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5강

아빠와 함께 2015. 10. 9. 09:41

2011-01-13 23:29:47 조회 : 2388         
10월 7일 요한계시록 5강 (요한계시록 5장) 이름 : 관리자 (IP:112.165.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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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101007요한계시록-5강a

제 5강a


자 시간이 되었으므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4장하면서 ‘하늘이 열렸다’ 그렇게 돼있죠? 하늘이 열렸을 경우에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 것하고, 하늘이 닫혔을 경우에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거하고, 분명히 차이가 나야 하겠죠? 우선 하늘이 열리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사람들이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늘이 닫혀있다’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신을 향하여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손 놓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 사람들도 어떤 신을 찾겠습니까?

가인 같은 경우에, 하늘이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의 의사를 표했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이 땅 자체, 인간들이 그냥 태어났다. 그냥 살다 죽었다. 이런 것만 있으면 그들이 신을 안 찾을 수가 있는데, 이 땅 자체가 이미 불교에서는 ‘고해’ 성경에서는 ‘고통’ ‘고난‘ ’고충‘ 이 세상 살기가 굉장히 힘들잖아요? 세상 살기가 힘이 들고 고고학자들이 발굴에 의하면, 이렇게 조사를 해보면, 현생 인류가 나타나기 전부터 매장제도가 있었고, 지금도 미개한 지역에 가면, 사람이 죽은 조상을 묻어주는 풍습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매장을 하고, 거기다가 조상 숭배를 왜 할까요? 사람이 이렇게 평생 살다가 고생하다가 죽으니까,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땅에서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죽은 데서는 편히 쉬소서, 죽어서는 아픔도 없고 특히 사채업자들 없는 곳에 가서 편히 사소서...ㅋ 그렇게 보통 연애 인들 자살하면, 죽으면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 하늘이 닫혀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만들어 냅니다. 닫혀 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구분해내야 하느냐 하면, ‘하늘이 열린 상태에서의 교회’와,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우싸, 우싸, 인간의 고해 같은 고통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신의 복을 받아가지고 편하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세상을 잘 살 수 있느냐, 신의 전능하시다는 하나님, 자비하시다는 하나님, 도움 받아 살아보자. 하는 식으로 나오는 교회, 그 교회 차이를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 것과 닫힌 것의 차이점을 우리가 애써 찾지 않더라고,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떤 짓들을 했는가를 잘 보여주죠. 하늘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하늘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율법이 오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이 율법이라는 것은 하늘이 열린 상태가 아니라도 하늘 자체가 천장이 무너져서 가까이 오게 되면,

율법하고 신약의 성령의 차이가 뭐냐 하면, 율법은 아무리 가까이와도 우리의 마음까지는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요게 차이점 이예요. 아무리 말씀이 고상해 보이고 거룩해 보여도 그 하나님의 문자가 우리 마음까지는 안 들어와요. 제가 알기로는 0.75센티 인가...ㅋ(제가 지어낸 거고..) 하여튼 우리 마음 앞까지만 와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사람 사진을 보게 되면, 그 사람 생각나죠? 그래서 그것을 10시간 붙들고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영화보고 옛날 그때 감동과 좋았던 것을 회상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 당신 누구요?” 하고 자기 마음보고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이 말이죠.

제가 지금 하나님의 법, 문자라는 것은 마음까지는 들어오지 않고 우리 코앞, 눈앞까지는 들어온다고 제가 방금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얘기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래 그게 전부지, 교회 와서 목사님 말씀 들으면 말씀이 딱 내 앞까지만 오지, 그 담부터는 건지냐 안 건지냐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다.” 라고 생각들 겁니다. 앞까지 온 걸 내가 낼름 해가지고 내 안에 쑥 집어넣는 것은 그건 나의 몫이라 생각할 거예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내 앞까지만 오고, 내 안까지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이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다들 그러니까.

만약에 학원 강사가 영어를 가르치거나 수학을 가르칠 때, 그 학원 강사가 얼마나 용한지, 마구마구 쏘아대는 것이 우리 맘까지 들어오면, 그거 책도 필요 없고 공부할 필요 없어요. 그냥 마음을 열고 앉아 있으면, 문자가 들어와서 집에 갈 때는 벌써 수학도사, 영어도사가 되어가지고, 시험 치면, 자기가 시험을 치는 것인지 강사가 시험을 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돼야 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수준이냐 하면, 성령을 받은 수준이거든요 그런데 강남의 어느 학원도 그냥 듣기만 해도 그 사람 갖고 있는 머릿속의 지식이 내 안에 다 들어왔다. 라는 정도의 용한 영어 강사가 없으니까, 그저 우리는 들은 대로 죽자고 공부해야 되고 순종해야 되고, 수행해야 되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가려고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되고, 밤잠 안자고 정전되면 촛불 켜고 공부하다 머리카락 태우고, 이렇게 해야 겨우 10가지 알면 그중에 한 가지 남을까 이렇게 한다.

이게 바로 상식이다. 맞아요. 상식 맞아요. 그 상식의 시대가 바로 구약 시대라는 겁니다. 상식에서 출발해서 상식으로 안다면 결국 그 사람은 구약시대를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애가 만약에 문자가 안 들어가면 오죽 답답하면, 회초리로 때려서라도 공부하라고 하죠. 대학 시험도 회초리 때려가면서 공부하라고 하는데, 만약에 문자로만 머물러 있다면, 천국과 관련돼 있다면, 저는 회초리 정도가 아닙니다. 권총으로 협박해서 “이거 순종해, 안 순종해,” 죽여 버립니다. 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거든요.

문자가 안 들어오면, 저 같으면 권총 들고 순종 안 하면, 죽여 버리겠는데, 하나님께서는 권총을 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들고, “가만있어라. 내가 집어 넣어줄게. 해서”일방적으로 우리 속에 집어 넣어줘 버려요. 내가 어떻게 혼자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기도 이전에, 허락 받지도 않고 불쑥 법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요 때부터 나온 시대가 뭐냐 하면, 신약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딱 와가지고 앞에 스톱, 하고 “ 이제 이대로 살아, 이제부턴 네 결심하기 나름이야.” 하는 것이 구약이라면, 어떻게 해서 신약은 그것이 우리 앞에 스톱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로 ‘확’ 하고 밀려와 버리느냐? 무슨 이유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밀려와 버리느냐, 그 계기가 뭐냐? 그것이 제가 처음에 얘기 했듯이 뭐가 열렸다 했습니까? ‘하늘이 열렸다.’ 그럼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구멍이 났단 말인가?

하늘에 만약에 2층 집이 있는데, 2층은 하늘이고, 아래층은 땅인데, 여기 천사들이 3명 있었는데, 자기들은 위에서 밥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하늘이 푹 꺼져서 ‘웬일이니, 하고 우르륵 떨어져서 코 깨고 이런 게 하늘이 열린 것이냐, 뭔가 움푹 파여서 갑자기 여기가 함몰 되어서 쭉 내려온 것이 하늘이 열린 것이냐, 아니면 다른 식의 하늘이 열린 것이냐, 고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하늘이 열리면서 거기에 성령이 임하면서 성령이 누구한테 임하느냐 하면, 바로 요단강에 세례 받고 있는 예수님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임하게 되거든요. 근데 하늘이 열렸다고 하니까 천사 세 마리(듣는 천사 기분 나쁘겠지만)가 움푹 빠졌다든지, ‘어’ 천정공사 잘못됐어, 왜 빠져? 이런 식의 움푹 빠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누구만 왔을 때 그 말을 쓸 수 있느냐 하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을 방문했을 때만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에 이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기도원에 갈 때 그냥 가지 말고 꼬챙이 하나 길다란 거 가지고 가셔가지고, 하늘나라를 이렇게 푹푹 쑤셔가지고 이래도 안 열리면 이쪽저쪽 하늘을 푹푹 꼬챙이로 쑤시면 될 거예요. 구멍이 펑, 펑 나면 천사가 이쪽은 두 마리, 저쪽은 3마리 떨어지겠죠. 그건 하늘이 열린 것이 아니고, 하늘을 뜯는 거고..하늘을 뜯는 거예요.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늘이 열린 적이 없었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을 다른 말로 대체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오셨다’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믿어서 구원을 받으면,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옛날 구약 때 십계명이 니 코 앞에 있는데, 그걸 믿으라하는 것과 똑 같이 요구하는 게 돼요.

십계명 믿어봤자 쫙 땡겨 봤자 0.75센티 앞에 스톱되려면, 내 쪽에서 어떻게 조치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안에 안 들어오는 것처럼, 아무리 예수님이 하늘이 열리고 내려와 봤자, 마찬가지로 십계명 들이대는 거나 예수님 들이대는 거나 마찬가지로 내가 결정하고 내가 그 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 분은 내 안의 예수님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의 입장에서는 누가 오든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하늘이 열린 의미가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하늘이 열리나 안 열리나 똑같은 상황이 되는 거죠.

그런데 성경 마태복음 4장에 보면, “하늘이 열리니....”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그 순간 하늘로 올라간 게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내려오시어 아들아,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무슨 매개체가 등장합니다. 매개체가 뭐냐 하면, 비둘기였죠. 비둘기 특징이 뭐입니까? 비둘기 특징이 전달하는 자와 전달 받는 자가 뚜렷하죠? 비둘기가 어디 앉으면 하나님께서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모든 내용을 집약해서 바로 그것, 비둘기가 앉는 그것만을, 그걸 위해서 한 거야, 라고 분명히 뜻이 드러나죠? 성령이 비둘기같이 왔다는 것은 성령께서 지나 걔나 소나 개나 다 내리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늘이 열린 취지는 한 분을 겨냥해서 거기에 안착하는 목적으로 성령이 오셨다는 자체적인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비둘기같이 오신 거예요.

평화가 오고 그런 뜻이 아니고, 올림픽 할 때나 평화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내가 지향하는 분은 저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성령이 누구한테 임하거든 그 분이 성령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분인 줄 알라’ 요한복음 1장 33절에 보면 거기 나와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의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매개물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머리에 내렸다는 이 사실 통해서 여기서 구약 성경의 다수가 한 분으로 집약이 되고, 나중에 한 분에 의해서 다시 다수로 이어지는 이런 구원의 과정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쯤 해서 잊어버렸으니 앞의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리마인드(remind)가 돼야 좋아요. ‘하늘이 열린 상태에서의 교회’와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의 교회‘의 차이점을 모르면, 그 사람은 아직 성도라고 보기 곤란하다고 그랬죠? 하늘이 열렸다고 좋아하지 말고 우리는 뭐부터 하자 했습니까?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신을 신봉 했는가를 보자 했죠? 그래서 제가 무슨 예를 들었죠? 여러 다수의 사람을 집어넣고 그 다수의 사람이 살면서 인생에서 뭘 느꼈죠? 고통과 고충을 느꼈죠? 그리고 조상을 숭배한다 했죠? 죽어서 사람은 편히 쉬고 싶고 영원히 살고 싶죠? 그때는 뭘 찾습니까? 신을 찾잖아요? “신이시여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죽어서는 좋은 데 가게 해 달라고 하겠죠?

이러한 닫힌 상태에서 제사한 사람이 누구라 했습니까? 가인이라 했죠. 여러분이 머리 좋은 줄은 압니다마는 사람인지라 다 지나가면 이런 중요한 가치를 다 놓쳐 버려요. 왜 놓치느냐 하면, 분명히 하늘이 닫힌 상태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담에 이게 아니고 ’하늘이 열린 상태입니다‘라는 말이 들어오게 되면, 분명히 닫힌 상태라고 했는데, 이게 우르륵 같이 쫓아가요. 분명히 내가 끊었는데,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르륵 합세하는 거예요. 가짜들이 여기 설치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의 열린 교회의 중심은 누구라 했습니까? 아무리 다수가 있더라도 다수를 부정해 버리고, 뭐로 초점된다? 성령께서는 비둘기로? 한 분에게 초점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걸 분명히 그런데도 그럴 줄 알고 열리면 닫히는 것으로 구분했는데, 갑자기 구분했던 벽돌담 확 헐어버리고 “야, 멋있다“ 해가지고 하늘이 닫힌 상태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열린 교회까지 와르륵 들이대는 경우를 제가 지금까지 평생 보고 있습니다. 평생 보고 있어요.

어느 교회 설교를 듣고 교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게 되면, 저게 닫혀 있는 모습일까 열려 있는 모습일까 그거부터 먼저 살펴요. 대부분 닫혀 있는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욕구, 그것들이 그대로 다 나옵니다. 여러분, 금요일 되면 이슬람교 교인들이 우리나라의 3D업종(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의 험난한 일을 하면서도, ‘땡’ 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시간이 되면, 서쪽을 향하여 자기들의 성전을 향하여 절하죠?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미쳤잖아요? 왜 그런 짓 하는데?

요번에 추석 때 우리나라로 시집 온 외국 며느리가 좋은 이야기 했어요. “한국사람 참 이상하다. 왜 죽은 사람한테 절하느냐?” 요새는 무서워서 교회에서도 못하는 이야기를 그 사람이 솔직하게 해버렸어요. 죽은 사람한테 절하니 이거 미친 거 아니야, 미친 거. 사람이 어딨다고 귀신이 어딨다고 절하느냐 말이죠. 우리가 평소에 ‘슛, 슛, 하는 이야기를, 이근호 벌거벗은 것을 폭로하는 순진한 아이처럼...죽은 사람한테 왜 절하느냐 말이죠. 그거나 금요일에 이슬람교 인들이 시간 맞춰 절하는 거나 이게 다 닫혀 있는 겁니다.

상상을 하는 거예요. 하도 닫혀 있으니까. 내 쪽에서 다가가지 않으면 저쪽에서 꿈쩍도 안 할 거니까 어떻게 귀염을 떨어야죠. 재롱을 부려야지 그래야 하늘나라 법정 회의에서 낼 거 아닙니까? 재롱을 떠는 거예요. ‘나 이뻐?’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쁘긴 뭘 이뻐,

우리는 다수에 해당됩니다. 이 점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왜? 우리는 다수이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를 찾아오면 저쪽은 뭐가 돼요? 저쪽은 무시당하잖아요. 성령께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똑바로 우리한테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우리한테 찾아오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비둘기에서 지목합니다. 한 분에게 찾아갑니다. 예수님께 찾아가죠. 예수님께 찾아가면 예수님은 바로 다수가 부정되고 한 분에게 들어오죠. 여기서 무슨 차이를 두느냐 하면, 왜 이 한 분과 이 많은 다수는 왜 아니어야 하고 왜 한 분 이어야 하는 이 비교,  이 비교가 바로 요한복음 4장~ 5장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간단하죠?

다수는 아니고 한 분이다. 그럼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분들은, 그 한 분되신 예수님한테 오시더라도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하실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는데, 이렇게 다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만 세례 받을 때 성령을 주셨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은근히 노리는 거예요.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지롱~’ 이렇게 기다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기다리는 것이 바로 ‘닫힌 교회’ 또 특징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온 것은, 너 기다릴 것도 없고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니가 무슨 주제? 니가 무슨 자격으로 은근히 성령오기를 고대하냐 말이죠. ‘아이고 뻔뻔스러워라, 낮 짝도 두껍지, 니가 뭐했다고 오느냐 말이죠. “예수님한테는 왜 성령이 옵니까?”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도 이미 흠이 없기로 소문이 난분이거든요.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사시는 분입니다. 뭐 하늘나라 살다가 땅에 왔다고 만만히 여기지 맙시다. 땅에서 친구라, 맞먹자, 하면 안 돼요. 하늘에서 사시던 흠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자’ 가 예수님 이예요. 독생자예요. 이스마엘이 살아 있을 때 이삭이 있었잖아요? 그렇죠? 같이 있으니까 편애했죠. 이스마엘이 “ 아, 이삭이 하나님의 자녀이면, 나는 옆에서 더불어 구원받을 거야” 라고 이스마엘이 생각을 했겠습니까? 생각 안했겠죠? “어이, 나도 동생 좀 덕 보자, 이삭아, 나중에 형 구박하지 말고, 니 하나님께 구원 받을 때 알지? 내가 한 때 구슬 공짜로 5개 빌려줬잖아, 알지? 그러니까 나 잊지마, 구원해” 라고 이스마엘이  생각을 했겠냐 말이죠. 생각을 하질 않습니다.

인간은 독점적입니다. 독점적. 전부 내 것이 돼야 되요.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아, 조금만 참아라, 동생의 구원이 이삭에게 주어지면 이삭이 너를 구원한단다.” 이러면 이스마엘이 풀려가지고 “그렇지, 하나님이 날 버릴 리가 있겠어?” 이래 나오겠죠. 그런데 그렇습니까? 아니죠. 왜? 내가 있는데, 이삭이 태어나야 돼? 한다 말이죠.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겸손한 척하면, “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왜? 예수님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나에게 굴러들어오니까 그때까지만 참는다. 어차피 주님의 복음은 내 것이 될 거니까 그래서 주님과 좋게 지내야지.” 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오신 취지를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 이예요.

이스마엘이 있는데 이삭이 왔다는 말은 “너는 내 자식 아니야 ”라는 뜻입니다. 이거는 제거해 버리는 거예요. ‘둘이 사이좋게’ 이런 거는 없습니다. 이건 야곱과 에서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만 택하실 때, “에서야 내가 동생 좋아한다고 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나중에 동생한테 잘해주면, 너한테 복이 와. 그러니까 너무 설치지 말고 동생은 택하고 너는 안  택했으니까 순서상 그런데 잘 하면 복 받아” 이런 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내줘도, 항상 두 종류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두 종류는 사이좋게 화해하는 법은 없어요. 에서와 야곱은 모친의 태중부터 싸웠던 잡니다. 싸웠어요. 싸운다는 것은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이냐를 보류된 상태로 나온 거예요. 엄마 뱃속에서 싸우다가 2라운드로 뛴 것이 나와서 싸운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의 싸움은 인간적인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성격이 더러워서 싸웠으면 에서와 야곱은 이렇게 성격 더러워서 싸웠지만, ‘우리는 에서와 야곱이 아니니 사이좋게 지내자.’ 그치? 이렇게 될 거예요. 아니에요.

에서와 야곱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겁니다. 대표하는데 서로 싸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자녀와 약속이 아닌 자녀는 타협은 있을 수 없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목사님, 그래도 구약 성경은 많은 사람이 구원 받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얘기하시는데, 다윗도 구원받고, 예레미야도 구원받고, 아브라함도 구원받고, 그 당시 남은 7천명도 있는데, 그런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우리가 애써 무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는데, 남은 7천명 구원 받은 거요, 자기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은 거예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은 것 아닙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믿게 하신 것을 그들이 믿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차후적으로 알고 믿게 된 겁니다. ”아, 예수님 메시야 맞아“, 이렇게 알아 모신 게 아니에요. 구약의 아담 구원도 마찬가지고 노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해야지, 창세기를 중심으로 해가지고 자꾸 밑으로 내리막길로 가면 안 됩니다. 구약은 항상 위로 올라가야 돼요.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 되는 겁니다. 한국 교회 실수 하는 것, 근본적으로 실수하는 것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 자체인데, 예수님께서 그런 사고방식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왔다는 말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해서 예수님께 온 거예요. 우리는 구원 받을 필요가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안 해줘요. 제 말 굉장히 쉽죠?  앞뒤가 맞아요.제 논리가 틀린 게 맞아요. 구원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안 해주는데, 단지 예수님 때문에 구원했다면,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초점이 예수님 개입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다른 조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전에 가졌던 거,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고 말거야’ 라고 생각했던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구원 받을 수 없는데 왠 은혜지? 왠 떡이지? 라는 식으로 사고방식이 바뀌어져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강의를 했죠. 홍수가 나서 물에 떠내려 갈 때, “살려주세요.” 누구나 간단해요. 거기서 무슨 긴 이야기가 필요 없어요. 나는 뭐 어떤 사람이고 어디 태생이고 학교 어디 나왔는데 살려주세요. 앞에 각설이 필요 없어요. 영어로는 “Help me, 우리말로는 ”살려주세요“ 짧은 다섯 자안에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살려주시면, 그저 고맙겠습니다. 는 내용이 포함될 수 있고,  살려주시면, 일단은 고맙지만, 내 보따리까지도 난 챙겨야 되겠습니다. 라는 내용도 포함될 수 있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다급해서 ”살려주세요“ 안에 내 보따리 챙겨야겠다는, 보따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질질질 끌어내서 살려주니까, 감사합니다만, 내 보따리 지금 어딨습니까? 하고 묻는단 말이죠.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마찬가지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주님 은혜 아니면 못 산다 할 때, 역시 두 가지가 다 포함돼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오죠. 이제 구원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구원한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 하심이라, 라는 것이 포함돼서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 라는 말도 성립될 수가 있고, 구원은 내 문제가 아니고, 이건 내가 할 게 아니고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일단 구원되고 난 후에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내가 하겠습니다. 라고 나올 수 있는 생각이 포함된 것인지, 그 사람을 끄집어내 봐야 아는 거예요.

고기를 잡아 봐야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일단 고기를 끄집어 내놓고, 바닷가에 어부가 휘파람 불면서 노래 부르면서 갈라내는 겁니다. ‘어허, 이거 아니었구나, 맞구나~ 하고 갈라내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입니까? 라고 묻는 게 질문이 잘못 되었어요.

세상에, 당신을 예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믿습니까? 물으면, 백이면백 “저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마음으로 믿습니다.” 라고 다 이야기 하지, “저는 두 번 다시 예수 보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 없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언어는 핑계의 수단이다. 기도할 때 입만 벌렸다하면, 그게 핑계의 수단, 이래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어쩔 수 없었다. 라고 핑계의 수단, 언어라는 것은 핑계의 수단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남의 언어를 따라 한다고 같은 믿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흉내 낸다고 성경 말씀을 달달 외우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요양병원 가면 많은 환자들이 성경 쓴다고 바빠요. 성경 할머니들이 왜 씁니까? 믿음 좋아라고? 아닙니다. 침해가 빨리 진전되지 말라고 성경 글자 쓰고 있습니다. 은혜 받았겠습니까? 받을 리가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의 교회와 열린 상태의 교회는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열린 상태의 교회는 무엇에 주목 하느냐 하면, 성령께서 하늘이 열리면서 골고루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에게 주었다는 데 여기에 하늘의 열림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순절은 뒷전이에요. 나중 이야기예요.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온 것은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처음입니다.

다수는 부정되고(어디로 간다고요?) 하나로 모이죠. 하나에서 다수로 가지 않습니다. 이것도 틀린 말이에요. 하나에서 다수로 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오신 성령을 줬다고  해서 다수가 되는 게 아닙니다. 다수 얘기는 잊으세요. 두 번 다시 다수에게 주어지는 방법 없습니다.
 
‘하나의 반복’입니다. 하나의 반복과 다수가 큰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예수님 한 분에게 주는 것을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겁니다. 이렇게 삼다수 물이 100개 된다면, ‘잡수세요, ‘잡수세요, 하면서 나누어 주는 거예요. 이건 한 사람이 나누어 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의 반복이라는 것은, “주세요.” 하면 안 줍니다. 안 주고 그 사람 속에 칼 가지고 배를 째고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자기가 들어 앉아 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한테 뭘 받기를 원했는데, 받기는커녕 예수님한테 자기가 망가지죠. 자신의 모든 것이 다 찢어져 버리죠. 그러기 전에는 주도권을 쥐고 자기가 주인이었는데,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니까 주인이 바뀌어버렸어요.

이제는 “주세요.”라는 말이 부끄러워요. 자기 게 있으면 주셔야 되는데, 자기 게 없는데 받아서 어디다 적재해 놓으려고?? 어디 창고 지어 놓을 겁니까?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누구 게 되겠는가?” 자기 게 여기 다수에서 하나로 갈 때 그냥 가지 않습니다. 다 이유 있습니다. 왜 다수를 부정하고 예수님 한 분에게만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오느냐 말이죠. 비둘기처럼 온다는 말은 한 사람을 지목해서 목적성을 분명히 해서 비둘기같이 온다 했죠? 올 때 다수가 그냥 다수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왜 다수는 안 되고 왜 하나냐 말이죠. 그렇게 구약 성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줬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한 분에게만 집착해서 줘 버리느냐 말이죠.

다수가 결국은 뭐였습니까? 다수는 뭐가 되냐 하면, 실패자, 다른 말로 죄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 말씀 성취자의 자격으로서는 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사람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씀을 온전하게 다 이룰 수 있느냐 거기에 여부가 달렸습니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 이예요.

어제 수요 설교 했죠? 선지자의 기능이 뭐라 했습니까? 착한 사람이 아니고 죄를 지으면 요렇게 망합니다. 라는 것을 남보다 앞장서서 보여주는 사람, 그래서 피부가 연성피부라 했죠? 다른 사람은 그냥 넘어가는 것도 선지자는 예리하게 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선지자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뭐랍니까?

“너희들은 세상 권력을 추구하지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대속 물로 주려 했다.” 해서 그 대속 물과 더불어서 제자들이 자기가 상상도 못한 세상의 높고자 하는 것조차도 그게 예수님께서 대속해야만 하는 죄의 일종인 것을 깨닫게 하죠. 이 세상의 높고자 하는 것,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도, 그것도 인간의 타고난 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다행스럽죠. 왜? 그렇게 이야기 해주는 예수님과 맞닥뜨렸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예수님과 안 맞닥뜨렸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그런 정상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맞닥뜨렸기 때문에, 아, 다수가 다 그렇게 하니까 되는 줄 알고, 죄가 아닌 줄 알고, 그냥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게 믿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딱 오니까 바로 섬김을 받고자 하는 시도조차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것을 아니까 얼마나 예수님이 고맙습니까?

선지자의 역할은 남들이 미처 모르는 죄의 내막을 많이 알고 있는 점에서 축복된 사람입니다. ‘디카로스’라는 신의 아들이 신화에 나와요. 파라핀을 아버지가 날개에 대충 발라주면서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말도 안 듣고 태양 가까이 갔다가 다 녹아서 날개사 다 떨어져서 물에 빠졌다는 신화가 있어요.

바로 선지자는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그 예수그리스도의 엄중한 거룩,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것처럼, 그 엄중한 거룩, 남들은 관심도 없는 거룩의 본래 원천지에 접근하는 역할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어떤 선지자는 자기 친구에게 ‘날 때려라’ 했는데 안 때렸다고 안 때린 선지자가 갑자기 사자에게 물려 죽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특이성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특이한 분이예요. 상상도 안 될 분이예요. 우리가 이해 못 할 분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찬찬히 하겠습니다. 다수에서 하나로 바뀌면서 다수는 부정당합니다. 어떤 누구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구원합니다. 예수님만 구원하시면서 예수님이 찾아갔을 때, 시간적으로는 예수님이 후대지만, 세례요한은 뭐라 했습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이 말도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그걸 제가 여러 군데서 책에서 설명을 나름대로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설명을 더해야 될 것 같아요.

‘예수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이 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다수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생각이 어디에 갇혀 있다. 라는 거예요? 기껏 생각해 봐야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갇혀 있는 시간의 틀 속에서 기껏 생각해 낸 세상관이고, 그 세상 관을 가지고 뭘 시도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해석한 자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잖아요.

아무리 성경을 은혜롭고 고상하고 경건하게 해석해도 전부 다 그게 죕니다. 죄가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까? 저에게 묻지 마세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도 죄에요. 성경 해석을 제대로 해서 그것이 의롭다 판정받아서 그 판정받은 의를 근거로 구원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 허용한 적은 없습니다.

성경 해석은 안 되도 구원이 되더라는 것이 유일한 성경 해석 이예요. 설거지 하다 구원받은 사람 그 사람 신학교 나왔어요? 아니죠? 가정주부가 무슨 신학? 몰라, 통신했는가? 아니면 인터넷? 시골에서 감자 캐는 할머니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면, 그 사람 신학교 중퇴했던가요? 아니면, 성경공부 참석했나요? 아닙니다. 그러니까

할머니, 당신은 성경 신학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하면, 성령 받은 할머니가 하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구원했어, 예수님이 구원 했어” “아니, 어디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합니까? 그게 어디 나옵니까?” “성경에 나오던데?” “아니, 박사들도 교수들도 성경 봐도 그걸 믿지 않는데? 왜 할머니 믿게 되었어요?” “성경에 보니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선물로 믿게 되어 있대.” 라고 하는 거예요. “할머니 그걸 이해하십니까?” “그걸 왜 이해해야 돼? 이해한다는 것은 모를 때 이해하는 거고, 알 때는 이해하면 안 되고, 느낄 뿐이야.”

알 때는, “당신은 조용필을 왜 좋아합니까?” 조용필 키가 몇 센티미터 연구한 게 아니에요. 그건 좋아하고 난 뒤의 문제고, “내가 좋아하겠다는 데 니가 왜 말이 많아?” “당신은 왜 나훈아 안 좋아하고 조용필을 좋아해?” “내 맘이다, 왜?”

그래서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그 맘속에 누가 들었다? 그 맘속에...? 그 맘속에 예수님이 들어오니까 예수님이 좋아진 거예요. 그것을 사랑의 힘이라고 합니다. 성경 요한일서에서. 그냥 들어와 버렸으니까 이제는 그냥 할머니 혼자 촌에서 여름밤에 덮다고 있는데, 도둑놈이 들어온 거예요. 들어와서 물건 다 가져간 거예요. 할머니가 뭐가 이쁘다고 보쌈 하여 들고 간 거예요.ㅎㅎ

그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는 딴 게 아니고, 보쌈 당했다. 허락도 안 받고 도둑놈이 들어와 가지고 보쌈 당했다. 그동안 “이 집에서 나가면 안돼,” 라고 알 수 없는 관념적인 사상들이 지배했는데, 그 관념 사상들(마귀)을 꽁꽁 묶고 주님이 납치해 갔다. 보쌈 당했어. 보쌈 빼버리면, 당했다, 그냥 당한거야. 주님한테 당해버린 거야.

참고로 성경 한 귀절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13장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아니 출애굽해서 건져주면, 볼일 봤으면 하나님 그냥 가셔야지, 출애굽 난 뒤에 이제는 뭐라고 합니까? “네 큰 아들 살았나?” “살았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뭘로 보답해야 할지...” “보답이고 뭐고 니 자식은 이래나 저래나 죽었다.” “왜요?” “그 살아있는 자식 있잖아?” “예” “내 자식이거든, 그 자식 니 자식 아니거든,” “누구 것입니까?” 내꺼야” 도둑놈이 따로 없네...ㅎ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하나님이 계획하고 다시 내 것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고 도로 내 것이 내 것이 되는 법은 역사상에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누구 것이라? 이제는 주님의 것이라. 성경에 있잖아요.(고전6:20, 고전7:23) 주님의 것이라면, 남은 우리의 인생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죠. 내 것이 아니죠. 내 것이 아니면, 우리는 걱정하고 염려할 것을 내가 지어 내면 안 되죠. 주님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거리가 돼야지, 내 걱정거리를 가지고 주님 앞에 응답해 달라고 윽박지르면, 주님께서는 이걸(주먹)로 윽박지르죠.

기껏 기도해 봐야 주님께서는 말씀 하나밖에 없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런 아주 무책임하게 보이는 그런 이야기를 할 뿐이에요. 성경대로만 나올 뿐이에요.

요한계시록 5장의 내용은 굉장히 간단해요. 아까 일찍 오신 분은 읽어보라 했지만, 요한계시록 5장의 모든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의 집중‘ ’하나에 집중‘ 하는 그 그림, 그 구조가 천국입니다. 하나의 집중이 뭐로 되냐 하면, 어린 양이라 했죠? 어린 양이라는 것의 특징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분이 이름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내용입니다.

왜 이름이 없어야 하느냐하면, 이름이 있는 세계는 이름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다수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무한으로 갈 때는 무한의 세계죠. 다수의 세계, 무한의 세계에서 이게 하나로 나아가는 모든 것이 이단입니다. 다수의 세계에서 이뤄 나가는 것이 다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다수의 세계에서 하나를 이루려면, 다수가 갖고 있는    공통점을 끄집어내야 돼요.

공통점을 끄집어내면, 1,2,3,4,5, 다섯 명이 있으면 다섯 명의 공통점을 끄집어낸다 말이죠. 그냥 다들 갔는데, 다섯 명이 우연히 모였다. 물었어요.“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별로 공통점이 없어요. 그런데, 실례하지만, 초등학교? ”대구 칠성 초등학교, “어, 나도 칠성학교, 옆에는 몇 회?” “나는 26회” “나는 36회” 보니까 여기 다섯 명이 칠성 초등학교 동문이에요. 그럼 여기 다섯 명의 공통점은 칠성 초등학교 하는 새로운 관점이 있죠. 그런데 다섯 명이 칠성 초등학교가 동창회한다고 있는데, 옆에 또 다섯 명이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이, “오, 반갑다 친구야, 하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 여기는 광주 출신이 대구에 온 거예요. 전라도 광주출신들의 모임이죠. 관념이 두 개예요. 또 다수가 돼요. 어떻게 이걸 묶던지 어떻게 집합을 해도 그 집합 자체가 무한대가 돼 가지고 하나로 모을 수가 없습니다. 답은 간단해요. 이걸 다 죽이면 돼요.

이름을 다 죽여 버리는데, 누가 죽이는가? 하나님께서 다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죽인다는 뜻으로, 이름을 없앤다는 뜻으로  죽이시는 분의 이름은 이름이 없습니다. 지상에서 이름이 없어요. 그냥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특징은 뭐를 의미합니까? 이 땅에서 뭐했다?  ’죽임을 당했다.‘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그 보좌의 이름이 뭐냐 하면, 어린양 이예요. 어린양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어요. 어떤 어린양?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대목이 요한계시록에 여러 군데 나오죠? (5:8, 12,13)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시간이 빨리지나가서 정리 못하겠네요. 시간이 지나서 다음 시간에...

10분 쉽시다.

 관리자 (IP:112.♡.81.204) 11-01-13 23:57 
하나교회101007요한계시록-5강b

2010-10-17 06:39:51   녹취: 이한례 


제 5강b

다수에서 한 분으로 갈 때, 다수가 옹립(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 하소서)하는 법은 없습니다. 다수가 예수님을 핍박을 하게 되죠. 그담에 나오는 하나에서 다수가 나올 때 다수가 아니고 ‘하나의 반복’ 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다수에서 하나로 이렇게 다수가 부정당하고, 하나가 될 때 이 과정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한 몸에서 다수가 아니고 한 몸에 하나가 반복이 되었던 요 과정을 여기 다 대입을 하면, 요 사태가 밝혀지게 돼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퇴출당해야 되는가? 여기 다수의 이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말씀을 알고, 특히 그들은 출애굽기에서 뭐냐면, 생명책에 자기 명단이 있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어요. 모세가 생명책을 봤어요. 컨닝을 했는지 보니까 시내 산에 올라가니까, '책에 있는 명단들을 주님께서 지워버리지 않도록 내가 대신해서 나서서 이 백성들에게 인도하게 해 달라.'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모세에 있어서의 책에 있는 명단이 지워지지 않으려면 여기에 뭐가 성립 되냐 하면, 언약이 언약대로 성취가 되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가 강의 첫 시간에 했죠? 하나님의 모세언약은 우리 안까지 들어온다? 안 들어온다? 했습니까? 안 들어오고 우리 앞에서 딱 스톱 돼 버리는 거예요. “지켜라, 하라, 그담에 니가 낚아채기만 하라, 니가 싫다면 말고, 낚아채서 믿으면 지킬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딱 앞에 나온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낚아채죠. 낚아채니까 안 낚이는데 어떡해요. 분명히 도깨비 같아요. 누가 있는데 낚이지 않는 거예요.

낚이지 않는데 이렇게 말씀이 있어도 못 지키는 원인이 말씀이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되고, 우리에게 그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 로마서 7장 알죠?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도록 우리의 선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죄’ 가 우리의 선한 법을 가로막았다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을 신학에서는, 육신과 영혼이 더하기 한 것으로 인간을 봤어요.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육신과 영혼을 더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 있다면 그 보이지 않는 아우라(☞뒤에 풍기는 후광 같은 것)가 인간에 둘러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가 아무리 선하고 싶어도 악한 아우라(마귀의 영)가 지배하고 있는 이상은 이 자체만으로 인간으로 보지 말고, 악한 아우라(악한 영들)가 둘러 친 전체를 인간으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인간을 봐야 ‘왜 인간이 뭐로 소멸됩니까? 결국은 흙으로 환원되죠? 인간이 죽어서 흙으로 된다는 것은 상식적 선에서 알고 있습니다마는 이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것을 모세 율법에 의하면 이게 뭐냐 하면,  ’언약 위반‘으로 보자 이겁니다. 사람이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 언약 위반이라는 요 기준, 요 기준점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뭐가 등장하냐? 인간은 죄가 드러나요. 죄가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게 아니에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우라가, 후광 같은 강력한 힘에 의해서 마치 캡슐 안에 들어있는 알약처럼 죄안에 들어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런 악한 아우라가 있는 줄 몰랐죠. 자기 혼자 멀쩡하니까 멀쩡하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준점이 등장하니까 우리는 기준점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데, 더불어서 기준점이 우리 쪽이 아니고 악의 동태를(니가 이래도 가만히 있겠느냐, 발작해 빨리,)를 살펴서 잠자고 있는 악을 들쑤셔버려요. 악의 동태를 살피는 말씀이에요. 니가 이래도 가만히 있겠느냐, 발작해, 빨리 반응을 보이란 말이야, 빨리, 빨리,

우리는 이쪽을 지키려 하지만, 기준점, 율법은 잠자고 있는 악을 들쑤셔버려요. 아까 전에 얘기 했잖아요. 섬김을 받는 것이 뭐가 된다? 그거는 바로 이방인들이 하는 권세 자가 하는 것이고, 그러면 섬김을 받지 않고 낮아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뭡니까? 예? 그것도 죄가 되죠. 오만한 자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시편 1편에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근데 오만하지 않기 위해서 겸손의 훈련을 쌓는 것은 뭡니까? 이미 그 사람은 오만하다는 뜻이에요. 오죽 오만했으면, 겸손하려 애쓰겠습니까?

로마서 5장에서는 아주 사도바울이 냉정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이 언약 적으로 흙(죽음)으로 죽게 된 것을 봐서 너는 여기서 어떤 발광을 하고 어떤 행동(진짜 나쁜 말이지만 나쁜 말은 안 쓰겠습니다. 지랄이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만)을 해도, 이미 죽기로 한 이상은 이 안에서 겸손의 훈련을 하든, 낮아져서 도를 닦든, 무소유를 하든, 이건 죽기로 돼 있는 코스를 네 힘으로 변경을 못하는 거예요.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안 하면 되는 거예요. 이 얼마나 쉽습니까? 안 하면 될 일을 괜히 하니까 착해 보이잖아요.ㅎㅎ

안 해도 될 짓을 왜 합니까? 차 고장 났으면 하이카 부르면 되지, 자기가 뻰치 들고 설치다가 견적 10만원 나올 것을 나중에 폐차 만들어 놔요. 하이카가 알아서 다 해주는데, 지가 타이어 2개, 4개 다 뽑고 엔진 건드려가지고 나중에 차 값보다 더 많이 나와요.

왜 이런 짓을 합니까? 왜 이 짓을 할까요? 바로 악이 이 모든 이러한 시도, 언약적 시도에 얼굴을 돌리지 말라는 거예요. 니는 꿈꾸지 마라, 성경에서 나오는 착각이다. 왜 너는 너 할 일을,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걸 왜 비겁하게 예수님한테 미루려 하느냐? 니는 배알도 없고 니는 체면도 위신도 없느냐? 니가 할 수 있는 것은 니가 해야지, 왜 그 것마저 주님께 맡기려 하느냐, 라고 옛날 죄악 된 악마의 속삭임이 강력합니다. 그래서 이런 악마를 이길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데, 미궁에서 잘 헤쳐 나오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도 죄를 못 이기기 때문에 주님께 ‘나는 모든 걸 맡기겠다.’ 맡기면 주님이 알아서 하겠지, 그거 죕니다. 그거 죄예요. 그거 잘한 짓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맡겼다는 그 행위가 마치 의로운 행위라고 여기도록 또 죄가 우리에게 격려를 하고 있어요. 죄는 어쨌든간에 바깥에서 쏟아지는 여러 가지 성경적인 멋들어진 교훈들, “모든 짐을 주께 맡기라든지, ”십자가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 ...., 모든 교훈들을 전부 다 뭐로 환원 시키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그런 것들로 환원 시킬 때, 우리의 시선은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일에서 우리는 돌릴 수 있기 때문에 마귀로서는 그런 작전을 쓰는 겁니다. 예수님이 일하심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마귀는 어떤 짓도 다 해요.

쉬운 예로 목사님 설교 하는데, 갑자기 설교 준비 잘 했어요. 원고가 석장이나 돼요. 이거로 설교하면 오늘 은혜 안 받는 사람이 바보라. 진짜 멋졌다 준비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바퀴벌레 하나가 기어가니까 지금 초장에 잘 나가고 있는데 교인들이 바퀴벌레에 관심이 가가지고 교인들이 설교 흐름을 깨버렸다 말이죠. 그러니까 목사님이 종을 치면서 “여기 집중하고!! 하는 바람에 자기도 흐름이 깨져 버렸네.ㅎ

그럼 뭐가 잘못된 겁니까? 정답은 잘못 된 거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그렇게 흐름이 깨졌다고 잘못된 거 같다고 여기는 본인의 기대감이 애초부터 그것은 주님을 보는 시선이 아니고, "이런 설교 오늘 대박이다." 라고 자기가 하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었던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 바퀴벌레 보내신 하나님께 찬양해야 됩니다.ㅎ 들켰어요. 멋들어지게 들켜버렸어요.

요한계시록 5장에서 어린양 중심에서 뭔가 배치(배열)가 돼요. 좌석배열입니다. 좌석배열이란 말은 고정적입니다. 4장과 5장의 특징은 고정적이라는 겁니다. 그 어떤 좌석이 있으면, 그 좌석에 앉았던 것은 자동적으로 힘이 나오고 기능이 나오는 특징이 있어요. 그런데 그러한 하늘보좌 말고 7장, 8장, 9장 이렇게 쭉 나오면 여기는 고정적이 아니고 움직인다 말이죠. 어떤 운동이 있어요.

그러나 하늘나라 보좌 이야기는 이것은 고정적이 되면서 좌석에 따라 이것이 좌석이 갖고 있는 고유의 발휘되는 그런 기능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나오는데 그 좌석에서 이렇게 어린양이 있고, 좌석이 각자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에서 나오는 그 의미가 좌석을 거쳐서 그 좌석은 어린양만 소개하는 식으로 기능이 발휘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라는 것이 아무나 사찰집사가 설교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를 할 때, 하늘나라 고정된 좌석에 의하면, 고정된 좌석은 목사의 자리를 대못으로 박아놨다 합시다. 그러면 그 목사는 어린양의 기능을 그대로 발휘를 해야 되죠.

그러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교회는 무슨 피로 샀다? 하나님의 피로 산 사람들을 감독하는 성령이 와서 이것을 증거 하게 함이죠. 그러면 목사의 입에서는 뭐가 나와야 되요? 하나님의 피의 의미만 쏟아져 나와야 되죠.

근데 못이 빠지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맡겼습니다.“ 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니까요. 못을 박아 놓으면, ’주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나올 자기가 못이 빠지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맡겼습니다. 가 나와 버려요. 그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굴 증거하는 것이에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복음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목사 설교단에 못을 하나 준비해야 돼요. 십자가처럼 못을 팍 박아야 해요. 그것을 성령 받은 교인들은 그것을 눈치를 챕니다. 말은 맞아, 그런데 아닌 것 같아. 라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왜 느낌이 오느냐 하면, 만약에 목사가 못이 빠져 설쳐버리면, 성도라는 것은 대못이 박혀 있거든요. 교인의 자리는 뭐냐, 하늘나라 자리 마찬가지거든요. 이십사 장로 자리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만 ‘예수님의 피’만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부터 대못이 빠져서 설쳐대니까 만약에 교인들이 못이 박혀 있으면, “목사님, 십자가 복음에 연관돼 있는 그런 식으로 결론해서 해주세요.“ 라고 요구하니까, 목사가 화를 내거든요. 그래서 교인들이 못을 다 뺏다. 다 빼인 온 교인 50명교인 전부 못 다 빼고 설쳐대면,  인간들의 ”날 알아줘“ 가치만 펄펄 살아나는 겁니다. 알아줘 가치만.

하늘이 닫힌 교회, “나는 왜 안 알아줘, 나는 설교를 하니까 가치 있지,” 나는 청소를 하니까 가치 있지,“ 이래 나오죠. 목사님, 청소하는 게 가치 있습니까? 없습니까? 묻는 사람이 잘못된 거예요. 그런 것은 있으나 없으나 아무의미가 없는 거예요. 대못을 박아 놓으면 우리는 내 자리가 어떤 자리냐?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합니까? 자리가 중요한데 그 원인은 하늘에서 찾으라는 거예요. 하늘에서 찾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생명책이 나옵니다. 생명책이 나오죠.

자, 이제부터 지금까지는 쉬웠는데 지금부터 많이 어렵습니다. 많이 어렵다고 하고서 쉽게 하면 다 안다 하지만 이거는 아닙니다. 진짜 많이 어렵습니다. 생명책과 모세 사이에서 뭐가  수립된다 했습니까? 언약이 있을 경우에만 생명책이 유지가 되죠. 그런데 모세 율법이 주어졌을 때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명단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게 돼 있습니다.

모세가 관계 했던 이 명단, 모세가 뽑아냈던 그 명단은 생명책에서 나오기는 나왔지만 생명책에서 원형이 나온 것이 아니고 생명책의 그림자가 나온 거예요. 생명책이 이런 취지로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폼으로 보여주는 그런 그림자가 나온 거예요. 예고편이 나온 겁니다. 예고편이라 해가지고 번역이 다 나온 게 아니고 예고편 따로 있어요. 그 그림자가 나와요.  여기서 원형이 나오려면, 생명책의 진짜 명단이 공개되려면, 여기 있는 그림자 같은 기둥들이 한 꺼풀 두 꺼풀 다 벗겨져야 되는 겁니다. 이걸 쉽게 얘기하겠습니다.

장막이 거두어지면, 비로소 전투가 시작된다. 구약 성경은 전쟁 이야기입니다. 무슨 전쟁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갖고 나온 것은 바로 ‘언약’이며 언약은 하나님의 이름에서 성취되며, 인간의 이름은 자기의 육에 근거해서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 보면, 젖먹이 아이 이름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모든 내력은 어렵게 되지만, 결론을 쉬운 예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제가 예를 들면 답변해 보세요. 교인 8명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죠? 주를 주라고 높이면 영광이 된다고 빌립보서 2장 나오죠? 모든 무릎을 꿇고 그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예수로 말미암아 누가 영광을 받죠? 하나님이 영광 받죠? 그런데 8명인데? 그런데 8명 나왔다가 다음주에 5명이 나오는데? 5명이 나오다가 1명밖에 안 나오는데? 1명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삐집니까? 영광스럽습니까? 영광스럽죠? 왜냐하면 여기에 다수와 하나의 특징은 하나는 자리가 중요하지만 다수는 양적인 숫자를 중요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이름은 숫자가 모여야 힘이 모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숫자가 많아야.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칠 때 다윗의 군사가 몇 명 나갔습니까? 1명 나갔죠?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사람 있었잖아요. 그래도 자기 1명 나갔죠? 물론 골리앗도 1명 나갔지만...  

여기 나와 있던 다수를 하나로 바꾸는데, 언약은 항상 다수를 찾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사기 같은 경우 사사들의 기록이잖아요? 사사들이 특징이 뭐예요? 숫자가 많으면 어떻게 됩니까? 숫자가 많으면, “집에 가라, 집에 가라.” 22000명 보내고 만 명도 많다고 보내고 몇 명 남았습니까? 300명 남았죠? 300명이 활 쏘고 주먹질하고 칼로 싸움 했습니까? 칼도 없고, 활도 없어요. 그러니 이게 뭐냐면, 칼 쥐고 활 쥐고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드라마에서 ‘설정’이라 해요.

설정이라 하는 것은 “니는 니 자리 있어.” 니 자리는 어떤 자리? 그냥 이유도 없이 당해야 하는 자리, 그리고 기드온은 횃불과 나팔도 어디 쓰이는지 모르고 항아리도 어디 쓰이는지, 영문도 몰라요. 그것은 장차 터지는 사건이 터질 때 소급해서 해석되는 겁니다.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아! 횃불은 여기에, 항아리는 여기 쓰이는 거야, 그러니까 소급해서 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은 앞으로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구원할지를 미리 압니까? 모릅니까? 전혀 모르죠. 왜냐하면 감독, 조감독의 설정이니까.

배우가 “연출가님, 왜 나무가 있어야 되고 넘어져야 되고, 차가 급하게 갑니까?” “당신은 당신 역할만 하면 돼“ 나중에 편집해서 보게 되면, ‘아, 주인공 여자가 만날 때 그때 갑자기 차가 뛰어들어서 여자가 죽고....., 당신은 당신 역할만 해,” 당신 것만 찍고, 여자도 찍고 합성하여 보면, 여자 만나고 헤어질 때 차에 뛰어드는 게 나온단 말이죠.

모든 것은 연극 무대의 설정에 불과한 겁니다. 근데 이 설정이란 말은 밑에서는 문이 움직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설정이니까 이미 어떻게 돼요? 고정적이죠. 결국은 지상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고정된 좌석의 그림자들, 그림자들이죠. 하늘나라에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의 무성한 수풀의 검은 그림자는 지상에 이렇게 얼룩덜룩 남겨 지듯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이걸 간단하게 얘기하면, 여러분이나 저나 세상의 되어가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내가 실수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든지 내가 기도를 못해서, 헌금을 안 해서, 내가 목사 욕을 했다든지, 내가 게으름 피워서 이런 낭패를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낭패를 당하고 안당하고 하면, 이건 움직임이 돼요. 왜 움직임에 여러분의 시선을 둡니까? 바보같이. 김 도향이 뭐라고 했습니까? 참 나,  바보같이 살았군요. 했잖아요. 바보는 자꾸 움직임을 따라 가는 거예요.

개한테 유리를 반사하여 빛을 쬐이면, 개는 빛이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따르고 짓고 그래요. 애들도 그래요. “에이고, 개는 진짜 바보구나~ 하잖아요. 근데 그 개가 "딴 짓하지 마세요." 외쳐요.

세상에서 고정된 하늘나라 보좌에서 움직이는 모든 작업을 보고, 우리는 그걸 잡아야 인생 성공한다고 그걸 죽자고 잡아 땡기니까, 흙만 코가 묻을 뿐이지, 뭐, 뭐 아무것도 없는데....

수천억 가지고 사채놀이 해봐야 죽으니까 그 모든 재산은 다 날아가는 거예요. 인생 그냥 왔다 그냥 간다고, 절에서 절하다가 백팔이 그렇게 얘기 했다 그럽니다.ㅎ 자이안트란 드라마에서..안 보는데 슬쩍 지나다가 보니... ㅎ

모든 것이 그림 자 놀이, 그림 자 놀이, 착각이었고 환상이었습니다. 그걸 따라간다고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시편90편에 보면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하시는 언약에 대해서 등장할 때, 여기서 반드시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전투, 전투라 하는 것은 소규모 전투라 하고, 사실은 전쟁 이래 보면 돼요. 그런데 저는 전투라 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전쟁이라 하는 것은 온 천지가 다 하나로 벌어질 때 전쟁이라 하고, 소규모 전투는 전투로 보면 좋은데, 하여튼 전투나 전쟁이나, 하나님이름과 사람이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죠? 그런데 나중에 가면, 이스라엘과 내부의 전쟁이고, 나중에는 유다 지파가 나오는데, 유다지파와 거짓 선지자간의 전쟁, 왕과 참된 선지자 사이에서 나중에 가면, 거짓 선지자와 진짜 선지자 사이의 싸움이죠. 계속 싸움이에요. 꺼풀 한 꺼풀 벗길 때마다 계속 싸움이에요. 그렇게 할 때마다 생명책 이름이 있다고 여기는 이름은 지워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지워지고, 계속 지워지는 거예요. 왜? 가짜 생명책이기 때문이에요. 전부 다.진짜 생명책 아니니까.

다만 전투적으로 설정용으로. 이렇게 나오는 인간은 짤리게 돼 있다 보여주는 설정용으로 계속해서 날라 가는데, 이 날라 가는 것이 몇 개 날라 가는가 하면, 6개 날라 가고, 7번째는 항상 마지막 화토 장 쥐고, 일곱 인을 주께서 떼버리면,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전쟁은 신약시대부터 일어나는 게 아니고, 바로 전 인류의 시작이요 나중까지의 끝까지의 전쟁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리 전쟁이 벌어져도, 전쟁이 일어나면 누구와 누구를 가리겠어요? 승자와 패자를 가리죠. 이미 승자는 어린양으로써 처음부터 고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를 보여주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다면 여기서 구약에서의 전쟁을 할 때 오해할 때, 오해의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벌리는 모든 언약을 오해를 해가지고 (이게 누구를 좋아라고 있나)자기가 속해 있는 이스라엘의 이름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언약이 있는 것처럼 오해( 설마 우리는 택한 백성인데, 설마 우리는 하나님한테 모세가 직접 법을 받은 백성인데, 저 개 같은 이방과 다른데, 우리는 홍해가 갈라진 사람이고, 여리고 성도 무너뜨린 백성인데, 우리는 많은 선지자가 찾아왔고 설마 우리를 버릴까??????  )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오해가 오해라면 진실은 어디 있습니까? 진실은 항상 선지자 뒤, 배후에 숨어 있는 거죠. 이게 우리 하나교회에서 요한계시록 처음에 할 때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처음할 때 기억납니다. 역사가 빙빙 돌고, 우리가 여기 있다면 우리 배후에 보이지 않는 분이 있죠? 그럴 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보이지만, 우린 항상 우리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부정을 하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고 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되어진 모든 영광은 누구한테? 꽂힙니까? 우리 배후에 계신 분에게 모든 영광이 다 돌아가도록 하죠. 왜냐하면, 난 죄인인데 죄인은 천국에 못가는 게 마땅하잖아요.

그러면 나 같은 죄인이 간다는 것은 내가 어떡해 어떡해 해서가 아니라 누구 때문에? 주님 때문에 라고 뒤에 하죠. 이건 신약 시대에 성령이 와서 성령이 문자로 우리 앞에서 스톱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 마음까지 들이닥칠 때 하는 이야기고, 구약에서의 율법은 딱 들이닥쳐 놓고 여기까지 오니까 ‘이대로 하라, ’이대로 하면 뭐 해줄게, 나오니까 그 모든 이야기가 누굴 위하라고? 숨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영광이 아니고 누구 이름? 자기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잘되면 덩달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그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그 오해가 이스라엘 역사의 긴 수평적 역사라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역사가 아니라 수평적 긴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깊이로서 시작되는 거예요. 어느 날 교회에 사람이 처음 나왔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하신다. 설교하는 말마다 자기가 한이 맺혀 있기 때문에 이 한맺힌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풀어줄 거라고 오해해가지고 전부 다 나에게 적용시키는데, 이 적용시킨 깊이를 쫙 뻗어보니까 세상에 구약 성경하고 똑같아요.

지금 내가 교회 와서 오해했던 오해를 선배가 있었네요. 그 선배가 누구였더라. 구약의 이스라엘 모든 사람의 그들의 오류가 바로 내 오류가 하나가 반복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됐던 이유가 이제는 내 인생을 완전히 페인트칠해 버리죠. 40이면 40대에 죽어야 되는 이유, 50이면 50대에 죽어야 될 이유, 30이면 서른 살 때까지의 자기의 오해, 모든 것, 이것이 구약성경 보면, 전부 다 우리 선배들이 그런 짓을 다 해왔고 결국은 그들이 멸망했다는 것이 다 나와 있는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자긍심이 대단했겠습니까? 골리앗을 이긴 우리나라 좋은 나라, 멋진 나라 했죠? 이겼던 민중들이, 대중들이 누구를 따랐습니까? 바로 압살롬을 따랐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가 줘야, 다윗을 버리고 따라가 줘야 시편이 나와요. 시편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났을 때, 나오죠? 그럴 때 분명히 혜택은 입어놓고 입은 싹 닦는 그런 짓들을 죄악의 아우라가 나와 줘야, 아!! 그래서 예수님 우리 대신 돌아가셨구나. 라고 다시 한 번 감격스럽게 다가오잖아요.

이것 때문에 여러분 아직 안 죽고, 지금 아직도 주께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지금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물이 너무 차가워요. 내년 봄으로 미루세요. 못 죽습니다.ㅎ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 떨어지지 않는 법이에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만남과 모든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일어나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래 돼 있죠. 십자가 복음으로!!!  갑자기 모든 하나님의 일하시는 추상적인 모든 것이 한 사건으로 모아지죠. 십자가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으로 모아지는 겁니다.

어렵지만 계속 나옵니다. 엘리야 시대 때 남은 7000명이 있었죠? 7000명 당시에 선지자 이름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가 알고 있는 성도 숫자 몇 명? 자기밖에 없었죠? 우리 같으면, 요즘 같으면 엘리야가 총회장 아닙니까? 총회장 정도 되면, 적어도 자기시대 성도 숫자쯤은 총회장에게 귀띔 해줘도 뭐 별 탈 없을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엘리야를 망신시킵니까? 자기 혼자 구원 받았다고 여기게 하십니까? 고생은 직살 나게 하면서.

인간의 모든 오해는 바로, 처음의 강의 시간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늘이 막혀있는 상태에서의 종교와 하늘이 열린 상태에서의 복음이 다르다 했죠? 막혀 있을 때 사람들은 육체를 갖고 있는 한 뭐를 잊을 수 없다? 삶(생존)에 대한 고통, 고난, 아픔을 잊을 수 없죠. 엘리야가 혼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편 되는 사람이 거의 안 나타났죠. 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도 나중에 겁먹고 기죽고 가버리고...‘나만 남았습니다.’ 라는 말이 거짓말 하는 게 아닙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했을 때 이러한 고충이 결국은 하나님이 변함없이 하늘나라 고정성(배열된 좌석)에서 보여주는 것에서 인간들이 오해가 나올 수밖에 없죠. 오해가 되어야 해요. 오해가 되어야 “엘리야야 미안하다, 남은 칠천 명 있다.

이렇게 하므로 말미암아 엘리야로 하여금 ”내가 주님 때문에 고생합니다. 힘듭니다. 그래서 나는 때려치우렵니다. 차라리 나를 죽이소서.“ 구약에 보면,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여러 명 나옵니다. 예레미야도 자살하려 했죠.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 엘리야도 자살하려 했지만,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자살인데요 뭐. 그런데 오해를 했으니까 엘리야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천국 간 거 성경에 어디 나옵니까? 변화 산에 나오잖아요. 변화 산에 간 것은 다시 말해서 천국이죠.

그럼 천국에 간사람 공통적 특징이 뭐다? '쪼다'다 이 말이죠. 천국 간 사람 특징은 쪼다예요. 하나님의 일은 전혀 모르고 자기 아픔만 생각하는 사람, 그런데 천국에 갔죠? 그렇게 가야 돼요. 가 줘야 구원 문제가 남 문제가 아니고, 구원 문제는 원래부터 고정성, 고정스럽게 비어 있는 좌석에 “엘리야, 너 와, 76번 F”에 집어넣기 위한 하나님의 고정적인 좌석이었습니다. 하늘나라 갈 때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지상에 올 때는 엘리야는 이리 휘달리고 저리 휘달리고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고 자기 환각과 자기오해와 이런 것들에서  어쩔줄 몰라 했어요.

하늘나라 주님의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 예수님도 이 땅에 왔을 때는 날 때부터 쫓겨가지고 애굽에 갔다가 나사로 왔다가 갈릴리 갔다가 십자가의 수모도 당하고, 이렇다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수모를 당했던 그것이 원형(모델) 케이스가 앞뒤로 구약 신약의  모든 백성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알고 고난 받았거든요. 마태복음 16장에, “내가 고난 받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알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주님 말씀대로 사는데, 이거는 도대체 이해가 안돼요. 왜 내가 고생을 해야 되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 예수님의 가신 길, 장차 오실 예수님은( 니 어처구니없지? 예, 어처구니없습니다 ) 그렇게 사셔야 될 분이고, 예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미리 오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그 자취를 따라 가려 함이라.(벧후2:21)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밟아가는 운명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맘 편하게 살려면, 우리가 어떤 해석 어떤 일을 해도, "아, 이것도 아마 오해일걸,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다. 이것도 오해다 말입니다. 오핸데 우리로 하여금 방치하지 않고, 뭐냐 하면, 우리를 전투원으로 사용합니다. 전투할 때 전쟁을 벌이죠? 자, 어려운 질문하나! 전쟁할 때 누구와 전쟁이죠? 구약 성경에서 누구와 전쟁했습니까? 이 전쟁은 성도가 전투원인데 누구하고 전쟁을 벌이죠? 한 잡니다. 누구하고 전쟁입니까?

‘나’하고 전쟁입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하고 전쟁을 벌이죠. 이게 엘리야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 자신과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우리 자신!!

왜 설교를 잘 하는데 교인이 안 모입니까? 내가 안 믿는 우리 형제들, 친척에게 그렇게 보증도 서주고 그렇게 애들 공납금도 내주고 했는데, 왜 걔들은 교회 안 나오고 절에 갑니까? 전부 다 누구하고 전쟁을 해요? 나하고 전쟁이에요. 그 나하고 전쟁에서 반드시 예수그리스도 나오는 기준점이 있어야 됩니다. 기준점이 없으면, 고난 받는 나를 정상인줄 알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 기준점을 항상 말씀을 통해 주죠.“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있는 걸로 족한 줄을 알라.” 참새가 하나님께서 키워주는데 언제까지 키워준다 했죠? 굶어 죽을 때까지 키워주죠.ㅎ 하나님께서 참새를 굶어죽을 때까지 키워주신다니까요. 그래서 굶어죽었어요. 그런데 그전까지는 키워주었어요.

잡초를 언제까지 키워 줍니까?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잡초를 잘 키워주신 거예요. 잡초가 아궁이에 들어가지 전까지 지 힘으로 살다가 재수 없는 주인을 만나서 아궁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때가 되매,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죽지 마세요. 내가 죽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는 겁니다. 지금 내가 죽겠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내가 살겠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듯이, 내가 살아야지 한다고 산 것이 아니듯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해서 죽는 게 아닙니다. 노인들 보세요. 맨 날 죽겠다 하죠. 맛있는 거 다 먹고 ㅎ 내가 죽어야지 늙으면 죽어야지. 절대 안 죽습니다. 보약 해 달라 하는데, 죽지 않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그 자석의 배열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해 봅시다. 제일 중심이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을 다시 설명하면, 어린양은 죽음이 함유된 무명이죠.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지상의 사람이 아니란 뜻이에요. 지상의 무빙(moving),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이미 이름의 차원을 넘어서 버린 거예요. ‘어린양’이름이 없으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능만 나오죠. 누가 죽였다. 누가 죽였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나를 죽였다. 자, 모든 세상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주님 십자가 달릴 때, 천둥 번개치고 십자가 엎어지지 않았어요. 그냥 십자가 그대로 지셨어요. 대 자연 변화도 그냥 예수님 죽는 데 협조가 돼야 됩니다.

지난 주일날인가 풍랑 이는 설교 했죠? 언젭니까? 지난 주일에 했죠? 그 때 제자들이 뭐했습니까? 풍랑일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잖아요? 그게 문제였어요. 죽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왜 깨웁니까? 죽지. 풍랑일 때 누구하고 같이 죽죠? 배가 뒤집어지면 누구하고 죽죠? 주와 함께 죽잖아요. 그게 십자가의 의미였던 거예요. 아직 때가 안 되어 못 죽은 겁니다. 결국은 같이 죽을 걸, 결국은 같이 죽어요. 베드로도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어느 목사님처럼)어차피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을 걸, 그 당시 주와 함께 죽으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깨우니까, 주님께서 “이 믿음이 없는 인간들아”했다고요.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산다고 로마서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주와 함께 죽은 자에 한해서만 주와 함께 살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로 하여금 어린양을 죽게 만들어서 인간들을 죽게 만드는 그 능력이 그대로 어린양에게 쏟아지므로 말미암아 여기에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는 단단한 사랑의 밧줄에 꽁꽁 묶인 능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근데 그것이 고정돼 있다니까요.

고정돼 있기 때문에 만약에 제가 질문 하나 할게요. 만약에 이 성도가 나이 80넘어 침해가 걸렸다. 침해 걸렸으면 구원 받습니까? 침해 걸렸다는 이유 땜에 구원받지는 않습니다.ㅎ 침해 걸린다고 구원 받는 건 아니지만, 구원은 침해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보면 정답이죠. 그러니까 맘껏 침해하세요. 누구나 침해걸리면 요양병동에 갈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57만원 주면 1달 버틸 수 있습니다. 남의 얘기 아니고 다 우리 얘기, 언제 분해 안 되면 다 침해 걸려 가지고, “누구신지요?” 이런다 말이죠.ㅎ 목사한테 잘 보여도 소용없어요. 나중에 침해 걸리면, “누구신지요?”하면 끝나요.

어린양을 죽일 때 그들은 전쟁을 통해서 어린양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까발리면서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처럼 행함을 의지했기 때문에 수많은 숱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피를 낸 거예요. 전에 얘기했죠?  어떤 왕은 처음엔 찬성해자기고 좋다고 승리했어요. 승리하고 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열왕기, 역대기 나오는 왕들 보세요. 좀 뜨니까 그 다름부터 뭐합니까? 이거는 선지자고 뭐고 목 다 쳐버리잖아요? 그런데 그걸 남의 얘기로 보지 마세요.

구약 성경에 이런 식으로 해서 포도원 비유 나오잖아요. 이스라엘 종들이 하나님이 보낸 종들 다 죽였다고, 마지막 아들 보내니까 아들 죽이면 어떡해 된다? 이 포도원을 물릴 것이다. 그 과정을 현재 우리도 못지않게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스라엘의 죄를 안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문제거든요. 그걸 성경을 통해서 까발려지면, 구원은 교회 나와서 열심히 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내 죄를 까발리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교회에 불러내고 있어요. 모든 발걸음과 주체를, 내가 주체가 아니라 내 모든 살아가는 모든 것에 주님이 주체가 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멸망당하느냐 멸망 안 당하냐 하는 것은 주님께서 노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으로 가는 노선이기 때문에 그담부터 이스라엘처럼 똑같은 죄를 지어도 이것이 모든 일어나는 일이 어린양 주님으로 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 받습니다.

강도가 강도짓해도 구원받는 이유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구원받기 위한 주님의 조치였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구원 받은 거예요. 근데 구원 받지 못한 강도는 뭐냐 하면, 자꾸 내가 강도 아니었을 경우를 생각하는 겁니다.“아, 안 잡혔으면 되는데, 예수여! 지금 당신부터 먼저 탈출하고 우리 탈출해 주면 믿어줄게. 이건 뭐를 연상 하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다른 팔자가 내한테 줄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팔자는 죄의 아우라에 있기 때문에 그 팔자 고쳐봐야 죄안에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지금 점점 고함지르는 것을 보니 시간이 다 된 모양인데.... 제가 좋아하는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여러분도 좋아하길 바라고 있는데요.  요한복음 3장 36절에 보면, 저는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 말 전하고 싶어요. 내가 사법고시 못해서 열등감 때문에 이런 거 아닙니다. 결코 ㅎ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거는 직업이 뭐냐 백수냐 합격 됐느냐, 뭐 승진했느냐, 퇴출당했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이미 고정돼 버렸어요. 아들이 없는 자는 지가 아무리 대통령이 되어도 그 자리가 무슨 자리다? 저주로 가야만 하는 자리기 때문에 주님께서 일부러 대통령 되게 하신 거예요. “니는 이 짓 하다가 지옥가라고.”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없습니다. 항상 뜻인데, 모든 것이 주의 뜻인데, 자리는 분간됩니다. 하나는 저주의 자리, 하나는 구원의 자리. 구원의 자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러한 모든 것이 어린양과 관련돼 있다. 하나님과 관련돼 있는 것은 이단입니다.

어린양과 관련돼 있어요. 하나님과 관련된 것과 어린양의 차이점은 뭡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서 고난을 안 받았고, 십자가를 안 졌지만, 어린양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린양을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가 누구다? 바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만남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 그것이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없다 말이죠.

성령을 안 받게 되면, 말씀을 지키려고 시작합니다. 근데 성령을 받게 되면, 말씀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이 말씀을 예수님이 이루었고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그것을 핍박했고,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비아냥거렸고 모독했으며, 필요할 때만 사용했고, 내 일 바쁘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말씀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니가 어느 곳에 가서 장사하여 이득을 보리라“(약4:13) 아니, 사업하는 사람치고 이런 생각 안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예?? 촌에서 상경한 사람 중에서 전부다 도시에 가서 망하자 하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악한 것이고 죄라는 거예요.’말씀이 없었으면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남들 다 하는데.... 다수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다수가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 나는 다수에 포함됐으면, 나는 결국 나쁜 인간은 아닐 것이다. 는 다수가 우리의 삶의 기준점으로 제시된 것이 현대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다른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죠. “니는 특이하다. 넌 별나거든. 너는 네 좌석은 배치돼 있다 말이죠.”그러면 하늘나라 배치는 이렇게 계단식으로 봅니다. 어린양 제일 중심에 있고, 그 담에 여기에 4 천사들 있고, 여기에 24장로 있고, 또 무수한 사람들이 종려나무 들고 있겠죠.

이배치를 할 때 여기는 어린양, 여기는 4 천사, 4천사들 특징은 완전함, 완전한 수준이 없습니다. 왝 하면, 우루루 몰려가고, 왝하면, 밑에 (에스겔에 보면)바퀴가 달려있어 가지고 하나의 보좌가 완전히 요양병원에 가면, 할머니들 타고 다니는 앉는 휠체어 유도 아닙니다. 왝하면 우루루 몰려가고, 웍하면 저리로 몰려가고...몰려가는데 이것이 4생물이에요. 4생물이라는 것은 동, 서, 남, 북 전부 다 카버(cover) 하는데, 카버해도 10미터 본다, 20키로 본다. 아닙니다. 눈들이 박혀 있어가지고, 날개 죽지에 눈들이 박혀 있어요. 혹시 여기 디자이너 없습니까?  옷에다가 외눈을 박아서 디자인을 해 보세요. 섬뜩합니다. 원피스 투피스 다 눈을 박아 보세요. 고게 천사 옷입니다. 날개다가 눈을 박아 놨어요. 괴물이에요. 괴물!!

이 말은 동, 서, 남, 북, 하늘 땅 끝이 안 들키는 게 없다. 안 들키는 게 없다는 말은 똑바로 하란 말이 아닙니다. 니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되어진 일이 하나도 없느니라. 이미 고정성에서 다 예상에서 네게 주어진 사건들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사건의 고정성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죽게 돼 있어요? 안 죽게 돼 있어요? 죽게 돼 있습니다. 죽게 돼 있는데, 죽이라고 설정된 인물들이 누굽니까? 피조물인 인간들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주님 앞에서 욥기에서 보면, 주님 앞에서 입을 막고, 할 말이 없어요. 입을 가리고 그것도 모자라면 재를  뒤집어쓰고...처음엔 "고난을 왜 주십니까?" 직접 하나님 보고,“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재를 뒤집어쓰죠. 쓴 순간 욥의 자리는 고정이 되고, 주님의 자리는 고정되면서 이것이 그림자인 동시에 여기에 이 자리를 확보하게 됩니다. 생명책 자리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이름 기록한 자리에 차지한 사람치고 주님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이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요한계시록 4장 10절, 24장로들이 뭘 벗습니까? 면류관을 벗어서 자기한테 던집니까? 자기한테? 연습해 볼까요? 면류관을 자기가 쓰고 까불고 촐랑거리고 할까요? 아니죠? 면류관을 벗어서 누구한테 던집니까? 어린양의 보좌에게 주님을 향하여 어린양의 보좌에 던지면서 뭐라 합니까? ”내가 주님을 이렇게 핍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은 모든 것의 공로가 우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주님의 공로입니다.“ 하고 던지죠.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 천국은 지상에서 철저히 오해와 오해사슬로 연결돼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오늘 다 하지 못하고 1절부터 3절까지만 했다 치고 다음달에는 5장 4절부터 7인, 왜 7이 들어가는가? 그 이유부터 또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주의 뜻이 있어서 이렇게 모였사오니, 우리가 진작 죽어도 될 우리들이 살아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십자가가 괜히 피 흘린 것이 아님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할 말 잊고 근심 걱정 수심 모두 다 철거해 버리고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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