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4강

아빠와 함께 2013. 12. 19. 10:51

 

(서울하나교회, 이 근호목사)

하나교회 100805요한계시록 4강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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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강a

자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4장 넘어가면서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해석했던 그 해석의 원칙과 원리가 요한계시록 4장에도 그대로 적용이 됐느냐 하는  그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 해석 쭉 하다가 갑자기 요한계시록 4장 이야기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렇게 하늘 문이 열렸다. 하늘 문이 열렸다. 요 영역은 하늘 영역이고, 하늘 영역은 문이 열리지 않으면 알 수가 없죠?  지상의 영역에 교회가 얼마 있었습니까? 대충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이 있다 이 말이죠.  이 교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여러 가지 말씀을 주는데 있어서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 하는 해석이 주어지겠죠.

여기에 하늘 문이 빼꼼이 열렸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으면 닫혔을 때는 지금 하늘 영역을 모르죠. 모르는 상태에서 땅의 7교회를  해석을 했다 이 말이죠. 과연 이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 틀린 해석이냐 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 4장에서 하늘 문이 열려서 이 하늘나라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이 생각하는 것이 모독하는 것이 하나가 되면 그 해석은 옳은 해석이겠죠. 그렇죠? 그런데 실컷 7교회 해석을 해 놨는데, 하늘 문이 빼꼼이 열리면서 하늘 영역의 하나님께서 일어난 일하고 이쪽하고 이것이 서로 틀린다면, 해석이 땅의 영역의 해석이 틀리고->1번이 틀리고,  하늘 영역이 맞을 수도 있고->2번이 틀리고 1번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고, 둘 다 틀린다는 말은 원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일치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사도요한에게 주신 계시가 원활하게 잘 소통이 된다 할 수 있겠죠. 근데 땅의 해석하고 하늘의 해석이 다르다 한다면 둘 중의 해석 하나는 잘못 된 거예요. 1장부터 3장까지 해석을 전부 다 때려 치워야 해요. 무효가 되는 거예요. 새로 다시 해야 돼요.

보통 1장에서 3장 해석할 때 어떤 해석을 해야 하느냐 하면, 마지막에 ‘하라’ ‘하지마라‘ 이렇게 나오고,  ’하라‘ 하는 것은 하겠습니다.  ’하지마라‘ 하는 것은 안하겠습니다. 라고 나오죠. 그런데 이 해석에서 아~ ’하라‘ 하는 것은 하면 옳은 교회되고 ’하지마라‘ 하면 안하면 옳은 교회 되겠구나~ 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 하늘 영역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빼꼼히 열린 하늘 문을 열고 보니까 인간들이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하늘 영역은 일괄적으로 하나님의 천사가 일괄적으로 모든 걸 처리를 해나가더란 말이죠. 그러면 1번 지상의 해석과 하늘의 해석이 같습니까? 틀립니까? 틀리죠. 틀리니까 우물쭈물 그냥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캘빈이라 하는 사람이 요한계시록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요한계시록은 주석 못한다고 하고 덮어버렸어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어요. 땅의 영역과 하늘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 이문열 소설가가 드라마 작가가 요한계시록을 썼다면, 3장부터 차근차근 계단 밟아가서 하늘 문 열릴 것도 없이 그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4장 5장 6장하시면, 드디어 천국 골인 하십니다. 성공 하셨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드디어 구원입니다 라고 얘기 한다 말이죠.

1장부터 3장 해석이 4장의 기초가 되고, 4장 5장의 기초가 되니까, 아 구원에 골인 했으니까 1장부터 3장 해석도 옳다고 속이 시원하게 안심 푹 놓고 판정을 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근데 초반부터 4장부터 위의 해석과 아래의 해석이 다르게 된다면, 이것은 반대로 4장에서 1장 3장을 해석하고  5장에서 4장을 해석하고 6장이 거꾸로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방식이   돼야 된다 말이죠. 해석이 위에서 내려오는 방식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천사를 통해서 사도요한에게 말씀을 줄 때에 우리보고 지키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줌과 더불어서 말씀이 이렇게 말씀 덩어리가 내려온다면 말씀 덩어리 안에 우리가 겉으로 보면 하라 하지마라 이런 식으로 나오지만 성경 알맹이에 뭐가 들어 있냐 하면 이 말씀의 성취는 ‘내가 이룬다’  ‘어린양께서 이룬다’  라는 것이 포함이 된 채  내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밑에서 보면 안에는 텅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껍데기에 써 있는 ‘하라’ ‘하지마라’ 만 충실하게  ‘쉐마 쉐마’ 하면서 지키게 되면 뭔가 말씀이 성취해서 그 댓가로 보상으로  천국에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는 오해들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4장 해석이라 하는 것은 4장 해석에서 1장 3장을 봐서 일치점을 가져야 되고, 충돌과 마찰이 없어야 돼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죠. 요한계시록이 끝났다 한 해석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이전까지  성경 해석과 일치돼야 하지 편리한대로 저 구절 에서는 저런 소리 했다가 이 구절에서는 이런 소리 했다가 사람 좋아라고 할 수 없어요. 일관성을 가지고 어디를 푹 쑤셔도 동일한 전체가 일관성을 가지고 전체가 다 딸려 와야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요한계시록 2장, 3장은 4장에 의하면 간단하게 말씀 드리는 겁니다. 누가복음에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라는 말씀이 있죠.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지구상 모든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 온 천하를 얻었다” 와 “자기 목숨을 얻는 것” 과 어느 것이 비중이 세단 말입니까? 자기 목숨이 비중이 더 세죠? 그러면 이 말씀에서 2가지 해석이 나오죠. ‘나는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해서 온 천하를 얻는 노력을 나는 포기 하겠다’라고 애를 쓰는 것. 그 해석이 있겠죠. 더 좋은 것(자기 목숨)을 얻기 위해서 온 천하를 얻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이걸 그만 두겠다.

두 번째 이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체에서 이대로 성도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수시로 부딪치고 만나는 그 사건과 사건 속에서 아~ 바로 이 사건이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 무슨 유익 하리요?  너는 모든 걸 버리더라도 너 생명 하나 주님께서 주셨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는 그러한 해석을 주시려고 이러한 사건을 주변(가정에서, 교회에서)에서 일어났구나. 하고 받을 때 이론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하면 감격이 일어나요. 감격. 내가 할 수도 없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그냥 공짜로 주셨구나. 어떤 공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생명을 얻게 하는 그러한 선물을 공짜로 주셨구나. 뉘앙스가 이상 하죠? 모든 것을 잃고도 생명에 비로소 눈 뜨게 되는 생명을 받았다(신경 쓰지 마. 내가 생명을 주는 거야)는 것을 주께서 직접 접촉해서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그 말씀, 그 느낌을 안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감명이 되고 위에서 일부는 하나의 애씀이 되겠죠. 가자. 해보자. 할 때까지 한번 해 보자.  기어이 은혜 받는 날이 오겠지. 열심히 해 보자. 이렇게 되겠죠? 이건 아무리 열심히 해봐도 순간적 기쁨은 모르지만 항상 미흡한  + 알파가 되어  뭔가 남아 있어요. 이 감격 속에는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다 이루었다” 속에 본인이 함유되어 있고 포함되어 있는 희열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이러한  감격이 오래가지 않는 것을 우리가 경험상 알지만 그러나 감격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게 오래 가느냐 안 오래 갈 것이냐 라는 생각조차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는...

아들이 만약에 사법고시에 응시 했는데 한 5년간 매번 떨어지고 5번째 이번에 안 되면 자살 할란다. 하고 심각하게 나올 때, “엄마 합격했어. 2차 3차 합격 했어”라 하면 얼마나 감격 스럽겠습니가? 그런데 감격스런 아들보고 “얘야 너는 판사 되면 뇌물 받지 말고 후원자 술 먹지 마라” 그 감격스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  해야 되겠습니까? 대보 난다 해서 너는    더 침착해야 돼.  인생이 다가 아니야. 요것은 감격하는 그 순간에 말고 하루쯤 지나서 해야 될 문제죠. 감격스런 그 순간에는 그 생각이 안 난다 말이죠. 이렇게 감격하는 순간이란 말은 남들은 이상하게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저렇게 하다가 삐지고 타락한다 하고 놀리고 시기하지만 본인만큼은 뭐가 달아나느냐 하면 지금까지 내가 내 구원받기 위해서 시도했고 노력했던 모든 수고가 다 헛짓이었음을 감격 가운데 알게 되죠.

그래서 그동안 구원받기 위해  모든 수고와  애씀이  모든 부질없는 헛짓이구나. 감격 가운데 알고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날아가죠. 헛짓이하 얘기 하면 주위사람들이 감격은 보지 않고 헛짓이구나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가지고 그렇게 헛짓이라면 사람들을 방종케 하고 타락케 하는데 사람들에게 함부로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느냐. 그런 식으로 가르쳐 가지고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다 모두 해도 된다.   이렇게 나오면  “그 책임을 당신이 질 수 있느냐?” 나오겠죠.

그런데 이 사람의 허점은 그런 것을 고려해서 헛짓이 아니고 남들이 뭐라 해도 당신들이 그런 소리 하는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고 지금 직접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참 생명을 얻는 것이 더 낫다” 하는 그것이 수백 번 들었던 말씀이지만 어느 순간에 내가 이해하려 했던 그 모든 과거는 사라지고 주님이 알게 해 주셨을 때 저항이 안 됩니다. 저항도 안 되고 말릴 수도 없고 그리고 당신은 수천 번 애썼던 것이 절대로 손해라는 느낌도 안 들고  그렇게 헛짓 했던 그것도 감격스런 순간이 되고 되니 그것도 필수 코스였고 또 누구도 그런 짓을 하는 것에 대해 나도 그런 짓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다. 왜 나도 그랬기 때문에.

그러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은혜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 말이죠. 내 노력한 것과 은혜 받은 것의 사이에 그 갭(gap)을 메꿀 수 있는 인간적 노력은 일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고백할 수가 없어요. 아저씨는 어떻게 집사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런 질문을 은혜 안 받으면 나도 남한테 질문을 하겠는데 은혜 받고 보니까 그 질문 자체가 은혜를 안 받았다는 표현밖에 되지를 않아요. 은혜를 안 받았으니까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또 해대는 거예요. 알아서 모방 하려고? 또 흉내 내려고? 필요 없는 거죠. 

이 순간 감격의 순간 다시 말하면 뭐냐면 말씀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말씀이 실제로 이렇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물로 사용되어 질뿐이죠. 전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말씀은 내가 지켜야 하는 하나의 규칙 같은 거였는데 주객이 바뀌었어요. 말씀이 덮쳐 버리니까 그 말씀이 우르르 내 안의 모든 것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방금 얘기 했듯이 그것이 계획입니다.

땅에서 ‘하라’ ‘하지마라’와 하늘을 정복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것이죠. 그것을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간단하게 얘기해서 하늘 문이 열리니, 하늘 문이 열렸다. 이렇게 얘기하면 목사님! 그렇게 얘기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믿으라고 준 게 아닙니다. 믿으라고 준 게 아니고, 믿는 자를 하나님이 만들어 낸다는 책 이예요. 믿으라고 했더니만 믿었다가 아니라 난데없이 믿어보니까 아~하나님이 주신 은혜구나를 고백하라고 증거 하라고 준 게 성경책 이예요. 그냥 하늘에서 땅에서 믿으려고 애쓰면 일종의 행함에 해당돼요. 그 행함은 은혜 주는 자 앞에서는 빛을 잃어 버립니다. 자 그다음 여기까지는  여러분 아셨죠? 감격...

그렇다면 지상에서 교회에게 ‘하라’ ‘하지마라’ ‘눈에  깐 것을 끍어 내라’ 죽도록 충성하라’ ‘하라‘하는 이런 이야기와 위의 원리와 일치 돼야 된다고 했잖아요. 하라 하지마라는 어떻게 해석 하는가? 4장에서 거꾸로 1장 2장 3장을 해석해야 하는가 하면, 하늘에서 그냥 ’하늘 문이 열렸다‘ 요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 무슨 준비된 작업이 있어요. 지난번에는 동해안에서 해상 훈련이 하고 오늘은 서해안에서 해상 훈련하죠? 해상 훈련할 때 지휘관은 지휘봉 하나만 있으면 해상 훈련합니까? 뭔가 구축함도 필요하고 준비된 게 있어야 되겠죠?

저 중국집에 조리실도 없고 주방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의자 탁자만 놓으면, 자~ 손님   맞이합니다. 짬봉 5천 원, 짜장면 4천 원 이렇게 안하거든요? 뭔가 준비된 게 있지 않습니까?

하늘 문 열었다. 하늘 문이 열렸다는 것은  그 위에는 하늘 문을 통해서 뭔가 지상에 일을 하고자 하는 준비된 작업들이 있어요. 그 준비된 작업을...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준비된 작업을 지상에서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방해 할 수 있겠습니까? 방해할 수 없겠습니까? 없죠. 이게 원리예요.

준비된 것은 지상에서 방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방해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도약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애씀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아까 오다 보니까 빗방울이 약간 떨어지던데...빗방울이 막 떨어져요. 그 빗방울 떨어질 때 위에서 비 고만, 빨리 비 내려..   고함질러서 빗방울 떨어진 거 아니죠? 준비된 오염된 기체 상태의 수증기가 액체가 되어 떨어지는 거잖아요. 준비된 거죠. 그럼 어깨에 머리에 우스스스 소나기를 맞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비를 맞든지 피하든지 그럴 뿐이죠. 비오기만 해 봐라! 이런 것은 헛짓이 되는 겁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위에서 그냥 소나기 맞으면 아! 위에서 하늘 문 통해서 이미  작업 해가지고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나~ 짜장면 시켜 놓고 손님이 앉아 있으면 되는데 지가 고무장갑 끼고 짜장면 제가 할게요. 이럴 필요가 없다 말이죠.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됩니다. 주는 대로 먹어놓고 제발 밖에 나가서 돈 내서 먹었다고 얘기 하지 마세요. 그냥 먹은 거예요. 이런 중국집에서 돈 내지 않은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그냥 먹는 거예요. 어떻게 은혜 받았습니까? 그냥 받은 겁니다. 어떻게 영생 얻었습니까? 그냥 받은 겁니다. 어떻게 천국 가게 되었습니까? 요한계시록 강의 들어서? 아니 그냥 받은 거예요. 요한계시록 강의 들은 것도 아니고 교회 가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받은 거예요. 그냥 받았으니까 받아서 그냥 챙기면 되지. 잘 됐다 그냥 받았으니까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챙기면 되는데 그것이 안 됩니다.  준비된 작업이 우리로 하여금 옛날 사람처럼, 내가 지상에서 은혜 받기 전의 인간성으로 가도록 허용이 안 되는 겁니다.

좀 지저분한 예를 들면, 중국집에 짜장면을 시켰는데 돈도 안냈는데 공짜로 짜장면이 나왔어요. 잘 먹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방장이 시커먼 짜장 발린 면을 얼굴에다 옷에다 칭칭 감아버렸어요. 시껍하고 놀라서 나갈 때 길 가던 사람이 보면 누가 봐도  사람은 짜장맨 이예요. 누가 봐도 짜장맨 이죠. 뗄 수가 없어요. 짜장면을 뗄 수가 없어요. 누가 봐도 짜장맨 이예요. 니 인간아 와 이리케 됐노? 받은 은혜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받은 은혜가... 열린 문으로 주신 하나님의 작업이 나로 이렇게 되었다. 나는 짜장면 먹고 입 딱 씻고 옛날처럼 고맙습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내 맘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싶었는데 그게 호락호락 맘대로 안돼요. 왜냐하면 여기에서 주시는 작업을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하느냐면 “구원“이라하고  ”생명”이라 하고 “천국”이라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구원과 영생의 특징은 우리가 소지하지 못하고 소유할 수 있는 용도가 아니고 오히려 구원이 나를 소유하고 영생, 천국이 나를 소유해 버립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이런 은혜를 안 받은 사람끼리 모였다고 합시다. 안 받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나 성당을 차려 가지고 한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 천국“ ”영생”을 쭉 보고 또 십자가 나오고 언약도 나오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자~~ 영생을 갖고 싶다,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다. 구원 받고 싶다. 그런데 방법은 뭐라 합니까? 십자가 피만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하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네? 얼마나 쉬워요?

첫 번째 단계는 성경을 공부해야 되고, 두 번째 단계는 그 성경 공부한 것을 이해해야 되고, 이해와 동시에 나아가서 그것을 믿습니다. 믿는다. 하고 세 번째 단계는 그것을 소지하면 되고, 네 번째는 중요한데 소지한 것을 도중에 엷어지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늘 이것을 되새김 하면서 유지 시키는 노력을 해야 되겠죠. 이게 다잖아요. 한국 교회 150년 역사 이거잖아요. 전부 이거. 이거 완전한 이단 이예요. 완전한 이단입니다. 이 이단이 유대교, 바리새인 이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작업은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1번도 내 작업이고 2번도 내 작업이고 3번도 내 작업이고 4번도 내 작업이고, 유지하는 것, 견제하는 것도 모자라 다섯 번째 그것도 모자라 키우는 것, 성화까지

그래서 가끔  밧데리 떨어지면 교환해서 밧데리 한번 채우고, 소나무 뿌리 2뿌리 뽑고, 주여~ 한번 부르고 시원하여 유지된 느낌이 들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식으로 해서 믿는 척을 해야 하는지...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만약에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감격” 다른 말로 “대박”
감격한 사람 와 버리면 이사람 이단 돼버립니다. 대번 이단 돼 버립니다. 니는 왜 우리와 다른데? 니는 왜 우리와 다른가?  미가야 선지자가 이런 이단 소리 들었어요. 니는 왜 400명이 다 여호사밧 다 찬성하는데 너도 찬성해 나는 못해, 왜 다른데? 나는 열린 천상회의에 가 봤거든.. 그러니까 이쪽 하는 말이 “내가 못 보는데 니가 왜 보는데?”  한국 교회가 은혜 안 받았다고 해서 우리도 은혜 받지 말아야 하는 되는 겁니까? 그런 법이 한국의 헌법에 있습니까? 없죠? 은혜 받으면 누가 받든 은혜 안 받든 그런데 신경 안 쓴단 이 말이죠. 주위에서 어떤 시선 성화 전혀 신경 안 써요.

다만 있을 수 있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말씀을 성취해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용서를 얻는 것이 더 낫다 하는 것을 분명히 나로 하여금 현실 인 것을 이렇게 일을 하시는데 나를 구원 하려고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온 천하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는 말씀을 그게 실제다 하는 것을 알려줬는데 감격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믿음도 함께 왔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실제로 믿어지더라 말이죠. 믿어지고 난 뒤에 부도가 나는 것 불이 나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생명을 얻었거든요. 이 해석이 하늘나라 영역의 해석이에요.

만약에 2번 해석이 1번 해석 같으면 1번 해석으로 이 말씀으로 성경하고 이해할 것 같으면 이해가 안 되면 이해 되도록  애써야 되거든요. 이해되려 애쓰는 것은 뭐냐면 이것은 전도가 아니고 교육이 돼요. 교육 이예요. 나 되는데 니 될 수 있어? 교육이 돼요. 나처럼 해 봐라. 이렇게 교육이 돼요. 이건 뭐냐면 교육이 아니고 증거가 돼요. 교육이 아니고 증거!!
목격자고 증거. 그냥 처음이고 전도가 되죠. 도를 전하게 되요. 여기 전하게 되면 1번 전체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리석음 이예요. 어리석음. 글쎄 말은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해서 은혜를 받았어? 어떻게? 설명을 해보라니까. 6하 원칙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느냐?

그러면 하늘 문이 열려서 그렇다고 하죠. 그러면 뺨 날아가죠. 니만 열리고 나한테는 왜 안 열리느냐?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우리한테 물어보면 곤란하죠. 다만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바로 “감명”이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한꺼번에 터져 나오죠. 실시간에 한꺼번에 터져 나오죠.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풀(Pool=수영장)장에 풍덩 뛰어드니까 온 피부에 물기가 튕기는 듯이 말씀이 톡톡 튕기는 거예요. 헤엄을 쳐도 말씀 속에서 헤엄치는 거예요. 말씀을 쥐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물속에 잠수 시켜 또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그래서 풍덩 풍덩 하며 허프~허프~ 하며 손 놀리는데 손 놀리면 외부에서 말씀이 다 튀어 나오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고 막 튀어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오시리라. 이런 게 막 튀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씀만 이해해서 감겨 있다가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전체의 풀장, 말씀의 풀장에서 내 손에 묻은 한 방울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요것도 이해되고 다른 것도 이해되고 한꺼번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가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는 정답은 “모든 말씀은 주께서 자신이 지키기에 주가 되신다.” 예수님은 주십니다. 왜? 예수님 홀로 자신의 약속과 말씀을 홀로 다 지켜 나가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그냥 지키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거저 은혜로 주시기 때문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모든 과제와 숙제를 우리가 푸는 과제 숙제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자신의 과제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 방주 때 그 많은 사람이 있지만, 달랑 1식구, 한 family, 8명만 들어가도 노아는 그렇게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왜 8명인가?  9명 되지 않고, 말을 안 했죠. 8명 되고 9명 되고 안 되고는 누구 소관입니까?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주님의 소관이지 자기가 왜 이 넓은 방주에 왜 8명입니까? 8명 너무 허전합니다. 채워 갈 걸 이런 걱정이나 뭔가 그래서는 배가 안 뜬다는 그런 걱정은 본인이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9명 안 채워서 배 안 뜬다는 거 없거든요. 없어요. 왜냐면 8명만 구원되라고 처음부터 창세전에  말씀이 그렇게 작정 되었기에 말씀만 되면 꽉 찬 겁니다. 그냥 꽉 찬 겁니다. 들어갈 틈이 없어요. 꽉꽉 찼습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본 우리의 안목과 열린 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안목의 차이 입니다.
결국은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이 두 가지 안목의 차이를 니가 알라는 겁니다.
우리가 육적인 것을 가지고 태어 날 때부터 육적인 것으로 태어나서 성경을 보면서 내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육적인 구원 욕구, 구원 욕구도 충분히 우리가 알고, 그리고 그것이 구원 받고 난 뒤에는 얼마나 헛짓인 것을 알아서, 고 차이, 고 차이의 틈새에서 생기는 것이 뭐냐면, 십자가는 은밀하게 아무에게 들킬 리도 없었고, 어느 사람도 십자가의 비밀을 알려고 시도해도 절대로 밝혀 낼 수 없는 그 은밀한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비밀이 바로 십자가였다는 것을 깨닫죠. 그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되지도 않는 은혜를 받게 되었으니 우리의 모든 공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린 예수님의 공로 돌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론도 안 들어갔어요. 이제 서론 들어갔어요. 이제 본론 들어가 보면, 그러면  하늘 문이 열리고 내려가는 이 작업이 어떤 작업이기에 1장 2장 3장의 교회를 그런 식으로 닦달내고 따지고 책망 하시고 왜 그런 식으로 협박 공갈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심하게 얘기 하느냐? 무슨 작업이 있었기에 1장 2장 3장의 7교회를 가지고 잡아먹을 듯이 왜 그렇게 심하게 하느냐 말이냐. 교회 다니는 일도 얼마나 자랑하고 대단한 일인데,


그리하지 아니하면 촛대 옮긴다 하고 겁나서 교회 다니겠어요? 눈에 안약을 바르라 하고 이거 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하나하나 다 시비 다 걸고, 칭찬했다 싶으면 또 뒤에 보면 책망이 나오고 우리가 그 말씀 듣고 개선했죠. 자 책망한 게 %가 높을까 나쁜 짓 한 게 %가 높을까 따지고, 책망한 게 많은가 나쁜 짓 한 게 많은가 책망한 게 조금이라도 많으면 혹시 구원받는데 천국 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그런 육적인 계산을 해대요.

그러니까 4장의 열린 문의 준비된 작업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하라’ ‘하지 마라’ 육적인 이런 법적인 그런 입장에서 시키는 대로 구원받고자 하는 아이디어만 자꾸 끄집어내는 거예요. 오늘 강의 분위기가 엄숙한지 모르겠어요. ㅋ

자 그러면 위의 있는 준비된 작업이 어떤 것이기에 지상의 교회를 그렇게 닦달내고 힘들게 만들고 죽도록 충성하라 그래야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하니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죽도록 충성하라’ 충성 안하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죽는 척 해도 안돼요. 죽는 척하면 안 되고 죽어야 해요. 순교한 척 하면 마지막 때 살려 준다는 말도 아니에요. 그냥 죽어버리라는 거예요. 죽고 난 후에 구원 안 해주면 누가 손핸데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또 문제는 ‘죽도록 충성하라’에서 문제는 ‘죽지 아니하면 죽도록 충성한 게 아닌 게 됩니다. 그렇죠? 죽도록 충성하라 했으니 죽지 않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영 미흡해. 왜? 아직까지 죽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진짜 죽어 버리면 죽고 난 뒤에 니가  충성해서 죽었는지, 충성 안 해서 죽었는지 죽고 난 뒤에 따질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사라져 버렸어요.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라.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자기는 죽도록 충성했다고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저 죽도록 충성했죠?” “어~ 니 까불다 죽었어.” 그러면 새로 다시 어떻게?? 이미 게임 다 끝나버렸는데, 게임 over 했는데...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그러면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하나님 이정도 하면 충성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 죽어 봐라 죽어봐” “곧 죽습니다.” “글쎄 아직도 멀었어. 죽어봐”아~~ 이래도 저래도 문제예요.

여기에 4장에 보면, 제 강의시간에 성경을 안 봐요. 왜냐면 잠이 오니까 그냥 들으세요.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하늘 보좌가 있고, 여기 24장로가 있고,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4생물(4천사)이 나오죠. 4천사가 나와요. 요 하늘나라 보좌 이야기가 열린 문 안에 있는 작업이라 했어요. 작업. 그런데 뭔가 하늘나라에 이렇게 배치돼 있는 어떤 존재는 무의미하게 배치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철퍼덕 버티고 있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일을 해야 돼요. 기능을 발휘해야 돼요.

신학생들이나 일반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구약을 보면서 제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을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고, 기능적으로 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스라엘이 뭐가 잘 되면 ‘구원 받았구나.’ 어떤 사람이 벌 받으면 ‘지옥 갔구나.’ 이렇게 그 사람 천국 갔거나 지옥 갔거나 이렇게 이스라엘이 어디서 존재 할지 그거만 생각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의 기능입니다. 기능.

다시 쉽게 말해서 탈렌트들이 나쁜 역 맡았다고 해서 시장 통에서 만나서 욕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 사람의 존재는 나쁘지 않습니다. 범죄인이 어떻게 탈렌트 하겠어요? 역할이 나쁜 역이기 때문에 인상이 밉상 역으로 보이는 거예요. 하는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만 역할을 수행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이스라엘 위에 하늘의 영역이 있는데, 하늘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작업에 걸려요. 이스라엘을 출애굽기 4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예. 그러면 존재론적으로 답변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기능적으로 아들입니다. 하면 딩동~♬ 맞는 거예요. 기능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어디 계셔요? 하늘 영역에 계시죠. 하늘에 있는 아들의 기능을 하늘에서 벌리는 사람이 나니라 지상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이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들입니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아시겠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됩니까? ①번 구원 받았다. ②번 멸망 받았다. 멸망했죠? 이스라엘 멸망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서 뭐 해야 합니까? 멸망 해야죠. 저주 받아야죠. 간단한 문제죠. 뭐 어려운 거 아니죠? 왜 하늘나라에서 자기 택한 백성을 낚싯대로“너 올라와” 너 올라와“  낚싯대로 하지 않고, 왜  십자가라는 귀찮은 작업을 왜 합니까?
망하지 않고서는 망하지 않고서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망하면 구원이 되겠네요. 하잖아요?  망하면 구원 되겠네요 하는 그 노림수가 안 망하겠다는 뜻이거든요. 그거 구원 없습니다. 그거 구원 없어요.

그럼 이래도 구원 없고 저래도 구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던 거예요. 왜냐면 이스라엘은 구원 받을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나 권리가 일체 없습니다. 왜냐면 아담을 대표하기 때문이에요.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슨 과일을 못 따먹었습니까? 같이 에덴동산에 있으면서도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었죠. 영생을 얻지 못했죠? 어떤 사람은 미리 따먹었다 하는데, 미리 따먹고 선악과 먹었으면 계속 저주 받은 채 영생, 지옥에 갑니다. 어떤 분이 그리 얘기 했어요. 처음엔 다 따먹었는데 선악과 따먹고 안 따먹었다 하는데, 일단 생명나무 따먹으면 그 효과가 영원히 갑니다. 선악과 한 번 따먹으면 돼요. 선악과 한 번 따먹고 자꾸만 따 먹었습니까?

두 나무의 특징은 한 번 따먹으면 그 나무의 기능은 정지(소멸)되는 겁니다. 그게 특징이에요. 사과야 먹고 다음에 또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 생명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한 나무에요. 그래서 선악과 따 먹은 아담과 하와, 다시 인간들이라 하면 안 되죠.  아니 아담과 하와만 따먹었죠.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 따먹었을 때, 모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들이 포함되어요. 인간들은 영원히 생명나무 가는 것은 미안하지만, 기대하지 마세요. 끝났습니다. 끝난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마귀가 거짓말시켜 놓은 게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하게 나가면 구원 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가 온 아담의 세계에 완전히 퍼졌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도, 서기관들도, 성경 주니까 성경을 어쨌던 간에 교회 안 나올 때는 개차반 같이 살다가도 교회 나와서 성경 보고 술 끊고 담배 끊어서 전보다 조금 더 전에는 소주 5병 먹었는데 이제는 반잔 먹고,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착한 쪽으로 나아지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착하다 충성되다 니 괜찮다. 완전하진 않지만 애쓰는 것 보고 봐 줄게’ 이런 식으로 구원 한다고 믿어서 만들어 진 것이 뭐냐면 천주교고 기독교고 불교, 이슬람교에요. 문화죠. 복음이 아닌 겁니다. 그냥 내 양심이 그러고 싶은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왜? 달리 저항이 없으니까. 뭐가 나쁜 건 알고 뭐가 좋은 건 아니까.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건 시도하는 것, 그런 식으로 좋은 쪽으로 눈을 틀었다는 것으로“아이고~ 대견 하구나~  착 하구나~  이런 인간 너 같은 인간 드물다. 그래서 죽어서 좋은 나라 같으면 좋겠어요.

로마서 7장에서 그거 완전히 다 깨집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너 마음은 가상하다만, 니 또한 법이 있어서 니 법을 꺾어버립니다.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절망적입니다.  아하 절망적입니다. 절망이구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 절망, 절망케 하는 거예요. 절망 뒤에 희망 준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이건 절망 아닙니다.
절망 중의 희망주면 반 절망입니다. 절망인척 하는 거예요. 사람끼리는 속아 넘어가요.하나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1번, 2번, 3번, 4번, 5번 있는데,  십자가 여기 있는데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은혜 받고, 이런 걸 모은다고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이 와서 구원되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은 생각 안하고 내가 십자가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되고,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되고,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가. 자기 머리 굴리는데 여기에 집중해서 양육 받고 교육 받으려 해요. 천주교는  피정, 수련회에 가서 도 닦고 참선해 가지고 천주교는 도입해 자기나 쳐다보고 있고, 다이어트는 도움이 돼요. 딴 건 도움이 안 된다니까.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불순종 안에 가두어 두시는 거예요.(롬11:32) 여러분  길가에 두더 쥐 게임 있죠? 돈 넣고 때려 치는 거. 순종하면 다  때려버려요.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어 두심은, 오직 불쌍히 여겨 주심을 받을 사람만 구원한다는 원칙입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고, 이런 하나님 말고 다른 하나님은 전부 너희들이 선악과로 지어 낸 하나님. 일방적으로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만 구원 하는 이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 참 하나님은 구원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가 기다려야 하나요? 기다리지 말고 그냥 지옥가면 돼요.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에 보면, 죄의 삯은 뭡니까? 사망, 사망이란 저주예요. 아까 얘기 다시 얘기 해 봅시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하리요? 자기 목숨을 얻는 게 낫다는 말씀이 우리가 이 내용을 알고 싶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깨닫죠. 깨닫는 그 옆에 뭐가 있느냐면, 죄의 삯, 죄를 지으면 저주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처사라고 같이 오는 거예요. 따라서 저주 받은 자가 건방지게 구원 받으려는 심보가 더러운 심보예요. 말도 안 되는 심보라고요.

말씀대로 돼야지. 세상에 말씀대로 되려면 죄 지었으면 저주 받아야지요. 혹시 빠지는 수는 없습니까? 그렇게 물어본다는 자체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성을 자기가 모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여 이 저주 받는 거,  주의 당연한 처분입니다. 합당한 처사입니다. 아 일 참 잘했습니다. 멋지게 했습니다. 죄 지었으면 지옥가야죠. 암요.

이러한 것이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이야기 한 거예요. “화로다 나는 드디어  망하는 모습이 내 모습이다.” 게임 끝났어요. 목사로서 선지자로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율법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 뜻에 합당하죠? 라고 나름대로의 자긍심을 가지고 주의 종으로 활동했건만, 막상 성전에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뒤에는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망하게 되었구나. 끝

고담에, 고담 장면은 우리가 미리 알아서 느긋하지만..그담 장면은 이사야가 예상도 못하고 우리도 예상 못한 거예요. 그담에 천사가 와서 숯불로 지져줄 줄이야..그건 우리가 예상 못했습니다. 우리의 예상 하기는 지지는 것은 못하고 파스 붙이는 정도. 우리의 계획은 주께서는 그 인간의 입술을 지져 버리고,  니가 알게 된 진짜 알게 된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기 위해서 누가 갈꼬? 뻔히 알면서도 “누가 갈꼬?” 하니 “제가 가겠나이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3년 동안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이사야는 “감격” “대박”.

3년 동안 발가벗고 애굽에서 전도해도 남들이 뭐라고 흉을 보든지, 가족들이 어떻게 돌보든 상관없이 본인은“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 때 그 시절 품속에서 벗어나지 않죠. 그러니까 그다음 차례에 이사야 준비된 것이 무엇이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계속해서 기능적으로 이사야를 말씀 속에 풀장에 푹 잠겨서 계속해서 그리스도 오실 모습의 내용을 예언자의 모습으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거 받아서  이사야가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는 그냥 “감격” 하나님의 계심은 인간의 조작된 것이 아니고,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이게 바로 숨겨진 현실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제 4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첫 번째 작업인데, 열린 문 안에 작업이 있는데, 이 작업이 무슨 작업을 위해서 뚝딱 뚝딱 뚝딱 무슨 작업을 했다 말이죠. 무슨 작업을 했느냐? 이 작업이 보좌에서 어떤 작업을 했고, 보좌의 작업이 어떤 작업이냐 하는 것은, 거기 배치돼 있는 생물들과 주변의 인물들이 영글어져서 뭐 하나 작업 하나 만들어 냈어요.

그 작업은 제가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 작업이 얼마나 우수하고 대단했던지, 여기에 있는 교회에 이런 지상에 있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거저 구원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손 댈 (우리가 지상에서 조금이라도 애쓰고 한다든지)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늘에서 준 자체로서 완벽하게 구원이 되는 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에 대한 모든 배치가 에스겔에 나옵니다. 에스겔. 에스겔에 보면 나오는데,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보좌하면 어려우니까 좌석)의 특징이 뭐냐? 문이 움직인다. 움직인다. 움직이니까 뭐냐면 기능적이죠. 기능적. 기능적이죠. 움직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인다는 말은, 어!! 하나님 보좌는 우리의 선입관에 안 움직여야 된다는 생각이 기존에 깔려 있거든요.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인다는 말은 뭐냐면 지상에 이스라엘 나라에 성전이 있고, 이 성전 위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서 기도하면, 위에서 응답하게 되어 있어요. 편리하죠. 여기에 연통 같은 게 있어 가지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내려오는 굴뚝 밑에 벽난로에서 오호~하면 굴뚝에서 소리 나는 것처럼 아래 성전에서 기도하면 위에서 응답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사람들이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이는 ‘역대 하’나 ‘열왕기 상’ 같은데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난 뒤에, 솔로몬이 엄청난 제사를 드렸죠? 수천 번제를 드렸어요. 수천 번제라 하면 한꺼번에 양을, 소를 수천마리 드렸어요. 성전을 완공하고 난 뒤에 갑자기 예상치 않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아까 제가 말한 이사야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보고 싶다 해놓고 막상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다 도망가고 말았어요. 다 숨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가고 난 뒤에 감히 하나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 한다는 자체는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사사기 같은 경우에 삼손의 아빠, 엄마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난 뒤에는 “이제 우리는 죽었다. 죽었어.” 이렇게 한 것처럼 실제로 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 이건 진짜 하나님이 영광중에 무서운 가운데 나타났다는 고백을 누가 하느냐 하면, 필리핀이나 핀란드나 덴마크 사람이 안하고 어느 나라 사람이 해요? 이스라엘 사람이 하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기능적이다. 이스라엘이 기능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어느 다른  이방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나타낸 적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이방이잖아요?  이방이 그런 이스라엘 보고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어요. “너희들은 구라다” “거짓말이다.” 너희들에게는 나타났는데 우리들에게는 왜 안 나타나느냐? 그럼 이스라엘은 뭐라 합니까? 너희들 신은 우상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쪽은 “너희만 참된 신이고 우리가 우상이라는 근거를 대라” 그럼 이쪽은 “우린 모세 할아버지를 만났거든.” 우리(한국)는 “단군 할아버지를 만났거든“ 해야겠죠.ㅋ

이스라엘만 참 하나님 알고 다른 덴 전부 다 가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지상에서 인간의 지혜서로는 찾아 낼 수 없어요.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든 민족에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모든 백성 가운데 오직 “너희만 알았나니” 라고 말씀이 그렇게 된 거예요.

세 번째 합니다. 또 해 봅시다. “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없다.”라는 이야기가 우리가 이러고 싶었습니까? “이런 말씀 주세요.” 하고 기대했습니까? 뭡니까? 아니죠? 그냥 이 말씀이 있던 걸 알죠. 은혜 받기 전에는 “아 이런 말씀도 있구나.”하는 선이었는데, 막상 이 말씀 자체가 우리를 해보니까 이 말씀만이 진짜 현실인걸 알죠.

그럴 때 다른 이방 민족이 공자, 맹자도 그 비슷한 말이 있거든. 아무리 무슨 소릴 해도 그 사람 귀에는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그건 이방들이 한 소리고 그건 마귀가 그렇게 한 거고, 진짜 은혜 받아버리면, 우리가 그걸 이해 한 정도가 아니고 말씀 자체가 옴팡 뒤집어 씌워버리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거예요. 임해서 너희가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늘의 보좌에서 응답하는 조치를 내리겠다. 해서 이 성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기도하는 집” 이라. 기도하는 집이라. 기도하는 집의 특징은 반드시 위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 고정 돼야 되죠. 고정 돼야 한다 말이죠.

매표소에서 표 끊는데 사람은 안 보이고 아래에 동그란 구멍만 있는데, “울산 표 주세요.”소식이 없는 거예요. 화장실에 가버리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비록 사람은 안 보이지만, “표 주세요.” 하면 손이 매니큐어 바른 손이 쑥 나와야 된다 말이죠. 2500원. 나와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매표소 아가씨가 어디 가버렸어요. 무빙(moving). 움직여 버렸어요. 그러면 그 터미널 이제 문 닫아버려야 해요. 표 파는 사람이 없는데요, 뭐. 표 파는 사람이 없어요. 움직이더란 말이죠. 움직이는데 그 움직일 때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기능적으로 어떤 기능을 보여 주면서 움직입니다. 그 움직일 때 하나님의 신이 움직이는데, 그 사면에 소, 사자, 독수리, 사람 얼굴을 한 그런 모습을 한 사면, 한 면, 두면, 세면, 네면, 사면을 한 그 가운데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것이 바퀴가 달려가지고 움직입니다. 전 세계를 다 움직이죠. 이렇게 움직이면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야, 이제 좋겠다. 이스라엘한테 복 주던 하나님께서 움직이니까 우리 대한민국도 복주겠네~이렇게 좋게 생각하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성전(하나님의 보좌)이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말은 요 보좌와 성전이 딱 끊어질 때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뭐냐면, 이 성전을 만들던 이스라엘이 뭘 했냐하면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요거 또 하나 이야기 해야겠습니다. 우상인줄 알고 우상 섬기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우상의 이름 가운데 요런 게 있어요. ‘여호와’ ‘예수’ ‘삼위일체’ 이런 이름이 있어요.

명칭이 ‘부처’ ‘몰록’ 이래서 우상이 되는 게 아니고 지금 열심히 “주여~ 주여~” 하는 우상이 있다니까요. 삼위일체 우상이 있고, 우상이다. 아니다. 를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위에 계신 분이 결정하지 자기가 결정하지 않아요. 부부 사이에 아내가 이렇게 말해요. “당신 언제부터 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 것 같애.” 할 때 남편이 ”내가 뭐? 나는 똑같애.“ ”아니야 여자의 육감은 못 속여.“ 여자의 육감은 못 속인다는 말 헌법에 나와 있습니까? 예레미야 몇 장에 나와 있습니까? 그런 거 없어요. 지 맘대로 생각한 거예요. 남들은 억울하지.
아니 요새 나한테 관심이 뚝 떨어졌어. 뭐 뚝 떨어져? 똑 같은데... 아니야. 아냐. 누가 달라진 겁니까? 그렇게 생각한 여자 쪽에서 달라진 공산이 많아요.

상투적이란 말 들어보셨죠? 요거 좀 설명해야 하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명해야 돼요. 왜냐하면 왜 우상을 섬겨야 하는지... 상투적이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아주 어렵게 얘기 하면 ‘동질성’이예요. 동질성이란 말이 뭐냐면,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것을 그대로 현재까지 잡아당기는 것을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어제 은혜 받은 것을 오늘 은혜 받은 걸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동질성이라 해요. 동질성. 10개월 전에 교회서 은혜 받은 것을 가지고 지금도 그 은혜 그대로 유지 하는 것을 동질성이라 합니다.

사람이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 순간도 같은 경우가 없어요.

그야말로 문 잠가놓고 안에서 컴퓨터하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그대로 백수가 그 자리 고대로 있더라도, 그 인간은 어제와 다른 인간입니다. 늘 달라요. 이미 생각이 다르고, 역사가 또 있어요. 요번 수련회 할 때 했는데, 1, 2, 3, 4, 5, 6  순서 정할 때 2라 하는 것은 1이 앞에 있을 때이고, 3이라 하는 것은 1과 2가 있을 때 3이 있어요. 이미 오늘이 돼 버리면 어제 있었던, 어제 만약 말하기를 “ 나는 어제와 똑같애.” 라고 말하는 것이 포함된 오늘이 되는 거예요.

오늘의 기억 속에는 어제와 똑같지 않아요. 이렇게 던져 놓고 “ 내가 합격해서 돌아올 때가 됐는데...” 라고 어제 기다린 기다림보다 오늘 기다림이 더 심화 되죠. 아,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더 심화 되죠. 같을 리가 없습니다. 같을 리가 없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 모든 게 달라지고 자기 주변 환경이 달라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달라지는데, 뭐 만큼은 하나인 것처럼 자꾸 척하느냐 하면, 어제 믿음이 오늘 그대로 유효하다고 그렇게 조작하고 싶어 해요. 조작하고 싶어 해요. 이것은 그냥 어제 은혜 받은 거 공짜로 덩태미로 그냥 넘어가려 해요. 신앙생활 아니에요. 신앙생활. 이발사가 교회 나오면 목사님이 뭐라 합니까? 이발만 하지 말고 신앙생활 하라 하죠? 그렇죠? 교회 나온 의사보고, 병만 고치는 것이 다가 아니고, 신앙생활 해야 된다 하잖아요.

그러면, 목사의 목회는 뭐해야 합니까? 목사의 목회는 뭡니까? 의사는 병 고치는 것이고, 이발사는 머리 감는 거라면, 목사의 기술은 뭐예요? 목회잖아요. 설교고, 근데 그게 신앙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거 신앙 아니죠? 목사는 신앙생활 해야 되는데, 목회 생활로 대체해 버려요. 이건 마치 이발사가 머리 깎아주는 것으로 신앙생활 대체하는 것과 똑같고, 의사가 병 고쳤다고 신앙생활로 대체하는 것과 똑같고, 판사가 판결내리는 것이 마치 신앙생활이라 취급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만나를 주듯이 매일같이, 매일같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다는 감격이 매일같이 거기서 주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럼 감격 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존의 보좌(성전)가 뚝 떨어질 때, 떨어지면서 이 성전은 아무리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상번제, 아침, 저녁마다 양 잡아 드려도, 양 잡고 소제 드려도 이건 우상이 되죠. 아무리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해도, 기도하는 집이라 하여 기도해도, 적게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두개인들이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특히 사두개인이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제사 지내는 일이었잖아요. 성전 관리잖아요. 바리새인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거잖아요. 그들이 구원 받았습니까?

예수님 말씀은 반대예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당 간다 했습니다. 금식한다고? 웃기고 있네. 신랑이 함께 있는데, 무슨 금식을 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어. 했다고요. 이거 누구 겨냥해서 한 거예요? 누구 겨냥해서?? 동질성, 상투적인 거. 그러니까  본인은 이걸 상투적이라고 봅니까? 안봅니까? 안 보죠. 그러니까 상투적 안 되려고 뭐했습니까? 금식하고 회개 집행한 거예요. 회개하고 금식했는데, 이걸 가지고 뭐라 했습니까? 옛 부대, 쉽게 말해서 옛 푸대. 옛 푸대에 옛 포도주를 담는 식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목사님 바리새인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냥 그대로 지 상투적인 거 하세요. 하고. 주님 만나서 무슨 소리 하면 되느냐 하면, 주여 이 짓해도 구원하고 상관없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거 하면 돼요. 그거 누가 했어요? 사도바울이 했잖아요. 사도바울이 율법에 흠이 있어요? 없어요? 흠이 없는데 그 소리 했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때려죽이려 했잖아요.

상투적이고 동질성이 되게 되면, 여기에 뭐가 가미 되냐 하면,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주님이 주신 믿음이라 주님이 주신 은혜라고 유대인들은 알고 있어요. 믿음은 은혜로 오고 구원은 은혜로 오고 영광은 행함으로 한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주특기입니다. 다 그렇게 교육했어요. 요즘 한국교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도 다 그랬어요.

문제는 이 믿음이 바로 동일성, 이 믿음의 주체 자가 봉사하기 위한 믿음이에요. 나를 살리기 위한 믿음이에요. 누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주인공이지 믿음이 나를 집어 삼키지는 않고 있단 말이죠. “나는 어제는 믿었지만 오늘도 믿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라고 나와야 돼요.
어제는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지 주의 말씀대로 믿었는데, 오늘 아침 되니까 영 믿음은 없고, “아이고 참 10년 댕기나 20년 교회 댕기나 다 헛짓이고 소용없는 것이다.” 라고 언제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을 해줘야 됩니다.

고렇게 하면 은혜가 오시는 게 아닙니다. 고거 한다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할 뿐이죠. 그런데 진짜 은혜가 오면, 뭘 하느냐 하면 어제 믿은 것 가지고 오늘 잡아당길 수 없음을 압니다. 주께서 날마다 살아계셔서 은혜를 주셔야지, 이만한 믿음 같으면 내일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제 힘으로 버텨 보겠습니다. 라는 얘기는 하지 맙시다. 우리, 그런 식으로.

어제는 예수님 필요 했는데, 오늘은 안 필요하다 식으로 나오지 맙시다. 어제도 거저 은혜를 주셨지만 오늘도 거저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택한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15년 줬는데, 안 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질문은, 그런 질문이 나올 때 은혜를 안 받았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와요. 왜냐면 은혜 주고 안 받고의 결정권이 나한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받았다면, 그렇게 요구할 쨉이 못되죠. 우리가. 이걸 말로 하려하니 답답한데, 실선으로 해 봅시다.

이 안에 우유가 있다고 합시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요구르트 아줌마가 아침마다 계속해서 갖다 넣고 가는 거예요. 다음에도 계속 해서 우유 넣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 애들이 “엄마, 우유가 공짜로 그냥 생겨” 내일도 보니 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온 식구들이 고맙다 인사하려고 기다리니까 우유가 안 오는 거예요. 우유 아저씨를 만났어요. “왜 안 오십니까?” “내 맘 대로야. 내 맘 대론데.” “아니 그래도 364일째는 왔잖아요. 왜 365일째는 안 옵니까?” 364일째 온 것은 온 거고 365일째 오고 안 오고는 내가 결정한다니까요.

“목사님, 그렇게 얘기 해버리면 믿음 불안해서 못합니다.” 어제 믿은 사람 내일 온다고 해줘야 안 불안하지 그리 얘기하면 실컷 예수 믿어도 그담부터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지만 진짜로 한 번에 은혜 받은 사람은 이것은 나한테 은혜 준 것이 내가 요구해서 내가 구원 받고자가 아니라 주께서 자기 택한 세계 계속 준다는 것이 보장하는 편에서 계속 우리에게 갖다 준다는 것이 믿어진다니까요. 그것이 알아지는 거예요.

한 번 주께서 은혜 주시면 계속 주신다는 것이 알게 된다니까요. 그래도 목사님 그것이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안 오면 이란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니까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았죠?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까? 주님 믿음입니까? 주님 믿음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예수님 바라봤잖아요. 요구르트 아줌마, 예수님을 보기를 기다렸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날 갖고 놀았다는 말이죠. 누굴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거저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하나님은 나를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와서 그동안 나를 갖고 놀았어요. 이스마엘 낳게 하고, 또 실망케 하고 낳은 자식은 저주 받아 버리게 하고, 생각도 않은 자식은 구원을 주는 이삭이 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나를 갖고 놀은 거예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기능적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신 거예요. 주체라는 것이 내가 믿음을(아까도 얘기 했지만) 소지 한다는 거, 이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소지해 버리면 내가 굳어져 버려요. 그렇다면, 자 여러분 질문 드리겠습니다. 너무 어려우니까.

하나님께서 보좌를 끊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멸망케 함이다. 멸망케 함으로서 이스라엘이 존재론적이 아니고 기능적이죠. 기능적으로 보인다는 말은 이러한 사실, 내막을 아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구원 받지요. 아, 하나님의 본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나라 완전히 박살내게 만들었구나. 이것이 오늘 강의의 하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그 보좌의 움직이는 4생물의 특징이 뭐냐면, 지상에서 “강탈” 다 빼앗는 거예요. 다 빼앗아 버려요. 뺏기는 자가 구원되는 거예요. 난데없이, 생뚱맞게, 황당하게,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다 뺏기는 거예요. 아이, 목사님, 죄를 지었으니까 빼앗기지.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빼앗기는 거라면 나보다 다른 사람 것을 다 빼앗아야 해요. 나보다 더 죄를 지은 사람이 더 많으니까. 그게 아니고 뺏아 주는 그 사람이 우리의 소중한 중력의 중심이에요. 블랙홀이에요. 무조건 끌어 당겨요.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고, 타고난 본능이 그래요.

그래서 이번 레위기 수련회에서 출생 자체가 처벌이라고. 사람이 태어나는 자체가 처벌이라는 거예요. 레위기에 나오잖아요. 여자가 해산하면 그 자체가 더럽다고, 아이고, 더러운 거 낳아 가지고 약속의 땅 버려났다고 하는 거예요 .애들 3명 나도 4명 나도 다 처벌이에요. 그 집안에 소복이 4명 다 처벌받는 거예요. 처벌 받는 것이 합당한 조치예요. 죄 지은 자에게는 너무나도 합당한 조치. 남의 애 성적 내려가면 그거 별로 기분 안 나빠요. 그런데 내 애 중에 성적이 내려가면 환장합니다. 우울증 걸렸다 난리 나요. 우울증 걸렸다 뛰어 내린다 난리예요. 무슨 일 났어요? 왜 뛰어 내리게 .. 죽는 시험 있어요? 아파트서 왜 뛰어 내리는데...? 자기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우울증 걸리고, 뛰어 내리는 거...? 아주 합당한 조치입니다. 조치예요.

성경에서 지옥을  뭐라고 표현했냐 하면, 구더기를 튀기는 것으로 표현했거든요. 자 구더기를 뜨거운 가마솥에 넣고 뚜껑을 덮지 말고, 소금을 탁탁 쳐 봅시다. 그리고 밑에서 장작 불 때면 풀풀 뛰죠. 그 뛰는 것을 우리가 관찰하는 자가 아니고, 우리가 가마솥의 뛰는 구더기라고 하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럼 주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이이, 고 놈 잘 뛴다.”합당한 조치기 때문에. 뛰라고 소금 친 겁니다. 뛰라고 장작 불 땐 거예요. 뛰라고 할 때 뛰어 주고 뜨거울 때 뜨거워해야 주님께 영광이 되요. 이거 미친 소리 같은데...ㅋ

그래야 영광이 된다고요. 이걸 이방인들의 하나님에는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은 없어요. 이방인들이 창안한, 선악과 기준하여 창안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너무 잔인하잖아요. 근데 인간은 잔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본인이 잔인하기 때문이에요. 왜 잔인하냐 하면,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인 자가 돼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픽, 할 때 이미 예수님 못 박혔어요. ‘흥’ 하고 조롱할 때 이미 또 못 박힌 것이 돼요. 물론 내부에는 인간 속에 악마가 있어서 악마가 그렇게 시키지만...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성전이 있으니까 성전이 고정되어 있으니까,

이것이 솔로몬 당시에는 맞아요. 솔로몬 이후에 이미 나라가 깨질 때 그들이 진짜 회개 합니다. 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을까. 이미 진즉에 회개해도 솔로몬도 마지막에 어떻게 했습니까? 이방 종교를 수입했죠? 수입해도 솔로몬은 이게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면 이방종교가 그렇게 수입돼도 나라는 탄탄하고 든든하고 아직도 주변에서는 못 다 바쳐서 “아유~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당신입니다. 세상에 이런 지혜와 이런 부귀영화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안 주면 이런 게 없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주의 종입니다.”라고 칭찬이 늘어서 막 쏟아지기 때문이에요. 

하나교회는 지금 회비가 모자라서 쏟아지기는커녕....... 솔로몬은 막 갖다 바쳤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양을 보시는 게 아닙니다. 질을 보잖아요. 질을 보시는데 양을 받아 딱  챙겨가지고는 뭘 생각합니까? 질을 포기한 거예요. 양 있으면 됐지 뭐 이만큼 얻었으면 됐지 뭐 하나님을 애타게 찾느냐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을 애타게 찾으려면 인간이 결국 무엇을 지표로 한다? 양, 이것은 힘이 되는 거예요.

양이라 할 때 하나님께 사랑 받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양이라는 것 힘이라는 것, 이것을 포크레인으로 하늘에서 후벼 파서 강탈해 가면, 그것보다 더 완벽한 사랑 없어요. 최고의 축복 아닙니까? 니가 온 천하를 얻고도 니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거 언제 느낀다고요? 난데없이 귀한 재산 날라 가고, 자식 아플 때, 집구석 개판 됐을 때, 교회 교인 다 나갔을 때.......ㅎ  과연 우리의 보물은 뭐였습니까? 가정이었습니까? 교회였습니까? 정말 우리의 보물은 어디에 있었어요?  돈이었습니까? 진즉 그래야죠. 진즉 그랬어야죠. 우리의 보물은 예수님 이었습니다. 그런 입에 발린 거짓말 하지 마세요. 우리의 보물은 예수님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그런 거짓말, 목사까지도 다 아는데.....  목사가 알면 다른 사람도 다 알지 뭐,...

사람은 자기가 육신이 살아 있는 한  자기의 보물이 고정적입니다. 뭐냐면 자기 육신이 보물입니다. 옆 사람 아파도 내 안 아프면 그만이에요. 내 아프면 옆 사람 건강해도 시기 나는 문제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손 뗀 교회가 중요하고 남의 집 애가 싫고 내 애는 좋아하고, 다른 나라 싫고 내 나라 좋고, 인간 똑똑해야 좋고, 내가 좋은 거예요.

내가 좋은 것 때문에 누가 싫은가 하면, 이 좋은 날 너무도 귀한 날 누가 나를 죄인이라 해요? 누가 나를 죄인이라 해요? 어, 분위기 와 이래요? 진짜 모릅니까? 누가 나보고 죄인이라 해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죄인이라 하면, 그럼 예수 죽여야 하죠. 믿는 척 하면서 내부에서는 “돈 만 주고 꺼져. 내가 원하는 돈 만 주고 꺼지란 말야.“ 양과 피만 주고 나가란 말야. 교회에 개척교회 목사 뭐랍니까? ”예수 당신은 교인 수 채워 주고, 헌금만 맞춰 주고 꺼져 나가. 이 교회 내꺼야.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옆에 교회 봐. 잘 안 되면 용서가 안돼. “

인간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항상 집중하는 거예요. 그 집중하는 기능을 고맙게도 누가 먼저 보여 줬습니까? 누가 먼저 보여 줬다고요? 이스라엘이 기능적으로 보여 줬죠. 이스라엘이.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있고 성전 있고, 율법 있고 다 있다. 왕 있고 다 있다.

주께서 짝짝(손뼉 치시며) “ 장사 잘 해라. 내 떠난다.” 해서 떠나기 위해서 바퀴 달고 떠나버렸어요. 바퀴 달고 떠나 버렸습니다. 자, 이제 문제 하나 나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떠나면 다른 민족에게 간다? 안 간다? 1번 간다. 2번 안 간다. 둘 중에 하난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떠나면 딴 나라 간다? 안 간다? 안 갑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대표자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멸망은 곧 뭐로 퍼지는가 하면, 전 모든 민족에 대한 멸망으로 퍼집니다. 고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미 바퀴 달린 보좌 나왔다 이 말은 자기 택한 백성을 어디로 위하느냐 하면, 미국 이민 보내고, 호주로 이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아예 하늘로 데려 가버립니다. 하늘로 데리고 갈 때 그냥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코스를 밟아서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그 코스는 복음 전하고, 목 베임 당하고, 위에서는 축하 한다고 손잡아 당기고, “에이 복 받은 자들아, 요렇게 복 받을 줄 니 몰랐지? 요렇게 지상에서 너희를 왕창 빼앗아 갈 줄 몰랐지?” 그러면 목 베인 사람들은 “감격” 감격해서 “하나님, 어떻게 말씀대로 그대로 세상 일이 되갑니까?" 하고 둘이 짝짜꿍 잘 되서, ”나는 말씀대로 그대로 시행한다.” 택한 백성 “어떻게 그렇게 말씀대로 하나 빈틈없이 짝짝 되갑니까?” 주의 약속대로 7교회 다 망하고  아이고 얼마나 꼬신지... 다 망해 버리고, 왜 그렇게 약속대로 되갑니까?

7교회 이야기 보고 교회 바르게 해보려고 “그래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는 회개하고 바르게 해 봅시다.” 한 교회 다 망했거든요. 말씀대로, 망해야 하는 교회는 망해야 돼요. 안 망하려 하는 것이 말씀에 대한 위배 입니다. 교회가 망해야 본인이 성도인 것이 드러나요. 이게 무슨 이야기야...?? 교회가 망해야...교회가 보물이 아니고, 누가 보물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보물이라는 것이 드러나요. 예수님이.

만약에  교회가 안 망하게 되면, 그 사람은 본인은 분명히 예수님 믿는다고 했고, 이 교회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덩어리째 떨어져서 이 교회가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교회 욕하면 용서가 안 되죠. 그런데 예수님이 교회 욕해버려요. 그 교회.
그 교회 지을 때 어느 장로님이 기도 하니까, 응답 받아서 땅 값 확 올라서 지은 교회인데, 기적과 기적이 연속으로 일어나서 지은 교회인데, 그 교회가 바로 이것이 바로 과거 현재 미래, 이것이 동질화에요. 동질화

이거 없고 그담에 내 새로운 교회 할까요? 이래 나오면 “주님 뜻대로 하세요. 주님 말씀대로 하세요.” 해야 하는데, 있는 교회나 크게 해 주이소. 이게 뭐냐면, 동질화잖아요. 동질화. 어제 것 그대로 땡겨서 굳어지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양적으로 이정도 하면 슬슬 안심되는 그러한 수준에 올라갔습니다. 라고 할 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저주하겠다는 말씀대로 유업은 너희들이 나와서 이 땅에서 배불리 먹고 좋은 집 질 때, 하나님을 모든 출애굽 때 빈털터리로 나왔던, 고아와 과부가 되어 나왔던 그 때 그 시절을 깡그리 잊어버리겠다. 이만하면 제가 살겠습니다. 휴우~ 이제 숨이 트입니다. 그 숨 확 막아 버립니다. 숨 막아 버려요.

4가지 짐승은 에스겔 10장에 나옵니다. 바퀴 안에서 불꽃이 나옵니다. 그 불꽃이 무슨 용도냐 하면, 유다 나라를 완전히 불살라 버리는 용도에요. 완전히 불 질러 버리는 거예요. 중국산 라이타와 똑같은 거예요. 한쪽에 휘발유 쭉 뽑고, 라이타 획 던지면  확 타죠.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말씀대로.

그것을 보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하소서.” 위에서 “말씀대로 했는데?”  “우리 다 타 죽습니다.” “아니야, 건질 사람 벌써 건졌어. 니 손으로 다 작살냈잖아. 목 베어버렸잖아.

문제는 이 4생물이 배치돼 있는데, 이 4생물이 기능적으로 에스겔 10장의 말씀대로,  전 세계가 불신으로 처해 있는데, 요 앞에 아버지의 보좌 말고, 그 앞에 어린양의 보좌가 있어요. 보좌가 2개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어린양의 보좌는 뭐냐면, 아버지하고(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아들하고 고 관계를 여기에 있는 4생물이 그대로 수행을 하게 돼 있습니다.

4생물이 하는 일이 자기 안에서 판단하여 적당히 불사르자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하고 하나님이 합의된  내용을 펼칩니다. 합의된 내용을. 합의된 내용이 뭐냐면, “하나님의 아들을 주님이시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늘나라에서 어떤 짓도 다 합니다. 무슨 짓도 다 해요. 살리고, 죽이고, 천국가고, 지옥가고, 이 모든 소관은 교회 소관도 아니고, 사람 소관이 아니라 순전히 어린양의 소관에 의해서 어린양에 따라서 다 결정돼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천사들의 지시는 어린양의 어린양 됨을 어린양이 주로 등극되었음을 축하 공연이죠. 어린양은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작업이 필연적으로 따라 오게 되는 겁니다.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그 점을 에스겔 성전 가지고 해 보겠습니다.

에스겔 성전의 이 보좌 이야기가 에스겔 1장에 나옵니다. 1장에 나오고 4장인가 5장...가물가물한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르겠다. 1장에 나오고요. 10장에 나오고, 두 장에 나옵니다. 그담에 제가 말한 것은 지금 설명이 시간상 어렵기 때문에, 설명을 쉽게 하려고 정리를 집중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4생물 안에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신이 임했으니까, 지금 에스겔 전체 내용이 뭐냐면, 성전이 있는데, 하나님의 고정된 보좌가 움직이니까 성전에서 하나님의 신이 동쪽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성전은 불바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러니까 성전을 백날 때려봐야 소용없죠. 너희들은 우상을 섬겼으니까...

그리고 아까 잊어버렸는데, 우상 이라하는 것은 반드시 앞에 붙는 게 있어요. 자기를 위한,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한 신은 무슨 신이라고요? 우상이죠. 그럼 우상이 아닌 신은, 자기를 위하여 대신에 (  )에 누구를 위한 신이 들어가죠?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오늘 강의에 의하면, 를 다른 말로 하면, “ 말씀 성취를 위한 기능인”, 말씀 성취를 위하여,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거예요.

고 관계를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구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나를 가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를 가나, 발로 걸으며 툭툭 치면 말씀이 생각나고, 누구를 만나도 말씀이 생각나고, 펄럭거리며 다니면 냄새나는 향수처럼 말씀으로 다 나오죠. 아~~이런 경우가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라 하는구나.’ 자꾸 말씀이 생각난다니까요. 아하, 이런 경우가 마귀가 예수님께 돌더러 떡 되게 하라는 그 대목이네.

어떤 경우 그러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항상 말씀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말씀 풀장에 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다 말씀이에요. 말씀대로. 얻어맞으면, 아 이게 얻어 맞을만해서 얻어맞는구나, 얻어맞는 것도 주의 말씀이 와서 때리는 거예요.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가 이런 경우구나...  그리고 또 맞았죠. 그러면, 아하 아까 맞은 것은 징계 근처도 안가고 이게 징계구나.. 이렇게 늘 말씀이 함께...술집에 가든, 미국에 가든, 교회에 가든, 집에 있든,........말씀과 더불어 항상 있는 거예요. 그게 무슨 생활? 그게 신앙생활 이예요.

신앙이란 방주에 실려서 사는 거예요.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요건 주일날 지키고, 요건 월요일에 지키고, 내가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지키고 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말씀이 듬뿍 뒤집어 씌워버렸는데, 내가 청와대 가도, 교도소 가도 말씀이 가득 차 있어요. 창살을 보면서, “사도 바울도 이런 고생 했구나.” 어디를 가도 말씀 생각이 나게 되어 있어요. 어디 가도. 그러니까 말씀 주위 상황을 내가 만들지 마세요.

이미 주어진 상황이 말씀이 충분히 헤엄치는 상황 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에서 “내가 가난에 처하든지 부유에 처하든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상황 탓을 하거나 누구 탓 한다든지, 시어머니가 교회가지 마라 해서 못 갔다 고 이런 핑계 는 달지 맙시다. 시어머니 보내주신 것도 말씀대로 보내주신 것이고, 시어머니 핑계대고 교회 안 간 것도 말씀대로 안 간 것이고, 그러다가 얻어맞는 것도 말씀대로 얻어맞는 것이고,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끄시는 겁니다.

왜냐면, 인간은 안개이기 때문에, 내 자체에 관심은 없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주의 말씀이 새롭게 주어질 때,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신인 성전이 깨어지겠죠. 성전이 깨어지는 것을, (잘 들어보세요)그걸 목격하고, 그담에 증거 하는 자를 에스겔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새로운 공동체’로 보는 겁니다. 희한하죠?

있는 성전 잘 해도 될 걸, 있는 성전 와장창 불타 버리고 불태운 것을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탔다는 것을 목격하고 증거 하면서 이방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그들 속에 ‘나의 신이 운반하는 수레바퀴가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멸망은 말씀대로 하나님이 잘 조치가 된 겁니다.

그런 조치를 제가 설명하면서 “강탈”, 강탈이란, 달리 얘기하면, (이 말이 표준말인지 모르겠어요) ‘움푹 파이는 것’ 표준말이에요? 움푹, 삽으로 푹 파는 것. 삽으로 톡 도려내는 것,  우리의 주체가 있으면 주께서 삽을 동원시켜 푹 파서 우리를 허하게 만드는 것, “나 그거 없이는 못 살아요.”할 때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 “ 나 그러 없이 죽어요.” 하면 움푹 푹 가져가는 것, “그래 죽을테면 죽어라.” 말씀대로 움푹 파는 것. 우리의 주체를 움푹 파는 것을 더 잔인하게 얘기하면,(오늘 잔인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네요) 단층 촬영하죠? 여러분 단층 촬영하면 사진 찍는 걸로 하지만, 빛의 안목에서 보면, 단층 촬영이 정육점에서 전기톱 가지고 모든 단면을 자르는 걸 말해요. 막 잘라 버려요. 막 잘라 버린다고요.

말씀께서 항상 우리를(잠 잘 때는 못 자르니까 자고)말씀을 가지고 단층 촬영하듯이 막 잘라버리면, 요 단면 하나하나가 주의 말씀대로 다 이끄신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아예 말씀의 풀장에 들어가니까, 말씀대로 안 되는 게 없어요. 여기서 문제 하나, 신자만 말씀의 풀장에 들어갑니까? 불신자도 말씀의 풀장에 들어갑니까? 신자, 불신자 다 말씀 속에 들어가요. 그런데 불신자는 뭘 몰라요? 불신자는 이게 잘라지는 게 없고, 뭐가 단단합니까?  ‘나‘ 주체가 단단하기 때문에 지켜도 내가 지키고, 구원 받아도 내가 열심히 해서 하고, 지금은 내가 바쁘다. 항상 주체가,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난 용서가 안돼.

자기 몸 중심으로 버티기 때문에 이 사람은 현실을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현실을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이제 4장 봅시다. (아이고 참, 본문 들어오는데 애 먹었다) 요한계시록에 금 면류관, 5절에 보면,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는 것이, 이게 어디 축제 합니까? 고추 아가씨 축제 할 때 폭죽입니까?  뭤 때문에 번개  뇌성이 있습니까? 완전히 하나님의  분노, 진노의 표현이죠. 찌직, 찌직, 뻔쩍, 뻔쩍, 뻔쩍 이게 뭡니까? “불안하지? 불안하지? 겁나지? 너희들 완전히 망가지지? 그래 이게 보좌안의 나의 뜻이야“ 이런 겁니다.

다시 말할게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더 이상 다른 이방 민족은 볼 것도 없어요. ‘개‘이기 때문에.... 그럼 구원 받는 사람은 오직 목격자들 밖에 없습니다. 무슨 목격자? 이스라엘이 성전 지었다가, “얼레리, 꼴레리, 자기 믿는 하나님한테 멸망당했다. 하고 이렇게 놀릴 때 그 때 하나님이 그것을 의도 했어요. 너희 이방민족이 너희를 포로 잡을 때 비로소 이방인들이 여호와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구약 성경 보면 많이 나와요.

너희들이 멸망당할 때 ”나 여호와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했다.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도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라도 우리가 몰랐던 현실이 나타난다면, 현실을 알았다는 그것만 해도, 우리는 온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었어요. 아~~, 성경속이 그냥 동화책이 아니고, 드라마가 아니고 실제상황이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 실제 상황이듯이, 사도바울에게 예수님 나타나기 전에는 실제상황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나타나고 난 뒤에는 야, 이게 실제상황이구나.

그래, 여기에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에스겔처럼 움직이는 대목은 없어요.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신약 성경에서 이미 어린양이 에스겔에 나오는 모든 걸 완료된 상태에요. 그렇다면, 이제는 에스겔에 나오는 내용대로 그대로 적용시키면 그만입니다. 그대로 적용시키면 됩니다. 주의 자리에 앉아서. 에스겔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만, 신약에서는 어린양의 보좌에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심판하는 권한이 있다. 찌직 찌직, 뻔쩍, 뻔쩍, 하는 거예요.

4가지 짐승들의 특징이 있어요. 날개에 뭐가 있습니까? 날개에 ①귀가 있다  ②코가 있다  ③귀가 있다  ④눈이 있다 뭐가 있어요? 눈이 있죠? 쉽죠. 눈이 있어요. 빡빡하게 있어요. 4생물이 동서남북을 전체를 카바(cover) 합니다. 이 4생물이 이사야에서 이사야가 6장에서 하늘 보좌에 보니까, 자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천사가 있죠? 천사가 뭐합니까? 천사가 이리이리 가리죠? 가리는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모든 어느 피조물도 감당을 못해요. 그래서 가린다 말이죠.

그런데 주위에 있는 4천사가 가리는 날개에 뭐가 있다고 합니까? 수북하게 눈이 있죠? 그 눈들은 뭐를 보는 눈이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주시하고, 심판하고, 탐색하고, 시예스아이(csi), 과학수사 보다 더 세밀하게 낱낱이 보는 그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가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4생물에 의해서 4생물의 존재를 현실로 보는 그 성도는 천사와 함께(뭘 해야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앞에서 천사와 똑같은 일을 해야 될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주여 진짜 이 영광스러운 천사도 감히 못하는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구원받아서 저희들도 우리의 주님 앞에 그냥 엎드릴 뿐입니다. 하는 천사가 하는 짓과  똑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 마지막에 보면 뭐를 던집니까?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24장로들이 엎드려서 자기의 면류관을 누구한테 던집니까? 이게 본인이 원해서 했습니까? 말씀이 그렇게 만들어서 그랬습니까? 말씀이 만들었죠. 지금 24장로(순교자)들이 엎드려 있을 때에, 그때 누가 하나 들어와서 “저 김장로, 애 이번에 공무원 합격 됐어? 안됐어? 이렇게 물으면 뭐라 하겠어요? 그게 질문이 가당키나 합니까? 지금 24장로들이 엎드려서 천사도 감히 못 보는 영광스런 보좌에서 완전히 황홀과 감격과 경악스러운 모습으로 엎드려서 모든 만물이 주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고, 그게 현실인데, 뒤에 철없는 자가 와서 ”요번에 아 공무원 시험 됐는가 몰라. 아이그 자식 애 먹인다.“ 이런 소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그리고 지금 목사님 쭉 엎드려 있는데, 어느 철없는 집사가 와가지고 ”목사님 여기 요번에 교회 부흥 되다가 부흥 안 되죠? 그런 소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습니까? 지금 부흥이 문제가 아니고, 회비가 문제가 아닙니다....(하~ 하~ 하) 그냥 현실 그대로 엎드릴 수밖에 없죠. 이걸 어떻게 지킵니까? 자기가 주체라 하면,  단단한 주체에서 어떻게 나와요? 주체가 움푹 파여야죠. 뭐로? 면류관을 바쳤나요. 말씀이 그대로 오게 되면, 오늘 바칩니까? 안 바칩니까? 말씀이 오게 되면, 어느 순간에 이미 바쳤어. 왜? 말씀이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 좀 받쳐줘. 부탁이야. 면류관을 벗어봐. 날씨도 안 덥나 좀 벗어. 이럴 필요 없어요. 그냥 말씀이 오면, 말씀이 그대로 합니다.

물가에 있는 베드로보고 예수님이 뭐라 했어요? “ 베드로야” 오라 할 때 베드로가 물에 연습해보고 걸었습니까? “오라” 하는 명령이 가다 보니까 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중간에 와가지고“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할 때 물에 빠졌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의 위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부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씀대로 면류관을 바치게 한 모든 능력과 은혜가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고 오직 누구한테 있다? 주께서 그렇게 현실 그대로 나에게 덮쳤고 시켰습니다. 라는 고백, 그게 바로 ‘주의 증인’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괜히 걱정했습니다. 지금 살아온 것도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미래조차도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주께서 다 결정해 놓은 사항인데, 그것을 약속을 우리가 보면서도 주춤주춤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매일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움푹 파이는 그 즐거움과 감격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말씀만 담기는 주의 목격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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