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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강의-요한계시록002강-100603a
2010-06-23 21:30:52 이름 : 오용익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2강-100603a(서울하나교회, 이 근호목사)
지난 시간에 요한계시록 첫째시간 했습니다. 첫째 시간 한 것 중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중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고 그 사람을 빙 둘러쳐서 사람의 역사가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흘러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휘감고 또 하나의 역사가 돌아가고 있는데 이것은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요 나중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역사가 있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보기에는 우리 몸만 있는데 우리 몸만 있으면 안 되고 여기에 예수님의 몸이 함께 있는 겁니다. 예수님 몸이 함께 있으면 우리 눈에는 우리 몸만 보이고 우리 역사만 보이지만 함께 계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것, 이 역사, 이것을 무엇에 포함시키느냐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자기언약을 이루는데 우리의 이 철없음, 너무나 이기주의적인 것, 일방적인 내 욕심, 이것을 예수님이 이루시는 그 알파요 오메가의 완성의 재료로 사용을 하는 겁니다.
사용을 해서 우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빛나도록 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지고 증인이라 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증인 된 사람은 무엇을 아는 사람이냐 하면, 내가 훌륭하고 내가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둘러치고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름대로의 완벽한 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죠. 만약에 이 빨간 것, 예수님의 하는 이 일을 모르는 사람 같으면 이 사람은 누구 증인이냐 하면, 자기 잘남의 증인이 되겠지요.
‘내가 이렇게 잘났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합니다.’ 하고 항상 자기증인이 될 겁니다. 불교라든지 도교라든지 그쪽 종교에서는 열심히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지요.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자기를 때리고 자학하면서 신에게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렇게 때려봐야 때리는 자기 자신, 자기를 부인하려고 애써봤자 자기를 부인하는 그 자기 자신 그 자체를 또 증언하기 때문에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안 계신 것은 마찬가지인 거예요.
아무리 본인이 애를 썼고 테레사 수녀처럼 어떻게 했고 한 경직 목사처럼 고아원을 차려서 이웃을 돌보고, 그런 것을 아무리 해도 그런 것은 자기증인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거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만일에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그들은 졸지에 무엇으로 간주되느냐하면, ‘내가 그동안 채워놓은 것은 죄에 불과합니다.’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설교를 하든지 강의를 하든지 뭘 하든지 죄가 됩니다.’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이고 도 닦듯이 자기를 단련시키고 자기를 절제하고 온유하니 마니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은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가 느껴지지 않고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밖에 안보이고 그렇기에 기껏해야 자기가 용쓰고 애쓴 것만 나타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다는 것, 함께 있으니까 까만 나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빨간 알파와 오메가의 그 함께 계신 분에 의해서 빨간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곱게 둘려져 있는데 이 색깔이 무슨 색깔이죠? 빨갛지요. 빨갛다는 말은 피를 둘둘 감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여기 있으면 이 바가지에 피를 담아서 피를 뿌리는 거예요.
그게 5절에 나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해방하시고’라고 하지요. ‘그의 피로’니까 이것을 연출하자면 우리 주변에 어디에도 피가 없는 곳이 없는 거예요.
전부 알파요 오메가인 그 붉은 피가 도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이 그림을 한 문장을 말하라면 ‘인간아,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거예요. 요한계시록은 초반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하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좀 의심스럽잖아요. 아무것도 안 해도 일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입니다.
초반부터 감동이 안 먹히네요. 요한계시록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꾸 뭔가 하게 되면 이 붉은 피가 있을 자리에 뭐가 자꾸 끼어드는가하면, 이 붉은 자리에 시커먼 우리 역사가 자꾸 개입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교회 목사님 같으면 따라서 하라고 할 텐데 용기가 없어서 저는 그러지를 못할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라고 하는 겁니다.
자꾸 뭔가를 하겠다는 것은 이 피가 허전해서 더 이상 이 피만 믿다가는 낭패당할까 싶어서 내 쪽에서 꿈지럭거리고 뭔가는 해야 되겠다는 허전함 때문에 자꾸 시도하는 거예요. 하게 되면 주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훼방하고 가리게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돼요.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고 어느 정도까지 아무것도 안하느냐하면, 세상이 나를 복음 안다고 죽인다고 할지라도 저항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것을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합니다. ‘죽게 되면 그냥 곱게 죽으세요.’ 그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자기가 계시 받으려고 용쓴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안했어요. ‘이쯤하면 계시 받을 때가 된 것 같은데 왜 안 오지?’ 그런 것 안했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했는데 그냥 계시가 왔습니다.
첫 번째 팁, 들어갑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두 번째, 인간은 뭐든지 하게 되어 있다. 세 번째 그래서 또 피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래도 인간은 아무것도 안하니까 너무 허전하니까 뭔가 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 언제 그런 믿음이 분명히 오느냐 하면, 그것도 진짜 믿음이 온 사람에게만 해당되지만, 죽기 1.5초전에 ‘아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는구나.’를 아는데 우리가 죽기 1.5초전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심장마비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것인데 우리 쪽에서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기 0.5초전까지도 ‘하나님, 천당 가려면 뭘 해야 됩니까?’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기에 ‘뭐든지 하게 되어 있다.’는 이 버릇은 우리가 못 고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요한계시록이 처음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평생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이 필요한 겁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하, 이제 보니 그 뜻이구나.’라고 깨닫지요. 그것이 몇 분 안갑니다. 돌아서면 또 ‘교회에서 충성을 했습니다. 뭔가 했습니다.’한다 이 말이지요. 충성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충성해도 안 알아주니 삐져서 있는데 일주일 뒤에 요한계시록을 보니까 ‘그 때 내가 미쳤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히 내가 설쳐서 혼자 삐져가지고 날 안 알아주느니 교회에서 날 무시했느니 혼자서 소설 쓰고 혼자서 시나리오 짜서 끙끙대다가 다시 요한계시록 성경 보니까 맞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을 왜 그렇게 그때 설쳤지.’ 하고 후회하게 되지요.
그것도 몇 분 안가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게 되풀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우리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저를 아실만큼 제가 오래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저를 아십니까?’라고 이야기하실 것인데 요한계시록 5절에 보면 주께서 뭘 아시는가 하면 ‘너 같은 인간은 피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하게 주께서 아십니다.
‘너 같은 인간은 내 피가 아니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어. 네가 개척교회를 열군데 스무군 데를 해도 선교사를 나간다 해도 그것은 다 소용없다.’는 거예요. ‘내 피가 아니면 어떻게 해도 너는 해방될 수 없어.’라는 점에서 주께서는 확실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일생을 가지고 주께서는 바가지처럼 피를 뿌려서 그 안에서 우리 죄에서부터 해방되게 하시는 그 이야기로부터 요한계시록이 시작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반드시 내가 해내고야 말리라. 너희가 걱정하든 말든 너희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의 일은 결정 났다.’고 합니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적은 없습니다. 괜히 그 원칙이 안 믿어져서 혼자 끙끙 앓지 마시고 우리가 끙끙 앓는 그 순간에도 주님의 원칙은 우리의 신음소리를 안 듣고 그냥 원칙대로 밀어붙여요.
마치 어릴 때부터 수제비를 좋아합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수제비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 지지를 않습니다. 물론 지금은 연세가 많으시니 그 요리를 하시지는 못합니다. 어머니가 수제비를 할 때에 밀가루반죽을 떼어서 끓는 물에 톡톡 던져 넣습니다. 그렇게 하고 계시는데 철없는 우리 형제들은 그것도 모르고 엄마한테 떼쓰면서 용돈 달라고 하고 어디에 놀러가도 되느냐고 묻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개입을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개의치도 않는 듯이 음, 음, 하면서 그냥 수제비를 툭툭 떼어서 끓는 물에 던져 넣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왜 응답이 없습니까? 우리애가 삼수 째를 하고 있는데 대학에 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해도 음, 음, 하면서 예수의 피만 툭툭 던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되느냐 하는 것은 주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철이 없어서 안다고 했다가도 또 자기자존심 위주로 또 돌아오고 또 돌아오거든요.
주님께서는 얼마나 듬직하신지 우리가 떼쓰는데 말려들지 않고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떼시는 거예요. 우리가 뭘 모르느냐하면, 왜 우리는 자기위신과 체면도 살려달라는 식의 떼를 쓰느냐하면,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을 저는 갈수록 펼쳐서 같이 읽기가 미안스러워요.
피곤하시기 때문에 저 혼자 수고하면 될지 싶어서 그냥 저 혼자 찾습니다. 마태복음 5장 30절에 보면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29절에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은 것이 유익하리라.” 이것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미국 인디언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사향쥐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얼마나 지독한지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덫에 걸리면 기어이 자기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물어뜯어서 떼어 내고 그 덫에서 빠져나간답니다. 성질이 꼭 누구 성질 같아요. 제 성질입니다. 조금이라도 붙잡히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잘라내고 빠져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뭐라고 한 겁니까?
너한테 죄가 묻어 있거든 그것을 아예 잘라내 버릴 정도로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느냐, 그 말입니다. 독이 묻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잘라버리고 그 나머지라도 지옥 불에 안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피를 우리 주변에 줄줄 흘리는 것은 보기에 우리가 참 답답한 거예요. 우리가 사향 쥐보다 더 못한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묻어 있으면 안 되는데 안타깝고 그냥 측은하고 처량하고 애타는데, 우리보다 주님이 더 애타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하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가 이 말입니다.
답답해하는 것은 사실 누가 답답해해야 됩니까? 우리가 답답해야 되는데 우리는 죄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되어버리고 정말 이것을 사향 쥐처럼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서라도 죄를 다루는 그 세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잘라야 될 정도의 그런 심정, 그 마태복음 5장의 심정을 가지고 주께서 피를 흘리신 거예요.
그 심정인데 우리는 그 심정을 모르는 거예요.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뭐, 우리가 천사입니까? 한번 봐주소.’ 맨 날 우리는 봐달라는 거예요. ‘봐주소. 그냥 눈 한번 질끈 감아주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데 다 그럴 수 있는 문제지요.’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봐주고 싶어도 하늘에 계신 엄격하신 하나님이 안 봐줘요. 그것을 우리 예수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아버지, 이 방법 말고 혹시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제가 십자가 지는 것 말고 어떻게 내 백성이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까? 철야를 한다든지 방언을 한다든지 헌금을 교회에 가져다 바치든지 그런 방법, 뭔가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안된다고요? 그러면 내 뜻대로 안하고 주의 뜻대로 제가 드리겠습니다. 창세전에 약속 한 바 그대로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생산된 것이 ‘피’입니다. 그래서 철없는 우리는 이제는 이미 해결이 난 상태에서, 지난시간에 ‘다 이루었다.’ 했지요, 해결이 난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 그 피만이 해결점인지를 알아가는 세월이 남아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한평생이라고 합니다. 5절의 말씀처럼 ‘왜 피만이 우리 죄를 해방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남은 세월입니다.
우리의 남은 세월가운데 지금 요한계시록을 접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합니다. 이미 해결은 봤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어요. 이제 문제는 왜 피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느냐, 그 문제를 두고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써나가시는 거예요. 마치 차를 타고 가다가 충돌사고가 났어요. 그 후로는 차가 잘 안 굴러가요.
그런데 현대차 직원이 나와서 “새 차로 뽑아드리겠습니다. 이미 차 문제는 해결 봤지요?” “고맙습니다.” “아니, 그냥 가지 마시고 이 차가 어디서 어째서 고장이 났는지를 아셔야 우리가 새 차 뽑아주는 의미도 생기니까 그냥 가지마세요. 당신은 이렇게 운전을 잘못했고 차는 이렇게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다뤄야 되며….”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이미 옆에 새 차는 받아 놓고 있는 입장입니다. 이미 피로 죄용서는 받았고 남은 것은 ‘우리 죄가 뭐냐?’라는 것을 알아 가는데 요한계시록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믿는 자에게만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하나님이 자기가 자기한테 약속한 것이기에, 예수님 본인이 본인에게 다짐하면서 구름타고 오시겠다고 한 거예요.
우리가 안 믿어도 구름타고 오십니다. 괜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옵션입니다. 십자가에 그냥 세트로 따라오는 거예요. 맨 날 위 쳐다본다고 구름이 그때 모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밭을 가세요. 가시면 한 사람은 구름 태워 데려가고 한 사람은 그냥 남겨두는 겁니다. 그냥 잠을 주무세요. 자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놔두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름타고 오시는 것은 우리가 기다린다고 해서, 우리가 환영이라고 써 붙여놓고 팬클럽처럼 한다고 해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감람산에 올라가서 그런 쇼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감람산에 갈 그 시간에 사우나에 가면 됩니다. 두 분이 사우나를 하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남겨두는 거예요.
그냥 오는 거예요. 이것이 십자가에 딸린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완성되면 그 피를 근거로서 주께서 다시 오시는 겁니다. 오시고 안 오시고 왜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걱정을 늘어지게 합니까? ‘기름을 준비해야 될 텐데 기름 좀 빌려줘.’ 기름은 주유소에 가면 팔아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7절에 나옵니다.
여기 7절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했잖아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옮기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입니다. 참 쉽죠, 잉? 지방선거 투표하는 것보다 더 쉽죠. ‘구름타고 오시리라.’ 그 앞에서 우리는 할 것 뭐 있다? 아무것도 안하면 된다니까요.
구름타고 오신다고 할 때 우리 쪽에서 플래카드 준비하는 식으로 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구름타고 오시면 ‘아, 약속대로 오시는구나.’ 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오늘 한 백번은 나올지 싶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아무것도 안하셔도 됩니다. 수제비는 어머니 혼자 떼어 넣듯이 주님께서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떼를 쓰든지 안 쓰든지 관계없이 그냥 오시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오실 때에 어떻게 오시는가? 그냥 오시지 않고 7절에 보면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한다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주님 오실 때 아무것도 안하시면 우리 주변에 우는 사람이 여럿 나타납니다.
우는 사람이 없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는 사람 만들어 가면서 오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해석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해석하게 되면 자기 해석이 여기에 섞여서 그것이 문제가 돼요. 그냥 믿는 그 넉넉함, 믿는 그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성경 보면서 믿는 여유가 없느냐하면, 성경 보는 시간이 짧아서 그래요.
요한계시록을 자주 못 봐서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시면 첫 번째 ‘아무것도 하지 말라.’ 두 번째, 주님께서 수제비를 그냥 아무 소리 없이 떼어 넣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뭐든지 하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라고 뭘 하든지 하게 되어 있지요. 왜 그렇게 움직이느냐하면, 죄를 끊는 것이 아니고 타협조로 나가요.
‘하나님, 이정도 충성했으면 좀 봐주세요.’ 하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봐줬어요. 주님이 피를 이미 흘렸는데 새삼스럽게 뭘 또 봐줍니까? 차가 고장 나서 새 차 줬으면 되었지 ‘내가 운전 좀 실수해서 핸들 좀 깨뜨리더라도 봐주세요.’ 합니다. 현대차 직원이 듣고 있다가 ‘봐주기는 뭘 봐줍니까? 그걸 버리라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미 우리는 폐차라는 뜻이에요. 폐차는 시원하게 버리는 것이 맞습니다. 버려야 이것이 크게 보이는데 폐차를 안 버리고 있으니까 교회에서 자기봉사하고 행동하는 이것이 크게 보이고 그것을 좀 봐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잘라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냥 눈은 눈대로 달려 있는 채로, 오른손도 그냥 그런대로 달려 있는 채로 봉사를 좀 하면 그런대로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맨 날 타협하는 안만 자꾸 끄집어내요. 주님하고 정치할 일 있습니까? 우리가 눈 빼고 다 빼도 소용없어요. 주님께서는 양푼으로 피를 뿌려놓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5절 봅시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을 시작해 봅시다. ‘머리’라는 의미가 성경에서 무슨 뜻인가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머리라는 것은 지체에서 분리되는 것이 머리예요. 오늘 아침에 쓴 글, ‘인간속의 악마’라는 글에 그것이 약간 비췄습니다만.
짐승이 이렇게 있으면 이 짐승은 머리가 몸체에 붙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가는 목을 사이에 두고 머리와 몸체가 분리되어 있는 거예요. 머리라는 것은 몸체에서 튀어나온 몸의 일부로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어려워요. 머리는 지체와 분리된 개념입니다. 분리되었다고 하면 또 떨어졌다고 이해하기 쉬운데 아예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고 돋보이는 것, 지체하고 안 섞이도록 유난히 돋보여서 모든 가치와 의미가 거기에 다 쏠리도록 모든 자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을 두고 머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가치와 의미가 쏠렸는지 너무나 유난스러워서 거기에 달려 있는 지체의 의미는 볼 겨를도 없어요. ‘내가 어떻게 살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까요?’ 이것을 아예 볼 겨를도 없을 정도로 머리가 커야 돼요. 머리가 유난히 엄청나게 크게 드러나는 것, 그런 의미에서의 머리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쉽게,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 알아들으신다고 보고 어렵게 들어갑니다. 교차대조법이라는 것이 문학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시간과 공간으로 항상 삽니다. 어려우니까 이것을 그냥 ‘공간적한계성, 시간적한계성’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공간적 한계성이란 무슨 뜻이냐? 지금 제가 여기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동작구 원룸 2층에 사는 학생이 뭘 하는지 제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그러니까 제가 세상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이것이 인간의 지리적 공간적인 한계성이에요. 시간적한계성이라는 것은 뭐냐? 이순신 장군 열일곱 살 때 뭘 했는지 제가 압니까? 모르잖아요. 그리고 앞으로 20년 후에 태어날 어떤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할지 내가 모르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시간적인 그리고 공간적인 한계가 있는 거예요.
모르면서도 꼭 안다고 우겨요. 안다고 우길 때는 이렇게 해야 돼요. 제가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말하면서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잖아요. 누구나 끄덕이면서 동의해요. 그러면서도 ‘나는 안다, 안다.’ 할 때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나한테 의미 있을 때는 안다. 나한테 이런 의미로 다가오는 그것에 대해서 내가 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소경이라 하면 차라리 소경이 아니지만 소경이 아니고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다.’ 라는 말을 한 거예요. ‘나는 압니다. 뭘? 나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 줄 압니다.’ 그것은 네 생각이고! 그것은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나는 시간 공간속에서 이것 이것을 추려내서 그것으로 구원받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밀양>이라는 영화에 보면 전도연이라는 영화배우가 ‘십자가 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했거든요. 부흥회 가서 믿었어요. 그 연기를 멋지게 잘하지요. 그런데 자기 아들을 죽인 그 죄수가 ‘나도 예수를 믿습니다.’ 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나는 예수 안 믿는다.’ 하고 나오거든요. 그러면 교도소에 그 사형수를 면회해서 만나기 전에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하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였어요?
‘내 구원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십자가 피에 대해서 내가 안다.’는 거예요. 그것은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에게 엄청난 정신적 상처를 안겨준 그 사람이 설마 내가 믿는 예수를 같이 믿고 형제라고 해야 되는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때는 ‘내가 예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하고 장담했던 그 피아노레슨 하는 그 아줌마가 막상 나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준 그 죄수가 내가 믿는 그 머리, 머리를 같이 믿는 머리로 신봉한다 하니까 도저히 그 자리에 합세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김 추자 노래 ‘거짓말이야’가 나오지요.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머리를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예요? 진짜 알 때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내가 지옥가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천국가도 ‘주님께서 잘 하셨습니다.’ 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에요. 오늘도 초반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날 구원 안하고 내가 제일 미운 사람, 김 정일 같은 사람, 조 용기 같은 사람을 회개시켜서 천국 보낸다고 하면 박수치면서 ‘참 잘하셨습니다. 마땅합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비로소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 교회 돈 들여서 이렇게 해놓았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공사를 크게 벌이더니 5천 평짜리 예배당이 있는 교회가 들어서서 그나마 한 열댓 명 나오든 교인들이 다 그 교회로 가버렸을 때 ‘잘 하셨습니다. 주께서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그동안 그런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일으켜서 그게 바로 십자가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어야 되고 살아 있을 동안에 그런 사건들이 툭툭 우리주변에서 계속해서 터지게 하시는 겁니다. 택한 백성에게만, 택한 백성에게는 그런 사건들이 터져서 나 좋으라고 있는 십자가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창세전의 선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창세전 선택 그 자체가 존경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것을 성령 받아서 알 때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의 특징은 내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도록 은혜로 받는 것이 성도거든요. 그렇다면 성도는 공부를 많이 해야 돼요. 뭘 공부해야 되느냐, 성령 안 받아도 되는 그것을 다 알고 그것을 제쳐놔야 되거든요. 그래서 신학을 해야 돼요.
인간이 신학을 글자만 알면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의미가 되니까. 교회사에 등장한 모든 신학의 특징이 뭐냐, 자기 교회, 자기교단의 정당성을 위하여 신학이 전파가 돼요. 예수회라는 가톨릭 쪽에서는 가톨릭 신학이 죽 나오는 이유가 그 신학을 해서 루터교 사람들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천주교로 사람들을 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회가 있는 겁니다.
항상 어떤 교회가 신학을 이야기할 때 그 신학은 자기 교회가 발전하고 번창할 수 있는 노림수를 깔고 신학을 전파하는 거예요. 지금 강의가 미궁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제가 빠졌다는 것이 아니고 듣는 분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는데 이왕 빠지는 것 더 빠뜨려 봅시다.
교회는 인간이 없습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이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지 인간의 몸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하면 내 몸이 있는 이 몸 중심으로 자꾸 교회를 형성하려고 하고 규합하려고 시도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머리 부분으로 올라가버리면 여기에는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이 있습니다.
그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이 4절에 나오는 겁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여기는 인간들이 알 수 있는 시간의 내용이 아니고 새로운 시간이 여기에 있습니다. “알파요 오메가라”, 이것을 묵시라 하지요.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땅의 임금들은 계속해서 생겨요. 죽은 임금들도 많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죽 있잖아요.
많이 있지만 그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머리되시는 분은 누구라고요? The king of the King,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에서의 시간과 공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나 위주의 시간과 공간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채의 해석이 나오지만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위에 올라가게 되면 여기는 예수님 중심이 시간과 공간이 있는데 여기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완전히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이 지상에 있는 시간인식과 공간인식을 가지고 위에 있는 것을 자꾸 엮어 보려고, 맞지도 않는데 자꾸 맞춰보려고 하니까 무리가 가는 거예요. 거기서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고’가 나오는 겁니다. 제가 초반부터 수차례 이야기를 했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뭐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위에서 다 하시는 거예요. 위에서 다 하시는데 우리가 못 알아먹는 것은 우리 고집이 대단해서 그래요. 우리의 시간적인, 공간적인 고집이 대단해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우리에게 일거리를 줘야 우리가 그것을 지켜서 구원받을 텐데 시간과 공간에 일거리를 주는 그 말씀이 너무 어렵다는 말이지요.
왔다 갔다 한다는 거예요. 분명히 땅의 역사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모든 것이 다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밑에서는 괴로워죽는다고 하는데 위에서는 14만 4천이 종려나무를 흔들고 있고, 뭘 어떻게 살라는 말인지. 일곱 인으로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일곱 나팔을 불고요. 나팔을 왜 붑니까, 끝났는데. 일곱 인이 끝났잖아요. 일곱 인으로 끝났다고 했는데 다시 일곱 나팔 불고 일곱 나팔로 끝난 줄 알았는데 일곱 대접이 있어서 대체 뭘 행하려고 할 때는 요한계시록이 전혀 먹히지를 않는 겁니다. 대처를 한다든지 우리 힘으로 싸운다든지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그것은 여기 중간에 올라갈 때 뭐로 올라가지요? 피를 통해서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피를 거치지 않으면 재림이 없어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애곡한다.’는 이 말은 피를 통해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올라가기 때문에 여기서 내려올 때도 이 피를 우회해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거쳐서 오게 되어 있어요.
피를 거쳐서 오게 되면 교회는 인간이 없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일곱 교회를 설교할 때 지금까지 제가 들은 모든 설교, 모든 주석들이 ‘바른 교회하기 위해서 하라고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자.’ 이렇게 나와요. 그러나 일곱 교회 해석은 그것이 아니고 ‘교회 없다!’ 하는 거예요. 이 땅에 교회 없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교회 자체가 없어요. 아니 없어야 돼요. 왜?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 동의를 안 하는듯한 분위기입니다. 고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지금 폐차인데 폐차는 손대면 안 되지요. 다만 이래서 폐차입니다, 하는 그것을 알려줄 뿐이에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하늘에 있는 교회 입장에서.
하늘에 있는 교회 입장에서 ‘그래서 저것은 폐차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여기에 일곱 교회가 이렇게 있습니다. 성령께서 일곱 교회에 말씀을 전할 때는 일곱 교회에 필요한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에요. 요한계시록 1장부터 끝까지, 창세기 1장부터 끝까지 그 모든 말씀을 다 여기에 집어넣어요.
시간과 공간적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를 쳐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교회가 교회를 쳐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마치 기생 라합이 자기 집에 있을 때 누가 왔지요? 이스라엘의 정탐군이 방문했지요. 그 때 기생 라합이 친구했습니까? 오히려 숨겨주었지요. 그 숨겨줌의 의미란 새로움이 와버리면 옛것은 그냥 손 놔버리면 되는 거예요.
야고보서에 보면 그것이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보여준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은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하는 그것이 기생 라합의 행함이고 그 행함이 바로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뭐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에다가 자기생각을 꽂아 넣었습니까?
안했지요. 이삭에게는 섭섭하지만 ‘너는 너를 주신 분에게로 가라.’ 하고 그냥 죽여 버렸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해놓고 나오는 예가 두 개인데 기생 라합의 예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거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손 터는 행함이에요. 손 툭 툭 터는 것, 참 쉽지요. 그런데 막상 해보면 이미 보통 사람으로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기 것이 되었고 기생 라합이 살아온 그 나라인 여리고성은 어찌되었든지 간에 시간적 공간적 제한 때문에 나에게 의미를 주었던 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것이, 믿음이 왔을 때는 ‘애초부터 내 것이란 없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제가 한 번 적어볼게요. 이것이 오늘 올린 글에 보면 나옵니다. ‘어쨌든 내 것이 있다.’ 사람들의 모든 행함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요. 성경공부 이렇게 하잖아요. 나중에 끝난 뒤에 집에 가보세요. ‘내 차를 어디에 두었더라.’ 이렇게 되지요.
‘얘야, 오늘 공부 마치고 집에 늦게 도착할 것인데 숙제는 잘 하고 잠도 잘 자거라.’ 할 때 그 자제분은 누구 자제분입니까? 어쨌든 내 자식 아닙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현실적으로 세상을 봅시다. 실제적으로 다룹시다. 추상 말고 관념 말고 실제적으로 봅시다.’ 하는데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간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것은 진짜 째보면 아프면서 느낄 수 있는, 꿈이 아니고 환상이 아닌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어쨌든지 내 것’ 이것만 남아 있어요.
‘내 것과 네 것 사이의 경쟁.’ 그것 외에 다른 것을 현실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바로 인간들의 이러한 점에 대해서 성실하게 충분히 인정해주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주변의 뭘 보라? 피를 보라. 너희들의 내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누가 죽었다는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온다고 해서 하늘이 아니에요. 하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내 것을 내 것으로 충분하게 고집을 부리세요. 저는 시골교회에 12년 있었고 지금의 교회에서 10년째 목회하는데 22년 동안 헌금 이야기 한 번도 안했습니다. 돈을 좀 내야 된다는 식의 뉘앙스조차 풍기지 않았어요. 왜 안했느냐, 돈을 십 원 내든 이십 원 내든, 내 것을 드린다는 식으로 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안 담겨 있어요.
억지로 동냥을 하듯이 줄 수는 있겠지요. 내 것을 낸다는 식으로 하면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것은 없습니다.’ 하는 그 짧은 순간이 있어요. 한 5초나 6초인데 그때 바로 내버려야 돼요. 그런데 너무 천천히 하다 보면 내다가 다시 ‘내 것인데 왜 내?’ 라고 되지요.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우리교회는 헌금하는 시간이 따로 없기에 봉투에 넣어서 들어오면서 하고 들어오는데 설교 한 뒤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아까 돈을 너무 심하게 냈다.’ 하는 것이 ‘나도 참 째째하다.’ 이런 생각이 들도록 하지요.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내 것을 포기하지 말아서 자기 죄가 그대로 살아 있어야 됩니다. 자칫하면 지금 오해합니다.
은혜 받고 헌금 잘하자, 그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95살 되어서 죽을 때까지 자기 재산 포기하지 말고, 며느리와 자식을 다루기 위해서는 끝까지 재산을 지키듯이 어찌되었든 인간은 이 자기 것을 계속 쥐고 있어야 저변에 깔려 있는 피의 의미가 살아나요. 살아나면서 ‘나 같은 인간은 지금 지옥가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 피를 보고 분명히 부각이 돼야 됩니다.
‘지옥가도 마땅한데 살려주는 것은 주님이 나하고 의논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나님하고 창세전부터 의논한 결과로 일한 피를 눈앞에 드러나게 하신 주님의 선택이었고 주님의 본심이었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되거든요.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자랑을 끼워 넣으면 안돼요. 우리는 빠져야 돼요.
빠지기 위해서는 ‘이것은 어쨌든 내 것입니다.’ 하는 그 경계선, 그것을 죽을 때까지 붙잡고 있어야 되지요. 붙잡고 있다는 말은 어폐가 있어요. 이런 말은 제가 이해시켜 드리지 않아도 잘 하십니다. 어쨌든 잘해요. ‘이것은 내 것이다.’ 하는 것에서 뭐가 나오느냐, 여기서 기도도 나오고 헌금도 나오고 봉사도 나오니까 그리고 그것을 잘 아시니까, 하나님께서 내 것밖에 모르는 그 인간을 구원할 때 나중에 천국 가시거든 생명의 면류관을 눈치 없이 자기가 쓰지 마시고 그것을 얼른 벗어서 주님 발 앞에 던지세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 같은 인간이 여기 오다니요. 어? 강도도 와 있네. 어? 창녀도 와 있네.’ 다 같이 와 있고 바람피운 막달라 마리아도 거기 와 있어요. 전부 다 뭐냐, ‘당신 왜 왔어요?’ 할 때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끝까지 여러분들은 용서 받을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 일은 우리가 죄를 안지어도,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어쨌든 이것까지는 내 것입니다.’ 하는 이것은 인력으로는 포기를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짧은 시간 그것을 잊어버리지요. 포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잊어버리게 되지만 다시 정신 번쩍 차리면 ‘아하, 지금 밥할 시간이다. 빨리 가자.’ 하고 남의 집 애가 아니고 우리 애를 위해서 또 가는 거예요.
신학교수 되고 박사 되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것은 바로 죄가 된다는 그것은 고백해주면 참 좋겠어요. ‘신학박사 땄습니다.’ ‘예, 애썼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또 죄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신학박사 못 봤습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이게 바로 죄입니다.’ 하는 사람을 못 봤어요.
‘목사는 설교하는 은사지만 나는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은사 같은 은사는 없습니다. 은사는 그런 은사를 말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다 자기 것을 챙기자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쉬운 것을 했는데 쉬었다가 다음 시간 합시다.
왜? 잘 들어보세요. 일곱별을 쥐었다는 그 자체를 우리들이 깨닫게 하는 그것도 일곱 별 쥘 때 예상된 사건입니다. ‘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 일곱별을 쥔 것이 맞구나.’ 하는 것이 우리에게 사건화 되어야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아, 여섯 번째 사건의 인이 우리에게 터지는구나.’ 그런데 그 다음날 ‘이번에는 네 번째 대접에 관한 사건이 또 터졌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소를 키워보셨습니까? 사료통에서 모래시계처럼 사료가 나오잖아요. 계시록 2장 1절에서 이야기한 것이 사실은 에베소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다 쏟아지는 겁니다. 이 전체가 나올 때는 사건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 사건이 뭐냐, 피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습니다.’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미 이루었기에 이런 사건들이 들이닥치는 겁니다. ‘예수님 피가 이루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건들이 너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일곱 교회냐 하면, 일곱 교회라 하는 이것은 인간이 뭘 해도 안 해도 상관없이 이미 완성된 촛대고 이미 완성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촛대는 주님께서 성전을 거닐다가 ‘아이쿠, 촛대 하나 부러졌네.’ 이런 법은 없거든요.
촛대사이를 거니실 때는 촛대가 안정적으로 보존된다는 뜻이지 뭘 하다가 떨어뜨려서 ‘아이고, 하나 부러졌구나. 이제 여섯 개밖에 안 남았네.’ 이런 것은 없다는 말이지요. 이미 완성된 촛대의 모습으로 쥐고서 이 하나교회에 사건화 되어버리면 이 하나교회는 하나교회를 안 믿지요. 왜 하나교회를 안 믿어야 되느냐하면, 하나교회를 안 믿어야 하나교회를 다니는 나를 안 믿게 되는 겁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되느니 마느니, 나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었느니 마느니, 이런 식의 나를 절대로 안 믿게 돼요. 그리고 이 교회 사람들이 모인 것은 하나하나가 주께서 보내신 사건이지요. 어떤 사건?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개인들의 모임이에요. ‘당신은 어떤 죄를 지어서 왔습니까?’ 이렇게 해야 된다니까요.
그 기능을 머리가 해요.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머리에서 쏟아지는 완성된 것이 지체를 만들어요. 머리라는 것이 그런 기능입니다. 머리에서 쏟아져야 돼요. 이것은 찾아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지요. 그 다음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 다음에 뭡니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지요. 충만케 했다는 말은 여기에 흠이나 오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미흡한 것이 남아 있어요? 안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일곱이지요. 일곱! 일곱이라 함은 처음에 완성했을 때 ‘다 이루었느니라. 안식하셨다.’ 그 때 인간과 그 모든 것이 형상화되었지만 시간은 형상화가 안돼요. 인간이 시간을 형상화 못함으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의 창조 속에 갇힌 꼴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시간을 못 뚫고 나가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과 끝을 일곱으로 정해놓아 버렸어요.
그 완성된 것이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는 미흡함이 없습니다. 내가 좀 죄 더 지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이 취소되거나 훼방되거나 모자란다든지 그런 것이 없어요. 처음에 교회 다닐 때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 그것을 가지고 항상 십일조를 잘 내야 되겠다, 하면서 은혜 받을 생각은 안 들고 내가 십일조를 한다는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십일조를 내가 할 때 목사님이 나보고 얼마나 신앙 좋다고 할지, 그것만 신경 쓰면서 가다 보니까 길에 야바위꾼이 보이는 거예요. 해답이 다 보이면서 금방 머리가 굴러가지요. ‘십일조를 가지고 곱빼기로 돈을 따면 본전가지고 십일조 내고 나머지는 다 챙길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날 십일조 다 날렸어요.
십일조 못 내면 구원에 미흡합니까? 그때는 미흡하다고 여겼어요. 충만을 몰랐어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이 사실을,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항상 신경 쓰는 것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완벽하게 해야지.’ 자기 행함에 신경 쓰다 보니까 이 충만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내가 지금 십일조 날린 그것도 뭐다? 충만에서 나온 하나의 사건인거예요. ‘봐라, 네가 행한 것이 대단한 것이 뭐가 있다고?’ 그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에요. 실수투성이, 못난이, 항상 자기 자식밖에 모르고 돈 버는 것밖에 모르는, 그런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 자체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나오는 사건이기에 그것을 깨닫는 거예요.
만약에 마귀로부터 깨닫게 되면 ‘그래, 앞으로는 더 잘해야지.’ 그렇게 나옵니다.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미흡함을 남게 만들어요. 마귀는 우리를 벌벌 떨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요.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데 두렵게 만들어서 ‘이제는 나만 믿어야지. 이제 예수도 안 믿을 거야. 이제는 신앙 좋은 나만 믿을 거야.’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귀는 그렇게 합니다.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진짜 주께서 성령으로 준 사건이 되면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바보같이 또 내 행동을 바라보면서 미흡 했니, 모자랐느니……’ 원래부터 모자라는 인간인데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그럽니까? 큰 죄를 지었다고요? 안 그러면 큰 죄 없었습니까?
투표철만 되어 보세요. 큰 죄를 얼마나 짓는다고요. ‘이 사람 찍을까, 저 사람 찍을까? 이리 찍어도 큰 죄, 저렇게 찍어도 큰 죄, 안 해도 큰 죄.’ 월드컵 하는데 한국 팀을 응원해 보세요. 오늘 저녁에 스페인하고 하는데 해 보세요. 하나의 사건으로 매치시키는 것을 모르고 우리가 ‘한국 이겨라! 한국 이겨라!’ 하다가 만약에 져보세요.
지면 졌다고 기도가 부족했다고 탄식하고 이기면 기도 발 섰다고 좋아하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못 믿게 만들고 계속해서 자기 행함을 지향하도록 하고 자기위주로 보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마귀의 사건이지요. 그게 바로 에베소교회에 말하는 처음사랑을 잊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오늘이고 내일이고 이 요한계시록을 떠나지 마세요. 늘 보세요. 보시면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 아무것도 하지마라. 두 번째,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중심? 다 나 좋으라고 뭔가 하게 되어 있다. 세 번째, 그때마다 사건이 터져서 다시 한 번 이미 다 이루심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 사건이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늘 여러분에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왠지 우리에게는 헛소리로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 힘든데, 이렇게 궁핍한데, 주님이 우리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느냐고 짜증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그 죄 때문에 우리 주변에 피가 깔려 있다는 사실, 그 피로 말미암아,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서 천국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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