 요한계시록 자체는 기적으로써 매일같이 성도의 삶 자리를 우리의 힘으로 버티는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 증거하라고 남겨준 그 사도요한의 자리, 성령이 있는 자리,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자리로서 날마다 우리를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중앙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간 어린양이 계시니 내막을 알지 못해서 울었던 사도요한의 심정,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몰랐지만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짐승의 나라며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인 것을 새삼스럽게 알고 이 은혜 이 놀라운 기적을 영원토록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