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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101007요한계시록-5강a
제 5강a
자 시간이 되었으므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4장하면서 ‘하늘이 열렸다’ 그렇게 돼있죠? 하늘이 열렸을 경우에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 것하고, 하늘이 닫혔을 경우에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거하고, 분명히 차이가 나야 하겠죠? 우선 하늘이 열리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사람들이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늘이 닫혀있다’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신을 향하여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손 놓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 사람들도 어떤 신을 찾겠습니까?
가인 같은 경우에, 하늘이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의 의사를 표했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이 땅 자체, 인간들이 그냥 태어났다. 그냥 살다 죽었다. 이런 것만 있으면 그들이 신을 안 찾을 수가 있는데, 이 땅 자체가 이미 불교에서는 ‘고해’ 성경에서는 ‘고통’ ‘고난‘ ’고충‘ 이 세상 살기가 굉장히 힘들잖아요? 세상 살기가 힘이 들고 고고학자들이 발굴에 의하면, 이렇게 조사를 해보면, 현생 인류가 나타나기 전부터 매장제도가 있었고, 지금도 미개한 지역에 가면, 사람이 죽은 조상을 묻어주는 풍습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매장을 하고, 거기다가 조상 숭배를 왜 할까요? 사람이 이렇게 평생 살다가 고생하다가 죽으니까,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땅에서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죽은 데서는 편히 쉬소서, 죽어서는 아픔도 없고 특히 사채업자들 없는 곳에 가서 편히 사소서...ㅋ 그렇게 보통 연애 인들 자살하면, 죽으면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 하늘이 닫혀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만들어 냅니다. 닫혀 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구분해내야 하느냐 하면, ‘하늘이 열린 상태에서의 교회’와,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우싸, 우싸, 인간의 고해 같은 고통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신의 복을 받아가지고 편하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세상을 잘 살 수 있느냐, 신의 전능하시다는 하나님, 자비하시다는 하나님, 도움 받아 살아보자. 하는 식으로 나오는 교회, 그 교회 차이를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 것과 닫힌 것의 차이점을 우리가 애써 찾지 않더라고,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떤 짓들을 했는가를 잘 보여주죠.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하늘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율법이 오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이 율법이라는 것은 하늘이 열린 상태가 아니라도 하늘 자체가 천장이 무너져서 가까이 오게 되면,
율법하고 신약의 성령의 차이가 뭐냐 하면, 율법은 아무리 가까이와도 우리의 마음까지는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요게 차이점 이예요. 아무리 말씀이 고상해 보이고 거룩해 보여도 그 하나님의 문자가 우리 마음까지는 안 들어와요. 제가 알기로는 0.75센티 인가...ㅋ(제가 지어낸 거고..) 하여튼 우리 마음 앞까지만 와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사람 사진을 보게 되면, 그 사람 생각나죠? 그래서 그것을 10시간 붙들고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영화보고 옛날 그때 감동과 좋았던 것을 회상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 당신 누구요?” 하고 자기 마음보고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이 말이죠.
제가 지금 하나님의 법, 문자라는 것은 마음까지는 들어오지 않고 우리 코앞, 눈앞까지는 들어온다고 제가 방금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얘기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래 그게 전부지, 교회 와서 목사님 말씀 들으면 말씀이 딱 내 앞까지만 오지, 그 담부터는 건지냐 안 건지냐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다.” 라고 생각들 겁니다. 앞까지 온 걸 내가 낼름 해가지고 내 안에 쑥 집어넣는 것은 그건 나의 몫이라 생각할 거예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내 앞까지만 오고, 내 안까지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이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다들 그러니까.
만약에 학원 강사가 영어를 가르치거나 수학을 가르칠 때, 그 학원 강사가 얼마나 용한지, 마구마구 쏘아대는 것이 우리 맘까지 들어오면, 그거 책도 필요 없고 공부할 필요 없어요. 그냥 마음을 열고 앉아 있으면, 문자가 들어와서 집에 갈 때는 벌써 수학도사, 영어도사가 되어가지고, 시험 치면, 자기가 시험을 치는 것인지 강사가 시험을 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돼야 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수준이냐 하면, 성령을 받은 수준이거든요 그런데 강남의 어느 학원도 그냥 듣기만 해도 그 사람 갖고 있는 머릿속의 지식이 내 안에 다 들어왔다. 라는 정도의 용한 영어 강사가 없으니까, 그저 우리는 들은 대로 죽자고 공부해야 되고 순종해야 되고, 수행해야 되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가려고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되고, 밤잠 안자고 정전되면 촛불 켜고 공부하다 머리카락 태우고, 이렇게 해야 겨우 10가지 알면 그중에 한 가지 남을까 이렇게 한다.
이게 바로 상식이다. 맞아요. 상식 맞아요. 그 상식의 시대가 바로 구약 시대라는 겁니다. 상식에서 출발해서 상식으로 안다면 결국 그 사람은 구약시대를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애가 만약에 문자가 안 들어가면 오죽 답답하면, 회초리로 때려서라도 공부하라고 하죠. 대학 시험도 회초리 때려가면서 공부하라고 하는데, 만약에 문자로만 머물러 있다면, 천국과 관련돼 있다면, 저는 회초리 정도가 아닙니다. 권총으로 협박해서 “이거 순종해, 안 순종해,” 죽여 버립니다. 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거든요.
문자가 안 들어오면, 저 같으면 권총 들고 순종 안 하면, 죽여 버리겠는데, 하나님께서는 권총을 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들고, “가만있어라. 내가 집어 넣어줄게. 해서”일방적으로 우리 속에 집어 넣어줘 버려요. 내가 어떻게 혼자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기도 이전에, 허락 받지도 않고 불쑥 법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요 때부터 나온 시대가 뭐냐 하면, 신약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딱 와가지고 앞에 스톱, 하고 “ 이제 이대로 살아, 이제부턴 네 결심하기 나름이야.” 하는 것이 구약이라면, 어떻게 해서 신약은 그것이 우리 앞에 스톱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로 ‘확’ 하고 밀려와 버리느냐? 무슨 이유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밀려와 버리느냐, 그 계기가 뭐냐? 그것이 제가 처음에 얘기 했듯이 뭐가 열렸다 했습니까? ‘하늘이 열렸다.’ 그럼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구멍이 났단 말인가?
하늘에 만약에 2층 집이 있는데, 2층은 하늘이고, 아래층은 땅인데, 여기 천사들이 3명 있었는데, 자기들은 위에서 밥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하늘이 푹 꺼져서 ‘웬일이니, 하고 우르륵 떨어져서 코 깨고 이런 게 하늘이 열린 것이냐, 뭔가 움푹 파여서 갑자기 여기가 함몰 되어서 쭉 내려온 것이 하늘이 열린 것이냐, 아니면 다른 식의 하늘이 열린 것이냐, 고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하늘이 열리면서 거기에 성령이 임하면서 성령이 누구한테 임하느냐 하면, 바로 요단강에 세례 받고 있는 예수님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임하게 되거든요. 근데 하늘이 열렸다고 하니까 천사 세 마리(듣는 천사 기분 나쁘겠지만)가 움푹 빠졌다든지, ‘어’ 천정공사 잘못됐어, 왜 빠져? 이런 식의 움푹 빠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누구만 왔을 때 그 말을 쓸 수 있느냐 하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을 방문했을 때만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에 이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기도원에 갈 때 그냥 가지 말고 꼬챙이 하나 길다란 거 가지고 가셔가지고, 하늘나라를 이렇게 푹푹 쑤셔가지고 이래도 안 열리면 이쪽저쪽 하늘을 푹푹 꼬챙이로 쑤시면 될 거예요. 구멍이 펑, 펑 나면 천사가 이쪽은 두 마리, 저쪽은 3마리 떨어지겠죠. 그건 하늘이 열린 것이 아니고, 하늘을 뜯는 거고..하늘을 뜯는 거예요.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늘이 열린 적이 없었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다른 말로 대체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오셨다’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믿어서 구원을 받으면,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옛날 구약 때 십계명이 니 코 앞에 있는데, 그걸 믿으라하는 것과 똑 같이 요구하는 게 돼요.
십계명 믿어봤자 쫙 땡겨 봤자 0.75센티 앞에 스톱되려면, 내 쪽에서 어떻게 조치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안에 안 들어오는 것처럼, 아무리 예수님이 하늘이 열리고 내려와 봤자, 마찬가지로 십계명 들이대는 거나 예수님 들이대는 거나 마찬가지로 내가 결정하고 내가 그 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 분은 내 안의 예수님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의 입장에서는 누가 오든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하늘이 열린 의미가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하늘이 열리나 안 열리나 똑같은 상황이 되는 거죠.
그런데 성경 마태복음 4장에 보면, “하늘이 열리니....”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그 순간 하늘로 올라간 게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내려오시어 아들아,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무슨 매개체가 등장합니다. 매개체가 뭐냐 하면, 비둘기였죠. 비둘기 특징이 뭐입니까? 비둘기 특징이 전달하는 자와 전달 받는 자가 뚜렷하죠? 비둘기가 어디 앉으면 하나님께서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모든 내용을 집약해서 바로 그것, 비둘기가 앉는 그것만을, 그걸 위해서 한 거야, 라고 분명히 뜻이 드러나죠? 성령이 비둘기같이 왔다는 것은 성령께서 지나 걔나 소나 개나 다 내리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늘이 열린 취지는 한 분을 겨냥해서 거기에 안착하는 목적으로 성령이 오셨다는 자체적인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비둘기같이 오신 거예요.
평화가 오고 그런 뜻이 아니고, 올림픽 할 때나 평화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내가 지향하는 분은 저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성령이 누구한테 임하거든 그 분이 성령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분인 줄 알라’ 요한복음 1장 33절에 보면 거기 나와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의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매개물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머리에 내렸다는 이 사실 통해서 여기서 구약 성경의 다수가 한 분으로 집약이 되고, 나중에 한 분에 의해서 다시 다수로 이어지는 이런 구원의 과정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쯤 해서 잊어버렸으니 앞의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리마인드(remind)가 돼야 좋아요. ‘하늘이 열린 상태에서의 교회’와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의 교회‘의 차이점을 모르면, 그 사람은 아직 성도라고 보기 곤란하다고 그랬죠? 하늘이 열렸다고 좋아하지 말고 우리는 뭐부터 하자 했습니까?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신을 신봉 했는가를 보자 했죠? 그래서 제가 무슨 예를 들었죠? 여러 다수의 사람을 집어넣고 그 다수의 사람이 살면서 인생에서 뭘 느꼈죠? 고통과 고충을 느꼈죠? 그리고 조상을 숭배한다 했죠? 죽어서 사람은 편히 쉬고 싶고 영원히 살고 싶죠? 그때는 뭘 찾습니까? 신을 찾잖아요? “신이시여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죽어서는 좋은 데 가게 해 달라고 하겠죠?
이러한 닫힌 상태에서 제사한 사람이 누구라 했습니까? 가인이라 했죠. 여러분이 머리 좋은 줄은 압니다마는 사람인지라 다 지나가면 이런 중요한 가치를 다 놓쳐 버려요. 왜 놓치느냐 하면, 분명히 하늘이 닫힌 상태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담에 이게 아니고 ’하늘이 열린 상태입니다‘라는 말이 들어오게 되면, 분명히 닫힌 상태라고 했는데, 이게 우르륵 같이 쫓아가요. 분명히 내가 끊었는데,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르륵 합세하는 거예요. 가짜들이 여기 설치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의 열린 교회의 중심은 누구라 했습니까? 아무리 다수가 있더라도 다수를 부정해 버리고, 뭐로 초점된다? 성령께서는 비둘기로? 한 분에게 초점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걸 분명히 그런데도 그럴 줄 알고 열리면 닫히는 것으로 구분했는데, 갑자기 구분했던 벽돌담 확 헐어버리고 “야, 멋있다“ 해가지고 하늘이 닫힌 상태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열린 교회까지 와르륵 들이대는 경우를 제가 지금까지 평생 보고 있습니다. 평생 보고 있어요.
어느 교회 설교를 듣고 교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게 되면, 저게 닫혀 있는 모습일까 열려 있는 모습일까 그거부터 먼저 살펴요. 대부분 닫혀 있는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욕구, 그것들이 그대로 다 나옵니다. 여러분, 금요일 되면 이슬람교 교인들이 우리나라의 3D업종(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의 험난한 일을 하면서도, ‘땡’ 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시간이 되면, 서쪽을 향하여 자기들의 성전을 향하여 절하죠?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미쳤잖아요? 왜 그런 짓 하는데?
요번에 추석 때 우리나라로 시집 온 외국 며느리가 좋은 이야기 했어요. “한국사람 참 이상하다. 왜 죽은 사람한테 절하느냐?” 요새는 무서워서 교회에서도 못하는 이야기를 그 사람이 솔직하게 해버렸어요. 죽은 사람한테 절하니 이거 미친 거 아니야, 미친 거. 사람이 어딨다고 귀신이 어딨다고 절하느냐 말이죠. 우리가 평소에 ‘슛, 슛, 하는 이야기를, 이근호 벌거벗은 것을 폭로하는 순진한 아이처럼...죽은 사람한테 왜 절하느냐 말이죠. 그거나 금요일에 이슬람교 인들이 시간 맞춰 절하는 거나 이게 다 닫혀 있는 겁니다.
상상을 하는 거예요. 하도 닫혀 있으니까. 내 쪽에서 다가가지 않으면 저쪽에서 꿈쩍도 안 할 거니까 어떻게 귀염을 떨어야죠. 재롱을 부려야지 그래야 하늘나라 법정 회의에서 낼 거 아닙니까? 재롱을 떠는 거예요. ‘나 이뻐?’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쁘긴 뭘 이뻐,
우리는 다수에 해당됩니다. 이 점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왜? 우리는 다수이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를 찾아오면 저쪽은 뭐가 돼요? 저쪽은 무시당하잖아요. 성령께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똑바로 우리한테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우리한테 찾아오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비둘기에서 지목합니다. 한 분에게 찾아갑니다. 예수님께 찾아가죠. 예수님께 찾아가면 예수님은 바로 다수가 부정되고 한 분에게 들어오죠. 여기서 무슨 차이를 두느냐 하면, 왜 이 한 분과 이 많은 다수는 왜 아니어야 하고 왜 한 분 이어야 하는 이 비교, 이 비교가 바로 요한복음 4장~ 5장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간단하죠?
다수는 아니고 한 분이다. 그럼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분들은, 그 한 분되신 예수님한테 오시더라도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하실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는데, 이렇게 다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만 세례 받을 때 성령을 주셨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은근히 노리는 거예요.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지롱~’ 이렇게 기다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기다리는 것이 바로 ‘닫힌 교회’ 또 특징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온 것은, 너 기다릴 것도 없고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니가 무슨 주제? 니가 무슨 자격으로 은근히 성령오기를 고대하냐 말이죠. ‘아이고 뻔뻔스러워라, 낮 짝도 두껍지, 니가 뭐했다고 오느냐 말이죠. “예수님한테는 왜 성령이 옵니까?”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도 이미 흠이 없기로 소문이 난분이거든요.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사시는 분입니다. 뭐 하늘나라 살다가 땅에 왔다고 만만히 여기지 맙시다. 땅에서 친구라, 맞먹자, 하면 안 돼요. 하늘에서 사시던 흠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자’ 가 예수님 이예요. 독생자예요. 이스마엘이 살아 있을 때 이삭이 있었잖아요? 그렇죠? 같이 있으니까 편애했죠. 이스마엘이 “ 아, 이삭이 하나님의 자녀이면, 나는 옆에서 더불어 구원받을 거야” 라고 이스마엘이 생각을 했겠습니까? 생각 안했겠죠? “어이, 나도 동생 좀 덕 보자, 이삭아, 나중에 형 구박하지 말고, 니 하나님께 구원 받을 때 알지? 내가 한 때 구슬 공짜로 5개 빌려줬잖아, 알지? 그러니까 나 잊지마, 구원해” 라고 이스마엘이 생각을 했겠냐 말이죠. 생각을 하질 않습니다.
인간은 독점적입니다. 독점적. 전부 내 것이 돼야 되요.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아, 조금만 참아라, 동생의 구원이 이삭에게 주어지면 이삭이 너를 구원한단다.” 이러면 이스마엘이 풀려가지고 “그렇지, 하나님이 날 버릴 리가 있겠어?” 이래 나오겠죠. 그런데 그렇습니까? 아니죠. 왜? 내가 있는데, 이삭이 태어나야 돼? 한다 말이죠.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겸손한 척하면, “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왜? 예수님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나에게 굴러들어오니까 그때까지만 참는다. 어차피 주님의 복음은 내 것이 될 거니까 그래서 주님과 좋게 지내야지.” 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오신 취지를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 이예요.
이스마엘이 있는데 이삭이 왔다는 말은 “너는 내 자식 아니야 ”라는 뜻입니다. 이거는 제거해 버리는 거예요. ‘둘이 사이좋게’ 이런 거는 없습니다. 이건 야곱과 에서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만 택하실 때, “에서야 내가 동생 좋아한다고 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나중에 동생한테 잘해주면, 너한테 복이 와. 그러니까 너무 설치지 말고 동생은 택하고 너는 안 택했으니까 순서상 그런데 잘 하면 복 받아” 이런 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내줘도, 항상 두 종류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두 종류는 사이좋게 화해하는 법은 없어요. 에서와 야곱은 모친의 태중부터 싸웠던 잡니다. 싸웠어요. 싸운다는 것은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이냐를 보류된 상태로 나온 거예요. 엄마 뱃속에서 싸우다가 2라운드로 뛴 것이 나와서 싸운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의 싸움은 인간적인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성격이 더러워서 싸웠으면 에서와 야곱은 이렇게 성격 더러워서 싸웠지만, ‘우리는 에서와 야곱이 아니니 사이좋게 지내자.’ 그치? 이렇게 될 거예요. 아니에요.
에서와 야곱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겁니다. 대표하는데 서로 싸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자녀와 약속이 아닌 자녀는 타협은 있을 수 없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목사님, 그래도 구약 성경은 많은 사람이 구원 받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얘기하시는데, 다윗도 구원받고, 예레미야도 구원받고, 아브라함도 구원받고, 그 당시 남은 7천명도 있는데, 그런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우리가 애써 무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는데, 남은 7천명 구원 받은 거요, 자기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은 거예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은 것 아닙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믿게 하신 것을 그들이 믿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차후적으로 알고 믿게 된 겁니다. ”아, 예수님 메시야 맞아“, 이렇게 알아 모신 게 아니에요. 구약의 아담 구원도 마찬가지고 노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해야지, 창세기를 중심으로 해가지고 자꾸 밑으로 내리막길로 가면 안 됩니다. 구약은 항상 위로 올라가야 돼요.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 되는 겁니다. 한국 교회 실수 하는 것, 근본적으로 실수하는 것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 자체인데, 예수님께서 그런 사고방식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왔다는 말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해서 예수님께 온 거예요. 우리는 구원 받을 필요가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안 해줘요. 제 말 굉장히 쉽죠? 앞뒤가 맞아요.제 논리가 틀린 게 맞아요. 구원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안 해주는데, 단지 예수님 때문에 구원했다면,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초점이 예수님 개입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다른 조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전에 가졌던 거,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고 말거야’ 라고 생각했던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구원 받을 수 없는데 왠 은혜지? 왠 떡이지? 라는 식으로 사고방식이 바뀌어져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강의를 했죠. 홍수가 나서 물에 떠내려 갈 때, “살려주세요.” 누구나 간단해요. 거기서 무슨 긴 이야기가 필요 없어요. 나는 뭐 어떤 사람이고 어디 태생이고 학교 어디 나왔는데 살려주세요. 앞에 각설이 필요 없어요. 영어로는 “Help me, 우리말로는 ”살려주세요“ 짧은 다섯 자안에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살려주시면, 그저 고맙겠습니다. 는 내용이 포함될 수 있고, 살려주시면, 일단은 고맙지만, 내 보따리까지도 난 챙겨야 되겠습니다. 라는 내용도 포함될 수 있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다급해서 ”살려주세요“ 안에 내 보따리 챙겨야겠다는, 보따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질질질 끌어내서 살려주니까, 감사합니다만, 내 보따리 지금 어딨습니까? 하고 묻는단 말이죠.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마찬가지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주님 은혜 아니면 못 산다 할 때, 역시 두 가지가 다 포함돼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오죠. 이제 구원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구원한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 하심이라, 라는 것이 포함돼서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 라는 말도 성립될 수가 있고, 구원은 내 문제가 아니고, 이건 내가 할 게 아니고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일단 구원되고 난 후에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내가 하겠습니다. 라고 나올 수 있는 생각이 포함된 것인지, 그 사람을 끄집어내 봐야 아는 거예요.
고기를 잡아 봐야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일단 고기를 끄집어 내놓고, 바닷가에 어부가 휘파람 불면서 노래 부르면서 갈라내는 겁니다. ‘어허, 이거 아니었구나, 맞구나~ 하고 갈라내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입니까? 라고 묻는 게 질문이 잘못 되었어요.
세상에, 당신을 예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믿습니까? 물으면, 백이면백 “저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마음으로 믿습니다.” 라고 다 이야기 하지, “저는 두 번 다시 예수 보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 없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언어는 핑계의 수단이다. 기도할 때 입만 벌렸다하면, 그게 핑계의 수단, 이래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어쩔 수 없었다. 라고 핑계의 수단, 언어라는 것은 핑계의 수단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남의 언어를 따라 한다고 같은 믿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흉내 낸다고 성경 말씀을 달달 외우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요양병원 가면 많은 환자들이 성경 쓴다고 바빠요. 성경 할머니들이 왜 씁니까? 믿음 좋아라고? 아닙니다. 침해가 빨리 진전되지 말라고 성경 글자 쓰고 있습니다. 은혜 받았겠습니까? 받을 리가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의 교회와 열린 상태의 교회는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열린 상태의 교회는 무엇에 주목 하느냐 하면, 성령께서 하늘이 열리면서 골고루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에게 주었다는 데 여기에 하늘의 열림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순절은 뒷전이에요. 나중 이야기예요.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온 것은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처음입니다.
다수는 부정되고(어디로 간다고요?) 하나로 모이죠. 하나에서 다수로 가지 않습니다. 이것도 틀린 말이에요. 하나에서 다수로 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오신 성령을 줬다고 해서 다수가 되는 게 아닙니다. 다수 얘기는 잊으세요. 두 번 다시 다수에게 주어지는 방법 없습니다.
‘하나의 반복’입니다. 하나의 반복과 다수가 큰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예수님 한 분에게 주는 것을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겁니다. 이렇게 삼다수 물이 100개 된다면, ‘잡수세요, ‘잡수세요, 하면서 나누어 주는 거예요. 이건 한 사람이 나누어 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의 반복이라는 것은, “주세요.” 하면 안 줍니다. 안 주고 그 사람 속에 칼 가지고 배를 째고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자기가 들어 앉아 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한테 뭘 받기를 원했는데, 받기는커녕 예수님한테 자기가 망가지죠. 자신의 모든 것이 다 찢어져 버리죠. 그러기 전에는 주도권을 쥐고 자기가 주인이었는데,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니까 주인이 바뀌어버렸어요.
이제는 “주세요.”라는 말이 부끄러워요. 자기 게 있으면 주셔야 되는데, 자기 게 없는데 받아서 어디다 적재해 놓으려고?? 어디 창고 지어 놓을 겁니까?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누구 게 되겠는가?” 자기 게 여기 다수에서 하나로 갈 때 그냥 가지 않습니다. 다 이유 있습니다. 왜 다수를 부정하고 예수님 한 분에게만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오느냐 말이죠. 비둘기처럼 온다는 말은 한 사람을 지목해서 목적성을 분명히 해서 비둘기같이 온다 했죠? 올 때 다수가 그냥 다수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왜 다수는 안 되고 왜 하나냐 말이죠. 그렇게 구약 성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줬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한 분에게만 집착해서 줘 버리느냐 말이죠.
다수가 결국은 뭐였습니까? 다수는 뭐가 되냐 하면, 실패자, 다른 말로 죄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 말씀 성취자의 자격으로서는 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사람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씀을 온전하게 다 이룰 수 있느냐 거기에 여부가 달렸습니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 이예요.
어제 수요 설교 했죠? 선지자의 기능이 뭐라 했습니까? 착한 사람이 아니고 죄를 지으면 요렇게 망합니다. 라는 것을 남보다 앞장서서 보여주는 사람, 그래서 피부가 연성피부라 했죠? 다른 사람은 그냥 넘어가는 것도 선지자는 예리하게 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선지자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뭐랍니까?
“너희들은 세상 권력을 추구하지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대속 물로 주려 했다.” 해서 그 대속 물과 더불어서 제자들이 자기가 상상도 못한 세상의 높고자 하는 것조차도 그게 예수님께서 대속해야만 하는 죄의 일종인 것을 깨닫게 하죠. 이 세상의 높고자 하는 것,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도, 그것도 인간의 타고난 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다행스럽죠. 왜? 그렇게 이야기 해주는 예수님과 맞닥뜨렸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예수님과 안 맞닥뜨렸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그런 정상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맞닥뜨렸기 때문에, 아, 다수가 다 그렇게 하니까 되는 줄 알고, 죄가 아닌 줄 알고, 그냥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게 믿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딱 오니까 바로 섬김을 받고자 하는 시도조차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것을 아니까 얼마나 예수님이 고맙습니까?
선지자의 역할은 남들이 미처 모르는 죄의 내막을 많이 알고 있는 점에서 축복된 사람입니다. ‘디카로스’라는 신의 아들이 신화에 나와요. 파라핀을 아버지가 날개에 대충 발라주면서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말도 안 듣고 태양 가까이 갔다가 다 녹아서 날개사 다 떨어져서 물에 빠졌다는 신화가 있어요.
바로 선지자는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그 예수그리스도의 엄중한 거룩,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것처럼, 그 엄중한 거룩, 남들은 관심도 없는 거룩의 본래 원천지에 접근하는 역할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어떤 선지자는 자기 친구에게 ‘날 때려라’ 했는데 안 때렸다고 안 때린 선지자가 갑자기 사자에게 물려 죽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특이성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특이한 분이예요. 상상도 안 될 분이예요. 우리가 이해 못 할 분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찬찬히 하겠습니다. 다수에서 하나로 바뀌면서 다수는 부정당합니다. 어떤 누구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구원합니다. 예수님만 구원하시면서 예수님이 찾아갔을 때, 시간적으로는 예수님이 후대지만, 세례요한은 뭐라 했습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이 말도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그걸 제가 여러 군데서 책에서 설명을 나름대로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설명을 더해야 될 것 같아요.
‘예수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이 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다수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생각이 어디에 갇혀 있다. 라는 거예요? 기껏 생각해 봐야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갇혀 있는 시간의 틀 속에서 기껏 생각해 낸 세상관이고, 그 세상 관을 가지고 뭘 시도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해석한 자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잖아요.
아무리 성경을 은혜롭고 고상하고 경건하게 해석해도 전부 다 그게 죕니다. 죄가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까? 저에게 묻지 마세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도 죄에요. 성경 해석을 제대로 해서 그것이 의롭다 판정받아서 그 판정받은 의를 근거로 구원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 허용한 적은 없습니다.
성경 해석은 안 되도 구원이 되더라는 것이 유일한 성경 해석 이예요. 설거지 하다 구원받은 사람 그 사람 신학교 나왔어요? 아니죠? 가정주부가 무슨 신학? 몰라, 통신했는가? 아니면 인터넷? 시골에서 감자 캐는 할머니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면, 그 사람 신학교 중퇴했던가요? 아니면, 성경공부 참석했나요? 아닙니다. 그러니까
할머니, 당신은 성경 신학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하면, 성령 받은 할머니가 하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구원했어, 예수님이 구원 했어” “아니, 어디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합니까? 그게 어디 나옵니까?” “성경에 나오던데?” “아니, 박사들도 교수들도 성경 봐도 그걸 믿지 않는데? 왜 할머니 믿게 되었어요?” “성경에 보니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선물로 믿게 되어 있대.” 라고 하는 거예요. “할머니 그걸 이해하십니까?” “그걸 왜 이해해야 돼? 이해한다는 것은 모를 때 이해하는 거고, 알 때는 이해하면 안 되고, 느낄 뿐이야.”
알 때는, “당신은 조용필을 왜 좋아합니까?” 조용필 키가 몇 센티미터 연구한 게 아니에요. 그건 좋아하고 난 뒤의 문제고, “내가 좋아하겠다는 데 니가 왜 말이 많아?” “당신은 왜 나훈아 안 좋아하고 조용필을 좋아해?” “내 맘이다, 왜?”
그래서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그 맘속에 누가 들었다? 그 맘속에...? 그 맘속에 예수님이 들어오니까 예수님이 좋아진 거예요. 그것을 사랑의 힘이라고 합니다. 성경 요한일서에서. 그냥 들어와 버렸으니까 이제는 그냥 할머니 혼자 촌에서 여름밤에 덮다고 있는데, 도둑놈이 들어온 거예요. 들어와서 물건 다 가져간 거예요. 할머니가 뭐가 이쁘다고 보쌈 하여 들고 간 거예요.ㅎㅎ
그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는 딴 게 아니고, 보쌈 당했다. 허락도 안 받고 도둑놈이 들어와 가지고 보쌈 당했다. 그동안 “이 집에서 나가면 안돼,” 라고 알 수 없는 관념적인 사상들이 지배했는데, 그 관념 사상들(마귀)을 꽁꽁 묶고 주님이 납치해 갔다. 보쌈 당했어. 보쌈 빼버리면, 당했다, 그냥 당한거야. 주님한테 당해버린 거야.
참고로 성경 한 귀절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13장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아니 출애굽해서 건져주면, 볼일 봤으면 하나님 그냥 가셔야지, 출애굽 난 뒤에 이제는 뭐라고 합니까? “네 큰 아들 살았나?” “살았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뭘로 보답해야 할지...” “보답이고 뭐고 니 자식은 이래나 저래나 죽었다.” “왜요?” “그 살아있는 자식 있잖아?” “예” “내 자식이거든, 그 자식 니 자식 아니거든,” “누구 것입니까?” 내꺼야” 도둑놈이 따로 없네...ㅎ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하나님이 계획하고 다시 내 것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고 도로 내 것이 내 것이 되는 법은 역사상에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누구 것이라? 이제는 주님의 것이라. 성경에 있잖아요.(고전6:20, 고전7:23) 주님의 것이라면, 남은 우리의 인생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죠. 내 것이 아니죠. 내 것이 아니면, 우리는 걱정하고 염려할 것을 내가 지어 내면 안 되죠. 주님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거리가 돼야지, 내 걱정거리를 가지고 주님 앞에 응답해 달라고 윽박지르면, 주님께서는 이걸(주먹)로 윽박지르죠.
기껏 기도해 봐야 주님께서는 말씀 하나밖에 없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런 아주 무책임하게 보이는 그런 이야기를 할 뿐이에요. 성경대로만 나올 뿐이에요.
요한계시록 5장의 내용은 굉장히 간단해요. 아까 일찍 오신 분은 읽어보라 했지만, 요한계시록 5장의 모든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의 집중‘ ’하나에 집중‘ 하는 그 그림, 그 구조가 천국입니다. 하나의 집중이 뭐로 되냐 하면, 어린 양이라 했죠? 어린 양이라는 것의 특징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분이 이름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내용입니다.
왜 이름이 없어야 하느냐하면, 이름이 있는 세계는 이름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다수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무한으로 갈 때는 무한의 세계죠. 다수의 세계, 무한의 세계에서 이게 하나로 나아가는 모든 것이 이단입니다. 다수의 세계에서 이뤄 나가는 것이 다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다수의 세계에서 하나를 이루려면, 다수가 갖고 있는 공통점을 끄집어내야 돼요.
공통점을 끄집어내면, 1,2,3,4,5, 다섯 명이 있으면 다섯 명의 공통점을 끄집어낸다 말이죠. 그냥 다들 갔는데, 다섯 명이 우연히 모였다. 물었어요.“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별로 공통점이 없어요. 그런데, 실례하지만, 초등학교? ”대구 칠성 초등학교, “어, 나도 칠성학교, 옆에는 몇 회?” “나는 26회” “나는 36회” 보니까 여기 다섯 명이 칠성 초등학교 동문이에요. 그럼 여기 다섯 명의 공통점은 칠성 초등학교 하는 새로운 관점이 있죠. 그런데 다섯 명이 칠성 초등학교가 동창회한다고 있는데, 옆에 또 다섯 명이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이, “오, 반갑다 친구야, 하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 여기는 광주 출신이 대구에 온 거예요. 전라도 광주출신들의 모임이죠. 관념이 두 개예요. 또 다수가 돼요. 어떻게 이걸 묶던지 어떻게 집합을 해도 그 집합 자체가 무한대가 돼 가지고 하나로 모을 수가 없습니다. 답은 간단해요. 이걸 다 죽이면 돼요.
이름을 다 죽여 버리는데, 누가 죽이는가? 하나님께서 다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죽인다는 뜻으로, 이름을 없앤다는 뜻으로 죽이시는 분의 이름은 이름이 없습니다. 지상에서 이름이 없어요. 그냥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특징은 뭐를 의미합니까? 이 땅에서 뭐했다? ’죽임을 당했다.‘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그 보좌의 이름이 뭐냐 하면, 어린양 이예요. 어린양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어요. 어떤 어린양?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대목이 요한계시록에 여러 군데 나오죠? (5:8, 12,13)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시간이 빨리지나가서 정리 못하겠네요. 시간이 지나서 다음 시간에...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